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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이야기

한국의 승마역사

작성자마굿간|작성시간09.09.10|조회수110 목록 댓글 0


1898년 경 외국인 선교사, 카톨릭 신부 및 외국인 교사들
로부터 유래하였다.
당시에는 당나귀를 이용한 경마가 성행을 하였으나 도박성이 아닌, 운동회에서 학생들의 흥을 돋우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학생들의 당나귀의 경주도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자취를
감춘 반면 군대에서는 승마술이 계승되어 1900년 11월 29일 기병대가 설치 되었으며 1901년 4월 무관학교에서 신체 건강한 학생들을 기병대로 선발하여 승마 훈련을 시킴으로써
승마의 기틀이 잡히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당시의 승마는 경마(당나귀 경주)로부터 시작하여 이후
학생과 군인들에 의해서 개화 풍물의 하나로 스포츠화 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승리로 한반도의 비극이 시작되었고, 그런 와중에도 기마대는 존속을 하였으며 경마와 같은 경주도 하는 등 일반인에게 승마를 선보이는 행사가 있었다.

그러나 1909년 7월 31일 한국의 군부와 무관학교가 폐지되면서 우리 나라의 승마는 싹이 채 자라지 못한 채 일제의 한일합병으로 그 주역이 일본인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결국 나라는 일제에 빼앗겼지만 당시 애국청년 학생들은 기를 꺽이지 않기 위해, 각종 체육
행사를 하였으나 당시에도 승마는 스포츠로서는 다소 생소한 분야에 머무르고 있었다.

다만 몇몇 개화한 일본인들, 특히 조선총독부의 관리들과 우리나라에 주둔한 일본군 지휘관들이 주동이 되어 1913년 서울의 수표동에 마술연습소(馬術練習所)를 낸 것이 승마단체 모임의 시초였다. 이듬해(1914년)인 4월에 승마장을 을지로 5가로 확장하여 옮기면서 '경성승마구락부'로 개칭되었고, 비록 일본인이 주축은 되었으나 이 조직은 한반도 최초의 승마 동호회가
되었다. 당시의 경성승마구락부는 경마를 위주로 한 단체로 활동을 하였으며 3.1운동 이후
승마경기의 틀이 잡혀 갔다.

   지금의 을지로 5가에 있었던 승마장에서 승마대회가 개최 되었는데 당시 종목으로 조마색,
마상체조, 장애물비월 등이 있었다.

1920년을 전후하여 승마인들은 자신들의 마술 향상 이외에 경마도 주도 하였고 1919년 2월에 일본인들이 주축이 된 조선체육협회가 발족하여 제1회 체육대회(지금의 전국체육대회)가
열리게 되었으며 1920년 7월에는 한국인 중심의 조선체육회(현 대한체육회의 전신)가 창립
되었다.

통상 경마는 동서양 어디서나 점령 지역에 대한 선무활동(본국의 시책을 이해시키어 민심을 안정시키는 일)에 이용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였고 초기 한국에서의 경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한국인 특히 지식층은 쉽사리 승마, 경마에 동화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주로 일본인으로 구성된 단체를 침략의 전위기관 중 하나로 바라 보면서 저항 의식을 가진 사람이 많았었고 승마나 경마가 일본 고유의 풍물이 아님에도 일본군 고관의 지원을 받고 있었던 까닭에 더욱 경계하고 저항했던 것이다.


한국의 승마는 1945년 9월을 맞아 드디어 학생 주축의 승마 단체인 '한국학생마술연맹'이 결성되었고 같은 해 10월에 '대한승마협회'가 정식으로 발족하게 된다.
1948년, 최초의 올림픽 참가를 위한 노력에도 불구
하고 예산 등의 이유로 출전 할 수 없었으나, 마침내
1952년 제15회 헬싱키올림픽 때 처음으로 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첫 출전에 힘입어 1960년 제17회 로마 올림픽 경기, 1964년 제18회 동경 올림픽경기에 참가 하였으며, 그 이후 20여 년의 침체기를 거쳐 마침내 1986년,
1988년 스포츠 장려 정책으로 서울올림픽('88년),
바르셀로나 올림픽('92년)에 참가하였고 국위를 선양 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지난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는 삼성전자승마단 선수들이 국가대표로서 참가하여 장애물 비월 단체 9위,
개인 15위라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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