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작가 임신행 선생이 <경남문학> 2014년 봄호(106호)에
동화 "밀밭 머리 버드나무에는"을 발표했다.
동화
밀밭 머리 버드나무에는
임신행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그는 알까
그리고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왜 우리는 다만 헤어지기 위해 자라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썼을까?
내 어린 시절이 죽었을 때
왜 우리는 둘 다 죽지 않았을까?
만일 내 영혼이 떨어져나간다면
왜 내 해골은 나를 좇는 거지?
─ 파블로 네루다
1.
“영아야!”
한 걸음 뒤져 등대 쪽으로 가던 현아가 앞서 가는 영아를 불렀습니다.
“…….”
영아는 듣지 못했는지 사박사박 걸어갑니다.
“왜 그래? 같이 가.”
사이좋게 소꿉놀이를 하던 영아가 무슨 까닭인지 벌떡 일어나 등대 쪽을 향해 달아나는 것이 아니겠어요? 초록빛 담쟁이덩굴이 돌담을 뒤덮기 시작한 돌담길을 영아는 긴 머리칼을 갯바람에 휘날리며 돌아보지도 않고 그냥 달려갔습니다.
초록빛 돌담이 영아를 따라갑니다.
“무슨 일이야.”
현아는 머리를 갸웃거렸습니다.
“차암, 기분 나쁘다 그치?”
누가 옆에 있기나 하는 것처럼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대답이라도 하고 가지…….”
현아는 왼발로 땅을 콩 굴렀습니다.
2.
잠시 멍청해진 현아는 머리 위로 날아가는 괭이 갈매기 두 마리를 향해 주먹총을 날렸습니다.
뭣 땜에? 못 들은 척, 어디를 가는 거야, 수상하지?
은근히 부아가 난 서현이는 가지고 놀던 소꿉을 대충 챙겨 집으로 돌아오며 몇 번이고 머리를 갸웃거렸습니다.
“현아! “
대문을 들어서는 현아를 불렀습니다.
마침 할머니가 댓돌을 내려서는 할아버지를 부축하며 등대로 산책을 가자고 눈짓을 했습니다.
서현이는 안고 온 장난감을 댓돌에다가 놓고 여느 때처럼 할아버지의 왼손을 잡고 집을 나섰습니다. 초록빛 담쟁이덩굴은 돌담의 돌들이 행여 굴러떨어질까 보듬고 있어 정겨운 섬길입니다. 돌담길을 천천히 걸어갑니다. 조금 전 영아가 달려간 돌담길입니다.
서현이가 윤이 자르르 나는 초록 담쟁이 잎을 왼손 손등으로 사알 살, 간질였습니다. 기름을 바른 듯 윤이 나는 초록빛 담쟁이덩굴 잎들이 까르르 웃었습니다. 할아버지도 잎을 쓰다듬어 주며 웃었습니다.
“나는 이 돌길이 조 오 타.”
할아버지는 담쟁이 잎을 도르르 스치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이 길은 우리 섬 자랑거리지요”
할머니가 거들었습니다.
“길이면 다 길인감. 생각할 수 있는 길이야 길이지…….”
“그럼, 새 길은 길이 아니네요?”
현아가 냉큼 물었습니다.
“새 길은 자기가 만들어 그 길로 다녀야 정이 들었어. 할아버진 이 길을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쳐 뭍에서 고등학교, 대학을 다닐 때는 방학 때 와 걸었고 교사 노릇을 43년 할 때도 방학 때 와서 걸었고, 정년하고서 돌아와 이렇게 너랑 살면서 거닐잖아. 당신도 그렇지?”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그럼요…….”
할머니는 어깨를 으쓱 추스르며 대답했습니다.
할머니는 흐뭇해 따라하며 밀밭 두렁길을 앞서 갔습니다.
3.
“순녀야! 서현아!”
노랗게 익어가는 밀밭 둑길을 걷던 할아버지가 좋은 일이 생겼는지 할머니 이름과 서현이 이름을 불렀습니다.
“네, 여~보!”
할머니는 모처럼 할아버지가 자기 이름을 불러 주는 것이 반가워 상냥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무릎까지 웃자란 밀밭으로 들어가 할머니와 서현이를 향해 손짓을 했습니다.
할머니보다 먼저 현아가 할아버지 곁으로 달려갔습니다.
“할아버지! 이게 뭐예요?”
밀이랑 사이에 새둥지 속에는 작은 아기 새가 꼬물거리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노골 노골 지리 지리 노고지리라고도 하고 아기 종달이다…….”
“착한 것들…….”
할머니가 아직 털이 다 나지 않은 아기 종달새 다섯 마리를 허리를 꾸부리고 들어다보며 말했습니다.
“우리가 키우면 안 되어요…….”
서현이는 아기 종달새를 키워 봤으면 하는 호기심에 할아버지 눈치를 살폈습니다.
“종달새는 성질이 말라 제 어미가 아니면 죽어요. 구경만 하고 우리도 물러나자.”
할아버지는 현아의 손을 잡고 밀밭 이랑을 벗어났습니다.
할머니는 가던 길을 돌아서 와 할아버지 등을 밀고 구새 먹은 버드나무 아래로 갔습니다.
“여보! 여보! 여길 보세요.”
할머니가 소스라치듯 할아버지를 향해 부르며 가르치는 곳에는 십여 센티미터쯤 되는 어린 버드나무 가지가 소옥 올라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봐요, 이 늙은 버드나무도 이 봄에 다시 새 가지를 내고 살아나는데, 당신도 이렇게 운동을 하여 나랑, 서현이랑 셋이서 알콩달콩 살아요. 여보. 힘내세요. 건강은 자기 맘먹기에 달렸어요…….”
할머니는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
할아버지는 대답은 않고 붉은 등대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자기 건강은 자기가 자긍심을 가지고 스스로 챙기고 보살펴야 해요.”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사람, 마음먹은 대로 된다면 무슨 걱정. 당신은 당신 몸이나 잘 다스려요.”
툴툴거리듯 할아버지는 할머니 건강 걱정을 했습니다.
“내 걱정을 해줘서 고마워요…….”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상냥하게 대답했습니다.
“이제, 우리도 자기 건강 자기가 챙기도록 해요. 나는 당신이 너무 나에 신경을 쓰니 혼란스러워요…….”
바닷가로 그것도 할아버지는 옛날 생각으로 기분이 좋아져 정신이 드는지 조용조용 말했습니다.
“네, 그렇게 해요.”
할머니는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4.
앞서 가던 할아버지가 엎디어 붉은발말똥게와 장난질을 하는 서현이를 불렀습니다.
“네, 할아버지.”
잡은 붉은발말똥게가 서현이 손가락을 집어 몹시 아파도 서현이는 할아버지 앞으로 가 활짝 웃었습니다.
“이 어린 나무를 보아라. 어린 나무는 서현이 너다. 이 고목은 할아버지, 할머니다. 넌, 부디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서. 너와 이웃을 돌보는 바른 사람이 되거라.”
할아버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중학교 국어 과목을 삼십칠 년간 가르치고, 할머니는 초등학교서 삼십육 년을 근무하다 할아버지와 같이 사 년 전, 이월 말에 정년퇴임을 한 부부 교사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렇지 않았던 할아버지가 작년부터 건강에 이상한 기미(치매)가 보였습니다. 올해 들어 심해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합니다. 더러 헛소리를 하기도 합니다. 조금 전의 한 일을 잊고 혼자 중얼거리는 횟수가 잦습니다. 읽고 있던 책을 찾아 집 안을 들쑤셔 놓고 버럭버럭 화를 냅니다. 점심밥을 분명 먹고서도 점심밥을 먹지 않았다고 생트집을 부립니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어쩔 줄을 몰라 전전긍긍하기가 일쑤입니다.
5.
“할아버지! 할머니! 나비가 여기…….”
버릇처럼 서현이는 구새 먹은 버드나무 안을 들여다보다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나비 세 마리가 줄지어 앉았네. 신통하구나.”
할아버지는 신기하고 좋아서 손뼉을 쳤습니다.
“어쩌면!”
뒤따라온 할머니는 잠자는 듯 나란히 줄지어 앉은 나비를 보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러게 말이요. 나비가 세 마리씩 들어와 앉아 쉬는 것은 처음 보네. 경사스러운 일이네…….”
할아버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습니다.
“맨 위에 앉은 나비는 할아버지. 두 번째 것은 나, 맨 끝에 앉은 나비는 우리 서현이…….”
할머니는 할아버지 왼쪽에서서 나비 한 마리 한 마리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6.
“세상에 이런 일이…….”
할머니는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좋아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당신이 말한 대로 맨 앞에 흰 나비는 나고, 두 번째 나비는 할머니고, 세 번째 나비는 서현이라고 좋은 생각이오. 나비야 자주 만나자…….”
조금 어눌한 목소리로 할아버지는 말을 하고 박수를 치며 좋아하며 새삼스럽게 속이 텅 빈 버드나무를 올려다봤습니다. 밀밭 머리 버드나무는 멀리서 보면 큰 초록빛 부채 하나를 세운 듯 모습을 하고 있고 나무 밑동은 구새를 먹어 속은 비어 있습니다. 구새 먹은 자리는 어른 두서너 사람은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있습니다. 마을과 뚝 떨어져 서 있는 밀밭 머리에 있는 이 자리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젊은 시절에 섬 마을 사람들 몰래 밤이면 만난 장소라고 합니다. 오순도순한 추억이 스며 있는 밀밭머리 버드나무이지요. 그러니까 할머니, 할머니와 같이 아니, 섬 마을 사람들과 함께 늙은 셈이지요. 밀밭은 이른 봄이면 할머니가 영아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밀씨를 뿌리고 밀을 거두면 콩을 심습니다. 요즘 들어서 밀밭머리 버드나무는 서현이와 영아의 비밀 장소입니다. 흰나비 세 마리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즐겁고 기운차게 했습니다.
7.
붉은 등대는 어제보다 더 아름답고 멋져 보였습니다. 오늘 따라 바다는 그림 속처럼 잔잔하고 조용한 물결을 치고 있었습니다. 바다에는 오는 듯 마는 듯 는개가 오고 있었습니다.
“아이쿠 갑자기 비가 오네!”
붉은 등대 쪽으로 가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손을 잡고 서둘러 버드나무 구새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빗방울이 굵어졌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서현이가 앉은 버드나무 구새 안으로는 다행히 빗방울은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비 오는 밀밭이 차암, 운치가 있네요…….”
할머니가 옆에 앉은 할아버지 손을 잡고 사무친 듯 말했습니다.
“아름다운 것들 중 뭐니 뭐니 해도 곡식에 비 오는 모습이지요. 당신 말대로 밀밭에 비 오는 모습도 아름다워요…….”
“밀밭하면 빈센트 반 고흐의 밀밭을 떠올리지만 고흐의 밀밭은 햇빛이 눈부셔 나는 싫어요.”
“솔직히 말해, 예술은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밀밭 머리 버드나무 속에 있으니 예술 작품 속에 우리가 들어 있지요. 우리는 예술을 누리고 삽시다.”
할아버지는 서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조용 말했습니다.
8.
“할아버지 게들이 자꾸 어디서 기어 나와요?…….”
붉은발말똥게가 열 마리도 더 되게 앙금앙금 기어와 비를 피하고 싶은지 구새 먹은 버드나무 아래로 모여들었습니다.
“저 게들은 야행성인데 여기서 잠을 자고 바다로 나가려나 보다”
할아버지는 무릎을 맞대고 마주 앉은 서현이 두 손을 모아 잡고 비 오는 밀밭을 거닐고 있는 할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9.
“할머니~ 감기 들어요.…….”
서현이는 우산도 없이 갈참나무 가랑잎 빛으로 물드는 밀밭 이랑을 거니는 할머니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놔둬, 저 연노랑으로 익어 가는 밀 물결을 실컷 느껴 보시게…….”
할아버지는 축구공 하나 크기로 뚫린 버드나무 구새 구멍을 올려다보며 실실 웃으며 말했습니다. 할머니는 는개가 내리는 밀밭을 거니는 것이 기분이 좋은가 양팔을 벌리고 천천히 걸어가고 있습니다.
10.
“할아버지! 이 버드나무는 몇 살이에요?”
왼손 집게손가락으로 푸석푸석 썩어가는 버드나무를 눌러보며 물었습니다.
“삼백 년은 더 됐지. 내가 너만 할 때는 이 버드나무가 초롱초롱 푸렁 살아 있어…… 내 공부방이었고, 훗날 할머니와 데이트 장소였었지. 저 구멍으로 밤이면 별이 들어와 할머니와 나를 즐겁게 해주었지. 내가 통영시내 이 학교, 저 학교 전근 다닐 때 죽었는가 봐. 이레 뵈도 이 버드나무는 앞으로 백 년은 더 살겠지…….”
할아버지는 가만히 일어나 줄지어 앉은 흰나비를 유심히 살펴보며 연극을 하듯 말했습니다. 할머니는 밀밭 머리를 나는 몸집이 큰 나비로 보였습니다.
11.
이때였습니다.
“서현아! 너 어머니 오셨다.”
흥분한 영아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
서현이는 선뜻 대답을 하지 않고 밀밭 이랑으로 졸랑졸랑 달려오는 영아를 바라봤습니다. 영아는 찢어진 검정 우산으로 비를 막고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거짓말! 어머니가…….”
반가운 마음에 서현이는 할아버지를 앞세우고 구새 먹은 버드나무에서 나왔습니다. 붉은발말똥게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나갔습니다.
“너 나한테 뻥 날리고 있지?”
서현이가 가쁜 숨을 쉬고 있는 영아를 빤히 바라보며 웃으며 물었습니다.
“아니야, 저쪽 바 봐.”
영아는 마을 쪽을 가리켰습니다.
“아무도 없잖아.”
영아가 가리킨 마을 쪽은 썰렁하니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으, 나를 따라오셨는데…….”
영아는 민망한 마음을 숨기지 못해 머리를 갸웃거렸습니다.
12.
“오! 영아 왔구나. 할아버지가 버드나무 구새 밖으로 나서며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영아가 할아버지를 향해 다소곳이 절을 했습니다.
“서현이 엄마 아버지가 오셨다고?”
할머니가 할아버지 옆으로 나서며 물었습니다.
“네! 오셨습니다.”
영아가 상냥하게 대답했습니다.
“어서 가봅시다.”
할머니는 서현이와 할아버지 손을 잡았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모시고 먼저 가세요. 영아랑 이야기 좀 하고 따라갈게요.”
서현이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등을 가볍게 밀었습니다.
“영아 너 아까 내가 부를 때 왜 혼자 갔니?”
서현이는 쌀쌀맞게 물었습니다.
“있잖아, 네 할아버지, 할머니 보시라고 너 모르게…….”
더듬거리듯 영아는 말했습니다.
“뭘?”
“저기, 흰 나비는 내가 색종이로 짝퉁흰나비 한 마리를 만들어 붙여 두었거든 그런데 정말 나비들이 날아와 앉았네, 그것도 두 마리가 줄지어…….”
“그럼 여기 이 게들은…….”
“자세히 봐 봐, 라면 부스러기를…….”
“네가 뿌렸니?”
“응”
“왜?”
비 오는 밀밭길 따라 천천히 할머니 곁으로 가는 할아버지를 가리켰습니다.
“네 할아버지 나비, 게, 꽃 이런 것을 좋아하시잖아, 제발 좀 건강하시라고…….”
“?!”
서현이 어머니는 우산도 없이 할머니, 할아버지를 향해 달려오며
“오모니! 아부지!…….”
베트남 망고 냄새를 풍기는 목소리로 부르고는 서현이를 와락 보듬었습니다.
“바쁠 텐데…….”
할머니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저저. 서현이 동생을…….”
말을 다 못한 어머니가 수줍어 서현이 작은 가슴에 얼굴을 묻었습니다.
“조기 돌 밑을…….”
영아가 서현이에게 귀엣말을 하고 빗속을 달아났습니다.
“!!.......”
“영아~ 너!”
서현이는 달아나는 영아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코를 훌쩍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