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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일어나는 순간 알아차리십시오

작성자이성준|작성시간09.11.12|조회수40 목록 댓글 0

Q. 저는 화가 나면 말을 하지 않고 속으로 삭입니다. 말을 하자니 사안이 너무 소소하고 안 하자니 화가 나요. 화가 날 때,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 버리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지금처럼 꾹 삭이는 것이 좋을까요. 화를 다스리는 법을 알려 주세요.

 

A.

화를 낼까요, 참을까요?

   화가 났을 때 우리들이 취하는 행동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화가 일어나니까 화를 내 버리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화가 일어나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꾹꾹 참는 경우입니다. 화가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바깥으로 다 표출해 버리는 게 제일 쉽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질대로 화를 낼 때를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화를 벌컥 낼 때는 모르지만 지나고 보면 사실 화내는 일도 힘이 듭니다. 굉장한 에너지를 발산하기 때문에 무척 피곤합니다. 화를 내면 상대방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잘못했다고 용서를 빕니까? 주로 더 세게 맞받아치기 때문에 화가 더 나죠. 그리고 힘이 부족할 때 화를 내면 두들겨 맞기까지 합니다. 내가 욕한 것보다 더 많은 욕을 얻어먹을 수 있지요. 그래서 화를 낸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큰 손해를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화가 나지만 참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화를 참기로 선택한 것은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사실은 나를 위해서 참는 겁니다. 참고 싶어서 참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쩔 수 없으니까 참는 거지요.

   그런데 화를 참는다고 모든게 해결될가요? 참는 것은 좋은데 참다가 못 참아 터지면 더 나쁜 결과가 나오죠. 아이를 야단칠 때도 두세 번은 참다가 화가 터지면 아이를 마구 두들겨 패게 되듯이, 화를 참다 그 화가 폭발하면 눈에 뵈는 게 없어집니다. 그래서 살인을 하거나 폭력을 행사허가너 자살을 하는 등 극한적인 행동으로 자신을 몰고 가기도 합니다.

   참는 것은 나에게도 괴로움입니다. 그래도 참을 만하면 괜찮은데 이것이 터지는 게 문제이지요. 또 터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참는 것이 오래 누적되면 스트레스가 쌓입니다. 스트레스가 자꾸 쌓이면 목이 뻣뻣해지고 뒷골이 아프다가 조금 더 심해지면 눈이 침침해지고 거기서 더 심해지면 머리가 아픕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여성들이, 특히 부인들이 참는 게 약이다 해서 너무 참다가 다른 나라 사람에게는 거의 없는 '화병'이 많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화를 내지 못하도록 너무 억눌러 온 문화였기 때문에 정신과에서는 환자들에게 화를 내도록 유도합니다. 그런데 당사자에게 대놓고 화를 낼 수는 없으니 화나게 만든 상대의 얼굴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허수아비를 만들어놓고 실컷 욕을 하게 한다든지 몽둥이로 두들겨 패게 합니다. 이런 식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나면 좀 시원해지지요. 그러나 문제가 근원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부처님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셨을까요? 화가 난다고 화를 내 버리는 것은 제1의 길인 쾌락에 속합니다. 화가 날 때 무조건 참는 것은 제2의 길인 고행에 속합니다. 제1의 길, 제2의 길도 해탈의 길은 아닙니다. 해탈의 길은 두 길을 떠난 제3의 길 '중도(中道)'입니다. 우리는 화가 일어났을 때 화를 내거나 참거나 하는 두 가지 길밖에 모르지요. 그러면 제3의 길인 중도의 길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화가 일어나는 순간 알아차리십시오.

   우리는 보통 화가 나면 눈에 뵈는 게 없다는 말을 합니다. 이건 '알아차림이 없다, 제정신이 아니다, 무지의 상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화가 일어날 때는 첫째, 화가 일어나는 줄을 빨리 알아차려야 합니다. 여기서 '화가 일어나는 것'과 '화를 내는 것'은 다른 말입니다. 화가 일어나는 것은 자기 속에서 화가 일어나는 것을 말하고, 그것을 바깥으로 드러내는 게 화를 내는 것입니다. 화가 일어날 때 자기 자신은 잘 모릅니다. 화라는 것은 '내가 화를 내야지.' 하고 생각을 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순간에 화를 내는 본인은 자신이 화를 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화가 심하게 일어나는데도 자신이 화가 이렁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화를 벌컥 밖으로 내고 맙니다. 그러나 화가 일어나는 그 순간에 곧 알아차리면 화는 사라집니다. 그런데 화가 일어나는 순간에 알아차리지 못하고 좀 늦게 알아차리게 되면, 알아차렸는데도 화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마치 두 개의 부싯돌이 부딪쳐 불이 일어났을 때 옆에 불이 옮겨 붙을 솜이 없으면 그냥 사라져 버리지만 솜이 옆에 있어서 솜에 불이 옮겨 붙으면 급속히 커져 쉽게 꺼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화가 일어나는 순간에 알아차리는 게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첫째, 알아차림에 대한 연습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는 알아차림이 없는[無知] 상태가 지속되기 때문에 '순간순간 깨어 있어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순간순간에 깨어 있으면 일어나는 즉시 알아차릴 수 있으니까요.

   화가 일어나는 순간에 그 화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화가 약간 많이 일어났을 때는 알아차려도 화는 금방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둘째, 화가 사라지지 않을 때는 화를 지켜봐야 합니다. 화를 내거나 참는 쪽으로 가지 말고, 화가 일어나고 있는 상태를 지켜보는 것입니다. 이는 알아차림의 지속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만 알아차리고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 알아차림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를 '지켜보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다시 말하면 화가 일어나는데서부터 시작해 화가 사라질 때까지 지속적으로 알아차림이 계속돼야 하는 것이지요.

   알아차리면 그 화가 더 이상 커지지 않습니다. 알아차림이 지속되면 일정하게 지속되던 화가 저절로 사라집니다. 알아차린 상태에서는 화가 1년이고 2년이고 계속 유지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1초간 유지되다가 사라지거나 10분간 유지되다가 사라지거나 합니다. 그런데 화를 참았을 때는 계속됩니다. 5분이면 5분, 10분이면 10분, 1시간이면 1시간 지속됩니다. 그런데 알아차림만 있으면 화가 저절로 사그라집니다.

   그래서 참으려고 노력하지 말고, 화가 일어남을 알아차리고 그 알아차림을 지속하면서 저절로 사그라질 때까지 지켜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화의 존재를 매우 뚜렷히 바라본다는 뜻에서 이를 '관범(觀法)'이라고 하지요. 원어로는 '위빠사나'라고 부릅니다.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은 본래 없습니다.

   그럼 보통 화는 왜 일어날까요? 그가 어떻게 말하고 어덯게 행동했기 때문에 화가 났다고 말하지만, 그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 때 모든 사람에게 다 화가 일어날까요? 어떤 사람은 화가 나지만 어떤 사람은 화가 나지 않습니다. 나 혼자만 생각하면 그 때문에 화가 났다고 말할 수 있지만, 여러 명이 있을 때 보면 어떤 사람은 화가 나고 어떤 사람은 화가 안 납니다. 예를 들어서 기독교인이 뭐라고 했을 때, 그 얘기를 듣고 불교인은 화가 날 수 있는데 기독교인은 화가 안 납니다. 대통령이 어떤 말을 했을 때 어떤 지역 사람들은 화가 나지만 어떤 지역 사람들은 화가 안 나기도 하고, 또 누군가의 말에 남자는 화를 내는데 여자는 화를 안 내는 경우도 있지요.

   이렇게 보면 그 사람이 나를 화나게 했다는 것은 나의 경우에 견주어 볼 때만 일어나는 착각일 뿐, 진실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나를 화나게 하는 게 아니라, 그사람의 행동과 말을 보고 내가 화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행동을 보고 내가 화나지 않는 경우도 있고 화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화가 나는 경우는 '내가 옳고 그가 잘못됐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화가 인러아는 것은 내가 내 의견이나 가치관, 생각을 옳다고 고집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화가 나지 않으려면 내가 옳다는 생각을 탁 놔버리면 됩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지요.

 

   여기 산이 하나 있습니다. 산 오른쪽에 사는 사람에게는 이 산이 서산(西山)이 됩니다. 그런데 산 왼쪽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 산이 동산(東山)이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동산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마을 사람들이 다 그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다 그렇게 말한다.'는 것은 자신의 말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다수의 의견을 통해 자신의 주관을 객관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옳다 그르다 하는 문제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생각이 바뀌거나 장소가 옮겨지거나 시간이 흘러가면 옳다는 것이 바뀌게 되는 겁니다. 같은 나라 안에서도 신라시대나 고려시대 또는 조선시대 때 옳은 것과 현재 옳은 것이 다를 수가 있고, 현대 와서도 박정희 시대 때 옳다고 평가되었던 것이 김영삼, 김대중 시절에는 잘못된 것으로 평가되죠. 또 그때 옳다고 평가되었던 것이 지금에 와서 잘못되었다고 평가되는 것도 있습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이 어릴 때 옳다고 주장했던 것이 지금은 애를 낳아서 키워 보니 그때 엄마, 아빠의 심정이 이해되고 '내가 잘못했구나.'하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은 주관적이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옳다 그르다 할 것이 본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화가 날 때에는 '내가 또 나를 고집하는구나, 내 생각만 옳다고 여기고 있구나.'하고 돌이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또 수행을 해야 이러한 돌이킴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알아차림이 없이 이미 화가 나 버렸다면 화가 난 훙라도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을 알아차려야 하고 지속적으로 지켜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켜보아도 화가 계속 난다면, 그때에는 상대편 입장에 서서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을 내야 합니다. 화를 내 버렸거나 화를 계속 참고 있다면 참회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무조건 '제가 잘못했습니다.'하고 참회하라는 게 아닙니다. 그런 참회의 기도는 '내가 뭘 잘못했는데?'라는 생각이 일어나게 만듭니다.

  참회기도는 '내가 당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당신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었겠네요. 그런데 내가 너무 내 입장만 고집해서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신을 미워했으니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생각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화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마음 이해하기는 곧 내가 참회하기로 직결됩니다. 참회한다는 것은 상대편 입장에서 이해하기의 일환입니다. 이것이 내가 옳다는 것을 내려놓는 방법입니다.

   선종에서는 화가 일어날 때 화를 지켜보거나 참회하지 말고 '왜 화가 일어날까?' 하고 참구(參究)하라고 합니다. 화가 일어나면 '너 때문에', '나 때문에' 이렇게 단정하지 말고, 어떤 단정도 하지 말고 다만 '왜 화가 일어날까?' 하고 참구만 하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방법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 수행해 나가면 지금보다 훨신 더 편안해질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제일 쉬운 방법은 참회하기입니다. 초심자는 지켜보기도 참구하기도 잘 안 되기 때문에, 상대편 입장에서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한 나를 중심으로 이해해서 그를 미원한 것에 대해 참회하는 방법이 더 쉽습니다. 그러니 초심자는 참회하기를 통해서 과거에 쌓인 스트레스를 먼저 풀어야 합니다. 과거에 쌓인 것들이 지금의 상황을 증폭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과거에 쌓인 스트레스를 다 풀어 버리면 지금 것은 그대로 지켜보기가 훨씬 수월해집니다.

 

-<행복한 출근길(법륜 지음, 김영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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