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츠는 버클리의 유일한 장애학생이었으나 그의 소문은 빠르게 퍼져 버클리는 또다른 장애학생을 받아들이게 된다. 다음해에 교통사고로 목을 다쳐 전신마비가 된 헤슬러 (Hessler)가 입학한다. 로버츠와 헤슬러 그리고 다른 장애학생들은 함께 모여 버클리대학에서 중요한 이슈였던 언론자유운동, 반전시위, 다른 정치적 사건들을 토론하고, 로버츠는 여성운동과 민권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자신의 신체에 대한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운동을 장애인들의 권리회복과 같은 맥락에서 보고 나약함을 가진 여성의 모습에 대한 편견을 이권에 이용하는 것을 장애인들이 동정과 보호본능을 일으키게 하는 것과 똑같이 여기게 된다.
학교 졸업 후 정치학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에 있던 1967년 버클리에는 12명의 중증장애학생들이 있었고 이들은 Rolling Quads로 그들 집단을 이름짓고 늦은 밤 휠체어에 앉아서 혹은 iron lung에 누운 채로 함께 모여 교실에의 접근의 어려움에서부터 교통수단의 부재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겪고 있는 일반적인 장애물의 제거방법을 논의하고 시위방법을 분석한다.
1968년 기숙사는 주정부의 재활과에 의해 공식적으로 운영되는 프로그램이 된다. 한 카운슬러가 낮은 학점을 이유로 두명의 학생을 기숙사로부터 퇴거시키려 할 때 Rolling Quads의 나머지 장애학생들은 반기를 든다. 카운슬러는 이들 모두가 A학점만을 받고 정해진 학점 이상을 이수할 것을 요구했고 그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학생들은 주정부로 부터의 재정지원을 삭감하겠다고 위협했으며, 두학생의 퇴거를 합리화하기 위해 학업에 적당치 않다는 라벨을 붙인다.
로버츠는 장애학생과 프로그램의 독립성을 수호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에 반기를 들고 학교행정부와 학생회에 장애학생에게 보다 엄격한 규정을 적용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항의를 하고, 그가 버클리에 들어올 때의 투쟁과 캠퍼스에서 보아 왔던 학생운동에 영향받아 지역신문사,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국에 전화를 건다. 기자는 "이처럼 악한 사람은 오랫동안 본적이 없다"라고 보도하고 버클리의 다른 학생들도 지지를 보낸다. 결국 몇주후에 이 카운슬러는 사퇴하게 된다.
이들의 늦은 밤 토론은 완전한 자력에 초점이 맞추어지게 된다. 이들은 자신의 카운슬러 혹은 사례관리자가 되어 다시는 자신들의 재정지원을 통제하는 관료에게 아부하는 일이 없게 되길 원했다. 자력으로 취업방법을 알아내어 주정부 프로그램에 의존하지 않아야 했고, 재활 카운슬러들의 클라이언트를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가 모든 것을 다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게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자신이 주정부의 서비스의 수혜자가 아닌 소비자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음해에 버클리시가 학교의 남쪽에 위치한 쇼핑 거리를 수리할 때 그들은 또한번 어려움을 겪게 된다. 보도블럭은 일반적 거리 설계에 포함되지 않았고 5인치 보도블럭위로 휠체어를 타고 다닐 수 없었기 때문에 장애학생들은 거의 캠퍼스를 떠나지 못했다. Rolling Quads의 8명의 장애학생들은 시의회 회의에 참석했고 그중 Donald Lorence의 대단한 연설은 도시 거리에 램프를 설치하는데 년간 5만달러를 투자하는 것을 약속 받게 된다. 이러한 작은 승리에서부터 정치적 운동의 싹이 자라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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