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농사
정 목 일
동구 밖으로 나오니 늙은 농부 한 분이 소를 몰며 쟁기질을 하고 있다.
푸르름 뚝뚝 떨어져 흐르는 유월의 하늘 속으로 종달새는 자꾸 거꾸로 떨어지며 눈부신 햇살 속에 노래를 섞고 있다. 논둑에서 가족인 듯한 두 사람이 쟁기질하는 노인을 바라보고 있다.
‘저렇게 늙은 농부가 쟁기질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나는 멈춰 서서 느릿느릿 소를 모는 늙은 농부를 바라보았다.
‘한 여든 살도 더 되겠다.’
“이랴! 이놈의 소, 이랴!”
노인의 목소리는 뜻밖에도 쩡쩡 울리고 있다. 그 목소리는 소만이 알아듣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산이 알아듣고 은은한 메아리로 답해 주고 있다.
“이랴! 이랴!”
노인의 목소리는 일하는 운치, 노래하는 후렴 같은 것으로 흥이요, 신바람이다. 들판과 산골짜기를 울리는 당당한 힘줄이 그 속에 뻗어 있다. 아이들 모양 짧게 깎은 머리에는 갈대꽃 같은 백발이나, 주름진 황토 빛 얼굴에 번지고 있는 맑은 즐거움…….
무릎밖에 안 닿는 짧은 삼베바지 밑으로 나온 노인의 다리는 대지를 딛고 서 있는 것만이 아니다. 소와 노인의 이 힘으로 지금 대지의 속살을 파 일으키고 있다. 느릿느릿하나 든든한 소의 서두르지 않는 걸음과 노인의 쟁기질에 의해 파헤쳐지는 흙덩이들이 아름다운 선으로 누워 있다. 흙덩이들이 잠을 깨어 조금씩 눈을 뜨고 있다.
“아버지, 이제 그만 나오시소.”
논둑에 앉아 있던 쉰 살쯤 돼 보이는 아들이 노인에게 하는 말이다.
“이럇! 이럇! 요놈의 소!”
“그러다가 편찮으시면 어쩌렵니까. 경운기로 하면 대번에 합니다.….”
아들은 사뭇 애원조로 말하나, 노인은 들은 척도 않는다.
노인은 편리한 경운기로 논을 가는 것보다, 손때가 묻은 쟁기로 소와 마음을 통하면서, 땀과 힘과 정성을 뿌리며 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맨발에 와 닿는 부드럽고 촉촉한 흙의 감촉, 아카시아의 솔향기로 빚은 훈풍을 들이마시면서…….
따사로운 봄 햇살 속에 늙은 농부와 소는 가장 마음을 잘 알아주는 오랜 친구인 듯 정다워 보인다.
“참, 큰일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중늙은이 아들이 옆에 있는 나를 돌아보며 하소연이다.
‘올 해 농사는 내가 주관하여 짓겠다.’
아버지의 말씀에도 ‘설마 그러시지는 않으시겠지.’ 여겼는데, 손수 논을 갈고 모내기며 농사일을 하시겠다고 나서시니, 여간 걱정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언제 수를 다할지 모르시는데, 아들로서는 낭패였다. 여러 번 만류하여 보았으나, 오히려 꾸지람이요, 그냥 보자니 이런 불효가 어디 있겠느냐고 하소연이다.
나는 말은 하지 않았으나, 노인에게 농사를 지으시도록 하시는 것이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 평생을 농부로서 이제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농사를 손수 지어 보겠다는 마음일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늙은 농부의 주름살에 고여 있는 평화는 자신이 대지의 한 부분인 흙덩이를 파 일으켜 그 터전에다 생명의 씨앗을 뿌려 기르겠다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음에 근거하는 듯하다.
숨을 거둬 언제 땅에 묻힐지 모를 노인에게는 한 생애를 되돌아보며, 소와 홁과 어떻게 화합을 이루는가, 마음으로 알아보려는 작업을 지금 하고 있음이 아닐까.
흙덩이들이 일어나고 있다. 잠을 깬 흙덩이들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지금 노인은 한 알의 벼이삭이 되어 땅에 묻힐 자신을 생각할지 모른다. 땅에 묻히면 노인도 싹이 될까. 되어서 다시 피어날까.
“이랴! 이랴!”
노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산골짜기를 울리고 있다.
“이랴! 이랴!”
벼가 누릇누릇 익어가는 구월 중순께, 나는 그 노인이 돌아 가셨다는 부음을 들었다.
나는 논두렁길을 걸으면서, 노인이 어디로 갔을까,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랴! 이랴!”
소 몰며 쟁기질하는 노인이 대지의 어디선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