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전포동 추억담

경남공고 과거와 현재 모습

작성자조용만(염직)|작성시간18.10.04|조회수2,344 목록 댓글 2

1971 본관 남편 입구(주 출입구), 왼쪽에 4.19혁명때 경찰의 총탄에 사망한 "강수영 열사 추모비"가 보입니다.

왼쪽 뒤편 신암 팔금산이다

 

1971 본관 서편 입구

 

1960년대 초반, 경남공고 서편 본관앞에 가교사를 지어놓고 생활하던 중앙중학교 옛 모습

 

이땐 염직과 실습공장, 기계과 실습공장 건립 전 입니다.

1964년 12월에 중앙중학교는 부산시립 부전도서관 앞에 새교사를 지어 이사하게 됩니다.

 

'60년대 초중반 경남공고 모습

 

1972 항공사진,  A : 금속과 실습공장, B : 금속과 교실, C : 화기과 실습공장 및 기전과 교실(3층),

D : 화학과 실습실 및 교실, E : 요업과 교실 및 실습공장, F : 체력단련실(보디빌딩). G : 창고

 

1972 경남공고 운동장, 뒤편에 육군 교도소와 병무청이 보이네

그 뒤편 좌측에 백양산 불웅령 기슭, 그 우측옆에 성지곡에서 만덕으로 넘어가는 바람 고개,

중앙에 쇠미산이 보이고 그 우측에 금정산 기슭이 보이네..

 

1972년 서면로타리 주변

 

'80년대 초반 정문

 

'80년대 교정 모습

 

2001년8월 교정 모습 (원본 45회 조인구, 수정 편집 48회 이건희)

 

2010년대 초반 교정

 

2014년 교정

 

지축 탑

 

기술인은 조국 근대화의 기수

 

교훈, 6회 이수종, 7회 김홍래

 

지축인의 긍지, 8회 도종이,  위 2015/08/30  사진들은 23회 다음카페에 응용화학과 오석동 후배님이

올린사진을 가져 왔습니다. 

 

강수영 열사 추모비

 

이하 곤색 글은 이석희 선생님 (본교 3회) 이 쓰신 본교 초기 역사이며 

첨부 사진은 인터넷 여기저기서 수집하여 지명을 기록 했습니다.

 

開校, 光復, 6.25 와 慶工 (1)

우리 모교인 경남공업고등학교의 개교에 관한 역사를 회고해 본다.
본교는 광복1년 전 해인 1944년 4월21일에 부산공립제2공업학교(釜山公立第二工業學校5學年制)로 개교하였다.

당시는 일본의 식민지 시대였는데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전쟁)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기술인력이 매우 부족하였

다. 따라서 기술인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1943년에 일본교육칙령(日本敎育勅令)에 의하여 일본과 조선의 상업계

학교를 줄이고 공업학교를 증설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서 名門 부산제2상업학교(부산상고,5년제)를 폐교하고

그곳에 부산공립제2공업학교(경남공고,5년제)가 개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곳의 位置가 현재의 서면 롯데백화

점자리였다.

 

초대 교장으로 渡邊三吉(와다나베미요시)교장이 취임하고 건축과 1학급 조선과 1학급을 설치하였다. 그때는

부산제2상업학교는 폐교가 되고 학생모집을 중지했지만 재학중인 학생들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2개의 학교가

같이 있었고 오다나베 교장이 2개의 학교장을 겸임을 하였던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은 끝나고 감격스러운 조국의 광복을 맞이하고 日帝의 교육에서 해방이

되었다. 따라서 부산제2상업학교가 다시 개교를 하였고 와다나베 교장은 辭職하였다. 이에 따라서 광복 한달 후

인 1945년 9월 14일부로 부산제1공업학교의 강삼영(姜三榮)교장이 부산제2공업학교의 사무취급을 인계 받고

그 10일 후인 1945년 9월 24일에 김택진(金擇辰)교장이 취임하여 2개의 공업학교를 겸임(兼任)을 하였다.

 

그리하여 부산제1공업학교(현 남부교육청자리)로 학교를 옮겨갔다. 1945년 10월 1일 요업과(窯業科) 1학급을

증설하였다. 그때에는 플라스틱이 나오기 전이어서 주방용기가 도자기제품으로 되었기 때문에 부산지방에 영도

에 大韓陶器를 비롯한 요업공장이 많아서 요업기술자가 많이 요구되던 때였다. 그래서 건축과, 조선과, 요업과

3학급이 설치되었다. 다음해인 1946년 8월 15일에 오계운(吳啓運)교장이 부산제2공업중학교 교장으로 취임

(就任)하고 1946년 9월 7일 校名을 경남공립공업중학교(慶南公立工業中學校 6學年制)로 개명(改名)하였다.

 

校名의 개명은 일제시대때 만든 부산제2학교라는 학교명이 적절하지 못하여 해방이 되면서 교명을 모두다

바꾸었다. 참고로 부산제1공업학교가 부산공업중학교로, 부산제2공업학교가 경남공업중학교로, 부산제1중학교

가 부산중학교로, 부산제2중학교가 경남중학교로, 부산제1상업학교가 경남상업중학교로, 부산제2상업학교가

부산상업중학교로, 부산항(港)여자중학교가 경남여자중학교로 각각 교명을 고쳤던 것이다. 일제시대에는 고등

학교가 없었고 중학교가 4년제 혹은 5년제 등이 있었는데 광복후 1946년에 일괄하는 6년제 중학교로 연장

시켰다. 오늘날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친 학제였다.


1946년 9월 7일 건축과, 조선과, 요업과가 지원학생수 부족으로 이를 폐지하고 화학제품과, 기계과, 염직과

(染色紡織科)를 설치하였다. 당시에는 건축과, 조선과 라는 것이 망치로 나무 집 만들고 나무배 만드는 “노동자”

직업으로 생각했다. 또한 한 構內에 2개의 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았던 것이다. 1946년

9월 20일에 학교를 대연동의 외곽 지역에서 교통이 편리한 초량동 774번지로 이전하였다.

 

그곳은 일제시대에 초량실천상업학교(草粱實踐商業學校 2년제 女商)가 있었던 곳으로 초량 기차역(草粱 汽車驛)

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정면에 오륙도 바다가 바라보이고 뒤에는 구봉산(龜峰山 일명 伏兵山)아래에

숲이 울창한 초량 철도 수원지(현 서중학교,동일초등학교 자리)가 있어 공기 좋고 조용한 곳이었다.

1950년 초량 시절의 경남공업중(경남공고)주변 항공사진

1946년 초량동 시절의 교정 모습. 현 구봉성당 자리 (1967년 초량성당에서 분당)

 

목조로 된 2층의 본교사가 축대(築臺)위에 세워져 있고 그 아래에는 운동장이 있었다. 본관 뒤편에는 정구장과

별관 교실(칸을 틔워서 강당으로 사용함)과 직원 사택이 있었다. 지금은 그곳에 천주교 구봉성당이 세워져 있다.
그때는 교사수가 20명, 학생수가 500명 정도로 사제간에 정의(情誼)가 있고 낭만이 있었다. 학교가 비대하면

사제간의 대화가 없어진다. 특히 학교가 초량 역에 가까워서 통근열차를 이용하는 시골학생들이 많았고 학생

들이 순박하고 성실하였다. 교사들도 훌륭한 분들이 많아서 학생들은 스승을 존경하였다.

 
교가를 작사 작곡하신 김점득(金点得)선생은 밴드부를 만들어서 지도를 하시고 대회 행진을 할 때는 밴드부가

선두에 서서 우렁찬 연주를 하면서 사기를 드높였다. 표옥준(表玉俊 수학)선생은 유도 부를 만드시어 방과후에

몸소 유도복을 입고 학생들을 단련시켰다. 영어를 가르치신 이상찬(李相讚)선생은 콘사이스를 손에 들고 다니

면서 읽으시고, 애써 정확한 영어발음을 가르치셨다. 

 
그때는 일본식 영어를 배워서 ‘택시’를 ‘다꾸시’라고 불렀다. 뒷날 연세대학교 교수로 가셨다. 그때 축구부가

결성이 되어서 각종 대회에 출전했다. 남기택코치(南基澤 경공2회, 해군사관학교, 편풍고 전국우승, 본교 코치)

도 당시에 활약했던 선수였다. 지금 전포동의 학교부지도 이 무렵에 확보하고, 1949년 4월 21일 개교 기념일에

새 교지에 전교생이 가서 기념식수(植樹)도 하고, 잡초가 무성한 운동장에서 축구시합을 하였다. 당시 그 주변

에는 민가(民家)가 없었고 황량한 벌판에 불과 했었다. 간선도로 변에 서면 전차 차고만 덩그렇게 있었다. 지금

은 그곳에 한전사옥(韓電社屋)이 있다. 교지 입구의 동천(東川)하천에는 다리가 없었고, 나무 電柱 두개가 나란

히 걸쳐 있었다.

 

그때는 교통수단이 마차(馬車)나 전차(電車)뿐이었는데 서면 로터리는 시내 전차의 종점 이였고 동시에 동래

전차의 환승점(換乘点)이었다. 마차가 다녔다고 하니 믿어지지 않겠지만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버스를 만들

지도 못하였고 또한 정유회사도 없어서 비싼 휘발유를 수입해야 했기 때문에 ‘휘발유 한 방이 피 한 방울’이라

는 구호가 있을 정도였다. 지금의 동구 범일동 시장 입구가 마차 종점이었다.

 

서부영화에 나오는 포장마차를 조랑말이 끌고 10여명의 사람을 태우고 범일동에서 충무동까지 다녔는데 말

엉덩이에는 말통 주머니를 달고 달렸다. 그러한데 구관(舊館) 언덕길에서는 말 힘이 부쳐서 더 오르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하기 때문에 손님들이 마차에서 내려와서 마차를 밀어 올리곤 하였다. 말에게는 가혹한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서면에서 동래온천장까지는 東萊電車가 다녔다. 단선 철로 위로 전차가 운행되었는데 역마다

멈추어 서서 마주 오는 차가 지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서면로터리에는 전차를 타려고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렸다. 봄가을에는 가족 등반하여 전차도 타고 동래온천을 하는 것이 즐거운 年中行事였다.


특히 겨울철에 서면 먼지바람이 유명했다. 하마정(下馬亭)에서 내려오는 북풍과 낙동강에서 불어오는 서풍이

마주치면서 회오리바람을 만들었다. 박상문(朴相文)선생의 증언(경공 동창회보 창간호에 기載 [옛날을回想하

며])에 의하면 현재의 전포동 학교 부지를 그 당시의 학부모님의 찬조금을 받아 3만평의 적산대지(敵産垈地

일본인 명의의 대지)를 구입했다고 한다.

 

 

開校, 光復, 6.25와 慶工 (2)

1950년 초여름의 일요일 아침에 6.25 동란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아무도 그것이 전쟁인줄 믿지를 않았다. 당시만 해도 개성의 38선 부근에서 인민
군과 국방군 사이에 소규모의 전투가 자주 일어났다.
한때는 인민군 소대가 투항해 온 일도 있었다. 육군 참모총장 채병덕장군은 ‘전쟁이 일어
나면 점심을 평양에서 먹고 저녁을 압록강에서 먹는다’고 豪言壯談을 하였다.
그러한데 인민군이 소련제 전차를 앞세우고 破竹之勢로 내려오자 국방군은 防禦戰을 해보
지도 못하고 후퇴하여 붕괴(崩壞)상태가 되었다.

 
당시에 美軍은 한국에서 모두 철수한 후였고 군사고문단이 잔류하고 있었다.
3일만에 서울이 점령되고 국방군은 하나밖에 없었던 한강철교를 폭파 해버렸다.
인민군은 8월 15일까지 남조선을 해방시킨다는 목표를 세우고 南進을 계속하자 맥아더장군
이 긴급히 와서 전선을 시찰하고 駐日 美軍이 한국에 투입되고 다시 UN군이 각국에서 참전을
하여 겨우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치열한 격전을 벌렸던 것이다.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면서 정부기관과 군부대, 병참부대, 육군 병원이 집결하고 따라서
피난민이 매일 밀려와 인구10만 명의 도시가 갑자기 200만 명으로 팽창하였다.
초량의 校舍는 육군 군악부대에 징발되어 학교의 수업은 중단되고 젊은 교사들은 군에
징집되고 상급학생들은 학도병으로 지원하거나 헌병학교, 통신학교 간부후보학교등에 입학
하여 단기교육을 받은 뒤에 전선으로 配置되어 갔다.

 
低學年 학생들은 비상소집을 하여 군 차량이 질주하는 간선도로에 배치되어 통행인의 교통
정리를 하고, 수영 비행장 건설공사에 학생들이 동원되어 일렬로 길게 서서 장산(萇山)에서
돌덩어리를 운반하는 작업도 하였다.
그때 학생들은 군복을 입고 木銃을 어깨에 매고 군사 교육을 받았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은 學生 敎鍊大會가 남항동 방파제 광장에서 열렸었다.
학교별로 小隊가 참석하여 소대장의 구령에 따라서 制式訓練을 실시하고, 審査官들이 채점
을 하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金鐘元 헌병사령관이 경공 소대 앞에 나타났다.

 
그분은 계급이 대령으로 이 대회의 위원장이다. 레이반 안경을 끼고 붉게 탄 얼굴에 입술
이 앞으로 튀어나오고 우락부락 하게 보였다. 별명이 백두산 호랑이라고 불렸다.
그는 지휘봉을 손에 들고 우렁찬 목소리로 경공 소대를 직접 지휘하였다.
앞으로 갓, 뒤로 갓, 우로 갓, 좌로 갓, 간격 넓혀 갓, 간격 좁혀 갓, 호령 부쳐 뒤로돌
아 갓 하며 숨가쁘게 구령을 하고는 갑자기 그는 슬며시 돌아서는 것이었다.
그러한데 소대가 행진하고 있는 앞에는 바로 바다가 있었기 때문에 선두가 더 이상 나아가
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고 행진이 멈추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후에 학생들은 그때 우리가 바다 속으로 들어갔더라면 1등을 했을 것이라 하며 매우 아쉬
워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서 1950년 10울 5일 학교를 충무동으로 옮겼다.
충무동의 海岸에 있는 부산유지공업소를 실습공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곳의 위치가 바로 남부민 초등학교가 있는 언덕 아래다. 그곳에다 교무실과 교실 4개를
마련하여 학교를 再開하고 학생들을 다시 모으기 시작했다.
1951년 2월 7일에는 전후 복구공사를 할 인력양성을 위하여 토목과 1학급을 증설하고 김기
발(金基發부산공전 교장)선생이 부임하였다.

 
1951년 6월에는 전쟁의 와중(渦中)에 學制가 개편(改編)되였다.
문교부(文敎部)는 일제시대의 학제를 없애고 미국식으로 고쳐서 6년제 중학교를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분리하였다.
이에 따라 경남공업중학교를 없애고 校名을 부산제일공업고등학교(釜山第一工業高等學校)
로 개명하였다.
경남(慶南)이라는 교명이 부산지역과 맞지 않다는 상부의 결정에 따라서 「경남」교명을
가진 학교는 일괄해서 「부산제일」로 고치었다.

 
따라서 중학 1학년, 2학년 학생의 일부는 新設한 영도중학교(현 남중)로 이관하고 남은
학생은 경남공업중학교에서 연차로 졸업하였다.
그때 중학 3학년 학생은 입학 시험을 쳐서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中學 4학년 5학년 학생은
무시험으로 고2, 고3학년에 편입되었다.


그러한데 그 당시 충무동의 학교 수업이라는 것이, 시간표가 제대로 만들어진 수업이 아니
라 敎師가 부족하여 자습도하고, 문달선(文達善)교장선생님은 漢文도 가르치고, 음악도 많
이 배웠다. 음악 담당 김학성(金鶴成)선생은 이름난 바이올리니스트로 바이올린 연주를 하면
서, 아름다운 이태리가곡을 많이 가르쳐 주셨다.

 
에피소드가 있다. 충무동의 실습공장 마당에서 전교생 공쿠르대회가 열렸는데 학생들이 마
치 노래자랑대회처럼 유행가를 자랑스럽게 부르고 앙코르를 요청하면서 흥겨워하였다.
김학성 선생님은 이것을 매우 못 마땅하게 생각하였지만 참고 계셨다. 드디어 심사 결과
가 발표되었다. 1등에 이태리가곡 ‘라파르마’를 고음으로 부른 키가 작은 2학년 학생이
수상하고, 2등에는 우리 민요 ‘배틀 노래’를 부른 3학년 권중환(權重煥)학생이, 3등에는
군가를 씩씩하게 부른 3학년 권종국(權宗國)학생이 각각 상을 받았다.

 
김학성선생은 민요를 부른 학생을 칭찬해 주시고, 한편으로 학생으로써 유행가를 부른 것
을 호되게 꾸짖으셨다. 군가를 부른 권종국 학생은 품행이 올바른 모범 학생으로 국제시장
(도떼기시장)에서 빙수장사를 하면서 열심히 공부를 하여 서울농대 축산학과에 입학하고
뒷날 호주에서 학위도 받아 서울농대 교수가 되었다.

 
충무동의 실습공장 앞에는 푸른 바다가 있어서 여름철에 학생들은 방파제의 맑은 물에서
수영을 즐겼다. 지금은 그곳을 매립하여 魚販場과 냉동공장이 들어서고 어선들이 붐비고
있다.


1949년 3월 26일 오계운 교장이 경남여자중학교로 전출하시고 이상철(李相喆)교장이 취임
하셨다. 오계운 교장은 둥근 얼굴에 안경을 끼고 온화한 분이셨고 이상철 교장은 매부리코
를 하고 곧고 엄한 모습이셨다.
1950년 2월 18일 이상철 교장이 마산고등학교로 전출하시고,
1952년 2월에 문달선(文장達善)교장이 梁山農高로 전출하시고 이영순(李英淳)교장이 취임
하였다. 이영순 교장은 긴 얼굴에 옛날 식 둥근 안경을 끼고 시를 좋아하시어 조례 훈화 때
‘청춘이 가기 전에 백발이 먼저 왔구나’라는 시를 읊으셨다.

 
1951년 10월 1일에 충무동의 실습공장이 협소하여 송도에 假校舍를 착공하였다.
1952년 3월에 제1회 졸업식을 거행하였다. 화학제품과 45명, 염직과 34명 합계79명이었
다. 1회 졸업생 중에서 서울공대 섬유공학과에 이희걸(李晞杰) 임병화(林炳和)씨 등이 입학
했다. 이희걸씨는 한때 모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다. 두분 다 본교 동창회장을 역임하였다.

 
백봉기(白奉基 1회 염직과) 배덕호(裵德浩 2회 염직과 전 삼성염색대표)선배님도 서울에
健在하시며 고령에도 불구하고 재경 지축 동문회에 참석하여 후배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
다.
1952년 5월 1일 토목과를 부산공업고등학교로 이관하면서 토목과 학생과 선생이 부산공고
로 옮겨야 했다. 부산공고는 物理系로 하고 부산제일공고는 化學系로 特性化 하라는 시달에
의한 것이다.


1953년 4월 10일에 충무동 실습공장으로부터 송도 암남동 100번지의 신축 가교사로 학교
를 이전하였다.
남부민동의 송도 윗길에는 천마산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바위가 서 있다. 지금 그 바위 위
에 영도 섬과 남부민동을 연결하는 송전탑이 세워져 있다.

 
影島는 옛날 신라시대부터 유명한 牧馬場이었다. 말들이 너무나 날쌔게 달렸기 때문에 말
의 그림자를 볼 수가 없다고 하여 절영도(絶影島)라 불렸는데 일제시대에 絶자를 떼어버리
고 影島(그림자 섬. 가게시마)로 이름을 고쳐 불렀다.
일본사람의 눈에는 말의 그림자가 있었던 것 같다.
한데 그 무수한 말 중에서 뛰어난 天馬(heavenly horse)가 탄생하였고, 장군이 그 천마를
타고 영도의 봉래산(蓬萊山)에서 남부민동 바위산으로 바다를 건너뛰면서 천마가 놀던 산이
라 하여 天馬山이라는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천마산 바위에는 지금도 그 말의 앞 발자국 2개가 남아있다. 또한 봉래산 동편 바위에 신
발같이 생긴 바위 하나가 놓여있는데 주민들이 그것을 장사 신발 바위라 부르고 있다.
남부민동의 천마산 바위가 주민들로부터 외경(畏敬)의 대상이 되어, 그 바위를 경계로 하
여 바위 남쪽 지역을 암남동(岩南洞)으로 부르고 있다.
암남동에는 송도 해수욕장과 더불어, 해안 풍경이 아름다운 암남자연공원(岩南自然公園)
이 있다.

 

충무동과 송도 시절 경남공고 항공사진 1950년대

 

開校, 光復, 6.25와 慶工 (3)

송도(松島)의 추억

충무동의 실습공장에는 굴뚝이 있었는데 학생들이 묘기자랑을 하듯 녹슨 굴뚝 사다리를
타고 오르기도 했다. 지금은 그 굴뚝이 철거되고 공장건물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고 롯데 델몬트 음료의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공장 앞의 푸른 바다는 매립되어 송도 아랫길 도로가 생기고 냉동공장이 즐비하게 서있다.

1953년 4월 10일에 송도의 신축 교사로 고등학교를 이전하고 충무동 실습공장에는 중학부
3학년이 남았다.
1954년 3월 6일 마지막 남은 3년제 중학부4회 졸업식을 끝으로 하여 3년제 중학교는 폐교
되고 말았다. 그 생활기록부(學籍簿)가 본교의 행정실(서무과)에 보관되어 있다.
암남동 100번지의 교사(校舍)는 송도 해수욕장 뒤편 남향의 양지바른 언덕에 있었다. 송
도 바다가 바라보이고 여름철에는 피서지로 더 없이 좋은 명당자리였다.
서면 부산제2상업학교에서 출발하여 대연동 못골 부산공업학교로, 초량동 실천상업학교
로, 전쟁으로 말미암아 충무동의 부산유지 실습공장으로, 다시 송도 가교사로, 다섯 번째의
학교이동 이었다.
비록 판잣집에 콜타르를 칠하고 양철로 지붕을 덮은 假校舍였지만 갑갑한 천막교실에 비
할 바 없이 좋았다.

학교 이웃에 서울의 창덕여고(昌德女高)가 나란히 있어서 학생들이 더욱 신명이 났었다.
운동장이 없어서 해수욕장 입구의 삼거리 공터에서 아침조례를 하며 학교 앞마당처럼 사용
하였다.
체육을 가르치시던 이근기(李根基)선생은 송도해수욕장의 백사장에서 씨름대회, 수영대회
(水泳大會), 송도-감천간 마라톤대회를 개최하여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송도 해수욕장은 난류가 흘러서 수온이 따뜻하여 학생들이 수영을 많이 하였다.
수영대회는 백사장에서 출발하여 서쪽 포인트를 돌아 동편의 거북섬까지 2km 나 되는 장거
리 원영(遠泳)대회였다. 만약의 사고를 대비하여 곳곳에 보트를 배치하여 탈락하는 학생을
건져 올렸다. 결승점인 거북섬에 도착한 학생들은 상으로 노트 한 권씩을 받았다.
백사장에서 씨름대회도 했다. 전교생이 둘러앉아 응원을 하고 몸집이 큰 선수들이 나와서
샅바를 쥐어 잡고 악을 쓰면서 뒹굴었다.
결승전에는 당당한 체격을 가진 두 선수가 맞붙었다. 3학년 염직과 김종열(金鍾烈 3회)선
수는 김해 명지의 씨름선수라고 했다. 샅바를 잡고 어깨를 밀착하고 굵은 다리에 힘을 주면
서 팽팽하게 힘을 겨루었다. 모두가 숨을 죽으며 긴장하였다. 그 순간 김종열선수가 몸을
백 팔십 도로 회전하면서 순식간에 상대를 넘어트렸다. 와! 하고 환호소리가 울려 퍼졌다.
씨름은 안다리걸기나 들배지기를 하는 것이 보통인데 김종열선수의 상체 돌리기 묘기를 보
고 모두 입을 담을 줄 몰랐다.
이근기선생은 일본체전(日本體專)출신으로 키가 작으신 분이 매우 소탈하시어 학생들이 선
생님께 농을 걸면서 좋아했다. 그 무렵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한국의 서윤복선수가 우승
을 하여 영웅이 되었는데 체육시간에 하시는 말씀이 “서윤복 선수는 단거리 선수처럼 스피
드를 내여 달리다가 뒤따라오는 선수가 보이지 않으면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쉬었다가 또 달
리곤 한다” 고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였다. 그 당시에는 중계방송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엉터리 말씀을 해도 반박하는 학생이 없었다.

그때는 서울의 대학이 부산에 다 모여 있었고 쟁쟁한 선생님들이 본교에 재직하셨다.
제길우(諸吉雨 사회)선생의 지성미 넘치는 강의를 들을 때는 학생들이 자기에게 질문이라
도 던지지 않을까 하여 숨을 죽이며 조용히 하였다. 뒷날 부산대 법대 학장이 되셨다.
원병휘(元炳徽 생물)선생은 집에서 쥐를 키우며 쥐의 생태를 연구를 하시어 쥐 박사라
불렸다. 뒷날 동국대학교 농대 교수가 되셨다. 조류학자 원병오(元炳午)교수의 친형으로
부친도 북한에서 이름난 조류학자로써 비둘기를 날려보내서 부자간의 안부 교류를 했다고
한다.
최내영(崔乃永 화학)선생은 부산대학 교수로 재직하시다가 영화금속대표가 되셨다.
차문성(車文星)선생은 부산대 지질학과 교수가 되셨고,
영어회화를 잘하시던 이경도(李慶道)선생은 뒷날 부산여대 교수가 되셨다.
강의시간에 ‘말이지’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시던 박평주(朴平柱)선생은 還都와 더불어
서울공대 금속과 교수로 복직하시고,
키가 크고 紳士이신 이희수(李喜洙 화학)선생은 이화여대로 가셨다.
서울공대 화공과 출신이신 박재만(朴在蔓)선생은 공업진흥청 표준계량부장으로 가시어
처음으로 공업표준화(KS)의 힘든 작업을 완성하셨다.
이두래(李斗來 기계)선생은 교육청 장학관을 거쳐서 중학교 교장으로 나가셨다.

송도 주변에는 서울에서 피난해온 학교들이 많이 있었다.
남항 방파제 공터에는 용산중고등학교가 있었다. 그 공터 뒤에는 청색 절벽이 있고 바닷물
이 절벽 밑까지 들어와서 길이 없었다. 때문에 학생들은 절벽 밑의 모난 바위를 딛고 다녔는
데 그 길목에 용산고등학교가 있어서 타교생이 지나면 종종 위협을 가하고 충돌이 발생했다.

송도 윗길에는 좁은 산복도로에 송도 충무동사이에 버스가 다녔고 산 중턱에 서울 음대
와 한양공대, 한양공고가 있었다.
송도 남단에 있는 血淸所(국립동물검역소)에는 서울농대가 있었다.
충무동해안가에는 서울 중 고등학교의 천막학교가 있었다. 아침 등교시간에 문앞에 3학년
학생 한 명이 지켜 서서 등교지도를 했는데 학생들이 겸손하고 질서정연한 모습이 존경스럽
게 보였다.

戰時 속의 사회는 도덕 없는 황폐한 사회다. 도둑과 강도가 많아서 밤에는 주민들이 딱딱
이를 두드리며 야경을 했다. 청소년들이 매우 거칠고 난폭하여 청소년범죄가 사회불안의 요
소가 되었다.

시내 교통사정도 대단히 열악하여 전차와 버스가 적어서 사람들은 십리 길을 예사로 걸어
서 다녔다. 학생들은 질주하는 트럭 뒤로 올라타고 또 달리는 차를 밀면서 뛰어 내렸다. 그
래서 학생들만 보면 차가 손살같이 달아났다.

1953년의 여름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사건이 발생했다.
아침 수업시간에 갑자기 하늘로부터 무수한 돌 벼락이 날아와서 유리창이며 학교건물을 파
괴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학생들이 교실 밖으로 나가보니 학교 뒤의 언덕길에 타교 학생
이 새까맣게 서서 돌팔매질을 하고 있었다.
어떤 학생은 날아오는 돌에 얻어맞아 쓰러지고 3학년 김경판 학생은 돌이 얼굴을 때려 코
뼈가 내려앉기도 했다.
일이 다급해지자 급기야 교련교사 서정현(徐正現)선생이 M1 소총을 들고 총구를 하늘로
향해 공포탄을 3발 발사했다.
동시에 학생들이 함성을 지르면서 맨주먹으로 언덕길로 올라가면서 반격을 가하자 그 많
던 학생들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산으로 달아나는 학생을 추격하여 붙잡기도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彼我間에 많은 중상자
가 발생하고 헌병부대가 출동하여 부상학생 수십 명을 트럭에 태워서 육군 병원으로 수송하
였다.

이 사건의 발단은 사소한 학생 충돌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 날 아침에 송도버스 종점에서 본교 1학년 학생이 중동고등학교 학생으로부터 폭행을 당
하고 학교에 오자 그 소식을 들은 2학년 학생 몇 명이 버스종점에 찾아갔는데 가해한 학생
은 보이지 않고 사건과 무관한 중동학생 몇 명에게 폭행을 가했던 것이다.
그 2학년 학생들은 평소에 교실의 천장에다가 샌드백을 달아놓고 권투글러브를 끼고 운동
하면서 건들거리는 학생들 이였다. 억울하게 얻어맞은 중동학생들은 학교에 돌아가자 동료들
에게 보복을 호소하고 이 사실이 전교에 알려지자 호주머니에 돌을 가득 주서 담고 와서 기
습적으로 집단 보복을 하여 어처구니없는 대형 충돌사고로 발전한 것이다.

中東고등학교는 역사가 100년이 되는 명문 사립학교로 삼성그룹 이병철씨를 비롯하여 양주
동, 김지하등 많은 인물을 배출한 학교이다. 한데 이 학교의 기질이 단결심이 강하여 일제시
대부터 일본학생들을 많이 때렸고 타교생이나 동네 불량배들이 중동학생을 한번 건드리고 나
면 떼로 몰려와 복수를 하여 중동학생을 무서워하는 거친 학교라는 말이 있다.

사건이 난 후에 학교가 매우 어수선했다. 신문 방송의 언론사 기자며, 수사관, 국회 진상
조사단이 오고 학생 간부와 교련 교사가 연행되어서 남 부산 경찰서에 구속됐다. 학생들은
성금을 모아서 구속학생을 면담하고 위로하기도 했다.

그러한데 그 사건의 뒤처리가 엉뚱하게도 학생회장에게 그 책임을 덮어 쉬워서 쌍방학교
의 학생회장이 형을 받아 서대신동 형무소에 수감되어 1개월 동안아니 수감생활을 했다.
두 회장은 감방 속에서 극진한 친구가 되었다 한다.

학생회장 이동훈(李東勳 3회 화학과)은 수감 경력 때문에 억울하게도 학교에서 퇴학을 당
했다. 이동훈 그는 두뇌가 명석하고 知德을 갖춘 모범학생이었다.
퇴학을 당한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경 공대에 시험을 보았는데
동경공대에서는 한국인을 입학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다음해에 동경 상대에 입학을 하고 졸업을 하자 日本商業銀行에 입사를 하여 3년간 근무
를 하였다. 주변에서 일본귀화를 권유하자 그는 거절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한국나일론
(코오롱)의 평사원으로 입사하고 경리과장을 거쳐 요직인 기획조정실장(企劃調整室長)에 승
진하였다. 그 후에 원진레이온의 상무로 발탁되어 갔다가 회사가 공해문제로 폐쇄된 뒤로 소
식을 알 길이 없다. 공화당 시절에는 지역발전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한 공로로 통일주체
대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이 지면을 통하여 50년 전 학생충돌로 말미암아 억울하게 퇴학을 당한 그에게 지금이라도
학교에서 명예회복을 시키고 졸업장을 수여하여 주시기를 간곡하게 청원을 하는 바이다.
수년 전에 필자가 동창회 회장님께 청원하여 늦게나마 동창회 회원으로 가입시킨 일이 있
었다.

 

 

開校, 光復, 6.25와 慶工 (4)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여름에는 송도 해수욕장은 인파로 메웠다.
여름철에는 자갈치에서 송도로 가는 배가 있었다.

충무동에서 송도 윗길로 가는 버스가 있었지만 사람들은 LST(상륙정)를 타고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잠시나마 전쟁의 아픔을 잊고 낭만을 느꼈다.

인민군은 결사적인 최후의 공격을 감행하여 낙동강 방어선이 뚫리고 부산 교두보까지
위기에 몰렸다.
부산에서 멀지 않은 물금역이 빨치산에 의하여 방화가 되고 초량 부둣가에 있는 미군
油類 저장소에서 大火災가 발생하고 서면에 있는 조병창이 한밤중에 폭파하면서 포탄
터지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육군 참모총장 채병덕(蔡炳德) 소장은 서부 전선에서 전사했다.

미국은 전쟁경험이 많은 일본 지원병을 참전시키려했지만,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고,만일 일본군이 오면 총부리를 돌리겠디고 얼음장을 놓았다.

그 무렵 갑자기 삼 사십대 남자까지 징집을 하여 일본으로 후송하고 군사훈련을 시켰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고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였다.

이 작전에 한국 해병대를 위시하여 1개 군단의 병력이 투입되었다. 전세는 역전되어
유엔군이 南進하자 인민군은 南北으로 협공을 받아 산악지대로 도피하고 主力은 괴멸
상태에 빠졌다.
대한민국은 기사회생(起死回生)하였다. 죽음 직전에서 살아난 것이었다.

그 무렵에 손석우 작곡의 '戰友'라는 노래가 유행하여 전 국민이 애창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前進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살아진 전우야.

1950년 10월 1일 한국군 단독으로 삼팔선을 넘어 북진을 하고 10월 7일에는 유엔총회
에서 북진 허용 결의안이 통과하여 뒤 따라 미군이 북진하고 적의 배후에 공수부대를
투하하면서 10월 20일에는 평양에 입성하였다.

1950년 10월 26일 국군이 압록강변에 도달하고 북한의 전 지역을 점령하기에 임박
하였다.
맥아더는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이 종결될 것이라고 워싱턴에 보고했다.

이무렵에 중공군이 참전하였다.
모택동(毛澤東)은 미군의 북조선 進入이 중국의 안전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라고 경고
하면서 保家, 援朝, 抗美의 명분을 내세우고,義勇軍의 이름으로 20개 사단을 투입하고
압록강 북편에 다시 병력을 집결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낙후된 兵器와 방망이 수류탄을 허리에 차고 게릴라 전법과 압도적인 人海
戰術을 구사하면서 미군을 괴롭혀,혹한(酷寒)과 험준(險峻)한 북한의 산악지역에서
아군의 퇴로가 차단되고 치욕적인 후퇴를 감행했다.
1951년 1월 4일 서울이 재함락되고 유엔군은 서울 남쪽 50km에서 평택과 원주를 연결
하는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성고하였다.
1.4후퇴과정에서 미 8군 사령관 워커대장이 서울 북방에서 자동차사고로 사망하였다.

후임으로 취임한 리지웨이 중장이 1951년 말에 서울을 재탈환하고 3월 31일에는 임진강
까지 진격하고, 중 동부 전선은 38선 북쪽까지 진격을 하여 덩서로 이어진 155마일
방어선이 만들어 졌다.

맥아더 유엔사령관의 해임

맥아더장군은 침략자 중공군이 개입한 이상 중국 본토의 폭격을 주장하다가 1951년
4월 11일 트루만 대통령에 의하여 전격적으로 직위해임을 당하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이 한구전쟁에서 중공군에게 참패를 하여 敗將
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예편되고 말았던 것이다.

중공군 개입 가능성에 대한 미국의 우려가 있었지만 중국 본토를 통일한지가 1년밖에
되지 않아 전쟁의 여력이 부족하고,또한 장개석의 國府軍이 본토를 진격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입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중공은 공군력을 보유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압도적으로 우세한 미국의 공군력
으로 중공군을 견제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맥아더의 腹案은 압록강 넘어 안전지대에 있는 중공군의 집결지와 보금기지,軍需工場
등을 대대적으로 폭격하고,필요하다면 원자폭탄을 사용하여 적의 戰力을 무력화하는
한편으로 대만에 있는 國府軍을 본토에 상륙시켜서 제2의 전선을 펴자는 것이었다.

그러한데 전면전의 위험을 경계하던 트루먼 대통령은 이것을 받아 들일 수 없었으며,
이에 대하여 영국을 비롯한 동맹국이 깊은 우려와 반대를 하였던 것이다.
중국에 대한 전면전이 시작될 경우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이 자연스럽게 개입할 것
이며 따라서 전쟁은 3차 세계대전으로 발전할 것이다.
더욱이 동맹국이 우려하는 것은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나리라 보고 있었다.
특히 서베를린은 동독의 영토 안에 있는 연합국 점령지로써 만약에 東獨이 그 進入路를
봉쇄한다면 수백만 서베를린 시민은 일시에 독안에 든 쥐의 신세가 되고,물도 전기도
없느암흑세계가 되고 말 것이다.
스탈린은 동유럽 공산국가들을 이용하여 나치 독일에 대한 보복전쟁을 계획하고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더 이상 미군의 희생을 바라지도 않았고 미국내 여론을 감안하여
오히려 한반도로 부터 유엔군의 撤收 案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

휴전회담

1951년 4월에 들어 서면서부터 공산군의 춘계 공세는 70만명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하여
공격하였고, 이에 대한 역공세가 되풀이 되면서 彼我間에 무수한 인명만 손실되는 소모전
이 계속되고 있었다.
따라서 유엔군의 동맹국들은 휴전 기운이 일고 있었던 한편,共産側은 유엔군의 제공권
(制空權)때문에 막심한 피해를 입어 전쟁의 승산이 없음을 인식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부담을 감내하시가 어려운 지경이었다.
그래서 쌍방의 필요성에 의하여 간헐적(間歇的)으로 休戰說이 논의되었던 것이다. 한국
전쟁이 일어난지 만 1년만인 1951년 6월 23일소련 유엔대표인 말리크가 총회연설에서
한국전쟁의 휴전을 제기하였다.
1주일 후에 릿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이 북한의 김일성과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彭德懷)
에 대하여 휴전회담을 제안하였고 이를 共産側이 수락함으로서 7월 10일 부터 開城에서
휴전회담이 열렸다.

회담의 첫번째 쟁점은 양군의 경계선의 책정 문제였다. 미국은 양군의 현 전선에 따라서
결정하자고 주장한 반면에 공산 측은 38선으로 원상회복을 고집하여 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8월 22일에 공산측은 회담의 중단 성명을 내고 회담은 停止되었다.

회담이 중지되자 전투는 다시 격렬해 지고 아군은 '斷腸의 稜線'을 탈환하였다.
2개월간의 회담 정지 후에 유엔군 사령관 릿지웨이의 제안에 따라 10월 25일 부터 휴전
회담은 중립지대인 판문점에서 재개되었다.
공산 측은 휴전선을 양군의 접촉선으로 하자는 유엔군측의 주장에 양보하고 11월 27일
에는 중립국 감시단의 설치에도 동의하였다.

회담의 가장 큰 쟁점은 바로 포로교환 문제였다.
유엔군 측은 포로의 자유 송환을 주장하고 공산 측은 강제송환을 주장하여 서로 의견이
대립되었다.
북한군 포로중에는 많은 한국군 포로가 인민군에게 강제로 편입된 사실과 북한이 점령한
지역에서 민간인을 강제로 징집하여 북한군 포로가 된 사실이 있었다.
또한 북한군 포로와 중공군 포로 가운데는 본국에 다시 송환되기를 거부하는 사실들을
이유로 포로 송환은 개개인의 의사에 따라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송환을 주장하였다.
이에 반하여 공산 측은 모든 포로는 당연히 원 소속 국에 송환되어 야 한다고 주장하며
회담이 또 다시 중단되고 교착상태에 빠졌다.

1952년 5월 7일에 거제도의 포로수용소에서 반란이 일어 나고 수용소의 사령관인 돗드
장군을 포로들이 감금시키고,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들을 위협하고 잔인한 테러를
가하여 결국 유엔군은 반공포로들의 안전을 위하여 격리하여 수용하였던 것이다.

릿지웨이장군이 나토사령관으로 전보되고 클라크 장군이 유엔군 사령관으로 부임하자
회담 재개의 채찍으로 새로운 공격을 시작하고,압록강 수풍댐까지도 폭격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소련의 미그 15기가 등장하여 공중전이 빈번해 졌고 B-26 폭격기를 조종
하던 밴프리트 장군의 아들도 전사하였다.
밴프리트 장군은 미8군 사령관을 지냈고 태능에 있는 육군 사관학교를 처음으로 창설한
사람이다.

1952년 1월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아이젠하워가 당선되었다.
그는 선거 공약으로 한구전쟁을 끝내기로 약속했다. 미국인에게는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른 불만과 한국에 자제를 보낸 미국인의 영향을 받아 停戰을 약속한 공화당후보에게
20년만에 처음으로 정권을 맡겼다.

또 하나의 큰 변화는 1953년 3월 5일에 소련 수상 스탈린이 사망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정전회담에도 새로운 轉機를 맞았다.

1953년 3월 28일에 공산 측은 휴전회담의 재개를 제의하였고 포로송환에 관한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송환을 희망하지 않는 浦虜를 중립국에 맡기자는 새로운 제안을 하였던 것이다.
쌍방은 중립국으로서 인도를 지정하는데 까지 합의하였다.

이때 유엔군이 수용하고 있던 포로는 17만 1000명이었는데 그중 5만 명 정도가 공산국가
송환을 거부하였다. 양측은 현재의 군사 분계선을 경계로 하여 각각 2킬로미의 비무장
지대를 설정하기로 합의했다.

반공포로의 석방

1953녀 3월 이래 휴전회담이 급속히 진행되면서 한국의 휴전반대 저항이 거세게 일어 났다.
중앙동 역전광장과 광복동 시청까지의 대로에는 연일 수천명의 학생과 시민이 휴전반대
시위를 벌렸다. 고등하고,대학교 학생이 스크럼을 짜고서 '북진' '통일' '북진' '통일' 을
외치며 성난 파도처럼 달리면서 목이 터지도록 외쳤다.
그 함성은 한반도의 분단을 논앞에 두고 이것을 막아 보겠다는 민족의 절규이며 몸부림
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은 일종의 자살행위이며 필요하면 한국군 단독으로 전쟁을 수행
하겠다고 공언을 하였다. 수많은 인명과 재산의 손실을 겪고 북한의 침략전쟁을 분단상태
에서 마감한다면 한국의 통일은 좌절되고 앞으로 몇백년간의 분단상태가 계속될 것이고
경제적 자립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공산군의 점령치하에서 강제적으로 의용군으로 징집되었다가 포로가 되었거나,
또 국군 포로로 인민군에 강제 편입되었다가 다시 포로가 된 반공포로를 공산측에 넘긴다는
것은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도저히 받아 들일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미국은 반공포로의 송환을 놓고 한국 정부를 무마하기 위하여 이 승만대통령의 미국 방문
을 초청하였으나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한 채 이승만은 1953년 6월 18일 새벽에 미국에
사전 예고도 없이 부산에 있는 2만 7000명에 달하는 반공포로를 석방시켜 버렸다.
한국군 포로 감시원은 미군 감시원을 총으로 위협하여 엎드려 뻗치게 하고 반공포로들을
일시에 철조망을 넘어서 탈출하게 하였던 것이다.
탈출한 포로들은 감쪽같이 민가에 잠적하고 말았다. 이승만은 이것이 자기의 명령임을
명백히 하고 軍警에 대하여 석방된 포로들을 보호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러한 돌발사태속에서 공산 측은 미국을 이승만과 짜고 하는 공범자라고 맹렬히 비난
하고 휴전 교섭을 파기한다고 하였다.
한편 미국은 이 사건과 관련이 없음을 해명하고,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이 경무대(현
청와대)로 이승만 대통령을 긴급히 방문했다.
각하께서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한 것은 휴전을 원하는 우방들의 노력을 방해하기
위한 부당한 행동이며, 따라서 석방한 포로들을 즉시 체포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만약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워싱턴당국은 한국을 더 이상 도와줄 의사가 없다고 통보
했다.
이날 클라크의 면담은 단지 5분만 에 끝났는데 클라크는 기자들의 질문에 상기된 얼굴로
'오늘의 면담은 감격적이었다'라고 말하고 떠나버렸다.
일설에 의하면 이승만 대통령이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어 클라크사령관을 나가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반공포로의 석방는 참으로 용기있는 역사적 사건이었지만 이승만은 미국과 우방으로부터
자기 고집만 부리는 완고한 노인으로 인식되어 따돌림을 당하였고, 곧 이어서 한국군의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되었다.

1950년대 초반 서면 주변 모습

 

開校, 光復, 6.25와 慶工 (5)

부제: 휴전의 성립과 학교의 전포동 이전

채찍과 당근

2년 동안 백 회가 넘는 긴 회담을 통하여 휴전협정의 조문에 완전히 합의해 놓고 전쟁 종식
의 조인식만 기다리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터졌던 것이다.
그것은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자유세계를 갈망하는 반공포로를 북한으로 강제송환 함으로써
북한정권으로 부터 조국을 배반한 악질 반동분자로 낙인찍혀서 처형되거나 평생을 탄광에서
노예생활을 해야 할 사람들을 이승만이 자유 민주주의의 시민으로 해방시킨 것이다.
또 다른 의도는 대한민국의 온 국민이 반대하는 남북의 분단을 만드는 휴전을 저지하기
위한 비상 수단이기도 한 것이었다.

워싱턴에서는 그만 대경실색하고 이승만에 대한 비난이 전 세계에서 빗발쳤다.
공산주의자들은 "이승만이 휴전을 받아드리지 않는다면 미국이 한국을 조정할 수 있겠는가"
하며 조롱하고 그들은 "殺人者 李承晩"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살인자란 말은 전쟁을 지속시켜서 사람을 죽인다는 뜻이다.
곧 이어 공산군은 우리측의 진지를 향해 최대 최후의 일대 공격을 개시했다. 별안간 뒤통수
를 강타하여 아군은 진지를 몇 마일씩 후퇴를 하고 하루에 천명이 넘는 인명의 손실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들의 주된 공격목표는 중부전선의 한국군에 집중되었다.
그들은 한국군 진지를 집중하여 포격하는가 하면 중공군은 인해전술로 연일 새로운 병력
을 교대하면서 한국군의 진지를 공격했다.
한국군을 돕던 미군 포병부대도 공격을 받아서 포의 지원도 중단되고 말았다.한국군 보병
을 돕던 미군 탱크도 서부전선으로 이동하고, 미군의 공중지원도 미군 진지쪽으로만
지원하고 한국군 쪽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전쟁은 이승만의 말대로 미군의 지원 없이
한국군 독자적으로 싸우게 되었다. 10일간의 최후 공세로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우리측 사망자 수는 1만4천명에 달하고 대부분이 한국군이었다 이때 미국은 아마도 한국군
이 미국의 원조 없이는 어떠한 공세 막아 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북진통일의 희망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하는 것 같았다.
중동부 전선의 산악지대인 철원북방의 백마고지,철의 삼각지대, 양구 동북방의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인제 동북방의 펀치볼 고지,김일성고지,모택동 고지,1211고지등이 치열한 격전
장이었다.

백마고지 전투

강원도 철원군 서북방면에 철의 삼각지대에 있는 해발 395미터의 주봉을 백마고지라 부른
다. 이 산 아래에는 철원 평야가 있다. 이 고지를 빼앗기면 철원평야가 적의 수중에 들어
가기 때문에 이 작은 고지를 놓고 치열한 공방전이 14일간이나 계속하여 한국군이 끝내
고지를 방어했다. 중공군은 야음을 틈타서 물밀 듯 고지로 기어 오르고 백마고지를 점령
하지만 한국군은 즉각적인 재공격으로 다시 탈환한다.
육군 소장 김종오 장군(제 9사단장)은 백마고지 공격에서 진두지휘를 하여 장병들은 죽음
을 무릅쓰고 고지를 점령했다.
이 전투에서 아군의 전사자는 3,500명이고 중공군의 전사자는 8천명이나 되었다.
이렇게 전선에서 한국군의 자꾸만 늘어 나는 손실을 보면서 한편으로 미국은 휴전을 반대
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시키기 위하여 로버트슨 미국무성 극동담당 차관보가 서울에
대통령 특사로 파견되었다.
로버트슨은 소 휴전회담이라고 불린 회담을 12일 동안이나 계속하면서 이 승만의 동의를
얻기 위한 협상을 하였다.

이 대통령은 결국 휴전과 관련하여 중대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 요지는 한국이 국토를
양단하는 휴전협정에 서명할 수는 없지만 그 협정을 동의할 수는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에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12시간 후에 전투는 중지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협정에 참여하지 않았으나,미국으로 부터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
한국군 20개 사단 증강 .전후복구 경제원조,한국통일을 위한 유엔 정치회담등의 약속을
받고 휴전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3년 1개월간의 참혹한 전쟁은 승리도 평화도 없이 휴전으로 마감했다.

아이젠하워 미국대통령은 휴전에 동의한 한국국민에 감사와 위로의 메시지를 발표하고
한국의 전 가정에 미군용 레이션을 1박스씩 선사했다. 한국 국민은 쓰린 눈물을
흘리면서 그것을 먹었다.

휴전이 되면서 1953년 8월 15일 정부가 부산에서 서울로 환도하여 기념식을 올리고
9월 16일에 국회가 서울로 돌아가고 따라서 피난 왔던 학교들도 차례로 서울로 돌아
갔다.

6.25 전쟁은 한국 역사상 가장 비참한 사건이었다. 남북한을 합친 인명피해는 사망과
실종,부상을 합하여 450만명에 이르고, 한국군의 인명 피해가 약 100만 명(전사 22만
7748명), 미군과 기타 유엔군 15만 명(전사 3만6823명), 인민군 60만 명 중공군 90만 명
이나 되었다. 상이군인 50만 명, 전쟁고아도 6만 명 가까이 생겨 났으며,이산가족도
1,000만 명에 이르렀다.
집도 공장도 파괴되고 잿더미 속에서 먹는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휴전이 된 다음해인 1954년 3월 19일에 학교는 제3회 졸업식을 거행하였다.
화학제품과 1학급,염직과 2학급 합계 148명이었다. 학교 운동장이 없었기 때문에 충무동에
있는 광명극장을 대여하여 졸업식을 거행했다.
그 무렵에 부산대학교 공과대학이 처음 신설되어서 화공과 섬유과에 본교 출신이 많이
입학하여 부산공대 1회가 되었다.
신영조(申永祚 2회)씨는 부산공전 교수를 거쳐 부산 공대교수가 되었다. 그때 부산대학
은 대신동 공설운동장 뒤편에 위치한 볼품없는 학교였는데 윤인구 총장이 동래 금정산
자락에 넓은 터를 잡아 학교를 크게 발전시켰다.

3회 졸업생으로 서울공대에 임우홍(林又洪,브라질에서 제조업), 남학우(南學佑,상업은행),
노문섭(盧汶燮,대한중석), 장병규(張丙圭 금강모직 대표) 등이 입학했다.

1954년 12월 18일 이영순 교장선생이 경남 진주고등학교로 전출하고 김택진(金澤辰)교장
이 취임하였다. 김택진 교장은 해방되던 1945년 9월에 본교의 전신(前身)인 부산제2공업
학교가 대연동에서 부산제일공업학교와 함께 있을 때 두 학교의 교장을 겸임한 적이
있었다.

1955년 2월 27일에 제4회 졸업식을 거행했다. 화학제품과 2학급 염직과 1학급 요업과
1학급이었다.
1955년 화학제품과를 응용화학과(應用化學科)로 이름을 바꾸고 광산과(鑛山科) 1학급을
신설했다.
응용화학과 3학급,염직과 1학급, 요업과 1학급,광산과 1학급, 모두 7학급으로 3개학년
완성학급 21학급이 된다.

1955년 5월 10일 교명을 부산제1공업등고등학교에서 경남공업고등학교로 개명하였다.
[부산제1]을 가진 학교는 일괄해서 [경남]으로 환원했다. 부산제1공고,부산제1고,
부산제1상고,부산제1여고가, 각각 경남공고,경남고,경남상고,경남여고로 이름을 바꾸었다.
[부산제일]이라는 이름이 타교에 대하여 우월감을 과시하고 위화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55년 6월 21일 김 택진교장이 부산대학교 공대로 전출하고 설동관(薛東棺) 교감이 교장
서리(署理)로 취임하였다.

1955년 8월 1일 전포동에 있는 학교부지를 군으로 부터 인수를 받았다. 그곳에는 전쟁 중
에 영국군 보병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고 영국부대가 귀국
하였다.
영국보병은 군기가 매우 엄격하여 법을 어긴 병사는 완전 무장을 하고 운동장을 돌면서
구보를 했다고 인근 주민이 말하고 있다.
전포동 학교 부지가 4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운동장 위의 터에 가교사 2동 20개
교실과 화장실 2동을 신축하면서 1955년 8월 25일에 추억이 담긴 송도 가교사를 떠나서
학교를 전포동으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이곳이 오늘날 경남공고의 터전이 되었던 것이다.

육이오 전쟁이 벌써 반세기가 지나고 전쟁을 체험하였던 세대도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그들은 전쟁의 비극을 몸으로 체험하고 후손에게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

역사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대비하여라 위기(Risk)에 대비하여라.
강대국들이 2차 대전의 말미에 서두른 정치적 결정에 따라 38선의 분단이 생기고, 우리가
군사적 대비와 집단안보의 구축이 미비하였기 때문에 전쟁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사전에 북한군에 대한 군사방어망을 구축하고, 밖으로는 외교적으로 집단 안보체제
를 구축하여, 미군 1개 사단만 주둔시켰더라도 전쟁은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스탈린도 토를 달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대한민국을 멸망으로 부터 구해준 미국을 배척하지 말아야 하고, 미국과의 동맹이
대한민국의 안전과 경제발전에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06.8.14 (끝)

 

서면로타리 주변 모습들

1962.1.25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부산 방문 행렬이 태화극장앞을 지나가고 있다.
서면로타리 부산탑 건립전이다(부산탑 1963년 건립), 태화극장도 완공 직전이다(태화극장 1962년도 중반 준공)

 

1967.3.4 서독 뤼브케 대통령 방문 행렬이 동보극장앞을 지나고 있다.(문정왕후 영화광고판이 보인다)

 

1967.3.4 서독 뤼브케 대통령 방문 행렬이 태화극장앞을 지나치고 있다.

 

1980년대 중반 태화쇼핑 앞, 뒤편 서면로타리에 부산탑이 보이지 않는다. 지하철1호선 건설관계로 1982년 부산탑을 철거했다.

고려예식장이 눈에 들어온다. 1981년3월 저기서 결혼식을 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조용만(염직)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8.10.05 1972 항공사진, A~G 까지 무슨 건물인지, 댓글 좀 달아 주세요..
    나는 요 생각이 잘 안 나네요
    본관과 본관앞 정원, 염직과 실습공장,운동장,농구장 쪽으로 많이 다니고
    본관 뒤편 쪽은 몇번 안 다녀봐서..^.^
  • 작성자김동관(기전) | 작성시간 19.03.07 내 기억으로는 A : 금속과 실습공장, B : 금속과 교실, C : 화기과 실습공장 및 기전과 교실(3층), D : 화학과 실습실 및 교실이며 E, F는 요업과 친구들이 잘 알겠지만 E : 요업과 교실 및 실습공장, F : 체력단련실로 기억함. G : 창고(?)가 아닐까?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