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가미 시리즈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세상은 경계적 세상이다. 이 세상에는 이미 천국도 종말도 우리 가운데에 와 있다. 우리가 스스로의 존엄을 내다 버리고 천해지는 순간 종말은 우리 한 가운데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천국을 산다는 것은 우리 안의 빛나는 그 무언가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그걸 찾는 사람은 <존엄의 길>을 아는 사람이다.
종말을 심판이라고 생각했던 옛 사람들은 심판의 기준을 “존엄의 포기”에서 찾았다. 그래서 대표적인 케이스로 구약성경 이사야 예언서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렇듯이 사람이 스스로 낮아졌고, 인간은 천해졌습니다. 그들을 용서하지 마소서. (이사야 2:9)작성자고미생각작성시간14.12.04
답글칼 라너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을 통해 예수든 야훼든 그를 구세주로 믿느냐의 여부가 구원의 기준이 된다는 통념을 깨버린 것이다. 믿는다면 무엇을 믿어야 할까? 스스로의 존엄을 믿어야 하고 내 이웃의 존엄을 믿어야 하며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존엄도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존엄'으로 대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사실 그것이야말로 구약과 신약을 모두 관통하는 야훼의 정신, 예수의 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이런 가르침이야 말로 유교와 불교, 선교까지도 넘나드는 공통적이요 보편적인 가르침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를 가르치는 종교인들이 과연 얼마나 되던가?작성자고미생각작성자 본인 여부작성자작성시간14.12.04
답글그래서 예수도 비슷한 언급을 했다. “가진 자는 더 받을 것이요, 그렇지 못한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마르 4:21~25)"
스스로의 존엄을 내다 버리고 남이 갖고 있는 것에만 한 눈을 파는 어리석은 자들은 그래서 결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스스로의 존엄과 가치를 바로 세우지 못하는 사람은 그 어떤 종교를 갖고 있다 해도 결코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칼 라너의 신론과 유시민의 무신론이 만난다. 칼 라너가 말했던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무신론을 말하는 유시민 같은 사람들을 껴안는 개념이다.작성자고미생각작성자 본인 여부작성자작성시간14.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