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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스크랩] (제85강)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갖자! (마 18:1-5)

작성자작은종|작성시간20.05.22|조회수1,642 목록 댓글 0

(제85강)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갖자! (마 18:1-5)

 

  본문은 1-10절이 연결된 말씀인데 본문을 보면 두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그 하나는 '어린아이의 비유'이고, 또 다른 비유는 '연자 맷돌에 관한 비유'입니다. 이 두 비유는 한 가지 주제, 즉 천국이라는 주제 속에 하나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1-5절까지는 어린아이의 비유인데 흔히들 '어린이 교훈'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린아이들에게 주시는 교훈이 아니라 어린아이를 통해서 어른들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한마디로 천국의 주인 될 자격에 관한 교훈입니다.
  '천국시민의 자격이 과연 무엇인가? 또 천국 시민으로써의 우리의 신앙의 자세를 어떻게 가져야 하는가?' 이런 교훈입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오직 누가 서열 제일이냐? 누가 킹 메이커냐? 누가 실권자냐?' 여기에 온통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예수님께 '천국에서는 누가 크나이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불러 제자들 앞에 세우고 세 가지의 교훈을 줍니다.
  ①'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②'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입니다.
  ③'누구든지 예수님의 마음으로 어린아이들 영접하면 곧 예수님을 영접함이 된다'는 교훈입니다. 한마디로 어린아이의 순수성과 정직성과 겸손함을 들어 이런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진 자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제목 소개!▶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선택받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있습니다. 본문의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제자들이 천국에 합당한 인물이 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눈앞에 두고 대중들에게서 벗어나 제자들과 더 많은 시간들을 보내시며 그들은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 당시 12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단 한 번도 만족을 주지 못한 늘 미숙하고 부족하며 연약하고 세속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실망하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인내하며 기다리며 사랑하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 주셨고, 잘못하면 고쳐 주셨고, 실수하면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은 천국백성으로 훈련시키셨고, 사명자로 훈련시키시면서 단 한 번도 제자들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사랑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향하고 계십니다. /믿/

 

  ▶1절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그때에' 마17:22-23절에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를 지고 죽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그때'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시기가 임박했음을 제자들에게 공포한 때'를 말합니다.
  또 한 곳의 배경은 막9:33-34절을 보면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는 직위에 대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막10장을 보면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님께 청원을 합니다.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여기 '그때는' 주님이 십자가를 눈앞에 둔 바로 '그때'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는 마땅히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수난을 생각하고 죽음을 앞둔 안타까움으로 같이 고민해야 할 때요, 기도할 때입니다. 그런 때에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크냐?' '누가 킹 메이커냐?'는 문제로 핏발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병으로 죽어 가는 아버지의 병상 앞에서 자식들이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살릴 수 있을까'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가 죽으면 '누가 더 많이 상속받는가'를 논쟁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상황이 임박했는데 제자들은 '누가 크냐?' 이것이 관심이었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이 질문을 천국의 성격이나 본질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질문입니다. 이유는 천국은 계급이 없는 곳입니다. 천국은 예수님과 함께 모든 사람이 더불어 사는 곳임을 요한계시록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천국의 그림자인 교회 역시 계급 사회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천국이나 교회에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질서가 존재합니다. 가정에 부부사이에는 계급이 없습니다. 남편이 사장이라고 해서 아내가 말단 사원 취급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질서는 있습니다.
  이들과 아버지 사이에 계급은 없습니다. 그러나 질서는 있습니다. 천국이나 교회는 계급사회는 아닙니다. 그러나 질서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제자들의 '천국에서 누가 크냐?'는 질문 속에는 그들의 어리석음이 들어 있습니다.
  ①예수님의 고통과 고난과는 무관한 사람들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②제자들이 하나님나라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메시아의 왕국이 이 땅에 임하게 될 때 우리들이 무슨 자리를 차지하게 될까요? 국무총리는 누가 하며, 국방부장관, 내부부장관, 교통부장관은 누가 할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누가 큰 자가 될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제자들은 아직도 영적으로 미숙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아직도 세속적인 것에 치우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출세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누가 더 높은가? 누가 월급은 얼마를 받나? 누가 더 많은 영향력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가? 자리 문제, 위치 문제입니다. 또 누가 좋은 것을 가졌는가? 큰집을 가졌는가? 무슨 차를 타고 다니는가?
  일반적으로 여자들의 관심은 누가 더 예쁜가 하는 관심입니다. 아무리 못난 사람이라도 자기를 외모에 지대한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들이 남자를 보다 '누가 더 큰집에 사는가? 누가 더 멋진 새 옷을 입는가? 누가 더 좋은 자동차를 탔는가?' 서로 비교하고 평가합니다. 지금 제자들의 관심은 온통 세속적인 것입니다.
  ③그래도 그들이 '천국에서'라는 분명한 범위를 정했다는 것은 신앙의 발전이 있었다는 평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의 주제가 이 땅이 아닌 천국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의 주제는 천국임을 분명히 알았는데 그 천국의 개념이 미숙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누가 큰가?'를 질문했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눌린 자의 콤플렉스입니다. 항상 정치적으로 눌려있고 종교적으로 경제적으로 눌려있다 보니 이 세상에서는 이렇게 짓눌려 살았으니 천국에서는 좀 높아져야겠다고 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이렇게 억울하게 살고 있지만 천국에서는 한번 크게 윗자리에서 행세하며 살고 있는 그런 마음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하고 나온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로마의 황제도 크고 분봉 왕 헤롯왕도 크며 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등이 큰 것이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도대체 누가 큽니까? 라는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의 이 질문 속에는 무엇인가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기대가 어떤 기대입니까? 아마도 저들의 기대는 '그래 이 세상에서는 로마의 황제도 헤롯왕도 대제사장도 크지마는 천국에서는 열 두 제자가 크다'는 대답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이외로 나타났습니다.

 

  ▶2절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전설에 의하면 이 어린아이는 베드로의 아들이었다고 합니다만 성경에 기록이 없으니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실물을 통해서 교훈 하심을 봅니다. 예수님은 공중에 나는 새도 비유해서 가르쳤습니다. 또는 둘의 백합화 겨자씨, 씨 뿌리는 일등을 통해 귀중한 진리를 교훈 하셨습니다. 이것은 가장 인상적이고, 사실적이고, 실감나며 잊을 수 없게 만드는 확실한 교육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것이 아닌 실물교육을 중히 여겼습니다.
  또 예수님은 크고 화려한 것들보다는 작고 사소하고 하찮게 여기는 것들을 통해서 천국의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⑴예를 들면 제자들이 계산한 200데나리온이 아니라 한 어린아이가 갖고 있던 물고기 두 마리요, 보리떡 다섯 개를 통해서 믿음의 법칙을 말씀하셨습니다.
  ⑵존경받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멸시천대를 받는 사마리아인을 통해서 진정한 이웃사람을 가르쳤고,
  ⑶외식하는 헌금이 아니라 과부의 엽전 두 푼을 통해서 최선을 다한 헌금의 진리를 교훈 하셨고,
  ⑷지극히 적은 겨자씨를 통해서 교훈을 주셨습니다.
  본문에서는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제자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대개의 경우 어린아이는 무시하는 수가 많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인원은 장정만 60만 명이었다고 하는데 여기서도 어린아이가 계수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어린아이, 여자, 노인들을 철저하게 외면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아이의 존엄성을 가장 철저하게 인정하신 것입니다. 어린아이도 어른과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귀중한 영혼입니다. 어린아이가 자라서 사회의 지도자가 되고 일꾼이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천국에서 누가 큰가?'라는 질문에 한 마디로 '어린 아이와 같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할/

 

  ▶3절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이 대답 속에는 '누가 큰가?'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누가 천국에 들어갑니까? 본문을 보겠습니다. 두 가지 조건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①돌이켜야 합니다. '너희는 돌이켜' 여기서 말하는 '돌이키다'는 말은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즉 회개를 말합니다. 너희들이 자꾸만 위를 보느라고 높이 생각하고 있는데 돌이켜 굽히라는 것입니다. '위를 쳐다보았느냐? 내려다보아라, 큰 것을 생각하고 있느냐? 작은 것으로 낮추어라! 돌이켜 즉 반대 방향으로 생각을 돌리라, 돌이켜서 이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 만약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진리입니다.
  회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 진리로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이라야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의 일 성도 세례요한의 복음의 일 성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입니다.
  회개한 사람이라야 죄 사함을 받고 죄 사함을 받아야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회개란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방향을 선회하는 것입니다. 회개 없이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어서 빨리 돌이켜야 합니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하나님 앞에서 옳지 못한 길이라면 즉시 돌이켜야 합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떳떳한 일이 아니라면 즉시 돌이켜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돌이킨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믿/
  여기 '돌이켜'에 해당하는 헬라어원으로 보면 '스스로 돌이키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순간적이고 결정적인 방향 전환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말은 한낱 행동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한 '마음의 변화, 즉 참회와 중생을 이루는 전인적인 변화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마치 성령에 의해 거듭나고 새 사람으로 변화되듯이 천국시민의 자격을 가지는 것은 마치 이런 중생의 새로운 역사를 체험하고 경험하는 것과 같은 차원에서 전인적이고 전폭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중생하여 새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함 아닙니까? 천국과 상관없는 중생, 천국과 상관없는 구원이 있다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천국이 이렇게도 중요하다면 돌이켜 어린아이처럼 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우리가 느껴야 합니다.
  ②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린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하여, 칼빈은 '단순성을 의미한다'고 했고, 클라크는 '단순성과 가르치기 쉬운 점', 벵켈은 '겸손과 단순성과 잘 받아들이는 마음'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성악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인간은 본래부터 악할 뿐만 아니라 그 악을 유전으로 받아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어른이 악하냐? 아이가 악하냐?'라고 묻는다면 삼척동자라도 어른이 더 악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다음과 같은 특성이 있습니다.
  ①어린 아이는 솔직합니다. 어린 아이는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있는 그대로 나타냅니다. 거짓으로 꾸미지 않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나타냅니다. 싫은 것 좋은 것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나타내 보입니다. 어른들은 솔직하지 못한데 비해 어린 아이들은 솔직합니다. 하나님은 솔직한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척 하는 사람, 이중적인 사람, 자기를 가리우는 사람, 위선적인 사람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다윗은 어린 아이처럼 솔직했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있는 그대로 다 솔직하게 나타내 표현했습니다.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습니다. 내 뼈에 평안함이 없습니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납니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닙니다.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습니다. 내가 피곤하고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합니다.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습니다.'(시38). 하나님은 솔직한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솔직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으시기를 원하십니까?  어린 아이처럼 솔직해져야 합니다.
  ②어린 아이는 안아주고 먹여주고 놀아주면 그저 좋아하고 즐거워합니다. 조그마한 것을 가지고도 좋아하고 즐거워합니다. 비교적 욕심이 적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돈이 없어도 재산이 없어도 엄마 아빠와 함께 있으면 즐겁고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즐겁습니다.
  하나님은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하나님 한 분 때문에 좋아하고 성도들 때문에 즐거워하는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성도들 때문에 즐거워한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시16편에 다윗의 두 가지 즐거움과 기쁨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주님 때문에 기뻐하고 성도들 때문에 즐거워한다고 고백했습니다.
  ③어린 아이는 단순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말을 잘 듣고 잘 믿고 잘 따릅니다. 어린 아이는 엄마 아빠를 전적으로 믿습니다. 어린 아이는 다른 사람들의 말도 잘 듣고 잘 믿습니다. 그래서 쉽게 속기도 하지만 하여튼 잘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잘 믿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어린 아이처럼 사람들의 말도 잘 듣고 잘 믿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속아넘어가는 일이 있더라도 사람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며 듣고 믿기를 원하십니다. 사탄과 죄악의 소리가 아닌 모든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를 듣고 믿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인간의 고통 소리도 듣고 자연의 신음소리도 듣는 것은 참으로 옳은 일입니다. 누가 배고프다고 말하면 그대로 믿는 것이 옳습니다. 누가 아프다고 하면 그대로 믿는 것이 옳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면 그대로 믿고 가고 사람들이 와서 도와달라고 하면 그대로 달려가서 도와주는 것이 너무나 옳은 일입니다.
  어른들은 믿기를 주저합니다. 빌립은 믿기를 주저했습니다. 5천명을 먹이라고 말씀했을 때 빌립은 믿기 전에 먼저 따지고 계산을 했습니다.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있어도 5천명을 먹이기에는 모자랄 것이라는 계산부터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던 한 소년은 따지고 계산을 하기 전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저 믿고 따랐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에게 드렸습니다. 그것이 그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아멘!/
  ④어린 아이는 특히 부모를 의존합니다. 어린 아이 때는 부모를 떠나면 죽는 줄로 압니다. 그리고 엄마 품에 안긴 채 엄마의 심장의 고동소리를 듣고 엄마의 젖을 먹고 엄마의 표정을 살피면서 행복해 합니다.
  인간의 삶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품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안식과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찬송시인은 '주의 날개 그늘 밑에 내가 쉬리라'고 노래했습니다. 어린아이가 전적으로 부모를 의존하듯이 우리 성도들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합니다. /믿/할/
  ⑤요구가 많습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부모가 해주어야 하고, 또 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미안한 마음을 갖는다든지 부담감을 갖는 것도 아닙니다. 부모에게 바라고 요구하는 것들이 당당하고 떳떳합니다. 만일 거절이라도 하는 날이면 울고불고 졸라댑니다.
  우리는 여기서 부모와 자식간의 그 끈끈하고도 굵은 줄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어떤 부모도 자식의 정당하고 바람직한 요구에 거절하는 부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어린아이의 요구가 정당하지 못하면 부모는 호되게 야단을 칩니다. 또 정당한 요구라도 부모가 능력이 없을 때 못 들어 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능력이 없어서 우리의 요구를 미루거나 거절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 어떤 요구도 다 수용하시고 들어주실 능력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잘못 구하면 응답이 없습니다. 약4:3절에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할/
  ⑥어린 아이의 특성중의 하나가 쉽게 돌이킵니다. 야단치면 무서워하고 매를 들면 떨고 설득하면 알아듣고 다짐하면 순종합니다. 얼마나 단순합니까?
  어린아이는 좀처럼 보따리 싸 가지고 대문을 나서지 않습니다. 대문을 나서는 버릇을 어른이나 아이나 좋은 버릇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쉽게 돌아서는 것이 유리합니다. 빨리 잘못했다고 고백하고 돌아서면 징계가 가벼워집니다.
  ⑦정직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정직은 상대적인 정직입니다. 아이들이라고 해서 절대적으로 정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른에 비해서 훨씬 정직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자기의 편견이 약합니다. 어른이 말하면 액면 그대로 받습니다.
  어떤 일을 달래기 위해 '어린이 공원으로 언제 놀러가자' 약속을 하면 어린아이는 손꼽아 기다립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어린아이와 같이 편견에 사로잡히지 말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성, 정직성'을 가지라고 합니다. 단순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지지 않고 잘 믿습니다.
  ⑧쉽게 본을 따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모방성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행동, 말씨, 사는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모방합니다. 그렇다면 어른들이 행동을 잘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인격교육, 사람교육이 중요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짐승, 개나 고양이를 길들이는 데는 흥미를 가지고 있지만 자기 자식을 가르치는 데는 무관심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무관심은 학교교육이나 자식교육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교육, 사람교육을 말합니다. 인격교육, 사람교육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것이 최고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잠언에서 '마땅히 행할 길은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멘!/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너희가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시면서 아주 강조를 하셨습니다. 또 결단코 라는 표현은 써서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4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4절에서 말씀하는 초점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초점은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모든 어린아이가 천국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려는 초점은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어린아이들은 겸손하고 온유합니다. 나 혼자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부모 없이 자기들이 존재할 수 없고, 부모가 없으면 밥도 못 먹고 옷도 못 입고 부모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렇게 어린아이들은 겸손합니다.
  본문은 '자기를 낮추는 그 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누가 천국에서 큰 사람입니까? 자기를 낮추는 자입니다. 낮춘다는 것은 겸손, 즉 자기 비하를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높이는데 열심입니다. 지식을 높이고 가문을 높이고, 그래서 자존심을 굉장히 내세웁니다. 그런데 천국은 자존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으뜸이 됩니다. /할/
  천국공식은 '작은 자가 큰 자이며, 낮은 자가 높은 자이며, 죽은 자가 산 자이며 주는 자가 얻는 자'입니다.
  표현과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를 돋보이게 하고 자기를 과시하고픈 본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본성은 겸손의 덕으로 누르고 신앙의 힘으로 통제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교만 방자한 사람이 됩니다.
  약4:6절에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리고 10절에서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하셨으며, 막9:35절에서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안아주시고 안수해 주셨습니다.
  본문의 중심교훈은 '어린아이들처럼 되라'는 것이고, 그 다음에 '어린아이들처럼 낮추라'라는 것입니다. 겸손은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사도바울은 내가 매일 십자가 아래 죽노라, 겸손은 자기를 죽일 때만이 나타나는 미덕입니다.
  천국은 신앙의 자만이나, 교만은 나는 당연히 라는 자만심을 허락지 않습니다. 천국의 문은 심히도 좁고 협착하여 겸손한 자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해야할 것은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인가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자가 되어서 '천국에 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할/

 

  ▶5절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5절은 6절과 이어져야 이해가 됩니다만 주제가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갖자'이기 때문에 5절까지를 본문입니다.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솔직한 믿음이 있어야 진정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기에서 우리들이 믿음이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믿음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그 자체가 자신을 항상 낮추는 겸손한 자입니다. 결코 아이들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본문에서 하신 말씀의 배경은 바로 '제자들이 서로 높아지려고 하는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자도 되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교만한 자는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성경에서는 교만한 자를 얼마나 많이 질타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잠8:13절에서는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노라'고 했으며, 잠16:18절에서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했습니다. 또 잠18:12절에서는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라고 했습니다.
  약4:6절에서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고 했고, 벧전5:5절에서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기까지 미워하십니까? 그것은 사탄이 하와에게 최초의 범죄 시에 사용한 방법이 인간의 교만을 유발시킨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단이 교만을 유발시킨 것은 선악과를 따먹기만 하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속삭임이었습니다. 인간의 최고의 교만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입니다. 사람들은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교만을 범하려고 하는 유혹을 끊임없이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악인 교만이 어린아이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면서 여러 가지를 경험하고 여러 경험을 쌓게 됩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되도록 자신의 학력을 나타내려고 합니다. 자신의 경력을 화려하게 치장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력서가 한 장으로 부족하고 여러 장을 쓰면 좋은 줄로 압니다. 명함에도 자신의 이름을 화려하게 장식하려고 합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과시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학력도 없습니다. 경력도 없습니다. 이력서도 이름 외에는 쓸 것이 없습니다. 명함도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그냥 자연인 아무개일 뿐입니다. 그는 다만 자신의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름도 그냥 그의 이름이 아니라 아무개의 아들 누구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즉 그의 존재는 그의 부모 안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린아이의 겸손입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이 이와 같이 순수한 믿음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나의 이름이 다만 하나님의 이름 안에서 발견되기를 노력해야 합니다. 나의 명함은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명함이면 족하다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만 모든 사람들이 다 동일한 권속임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세상적인 가치에 의해서 교회 안에서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모든 일을 겸손으로 감당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인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소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예수께서 어린아이를 안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하셨습니다. 우리들의 믿음이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으로 바꾸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합시다. /할/


  ▶어린아이의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요?
  ①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은 성장하는 믿음입니다. 어린아이는 쉬지 않고 자라나는 역동적인 생명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자라야 합니다.
  ②아버지의 형상을 닮아 가는 믿음입니다. 어린아이는 그 부모의 붕어빵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③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은 사랑하는 믿음입니다. 어린아이는 결코 남에게 화를 내거나 악의를 품지 않습니다. 미움보다는 사랑의 마음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④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어린아이는 부모의 말에 절대 순종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에 쉽게 따르고 고칩니다.
  순종은 성도로 하여금 무한한 상급의 주인이 되게 하는 열쇠입니다. 때문에 순종은 축복의 시작이며 관심입니다.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으로 예수님도 영접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아멘!/할/

  ▶오늘 우리에게 주요한 과제의 핵심은 '자녀를 어떻게 교육하느냐?'입니다.
  유대인의 어머니들의 교육은 '쥬이쉬마더(Jewish Mother)'라고 해서 세계적으로, 역사적으로 유명합니다. 유대인 어머니들의 교육 방법과 교육철학은 세계에서 내로라 하는 교육학의 석학들이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연구해도 다 이해하지 못하며, 또 흉내를 낼 수 없습니다. 유대 어머니들의 교육 방법의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아이들을 서로서로 비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들이 가정에서 의식적으로 행하고 있는 잘못된 교육의 관행들을 생각해 봅니다.
  위협형입니다. '한번만 더 그런 짓 했다가는'하고 아이들을 위협하는 형입니다.
  비교형입니다. '그 애는 안 그러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니?' 하고 야단칠 때마다 남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조소형입니다. '잘한다. 잘 논다. 어디 두고 보자' 하면서 아이 들을 비웃는 것입니다.
  변덕형입니다. 일관성 없는 교육방법입니다.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언제는 꾸짖고, 언제는 그냥 넘어가고 해서 아이들로 하여금 갈팡질팡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교육방법들은 다 좋지 못한 유형들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교육방법은 절대로 비교하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시기, 질투, 경쟁심 같은 것들이 전혀 생기지 않도록 키운다는 것입니다. 그런 교육을 받고 성공한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아인슈타인입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에 얼마나 공부를 못했던지 성적표에 이런 평가가 나와 있었다고 합니다.
  '이 학생은 앞으로 무슨 공부를 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음' 여러분의 자녀가 이런 성적표를 받아왔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했겠습니까? 아마 초상집이 됐을 것입니다. 자식농사 다 망쳤다고 절망합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그 성적표를 보고 얼굴하나 찡그리지 않고 오히려 '걱정할 것 없다. 남과 같아지려고 하면 결코 남보다 나아질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너는 남과 다르기 때문에 기필코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격려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들의 축복 관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유대 어머니들은 동네에 유명한 랍비가 오시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복을 빌어주세요. 복을 빌어주세요' 청한답니다. 이것이 저들의 풍속이요, 교육방법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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