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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의 카스트로와 게바라

작성자김명호(1기)|작성시간16.11.30|조회수103 목록 댓글 0

2016.11.29 국제신문 도청도설

두 사람은 1955년 여름 망명지 멕시코에서 만났다. 쿠바 출신 변호사는 29세, 아르헨티나 출신 의사는 27세였다. 의기투합하는 데는 하룻밤이면 충분했다. 그만큼 젊은 피가 끓었다. 목표는 쿠바 혁명이었다.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내 생애 가장 위대한 만남'이다.

 

 

카스트로는 1953년 쿠바의 바티스타 정권에 맞서 몬카다 병영을 습격하다 체포돼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역사가 나의 무죄를 증명할 것'이라는 어록이 이때 생겼다. 1955년 5월 특사로 풀려난 그는 멕시코로 망명했다.

 

아르헨티나 상류 백인 가정에서 태어난 게바라는 두 차례에 걸친 여행에서 사회변혁을 꿈꾸는 혁명가로 변신했다. 1951년 라틴아메리카 첫 여행 때 '힘센 녀석'이란 뜻의 중고 오토바이 '포데로사'를 몰았다. 의대를 졸업한 뒤 이뤄진 1953년 남아메리카 여행 이후 과테말라 혁명에 투신한 그는 민주정권이 친미정권으로 교체되는 과정에서 멕시코로 피신했다.

 

1956년 겨울 두 사람은 한배를 탔다. 멕시코를 떠나 쿠바로 향하는 그란마호. 바티스타 정권을 상대로 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이끌었다.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에서 시작된 게릴라전은 1959년 1월 승리로 끝났다. 카스트로가 최고 권력에 오르고, 게바라는 중앙은행 총재와 장관을 역임하며 '쿠바의 두뇌'로 불렸으나 두 사람의 운명은 이내 엇갈렸다.

 

1965년 4월 게바라는 '쿠바에서 할 일은 끝났다'는 편지를 남기고 홀연히 쿠바를 떠났다. 그는 아프리카 콩고를 거쳐 볼리비아 혁명에 가담했다. 산악 게릴라전을 펼치던 그는 1967년 10월 39세 나이로 불귀의 객이 됐다. 그의 시신은 볼리비아에서 쿠바로 옮겨져 산타클라라의 혁명공원에서 영면했다. 스스로를 바꾼 두 차례의 여행기인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와 함께.

 

게바라의 혁명 동지인 피델 카스트로 쿠바 전 국가평의회 의장이 타계했다. 634회의 암살 위협을 극복하며 쿠바식 사회주의를 고수했던 그다. 20세기 혁명의 두 아이콘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게바라가 이상을 추구하다 혁명 전선에서 산화했다면 미국 대통령 10명과 맞서며 쿠바를 이끈 카스트로는 세월에 진 셈이다.

 

카스트로는 "좋은 정부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완수하면 그때 턱수염을 자르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오히려 턱수염이 있어 카스트로는 게바라와 함께 더 오래 기억될지 모를 일이다.**********

2016.11.29 부산일보 밀물썰물

     카스트로 타계

쿠바 혁명의 주역이자 상징인 피델 카스트로가 지난 25일 타계했다. 1926~2016년 90세. 냉전시대의 마지막 '붉은 별'이 스러졌다.

그는 많은 얘기를 남겼다. 어떤 것은 한쪽만 놓고 보기에 매우 모순적이었다. 그는 미국을 지극히 싫어했지만 미국 민주주의 이념을 만든 링컨을 열렬히 존경했다. 그는 쿠바에서 대규모 반미 시위를 주도하면서 링컨을 인용했다. "누구도 동의 없이 어떤 사람을 지배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민주주의의 금과옥조다. 이 금과옥조가 쿠바에서 잘 구현됐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는 서구의 양복을 싫어해 녹색 군복을 즐겨 입었다. 하지만 2006년부터는 독일 스포츠 브랜드인 아디다스 운동복을 줄창 입었다. 카스트로는 프란치스코 교황이나 외국 국가 원수들을 만날 때도 흰 줄이 선명한 '아디다스'를 입었다. 아디다스가 쿠바 올림픽 국가 대표팀을 후원했기 때문이라는 등 온갖 분석이 구구했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군복보다 편하고 사진도 잘 나온다"며 운동복을 입는 이유를 싱겁게 말했다. 어쨌든 2009년 타임지는 카스트로를 '옷 못 입는 지도자' 7위에 매겼다. 카스트로는 암살 피하기에서는 완벽한 금메달감이었다. 640차례가 넘는 미국 CIA의 암살 시도를 물먹였다. 그 많은 음모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인명재천인지 음모에 대한 저항력 때문인지 카스트로는 90세 '졸수(卒壽)'를 누렸다. 타계한 그를 놓고 뉴욕타임스는 '11명 미국 대통령의 숙적'이라고 썼다.

 

그는 무엇보다 연설의 달인이었다. 정치는 연설이자 말이라는 점에서 그는 유능한 정치인이었다. 1959년 쿠바 혁명에 성공한 뒤 아바나에 입성한 그는 대중 앞에서 연설했다. "국민을 속이고 국민을 기만하면 항상 참담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우리가 왜 승리했을까요? 진실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올해 4월 그는 쿠바 공산당 전당대회 폐막식에서 아디다스를 입고 나와 마지막 연설을 했다. "나는 곧 90살이 된다. 나도 다른 사람과 같아질 것이다.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찾아온다. 하지만 쿠바의 사상은 계속될 것이다." 이 연설을 들은 많은 이가 울었다고 한다. 우리에게도 국민을 울리는,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연설이 필요하다. 지금, 진실이 필요하다.

최학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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