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단어 9 살전 4:13 소망 없는 이가 슬퍼한다.
오늘은 소망 즉 희망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구약 안에 신약이 감추어져 있고, 신약 안에서 구약이 드러나 있으니, 구약부터 살펴봅니다. 하나님은 시편 91편 2절에서 “나는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을 NIV로 “I will say of the LORD, ‘He is my refuge and my fortress, my God, in whom I trust.’”입니다. 이것을 직역하면 “나는 여호와에 대하여 말하리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이시며, 내가 신뢰하는 나의 하나님이시다.’”입니다. 여기서 ‘의뢰하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בָּטַח(바타흐, batach)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신뢰하다, 확신하다, 안전하게 의지하다, 믿고 맡기다. 입니다. 따라서 바타흐는 단순히 ‘하나님이 계시겠지’라고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안전함을 누리는 신뢰를 의미합니다. 바타흐를,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역(LXX)에서 ‘엘피스(ἐλπίςς, elpis) 또는 엘피조(ἐλπίζω, elpizō)’라고 번역했습니다. 엘피스는 소망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신뢰가 소망이고 소망이 신뢰입니다. 여기서 소망은 알지 못하는 미래에 기대하면서 검증되고 진실한 관계에 의존하는 신뢰로 여겨집니다(신약단어, 191쪽)./ 이는 히브리적 사고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과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이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뢰가 소망의 기초이고, 소망은 신뢰의 미래 지향적 표현입니다. 소망과 희망은 거의 같은 뜻인데, 교회에서는 일반적인 기대나 바람을 말할 때는 희망(Hope)이고,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확신 있는 기대를 말할 때는 소망(Christian Hope)이라고 합니다. 한국어 사전적 의미에서는 소망 = 희망입니다. 성경 해석에서만 ‘소망’이라는 단어에 더 깊고 신앙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질 약속을 기반으로 하기에, 영어권 신학이나 성경 번역에서는 이를 일반 희망과 구분하기 위해 주로 Hope 앞에 수식어를 붙이거나 대문자 Hope로 표현합니다./ 시편 91편 1~2절은 여호와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에게 안전을 주신다는 내용입니다. 안전에 대한 단어가 연이어 등장하며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은 성경적 신앙의 이상인 전적 신뢰를 보여줍니다(ESV 스터디, 1,160쪽)./ 우리가 누리는 안전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안전은 우리의 환경이나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교인들은 곤경이나 궁핍의 시기는 물론이고 언제나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무디주석, 919쪽)./ ‘의뢰’는 안전함을 느끼는 곳에서 생겨납니다(성경신학 스터디, 1,121쪽)./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워하거나 아프거나 깊은 곤경에 처했을 때 우리를 숨기고 보호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보호자로 여기는 믿음은 그가 인생의 모든 위험과 두려움을 헤쳐나가게 해 줍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는 그림입니다(LIFE 스터디, 1,048쪽)./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소망(헬라어 ἐλπίς, 엘피스)’이라는 단어가 4번 나옵니다(ChatGPT). 사도 바울은 이 단어를 당시 고난받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세 가지 핵심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Gemini). 소망은 첫째,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면서 인내하는 겁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에서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을 NIV로 “We remember before our God and Father your work produced by faith, your labor prompted by love, and your endurance inspired by hope in our Lord Jesus Christ.”입니다. 직역하면 “우리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이 만들어 낸 일과 사랑이 불러일으킨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이 낳은 인내를 기억합니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and your endurance inspired by hope in our Lord Jesus Christ”를 직역하면,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에 의해 불러일으켜진(고무된) 너희의 인내”입니다. 여기서 소망은 단순한 낙관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기대이며 미래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며 환난 속에서도 견디게 하는 힘입니다. 바울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데살로니가 교회의 특징으로 말합니다./ 의미: 여기서 소망은 ‘인내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극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고난 속에서도 버틸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구원을 완성하실 것’이라는 확실한 소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며 격려합니다./ 소망은 단순히 마음의 위안이 아니라 ‘삶을 견디게 하는 실제적인 힘’으로 묘사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극심한 박해 속에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국 승리하시고 다시 오실 것이라는 확실한 소망(엘피스)이 있었기에 박해를 끝까지 참아낼(인내)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선교할 때를 회상합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바울 서신의 3대 강령입니다. 역사와 수고와 인내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회심한 실제적인 결과입니다. 교인들은 믿음이 있기에 역사를 이룰 수 있었고 사랑이 있기에 수고할 수 있었고 소망이 있기에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소망은 말세와 관련이 깊은 편지에 적합합니다(ESV, 2,361쪽)./ 믿음은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를 되돌아 보고 사랑은 아버지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를 우러러보고 소망은 자기 백성을 위해 오실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믿음에서 흘러나오는 역사와 사랑이 동기가 된 수고와 소망에 근거한 인내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했고 그 관계로 인해 아버지 앞에서 적절한 역사와 수고와 인내를 드러내 보였습니다(무디주석, 2,144쪽)./ ‘믿음의 역사’는 믿음은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사랑의 수고’는 사랑에서 비롯된 교인의 행위를 가리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는 다 잘될 것이라는 미미하고 일반적인 희망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다시 오셔서 장차 올 심판에서 교인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확실하고 구체적인 신념입니다. 바울은 이런 종말론적 소망을 강조함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논의를 넌지시 드러냅니다(성경신학, 2,390쪽)./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박해 중에도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소망의 인내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LIFE, 2,324쪽)./
소망은 둘째,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믿음을 지킨 성도들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9절에서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을 NIV로 “For what is our hope, our joy, or the crown in which we will glory in the presence of our Lord Jesus when he comes? Is it not you?”입니다. 직역하면 “우리 주 예수께서 오실 때 그분 앞에서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이 아니겠습니까?”입니다. 여기서 소망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받을 기쁨이자 하나님 앞에 세워질 성도들에 대한 기대를 의미합니다. 바울에게는 데살로니가 성도들 자체가 장차 주님 앞에서의 소망과 영광이었습니다./ 의미: 여기서 소망은 바울에게 있어 ‘미래에 받게 될 상급이자 보람’을 뜻합니다. 바울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재림), 자신이 전도하고 양육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가장 큰 소망이자 기쁨이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고난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는 이유와 미래에 바라는 최고의 영광이 바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성도들이 온전히 서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야말로 바울이 품은 확신에 찬 소망이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에게 애정이 있었습니다. 교인은 미래의 소망을 품게 하는 원인이요 현재 기쁨의 궁극적 원천이요 그가 보상 즉 그의 면류관을 기대하는 근거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가 강림하실 때 주 예수 앞에서 온전히 실현될 겁니다(무디주석, 2,148쪽)./ ‘면류관’은 승리한 선수에게 주는 월계관으로 교인에게 주는 썩지 않는 면류관과는 다릅니다. ‘그가 강림하실 때’는 바울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그가 사도적 부르심을 따라 신실하게 수행해 왔다는 증거로 승리한 회심자들을 그분 앞에 내놓을 것을 기쁜 마음으로 고대합니다(성경신학, 2,393쪽)./ 바울이 자신의 사역에 대해 받은 궁극적 보상은 돈이나 특권이나 명성이 아니라 자신이 전한 복음을 통해 하나님이 삶을 바꾸신 교인들입니다. 이것이 그가 그들을 간절히 보고 싶어 했던 이유입니다(LIFE, 2,327쪽)./
소망은 셋째, 교인과 비교인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교인은 소망이 있는 자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에서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NIV로 “Brothers and sisters, we do not want you to be uninformed about those who sleep in death, so that you do not grieve like the rest of mankind, who have no hope.”입니다. 직역하면:“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죽음 가운데 잠든 자들에 대하여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는 소망이 없는 다른 사람들처럼 여러분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입니다. 여기서 “who have no hope”는 헬라어 μὴ ἔχοντες ἐλπίδα (메 에콘테스 엘피다)로, “소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성도의 죽음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성도도 슬퍼합니다. 그러나 그 슬픔은 부활과 재림의 소망이 없는 절망적인 슬픔이 아니라,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는 소망 가운데의 슬픔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소망은 특별히 부활의 소망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소망은 죽음 이후의 부활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만날 미래를 뜻합니다. 비신자들은 죽음을 끝으로 보지만, 성도들은 부활과 재림을 기다리므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의미: 여기서 소망은 ‘부활과 영생에 대한 확신’입니다. 먼저 죽은 이들 때문에 슬퍼하는 성도들에게, 바울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이 끝이 아니며 부활의 아침이 기다리고 있다는 소망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즉, 죽음 앞에서 절망하는 비신자들(소망 없는 다른 이)과 구별되는 결정적인 기준이 바로 이 소망입니다./ 당시 헬라·로마 세계(이방인)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알지 못해 죽음을 끝으로 보았고, 따라서 ‘소망 없는 슬픔’에 빠졌습니다. 반면 바울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부활과 영생의 확신이 있으므로 슬퍼하되 절망적인 슬픔에 잠기지 않는다고 선포합니다./ 1세기 헬라인들은 죽음에 대해 비관적인 생각을 가졌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죽은 교인들이 예수님이 재림할 때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날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자는 자들’ 즉 죽은 교인들을 자는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무덤에서 일어나기에 죽음을 잠에 비유했습니다. 죽은 자들은 중간상태에서 하나님과 의식적인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는 슬픔 자체가 잘못은 아니지만 비교인처럼 소망 없이 슬퍼하는 것은 잘못입니다(ESV, 2,366쪽)./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마지막 때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그 이후 디모데가 사역하기 전에 일부 교인들은 죽었고, 교회는 박해받았습니다. 이미 죽은 교인은 주님의 재림을 놓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부 교인은 주의 날인 환란의 시기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오심이 임박했고 언제라도 죽은 교인이 일어날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세상 사람들처럼 가족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고 위로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듯이 교인은 잠을 잤다가 다시 깨어날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무디주석, 2,151쪽)./ ‘자는’은 죽음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말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죽음과 부활 사이에서 영혼이 의식 없이 수면 상태로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망 없는’은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에서는 죽음은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성경신학, 2,396쪽)./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왜 동료 교인들이 죽었는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했습니다. 바울은 죽음은 끝이 아니며 교인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기에 교인들도 다시 살아날 겁니다(LIFE, 2,329쪽)./
교인과 비교인을 구분하면 교인은 낮에 속한 자이고, 비교인은 어둠에 속한 자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8절에서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NIV로 “But since we belong to the day, let us be sober, putting on faith and love as a breastplate, and the hope of salvation as a helmet.”입니다. 직역하면:“그러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을 흉배로 입고, 구원의 소망을 투구로 씁시다.”입니다. 여기서 “구원의 소망(hope of salvation)”은 헬라어로 ἐλπίδα σωτηρίας (엘피다 소테리아스)이며, “구원에 대한 소망”, “구원의 완성을 기대하는 소망”이라는 뜻입니다. 이 소망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때 이루어질 구원의 완성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여기서 소망은 장차 완성될 구원이며 주님의 재림 때 이루어질 구원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흉배, 사랑도 흉배, 소망은 투구로 비유되어 성도를 보호하는 영적 무장으로 나타납니다./ 의미: 치열한 영적 전투 속에서 성도의 생각을 지켜주는 ‘영적인 방어구’로 쓰였습니다.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처럼, ‘우리는 결국 구원받을 것’이라는 확실한 소망이 성도의 생각과 마음을 사탄의 유혹이나 절망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준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영적 전쟁을 치르는 성도들에게 소망을 ‘투구’에 비유합니다. 치열한 고난 속에서 사탄은 우리의 생각과 믿음을 뒤흔들지만, ‘우리는 반드시 최종 구원을 얻는다’라는 엘피스(확신)를 머리에 쓰고 있으면 어떤 유혹과 두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여호와를 갑옷 입은 전사로 묘사합니다. 교인은 마지막 날에 주님 곁에 서도록 예정된 자들로 갑옷을 입을 것을 요청받습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교인의 본질적 특성 세 가지입니다(ESV, 2,367쪽)./ 바울은 환란의 시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교인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않고 빛의 아들이고 낯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교인은 그날 그곳 즉 환란의 시기에 환란의 자리에 있지 않을 겁니다(무디주석, 2,154쪽)./ ‘호심경…. 투구’는 하나님은 갑옷을 입은 전사로 묘사하는 이사야 59장 17절에서 유래했습니다. 바울은 군사적 이미지를 사용해 교인은 영적 전투에서 무장해야 할 다양한 덕목을 설명합니다. 그는 데살로니가 교인에게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입으라고 권면합니다(성경신학, 2,398쪽)./
데살로니가전서의 소망은 네 번 모두 미래를 바라보지만,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결된 소망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의 ‘소망’은 단순한 긍정의 힘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죽은 자의 부활, 그리고 최종적인 구원에 대한 100%의 확신이며, 성도들이 고난 속에서도 끝까지 인내하며 믿음을 지키게 하는 강력한 원동력으로 쓰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의 ‘엘피스(소망)’는 막연한 희망 사항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 그리고 최종적인 구원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확실한 기대’를 뜻합니다. 바울은 이 소망을 통해 성도들이 현실의 고난을 이겨내고, 죽음의 공포를 뛰어넘어, 거룩한 영적 무장을 하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아무리 어렵더라도 주님이 도와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인내하며 슬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