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로니아 - 신들의 전쟁
두번 째 이야기 신들의 전쟁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아직 하늘과 땅도 없을 때, 세상에는 다만 물과 그 물을 지배하고 있는 두 존재만이 있었다.
신선한 물은 아푸스의 소유였고, 소금물은 그의 아내 티아마트의 소유였다.
그러나 그 무렵 이 두가지는 함께 섞여 있었으므로, 아직 강이라든가 바다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마침내 결혼하여 큰 두 아이를 낳았으니, 남자 아이는 라무이고 여자 아이는 라하무 였다.
다시 이들이 결합하여 안샤와 키샤를 낳았다. 안샤는 하늘 위의 영이었고, 키샤는 땅에 사는 영이었는데, 이들한테서
아누 혹은 하늘이 태어났다.
아누의 아들 에아는 막강한 만큼 예지도 넘쳐, 그의 부모는 물론 그 이전의 누구보다도 빼어났다.
에아가 태어난 후 신들의 가족은 급작스럽게 불어나서 시끄럽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펄쩍펄쩍 뛰고, 달리고,
호들갑스럽고, 젖먹던 힘까지 다해 소리지르는 바람에, 불쌍한 증조할머니 티아마트는 마침내 신경 쇠약증에 걸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속으로만 삭일 뿐이었다. '애들은 역시 애들이야'하면서 '고칠 수
없을 때는 참는 도리밖에 없지'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증조할아버지 아푸스는 성미가 달랐다. 어느 날 그는 더 이상 그 소란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아푸스는 그가 상담이나 기분풀이하기 위해 집에 데리고 있는 난쟁이 뭄무를 불러 왔다.
"자, 나하고 같이 티아마트에게 가서 이걸 말해 봐야겠다." 하며 둘이서 티아카트한테로 가 아이들 문제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의논하였다.
그러나 아푸스는 조용하게 의논할 기분이 아니었으므로 큰 소리를 쳤다. "들어보구려, 할멈. 나는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소! 낮에는 낮대로 잠시도 편할 날이 없고, 밤에는 한숨도 잘 수가 없단 말이오. 어떻게 해야 편안히
지낼 수 있겠소? 그래, 내 저놈들을 당장 없애 버려야겠소." 이런 말을 듣자, 티아마트는 새파랗게 질려 화를 버럭
내며 아푸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는 거예요? 그래, 우리 손으로 만든 것을 우리 손으로 없애버리자는
말씀이세요? 물론, 저 아이들이 우리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본래, 아이들이란 모두 어른들을
귀찮게 구는 법이에요. 그러니 그 정도는 참아야지 별 수 없지 않겠어요!"
그러나 그녀의 이와 같은 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녀가 이렇게 말하자, 뭄무는 주인 곁에 바싹 다가가 귀에
속삭였다. "주인님! 못 들은 체하십시오. 조용하기를 바라신다면 주저치 마시고 저것들을 그냥 없애 버리십시오!"
뭄무의 조언을 듣고 아푸스는 흡족한 생각이 들었는지 난쟁이를 덥석 안아 자기 무릎 위에 앉혀 놓고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어 주었다.
그리고나서 그들은 신들에게 나아가 자기들이 결심한 바를 말해 주었다.
이 결정을 들은 신들의 놀라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저 하늘 이쪽 저쪽을 몰려 다니며 손을 비비고 어쩔 줄을 모르다가 급기야 슬픔에 빠진 듯 주저앉아 자기들
머리에 떨어질 재난을 탄식할 뿐이었다.
단지 에아만은 그렇지 않았다. 하늘의 무리들 중 총명하게 뛰어나고 민첩하기 이를 데 없고 지략에도 능한 에아는 이미
앞날을 예측하고 선수를 쳐서 대책을 꾸며 놓은 지 오래였다.
그의 모든 형제 자매들이 모여서 대책도 없이 탄식만 하고 있을 때, 에아는 작전을 세우느라 분주하였다.
그는 한마디 말도 없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물통을 가져다 물을 가득히 채웠다.
그리곤 거기에 영험 있는 주문을 외우더니 아푸스와 뭄무 쪽으로 그 물통을 가지고 가서 그들에게 마시라도 하였다.
잠시 후, 아푸스는 잠에 곯아떨어졌고, 뭄무는 졸음을 견디지 못해 이리 꾸벅 저리 꾸벅하면서도 잠을 쫓으려 했지만,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에아는 때를 놓칠세라 번개처럼 날쌘 동작으로 아푸스의 옷과 왕관을 벗기고, 후광도 떼어낸
다음 그가 살던 집을 점령하였다.
천하에 고약한 자문위원 뭄무에 대해서는 꽁꽁 묶고 코를 꿰어 방울을 달아 지하 감방으로 끌고 가 쳐넣었다.
이처럼 자기 적을 정벌하고 자기의 승리를 기록한 기념탐을 세운후, 그는 아늑하고 아름다운 방을 꾸며 담키나를
신부로 맞이하였다.
이 성스럽고 행복한 곳에서, 신들 가운데서 가장 강한 왕자 중의 왕자, 왕 중의 왕인 말둑신이 태어난 것이다.
그는 여신들의 품에 안겨 자라면서 여신들의 젖과 함께 그들이 지닌 위엄과 권력을 빨아먹었다.
그의 모습은 부드럽고 유연했으며, 눈은 현란하게 빛났고, 걸음걸이는 당당하였다. 그는 그가 탄생하던 날 벌써
다 자랐다. 아버지 에아는 그를 보자 너무나 기뻐서 파안대소하였다. 그리고 그를 승인하는 표시를 부여함과 동시에
그에게 신성을 두 배로 주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에아는 말둑에게, 인간의 마음으론 상상할 수도 없고 인간의 말로는 표현할 수조차 없는 당당한 형상을
부여하였다. 말둑은 눈과 귀를 각기 4개씩 갖고 있었으며, 그가 입술을 움직이면 거기선 불이 쏟아져 나왔다.
키는 굉장히 컸고, 사지도 그에 따라 클 수밖에 없었는데, 열 명의 신들이 발하는 휘황찬란한 후광을 의상으로 차려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매우 모험적인 기질을 타고난지라, 자라면서 엉뚱한 장난을 치기 시작하였는데, 갈수록 난폭해졌다.
한때는 장난삼아 바람을 가죽끈으로 매어 버렸기 때문에, 바람을 말뚝이 택하는 곳으로 바람을 불 수밖에 없었다.
또 어떤 때는, 천상의 거처를 지키는 용의 입에 망태기를 씌워 틀어 막았다.
이제 신들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티아마트에게 가서 불평을 늘어 놓았다. "말둑이 일을 얼마나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있는지 알고나 계십니까? 그애의 장난에는 넌더리가 난답니다. 그런데도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계실겁니까?
허구헌 날 못된 짓만 골라 하고 다닌답니다. 지난날 아푸스와 뭄무가 뭐라고 했을 때에도 당신은 그저 가만히 있었
지요? 당신은 아푸스가 만든 큰 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푸스가 위태롭게 되었을 때, 그것을 써볼 생각은 하지도
않았지요!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당신은 과부신세가 되고 말았지 않습니까? 남편을 위해 일을 다하지 못했
을지라도, 아이들을 위해선 무언가 해주셔야 합니다! 이제 말둑을 호되게 혼내 주십시오!"
이렇게 추궁을 당하자 티아마트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다! 그럼, 우리 모두 함께 가 그 아이와 싸우자!
그러나 경고해두지만 우리 모두가 덤비더라도 그 아이를 당하지 못할 것이다.
원군이 없으면 승산이 없다! 그러니 우선 그것들을 조금 만들어 두어야 할 것이야."
이리하여 티아마트를 중심으로 신들이 모여 작전 회의를 열었다. 저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작전 계획을 세웠다.
그러는 동안 티아마트는 무시무시한 짐승들을 만들었다.
그놈들은 날카로운 이빨과 뻐드러진 어금니를 갖고 있었고 혈관에는 피 대신 독액이 주입되었다. 광란하는 괴물들도
만들었는데 활활 타오르는 불꽃에 둘러싸인 저들에게서 섬광이 번뜩이는 것을 보게 되면 어느 누구라도 꼬리를
감추고 도망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살무사, 용, 맘모스, 큰 사자, 미친 개, 전갈, 광폭한 폭풍의 악귀들, 나는 용, 켄타우로스 등 11종에 이르는 소름이
끼치는 존재들은 싸움에 나서면 무서움을 모르는 전사들이었기에 이들의 공격을 막아낼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다음에 티아마트는 킹구라 불리는 신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킹구, 그대는 군기를 높이 들고 전군을 지휘하며, 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대의 명령은 아무도 거역
못 할 것이니. 보라, 이는 내가 그대를 높은 자리에 앉혔음이며, 따라서 그대는 나의 반려자가 될 것이니라!" 이렇게
말하며 티아마트는 그에게 권력의 상징을 부여하고, 그의 가슴엔 운명을 결정하는 커다란 결정의 패찰(tablets of
decision)을 달아주었다. 취임식을 마치고 나서 티아마트와 킹구는 신들을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쳤다.
불이 타오르고, 불길이 치솟아도,
그대들은 그것을 불어 끌지어다!
강한 자가 힘을 잃고,
오만한 자가 패주할 것이로다!
이러한 말이 귓가에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군사들은 출발을 하였다.
한편, 말둑은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에아는 자가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위험이 닥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크게 분노했다.
그는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차분하게 생각할 여유도 갖지 못하고 앉아서 걱정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흥분이 가라
앉고 냉정하게 사태를 볼 수 있게 되자, 좋은 계획이 머리에 떠올랐다.
에아는 즉시 일어나 안샤에게 달려갔다. 기민하고 현명한 에아는 나이 지긋한 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티아마트는 하늘의 궁정에 대하여 반역을 꾀하고 있습니다." 하며 말문을 연 에아는, 티아마트가 신들을
모은 사실과, 무서운 괴물들을 만든 사실 그리고 이미 전투를 시작하였다는 사실을 안샤에게 보고하였다.
이 말을 듣자 안샤는 노여움에 가득 차 자기 무릎을 치며 입술을 꽉 깨물었으니 마음에 불길한 생각으로 가득하였다.
"에아야, 너는 지난날 아푸스와 뭄무를 없애면서 너의 기개를 보여 주었다. 이제, 다시 나아가 킹구와 티아마트를
죽여라!" 그리하여 에아는 전진해오는 적군과 맞섰으나, 선두에서 달려오고 있는 괴물들과 그것들을 감싸고 있는
화염을 보자 무서운 생각이 들어 퇴각하고 말았다.
에아가 패주하였다는 보고를 받자, 안샤는 매우 당황하여 아들 아누를 불러 말하였다. "너는 나의 장남으로 아무도
당할 수 없는 영웅이다. 이제 가서 타이마트를 만나고 오너라. 우선 그녀를 어르고 달래보다가 정말로 말을 듣지
않을 때에는 네가 나를 대신하여 왔노라고 말하고 복종하도록 만들어라!" 아누는 즉시 티아마트에게로 갔다.
그러나 그도 노여움에 부르르 떨고 있는 이 여신의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자 겁에 질려 에아처럼 도망치고 말았다.
그가 다녀와서 안샤에게 사태의 전말을 보고하자, 안샤는 에아를 보면 실의에 빠진 듯 고개를 흔들었다.
하늘의 무리들은 모여 수군거렸다. "이것 보게나, 티아마트와 맞섰다가 살아 돌아올 수 있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군
그래!" 신들은 모여 앉아 오돌오돌 떨며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안샤가 왕좌에서 일어나 신들을
위엄 있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리를 대신할 수 있는 전사는 오직 하나, 저 용감한 전사, 두려움을 모르는 호담한
말둑뿐이다!" 이 말을 듣고 에아는 즉시 말둑을 내실로 불러들여 은밀히 이야기했다.
에아는 그에게 티아마트의 계획을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그렇지만 그 계획이 말둑 자신을 향한 것이라는 점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가 안샤에게 말한 바와 같이 '티아마트의 모반은 하늘의 궁정에 대해 일으킨 모반'이라고
말했다. 그의 얼굴엔 진지한 빛이 나타났다. "말둑아, 아버지로서 너에게 이르는 것이니, 잘 듣고 내 말을 따르거라.
너의 증조할아버지이신 안샤 님을 만나뵙도록 하여라. 너의 형제자매들이 너에 관해 불평을 할 때에도 안샤 님은
언제나 네 편을 드셨고, 너에게는 따뜻한 애정을 베풀고 계시다. 그분 앞에 나아갈 때에는 보무당당하게, 말은 무인
답게 명료하게 하여야 한다. 반드시 기뻐하실 것이다."
말둑은 아버지가 명하신 대로 안샤를 찾아뵙고, 당당한 태도를 지으며 걸었다.
용맹스러운 그의 표정과 태도를 보자 안샤의 가슴은 힘이 솟는 것 같아 다정하게 말둑에게 입맞추어 주었다.
말둑은 깊이 감동하여 이렇게 말했다. "안샤 할아버님, 저는 언제나 증조할아버님을 사랑하고 있사오며, 증조
할아버님을 위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티아마트가 어떻게 하늘의
궁정에 모반을 하고 있는지 아버지로부터 들었습니다.
조금도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티아마트는 여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제 싸울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증조할아버님
께서 티아마트의 목을 짓밟도록 해드리겠나이다." "오오, 갸륵한지고!" 하며 안샤는 즐거운 듯 말했다.
"가서, 그녀를 만나라. 처음에는 말로 타이르도록 하고, 듣지 않을 땐, 주문을 외워서라도 그녀를 달래보도록 해보
하라. 그래도 듣지 않을 경우, 폭풍의 전차를 몰아 싸우도록 하라."
말둑은 에아의 아들답게 용감했을 뿐 아니라, 머리도 민첩하게 돌아갔고 또 야심도 만만찮았다.
'다시 없는 기회다! 괴물들을 물리치고, 천상의 명예를 지키면 보상도 내리실 것 아닌가?' 그는 생각했다.
그리하여 넓은 어깨를 펴고 증조할아버지를 바라보며 감히 말했다. "안샤 할아버님, 지금이라도 나갈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그러하오나 제가 티아마트를 정복하고 증조할아버님의 생명을 구하게 되면, 저를 신들의 우두머리로
삼아 주셔야 합니다. 지금 모두 불러 모으시고 약속해 주십시오.
지금 이 시각으로부터 결정을 내리는 자는 저뿐이옵고, 제가 말하는 것이 곧 법이 될 것이라고 선언을 하십시오."
이 말을 들은 안샤는 자기의 심복 가가를 불러 말했다. "바다 밑에 계신 늙으신 나의 부모님, 라무와 라하무에게
다녀오게. 두분에게 티아마트가 하늘의 궁정에 모반을 일으켰는데, 말둑이 신들의 우두머리가 되는 조건으로
티아마트와 싸우겠노라 한다고 말씀드리게. 이 문제는 나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으니 설명을
드리게. 왜냐하면 그 문제가 위에 있는 신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아래에 있는 신들에게도 영향을 끼치는 중차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네. 그분들의 구역에 사는 모든 신들을 불러 모아 이곳으로 보내시어 같이 상의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잘 말씀드리게." 가가는 라무와 라하무를 찾아가 안샤의 말을 전하고, 이제까지의 전말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라무와 라하무는 즉시 자기들 구역의 신들에게 하늘의 궁정 회합에 참가토록 지시하였다.
신들이 출두 명령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였다. "뭐가 심상찮은 일이 일어난 게로군.
티아마트가 이같이 모반을 일으키다니, 우리가 가서 진상을 알아보는 것이 좋겠구먼."하며 그들은 숙덕거렸다.
마침내 하늘의 궁정에는 사방에서 모여든 남녀의 신들로 북적거렸다. 그들은 서로 마주칠 때마다 발걸음을 멈추고
포옹하면 인사말을 나누었다. 모두 모이자 주안상이 베풀어져 일동은 연회석에 앉았다. 최종결정이 내려질 무렵
에는 참석자들은 모두 기분좋은 상태에 있었으므로 의안이 제출되어도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든가 토를 다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급히 단성이 마련되고 말둑이 개선 장군과 같이 단상에 오르자 모든 신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와
찬사를 보내어 의안을 승인하였다. "우리들의 우두머리이신 말둑이시여! 당신이 하신 말은 그대로 법이 될 것이
오니 높이거나 낮추거나 뜻대로 하소서.
아누가 지닌 모든 권력을 말둑에게 드리어 말둑을 전세계의 왕으로 삼자! 그가 쏘는 화살이 한 발도 빗나가지 않기를!"
누군가가 화려한 옷 한 벌을 가지고 왔다. "말둑이시여, 당신이 가지신 힘을 보여 주십시오!
한 마디 말씀으로 이 옷이 갈기갈기 찢어졌다가, 한 마디 말씀으로 본래대로 되게 해보십시오!"(주1) 그리하여 말둑이
명령을 하자, 옷을 갈기갈기 찢어졌고, 다시 명령을 하자 본래대로 되었다.
그러자 말둑의 범상치 않은 능력을 본 신들은 그를 믿고 무릎 꿇어 소리 높여 찬양하였다. "말둑이야말로 우리의 왕
이시다. 말둑이야말로 우리의 왕이시다." 그들은 그의 손에 왕홀을 쥐어 주며 왕좌에 앉히고 왕의 휘장을 건네 주었다.
그들은 그에게 훌륭한 검을 주면서 말했다. "자, 이 검으로 티아마트의 목을 베고, 바람을 일으켜, 그녀의 피를 날려
버리십시오!" 신들이 돌아가자 말둑은 즉시 무기를 정비하여 전쟁 준비를 하였다.
활시위를 당겨 화살을 재고, 활촉에는 번개를 달아 두었으므로 그의 전신은 빛에 싸여 휘황찬란하였다.
그리고 그는 적을 사로 잡기 위하여 그물을 쥐고, 거센 폭풍을 겨드랑이에 끼고 행군하기로 하였다.
만반의 준비가 끝나자 말둑은 벼락을 손에 들고, 폭풍의 전차에 올라 탔다. 노여움과 잔혹 그리고 폭풍과 질풍이라는
네 마리의 괴물이 전차를 끌었으며, 모두들 예리한 독아를 가지고 있었다.
말둑은 악의 힘을 막기 위하여 입가에 붉은 칠을 하였고, 손에는 티아마트와 그녀의 맹수들이 내뿜는 악취를 묻히지
않기 위하여 향내 나는 풀을 들고 있었다. 그렇게 하고나서 그는 출전하였던 것이다.
킹구를 비롯한 선봉에 서 있는 적봉들은 말둑이 달려오는 모습을 보자 부들부들 떨었다. 이런 자가 나타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이었다. 작전은 지리멸렬되고 말았다. 그러나 티아마트는 두려워하지도 떨지도 않았다.
그녀는 용감하게 전진하였으며, 그녀가 부르는 군가는 천지를 진동하였다. "네 비록 앞에 서서 뽐내고 있으나,
네가 바칠 것은 항복뿐이리. 자, 만군의 신들이 예 왔노라! 너를 무찌르기 위하여." 그러나 그 노랫소리가 그의
귓가에 와닿기도 전에 말둑은 티아마트에게 곤봉을 휘두르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대의 힘이 막강하고, 그대 분명
모든 신들 중의 여왕이었으나, 그대 마음 속엔 옳은 것이 간직되어 있지 않고, 분쟁과 다툼만이 있을 뿐.
그대를 우리의 고조할머니로서 깍듯이 모셔 왔으나 마음 속엔 원한만이 가득하여, 형제가 형제끼리 다투고, 자식이
아비에게 대항하도다. 잔인하고 비열한 흑심덩이, 생자나 사자의 신뢰를 저버리고, 아푸스가 떠나가자, 킹구를 맞이
하였도다! 이 무슨 만용이며, 무례한 꼴인가? 옛 신들에게 도전하다니, 괴물들에게나 의존하여, 그것들을 이끌고
진격하다니. 내 이르노니, 그대 혼자 오라! 부하들은 눈앞에 알짱거리지 마라 하고, 단둘이 겨루어 보자, 단둘이서
자웅을 결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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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원본에서 사용된 단어는 '사라지다'라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학자들은 말둑이 그 의상을 사라지게 한 다음, 다시 나타나게 했노라고 생각한다.
이 노래에 티아마트는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아 좌우를 살피지도 않고 무작정 이 무뢰한을 삼킬듯이
돌진하였다. 째어지는 목소리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맹렬히 앞을 향해 덤벼들었으므로, 곁에서 진격하던 신들도
다시 무기를 고쳐 잡았다. 그러나, 말둑은 말할 수 없이 빨랐다.
티아마트가 덤벼든다고 느꼈을 때 그는 이미 번개처럼 날렵하게 그녀가 달려오는 길목에 예의 그물을 던져 그녀를
잡아올리고 말았는데, 그녀는 꼼짝없이 그물 속에 갇혀 날뛰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자 후미에서 진군하던 폭풍을 전방으로 불러냈다. 폭풍은 세차게 앞으로 진격하여 티아마트의 벌려진 입을
향해 맹공을 가했으므로 티아마트는 입을 다물 수 없게 되었다.
때를 놓칠세라 말둑은 시위를 당겨 벌려진 입에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티아마트의 내장 깊숙히 박히면서 혈관을
꿰뚫고, 심장을 파열시켰다. 드디어 거대한 그녀의 육체도 힘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말둑은 그녀를 묶고 생기를
뽑은 다음 큰 대자로 늘어진 시체를 밟고 섰다.
티아마트의 군대는 우두머리가 쓰러지는 것을 보자, 대오를 흐트리며 도망가려 하였으나, 말둑의 군대는 그 퇴로를
막고 그들의 무기를 빼앗고 쇠사슬로 묶어 버렸다. 말둑은 그들을 그물로 묶어 땅굴에 던져 넣고 영원히 포로로
썩게 하였다.
열한 마리의 괴물도 밧줄에 묶어 곤죽이 될 정도로 밟아 뭉갰으므로, 힘을 잃고 매우 온순한 동물이 되어, 가죽 끈에
묶이게 되었다.
킹구에 관하여는 특별한 판결을 내렸으니, 킹구는 더 이상 신들과 어울릴 수 없게 되었다.
티아마트의 일당을 대강 처치하고 나서 말둑은 다시 티아마트의 주검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그리곤 커다란 곤봉을 들어 티아마트의 두개골을 힘껏 내리쳤다. 산산조각이 난 혈관에서 튀어 나온 피는 바람이
실어가 버렸다. 안샤와 에아 등 모든 신들은 말둑의 솜씨를 보고 기뻐 날뛰며 안도의 숨을 몰아 쉬었다.
그들은 제물을 받쳐들고 나와 말둑을 둘러쌌다. 그러나 말둑은 그런 물건을 박기 위하여 우물쭈물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새로운 임무로 바빠졌기 때문이었다.
티아마트의 죽음은 그에게 있어서 새로운 질서의 시작을 의미하였다. 쭉 뻗은 티아마트의 사체를 조개처럼 두 쪽
으로 가른 다음, 너비를 잰 다음, 그 한쪽으론 하늘의 궁창을 삼았고, 궁창 아래에 있는 물의 깊이를 재고, 너비를 잰
다음, 나머지 반쪽으론 그걸 덮을 덮개로 만들었으니, 그 덮개가 땅의 기초가 되었다. 그리곤 아누를 궁창의 영역에
살게 하고 엔릴을 하늘과 땅 사이에, 그리고 에아를 땅 아래에 있는 물에 살게 하였다.
그리하여 아누는 하늘의 신이 되고 엔릴은 공기의 신이 되었으며, 에아는 대양의 신이 되었다.
이제 말둑은 다른 모든 신들에게도 자리를 정해주었으며, 빛나는 것들을 만들어 하늘에서 빛나도록 하였으니, 해라
든가 달, 별들은 이렇게 하여 생겨났다.
말둑은 그들이 움직이는 시간과 계절을 정해주고, 별에는 궤도를 만들어 주었다.
또한 달들의 길이를 정해 주었다. 동쪽 하늘에는 태양이 솟아오를 입구를 만들고, 서쪽 하늘에는 저녁에 그곳으로
나가기 위한 출구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모든 것이 정해지자, 신들은 말둑의 주위에 모여들어 잔소리를 하기
시작하였다. "왕께서는 우리들의 위치를 정해 주시고 각기 임무를 부여해 주셨습니다마는, 우리들이 일하는 동안
우리를 위해 일하며 우리를 돌봐 줄 자를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누가 우리들의 집안일을 돌보며 식사준비를
해주게 됩니까?" 이 말을 듣고 말둑은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 같더니 갑자기 얼굴을 들고 혼잣말을 하였다.
"옳거니! 뼈와 피로 꼭두각시들을 만들자! 내 그것들을 인간이라고 부르겠다.
신들이 자기 일을 할 때, 인간으로 하여금 신에게 봉사하게 하고, 신의 용무를 돌봐 주도록 하면 되겠구나!"
그러나 이러한 계획을 에아에게 말하자, 이 늙고 약삭빠른 신은 곧바로 말하였다. "뭐 하려고 새로운 피와 뼈를
만들려 하는가? 모반을 일으켰던 자들의 것을 쓰면 될 게 아닌가?" 그리하여 말둑은 묶여 있는 포로들을 데려다가,
너희들 중에서 누가 모반을 획책한 장본인인가 하고 다그쳤다. 모반을 일으킨 장본인을 처형하려는 뜻에서였다.
그러나 포로들은 모두 티아마트의 졸개들뿐이었으므로, 그 누구도 전쟁의 책임을 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하였다. "킹구가 장본인입니다. 킹구가 우리의 사령관이었습니다.
그가 이 공격을 계획하고 지도하였습니다."
이리하여 킹구는 감옥에서 끌려나와 에아의 손에 넘겨졌다. 에아는 그의 목을 자르고 혈관을 도려내 그것으로 인간
이라 불리는 꼭둑각시를 만들었다. 신들은 크게 기뻐하며 말둑을 에워쌌다. "오오, 말둑이시여! 당신은 우리들의
짐을 덜어 주고 노고를 가볍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은 땅 위에 당신이 쉴 수 있는 신전을 지어 이것으로
감사의 표적을 삼겠습니다. 해마다 우리들도 그 신전에 모여 당신께 경의를 표하고 당신을 찬양하겠습니다."
줄곧 2년간에 걸쳐 신들은 벽돌과 모르타르를 사용하여 열심히 일하였다.
그리하여 3년째 되던 해에 바빌론 시가 완성되었고, 그 도시 안에는 에사길라 궁정 곧 말둑의 신전이 우뚝 솟아
오르게 되었다. 이 건물이 완성되자 모든 신들이 그곳에 모여 축하연을 베풀었다. 말둑도 그들에 둘러싸여 정좌하고,
그들의 찬사를 받으면서 운명의 법과 전세계의 운명을 선포하였다.
그러고 나서 적을 쓰러뜨린 큰 활은 온 세상이 볼 수 있도록 하늘에 걸어 놓았다.그러한 전통은 오늘까지도 계속
되어 있다. 인간은 신들의 종이며 해마다 신년 원단이 되면, 신들은 모두 바빌론에 있는 말둑의 신전에 모여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그리고 말둑은 신들을 향하여 운수를 선언한다. 그리고 그 활은 지금도 모두들 볼 수 있도록
하늘에 걸려있다.
신들의 전쟁의 해석.
'신들의 전쟁'은 순수한 민간 설화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바빌로니아 신년의 축제 4일째 되는 날 사원 안채에서
대제사장에 의해 장엄하게 낭송되던 것으로,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축제시에 사용하던 '가사집'과 같은 원시적인
성가(聖歌)였다.
바빌로니아의 대다수 도시에서 신년 축제는 봄이 시작 될 때 10일부터 11일간 거행되었고, 몇몇 도시에서는
초가을에 거행되었다. 이 축제의 주제는 생명의 갱신이었다.
그것은 세계의 질서의 재확립, 왕의 즉위 재연과 확인, 신들에 의한 그 해 열두 달 동안의 인간의 운수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이 모든 사항은 축제의 일부로서 무언극으로 재연되었고, 반대로 무언극은 시간이 시작할 때 벌어지는 일들을 재현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주신은 혼돈이 이끄는 악마의 군대와 싸워 그들을 쳐부수고 나서 창조의 질서를 다시 확립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의 승리의 표징으로 그의 조상(彫像)이 형식적으로 가로를 행진한 다음 마지막으로 신전 특별한 곳에 봉납된다.
인근의 모든 신들도 그때만은 위엄을 갖추어 예방을 하며, 그 신들의 상도 행렬에 끼어 따라간다.
그런 다음 주신은 방문자들에게 둘러싸여 특별한 방에서 의식을 행하며 사람들의 운수를 결정한다. 의식을 거행하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왕은 형식적으로 폐위된 다음 다시 즉위하게 되는데, 이것은 왕이 해마다 이지러져
가다 다시 새롭게 되는 공동체의 생활을 의인화한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것이다.
용과 벌이는 모의전투, 승리의 행렬 또는 왕의 형식적이 폐위와 복위를 포함하는 이러한 종류의 의식들은 여러 곳
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현상이다. 호기심 많은 독자는, 제임스 프레이저 경(Sir James Frazer)의 고전적인 저서
'황금의 가지(Golden Biugh)' 안에 수록되어 있는 많은 실례들을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한 민간 관습에서
볼 수 있는 5월의 왕과 여왕, 오늘날의 '미의 여왕'이라든가 '미스, 어쩌고 저쩌고'하는 것 따위들이 해마다 벌였던
주권자의 즉위식 재연 행사의 어설픈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들의전쟁'의 주요 원본은 아수르바니팔(기원전 662-626)의 서재에서 나온 것이다.
원래의 점토판은 19세기에 발굴되었는데, 대영제국 박물관에 있다. 이 점토판들은 아시리아의 후대의 수도 였던
니네베에서 발견되었으나, 거기에 수록된 이야기의 원문 자체는 바빌론에서 전해진 것이며, 그 도시에서 행해졌던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주인공은 말둑으로서 간주되며, 그는 바빌로니아 수도의 주신이었고, 그 신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누각
에사길라는 이 도시에 있던 거대한 신전이었다. 그러나 1915년에 기원전 20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이야기의
고본이 아수르에서 발견되었다. 이곳은 아시리아의 고대 수도였다. 거기서의 주인공은 그 나라의 신인 아수르였고
그것이 봉납된 곳은 아시리아 수도의 유명한 이 신의 신전이었다.
이 이야기는 이전에 독립적으로 존속되어 온 많은 이야기들을 외형상 일관된 이야기로 만들어 주고 있다.
아마도 이 '신들의 전쟁'이 현재의 형태로까지 발전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으로 보인다.
이야기 전체를 살펴볼 것 같으면 민간에 흔히 볼 수 있는 생각들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생각들은 다른 민족의
민간 설화 속에서도 자주 나타나는 것이다.
최초의 원리는 물이었다---이 생각은 원시적인 우주 발생 설화에서는 공통적인 것이나, 각별히 바빌로니아인
들에게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던 까닭은, 그들의 초기 도시들이 실제로 늪 위에 세워졌던 데에서 연유하는 것 같다.
최초의 생물은 짝을 이루어 창조되었다.
영웅신(말둑)은 조숙한 아이였으며, 실제로 성인으로 태어났는데,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나, 후대 유태인 전설
속의 모세, 히타이트인의 '돌로 된 괴물'의 이야기에 나오는 울리쿰미 같은 경우가 그렇다.
그는 4개의 눈을 갖고---이 또한 그리스 신화에서의 크로노스와(떠로는) 페르세폰에 대해 묘사되어 있는 특징
이다---또 입에서 불을 뿜어내고 있다.
그의 적 티아마트는 보통의 무기로는 이겨낼 수 없고, 오직 바람을 입에 불어넣어, 그녀의 배를 바람으로 채우고서야
정복할 수 있었다. 악귀로부터 방호하는 수단으로 원시인들은 붉은 색을 흔히 사용하였다는 것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에서는 붉은 어린 암소의 재는 부정(不淨)한 것을 제거하였다(민수기 19:2, 주2). 카피르족의 여인
들은 산후에 붉은 진흙을 몸에 바른다. 한편 갈레라스와 타벨로레제족 사이에서는, 성년식을 행할 때 아이들의 몸에
붉은 안료를 바른다.
또한 같은 이치에서, 빨간색 실은 원시인의 주술에서 적이나 암흑의 힘을 상징적으로 '묶는 것'으로 가끔 정해지고
있다.
죽은 신의 피로 인간을 창조한다는 유사한 예를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인도 신화에서 사람은 푸루사의 피에서 생겨나고, 그리스 신화에서는 패주한 타이탄의 피에서 생겨난다.
마지막으로 말둑이 승리의 활을 하늘에 거는 대목은, 폭풍의 신이 쿠오쟈가 홍수를 일으킨 악마를 패배시킨 후,
승리의 활을 하늘에 두었다고 기술하고 있는 초기 아랍인의 전설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그 이야기에서 문제의 활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무지개가 아니라, 별자리하는 점이 부연되어야할 것이다.
(학성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