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종교 신화 설화

엘리아데 - 고대인의 눈으로 현대를 조망한 엘리아데 종교학의 이해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4.11.15|조회수132 목록 댓글 0

 

고대인의 눈으로 현대를 조망한 호모 렐리기오수스 미르치아 엘리아데 

(Mircea Eliade, 1907-1986)


 

인간이 거룩한 것을 깨닫는 것은 그것이 세속적인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그 무엇으로서 자신을 드러내고 보여

주기 때문이다.”(M. 엘리아데)


 

The Bus that stops at Eleusis...



위에 적힌 영어문장은 어느 책의 한 항목을 아우르는 제목으로 사용된 것이다. ‘엘레우시스 앞에 멈춰선 버스’ 

그 제목만으로는 필력 넘치는 한 작가의 수필이나 소설에서 따옴직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저 제목이 붙어있는 서적은 아쉽게도 소설도, 그렇다고 수필집이나 시집도 아니다. 그렇다면 저 제목이 

적혀있는 책은 누구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가? 그 책은 한 학파의 수장이기도 했고, 종교학이라는 분과학문을 

대중화, 세계화하는데 지대한 공로를 세웠던 엘리아데라는 한 대학의 교수였던 이가 필생을 걸고 저술한 연구서, 

즉 『종교이념의 역사』A History of Religious Ideas(1982)이다. 

급작스러운 저자의 서거가 없었더라면 총 4권으로 출간되었을 이 책은 아쉽게도 3권으로 마무리되었고, 

위에 인용된 멋들어진 작은 제목은 2권 맨 마지막 장의 끝 귀퉁이에 걸려있다. 

 

고대 이교도의 몰락과 그리스도교의 승리를 언급하고 있는 2권의 30장 ‘신들의 여명’The Twilight of the Gods의 

끄트머리에 엘리아데는 1940년에 있었던 아테네 신문에 나온 에피소드 하나를 제시하며 저 타이틀을 사용하고 

있다. 엘리아데가 보기에 그것은 농업의 여신인 데메테르가 어떻게 그리스도교의 신화로 변해가는 가를 보여주는 

매우 상큼한 사례였던 것이다. 이런 식이다. 그는 이렇게 어렵고, 골치 아프고, 고민스러운 학문의 내용을 수려한 

문학적 상상력에 담아 너무도 깔끔하게 표현해내곤 했던 감수성 풍부한 ‘예술가적 학자’였다. 그래서였던가? 

그는 열정적인 학자로서의 활동 중에도 소설 및 자서전 쓰기를 멈추지 않은 문필가이기도 했다.


 

난 독일 유학시절 박사반에 함께 있던 한 여학생으로부터 엘리아데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귀동냥 할 수 있었다. 

그 학생의 이름은 한나였고, 그녀는 엘리아데를 주제로 학위 논문을 쓰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엘리아데와 

같이 루마니아 출신이었다. 외국인 치고는 유창한 독일어에 유난히도 말랐고, 또 유난히도 번득이는 눈빛을 지닌 

한나는 루마니아에서의 엘리아데에 대한 평판에 대한 나의 질문에 이렇게 답해 주었다.


“루마니아에서의 엘리아데? 글쎄 그의 고향사람들은 그가 유명한 소설가인줄 알지.”


 옅은 미소와 함께 한나는 고향에서의 엘리아데의 대한 평가를 그렇게 정리해주었다.


 

엘리아데는 1907년 3월 9일 부카레스트Bucharest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곤충과 식물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꿈 많은 소년이었다. 

그러다 엘리아데는 동경해마지 않던 독일의 대문호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1749-1832)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의 관심의 폭은 점점 더 넓어져만 갔다. 

엘리아데의 관심은 세계 문학을 거쳐, 문헌학과 철학을 넘어 종교학으로까지 이어졌다. 

1925년부터 그는 자신의 고향인 부카레스트에서 철학을 전공함으로써 본격적인 대학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1928년 르네상스기의 철학자 피치노Marsilio Ficino(1433-1499)를 주제로 석사과정을 마친다. 

그 후 엘리아데의 학문여정은 유럽을 떠나 인도로 옮겨진다. 석사를 마친 해부터 1931년까지 엘리아데는 인도에 

머물며 그의 생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기를 보내게 된다. 우선 그는 캘커타에서 다스굽타Surendranath 

Dasgupta(1887-1952)라는 대가로부터 산스크리트어와 인도철학을 공부한다. 

 

다스굽타와의 인연은 엘리아데가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탈리아 여행 중에 엘리아데는 우연히 다스굽타가 저술한 『인도철학사』The History of Indian Philosophy라는 

책을 접하게 되고, 그 책으로부터 큰 감명을 받는다. 

먼 타지에서 문자로 만난 스승의 글에 엘리아데는 주저 없이 인도로의 여행을 결심한다. 

다스굽타의 가르침을 받은 후 그는 히말아야의 리시케쉬Rishikesh에 있는 작은 암자에 6개월가량 머물게 되는데, 

바로 그곳에서 엘리아데는 쉬란다Swami Shiranda의 도움으로 요가수행에 전념한다. 

그 당시 엘리아데가 손수 행한 요가수행은 학문적 작업으로 이어져 결국 부카레스트로 돌아온 그는 인도 요가에 

대한 논문으로 학위를 받는다.


학위 후 엘리아데는 다양한 학문적 활동과 더불어 열정적인 사회활동을 시작한다. 뛰어난 문장력을 자랑하던 그는 

당시 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문학가로서도 활동하였고, 또한 신문평론가로서도 이름을 높이고 있었다. 

 

그즈음 엘리아데는 루마니아의 한 우익단체에 열성적인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적어도 신문평론가로서 엘리아데는 그 우익단체에 대한 서포터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고, 서서히 공산화의 길을 

걸어가던 루마니아의 정세 속에서 엘리아데의 그러한 우익활동은 그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상당부분 축소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1938년 이 문제로 인하여 약간의 어려움을 당한 엘리아데는 1940년 런던에 있는 루마니아 연락사무소로 파견된다. 

그리고 1941년부터 45년까지는 포르투갈의 리스본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에서 근무한다. 

당시 그는 루마니아 민요의 수집에 전념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고 ‘환상문학’에 속하는 몇 권의 소설들을 발표

하면서 나름대로는 유의미한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게 된다.


1945년 엘리아데는 프랑스 파리에 정착한다. 당시 그의 조국 루마니아는 공산국가가 되었고, 우익전력을 가지고 

있던 엘리아데가 공산화된 조국에서 활동하기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엘리아데는 파리 소르본느 

대학의 방문교수라는 신분을 얻을 수 있었고, 그곳에서 계속하여 중요한 종교학적 저술들을 발표한다.


1957년 급작스레 스위스에서 운명한 요아킴 바흐의 후임으로 엘리아데는 시카고대학의 종교학 전임교수로 초빙 

받는다. 그 후 그는 대표적인 종교학자로서 열정적인 학문 활동을 펼친다. 

 

시카고 시절의 엘리아데는 커다란 세 가지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 첫 번째가 <종교학>History of Religions이라는 학술지의 창간이었고, 이는 1961년 창간호가 간행됨으로 목표를 

달성하였다. 다음은 그의 필생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이념들의 역사』였는데, 아쉽게도 이 계획은 미완

으로 마무리되었다. 1976년 불어로 써진 1권이 출판된 이후 3권까지는 출판되었지만, 마지막을 장식할 4번째 책은 

끝내 그의 죽음이라는 장벽 앞에 세상의 빛을 볼 수가 없었다. 

그의 세 번째 계획은 『종교백과사전』Encyclopedia of Religion의 완간이었다. 하지만 이 시리즈의 책임 편집자

이기도 했던 엘리아데는 사전의 완간까지는 지켜볼 수 없었다. 

그 사전의 마지막 시리즈이기도 했던 16번째 책이 출간되기 1년 전인 1986년 4월 22일 엘리아데는 시카고에서 그의 

고단한 육신의 여정에 종을 고했기 때문이다.


 

illud tempus: 고대인의 눈으로 세상보기


 

흡사 시간 여행자와도 같이 엘리아데는 현대에 살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언제나 과거를 지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지향하고 있었던 과거는 단순한 기억 속에 머물러 있는 그런 유의 과거는 아니었다. 

그가 꿈꾸고 바라보았던 과거는 멀고도 먼 참으로 먼 옛날이었다. 

하늘이 열리고, 땅이 뒤틀리고, 바람이 물을 가르던 개벽의 시대를 엘리아데는 언제나 그의 가슴 속에 묻고 있었다. 

 

그처럼 그는 ‘그때’(illud tempus)를 지향하고 있었고, 또 언제나 그는 ‘그때’를 현대인에게 소개하였고, 혹은 망각 

속에 파묻힌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려고 애써서 설명하고 또 설명하였다. 

그리고 엘리아데에게 있어 ‘그때’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는 반드시 학술적이거나 아카데믹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그가 지향하고 있는 세계를 현대인들에게 소개하길 원했고 때로 그것은 다양한 모습의 

소설로도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 옛날’을 그처럼 지독하게 골똘히 바라보고 있었던 것인가? 

여기에서부터 바로 엘리아데가 생각하고 있었던 ‘종교의 본질’이 읽혀진다.


이미 밝혔듯이 엘리아데는 고대인들의 자기이해와 세계이해를 자신의 연구 테마로 삼았다. 

그는 이를 ‘고대의 존재론’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엘리아데가 바라보았던 고대인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리고 그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엘리아데는 ‘시간’이라는 잣대로 고대인과 현대인을 나눈다. 

엘리아데는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역사는 바로 공포의 대상이었음을 지적한다. 

흘러가는 시간을 제어하거나 붙잡을 수 없는 인간에게 역사는 공포 그 자체이다. 

시간의 축적이란 곧 인간에게는 소멸과 직결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인간은 시간을 잊고자 

한다.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생명력이 넘쳐나는 최초의 시간으로 ‘복귀’하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들은 일상 속에서 지속적으로 그들을 괴롭히는 시간의 저주와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하지만 현대인은 다르다. 세속화된 시공 속에서 현대인은 시간의 두려움을 잊고 산다. 

아니 어떤 점에서 현대인은 시간의 주체적인 창조자로서 자임하기조차 한다. 

 

엘리아데는 이러한 현대인의 역사친화적인 태도를 ‘유대-그리스도교적 역사이해의 부산물’이라 판단한다. 

즉 신적 존재가 인간의 역사에 개입함으로써 인간은 바야흐로 역사의 의미와 가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되었

다는 것이다. 

역사는 인간을 소멸시키고 사장시키는 마력적인 괴물이 아니라, 신의 의지가 실현되는 긍정적인 마당이 되었고, 

바로 그러한 현장에서 인간은 신의 섭리에 따라 역사의 창조적인 활동가로서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인간은 역사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역사적 사건은 그것이 무엇이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간에 더 이상 인간을 공포의 

구렁텅이로 몰아갈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인간은 역사를 피해 멀리 도망칠 필요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혹은 사회적으로 맞닥뜨린 개별적 사건들이 

지니는 신적 의지 혹은 섭리를, 즉 역사적 의미를 해석해내면 될 뿐이다. 

 

바야흐로 인간은 역사가 주는 무서움을 그렇게 잊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 것일까? 과연 현대인은 고대인이 지녔던 역사에 대한 공포를 완전히 떨쳐낸 것인가? 

이제 더 이상 현대인은 역사의 공포를 체험하지 않고 있으며, 매 순간 역사의 창조자로서 초역사적인 시공에 대한 

존재론적 동경을 망각했고, 또 다시는 할 필요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인가? 

그렇다면 세속과 일상에서 경험되는 종교적 현상들은 또 무엇인가? 

왜 무서움이 사라진 이 세속에서, 역사의 공포를 망각한 이 일상적 공간에서 사람들은 ‘단절적인 시공의 드러남’을 

그리워하고 또 그것들에게 매혹 당하고 있는가? 엘리아데의 질문은 끊임없이 터져 나온다. 

 

제 아무리 현대인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속한 세속적 공간에서 만나게 되는 종교적 시공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러한 질문의 연속은 엘리아데로 하여금 현대에 살면서 고대인으로 남게 만드는 결정적인 동인이 되게 

한다.


엘리아데의 진단은 인간은 여전히 고대인의 ‘세계 이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제 아무리 인간이 역사친화적인 존재로 바뀌었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만나게 되는 일상 속의 초역사적인 체험들은 

인간 안에 본질적 속성으로 자리 잡은 고대의 존재론을 알게 해 준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느 누구도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이라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잠잠히 생각해보라!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일상 속에서 전혀 ‘이질적인 시공’의 침범을 당하고 있는가!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살펴보라. 

좋아하는 소설이나 영화에 빠져 시간의 흐름조차 망각한 이들의 즐겁고 유쾌한 경험을 생각해보라. 

때론 음악에 몰두하여 시간의 축적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행복해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라. 

일상적이고 무료한 시공에 그처럼 낯설고 이질적인 시공의 접목이 가능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해리 포터』을 읽고 있는 한 소년의 모습을 생각해보자. 그 책이 주는 현란한 포장과 화장술에 빠져 얼마동안

이라도 넋을 잃고 있던 아이가 자신은 잠깐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학생이 되어 해리 포터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

노라고 이야기 한다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무척 낯선 풍경이라 억지 부리며 그 아이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는 

우는 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는 시간 축적으로부터 해방되어 일상적 시공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존재체험을 하는 

것이 여전히 현대인에게도 유효한 것임을 알게 된다.


바로 그러한 일상적 공간에 전혀 낯선 세력이 등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현’hierophany이다. 일상적 시공에 

침투하는 존재의 모습. 

이것이 성현이며 엘리아데는 이를 ‘존재의 드러남’ontophany이라고도 부른다. 

 

존재하는 것이, 실재하는 것이 자신의 참 모습을 드러내는 것. 바로 그것이 성현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성현의 드러남을 담고 있는 것이 종교적 현상들이다.


자, 이제 문제는 정리되었다. 

고대의 존재론은 고대인들만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선험적으로 주어진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본질적인 한 방식’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대인들의 존재론을 보다 인내심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여기서 엘리아데의 ‘고대로의 여행’은 좀 더 탄력을 받게 된다. 

그처럼 무서운 역사를 고대인들은 어떻게 이겨냈는가? 

엘리아데는 이와 같은 질문과 함께 세밀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고대의 문명, 문화, 종교적 흔적들에 집중한다. 

 

그리곤 곧 하나의 중요한 단서를 찾아낸다. 

고대인들의 문화 속에 빈번히 등장하는 ‘반복’의 표상들. 그것이 바로 열쇠이다! 

그들은 자꾸 무언가로 돌아가려고 하는 행위를 의례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지향하는 바의 꼭짓점에는 바로 ‘그때’, 즉 ‘태초의 순간’이 있었다. 

 

무섭고 떨리는 역사의 공포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그 역사의 시초로 돌아가는 것이 현명한 해결책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일상을 깨고 태초의 시간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고대인들은 최초의 시간을 회복할 수 있었을까? 엘리아데의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때 엘리아데의 안테나에 잡힌 것은 바로 ‘그때’의 모습을 담고 있는 고대인들의 한 문화적 유산이었다.


신화! 바로 그것이다. 

 

고대인들의 신화는 ‘그때’를 담고 있다. 그래서 하늘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산은, 계곡은, 바다는... 

종국에는 인간을 비롯한 이 모든 만물이 어떤 경로를 통해 지금과 같은 모습을 지니게 되었는가를 신화는 설명해

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신화는 단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며, 작위적인 거짓 이야기도 아니다. 

 

고대인들은 신화라는 양식을 통해 그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세계를, 존재를 담고 있었을 뿐이다. 

고대인들은 그들이 관찰하고 수용하고 있는 세계를 신화라는 장르를 통해 보존 가능한 문화적 유산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제 고대인은 신화를 들으며 ‘그때’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신화는 제의와 결합되며 더 큰 생명력을 

얻게 된다. 

 

매년 새해에 반복되는 신화적 제의는 고대인들에게 역사의 공포를 잊게 해주는 일종의 ‘세계관적 시스템’으로 

기능하였다. 

그리고 신화라는 그릇에 담긴 고대인들의 세계이해는 곧 고대인들의 행위에도 모범적 역할을 하였다. 

이제 고대인들은 신화가 제공해주는 ‘그때’의 세계이해에 기초하여 문명이라는 부산물을 만들어나가게 된다. 

사원이나 도시들, 그리고 인간이 거주하게 되는 집들은 하늘을 본받아 만들어지며, 인공적으로 축조된 건축물들의 

안정과 존속을 위해 치러지는 각종 다양한 제의들은 세계 창조의 구조를 모방하게 된다.


이처럼 엘리아데는 고대인의 눈으로 세계를 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그 또한 스스로 그렇게 불리기를 

원했던 것처럼 ‘종교사학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역사는 일반적 의미의 역사와는 그 규모와 크기가 너무도 달랐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고 있는 역사는 일반적 역사를 넘어서 저 태초의 때, 바로 그때를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학은 창조적인 해석학


혹자는 나무나 돌을 보고 절하며 그들을 대상으로 하여 기원하는 이들을 손가락질한다. 

그러면서 냉철한 계몽주의적 시선을 가진 양 돌과 나무도 제대로 구분 못하는 그들의 지적 능력의 떨어짐을 흉보

기도 한다. 

도대체 기원하는 바를 해결해줄 수도 없는 일개 무기물질이나 혹은 단순한 생명체에 불과한 돌이나 나무에게 왜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느냐는 일갈인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엘리아데의 시선이 포개어진다면 우리는 이들 계몽주의자들의 독선이 오류일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어떤 이라도 단순한 나무나 돌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그것이 단순한 나무나 돌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에 열심히 절하는 이들이 있다. 

왜? 그들이 나무와 돌을 숭배하는 바로 그 시공에 ‘성현’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은 나무와 돌을 통해 드러나는 '존재 그 자체'와 또 그러한 성현으로 인하여 형성되는 ‘시간 없음’을 체험

하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종교적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행간의 문화적 맥락과 존재론적 의미를 잡아내고 끌어내고, 

또 설명해 내는 것이 바로 엘리아데가 생각하는 종교학이라는 분과학문이다.


따라서 엘리아데는 이와 같은 종교적 의미를 주도면밀하게 잡아내지 않게 되는 상황에 대하여 우려의 심정을 

숨기지 않는다. 

따라서 종교를 대하는 이들이 단순히 문헌학적, 역사적, 철학적 혹은 사회학적 시선에만 매몰된다면, 종교의 참 

모습을 제대로 잡아낼 수 없다고 그는 보았다. 

 

종교현상의 의미는 분명 그런 세속적인 시선으로는 잡아낼 수 없다고 엘리아데는 단언한다. 

예를 들어 환원주의적 종교연구는 각자의 처한 관점에 따라 종교현상들을 분석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 그들은 

종교의 본질적 요소(근원으로의 회귀)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정확한 의미 축출에는 실패하고 말 것이라는 우려를 

끊임없이 엘리아데는 제기한다. 

 

역사주의라는 토대 위에 건설된 현대의 사회과학적 종교연구는 종교의 본래적 의미를 훼손할 수 있다고 엘리아데는 

우려하고 있다. 따라서 종교를 대하는 이들은 우선 종교현상이 가지는 ‘비일상적인 특성’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선 종교연구가들은 무엇보다도 인간들이 ‘종교적 인간’임을 직시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앞서 언급했듯이, 종교적 행위를 통하여 ‘근본으로의 돌아감’을 기원하고 있는 존재들이고, 

종교란 바로 그러한 과정의 현상이다. 

따라서 종교학은 그러한 종교적인 기준으로 인류가 보여주는 종교현상들을 기술하고 설명하는 해석학적 작업을 

본류로 삼는 분과학문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때의 해석학은 ‘창조적’이어야만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의미들을 잡아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엘리아데는 생리학, 심리학, 사회학, 경제학, 언어학 등과 같은 환원주의적 학문들을 가지고 종교 현상

들을 해부하는 것에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무엇보다도 종교학은 종교현상들이 가지는 본질적 특성과 또 초역사적인 의미를 잡아낼 수 있어야만 한다. 

적어도 엘리아데가 생각하는 종교학은 그렇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종교학은 환원주의적 학문들이 보지 못하는 

종교현상의 본질적 의미를 축출해내는 ‘창조적 해석학’이 되어야만 한다.


엘리아데는 학문적 작업 못지않게 문학적 활동을 통하여 종교현상의 본질적 의미를 전달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의 문학 활동은 취미생활 그 이상의 것이다. 단순히 학술적 연구 중간에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보조적 

장치로서의 글쓰기가 아니라, 현대인들에게 고대의 종교적 인간들이 가졌음직한 실존적 상황을 일깨워주는 효율

적인 도구로서 엘리아데는 문학작품을 선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넓게 보아 그의 문학 활동 역시 그가 학문적 영역에서 하고 있었던 창조적 해석학의 연장 속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엘리아데 자신은 학술적인 문장에서보다 더 많은 즐거움으로 자신의 고대 존재론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길 원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보다 적극적으로 그의 학문 활동을 평가한다면, 그는 학문과 문학의 장벽을 허문 최초의 사람으로도 기록

될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럴만한 자격과 결과물은 엘리아데는 충분히 가지고 있다.


 

비판과 칭송 사이에 서서


엘리아데에 평가는 극과 극이다. 한편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대단하다. 하지만 곧바로 다른 쪽에 서있는 학자들은 

그에게서 종교학자라는 지위를 떼어내야 한다고 할 정도로 매섭고 싸늘하다. 

이 엇갈리는 평가들 사이에서 엘리아데는 여전히 살아있는 종교학자로서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셈이다.


우선 엘리아데의 지지자들은 여전히 엘리아데가 제시한 창조적 해석학으로서의 종교학에 매료를 느끼고 있다. 

종교적 인간이 종교적 현상을 체험하는 것을 제대로 잡아내는 기술적 학문으로서의 엘리아데식 종교학은 여전히 

유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최소한의 규범적 장치 없이 어떻게 다양한 인간의 종교현상들을 유의미한 해석체계로 담아낼 수 있겠는가 

란 물음이 여전히 힘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들리Guilford Dudley라는 학자는 엘리아데가 역사가가 아니라는 비판에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엘리아데

를 옹호하고 나선다. 

더들리 자신도 엘리아데는 일반적인 의미의 역사가는 분명 아니라고 못을 박는다. 아니 더 나아가 엘리아데는 

‘반역사가’로서 봐야만 하며, 오히려 그 점이 엘리아데의 큰 장점이 된다고 까지 주장한다. 

꼭 검증적 실증적 역사주의의 요구대로 엘리아데를 구속할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창조적 해석학

으로서의 새로운 종교연구 방법을 더 끌고나갈 필요가 있다고 까지 주장하는 것이다.


엘리아데에 대한 비판은 그의 종교학이 검증적인 성격과는 일정부분 거리가 있음을 지적한다. 

즉 그들은 엘리아데가 지극히 규범적인 학문적 전제를 구축함으로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종교적 현상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차단시켰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엘리아데의 연구는 종교신학이나 철학 쪽으로 경도되었다고 그들은 지적한다. 

 

마르부륵 대학의 루돌프Kurt Rudolph 교수는 이런 입장의 대표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물론 루돌프 교수도 엘리아데가 가진 매혹적인 부분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엘리아데식의 종교이해는 

억지로 현대 종교인들을 고대 종교의 세계로 끌고 갈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러한 엘리아데식의 종교연구는 종교학이 지니는 역사비평적이고 문헌학적인 기초를 한 번에 허물어버릴 

수도 있다고 본다. 

 

루돌프 교수는 좀 더 목소리를 높이며 엘리아데의 규범적 종교연구방법을 비판한다. 

“역사와 시간을 지양하기 위해 우주적인 성스러움에 철저히 천착해 들어가는 그런 류의 호모 렐리기오수는 결코 

존재하지도 않았고 그리고 결코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루돌프 교수는 일갈한다.


엘리아데가 서있는 바로 그 지점을 놓고 이처럼 첨예하게 양 진영이 대립하고 있는 것은 종교연구가로서 엘리아데

가 지닌 매력이 여전히 시들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제시한 종교연구를 위한 선험적인 조건들(성현, 근본으로의 회귀, 원형으로서의 신화, 고대의 존재론 

등등)은 여전히 더 많은 탐구와 논의가 필요한 지금도 뜨거운 논쟁거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앞서 언급했던 한나의 이야기를 재차 꺼내보고자 한다. 엘리아데의 조국인 루마니아에서 온 소녀.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엘리아데식 종교연구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로 스스로를 자임하는 루돌프 교수 밑에서 바로 

엘리아데를 가지고 학위 논문을 쓰고 있었다. 

비판자의 밑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이의 고국에서 온 학생이 비판의 대상을 가지고 논문을 쓰고 있는 이 아이

러니! 난 세미나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나와 마주치면 어김없이 그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곤 하였다.


“요즘 루돌프 교수와 잘 지내? 그리고 너와 루돌프 교수의 엘리아데는 아직 별 문제는 없니?”


장난기 섞인 내 질문에 한나 역시 잊지 않고 다음과 같은 답변에 웃음을 더하여 대화의 즐거움을 유지해 주었다.


“왜 그분이 엘리아데를 싫어하는지를 역으로 추적해가면 정말 엘리아데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보다 더 분명히 

알 수 있더라!”


 

 

엘리아데의 저서들


Cosmos and History: The Myth of the Eternal Return, 1954. 정진홍 옮김, 『우주와 역사』, 현대사상사, 1976.

Yoga, Immortality and Freedom,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58. 정위교 옮김, 『요가』, 고려원, 

1989.

Rites and Symbols of Initiation (Birth and Rebirth), London: Harvill Press, 1958.

Patterns in Comparative Religion, London: Sheed and Ward, 1958. 이은봉 옮김, 『종교형태론』, 한길사, 

1996.

The Sacred and the Profane, London: Harcourt Brace Jovanovich, 1959. 이은봉 옮김, 『성과 속』, 한길사, 

1998.

Myths, Dreams and Mysteries: the Encounter between Contemporary Faiths and Archaic Realities, 

London: Harvill Press, 1960.

Images and Symbols: Studies in Religious Symbolism, London: Harvill Press, 1961. 이재실 옮김, 

『이미지와 상징』, 까치, 1998.

Myth and Reality, New York: Harper and Row, 1963. 이은봉 옮김, 『신화와 현실』, 성균관대출판부, 1985.

Shamanism: Archaic Techniques of Ecstasy, London: Routledge and Kegan Paul, 1964. 이윤기, 

『샤마니즘』, 까치, 1992.

The Quest: History and Meaning in Religion, Lond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9.

A History of Religious Ideas, vol. I, From the Stone Age to the Eleusinian Mysteries, Chicago, I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8. 이용주 외 옮김, 『세계종교사상사 1: 석기시대에서부터 엘레우시스의 비의까지』, 

이학사, 2005.

A History of Religious Ideas, vol. II, From Gautama Buddha to the Triumph of Christianity, Chicago, I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2. 이용주 외 옮김, 『세계종교사상사 2: 고타마 붓다에서부터 기독교의 

승리까지』, 이학사, 2005.

A History of Religious Ideas, vol. III, From Muhammad to the Age of the Reforms, Chicago, I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5. 이용주 외 옮김, 『세계종교사상사 3: 무함마드에서부터 종교개혁의 시대까지』, 이학사, 

2005.

 

 

 

 

엘리아데, 영원 회귀를 향한 메타 역사의 시간

 

종교학자 엘리아데는 근대에 대한 비판자다. 

근대 학문의 세계에서 일어난 전문화와 사회 과학의 발달에 대한 비판이다. 

기계화와 산업화를 곧 휴머니즘으로부터 일탈한 붕괴로 본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근대성은 반드시 치유되어야만 되는 대상이다. 

엘리아데는 그 근대의 붕괴를 원초적 시간에서 치유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 세계는 인류가 잊고 사는 신화의 세계다. 

모든 것이 성(聖)과 속(俗)으로 나뉜 세계. 인류가 향한 태고의 시간 ‘그 때(illum tempus)’는 모든 것이 비롯된 모태

이다. 그래서 그 안에는 우리가 본받고 따라야 할 하나의 원형(原型)이 있다. 

그 신화 속의 원형에서 세계는 성화(聖化)되고 그 안에서 인류는 휴머니즘을 구현하는 것이고 그것이 인류가 추구

하는 이상(理想)의 세계인 것이다.

 

결국 그가 해석하는 세계는 원초적 시간의 터인 신화 안에서 모든 사물이 원형으로 성화되는 세계다. 

그 사물의 세계는 물질과 사회의 역사를 초월해서 존재한다. 

그에게 ‘역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과거 내지 그 기록’이 아니라 그만이 특별히 이해하는 방식의 독특한 

장르다. 그 ‘역사’는 인간의 역사, 사회의 역사, 변화의 역사가 아니다. 

인간과 사회와 변화를 초월하는 영원회귀 전체성의 역사다. 

본질적으로 가상의 역사이다. 

손으로 쥘 수도, 몸으로 만질 수도, 눈으로 볼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어떤 힘의 역사다.

 

엘리아데의 그 세계 안에서 종교는 자치성을 누리는 존재다. 

종교라는 것이 마르크스가 말하는 바와 같이 생산 수단이 바뀌고 물질 구조가 바뀐다고 해서 바뀌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종교는 그 어느 외부 인자도 침해할 수 없는 영역이고, 그 어떤 것으로도 환원 될 수 없는 영원의 시간 속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사회, 물질, 변화 등으로 풀어 해석할 수도 없고, 그래서 그렇게 해석하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그 이해는 원초적 개념에 대한 에포케(epoche) 즉 ‘가치에 대한 판단 정지’ 그리고 현상으로서의 기술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인간이 해석해야 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종교적 인간의 행동과 정신 세계의 이해뿐이다. 

그 안에서 엘리아데는 원초의 통합적 행동만을 관심 대상으로 삼을 뿐, 그 행동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발현하고, 

기능하고, 결과를 만들어내는지에 대해서는 가치를 두지 않는다. 

오로지 해석만 있을 뿐, 분석이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엘리아데의 종교 해석은 인류가 공통적으로 갖는 유형

으로 분류된다.

 

그 유형의 성격들은 엘리아데의 원초적 신비주의 안에서 각각의 현상으로 차별화 되면서 이해된다. 

그렇게 되면 특정한 신앙과 행위 그리고 경험의 가치와 의미가 서로 비교되면서 해석된다. 

그 안에서 하늘은 높음이고, 초월이며 무한이다. 높이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신성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유대인에게 절대자가 하늘임과 같이 아메리카 인디언 이로쿼이 족에게도 절대자는 하늘이고, 오스트레일리아 

동남쪽에 사는 여러 부족들에게도 절대자는 하늘이다. 

중국에서도 마찬가지고, 북극에서도 마찬가지고, 중앙아시아 초원에서도 그렇다. 

그들 모두에게 하늘은 힘, 창조, 법, 절대 권위 등의 의미를 갖는다. 태양은 빛남이다. 

그래서 영웅은 모두 태양의 아들이다. 태양은 번식의 주체로서 생명과 풍요의 상징이다. 

그래서 왕은 풍요를 주재하는 신이 된다. 메소포타미아에서 그렇고, 이집트에서 그렇다. 인도네시아 토라자 족도 

그렇고, 인도의 문다 족도 그렇다. 태양은 죽음을 모른다. 

 

일몰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의 제국으로 들어가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일 아침 태양은 죽음의 제국을 

건너오고, 그래서 생명은 부활하는 것이다. 달은 태양 같은 불변자가 아니다. 달은 탄생과 죽음을 주기로 반복하는 

우주 천체의 순환 그 자체다. 

그 안에 물이 있고, 비가 있으며, 식물이 있다. 그 안에 여자의 월경이 있고, 조수 간만이 있으며, 파종과 추수가 

있다. 달은 생성을 관장하는 리듬의 에너지를 품는다. 땅은 어디에서나 어머니이고, 우주를 지탱하는 것은 어디

에서나 나무이고, 그 나무가 있는 곳은 항상 신성한 공간이다. 

세계 곳곳의 종교가 그 형태만 다를 뿐 본질은 이와 같다는 것이 엘리아데가 보는 신화의 세계다.

 

그 세계 안에서는 항상 어떤 특정한 형태나 크기를 갖는다거나, 의례와 관련하여 의미를 가질 때 그 돌은 성스러운 

돌이 되고, 그 나무는 성스러운 나무가 되고, 그 물은 성스러운 물이 된다. 

이렇게 되는 질적 변화를 엘리아데는 히에로파니(hierophany 聖顯)에 의해 속(俗)이 그 본래적 성질을 극복하고 

성(聖)으로 통합된다고 했다. 그렇게 성현으로 합이 이루어진 것이 신화, 신상, 성물, 의례, 상징, 성소 등이다. 

결국 변증법으로 이루어지는 세계다. 엘리아데는 이를 성과 속의 변증법이라 했다.

 

엘리아데는 성현의 세계란 과학과 기술의 근대와 더불어 옅어져 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절대로 사라지지는 않는

다고 했다. 모든 인간에게, 그 어떤 무신론자에게도 남아 있는, 누구에게 배운 적도 없지만 끈적끈적 하게 달라

붙어 있는 그 원초적 세계에 대한 믿음 그것이 바로 종교의 원천이다. 

그 원천에 대한 그리움은 인간 역사의 변화에 대한 저항이다. 그것은 개인을 버리고 전체를 지향하는 강한 추동

이다. 십자가를 다름 아닌 우주를 지탱하는 축으로 보는 것은 강증산의 당산 나무를 그렇게 보는 것과 같고, 

붓다가 그 밑에서 수도했다는 보리수를 그렇게 보는 것과도 같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태초의 영원 회귀, 그 잃어

버린 시간으로 가려는 희구다. 

 

따라서 야훼가 도시 한 복판 아스팔트 위에 나오거나 예수가 아파트 베란다에 나타날 수는 없다. 

그것은 곧 신화 파괴이고 성(聖)에 대한 모독이며 속된 인간사일 뿐이다. 신화의 시간 속에서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이지만, 그러한 신화 파괴의 시간 속에서는 산이 물이 되고, 물이 산이 될 수 있다. 

신화 속의 ‘그 때’가 아닌 역사 속의 ‘지금 여기’의 시간은 곧 속됨이다.

 

그래서 엘리아데에 의하면, 인간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질적 인간 실존이 아닌 종교적 인간 실존의 

상황을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특정 종교의 특정 상태에 위치하는 낯선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내부의 종교적 상황에 몰입을 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 전제 위에서 그들의 가치를 파악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세계를 파악하는 것은 관념이나 과학적 조사를 통해 이루어질 수 없고, 오로지 직관을 통한 몰입의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엘리아데에 의하면 인간은 종교라는 영원 회구의 시간 속 원초적 통합체에 기반을 두고 살아

야 한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삶을 살면 결코 인간이 고독하거나 소외되는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런데 현대인은 고독하다. 그것은 그들이 그 초월적 원초적 시간의 세계에 들어가기를 거부한 채 속된 변화 속에서 

파편의 삶을 몸부림치기 때문이다.

 

세계를 성과 속의 이항 대립으로 보고, 속에서 성현이 발현하여 성화된 것들의 시간만이 역사라고 하는 엘리아데의 

생각은 하이데거가 사물을 존재와 존재자로 나누고, 존재하는 것을 현시하는 것만을 예술이라 하는 것과 같은 

논리적 소산이다. 

 

다만, 다른 것은 하이데거와는 달리 엘리아데의 세계에는 보편적 상징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민족이나 어떤 사회나 모두 거룩한 성의 본질을 상징으로 바꾸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엘리아데의 세계관에 따르면 그 상징은 인류 보편적이므로 그에 의거하여 사진 작업을 하면 서로 다른 

문화권과 사회에서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일정하게 보편적인 느낌을 갖게 될 수 있다. 

상징이 갖는 스투디움의 세계다. 

전 세계 모든 독자에게 보편적인 감동을 느끼게 하는 것, 평균화 된 합리적 교양의 일부, 코드화되어 이해를 공유

할 수 있는 것들이 사진 예술에서 스투디움이 되는 것은 - 엘리아데의 세계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면 - 

이미 인류가 속에서 성으로 성현이 되는 그 정신세계의 역사를 널리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이너 화이트, 1955.

 

1950년대 미국에서 활동한 마이너 화이트의 사진을 보면 엘리아데가 보인다. 그는 사진을 객관적인 사실의 기록

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에게 사진은 사진을 찍는 사람의 감정을 기계에 이입시켜 이미지를 만들고, 그것을 통해 자아의식의 초월적

이고 무한한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반(反)역사적이고 그런 점에서 엘리아데의 메타 시간관에 가까이 가 있다. 마이너 화이트는 스티글리츠가 정립한 

'동등(equivalent)' 이론을 따라 자신의 눈이라는 감각을 통해 접하는 시각적 사실로부터 자유로울 것을 요구

하였다. 

시각이나 촉각 등 인간의 감각은 그 본질의 진실을 드러내는 일에 방해하는 폭군이라 하였다. 

그래서 마치 엘리아데가 속의 세계가 성현의 과정을 통해 성의 세계로 전환이 되는 영원의 본질적 시간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듯이 사진이란 우리 눈에 드러난 외형이 고유의 상징을 통해 독자가 스스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사건으로 전환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설파한다.

 

그래서 마이너 화이트의 사진 세계는 자신이 활동했던 1950년대 당시 미국의 현대 사진의 큰 조류와 달리 비의적

(秘儀的)이다. 그의 사진은 다름 아닌 속의 세계와 성의 세계가 만나는 지점이다. 비록 사진이 갖는 재현이라는 

본질적인 속성 내지는 한계 때문에 그 자체가 성소가 될 수는 없지만, 그가 재현한 이미지는 충실하게 그 신화를 

설명하려 한다. 그만큼 엘리아데의 ‘원초의 시간’ 개념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사진이 마이너 화이트의 사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마이너 화이트가 같은 시대에 미국이라는 같은 공간에서 활동한 엘리아데와 어떤 교분을 가졌는지, 그의 세계

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지 못하다. 

하지만 기계 이미지 안에서 드러나지 않는 정신의 세계를 표현하려 한 그의 사진은 현대 사진의 분명한 갈래 

하나를 열었고 그 세계관이 엘리아데의 그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은 분명하다.

 


앙리-까르띠에 브레송, 1948

 

브레송의 사진은 시간의 이미지다. 현대 사진 특히 사진을 처음 접하는 아마추어 작가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그는 사진을 리얼리티를 추구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리얼리티에는 시공간의 맥락이 

담겨 있지 않다. 브레송은 ‘결정적 순간’으로 대변되지만 그렇다고 그가 역사에서 말하는 결정적 순간 즉 전쟁, 

혁명, 운동, 독립, 분단 등과 같은 역사의 거대 시간에 관심을 두는 것은 아니다.

 

위 사진은 브레송의 시간관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예다. 식민지 인도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단되면서 인류사 

최대 규모의 강제 이주와 상호 학살 그리고 피난이 벌어지던 어느 난민촌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런데 그 무엇을 통해서도 이 사진에서 난민의 삶에 대한 기록이나 느낌을 읽을 수는 없다. 사진이라는 게 결국 

프레이밍이고, 거대 장면의 단절이라 한다지만, 브레송의 사진은 사진의 그러한 본원적 한계를 넘어 사진을 통해 

거대 역사를 지우는 작업으로까지 보인다.

 

그의 결정적 순간은 직관의 산물이다. 그 직관은 방법론적으로는 기다림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대상 안으로 몰입하는 경험적 방법을 통해서 확보된다. 따라서 그 시간은 매일의 일상적 시간에서는 감각적으로 

접할 수 없고 그 대신에 역사의 시간이 멈추는 탈(脫)역사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엘리아데가 말 하는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그 원초적 순간이 브레송에게서 결정적 순간으로 치환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미에 대한 작가의 주체적 입장이 뚜렷하고 조형미가 돋보이는 점에서는 모더니티에 충실한 

것이지만, ‘다큐멘터리’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역사성으로서의 구체적 시공간의 맥락을 빼고 그 대신 엘리아데 

세계의 총체적 근원으로서의 결정적 순간만을 넣는다는 사실에선 근대적이지 않다. 사회에 대한 통찰력과 직시 

그리고 비판과 실존으로부터 이탈해 있다는 점에서 매우 강한 고전 지향적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이갑철, 1993

 

한국 작가 이갑철의《충돌과 반동》에 나타난 사진 세계는 적어도 이미지가 주는 시각적 효과와 주제를 통해서 

볼 때, 브레송은 물론 마이너 화이트보다도 훨씬 더 엘리아데의 세계에 가깝게 보인다. 

그는 불교의 선문답 같이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 되지만 가슴이 서늘해지는 정서에 큰 매력을 느낀다고 한다. 

대상은 본질을 가지고 있으니 칼라로 표현하기가 어려워 흑백으로 표현하고자 한다고 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다. 

이는 이갑철이 엘리아데가 말하는 바로 변화무쌍한 색(色 rupa)의 세계가 아닌 모든 색의 원천인 흑과 백의 세계, 

태고의 그 시간 즉 종교의 세계에 젖어 있음을 일컬음이다. 

그래서《충돌과 반동》안에 드러난 그의 시간은 지각할 수 없고, 세계는 논리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기묘하게 

끌려가는 지남철의 자장과 같은 공간이다. 그 알 수 없는 기(氣)의 세계, 그것이 그의 사진 세계가 엘리아데의 

영원 회귀와 맥이 닿은 이유다.


사진가가 갖는 시간은 무엇인가? 이갑철은 무슨 시간을 갖는가? 사회가 진보하는 것이란 다름 아닌 인류의 원천을 

잃어버린 것이라는 엘리아데의 보수적 세계관에 대해 이갑철은 동의할 것으로 보인다. 이갑철의 사진은 직관적 

몰입을 통해 불변하는 원초적 세계를 파악하고자 함이니, 결국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의 생명력을 이미지를 통해 

창조해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갑철은 흔히 말 하듯 단순히 ‘우리’의 전통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구성지게 

슬픈 한(恨)과 상처를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잃어버린 인류의 태고의 시간, 너와 나, 

우리의 심연을 보듬고 아우르는 그 본질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 본질은 일상의 눈을 통해서는 볼 수 없는 시간의 

속성이다. 기계와 프레임의 물질 구조 안에서 기(氣)가 충돌하고 영(靈)이 반동하는 이갑철의 세계, 

그 안에 엘리아데의 원초의 시간이 보인다.

 

 

 

[출처] 원초: 엘리아데, 영원 회귀를 향한 메타 역사의 시간|작성자 아시아평화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