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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11월 25일

작성자구름위집|작성시간08.11.25|조회수58 목록 댓글 0
11월 25일(화) 음력 10월 28일

[1898년] 독립운동가 안재환(安載煥) 출생
1898. 11. 25 평남 안주~1977. 5. 11.
이명은 지청(志靑)·동만(東滿). 일찍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황푸 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우한 분교[武漢分校]에 재학중이던 1924년 9월 동교생인 박시창(朴始昌)·송욱동(宋旭東), 중국군대의 기술교관으로 있던 백득림(白得林) 등과 같이 우창[武昌]에서 우한 한인혁명청년회를 조직했다. 1927년 2월 유자명(柳子明)·신공제(辛公濟)·김규식(金奎植) 및 중국인·안남인·인도인 등과 함께 난징[南京]에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하고 한국부 상무로 활동했으며, 기관지로 〈동방민족〉을 한국어·중국어·영어로 발간하여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선전했다. 1929년 난징에서 민병길(閔丙吉)·신익희(申翼熙)·김홍일(金弘壹) 등 10여 명과 한국혁명당을 조직했다. 또한 무력행동 단체인 철혈단(鐵血團)을 조직하고 단장이 되었으며, 기관지 〈우리 길〉을 발간했다. 1933년 난징에서 김규식이 김두봉·신익희·최동오 등과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할 때 난징 한교회 간부로 참여했으며, 1934년 난징 한교회 주석으로 의열단 활동에도 참여했다. 1935년에는 뤄양 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를 졸업했다. 1935년 여름 한국독립당·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의열단·미주대한인독립당 등 5당 대표가 난징에서 통일당으로 민족혁명당을 조직하자 간부로 활동했으며, 기관지 〈민족혁명〉을 발간했다. 1937년 민족혁명당 상하이[上海] 특별지부장이 되었으며,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군자금 모집, 밀정처단 등의 활동을 하다가 같은 해 12월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평양으로 압송되었다. 출옥 후 다시 상하이로 탈출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1892년] 쿠베르탱, 올림픽 부활 제창
← Pierre de Frédy, Baron de Coubertin
1892년 11월 25일 프랑스의 교육자인 쿠베르탱(Pierre de Coubertin ( 1863.1.1 ~ 1937.9.2 ))은 운동경기연맹 모임에서 처음으로 근대 올림픽 대회를 개최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쿠베르탱은 구미 각지를 돌며 교육 방법론 모색에 골몰하던 중 그리스 방문길에 마침 고대 올림픽 경기 발상지 발굴 현장을 보게 되었다. 일찍이 신체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를 역설해오던 그가 1892년 프랑스 운동경기연맹 모임에서 처음 근대 올림픽 대회를 개최하자는 의견을 내놓았을 때 참석자들의 반응은 썩 신통치 않았다.
그로부터 2년 뒤, 쿠베르탱은 9개국 79명의 대표가 참석한 파리 국제체육회담에서 다시 올림픽 대회 부활을 주장했고 마침내 만장일치의 찬성으로 올림픽 대회 개최가 가결되었다. 1896년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최초의 근대 올림픽이 개최되었는데 국가대표라는 것은 아예 없었고, 여행길에 우연히 참가한 사람도 있었다. 쿠베르탱은 1896~1925년 국제 올림픽 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지냈다./브리태니커

[1986년] 이란-콘트라 스캔들 폭로
← 레이건(1981)
1986년 11월 25일 미국국가안전보장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NSC)가 불법적으로 이란에 무기를 판매하고 판매대금의 일부를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에 지원한 사실이 폭로되었다. 국가보안과 관련된 대내외 정책과 군사문제에 관한 대통령 자문기관인 NSC는 1985년초부터 여러 차례 이란에 무기를 판매했다. 이는 레바논에서 시아파 테러 집단에게 억류되어 있는 미국 시민을 석방한다는 조건으로 이루어진 밀거래였다. 이같은 대(對) 이란 무기 판매행위는 당시 이라크와 전쟁 중인 이란을 원조하지 않을 것이라던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에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다. NSC는 이란으로부터 받은 대금 4,800만 달러 중 일부를 빼돌려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부 전복을 꾀하던 반군 콘트라에게 전달했다. 이 사실이 폭로되면서 당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대외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었다.

[1936년] 일본독일 방공협정 체결
← 일ㆍ독 방공협정에 조인한 히틀러(오른쪽)와 무샤노코우지 주독일본대사
1936년 11월 25일 베를린에서 본문 3개조 비밀부속협정 3개조를 주 내용으로 하는 ‘본독일 방공협정(防共協定)’ 조인식이 열렸다. 그 내용인즉, 코민테른의 활동 저지를 위해 양국이 서로 협력한다는 것이었다. 협정 유효기간은 5년으로 정했다. 코민테른의 실질적 주체가 소련이라는 것은 일본, 독일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으므로 본문에서 ‘소련’이라는 국명을 밝히는 것은 삼갔다.
협정체결에의 움직임은 1935년 여름 제7회 코민테른대회에서 소련이 독일, 일본의 파시즘을 적(敵)으로 규정한 즈음부터 육군의 의사를 전해 받은 주독일본대사관부무관 대도호와 독일 나치스의 외교관 리벤트로프 사이에서 이루어져왔다.
본 협정은 양국의 의도가 엇갈려 해석의 요지를 남긴 다분히 애매한 것으로, 일본국내에서도 “‘독(獨)이(伊)’라는 친구를 얻기 위해 ‘영(英)미(美)’ 라는 중립적 위치의 친구를 잃었다” 는 혹평을 받았다. 국제적으로도 평판은 매우 좋지 않았다. 본 협정에서 제3국의 참가를 장려했기에 일본은 영국, 네덜란드에 가입을 호소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협정 조인 다음날 26일, 이탈리아만이 일(日)이(伊)간에 본 협정을 맺고 싶다고 제의해왔으나 이탈리아의 정식 참가는 1년 후에나 이뤄졌다./조선

미시마 유키오 할복자살/1970
← 자위대원들을 향해 궐기를 호소하는 미시마 유키오
󰡐일본적 미의식에 바탕한 전후최대의 작가󰡑라는 평을 들었던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는 삶 자체를 최고의 예술로 여기는 철두철미한 탐미주의적 작가였다.
국화와 일본도를 일본정신의 핵으로 파악하고 󰡐무사도󰡑를 일본정신의 원형으로 여긴 미시마는 자신의 사조직 󰡐다테노카이(楯の會)󰡑 회원들과 함께 자위대에서 군사정보원 훈련을 받았고, 비밀리에 한국도 방문, 예비군 훈련을 참관하기도 했다.
1970년 11월 25일 오전10시40분쯤, 다테노카이 회원 4명과 함께 도쿄 시내 육상자위대 총감부에 난입, 총감을 인질로 삼은 미시마가 2층 발코니에서 1000여명의 자위대원들을 향해 궐기를 호소했다. 󰡒지금 일본 혼을 유지하는 것은 자위대 뿐이다...너희는 사무라이다. 자신을 부정하는 헌법을 왜 지키고 있단 말인가󰡓
그러나 2차대전후의 평화헌법을 뒤엎고 천황제를 실시하자는 그의 절규에도 자위대원들이 냉소와 경멸의 반응을 보이자 미시마는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자신의 배를 갈랐다. 추종자가 다시 그의 목을 치는 전형적인 사무라이 자살 방식에 일본 열도는 경악을 금치 못했고, TV는 특집 프로그램을 급히 편성하는 등 호들갑을 떨었다.
할복후 미시마는 뚜렷한 구심점이 없던 일본 우익의 정신적 지주로 부상했고, 사건은 전후 일본 사회 저변에 흐르던 군국주의를 준동케 하는 계기가 됐다./조선

北경수로 공사비 결정/1997
1994년 한반도를 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은 제1차 북한 핵 위기를 잠재우는 데 든 돈은 얼마일까. 그 여진이 지금도 계속되는 만큼 최대 비용은 계산할 길이 없다.
다만, 최소 비용은 97년 11월 25일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집행이사회에서 결정됐다. 51억7850만달러.
94년 북한과 미국간 제네바합의에 따라 북한에 공급하기로 한 경수로 2기의 총 공사비였다. 당시 환율은 1달러에 1000원. 우리 돈으로는 5조1785만원이었다. 한국은 이 가운데 약 70%(당시 3조6300억원)을 부담키로 했다.
경수로는 1차 북핵 위기를 해소할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졌다. 무기용 플루토늄을 추출하기 어려운 경수로를 제공하고, 그 대신 북한이 흑연로 3기를 해체하면 핵의 망령은 한반도를 떠날 줄 알았다. 당시 김영삼(金泳三) 정부로서도 남북정상회담(94년 7월 25일 예정)을 앞두고 다른 대안을 찾기 어려웠다.
그러나 한국형 경수로 제공은 결국 󰡐자승자박󰡑이었다. 북한은 그때도 미국만 상대하려 했다. 󰡐한국 표준형 경수로는 궁극적으로 북한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트로이 목마󰡑라며 강력히 반대했다. 6개월 예정이던 경수로 공급 협상이 14개월을 끈 것도 이 때문이다.
북한은 KEDO 사무총장도 미국인이어야 하고, KEDO와의 모든 협상에서 미국인 수석대표를 원했다. 공사비 한 푼도 안 내는 미국이 KEDO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다 북한 덕이다. 그런 미국이 지금은 경수로 공사 완전 폐기를 주장하고 있다.
이제 한국형 경수로 제공은 󰡐천덕꾸러기󰡑나 다름없다. 2002년 10월 제2차 북핵 위기가 발생하자 KEDO는 지난해 12월 경수로 건설 중단을 공식 선언했다.
한국 정부가 경수로 공사비 분담금을 조달하기 위해 99년부터 올해 9월 말까지 발행한 국채는 2조2527억원. 이미 거의 다 공사비로 들어간 이 돈이 그 값을 하려면 경수로를 완성해야 한다. 그러나 공사에 들어갈 추가 비용은 무려 3조7000억원이나 된다. 경수로의 불투명한 미래에 투자하기엔 너무 많다.
지금도 계속되는 2차 북핵 위기의 󰡐만병통치약󰡑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값은?

[1835년] 카네기 Andrew Carnegie
스코틀랜드 태생 미국의 실업가.
1835. 11. 25 스코틀랜드 파이프 던펌린~1919. 8. 11 미국 매사추세츠 레녹스.

카네기는 스코틀랜드 태생으로 19세기 후반 미국의 철강산업을 성장시킨 주역이며 당대 최고의 자선사업가이다. 가난한 베틀직공의 아들로 태어난 카네기는 1848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펜실베이니아 주 앨러게니(지금의 피츠버그)에 정착했다. 그는 한 면직물 공장에서 일하다가 나중에는 전보 배달원과 전신기사로 일했다. 전신기사로 일하던 중 카네기는 펜실베이니아철도회사 사장인 토머스 스콧의 눈에 띄어 1853년 그의 개인비서로 고용되었다. 카네기는 계속해서 고속승진을 거듭하여 1859년에는 이 철도회사의 서부지역 총책임자가 되었는데, 이 직위에 있으면서 침대차를 발명했다. 한편 그는 여러 산업과 금융계통의 회사에 현명하게 투자하기 시작해 30세쯤에는 연소득이 5만 달러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강철에 대한 높은 수요를 예견하고 1872년 회사를 설립하여 철강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카네기는 철강제조에 있어 원료를 제공해주는 코크스 광산과 철광산뿐만 아니라 원료품들을 그의 공장으로 수송할 배와 철도를 구입해 생산성을 높였다. 1889년 카네기 소유의 모든 회사가 카네기철강회사로 통합되었고 이 회사는 미국의 철강업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1901년 그는 회사를 J. P. 모건의 유나이티드스테이츠철강회사에 매각하고 이후에는 자선사업에 몰두했다. 1900년 피츠버그에 있는 카네기멜런대학교에 카네기공과대학을 설립했고, 1902년에는 워싱턴 D.C.에 워싱턴 카네기 연구소를 설립했다. 또한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여러 영어권 국가에 수많은 공공도서관을 설립하기 위해 기부금을 내놓았다. 1920년 J. C. 밴 다이크에 의해 그의 자서전이 출판되었다./브리태니커

[1922년] 시인 김춘수/金春洙 출생
1922. 11. 25 경남 충무 ~ 2004. 11. 29.
서구 상징주의 시이론을 받아들여 초기에는 그리움의 서정을 감각적으로 읊다가, 점차 사물의 본질을 의미보다는 이미지로 나타냈다.
경기중학교를 거쳐 1940년 일본대학 예술과에 입학했다. 1942년 퇴학당했으며 사상이 불순하다는 혐의로 경찰서에 6개월 동안 갇혀 있다가 서울로 송치되었다. 1945년 충무에서 유치환․윤이상․김상옥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만들고, 노동자를 위한 야간중학과 유치원을 운영하면서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1946~48년 통영중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조향․김수돈 등과 동인지 〈노만파 魯漫派〉를 펴냈다. 1952년 대구에서 펴낸 〈시와 시론〉에 참여해 〈시 스타일 시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1956년 유치환․김현승․송욱 등과 시동인지 〈시연구〉를 펴냈다. 해인대학교․부산대학교에서 강의하다가 1964년 경북대학교 교수로 취임, 1978년까지 재직한 뒤 이듬해 영남대학교로 옮겨 1981년 4월까지 재직했다.

[1915년] 실업가 정주영/鄭周永 출생
1915. 11. 25 강원 통천~2001. 3. 21 서울.
1930년 송전소학교를 졸업했으며, 막노동으로 출발하여 한국 최대의 재벌이 된 인물이다. 1937년 9월 경일상회라는 미곡상으로 사업을 시작했으며,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했다. 1940년 아도서비스공장 대표, 1950년 현대건설(주) 및 현대상운(주) 사장 등을 거쳐, 현대가 그룹체제로 전환한 1971년부터 현대그룹 회장을 지냈다.
1969~89년 지역사회학교후원회 회장, 1977~8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1982~84년 대한체육회 회장 겸 한국 올림픽 위원회(KOC) 위원장, 1983~87년 한국정보산업협회 회장, 1989~92년 한․소경제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1975년 경희대학교에서 명예공학박사, 1982년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 명예경영학박사와 연세대학교에서 명예경제학박사, 1990년 서강대학교에서 명예정치학박사 등의 학위를 받았다.

[1911년] 서양화가 남관/南寬 출생
← 남관이 그린 〈묵념〉(1978), 162×130cm
1911. 11. 25 경북 청송~1990. 3. 30 서울.
국내 추상화단을 이끌어왔으며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화가이다. 일본 다이헤이요[太平洋]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구마오카[態岡] 미술연구소에서 공부했으며 문부성미술원 등에 출품, 일본 후나오카 미즈이 상을 받았다. 1955년 프랑스로 건너가 프티팔레에서 열린 재불외국인화가전과 현대국제조형예술제 등에 출품했다. 1958년 살롱 드 메에 초대되어 한국화가로서는 최초로 국제무대에 진출했다. 특히 1966년 7월 프랑스에서 열린 생트비엔날레에서는 피카소․뷔페․아르망․피숑 등의 쟁쟁한 거장들을 물리치고 대상을 받아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1968년 파리에서 귀국하여 홍익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대한민국미술전람회, 대한민국미술대전 등의 심사위원장을 역임했다. 1974년 한국문화예술상, 1981년 문화훈장 등을 수상했으며 서울과 파리를 오가며 20여 회의 해외전과 10회의 개인전을 갖는 등 경력을 쌓았다.

[1897년] 목사 주기철/朱基徹 출생
1897. 11. 25 경남 창원~1944. 4. 21 평남 평양.
장로교 목사, 민족계몽운동가.
아명은 기복(基福). 호는 소양(蘇羊).
1916년 오산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했다. 1921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해 1925년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26년 부산 초량교회에 부임했으며, 1931년 마산 문창교회에 부임해서는 신앙운동과 계몽운동을 벌였다.
1936년 10월에는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하여 재직하던 중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이를 결사적으로 거부하며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이로 인해 1938년 체포되어 황실불경죄․치안유지법 위반이란 죄목으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평양형무소에서 복역중 일제의 잔혹한 고문으로 순교했다.
1963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에 추서되었다.

[1881년] 교황 요한네스 23세/Johannes ⅩⅩⅢ 출생
(영)John ⅩⅩⅢ. 본명은 Angelo Giuseppe Roncalli.
1881. 11. 25 이탈리아 소토일몬테~1963. 6. 3 로마.
교황(1958~63 재위).
역대 교황들 가운데 가장 좋은 평판을 얻은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변화를 받아들이는 폭넓은 태도로 로마 가톨릭 교회사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런 태도는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데서 잘 나타났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여러 회칙을 썼으며,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지상의 평화 Pacem in Terris〉이다.


존경하는 형제들과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인사와 더불어 사도적 축복을 보낸다.

머 리 말

하느님의 질서와 세상의 질서

1.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는 모든 시대의 인류가 깊이 갈망하는 것으로서 하느님께서 설정하신 질서를 충분히 존중할 때에 비로소 회복될 수 있고 견고해진다.

2. 세상에는 살아 있는 생명과 자연의 힘을 지배하는 놀라운 질서가 있기 때문에 현대 과학의 발전과 기술의 발명이 가능하다. 그리고 자연의 힘을 지배하고, 그 선익을 향유하기 위하여 적당한 도구들을 창조하고, 그런 질서를 발견하는 것은 인간이 지닌 위대함의 소산이다.

3. 그러나 과학의 발전과 기술의 발명은 무엇보다도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무한한 위대하심을 드러내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시편 저자가 외치듯이 지혜와 선의 귀중한 보화들을 인간에게 풍요롭게 주시려고 우주를 창조하셨다. “하느님, 내 주시여, 온 땅에 당신 이름 어이 이리 묘하신고.” “주님이 하신 일이 많고도 많건마는, 그 모두를 지혜로써 이룩하시었으니, 온 땅에 당신 조물 가득 차 있나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대로” 당신과 비슷하게 지성과 자유 의지를 지닌 인간을 만드시고, 세상의 주인으로 올려놓으신 것이다. 계속하여 시편 저자는 외치고 있다. “당신은 인간을 천사들보다는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어주셨나이다.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삼라 만상을 그의 발 아래 두시었으니.”(이하 생략)

[1983년] 교황청, 교황 한국 방문하여 순교 복자 103위 시성식 올린다고 발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생전에 1984년과 1989년 두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교황의 첫 방한은 전세계 모든 가톨릭 신자들의 이목을 한국으로 쏠리게 한 일대 '사건'이었다.
이에 앞선 1983년 9월 바티칸의 교황청 비밀 회의장에서 한국 순교 복자 103위를 성인의 반열에 올린다는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가톨릭 2천 년 사상 이처럼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성인이 된 것은 처음이었다. 성인이 되려면 기적의 사례가 반드시 필요했는데, 이조차 그야말로 '기적적으로' 면제된 것이다.
3개월 뒤인 11일 25일에는 더욱 놀라운 소식이 전세계에 전해졌다. 교황이 직접한국을 방문해 한국 순교 복자 103위에 대한 시성식을 올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동안 시성식은 줄곧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됐었다.
한국의 신자들은 즉위 후 5년 동안 27만 ㎞나 되는 거리를 누비며 36개국을 돌아다닌 교황이 시성식을 위해 몸소 한국땅을 밟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자부심과 긍지를 느꼈다.
교황은 1984년 5월 3일 비행기에서 내려서자마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순교자의땅, 순교자의 땅"이라고 하면서 한국의 땅에 입을 맞췄다.
교황은 방한사에서도 "벗이 있어 먼 데서 찾아오면, 이 또한 기쁨이 아닌가"라고 유창한 한국어로 말해 한국인들을 또 한번 놀라게 했다.
교황은 4박 5일 간의 일정을 마치고 한국땅을 떠날 때까지 신학생과 수도자, 주교단, 문화.예술인, 외교관 등 많은 이들을 만나는 한편 국립 소록도 병원을 찾아나환자들에게 성금을 전달하고, 광주 민주화 운동의 희생자 묘소를 참배하기도 했다. /Google

[1501년] 퇴계 이황 출생

← 남산에 있는 퇴계 이황의 동상

1501(연산군 7) 경북 안동 ~ 1570(선조 3).
조선 중기의 문신․ 성리학자.
이황(李滉, 1501년 음력 11월 25일~1570년 음력 12월 8일)은 조선 명종, 선조 시대의 명신. 정치보다는 학자 지향형 인물이다.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거계상[退居溪上]의 줄임말), 본관은 진성(眞城)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이황은 조선 연산군 7년(1501년), 경북 예안군(오늘날의 안동)에서 이식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마흔 살의 나이로 사망하여, 이황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야 했다. 이황은 열두 살 때부터 숙부인 송재 이우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송재는 그때 관직에 있었는데, 바쁜 일과 중에도 퇴계를 가르쳤다. 1527년에 소과에 입격하고 1534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헌부 지평, 성균관 사성, 단양 군수, 풍기 군수 등을 역임하였는데, 풍기 군수 시절에 소수서원(당시 백운동서원) 사액을 실현시켰다. 선조 즉위 직후 임금에게 올린 성학십도가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나타낸다.
조선 정치사에서 특히 남인(南人) 계열의 종주가 되었고, 사후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광해군 치세인 1609년에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이이와 더불어 한국의 성리학의 발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친구로서 호남의 대학자 하서 김인후와 사마시에 같이 급제한 김난상 등과 교류하였다.
일본 에도 시대에 퇴계 이황의 영향을 받은 학파로 기몬(崎門) 학파와 구마모토(熊本) 학파가 있다.

[1844년] 독일 자동차 기술자 벤츠 출생/Karl (Friedrich) Benz 출생
1844. 11. 25 독일 바덴 카를스루에~1929. 4. 4 만하임 근처 라덴부르크.
독일의 기계공학자.
> 내연기관(內燃機關)으로 동력을 얻는 세계 최초의 실용적인 자동차를 설계․제작했다. 최초의 벤츠 자동차(3륜차이며 지금은 뮌헨에 보존되어 있음)는 1885년초에 처음으로 운행되었지만, 설계 특허는 1886년 1월 26일에 획득했다. 벤츠사(Benz & Cie.)는 1883년 만하임에서 설립되어 고정 내연기관을 제작했다. 이 회사는 1893년에 최초의 4륜 자동차를 완성했으며, 1899년 일련의 경주용 차들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926년 벤츠사는 다임러자동차사와 합병하여, 메르세데스벤츠 자동차를 제작한 다임러벤츠사로 되었다. 벤츠는 1906년경 회사를 그만두고 아들인 오이겐, 리하르트와 함께 라덴부르크에서 C. 벤츠 죄네(C. Benz Sohne)를 결성했다.

[2001년] 미국 ACT사, 인간배아 첫 복제했다고 공식인정
미국의 한 생명공학 회사가 각종 병의 치료에 응용되는 `만능세포`인 줄기세포를 채취하기 위해 처음으로 인간 배아를 복제했다고 2001년 11월 25일 발표했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워체스터의 어드밴스트 셀 테크놀러지(ACT)는 이날 인간 배아에 복제기술을 처음으로 사용했다며, 이 연구가 파킨슨병부터 암,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아동 당뇨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질병의 치료에 활용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ACT측은 난자(卵子)에서 유전물질인 DNA를 제거해, 성체(ad-ult) 세포에서 채취한 DNA를 주입하는 `고전적인` 복제방법을 사용했다고 밝혔다. ACT의 최고 경영자인 마이클 웨스트는 미국 NBC방송의 `언론과의 만남`에 출연, “우리가 복제한 것은 인간이 아니라 세포일 뿐”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생명공학 회사들은 의회 청문회 소환 등 복잡한 절차를 피하기 위해 복제 연구를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았으며, 인간 배아 복제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ACT가 세계 최초이다. /조선

[1990년] 폴란드, 역사상 최초의 직선 대통령 선거 실시
1980년 7월 자유노조를 이끌어온 공로를 인정받아 1983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레흐 바웬사는 1990년 4월 10일 보이체흐 야루젤스키 현 대통령을 사임하게 한 자신이 대통령직을 맡을 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폴란드 관영 통신 PAP통신이 전했다.
정치상황의 급변과 경제 시장의 악화 등을 이유로 구세대인 보이체흐 야루젤스키대통령을 조기 퇴진시키는 한편, 바웬사와 마찬가지로 솔리다르노시지(연대노조) 출신으로 수상에 취임하여 먼저 정치 일선에 나선 마조비에츠키에 대하여 대통령 경선에 참여하지 말라는 압력을 행사해 왔으며 (11월 25일의) 1차투표에서 그는 탈락하고 말았다. 1990년 12월9일 실시된 폴란드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에서 도전자 니슬라프 티민스키의 약점과 한계를 적절하게 공략하여 압승을 거두고 레흐 바웬사는 대통령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로서 1980년 7월의 육류공급 파동으로 일어난 노동자들의 민주화 투쟁은 그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과거에 소련과 바르샤바조약국들의 내정간섭과 침략을 우려하고 자국의 주권을 행사하지 못했던 권리를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등장으로 찾게 된 것이다.
폴란드의 민주국가로의 전환을 방해하고 압력을 행사하던 소련이 이제는 그것을 받아드리고 환영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Google

[1981년] 86아시안게임 서울을 개최지로 결정 (아시아경기연맹 집행위, 뉴델리)
한국은 9월30일 서독[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제 84차 총회에서 일본[나고야]를 52대 27의 큰 표 차로 제압, 88년 제24회 하계 올림픽 서울 개최의 영예를 안았다. 한국은 또한 86년 제 10회[아시아] 경기 개최권을 놓고 치열한 경합이 예상됐던 북한이 11월25일 인도[뉴델리]의 아시아 경기연맹(AGF) 집행위원회에서 돌연 경합을 포기, 아시아 경기 개최권을 따냈다. /Google

[1974년] 미얀마의 교육자, 정치가, 전 유엔사무총장 우탄트(U Thant, 1909~1974) 사망
판타나우 출생. 양곤대학을 중퇴하고 고향의 국립고등학교 교사 ·교장을 지냈다. 1947년 반(反)파시스트 버마인민자유연맹(BAFPFL)의 교육선전부장을 역임하다가, 아웅산의 권유로 정부의 정보성에 들어가, 총리부에서 근무하였다. 1948년 미얀마 독립 후 주미대사 ·UN대사로 활약하였다. 1961년 11월 임시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가 1962년 2월 정식으로 사무총장이 되었다. 그는 콩고 ·쿠바 ·베트남 문제 해결에 노력하였는데, 1966년 9월 UN의 약체화와 사무총장의 무력화를 이유로 재선 사퇴의사를 밝혔으나, 미국 ·소련을 포함한 각국의 재임 간청으로 1971년 12월까지 재임하였다.
1974년 뉴욕에서 암으로 사망한 후 시신은 양곤으로 옮겨졌다. 저서에 《세계평화를 위하여 Toward World Peace》(1964) 《유엔에서 본 관점 View from the UN》(1978, 유고집) 등이 있다. 1965년 네루상을 수상하였다. /naver

[1915년] 아인슈타인, 중력장 방정식을 완성 (일반상대성이론)
1905년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이론, 광양자가설, 브라운운동가설 등 3편의 논문을 발표해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덕분에 궁색했던 그의 생활도 폈다. 1902년 스위스 베른의 연방특허국에 들어갈 때만 해도 3급 견습에다 연봉은 3천8백 프랑에 불과했다. 그런데 1906년 그는 2급 전문관으로 승진했고 연봉도 4천5백 프랑으로 올랐다.
더욱 아인슈타인을 기쁘게 했던 것은 그토록 바라던 대학에 자리가 생긴 것이다. 1908년 독일 물리학계의 거물이었던 막스 플랑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베를린대학에서 강사생활을 했으며, 1909년에는 특허국 생활을 청산하고 취리히공과대학 교수가 됐다. 이후 세계적인 과학자의 자격으로 1911년에는 제1회 솔베이회의에 참석했다. 1913년에는 프러시아 과학아카데미 회원으로 뽑혔으며, 같은 해 베를린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그의 마음엔 늘 꺼림칙한 문제 하나가 있었다. 그가 1905년에 제시한 3편의 논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특수상대성이론이다. 사람들은 특수상대성이론이라고 하면 시간여행을 상상하곤 한다. 운동하는 물체의 시간이 느려지기 때문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달리는 기차의 길이는 짧아진다. 예를 들어 1백m 길이의 고속열차가 시속 3백km로 달리면 1조분의 4m 가량 열차의 길이가 준다. 이러한 지식들은 사람들에게 상식처럼 돼 있다. 또 여기서 유도된 질량에너지등가공식(E=mc2)은 물리학과 천문학, 그리고 에너지 개발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특수상대성이론은 말 그대로 특수한 경우, 즉 등속직선운동을 하는 관성계에서만 성립한다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가속운동을 하는 좌표계나 회전운동을 하는 경우에는 맞지 않는 얘기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특수상대성이론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10년 동안 끙끙거려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1915년 11월 25일 중력장 방정식을 완성하고, 이듬해 3월 20일 ‘물리학연보’에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했다.
특수상대성이론이 광속도일정의 법칙을 기준으로 만든 것이라면, 일반상대성이론은 중력과 가속도가 같다는 등가원리에서 출발된 이론이다. 따라서 일반상대성이론을 따르면 중력에 의해 휘어진 공간을 통과하는 것은 질량을 가진 물체든 질량이 없는 빛이든 모두 휘어진다. 그동안 세계를 지배해온 뉴턴의 중력이론이 질량을 가진 물질들의 운동만 설명하는 한계를 일반상대성이론이 뛰어넘은 것이다. 훗날 아인슈타인은 중력이 가속도와 같다는 생각을 끄집어낸 것은 행운이었다고 회고했다. /Google

[1875년] 영국, 이집트로부터 수에즈운하 매수
수에즈 운하의 개착공사에 반대하던 영국은 막상 운하가 개통되자 태도를 바꾸었으며, 1875년에는 이집트 정부의 소유주를 매입하여, 운하의 경영에 대한 발언권을 강화하였다. 영국은 국제적인 요구였던 운하의 중립성 보장과 이를 위한 국제관리안에 반대하였으며, 러시아와 터키가 전쟁 중인 1878년 5월에는 운하 보호를 이유로 포트사이드에 함대를 파견하였다. 이 해에 국제법학회가 전시에도 교전국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국제 관리를 결의하였으나 영국은 이를 거부하였다. 1882년 6월 이집트에서 반제국주의(反帝國主義) 반란이 일어나자 그 진압을 구실삼아 운하지대를 영국의 군사기지로 만들고, 며칠 동안 운하 통과를 중지시켰다. /Google

그밖에
2004년 배용준 일본 방문으로 나리타공항 마비
2002년 미국 '국내안보부 신설' 법안에 부시 대통령 서명
2002년 북한, 금강산 관광특구 첫 지정. 숙박․오락시설 투자허용
2002년 애니카 소렌스탐, 미 LPGA투어 사상 한시즌 11승 대기록 수립
2002년 노무현․정몽준 후보단일화, 여론조사에서 노무현 후보 단일후보로 확정
1996년 일본 동경에 거주하던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세손 이구씨, 국내영주를 위해 귀국
1991년 국산 '창공91호' 시험비행 성공
1988년 한국-폴란드 무역사무소개설협정 체결
1984년 윌리엄 시로더(52), 사상 두번째 인공심장 이식수술
1982년 제일제당 식품연구소, 항암제 인터페론 생산 성공
1982년 일본 나카소네 제11대 자민당 총재에 취임
1980년 경남일보 종간(1909.10.15 창간)
1980년 언론통폐합에 따라 신아일보 등 폐간
1975년 수리남, 네덜란드로부터 독립
1972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법 공포
1965년 콩고에 군부쿠데타. 모부투장군 집권
1964년 월남 사이공서 대규모 학생데모 폭동화. 계엄선포
1961년 소련-알바니아 국교 단절
1959년 강원도 명주군 일가족몰살사건 발생
1956년 미국 샌디애고 근교에 산불. 4만에이커 소실
1950년 중공군-북한군 반격개시
1947년 독일문제로 런던서 4개국 외상회담 개막
1939년 나환자 요양을 위한 소록도 갱생원 완공
1933년 금강철교 준공
1931년 중외일보 해산, 중앙일보 창간
1922년 터키공화국 수립
1914년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 출생
1908년 '크리스찬 사이언스 모니터'지 창간
1894년 근대올림픽 개최 결정
1878년 독일 극작가 게오르크 카이저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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