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갈루아의 일화들... "천재들의 수학 노트" 에서.
1. 갈루아의 첫번째 논문을 프랑스 과학원의 심사위원이었던 코시가 잃어버렸다?
☞ 갈루아는 그의 짧은 평생을 두고 몰두하였던 주제인 방정식의 대수적 해법에 관한 첫번째 논문을 프랑스 학술원에 제출하였는데,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코시는 갈루아의 논문을 검토하고서 그에게 아벨의 논문을 연구해 보도록 충고하였다.
또, 코시는 갈루아의 논문이 가진 중요성을 즉각 알아차리고 학회에서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불행히도 발표 당일 몸이 좋지 않아 불참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논문을 보완하여 곧 있을 프랑스 학술원 논문 공모에 응해 보라며 갈루아에게 논문을 돌려주었다고도 하는데,
실제로 그가 같은 주제로 논문을 응모하였던 것을 보면 이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
2. 갈루아가 에콜 폴리테크닉에서 떨어진 것은 갈루아가 시험관의 얼굴에 칠판지우개를 집어던졌기 때문이다?
☞ 갈루아는 아버지가 기독교 사제의 모함에 빠져 목을 메어 자살한 후에 에콜 폴리테크닉에 두번째 도전을 하게 된다.
"조제프 베르뜨랑"의 기록에 따르면, 갈루아는 증명을 해보라는 시험관에게 자명해서 증명할 것이 없다고 답하였다고 한다.
이런 식의 불성실한 대답이라면 그 시험의 결과가 어떨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3. 갈루아는 "정체불명의 여인" 으로 인한 결투에서 죽음을 맞이했는데, 그 "정체불명의 여인"은 창녀였다? 또는 정부에서 고용한 비밀경찰이었다?
☞ 갈루아의 편지를 조사하였던 학자들은 그 정체불명의 여인의 이름은 "스테파니 뒤모텔"이고 교양있는 집안의 딸이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갈루아가 수감 생활을 할 무렵 파리에 콜레라가 창궐하자 프랑스 정부는 죄수들을 "시외르 폴트리에" 라는 곳으로 이송하게 된다.
그때 그곳에서 살고 있던 스테파니 뒤모텔은 의사였던 아버지를 도와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고 갈루아와의 만남은 그때 이루어진다.
4. 갈루아의 결투 상대는 비밀경찰이었다?
☞ 대체적으로 페르쇠 데르뱅빌 또는 뒤샤틀레 둘 중 한사람으로 수학자들은 의견을 모으고 있다.
어째거나 두 사람 모두 갈루아와는 절친했던 친구들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결투에는 두자루의 권총 가운데 하나만 장전이 되어있었다고 한다.
차마 친구사이에서 서로 총질을 할 수는 없었던 것일 것이다.
물론 빈 총은 갈루아가 선택하게 되었고, 갈루아는 복부에 총을 맞고 과다 출혈로 죽었다.
5. 갈루아는 결투 전날에 자신의 이론을 처음으로 정리하였다?
☞ 아무리 천재라 하여도 하룻밤 사이에 이론의 전모를 기술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갈루아의 이론은 이미 그가 썼던 이전 논문들에 그 아이디어들이 충분히 제시되고 있었다.
코시, 푸리에, 푸아송에게 제출하였던 논물들이 그것이고, 그 논문들은 대부분 출판되었었다. 물론 그 가치를 알아차리는 수학자가 거의 없었을 뿐이었다...
6. 만약 갈루아가 그 결투에서 죽지 않았다면?
☞ 수학과 학생들끼리 흔히 하는 농담 가운데 하나가 "갈루아가 결투에서 죽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가" 하는 것이다.
대수학의 분량이 엄청나게 많아졌을 것이라는 의견이 대부분이고, 그때 안죽었으면 내가 죽였을거라는 극단적인 말도 나온다...
그러나 저자("박부성"님)가 들었던 가장 그럴듯한 대답은 "그는 아마 그 다음 결투에서 죽었을 것이다"였다.
이것이야말로 인생을 한 순간 불꽃처럼 소진해 버린 불행한 운명의 소유자 갈루아에게 걸맞는 대답이 아닐까.
1. 갈루아의 첫번째 논문을 프랑스 과학원의 심사위원이었던 코시가 잃어버렸다?
☞ 갈루아는 그의 짧은 평생을 두고 몰두하였던 주제인 방정식의 대수적 해법에 관한 첫번째 논문을 프랑스 학술원에 제출하였는데,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코시는 갈루아의 논문을 검토하고서 그에게 아벨의 논문을 연구해 보도록 충고하였다.
또, 코시는 갈루아의 논문이 가진 중요성을 즉각 알아차리고 학회에서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불행히도 발표 당일 몸이 좋지 않아 불참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논문을 보완하여 곧 있을 프랑스 학술원 논문 공모에 응해 보라며 갈루아에게 논문을 돌려주었다고도 하는데,
실제로 그가 같은 주제로 논문을 응모하였던 것을 보면 이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
2. 갈루아가 에콜 폴리테크닉에서 떨어진 것은 갈루아가 시험관의 얼굴에 칠판지우개를 집어던졌기 때문이다?
☞ 갈루아는 아버지가 기독교 사제의 모함에 빠져 목을 메어 자살한 후에 에콜 폴리테크닉에 두번째 도전을 하게 된다.
"조제프 베르뜨랑"의 기록에 따르면, 갈루아는 증명을 해보라는 시험관에게 자명해서 증명할 것이 없다고 답하였다고 한다.
이런 식의 불성실한 대답이라면 그 시험의 결과가 어떨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3. 갈루아는 "정체불명의 여인" 으로 인한 결투에서 죽음을 맞이했는데, 그 "정체불명의 여인"은 창녀였다? 또는 정부에서 고용한 비밀경찰이었다?
☞ 갈루아의 편지를 조사하였던 학자들은 그 정체불명의 여인의 이름은 "스테파니 뒤모텔"이고 교양있는 집안의 딸이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갈루아가 수감 생활을 할 무렵 파리에 콜레라가 창궐하자 프랑스 정부는 죄수들을 "시외르 폴트리에" 라는 곳으로 이송하게 된다.
그때 그곳에서 살고 있던 스테파니 뒤모텔은 의사였던 아버지를 도와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고 갈루아와의 만남은 그때 이루어진다.
4. 갈루아의 결투 상대는 비밀경찰이었다?
☞ 대체적으로 페르쇠 데르뱅빌 또는 뒤샤틀레 둘 중 한사람으로 수학자들은 의견을 모으고 있다.
어째거나 두 사람 모두 갈루아와는 절친했던 친구들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결투에는 두자루의 권총 가운데 하나만 장전이 되어있었다고 한다.
차마 친구사이에서 서로 총질을 할 수는 없었던 것일 것이다.
물론 빈 총은 갈루아가 선택하게 되었고, 갈루아는 복부에 총을 맞고 과다 출혈로 죽었다.
5. 갈루아는 결투 전날에 자신의 이론을 처음으로 정리하였다?
☞ 아무리 천재라 하여도 하룻밤 사이에 이론의 전모를 기술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갈루아의 이론은 이미 그가 썼던 이전 논문들에 그 아이디어들이 충분히 제시되고 있었다.
코시, 푸리에, 푸아송에게 제출하였던 논물들이 그것이고, 그 논문들은 대부분 출판되었었다. 물론 그 가치를 알아차리는 수학자가 거의 없었을 뿐이었다...
6. 만약 갈루아가 그 결투에서 죽지 않았다면?
☞ 수학과 학생들끼리 흔히 하는 농담 가운데 하나가 "갈루아가 결투에서 죽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가" 하는 것이다.
대수학의 분량이 엄청나게 많아졌을 것이라는 의견이 대부분이고, 그때 안죽었으면 내가 죽였을거라는 극단적인 말도 나온다...
그러나 저자("박부성"님)가 들었던 가장 그럴듯한 대답은 "그는 아마 그 다음 결투에서 죽었을 것이다"였다.
이것이야말로 인생을 한 순간 불꽃처럼 소진해 버린 불행한 운명의 소유자 갈루아에게 걸맞는 대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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