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석굴암 해체·복원과정 찍은 유리원판 사진 공개
일제의 석굴암 훼손 실상 생생 / 성균관대박물관 19일 일반공개
일제 강점기인 1913년 무렵 경주 석굴암을 처음으로 해체·복원하는 과정을 찍은 유리원판 사진 12점과 1925년 불국사 다보탑 수리 장면을 찍은 유리원판 사진들이 공개됐다. 석굴암 관련 유리원판 사진 가운데 7점은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성균관대박물관이 17일 공개한 이들 사진은 일제 때 경주에서 동양헌이라는 사진관을 운영하던 다나카라는 민간인과 조선총독부 박물관장을 하던 후지타 료오사쿠(1892~1960)가 촬영한 것으로, 일제가 우리의 문화재를 복원하면서 훼손한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김대식 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석굴암 해체과정의 사진에는 석굴암 돔을 덮었던 흙, 기와, 석재와 내부의 환기구 모습 등이 담겨 있어 석굴암 구조를 밝혀줄 중요한 단서가 된다”며 “특히 일제시대 초기 석굴암 복원 과정에서 본존불을 제외한 모든 초석이 교체된 사실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말했다.
이밖에 1925년 불국사 다보탑을 수리하는 모습과 다보탑 위에서 찍은 석가탑 사진도 최초로 공개됐다. 그동안 다보탑 수리에 관한 보고서가 없어 그 이전 모습을 알 수 없었으나, 이번 유리원판 사진은 그 실상의 단면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사진으로 평가된다.
한편 성균관대박물관은 19일부터 석달 동안 특별전 ‘경주 신라 유적의 어제와 오늘-석굴암·불국사·남산’을 열어 사진들을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1960년대 2차 수리과정부터 현재까지 석굴암의 어제와 오늘을 보여줄 예정이다. 또 이번 전시회에서는 1차 해체과정에서 발견된 천불보탑과 금강역사의 팔뚝도 전시되며 경주 남산의 식민지시대 유리원판 사진 60점도 공개된다.
송재소 박물관장(한문학)은 “일제가 석굴암을 해체·복원하는 과정에서 훼손한 실상을 유리원판 사진을 통해 최초로 공개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김연기 기자 ykkim@hani.co.kr /한겨레 2007-09-17
[2002년] 고이즈미 일본 총리 방북.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정상회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9월17일 북한을 방문,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평양 백화원초대소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국교정상화 문제를 비롯한 현안들을 논의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김위원장이 "핵과 관련해 제반 국제협약을 모두 준수하고 미사일은 기간제한없이 발사를 동결하겠다"고 약속했음을 분명히 했다. 양국 정상회담 성사로 북한은 양국간 수교시 일본에 대해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과 戰後(전후) 적대행위에 대한 배상금 등을 요구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고, 일본은 自國(자국)이 동북아 문제의 主役(주역)임을 세계에 알리게 됐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의 일본인 납치와 괴선박 공작에 대해 전면 인정하고 사과함으로써 자신의 對日관계 회복 의지를 보여주려 했는데, 피랍된 14명의 일본인 중 8명이 사망했다는 사실이 일본 열도에 전해지면서 일본 내 분위기가 분노로 돌변, 북일(北日)관계 전망도 불투명해졌다. 고이즈미는 여론의 반발이 예상했던 것보다 커지자, 서둘러 진화에 나섰지만 북한에 납치돼 사망한 8명의 일본인들에 대한 타살 의혹이 확산되면서 ‘사망자 진상규명’이 북일간의 또 다른 쟁점으로 떠올랐다. 생존자 5명은 10월15일 일본에 일시 귀국, 기다리던 가족들과 24년 만에 재회했지만 영구귀국에 대한 북일간의 입장차이로 해결에 난항을 거듭했다. /조선
[2000년]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복원끝내고 개관
중국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가 2000년 9월 17일 한국 광복군 창설 60주년을 맞아 중수복원을 마치고 새로 문을 열었다.
독립기념관과 중경 임시정부 구지(舊址) 진열관은 5월 청사 개보수를 위한 협의서를 체결하고 18만 달러의 공사비를 들여, 대대적인 복원공사를 마쳤다. 중경시 유중구 칠성강 연화지 38호에 위치한 임시정부 청사는 5개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지 1034평방미터에 연건평이 1322평방미터(약 400평)이다.
한때 중경시의 도시개발 계획에 따라 철거될 위기에 놓였던 임정 청사는 1991년 국내 학술조사단의 보고로 보존책이 적극 강구되어, 1994년 양국간에 복원협정서가 체결되고 1995년 8월11일 1차 복원식을 거행한 바 있다. 이번 복원기념식에는 당시 중경 현지에서 활동한 광복군 등 애국지사 30여명과 홍순영 주중한국대사, 중국 관계자 등이 참석했다. /조선
[1998년] 김대거 원불교 3대 종법사 열반
← 원불교 3대 종법사를 지낸 대산 김대거 종사
원불교 3대 종법사를 지낸 대산 김대거(84)종사가 1998년 9월 17일 전북 익산 원불교 중앙총부에서 열반했다.
1914년 전북 진안군에서 출생한 대산 종사는 원불교 교세를 확장하고 운영을 체계화하여 오늘날의 원불교로 만든 종교지도자다. 본명은 영호로 11살 때인 1924년 원불교 교조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에 귀의, 시봉으로서 교리를 연마하다가 1962년 정산 송규 종사에 이어 교단운영을 맡았다. 이후 교화 교육 자선의 3대사업을 더욱 발전시켰다. 천석꾼의 아들로 한시를 잘 지었던 대산 종사는 1946년 해방 직후 서울출장소장 때 이승만, 김구 등과 교분을 쌓기도 했다.
1995년까지 33년 동안 국내외에 수많은 원불교 교당을 개설하고, 교도들을 훈련시켰다.
대산 종사는 원불교를 13개 교구 5백여 교당에 신자수 1백30만명의 국내 4대 교단으로 교세를 확장시켰으며, 특히 심전(心田)개발, 인류공동시장 개척, 종교연합운동에 앞장섰다. 교리해설서 ‘정전대의’를 저술하기도 했으며, "진리는 하나, 세계도 하나, 인류는 한 가족, 세계는 한 일터, 개척하자 하나의 세계"라는 열반송을 남겼다. -조선
[1997년] 소설가 정한숙(鄭漢淑)씨 별세
← 소설가 정한숙씨
1922 평북 영변~1997. 9. 17 서울.
소설가로서는 물론 국문학자·문예행정가로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정한숙은 1946년 월남해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재학 중이던 1948년 단편소설 〈흉가〉가 문예지 〈예술조선〉 공모에 당선되면서 등단했고, 전광용·정한모 등과 함께 〈주막〉·〈시탑 詩塔〉 동인으로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6·25전쟁 전후 등단한 당대 '신세대 작가군'의 한 사람으로 평생 다양한 소설기법을 실험했고, 특히 1952~85년에는 한 해도 작품 발표를 거르지 않아 부지런한 작가의 전형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격동의 현대사를 골고루 겪은 그는 분단시대의 대표적 피해 당사자인 실향민으로서 1950년대 중반부터 한국현대사에 대한 관심을 소설화하기 시작했다.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모두 160여 편의 작품을 썼는데 그 중 15편이 중·장편일 만큼 다작이었다. 6·25전쟁으로 붕괴된 봉건사회의 갈등과 사랑을 그린 〈고가 古家〉(1956), 낙원을 찾으려는 인간의 꿈과 좌절을 그린 〈이어도〉(1960), 남북분단의 현실을 닭장에 비유해 쓴 우화소설 〈닭장관리〉(1963),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한 〈전황당인보기 田黃堂印譜記〉(1955)와 〈금어 金魚〉(1971), 전통의 향기와 함께 민족사의 비극이 어우러진 소설 〈금당벽화〉(1955)·〈이성계〉(1965)·〈논개〉(1971) 등을 그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
1954~88년 고려대 교수로 재직했던 그는 1975년 한국소설가협회 부회장을 맡으면서 문예행정가로서의 탁월한 일면을 보이기도 했다. 1983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예술원 회장과 문예진흥원장, 국제 펜클럽(International PEN) 한국본부 고문 등을 역임했다. 대한민국예술문화상, 3·1문학상, 국민훈장 모란장, 은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했다. 작품으로 소설집 <황진이>(1955)·<끊어진 다리>(1962)·<조용한 아침>(1976) 등과 시집 〈나무와 그늘 사이에서〉(1988)·<잠든 숲속을 걸으며>(1989) 등을 펴냈고 평론집 <현대한국문학사>(1982)와 <현대한국소설론>(1973) 등의 문학이론서를 남겼다.
[1994년] 재미 원로시인 박남수씨 별세
← 4·19 혁명에 관한 좌담회에 청록파 시인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왼쪽 둘째부터 박두진, 박남수, 조지훈, 박목월.
유신시절인 지난 1975년 홀연히 미국 이민 길에 올랐던 원로 시인 박남수(76)씨가 미국 뉴저지주 자택에서 1994년 9월 17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1918년 평양에서 태어난 박 시인은 평양숭실상고를 졸업한 다음해인 1939년 정지용 시인의 추천으로 ‘문장’ 지를 통해 등단했다. 1941년 일본 중앙대 졸업, 1·4후퇴 때 월남했다. 박 시인은 1940년 첫 시집인 ‘초롱불’ 을 낸 이후 ‘갈매기 소묘’ (1958년), ‘새의 암장’ (1970년) 등 정갈하면서도 의식 깊은 곳에 서있는 시를 써왔다. ‘새’로 상징되던 그의 긴장과 절제의 시세계에는 이민 후 삶의 깊이와 무게가 수사없이 진솔하게 쌓여 통곡하며 떠난 미국 삶의 고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고락을 함께 했던 부인을 떠나보낸 후 1년 만인 1993년 4월에 낸 시집 ‘그리고 그 이후’ (문학수첩)는 이국에서 홀로 황혼을 맞게 된 노시인의 외로움과 죽음의 세계를 초월하려는 자세를 담담히 그려냈다. 박 시인은 1957년 유치환, 박목월, 조지훈, 장만영 등과 함께 한국시인협회를 창립했으며 아세아자유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현대시를 통해 발표한 ‘꿈의 물감’으로 1994년 6월 제5회 공초문학상을 수상했다./조선
[1994년] 철학자 칼 포퍼 사망(9/17)
← Karl Raimund Popper (1994.5)
칼 레이먼드 포퍼(Karl Raimund Popper, 1902년 7월 28일 ~ 1994년 9월 17일)는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영국 철학자로, 런던 정치경제대학(LSE)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었던 과학 철학자로 꼽히고 있으며, 과학 철학 뿐 아니라 사회 및 정치 철학 분야에서도 많은 저술을 남겼다. 고전적인 관찰-귀납의 과학 방법론을 거부하고, 과학자가 개별적으로 제시한 가설을 경험적인 증거가 결정적으로 반증하는 방법을 통해 과학이 발전함을 주장하였다.
칼 포퍼는 1902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 혈통의 중산층이었다. 그러나, 포퍼는 생애 내내 인종이나 혈통에 의해 사람을 분류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며, 자신도 스스로 유대인으로 분류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나치즘에 대해서도 시오니즘에 대해서도 모두 반대하였다. 포퍼는 부모로 부터 루터교 신앙을 물려받았으며 빈 대학교를 수료했다. 그의 아버지는 장서 수집가였으며 12,000 ~ 14,000 권 가량의 책을 개인 서고에 모았다. 포퍼는 아버지로 부터 책들과 함께 도서 수집벽도 함께 물려받았다.
1919년 포퍼는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어 학생 사회주의 협회에 가입하였으며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의 당원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포퍼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유물론에 회의를 품게 되어 탈당하였으며 이후 사회자유주의를 지지하였다.
그는 1928년 심리학 박사 학위를 획득하였으며 1934년 첫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를 출간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심리주의, 자연주의, 귀납론, 논리실증주의 등에 대한 자신의 비판을 서술하였다.
1937년 나치의 준동과 오스트리아 병합으로 인해 포퍼는 뉴질랜드로 이민하여 켄터브리 대학교의 철학 강사가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1946년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 대학교의 런던 정치경제학교(LSE)에서 논리학 및 과학적 방법론을 강의하였으며, 1949년 교수로 임명되었다. 1965년 엘리지베스 2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 1976년 런던 왕립 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포퍼는 세속적 휴머니즘 협회의 회원이었으며 스스로를 불가지론자이기는 하나 기독교와 유대교의 도덕적 전통을 존중하는 사람이라 밝혔다.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 남북한이 회원국으로 동시 가입함에 따라 양국 국기가 유엔본부 앞에 나란히 게양되었다.
1991년 9월 17일 오후 3시20분, 미국 뉴욕시에 자리잡은 유엔본부에서 제46차 유엔총회가 열렸다. 의장으로 선출된 사우디아라비아의 쉬하비 유엔대사는 의안번호 제20호 신규회원국 가입안을 상정, 안전보장이사회의 권고안을 총회가 채택하여 A/46/L.1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이 유엔회원국으로 가입하였음을 선포했다.
1949년 1월 19일 우리 정부가 가입신청을 낸 지 42년 만에 이루어진 유엔가입의 순간이었다. 이로써 북한은 160번째, 한국은 161번째 유엔가입국이 됐다.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은 분단고착화라고 주장하며 단일의석 공동가입안 만을 고집해 온 북한이 중국과 쿠바를 포함한 국제적 지지가 확실치 않은데다 1990년 4월 제주도 한소정상회담에서 고르바초프가 유엔보편성 원칙에 대한 이해를 표시하자 기존의 주장을 포기하고 남북한 유엔동시가입으로 방향을 선회하면서 이루어졌다./조선
[1988년] 서울 올림픽 대회 개막
← 서울 올림픽 대회 개막식
1988년 9월 17일 서울에서 제24회 올림픽 대회의 막이 올랐다. 10월 2일까지 16일 간 전세계 160개국에서 참가한 1만 3,304명의 선수들이 실력을 겨루었다. 대회의 기본 이념은 '화합과 전진'이었다. 올림픽 헌장을 충실히 준수함으로써 범세계적 화합을 이루고 인류의 오랜 염원인 영원한 행복과 번영을 위해 함께 전진하는 전기로 삼으며, 한국의 전통문화 선양과 올림픽 운동에 활력소를 부여하고,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나라들에 용기를 심어주는 계기를 마련하자는 데 대회 개최의 의의를 두었다. 최다의 참가, 최상의 화합, 최고의 성과, 최적의 안전봉사, 최대의 절약 등을 대회의 목표로 삼고, 화합의 올림픽, 문화의 올림픽, 복지의 올림픽, 희망의 올림픽, 번영의 올림픽 등을 지향했다. 총 23개 정식종목(237개 세부종목) 경기가 진행되었으며, 야구·태권도·배드민턴·볼링 등은 시범종목으로 개최되었다. 경기 결과 세계신기록 33개, 세계 타이 기록 5개, 올림픽 신기록 227개, 올림픽 타이 기록 42개 등 각종 신기록 307개가 수립되었다. 소련이 금메달 55개, 은메달 31개, 동메달 46개로 1위를 차지했으며, 그 뒤를 이어 동독(독일민주공화국)이 2위, 미국이 3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로 4위를 차지했다./브리태니커
[1983년] 미스아메리카 최초로 흑인여성 선발
← 흑인 최초로 미스아메리카에 당선된 윌리엄즈
미국의 미인대회에 있어 재능, 두뇌, 미모 등에 중점을 두는 미스 아메리카에 사상최초로 1983년 9월 17일 흑인여성이 선발됐다.
이날 미스아메리카에 선발된 윌리엄즈(Vanessa Williams)는 스페인계의 혼혈흑인으로 시라큐스대에서 음악과 춤을 전공하는 20세의 학생으로 키 168cm에 균형잡힌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1921년 시작당시에는 미스아메리카에 흑인이 참가할 수 없었지만 1950년대 후반부터 참가가 허용되었고 이제까지 최고성적은 1980년의 5위였다. 이날 대회에는 2위 선발자도 흑인이었다. 이로써 흑인도 아름다움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대회가 됐다./조선
[1980년] 독재자 소모사 피살
1980년 9월17일, 파라과이 수도 아순시온의 시가지를 지나는 한 승용차에 바주카포와 기관총이 무차별로 발사돼 차에 타고 있던 소모사가(家)의 마지막 독재자 아나스타시오 소모사가 형체를 알아 볼수 없는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 북한의 김일성 부자를 제외하고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던 니카라과의 장기독재 가문 소모사가(家)가 43년 만에 종말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소모사는 1년전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에게 쫒겨나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파라과이에서 권토중래를 꿈꾸던 중이었다.
소모사가(家)의 악명은 1937년 아버지 소모사의 쿠데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군부 실력자로, 때로는 대통령으로 1956년 피살될 때까지 20년간 니카라과를 주무르며 철권통치를 행사해왔다. 그의 사후 대통령직을 물려받은 큰아들 소모사가 7년 만인 1963년에 재출마를 거부하면서 니카라과에도 한때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설 기회가 있었지만 이미 떡고물 맛을 본 측근들이 더 난리였다. 그들은 국가수비대 사령관으로 군권을 장악한 동생 소모사에게 1967년 정권을 내주며 신변안전을 위탁했다. 아버지를 빼닮은 소모사 역시 정계ㆍ재계ㆍ군부를 한 손에 틀어쥐고 폭압정치를 펼쳤으나 이미 운이 다했다./조선
[1978년]이스라엘-이집트 간 캠프데이비드 협정 체결
← 베긴
1978년 9월 17일 중동국가들과 이스라엘 간의 평화정착을 위해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체결했다. 이스라엘의 베긴 총리와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이 카터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미국 캠프데이비드에서 협상을 가진 후 맺은 협정이었기 때문에 '캠프데이비드 협정'으로 명명되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래 사실상 교전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관계는 1967년 6일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이집트로부터 시나이 반도를 탈취·점령한 후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러나 1977년 11월 19~21일 사다트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방문해 이스라엘 정부와 의회에서 연설함으로써 양국 사이에 화해의 분위기가 싹텄다. 이후 1978년 9월 5일 미국·이스라엘·이집트 정상회담을 개최하자는 카터 대통령의 제안을 양국이 수락하면서 협상 가능성이 커졌다. 12일 동안 지속된 협상에서 사다트 대통령과 베긴 총리는 양국간의 평화조약 체결을 위한 기본사항과 중동에서의 평화정착을 위한 대체적인 골격에 합의했다.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기초로 1979년 3월 26일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 평화조약이 조인되어 양국간의 교전상태가 공식적으로 종식되었으며, 양국간 국교가 정상화되었다./브리태니커
[1963년] 부산에서 콜레라 환자 발생
1963년 9월 17일 부산에서 콜레라 환자가 발생한 이래 10월 25일까지 전국에서 1천여명이 넘는 환자가 발생, 이중 70여명이 사망했다. 이 콜레라는 날이 갈수록 더욱 번져, 9월 하순에는 서울과 경기도 부평, 경북 포항, 경남 양산 등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이 때문에 전국 초중고교는 학교장 재량으로 휴교 조치했다. 정부는 9월 23일 긴급임시각의를 소집, 보사부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콜레라 방역 중앙대책위원회를 구성, 이에 대비토록 하는 한편 국고예비비에서 1천3백50만원을 지급, 7백35만5천5백명에게 예방접종을 실시했다. 또 외국에서 4백20만cc의 예방약을 긴급히 얻어왔다. 이와 함께 방역대책본부는 이번 국내에서 발생한 콜레라는 오가와 형중 `엘톨`형에 속하며 1946년 중국 상하이에서 귀환한 교포가 퍼뜨린 클라시칼 콜레라와는 다른 것이라고 발표했다./조선
[1961년] 하마슐드 유엔 사무총장 사망
← 하마슐드 사무총장(가운데)의 생전 최후의 사진
1961년 9월 17일 전쟁으로 찢겨진 콩고에 평화를 안겨주려는 다그 하마슐드 유엔사무총장의 힘든 노력이 그가 북부 로디지아에서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함에 따라 끝이 났다. 세 명의 미국인을 포함한 12명의 승무원과 승객이 사무총장과 함께 사망했다.
사고의 유일한 생존자인 미국인 경호원은 북부 로디지아의 돌라 공항 근처에 비행기가 추락하기 전에 몇 차례의 폭발음을 들었다고 전했다. 비행기는 폭파되기 전 공항을 몇 차례 선회하고 있었다.
하마슐드는 카탕가의 모제 촘베를 만나러 가고 있던 중이었다. 촘베는 UN군이 자신의 군대를 격파하여 카탕가의 통치권이 콩고 정부에 넘어간 뒤 북로디지아로 도주했었다. 촘베는 하마슐드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하마슐드가 카탕가를 해방시킬 방법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11월 3일에는 하마슐드의 뒤를 이어 미얀마의 우 탄트 대사를 만장일치로 UN사무총장으로 선출했다./조선
[1959년] 태풍 사라호 참사(사망-실종 924명, 수재민 98만5천명)
← 사라호 태풍으로 극심한 재산피해를 본 이재민들이 넋을 잃은 채 앉아 있다.
초특급 태풍 사라호가 추석 하루 전인 1959년 9월 17일 새벽부터 당일 밤 12시까지 전남-경남 지역은 물론, 중부내륙지역을 강타했다.
중심기압이 905밀리바인 이 태풍으로 9백24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고, 98만 5천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건물 12만1천37동과 선박 6천6백19척이 파괴됐고, 경작지 12만8천25정보가 침수됐다. 사라호 피해는 그전까지 최고의 홍수피해로 기록된 이른바 ‘을축년 대수해’(647명 사망-실종)보다 규모가 훨씬 더 컸다. 중앙관상대가 그 전날까지도 "이번 태풍은 대륙까지는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며 17일에는 대체로 날씨가 갤 것"이라고 예보, 국민들을 무방비상태에 빠뜨린 것도 피해가 커진 원인 중 하나였다.
[1947년] 유엔총회에 한국문제 정식 상정
두 차례의 미소공동위가 결렬되어 全조선통일임시정부수립이 어렵다고 판단한 미국은 1947년 9월 17일 한국문제를 유엔총회에 정식 상정했다. 미국은 또 10월 17일 "유엔 임시한국위원단을 설치, 1948년 3월까지 유엔 감시하에 남북한에 자유선거를 실시, 국회와 정부를 수립한 다음 90일 이내에 미소 양국군을 철수한다"는 결의안도 제출했다.
이에 앞서 미국은 8월 25일 유엔감시와 인구에 비례한 남북입법관선거 실시, 통일임시정부 수립, 미-소-영-중 4개국 회의안을 소련에 제의했으나 소련이 거부한 바 있다. 11월 14일 제2차 유엔 정기총회 전체회의는 미국이 제안한 ‘신탁통치를 거치지 않는 한국의 독립과 유엔 감시하의 남북총선거를 통한 한국 통일안’을 만장일치로 결의, 마침내 한국 총선거안을 가결시켰다./조선
[1940년] 광복군 창설
1940년 9월17일 새벽 6시. 임시정부 간부들과 한ㆍ중(韓ㆍ中) 양측 인사 200여명이 중국 충칭(重慶)의 가릉빈관(嘉陵賓館)에 모여들었다. 이윽고 김구 주석이 선언문을 발표하고 조직구성이 발표됨으로써 마침내 임시정부도 21년 만에 무장군대를 갖게 됐다. 광복군이 첫 발을 내 디딘 것이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고 33년 만에 맞는 감격이었다.
12명의 장교에 병력이라곤 30여명에 불과한 초라한 출발이었지만 부대원들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쳐났다. 1년뒤 300명, 2년뒤 340명으로 완만한 증가세를 보이는 가운데에서도 광복군은 눈부신 활약을 펼쳐 대일 선전포고(1941년)를 하고, 영국군에 파견돼 인도·버마 전선에 투입(1943년)됐으며, 미국 전략정보기구(OSS)와 합작해 국내진공을 위한 특수훈련(1945년)을 받았다.
그러나 조국이 없는 군대의 현실은 언제나 설움뿐이었다. 창설 2개월 만에 본부를 시안(西安), 2년 뒤에는 다시 충칭으로 옮겨야했고, 1941년 11월부터는 중국 정부의 원조를 받는 조건으로 중국군 참모총장의 지휘를 받아야 했다. 1945년 4월에 이르러서야 중국군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났지만 곧 광복을 맞았다. /조선
[1939년] 권투선수 김기수(金基洙) 출생
← 한국 프로권투 사상 첫 세계챔피언이었던 김기수씨.
1939. 9. 17 함남 북청~1997. 6. 10 서울.
유복자로 태어나 6·25전쟁 중 12세의 나이로 어머니와 형과 함께 월남했다. 여수 피난민수용소에서 구두닦이, 목판담배장수를 지내다가 권투선수로 입문했다. 여수고등학교 1학년 때 광주에서 개최된 전국학생선수권대회 라이트웰터급에서 우승, 당시 서울 성북고등학교 교장이던 고향 사람 이의석의 눈에 띄어 본격적인 선수로 활동을 했다.
1958년 제3회 도쿄[東京] 아시아 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으나, 1960년 제17회 로마 올림픽 대회에서는 웰터급에 출전하여 이탈리아의 벤베누티에게 져 초반에 탈락한 후 프로로 전향했다. 1966년 6월 25일 장충체육관에서 아마추어 시절 자신이 졌던 벤베누티를 이기고 한국 최초로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에 올랐다. 그 후 6개월 간격으로 미국의 스턴 해링턴과 프레디 리틀을 상대로 2차례의 방어전에 성공한 뒤 1968년 5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산드로 마징기와의 적지 3차방어전에 실패, 1년 11개월의 세계 챔피언 생활을 끝맺었다. 1969년 5월 선수생활에서 은퇴한 뒤 개인사업을 해왔다.
[1919년] 강우규 의사 피체
← 강우규
본관은 진주. 자는 찬구(燦九), 호는 일우(日愚). 가난한 농가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한의학을 배워 한약방을 차렸다. 1911년 북간도로 망명하여 연해주를 넘나들면서 조국의 독립을 의논했다. 1915년 라오허 현[饒河縣]으로 옮겨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을 꾀했으며, 농토를 개간하여 신흥촌(新興村)을 건설했다. 1917년에는 동광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며 독립정신 고취에 힘썼다. 3·1운동 소식을 듣고 1919년 3월 4일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가입해 있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 노인단(老人團)의 길림성 지부장이 되었다. 노인단의 독립투쟁노선에 따라, 일본총독 등을 암살하기로 결의하고 그해 7월에 러시아인으로부터 영국제 수류탄 1개를 구입하여 8월 서울에 잠입했다. 9월 2일 남대문 정거장(지금의 서울역)에서 제3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게 수류탄을 던졌다. 총독 암살에는 실패했지만, 정무총감·만철(滿鐵)이사·일본경찰 등 37명을 사상시켰다. 거사 뒤 현장에서 빠져나와 오태영(吳泰泳)의 소개로 장익규(張翊奎)·임승화(林昇華) 등의 집에 숨어다니다가, 9월 17일 일제의 앞잡이 김태석(金泰錫)에게 붙잡혀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했다. 유해는 감옥 공동묘지에 있다가 이후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1962년 3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브리태니커
[1917년] 윤이상(尹伊桑) 출생
"작곡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무관심한 존재가 아니라 그것을 아는 존재이다. 인간의 고통과 억압과 불의,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사유 대상이 된다. 고통이 있는 곳, 불의가 있는 곳에서 나는 음악으로 발언한다." - 윤이상
1917년 9월 17일 태어남 / 1995년 11월 3일 죽음
윤이상은 음악을 통해 한반도 분단의 갈등을 화해시키고자 애쓴 민족음악인이며, 서양과 동양의 음악 사이에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한 세계적 음악인이다. 그는 17세 때 일본에 유학해 첼로·음악이론·작곡 등을 배웠다. 1943년 무장독립운동을 하려다가 체포된 적이 있었고, 8·15해방 후에는 고아들을 보살피기도 했다. 1948년 통영여자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했고, 1953년에는 서울에 있는 여러 대학에서 강사로 일했다. 이즈음 가곡과 실내악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1956년에는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파리 음악원에서 P. 르벨과 T. 오벵에게서 음악이론과 작곡을 배웠다. 1957년 8월 서베를린음악대학에서 R. 슈바르츠 쉴링, J. 루퍼에게서 음악이론을, B. 블라허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1960년 서독 프라이부르크에서 중국·한국의 궁중음악에 대한 라디오 방송을 했고, 1962년에는 관현악곡 <바라 婆羅>가 베를린 라디오 방송관현악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1963년 북한을 방문했으며 1965년에는 서독 하노버에서 <오 연꽃 속의 진주여!>를 초연했다. 1967년 한국 중앙정보부는 동베를린 간첩단사건과 관련하여 그를 임의동행 형식으로 귀국시켰고, 재판 결과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68, 1969년 2번에 걸쳐 10년이 감형되었고 동료 음악가·교수 들의 국제적 항의와 독일정부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1971년 독일국적을 취득했으며, 뮌헨 올림픽 대회 문화행사의 일환으로 오페라 <심청>을 초연했다. 늘 고국을 그리워했던 그는 복권이 이루어진 1994년 9월 한국에서 열린 윤이상음악축제에 참석하려 했지만, 한국정부와의 갈등으로 끝내 귀국하지 못했다./브리태니커
[1917년] 프랑스의 화가 드가(Degas, Edgar, 1834~1917) 사망


본명 일레르 제르맹 에드가르 드가(Hilaire Germain Edgar De Gas). 파리 출생.
부유한 은행가 집안의 장남으로, 처음에는 가업을 계승하기 위하여 법률을 배웠으나, 화가를 지망하여 1855년 미술학교에 들어갔다. 거기서 J.A.D.앵그르의 제자 L.라모트에게 사사(師事)했고, 앵그르로부터도 직접 가르침을 받아, 평생토록 이 고전파의 거장에 대한 경의를 품게 되었다. 1856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르네상스 작품에 심취하였다. 이 무렵부터 거의 10년간은 화가로서의 본격적인 수업기로 오로지 고전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1865년 살롱에 《오를레앙시(市)의 불행》을 출품하였다. 그 후 자연주의 문학이나 E.마네의 작품에 이끌려, 근대생활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을 제작했는데, 1874년부터 1886년까지 인상파전에 7회나 출품 ·협력하였으나 그 후로는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그는 파리의 근대적인 생활에서 주제를 찾게 되자 더욱 재능을 발휘하여 정확한 소묘능력 위에 신선하고 화려한 색채감이 넘치는 근대적 감각을 표현하였다. 인물동작을 잡아 순간적인 포즈를 교묘하게 묘사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부분적으로 부각시키는 수법을 강조해왔다. 경마나 무희, 욕탕에 들어가거나 나오려는 여성의 한 순간의 동작을 즐겨 그렸다. 이러한 그의 눈과 기량은 파스텔이나 판화에도 많은 수작을 남겼을 뿐 아니라, 만년에 시력이 극도로 떨어진 뒤에 손댄 조각에까지 더없는 걸작을 만들어냈다. 선천적으로 자의식(自意識)이 강한 성격 때문에 독신으로 보냈고, 그의 인간혐오증은 늙어갈수록 더하여 고독한 가운데 파리에서 1883년의 생애를 마쳤다. 파리 인상파미술관에 소장된 대표작 《압생트》(1876) 《대야》(1886)를 비롯한 많은 작품를 남겼다. /naver
[1795년] 이탈리아의 작곡가, 음악 교육가 메르카단테(Mercadante, Saverio, 1795~1870) 출생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도니체티·로시니·벨리니로부터 베르디를 잇는 전환기적 인물이며 중요한 개혁가로 평가되고 있다.
사생아로 태어난 그는 11세에 나폴리로 와서 1808년에는 이름·출생지·생년월일을 바꾸어 산세바스티아노대학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학생으로 있는 동안 3편의 발레음악을 포함한 다수의 기악 소품들을 작곡했다. 1819년 1월 4일 그의 첫번째 오페라가 초연되었으며, 그후 3년이 채 못 되어(정확하게 5편의 오페라를 발표한 후) 〈엘리사와 클라우디오 Elisa e Claudio〉가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1826년에는 또다른 대중적인 오페라 〈스페인의 여왕 카리테아 Caritea, regina di Spagna〉(〈카리테아 부인 Donna Caritea〉으로 더 잘 알려져 있음)를 작곡했다.
1827~30년 잠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이탈리아 오페라단에서 활동했으며 1832년에 결혼해 1833~40년 노바라 성당의 성가대 지휘자로 일했다. 1835년 자코모 마이어베어의 음악을 접하게 되었으며 1837년에 공연된 오페라 〈맹세 Ⅰl giuramento〉는 그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되며 작품 전면에 마이어베어의 영향이 반영되어 있다. 그후 계속 음악과 극의 보다 조화로운 결합을 시도했으며 단순화된 성악 선율, 독창성, 사려깊고 진지한 작품을 지향했다. 1840년부터 죽을 때까지 나폴리 음악원 원장으로 재직했다. 그는 오페라뿐만 아니라 여러 곡의 미사곡을 포함한 종교음악·칸타타·찬미가를 작곡했으며 관현악 소품과 다양한 실내악곡도 남겼다. /브리태니커
[1787년] 미국 헌법 제정
1775년에 시작된 미국의 독립혁명은 약 1세기 반에 걸쳐 식민지인들이 확립한 자치에 대하여 본국 정부가 이것을 침범하려고 시도한 데서 일어나게 되었다. 그 직접적인 원인은 영국 의회에서 정한, 식민지 백성에 대한 과세(課稅)와 서방영토로의 진출 저지였다. 따라서 독립혁명 때는 본국인 중에도 많은 동조자가 있었고, 17세기 이래 영국과 항쟁하고 있던 프랑스도 식민지를 도왔으므로 마침내 식민지는 승리를 획득하였다. 1776년에 독립을 선언하였고, 1783년에는 파리조약에 의하여 독립이 승인되었으며, 또 프랑스령(領)이었던 미시시피강(江) 동쪽의 영토를 공식적으로 획득하였다. 1781년에 최초의 헌법으로서 연합규약(聯合規約)이 만들어져 13주는 하나의 연방국가가 되었으나, 중앙정부의 권한이 너무도 약했기 때문에 사회불안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또 외국에서도 미국을 독립국으로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다 완전한 연방을 만들기 위하여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헌법희의를 열고 연방헌법을 제정하였다.
[1552년] 유명한 교회법률가인 로마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 1552~1621) 출생
← 교황 바오로 5세
본명은 Camillo Borghese.
유명한 교회법률가로서 교황 클레멘스 8세 때 스페인 주재 교황대사를 지냈고, 1596년 클레멘스에게 추기경 임명을 받았다. 1603년 로마의 교황대리가 되었고, 1605년 5월 16일 나폴리 왕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이 성직자들의 권리를 무시하고 있던 상황에서 교황 레오 11세의 계승자로 선출되었다.
교황이 되어 맨 처음 취한 행동들 가운데 하나는 '프리빌레기움 포리', 즉 형사사건에서 성직자들이 세속법정이 아닌 교회법정에서 재판받을 수 있는 권리를 무시했다는 이유로 나폴리의 고집스런 장관을 파문한 일이었다. 1606년에는 유명한 신학자 파올로 사르피로부터 교황의 간섭에 맞서도록 격려를 받은 베네치아 공화국과 교황 간에 사법권 및 교회의 면책특권을 놓고서 분쟁이 벌어졌다. 1606년 5월 베네치아에 대해 성무금지령을 내리자 사르피의 주도로 더욱 거센 저항이 일어남으로써 사태는 악화되었다. 베네치아가 로마와 결별하고 이탈리아에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커지자 주변 국가들이 개입했다. 파울루스는 무력에 호소하기로 결심했으나, 1607년 4월 21일 주로 프랑스의 중재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파울루스는 성무금지령을 거두어들이는 동시에 사르피를 파문했고, 그해 10월 사르피가 피습을 당하는 일이 생겼다. 사르피는 암살을 부추긴 혐의로 교황청을 고소했고, 파울루스는 이 혐의를 부인했다. 파울루스는 이 사건을 통해 성무금지령의 효과가 소멸했음을 깨닫게 되었고, 그뒤 교황청은 주권 국가에 대해서 이 명령을 다시 사용하지 않았다. 파울루스는 그 이전 1606년 9월 22일 영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들에 대해서 왕 제임스 1세가 부과하는 새로운 충성서약을 하지 말도록 공포한 바 있다. 그러나 베네치아와 분쟁을 벌이는 바람에 정치적으로 조심스런 태도를 취하게 되었고, 어떻게 해서든 합스부르크가와 프랑스가 서로 평화를 유지하도록 만들려고 노력했다. 투르크인에 대해 또 한 차례 십자군원정을 고려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독일에서 루터교와 가톨릭 교회가 공존할 수 있는 최초의 항구적인 법적 근거가 된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이 공식적으로 파기되는 것을 특히 두려워했다. 그러므로 1618년 독일 가톨릭교도들과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의 반목이 30년전쟁으로 발전된 분쟁을 일으켰을 때 파울루스는 가톨릭 세력에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았다. 교리문제들에서 그는 놀라울 정도로 교리에 얽매이지 않았다. 선교, 특히 라틴아메리카 선교를 장려했고, 재속(在俗) 사제들의 수도회인 성 필리포 네리의 오라토리오회(1613 승인)를 포함한 많은 수의 새로운 수도회들과 형제회들을 승인했다. 교황 문서들을 보관하기 위해 바티칸 문서보관소들을 세웠다. 1612년 로마의 전례서들 가운데 하나인 〈로마 전례서 Rituale Romanum〉의 새로운 개정판을 승인하고 1614년 6월 17일에 공포했다. 그러나 족벌주의를 시행했고, 자기 가문에 지나친 재산을 쌓았다. 특히 조카 마르칸토니오 보르세스를 좋아해 비바로의 공작이 되게 해주었다. 과시를 지나치게 좋아하여 더욱 중요한 목적에 써야 할 자금을 낭비하기도 했지만 예술과 건축의 주요후원자가 되었다. 그가 지은 건축물 중에는 로마 산타마리아마조레 대성당의 부속 예배당이 있으며, 죽은 뒤 이곳에 묻혔다. /브리태니커
[ 14년] 제2대 로마제국 황제 티베리우스 즉위
제2대 로마의 황제(AD 14~37 재위).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그가 이룩한 제국의 제도와 영토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말년에 폭군적인 은둔생활을 하면서 로마의 중요 인물들에게 공포정치를 실행했다.
그밖에
1992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평양). 화해,불가침,교류,협력 등 3개분야 부속합의서 공식발효
1989 노태우 대통령, 서울평화상 제정 발표
1987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족문학작가회의로 창립
1982 레바논 민병대, 서(西)베이루트내 팔레스타인 난민 1800명 대량학살
1982 국무회의, 인구 및 각종 산업시설 배치 등을 조정하기 위한 수도권정비계획법안의결
1980 계엄보통군법회의, 내란음모혐의로 김대중에 사형선고
1980 폴란드 자유노조 ‘연대’ 출범
1980 미국-중국, 4개협정 조인. 관계 전면 정상화
1980 최초로 어린이가 이해력을 획득하는 과정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스위스의 심리학자 피아제 사망
1978 한국-아프가니스탄, 단교
1971 통혁당 조직 및 사회혼란사건 발표
1968 박정희대통령, 한국-호주 정상회담
1963 111개국 유엔총회 18차회의 개막
1963 말레이시아연방정부, 인도네시아-필리핀과 단교 성명
1957 태국에 군사쿠데타 사리트장군 정권 장악
1953 미국 국방성, 핵탄두 낙하예상 70개지구 발표
1951 북대서양조약기구 이사회 5개국위원회 설치를 결의
1946 수도경찰청 발족(청장 장택상)
1945 조선프로문학동맹 결성
1939 소련군 폴란드 진주
1935 필리핀, 케손 초대대통령에 당선
1922 제1회 조선변호사시험 실시. 4명 합격
1862 미국 메릴랜드주 안티탬크리크서 남북전쟁중 최대 혈전
1857 우주 비행이론 선구자 치올코프스키 출생
1826 독일의 수학자 리만 출생
일제의 석굴암 훼손 실상 생생 / 성균관대박물관 19일 일반공개일제 강점기인 1913년 무렵 경주 석굴암을 처음으로 해체·복원하는 과정을 찍은 유리원판 사진 12점과 1925년 불국사 다보탑 수리 장면을 찍은 유리원판 사진들이 공개됐다. 석굴암 관련 유리원판 사진 가운데 7점은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성균관대박물관이 17일 공개한 이들 사진은 일제 때 경주에서 동양헌이라는 사진관을 운영하던 다나카라는 민간인과 조선총독부 박물관장을 하던 후지타 료오사쿠(1892~1960)가 촬영한 것으로, 일제가 우리의 문화재를 복원하면서 훼손한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김대식 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석굴암 해체과정의 사진에는 석굴암 돔을 덮었던 흙, 기와, 석재와 내부의 환기구 모습 등이 담겨 있어 석굴암 구조를 밝혀줄 중요한 단서가 된다”며 “특히 일제시대 초기 석굴암 복원 과정에서 본존불을 제외한 모든 초석이 교체된 사실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말했다.
이밖에 1925년 불국사 다보탑을 수리하는 모습과 다보탑 위에서 찍은 석가탑 사진도 최초로 공개됐다. 그동안 다보탑 수리에 관한 보고서가 없어 그 이전 모습을 알 수 없었으나, 이번 유리원판 사진은 그 실상의 단면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사진으로 평가된다.
한편 성균관대박물관은 19일부터 석달 동안 특별전 ‘경주 신라 유적의 어제와 오늘-석굴암·불국사·남산’을 열어 사진들을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1960년대 2차 수리과정부터 현재까지 석굴암의 어제와 오늘을 보여줄 예정이다. 또 이번 전시회에서는 1차 해체과정에서 발견된 천불보탑과 금강역사의 팔뚝도 전시되며 경주 남산의 식민지시대 유리원판 사진 60점도 공개된다.
송재소 박물관장(한문학)은 “일제가 석굴암을 해체·복원하는 과정에서 훼손한 실상을 유리원판 사진을 통해 최초로 공개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김연기 기자 ykkim@hani.co.kr /한겨레 2007-09-17
[2002년] 고이즈미 일본 총리 방북.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정상회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9월17일 북한을 방문,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평양 백화원초대소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국교정상화 문제를 비롯한 현안들을 논의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김위원장이 "핵과 관련해 제반 국제협약을 모두 준수하고 미사일은 기간제한없이 발사를 동결하겠다"고 약속했음을 분명히 했다. 양국 정상회담 성사로 북한은 양국간 수교시 일본에 대해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과 戰後(전후) 적대행위에 대한 배상금 등을 요구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고, 일본은 自國(자국)이 동북아 문제의 主役(주역)임을 세계에 알리게 됐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의 일본인 납치와 괴선박 공작에 대해 전면 인정하고 사과함으로써 자신의 對日관계 회복 의지를 보여주려 했는데, 피랍된 14명의 일본인 중 8명이 사망했다는 사실이 일본 열도에 전해지면서 일본 내 분위기가 분노로 돌변, 북일(北日)관계 전망도 불투명해졌다. 고이즈미는 여론의 반발이 예상했던 것보다 커지자, 서둘러 진화에 나섰지만 북한에 납치돼 사망한 8명의 일본인들에 대한 타살 의혹이 확산되면서 ‘사망자 진상규명’이 북일간의 또 다른 쟁점으로 떠올랐다. 생존자 5명은 10월15일 일본에 일시 귀국, 기다리던 가족들과 24년 만에 재회했지만 영구귀국에 대한 북일간의 입장차이로 해결에 난항을 거듭했다. /조선
[2000년]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복원끝내고 개관
중국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가 2000년 9월 17일 한국 광복군 창설 60주년을 맞아 중수복원을 마치고 새로 문을 열었다.
독립기념관과 중경 임시정부 구지(舊址) 진열관은 5월 청사 개보수를 위한 협의서를 체결하고 18만 달러의 공사비를 들여, 대대적인 복원공사를 마쳤다. 중경시 유중구 칠성강 연화지 38호에 위치한 임시정부 청사는 5개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지 1034평방미터에 연건평이 1322평방미터(약 400평)이다.
한때 중경시의 도시개발 계획에 따라 철거될 위기에 놓였던 임정 청사는 1991년 국내 학술조사단의 보고로 보존책이 적극 강구되어, 1994년 양국간에 복원협정서가 체결되고 1995년 8월11일 1차 복원식을 거행한 바 있다. 이번 복원기념식에는 당시 중경 현지에서 활동한 광복군 등 애국지사 30여명과 홍순영 주중한국대사, 중국 관계자 등이 참석했다. /조선
[1998년] 김대거 원불교 3대 종법사 열반
← 원불교 3대 종법사를 지낸 대산 김대거 종사원불교 3대 종법사를 지낸 대산 김대거(84)종사가 1998년 9월 17일 전북 익산 원불교 중앙총부에서 열반했다.
1914년 전북 진안군에서 출생한 대산 종사는 원불교 교세를 확장하고 운영을 체계화하여 오늘날의 원불교로 만든 종교지도자다. 본명은 영호로 11살 때인 1924년 원불교 교조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에 귀의, 시봉으로서 교리를 연마하다가 1962년 정산 송규 종사에 이어 교단운영을 맡았다. 이후 교화 교육 자선의 3대사업을 더욱 발전시켰다. 천석꾼의 아들로 한시를 잘 지었던 대산 종사는 1946년 해방 직후 서울출장소장 때 이승만, 김구 등과 교분을 쌓기도 했다.
1995년까지 33년 동안 국내외에 수많은 원불교 교당을 개설하고, 교도들을 훈련시켰다.
대산 종사는 원불교를 13개 교구 5백여 교당에 신자수 1백30만명의 국내 4대 교단으로 교세를 확장시켰으며, 특히 심전(心田)개발, 인류공동시장 개척, 종교연합운동에 앞장섰다. 교리해설서 ‘정전대의’를 저술하기도 했으며, "진리는 하나, 세계도 하나, 인류는 한 가족, 세계는 한 일터, 개척하자 하나의 세계"라는 열반송을 남겼다. -조선
[1997년] 소설가 정한숙(鄭漢淑)씨 별세
1922 평북 영변~1997. 9. 17 서울.
소설가로서는 물론 국문학자·문예행정가로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정한숙은 1946년 월남해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재학 중이던 1948년 단편소설 〈흉가〉가 문예지 〈예술조선〉 공모에 당선되면서 등단했고, 전광용·정한모 등과 함께 〈주막〉·〈시탑 詩塔〉 동인으로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6·25전쟁 전후 등단한 당대 '신세대 작가군'의 한 사람으로 평생 다양한 소설기법을 실험했고, 특히 1952~85년에는 한 해도 작품 발표를 거르지 않아 부지런한 작가의 전형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격동의 현대사를 골고루 겪은 그는 분단시대의 대표적 피해 당사자인 실향민으로서 1950년대 중반부터 한국현대사에 대한 관심을 소설화하기 시작했다.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모두 160여 편의 작품을 썼는데 그 중 15편이 중·장편일 만큼 다작이었다. 6·25전쟁으로 붕괴된 봉건사회의 갈등과 사랑을 그린 〈고가 古家〉(1956), 낙원을 찾으려는 인간의 꿈과 좌절을 그린 〈이어도〉(1960), 남북분단의 현실을 닭장에 비유해 쓴 우화소설 〈닭장관리〉(1963),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한 〈전황당인보기 田黃堂印譜記〉(1955)와 〈금어 金魚〉(1971), 전통의 향기와 함께 민족사의 비극이 어우러진 소설 〈금당벽화〉(1955)·〈이성계〉(1965)·〈논개〉(1971) 등을 그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
1954~88년 고려대 교수로 재직했던 그는 1975년 한국소설가협회 부회장을 맡으면서 문예행정가로서의 탁월한 일면을 보이기도 했다. 1983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예술원 회장과 문예진흥원장, 국제 펜클럽(International PEN) 한국본부 고문 등을 역임했다. 대한민국예술문화상, 3·1문학상, 국민훈장 모란장, 은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했다. 작품으로 소설집 <황진이>(1955)·<끊어진 다리>(1962)·<조용한 아침>(1976) 등과 시집 〈나무와 그늘 사이에서〉(1988)·<잠든 숲속을 걸으며>(1989) 등을 펴냈고 평론집 <현대한국문학사>(1982)와 <현대한국소설론>(1973) 등의 문학이론서를 남겼다.
[1994년] 재미 원로시인 박남수씨 별세
유신시절인 지난 1975년 홀연히 미국 이민 길에 올랐던 원로 시인 박남수(76)씨가 미국 뉴저지주 자택에서 1994년 9월 17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1918년 평양에서 태어난 박 시인은 평양숭실상고를 졸업한 다음해인 1939년 정지용 시인의 추천으로 ‘문장’ 지를 통해 등단했다. 1941년 일본 중앙대 졸업, 1·4후퇴 때 월남했다. 박 시인은 1940년 첫 시집인 ‘초롱불’ 을 낸 이후 ‘갈매기 소묘’ (1958년), ‘새의 암장’ (1970년) 등 정갈하면서도 의식 깊은 곳에 서있는 시를 써왔다. ‘새’로 상징되던 그의 긴장과 절제의 시세계에는 이민 후 삶의 깊이와 무게가 수사없이 진솔하게 쌓여 통곡하며 떠난 미국 삶의 고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고락을 함께 했던 부인을 떠나보낸 후 1년 만인 1993년 4월에 낸 시집 ‘그리고 그 이후’ (문학수첩)는 이국에서 홀로 황혼을 맞게 된 노시인의 외로움과 죽음의 세계를 초월하려는 자세를 담담히 그려냈다. 박 시인은 1957년 유치환, 박목월, 조지훈, 장만영 등과 함께 한국시인협회를 창립했으며 아세아자유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현대시를 통해 발표한 ‘꿈의 물감’으로 1994년 6월 제5회 공초문학상을 수상했다./조선
[1994년] 철학자 칼 포퍼 사망(9/17)
← Karl Raimund Popper (1994.5)칼 레이먼드 포퍼(Karl Raimund Popper, 1902년 7월 28일 ~ 1994년 9월 17일)는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영국 철학자로, 런던 정치경제대학(LSE)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었던 과학 철학자로 꼽히고 있으며, 과학 철학 뿐 아니라 사회 및 정치 철학 분야에서도 많은 저술을 남겼다. 고전적인 관찰-귀납의 과학 방법론을 거부하고, 과학자가 개별적으로 제시한 가설을 경험적인 증거가 결정적으로 반증하는 방법을 통해 과학이 발전함을 주장하였다.
칼 포퍼는 1902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 혈통의 중산층이었다. 그러나, 포퍼는 생애 내내 인종이나 혈통에 의해 사람을 분류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며, 자신도 스스로 유대인으로 분류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나치즘에 대해서도 시오니즘에 대해서도 모두 반대하였다. 포퍼는 부모로 부터 루터교 신앙을 물려받았으며 빈 대학교를 수료했다. 그의 아버지는 장서 수집가였으며 12,000 ~ 14,000 권 가량의 책을 개인 서고에 모았다. 포퍼는 아버지로 부터 책들과 함께 도서 수집벽도 함께 물려받았다.
1919년 포퍼는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어 학생 사회주의 협회에 가입하였으며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의 당원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포퍼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유물론에 회의를 품게 되어 탈당하였으며 이후 사회자유주의를 지지하였다.
그는 1928년 심리학 박사 학위를 획득하였으며 1934년 첫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를 출간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심리주의, 자연주의, 귀납론, 논리실증주의 등에 대한 자신의 비판을 서술하였다.
1937년 나치의 준동과 오스트리아 병합으로 인해 포퍼는 뉴질랜드로 이민하여 켄터브리 대학교의 철학 강사가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1946년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 대학교의 런던 정치경제학교(LSE)에서 논리학 및 과학적 방법론을 강의하였으며, 1949년 교수로 임명되었다. 1965년 엘리지베스 2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 1976년 런던 왕립 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포퍼는 세속적 휴머니즘 협회의 회원이었으며 스스로를 불가지론자이기는 하나 기독교와 유대교의 도덕적 전통을 존중하는 사람이라 밝혔다.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 남북한이 회원국으로 동시 가입함에 따라 양국 국기가 유엔본부 앞에 나란히 게양되었다.1991년 9월 17일 오후 3시20분, 미국 뉴욕시에 자리잡은 유엔본부에서 제46차 유엔총회가 열렸다. 의장으로 선출된 사우디아라비아의 쉬하비 유엔대사는 의안번호 제20호 신규회원국 가입안을 상정, 안전보장이사회의 권고안을 총회가 채택하여 A/46/L.1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이 유엔회원국으로 가입하였음을 선포했다.
1949년 1월 19일 우리 정부가 가입신청을 낸 지 42년 만에 이루어진 유엔가입의 순간이었다. 이로써 북한은 160번째, 한국은 161번째 유엔가입국이 됐다.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은 분단고착화라고 주장하며 단일의석 공동가입안 만을 고집해 온 북한이 중국과 쿠바를 포함한 국제적 지지가 확실치 않은데다 1990년 4월 제주도 한소정상회담에서 고르바초프가 유엔보편성 원칙에 대한 이해를 표시하자 기존의 주장을 포기하고 남북한 유엔동시가입으로 방향을 선회하면서 이루어졌다./조선
[1988년] 서울 올림픽 대회 개막
← 서울 올림픽 대회 개막식1988년 9월 17일 서울에서 제24회 올림픽 대회의 막이 올랐다. 10월 2일까지 16일 간 전세계 160개국에서 참가한 1만 3,304명의 선수들이 실력을 겨루었다. 대회의 기본 이념은 '화합과 전진'이었다. 올림픽 헌장을 충실히 준수함으로써 범세계적 화합을 이루고 인류의 오랜 염원인 영원한 행복과 번영을 위해 함께 전진하는 전기로 삼으며, 한국의 전통문화 선양과 올림픽 운동에 활력소를 부여하고,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나라들에 용기를 심어주는 계기를 마련하자는 데 대회 개최의 의의를 두었다. 최다의 참가, 최상의 화합, 최고의 성과, 최적의 안전봉사, 최대의 절약 등을 대회의 목표로 삼고, 화합의 올림픽, 문화의 올림픽, 복지의 올림픽, 희망의 올림픽, 번영의 올림픽 등을 지향했다. 총 23개 정식종목(237개 세부종목) 경기가 진행되었으며, 야구·태권도·배드민턴·볼링 등은 시범종목으로 개최되었다. 경기 결과 세계신기록 33개, 세계 타이 기록 5개, 올림픽 신기록 227개, 올림픽 타이 기록 42개 등 각종 신기록 307개가 수립되었다. 소련이 금메달 55개, 은메달 31개, 동메달 46개로 1위를 차지했으며, 그 뒤를 이어 동독(독일민주공화국)이 2위, 미국이 3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로 4위를 차지했다./브리태니커
[1983년] 미스아메리카 최초로 흑인여성 선발
미국의 미인대회에 있어 재능, 두뇌, 미모 등에 중점을 두는 미스 아메리카에 사상최초로 1983년 9월 17일 흑인여성이 선발됐다.
이날 미스아메리카에 선발된 윌리엄즈(Vanessa Williams)는 스페인계의 혼혈흑인으로 시라큐스대에서 음악과 춤을 전공하는 20세의 학생으로 키 168cm에 균형잡힌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1921년 시작당시에는 미스아메리카에 흑인이 참가할 수 없었지만 1950년대 후반부터 참가가 허용되었고 이제까지 최고성적은 1980년의 5위였다. 이날 대회에는 2위 선발자도 흑인이었다. 이로써 흑인도 아름다움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대회가 됐다./조선
[1980년] 독재자 소모사 피살
1980년 9월17일, 파라과이 수도 아순시온의 시가지를 지나는 한 승용차에 바주카포와 기관총이 무차별로 발사돼 차에 타고 있던 소모사가(家)의 마지막 독재자 아나스타시오 소모사가 형체를 알아 볼수 없는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 북한의 김일성 부자를 제외하고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던 니카라과의 장기독재 가문 소모사가(家)가 43년 만에 종말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소모사는 1년전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에게 쫒겨나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파라과이에서 권토중래를 꿈꾸던 중이었다.
소모사가(家)의 악명은 1937년 아버지 소모사의 쿠데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군부 실력자로, 때로는 대통령으로 1956년 피살될 때까지 20년간 니카라과를 주무르며 철권통치를 행사해왔다. 그의 사후 대통령직을 물려받은 큰아들 소모사가 7년 만인 1963년에 재출마를 거부하면서 니카라과에도 한때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설 기회가 있었지만 이미 떡고물 맛을 본 측근들이 더 난리였다. 그들은 국가수비대 사령관으로 군권을 장악한 동생 소모사에게 1967년 정권을 내주며 신변안전을 위탁했다. 아버지를 빼닮은 소모사 역시 정계ㆍ재계ㆍ군부를 한 손에 틀어쥐고 폭압정치를 펼쳤으나 이미 운이 다했다./조선
[1978년]이스라엘-이집트 간 캠프데이비드 협정 체결
← 베긴1978년 9월 17일 중동국가들과 이스라엘 간의 평화정착을 위해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체결했다. 이스라엘의 베긴 총리와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이 카터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미국 캠프데이비드에서 협상을 가진 후 맺은 협정이었기 때문에 '캠프데이비드 협정'으로 명명되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래 사실상 교전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관계는 1967년 6일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이집트로부터 시나이 반도를 탈취·점령한 후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러나 1977년 11월 19~21일 사다트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방문해 이스라엘 정부와 의회에서 연설함으로써 양국 사이에 화해의 분위기가 싹텄다. 이후 1978년 9월 5일 미국·이스라엘·이집트 정상회담을 개최하자는 카터 대통령의 제안을 양국이 수락하면서 협상 가능성이 커졌다. 12일 동안 지속된 협상에서 사다트 대통령과 베긴 총리는 양국간의 평화조약 체결을 위한 기본사항과 중동에서의 평화정착을 위한 대체적인 골격에 합의했다.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기초로 1979년 3월 26일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 평화조약이 조인되어 양국간의 교전상태가 공식적으로 종식되었으며, 양국간 국교가 정상화되었다./브리태니커
[1963년] 부산에서 콜레라 환자 발생
1963년 9월 17일 부산에서 콜레라 환자가 발생한 이래 10월 25일까지 전국에서 1천여명이 넘는 환자가 발생, 이중 70여명이 사망했다. 이 콜레라는 날이 갈수록 더욱 번져, 9월 하순에는 서울과 경기도 부평, 경북 포항, 경남 양산 등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이 때문에 전국 초중고교는 학교장 재량으로 휴교 조치했다. 정부는 9월 23일 긴급임시각의를 소집, 보사부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콜레라 방역 중앙대책위원회를 구성, 이에 대비토록 하는 한편 국고예비비에서 1천3백50만원을 지급, 7백35만5천5백명에게 예방접종을 실시했다. 또 외국에서 4백20만cc의 예방약을 긴급히 얻어왔다. 이와 함께 방역대책본부는 이번 국내에서 발생한 콜레라는 오가와 형중 `엘톨`형에 속하며 1946년 중국 상하이에서 귀환한 교포가 퍼뜨린 클라시칼 콜레라와는 다른 것이라고 발표했다./조선
[1961년] 하마슐드 유엔 사무총장 사망
← 하마슐드 사무총장(가운데)의 생전 최후의 사진1961년 9월 17일 전쟁으로 찢겨진 콩고에 평화를 안겨주려는 다그 하마슐드 유엔사무총장의 힘든 노력이 그가 북부 로디지아에서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함에 따라 끝이 났다. 세 명의 미국인을 포함한 12명의 승무원과 승객이 사무총장과 함께 사망했다.
사고의 유일한 생존자인 미국인 경호원은 북부 로디지아의 돌라 공항 근처에 비행기가 추락하기 전에 몇 차례의 폭발음을 들었다고 전했다. 비행기는 폭파되기 전 공항을 몇 차례 선회하고 있었다.
하마슐드는 카탕가의 모제 촘베를 만나러 가고 있던 중이었다. 촘베는 UN군이 자신의 군대를 격파하여 카탕가의 통치권이 콩고 정부에 넘어간 뒤 북로디지아로 도주했었다. 촘베는 하마슐드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하마슐드가 카탕가를 해방시킬 방법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11월 3일에는 하마슐드의 뒤를 이어 미얀마의 우 탄트 대사를 만장일치로 UN사무총장으로 선출했다./조선
[1959년] 태풍 사라호 참사(사망-실종 924명, 수재민 98만5천명)
← 사라호 태풍으로 극심한 재산피해를 본 이재민들이 넋을 잃은 채 앉아 있다.초특급 태풍 사라호가 추석 하루 전인 1959년 9월 17일 새벽부터 당일 밤 12시까지 전남-경남 지역은 물론, 중부내륙지역을 강타했다.
중심기압이 905밀리바인 이 태풍으로 9백24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고, 98만 5천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건물 12만1천37동과 선박 6천6백19척이 파괴됐고, 경작지 12만8천25정보가 침수됐다. 사라호 피해는 그전까지 최고의 홍수피해로 기록된 이른바 ‘을축년 대수해’(647명 사망-실종)보다 규모가 훨씬 더 컸다. 중앙관상대가 그 전날까지도 "이번 태풍은 대륙까지는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며 17일에는 대체로 날씨가 갤 것"이라고 예보, 국민들을 무방비상태에 빠뜨린 것도 피해가 커진 원인 중 하나였다.
[1947년] 유엔총회에 한국문제 정식 상정
두 차례의 미소공동위가 결렬되어 全조선통일임시정부수립이 어렵다고 판단한 미국은 1947년 9월 17일 한국문제를 유엔총회에 정식 상정했다. 미국은 또 10월 17일 "유엔 임시한국위원단을 설치, 1948년 3월까지 유엔 감시하에 남북한에 자유선거를 실시, 국회와 정부를 수립한 다음 90일 이내에 미소 양국군을 철수한다"는 결의안도 제출했다.
이에 앞서 미국은 8월 25일 유엔감시와 인구에 비례한 남북입법관선거 실시, 통일임시정부 수립, 미-소-영-중 4개국 회의안을 소련에 제의했으나 소련이 거부한 바 있다. 11월 14일 제2차 유엔 정기총회 전체회의는 미국이 제안한 ‘신탁통치를 거치지 않는 한국의 독립과 유엔 감시하의 남북총선거를 통한 한국 통일안’을 만장일치로 결의, 마침내 한국 총선거안을 가결시켰다./조선
[1940년] 광복군 창설
1940년 9월17일 새벽 6시. 임시정부 간부들과 한ㆍ중(韓ㆍ中) 양측 인사 200여명이 중국 충칭(重慶)의 가릉빈관(嘉陵賓館)에 모여들었다. 이윽고 김구 주석이 선언문을 발표하고 조직구성이 발표됨으로써 마침내 임시정부도 21년 만에 무장군대를 갖게 됐다. 광복군이 첫 발을 내 디딘 것이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고 33년 만에 맞는 감격이었다.
12명의 장교에 병력이라곤 30여명에 불과한 초라한 출발이었지만 부대원들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쳐났다. 1년뒤 300명, 2년뒤 340명으로 완만한 증가세를 보이는 가운데에서도 광복군은 눈부신 활약을 펼쳐 대일 선전포고(1941년)를 하고, 영국군에 파견돼 인도·버마 전선에 투입(1943년)됐으며, 미국 전략정보기구(OSS)와 합작해 국내진공을 위한 특수훈련(1945년)을 받았다.
그러나 조국이 없는 군대의 현실은 언제나 설움뿐이었다. 창설 2개월 만에 본부를 시안(西安), 2년 뒤에는 다시 충칭으로 옮겨야했고, 1941년 11월부터는 중국 정부의 원조를 받는 조건으로 중국군 참모총장의 지휘를 받아야 했다. 1945년 4월에 이르러서야 중국군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났지만 곧 광복을 맞았다. /조선
[1939년] 권투선수 김기수(金基洙) 출생
← 한국 프로권투 사상 첫 세계챔피언이었던 김기수씨.1939. 9. 17 함남 북청~1997. 6. 10 서울.
유복자로 태어나 6·25전쟁 중 12세의 나이로 어머니와 형과 함께 월남했다. 여수 피난민수용소에서 구두닦이, 목판담배장수를 지내다가 권투선수로 입문했다. 여수고등학교 1학년 때 광주에서 개최된 전국학생선수권대회 라이트웰터급에서 우승, 당시 서울 성북고등학교 교장이던 고향 사람 이의석의 눈에 띄어 본격적인 선수로 활동을 했다.
1958년 제3회 도쿄[東京] 아시아 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으나, 1960년 제17회 로마 올림픽 대회에서는 웰터급에 출전하여 이탈리아의 벤베누티에게 져 초반에 탈락한 후 프로로 전향했다. 1966년 6월 25일 장충체육관에서 아마추어 시절 자신이 졌던 벤베누티를 이기고 한국 최초로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에 올랐다. 그 후 6개월 간격으로 미국의 스턴 해링턴과 프레디 리틀을 상대로 2차례의 방어전에 성공한 뒤 1968년 5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산드로 마징기와의 적지 3차방어전에 실패, 1년 11개월의 세계 챔피언 생활을 끝맺었다. 1969년 5월 선수생활에서 은퇴한 뒤 개인사업을 해왔다.
[1919년] 강우규 의사 피체
← 강우규본관은 진주. 자는 찬구(燦九), 호는 일우(日愚). 가난한 농가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한의학을 배워 한약방을 차렸다. 1911년 북간도로 망명하여 연해주를 넘나들면서 조국의 독립을 의논했다. 1915년 라오허 현[饒河縣]으로 옮겨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을 꾀했으며, 농토를 개간하여 신흥촌(新興村)을 건설했다. 1917년에는 동광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며 독립정신 고취에 힘썼다. 3·1운동 소식을 듣고 1919년 3월 4일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가입해 있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 노인단(老人團)의 길림성 지부장이 되었다. 노인단의 독립투쟁노선에 따라, 일본총독 등을 암살하기로 결의하고 그해 7월에 러시아인으로부터 영국제 수류탄 1개를 구입하여 8월 서울에 잠입했다. 9월 2일 남대문 정거장(지금의 서울역)에서 제3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게 수류탄을 던졌다. 총독 암살에는 실패했지만, 정무총감·만철(滿鐵)이사·일본경찰 등 37명을 사상시켰다. 거사 뒤 현장에서 빠져나와 오태영(吳泰泳)의 소개로 장익규(張翊奎)·임승화(林昇華) 등의 집에 숨어다니다가, 9월 17일 일제의 앞잡이 김태석(金泰錫)에게 붙잡혀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했다. 유해는 감옥 공동묘지에 있다가 이후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1962년 3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브리태니커
[1917년] 윤이상(尹伊桑) 출생
"작곡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무관심한 존재가 아니라 그것을 아는 존재이다. 인간의 고통과 억압과 불의,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사유 대상이 된다. 고통이 있는 곳, 불의가 있는 곳에서 나는 음악으로 발언한다." - 윤이상1917년 9월 17일 태어남 / 1995년 11월 3일 죽음
윤이상은 음악을 통해 한반도 분단의 갈등을 화해시키고자 애쓴 민족음악인이며, 서양과 동양의 음악 사이에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한 세계적 음악인이다. 그는 17세 때 일본에 유학해 첼로·음악이론·작곡 등을 배웠다. 1943년 무장독립운동을 하려다가 체포된 적이 있었고, 8·15해방 후에는 고아들을 보살피기도 했다. 1948년 통영여자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했고, 1953년에는 서울에 있는 여러 대학에서 강사로 일했다. 이즈음 가곡과 실내악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1956년에는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파리 음악원에서 P. 르벨과 T. 오벵에게서 음악이론과 작곡을 배웠다. 1957년 8월 서베를린음악대학에서 R. 슈바르츠 쉴링, J. 루퍼에게서 음악이론을, B. 블라허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1960년 서독 프라이부르크에서 중국·한국의 궁중음악에 대한 라디오 방송을 했고, 1962년에는 관현악곡 <바라 婆羅>가 베를린 라디오 방송관현악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1963년 북한을 방문했으며 1965년에는 서독 하노버에서 <오 연꽃 속의 진주여!>를 초연했다. 1967년 한국 중앙정보부는 동베를린 간첩단사건과 관련하여 그를 임의동행 형식으로 귀국시켰고, 재판 결과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68, 1969년 2번에 걸쳐 10년이 감형되었고 동료 음악가·교수 들의 국제적 항의와 독일정부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1971년 독일국적을 취득했으며, 뮌헨 올림픽 대회 문화행사의 일환으로 오페라 <심청>을 초연했다. 늘 고국을 그리워했던 그는 복권이 이루어진 1994년 9월 한국에서 열린 윤이상음악축제에 참석하려 했지만, 한국정부와의 갈등으로 끝내 귀국하지 못했다./브리태니커
[1917년] 프랑스의 화가 드가(Degas, Edgar, 1834~1917) 사망
본명 일레르 제르맹 에드가르 드가(Hilaire Germain Edgar De Gas). 파리 출생.
부유한 은행가 집안의 장남으로, 처음에는 가업을 계승하기 위하여 법률을 배웠으나, 화가를 지망하여 1855년 미술학교에 들어갔다. 거기서 J.A.D.앵그르의 제자 L.라모트에게 사사(師事)했고, 앵그르로부터도 직접 가르침을 받아, 평생토록 이 고전파의 거장에 대한 경의를 품게 되었다. 1856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르네상스 작품에 심취하였다. 이 무렵부터 거의 10년간은 화가로서의 본격적인 수업기로 오로지 고전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1865년 살롱에 《오를레앙시(市)의 불행》을 출품하였다. 그 후 자연주의 문학이나 E.마네의 작품에 이끌려, 근대생활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을 제작했는데, 1874년부터 1886년까지 인상파전에 7회나 출품 ·협력하였으나 그 후로는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그는 파리의 근대적인 생활에서 주제를 찾게 되자 더욱 재능을 발휘하여 정확한 소묘능력 위에 신선하고 화려한 색채감이 넘치는 근대적 감각을 표현하였다. 인물동작을 잡아 순간적인 포즈를 교묘하게 묘사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부분적으로 부각시키는 수법을 강조해왔다. 경마나 무희, 욕탕에 들어가거나 나오려는 여성의 한 순간의 동작을 즐겨 그렸다. 이러한 그의 눈과 기량은 파스텔이나 판화에도 많은 수작을 남겼을 뿐 아니라, 만년에 시력이 극도로 떨어진 뒤에 손댄 조각에까지 더없는 걸작을 만들어냈다. 선천적으로 자의식(自意識)이 강한 성격 때문에 독신으로 보냈고, 그의 인간혐오증은 늙어갈수록 더하여 고독한 가운데 파리에서 1883년의 생애를 마쳤다. 파리 인상파미술관에 소장된 대표작 《압생트》(1876) 《대야》(1886)를 비롯한 많은 작품를 남겼다. /naver
[1795년] 이탈리아의 작곡가, 음악 교육가 메르카단테(Mercadante, Saverio, 1795~1870) 출생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도니체티·로시니·벨리니로부터 베르디를 잇는 전환기적 인물이며 중요한 개혁가로 평가되고 있다.사생아로 태어난 그는 11세에 나폴리로 와서 1808년에는 이름·출생지·생년월일을 바꾸어 산세바스티아노대학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학생으로 있는 동안 3편의 발레음악을 포함한 다수의 기악 소품들을 작곡했다. 1819년 1월 4일 그의 첫번째 오페라가 초연되었으며, 그후 3년이 채 못 되어(정확하게 5편의 오페라를 발표한 후) 〈엘리사와 클라우디오 Elisa e Claudio〉가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1826년에는 또다른 대중적인 오페라 〈스페인의 여왕 카리테아 Caritea, regina di Spagna〉(〈카리테아 부인 Donna Caritea〉으로 더 잘 알려져 있음)를 작곡했다.
1827~30년 잠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이탈리아 오페라단에서 활동했으며 1832년에 결혼해 1833~40년 노바라 성당의 성가대 지휘자로 일했다. 1835년 자코모 마이어베어의 음악을 접하게 되었으며 1837년에 공연된 오페라 〈맹세 Ⅰl giuramento〉는 그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되며 작품 전면에 마이어베어의 영향이 반영되어 있다. 그후 계속 음악과 극의 보다 조화로운 결합을 시도했으며 단순화된 성악 선율, 독창성, 사려깊고 진지한 작품을 지향했다. 1840년부터 죽을 때까지 나폴리 음악원 원장으로 재직했다. 그는 오페라뿐만 아니라 여러 곡의 미사곡을 포함한 종교음악·칸타타·찬미가를 작곡했으며 관현악 소품과 다양한 실내악곡도 남겼다. /브리태니커
[1787년] 미국 헌법 제정
1775년에 시작된 미국의 독립혁명은 약 1세기 반에 걸쳐 식민지인들이 확립한 자치에 대하여 본국 정부가 이것을 침범하려고 시도한 데서 일어나게 되었다. 그 직접적인 원인은 영국 의회에서 정한, 식민지 백성에 대한 과세(課稅)와 서방영토로의 진출 저지였다. 따라서 독립혁명 때는 본국인 중에도 많은 동조자가 있었고, 17세기 이래 영국과 항쟁하고 있던 프랑스도 식민지를 도왔으므로 마침내 식민지는 승리를 획득하였다. 1776년에 독립을 선언하였고, 1783년에는 파리조약에 의하여 독립이 승인되었으며, 또 프랑스령(領)이었던 미시시피강(江) 동쪽의 영토를 공식적으로 획득하였다. 1781년에 최초의 헌법으로서 연합규약(聯合規約)이 만들어져 13주는 하나의 연방국가가 되었으나, 중앙정부의 권한이 너무도 약했기 때문에 사회불안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또 외국에서도 미국을 독립국으로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다 완전한 연방을 만들기 위하여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헌법희의를 열고 연방헌법을 제정하였다.
[1552년] 유명한 교회법률가인 로마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 1552~1621) 출생
← 교황 바오로 5세본명은 Camillo Borghese.
유명한 교회법률가로서 교황 클레멘스 8세 때 스페인 주재 교황대사를 지냈고, 1596년 클레멘스에게 추기경 임명을 받았다. 1603년 로마의 교황대리가 되었고, 1605년 5월 16일 나폴리 왕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이 성직자들의 권리를 무시하고 있던 상황에서 교황 레오 11세의 계승자로 선출되었다.
교황이 되어 맨 처음 취한 행동들 가운데 하나는 '프리빌레기움 포리', 즉 형사사건에서 성직자들이 세속법정이 아닌 교회법정에서 재판받을 수 있는 권리를 무시했다는 이유로 나폴리의 고집스런 장관을 파문한 일이었다. 1606년에는 유명한 신학자 파올로 사르피로부터 교황의 간섭에 맞서도록 격려를 받은 베네치아 공화국과 교황 간에 사법권 및 교회의 면책특권을 놓고서 분쟁이 벌어졌다. 1606년 5월 베네치아에 대해 성무금지령을 내리자 사르피의 주도로 더욱 거센 저항이 일어남으로써 사태는 악화되었다. 베네치아가 로마와 결별하고 이탈리아에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커지자 주변 국가들이 개입했다. 파울루스는 무력에 호소하기로 결심했으나, 1607년 4월 21일 주로 프랑스의 중재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파울루스는 성무금지령을 거두어들이는 동시에 사르피를 파문했고, 그해 10월 사르피가 피습을 당하는 일이 생겼다. 사르피는 암살을 부추긴 혐의로 교황청을 고소했고, 파울루스는 이 혐의를 부인했다. 파울루스는 이 사건을 통해 성무금지령의 효과가 소멸했음을 깨닫게 되었고, 그뒤 교황청은 주권 국가에 대해서 이 명령을 다시 사용하지 않았다. 파울루스는 그 이전 1606년 9월 22일 영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들에 대해서 왕 제임스 1세가 부과하는 새로운 충성서약을 하지 말도록 공포한 바 있다. 그러나 베네치아와 분쟁을 벌이는 바람에 정치적으로 조심스런 태도를 취하게 되었고, 어떻게 해서든 합스부르크가와 프랑스가 서로 평화를 유지하도록 만들려고 노력했다. 투르크인에 대해 또 한 차례 십자군원정을 고려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독일에서 루터교와 가톨릭 교회가 공존할 수 있는 최초의 항구적인 법적 근거가 된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이 공식적으로 파기되는 것을 특히 두려워했다. 그러므로 1618년 독일 가톨릭교도들과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의 반목이 30년전쟁으로 발전된 분쟁을 일으켰을 때 파울루스는 가톨릭 세력에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았다. 교리문제들에서 그는 놀라울 정도로 교리에 얽매이지 않았다. 선교, 특히 라틴아메리카 선교를 장려했고, 재속(在俗) 사제들의 수도회인 성 필리포 네리의 오라토리오회(1613 승인)를 포함한 많은 수의 새로운 수도회들과 형제회들을 승인했다. 교황 문서들을 보관하기 위해 바티칸 문서보관소들을 세웠다. 1612년 로마의 전례서들 가운데 하나인 〈로마 전례서 Rituale Romanum〉의 새로운 개정판을 승인하고 1614년 6월 17일에 공포했다. 그러나 족벌주의를 시행했고, 자기 가문에 지나친 재산을 쌓았다. 특히 조카 마르칸토니오 보르세스를 좋아해 비바로의 공작이 되게 해주었다. 과시를 지나치게 좋아하여 더욱 중요한 목적에 써야 할 자금을 낭비하기도 했지만 예술과 건축의 주요후원자가 되었다. 그가 지은 건축물 중에는 로마 산타마리아마조레 대성당의 부속 예배당이 있으며, 죽은 뒤 이곳에 묻혔다. /브리태니커
[ 14년] 제2대 로마제국 황제 티베리우스 즉위
제2대 로마의 황제(AD 14~37 재위).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그가 이룩한 제국의 제도와 영토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말년에 폭군적인 은둔생활을 하면서 로마의 중요 인물들에게 공포정치를 실행했다.
그밖에
1992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평양). 화해,불가침,교류,협력 등 3개분야 부속합의서 공식발효
1989 노태우 대통령, 서울평화상 제정 발표
1987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족문학작가회의로 창립
1982 레바논 민병대, 서(西)베이루트내 팔레스타인 난민 1800명 대량학살
1982 국무회의, 인구 및 각종 산업시설 배치 등을 조정하기 위한 수도권정비계획법안의결
1980 계엄보통군법회의, 내란음모혐의로 김대중에 사형선고
1980 폴란드 자유노조 ‘연대’ 출범
1980 미국-중국, 4개협정 조인. 관계 전면 정상화
1980 최초로 어린이가 이해력을 획득하는 과정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스위스의 심리학자 피아제 사망
1978 한국-아프가니스탄, 단교
1971 통혁당 조직 및 사회혼란사건 발표
1968 박정희대통령, 한국-호주 정상회담
1963 111개국 유엔총회 18차회의 개막
1963 말레이시아연방정부, 인도네시아-필리핀과 단교 성명
1957 태국에 군사쿠데타 사리트장군 정권 장악
1953 미국 국방성, 핵탄두 낙하예상 70개지구 발표
1951 북대서양조약기구 이사회 5개국위원회 설치를 결의
1946 수도경찰청 발족(청장 장택상)
1945 조선프로문학동맹 결성
1939 소련군 폴란드 진주
1935 필리핀, 케손 초대대통령에 당선
1922 제1회 조선변호사시험 실시. 4명 합격
1862 미국 메릴랜드주 안티탬크리크서 남북전쟁중 최대 혈전
1857 우주 비행이론 선구자 치올코프스키 출생
1826 독일의 수학자 리만 출생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