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자연 풍수지리 학회 5차 간산 안내입니다.
비무장지대에 산재된 음택과, 본인의 풍수스승이던 청오 지창룡 선생의 묘택을 돌아보는 연천군 일대로 정했습니다.
민족분단의 상징인 비무장지대는 예전에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모든 마을이 철수되고, 지금은 거의 속살을 드러낸 민둥산이 되어 풍수공부하기에는 금상첨화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곳은 가고싶어도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하여 가기가 어려운 곳인 만큼 모든 회원들의 많은 참여를 바라며, 꼭 신분증(주민등록증)을 지참하시기 바랍니다.
1. 일시 : 2006년 4월 1일 (토요일) 오전 10: 00
2. 집결지 : 태릉역 (오전 10시 소형차량)
- 지하철 6, 7호선 태릉역 하차, 7번 출구
3. 진행 : 碩礎 채영석, 冶丁 김명식
4. 답사지 (답사지는 사정에 따라 순서가 바뀔 수 있습니다)
5. 지참물: 신분증(주민등록증 등)
※ 총무께서는 수고스럽더라도 중식은 김밥이 아닌 도시락(여유 있게)으로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1) 청오 지창룡(池昌龍) 음택
대한민국 최고의 역술인이면서 초대 한국역리학회 회장과 한국역술인 협회 회장을 오랫동안 역임하셨으며, 풍수가로 이름을 날리면서 약관 34세로 동작동 국립묘지를 선정하는 등 국가의 중요한 사업(한강 종합개발 등)에 풍수가로 참여하였다. 그동안 소점한 음택으로는 박정희 전 대통령내외 묘, 이승만 전 대통령 묘, 연세대 총장 백낙준박사 묘, 삼성 이병철 회장 묘, 새한미디어 이창희 묘, 양주시의 홍진기 법무장관 묘, 전 국회의장 이재형 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부친 묘, 미얀마랑군 사태 때, 희생한 장관들 묘 등이다.
청오선생은 말년에 이곳 지정골(지씨 골)에 잠시 거처를 하면서 흩어진 가족묘지 수 십 기를 이곳 묘택 위로 조성해 놓았으며 또한 자신의 사후지지로 이 자리를 선택하였는데, 이곳 터가 명성에 맞는 자리인지 또는 지관들 치고 좋은 자리 못 들어간다는 속설에 맞는 자리인지를 살펴보는 기회이다.
이곳 형국(形局)은 우리 학회의 '박행묵님' 조상묘역과 비슷한, 천상의 옥녀(玉女)가 상제에게 진상을 바치는 옥녀봉반형(玉女奉盤形)이다.
2) 미수 허목 음택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산114 비무장지대 안에 있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대학자로,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현감 교(喬)의 아들로 태어났고, 찬성 자(磁)의 증손이다. 증조모는 양녕대군의 증손 증파수 종암의 딸이고 조모는 강희맹(姜希孟)의 현손 강복의 딸이며, 어머니는 임제(林悌)의 딸이다.
이곳 연천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하였으며, 영남학파의 적통을 이어받은 남인 학문의 거두로 눈썹이 아름다워 호를 미수(眉수)라 하였고, 대령노인이라고도 불렀다.
아버지가 거창현감으로 재직할 때, 남인(南人)의 거두인 정구(鄭逑)로 부터 글을 배웠다. 1626년(인조 4) 유생으로서 동학(東學)의 재임(齋任)을 맡고 있을 때, 인조(仁祖)가 자기의 생부(生父)인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을 왕으로 추증하려 하자 이것을 반대하여 과거 응시를 금지 당하는 처벌을 받았다.
그 일을 계기로 과거와 벼슬에 뜻을 버리고 광주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으며 여러 곳을 이주한 끝에 1646년 연천으로 돌아왔다. 50년(효종 1) 이후 정릉참봉․내시교관․조지서별좌․공조좌랑․용궁현감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거나 곧 사직되었다. 1657년 공조정랑․사복시주부를 거쳐 59년에 장령에 임명되자 상소를 올려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의 정책에 반대하는 등 중앙 정부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효종에 대한 인조 계비 조대비(趙大妃)의 복상 기간을 서인 송시열 등이 1년으로 한 것은 잘못이므로 3년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예송(禮訟)논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좌절되고 삼척부사로 축출되었다.
1674년 효종비가 죽자 조대비의 복제를 송시열 등이 주장한 9개월 복 대신 기년복으로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승리하고, 남인이 집권함에 따라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는 않았다.
1675년(숙종 1)에 산림직인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를 비롯하여 이조참판․우참찬․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됨으로써, 과거를 거치지 않고 진출한 산림(山林) 중에 정승으로 승진한 흔하지 않은 인물이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관작이 삭탈되고 학문과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사상적으로 이황(李滉)․정구의 학통을 이어받아 이익(李瀷)에게 연결시킴으로써 기호 남인의 선구이며 남인 실학파의 기반이 되었다.
묘택 아래에는 이장할 때 출토된 큰 바위를 쪼아만든 전형적인 석관(石棺)이 진열되어 있다.
3) 강회백(姜淮伯) 음택
미수 허목 묘에서 조그만 더 들어가면 비룡상천(飛龍上天)으로 돌출한 산정(山頂)에 특이하게 조성된 묘다. 특출 나게 돌출한 구릉 꼭대기에 조성되어 초행자는 전혀 묘처럼 보이지 않으며, 산정아래에 진응수(眞應水)가 이루어 놓은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산정이 좁아 상석 등은 모두 평지에 있다.
강회백은 고려 공민왕 6년(1357)에 태어나 조선 태종2년(1402)에 죽은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호는 통정(通亭)으로 미수 허목의 외조부(外祖父)이다.
그의 가문은 원래 진주의 토성 사족(土姓士族)이었으나 일찍이 상경종사(上京從仕)하여 연천 지역에 상당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양촌 권근(權近)의 문인으로 1376년(우왕 2)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성균좨주를 거쳐 밀직사의제학, 첨서사사를 역임하였으며, 1388년 창왕(昌王) 즉위 때는 이성계의 장남 이방우(李芳雨)와 함께 명을 다녀왔다.
창왕을 폐할 때 공을 인정받아 1389년 공양왕 즉위 시, 추충협보공신(推忠協輔功臣)이 되었고, 세자사로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이어 판밀직사사에 이조판서를 겸임하였다.
조선이 창건되고, 정몽주(鄭夢周)의 편에 서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을 탄핵하였는데, 1392년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살해당하자 정치적 입장이 어렵게 되었다. 더욱이 동생 회계(淮季)가 공양왕의 공주인 경화궁주(敬和宮主)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던 관계로 이성계 파의 눈밖에 나서 진양에 유배되었다. 공양왕이 폐위되고 동생 회계가 회빈문 밖에서 참형을 당할 때, 연좌(連坐,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하여 특정한 범위의 가족 등이 연대책임을 지는 것)되는 고비를 넘겼다.
조선 태조가 인망이 있다 하여 상중(喪中)의 그를 계림윤에 임명하여, 1398년(태조 7)에 동북면도순문사가 되었다. 문집으로 『통정집(通亭集)』이 있으며, 허목이 그를 위해 지은 「강정당유사(姜政堂遺事)」가 있다.
4)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릉(敬順王陵)
문성왕(文聖王)의 후손(後孫)으로, 927년 후백제 견훤(甄萱)의 침공으로 경애왕(景哀王)이 죽은 뒤 왕위에 올랐다.
재위 때는 각처에서 군웅(群雄)이 할거하여 국력이 쇠퇴하였고, 특히 여러 차례에 걸친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의 기능이 마비되었다. 영토는 날로 줄어들고,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어지자 935년(경순왕 9) 10월에 군신회의를 소집, 고려에 귀부(歸附)하기로 결정하고,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국서(國書)를 가지고 가도록 하여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이때, 그의 아들인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天命)이 있으니, 오직 충신(忠臣)과 의사(義士)와 더불어 민심을 수합하여 스스로 나라를 굳게 하다가 힘이 다한 후에 끝내는 것인데, 어찌 1,000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쉽사리 남에게 내줄 것이랴" 통곡하면서 왕과 이별을 하고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가 마의(麻衣)와 초식(草食)으로 일생을 마쳤다고 전한다.
경순왕은 국가를 내주면서 왕건에게 유화궁(柳花宮)을 하사 받았고, 왕건의 딸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맞았다. 경주(慶州)를 식읍(食邑)으로 하사 받았고, 정승공(政承公)에 봉해졌으며,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에 임명됨으로써 고려시대 사심관제도의 시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