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우스 ( Carl Friendrich Gauss / 1777~1857)
10803 강태일
독일 브룬스빅의 가난한 집안에서 일용 노동자인 아버지와 농부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가우스는 일생동안 가난과 싸워야 했지만 오늘날까지 모든 수학자들의 왕으로 추앙 받고 있다. 그는 독일 수학의 본거지 괴팅겐 대학을 다녔고, 1830년 무렵부터 이 대학에서 가르쳤다.
가우스는 수리론, 기하학, 확률과 통계를 체계화했으며 천문학과 전자기학에도 주요한 공헌을 했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한 선구적 이해는 가장 두드러진 업적의 하나였다. 어떤 이는 "지금도 수학자들에게 역사상 가장 저명한 수학자 세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어김없이 아르키메데스와 아이작 뉴턴, 그리고 가우스가 뽑힐 것이다"라고 썼다.
초등학교 때 1부터 100까지 더하도록 시키자마자 바로 답을 구하였다고 한다. 다른 학생들이 1+2+3+....9를 계산하는 동안 가우스는 1+100, 2+99, 3+98,...50+51과 같은 식으로 하여 101*50=5050의 정답을 구했던 것이다.
그의 수학발견의 대부분은 14세에서 17세 사이에 이루어졌다. 그는 산술과 기하평균에 관심을 가졌으며, 특히 소수의 빈도에 관심을 가지고 일생동안 연구를 하였다. 1974년 뉴턴의 Principia를 입수한 그는 같은 해 최소자승법을 발표하였다. 1975년 이차유수(quadratic residue)에 대한 중요한 연구를 매듭지은 그는 1794~1798년 괴팅겐대학에서 공부하였다.1799년 헬름슈테트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논문의 주제는 대수학의 기본 정리인 "복소계수를 갖는 모든 대수방정식은 복소해를 갖는다."는 것이다.
1801년 '세레스'라는 소행성의 궤도를 정확하게 계산해냄으로서 그의 뛰어난 계산 능력을 전 유럽에 알릴 기회가 되었다. 그는 단지 3개의 관측 기록만을 가지고 새로 개발한 최소제곱법을 이용하여 유럽의 많은 천문학자들이 실패한 계산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것이다.
1820년 가우스는 측지학에 관심을 기울여, 보다 지구를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해 '헬리오트로프'를 발명했고, 가우스 오차 곡선을 도입하여 확률이 어떻게 해서 정규 분포 곡선으로 표시될 수 있는지 증명했다. 중력과 자기에 관해 관심을 가져서 근대 포텐셜 이론의 출발점이 된 실해석에 관한 연구를 수행했다. 1930년 빌헬름 베버와 협력하여 그 당시 마이클 패러데이가 탁월한 개념화를 진행하고 있던 전자기분야의 문제들을 연구하며 기존 물리학 이론에 적용할 수 있는 수학적 도구와 기술을 만들었다. 현재에도 가우스의 업적을 기려 자기장의 단위를 '가우스'로 부르고 있다.
가우스의 "비 유클리드 기하학은 상대성 이론에 함축되어 있고 실제로 슈퍼스트링 이론이나 '하이퍼 스페이스'같은 현대 이론의 기초를 이루었다.
그의 사후에 발행된 기념 주화에는 다음과 같은 찬사의 문구가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