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9 1월 9일
[1839년] 다게레오타이프 발명 공표
← Louis-Jacques-Mande Daguerre가 다게레오타이프로 찍은 (1837)'고요한 생명(Still Life)', 루이-자크-망데 다게르의 다게레오타이프(은판 사진), 1837
1839년 1월 9일 프랑스의 화가이자 물리학자인 다게르가 다게레오타이프(은판사진)를 발명한 사실을 공표했다. 실물을 영구적으로 기록한 최초의 사진은 1826, 1827년 프랑스의 조제프 니세포르 니에프스가 만들었지만, 질이 좋지 않고 노출시간이 무려 8시간이나 필요했다. 반면에 다게르가 개발한 방법은 노출시간이 20~30분 정도면 충분해서 사진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다게르는 세관관리로 일하다가 오페라 무대배경을 그리는 화가가 되었다. 니에프스는 다게르도 똑같은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1829년부터 헬리오그래피(heliography:사진제판법)의 과정을 다게르와 함께 개발했다. 1833년 니에프스가 죽은 뒤 다게르는 실험을 계속하여 다게레오타이프를 발명했다. 1839년 1월 9일 천문학자이자 물리학자인 D.F.J. 아라고가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서 다게레오타이프를 발표했고 다게르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그의 사진기술은 고더드·톨벗·아처 등의 연구를 거쳐 꾸준히 개선되다가 1870년대에 건판이 발명되면서 대체되었다./브리태니커
[1989년] 서대문 독립공원 착공
일제강점기에 의병투쟁, 3·1독립만세운동, 항일투쟁 등으로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다 순국한 선열들을 기리기 위하여 조성되었다. 이곳의 옥사는 1908년 일제가 침략을 본격화하기 위하여 지은 근대식 감옥으로, 경성감옥이라는 명칭으로 문을 열었는데 항일투사들이 늘어나자 일제가 마포구 공덕동에 새로 감옥을 지어 1912년에 서대문감옥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 후 1923년에는 서대문형무소로, 광복 직후인 1946년에는 경성형무소로, 1950년에는 서울형무소로 바뀌었고 1961년에는 서울교도소로 개칭되었다가 1967년 7월에 서울구치소로 바뀌는 등 여러 차례 그 명칭이 바뀌었다.
개설 당시에는 감방 480평, 청사 및 부속건물 80평으로, 5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다. 당시 전국에 있는 8개 감옥의 총수용인원이 300명이었는데 그에 비하면 엄청난 규모였다. 4·19혁명, 5·16군사정변 등 정치적 변동을 겪으면서 많은 시국사범들이 수감되어 있던 이곳은 도시의 발달로 인하여 구치소 위치로는 적당하지 않아 1987년 11월 15일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갔다. 이때 서울시가 법무부로부터 이곳을 매입하여 1988년 조성공사를 시작하였고, 1992년 8월 15일 광복절 제47주년을 맞이하여 서대문독립공원으로 개원하였다.
공원 규모는 9만 7377.3㎡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그 외 시설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역사전시관, 제9·10·11·12·13옥사와 중앙사, 나병사, 추모비, 사형장, 지하옥사를 포함하고 있고 그 외 시설은 순국선열추념탑, 3·1독립선언기념탑, 독립문, 독립관 등이다.
순국선열들이 옥고를 치른 제10·11·12옥사와 사형장은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었으며 9사, 13사와 구여사(舊女舍) 및 지하감옥은 매몰되었던 것을 복원하였다. 구여사는 1920년 유관순이 고문 끝에 숨진 곳으로 일명 유관순굴이라고 한다. 순국선열추념탑은 이봉창·윤봉길·유관순·안중근 등 애국지사들의 높은 뜻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고 3·1독립선언기념탑은 탑골공원에 있었던 것인데 1992년 복원했다.
사대외교의 상징인 영은문을 헐고 세운 독립문(사적 32)은, 갑오개혁 이후 자주독립의 결의를 다짐하려는 의미에서 만든 기념물이다. 서재필(徐載弼)이 제안하고 국왕의 동의를 얻어 뜻있는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대대적인 호응을 받아 완공하였는데 원래 지금의 위치에서 남동쪽 70m 지점인 도로 가운데 있었으나 1979년 성산대로 건설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옮겨오게 되었다.
영은문(迎恩門)은 1407년(태종 7)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서대문 밖에 세운 사대주의 상징물인데 1896년(고종 32) 김홍집 내각 때에 철거되었다. 지금은 영은문주초(迎恩門柱礎) 2기(사적 제33호)가 남아 있다. 독립관은 조선시대에 중국 사신들에게 영접연을 베풀던 ‘모화관(慕華館)’으로 사용되었던 곳인데, 후에 독립협회가 사무실 겸 집회실로 사용하였다 하여 일제가 강제 철거하였다. 1997년에 목조건물로 복원하여 순국선열들의 위패 봉안과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다. /naver
[1960년] 이집트 나일강 상류에 아스완하이댐(Aswan High Dam) 건설 시작
← The hydroelectric power station of Aswan Dam
높이 111m . 제방 길이 3.6km. 저수량 1,570억m3. 저수지 길이 500km. 아스완 부근 나일강(江) 급류를 막아 건설한 세계 최대의 록필(rock-fill)댐이다. 1902년 영국인이 나일강의 홍수조절과 관개용수 확보를 위하여 아스완에 댐을 만들었는데, 그 후 나세르 대통령이 댐의 상류 7km 지점에 새로이 하이댐 건설을 계획하였다. 1960년에 러시아의 기술 원조로 공사에 착수하였고 1971년에 완공하였다. 고대 이집트의 많은 문화 유적이 물속에 잠길 것에 대비하여 유네스코(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가 중심이 되어 유적의 이전계획이 추진되었다. 그 중에서 최대의 공사는 아부심벨신전의 이전이었다. 이 신전은 BC 13세기에 연안의 절벽을 파서 만든 것으로 높이 20m, 절벽 속의 너비 60m였는데, 신전을 구성하는 바위(砂岩)를 톱질하여 20∼30 t의 블록으로 절단한 다음 저수지의 수면보다 높은 위치로 옮겼다. /naver
[1950년] 콜롬보서 영국연방외무장관회의 개최, 콜롬보계획 결의
콜롬보계획(Colombo Plan)은 남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에 대한 협동적 경제개발을 위한 국제협약으로, 1950년 1월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에서 열린 영연방 외무장관회의에서 캐나다의 제안으로 채택되었기 때문에 콜롬보계획이라고 한다. 당초의 참가국은 영연방 제국뿐으로, 참가국 중 아시아 제국(피원조국)의 생활수준 향상을 위한 식량 ·운수 ·동력이나 교육 ·위생 등의 개발을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이 원조하는 6개년 계획(1951∼1957)으로 발족하였는데, 그 후 수차에 걸쳐 기간을 연장하여 왔다. 피원조국도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거의 전역에 걸쳐 있으며, 또 원조국으로서 미국과 일본 및 동남아시아 각국이 참가한다.
콜롬보계획에는 자본원조계획과 기술원조계획이 있는데, 전지역에 대한 일원적인 개발계획이 아니라 피원조국이 개별적인 개발계획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양국간의 쌍무협정(雙務協定)에 의하여 원조를 제공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기구로는 참가국의 각료급 대표로 구성되는 최고정책 결정기관인 협의위원회가 있어, 연1회 회합하여 계획운영의 개요를 정하는 외에, 하부기구로 기술원조계획의 운영을 위하여 콜롬보에 상설기구로서의 기술협력심의회와 사무국이 설치되어 있다. /naver
[1885년] 한성(漢城)조약 체결
← 전권대신(全權大臣)이 되어 일본의 이노우에 가오루와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한 김홍집.
외세의 힘을 빌어 조선을 개혁하려고 했던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1884년 12월 청군의 도움으로 갑신정변을 진압한 민씨 정권은 예조참판 서상우를 특차전권대신으로 일본에 보내 일본측이 정변에 관여한 사실을 따지며 주동자 김옥균의 소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갑신정변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며 도리어 공사관의 파괴와 일본인 살해를 구실로 조선의 책임을 추궁했다. 양측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자 일본은 2개 대대와 군함 7척을 대동한 외무상 이노우에 가오루를 조선에 파견했다. 결국 두 나라는 조선의 일본에 대한 사의 표명, 배상금 10만원 지불, 일본 공사관 수축비 부담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한성조약을 1885년 1월 9일(음력) 체결했다.
또한 일본은 같은해 4월 18일(음력) 청나라와 조선에서 청일 양국군 철수, 장래 조선에 변란이나 중대사건이 일어나 청일군 어느 한쪽이 파병할 경우 이 사실을 상대방에 알릴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천진조약(텐진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일본에 청나라와 같이 조선에 대한 파병권을 주었고, 10년 뒤 일어난 동학농민운동 때 일본의 파병 구실이 됐다.
[1947년] 독일의 사회학자 칼 만하임 사망
← 사회학자 칼 만하임.
자유방임주의와 파시즘적 독재체제를 모두 거부하며 사회민주주의적 입장에 서서 저술활동을 한 독일의 사회학자 칼 만하임이 1947년 1월 9일 사망했다.
칼 만하임은 189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철학 공부를 시작한 그는 당시 중동부 유럽의 중심지이던 독일로 유학해서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짐멜과 막스 베버, 알프레드 베버 형제 밑에서 공부한 후 1914년 헝가리로 돌아왔다. 만하임은 1919년 다시 독일로 건너가 하이델베르크대학과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연구활동에 전념했다. 이 기간 동안 ‘인식론의 구조 분석’ ‘역사주의’ ‘보수주의적 사고’ 등의 저술을 발표하면서 점차 그의 지적 관심의 중심은 철학에서 사회학으로 이동했다.
그가 초기 학문적 관심사를 집대성한 필생의 역작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를 발표한 것은 1929년이었다. 만하임의 삶에 새로운 지평을 연 것은 1933년 영국 이주였다. 당시 막 집권한 나치 독일을 피하기 위해 선택한 이 결정은 만하임의 지적 관심 분야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는 런던 정경대(LSE)와 런던대 교육연구소 교수로 활동하면서 사회계획과 사회재건을 위한 사회학 발전에 몰두했다.
그가 남긴 ‘재건기의 인간과 사회’ ‘시대진단’ ‘자유, 권력, 민주적 계획’ 등 저술 목록은 그가 독일시절부터 선호하던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고향에서 복지사회 건설을 위해 바친 열정을 잘 보여준다.
[1908년] 보부아르 Simone de Beauvoir 출생
← 보부아르
1908년 1월 9일 태어남 / 1986년 4월 14일 죽음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 시몬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보부아르는 여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프랑스 작가이다. 사립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소르본대학교에 들어갔고 이후 철학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1929년 실존주의를 주도한 장 폴 사르트르와 '계약 결혼'을 시작했으며, 1945년부터는 그와 함께 월간지 <탕 모데른 Les Temps Modernes>을 편집했다. 또한 그녀는 <제2의 성 Le Deuxième Sexe>(2권, 1949)을 통해 '여성다움'을 강조한 전통적 관념에 반기를 들었다. 이 작품은 여성해방문학의 고전이 되었다. 주요 작품으로 <초대받은 여자 L'Invitée>(1943)와 공쿠르상 수상작인 <레 망다랭 Les Mandarins>(1954)이 있다.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본 다양한 철학서적과 평론을 썼으며, 프랑스 지식인들의 생활을 분명하게 드러낸 여러 편의 자서전을 출간했다.
[1901년] 미국의 시사만화가 영(Young, Chic) 출생
← Blondie and Dagwood in 1932. Dagwood grew taller after their wedding a year later.
1901. 1. 9 ~ 1973. 3. 14
그가 그린 만화 〈블론디 Blondie〉는 1960년대까지 세계 전역에서 1,500종 이상의 신문에 연재되었다. 영은 미술가 집안에서 태어나 수년 간 철도사무소의 속기사를 비롯한 여러 직업에 종사했다. 〈부츠와 그녀의 친구들 Boots and Her Buddies〉의 작가 에드거 마틴을 통해 처음으로 만화일을 맡게 되었다. 1920년대 중엽에 뉴욕 시로 이주하여 〈아름다운 뱁스 Beautiful Babs〉 연재물을 잠시 그리다가 이후 6년간 연재만화 〈바보 같은 도라 Dumb Dora〉를 그렸다.
〈블론디〉는 1930년에 등장했는데 처음의 등장인물은 곱슬머리의 예쁜 블론디와 그녀를 찬미하는 구혼자(후에 남편)인 엉망진창의 대그우드 범스테드였다. 그후에 디터스 씨(제멋대로인 사장)와 아기 덤플링(1934 등장), 쿠키(1941 등장), 데이지와 그녀의 강아지들이 추가되었다. 일상생활을 약간 과장해서 묘사하는 상황희극인 블론디는 영화와 텔레비전 및 라디오 연속극으로 각색되었다. 대그우드 샌드위치라는 명칭은 대그우드가 밤참으로 먹었던 두툼한 여러 겹의 샌드위치를 가리키는 것으로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브리태니커
[1867년] 메이지(明治) 일왕 즉위
일본의 제122대 왕 무쓰히토(睦仁)가 1867년 1월 9일 16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이듬해 9월 연호를 메이지(明治)로 고치고 1세 1원제(一世 一元制)를 택했다. 이에 따라 그의 재위기간을 메이지시대라고 부르게 됐다.
메이지천황은 최고통치권자로서 왕정복고를 실현하고 메이지 신정부를 수립하는 메이지 유신이 성공함에 따라 메이지를 중심으로 하는 절대주의적 천황제국가를 완성시켜 나갔다. 특히 제국헌법에서도 왕의 국가통치 대권ㆍ육해군 통수권을 명기했고, 교육칙어에서는 왕이 국민도덕의 중심임을 밝힘으로써 천왕제국가를 유지하는 2대 이념으로 삼았다. 특히 청일ㆍ러일전쟁의 승리는 왕에 대한 국민의 숭앙을 더욱 절대적이게 했던 시대로 만들었다. /naver
[1590년] 프랑스의 화가 시몬 부에(Vouet, Simon) 출생
← 부에가 그린 유화 <풍요>(1630경), 프랑스 파리에 있는 Musee du Louvre 소장
1590. 1. 9 프랑스 파리~1649. 6. 30 파리.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의 회화를 들여왔다. 1612~27년 이탈리아에서 살면서 자신의 양식을 형성했다. 〈연인〉(로마 팔라초 팔라비치니로스필리오시)과 같은 초기 작품들에서 명암을 극적으로 대비시킨 것은 그가 로마에서 카라바조의 제자로서 미술을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성 브루노〉(1620, 나폴리 체르토사 디 산마르티노)나 〈큐피드와 프시케〉(1637, 리옹 미술관)와 같이 1620년 이후에 그린 작품들에서는 인물을 좀더 이상적으로 표현했으며, 볼로냐파의 고전적인 바로크 양식에 따라 그림을 그린 구이도 레니, 구에르치노, 도메니키노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부에의 〈정복한 시간 Time Vanquished〉(1627,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은 카라바조의 명암대조법을 버리고 그의 후기 양식으로 특징지워지는 좀더 고르게 퍼진 흰빛을 사용하고 있다.
1627년 루이 13세의 요청대로 파리에 되돌아와 그의 수석화가로 임명되었다. 그뒤 거의 모든 중요한 그림을 의뢰받았으며 15년 동안 파리의 미술계를 지배했다. 생제르메낭레 성(城)의 장식품으로 계획된 〈풍요 Riches〉(1630경, 파리 루브르 박물관)와 같은 작품들로 큰 영향을 미쳤다. 구에르치노의 〈오로라 Aurora〉에서 따온 실리 성의 작품과 베로네세에서 따온 세기에 저택의 작품(1640경 완성) 등 남아있는 판화 및 패널화를 보면 그가 이탈리아의 환상적인 천장화를 연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밖에 뷜리옹 저택과 뤼에유의 있는 리슐리외 추기경궁에서도 중요한 작품을 맡았다.
〈성 카롤루스 보로메오〉(1640경, 브뤼셀 미술관)와 같은 1630년대초의 종교화들은 한층 발전된 양상과 더불어 절제된 바로크 양식을 보여준다. 〈성모〉(1640경, 잉글랜드 옥스퍼드 애시몰린 미술관)와 〈디아나〉(1637, 런던 햄프턴 코트)는 그의 대표적인 양식을 보여주며, 부드럽고 매끄러우며 이상적인 모델링과 감각적인 형태 묘사, 밝은 색채의 사용 및 뛰어난 기법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1570년] 노보그라드 대학살 시작
1570년 1월9일 러시아 황제 이반4세(Ivan IV, 1530~1584)의 군대가 노보그라드(Novogorad)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기 시작했다. 황제는 노보그라드에 반역의 기운이 감돈다는 말을 듣고 1주일 전에 군대와 함께 이 도시에 도착했다.
군대는 도착 즉시 도시 주변에 나무벽을 쌓고 교회와 수도원을 모두 폐쇄했다. 사람들이 피신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였다. 일부 성직자와 상인들은 황제에게 돈을 바치고 죽음을 면했다. 황제는 그 돈을 군인들에게 나눠 주었다. 곧 시작될 살인 작전에 대한 선금이었다.
살인 파티는 5주 동안 계속되었다. 군인들은 닥치는 대로 죽였다. 황제는 제 군인들이 제 신민을 찔러 죽이고 태워 죽이고 물에 빠뜨려 죽이는 것을 현장에서 지켜보았다.
1월9일부터 2월12일까지 6만 명이 넘는 노보그라드 주민이 학살당했다. 황제는 살아남은 주민들을 ‘사면’한 뒤, 이 학살의 책임은 주민들을 잘못 인도한 노보그라드의 대주교에게 있다고 선언하고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이반4세(1530~1584)는 3세에 즉위한 뒤 51년간 러시아를 다스렸다. 그는 치세 후기에 귀족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극단적인 공포 정치를 펼쳐 ‘무서운 이반(Ivan IV, the terrible)’ 또는 이반뇌제(雷帝)라고 불린다. 폭군들이 드물지 않게 그렇듯, 그도 젊은 시절에는 총명한 군주였다.
어린 시절 중앙 대귀족들의 전횡으로 어려움을 겪은 이반4세는 친정(親政)을 시작한 뒤 지방 귀족층의 도움으로 중앙 귀족을 제압하고 행정ㆍ사법ㆍ군사ㆍ교회제도의 중앙집권화에 힘썼다. 서시베리아를 정복해 동방 진출의 바탕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너무 많이 나갔다.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굳게 신봉한 그는 귀족의 날개만을 꺾은 것이 아니라 신민 전체를 폭정으로 다스렸고, 만년에는 말다툼 끝에 자기 장남을 죽이기까지 했다. /Google
[1396년] 한양성 성곽 완성
1396년(태조 5) 축성되었다. 성벽은 백악(白嶽)·낙산(駱山)·남산(南山)·인왕산(仁王山)의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다. 길이는 영조척(營造尺)으로 5만 9500자, 이 길이를 천자문(千字文)의 97자(字) 구획으로 나누고 매자구간(每字區間) 600자로 하여 백악의 동쪽으로부터 천자(天字)로 시작되었다. 막음은 백악 서쪽의 조자(弔字) 구역으로 끝났다. 이 때 쌓은 성벽은 석성(높이 15자) 1만 9200자, 평지의 토성(土城:下廣 24자, 上廣 18자, 높이 25자) 4만 30자이며, 수구(水口)에는 홍예[雲梯]를 쌓고 좌우에는 석성을 축조하였다. 홍예 높이는 16자, 석성 등을 포함한 길이는 1,050자였다.
성에는 사대문(四大門 : 東―興仁之門, 西―敦義門, 南―崇禮門, 北―肅淸門)과 사소문(四小門:北東―弘化門, 南東―光熙門, 北西―彰義門, 南西―昭德門)을 냈다. 흥인지문(동대문)만은 옹성을 쌓았고 숙청문(숙정문)은 암문(暗門)으로 하여 문루를 세우지 않았다. 공사는 이렇게 끝났으나 남대문은 1396년, 동대문 옹성은 1399년 완성되었다.
1422년(세종 4)의 도성 수축공사 때 토성 부분을 석성으로 개축하였고, 성벽의 수리는 1451년(문종 1)에도 시행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참변을 당하였고 1616년(광해군 8) 일부가 수리되었다. 그 후 1704년(숙종 30), 1743년(영조 19) 부분적 보수를 하였으며, 1869년(고종 6) 동대문의 개축을 끝으로 도성의 수명이 다하였다. 현재는 삼청동 ·성북동 ·장충동 일대에 성벽이 남아 있다. /naver
그 밖에
2003년 두산중공업 노조 전대의원 배달호씨 분신 자살
2001년 동화작가 정채봉 타계
1995년 정부,부동산실명제를 7월1일부터 실시키로 확정 발표
1995년 라오스의 초대 대통령 수파누봉 사망
1993년 아동문학가 방기환 사망
1990년 코메콘(동구경제상호원조회의) 45차 연차총회,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서 개최
1983년 박순천 전 민중당 대표 사망
1982년 일본 최고의 인쇄물인 백만다라니 발견
1980년 한국, 덴마크와 해운협정 체결
1979년 정부, 일본 마이니치(每日)신문의 국내 판매 금지령 발표
1972년 세계최대 여객선 퀸 엘리자베스호 침몰
1969년 문교부, 고등학생-대학생에 군사교련 실시 결정
1966년 나이지리아 수도근방에서 정치적 폭동 발생
1962년 해밀턴 미국 국제개발처 일행 내한
1959년 스페인 댐 폭발. 100여명 사망
1957년 이든 영국 수상, 수에즈전쟁 책임지고 사임
1954년 국제대학 창설
1954년 수단, 알 하즈하리 자치정부 수립
1953년 여객선 창경호 다대포서 침몰. 229명 사망
1947년 독일의 사회학자 칼 만하임 사망
1945년 미국군, 루손섬 상륙
1932년 독일, 제1차세계대전 배상지불 불능 선언
1922년 홍사용, 박종화 '백조' 창간
1913년 미국 제37대 대통령 닉슨 출생
1911년 미국,영국 북대서양어업협정 성립
1908년 청진 개항
1901년 유두포, 최초의 한국 상인으로 하와이에 건너감
1890년 체코의 극작가 겸 소설가 카렐 차페크 출생
1873년 나폴레옹3세 사망
1866년 미국 최초의 흑인 고등교육기관인 피스크대학 개교
1593년 왜병에 함락되었던 평양성 탈환
[1839년] 다게레오타이프 발명 공표
← Louis-Jacques-Mande Daguerre가 다게레오타이프로 찍은 1839년 1월 9일 프랑스의 화가이자 물리학자인 다게르가 다게레오타이프(은판사진)를 발명한 사실을 공표했다. 실물을 영구적으로 기록한 최초의 사진은 1826, 1827년 프랑스의 조제프 니세포르 니에프스가 만들었지만, 질이 좋지 않고 노출시간이 무려 8시간이나 필요했다. 반면에 다게르가 개발한 방법은 노출시간이 20~30분 정도면 충분해서 사진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다게르는 세관관리로 일하다가 오페라 무대배경을 그리는 화가가 되었다. 니에프스는 다게르도 똑같은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1829년부터 헬리오그래피(heliography:사진제판법)의 과정을 다게르와 함께 개발했다. 1833년 니에프스가 죽은 뒤 다게르는 실험을 계속하여 다게레오타이프를 발명했다. 1839년 1월 9일 천문학자이자 물리학자인 D.F.J. 아라고가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서 다게레오타이프를 발표했고 다게르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그의 사진기술은 고더드·톨벗·아처 등의 연구를 거쳐 꾸준히 개선되다가 1870년대에 건판이 발명되면서 대체되었다./브리태니커
[1989년] 서대문 독립공원 착공
일제강점기에 의병투쟁, 3·1독립만세운동, 항일투쟁 등으로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다 순국한 선열들을 기리기 위하여 조성되었다. 이곳의 옥사는 1908년 일제가 침략을 본격화하기 위하여 지은 근대식 감옥으로, 경성감옥이라는 명칭으로 문을 열었는데 항일투사들이 늘어나자 일제가 마포구 공덕동에 새로 감옥을 지어 1912년에 서대문감옥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 후 1923년에는 서대문형무소로, 광복 직후인 1946년에는 경성형무소로, 1950년에는 서울형무소로 바뀌었고 1961년에는 서울교도소로 개칭되었다가 1967년 7월에 서울구치소로 바뀌는 등 여러 차례 그 명칭이 바뀌었다.
개설 당시에는 감방 480평, 청사 및 부속건물 80평으로, 5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다. 당시 전국에 있는 8개 감옥의 총수용인원이 300명이었는데 그에 비하면 엄청난 규모였다. 4·19혁명, 5·16군사정변 등 정치적 변동을 겪으면서 많은 시국사범들이 수감되어 있던 이곳은 도시의 발달로 인하여 구치소 위치로는 적당하지 않아 1987년 11월 15일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갔다. 이때 서울시가 법무부로부터 이곳을 매입하여 1988년 조성공사를 시작하였고, 1992년 8월 15일 광복절 제47주년을 맞이하여 서대문독립공원으로 개원하였다.
공원 규모는 9만 7377.3㎡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그 외 시설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역사전시관, 제9·10·11·12·13옥사와 중앙사, 나병사, 추모비, 사형장, 지하옥사를 포함하고 있고 그 외 시설은 순국선열추념탑, 3·1독립선언기념탑, 독립문, 독립관 등이다.
순국선열들이 옥고를 치른 제10·11·12옥사와 사형장은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었으며 9사, 13사와 구여사(舊女舍) 및 지하감옥은 매몰되었던 것을 복원하였다. 구여사는 1920년 유관순이 고문 끝에 숨진 곳으로 일명 유관순굴이라고 한다. 순국선열추념탑은 이봉창·윤봉길·유관순·안중근 등 애국지사들의 높은 뜻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고 3·1독립선언기념탑은 탑골공원에 있었던 것인데 1992년 복원했다.
사대외교의 상징인 영은문을 헐고 세운 독립문(사적 32)은, 갑오개혁 이후 자주독립의 결의를 다짐하려는 의미에서 만든 기념물이다. 서재필(徐載弼)이 제안하고 국왕의 동의를 얻어 뜻있는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대대적인 호응을 받아 완공하였는데 원래 지금의 위치에서 남동쪽 70m 지점인 도로 가운데 있었으나 1979년 성산대로 건설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옮겨오게 되었다.
영은문(迎恩門)은 1407년(태종 7)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서대문 밖에 세운 사대주의 상징물인데 1896년(고종 32) 김홍집 내각 때에 철거되었다. 지금은 영은문주초(迎恩門柱礎) 2기(사적 제33호)가 남아 있다. 독립관은 조선시대에 중국 사신들에게 영접연을 베풀던 ‘모화관(慕華館)’으로 사용되었던 곳인데, 후에 독립협회가 사무실 겸 집회실로 사용하였다 하여 일제가 강제 철거하였다. 1997년에 목조건물로 복원하여 순국선열들의 위패 봉안과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다. /naver
[1960년] 이집트 나일강 상류에 아스완하이댐(Aswan High Dam) 건설 시작
← The hydroelectric power station of Aswan Dam높이 111m . 제방 길이 3.6km. 저수량 1,570억m3. 저수지 길이 500km. 아스완 부근 나일강(江) 급류를 막아 건설한 세계 최대의 록필(rock-fill)댐이다. 1902년 영국인이 나일강의 홍수조절과 관개용수 확보를 위하여 아스완에 댐을 만들었는데, 그 후 나세르 대통령이 댐의 상류 7km 지점에 새로이 하이댐 건설을 계획하였다. 1960년에 러시아의 기술 원조로 공사에 착수하였고 1971년에 완공하였다. 고대 이집트의 많은 문화 유적이 물속에 잠길 것에 대비하여 유네스코(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가 중심이 되어 유적의 이전계획이 추진되었다. 그 중에서 최대의 공사는 아부심벨신전의 이전이었다. 이 신전은 BC 13세기에 연안의 절벽을 파서 만든 것으로 높이 20m, 절벽 속의 너비 60m였는데, 신전을 구성하는 바위(砂岩)를 톱질하여 20∼30 t의 블록으로 절단한 다음 저수지의 수면보다 높은 위치로 옮겼다. /naver
[1950년] 콜롬보서 영국연방외무장관회의 개최, 콜롬보계획 결의
콜롬보계획(Colombo Plan)은 남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에 대한 협동적 경제개발을 위한 국제협약으로, 1950년 1월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에서 열린 영연방 외무장관회의에서 캐나다의 제안으로 채택되었기 때문에 콜롬보계획이라고 한다. 당초의 참가국은 영연방 제국뿐으로, 참가국 중 아시아 제국(피원조국)의 생활수준 향상을 위한 식량 ·운수 ·동력이나 교육 ·위생 등의 개발을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이 원조하는 6개년 계획(1951∼1957)으로 발족하였는데, 그 후 수차에 걸쳐 기간을 연장하여 왔다. 피원조국도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거의 전역에 걸쳐 있으며, 또 원조국으로서 미국과 일본 및 동남아시아 각국이 참가한다.
콜롬보계획에는 자본원조계획과 기술원조계획이 있는데, 전지역에 대한 일원적인 개발계획이 아니라 피원조국이 개별적인 개발계획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양국간의 쌍무협정(雙務協定)에 의하여 원조를 제공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기구로는 참가국의 각료급 대표로 구성되는 최고정책 결정기관인 협의위원회가 있어, 연1회 회합하여 계획운영의 개요를 정하는 외에, 하부기구로 기술원조계획의 운영을 위하여 콜롬보에 상설기구로서의 기술협력심의회와 사무국이 설치되어 있다. /naver
[1885년] 한성(漢城)조약 체결
← 전권대신(全權大臣)이 되어 일본의 이노우에 가오루와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한 김홍집.외세의 힘을 빌어 조선을 개혁하려고 했던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1884년 12월 청군의 도움으로 갑신정변을 진압한 민씨 정권은 예조참판 서상우를 특차전권대신으로 일본에 보내 일본측이 정변에 관여한 사실을 따지며 주동자 김옥균의 소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갑신정변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며 도리어 공사관의 파괴와 일본인 살해를 구실로 조선의 책임을 추궁했다. 양측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자 일본은 2개 대대와 군함 7척을 대동한 외무상 이노우에 가오루를 조선에 파견했다. 결국 두 나라는 조선의 일본에 대한 사의 표명, 배상금 10만원 지불, 일본 공사관 수축비 부담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한성조약을 1885년 1월 9일(음력) 체결했다.
또한 일본은 같은해 4월 18일(음력) 청나라와 조선에서 청일 양국군 철수, 장래 조선에 변란이나 중대사건이 일어나 청일군 어느 한쪽이 파병할 경우 이 사실을 상대방에 알릴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천진조약(텐진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일본에 청나라와 같이 조선에 대한 파병권을 주었고, 10년 뒤 일어난 동학농민운동 때 일본의 파병 구실이 됐다.
[1947년] 독일의 사회학자 칼 만하임 사망
← 사회학자 칼 만하임.자유방임주의와 파시즘적 독재체제를 모두 거부하며 사회민주주의적 입장에 서서 저술활동을 한 독일의 사회학자 칼 만하임이 1947년 1월 9일 사망했다.
칼 만하임은 189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철학 공부를 시작한 그는 당시 중동부 유럽의 중심지이던 독일로 유학해서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짐멜과 막스 베버, 알프레드 베버 형제 밑에서 공부한 후 1914년 헝가리로 돌아왔다. 만하임은 1919년 다시 독일로 건너가 하이델베르크대학과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연구활동에 전념했다. 이 기간 동안 ‘인식론의 구조 분석’ ‘역사주의’ ‘보수주의적 사고’ 등의 저술을 발표하면서 점차 그의 지적 관심의 중심은 철학에서 사회학으로 이동했다.
그가 초기 학문적 관심사를 집대성한 필생의 역작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를 발표한 것은 1929년이었다. 만하임의 삶에 새로운 지평을 연 것은 1933년 영국 이주였다. 당시 막 집권한 나치 독일을 피하기 위해 선택한 이 결정은 만하임의 지적 관심 분야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는 런던 정경대(LSE)와 런던대 교육연구소 교수로 활동하면서 사회계획과 사회재건을 위한 사회학 발전에 몰두했다.
그가 남긴 ‘재건기의 인간과 사회’ ‘시대진단’ ‘자유, 권력, 민주적 계획’ 등 저술 목록은 그가 독일시절부터 선호하던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고향에서 복지사회 건설을 위해 바친 열정을 잘 보여준다.
[1908년] 보부아르 Simone de Beauvoir 출생
← 보부아르1908년 1월 9일 태어남 / 1986년 4월 14일 죽음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 시몬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보부아르는 여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프랑스 작가이다. 사립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소르본대학교에 들어갔고 이후 철학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1929년 실존주의를 주도한 장 폴 사르트르와 '계약 결혼'을 시작했으며, 1945년부터는 그와 함께 월간지 <탕 모데른 Les Temps Modernes>을 편집했다. 또한 그녀는 <제2의 성 Le Deuxième Sexe>(2권, 1949)을 통해 '여성다움'을 강조한 전통적 관념에 반기를 들었다. 이 작품은 여성해방문학의 고전이 되었다. 주요 작품으로 <초대받은 여자 L'Invitée>(1943)와 공쿠르상 수상작인 <레 망다랭 Les Mandarins>(1954)이 있다.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본 다양한 철학서적과 평론을 썼으며, 프랑스 지식인들의 생활을 분명하게 드러낸 여러 편의 자서전을 출간했다.
[1901년] 미국의 시사만화가 영(Young, Chic) 출생
← Blondie and Dagwood in 1932. Dagwood grew taller after their wedding a year later.1901. 1. 9 ~ 1973. 3. 14
그가 그린 만화 〈블론디 Blondie〉는 1960년대까지 세계 전역에서 1,500종 이상의 신문에 연재되었다. 영은 미술가 집안에서 태어나 수년 간 철도사무소의 속기사를 비롯한 여러 직업에 종사했다. 〈부츠와 그녀의 친구들 Boots and Her Buddies〉의 작가 에드거 마틴을 통해 처음으로 만화일을 맡게 되었다. 1920년대 중엽에 뉴욕 시로 이주하여 〈아름다운 뱁스 Beautiful Babs〉 연재물을 잠시 그리다가 이후 6년간 연재만화 〈바보 같은 도라 Dumb Dora〉를 그렸다.
〈블론디〉는 1930년에 등장했는데 처음의 등장인물은 곱슬머리의 예쁜 블론디와 그녀를 찬미하는 구혼자(후에 남편)인 엉망진창의 대그우드 범스테드였다. 그후에 디터스 씨(제멋대로인 사장)와 아기 덤플링(1934 등장), 쿠키(1941 등장), 데이지와 그녀의 강아지들이 추가되었다. 일상생활을 약간 과장해서 묘사하는 상황희극인 블론디는 영화와 텔레비전 및 라디오 연속극으로 각색되었다. 대그우드 샌드위치라는 명칭은 대그우드가 밤참으로 먹었던 두툼한 여러 겹의 샌드위치를 가리키는 것으로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브리태니커[1867년] 메이지(明治) 일왕 즉위
일본의 제122대 왕 무쓰히토(睦仁)가 1867년 1월 9일 16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이듬해 9월 연호를 메이지(明治)로 고치고 1세 1원제(一世 一元制)를 택했다. 이에 따라 그의 재위기간을 메이지시대라고 부르게 됐다.
메이지천황은 최고통치권자로서 왕정복고를 실현하고 메이지 신정부를 수립하는 메이지 유신이 성공함에 따라 메이지를 중심으로 하는 절대주의적 천황제국가를 완성시켜 나갔다. 특히 제국헌법에서도 왕의 국가통치 대권ㆍ육해군 통수권을 명기했고, 교육칙어에서는 왕이 국민도덕의 중심임을 밝힘으로써 천왕제국가를 유지하는 2대 이념으로 삼았다. 특히 청일ㆍ러일전쟁의 승리는 왕에 대한 국민의 숭앙을 더욱 절대적이게 했던 시대로 만들었다. /naver
[1590년] 프랑스의 화가 시몬 부에(Vouet, Simon) 출생
← 부에가 그린 유화 <풍요>(1630경), 프랑스 파리에 있는 Musee du Louvre 소장1590. 1. 9 프랑스 파리~1649. 6. 30 파리.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의 회화를 들여왔다. 1612~27년 이탈리아에서 살면서 자신의 양식을 형성했다. 〈연인〉(로마 팔라초 팔라비치니로스필리오시)과 같은 초기 작품들에서 명암을 극적으로 대비시킨 것은 그가 로마에서 카라바조의 제자로서 미술을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성 브루노〉(1620, 나폴리 체르토사 디 산마르티노)나 〈큐피드와 프시케〉(1637, 리옹 미술관)와 같이 1620년 이후에 그린 작품들에서는 인물을 좀더 이상적으로 표현했으며, 볼로냐파의 고전적인 바로크 양식에 따라 그림을 그린 구이도 레니, 구에르치노, 도메니키노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부에의 〈정복한 시간 Time Vanquished〉(1627,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은 카라바조의 명암대조법을 버리고 그의 후기 양식으로 특징지워지는 좀더 고르게 퍼진 흰빛을 사용하고 있다.
1627년 루이 13세의 요청대로 파리에 되돌아와 그의 수석화가로 임명되었다. 그뒤 거의 모든 중요한 그림을 의뢰받았으며 15년 동안 파리의 미술계를 지배했다. 생제르메낭레 성(城)의 장식품으로 계획된 〈풍요 Riches〉(1630경, 파리 루브르 박물관)와 같은 작품들로 큰 영향을 미쳤다. 구에르치노의 〈오로라 Aurora〉에서 따온 실리 성의 작품과 베로네세에서 따온 세기에 저택의 작품(1640경 완성) 등 남아있는 판화 및 패널화를 보면 그가 이탈리아의 환상적인 천장화를 연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밖에 뷜리옹 저택과 뤼에유의 있는 리슐리외 추기경궁에서도 중요한 작품을 맡았다.
〈성 카롤루스 보로메오〉(1640경, 브뤼셀 미술관)와 같은 1630년대초의 종교화들은 한층 발전된 양상과 더불어 절제된 바로크 양식을 보여준다. 〈성모〉(1640경, 잉글랜드 옥스퍼드 애시몰린 미술관)와 〈디아나〉(1637, 런던 햄프턴 코트)는 그의 대표적인 양식을 보여주며, 부드럽고 매끄러우며 이상적인 모델링과 감각적인 형태 묘사, 밝은 색채의 사용 및 뛰어난 기법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1570년] 노보그라드 대학살 시작
1570년 1월9일 러시아 황제 이반4세(Ivan IV, 1530~1584)의 군대가 노보그라드(Novogorad)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기 시작했다. 황제는 노보그라드에 반역의 기운이 감돈다는 말을 듣고 1주일 전에 군대와 함께 이 도시에 도착했다.
군대는 도착 즉시 도시 주변에 나무벽을 쌓고 교회와 수도원을 모두 폐쇄했다. 사람들이 피신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였다. 일부 성직자와 상인들은 황제에게 돈을 바치고 죽음을 면했다. 황제는 그 돈을 군인들에게 나눠 주었다. 곧 시작될 살인 작전에 대한 선금이었다.
살인 파티는 5주 동안 계속되었다. 군인들은 닥치는 대로 죽였다. 황제는 제 군인들이 제 신민을 찔러 죽이고 태워 죽이고 물에 빠뜨려 죽이는 것을 현장에서 지켜보았다.
1월9일부터 2월12일까지 6만 명이 넘는 노보그라드 주민이 학살당했다. 황제는 살아남은 주민들을 ‘사면’한 뒤, 이 학살의 책임은 주민들을 잘못 인도한 노보그라드의 대주교에게 있다고 선언하고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이반4세(1530~1584)는 3세에 즉위한 뒤 51년간 러시아를 다스렸다. 그는 치세 후기에 귀족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극단적인 공포 정치를 펼쳐 ‘무서운 이반(Ivan IV, the terrible)’ 또는 이반뇌제(雷帝)라고 불린다. 폭군들이 드물지 않게 그렇듯, 그도 젊은 시절에는 총명한 군주였다.
어린 시절 중앙 대귀족들의 전횡으로 어려움을 겪은 이반4세는 친정(親政)을 시작한 뒤 지방 귀족층의 도움으로 중앙 귀족을 제압하고 행정ㆍ사법ㆍ군사ㆍ교회제도의 중앙집권화에 힘썼다. 서시베리아를 정복해 동방 진출의 바탕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너무 많이 나갔다.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굳게 신봉한 그는 귀족의 날개만을 꺾은 것이 아니라 신민 전체를 폭정으로 다스렸고, 만년에는 말다툼 끝에 자기 장남을 죽이기까지 했다. /Google
[1396년] 한양성 성곽 완성
1396년(태조 5) 축성되었다. 성벽은 백악(白嶽)·낙산(駱山)·남산(南山)·인왕산(仁王山)의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다. 길이는 영조척(營造尺)으로 5만 9500자, 이 길이를 천자문(千字文)의 97자(字) 구획으로 나누고 매자구간(每字區間) 600자로 하여 백악의 동쪽으로부터 천자(天字)로 시작되었다. 막음은 백악 서쪽의 조자(弔字) 구역으로 끝났다. 이 때 쌓은 성벽은 석성(높이 15자) 1만 9200자, 평지의 토성(土城:下廣 24자, 上廣 18자, 높이 25자) 4만 30자이며, 수구(水口)에는 홍예[雲梯]를 쌓고 좌우에는 석성을 축조하였다. 홍예 높이는 16자, 석성 등을 포함한 길이는 1,050자였다.성에는 사대문(四大門 : 東―興仁之門, 西―敦義門, 南―崇禮門, 北―肅淸門)과 사소문(四小門:北東―弘化門, 南東―光熙門, 北西―彰義門, 南西―昭德門)을 냈다. 흥인지문(동대문)만은 옹성을 쌓았고 숙청문(숙정문)은 암문(暗門)으로 하여 문루를 세우지 않았다. 공사는 이렇게 끝났으나 남대문은 1396년, 동대문 옹성은 1399년 완성되었다.
1422년(세종 4)의 도성 수축공사 때 토성 부분을 석성으로 개축하였고, 성벽의 수리는 1451년(문종 1)에도 시행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참변을 당하였고 1616년(광해군 8) 일부가 수리되었다. 그 후 1704년(숙종 30), 1743년(영조 19) 부분적 보수를 하였으며, 1869년(고종 6) 동대문의 개축을 끝으로 도성의 수명이 다하였다. 현재는 삼청동 ·성북동 ·장충동 일대에 성벽이 남아 있다. /naver
그 밖에
2003년 두산중공업 노조 전대의원 배달호씨 분신 자살
2001년 동화작가 정채봉 타계
1995년 정부,부동산실명제를 7월1일부터 실시키로 확정 발표
1995년 라오스의 초대 대통령 수파누봉 사망
1993년 아동문학가 방기환 사망
1990년 코메콘(동구경제상호원조회의) 45차 연차총회,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서 개최
1983년 박순천 전 민중당 대표 사망
1982년 일본 최고의 인쇄물인 백만다라니 발견
1980년 한국, 덴마크와 해운협정 체결
1979년 정부, 일본 마이니치(每日)신문의 국내 판매 금지령 발표
1972년 세계최대 여객선 퀸 엘리자베스호 침몰
1969년 문교부, 고등학생-대학생에 군사교련 실시 결정
1966년 나이지리아 수도근방에서 정치적 폭동 발생
1962년 해밀턴 미국 국제개발처 일행 내한
1959년 스페인 댐 폭발. 100여명 사망
1957년 이든 영국 수상, 수에즈전쟁 책임지고 사임
1954년 국제대학 창설
1954년 수단, 알 하즈하리 자치정부 수립
1953년 여객선 창경호 다대포서 침몰. 229명 사망
1947년 독일의 사회학자 칼 만하임 사망
1945년 미국군, 루손섬 상륙
1932년 독일, 제1차세계대전 배상지불 불능 선언
1922년 홍사용, 박종화 '백조' 창간
1913년 미국 제37대 대통령 닉슨 출생
1911년 미국,영국 북대서양어업협정 성립
1908년 청진 개항
1901년 유두포, 최초의 한국 상인으로 하와이에 건너감
1890년 체코의 극작가 겸 소설가 카렐 차페크 출생
1873년 나폴레옹3세 사망
1866년 미국 최초의 흑인 고등교육기관인 피스크대학 개교
1593년 왜병에 함락되었던 평양성 탈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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