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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 11월 16일

작성자구름위집|작성시간07.11.16|조회수67 목록 댓글 0
[1995년]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노태우 전 대통령이 수천억 원 규모의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 수감되어 무기징역을 구형받았다.
경상북도 달성 출신인 노태우는 경북고등학교 졸업 후 1952년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1955년 전두환·정호용·김복동 등과 함께 육사 11기생으로 육군 소위에 임관했고, 1961~66년에 정보 관련 분야에서 근무했다. 1979년 12·12사태 당시 전두환과 함께 군사 쿠데타를 주도했으며 1980년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한 뒤, 1987년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그해 시민들에 의해 격렬한 민주화운동이 확산되자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김대중 사면복권 등을 내세운 '6·29선언'을 발표했다. 1987년 12월 16일 직접투표에 의한 선거에서 당선되어 대통령이 되었고, 1993년 김영삼에게 차기 대통령 자리를 내주었다.
김영삼 대통령 재임 시,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자행한 수천억 원 규모의 비자금 사건이 밝혀짐으로써 1995년 노태우는 무기징역을 구형받고 1997년 4월 17일 대법원 선고공판에서 징역 17년, 추징금 2,628억 원을 선고받았다.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선거 직후 특별사면조치로 석방되었다.

[1940년] 나치스, 바르샤바에 `게토` 설치
사진은 독일군에 내쫓겨 ‘게토’에 강제수용되고 있는 유태인가족
폴란드에 거주하는 유태인을 격리하기 위한 ‘게토’가 1940년 11월 16일 바르샤바에 설치됐다. 게토는 히틀러가 유태인을 집단 학살하기 위해 수용소로 보내기 전 강제 이주시킨 유태인 집단촌이다. 원래는 프라하에 설치할 예정이었으나 학살 계획이 임박해오자 급히 바르샤바 시내에 설치했다. 40만 명의 유태인들은 좁고 열악한 위생상태 하에서 근근이 살아가야 했다. 게토는 사실상 죽음으로 가는 대기실이었다. 그곳에는 언제나 비명과 시체만이 난무했다.
게토에 거주하던 유태인들에게 학살 수용소로 이주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것은 1942년 7월이었다. 그리고 1943년 2월, 남아있는 그들 대부분에게 사형판결이 내려지자 히틀러는 “바르샤바의 게토를 파괴하라”고 지시했다. 마침내 이날 SS대원 58명과 장교 16명이 전차와 장갑차로 게토에 침입했다. 유태인들은 격렬히 저항하며 필사적으로 방어했으나 이들의 저항은 오래가지 못했다. 무기도 보급도 없는 주민들은 다가오는 적들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대원들은 주민들의 방어기지인 지하실을 파괴했고, 화염 방사기로 집들을 불태웠다. 5월 16일 현장 지휘관인 슈트로프는 상부에 이렇게 보고했다. "바르샤바에는 이제 유태인 거주 지역은 한 군데도 없다. 저녁 8시 15분에 모두 종료됐다.

[1960년] 미국 영화배우 클라크 게이블 사망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비비안 리와 석양 아래에서 환상의 키스신을 벌였던 할리우드의 대스타 클라크 게이블이 1960년 11월 16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59세였다.
특유의 미소와 큰 퀴, 넓은 어깨는 희대의 바람둥이로서의 구성요소를 완벽히 구비한 듯했다. 그러나 이러한 외모와는 달리 미국 오하이오주의 석유 광부 아들로 태어난 클라크 게이블은 생후 7개월 만에 모친을 잃고 홀로 계모의 손에서 키워졌다. 10대 시절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극단의 심부름꾼, 전화설치공, 신문 배달부 등의 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그는 어느 날 우연히 보게 된 시골 극단의 뮤지컬 한 편에 배우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첫 번째 부인이기도 한 조세핀 딜런을 만나 철저한 연기수업을 받으며 최고의 배우가 되기 위한 꿈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후 1930년대 할리우드에서 차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그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어느 날 밤에 생긴 일(1934년)’을 비롯,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년)’ 등에 출연하며 자타 할리우드 최고의 주연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42년]티베리우스 Tiberius 출생
37년 3월 16일 죽음
티베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영토를 지키려 노력했으며 말년에는 폭군이 되어 공포정치를 편 로마의 제2대 황제이다(AD 14~37 재위).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의붓아들인 그는 BC 12년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와 결혼하여 많은 영예를 얻었고 BC 7년 호민관이 되었다. 14년 8월 19일에 아우구스투스가 죽자 티베리우스는 9월 17일 원수직을 계승했다. 재위 초기에는 지혜롭고 절제된 통치를 펼쳤다. 특히 로마 제국의 재정낭비를 중단시켜 그가 죽을 무렵에는 물려받은 재산의 20배를 남겨놓았다. 그는 해군을 강화했고 검투사 경기를 벌이는 관습을 없앴다. 그러나 이따금 야만적 폭압이 벌어졌고 바람직하지 못한 고발 풍습이 늘어났다.
23년 아들 드루수스가 죽은 뒤 슬픔에 빠져 세야누스에게 실권을 위임하고 27년 카프리 섬으로 들어가 로마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후 세야누스의 세도가 과도해지자 그를 처형하고 '칼리굴라'로 불리던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후계자로 선택했다. 37년 봄, 티베리우스가 쓰러져 의식을 잃자 근위대는 후계자 칼리굴라를 새 황제로 선포했다. 의식을 회복했으나 근위대 사령관 마크로에 의해 살해되었다.

[1901년]김형원 출생
한국시사(詩史)에 있어서 신경향파 시를 처음으로 또 가장 많이 썼다. 호는 석송(石松).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1920년대에 〈동아일보〉·〈조선일보〉·〈매일신보〉 기자를 거쳐 〈동아일보〉 사회부장,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1924년 '파스큘라'에 가담하면서 경향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1925년 카프의 창립 발기인으로 활동했으며, 같은해 잡지 〈생장〉을 주재했다. 해방 뒤 공보처장을 지냈으며, 6·25전쟁 때 납북되어 생사를 알 수 없다.
1920년 〈개벽〉에 〈이향 離鄕〉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초기에는 미국의 민중시인 휘트먼(W. Whitman)에 심취하여 1921년 〈개벽〉의 창간 2주년 기념호에 휘트먼을 소개하였고, 그의 영향을 받은 대표작 〈아, 지금은 새벽 네 시〉(개벽, 1924. 11)를 발표했다. 주로 민주주의를 따르고 사회제도 및 역사의 구속 등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를 노래했다. 그밖에 시 〈죽음의 미〉(개벽, 1921. 2)·〈무산자의 절규〉(개벽, 1921. 6)·〈햇빛 못 보는 사람들〉(개벽, 1922. 2)·〈숨쉬는 목내이〉(개벽, 1922. 3) 등을 발표했다. 박팔양은 평론 〈조선신시운동개관〉(조선일보, 1929. 2. 28~3. 1)에서 그의 시는 힘있고 굳센 특색이 있다고 하면서, 후일 신흥 계급운동이 일어나는 데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고 했다.
당시 〈창조〉·〈폐허〉·〈장미촌〉 등에서 보이던 퇴폐적 낭만주의나 유미주의 문학과 달리 당대의 비참한 생활과 불평등하고 부조리하며 자유없는 현실을 거부하는 의식을 읊었다. 1979년 가족들이 시 124편을 모아 〈석송 김형원시집〉을 펴냈다.

[1831년]프로이센의 장군 클라우제비츠 사망
1831년 11월 16일 역사연구서와 전략문제를 다룬 주요 저서 <전쟁론 Vom Kriege>을 쓴 프로이센의 장군 클라우제비츠가 사망했다.
1780년 중산층 가문에서 태어나 1792년 프로이센군에 입대한 그는 프랑스 혁명군과의 라인 전투 때 임관했다. 1801년 베를린 육군대학에 들어가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에게 군사학을 배웠다. 1806년 예나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사로잡혔으며, 1808년 프로이센으로 돌아왔다. 1812년 원정에서 그는 러시아군 참모장교로서 두각을 나타냈고 프로이센군으로 돌아온 후 1818년 육군대학 총장에 임명되었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을 완성하기 전인 1831년 11월 16일 콜레라에 걸려 죽었으며, 그의 원고는 미망인에 의해 출간되었다.
<전쟁론>은 마르크스·엥겔스·레닌 등 공산주의자들에게 읽혔고, '제국주의 전쟁'과 같은 전쟁의 본질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이론은 주로 그에게서 도출된 것이다. 그의 전략 개념은 육상전만을 다룬 것이었기 때문에 20세기 중반 장거리 무기체제가 새로이 등장하면서부터 중요성이 줄어들긴 했지만, 기본 개념 중 많은 부분이 여전히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532년] 잉카제국 멸망
잉카 문명 (케추아어: Tawanti Suyu, 타완티 수유, 네개지역연합)은 1438년 부터 1533년에 걸쳐 번성한 제국이며 현재 페루 영토에 주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 기간동안 잉카인들은 점령과 평화적인 합방을 통해 안데스 산맥을 주축으로 하는 남아메리카 서부의 주요 영토를 제국의 일부로 편입했다. 1533년 사파 잉카라 불리는 마지막 황제 아타왈파는 점령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명령에 의해 살해당하고 잉카 제국의 멸망과 동시에 에스파냐 지배가 시작되었다.
잉카는 네개의 "수유" (suyu)로 나뉘어 각 수유의 모서리는 (잉카 신화에 의하면) "세계의 배꼽" (Qusqu)에 서로 맞닿아 이곳에 수도 쿠스코가 설립되었다.
제국의 공식 언어는 케추아어였으나 몇백개가 넘는 지역 언어가 통용되었다. 잉카 지도부는 그들의 신을 숭배하도록 권장했는데 그 중 최고신은 태양신 인티였다.

그밖에
2005년 한국·페루 정상회담(청와대)
2005년 한국·페루 의정서 서명식(서울)
2004년 콘돌리자 라이스 흑인여성 최초 미국 국무장관에 선출
2000년 클린턴 미국 대통령, 25년 만에 베트남 방문
1990년 한국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 결성
1989년 제4차 남북체육회담, 남북단일팀 명칭 `코리아`로 결정
1988년 삼성전자, 세계2번째로 1MS램 개발
1988년 북한 연형묵 총리, 부총리급을 단장으로 하는 남북정치군사회담 제의
1987년 낙동강하구둑 준공
1984년 동양 최장 대호방조제 준공
1983년 PLO반군, 아라파트 최후거점 점령
1983년 소련, 미국기술 훔쳐 순항미사일 개발
1983년 소련 `특무부대` 창설
1982년 국내 처음 근대2종경기(수상,육상) 개막. 우승 강석인
1982년 아시아경기연맹(AGF), AGF를 해체하고 새로운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창설키로
1981년 연합통신, 제1회 전국신문-방송발행인 및 편집-보도국장회의 개최
1981년 미국-중공 공동경제협의회 개막(북경)
1977년 장성탄광 갱도에 화재, 46명 사상
1976년 세계 희귀조인 황새, 제주 성산포서 발견
1975년 스페인령 사하라를 모로코와 모리타니아가 분할키로 합의
1970년 파키스탄 태풍과 해일고 150만명 사망
1965년 소련, 금성탐사를 위한 `금성3호` 발사
1962년 콜롬보계획 14차 자문위 한국가입 가결
1962년 프랑스 총선, 드골체제 확립
1959년 대구 국제백화점에서 화재 300여 점포 소실
1957년 64개국 공산당-노동당 회의. 모스크바에서 개최
1949년 외자구매청 신설
1945년 44개국의 교육문화회의에서 유네스코 헌장 채택
1945년 유네스코 창립총회
1938년 영국, 이탈리아의 이디오피아 병합 승인
1933년 미-소 외교관계 수립
1919년 일본 낭인들, 항일중국학생들을 폭행(복주사건)
1918년 헝가리 공화제 선언
1908년 동양애국부인회, 부인병원 설립
1908년 보이스카우트 창설
1907년 오클라호마, 미합중국에 편입
1906년 토지-건물전당(典當)집행규칙 발표
1904년 제중원(세브란스병원) 낙성식
1900년 세계최초로 시민이 창설한 필라델피아 관현악단, 제1회 콘서트 개막
1899년 청-프랑스, 광주만 조차조약 조인
1643년 상중 혼인 금지
1308년 동성동본의 결혼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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