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단어 7 고전 1:18~25 십자가는 역설이다.
우리교회는 주일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중요한 단어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십자가를 전하려고 합니다. 십자가는 지금은 기독교의 상징이지만, 원래는 사형 방법이었습니다. 로마인은 그전에 있었던 사형 방법에 로마제국의 효율성을 더해 십자가형을 극대화하였습니다. 로마인은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주요 도로에 노예나 반역자를 매달았습니다. 제3차 노예 반란인 스파르타쿠스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처음에는 검투사 70~80명이 반란을 시작했는데 많을 때는 7만 명에서 12만 명 정도의 노예와 농민과 탈주병이 합류했습니다. 로마군은 처음에는 반란을 무시했다가 나중에는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를 특별 지휘관으로 임명했습니다. 반란군은 처음에는 승리했으나 로마를 약탈하려는 세력과 알프스를 넘어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세력 사이에 내부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반란은 로마군의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진압되었고, 주요 도로인 아피아 가도 즉 카푸아에서 로마 사이에 약 200km 구간에 죄수들 6천 명을 마주 보고 양쪽에 매달았습니다. 이미 세워 둔 세로 기둥(stipes)에 죄수는 가로 기둥(patibulum)을 지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사형수가 고통을 느끼며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공포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십자가형은 로마제국의 질서에 순응하고 로마제국의 필요에 협력하라는 메시지였습니다(신약단어, 105쪽)./ 우리나라도 조선시대에는 중죄인, 특히 반역죄나 강도·살인 등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자에 대해 참수(목을 벰) 후에 효시(梟示)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효시란 범인의 머리나 시신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내걸어 공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범죄에 대한 경고와 국가 권위의 과시와 다른 사람들에게 본보기(본보기형)의 목적을 가졌습니다(ChatGPT)./
구약성경에서 나무에 달리는 것은 저주받은 형벌이었습니다. 신명기 21장 22~23절에서 “사람이 만일 죽을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나무에 매달린다.’라는 것은 단순히 목숨을 잃는 것을 넘어, 공동체로부터 끊어지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놓였다는 공포스러운 표식이었습니다. 나무에 달린 모습은 단순한 처형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라는 규정에 따라 예수님의 시신은 저녁이 되기 전에 무덤에 안장하였습니다(ESV 스터디, 419쪽)./ 유대인들은 주로 돌로 쳐서 사형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가 죽었고 그 사람처럼 행동하면 안 된다는 의미로 범죄자의 시신을 말뚝에 박아 위로 올렸습니다. 범죄자는 나무에 달려서가 아니라 처형된 행동으로 인해 저주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경고하였고, 시체는 이스라엘의 땅을 더럽히지 않고 처리해야 했습니다. 율법은 누군가 처형되어 나무 위에 달렸다면 당일 해지기 전에 묻어두어야 했습니다(무디주석, 325쪽)./ 사형당한 자를 말뚝 위에 꿰어놓은 것은 그가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했던 자라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고 죽은 후에도 수치를 주고자 하는 의도를 가졌습니다. 시체를 달아두면 그가 사후에도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율법은 살인자의 저주가 백성을 오염시킬 수 있기에 밤새도록 매달아두지 말라고 제한했습니다(IVP 성경주석, 303쪽)./ 여기서 ‘죽을죄를 범하므로’라는 죄수가 살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나무 위에 달거든’은 처형 후 그 행위의 가증함과 죄수가 초래한 수치스러운 저주를 드러내기 위해 시신을 나무에 매달았습니다. ‘밤새도록’은 시신의 방치가 길어지면 땅이 더럽혀졌습니다. 시신은 나무에서 내려 같은 날 묻어야 했습니다(성경신학 스터디, 390쪽)./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저주를 복으로 전환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나무)에 달리신 사건은 ‘거룩한 교환’이었습니다. 우리의 상태: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해 저주 아래 있었음. 그리스도의 행동: 죄 없으신 분이 스스로 나무에 달려 저주가 됨. 결과: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이 그리스도에게 쏟아졌고, 우리는 자유를 얻음. 정리하면: 구약: 나무에 달림 = 하나님의 저주. 신약: 예수님이 그 저주를 대신 짊어짐 → 인간을 구원. 이 구절은 결국 “저주를 통한 구원”이라는 역설을 보여주는 핵심 말씀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신을 위한 대속이라고 말했고, 3장 13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다른 사람들을 위한 무거운 짐을 제거했다고 말했습니다(ESV, 2,301쪽)./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교인들을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습니다. 속량은 헬라어로 ‘엑사고라조(ἐξαγοράζω, exagorazō)’라고 하는데, 위험한 상황에서 누군가 혹은 무언가 돈을 주고 빼내는 것을 가리킵니다(무디주석, 2,094쪽)./ 율법이 사람을 의롭게 하지 못하고 율법이 가진 저주의 능력 때문에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죽음으로 사람을 그 저주에서 해방(속량)하셨기 때문입니다(IVP 성경주석, 1,668쪽)./ 바울은 그리스도가 사람들에게 율법을 순종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죽음으로 율법의 저주를 받아들이시고 그 저주를 언약에서 제거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 모세 언약에서 해방한 사람들이 더 오래된 아브라함의 언약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베이커 신약, 443쪽)./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율법을 어긴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선고된 모든 저주를 담당하셨습니다(성경신학, 2,333쪽)./ 하나님이 율법을 주실 때 순종에 대한 복과 불순종에 대한 저주를 정하셨습니다. 저주는 강력한 정죄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신실한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죗값을 치르셨고,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에 저주받으셨습니다(LIFE 스터디, 2,263쪽)./
신약성경에서 십자가라는 단어가 고린도전서에서 중요하게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시기와 분쟁과 갈등하던 고린도 교회에 ‘십자가’ 헬라어 명사로 ‘스타우로스(σταυρός)’를 3번 사용했고, ‘십자가에 못 박다.’라는 동사 ‘스타우로오(σταυρόω)’를 6번 사용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파당’을 해결할 유일한 열쇠는 십자가의 도(The Message of the Cross)라고 말씀했습니다. 고린도전서에 등장하는 십자가를 내용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말의 지혜를 능가한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7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에 온 목적이 세례를 주거나 화려한 말재주를 뽐내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내용 분석: 당시 고린도 사교계에서는 그리스 철학에 기반한 화려한 수사학과 웅변술(말의 지혜)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이러한 인간적인 포장지인 말의 지혜를 사용하지 않고 복음의 알맹이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했습니다. 여기서 ‘말의 지혜’는 그레코로만 세계에서는 수사학적 설득과 전문적인 웅변술이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가르칠 수 있다고 주목받았습니다(ESV, 2,238쪽)./ 지각이 없어 멸망하는 사람들은 십자가의 도를 지혜가 아니라 미련한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의 중심으로 인식합니다(베이커 신약, 376쪽)./ 여기서 ‘말의 지혜’는 ‘소피아 로고스(σοφίᾳ λόγου)’입니다. 1세기 그리스·로마 문학에서는 수사학 곧 공적인 연설에서 가장 효과적인 설득의 수단을 주제로 공부하고 훈련하는 학문이었습니다. 수사학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었습니다. 바울은 형식인 수사학적 탁월함이나 논증하는 능력이 아니라 내용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기독교 선포에서 설득의 힘은 수사학적 탁월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메시지 자체였기 때문입니다(성경신학, 2,263쪽)./ 어떤 연설가는 인상적인 단어를 사용하지만, 내용은 빈약합니다. 바울은 청중을 위한 견실한 내용과 실제적 도움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화법이 아니라 메시지를 중요시했습니다.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야기가 설득력이 있습니다. 자신의 지식이나 언변이 아니라 메시지 내용이 중요합니다(LIFE 스터디, 2,194쪽)./
고린도 교인들은 1장 5절에서 언변과 지식에 풍족했고, 7절에서 은사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말 잘하는 사람들에게 말로 정면승부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했습니다. 수사학과 십자가를 비교한다면 수사학은 상품을 예쁘게 꾸미는 포장지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상품의 진짜 알맹이입니다. 우리가 겉에 몰두하면 속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외양이 아니라 내면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4절에서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그리스식 미사여구를 피했고 고린도 사람들이 인간 전달자의 능력보다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도록 십자가의 메시지에 집중했습니다(ESV, 2,239쪽)./ 로마서 8장 27절에서 성령님은 인간의 마음을 살피시지만(헬라어, 에라우나오, ἐρευνάω, ereunaō), 고린도전서 2장 10절에서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통달하십니다(헬라어, 에라우나오, ἐρευνάω, ereunaō).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마음과 인간의 마음과 갈라진 틈을 연결하여 다른 방법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십자가의 메시지를 인간으로 이해하게 하십니다(ESV, 2,239쪽)./ 1세기 웅변가 즉 대중 연설가는 수사학적 기교를 능숙하게 사용해 청중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그 당시 웅변술은 마술로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웅변가의 직업적인 기교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말의 지혜였습니다. 만약 바울이 수사학을 동원한다면 청중의 관심은 설교자에게 향하고 하나님이 백성을 구원하는 사건은 소홀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인간적인 추종자는 확보할 수 있지만, 복음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IVP 성경주석, 1,601쪽)./
둘째, 십자가의 도(道)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용 분석: ‘십자가의 도’는 헬라어로 ‘로고스 투 스타우루(λόγος τοῦ σταυροῦ)’, 영어로 즉 ‘the message of the cross’ 즉 ‘십자가의 말씀(메시지)’을 뜻합니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 십자가는 가장 극악무도한 죄수만 처형하는 저주와 수치의 틀이었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눈(멸망할 자들)으로 볼 때 사형 틀에 매달려 죽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 것은 한없이 ‘미련한 짓’이었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눈이 열려 구원을 얻은 성도들에게 이 십자가는 죄와 사망을 이기게 하는 ‘가장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2~23절에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은 예수님이 메시야라면 더 많은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하였고, 헬라인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사람을 녹일 수 있는 말의 지혜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헬라인에게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신이 인간에게 죽는다는 것이 지혜가 아니라 터무니없이 보였고, 유대인에게는 표적이 아니라 율법에서 저주라 하였기에 불쾌하게 느껴졌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십자가: 표적(기적)을 구하던 유대인들에게 나무에 달려 저주받아 죽은 메시아는 받아들일 수 없는 ‘거리끼는 것(걸림돌)’이었습니다. 헬라인들에게 십자가: 지혜(철학)를 구하던 지식인들에게 무기력하게 처형당한 자를 신뢰하라는 복음은 한낱 ‘미련한 것(말도 안 되는 소리)’이었습니다./ 고대의 어떤 연설가도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에 대해 웅변하지 않았습니다. 비교인에게는 구원자가 십자가에 죽은 것은 터무니없는 소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인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메시지를 선포할 때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전할 때 하나님이 친히 사람들을 설득하셔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 하십니다(성경신학, 2,264쪽)./
고린도전서 1장 27절에서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전하니 하나님이 그들에게 믿음을 가지도록 작용하셔서 유대인과 이방인 중에서 일부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말의 지혜로 사람을 설득하는 헬라인의 지혜보다 지혜롭고, 표적을 보여줘야 믿겠다는 유대인의 능력보다 강했습니다(ESV, 2,238~2,239쪽)./ 십자가 =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입니다. 인간의 지혜 → 십자가를 거부하지만, 하나님의 지혜 →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해결할 수 없는 죄와 죽음의 문제를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해결하셨기에 십자가는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바울은 화려한 철학이나 수사학 대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 안다고 말했습니다(고전2:2)./ 17절에 나오는 십자가의 능력을 18절에서 발전시켜 나갑니다. 미련한 것은 세속적인 헬라어에서 무미건조하거나 지루한 것에 사용합니다. 미련하다는 것은 구역질 날 정도로 어리석은 거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십자가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19절에서 십자가가 세상 지도자들의 지혜를 무너뜨린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무디주석, 2,037쪽)./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헬라어로 ‘호 로고스 호 투 스타우루(ὁ λόγος ὁ τοῦ σταυροῦ, ho logos ho tou staurou)’라고 부릅니다. 직역하면 ‘십자가의 메시지, ’십자가의 말씀, ‘십자가에 관한 선포’입니다./ ‘십자가에 관한 웅변(로고스)’은 복음 전파가 어떤 이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능력의 수단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당대의 수사학과 신학적 성찰이 하나님을 믿도록 인도하지 못했다고 선언합니다(IVP 성경주석, 1,601쪽)./
셋째, 십자가의 도(道)는 한마디로 ‘역설(Paradox)’입니다. 역설(逆說)은 겉으로 보기에는 모순되거나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더 깊이 생각하면 중요한 진리나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죽어야 산다.’, ‘약함이 강함이 된다.’입니다. 겉으로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깊은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대표적인 역설은 ‘십자가’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십자가는 저주와 죽음의 틀이었으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구원과 생명의 문’이었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십자가는 약함과 실패의 증거였으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승리와 능력의 증거’였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십자가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이었으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지혜와 슬기’였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십자가는 ‘약함이 능력이 되고, 미련함이 지혜가 되며, 죽음이 생명이 되는 하나님의 역설’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십자가의 역설 속에서 인간의 자랑은 사라지고 오직 그리스도만 드러난다고 가르칩니다(고전1:29~31)./ 우리나라 속담에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라는 역설(paradox)의 좋은 예입니다. 겉으로 보면: 곧고 잘생긴 나무가 더 가치 있어 보입니다. 굽은 나무는 쓸모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곧은 나무는 목재로 쓰기 위해 먼저 베어집니다. 굽은 나무는 목재 가치가 낮아 베어지지 않고 오래 남습니다. 결국 굽은 나무가 산과 묘지를 오랫동안 지키게 됩니다. 따라서 이 속담은 ‘쓸모없어 보이는 것이 오히려 오래 살아남고, 약해 보이는 것이 오히려 강한 역할을 한다.’는 역설적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ChatGPT)./ 우리는 십자가가 죽는 거지만 살리는 것이고, 어리석게 보이지만 지혜롭고, 약하게 보이지만 능력이라는 역설을 알고 십자가의 도를 전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