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가
아침안개 흩어진 황령산 아래
우뚝솟아보이는 우리들의 학원
신선하고 아름다운 배움의 길을
넓게 깊게 배워나가자
빛내자 빛내자 영원히 빛내자
우리들의 모교 경남공업고등학교
교가(校歌)에 얽힌 이야기
교가는 그 학교의, 기상을 상징하는 노래이다. “신선하고 아름다운 배움의 길을 넓게 길게 배워나가자” 교가의 핵심 되는 가사이다.
본교의 교가를 작사, 작곡하신 김점득(金点得)선생님은 교가를 부를 때는 장엄하고 씩씩한 기분으로 불러야 한다고 하셨다.
선생님은 언제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학생을 맞이하셨고 학생들에게 음악뿐만 아니라 높은 인격의 감화를 주신 훌륭하신 스승이셨다.
바리톤 김점득선생님은 고향이 경남 의령 출생으로 일찍이 일본 고등 음악학교를 거쳐 동경 중앙음악학교를 졸업을 하시고
木下淸, 下八川圭祐, Arnold bauer 선생으로부터 성악을 배우시고, 音樂美學을 牛山充, 湯淺永年 선생에게서 가르침을 받으셨다.
광복 다음해인 1946년 8월 31일 본교에 부임하셨다. 선생님은 그의 젊은 열정을 교육에 쏟으셨다. 학생들에게 굶직한 목소리로
“코오르위분겐”을 가르쳤고 자비(自費)로 값비싼 악기를 구입하여 밴드 부를 지도하시고 학생들과 같이 공도 차면서 축구도 하시고
정구장에서 교사 테니스 시합도 하시며 동료교사간에 신망도 높으셨다.
1947년에는 “독일 가곡의 밤” 독창회를 발표하시고 사회적으로도 폭 넓은 음악 활동을 하시었다. 그때 부산 문화협의회 회장, 음악가
동맹 회장에 추대되시기도 하셨다. 김 선생님은 봉급을 예술동호인의 찻 값으로 쓰시고 가사(家事)는 사모님이 친정의 도움을 받아서
뒷바라지를 하셨다고 한다. 처가(妻家)가 삼천포에서 부유한 집안이었다고 한다.
풍문에 의하면 김 선생님이 좌익 사상 관계로 곤욕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사실은 광복직후 지식인들이 진보적 사상을 가진 사람이
많아서 김 선생님의 원만한 성격 때문에 서로 교류한 일이 있어서 요사찰(要査察) 대상이 되어 몇 번 문초를 받은 일이 있었으나
좌경사상에 말려든 바는 없었다고 술회(述懷)하셨다.
그 후에 6.25 전쟁 중에 처가인 삼천포에서 내조자이신 사모님과 아들을 일시에 잃는 비극을 당하시고 그 충격으로 입산하셨다는 말이 있었다.
그 후에 친구분의 권유로 경남 칠원 중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시다가 다시 부산으로 와서 부산고등학교 및 부산사대(釜山師大)에서
3년간 재직하시었다. 그 무렵에 같은 음악인(音樂人)과 재혼을 하셨다., 1957년에 부산 문화예술의 창달에 끼치신 공헌으로
제 1회 부산시 문화상(예술분야)을 수상하셨다.
서울에서는 음악 평론, 저술, 문하생 지도 등 원로 음악인으로 활동을 하시었다. 著書로 ‘韓國歌曲全事’ ‘世界名歌153’ ‘音樂大事典’
(편집의원)이 있다. 성악 문하생 발표회도 6회나 하시고 테너 엄정행씨(경희대 교수)등 많은 후배 성악인을 지도하셨다. 본교 5회
동문이신 임종길(林鐘吉 전 釜山市響 부 지휘자 신라대 교수)씨도 재학 시부터 師事하였다 한다.
1979년에는 60세의 노령에도 왕성한 정열로써 서울, 부산, 마산, 삼천포, 진주 등지에서 ‘바리톤 김점득 독창회’를 공연을 하시어
음악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당시 서울의 장충동 국립극장 소 강당 독창회 때, 재경 동문회 하은구 총무님과 필자가 각각 화분을
마련하여 축하를 드렸었다. 김 선생님은 한국가곡을 통하여 韓國美의 發見과 音樂美學의 創出로 깊은 餘韻을 남기시었다.
선생님은 경남공고에 재직하실 때를 회고하시면서 ‘나의 첫 부인 학교이며 잊을 수 없는 곳이다. 사제간에 정의(情誼)가 두터웠고
이상을 가지고 실천했다고 하시며 ‘그때 교육은 낭만주의적인 훈풍(따뜻함)이 있었다. 교육은 서정적(敍情的)인 인간성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고, 정서교육을 통하여 인간회복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현대사회의 지나친 물질주의(物質主義)를 염려하신다.
선생님의 인생관은 ‘일제시대에는 민족의식과 조국의 독립의 목표였지만 지금은 긍정적이고 성실한 자세가 나의 모토(좌우명)이다.
사는 보람을 느끼며 죽는날 까지 꾸준히 (노래를) 계속하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고 마음속의 생각을 말씀하신다.
선생님은 연세보다 월씬 젊게 보여져서 건강에 대한 비결이 무엇인지를 여쭈어 보았다. ‘젊은 시절부터 축구선수로 뛰고 운동도 하고
지금도 아침 일찍 일어나서 남산 약수터까지 산택을 한다’고 하신다. 꾸준한 운동과 마음의 평화가 건강의 비결인 것 같다.
교가(校歌)의 작곡에 관한 이야기를 여쭈어 보았다.
교가의 가사(歌詞)를 처음에 국어선생인 최두고 선생(전 국회의원, 동성학원 이사장)에게 작사를 부탁했는데 미루어와서
김 선생님이 손수 작사 작곡을 하셨다고 한다. 그 당시에 선생님이 해운대에서 초량역까지 기차로 통근을 하셨는데 기차 속에서
곡을 만드셨다고 한다. 그때는 학교가 초량의 복병산 수원지 곁에 있었고 오륙도 바다가 내려다 보였다.
동경 유학시절에 명문(名門) 동경일고(東京一高) 교가가 좋아서 머리에 연상(聯想)되어서 좋은 교가를 만들어 보겠다고 하시고
무척 고심을 하여 곡을 만드셨다고 한다. 현재의 교가가 옛날 것과 달라진 부분이 있어서 악보를 드렸더니 몇 번이나 피아노를
치시면서 수정을 하여 며칠 뒤에 편지로 보내주셨다. 수정된 악보를 음악교사인 강기성 선생님에게 전달하고 착오가 없도록
부탁드렸다. 학교가 바뀌면서 가사도 바뀐 것이 있다.
복병산(초량)이 황령산(전포동)으로 되고 경남공업중학교를 경남공업고등학교로 고치게 되었다.
끝으로 학생들에게 당부하는 말로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과학뿐만 아니라 바이올린 연주에도 조예가 깊었다.
공고 학생이지만 정서적인 공부도 하여 인간성을 넓히기를 바란다’고 당부하신다.
선생님은 사모님과 함께 서울 중구 쌍림동에서 살았는데 그 후에 경기도 부곡의 시골마을에 아담한 집을 지으시어 전원생활로
돌아갔다. 살아 계신다면 올해에 연세가 88세가 된다. 이 글은 필자가 1974년에 동창회보 창간호에 ‘스승의 모습 교가 작곡자
김점득선생’ 제목으로 지개했던 글을 옮긴 것이다.
後記 : 1979년 5월 19일(토요일) 오후 19:00시 서울 국립극장 소 강당과 1980년 4월 23일(수요일) 오후 19:00시 부산시민회관
소 강당에서 독창회 때 필자가 김점득 선생님의 귀중한 노래를 녹음을 한 것이 있다. 그 때의 앙코르 송을 노래와 함께 소개한다.
이 노래는 아직껏 어떤 성악가도 불러본 적이 없고 처음 들어보는 노래로 한국적 음악미(音樂美)와 여운이 남는 노래이다.
갓모를 잊고 (알코르 송 가사)
여봐라 저 하늘에 흰 구름도 쉬어 넘는 높디높은 추풍령
추풍령 저 주막에 갓모를 잊고
어허…. 가랑비 오락가락
갓모 없이 비에 젖는 이내 모습이
추풍령 천리 길을 혼자 넘겠네.
(주: 갓모: 옛날 남자가 머리에 쓰던 말총으로 만든 모자
갓모는 햇빛도 가리고 비가 오면 우산도 되는데 나그네가 주막에서 갓모를 두고 나와 가랑비를 맞고 상투와 얼굴에 빗물이
흘러내리면서 초라한 모습으로 비틀거리며 산길을 넘고 있다.)
2006. 1. 1 이 석 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