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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센트의 행렬

작성자레인보우|작성시간03.02.17|조회수70 목록 댓글 0

루즈벨트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장애인이 되었다. 미국인들은 그의 소아마비와의 전쟁을 존경하였다. '10센트의 행렬(우리 나라의 10원짜리 동전 모으기와 유사한 운동)'에 성금을 보내는 국민들의 손길이 줄을 이었다. '루즈벨트의 아름다운 속임수'라는 한 역사가의 표현대로 루즈벨트는 그의 장애의 정도를 숨김으로써 더 많은 걸음을 내디뎠다.
루즈벨트는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던 인상과는 반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그는 휠체어에 앉아서 개인적으로 사진을 찍거나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것은 아직 TV의 시대 이전이기에 가능했을지 모른다. 그의 아들과 비서는 건물의 안과 밖에서 그가 서있도록 했다. 그가 만약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에 그들은 루즈벨트 옆에 바짝 붙었고, 루즈벨트는 그들 팔에 지탱해서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는 또 걸을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였다. 워싱턴은, 적어도 루즈벨트가 많이 다니는 길은, 휠체어로 접근이 가능한 도시였다. 이곳은 다른 도시보다 30년정도 먼저 램프가 설치되었다.

또다시 이때 장애를 가진 병사들이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돌아왔으며, 이것은 연방정부의 재활프로그램의 확대에 영향을 주었고, 새로운 정책서비스의 확산이 이루어졌다. 미국 퇴역상이군인회가 1946년에 자신들의 의료혜택을 증가시키고자 결성되었으며, 장애인의 고용에 대한 대통령위원회가 그 다음해에 설립되었다. 2차 세계대전동안 가장 중요한 재활의학이 하워드 러스크와 헨리 케슬러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혁명적인 생각을 가지고 재활센터를 설립하였다. 상이군인들에게 모든 서비스-신체적인 치료에서 취업을 위한 치료-를 제공해서 그들이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이러한 독립적인 삶에 대한 운동은 그 사람을 단지 환자로 보는 의료적인 모델을 거부하고 인간으로서 그 사람의 인생을 보는 것에 바탕을 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장애인을 돕는 것은 정부나 자선단체였지만, 일부나마 장애인 자신들의 자조적인 활동도 있었다. 청각장애인과 시각장애인들은 국가적인 자조조직을 19세기 후반기에 처음으로 설립하였다.
시각장애인구제법이 1920년대와 30년대 초에 시행되었다. 그러나 경제사정이 좋았을 때, 다른 사람들은 그러한 특별한 원조는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들이 이러한 자선이 없이는 살 수가 없다는 인식을 더 많이 심어주는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미국시각장애인협회를 이끌고 있던 로버트 어윈은 이러한 시각장애인을 위한 자동적인 연금이나 특수학교 설립정책에 반대하였다.
장애인들은 이러한 대공황시기동안에 처음으로 불복종으로 돌아섰다. 역사학자인 폴 롱모어는 '신체장애인 동맹'의 버려진 이야기를 추적하였는데, 뉴욕의 3백명의 장애연금자들이 그들의 고용개발국(Work Progress Administration:WPA)의 일자리를 거부하는 항의를 하였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장애인 정책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부모운동의 확산이었다. 새로운 장애인 집단이 부모들에 의해서 생겨나게 되었다. 더 많은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죽지 않고 살아나게 되면서 부모들은 기관에 보내는 것을 보다 강력하게 거부하게 되었다. 그들은 의사나 혹은 사회서비스 기관의 직원들의 지지와 더불어 다른 부모들과의 투쟁을 함께 하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의 가장 커다란 공통관심사는 장애자녀의 교육문제였다. 이러한 새로운 부모집단들은 자녀들의 실태를 의회에 제출하였고, 1966년에 장애인을 위한 연방국이 설립되었다. 이 부모집단들은 워싱턴에 끊임없는 로비를 하였으며, 1970년에 연방국은 특수교사의 훈련과 학급에서 장애아들을 가르치기 위한 특수 교재를 개발시키기 위한 재정을 제공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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