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문학> 2014년 봄호(106호)에 발표한 회원 작품입니다.
수필
/ 그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ㅣ 정목일
2005년 11월 25일, 금요일 하오 3시 30분, 인사동 전통찻집 다경향실 에서 차를 마신다. 텅 빈 2층 공간에 혼자 차를 마시는 중이다. 무심히 창밖으로 눈길을 보낸다. 창 아래 맞은편 전통찻집 인사동 앞에 50대 중반의 한 사람이 앉아 있다. 검은 베레모, 색안경, 긴 분홍색 목도리, 그 안에 또 하나의 청색 짧은 목도리, 회색 바바리, 손에 검은 장갑, 흰 운동화, 계량 한복 바지-. 국적 불명의 야릇한 차림이다.
휴대용 의자에 앉아 발을 벌리고 양팔을 어깨 높이로 들고 있다. 앞에는 신라토기 항아리 하나가 놓여 있다. 그는 거리에 앉아 무얼 하는가. 팔을 공중으로 들어 올린 자세로 꼼짝도 하지 않는다. 날씨도 찬데, 그의 행동이 미덥지가 않다. 얼마나 오래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그의 의도는 무엇인가?
나는 차를 마시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땅 위에 펼쳐놓은 종이에 무언가를 써놓은 모양이다. 그는 자못 엄숙하다. 행인들의 눈길과 관심을 모으기 위한 차림과 행위는 침묵으로 위장돼 있으나 처절하게 느껴진다. 그가 무참해지는 것은, 행인들이 알 바 없다는 듯 무심하게 지나치는 데 있다. 그도 일일이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하다. 거리의 움직임에 익숙해 있다. 다만 마음으로 읽고 있다. 행인들이 흘끔흘끔 한 번이라도 쳐다보지 않고 지나가는 것에 대한 섭섭함을.
어떻게 대중들의 관심을 끌 것인가? 그의 옷차림과 행위, 그리고 소품들은 행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최선의 노력과 고뇌의 연출이다. 그런데도 거리의 행인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음을 본다. 이것은 자신의 처참한 몰골을 보여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자신의 행위, 의도가 완전히 실패했음을 뜻한다. 이제 그런 행색과 행위는 낡은 것이 돼버렸음을 말한다. 소재 자체가 퇴색된 것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는 알고 있을까. 행인들은 도사나 성자인 양 과장과 변신을 하더라도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는 걸. 그는 태연한 척하지만, 눈길을 끌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의 차림은 달라이 라마나 티베트의 라마승을 흉내낸 것처럼 보인다. 수도승처럼 보이려 태연자약한 척하지만,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무관심의 대상일 뿐이다. 종이엔 무엇을 써놓았을까. 행인들 중엔 종이의 글을 읽느라 눈길을 주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녹차를 마시면서 그를 주시하고 있다. 그를 흥미의 대상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지나는 사람이 있긴 해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1시간이 지나도 어떤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의 표현법은 행인들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다. 구경거리, 흥미거리의 대상에 끼지 못하고 있다.
평생 동안 글이라고 써온 나도 어쩌면 그와 행색이 다르지 않을 듯싶다. 나의 글도 철저하게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한 채 소외 속에 덩그렇게 처박혀 있는 몰골이 아닐까. 나의 표현법도 독자층과는 공감대를 이루지 못해 관심 밖으로 밀려나간 게 아닐까. 그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 문인들도 툭하면 성자나 깨달음을 얻은 자처럼 위선과 거드름을 피우지 않는가. 적멸寂滅, 소신공양消身供養, 오체투지五體投地, 화엄華嚴, 찬양, 기도-. 이런 언어는 함부로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피상적인 지식만으로 중얼중얼 토해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는 벌을 서고 있는 듯 보인다. 손을 들고 종이 팻말을 보이며 무엇을 말하고 있다. 1인 시위 행위는 아닌 듯하지만,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는 무슨 운동가인가. 고심에 찬 행위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반응이 없다는 게 그를 못 견디게 한다. 아무도 신라토기 항아리에 동전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서양인 세 사람이 옆 건물인 한국공예관 앞에 서서 열심히 김밥을 먹어치우더니 떠난다. 그에겐 관심조차 없다. 한 줄에 천 원인 김밥으로 한 끼를 때우고 외국 관광객은 사라진다. 아무도 그를 성자로 볼 리가 없다.
무슨 캠페인이나 운동가로 볼지도 의문이다. 앞에 놓여 있는 신라토기 항아리가 속셈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는 지금 돈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도 엉뚱하게도 안개를 피워내고 있다. 한 푼 줍쇼 하고 애걸하는 게 솔직한 모습이 아닌가. 성자처럼 인류를 위한 계몽운동자인 척하여야만 성금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다.
행인들의 눈은 절대로 어리숙하지 않다. 사기꾼이나 행위예술가의 흉내를 내는 구걸꾼처럼 생각하며 지나치고 있다. 그는 지금 어떤 자극과 호기심도 불러일으키지 못한 퍼포먼스를 이대로 계속할 셈인가. 군중심리를 너무나 모르는 듯하다. 일말의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 이제 일어서서 돌아가야 한다. 반응 없는 행위는 무모하고 부질없는 짓에 불과하다. 그의 표현은 난해하다. 명료하지 못하다. 소외당하고 버림받고 있다.
나도 이제 더 이상 인내심을 갖고 그의 행위를 목격할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도대체 종이 위에 무엇을 써놓았을까? 1시간 30분이 지나가도록 어떤 소득도 올리지 못하고 있다. 그가 쓸쓸해 보이고 가련하다. 그는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일까.
검은 가방을 꺼내 자크를 열고 안을 뒤진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임을 알아차린 것일까. 그는 가방 속에 장갑을 벗어 넣고는 맨손을 치켜든다. 비장하다. 찬 날씨에 얼마나 오래도록 견딜 수 있을 것인가. 희망이 없는 일인 데도 자신과 싸우고 있다. 일어서려 하다가도 도로 주저앉는다. 아무도 신라토기 항아리에 동전을 투입하지 않는다. 모조품이긴 해도 신라토기 항아리가 민망해 보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층계를 내려가 그의 앞에 선다. 무엇을 써놓았는가, 알고 싶다. 그는 자신의 침묵과 명상법이 현실과 통하지 않는 것을 모르고 있단 말인가. 행인들의 관심 밖이라는 걸 자각하지 못하는 걸까.
나는 드디어 그가 써놓은 비장의 메시지를 본다.
“쌀도 핵이다. 꼭 지켜야 한다”
일체 지공一體 知空(몸으로 공空을 아네) 이란 글과 함께 달라이 라마 14대의 사진이 붙어 있다. 아하, 그의 옷차림은 달라이 라마 14대를 흉내낸 것이었구나. 그는 생불生佛의 모습으로 거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백 원짜리, 십 원짜리 동전이 들어 있는 모조 신라토기 항아리 속에 나는 천 원 지폐 한 장을 넣으며 그의 얼굴을 본다. 40대쯤밖에 안 돼 보이는 얼굴이다. 토기항아리 곁에 시집이 하나 놓이고 시집의 사진이 그라는 걸 알리고 있다. 시인이란 말인가? 나는 낭패한 얼굴로 인사동 거리를 벗어난다. 그의 얼굴에 내 얼굴이 겹쳐지고 있다.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