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창작 자료방

알기 쉬운 현대 시 작법

작성자성담 임상호|작성시간26.06.15|조회수2 목록 댓글 0

 

알기 쉬운 현대 시 작법

 

리듬은 숨결이다








시의 고향은 리듬이다.
 


현대시는 리듬보다 이미지를 강조하지만 원래 시는 노래에 뿌리를 둔다. 고대 시가인 황조가, 공후인이 그렇고
신라 향가가 그렇고 고려 가요가 그렇고 이조 가사나 시조가 그렇다. 근대시 이전엔 시라는 말보다 노래歌가
강조되고 따라서 시와 노래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시와 노래는 함께 움직이고 서로 넘나들며 특수한 공간을 이룬다.


시조時調라는 말도 시 혹은 글귀를 의미하는 詩가 아니라 때를 의미하는 時이고, 그런 점에서 시조 역시 노래를
강조한 용어이다. 시조란 당대의 가락이라는 뜻이고 오늘의 용어로 말하면 이른바 유행가이다. 시조는 당대 유행하는
가락이란 의미이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엔 그저 고려가요, 이른바 여요이다. 청산별곡이 그렇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애 살어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애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울어라 울어라 새여
자고니러 울어라 새여
널라와 시름한 나도
자고니러 우니노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청산별곡 앞부분이다. 표제는 청산을 이별한 노래. 말하자면 이별가라는 뜻이지만 "살어리랏다" 는 과거 가정법에
속하고, 그 의미는 "살아야 했었을 것을" 하고 후회하는 노래, 요컨대 머루나 다래를 먹는 삶이지만 청산에 살아야
했었을 것을 그러지 못해 고생이라는 말씀이다. 이런 절망은 자고 일어나 우는 새를 보며 "너보다 시름이 많은 나도 /
자고 일어나 운다"는 표현이 암시하고, 전체시를 보면 결국 청산도 포기하고 바다에 가서 살았을 것을 하고 후회하지만
바다도 포기한다. "얄리얄리 얄라셩"은 후렴구이고 같은 낱말의 반복, 어구의 반복을 통해 리듬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시와 노래가 함께 어울리던 것이 근대가 되면서 시와 노래가 분리되고 따라서 근대가가 아니라 근대시라는
용어가 암시하듯이 이제는 노래가 아니라 시가 강조된다. 그러나 시라는 용어는 말씀을 뜻하는 언言과 관청을 뜻하는
시寺로 되어 있고, 이 관청 시寺가 후에 절을 뜻하는 사寺가 된다. 이 寺자 역시 분석하면 갈지之와 법도 촌寸으로 되어
있고, 그런 점에서 일정한 법도로 일을 해 나가는 관청을 의미하고, 후에 불교가 들어왔을 때 관청에서 불법을 논한
까닭으로 절을 의미하게 된다. 시는 시언지詩言志라는 말이 있듯이 마음에 있는 뜻을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라는 말이 관청 시寺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법도로 일을 한다는 의미하고 결국은 시는 마음 속에 있는
뜻을 운율(寺)에 맞추어 말(言)로 표현하는 글(詩)이다. 그리고 법法은 율律과 통하고 율은 시의 경우 음률이다.




시라는 말은 물론 말씀 言과 절 사寺로 되어 있다. 원래는 말씀 언과 관청시寺로 되어 있지만 후에 그렇게 변했기 때문에
그렇게 읽을 수도 있으나 많은 시인들이 생각하듯이 이런 의미를 고지식하게 정의하면 이상한 해석이 된다. 무슨 말인가?
시를 정의 한답시고 말씀 언과 절 사를 강조하면서 시는 언어로 된 사원이고, 따라서 시는 세속을 떠난 초월적이고 신성한
공간이라고 주장하는 시인들도 있지만, 이런 해석이나 주장은 다분히 주관적이고 감상적이다.




요컨대 지금 내가 강조하는 것은 근대시에 오면 시와 가, 말과 노래, 언어와 음악이 분리되면서 전자를 강조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조의 문제라는 것, 따라서 근대시든 현대시든 음악성, 노래의 요소, 리듬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우리 시의 경우 김소월, 한용운, 서정주, 청록파, 김수영, 김춘수 등은 리듬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의 우리시는
리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그저 문장을 토막내 쓰면 시가 되는 것으로 오해하고 그런 점에서 시가 쓸데없이 길고
재미가 없다. 물론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시를 쓰는 시인들의 경우 리듬을 무시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무시가 아니라
전통적인 리듬과의 싸움이고 투쟁이고 변증법이다.




 

자유시에도 운이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정형시뿐만 아니라 자유시의 경우도 각운rhyme에 의해 시의 음악성이 강조된다. 각운은 흔히 낱말의
동일한 위치에서 동일한 소리가 반복되는 현상, 한국어의 낱말은 일반적으로 초성, 중성, 종성으로 되어 있고, 따라서
각운은 초성이 반복되면 두운alliteration, 중성이 반복되면 요운internal rhyme, 종성이 반복되면 말운rhyme이 된다.
각운이란 말은 운율을 맞춘다는 의미와 머리, 허리, 다리에서 다리가 되는 운, 곧 말운이라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각운은
광의로 두운, 요운, 말운을 포함하고 협의로는 말운에 해당한다. 물론 각운은 낱말과 낱말 사이에도 적용되고 시행과
시행 사이에도 적용된다. 다음은 낱말과 시행 양자에 걸쳐 두운이 나타나는 경우.






말리지 못할 만치 몸부림치며
마치 천리 만리나 가고도 싶은
맘이라고나 하려볼까


- 김소월 <천리만리>








먼저 낱말의 경우 1행에는 "말리지 / 못할 / 만치 / 몸부림치며"에서 알 수 있듯이 네 낱말의 머리에 "ㅁ"이 반복되는
두운 현상이 나타난다. "만치"를 독립된 낱말로 읽지 않는 경우 1행은 "못할 만치 / 몸부림치며"가 되고 이 때는 "못할 /
몸부림"의 두운 현상 "-만치 / -림치며"의 요운 현상이 나타난다. 그런가 하면 1행의 첫소리, 2행의 첫소리, 3행의
첫소리는 모두 ㅁ으로 시작되는 두운 효과를 준다. 문제는 말운이고, 정형시의 경우도 우리시에는 말운 현상은 없고
운 대신 형태소나 낱말이 반복된다. 윤동주의 대표작 <서시>가 아름답고 감동을 주는 것은 무슨 사상의 깊이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음악성 때문이고, 그것도 두운과 요운 현상 때문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중략)......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먼저 "하늘을 우러러"가 문제이다. "하늘을 우러러"란 무슨 뜻인가? 정확하게 표기하면 "하늘을 쳐다보며"이거나
"하늘을 공경하며"이다. 그러나 시인은 "하늘을 우러러"라고 표현한다. "쳐다보며". "공경하며"가 아니라 "우러러"라고
표기한 것은 무엇보다 요운의 효과 때문이다. "하늘을 / 우러러"의 경우 "-ㄹ-/ -ㄹ-"이 반복되므로써 요운 현상이
 나타나고. 따라서 "하늘을 쳐다보며"나 "하늘을 공경하며"가 단순한 의미 전달을 목표로 한다면 이런 표기는 미적 효과를
목표로 하고 시가 예술일 수 있는 것은 이런 미적 책략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한 점"도 문제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이라고 말하지는 않고 "결코 부끄럼이
없기를" 혹은 "죽어도 부끄러움이 없기를" 이라고 말한다. 혹시 일부에서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하는 식으로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서시"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우리말에는 시간을 알리는 경우나 점에 대해 말하는
경우가 아니면 "한 점"이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다. 그것도 한 점 부끄러움이라니? 그렇다면 두 점 부끄러움도 있고 세 점
부끄러움도 있단 말인가? 이런 표기는 앞에 나온 "하늘"과 관계되는 바. 두 낱말 모두 첫 소리가 ㅎ으로 되어 있고 따라서
두운 효과가 있다. 요운 현상은 2행 "부끄럼이 없기를"에도 나타난다. "-ㄲ-/-ㄱ-"의 반복이 그렇다. ㄲ과 ㄱ은 다르지만
이 시행이 경우 비슷한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마지막 행이 아름다운 것 역시 "-밤-/-별-/-바람-"의 요운 현상 때문이다.


결국 윤동주의 <서시>는 사상이 아니라 소리 효과, 음악성, 그것도 섬세한 운의 효과가 감동을 주고 그의 시가 명시인
것은 이런 예술성 때문이다.




우리시에는 정형시든 자유시든 말운 현상이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각 시행의 끝이 비슷한 혹은 같은 소리로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말운은 아니지만 각 시행의 끝에 비슷한 혹은 같은 소리가 음으로써 미적 효과를 낳는 경우는 많다.
엄격하게 정의하면 앞에서도 말했지만 각운rhyme은 각 시행의 끝소리가 같은 소리로 조직되는 것이고, 따라서 협의로는
말운을 뜻한다. 그러므로 두운 역시 각 시행의 첫 소리가 같은 소리로 조직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위에 인용한 두 편의 시 가운데 김소월의 시가 두운 현상에 적합하고 윤동주의 경우는 변형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요운 현상 역시 각 시행 중간에 같은 소리가 나오는 경우이고 한 시행 속에 나오는 경우는 요운의 변형, 혹은
자음조화consonance나 모음조화assonance로 읽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말하자면 "팔리지 못할 만치 몸부림치며"는
자음조화, "마치 천리 만리나"는 모음조화로 읽을 수 있다. 우리시의 경우 각 시행이 끝이 같은 소리가 오는 이른바 말운
현상은 없지만 비슷한 소리(?)가 오는 경우는 있다.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 날빛이 뻔질한
은결을 돋우네
가슴엔듯 눈엔 듯 또 핏줄엔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김영랑,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말운의 정확한 보기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시의 미적 효과는 각 시행의 끝에 비슷한 소리가 오기 때문이다.
1행, 3행, 7행은 "끝없는 / 뻔질한 / 끝없는"의 ㄴ소리가 반복되고 2행, 4행, 8행은 "-네 / -네"의 같은 모음이 반복되고
5행, 6행,은 "듯 / 곳"의 ㅅ소리가 반복된다. 그러나 이런 소리의 반복은 말운 현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시의 경우
각 소리들은 각 낱말의 종성에 위치하는 소리가 아니라 낱말이거나 어미 활용에 속하고(끝없는, 흐르네,인 듯)굳이
종성에 위치하는 소리를 찾자면 "곳"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같은 ㅅ소리를 반복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이 소리는
운이 아니라 "곳"이라는 낱말의 반복이기 때문에 말운이 아니다. 여컨대 우리시의 경우 말운이 아니라 같은 어미나
낱말이 반복되고 이런 반복이 미적 효과를 준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