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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학 : 우리역사

[스크랩] [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 세계사 주역은 동양도 서양도 아닌 중앙유라시아였다

작성자김태복|작성시간16.05.05|조회수689 목록 댓글 0

[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 세계사 주역은 동양도 서양도 아닌 중앙유라시아였다
 

동서양 쥐고 흔들며 3000년 역사 호령… 화려한 문명의 맥박이 유럽을 넘어 한반도까지 전해져
실크로드 지배자는 초원의 유목민과 사막의 오아시스민
실크로드는 단순한 교통로가 아닌 문명의 진원지… 대륙의 정복자였던 중앙유라시아 주민, 캐러밴 무역을 이끌던 국제 상인이자 선교사 역할

중앙유라시아에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습니다. 몽골, 중앙아시아, 만주, 시베리아, 티베트, 아프가니스탄, 헝가리 등 유목민족의 활동무대였던 중앙유라시아는 최근 풍부한 부존자원을 바탕으로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어 열강의 각축장이 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Weekly Chosun은 이번 호부터 중앙유라시아사의 권위자 서울대 동양사학과 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을 연재합니다. 중앙유라시아는 동양문명과 서양문명을 연결시켜 세계사를 가능하게 만든 문명입니다. 초원과 사막의 중앙유라시아 문명은 영역이 광대하고 독자적 문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소홀하게 다뤄진 측면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의 기원도 이들 문명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구소련 붕괴 후 등장한 중앙아시아 국가들에는 ‘고려인’으로 불리는 수많은 우리 핏줄이 살고 있는 데다 풍부한 자원을 갖고 있는 이들 지역과의 경제적 교류도 갈수록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지역에 대한 국내의 관심과 수요는 높아지는 반면 깊이 있는 정보는 턱없이 부족한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따라서 Weekly Chosun은 국내 잡지 사상 최초로 중앙유라시아를 주제로 한 대형 시리즈를 기획했습니다. 연재를 맡은 김호동 교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중앙유라시아 권위자로,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미 하버드대학에서 내륙아시아 및 알타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86년부터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심오한 전문지식과 유려한 필치를 바탕으로 펼쳐지는 김 교수의 문명 탐험은 독자 여러분을 매혹적인 지적 세계로 인도할 것입니다. 많은 성원을 바랍니다.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는 ‘중앙유라시아’라는 말이 매우 생소하게 들릴 것이다. 유럽과 아시아라는 말의 합성어인 유라시아라는 말도 그리 자주 쓰는 용어가 아닌 터에 ‘중앙’이라는 수식어까지 붙었으니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지 선뜻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다지 익숙치 않은 이 ‘중앙유라시아’란 용어가 앞으로 계속될 연재에서 키워드처럼 자주 사용될 것이기 때문에 먼저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또 도대체 그것을 논의할 필요성이 있는지에 대해서 간단한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우리가 그동안 많이 써온 ‘동양’과 ‘서양’이라는 말이 개념적으로 아주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이 지적한 바 있다. ‘동양’의 원어에 해당되는 ‘오리엔트’는 ‘해가 뜨는 곳’이라는 뜻으로 원래 유럽인들이 지중해 동부 연안, 즉 오늘의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방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했는데, 후일 그들의 지리적인 지식이 넓어지면서 그 너머의 모든 동방지역을 총칭하는 용어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오리엔트’라는 말은 근대에 들어와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며 ‘우리’와 ‘그들’을 규정할 필요가 있었던 유럽인에게는 나름대로 유용한 용어였겠지만, 공통성이 별로 없는데도 한꺼번에 ‘동양’으로 분류된 중국·인도·아랍의 입장에서 볼 때 그 말은 무용한 것일 뿐만 아니라 진실을 왜곡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동양이라는 말에 담긴 이같은 개념적 오류와 문화적 편견을 ‘오리엔탈리즘’이라 규정하고 이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제기된 것은 당연한 일이며, 이제 우리 주위에서는 서구 중심적인 이같은 이론에 대한 비판적 주장을 거의 일상적으로 듣게 되었다. 아니 요즘의 논자들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역사적으로 볼 때 세계사의 중심은 유럽이 아니라 동아시아에 있었고 유럽은 근대에 들어와 ‘운좋게’ 기회를 잡아 일시적으로 헤게모니를 잡은 것일 뿐, 이제 머지않아 동아시아가 주도하는 시대가 다시 도래할 것이라는 자신에 찬 낙관론을 제기할 정도가 되었다. 최근 놀라운 경제적 발전과 함께 이런 분위기에 한껏 고무된 중국이 신(新)중화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며 역사 해석 문제를 두고 주변국들과 갈등까지 빚고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목도하는 바이다.

이렇게 해서 작금의 상황은 총성만 들리지 않을 뿐 전후방의 구분이 없이 벌어지는 치열한 ‘역사전쟁’의 와중이라고 할 만하다. 물론 자기가 속한 국가와 민족을 중심에 두는 역사 해석이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고, 또 그 자체가 이론과 연구의 영역에 머무르고 정도가 크게 지나치지 않는다면 그다지 비난 받을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애국애족의 역사관을 표방하지 않으면 혐의와 질시를 받고 사회적으로도 매도되기에 이른 오늘날의 상황은, 거의 맹목적으로 “우리 것은 좋은 것이야”를 외치는 그야말로 주체사관의 올무로 우리를 밀어넣고 있다.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된 근본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는 세계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대단히 피상적이고 일방적이라는 데에 있다. 우리나라에서처럼 중고등학교에서 세계사 교육이 홀시되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세계사 과목은 아주 소수의 학생만이 선택하기 때문에 대학 신입생들의 평균적인 세계사 지식은 통탄할 지경에 이르렀다. 국내의 역사연구자들도 한국사를 제외하고는 주로 구미·중국·일본 등 ‘주류’ 국가들에 집중되어 있고 인도·동남아·아랍권의 전문가는 가뭄에 콩 나듯한 실정이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세계사인 전반에 대한 우리의 무지로 연결되고 무지는 배타적인 주관과 아집을 낳게 되는 것이다.
주간조선 ; [1957호] 2007.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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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1)] 황금의 유목문화 | 스키타이
 

스키타이는 인류 최초의 유목민족, 페르시아도 굴복
기원전 7~6세기경 출현, 흑해 북안·이집트·시리아 휩쓸며 황금강국 건설… 왕족·유목·농경 스키타이 부족으로 구성돼

▲ 스키타이 고분에서 출토된 황금빗 상부의 전투장면 장식 (러시아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구약시대에 ‘눈물의 예언자’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진 예레미아라는 이름의 선지자가 있었다. 기원전 7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에 걸쳐서 활동했던 그는 자기 민족 이스라엘이 극심한 종교적 타락으로 말미암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리라는 것을 신의 계시를 통해 거듭해서 경고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가 쓴 ‘예레미아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보라! 한 민족이 북방에서 오며 큰 나라가 땅 끝에서부터 떨쳐 일어나나니, 그들은 활과 창을 잡았고 잔인하여 자비가 없으며 그 목소리는 바다가 흉용함 같은 자라. 그들이 말을 타고 전사같이 다 항오(行伍)를 벌이고, 딸 시온 너를 치려 하느니라!”(6장 22~23절) 여기서 그가 마치 환상을 본 듯 서술하고 있는 활과 창을 잡고 말을 타고 줄을 지어 엄습하는 전사들은 아시리아인도 바빌론인도 아니었다. 바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유목민족이라 칭해지는 스키타이였다.

스키타이인들은 인도·이란 계통의 민족이었다. 최근 일부 학자들의 설득력 있는 주장에 의하면 종족의 명칭도 ‘스쿠타(skuta-)’라는 고대 이란어에서 나왔으며, 이는 오늘날 영어에서 ‘shooter’와 동일한 어원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한다. 스키타이는 ‘궁사’를 뜻하는 셈이었다. 아마 큰 무리를 이루어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던 그들의 모습에 강한 인상을 받은 다른 민족들이 붙여준 이름일 것이다. 스키타이라는 명칭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데,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 우리 문화의 원류 가운데 하나로 ‘스키타이’ 혹은 ‘스키토-시베리아’ 문화라는 것이 소개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민족의 기원과 역사에 관해서 가장 상세한 기록을 남긴 인물은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투스였다. 그는 ‘역사’라는 책에서 스키타이의 기원에 대해 몇 가지 설화를 전하면서 자신이 보기에 가장 신빙성이 있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그들은 원래 아락세스강(오늘날의 볼가강) 동쪽에 살던 민족이었는데, 마사게태라는 민족의 공격을 받게 되자 서쪽으로 도망쳐 강을 건너서 흑해 북안(北岸·북쪽 해안)의 원주민 킴메르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킴메르인들이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 남쪽으로 도망치자 스키타이는 그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는데, 그만 도중에 길을 잘못 들어서 근동(近東) 지방으로 내려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예레미아는 바로 그때 내려온 스키타이를 목격한 것이었다. 이 스키타이에 관한 최초의 기록도 당시 근동의 강국이었던 아시리아의 설형문자 점토판에서 발견된다. 즉 이슈파카이 왕이 이끄는 아슈쿠자이라는 집단이 아시리아의 왕 에사르핫돈(기원전 680~669년)과 전투를 하여 패배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서 아슈쿠자이가 스키타이를 지칭한다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당시 근동 지역에는 아시리아, 메디아, 우라르투 등 여러 세력들이 각축을 벌여 정치적으로 극도의 혼란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무대에 출현한 스키타이는 이들 국가와 때로는 연맹하고 때로는 적대하면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이슈파카이의 아들인 파르타투아는 과거의 적이었던 에사르핫돈과 혼인동맹을 맺게 되었는데, 후일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가 메디아에 의해 포위 공격당할 때 그의 아들이 스키타이의 왕이 되어 원군을 이끌고 와서 메디아를 격파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 뒤 스키타이는 이집트 원정에 나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거쳐 남진했는데, 겁을 먹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직접 선물을 갖고 올라와 스키타이의 국왕 마디에스에게 바치고 화평을 맺었다.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스키타이는 이처럼 28년 동안 중근동 각지를 호령하면서 여러 민족으로부터 조공을 받기도 하고 약탈을 자행하기도 했지만, 메디아의 국왕 퀴악사레스가 그들을 연회에 초대하여 술에 잔뜩 취하게 한 뒤 몰살시켜 버림으로써 그들의 패권은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고 한다.


▲ 스키타이 시대의 중앙유라시아
근동을 떠난 스키타이인들은 다시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서 흑해 북안의 초원으로 돌아갔다. 헤로도투스는 이들이 북방으로 귀환한 뒤 일어난 흥미로운 사건에 대해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스키타이인들이 근동을 원정하는 동안 부인들이 현지의 노예들과 관계를 맺어 낳은 자식들이 귀환한 옛 주인에게 예속되기를 거부했고, 양측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스키타이인들은 그들을 제압할 수 없었다. 그런데 노예들을 상대할 때는 칼이나 활이 아니라 채찍을 써야 한다는 누군가의 제안을 받아들여 채찍을 휘둘렀더니 겁을 먹고 다시 복종했다고 한다. 이 설화는 스키타이인들이 흑해 북안 즉 돈강과 다뉴브강 사이의 초원지역을 점령하고 국가를 건설할 때 군사적 정복과 함께 현지 주민과의 민족적 혼합도 동시에 일어났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흑해 북쪽 해안을 근거로 건설된 스키타이 국가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우선 ‘왕족 스키타이’라는 집단인데 최고의 지배층을 이루었고, 그 다음에는 일반 유목민으로 구성된 ‘유목 스키타이',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피정복민 ‘농경 스키타이’가 있었다. 이러한 복합적 구조는 스키타이 국가가 결코 단일한 종족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이질적인 다양한 부족들의 결합체였음을 말해준다.

흑해 북안으로 돌아온 스키타이는 기원전 6세기 말 페르시아 제국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냄으로써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다리우스 대제는 8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스키타이를 잡기 위해서 초원을 헤맸으나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절망에 빠진 그는 스키타이인들에게 사람을 보내 비겁하게 도망만 다니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나와서 싸우자는 전갈을 보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우리는 도망다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생활방식이 원래 그렇다”는 조롱 섞인 답신뿐이었다. 식량이 고갈된 페르시아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스키타이는 초원에 물이 귀하므로 그들이 물이 있는 곳을 따라 퇴각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맹추격을 시작했으나, 페르시아인들은 초원의 지리에 어두워 물도 없는 엉뚱한 길로 가는 바람에 전멸 위기에서 벗어나 구사일생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주간조선 ; [1957호] 2007.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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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2)]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 헬레니즘의 물결

헬레니즘을 아시아로 전파한 숨은 공신은 페르시아 제국
헬레니즘 확산 이후 불상 출현

▲ 탁티바히의 간다라식 불상
이집트에서인도까지 광대한 영토를 연결한 간선도로 건설
페르시아 멸망시킨 알렉산더 동방원정이 헬레니즘 전파
아프가니스탄 고지대에서도 그리스식 도시 발견돼

석가모니 사망 후 500년 동안은 불상 없어
간다라 지방 불상의 옷·자세 등 그리스 신상과 비슷
중국 서북부 둔황 지역 넘어 한반도까지 영향 끼쳐

무엇보다도 부처의 얼굴 모습이 그러한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가 걸치고 있는 승복도 그리스·로마인의 토가를 그대로 본뜬 듯하며, 서 있는 자세 또한 그리스 신상에서 흔히 보이는 콘트라포스토,
즉 한쪽 다리를 살짝 구부린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세기 초 중국의 가장 서북쪽인 신장(新疆)에서 타클라마칸사막 아래에 묻혀 있던 폐허의 도시 미란(Miran)이 발견되었다. 거기서 주민의 주거지, 불교 사원의 흔적과 함께 고대인의 생활을 추측케 하는 많은 자료가 출토되었는데 그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그리스·로마풍 인물이 묘사된 벽화였다.

거기에는 ‘티타(Tita)’라는 화가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었다. 이름으로 미루어볼 때 그가 서방 계통의 순회화가가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사실 신장 지방에서는 이 벽화 외에도 그리스의 신상이 조각된 인장(seal)도 상당수 발견되어, 여기서 수천 ㎞나 떨어진 지중해를 본산지로 하는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보여준다. 도대체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헬레니즘의 물결이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중앙아시아로,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파미르고원을 넘어서 지금의 중국 서북부 지방에까지 이르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물론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일 것이다. 비록 그에게 무너져버리긴 했지만 소아시아 반도에서부터 중앙아시아 변경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통치한 페르시아 제국이 없었다면 헬레니즘의 광범위하고도 신속한 확산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헬레니즘을 운운하기에 앞서 페르시아 제국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 이란의 서북부 케르만샤 지방에 가면 비스툰 비문을 볼 수 있다. 높이 105m의 깎아지른 절벽에 가로 22m, 세로 7.8m의 면적에 새겨져 보는 이를 압도하는 이 비문은 ‘비문들의 여왕’이라는 별명에 손색이 없다. 중앙에는 등신대 사이즈(1.72m)의 다리우스(Darius) 대제가 위로는 최고신 아후라 마즈다의 축복을 받으며, 발 아래로는 찬탈자 가우마타(Gaumata)를 짓누르고, 뒤에서 궁수와 창수의 호위를 받으며 반란을 일으킨 수령들 9명을 사슬에 묶어 부리는 모습이 부조되어 있다. 그 주위로는 다리우스의 업적을 칭송하는 명문이 설형문자로 새겨져 있고, 내용은 고대 페르시아어, 엘람어, 아카드어 등 모두 세 가지 다른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한 주인공은 사실 다리우스가 아니라 퀴로스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기원전 539년 바빌론을 무너뜨리고 서아시아의 주인이 되었지만, 기원전 530년 중앙아시아 초원지역을 호령하던 마사게테(Massagetae)라는 부족과의 전투에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퀴로스가 죽은 뒤 제위를 이은 그의 아들 캄비세스는 이집트를 원정해 영토를 확장시키기도 했으나 기원전 522년 사망하고 말았고, 캄비세스의 아들을 참칭(僭稱)한 가우마타가 등장하면서 제국은 극도의 혼란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 혼란을 수습한 인물이 바로 황족 출신의 다리우스였으며, 내란을 평정한 직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비스툰 비문을 새겼으니 기원전 519년의 일이었다.


다리우스에 의해 설계된 통치의 기본 구조는 ‘성(省)’제도였다. 전국을 20개 정도의 성으로 분할하고 각각에 총독(kshatrapa, 영어 satrap의 기원)을 임명했는데, 그에게는 군사권을 제외한 사법·징세·행정 등 광범위한 민정권이 부여되었다. 각 성은 매년 은을 세금으로 납부해야 했다. 행정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전국 각지를 잇는 주요 간선도로를 건설했다. 특히 소아시아의 사르디스에서 제국의 수도인 수사에 이르는 2470㎞ ‘제왕의 길’에는 111개의 역참이 설치되었고, 신속을 요하는 사항은 하루 300㎞ 이상 달려 일주일 만에 전 구간을 주파했다고 한다. 또한 문화적으로도 통일을 기해 아람어·문자를 제국의 공용언어·문자로 정하고, 조로아스터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주간조선 [1958호] 2007.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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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3)] 격돌하는 고대제국 | 흉노와 한

흉노 VS 漢, 전쟁과 평화의 300년史 유라시아 역사를 바꾸다
기원전 200년 항우 이긴 유방, 흉노족 공격했다 되레 죽을 위기
굴욕적 조약 맺고 공주·조공 바쳐… 한 무제 때 강공책 급선회
‘왕소군의 恨’등 숱한 드라마 남겨
‘이릉의 화’등 비사 남긴 반세기 전쟁으로 두 제국 국력 쇠퇴
서역·한반도까지 넘나들며 유라시아 문명교류에 큰 공헌

▲ 흉노 전사의 모습 스케치
우리는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 격돌하는 초한쟁패(楚漢爭覇)에 대해서는 많이 들었지만, 역발산의 기개세를 자랑하던 항우를 꺾고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그 당시 흉노(匈奴)라는 유목민과 전쟁하다가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나온 사실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중국인의 입장에서 위대한 한제국의 건국자가 당한 수치스러운 사건, 그것도 북방의 ‘야만인’에게 당한 것이라면 알려져서 무엇이 좋았겠는가. 그러나 사실은 사실이고 그것은 엄연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한 고조(高祖), 즉 유방은 천하통일의 기세를 몰아 기원전 200년 직접 군대를 이끌고 북방의 강호(强胡·강한 오랑캐라는 뜻) 흉노를 치러 나섰다. 마침 겨울에 큰 추위와 함께 많은 눈이 내려 병졸 열 명에 두셋은 동상으로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


그러나 묵특이라는 이름을 가진 흉노의 선우(單于·군주의 칭호)는 짐짓 패한 척 도망치며 한나라 군사를 유인하였다. 유방은 ‘32만명’의 대군을 데리고 추격에 나서 마침내 산서성 평성(平城)의 백등산(白登山)이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그는 미처 주력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흉노의 정예 ‘40만 기병’에 포위되고 말았다.

유방은 한겨울에 일주일을 꼬박 갇혀서 식량도 떨어진 채 죽기만 기다리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묵특의 부인에게 몰래 최고급 모피코트를 뇌물로 건네주었고, 이를 받은 그녀가 묵특에게 “당신이 지금 한나라 땅을 차지한다고 해서 거기서 살 것도 아니지 않소?”라고 하며 유방을 풀어줄 것을 권유했고, 이를 받아들인 묵특은 포위망의 한쪽 귀퉁이를 열어서 그를 보내주었던 것이다. 여기서 시작된 한과 흉노 제국의 전쟁과 화평의 관계는 이후 약 300년간 지속된다.

이러한 내용은 사마천의 ‘사기(史記)’ ‘흉노열전’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으니, 비록 군대의 수에 다소 과장이 있을 수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신뢰할 만한 보고이다. 포위에서 풀려난 유방은 사신을 보내 흉노와 ‘화친(和親)’이라는 이름의 조약을 맺었다고 한다. 그것은 네 가지 항목으로 구성되었는데, (1) 만리장성을 양국의 경계로 삼는다 (2) 상호 형제관계를 맺는다 (3) 한나라 공주를 흉노 왕에게 시집보낸다 (4) 매년 흉노에게 옷감과 음식을 보낸다는 것이었다.



▲ 기원전 1세기 무렵 한과 흉노 지도
앞의 두 항목으로 보아서 양국이 평등한 관계인 듯하지만 한나라가 흉노에게 일방적으로 공주와 물자를 바치는 형편이라서, 말이 ‘화친’이지 실제로는 불평등 조약이나 다름없었다. 그 같은 사정은 유방의 미망인 여후(呂后)와 묵특 사이에서 벌어진 소위 ‘농서(弄書)’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유방이 죽은 뒤 묵특은 여후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인즉 “나는 외로운 군주로서 습한 소택지에서 태어나 소와 말이 가득한 들판에서 자라났소. 여러 차례 변경에 가보았는데 중국에 가서 놀고 싶은 희망이 있었소. 이제 그대도 홀로 되어 외롭게 지내고 있으니, 우리 두 사람이 모두 즐겁지 않고 무엇인가 즐길 것이 없는 듯하오. 그러니 각자 갖고 있는 것으로 서로의 없는 것을 메워 봄이 어떻겠소?”라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성질이 강퍅하기로 소문난 여후는 이 편지를 받고 모욕과 수치심으로 펄펄 뛰면서 즉각 전쟁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백등산의 치욕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던 많은 대신이 만류했고, 이에 하는 수 없이 부드러운 내용으로 묵특을 달래는 답장을 써서 보내기로 한 것이다.

그 내용도 가관이어서 “폐하께서 저희 조그만 고장을 잊지 않고 글을 내려주시니 저희는 두려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물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저는 이제 늙어서 기력이 쇠하고 머리카락과 이도 다 빠졌으며 걸음걸이도 주체가 안됩니다. 폐하께서 누군가의 말을 잘못 들으신 듯한데, 저와 같이 지내봐야 공연히 힘드시기만 할 것입니다. 저희 고장이 지은 죄가 없으니 널리 용서해 주십시오. 황제의 전용수레 2대에 말을 같이 붙여 보내드릴 테니 항상 타고 다니는 데 쓰옵소서”라는 것이었다.

주간조선 ; [1959호] 2007.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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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4)] 한혈마의 고향 |‘서역’의 세계

漢 무제, 對흉노 연합전선 구축 위해 서역에 장건을 밀사로 파견
장건, 수차례 구금·탈출 끝에 13년 만에 돌아와
대완·오손·대하·안식 등 서역의 나라들 중국에 알려
漢, 한혈마 뺏기 위해 서역 정벌
말 숭배사상 강해… 한혈마, 천마(天馬)의 후손으로 알려져
기원전 60년 서역도호부 설치 후 본격 서역 진출 교두보 마련
200년 후 사신 감영, 안티오크 진출
중국 비단 중개 독점한 안티오크 상인, 감영의 로마행 막아
실크로드 통해 로마의 화폐·유리제품 등 유라시아 전역에 유통돼

▲ 유라시아의 천마 숭배 사상을 보여주는 경주 천마총 천마도 장니.
6세기경 중국의 양(梁)나라 사람인 종름(宗)이 강남지방의 세시풍습을 기록한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는 칠월 칠석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어느 물가에 한 남자가 살았는데, 매년 8월경이면 그곳으로 뗏목 하나가 흘러 내려오곤 했다. 하루는 그가 그 뗏목 위에 조그만 집을 짓고 식량을 많이 실은 뒤 출발하여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10개월 남짓 뗏목을 타고 가다가 어딘가에 도착했는데 거기에는 훌륭한 누각이 있었고, 그 안을 들여다보니 한 여인이 베틀에서 옷감을 짜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한 남자가 소를 끌고 그곳에 와서 물을 먹이기에, 그에게 그곳이 어디냐고 물어보니 “돌아가서 촉(蜀)나라에 사는 모모(某某)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그 뒤 그는 다시 뗏목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와 그 모모씨를 찾아 연유를 물어보니, “모년 모월 밤하늘에 갑자기 이름을 알 수 없는 별 하나가 나타나 견우성에 접근했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계산을 해보니 그 달은 바로 자기가 뗏목을 타고 그 물가에 도착한 시점이었다는 것이다.

‘별로 가는 뗏목’을 타고 하늘나라를 다녀온 사람. 중국의 민간설화에서는 그 주인공이 바로 장건(張騫)으로 되어 있는데, 그는 한 무제가 흉노와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흉노의 적이었던 월지(月氏)와 연맹을 도모하기 위해 서역으로 파견한 인물이었다. 무제의 밀명을 받은 그는 감보(甘父)라는 흉노인을 길잡이로 데리고 기원전 139년 수도 장안을 출발했다. 그러나 서쪽으로 가는 도중에 흉노에게 발각되어 초원으로 끌려갔다. 거기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는데, 11년이 지난 뒤 드디어 탈출에 성공했다.

그는 월지를 다시 찾아 나섰지만 월지는 이미 흉노의 공격을 받아 멀리 도망간 뒤였다. 그래서 그는 중앙아시아를 거쳐서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지방까지 내려갔다. 거기서 월지의 왕을 만나서 무제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이미 그곳에 정착해 편안하게 잘 살고 있던 월지인에게 사나운 흉노인과 전쟁하기 위해 머나먼 고향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장건은 빈손으로 귀국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흉노에게 붙잡히지 않기 위해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길, 즉 티베트인이 사는 강중로(羌中路)를 이용했는데 불행하게도 또 붙들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행운의 사나이였다. 흉노에서 일어난 정변을 틈타 1년 만에 탈출에 성공했고, 이번에는 전에 남겨두었던 처자식까지 데리고 귀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장건은 출발한 지 13년이 지난 기원전 126년에 마침내 장안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뗏목 타고 가는 장건.
역사상 장건의 이 여행은 ‘서역착공’이라 불린다. ‘착공(鑿空)’이란 문자 그대로 아무도 가지 않은 새로운 땅을 뚫었다는 뜻이다.

한 무제는 흉노를 치기 위한 예비전략으로 장건을 파견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자 그를 파견한 지 6년 뒤인 기원전 133년 드디어 흉노와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흉노는 예상보다 훨씬 끈질기고 강한 상대였으며 전황은 어렵게 전개되어 갔다. 바로 그때 장건이 돌아온 것이다. 그는 13년 동안 자기가 보고 들은 ‘서역’의 사정을 황제에게 낱낱이 보고했다. 월지가 동맹을 거부한 것이 실망스러웠지만 그 대신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에 있는 오손(烏孫)·대완(大宛)·대하(大夏)·안식(安息)·대진(大秦) 등 여러 나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오손은 천산산맥 북방에 살던 유목민이었고, 대완은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 부근의 나라였으며, 대하는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그리스인 정권 박트리아, 안식은 파르티아, 대진은 로마를 지칭했다.

그런데 장건이 갖고 온 정보 중에서 한 무제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오손과 대완 지방에 산다고 하는 한혈마(汗血馬)라는 이름의 명마였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마(天馬)’의 후손인 이 말은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하루에 천리를 주파할 수 있고 마치 피처럼 붉은 땀을 흘린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한 무제는 대완이라는 나라에 사신을 보내 한혈마를 요청했으나 거부되자 군사적인 방법에 호소했다. 그의 명령을 받은 이광리(李廣利)라는 장군이 기원전 104년 수만의 군사를 데리고 대완을 향해 출발했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도중에 위치한 도시들이 한나라를 도왔다가 혹시 흉노가 보복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성문을 꼭꼭 잠그고 식량 한 톨 제공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병사들은 다 도망갔고 이광리는 수천 명의 남은 병사를 추슬러 돈황으로 돌아왔다.
주간조선 ' [1960호] 2007.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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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5)] 흉노와 훈족, 민족 대이동의 시대

한족과 신흥 선비족에 쫓겨간 흉노 2세기 후 훈족으로 유럽사에 등장
4세기 중반 흑해 고트족 공격하며 유럽 공포로 몰아넣어
피란민 로마제국 변방에 수십만명 몰려들어 대혼란
게르만 대이동과 서로마 붕괴 불러
452년 아틸라, 알프스 넘어 로마시까지 파죽지세로 진격
피란민들 해안가로 도망가 ‘바다도시’베네치아 등 건설
‘훈족의 영웅’ 아틸라, 황화론 상징
숱한 신화 남기고 결혼식날 급사… ‘니벨룽겐의 반지’주인공으로
고트족 반란 등 내부 분열로 유럽 흔든 100여년 정복 역사 막 내려

▲ 훈족과 고트족을 묘사한 스케치.
376년 다뉴브 강가의 전방초소에 배치된 로마제국의 군관에게 긴급한 보고가 접수되었다. 북방 야만인 사이에 이상할 정도로 거대한 동요가 감지되고 있으며, 어디에선가로부터 출현한 무서운 민족의 공격을 받아 고향을 버리고 도망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군관들은 처음에 이같은 보고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나, 곧 많은 수의 야만인이 다뉴브강 북안에 밀려들어 제국의 보호를 요청하기 시작하자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이들은 흑해 북방에 거주하던 고트족이었고, 그들을 밀어낸 새로운 민족은 바로 역사상 유명한 훈족이었다. 훈족은 370년경부터 휘하의 알란족을 이끌고, 돈강과 드니에스터강 사이 지역에 있던 동고트(Ostrogoth) 왕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동고트의 국왕 에르마나릭은 절망 속에서 자살하고 말았고 훈족의 말발굽에서 피신한 잔중(殘衆)은 서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들을 뒤쫓은 훈족이 강을 건너 서고트(Visigoth)를 압박하자 수많은 고트족이 가재도구를 챙겨서 다뉴브강으로 밀려들었던 것이다.

일부 기록에 의하면 당시 로마제국의 변경으로 밀려든 피란민의 수가 20만명에 육박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역사상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훈족과 훈제국은 453년 아틸라의 죽음으로 그 세력이 와해될 때까지, 게르만족의 대대적인 이동을 격발시키고 결국은 (서)로마제국의 붕괴라는 사태까지 초래하였던 것이다. 일찍이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와 같은 학자는 훈족의 침입과 게르만족의 이동이 유럽사에서 고대의 종말을 가져온 사건이라고 규정하기도 했고, 이러한 주장은 그 뒤 프랑스의 역사학자 피렌에 의해 비판되면서 유럽사의 시대구분 논쟁을 촉발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었던 훈족은 누구였으며 어디에서 온 사람인가. 4세기 후반 동로마의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훈족의 생김새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훈족은 아이들이 태어나면 그 뺨에 쇠붙이로 깊은 상처를 내어, 어른이 된 다음에 수염이 날 때에도 주름진 상처로 인해 털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도록 했다. 그래서 수염이 없는 그들은 흉물스럽게 되고, 내시처럼 보기에도 역겨운 모습이다. 그들은 지저분할망정 그런대로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다. 어찌나 강인한지 음식에 맛을 내지도 불에 굽지도 않고… (생고기를) 자기 허벅지와 말 등 사이에 끼워 넣어 따스하게 한 뒤에 그냥 먹는다.” 448년 아틸라의 캠프에 직접 다녀온 적이 있는 또 다른 역사가 프리스쿠스도 훈족의 외모에 대해서 넓은 어깨와 가슴, 키는 작지만 말 위에 앉으면 커 보이는 인상, 납작한 코, 작고 찢어진 눈 등을 기록하여 몽골로이드적인 특징을 지적한 바 있다.


▲ 훈족의 이동 경로
그래서 드 기네(De Guines·1721~1800) 같은 프랑스 학자는 일찍이 훈족은 바로 몽골초원에서 이주해온 흉노족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던 것이며, 그 근거로 훈과 흉(노)이라는 명칭의 유사성, 양자 모두 몽골로이드적인 외모를 갖고 있었으며 유목민족이라는 점, 중국 측 문헌에 보이는 기록 등을 지적했다. 그 후 여러 학자들이 흉노·훈 동족론에 대해 찬반의 뜨거운 논쟁을 벌였는데, 현재는 동족론을 지지하는 입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동서 간의 여러 자료를 토대로 흉노가 서방으로 이주하여 훈족으로 나타난 과정은 이렇게 정리된다. 기원후 48년경 흉노는 누가 군주의 자리를 차지하느냐는 문제를 두고 심각한 내분이 일어나 두 조각으로 분열되고, 남흉노는 고비사막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와 한나라의 보호를 받고 북흉노가 초원을 호령하는 사태가 되었다. 그러나 북흉노는 한제국과 남흉노 연합세력의 압박을 받는 한편 초원 동부지역에서 흥기하기 시작한 선비족의 공격을 받으면서 약화되어, 91년에는 몽골리아를 포기하고 중앙아시아의 일리강 유역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흉노는 그곳을 근거로 인근 도시국가들을 지배하기도 했지만 결국 몽골리아 초원의 새로운 패자인 선비족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2세기 중반경 더 서쪽으로 옮겨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초원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후 이들은 역사적인 기록에서 포착되지 않은 채 사라져 버린 듯했지만, 4세기 중반 갑자기 ‘훈’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훈족의 침입과 게르만족의 대이동 경로
당시 유럽인은 이러한 사정을 알 리가 없었기 때문에 훈족의 출현에 대해 기이한 설화들을 지어내어 이해하려고 했다. 6세기 중반 동로마의 역사가 요르다네스(Jordanes)는 고트족 사이에 유포되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옛날에 필리메르라는 이름의 고트족 왕이 있었는데 어떤 마녀를 스키타이인이 사는 황무지로 추방했는데, 황야를 떠돌던 한 악령이 그 마녀를 발견하고 결합하여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민족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초자연적일 정도로 가공할 훈족의 잔인성과 파괴성을 경험한 고트족의 심리를 잘 반영하는 설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로마인은 다른 설화를 유포시켰다. 즉 훈족은 원래 흑해 북단의 크리미아 반도 부근에 있는 소택지 건너편 동쪽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그들이 기르던 암소 한 마리가 쇠파리에 물려 놀라서 서쪽으로 도망치자 그것을 잡으러 온 목동이 소택지 서쪽에 펼쳐진 풍요로운 초원을 보게 되었고, 그 이야기를 들은 훈족이 대거 서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설화는 환경과 생태적 요인을 지적하고 있으며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래도 훈족의 이동을 설명해주는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370년대 훈족의 침입과 고트족의 이동이 벌어진 뒤 로마제국의 변경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30년 뒤인 400년경 훈족의 제2차 파도가 덮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울딘(Uldin)이라는 수령이 이끄는 훈족의 공격을 받은 고트족 집단이 헝가리의 판노니아 평원으로 도망쳐 왔다가, 404년에는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갔지만, 울딘도 그들을 추격하여 로마와 합세하여 격파하였다. 훈족의 활동은 게르만족의 거대한 민족이동을 촉발시켰다.

주간조선 [1961호] 2007.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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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6)] 신질서를 모색하는 고대 중앙유라시아

동아시아, 한·흉노 양극체제 무너지며 대혼란… 7세기 당제국으로 매듭
중국, 오호십육국·위진남북조 거쳐 수나라로 통일
북방은 선비·유연 지배 거쳐 6세기 돌궐제국으로
수·당, 유목민 영향 漢보다 개방적
중국 역사상 북방민족의 지배기간이 절반 넘어
북방민족, 200년 가까이 산둥성 등 중국 북부전역 약탈
북방 새 강자 돌궐, 카스피해까지 지배
유목민 일부 한반도로 이동, 신라지역 정착 가능성
일부 학자 “일본까지 진출 야마토 정권 수립” 주장도

▲ 내몽골 호린게르에서 발굴된 선비족 묘의 벽에 그려진 수렵도.
한 학자는 일찍이 수천년의 중국 역사를 한마디로 정의하여 “만리장성을 사이에 둔 남과 북의 대결”의 역사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이같은 단언은 중국사의 내적인 변화와 발전을 무시하고 대외적인 측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북방민족과의 갈등과 대결, 정복과 복속이 중국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테마의 하나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최초의 통일왕조인 진제국이 출현한 기원전 221년부터 마지막 왕조 청제국이 멸망한 1911년까지 2000여년 가운데, 중국의 일부 혹은 전체가 북방민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던 기간은 거의 반 정도에 이른다. 게다가 흔히 한족왕조로 분류되는 수당제국도 사실상 그 건국세력이 북방계의 혼혈인 소위 ‘관롱집단’이었음은 이미 오래전부터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최근 일본의 한 대표적인 학자는 북위는 물론 당제국도 모두 선비(鮮卑)족 계통의 ‘탁발(拓跋)국가’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한 바 있다. 우리가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중국사를 ‘남과 북’ 대립의 역사로 보는 것도 결코 과장이라고 하기만은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중국의 역사에서 한족에 대한 북방민족의 장기간의 정복과 지배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史實)’이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다. 과거 중국의 학자들은 비록 중국이 일시 군사적으로 북방민족의 지배를 받긴 했지만, 한족의 탁월한 정치·문화적 수준과 인구·경제적 역량은 소수의 이들 지배자를 흡수하고 동화시켜 결국 한민족의 일부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고 주장해 왔다. 이것이 소위 ‘한족중심 동화론’이다.

그러나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은 한족중심주의를 명백하게 배격하고 있다. 한족은 다른 55개 소수민족과 더불어 중국의 역사를 성립·발전시켜온 ‘중화민족’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이다. 다시 말해 고대의 흉노족, 선비족, 여진족, 몽골족, 만주족 등도 모두 중화민족의 일부라는 것이다. 과거 ‘한족중심주의’는 ‘중화민족중심주의’에 의해서 대체된 셈이다. 이런 논리를 인정한다면 그들의 역사는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될 수밖에 없고, 현재 ‘동북공정’이니 ‘서북공정’이니 하면서 북방민족의 역사를 중국화하는 작업도 그 필연적인 귀결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중국 학자들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이제까지 외국 학자들의 입장은 어떠했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 비판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같은 입장을 방조하고 강화시켜 주었던 것 같다. 소위 ‘정복왕조론’이라는 것이 그런 역할을 했다.

중국이건 외국이건 불문하고 이렇게 북방민족과 중국의 관계를 관찰할 때 중국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에 관한 거의 모든 기록이 한문으로 쓰여 있다는 데에 기인한다. 물론 시대가 내려오면 북방민족도 독자적 문자를 만들고 기록을 남기긴 하지만 여전히 전달되는 정보의 양은 제한적이다. 그렇다보니 문헌기록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학자의 관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기록자의 관점을 취하게 되고, 그것이 하나의 ‘주관’이 아니라 ‘객관’인 것처럼 믿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만약 우리나라의 역사를 중국 측 기록에만 의존해서 연구하고 서술한다고 상상해보자. 게다가 현재 다른 소수민족처럼 우리도 중국의 영토 안에 편입되어 있다고 가정해보자. 한국사를 서술한 책의 내용은 아마 지금과 판이하게 달랐을 것이다. 따라서 북방민족, 나아가 중국 ‘주변’ 민족의 역사를 연구할 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기존의 텍스트(여러 형태의 사료)를 ‘해체’하여 그 패권적인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워지는 일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전략은 첫째로 텍스트 안에 내재된 중국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일과, 둘째로 비(非)중국 텍스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일이다. 한제국 붕괴 이후 약 350년간 일어난 역사에 대해서도 그동안 줄곧 중국 중심적 역사관에 의해 이해·서술·교육되어 왔지만, 이제는 남북의 균형된 역사서술의 틀을 모색할 때가 되었다.


먼저 장성 이남 지역에 대해서 살펴보자. 기원후 220년 한제국의 멸망 이후 위·오·촉이 정립하는 삼국시대가 도래했고 뒤이어 (서)위와 (서)진의 짧은 통일왕조가 들어섰다. 그러나 곧 흉노·갈호·선비·저·강 등 소위 ‘다섯 오랑캐(五胡)’ 민족이 잇따라 화북을 정복하고 여러 왕조를 건설하는 ‘오호십육국’의 시대로 넘어갔다. 이제까지 이에 대한 서술은 ‘역사가 없는 민족’들이 갑자기 중국사의 무대에 나타나 야만적인 약탈과 파괴를 자행한 것처럼 묘사되어 왔다. 그런가 하면 위트 포겔과 같은 학자는 이들에게 ‘정복왕조(Conquest Dynasties)’의 특수한 형태로서 ‘침투왕조(Infiltration Dynasties)’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그 까닭은 몽골이나 만주처럼 일거에 장성을 돌파하고 중국을 점령한 것이 아니라 조금씩 천천히 마치 물이 삼투되듯이 중국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한편 화남지방에는 한족의 망명정권이 고도의 문화수준을 유지하면서 흥망을 거듭했고, 그러는 사이 화북지역에서도 선비족 계통의 (북)위왕조가 통일을 이룩하고 마침내 중국문명의 세례를 받고 ‘한화(漢化)’ 정책을 취하기 시작했다. 이어 그 계승국가들에 의한 통치가 계속되다가 589년 마침내 수나라에 의해 남북을 아우르는 통일제국이 회복되었고, 당제국에 의해 계승되면서 중화왕조는 화려한 부흥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주간조선 [1962호] 2007.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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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7)] 유라시아 초원을 제패한 돌궐제국

돌궐·위구르로 이어진 유목제국, 유라시아의 무역·군사 초강국 군림
흉노 붕괴 500년 만에 유연 멸망시키고 초원의 유목민 통합
돌궐, 세부족 반란으로 무너진 후 위구르가 새 제국 건설
돌궐, 정체성 지키기 위해 중국의 불교·도교 배척하고 고유의 ‘탱그리’신앙 숭배
위구르, 唐 반란 제압해주고 비단 헐값에 독점매입

▲ 몽골 체체를렉 박물관의 부구트 비석
6세기 중반 서쪽으로는 카스피해에서 동쪽으로는 만주지방에 이르는 광대한 유라시아 초원을 제패한 강력한 유목제국이 출현했다. 이 제국을 건설한 사람은 스스로를 ‘튀르크(T?rk)’라고 불렀고, 중국 측 자료에는 ‘돌궐(突厥)’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오늘날 터키(Turkey)라는 나라의 이름도 그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이 ‘튀르크’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돌궐제국은 기원후 1세기 중반경 흉노가 붕괴된 뒤 실로 500년 만에 초원의 유목민을 통합하고 출현한 국가였다. 그런데 그 영역은 훨씬 더 커졌다. 과거 흉노의 경우 서쪽 경계가 대체로 파미르고원 정도까지였는데, 돌궐의 범위는 서쪽으로 더욱 확장되어 카스피해와 흑해까지 미쳤으니 실로 유라시아 규모의 대제국이었고 당시 동아시아의 당제국, 서아시아의 압바스 칼리프조, 유럽의 동로마제국과 함께 유라시아의 국제질서를 좌지우지했던 큰 기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료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돌궐’이라는 부족은 원래 알타이 산맥 부근에서 유목하면서 거기서 철을 캐내어, 몽골리아 초원의 맹주 유연(柔然)에게 공납을 바치던 일개 미약한 부족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문으로 된 사료에는 돌궐인의 조상설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고난으로 점철된 그들의 역사적 기억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즉 언젠가 돌궐인이 주변의 강력한 국가의 공격을 받아 주민 모두가 살해되고 어린 사내아이 하나만 겨우 살아 남았는데, 암늑대 한 마리가 그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고기를 물어다 주어 키웠다. 후일 이 아이가 커서 암늑대와 혼인을 하고 거기서 10명의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 가운데 막내아들의 이름이 ‘아사나(阿史那)’였고, 그가 바로 돌궐제국의 카간(qaghan·황제)을 배출하는 씨족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아사나’라는 말이 튀르크어로 ‘늑대’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통상 ‘낭생설화(狼生說話)’라고 불리는 이러한 전설은 돌궐뿐만 아니라 몽골인에게도 보인다. 칭기즈칸의 계보와 그의 일대기를 기록한 ‘몽골비사’라는 책을 보면 맨 처음에 ‘잿빛 늑대’와 ‘흰빛 사슴’이 만나서 아이를 낳고 그 후손 가운데 칭기즈칸이 출현했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물론 늑대가 이들의 조상일 수는 없고, 다만 초원의 약탈자적 강인함의 상징인 늑대를 토템동물로 숭배했던 유목부족의 관습에서 비롯된 설화일 텐데,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돌궐인이 이같은 낭생설화를 실제로 믿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발견된 것이다.


▲ 빌개 카간의 황금왕관
오늘날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서쪽으로 400㎞ 정도 떨어진 곳에 체체를렉이라는 도시가 있다. 현지어로는 ‘꽃이 만발한 곳’이라는 의미인데, 사실 이 도시는 항가이라는 이름의 산맥 북사면에 있으며 해발 1700m의 비교적 고지대에 위치해 있어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봄이 되면 푸른 초원에 아름다운 야생화들이 만발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던 것 같다. 이 도시의 중앙에 박물관이 있고 정원 한가운데에 높이 2.45m의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는데, 기단 부분에는 거북이 모양을 조각한 귀부(龜趺·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가 있다. 이수(首·뿔 없는 용의 모양을 아로새긴 형상)에 해당되는 부분은 한쪽 귀퉁이가 떨어져 나갔는데, 흔히 이수에 새기는 용은 보이지 않고 대신 어린아이가 늑대의 젖을 빨아먹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이 비석의 삼면에는 모두 중앙아시아에서 사용되던 소그드(Soghd) 문자가 새겨져 있고 마지막 한 면에는 인도에서 사용되던 브라흐미 문자가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은 원래 체체를렉 근교에 위치한 부구트(Bugut)산에서 발견되어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기 때문에 통상 ‘부구트비’로 부른다. 비문을 판독한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여 제작연도는 대체로 580년대이며, 비석은 당시 이 지역을 지배하던 돌궐왕족에 속하는 마한 테긴(Mahan Tegin)이라는 인물의 기념비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돌궐제국의 지배집단은 자기들 조상이 늑대의 젖을 먹고 살아남은 ‘아사나=늑대’의 후손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처럼 비석의 머리 부분에 자신들의 뿌리를 보여주는 내용을 부조해 넣은 것이다. 늑대와 아이가 조각된 것은 퀼 테긴이라는 왕자의 비석 상단에도 보이는 것으로 보아 아사나 일족이 모두 믿고 있던 설화였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측 기록에 의하면 돌궐의 건국은 553년의 일이었다. 그 해에 투멘(T?men·만호장)이라는 이름의 수령이 몽골리아에 있던 유연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일릭 카간(Ilig Qaghan)’이라는 칭호를 갖고 즉위했다고 한다. ‘일릭’은 ‘나라를 건설한’이라는 의미의 튀르크어이지만, ‘카간’은 돌궐인이 처음 만든 것은 아니었다. 유목민의 군주를 뜻하는 명칭인 ‘카간’ 혹은 ‘칸’이라는 단어가 언제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는지는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늦어도 5세기 중반경이 되면 선비·유연 계통의 유목민 사이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신라에서 4세기 중반경 처음 출현하는 ‘마립간(麻立干)’이라는 칭호에서 ‘간’을 ‘칸’과 동일한 단어로 보는 견해도 있다.

6세기 중반 몽골리아를 장악한 돌궐은 곧바로 대외원정에 나서기 시작한다. 제2대 카간은 서쪽으로는 헤프탈(Hephtal)을 쳐서 사산조 페르시아와 접경을 이루고, 동쪽으로는 거란족을 복속시켰으며, 북으로는 바이칼호에 이르고, 남으로는 고비사막을 넘어 당시 북주·북제로 나뉘어져 있던 북중국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다. 당시 이 두 나라는 서로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방의 돌궐에 잘 보이기 위해 경쟁적으로 재물을 갖다 바쳤으니, 돌궐의 제3대 카간은 “남쪽에 효성이 지극한 두 아이들이 있는데, 내게 물자가 부족할까 무슨 걱정을 하겠는가?”라고 호언장담을 했다고 한다.

주간조선 [1963호] 2007.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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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8)] 실크로드 상권 장악한 소그드인 중국정치·문화까지 주물러

당나라 때 수도 장안의 평강방(平康坊)이라는 곳에 보리사(菩提寺)라는 절이 있었다. 그 옆에 현종 때 재상이었던 이임보(李林甫)의 사저가 있었는데, 생일이 되면 그는 보리사의 스님을 초청하여 찬불을 올리게 했다. 한 해는 사례로 말안장 하나를 받은 스님이 시장에 내다 팔아 7만전을 받은 일이 있었다. 이렇게 해서 보리사 스님들 사이에 이임보의 커다란 씀씀이는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다들 그의 생일에 혹시 초대받지 않을까 은근한 기대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해에 한 스님이 과연 초대를 받게 되었고 열심히 찬불을 올리면서 주인의 공덕을 치켜세웠다. 그런데 막상 돌아갈 때 그가 받은 것은 불과 몇 ㎝ 안 되는 썩은 못 같은 것이었다. 크게 실망한 그는 장안 서쪽에 있는 서시(西市)로 나가 ‘상호(商胡)’, 즉 소그드 출신의 상인이 경영하는 가게를 찾아가 보여주었다. 그 가게 주인은 크게 놀라면서 “스님께서는 이런 것을 어떻게 손에 넣으셨습니까? 이것을 팔 때는 값을 잘못 매기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래서 스님은 시험삼아 100민(緡·1민은 1000전)을 불렀더니 주인이 껄껄 웃으며 “그렇게 할까요?”라고 되물었다. 그래서 스님은 한껏 더 많이 부를 생각으로 500민이라고 했더니, 주인은 “이것은 천만(千萬)의 가치가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거액을 내놓았다. 그래서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렇게 비싸냐고 물었더니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것이 바로 보골(寶骨)입니다”였다.

이 이야기는 단성식(段成式·803~863)이 편찬한 ‘유양잡조(酉陽雜俎)’라는 글에 나오는 것으로, 일본의 학자 이시다 미키노스케의 명저 ‘장안의 봄’에 소개되어 유명해졌다. 물론 이것은 실제 사건이 아니라 설화로 꾸며낸 이야기이긴 하지만 당시의 역사적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선 ‘보골’이라는 것은 부처님의 사리를 가리키며 당시에는 ‘불골(佛骨)’이라고도 불렀으니, 사리라고 하면 진위를 가릴 여유도 없이 수만금을 주고 사려고 하는 불교 숭배의 풍조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헌종(재위 806~820)은 사리를 궁정 안에 안치하려고 했는데, 한유(韓愈)가 ‘논불골표(論佛骨表)’라는 글을 올려 이를 비판했다가 목숨을 잃을 뻔한 사건도 있었다.


오아시스 정착민 출신으로
동서 오가며 비단으로 막대한 부


그런데 위의 이야기가 반영하고 있는 또 다른 역사적 사실은 ‘상호’ 혹은 ‘호상(胡商)’이라고 불리는 상인이 갖고 있던 엄청난 재력인데, ‘보골’ 한 조각에 상상을 초월하는 현금을 쾌척할 정도의 재력을 갖고 서시를 좌지우지했던 이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물론 한나라 때와 같은 시대에는 ‘호’라고 하면 흉노인과 같은 북방의 유목민을 지칭했지만, 수·당대에 오게 되면 이 말은 거의 전적으로 중앙아시아의 소그드(Soghd)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굳어졌다. 따라서 ‘호상’은 곧 소그드인으로서 중국에 와서 교역에 종사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던 것이다.

▲ 낙타 위의 소그드인 주막대
아주 오래전부터 ‘소그드’란 명칭은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을 가리켰다. 이미 다리우스 대제 때에 새겨진 비스툰 비문(기원전 519년)에도 언급되었다. 이들은 파미르 산맥 서쪽의 건조지대, 즉 북쪽의 시르다리아 강과 남쪽의 아무다리아 강 사이에 점재하는 오아시스 도시들에 살던 정착민으로, 농사를 짓기도 하지만 수공업과 상업에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여 멀리 중국이나 인도 혹은 서아시아 각지로 나가서 국제무역에도 종사하였다.


‘호상’이라 불리며 중국서 맹활약
장안에만 4000여명 거주

‘호상’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사람이 중국 측 자료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후한대 즉 1세기 이후의 일이었고, 중국 측 문헌에는 “장사하러 오는 호상들이 매일 변경에 온다”는 기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소그드인은 쿠샨왕조의 지배를 받으며 중앙아시아~인도~중국을 연결하는 교역로를 장악했던 인도나 박트리아 출신 상인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아직 활동의 정도는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4세기에 들어오면서 북방에서 히온(Chion)이라든가 헤프탈(Hephtal)과 같은 유목민이 대거 남하하고 약탈하면서 오늘날 아프간과 인도 서북부 지방이 황폐해졌고 종래 인도와 연결되는 교역망이 파괴되고 말았다. 이 혼란으로 초래된 공백을 메우고 국제무역의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소그드 상인이었다.

장사라고 하면 다른 민족에게 뒤지지 않는 중국인의 눈에도 이 소그드인의 상재(商才)는 거의 천부적일 정도로 비쳤던 모양이다. ‘신당서(新唐書)’라는 역사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아이가 태어나면 사탕을 물리고 손에는 아교를 잡게 하는데, 이유인즉 그가 커서 달콤한 말을 하고 돈을 손에 쥐면 딱 달라붙게 되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글 쓰는 법을 익히고 장사에 능하며 이익을 탐한다. 남자 나이 스물이 되면 이웃나라로 가는데, 이익이 있는 곳이라면 아니 가는 곳이 없다.”
▲ 소그드인의 교역 네트워크와 거류지 분포
당시 중국에는 많은 수의 소그드 상인이 활약하고 있었는데 그 수를 정확히 말해주는 자료는 없다. 그러나 8세기 중반 장안에 40년 이상 거주하며 처자식을 두고 전택과 가옥을 소유한 ‘호객(胡客)’의 수가 4000명 정도였다는 한 기록만을 보아도 대충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국제교역에 종사하는 이들은 중국의 비단을 대대적으로 구입하여 육상 실크로드를 통해서 페르시아와 비잔티움 방면에서 고가에 판매함으로써 막대한 수입을 올렸던 것이다. 따라서 국제적인 교역망을 유지·운영하기 위해서 이들은 고향이 있는 실크로드 교역로 중간 곳곳에, 그리고 중국 내 여러 도시들에 집단거류지를 형성하였다.

주간조선 [1964호] 2007.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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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9)] 파미르 원정대를 이끈 고선지와 그의 시대

고구려 후예인 唐 맹장 고선지
파미르 넘어 타슈켄트까지 정복
중앙아시아 패권 놓고 압바스 왕조와 탈라스 전투
제지기술자 포로로 끌려가 이슬람권에 첫 제지술 전파
패전 후 황제 호위대장군에 임명 ‘안록산의 난’ 진압 지휘
부관 거짓밀고로 전장에서 참형, 비운의 영웅으로 남아

▲ 고선지 장군의 활동 무대였던 파미르 산중의 와한 계곡.
오늘날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이 접경하는 곳에는 탈라스(Talas)라는 이름의 그리 크지 않은 강이 흐르고 있다. 그런데 지금부터 1250년 전 여기서 거의 10만명의 중국군과 아랍군이 격전을 벌여 중국군이 참패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탈라스의 전투’(751)이다. 그때 중국군을 지휘했던 사람이 고구려 유민의 후손이었던 고선지 장군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전투는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누가 차지하느냐를 두고 중국과 이슬람이라는 두 개의 문명권이 충돌한 것이고, 오늘날까지 이 지역 주민의 대다수가 이슬람을 신봉하고 있는 것도 이 전투의 결과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탈라스전투는 세계사의 전개에서 이처럼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그 의미를 충분히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승리를 거둔 아랍 측에서는 이 전투에 대해 거의 아무런 언급도 없을 뿐만 아니라, 수만 명이 몰살당한 중국 측에서도 아주 단편적인 기록만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떤 사건은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별로 하찮은 일 같아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그 중요성이 인식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고선지 장군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그가 단지 고구려인의 후예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중앙아시아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격돌의 현장에 주역으로 활약했던 그의 생애와 활동이 곧 당시 세계사의 응축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의 생애에 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은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 등 중국의 정사(正史) 속에 포함된 열전(列傳)에 보인다. 이에 의하면 처음에 그의 부친 고사계()는 오늘날 감숙(甘肅)지방에 주둔하던 하서군(河西軍)에 배속된 군인이었는데, 여러 차례 공을 세워 사진장교(四鎭將校)로 승진했다. ‘사진’이란 ‘안서사진(安西四鎭)’을 뜻하는 것으로, 현재 신강에 위치한 네 도시, 즉 쿠차(龜玆)·카라샤르(焉耆)·호탄(于)·카슈가르(疏勒)에 배치된 군대를 말한다. 그 사령부 격인 안서도호부는 쿠차에 있었다. 고선지는 서부전선에 장교로 임명된 부친을 따라 처음으로 서역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 고선지 장군의 원정도
그는 20살쯤 되었을 때 ‘음보(蔭補·아버지가 고관일 경우 자식에게 낮은 관직을 임명하는 제도)’로 유격장군(游擊將軍)에 임명되었는데, “용모가 빼어나고 기사(騎射)에 탁월했으며 용맹”했기 때문에 신속하게 승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었으니, 아직 최고사령관인 절도사의 눈에 띄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가 티베트계 출신의 부몽영찰이 절도사로 부임해 오면서 주목을 받아 중책을 맡기 시작했고, 곧 호탄과 카라샤르와 같은 도시를 방위하는 장군으로 임명되었다. 740년경 그는 불과 2000명의 기병을 데리고 천산산맥 서부에 있던 달해(達奚)라는 부족을 정복한 공을 인정 받아 안서부도호(安西副都護)에 임명되고 곧 이어 사진도지병마사(四鎭都知兵馬使)가 되었으니, 사실상 절도사 다음의 부사령관이 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명성을 내외에 드높인 것은 747년의 파미르 대원정이었다. 오늘날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이 접경하는 파미르고원의 해발 4000~5000m 고지를 넘나들면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그는 마침내 공로를 인정받아 서부방위 최고사령관인 안서절도사에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당제국이 고선지가 이끄는 원정대를 이처럼 고산지대로 보낸 까닭은 티베트 지방에서 흥기하여 당의 서부 변경을 압박하면서 중앙아시아 각지로 세력을 뻗침으로써 안서도호부의 목을 죄고 있던 토번(吐蕃)이라는 강국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파미르 산중에는 20여개의 군소국가가 산재해 있었는데, 이들이 토번의 압력을 받아 당과 관계를 단절하자 당의 서역경영은 심각한 차질을 빚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고선지를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로 임명하고 1만여명의 기병을 주어 토벌을 명령하였다. 현존하는 기록을 통해서 원정과정을 재구성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우선 그는 사령부가 있던 안서(쿠차)를 출발하여 소륵(疏勒·카슈가르)을 거쳐 파미르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총령수착(蔥嶺守捉·타쉬쿠르간)을 지났다. 거기서 20일을 진군하여 파미르강에 이르렀고, 20일을 더 행군하여 오식닉(五識匿·시그난)이라는 곳에 도달했다. 그로부터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호밀(護密·와한) 계곡을 거쳐 연운보(連運堡)를 공략했는데, 이곳은 지형이 험난하고 1만명에 가까운 토번의 병력이 수비하고 있는 데다가 요새 아래로 흐르는 파륵천(婆勒川)의 강물까지 불어서 도저히 접근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고선지는 희생물을 잡아서 강에 제사를 올리고 병사에게는 3일치 식량만 챙기게 한 뒤 도하를 지시했다. 장병들은 모두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강을 건너고 보니 “사람이 든 깃발도, 말의 안장도 젖지 않은 채” 온전하게 맞은편에 도착했던 것이다. 고선지는 “하늘이 이 반도의 무리를 우리 손에 넘겨준 것”이라고 선포하며 산을 올라 공격을 개시했고, 마침내 5000명을 죽이고 1000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고선지는 여기서 더 전진하여 토번의 영향 아래 있던 소발율(小勃律·길기트)에 대한 원정을 강행했다. 그러나 부장이었던 변령성(邊令誠)을 위시하여 더 이상의 행군을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다. 고선지는 변령성에게 3000명의 병사와 함께 연운보를 지키라고 남겨놓은 뒤, 자신은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탄구령(坦駒嶺·다르코트)이라는 곳에 도달했다. 4575m 고도를 자랑하는 이 고개에 올라선 병사들의 눈 밑으로는 깎아지른 절벽처럼 가파른 하행길이 40리나 뻗쳐있었고, 가슴이 내려앉은 병사들은 하산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주간조선 : [1965호] 2007.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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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10)] 이슬람 세력의 동진과 중앙아시아의 운명

8세기 중앙아시아, 아랍과 첨예대치
100년 ‘피의 역사’끝에 이슬람에 굴복
베두인 유목민 통합한 아랍군, 페르시아 점령하고 동방경략부 설치
소그드 지방 평정하며 북상… 모스크 짓고 우상숭배 배척
아랍, 튀르기스 이어 신흥강국 토번, 당과도 패권 다툼
탈라스전투 이후 파미르고원 서쪽 이슬람 급속 확산

▲ 무그산성에서 출토된 기마병사상. 방패의 일부분이다.
1220년 3월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군대가 당시 중앙아시아 최대의 도시라고 할 수 있는 사마르칸트를 포위했다. 도시를 둘러싼 견고한 성벽, 그 주위를 흐르는 강과 해자(垓字·성 주위에 둘러 판 못), 그리고 11만명이라는 막대한 수비병력. 그러나 포위가 시작된 지 불과 며칠 만에 도시는 함락되고 말았다. 몽골군은 다른 도시에서 그러했듯이 며칠간 약탈을 자행했고 다시는 저항하지 못하도록 성벽을 파괴했으며, 귀족과 군인 수만 명을 들판으로 끌고 나가 처형했다. 이렇게 해서 2000년 이상 명성을 떨치며 번영을 구가하던 고대도시 사마르칸트는 지상에서 사라져버렸다. 주민은 폐허로 변해버린 구도시의 남쪽에 새로운 터전을 만들어 살기 시작했고 그것이 오늘날의 사마르칸트가 되었다. 주민은 둔덕으로 변해버린 폐허를 ‘아프라시압(Afrasiyab)의 언덕’이라 불렀는데, 아프라시압은 이란 민족의 전설 속에 나오는 투란(Turan)이라는 북방민족 왕의 이름이었다.

아무튼 칭기즈칸에 의해 지상에서 사라지고 나서 600년이 지난 뒤인 1913년 러시아의 한 학자가 아프라시압 언덕을 조사하여 벽화 몇 점을 찾아냈다.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된 것은 1965년부터였다. 이때 비로소 삼중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구조가 드러나고, 도시 중심부에 있던 궁전과 큰 규모의 가옥이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궁전 내부에서는 가로·세로가 각각 11m에 이르는 넓은 홀과 사방 벽면에 그려진 벽화가 발견되었다. 입구에 들어서서 맞은편에 있는 서면에는 왕의 즉위식 장면이 그려져 있었고, 남면에는 시집을 오는 외국의 공주와 그 일행의 모습이, 북면에는 수렵하는 장면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면에는 먼 지역의 생활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즉위식의 주인공은 벽화에 보이는 명문(銘文)을 통해서 바르고만(Vargoman)임이 확인되었다. ‘신당서 서역전’에 의하면 고종 영휘(永徽) 연간, 즉 650~ 655년에 강국(康國)에 강거(康居)도독부를 설치하고 불호만(拂呼 )이라는 인물을 도독으로 임명했다는 글이 보이는데, 이 불호만이 바르고만과 동일인물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궁정의 홀 입구 맞은편, 즉 서쪽면의 벽에 보이는 그림이다. 즉위식을 묘사한 이 장면에는 주변의 도시나 외국에서 축하차 보내온 사신단의 모습이 보이는데, 놀랍게도 거기에는 한반도에서 간 사신 두 사람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새의 깃털을 꽂은 모자(鳥羽冠)를 쓰고 두 손을 소매에 넣은 공수(拱手)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허리에는 손잡이 끝이 둥근 고리모양을 한 환두대도(環頭大刀)를 차고 있는 모습을 보면 이들이 한반도에서 간 사람임은 분명하다. 물론 고구려·신라·백제 삼국 가운데 어느 나라에서 갔느냐에 대해서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나 대체로 고구려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고, 당나라의 압박을 받던 고구려가 외국의 연맹세력을 구하기 위해 멀리 사마르칸트까지 사신을 파견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아무튼 한반도의 사신과 관련된 다른 문헌자료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자세한 사정을 알 수는 없으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고구려의 지도층이 수천㎞ 떨어진 곳에 있는 사마르칸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물론 당시 소그드 상인이 중앙유라시아 각지를 무대로 교역활동을 하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프라시압, 판지켄트(Panjkent), 바락샤(Varakhsha) 등지에서 발굴된 유적을 통해서 우리는 소그드인이 국제무역으로 축적된 재화로 궁전과 사원을 건설했고, 거리에는 2~3층의 가옥이 즐비할 정도로 고도로 발달된 도시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번영을 구가하던 바로 그때 서방에서 새로운 세력이 출현했으니 그것이 바로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기치로 내세운 아랍인이었다.


예언자 무하마드에 의해 창시된 계시적 종교 이슬람은 그때까지 부족단위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고 약탈을 계속하던 아랍의 베두인 유목민을 통합했을 뿐만 아니라, 그 통합된 힘을 집결시켜 외부로 폭발시키는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632년 무하마드가 사망하고 나서 불과 2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아랍군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그리고 이집트 지방에서 비잔틴 제국의 세력을 밀어냈으며, 동방으로는 중동 최대의 강국인 사산조 페르시아를 압박해 들어갔다. 고향을 떠나 정복전에 참여한 아랍 베두인은 낙타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정복한 도시 안에 들어가지 않고 사막의 변두리에 집단캠프를 치고 거주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군영(軍營)이 후일 대도시로 발전해 갔으니, 오늘날 이라크의 쿠파(Kufa)나 바스라(Basra), 이집트의 카이로(Cairo)와 같은 곳이 대표적 예다.

주간조선 [1966호] 2007.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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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라스 전투

 

 
연도 751년 7월 10일
저자 존 헤이우드

아랍의 승리가 중앙아시아에서 중국(당나라)의 팽창 계획을 막는다.

아랍인이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중국인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면서, 이슬람은 중앙아시아의 지배적인 종교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사건은 중국의 중앙아시아 제국의 붕괴를 가속화했다.

태종 때(628~649년), 중국은 중앙아시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목적은 중국과 중동, 지중해 연안을 연결하는 실크로드를 지배하기 위해서였다. 8세기에 중국은 힌두쿠시 산맥까지 뻗친 1,610㎞ 가량의 지역을 정복했다. 그러나 새로이 이슬람화된 아랍인도 나름의 확장 계획을 품고 있었고, 710년 그들은 커다란 캐러밴 도시 부카라와 사마르칸트를 점령했다.

750년, 고선지()가 이끄는 중국군이 타슈켄트를 점령하고 투르크인 군주를 처형했다. 왕의 아들은 중국군을 몰아내기 위해 아랍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751년 4만 명의 아랍-투르크 군대가 중국 영토로 진격했으며, 오늘날의 키르기스스탄에 있는 탈라스 강에서 고선지의 군대와 맞섰다. 중국군은 주로 보병이었으며 아랍-투르크 기병에 허를 찔렸다. 겨우 몇 천 명의 중국 군사만이 탈출했다.


이 전투 이후, 중국 포로들이 사마르칸트에서 강제 노역에 처해 제지 공장을 지었고, 이 공장에서는 중국이 비밀로 지켜왔던 종이 제작법을 이용했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가 정말인지는 의심스럽지만, 종이 사용이 이슬람 세계에 전파된 것은 이 무렵이었고, 이후 13세기에 유럽으로 전달된다.

"(아랍) 남자들은 코가 높고, 피부가 검고, 수염이 났다. 여자들은 피부가 매우 희다."
두환(, 탈라스에서 포로로 잡힘), 『경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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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11)] 이슬람 세계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투르크 유목민

이슬람 노예로 팔려온 투르크족
이슬람 제국 주인으로 세계사 호령
가즈나 왕국 세우고 세속군주 뜻하는‘술탄’ 칭호 첫 사용
뒤이은 셀주크 부족 바그다드 점령하고 비잔틴까지 휩쓸어
15세기 아나톨리아 투르크족 중심, 오스만 세력 급부상
콘스탄티노플 시작으로 아시아·유럽·아프리카 휩쓴 대제국 세우며 세계사 뒤흔들어

▲ ‘제왕의 서’에 나오는 삽화. 바흐람 구르가 용을 사냥하는 장면. 14세기 작품. 이스탄불 톱카프박물관 소장
과거 중국인의 세계관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화이지분(華夷之分)’이라 할 수 있다. 즉 세계는 문명의 ‘중화’와 야만의 ‘이적’이 거주하는 권역으로 나뉘어 있고, 역사는 이 두 세계가 충돌하고 갈등하면서 종국적으로 중화의 승리가 성취되어 가는 과정으로 이해되었다. 물론 고대 그리스인도 이와 유사한 문명과 야만의 이항대립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고대 중국과 그리스의 세계관에 보이는 ‘야만인’은 분명히 달랐다. 중국의 경우 방위에 따라 이름을 달리 붙여서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 불렀지만 중화의 문명에 대한 심각하고 현실적인 위협은 뭐니뭐니 해도 북방의 유목민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대 중국인의 이러한 ‘화이지분’과 매우 흡사한 세계관이 바로 이란인에게서 발견된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그들은 자신의 역사가 ‘이란(Iran)’과 ‘투란(Turan)’의 대결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란이 중화와 같은 문명세계의 표상이라면 투란은 이적(夷狄)과 같은 야만의 유목세계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세계관과 역사관이 잘 드러난 ‘제왕(帝王)의 서(書)’라는 책이 있다. 이것은 11세기 초두에 피르다우시(Firdawsi)라는 시인이 이란인 사이에 전설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영웅들의 이야기와 역사상 실제로 출현했던 제왕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하여 운문으로 만든 장편시이며, 지금까지 이란 민족이 자랑하는 민족의 대서사시이기도 하다.


그런데 중국과 이란 두 민족이 이처럼 유사한 세계관을 갖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중국인이 만리장성 너머에 있던 투르크·몽골계 유목민과 대결해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란인 역시 아무다리아강 너머에 있던 유목민과 힘든 싸움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싸움의 결과는 전설 속 이야기와는 달리 농경민족인 이란 영웅들의 화려한 승리로 점철된 것은 아니었다. 고대 페르시아의 제왕 캄비세스를 전투에서 패사시킨 마사게태족, 알렉산더와 그 후계자들을 괴롭힌 사카족과 쿠샨족, 사산조(朝)의 후방을 유린한 헤프탈족 등은 중국의 한나라나 당나라와 대결했던 흉노와 돌궐·위구르 못지않게 무서운 상대였다. 11세기 초에 쓰여진 ‘제왕의 서’에서 ‘이란’과 숙명적 대결을 벌이는 ‘투란’, 즉 투르크인은 오랫동안 이란인의 세계를 엄습하던 북방의 유목민족 가운데 가장 최후에 등장한 민족이었다.

투르크인이 이란의 변경지역을 압박하며 남하하기 시작한 것은 9세기 후반부터였는데, 투르크인의 진출은 서아시아를 지배하던 이슬람 칼리프 정권의 지배력이 약화되는 것과 시기적으로 맞물려 있었다. 당시 바그다드를 수도로 극도의 번영을 구가하던 압바스조(朝)는 9세기 중반을 정점으로 급격하게 내리막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천일야화(아라비안 나이트)’에 등장하는 칼리프의 화려한 궁정은 하룬 알 라시드(786~809년) 시대의 번영을 배경으로 했다고 하는데, 그가 사망한 뒤 제국의 동부와 서부를 나누어 통치하던 두 아들 사이에 벌어진 암투는 칼리프의 위상에 치명적 타격을 가져다 주었다. 아랍인의 충성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 칼리프들은 ‘맘룩(mamluk)’이라 불리는 노예를 모집하여 자신의 친위부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래 이슬람에서는 같은 종교를 가진 신도를 노예로 삼는 것을 금지하거나 억제했기 때문에, 이슬람권 바깥에서 노예를 들여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 같은 노예의 공급지역으로는 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가 있었고 거기서 노예가 유입되었다. 특히 중앙아시아 초원지역에서 유입된 투르크 유목민 출신의 노예는 기마와 궁술에 뛰어나 탁월한 전투능력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부족의 질서와 규범이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에 주군에 대한 충성과 헌신도 널리 인정 받았다.

귀족과 고관의 수요를 충족시켜주기 위하여 중앙아시아의 부하라 같은 도시에는 상설 노예시장이 열리게 되었다. 또한 붙잡혀온 투르크인을 그냥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아랍어를 가르치고 예의범절도 익히게 하여 상품가치를 높인 뒤 시장에 내놓았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이슬람으로 개종했지만 그렇다고 노예 신분에서 즉각 해방되지는 못했다. 아무튼 시간이 흐르면서 이슬람권으로 유입된 투르크인의 수는 점점 늘어났고, 특히 바그다드의 칼리프 궁정에서는 그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에 이르렀다.

1072년 최초의 투르크어 사전이 바그다드에서 편찬된 데도 바로 이러한 배경이 있다. 현재 신장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도시인 카쉬가르 출신의 마흐무드(Mahmud Kashghari)는 중앙아시아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투르크 부족민을 방문해서 그들이 사용하는 다양한 방언을 수집하여 ‘투르크어 사전(Divan Lughat at-Turk)’을 편찬하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사전에 나오는 많은 단어와 속담을 아랍어로 설명하였고 완성한 뒤에 칼리프에게 헌정한 것이다. 이 같은 사전을 편찬한 것은 바그다드의 칼리프 궁정에 점점 더 많은 투르크인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그들의 언어를 알아야 할 필요성이 생긴 이유에서 비롯됐다.

주간조선 [1967호] 2007.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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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12)] 중화 질서의 붕괴와 다원체제의 동아시아

당 멸망 후 수세 몰린 중국 ‘中華’ 포기
거란·여진 등에 조공 바치며 ‘평화’ 얻어
송나라, 신흥세력 거란과 굴욕적 ‘전연의 맹’ 맺고 형제 인정
거란 멸망시키고 급성장한 여진엔 ‘신하의 예’ 맹세까지

당 이후 오대십국, 요, 송, 금, 고려
각각 ‘中華’ 자처
몽골 등장 이전까지
유라시아 동부, 다원체제로

▲ 거란인이 말을 끌고 가는 모습의 벽화. 내몽골 적봉시 출토.
오늘날 외국인들이 ‘중국’을 칭할 때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단어는 ‘차이나(China)’이다. 물론 이 말이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 이름인 진(秦·Chin)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그런데 과거에 ‘차이나’만큼이나 널리 사용되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또 다른 중국 명칭이 있는데, 바로 ‘키타이(Kitai)’가 그것이다. 러시아나 중앙아시아의 주민들은 아직도 중국을 ‘키타이’라고 부르고 있고, 대만의 항공사 이름인 캐세이퍼시픽(Cathay Pacific)의 Cathay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이 ‘키타이’라는 말은 사실 북방 유목민족의 명칭인 거란(契丹)을 옮긴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거란’이라고 읽고 있지만, 원래 이 민족의 이름은 ‘키탄(Qitan)’ 혹은 ‘키타이(Qitai)’로 발음되었고, 중국사에서는 요(遼)라는 나라를 세운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서 한족(漢族)도 아닌 북방민족 거란이 중국을 부르는 명칭이 된 것일까. 그것은 당제국의 멸망으로 인하여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가 붕괴된 것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흔히 ‘개원(開元)의 치(治)’라고 회자되는 당나라 현종 대(代)의 영화는 숨을 거두기 직전에 잠시 정신이 반짝 맑아지는 것과 같은 현상이었다. 몽골 초원을 질주하던 돌궐 유목민들의 무릎을 꿇게 한 뒤 중앙아시아를 거머쥐고, 나아가 동방의 일대 세력인 고구려까지 넘어뜨려 한반도를 넘보던 당제국의 위용은 태종(626~649년)과 고종(650~683년)의 시대를 뒤로 하면서 서서히 빛을 잃고 있었다. 측천무후는 천하를 호령하던 일대의 여걸이었음이 분명하지만 고비사막 북방에서 재흥하여 맹위를 떨치던 돌궐제국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현종의 긴 치세(712~756년)는 백성들에게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주었지만, 후일 중국의 고질적인 문제가 되는 절도사(節度使)라는 군벌집단이 등장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양귀비의 최후를 재촉한 안록산의 반란은 현종대의 태평의 실체가 무엇인지 여지없이 드러내준 사건이었다.


안록산과 사사명이 주도했던 반란(755~763년)은 위구르와 같은 외부 지원군에 의해서 간신히 진압되었지만, 8세기 후반부터 당제국은 태종대의 위용도 현종대의 영화도 상실한 채 일종의 관성의 힘으로 생존을 지속하는 범용한 왕조로 변모하고 말았다. 그 관성의 힘도 875년이 되면서 소금 밀매업자인 황소(黃巢)와 왕선지(王仙芝)의 반란으로 끊어지고 말았지만, 그래도 왕조의 잔명은 904년 마지막 황제가 주전충(朱全忠)에 의해 살해될 때까지 30년이나 더 지속되었다. 중국사에서는 이때부터 960년 조광윤(趙匡胤)이 송(宋)나라를 건국할 때까지 약 반세기를 가리켜 ‘오대십국(五代十國)’이라 부른다. 이것은 화북 지방에 양(梁)·당(唐)·진(晉)·한(漢)·주(周)라는 다섯 개의 왕조가 교대로 흥망하고, 이와 동시에 사천과 남부 지역에 10개의 군소 왕국들이 병립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대단한 혼란기임에는 틀림없지만 한나라가 무너진 뒤 찾아온 남북조 시대에 비하면 분열의 기간은 훨씬 짧았고, 반세기 만에 송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중화의 질서를 되찾은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상은 중국 중심의 왕조사관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황소의 반란군이 낙양과 장안을 함락했을 때 사천으로 ‘몽진(蒙塵)’을 떠난 당나라 황제는 당시 하동(河東)절도사였던 이극용(李克用)이라는 인물에게 진압을 부탁했다. 그는 휘하 군대를 이끌고 883년에는 산서 지방에서 남하하여 장안을 탈환하였다. 그러자 황실은 그를 견제하기 위해 반란군의 항장(降將)인 주전충을 변주(?州), 즉 개봉의 절도사로 임명하였고, 화북의 패권을 두고 두 사람은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주전충과 라이벌 관계에 있던 이극용은 908년 사망할 때 아들 이존욱(李存)에게 ‘세 개의 화살’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하나는 유주(幽州·현재의 베이징)의 절도사인 유인공(劉仁恭), 하나는 거란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또 하나는 후량의 주전충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셋을 반드시 멸하라는 유촉이었다. 이존욱은 부친의 유언대로 유주를 함락하고 후량도 멸하여 923년에는 당나라의 정통을 잇는다는 뜻에서 ‘당(唐)’이라는 왕조를 칭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북방의 신흥세력인 거란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거란인 도금마스크. 내몽골 출토.
거란은 원래 요하(遼河)의 상류인 시라무렌(潢河) 유역에서 유목하던 몽골 계통의 부족이다. 630년경 당 태종이 돌궐을 무너뜨린 뒤 거란족을 통제하기 위해 송막도독부(松漠都督府)라는 것을 두었는데 7세기 말 돌궐의 재흥과 함께 정세는 급변하였다. 황실로부터 이씨 성을 사여 받고 송막도독에 임명되었던 이진충(李盡忠)은 스스로 무상가한(無上可汗), 즉 ‘지고한 카간’이라고 칭하며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물론 이것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꿈은 200년이 지난 뒤 야율아보기에 의한 거란제국의 출현으로 실현되었다.

학자들의 추정에 의하면 거란족은 말(馬)을 토템으로 하는 씨족과 소(牛)를 토템으로 하는 씨족으로 이루어졌고, 전자는 ‘야율(耶律)’씨로 후자는 ‘소(蕭)’씨로 불렸으며, 상호 혼인으로 결합되었다. 따라서 ‘야율아보기’란 말씨족 출신으로 아보기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을 뜻한다. 후일 지어진 이야기이겠지만 그의 어머니가 태양이 뱃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출생했으며, 9척 장신의 거구에 300근짜리 활을 당기는 괴력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주간조선 ; [1968호] 2007.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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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13)] 칭기즈칸과 몽골 세계제국의 등장

동·서양 쥐고흔든 첫 세계제국 출현
칭기즈칸, 1206년 몽골 유목민 통일하고 초원 밖으로
교역 위한 원정전쟁이 세계 정복전쟁으로 확대
후계자 우구데이- 뭉케- 쿠빌라이로 이어지며
유라시아 대륙과 해상까지 휩쓸고 세계역사 바꿔

▲ 칭기즈칸 청동상(像) (photo 조선일보 DB)
몽골제국의 출현은 세계 역사상 대단히 경이로운 현상이다. 유럽의 한 역사가는 “사냥과 목축으로 살아가던 미개하고 가난하며 수적으로도 얼마 되지 않던 민족이 어떻게 해서 무한한 인적 자원을 갖고 있던 아시아의 강력한 문명국가들을 정복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

물론 당시 몽골인이 그렇게 ‘미개’했는가 하는 문제는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적으로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1206년 칭기즈칸이 몽골 초원을 통일하고 대집회(쿠릴타이)를 열어 ‘몽골국(Mongol Ulus)’의 탄생을 선포했을 때, 휘하에 들어온 유목민을 모두 천호(千戶)로 편성하였는데 그 총수는 95개였다. 만약 1호를 평균 5명으로 계산한다면 당시 칭기즈칸이 지휘한 몽골인은 남녀노소 다 합해봐야 50만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같은 시기 중국의 인구는 북쪽의 금나라와 남쪽의 송나라를 모두 합해서 이미 1억명을 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단순한 산술적 계산으로도 1 대 200이라는 비율이 나오는데, 1당 100이 아니라 1당 200의 기적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먼저 그들의 출현을 목격하고 그들과 싸우면서 그 힘을 실감한 당대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의문을 가졌음에 틀림없다. 우선 갑작스럽게 출현한 이들이 지닌 여러 가지 특징, 과거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던 미지의 집단이라는 신비성, 전쟁 시 적에게 가하는 엄청난 파괴력, 그와 함께 수반되는 잔인함…. 몽골의 또 다른 명칭이었던 ‘타타르(達·Tatar)’가 라틴어에서 ‘지옥’을 뜻하는 ‘타르타르(Tartar)’와 비슷한 발음이었기 때문에 유럽인에게는 그 이름 자체가 이미 지옥의 사자, 악의 화신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했다. 혹은 신이 인간의 타락을 징벌하기 위해서 보낸 도구, 즉 일찍이 훈족의 아틸라를 가리켜 부르던 ‘신의 채찍(Flagellum Dei)’이 다시 나타난 것처럼 여기기도 했다.


물론 오늘날의 학자들이 이러한 관점에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몽골 세계제국의 출현을 설명함에 곤혹스러움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여러 가지 가설이 제시되었다. 우선 ‘기마전술의 탁월함’이 꼽힌다. 총과 화약이 널리 사용되기 전에는 기마전이 가장 신속하고 위력 있는 공격방법이었고, 다른 누구보다 유목민이 그것을 잘 수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는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즉 ‘어찌해서 그 전에는 그러한 대대적인 정복이 일어나지 않았는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몽골 지도층의 탁월한 능력, 특히 칭기즈칸의 리더십에 대한 강조이다. 그는 부하들을 포용하고 그들로부터 헌신적인 봉사를 이끌어내는 탁월한 인간적 친화력, 군대를 조직하고 규율을 부여하며 실전에서 치밀한 작전을 통해 전쟁을 승리로 끌고 가는 전략적 능력까지 갖춘 인물로 평가되었다. 말하자면 ‘야만의 어둠’을 뚫고 빛나는 탁월한 ‘천재성’인 셈이다.

그러나 칭기즈칸의 역할을 과도하게 평가하는 것은 조심해야 할 일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된 한 책의 저자는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다. “칭기즈칸의 업적을 미국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자무식의 노예가 오로지 자신의 탁월한 개성과 카리스마와 결단력을 바탕으로 북미 대륙을 외국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고 미합중국을 창건했으며, 알파벳 문자를 창제하고 헌법을 기초했고, 보편적인 종교의 자유를 실현하고 새로운 방식의 전쟁술을 도입했으며, 군대를 이끌고 캐나다에서 브라질까지 진군했고,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포괄하는 자유무역지대를 만들어 교역을 활성화시켰다.” 이 같은 단정은 전형적인 영웅사관의 발로가 아닐 수 없으며 많은 사람의 동의를 쉽게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칭기즈칸에 대해 우리가 갖는 대표적 오해의 하나는 그가 ‘세계정복자’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세계를 정복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초원의 유목민으로 태어났으며 유목민으로 죽었다. 그의 세계관 속에서 초원이 아닌 다른 지역은 부차적인 의미밖에 없었고 그런 곳을 지배하고 호령할 생각도 별로 없었다. 아직 그의 정확한 출생연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1227년에 사망한 것은 확실하며 대략 65세 전후가 아니었나 추측된다.

주간조선 [1969호] 2007.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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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14)] 팍스 몽골리카의 성립과 동서 문화교류의 확대

팍스 몽골리카의 동맥은 말(馬)을 이용한 글로벌 네트워크

13~14세기 인류 역사 최대의 동서남북 교류 이뤄져
상인 우대정책 펴고 자본출자 등 국제무역 적극 지원
아랍 상인도 맹활약… 한반도까지 오가며 교역활동

종교인 관용정책 힘입어 선교활동 활발… 중국에 기독교 확산
마르코 폴로·이븐 바투타 등 여행가들 잇달아 여행기 남겨

▲ 내몽골에서 발견된 패자. 패자를 제시하면 역참에서 음식 등을 서비스 받을 수 있었다.
몽골세계제국은 결코 많은 사람의 축복과 환호 속에서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 전투에 동원된 병사들이 사망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전쟁과 무관한 수많은 민간인이 살육되었다. 당시 중국 측 문헌에는 ‘도성(屠城)’이라는 표현이 자주 보이는데, 그것은 문자 그대로 도시와 그 주민을 도륙하는 것이다.

사정은 중동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앙아시아에서 서아시아로 연결되는 실크로드 연도에 위치해 번영하던 도시들은 몽골군이 몰고 온 파괴의 바람을 정면으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니샤푸르에서는 170만명이 죽음을 당했고, 메르브에서는 100만명 정도, 발흐에서는 70만명 정도가 도살되었다는 이슬람 측 기록이 과장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사실 무근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글로 옮기기에도 잔혹한 일화가 수없이 전해지고 있는데, 일부 학자의 해석에 따르면 몽골군이 적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심리전’을 활용한 결과라고 한다.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에서 묘사한 역참

“각 지방으로 가는 주요 도로변에 25마일이나 30마일마다 이 역참이 설치되어 있다. 이 역참에서 전령은 명령을 기다리며 대기 중인 삼사백 마리의 말을 볼 수 있다. (중략) 이러한 방식으로 대군주의 전령은 온 사방으로 파견되며, 그들은 하루 거리마다 숙박소와 말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정말로 지상의 어떤 사람, 어떤 국왕, 어떤 황제도 느낄 수 없는 최대의 자부심과 최상의 웅장함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분은 그가 이들 역참에 특별히 자신의 전령이 쓸 수 있도록 20만 마리 이상의 말을 배치해 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내가 말했듯이 멋진 가구들이 갖추어진 숙사도 1만곳 이상에 이른다.”


시간이 흐르면서 제국의 위용이 갖추어져 갔고 몽골인도 도시와 사람을 무절제하게 파괴하는 것이 결코 이로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그들이 수행한 전쟁이 다른 시대, 다른 민족이 벌인 전쟁에 비해 특별히 더 잔인하다고 할 것도 없게 되었다.


예를 들어 쿠빌라이가 보낸 원정군이 남송의 수도 항주를 함락할 때에는 문자 그대로 무혈입성이었고, 점령한 뒤 아무런 파괴도 살육도 일어나지 않았다. 절대로 주민을 죽이지 말고 도시의 건물을 파괴하지도 말라는 쿠빌라이의 엄격한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몽골인도 드디어 인간과 도시의 가치를 알게 되었고, 그것이 자신들이 건설하고 있는 제국에 중요한 자산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몽골제국은 유라시아 대륙의 거의 대부분을 지배하면서 문명의 파괴자가 아니라 보호자로 역할을 선회하기 시작했고, 이로써 소위 학자들이 말하는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팍스 몽골리카는 ‘몽골의 평화’라는 뜻으로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는 말을 원용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 같은 명칭을 사용하는 까닭이 몽골제국시대에 전쟁이 종식되고 정치적 평화를 구가했기 때문은 아니다. 몽골이 유라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전반에도 크고 작은 전쟁이 제국의 내부에서 몽골인끼리 혹은 제국의 변경에서 다른 국가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다. 팍스 몽골리카는 13~14세기 몽골인 주도하의 유라시아 국제질서, 즉 각 지역 간 교류와 대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그 결과 각 문명 상호 간 이해의 폭이 비약적으로 넓어진 결과를 낳게 한, 그러한 정치질서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몽골제국이 표방한 이념과 정책은 동서 간 인적·물적 교류의 진작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 예로 역참제(驛站制)를 들 수 있다. 몽골인이 ‘잠(jam)’이라고 부르던 역참은 제국 전역을 연결하는 조밀하고 광역적인 교통의 네트워크였다. 물론 몽골인이 이러한 역참제를 처음 실시한 것은 아니지만 그 중요성이 특별히 강조되었고, 현대 중국어에서 ‘역, 정거장’을 뜻하는 ‘짠(站)’이라는 단어가 몽골어 ‘잠’에서 유래한 것도 이 같은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13세기 페르시아의 역사가 주베이니(Juvayni)가 저술한 ‘세계정복자의 역사’라는 책에는 이미 칭기즈칸의 시대에 정보와 물자의 원활한 전달을 위해서 역참을 설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계승자인 우구데이의 치세에는 영토가 더욱 확장되면서 수도 카라코룸과 원근 각지를 연결하는 역참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다. 그래서 그는 북중국에서 카라코룸에 이르는 역도에 70리마다 역참을 하나씩 두어 모두 37개의 참을 두었으며, 다시 카라코룸에서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지방으로 연결되는 역참을 설치했다. 그는 자신이 자부하는 치적 네 가지 가운데 하나로 이 역참제의 확대를 꼽을 정도였다.

몽골 지배하의 중국에서 역참제는 더욱 발전하게 된다. 수도 대도(大都·현 베이징)를 중심으로 사통팔달의 역도가 전국을 연결했고, 동으로는 고려와 만주, 서로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이란과 러시아에 이르는 교통로상에 역참을 두었으며, 남쪽으로는 안남과 버마로까지 연결되었다. 당시 중국에 있던 역참만 1500군데라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마르코 폴로 역시 페르시아·투르크인의 발음에 따라 ‘얌(iamb)’이라고 불린 역참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역참은 내륙의 교통로에만 설치된 것이 아니었다. 중국의 강남지방이나 해안지방에는 수참(水站)과 해참(海站)을 둬 말이나 수레가 아니라 선박을 비치했으며, 북방의 추운 지방에는 구참(狗站)을 설치해 눈썰매와 그것을 끄는 개가 준비되었다.

주간조선 [1970호] 2007.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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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16)] 몽골제국이 남긴 최대 유산은 세계사의 탄생

동·서양이 비로소 세계사에 눈을 뜨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신세계 소개하며 유럽인 세계관 바꿔
몽골은 14세기 초에 인류 최초의 세계사 책인 ‘집사’ 펴내기도
‘동방견문록’에 심취한 콜럼버스, 인도 찾다 신대륙 발견
1402년 조선시대 지도에 아프리카 처음 등장

▲ 콜럼버스의 기함 산타마리아호(모형).
1324년 마르코 폴로가 고향 베네치아(영어명 베니스)에서 숨을 거둘 때 그의 임종을 지켜보기 위해 모인 친구들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이제까지 한 이야기들 가운데 진실된 것이 얼마나 있겠는가? 잘못하면 죽어서 지옥에 갈지도 모르니 어서 회개하게나!” 그러나 마르코 폴로의 대답은 단호했다. “나는 이제껏 내가 본 것 가운데 아직 반도 다 이야기하지 못했어.” 사실 마르코 폴로의 별명은 ‘백만’을 뜻하는 ‘일 밀리오네(I l Milione)’였다. 이것은 그가 백만장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입만 벌리면 ‘백만, 백만’했기 때문에, 말하자면 ‘허풍쟁이, 떠벌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불린 것이다. 그가 남긴 ‘동방견문록’에는 이처럼 사실과는 거리가 먼 과장이나 환상적으로 꾸며진 이야기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자료들을 꼼꼼하게 비교연구한 학자들은 그가 말한 내용의 대부분이 정확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13세기 후반 중국인의 생활상을 복원하는 데 긴요한 자료로 사용하고 있다. 그의 임종 때 일화는 역설적이긴 하지만 중세 유럽인들이 유럽 이외의 바깥세상에 대해 그만큼 무지했다는 점을 방증해주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13~14세기 유럽인의 세계관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은 역할을 한 것이다.

베네치아 출신의 상인으로 콘스탄티노플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니콜로 폴로와 마페오 폴로라는 형제, 그리고 니콜로의 아들 마르코는 몽골 지배하의 동아시아를 방문해 그곳에서 무려 17년간 머물다가 다시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마르코 폴로는 그 뒤 지중해의 패권을 둘러싸고 베네치아와 제노바(영어명 제노아) 사이에 벌어진 해전에 참가했다가 포로로 잡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피사 출신의 작가 루스티켈로를 만나 자신이 세계 각지를 다니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구술해서 완성한 것이 ‘동방견문록’인 것이다.
이 책은 원래 이탈리아 방언이 강하게 섞인 프랑스어로 쓰였으며 원제목은 ‘세계의 서술(Divisament dou Monde)’이었다. 그런데 서구와 미국에서는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라고 부르고 일본에서는 ‘동방견문록’이라 칭하였는데, 우리는 일본식 명칭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실제로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글은 마르코 폴로의 여행에 기초했으면서도 서술의 순서나 체재를 보면 결코 ‘여행기’나 ‘견문록’이라고 하기 어렵고, 유럽과 지중해 연안을 제외한 나머지 ‘세계’에 대한 ‘체계적 서술’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원래 제목인 ‘세계의 서술’은 책의 내용과 성격을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몽골제국의 마지막 법전인‘지정조격’(단례 부분).
유럽에서 ‘동방견문록’은 성경 다음 가는 베스트셀러였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그의 글이 남긴 영향은 정말로 지대하였다. 그의 글에 묘사된 ‘카타이(Cathay)’라는 나라는 유럽인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그곳은 온갖 재화와 물산이 넘쳐나고 위대한 군주 쿠빌라이가 지배하는 무한히 넓은 왕국이었고 캄발룩(Cambaluc·대도·베이징), 자나두(Xanadu·상도·원나라의 여름 수도·현 네이멍구자치구 소재), 자이툰(Zaitun·천주·푸젠성 소재)과 같은 도시는 이탈리아 상인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 뒤 수많은 상인과 선교사가 ‘카타이’를 찾으러 나섰는데,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콜럼버스였다. 그는 평소 마르코 폴로의 글을 접하고 읽으면서 흥미로운 대목이 있으면 그 옆에 특별히 메모를 남길 정도로 탐독했다. 마르코 폴로는 몽골의 대칸이 지배하는 영역이 대인도, 중인도, 소인도 등 ‘세 개의 인도’로 되어 있다고 기록하였다. 그래서 콜럼버스는 페르디난드 국왕과 이사벨라 여왕의 친서를 받아 1492년 이 ‘인도’를 향해 출항한 것이다.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은 콜럼버스의 ‘인도’가 우리의 ‘인도’와는 완전히 다른 실체였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아무튼 그가 휴대한 친서의 수신인은 ‘인도’를 지배하는 몽골의 ‘그랑 칸’, 즉 ‘위대한 칸’이었다. 그는 자기가 기착한 곳이 대칸이 통치하는 대륙에서 아주 가까운 섬이며, 근처에는 은이 풍부한 나라로 묘사된 ‘지팡구’, 즉 일본이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르코 폴로의 글이 유럽인의 지리 지식과 세계관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 1375년 지중해 서부의 마요르카(Mallorca)라는 섬에서 제작된 카탈루니아 지도(Catalan Atlas)로, 이것은 유럽 최초의 ‘근대적’ 지도로 유명하다. 이 지도에는 ‘동방견문록’에 의해 처음 알려지게 된 지명들이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지도의 원래 제목이 라틴어로 ‘세계의 지도(Mapa Mondi)’라 붙여진 것도 ‘동방견문록’의 원제목인 ‘세계의 서술’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모두 8장으로 이루어진 이 지도는 동방 세계에 4장을 할애하였다. 동방 세계에 대한 유럽인의 지리 지식이 얼마나 풍부해지고 사실적이 되었는가 하는 것은 이제까지 기독교적 세계관에 근거한 소위 ‘OT지도’라는 중세적 지도와 비교해보면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처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에서 카탈루니아 지도 제작에 이르기까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남긴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고 할 수있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바로 ‘동방견문록’과 같은 책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몽골제국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유라시아 여러 지역 간 교류가 활성화되고 미증유의 문화적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런 현상들은 애당초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팍스 몽골리카’, 즉 몽골의 세계 지배가 없었다면 유럽의 근대가 없었을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상당히 지체되었거나 혹은 유럽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유럽이 한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자기가 속해 있는 지역과 문화의 협소함을 극복하고 세계 전체를 시야에 넣는 넓은 관점을 획득한 것이 유럽인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간조선 ; [1972호] 2007.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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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17)] 유럽 문명 짓밟은 ‘정복자’ 티무르 사마르칸트를 ‘세계문명의 중심’으로

촌락에 이슬람 최대도시인 ‘카이로’‘바그다드’이름 붙이고
‘비비 하늠’모스크 등 거대한 건축물 건설, 이슬람 최고 문화도시로

북쪽의 우즈베크, 서쪽의 이란‘사바피’에 밀려 동남쪽으로
후예 바부르, 인도 정복하고 무굴제국 창건 고도의 문명 이어가

▲ 티무르의 사마르칸트 입성 장면.
‘칭기즈칸’이라는 이름에 비해 ‘티무르’라는 이름은 썩 널리 알려져 있는 것 같지 않다. 하지만 티무르가 정복을 위해 보낸 시간과 다녔던 지역을 보면 칭기즈칸의 패업(覇業)은 오히려 빛을 잃을 정도이다. 사실 칭기즈칸은 생애의 대부분을 몽골 초원의 통일로 보냈고, 그가 참가했던 대외원정은 세 군데, 즉 서하·금나라·호레즘뿐이었다. 그러나 1336년에 출생한 티무르는 1369년 중앙아시아의 유목부족들을 통합하는 데 성공한 뒤, 1405년에 중국을 치러 가다가 사망할 때까지 거의 40년을 유라시아 사방 각지를 원정하고 정복하는 데 몰두했다. 칭기즈칸이 ‘세계정복’의 문을 열었고 실제로 그것을 완수한 것은 그의 후손들이었다면, 티무르는 자신의 일대에서 ‘세계정복’의 과업이 다 끝나버렸고 그의 후손들은 가만히 앉아서 과실을 향유했을 뿐이었다.

스페인의 카스티유 국왕이 파견한 클라비호(Clavijo)라는 사신이 1412년 사마르칸트를 방문하여 티무르를 만났다. 그리고 그의 보고를 통해서 티무르의 진면목이 유럽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만, 사실 티무르의 이름은 이미 그 전부터 유럽에서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을 떨게 했던 동방의 군주들이 모두 그 앞에서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를 지배하던 몽골계 킵착 칸국의 군주 톡타미시(Toqtamish)는 원래 티무르의 지원으로 권좌에 올랐지만 칸이 된 뒤에 티무르와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자 티무르는 1391년 볼가 강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그를 격파하고 킵착 칸국의 수도였던 사라이(Saray)를 폐허로 만들었다. 러시아의 많은 역사학자들은 러시아가 ‘타타르의 멍에’를 벗어던진 것이 러시아인들의 애국적 투쟁 즉 ‘키에프인들의 피’ 때문이었다고 해석하지만, 사실은 티무르의 원정으로 인해 킵착 칸국이 결정적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티무르는 서구를 위협하던 또 하나의 대국을 강타했다. 1402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야지드 1세가 이끄는 군대를 앙카라 부근에서 격파한 것이다. 이 전투에서 바야지드는 포로가 되고 결국 1년 뒤 적국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유럽에서 티무르의 명성을 한마디로 말해주는 것이 1587~1588년에 영국의 작가 말로(Christopher Marlowe)가 쓴 ‘탬벌레인(Tamburlaine)’이라는 희곡이다. 줄거리는 주인공 탬벌레인이 페르시아 제국과 터키와 아프리카를 정복하고, 마침내 자신이 신보다 더 위대하다고 외치며 ‘꾸란’을 불태우는데, 오히려 그것이 그의 저주가 되어 다음 해에 사망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 희곡은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강조하던 당시 영국의 지적 분위기와 부합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세계정복자’ 티무르는 아주 적합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탬벌레인’이라는 이름은 페르시아어로 ‘티무리 랑(Timur-i lang)’, 즉 ‘절름발이 티무르’라는 말을 부정확하게 옮긴 것이다. 그가 젊었을 때 한쪽 다리에 화살을 맞아 근육이 수축되어 다리를 절었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여진 것이다. 1941년 학자들이 사마르칸트에 있는 티무르의 무덤 구리 미르(Gur-i Mir)를 열어서 그의 시신을 조사했다. 특히 게라시모프(M. M. Gerasimov)라는 소련 학자는 티무르의 해골을 근거로 그의 얼굴을 복원했으며 생전에 절름발이였다는 사실까지 확인했다. 그런데 티무르의 무덤에 대해서는 옛날부터 전해져 오던 전설이 있었다. 그것은 누구라도 티무르의 무덤을 열면 그 나라에 파멸이 닥치리라는 것인데, 정말 그의 무덤이 개봉된 사흘 뒤에 독일의 소련 침공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 유물을 기초로 복원된 티무르 흉상.
이처럼 칭기즈칸을 무색케 할 정도였던 희대의 정복자 티무르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를 ‘칸(khan)’이라고 부를 수 없었던 것이다.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이 등장한 이래 그의 후손이 아니면 누구도 ‘칸’을 칭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유라시아 전 지역에 통용되는 불문율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티무르조차도 칭기즈칸의 후손 가운데 하나를 허수아비 칸으로 내세우고, 자신은 칭기즈칸 일족의 여자와 혼인한 뒤 ‘구레겐(g?regen)’, 즉 부마(駙馬)라는 칭호로 만족해야 했다.

티무르의 최종 목표는 몽골세계제국을 자신의 힘으로 재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몽골제국은 이미 분열되고 약화되어 옛날과 같은 영광은 오래전에 없어지고 말았다. 그가 유라시아 각지를 원정했던 까닭도 바로 사라진 제국의 영광을 부활시키려는 궁극적인 목적에서 추진된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몽골제국의 본부가 있었던 중국을 자신의 최종 목표로 삼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1405년 그는 총동원령을 내려 군대를 소집하고 드디어 중국원정을 시작하였다. 당시 중국은 명나라의 영락제(1402~1424년)가 통치하고 있었다. 물론 영락제는 몽골에 대한 5차례 친정(親征), 환관 정화의 인도양 원정 등으로 중국사에서도 보기 드문 공격적인 군주였지만, 집권 초기의 상황은 상당히 불안했었다. 쿠데타를 일으켜 조카였던 건문제를 시해하고 즉위했기 때문에 그의 집권에 대해 내부의 불만이 가득한 상태였다. 이런 처지의 영락제가 수십 년 동안 원정을 통해서 단련된 티무르의 기마군단을 막아냈으리라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던 티무르가 시르다리아 강가에 위치한 오트라르(Otrar)라는 변경도시에서 갑자기 사망하고 말았고, 이로써 중국은 끔찍한 참화를 면하게 된 것이다.

티무르의 정복전은 엄청난 파괴와 살육을 수반했다. 도시는 페허로 변해버리고 높은 미나렛(이슬람 사원의 첨탑)이 있었던 곳에는 수만 명의 해골로 이루어진 탑이 쌓였다. 그 파괴의 정도는 칭기즈칸 시대를 능가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그를 문명의 ‘도살자(butcher)’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가 파괴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건설자이기도 했다. 특히 그가 수도로 삼은 사마르칸트는 세계 각지에서 끌어모은 기술자들과 재물로 화려하게 장식되기 시작했다. 말로의 희곡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내 고향 사마르칸트는 대륙의 가장 먼 곳까지 유명해지리라. 그곳에 나의 왕궁이 세워질 터인데, 그 빛나는 탑으로 인해 하늘이 무색해지고 트로이의 탑이 떨치는 명성도 지옥으로 떨어지리라.’

주간조선 ; [1973호] 2007.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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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18)] 무슬림들의 마음을 지배한 신비주의 교단의 성자들

이슬람의 눈부신 확장은 신비주의자‘수피’들이 이룬 기적

사치사회에 대한 반동으로 금욕과 고행 외치는 수피즘 등장
무슬림들의 지지 받으며 세력 확장하고 대중운동으로 발전

기존 율법교단과 충돌하며 독자교단 형성, 다양한 형태로 발전
병자치유 등 ‘기적’행하며 이교도의 땅으로 가 이슬람 전파

▲ 메카 성지순례에서 아라파트산에 운집한 참배객들.
최근 아프가니스탄에서 있었던 인질 피랍사건으로 전국이 호되게 홍역을 앓았다. 이 사건은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테러집단의 불법적 인질극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그 이면에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립과 충돌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문명의 충돌’을 운운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상 이 두 종교가 얼마나 자주 부딪쳤고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는가는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도대체 현재 지구상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을 신봉하는 사람의 수는 얼마나 될까. 특정 종교의 신도 수는 어느 기관에서 제시하느냐에 따라서 많은 차가 날 수 있기 때문에 예민한 문제이긴 하지만, 교단과는 무관한 비교적 중립적이라고 할 수 있는 브리태니커 2003년판 연감에 근거한다면 전 세계 기독교도는 20억명, 무슬림은 12억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한다. 전세계 인구를 60억명이라고 할 때 세 명 가운데 한 명은 기독교,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은 이슬람을 믿는 셈이다. 현재까지는 기독교의 수적 우위가 유지되고 있는 셈이지만, 이슬람의 놀라운 팽창률과 그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조한 기독교도의 증가율을 감안하면, 앞으로 반세기 이내에 양자 사이의 관계가 역전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슬람의 이러한 놀라운 팽창이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이라는 식의 강압과 협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분명히 밝혀졌다. 과거 그같은 오해의 이면에 종교적인, 특히 서구의 기독교적 편견이 작용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같은 편견은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기독교의 정도(正道)에서 일탈한 사이비 종교 정도로 생각하는 결과를 낳았다. 오늘날 국제정치에서의 대결적 구도로 말미암아 아직도 대중적으로는 이같은 편견이 강하게 표출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지만 이슬람에 대한 기존 시각을 모두 오리엔탈리즘적이라고 비판하는 태도 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다가 자칫 객관적 균형감각을 잃고, 이슬람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부정적 측면마저도 옹호하는 입장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과거 이슬람의 팽창을 가져온 것이 ‘칼’의 위력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슬람의 성공은 여러 지역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성취된 것이기 때문에 그 원인도 정치적·경제적·문화적으로 다양하고 복잡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슬람이 단지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영혼에 호소하는 ‘종교’라고 한다면, 그것이 만약 사람들의 신앙적 갈증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어떤 영적인(spiritual)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면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힘은 결코 율법(shariah)에서 나올 수는 없었다. 이슬람의 율법은 어느 종교보다도 체계적이고 정밀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율법은 도덕적 기준으로 사회를 규율하고 유지하는 기능을 갖고 있을 뿐, 신자들 개개인의 종교적 열망을 충족시켜 줄 수는 없었다. 그런 역할을 했던 것은 바로 ‘수피(sufi)’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신비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절대자와의 합일을 추구하는 구도자적 모습을 통해서 무슬림의 종교적 지향점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억압적인 정권에 저항하는 민중봉기에 앞장서기도 하고, 때로는 이교도에 대한 ‘성전’을 외치다가 ‘순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은 어떤 역사적 맥락 속에서 생겨났으며, 이슬람의 팽창에는 어떤 역할을 한 것일까.

‘수피’라는 말은 원래 아랍어에서 ‘양모로 짠 거친 겉옷’을 뜻하는 ‘타사우프(tassa wuf)’라는 단어에서 기원했다. 즉 세속적 사치나 명리를 초개처럼 버리고 오로지 절대자 신과의 합일을 위한 길에 자신을 헌신하는 구도자를 가리켰다. 처음에는 개인적 현상으로 시작된 것이 점차 종교적 운동으로 확대되고 나중에는 거대한 교단으로까지 발전했기 때문에, 이런 것을 총칭하여 학자들은 ‘수피즘(Sufism)’이라고 부른다. 후일 수피즘이 이슬람권으로 널리 퍼진 뒤 유명한 수피들의 생애나 일화를 모아놓은 ‘성자전’이 많이 씌어졌는데, 거기에는 초기 수피들의 면모가 잘 묘사되어 있다. 이들은 금욕과 고통이 오히려 자신을 신에게로 한걸음 더 다가가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잠자리에서는 거적때기로 몸을 덮고 벽돌로 베개를 삼는 것을 기뻐했으며, 입고 다니는 옷에 이가 우글거리는 것을 오히려 행복으로 여겼던 것이다. 심지어 신발조차도 신으로 가는 길을 차단하는 ‘베일’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금욕과 고행은 방법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들의 궁극적 목적은 ‘신과의 합일’이었고 이것은 신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통해서 실현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절대적 사랑을 가장 잘 표현했던 초기의 수피가 8세기 이라크 지방의 바스라에 살던 라비아(Rabia)라는 여자였다. 그녀는 대낮에도 거리에서 한 손에는 등불을 들고 다른 손에는 물통을 들고 다녔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이 불로 천국을 태우고 이 물로 지옥불을 꺼서 이 두 개의 베일을 모두 없애고 싶다. 그러면 나는 천국에 대한 희망에서도 지옥에 대한 두려움에서도 아닌, 오로지 사랑하는 마음에서 신을 경배할 수 있지 않겠는가?” 봄이 되면 그녀는 정원에 피어난 아름다운 꽃을 보지 않으려고 창문을 꼭꼭 닫은 채 방안에 틀어박혀 오로지 봄과 꽃을 창조한 신을 묵상하는 일에 몰두했다고 한다.

초기 수피들의 이러한 언행은 그들이 추구했던 이상을 잘 보여주었고 또 후일 수많은 수피의 모범이 되었다. 수피와 신의 관계는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의 관계로 인식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소멸’시킴으로써 그 안에서 ‘영원’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수피 시인들은 나방과 촛불의 비유를 곧잘 인용했다. 즉 촛불을 향해 뛰어들어 자신의 몸을 태우는 나방처럼 신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없애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신과의 합일’에 도달하는 것이다.

주간조선 [1974호] 2007.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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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19)] 몽골의 부흥과 달라이 라마

칭기즈칸 후예, 티베트 불교와 손잡고 ‘부활의 기도’

군주권 강화와 분열된 부족민 규합 위해 정신적 지주 필요
티베트 겔룩파 수장을 달라이 라마로 추대하고 불교 확대 정책

남북종단 불교 벨트 형성, 이슬람 세력 저지용 방벽 역할
몽골·티베트 막강 커넥션 과시하며 정치·군사적 영향력 행사

▲ 에르데니 조 사원 경내에 있는 티베트식 불탑.
1368년 여름, 지난 1세기 동안 중국을 지배하던 몽골제국은 마침내 그 최후를 맞이하였다. 주원장(朱元璋)이 이끄는 25만명의 반란군이 곧 수도로 진입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지막 황제 토곤 테무르는 급하게 북쪽으로 피란길에 올랐다. 수도인 대도(大都·현재의 베이징)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고북구(古北口)라는 곳을 지나면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본 그의 눈에는 저 멀리 대도의 모습이 뽀얀 안개 속에 아스라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순간 도읍지를 잃은 설움이 밀려들면서 사태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한 자신의 어리석음에 가슴을 치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갖가지 보석으로 정성스럽고 아름답게
완성된 나의 대도여!…
따스하고 아름다운 나의 대도여!
붉은 토끼띠의 해에 잃어버린
나의 가련한 대도.
이른 아침 높은 곳에 오르면 보이던
너의 아름다운 연무(煙霧).
나는 울면서 떠날 수밖에 없었노라.…
아홉 가지 보석으로 완성된
나의 대도성이여.…
내가 겨울을 보냈던 나의 가련한 대도,
이제 중국인이 모두 차지했구나.

토곤 테무르는 몽골 황제들의 여름수도가 있던 상도(上都)로 향했으나 애통한 마음으로 화병을 얻었는지 그곳에서 곧 사망하고 말았고, 그를 호종(護從)하던 비빈과 귀족들은 뒤이어 추격해온 명나라 군대에 졸지에 포로로 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다행인지 황태자만은 용케 탈출에 성공해 고비사막을 넘어서 북방의 광활한 초원으로 가서 권토중래(捲土重來)를 도모하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토곤 테무르와 고려 여인 기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아유시리다라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몽골인들은 중국을 상실하고 초원에 남아 나라의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지만 황제의 권위는 이미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대신 유목민 집단을 지휘하던 수령들이 발호하기 시작했고 그 가운데 실력자들은 ‘타이시(tayisi·太師)’라는 칭호를 내세운 채, 허울뿐인 황제를 좌지우지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1388년 칭기즈칸의 적통을 잇는 황제마저 피살된 뒤, 몽골인들은 동부와 서부로 나뉘어 서로 대립했을 뿐만 아니라 각각 그 안에서도 서로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황금씨족’이라고 불리던 칭기즈칸 일족의 권위는 거의 불가침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막강한 권신들조차 스스로 칸(khan)을 칭하지는 못했고 명목상일지언정 칭기즈칸의 후손을 칸으로 세울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 17세기 후반에 나온 ‘에르데니인 톱치’(일명 몽골원류)라는 책에 기록된 토곤 테무르의 비가(悲歌).
아무튼 우리는 이제까지 14세기 중반 이후 동아시아의 역사를 설명할 때 중국인의 관점을 아주 충실하게 반영해왔다. 즉 몽골인들이 중국에 세운 ‘원나라’는 1368년에 망하고 그 후 그들은 분열과 혼란 속에서 침체에 빠져들었기 때문에, 칭기즈칸과 쿠빌라이로 상징되는 ‘대몽골’의 영광은 마침내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몽골인들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한문이 아니라 그들이 남긴 몽골어로 된 자료를 읽어보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우리가 막연히 갖고 있던 기존의 생각도 무비판적으로 계속 유지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확신하게 된다.

우선 당시의 몽골인들은 몽골제국이 중국의 한 왕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중국이 물론 가장 중요한 부분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제국의 일부에 불과했다. 따라서 그들은 중국인이 만리장성 이남을 다시 빼앗았다고 해서 그것을 곧 제국의 ‘멸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영토가 축소된 것뿐이었다. 토곤 테무르의 ‘비가(悲歌)’를 가만히 읽어보면 그것은 망국의 설움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조상 대대로 가꾸어온 두 수도, 즉 ‘시원하고 멋진 개평 상도’와 ‘따스하고 아름다운 대도’를 상실한 아쉬움을 토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몽골어로 된 연대기들은 1368년을 분수령으로 황통이 끊어지고 제국의 명맥이 단절된 것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몽골인이 전과 같은 기세를 상실하고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것도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명나라 3대 황제인 영락제는 1410년부터 1424년까지 전후 5차례에 걸쳐 매번 50만명이라는 엄청난 군사를 동원하면서 대원정을 감행했지만 끝내 몽골의 위협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오히려 영락제의 과도한 정책으로 인해 중국은 재정적으로 피폐하게 되었고 몽골은 오히려 더욱 군사화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1449년에는 중국의 황제가 에센(Esen)에게 포로로 잡히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역사상 ‘토목보(土木堡)의 변(變)’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당시 명나라의 군사적 무력성을 그대로 잘 드러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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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그동안 부족 수령의 발호로 인해서 약화되었던 칸의 권력이 다시 회복되고 강화되는 추세가 나타났다. 특히 1488년 바투 뭉케라는 인물이 즉위하면서 중앙집권화는 가속화되었다. 그는 재위 37년 동안 고비사막의 남북에 흩어져 있던 여러 부족을 통합한 뒤 휘하의 유목민을 모두 6개의 ‘만호(萬戶)’로 재편하고 그것을 자식들에게 분봉해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몽골 유목민에 대한 칭기즈칸 일족의 지배권이 다시 확립되었다. 그는 스스로를 ‘다얀 칸(Dayan Khan)’이라고 불렀는데 ‘다얀’은 바로 ‘대원(大元)’이라는 발음을 옮긴 것이니, 이는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을 지배한 쿠빌라이 제국의 부활이 바로 자신의 정치적 목적임을 분명히 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뒤를 이어서 16세기 전반과 중반에 활동한 알탄 칸(Altan Khan)이라는 인물은 명나라 북변(北邊)에 대해 끊임없는 약탈과 공격을 가했는데, 한 중국 측 기록에 의하면 1542년 38개 주현(州縣)을 공격해 20여만명을 살육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1550년에는 토곤 테무르가 쫓겨갔던 바로 그 고북구를 통해서 남하해 명나라의 수도 북경을 포위한 사건이 일어났으니, 이를 두고 ‘경술지변(庚戌之變)’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관광객들이 흔히 보는 북경 외곽의 엄청난 만리장성도 바로 이처럼 계속되는 몽골의 공격에 대한 대응으로 축성된 것이었다.

주간조선 ; [1975호] 2007.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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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20)] ‘타타르의 멍에’를 벗어던진 러시아의 동방 진출

러시아 “모피를 확보하라” 시비르강 넘어 東으로 東으로

몽골 지배 굴욕 벗고 1582년 시베리아 진출 길 열어
60년 만에 오호츠크해까지 영토 확장, 유럽 모피시장 장악

러시아의 무자비한 약탈에 맞서 아무르족 중국에 지원 요청
조선도 효종 때 두 차례 원정군 파견해 ‘나선(러시아)정벌’

東몽골 격파하고 급부상한 ‘준가르’ 출현으로 중앙유라시아 세력 재편
중국,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 맺고 준가르와 명운 건 전쟁

▲ 예르막의 시베리아 정복을 묘사한 그림. 바실리 수리코프 1895년작.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박물관 소장.)
러시아의 영토는 1700만㎢로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이다. 캐나다가 2위이며, 면적이 엇비슷한 중국과 미국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소련의 붕괴로 상당수의 나라가 독립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여전히 1위를 고수할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시베리아’라는 거대한 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1582년 예르막(Yermak)이 이끄는 800여명의 코사크인이 우랄산맥 부근을 흐르는 시비르(Sibir)강을 건너 시베리아 진출의 길을 열어젖힌 사건은 러시아 역사상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오랜 동안 몽골의 지배를 받던 러시아가 드디어 ‘타타르의 멍에’를 벗어던지고 본격적인 ‘동방 진출’을 시작했음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시베리아’라는 이름도 실은 이 ‘시비르’라는 강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모스크바 정부의 특별한 양해 아래 시베리아 지방과 모피무역에 종사하던 스트로가노프(Stroganov) 가문은 독자적인 민병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예르막도 그 아래에서 일하던 일종의 용병대장이었다. 그는 원래 돈강과 볼가강 유역에서 약탈을 하며 지내던 코사크인의 ‘두목(ataman)’이었는데, 1582년 시비르강을 건너 시비르 칸국의 쿠춤 칸(Kuchum Khan)을 격파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로부터 불과 2~3년 뒤 그는 토볼강가에서 몽골군에 의해 포위되어 피살되고 말았지만 바실리 수리코프의 그림에서 드러나듯이 후일 그는 민담과 전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은 1649년 마침내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인 오호츠크해에 도달할 때까지 부단히 계속되었고, 이에 따라 러시아의 영토도 엄청나게 넓어져 갔다. 대략 1300만 ㎢로 추산되는 시베리아는 러시아 전 영토의 4분의 3에 해당한다. 시비르강을 넘어선 뒤 오호츠크해에 도달할 때까지 60~70년 동안 매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한반도만한 영토를 하나씩 확보한 셈이었다.

그렇다면 러시아인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시베리아로 진출했으며 어떻게 해서 그렇게 신속하게 뻗어나갈 수 있었던 것일까. 그들이 시베리아로 나간 까닭은 한마디로 말해서 모피였다. 담비, 수달, 밍크 같은 동물의 모피는 혹독한 겨울을 견뎌내야 하는 러시아인은 물론 유럽 귀족들에게도 인기가 높아 비싼 가격으로 팔려나갔다. 후일 영국과 프랑스가 북미 대륙으로 진출해 그곳의 모피를 들여올 때까지 러시아는 유럽의 모피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했으며, ‘부드러운 금’이라고 불리던 모피를 통한 국가의 재정수입은 1589년 3.75%, 1605년에는 11%에 달할 정도였다. 그러나 시베리아 진출이 본격화됨에 따라 모피 공급의 원천인 동물들은 빠른 속도로 고갈되어 갔고 새로운 모피를 구하기 위해서 동쪽으로 동쪽으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현지 주민들로부터 모피를 일종의 세금처럼 받았고 이를 ‘야사크(yasak)’라고 불렀다. 원래 ‘야사크’라는 말은 몽골어의‘법령’을 뜻하는 ‘자사크(jasaq)’에서 유래했는데 16세기 이후 시베리아에서는 ‘모피세’와 동의어로 사용된 것이다.

러시아인의 시베리아 진출에 큰 도움을 준 것은 그곳의 독특한 수로체계(水路體系)였다. 혹독하기로 이름난 시베리아의 겨울에 사람들의 활동이 어려우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사실 여름의 시베리아도 이동하기에는 결코 만만치 않다.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진창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평한 시베리아 대평원에는 크고 작은 강줄기가 마치 바둑판처럼 얽혀 있다. 큰 강들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 북빙양으로 들어가고, 그 사이로 작은 강들이 동서로 흐르면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바로 이 수로를 이용해 여름에는 배를 타고, 겨울에는 얼어붙은 강 위로 썰매를 타고 이동했던 것이다.

시베리아 지도를 보면 토볼스크, 톰스크, 예니세이스크, 셀렝긴스크, 이르쿠츠크 등 크고 중요한 도시들이 모두 강의 이름을 딴 것도 바로 이러한 사정 때문이었다. 이러한 도시들은 대체로 강과 강이 만나는 교차점에 목책(木柵)으로 지어진 성채인 ‘오스트로그(ostrog)’라는 것에서 기원하였다. 당시 러시아 본토에서 가난한 농민, 범법자 또는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 등 다양한 종류의 사람이 동쪽으로 이주해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베리아에는 여전히 몽골-타타르 계통의 부족이 흩어져 있고 이들은 이주민을 대상으로 자주 약탈을 자행하였다. 러시아 정부로서는 약탈을 막고 이주민들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군대와 시설이 필요했기 때문에 ‘보에보다(voevoda)’라 불리던 군관을 파견하여 오스트로그를 거점으로 지배력을 장악해나갔던 것이다. 이처럼 초기 러시아의 시베리아 지배는 군사식민적인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1587년에는 토볼스크가 세워지고, 1604년에는 톰스크, 1619년 예니세이스크, 1652년 이르쿠츠크, 1632년 레나강 유역에 야쿠츠크가 건설되고, 마침내 1649년에는 오호츠크에 도달한 것이다. 당시 러시아인에게 무엇보다도 시급한 문제는 춥고 척박한 환경에서 어떻게 식량을 확보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야쿠츠크를 일종의 사령부로 삼아 일련의 탐사대를 아무르강 유역으로 파견했다. 1643년에는 포야르코프(V.Poyarkov)가 132명의 대원을 이끌고 탐사에 나섰는데, 1645년 귀환한 뒤 살인을 자행하고 인육을 먹었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게 되었고 자신도 그 같은 혐의를 부인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 식량이 떨어진 극한 상황에서 일어난 사건이었겠지만, 현지인 사이에서는 식인종이 출현했다는 소문까지 퍼졌으니 사실 무근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 셈이다. 뒤이어 1648년에는 하바로프(E.Khabarov)의 탐사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그는 아무르강 상류에 있던 현지민을 공격하여 약탈과 방화와 살해를 자행해 악명을 떨쳤다. 오늘날 극동의 도시 하바로프스크는 바로 이 잔혹한 탐험대장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1653년에는 스테파노프(O.Stepanov) 탐험대가 파견되어 숭가리, 우수리 등의 강을 오가면서 모피세와 식량을 거두어가기 시작했다. 이처럼 러시아인들의 갑작스런 출현은 아무르 지방의 현지인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고, 궁지에 몰린 그들은 중국에 지원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중국에는 왕조 교체라는 엄청난 정치적 격변이 막 종료되었다. 1644년 한족의 왕조인 명나라가 망하고 만주족이 건설한 ‘대청(大淸·Daicing)’이 중국의 새로운 주인이 된 것이다. 이제 막 산해관(山海關)을 돌파하고 중원에 들어온 만주족은 중국을 정리하기에도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저 멀리 아무르강 유역까지 많은 군대를 보내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조선에 대한 원병 요청은 이렇게 이루어지게 되었고, 효종은 두 차례에 걸쳐서 원정군을 파견하게 된다. 1654년에는 변급(邊)을 사령으로 한 150명, 그리고 1658년에는 신유(申瀏)가 이끄는 262명 소총수의 파견이 있었다. 특히 1658년 6월 10일(음력) 조선과 만주 연합군은 아무르강의 지류인 숭가리강(松花江)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스테파노프가 이끄는 러시아 군대를 격파하고 승리를 거둠으로써 비록 잠시 동안이나마 러시아의 진출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주간조선 ; [1976호] 2007.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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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21)] 네르친스크에서 만난 청제국과 러시아

만주족에서 중원의 주인이 된 淸

서몽골 통합하고 급부상한 갈단 고립시키려 러와 역사적 조약
중앙유라시아 분할의 출발점… 21세기까지 영향 미쳐

만주·몽골·티베트 포함한 다민족·다문화·다인종 제국으로
몽골제국 사회군사조직인 천호제 본뜬 ‘팔기제’ 도입

▲ 책상에 앉아있는 젊은 강희제의 모습.(베이징 고궁박물원 소장)
1689년 8월 27일, 러시아와 청나라의 대표단이 네르친스크(Nerchinsk)라는 변경도시에서 만나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그로부터 약 30년 후인 1727년 캬흐타(Kiakhta) 조약에 의해 보완되면서 러·청 양국의 외교적인 기본틀로 기능하였다. 그런데 러시아와 청, 이 두 세력이 네르친스크에서 만난 것은 16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부단하게 진행된 유라시아 대륙의 분할과정, 즉 러시아가 대륙의 서쪽에서 흥기하여 시베리아로 진출하다가 마침내 중앙아시아를 장악하고, 만주족이 대륙의 동쪽 끝에서 일어나 중국을 정복하고 몽골을 비롯한 내륙으로 세력을 확장해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인 것이다. 네르친스크 조약은 단순히 러·청 양국의 국경 설정과 교역조건에 관한 내용을 담은 단순한 문서가 아니라 21세기 오늘까지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 즉 ‘중앙유라시아의 분할’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사건의 의미를 보다 거시적인 시각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와 청이라는 두 제국의 탄생과 팽창 과정, 나아가 제3의 세력인 몽골의 동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만주족의 등장과 팽창에 대해서, 다음 주에는 몽골족의 동향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명대 말기 동북 변경의 만주지역에는 퉁구스어를 사용하는 집단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우리나라와 중국 측 자료에는 ‘여진(女眞)’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것은 ‘주르첸(Jurchen)’이라는 말을 한자로 옮긴 것이며, 이들은 과거 몽골제국에 의해 멸망한 금(金)나라를 건국한 민족이다. 당시 중국인은 변경의 여진인을 중국과의 정치적 관계 및 문화적 발전 정도에 따라 크게 세 부류로 나누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건주(建州)여진, 그 북쪽에 해서(海西)여진, 가장 먼 곳의 야인(野人)여진이 그들이다. 건주여진은 중국이나 조선의 변경과 비교적 가까웠고, 해서여진은 초원과 접하여 몽골인과 접촉이 많았으며, 가장 멀리 떨어진 삼림지대에 살던 야인여진은 주로 수렵을 생업으로 삼으며 살아가던 집단이다.


청제국의 기틀은 놓은 사람은 누르하치(Nurhaci·1559~1626년)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건주여진 출신의 수령으로 여진 집단에 대한 내적 패권은 물론 주변 몽골부족에 대한 지배권까지 확립하였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정통성을 과거 중국의 북부를 지배한 금나라에서 찾으면서 나라의 이름을 ‘후금(後金)’이라 칭했으나 이 명칭은 그의 후계자인 홍타이지(Khongtaiji·1592~1643년)에 의해 ‘대청(大淸·Daicing)’으로 바뀌었다. 홍타이지는 ‘여진’이라는 이름의 사용을 금지하고 대신 ‘만주’라는 새로운 민족의 명칭을 채용했으며,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책을 시행했다. 그는 여러 차례 중국으로의 진출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요동지방의 웅관(雄關)인 산해관(山海關)을 돌파하지 못한 채 좌절하고 말았다. 홍타이지의 뒤를 이은 순치제(順治帝·재위 1643~1661년)는 불과 여섯 살의 나이로 즉위했기 때문에 국사는 섭정들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최고의 실력자는 그의 숙부 도르곤이었다. 마침 그때 만주족에게 산해관을 돌파할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왔다. 중국 남부에서 반란이 격화되고 이자성(李自成)이라는 인물이 이끄는 반란군이 북상하면서 수도가 함락되자, 위협을 느낀 산해관의 사령관 오삼계(吳三桂)가 1644년 스스로 청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자청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만주족 팔기군은 활짝 열린 산해관의 문을 통해서 북중국으로 쇄도해 들어갔고, 오삼계와 함께 이자성을 물리치고 드디어 중원의 주인이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1644년의 이 사건을 ‘입관(入關)’이라 부른다. 물론 문자 그대로 풀자면 이 말은 산해관을 통해서 중원으로 들어왔다는 의미에 불과하지만, 동북방의 만주인들이 세운 청나라가 드디어 중국으로 들어와 ‘중국식 왕조’로 전환에 성공했음을 상징하는 용어로도 사용되어왔다. 마치 과거 몽골제국의 쿠빌라이가 1260년 카라코룸에 있던 수도를 북경 지역으로 옮기고 ‘중통(中統)’이라는 중국식 연호를 세운 것을 두고, 유목적인 몽골제국에서 중국식 왕조 원(元)으로의 전환이 이뤄지는 상징적인 계기로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로 이어지는 만주의 황제들은 한족이 쌓아올린 전통적인 중국 문화의 위대한 수호자로 묘사되었고, 황제를 위시한 최고 지배층은 물론 만주족이었지만 국가의 통치를 위해서 만한병용책(滿漢倂用策)을 썼고, 마침내 19세기 중반 태평천국의 난이 끝난 뒤에는 황제를 제외한 최고위 집권층마저 한인으로 대치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1644년의 ‘입관’은 청나라가 드디어 한, 당, 송, 원, 명의 뒤를 잇는 중국의 왕조가 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인 셈이다.

그러나 ‘대청(Daicing)’이라는 나라는 결코 ‘중국’의 왕조라고만 하기는 어렵다. 18세기 중반이 되면 청나라는 중국은 물론 중앙아시아, 티베트, 몽골, 만주를 포괄하는 대제국으로 발전했고 과거 명나라의 영역이던 소위 ‘본래의 중국(Proper China)’은 그 일부에 불과하게 되었다. 청나라의 군주는 한족의 지배자인 ‘황제(皇帝)’이자 동시에 만주족과 몽골족을 지배하는 ‘카간(Qaghan)’이었고, 나아가 티베트의 불교도들을 보호하는 세속군주, 즉 ‘전륜성왕(轉輪聖王·Chakravartin)’이었던 것이다. 현재 대다수 학자는 청나라를 다민족·다문화·다언어의 제국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이러한 신경향을 가리켜 ‘새로운 청대사(New Qing History)’라는 이름까지 사용한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청나라의 이 같은 ‘다중성’이 소위 ‘입관’하고 나서 중국·티베트·신강·몽골을 지배하게 된 뒤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입관’하기 전, 즉 누르하치에서 홍타이지에 이르는 시기에 거의 그 원형이 완성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정치와 문화 방면에서 몽골의 영향력은 거의 압도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제까지 만주어로 ‘수령’을 뜻하는 ‘버일러(beile)’를 칭하던 누르하치는 1607년 주변 몽골부족을 복속시킨 뒤 ‘한(han)’을 칭함으로써 과거 몽골제국으로 소급되는 중앙유라시아 전통의 군주권을 표방하기 시작했고, 1635년 홍타이지는 몽골의 군주였던 릭단 칸(Lighdan Khan)이라는 인물을 격파하고 원나라의 국새(國璽)를 받게 되는데, 그는 이것을 ‘천명’이 자기에게로 옮겨온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가 ‘후금’이라는 국호를 ‘대청’으로 바꾼 것도 바로 이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만주족 통치자들의 주변에는 ‘박시(baksi·중국어 ‘博士’라는 말에서 기원)’라는 칭호로 불린 다수의 문관이 포진돼 국가의 문서행정은 물론 통치 일반에 관한 광범위한 자문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만주와 몽골, 중국과 조선 등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동시에 체득한 사람들이었으니, 다민족·다언어 국가인 청제국의 지향과 잘 부합되는 인물이었다. 한 학자는 이런 부류의 사람을 ‘경계인(境界人·transfrontiermen)’이라고도 불렀다. 무엇보다 초기 만주인들에게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할 수 있게 한 조직으로 청나라 말기까지 지속된 팔기(八旗)제도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 역시 몽골제국 시대의 천호제(千戶制)로 소급되는 몽골 유목사회의 사회군사조직을 본뜬 것이다.

주간조선 ; [1977호] 2007.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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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22)] 최후의 유목국가 준가르의 운명

淸 강희제, 준가르 고립시키려 4차례나 직접 북방 원정
막대한 병력 투입하고도 성과 없어… 전쟁사 편찬해 미화·왜곡
준가르, 전후 50년간 번성하다가 내란으로 파멸의 길에
1757년 건륭제, 준가르 복속시키고 철저한 말살정책
볼가강변 이주한 토르구트족 불러들여 유라시아 평정 과시

▲ 만주 팔기병의 모습. 준가르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760년 만들어진 화첩에 수록.
기원전 7세기 스키타이인들이 흑해 북쪽에 제국을 건설한 이래 중앙유라시아의 초원지역에는 수많은 유목국가가 흥망을 거듭했다. 과거에는 그저 변경 지역에 살면서 약탈을 일삼는 ‘야만인’ 정도로만 묘사되어 왔던 이들의 국가가 세계사의 전개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이제 더 이상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 보이는 주목할 만한 현상은 점점 더 많은 학자가 유라시아 역사에서 초원제국이 지닌 ‘중심성’ 혹은 ‘핵심성’에 주목하고 그들의 역사적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스키타이와 흉노가 출현한 이래 이처럼 면면히 계속되어온 유목국가의 전통이 18세기 중반 준가르(Junghar)를 마지막으로 갑작스럽게 사라지고 만다. ‘최후의 유목국가’라는 심상치 않은 별명으로 불리는 준가르. 그들은 도대체 누구였고 어떻게 해서 역사의 무대에서 최후를 맞게 된 것일까.

‘준가르’라는 이름은 몽골어로 ‘좌익(je’?n ghar)’을 의미한다. 왜 이런 이름이 나오게 되었는지 그 연유는 분명치 않으나, 이들은 알타이산맥 서쪽의 준가리아 분지와 천산산맥 북방의 초원을 근거지로 유목생활을 하던 ‘오이라트(Oirat)’라는 통칭으로 불리던 서몽골 집단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17세기에 들어와 서몽골 각 부족 사이에서 분쟁이 격화되기 시작했다. 현재 그 원인을 분명히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아마 기후의 격변, 유목인구의 증가, 초목지의 부족 등이 지적되고 있다. 아무튼 내적 갈등이 심해지면서 일부 부족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호쇼트(Khoshot)라는 부족은 청해(靑海) 지방으로 내려간 반면, 토르구트(Torghut) 부족은 저 멀리 볼가강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혼란 가운데 1670년대에 패권을 장악한 인물이 바로 준가르 부족의 수령 갈단(Galdan)이었다. 그는 원래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밑에서 승려 수업을 받고 있었는데, 본국에서 부친이 사망한 뒤 이복형제들이 자기 친형을 죽이고 부족장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라이 라마의 허락을 받고 돌아가 형제들을 죽이고 준가르의 패권을 장악한 인물이다. 이후 그는 오이라트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 나아가 1680년경에는 오늘날의 신강(新疆)지방까지 장악하면서, 드디어 유목제국의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과거 중앙유라시아 초원의 유목국가들이 그러했듯이 일단 국가가 건설되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재화가 필요했는데, 취약하고 단순한 유목경제의 한계를 뛰어넘는 길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하나는 실크로드 무역을 장악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중국으로 가는 길’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신강 지방의 점령은 갈단에게 이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가져다준 셈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가지, 즉 중국으로 가는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서 그는 먼저 몽골 초원의 본령에 있던 동몽골 부족들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마침내 그 기회는 1687년 동몽골 세력의 내분과 함께 찾아왔다. 당시 동몽골에서는 좌익(=서부)의 자삭투 칸(Jasaghtu Khan)과 우익(=동부)의 투시예투 칸(T?siyet? Khan)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는데, 갈단의 동생이 이들 사이의 분쟁에 휘말려 살해되는 사건이 터진 것이다. 갈단은 복수를 명분으로 1687~1688년 동몽골에 대한 대대적 침공을 감행했고, 궁지에 몰린 투시예투 칸, 불교 교단의 수장으로 일종의 ‘몽골의 달라이 라마’ 격이었던 젭춘담바(Jebchundamba) 등 동몽골의 귀족들은 대거 남하하여 청나라의 강희제에게 구조를 요청하게 된 것이다.

몽골고원에서 전쟁이 터지는 것을 막으려고 했던 강희제는 중재를 시도했지만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드디어 갈단과의 일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갈단이 러시아와 연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단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러시아를 중립시켜 놓은 다음, 갈단을 치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수립하고 드디어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친정(親征)’에 나섰다. 강희제는 1690년부터 1697년까지 모두 4차례에 걸쳐서 친정을 감행했으니, 이것만 보아도 그가 갈단을 제압하기 위해서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세운 기록은 명나라의 영락제가 몽골을 치기 위해 5차례 친정한 것에 버금가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친정이 갖는 역사적 의미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군대를 이끌고 사막을 건너 초원을 전전하는 동안 북경에 남겨둔 아들에게 쓴 만주어 편지들에서 자신의 아버지다운 인간적 면모와 함께 황제로서의 책임감과 통치철학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던 것이다.

강희제와 갈단의 대결과정은 ‘친정평정삭막방략(親征平定朔漠方略)’이라는 거대한 편찬물에 잘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전쟁이 끝난 뒤 강희제의 지시에 의해 특별히 만들어진 것인데, ‘황제의 친정으로 북방을 평정한 기록’이라는 그 제목이 시사하듯이 황제의 ‘성무(聖武)’를 기록하고 선전하기 위해서 편찬된 것이었다. 후일 옹정제와 건륭제도 이를 본떠 유사한 기록물들을 편찬했으니 드디어 ‘방략’은 청대 특유의 역사기록 장르가 되었다. 따라서 이 기록에 근거한 연구들에서 갈단 행동의 ‘부당함’과 강희제 대응의 ‘정당성’과 아울러 작전의 ‘치밀성’이 강조된 것은 피할 수 없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갈단 측의 기록이 없는 상황에서 ‘방략’에 기록된 내용을 비판적으로 소화한다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청 측의 자료들을 가만히 읽어보면 강희제가 기울인 노력, 즉 4차례의 친정과 막대한 병력·물자의 투입에 비해 그 성과는 터무니없이 미미했으며, 오히려 그런 미미한 성과를 아전인수격 해석과 과장으로 포장함으로써 ‘역사적 의미’를 부여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예를 들어 1차 원정의 결과 벌어진 울란 부퉁(Ulan Butung)의 전투에서는 비록 청군이 약간의 우세를 보이긴 했으나 확실한 승부가 나지 않은 채 양측 모두 퇴각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또한 제2차 원정에서 벌어진 자우 모두(Jau Modo)의 전투에서는 서로군(西路軍)이 겨우 갈단의 후방을 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지만 역시 그를 잡는 데는 실패했다. 제3차 원정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고, 제4차 원정은 갈단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서 중단되고 말았다.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이 마지막 친정은 갈단이 1697년 음력 3월 13일에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도 모른 채 진행되었고, 청조는 이같은 수치스러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 그의 사망을 원정이 끝난 뒤인 음력 윤3월 13일로 조작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갈단의 ‘부당성’과 황제의 친정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갈단이 ‘자살’한 것으로 꾸몄다. 물론 사실과는 전혀 다른 얘기이다.

주간조선 ; [1979호] 2007.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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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23)] ‘대중국’의 탄생

淸은 중국·몽골·티베트의 연합국가
강희·옹정·건륭제 3대에 걸쳐 정복전쟁, 중앙 유라시아까지 영토 확장
총 면적 한반도 54배로 명나라 때의 3배 규모인 거대중국 만들어
몽골·티베트·신강 주민, 중국을 지배자가 아닌 제국의 일원으로 생각
고위관리에 한족은 배제하고 별도 통치, 한어 외 4개 언어도 공용어로

▲ 달라이 라마가 거주하던 티베트의 포탈라 궁.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는 약 950만㎢에 달한다. 이 방대한 지역 안에는 전체 인구의 90% 이상을 점유하는 한족(漢族)을 제외하고도 55개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제국’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남북한 다 합해서 22만㎢밖에 되지 않는 우리 입장에서는 부럽기도 하지만 실로 두렵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중국이 우리에게는 항상 ‘대국’처럼 보였던 것도 결코 착시현상은 아니었다. 오늘날 ‘사대주의’라고 우리가 맹렬하게 비판하는 조상들의 중국에 대한 태도 역시 자존심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2000~3000년의 역사를 훑어보면 중국이 항상 이런 정도의 ‘제국’의 사이즈를 유지했던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우리보다 큰 것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그런 엄청난 규모는 아니었다. 멀리 올라갈 것도 없이 명나라(1368~1644년)를 보면 알 수 있는데, 그 영토는 400만㎢를 넘지 않았으니 지금의 절반도 안 되는 셈이다. 과거 한(漢)이나 송(宋)과 같은 왕조도 명나라보다 적으면 적었지 더 크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 거대한 제국의 영토는 언제 생겨난 것인가. 그것은 바로 17~18세기, 즉 청나라 중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18세기 후반이 되어 청제국의 영토는 거의 1300만㎢를 육박하게 되었으니, 이는 명나라의 영토를 세 배 이상으로 불린 것이었다. 이 청제국의 영토 가운데 ‘외몽골’이 독립해서 떨어져 나갔을 뿐, 나머지 대부분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 바로 오늘의 중국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이 표방하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는 사실상 따지고 보면 청제국의 유산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청조에 대한 인상은 지극히 부정적이었다. 한때 지중해를 석권하고 빈의 성문을 두드렸던 막강한 오스만 제국이 19세기 후반에 들어와 ‘유럽의 병자’로 불렸던 것처럼, 아편전쟁 이후 서구열강의 침탈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다가 결국 1911년 신해혁명으로 망한 청조는 무기력과 부패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현재 중국에서는 ‘대청제국’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청조는 ‘이민족’인 만주인이 중국을 ‘정복’해서 건설한 정권이나 외세에 찌든 무력한 왕조가 아니라, 중국민족이 건설한 위대한 왕조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경제대국으로 부상하면서 생겨난 민족적 자부심의 고양과 무관하지 않으나, 자칫 과거와 같은 ‘대(大)중화주의’로 흐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중국의 역사를 보면 한(漢)·송(宋)·명(明)과 같이 한족이 건설한 왕조가 지배할 때에는 영토가 비교적 소규모였지만, 몽골족의 원(元)이나 만주족의 청(淸)과 같이 이민족이 건설한 왕조가 통치할 때에는 규모가 갑자기 확장되는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대중국’과 ‘소중국’이 번갈아 가면서 나타났던 셈이다. 당(唐)도 ‘대중국’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데, 사실 그 건국집단은 학계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관롱집단(關集團)’이라는 특수한 명칭으로 알려져 있듯이 이민족과 한족의 혼혈인이었다.

이처럼 이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건설한 왕조들은 이제까지 ‘정복왕조’라는 이름으로 흔히 불려왔다. 그러나 이 표현은 다분히 중국중심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정복왕조’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곧 바로 중국의 왕조사 맥락 속에 들어와 버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원조’와 ‘청조’는 중국사의 일부가 될 뿐, 독자성을 지니면서도 중국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의 ‘몽골제국’이나 ‘만주제국’의 이미지는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제국의 역사는 중앙유라시아라는 새로운 컨텍스트(맥락) 속에서 해석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17~18세기에 청제국이 이룩한 성취는 바로 이같은 중앙유라시아적 맥락이 아니면 올바로 이해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강희·옹정·건륭, 이 3대 황제의 시대에 확보된 영토가 내몽골·외몽골·티베트·신강 등 모두 중앙유라시아 지역이었고, 만주의 황제들이 이 지역에 거주하는 다양한 민족집단을 지배할 때 표방한 이념 역시 중앙유라시아의 정치적 전통에 뿌리를 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과정에 대해 설명하면서, 가장 중요한 동기 가운데 하나가 모피 획득이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다시 말해 러시아인의 동진을 촉발시킨 것은 무엇보다도 경제적 요인이었다. 그러나 청제국의 경우는 달랐다. 무엇보다도 정치·군사적 측면이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청이 내·외몽골과 티베트와 신강을 정복하게 된 까닭도 이들 지역이 정치·군사적으로 분리되기 어려운 ‘하나의 패키지’와 같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몽골인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티베트를 장악해야 했고, 몽골을 정복하고 나니 신강이 일종의 ‘덤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파미르 고원의 서쪽은 이 패키지 안에 들어있지 않았다. 따라서 만주 팔기병의 말발굽은 파미르 기슭에서 멈추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몽골-티베트-신강이라는 트라이앵글의 구조, 즉 서로 분리되기 어려운 역사·지리적 연관성은 어떻게 해서 형성된 것일까.

몽골-티베트 커넥션은 이미 13세기 몽골의 대칸 쿠빌라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유교나 불교, 기독교와 이슬람 등 모든 종교에 대해 대체로 관용적이었지만, 무엇보다도 티베트 불교에 많이 경도되어 파스파(Pags-pa)라는 젊은 승려를 초치해 와서 ‘국사(國師)’라는 거창한 호칭을 주고, 티베트에 대한 성속(聖俗)의 지배권은 물론 제국 안의 불교 교단에 대한 관할권까지 부여하였다. 그리고 쿠빌라이 자신은 불교를 보호하는 세속의 군주, 즉 전륜성왕(轉輪聖王·차크라바르틴)을 자칭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그후로도 계속되다가 1368년몽골이 중국의 영토를 상실한 뒤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16세기 후반 알탄 칸(Altan Khan)이란 인물이 소남 갸초라는 승려에게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를 헌정하고, 자신은 쿠빌라이의 뒤를 이어 불교 교단의 보호자임을 자임함으로써 몽골-티베트 커넥션은 부활하게 되었다.

소남 갸초의 뒤를 이어 달라이 라마(제4대)가 된 인물은 알탄 칸의 손자였다. 뿐만 아니라 많은 몽골 귀족이 티베트로 가서 승려 수업을 받기도 하고, 티베트에서 승려들이 몽골로 와서 이동식 사원을 세우고 경전을 가르쳤으니 양측의 긴밀한 교류관계를 잘 보여주는 예가 자야 판디타이다.

강희제가 17세기 말 서몽골 준가르의 갈단과 대결하는 과정에서 직면했던 문제가 바로 티베트와의 커넥션이었다. 왜냐하면 제5대 달라이 라마가 1682년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섭정으로 있던 인물이 그의 죽음을 은폐하고 계속해서 갈단을 지지하는 것처럼 위장했기 때문이다. 섭정은 달라이 라마가 사망한 지 15년이 지난 1697년, 즉 갈단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그같은 사실을 공포했다. 강희제로서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그는 티베트를 장악하지 않고는 몽골인들을 승복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후 서몽골 준가르와 청제국의 만주 황제들 사이에서는 몽골-티베트인의 종교적 지도자이자 상징적 구심점인 달라이 라마를 선점하기 위한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1720년 마침내 강희제는 당시 청해 부근의 쿰붐 사원에 있던 제7대 달라이 라마를 손에 넣고, 청군으로 하여금 그를 호송하여 라싸로 진입시킴으로써 티베트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주간조선 ; [1980호] 200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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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24)]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복

타슈켄트 거점 삼아 南으로 20년 만에 중앙아시아 정복 완성
시베리아 동진의 눈부신 성공에 비해 중앙아시아 남진은 좌절의 연속
1860년대 타슈켄트 점령해 방위선 구축… 부하라 등 차례로 점령
북방과 남방 세력 각축·실크로드 통한 동서 교류 역사는 막 내려
유라시아 내륙 러·청에 의해 분할… 2000년 역사의 물줄기 바꿔

▲ ‘전쟁터에서’. 1873년 베레샤긴(V. Vereshchagin) 작. (모스크바 트레자코프 미술관 소장.)
1853년 7월 28일 러시아군은 4일간의 치열한 공격 끝에 시르다리아 강 중류에 위치한 조그만 성채 악크 메체트(Aq Mechet)를 점령했다. 원래 현지어로 ‘백색의 사원(寺院)’이라는 뜻을 지닌 이 성채(城砦)는 점령군 사령관의 이름을 따서 페트로프스크(Petrovsk)로 바뀌었고, 소비에트 시기에는 키질 오르다(Qizil Orda·현재 카자흐공화국령), 즉 ‘붉은 군영(軍營)’으로 다시 바뀌었다. 중앙아시아의 도시들처럼 정치적 격변에 따라 그 명칭이 수난을 받은 곳이 지구상에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러시아는 악크 메체트를 점령함으로써 카자흐스탄 초원 가장 남쪽에 거점을 확보한 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의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중앙아시아를 향한 러시아의 전략적 위치는 여전히 불안정하고 미완성인 상태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즉 서북쪽에서부터 시작하여 카자흐스탄의 광막한 초원을 가로질러서 시르다리아에 안착한 시르다리아 라인(Syr Darya Line)과 동북쪽의 시베리아에서 시작하여 천산(天山) 북방의 알마티(Almaty·당시 이름은 Verny)에서 끝난 시베리아 라인(Siberia Line)이 서로 만나지 못한 상태로, 남쪽의 방어 라인은 그대로 취약하게 열린 채 남아 있었던 것이다.

19세기 중반 시르다리아 이남의 투르키스탄은 세 개의 ‘칸국’, 즉 칸(khan)이 지배하는 나라로 나뉘어 있었다. 가장 북쪽에 호칸드(Khoqand) 칸국, 남쪽에 부하라(Bukhara) 칸국, 그리고 서남쪽 아래에 위치한 히바(Khiva) 칸국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에서 특히 호칸드와 부하라는 러시아 변경지역을 약탈하거나 혹은 러시아제국에 ‘복속’되어 있던 카자흐 부족민들을 부추겼기 때문에 러시아와는 적대적 관계에 있었고, 이러한 상황은 러시아의 중앙아시아에 대한 전략적 입장에 심각한 문제를 노출하고 있었다. 호칸드의 변경도시인 악크 메체트를 점령한 것도 카자흐스탄에 대한 그들의 약탈을 저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렇지만 러시아는 투르키스탄으로 본격적으로 남하하기에는 주저되는 바가 적지 않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중앙아시아를 경략하려 했던 과거 러시아의 노력들이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시베리아로의 ‘동진’이 눈부신 성공을 거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중앙아시아로의 ‘남진’은 그야말로 좌절의 연속이었다. 그 최초의 시도는 1717년 표트르 대제에 의해서 감행되었다. 그는 아랄해 남쪽에 위치한 히바 칸국을 공격하기 위해서 3500명의 원정군을 편성하여 카스피해 동부 연안의 크라스노보드스크에서 출발시켰다. 그러나 러시아 군대는 사막을 건너는 데 필요한 물자 수송문제와 현지민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해 거의 몰살을 당하고 극히 일부만 살아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실패는 러시아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고 상당 기간 중앙아시아로의 진출은 저지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로의 성공적 진출을 위해서 먼저 카자흐스탄을 확실하게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마침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당시 카자흐족은 크게 세 개의 부족연맹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들이 차례로 러시아에 복속할 것을 청해온 것이다. 즉 1731년에는 소부(小部·Kishi Juz)와 중부(中部·Orta Juz)가, 그리고 1734~1737년에는 대부(大部·Ulugh Juz)가 황제의 신하가 되겠다고 찾아왔다. 물론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동쪽에 있던 유목국가 준가르의 위협, 카자흐 지배층의 내분, 그리고 1720년대에 일어난 ‘대기근’ 등이 그것이다. 러시아는 카자흐인들의 이러한 요청을 러시아 제국에 대한 ‘자발적인 복속’의 의사로 간주하고 그들이 황제의 ‘신민(臣民)’이 된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물론 카자흐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것은 카자흐인들이 궁지에 몰려 잠시 러시아 측에 도움을 요청한 것뿐이지 결코 정치적으로 영구적 종속을 희망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위 ‘자발적 복속’이 있은 뒤에도 카자흐인들은 러시아의 상인들을 약탈하거나 러시아 정부에 대해서도 공공연하게 적대적인 행동을 했는데, 이것은 카자흐인들로서는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충격적이었던 것은 1770년 러시아를 뒤흔든 푸가체프(E. Pugachev)의 반란을 카자흐인들이 지원하고 나선 것이다. 이제 러시아 정부는 카자흐에 대해서 종래와 같은 정책을 계속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보다 직접적 방식으로의 통제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러시아는 카자흐의 칸들을 부족민으로부터 떼어놓아 오렌부르그로 이주시킨 뒤 거기서 연금을 받으며 살도록 했다. 비록 귀족대접을 받으며 호의호식하긴 했지만 부족민으로부터 유리된 칸들은 그저 허수아비였고 러시아 정부의 연금생활자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19세기 전반에는 ‘칸’이라는 지위 자체를 폐지시키고, 카자흐의 수령들로 하여금 러시아 황제의 ‘신하’임을 명시한 협약에 서명하도록 강제하였다. 그리고 이제까지 외무성에서 카자흐인들의 문제를 취급해오던 것을 재무성이나 관련 군구(軍區)로 이관시킴으로써 행정적으로도 카자흐의 독자성을 없애버리고 내지(內地)로의 편입을 완성시켰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카자흐인의 ‘반란’은 끊이지 않았다. 여기에 러시아의 팽창에 반발하는 중앙아시아의 칸국들도 그들을 직접적으로 지원하고 러시아의 대상단(隊商團)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 예가 1836~1846년에 일어난 카심울리(Kasimuli)의 ‘반란’과 히바 칸국의 공개적 지원이었다. 러시아는 히바를 응징하기 위해 1839~1840년 대규모 원정군을 보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무참하게 괴멸되어 표트르 시대에 당했던 것 이상으로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다. 이제 러시아는 카자흐스탄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고 투르키스탄 칸국들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보다 남쪽으로 내려가 확실한 거점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으니, 그 거점은 다름아닌 타슈켄트였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국제정세로 볼 때 러시아의 타슈켄트 점령은 단순히 군사적인 작전으로만 끝날 성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러시아 입장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영국의 반발 가능성이었다. 즉 중앙아시아의 세 칸국의 남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미 인도를 식민지로 장악하고 있던 대영제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인도에서 자국의 이해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군사적 모험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인도의 앞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중앙아시아를 러시아가 석권하는 것은 영국으로서는 결코 강 건너 불과 같은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인도를 정복한 대부분의 세력들이 바로 중앙아시아에서 아프간을 거쳐서 들어왔다는 것은 역사가 입증하는 바이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던 러시아 정부, 특히 외무성 관리들은 가능하면 무모한 확장을 자제하고 영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중앙아시아 현지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 장군들의 생각은 달랐다. 전략적으로 볼 때 악크 메체트의 점령은 여전히 문제의 해결이라고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결국 궁극적인 해결책은 중앙아시아를 향해 뻗어 있는 두 개의 전략 라인을 연결하는 것밖에는 없었는데 그것은 곧 타슈켄트 공략을 의미했다. 그러나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2세로부터 그것을 허락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만 러시아중앙정부 역시 현지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인 지시를 하지 않았을 뿐 암묵적으로는 남진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현지 사령관들에게 주어진 선택은 단 하나뿐이었다. 즉 일을 저질러 놓고 보는 것이었다. 일단 러시아의 깃발이 올라가면 황제도 그것을 다시 내리라고 명령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성공하면 훈장감이지만 실패하면 불명예 제대를 각오해야 했다.
 

주간조선 ; [1982호] 2007.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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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25)] 소비에트 혁명과 중앙아시아

소련, 무슬림 단일국가 출현 막으려 카자흐스탄 등 5개‘스탄’으로 분할
볼셰비키는 중앙아시아 무슬림 세력을 혁명 파트너로 삼았다가 소비에트 정권 수립 후엔‘민족주의적 공산주의 배척’명분 탄압

▲ 소련에 의해 멸망한 부하라 칸국의 마지막 군주 무함마드 알림 칸(1880~1944). 1911년 촬영. 미 의회도서관 소장.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하기 전, 즉 과거 소비에트 연방을 구성하는 일원이었던 ‘우즈베키스탄 사회주의공화국’으로 존재할 당시 사람들이 부르던 ‘국가(國歌)’는 다음과 같은 가사로 시작되었다.

앗살람! 러시아 형제여,
그대는 위대한 민족!
불멸의 수령,
우리의 레닌 동지에게 영광 있으라!
자유를 위한 투쟁의 길에서
우리는 전진했으니,
소비에트 나라에서
우즈베크는 영광을 얻었도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하는 우리 애국가의 가사를 생각해본다면, 도대체 한 나라의 국가라고 하기도 어려운 내용이 아닐 수 없다. 누가 보아도 ‘큰 형(Big Brother)’ 러시아에게 노골적으로 아부하는 듯한 국가는 당시 우즈베크 민족의 처지를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지만, 이런 식의 가사는 우즈베크뿐만 아니라 타지크와 투르크멘 등 중앙아시아 다른 공화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우즈베크가 1991년 독립한 직후 가사를 갈아치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가사만 바뀌고 곡조는 옛날 그대로이니, 이는 러시아 지배의 역사적 유산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오늘날 중앙아시아에는 소위 ‘스탄(‘-stan’은 원래 이란어에서 ‘…의 땅, 지방’을 뜻하는 접미사)’을 돌림자로 갖는 5개의 공화국(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스탄·투르크메니스탄·타지키스탄)이 독립해 있는데, 소비에트 시대가 남긴 가장 큰 역사적 유산은 바로 이 같은 민족의 분할이다. 즉 이 지역이 19세기 후반 러시아 제국에 편입될 당시에는 그렇게 분명히 나뉘어 존재하지 않던 민족이 소비에트 체제를 거치면서 5개의 독자적 민족으로 형성되고 오늘날과 같이 각자 독립된 국가를 갖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그것은 20세기 전반 볼셰비키 혁명이 터지고 소비에트 체제가 확립되는 와중에 중앙아시아가 겪어야 했던 역사적 운명과 직결되어 있다.

20세기 초두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중앙아시아에서는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 인물은 크리미아 출신의 타타르인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Ismail Gasprinsky·1851~1914)였는데, 그는 소위 서구식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해 전통적 이슬람 교육방식을 지양하고 새로운 내용의 커리큘럼으로 이루어진 교육을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와 의견을 같이 했던 지식인들은 소위 ‘자디디즘(Jadidism)’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계몽운동을 펼쳐나갔다.

또한 당시 오스만 제국에서 일어나던 범(汎)투르크주의·범이슬람주의의 영향을 받은 지식인들이 부하라를 중심으로 봉건적 관습의 타파를 부르짖기 시작했다. 피트라트(Abdarrauf Fitrat·1886~1938)를 비롯한 이들은 소위 ‘부하라 청년단(Young Bukharans)’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의 목소리와 노력은 제정 러시아의 식민통치자들에 의해 견제를 받거나 러시아의 보호국으로 남아있던 부하라 칸국의 지배층에 의해 탄압을 받았고, 결국 이렇게 절망한 중앙아시아의 지식인들은 개혁이 아니라 사회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대안을 모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바로 그때 1917년 2월 러시아에서 혁명이 터졌고 제정 러시아가 무너진 것이다. 그러나 새로 수립된 임시정부는 중앙아시아의 민족적·문화적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과거 러시아 제국의 식민주의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이렇게 되자 러시아 영내의 무슬림(이슬람교도)대표들은 그해 5월 회의를 열고 범이슬람주의와 범투르크주의를 공식적으로 채택해 러시아 민족과의 차별성을 분명히 천명했다. 이런 가운데 10월에 다시 볼셰비키 혁명이 터졌고, 임시정부 측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의 지지를 필요로 했던 그들은 무슬림 민족주의자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다.

적군과 백군의 대립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결국 무슬림들도 양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러시아와의 타협을 거부한 채 게릴라식 투쟁방식을 택했던 ‘바스마치’ 운동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은 민족문제에 비교적 유연한 태도를 보였던 적군(赤軍) 측에 가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볼셰비키와 중앙아시아의 무슬림들은 결국 같은 배를 타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다른 목표를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별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즉 계급과 민족, 양자 가운데에서 어느 것이 더 우선시되어야 하는가를 두고 양측은 전혀 타협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즉 무슬림들에게 있어서 사회주의는 민족문제, 즉 민족의 자결과 번영이라는 지상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불과했다.

그들이 사회주의를 택한 것은 민족 해방을 위한 ‘이념’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대중을 동원하고 조직할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일찍이 혁명의 성공을 위해서 보다 많은 민족주의자와 제휴할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겉으로는 민족주의자를 표방하면서도 속으로는 사회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지만 중앙아시아의 무슬림 혁명가들은 사실상 “겉으로는 사회주의자이지만 속으로는 민족주의자”였던 것이다.

주간조선 ; [1983호] 2007.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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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기행(26) 끝] 몽골 사회주의 혁명과 '붉은 영웅'

청 붕괴 후 임시정부 세우고 독립운동
소련 이어 두 번째 사회주의 국가로

1992년 1월 몽골인들은 새로운 헌법을 공포하고 국호도 ‘몽골인민공화국’에서 ‘몽골국(Mongol Uls)’으로 바꾸었다. 국호의 개명이 이제까지 종주국을 자처해 오던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사회주의 체제의 굴레를 내던지고 자유경제와 민주선거를 지향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사회주의 혁명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울란바토르(Ulaanbaatar)’라는 이름을 바꾸자는 주장이 제기되지는 않은 듯하다.

현재 몽골의 수도인 이 도시가 17세기에 처음 세워졌을 때의 이름은 ‘우르구우(?rg??·거주지)’였고, 러시아나 유럽인들에게도 그 변형된 발음으로 전해져 ‘우르가(Urga)’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18세기에 들어 ‘이흐 후레에(Ikh Kh?ree·커다란 둔영)’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기 시작했고, 청나라 자료에는 이를 한자로 옮긴 ‘고륜(庫倫)’이라는 표기가 자주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20세기에 들어와 사회주의 혁명이 터지고 1924년 이 도시가 정식으로 인민공화국의 수도가 되면서 그 명칭도 혁명적 의미를 지닌 ‘붉은 영웅’, 즉 울란바토르로 바뀌게 된 것이다.



▲ 몽골 울란바토르 시내 수흐바토르 광장에 서있는 수흐바토르상(像).
몽골은 러시아의 뒤를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나라이다. 이는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던 중국이나 북한보다도 무려 20년 이상이나 앞선 것이다. 다만 몽골은 소련의 위성국 처지에 머물면서 국제사회에서 주목을 받지 못했고, 우리와의 관계도 완전히 단절되어 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20세기에 들어와 그들이 겪은 우여곡절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들의 근현대사도 결코 순탄치만은 않은 것이었다. 고비사막 이북의 ‘외몽골’과 이남의 ‘내몽골’이 2~3세기에 걸쳐 만주족이 지배하는 청제국의 일원으로 존재하다가 한쪽은 독립된 국가로 발전하고 다른 한쪽은 중국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우리가 남북으로 분단된 것과도 유사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면, 내몽골은 장차 중국과 몽골의 정치·외교적 관계에 있어서 매우 민감한 문제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튼 청 지배하의 몽골이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은 20세기 초 청·러 두 제국의 붕괴와 러시아 혁명이라는 역사적 격랑을 몽골이 어떻게 헤쳐나갔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므로, 우리의 눈길을 1세기 전으로 되돌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9세기 말 몽골은 이미 과거와 같은 유목사회의 다이내미즘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그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청나라가 실시한 팔기제(八旗制)의 영향, 티베트 불교의 확산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여파, 중국 상업자본의 진출에 의한 유목경제의 붕괴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팔기제는 유목민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을 금지하고 일정한 영역 안에 머무르도록 규정했기 때문에, 이로 인해 몽골인은 기동성이라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동력과 무기를 상실하고 말았다.

또한 불교 사원이 초원 곳곳에 생겨나고 정치·경제적 영향력도 커지면서 수많은 몽골인이 라마승을 자원하게 되었고, 급기야 19세기 말 성인남자 전체의 반 가까운 수가 라마승이 될 정도였다. 물론 이들이 모두 절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은 아니었고 재가(在家)·대처(帶妻)하는 승려가 많았지만, 이는 분명히 유목사회를 변질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청 정부의 면허를 받아 초원 각지에서 활동하던 산서(山西)성 출신의 한인(漢人) 상인들은 고리대금업을 통해서 몽골인들의 경제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거액의 부채를 지게 된 귀족들은 일반 유목민에게 그 상환을 전가하였고, 이로써 유목민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어 갔다.


19세기 말 몽골 각지에서 한인 상점들에 대한 약탈과 방화 사건이 터지고, 1900년에는 울리야수타이라는 도시에서 폭동이 일어나 청나라 관리와 병사들이 추방당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나아가 1906년에는 청조가 내외적인 온갖 위기와 모순을 타개하기 위하여 소위 ‘신정(新政)’을 표방하고 그 일환으로 관제개혁을 실시하였는데, 이제까지 몽골을 일종의 특별구역으로 취급하던 관례를 깨고 중국 내지와 동일한 관제를 그대로 적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는 몽골의 귀족·왕공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가져다주었으며, 1911년 여름에는 불교 교단의 수장이던 ‘젭춘담바 후툭투(Jebtsundamba Qutuqtu·일명 보그드 한)’, 그리고 당시 몽골을 지배하는 4명의 칸이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로 밀사를 파견하여, 청 정부가 관제개혁을 취소하도록 압력을 넣어달라는 요청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몽골의 왕공들이 이미 청나라가 붕괴되기 전에 독자적 생존을 모색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1911년 10월 드디어 호북(湖北)성 무창기의(武昌起義)를 시발점으로 신해혁명이 터지고 청나라가 붕괴되자마자 몽골의 귀족들은 우르가에 모여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립을 선언하였다. 중국에서 실권을 장악한 원세개(袁世凱)가 그 다음 해에 몽골 측에 전문(電文)을 보내 새로 성립한 중화민국으로 복귀할 것을 종용했는데, 이에 대해서 그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답신을 보냈다. “중국과 몽골은 모두 만주인에 의해 지배를 받으면서 통합되어 있었다. 이제 만주인들의 나라가 사라졌으니 우리는 서로 제 갈 길을 가야 할 것이다.” 이 답신은 청제국과 몽골의 관계에 대한 몽골인의 관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즉 몽골은 ‘중국인(=한인)’의 지배를 받은 것이 아니라 만주인의 지배를 받았을 뿐이며, 그런 면에서 중국인과 몽골인은 모두 제국의 동일한 신민(臣民)에 불과하고, 정치적으로 어느 일방이 다른 일방을 지배할 아무런 역사적 근거도 없다는 것이다.

주간조선 ; [1984호] 2007.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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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기행] 연재를 마치며

중앙유라시아의 세계사적 의미 재평가
21세기 한국의 미래 위한 나침반 되길

‘중앙유라시아 역사기행’을 통해서 우리는 지난 3000년 동안 중앙유라시아의 초원과 사막을 무대로 펼쳐진 다양한 역사의 현장들을 찾아보았다. 그동안 이 글을 챙겨서 읽은 독자라면 그 수많은 현장에서 조금은 낯선 역사의 주인공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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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해(黑海) 연안의 초원을 주름잡던 스키타이인, 실크로드를 누비던 소그드의 국제상인들, ‘타타르의 땅’을 찾아나선 유럽의 프란체스코파 수사(修士)들, 만주족 강희제와 제국의 운명을 걸고 대결을 벌인 갈단…. 어쩌다 들어봤을지 모르지만 우리와는 별로 관계가 없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러했다면 그것은 필자의 의사전달이나 표현능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번 ‘역사기행’을 통해서 전해주고 싶었던 메시지는, 그 동안 우리가 생소하게 여겨온 중앙유라시아라는 지역에서 벌어진 일들이 사실은 세계사의 전개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실크로드 ‘과잉’에서 벗어날 때

또한 그곳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마치 강력한 지진파가 외부를 향해 퍼져나가듯 주변 세계, 즉 동아시아·서아시아와 유럽에 부단한 충격을 가하며 그 역사적 흐름에 영향을 미쳐왔다는 사실을 여러 사례를 통해서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

전문적인 연구자냐 아니냐를 불문하고 이제까지 중앙유라시아에 대한 관심의 초점은 지나치리만큼 실크로드에 맞추어져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실크로드가 역사적으로 동서문화를 매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본래 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연결하던 내륙 교통로를 지칭하던 실크로드라는 말의 의미가 점차 확대되어 북방의 초원루트와 남방의 해양루트까지 포괄하게 되면서 이제는 역사적 개념으로서의 유효성을 의심케 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 지난 7월 11일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열린 몽골 전통축제 '나담축제' 개막식에서 기마대가 트랙을 따라 행진하고 있다. / photo 조선일보 DB
더구나 실크로드의 상업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그 이국적이고 낭만적인 측면이 정도 이상으로 부각되었고, 이는 실크로드의 역사적 진상을 호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이제는 중앙유라시아의 역사를 바라볼 때 이 같은 실크로드 ‘과잉’에서 벗어나 그 세계사적 의미를 진지하게 다시 검토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해외 역사학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우리에게 좋은 출발점을 제시하고 있다. 즉 냉전의 종말과 인터넷의 확산은 그야말로 ‘지구화(globalization)’ 시대로의 진입을 실감케 하고 있는데,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발맞추어 역사학계에서도 이제까지 고립되고 독립적인 국가·지역·문명에 대한 연구에서 벗어나 ‘세계’를 하나의 단위로 하는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소위 ‘신(新) 세계사’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 같은 경향은 중앙유라시아의 세계사적 의미에 대한 근본적 재평가를 요구하고 있다.

더 이상 ‘변방의 역사’ 아니다

예를 들어 제리 벤틀리(Jerry H. Bentley)와 같은 학자는 기원후 500년에서 1500년까지의 1000년을 ‘유라시아적 통합’이 이루어지던 시기였고, 특히 1000~1500년의 기간은 ‘초(超)지역적 유목제국’이 주도하던 시대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서구에 의한 소위 ‘근대적 세계체제’가 성립되기 이전에 이미 유목제국에 의해 구대륙의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 같은 통합은 기존의 ‘실크로드’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보다 근본적이고 다양한 형태의 정치·경제·문화적 교류와 융합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중앙유라시아는 ‘세계사’의 지나온 궤적을 이해하는 데 매우 긴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더 이상 ‘변방의 역사’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중앙유라시아의 중요성에 대한 재인식은 우리 민족의 과거를 올바로 이해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세우는 데도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21세기 인류의 역사는 엄청난 변화를 예고하고 있고 그 격랑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세계관과 가치관의 정립을 요청 받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지혜를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는가. 작금의 상황을 돌이켜보면, 지난 몇 세기 동안 확고부동하던 ‘서양’의 절대적 우위는 흔들리는 반면 이슬람의 도전과 중국의 부상(浮上)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변화가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으며 장차 세계사의 흐름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겠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해 국제 학술계에서는 치열한 지적 모색이 진행 중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우리나라에서 유행되다시피 한 서구중심적 관점에 대한 비판은 카타르시스를 위한 심리적 효과나 독자의 호응을 기대하는 상업적 효과는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 이상의 건설적 대안이 되기는 어렵다.

지구촌은 머지않아 ‘다(多)중심체제’의 시대로 진입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중심’들이 형성될지는 두고볼 일이지만, 현재로서는 구미권·이슬람권·중화권과 같은 커다란 블록이 예상된다. 물론 인도나 중남미 같은 변수도 존재할 것이다. 아무튼 문제는 우리 한국이다. 개항 이후 지금까지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쳐온 서구의 문명·과학·이념을 비판하고 거부한다고 해서 중국 중심의 세계관으로 회귀할 수도 없는 문제이다. 이슬람은 우리에게 하나의 패러다임이긴 하지만 우리의 것으로 수용하기는 어려운 실체이다.

우리 민족 역사와도 깊은 연관성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역사기행’에서 중앙유라시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통해서 21세기를 맞아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서 성찰하고 미래를 위한 새로운 비전을 형성하는 데 작으나마 기여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중앙유라시아는 세계사의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적어도 지난 2000년 동안 한반도와 그 주민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쳐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동안 우리는 한민족의 독자성과 지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한반도와 중앙유라시아, 즉 역사적 ‘남북관계’를 항상 대립적인 것으로 서술해왔다. 그래서 북방 ‘오랑캐’와의 항쟁을 강조해왔고, 몽골의 지배를 받던 고려시대는 외세에 굴복한 수치스러운 역사의 일부인 것처럼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돌아보면 ‘남북관계’는 대립에서 융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의 접촉과 교류를 포괄하는 관계였다. 우리의 언어·풍속·제도·종교 등 여러 방면에서 우리는 그 영향을 받아왔다. 한반도는 한편으로는 바다를 향해 열려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중앙유라시아를 향해 열려 있었고, 북방의 채널을 통해 그곳의 문물이 끊임없이 흘러들어온 것이다.

필자는 지금이야말로 중앙유라시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세계사의 지난 궤적을 이해하고 현재의 국제적 상황의 원천을 올바로 파악하는 데 긴요할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적 정체성과 미래 비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필수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우리 역사는 지나칠 정도로 ‘중국중심’ 혹은‘민족중심’으로 해석되어왔다. 중앙유라시아와의 연관성은 한낱 에피소드로 치부되었지 우리 역사에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지는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편견을 벗어버려야 할 때다. 한반도가 지리적으로 만주와 몽골을 거쳐 대륙으로 연결되어 있듯 우리의 역사도 중앙유라시아와의 심층적이고 광범위한 연관성 속에서 전개되고 발전되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 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hdkim@snu.ac.kr

주간조선 : [1984호] 2007.12.17

첨부 : 중앙유라시아 역사기행 

첨부파일 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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