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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베토벤 / 교향곡 제9번 "합창" 제4악장

작성자깊은연못|작성시간07.12.15|조회수51 목록 댓글 0

 

Beethoven Symphony No.9 D Minor Op.125
Choral mov.4 "Ode to Joy" "O Freunde, nicht diese Tone!"


쿠르트 마주르(Kurt Masur) 지휘

 Leipzig Gewandhaus Orchestra    
Venceslava-Freiberger, soprano
Doris soffel, mezzo
Wagner, tenor
Gwynne Howell, bass


독일 라이프지히의 게반트하우스 콘서트홀에서
공연된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의 라이브 레코딩입니다

쉴러(Schillers)의 환희에 붙임 이라는 시에 의한 합창이 있는 교향곡으로 흔히
이 곡은 코랄 심포니(Choral Symphony)'라 부르는데 이 명작은 그의 고향인 본
시대부터 창작하여 1798년의 작곡 스케치북에 이 시의 일부가 멜로디와 함께 기록
되어 있었습니다.

1822년 10월 10일 런던 필하아모니 소사이어티로부터 교향곡 작곡의 청탁을 받은
것이 이 작품을 실현시키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이 거작은 1823년 말경에
완성 되었는데 무려 31-2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을 초월한 인류 최고의 예술 작품은 1824년 5월 7일 비인에서 작곡가
자신의 지휘로 초연 되었습니다. 이 때의 실질상의 지휘는 미하엘 움라우프와 악장은
슈판치히 등이 담당하였습니다.

이 음악 속에는 인간이 가진 모든 희노애락에 대한 깊은 공감과 그의 해석,다시 말해서
그의 철학인 동시에 인생관을 여기에 피력한 것입니다.

<해 설>

1826년에 출간 된 초판 스코어의 제명에 [실러작 송가'환희에 붙임'을
마지막의 합창으로 한 대관현악, 4성의 독창, 4성의 합창을 위해 작곡되었으며,
프로이센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폐하에게 심심한 경의를 표하기 위해
루드비히 반 베에토벤에 의해서 봉정된 교향곡 작품 125]라고 기재되어 있으며,
이것이 이 작품의 바른 명칭이다.

 9번 합창 교향곡은 베토벤이 20년이 넘는 기간동안작곡을 했으며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고전주의의 완성이자 낭만주의 문을 여는 기가막힌 작품이라 평할 수 있다.

특히 4악장에 합창을 넣은 것은 베토벤이 사람의 목소리까지 넣은 모든 악기를 동원한
조화의 걸작으로 보통의 교향곡 구성에서 2,3악장이 자리를 바꾸었고,
1악장에 핵심 주제가 자리잡고 있으며, 4악장에서 그 핵심 주제를
하느님께 대한 신앙, 인류의 평화, 만물의 조화로 풀어내고 있다. 

이 곡은 베토벤 예술의 최고 절정을 이루고 있으며,

고금의 교향곡 중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품의 하나이다.

베토벤이 항상 공감하고 애독했던 독일의 위대한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Fridrich Schillers)의 장시 <환희의 노래> 에 의한 합창 붙임을 가진 교향곡이며,
네 사람의 독창과 대합창이 교향곡에 사용된 최초의 음악이다.
23살의 젊은 베토벤은 <환희의 노래>를 읽고 음악으로 옮기려고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실제로 <환희의 노래>가 교향곡에 담겨 완성된 것은 31년 뒤인 1824년이다.

베토벤이 처음으로 교향악과 칸타타의 결합을 시도한 것은 1808년의 《합창 환상곡》작품 80번에서였으며 이 시도 가 후에 《합창》교향곡이란 위대한 작품을 만들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 곡을 작곡할 때 베토벤은 완전히 귀머거리가 되어 음향의 세계와 단절된 상태에서 무한한 고통과 싸워야 했고, 육체적인 건강의 악화와 가난 때문에 그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그러한 환경에서 그는 고뇌를 맛본 환희를 영원히 노래 부르고 음으로써 표현한 것이다.
그는 예술에 의해 인간의 고난을 극복했으며 역경에 놓일수록
그것을 이겨나가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제4악장 프레스토 D단조 3/4박자 < 실러의 환희의 송가 >

혼성 4중창(소프라노, 알토, 테너, 바리톤)


 

이 악장은 네 사람의 독창자와 대합창을 사용한 마지막 악장으로 《환희의 송가》이다. 관현악의 서주로부터 시작되는 이 악장은 변주곡 형식이라 할 수 있는데 형식적인 것보다는 고뇌를 이겨내고 환희 에 도달한 음악 내용이 압도적인 힘으로 우리를 제압한다.

먼저 관악기만으로 숨가쁘고 리드미컬한 곡취를 나타내는데 이것들은 제1, 제2, 제3악장의 주요한 악상을 회고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베토벤 자신이 <아니다(Nein)>라고 적어 넣은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에 의한 레치타티보풍의 가락을 무반주로 제시한다. 그리고 망설이던 《환희》의 주제가 되풀이된다. 리드미컬한 팡파르가 짧은 명상을 깨뜨리고 울리다가 멎자, 바리톤이 힘차게 노래를 시작한다.

'오! 벗들이여 이 가락이 아니고 더욱 즐거운 가락 그리고 환희에 넘친 가락을 함께 부르자!'

이 가사는 실러의 시에 의한 것이 아니고 베토벤 자신이 붙인 것이다. 바리톤 독창은 이어서 처음에 기악으로 모습을 보였던 레치타티보 가락에 의한 환희의 주제를 노래 부른다.

'환희여! 아름다운 주의 빛,
낙원에서 온 아가씨여,
정열에 넘치는 우리들은 그대의 성정에 들어가리.
그대의 매력은 가혹한 세상의 모습에 의해 떨어진 것을 다시 결합시키도다.
그대의 날개에 머물 때 모든 사람들은 형제가 되리.'

이 노래는 모두 함께 부를 수 있는 16마디로 된 민요풍의 노래이다.
곡은 일변하여 안단테 G장조 3박자로 위엄있게 된다. 남성 합창이 코랄풍의 노래를 장중하게 부르기 시작하여 높은 음의 현과 함께 여성이 등장한다.

'포옹하라! 만민들이여!
온 세상에게 이 키스를 주리. 형제들이여!
푸른 하늘 위에는 사랑하는 주가 꼭 계시리.
땅에 엎드려 비나니 만물들이여 조물주를 믿는가?
푸른 하늘 위에서 주를 찾으라. 많은 별 위에 그는 꼭 계실 것이다.'

이윽고 혼성합창으로 포옹하라의 선율과 환희의 주제가 얽힌 장려한 2중 푸가가 전개된다. 알레그로 에네르지코 셈플 마르카토의 D장조 6/4박자이다. 2중 푸가가 귀결부로 들어가면서 다시 기도의 대화가 시작된다. 그리고는 곡상이 변하여 2/2 박자의 조심성 있는 알레그로로 된다.

환희의 주제에 의한 변주로 돌아가서 네 명의 독창자와 합창이 《환희의 송가》 첫 구절의 새로운 변주를 주거니 받거니 노래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전곡의 코다가 되어 독창과 합창은 프레스티시모로 열광적인 환희를 노래한다.

'품에 안겨라. 만민들이여!
온 세상에 이 키스를 주리... 환희여!
아름다운 주의 빛,
낙원에서 온 아가씨들이여, 환희 여, 아름다운 주의 빛.'

마지막에 전 관현악 악기는 합창과 함께 무한한 환희 속에서 화려하게

 

베토벤의 9번교향곡 "합창" 마지막악장이다.  마지막 4악장에서는 3악장의 회상(回想)에 이어 독창·합창이 환희의 송가를 노래한다. 베이스가 독창으로 [오 친구여, 이런 음들 말고 좀더 즐거운 음에 소리를 맞추세. 좀더 즐거운 음에라고 노래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베토벤이 쓴 구절로, 실러의 시에는 없다. 그리고 앞의 저음역 현악기와의 레치타티보풍의 선율로 노래하여 그 악구의 의미를 여기서 명확히 보여준다. 그리고 환희의 주제가 실러의 송가로 노래된다. 합창도 가세하여 환희의 세계가 펼쳐지며 모든 인류가 하나의 동포로서 서로 평화롭게 지내자는 소리가 높아진다. 변주7에서 행진곡풍이 되며, 이어 종교적인 분위기가 조성되고 이후 2중 푸가토가 된다. 이렇게 감동 속에서 곡 전체의 클라이맥스가 이루어지며, 마지막으로 [환희의 아름다운 신의 섬광]이라고 소리높여 부르면서 힘차게 곡을 마친다.

 

 

 

합창교향곡 [ 合唱交響曲 , Choral Symphonie ]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의 교향곡 제9번.
제작연도 : 1823년

작품 125, D단조이다. 1822∼1824년 초에 작곡된 것으로, 9곡의 교향곡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베토벤의 후기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정식 표제는 《실러의 송가(頌歌) 〈환희에 붙임〉에 의한 종결합창을 수반한 관현악, 독창 4부와 합창을 위한 교향곡 제9번》으로 되어 있다.

소나타 형식으로 된 몹시 빠른 제1악장, 스케르초의 제2악장, 느린 제3악장과 마지막 악장에서는 앞선 3악장의 회상(回想)에 이어 독창·합창이 환희의 송가를 노래한다. 성악을 교향곡에 도입하는 등 당시로서는 매우 대담하게 표현하였다.

또 이 곡은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Friedrich Wilhelm Ⅲ:1770∼1840)에게 헌정되었으며, 표제에 '요한 프리드리히 폰 실러(Johann Friedrich von Schiller)의 환희송가에 의한 종말 합창이 있는 교향곡'이라고 적혀 있어 '합창교향곡'이라고 불린다. 교향곡의 역사, 나아가서는 서양음악사에서 금자탑이라 할 만한 작품이다.

30살 무렵부터 음악가에게 생명과도 같은 청각이 감퇴되어 45살에 이르러서는 청각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이 때문에 너무나 절망한 나머지 그는 동생에게 유서를 쓴 뒤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을 되돌려 아무 소리도 없는 침묵 속에 살면서 음악의 길에 계속 정진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최고 대작으로 꼽는 제9번 합창교향곡도 50살이 넘어서야 완성되었다.

1824년 5월 빈에서 베토벤이 스스로 지휘봉을 잡고 초연하였는데, 당시 베토벤은 청력을 잃은 상태라, 마지막 악장을 마쳤을 때 베토벤은 음악이 끝난 것도 몰랐고, 청중의 엄청난 박수가 쏟아지는 것도 듣지 못한 일화는 유명하다.

베를린 주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데, 2002년 악보로는 처음으로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교향곡 제9번> 제4악장의 유명한 [환희의 주제]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근원을 찾는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거기에는 1794년 또는 1795년 초에 씌어진 가곡 <사랑받지 못하는 이의 탄식>(Seufzer eines Ungeliebter)과 <서로 사랑함>(Gegenliebe)의 부분이 발견된다. 이 가사는 뷔르거 (1749~1795)가 쓴 것으로, 사상적으로는 실러의 것과 관계가 없다. 또한 이 선율은 1808년에 완성된 <합창 환상곡> 작품80의 노래 주제로 다시 사용된다.

1812년이 되면 [환희의 주제]를 위한 또다른 스케치가 나타난다. 이것은 3/4박자의 것으로 첫째박에만 선율음을 두고, 둘째박과 셋째박을 쉼표 처리한 것이다. 또한, 1822년에는 4/4박자의 현재의 것과 동일한 선율이 스케치 노트에 등장한다.

이처럼 제4악장의 가사와 주제만 놓고 보더라도 <교향곡 제9번>이 완성되기까지 작곡에 걸린 기간은 매우 길다. 다른 악장의 경우 1809년의 스케치에서 처음으로 현재의 제1악장 첫머리의 복안이 씌어져 있는 것이 발견된다. 1811년과 1812년경에는 이라는 필적이 있으며, 1812년 5월 말의 편지에는 [지금 3곡의 교향곡을 작곡하고 있으며, 한 곡은 이미 완성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 3곡은 교향곡 제7번과 제8번, 그리고 제9번 d단조 교향곡이다.

1815년은 빈 회의가 열린 해이며, 베토벤 개인적으로도 영광의 해라고 할 수 있다. 스케치 노트에서는 현재의 <교향곡 제9번> 제2악장의 스케르초 주제가 발견된다. 또한 1817년 9월경부터 1818년 5월경까지의 스케치 노트에서는 현재의 제1악장의 대체적인 윤곽과 전체의 구상도 발견된다. 1818년에는 교향곡에 옛 조성을 지닌 종교적인 노래를 도입하는 것 때문에 고민하며, 마지막 악장이나 아다지오에 노래를 삽입하기로 한다. 즉, 아다지오에는 그리스의 종교적이며 신비한 가사를, 마지막 악장에 바쿠스의 제전을 배치하려고 한다. 그 무렵 베토벤은 2곡의 교향곡을 쓰려고 계획하고 있었으므로 어느 곡에 성악을 도입하려 했는지 단정할 수는 없다.

이 1817년부터 1818년까지 베토벤은 개인적으로 행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귓병에 대해서는 완저히 체념 상태였으며, 몸도 좋지 않아 기관지와 장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다. 더구나 베토벤을 둘러싼 빈의 음악계는 심원한 음악을 반기지 않는 분위기였으며, 정치적으로도 메테르니히의 철권보수 반동체제를 확립하여 자유주의가 승리하기를 기대하던 시민들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다. 베토벤은 이런 상황을 참을 수 없었다. 또한 조카인 카를을 돌봐야 하는 문제도 있었다. 점점 불량해지는 카를에 대해 피붙이로서의 애정을 쏟으며, 품행이 좋지 않은 카를의 엄마와 카를의 양육을 둘러싸고 재판까지 벌이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베토벤의 창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당연하였으며,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 가운데 남모르게 진척시키고 있었던 것이 <교향곡 제9번>의 제1악장이었다. 이 악장의 커다란 스케일과 투쟁적 득성, 고투하는 모습은 당시 베토벤이 겪던 어려움을 이해할 때만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병마와 육체적 피로, 마음의 아픔과 같은 악조건에 둘러싸인 베토벤에게 1818년 영국으로부터 최신식 브로드우드 피아노가 기증되었고, 이를 계기로 베토벤의 피아노 음악에 대한 의욕이 다시 타오르게 된다. 또한 그해 가을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 빈을 벗어나 이전부터 있었던 초청을 받아들여 런던의 필하모니 협회에서 교향곡을 초연하려는 계획도 진척시키고 있었다(그러나 이것은 실현되지 못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장엄 미사>(미사 솔렘니스)의 작곡에도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이처럼 1818년 초여름에 베토벤은 창작의 힘을 되찾았다. 그리고 런던 필하모니 협회로부터 두 곡의 교향곡을 작곡해달라는 의뢰도 받는다. 앞서 말한 두 곡의 교향곡 작곡 계획은 이와 연관된 것이다. 베토벤은 한 곡을 기악만으로, 다른 한 곡은 성악을 함께 사용한 곡을 쓰려고 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다.

<장엄 미사>는 원래 루돌프 대공의 대주교 취임을 위한 곡이었으며, 예정보다 2년 정도 늦어진 1822년에 완성되었다. 베토벤은 자신의 마음을 충족시키는 평화와 세계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이 곡을 열심히 썼으며, 피아노 소나타로 기분을 전환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곡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이렇게 대곡 미사가 완성되자 중단했던 교향곡 작곡에도 눈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런던에 있던 제자 리스에게 새로운 교향곡의 작곡료 등에 대해 필하모니 협회와 다시 이야기를 진척시키라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 결과 런던의 이 협회는 1822년 11월 작곡료를 결정하였고 베토벤도 이것을 받아들인다.



베토벤은 그때까지 구상하고 있던 을 협회를 위해 진행시키기로 하고 기악만 사용한 교향곡으로 작업하게 된다. 그러나 합창을 덧붙인다는 아이디어도 버린 것은 아니어서, 또다른 [독일 교향곡]이라는 작품에 합창을 삽입할 예정이었다. 이것은 당시 민족 의식의 고양이라는 흐름에서 독일인으로서의 자각에 입각하여 계획된 것으로, 그 마지막 악장에 실러의 [환희에 부침]에 토대를 두고 전체의 클라이맥스를 구축하려는 구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d단조 교향곡 제3악장은 바덴의 자연 속에서 작곡되어다. 이 악장에 안정되고 따스한 분위기가 감도는 것은 바로 그런 환경 탓이었다.



베토벤은 이 두 교향곡을 함께 작곡할 예정이었으나 결국 아이디어를 하나로 합쳐 하나의 교향곡을 쓰기로 계획을 바꾸게 된다. 현재의 <교향곡 제9번>은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전곡은 1824년 2월에 완성되며, 역사적인 초연은 빈의 케른트너토어의 궁정극장에서 이루어졌다. 곡이 끝났을 때, 완전히 귀가 들리지 않았던 베토벤은 알토 독장자가 알려주어 간신히 청중의 박수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이 연주회에서 돌아온 수입은 예상 외로 적었다고 한다.


이 <교향곡 제9번>은 확실히 베토벤의 위대한 산물이다. 베토벤은 <장엄 미사>에서 자신의 내적인 평안과 외적인 평화를 기원하였고, 마지막 곡 <아뉴스 데이>에서는 내적인 평안은 확신하였지만 외적인 평화에 대해서는 스케치나 초고에 나타나 있지 않다. 그것을 보충하는, 또는 환결짓는 것이 바로 이 교향곡이다. 모든 인류가 함께 실현시켜야 할 평화를 이상주의적으로 노래한 것이다. 또한 베토벤의 신념이었던 [고뇌를 통한 환희]라는 말은 그대로 이 교향곡 작곡 과정에서도, 그리고 곡 자체의 진취적인 자세에서도 확실히 부각되어 있다. 오스트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불온한 반동정치도 베토벤에 의해 불멸의 예술 작품으로 귀결되었다.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뇌를 통한 환희]라는 주제를 놓고 볼 때, 앞의 세 개의 악장은 제4악장의 전제로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마지막 악장에서 음악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앞의 세 개의 악장을 총괄하는 새로운 방법이 사용되고 있다. 아울러 제1악장의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공허한 시작 방법, 충실하고 장대한 코다, 제2악장 스케르초에서의 소나타 형식과 푸가토를 혼용하는 대규모의 구성법, 제3악장의 두 개의 주제를 지닌 변주곡이면서도 자유롭게 정돈된 방법, 그리고 마지막 악장에서의 변주에 기반을 둔 자유로운 형식. 이 모든 것은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런 여러 가지 특징은 후대 작곡가들에게 끊임없이 큰 영향을 주었다. 악기 편성에서도 종래의 교향곡보다 수준이 높으며, 타악기 종류도 늘어나 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윌리엄) 3세(1797-1840)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1806-07년의 나폴레옹 전쟁에서 참패하여 엘베 강 서쪽 지방을 모두 잃었다. 1815년 빈 회의에서 라인 지방과 베스트팔렌 그리고 작센을 대부분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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