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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신화 설화

정감록 이야기 7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4.12.24|조회수205 목록 댓글 0

16. ‘원조’ 예언자들

 

언제 누가 무슨 예언으로 세상을 움직였을까. 시대의 변천에 따라 예언자의 계보도 많이 달라졌다.

20세기 초엔 손병희를 비롯한 신종교단체 지도자들이 ‘정감록’을 근거로 ‘후천개벽’을 예언했다.

그에 앞서 조선 후기에는 풍수지리와 점술에 밝은 ‘술사(術士)’들이 예언자로 활동했다.

그들은 정권에서 소외된 이른바 ‘원국지사(怨國之士)’들과 연합해 새 왕조의 창립을 꿈꾸었고,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예언서 ‘정감록’을 민간에 유포시켰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좀더 다양한 부류의 예언자들이 발견된다.

우선 고려 후기에는 미륵불의 화신이라고 주장하다가 사기꾼으로 단죄된 사람들이 있었다.

사실 고려시대만 해도 국가는 정치적 예언을 독점 관리하였으며, 이를 위해 천문과 지리 등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술관(術官)을 따로 설치했다.

▲ 도심에서 재현된 살풀이굿. 고대로부터 예언자의 기능을 행사해왔던 무당은 지금은 그 활동범위가 개인적 운명을 예언하는 데 국한돼 있지만 본래는 국가의 운명을 점치는 것이 중요한 임무였다.

국가가 예언을 제도적으로 독점하는 경향은 이미 고대로

부터 비롯됐다.

우리와 이웃한 고대 중국은 물론, 서양문명의 뿌리로 알려진

로마제국에서도 정치적 예언은 국가의 통제를 받았다.

정치적 예언은 허가받은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만큼 고대사회에서 예언의 역할은 중요했다.

한국 고대의 예언자들은 크게 네 가지 종류로 구분된다.

왕, 무당, 일관 및 승려가 그들인데,

이들은 예언의 원조였다.

‘정감록’의 가장 깊숙한 뿌리였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신성한 왕들의 예언능력

 

고대엔 왕들이 직접 예언자 역할을 담당했다.

예컨대 신라 선덕여왕이 그랬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설화인데 비교적 널리 알려진 이야기라

줄거리만 간단히 언급하겠다.

영묘사 옥문지에 개구리 떼가 모여 여러 날 동안 울어댔다.

이것을 보고 여왕은 여근곡이란 곳에 백제 군사가 잠복해

있는 줄을 알아냈다.

개구리는 눈이 툭 불거져 있어 성난 모습을 하고 있으므로,

병사로 해석했다.

개구리가 울던 옥문은 곧 여자의 생식기인데 여자는 음이요,

빛깔로 말하면 흰색, 방향으로는 서쪽이다.

여왕은 적군이 서쪽에 있음을 짐작했다.

그런데 남근이란 여근 속에 들어가면 죽는 법이라 여근곡의

적군은 물리치기가 쉬울 것으로 판단했다.

선덕여왕의 예언은 사물의 형태, 이름, 빛깔이 당시 사람들이

공유한 상징체계의 틀 안에서 이뤄졌단 점이 주목된다.

 

역사가들은 이 설화를 예로 들어 선덕여왕은 개인적으로 대단한 능력이 있었다든가, 또는 여왕의 권위가 만만치

않았다는 주장을 편다. 여기에 덧붙여 나는 한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고대의 왕은 신성시 됐는데, 왕의 초월적 능력에 대한 기대가 그 이면에 자리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집트의 파라오나 중국 고대의 진시황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신성한 능력의 소유자로 간주돼, 사시사철 천지의 순조로운 운행을 알리는 달력을 공포할 권리가

있었다.

 

심지어 고대 동양에서는 신기한 동식물의 출현, 별자리의 움직임을 비롯해 갖가지 천문 현상, 바람과 비 등 일체의

자연 현상에서 하늘의 뜻을 발견하고자 했다.

자연환경의 사소한 변화에도 한 나라의 정치적 공과가 반영되어 있다고 믿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물론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도 이에 관한 기사가 수없이 많다.

왕은 이 모든 현상의 이면에 암시된 하늘의 뜻을 정확히 읽고 적절히 대응해야만 됐다.

그것이 하늘과 백성에 대한 왕의 의무였다.

 

이런 점이 지나치게 강조되다 보니 한국 고대엔 왕이 흉년이나 자연재해에 대해 직접 책임을 져야 됐다.

부여에선 여차하면 왕을 바꾸기까지 했다고 한다.

부여 왕은 정치적 수장이자 최고의 사제로서 책임을 져야 했다. 부여 사람들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하늘의

의지가 절대적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이 벌어지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 그 발굽 모양으로

길흉을 점칠 정도였다.

일종의 동물 점(占)이 애용되었던 것인데, 그 방법이 중국 고대 은(殷)나라의 갑골점(甲骨占)과 비슷해 보인다.

고대에는 아직 세속적인 지식과 종교적인 신앙심이나, 정치권력과 종교적 권위를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지 못하

였다. 그런 가운데 왕은 최고 권력자이자 종교적으로 신성한 존재로서 하늘의 뜻을 정확히 읽어내야 된다는

사명을 떠안게 됐다. 심한 경우, 예언과 주술의 능력이 부족한 왕은 퇴출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상적인 왕은 선덕여왕처럼 예지 능력을 구비했어야 됐다.

 

 

궁중의 무당 또는 일관들, 예언 전문가로 국정에 간여해

 

시일이 흘러감에 따라 정치와 종교는 점차 분리되었고, 정치권력이 종교적 권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왕 노릇을 하는 데는 여전히 정치적 예언능력이 요구되었지만, 왕이 직접 예언자여야 할 필요는 사라졌다.

왕은 궁궐 안에 예언자들을 고용했고, 그것으로 족했다.

‘삼국사기’에 보면 이미 백제의 초창기인 온조왕 때,‘일관(日官)’이란 전문가가 측근으로 기용돼 있었다.

어느 한 해엔 왕궁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쳤고, 도성에 사는 어떤 백성의 집에서 말이 소를 낳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더욱이 그 머리는 하나였으나 몸은 둘이었다. 이런 변고(?)에 대해 일관이 해석을 내놨다.“우물물이 갑자기 넘친

것은 대왕이 크게 세력을 일으키게 될 징조입니다. 소가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인 것은 대왕이 이웃 나라를 병합

하게 될 징조입니다.” 예언은 맞아들었다. 얼마 후 온조왕은 진한과 마한을 병합하는 데 성공했다.

 

일관의 정체가 과연 무엇일지 궁금하다. 고구려에서는 일자(日者)라고도 하였다.

그는 천체의 이상현상을 예언으로 풀이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예컨대 149년(고구려 차대왕 4년) 5월에 다섯 별(歲星 또는 木星,熒惑 또는 火星,太白 또는 金星,辰星 또는 水星

그리고 鎭星 또는 土星)이 동쪽 하늘에 모였다.

 

일자가 보기에 흉한 조짐이었다. 그러나 그는 왕의 마음에 거슬리면 공연히 화를 당할 수도 있다고 판단해,“임금의

덕”이 있다는 증거라고 거짓으로 둘러댔다.

 

이 이야기에서 보듯, 늦어도 2세기에는 천문에 정통한 직업적인 예언자들이 고구려 왕실에 존재했다.

일자는 이를테면 전문직 관리로 왕을 보좌했다.

 

고구려 왕실에는 또 다른 부류의 예언자들도 있었다. 역시 고구려 차대왕 때의 기록이 참고가 된다.

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마침 하얀 여우가 보이기에 활을 쏘았다. 그러나 맞히지 못해 떨떠름해했다.

왕은 ‘무사(巫師)’에게 이 일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스승 사(師)’ 자를 붙여 무사라 일컫는 데서 짐작되듯,

최상급의 무당이었다. 무사는 그 일이 아주 나쁜 징조라고 말했다.

여우는 요사스러운 짐승인데 하물며 그 빛깔이 하얗다면 더욱 괴이한 일이라 했다.

“임금님은 하늘의 뜻을 두려워하여 덕을 닦고 잘못을 반성하십시오. 만일 임금님이 덕을 닦으시면, 화가 변하여

복이 될 수 있습니다.” 왕은 화가 치밀어 올라 이렇게 간언하는 무사를 죽여 버렸다.

 

나라 안의 최고 무당으로서 예언자는 자연 현상에 은밀하게 담긴 하늘의 뜻을 제대로 알아맞혀야 했다.

여기서 반드시 언급돼야 할 한 가지 중요한 사항이 있다.

무당은 자연 현상의 예언적 의미를 캐낼 때 현실정치에 깊숙이 개입할 수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들의 정치적 개입은 위의 이야기가 상징하듯 상당한 위험이 뒤따랐다.

 

우리에게 삼국통일의 명장으로 널리 알려진 김유신만 해도 본래는 고구려의 무당이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는 전생에 고구려의 무당 추남이었다 한다. 추남은 천지자연의 여러 현상을 예언으로 풀이하는데 능했다.

뿐만 아니라 점술에도 밝았다. 하지만 고구려 왕비의 뜻을 거스른 바람에 무고하게 죽음을 당했고, 이를 복수하기

위해 적국 신라의 귀족 가문에 환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삼국유사’에 보면, 고구려의 연개소문 역시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적국의 장수로 환생하였다고 했다.

 

환생에 얽힌 전설이 사실이었는가 하는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점은 추남이든 또는 차대왕 때의 무사든 국가의 운명을 바로 예언해야 될 사명을 띤 무당들이

왕의 곁에 포진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과 별도로 천문에 밝은 일자들 역시 예언을 임무로 삼았다.

 

 

명산대천과 시조 사당의 제관들, 국운을 예언하다

 

7세기의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얼핏 무당과 비슷해 보이지만 엄밀한 의미로는 구별되는 새로운 부류의 예언자

들이 등장했다. 사제 또는 제관(祭官) 즉, 나라의 중요한 제사를 담당하던 종교인들이 예언자의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고구려 말기인 보장왕 때 일이다.

654년(보장왕 13년) 4월, 마령 고개 위에서 신인(神人)이 나타나 고구려의 멸망을 예언했다.

마령의 신인이란 산신령을 가리킨 것이 거의 틀림없다.

 

신라의 경우 김유신의 전기를 읽어보면 삼산(三山)의 여신들이 국운을 수호하는 신으로 언급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마령도 국가적으로 중시되던 명산이며, 그 곳의 산신이라면 특별한 신앙대상이 아닐까

한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마령 산신의 예언을 청취한 사람은 결코 평범한 사람일 수가 없다.

그는 산신령의 제사를 전담하는 사제였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딱히 고구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삼국에는 저마다 국가적인 제사의 대상이 정해져 있었다.

유명한 산천과 국가의 시조묘(始祖廟) 등이 신앙 대상이었다. 이들 종교시설을 관리하는 사람들도 따로 있었다.

고구려 요동성(遼東城)만 해도 시조 주몽(朱蒙)의 사당이 설치돼 있었는데 그에 얽힌 이야기는 마침 예언자에

관한 우리의 논의에 도움이 된다.

 

보장왕 때 당나라 장수 이세적(李世勣)이 고구려를 정복하기 위해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그 성 아래까지 쳐들어

왔다. 당나라 군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달아 성을 공격했다.

당 태종까지 친히 합세해 요동성을 수십 겹으로 에워싸 북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요동성 주민들의 사기는

저하됐고 성은 함락직전이었다.

바로 그때 주몽 사당을 관리하는 사람이 나섰다.“우리가 모시는 주몽 사당에는 철판을 이어 만든 갑옷이 있고

날카로운 창이 있다. 전해오는 말로 이것은 전연(前燕·249∼370) 때 하늘이 내려 보냈다고 한다.

지금 적에게 포위되어 형세가 위급하다. 미녀를 단장하여 주몽 신에게 아내(‘婦神’)로 바치자.”

그의 제안대로 미녀를 바친 다음 제관이 다시 말했다.

주몽이 기뻐하시므로 성은 반드시 지켜질 것이란 이야기였다. 그러나 요동성은 바로 함락되고 말았다.

 

‘삼국사기’에는 주몽 사당의 제관을 단순히 무당(‘巫’)이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크게 괘념할 일은 아닐 성싶다. 요동성의 함락에 관한 내용은 고구려의 적국인 당나라 측의 사료를 거의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그 사당을 보호하고 관리할 ‘사제’ 또는 ‘제관’이 없었을 리는 만무하다.

 

이쯤에서 요점을 간추려보자.

 

첫째, 고구려의 건국 시조 주몽은 사후에 국방의 요충인 요동성을 수호하는 신으로 간주돼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비슷한 예로 신라의 문무왕도 죽어 국가의 수호신이 되었다.

문무왕과는 달리 주몽은 성곽의 수호신이었다. 그런 점에서 주몽 사당은 후대 중국 성황(城隍)의 원형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둘째, 주몽 신에게 젊은 여성이 희생으로 바쳐졌다는 점이다.

사람을 산 채로 무덤에 부장품으로 삼는 순장(殉葬) 풍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으나, 종교적 희생은 오랫동안 끈질

기게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인용한 사료에서 확인되듯 국가적으로 중요한 이 사당을 관리하는 제관이 있었고, 그는 수호신 주몽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바로 이 점이 지금 우리에겐 가장 중요하다.

 

백제의 경우에도 명산대천은 국가적 신앙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중요했던 만큼 국가의 멸망을 예언하는 징조가 가장 분명하게 포착된 장소이기도 했다.

백제가 멸망하기 몇 해 전부터 기이한 현상들이 자주 목격됐다.

빨간 말이 북악의 오함사(烏含寺)에 들어와 울었다고 했다. 그 말은 사찰을 여러 날 동안 맴돌다 죽었다는 것이다.

북악이라는 명칭에서도 짐작되듯 그 산은 백제의 오악 가운데 하나였다.

명산 중의 명산으로 백제가 국가적 신앙대상으로 삼았던 북악 산신이 나라의 멸망을 알리는 징조였다면 의미심장

하다. 하필 ‘말’이 등장하고 있는 것도 상징적이다.

 

앞서 예로 든 고구려의 산신도 마령 즉 ‘말 고개’에 출현했던 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고대에 말은 전쟁 또는 군신(軍神)의 상징이었다.

멸망을 눈앞에 두고 백제의 우물, 강물 그리고 바다에도 재앙의 조짐이 역력했다.

서해안 해변에는 무수히 많은 작은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어찌나 많던지 백성들이 아무리 먹어도 남았다고

했다. 생초진(生草津)엔 거대한 여인의 시체가 발견됐다. 그 길이가 무려 18척이나 됐다고 한다.

수도 사비성의 서남쪽으로 흐르는 사비하(금강)에는 큰 물고기가 죽어 떠올랐는데, 길이가 3척이나 됐다. 이어서,

사비하의 물이 핏빛처럼 붉게 물들었다. 도성의 우물물도 핏빛으로 변했다. 모두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들이다.

 

따져보면 우물물이나 강물이 붉게 변했다는 이야기는 큰 물고기나 거대한 여성이 폐사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고대 한국인들의 관념에 따르면 물속에는 물의 신이든가 아니면 용이 살고 있었다.

그 형상은 특출한 사람의 모습일 수도 있었고 물고기 또는 지렁이와 같을 수도 있었다.

 

이러한 물의 신은 우선 고구려의 건국신화에 등장한다. 주몽의 외할아버지 하백이 바로 그렇다.

작은 물고기들은 물의 신(水神,河伯)의 신하로 인식됐다.

적에게 쫓기던 주몽이 무사히 강물을 건너 도망칠 수 있었던 것도 다름 아닌 물고기와 자라들 덕분이었다.

만일 주몽이 수신의 외손이 아니었더라면, 수중 생물들의 도움을 기대하긴 어려웠다는 것이 신화의 논리다.

 

백제 왕실은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였던 만큼 명산 못지않게 대천(大川)도 중요했다.

수도 사비성을 감싸 흐르던 사비하, 생초진 그리고 서해 바다의 수신은 모두 백제의 수호신이었을 것이다.

물론 수호신들의 죽음에 대한 관찰은 비현실적이지만 이런 비현실적인 현상을 목격하고 보고하고 기록한 것은

보통사람들의 몫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언자인 제관들의 고유한 권리요, 또한 의무였다.

 

호국사찰의 승려들, 불안한 미래를 보다

 

삼국에 불교가 전파된 뒤로 각 나라엔 호국사찰(護國寺刹)이 들어섰다.

기존의 산신과 수신에 더하여 부처님의 가호가 나라의 융성을 보장해주리란 믿음이었다.

그러다 나라가 망하게 되자 그 조짐이 호국사찰에도 나타났다.

 

백제의 경우, 천왕사(天王寺)와 도양사(道讓寺)의 탑이 벼락을 맞는가 하면, 백석사(白石寺) 강당에도 벼락이 쳤다.

왕흥사(王興寺)에선 배의 돛과 같이 생긴 것이 강물을 따라 절간 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목격됐다.

왕흥사 승려들은 이런 모습을 함께 지켜봤다 한다.

정치적 예언은 본래 신성한 왕과 무당들의 독점적 영역이었으나, 역사 속에 새로 등장한 일관(日官)들, 불가(佛家)의

스님들에게도 예언의 권능이 공유되기 시작했다.

 

이런 고대 예언자들의 직업적 계보가 이어져, 조선후기엔 술사(術士)와 스님들이 정감록의 생산과 유통을 주로

담당하게 된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친다.

 

 

 

17. 예언가와 정감록-1

무학대사와 ‘정감록’

조선왕조엔 세번의 위험 닥친다는 ‘三絶運’ 무학은 조선의 수명 연장하려 선바위서 기도 무학의 풍수·예언능력은 술사들이 부풀린것

‘정감록’엔 이른바 삼절운(三絶運)이 예언돼 있다.

조선왕조의 운수가 세 번 끊길 위험에 처한다는 것인데,“이씨의 운에 세 개의 비밀스러운 글자가 있으니 소나무, 집, 그리고 밭이라(李氏之運 有三秘字 松家田三字也)”고 한 구절이 그것을 집약하고 있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소나무, 집, 그리고 밭이 최적의 피란처란 뜻이다.

소나무(松, 명나라 장수 李如松) 덕택에 임진왜란을 넘길 수 있었으며, 병자호란은 겨울철에

일어난 전쟁인 데다 단기간의 전쟁이라 집에 조용히 머문 사람은 무사했고 멀리 피란간 사람들은 도리어 혹한을 만나 얼어 죽었다는 이야기다.

밭이 피란처가 되는 것은 세 번째 위기가 닥쳐올 때라고 했다.

 

 

▲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화가 강희언의 인왕산도. 조선 초기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려 했을 때 무학대사는 이 산을 주산으로 삼으려 했으나 정도전 등의 반대로 실패했다고 한다. 훗날 조선후기 술사들이 이같은 사연을 악용, 조선왕조의 종말을 예언한 ‘무학비결’을 조작해 반란을 획책하기도 했다.

위기가 닥쳐올 시기에 대해 “해를 헤아려보면 세 번의 전쟁은 원숭이, 쥐 또는 용해에 일어난다.(考基年數 則兵在申子辰)”고 했다. 임진(辰)·병자(子)는 이미 역사적 사실로 입증됐기 때문에 원숭이해가 언제인가로 초점이 모아졌다. 조선 후기 기득권층은 그 해가 언제냐며 전전긍긍해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왕조의 종말을 바라던 사람들은 이 예언에 큰 희망을 걸었다.

그런데 전혀 뜻밖에도 이 예언을 남긴 사람은 무학대사(無學大師)라고 했다. 무학이라면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로 한양 천도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조선왕조의 멸망 시기를 예언했다니 갑자기 어리둥절해진다. 무학은 정말 조선 왕조의 멸망을 예언했을까.

만일 그런 일이 없었다면, 언제 누가 왜 무학의 이름을 판 것일까.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

 

사실 태조 이성계는 무학에게 정신적으로 적잖이 의지했다. 이 점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확인된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태종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실세로 등장하자 이성계는 왕위를 버리고 고향땅 함흥으로 낙향했다. 이것은 태종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의 표현이었고, 따라서 태종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정치적 부담이었다.

태종은 부왕을 다시 서울로 모셔오지 않으면 안 됐고, 그래서 여러 차례 함흥으로 사신을 보냈다. 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항간에는 태조가 함흥으로 내려온 사신을 모조리 잡아 죽였다고도 한다. 어딜 가서 아무 소식도 전하지 못하는 경우 ‘함흥차사’(咸興差使)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유래는 태종 때의 복잡한 사정을 반영한다. 태조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태종은 마침내 무학대사를 함흥으로 보냈다. 평소 태조는 무학을 한없이 공경하고 믿었기 때문에, 그를 통해서라면 태조의 오해를 풀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태종2년 11월9일 무자).

▲ 인왕산 선바위
무학대사가 조선왕조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 선바위 앞에서 1000일 기도를 올렸다는 전설이 전해내려온다.

과연 무학의 설득은 효과가 있어 얼마 후 태조는 다시 서울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 만큼이나 태조는 무학을 존경했고 인간적으로 신뢰했다.

몇 년 뒤 무학이 타계하자 태조는 아들 태종에게 부탁해 무학에게 묘엄존자(妙嚴尊者)라는

시호를 내리게 하였다(태종 10년 7월12일 정축).

마지못해 태조의 뜻을 따르기는 했지만 태종은 실상 무학을 우습게 여겼다.

태종의 눈에 비친 무학은 한낱 평범한 승려에 불과했다.

조선 초기의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무학은 설법(說法)에 뛰어나지 못했다 한다.

 

한 번은 궁중에서 선(禪)에 관해 가르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무학은 불교의 종지(宗旨)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그 자리에 있던 여러 스님들의 애를 태웠다는 것이다(실록, 태조 1년 10월11일 기미). 그 자신 선승(禪僧)이었지만 참선에 관해 별로 많이 알지 못했다는 악평인데,

물론 이것은 태종을 비롯한 일부 인사들에 의해 왜곡된 평가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태조는 무학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태조는 무학이 머무는 회암사(檜巖寺)를 찾아가 숙식을 함께 하기도 했고, 그를 스승으로 받들어 계(戒)를 받고 심지어 대사의 생활방식을 본 떠 일체 육식을 끊어버리기도 했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질문을 제기된다. 무학의 어떤 점이 태조를 그렇게까지 매료시켰을까.

역사적 기록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두 사람이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에서 큰 구실을 담당한 것은 풍수지리에 관한 무학의 전문적 지식이었다.

태조는 즉위 초 계룡산 천도를 검토했다.

당시 무학은 태조의 측근에서 계룡산의 풍수지리를 검토했다.

결국 그는 천도를 반대하게 되었고(실록, 태조 2년.2월11일 병술), 계룡산 천도도 무위에

그쳤다.

그 뒤 한양이 새 수도의 후보지로 떠올랐고 그 때도 태조는 무학의 의견을 물었다.“이 곳은

사면이 높고 수려(秀麗)하며 중앙이 평평하므로,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합니다.”(실록, 태조 3년.8월13일 경진) 이러한 무학의 찬동에 태조는 무척 만족했다. 왕은 정도전·하륜·이양달 등에게도 명령해 천도문제를 함께 결정짓게 했다.

▲ 무학대사 초상화

무학은 북한산에 올라 한양의 풍수를 살폈다.

그 때 무학이 미래의 도성 풍경을 조망한 곳은

삼각산의 하나인 만경대(萬景臺)였다.

거기서 한양 쪽을 내려다보면 만 가지 모습이

한 눈에 보인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무학이 나라의 도읍터를 살폈기 때문에 국망봉

(國望峰)이라고도 한다.

일설에 따르면, 그 때 무학은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북악을 좌청룡(左靑龍), 목멱산(남산)을

우백호(右白虎)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정도전(鄭道傳) 등이 강력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북악이 주산이 되었다 한다.

무학은 정도전 등과 더불어 한양 천도의 일등

공신이었다.

도읍을 옮기는 문제는 가벼운 일이 아니었지만

태조는 이를 서둘렀다.

그는 고려 말 갑자기 중앙정계에 등장한 신흥

세력이었기 때문에, 고려의 수도 개성에 포진한 해묵은 귀족 세력들이 눈엣가시처럼 느껴졌다.

무학은 왕의 그런 심중을 정확히 헤아려 한양

천도를 적극 도왔다.

이로써 무학은 태조와 하나가 되었다.

 

무학대사는 갈수록 높이 평가돼

 

무학은 실제로 풍수지리에 능통했다. 그런데 후대로 갈수록 풍수 및 예언에 관한 그의 능력은 더욱 미화되었다.17세기 중반 대신(大臣) 송시열(宋時烈)은 효종 임금 앞에서 조선시대의 3대 풍수지사를 거론하는 일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첫 손가락에 꼽힌 사람은 무학(無學)이었다.

나머지 둘은 이의신(李懿信)과 박상의(朴尙毅)라고 했다.(‘실록’, 현종 개수 즉위년 7월3일

임술). 이것은 아마도 당대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평가로 봐도 좋을 것이다.

 

후대 사람들이 무학을 높이 평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조선왕조의 기틀이 확고해지면서 건국의 주역들이 신성화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태조 이성계는 신성한 왕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그런 가운데 태조를 가까이서 보좌한 무학은 신인(神人)으로 기려졌다.

태조와 무학의 특별한 관계를 상징하는 설화도 많이 생겨났다.

예컨대, 무학이 스승 나옹화상과 함께 왕후(王侯)가 배출될 명당과 장상(將相)이 나올 명당을 봐두었는데 무학이 이성계에게 이를 알려주었다는 이야기다.

이성계는 무학의 말을 듣고 아버지 이자춘의 묘를 잘 써서 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왕건 가문과 도선의 관계를 꾸민 설화를 연상케 한다.

설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나이를 고려할 때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둘째, 수도 한양이 명실공히 모든 분야에서 조선왕조의 중심이 됨에 따라, 도읍을 정하는 데

기여한 무학의 능력이 과장되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해 왕십리에 관한 설화도 탄생했다.

한양에 도읍하려고 했을 때 무학은 왕십리 자리에 궁궐을 지으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무학은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았으므로, 이런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설화에 따르면, 무학은 왕십리에서 검은 소를 타고 지나가던 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소를 때리면서 무학만큼이나 미련하다고 꾸짖었다.

이에 무학이 노인에게 가르침을 청했고 십 리를 더 가라는 깨침을 얻어 왕(往)십리라는 지명이 생겼다 한다. 어떤 설화에서는 그 노인이 신라의 고승 도선 국사였다고 한다.

 

물론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그렇긴 해도 이 설화에는 한두 가지 숨은 뜻을 담고 있다고 본다.

한양의 궁궐터를 정하기가 쉽지 않았던 사실이 암시되어 있고, 풍수지리의 대가였던 도선과

무학은 죽음의 세계를 뛰어넘어 서로 통한다는 믿음이 보인다.

그런가 하면, 이런 신이한 우여곡절을 통해 얻은 도읍인 만큼 한양은 최고의 수도라는 뜻도

있는 것같다. 이런 주장과 믿음은 조선시대 일반 민중의 의식세계를 반영한다.

그것이 정말 옳으냐 그르냐하는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셋째, 풍수지리에 관한 무학의 능력이 점차 과장되면서 그가 생전에 발휘하지 못한 다른 능력까지도 재평가되었다. 해몽을 잘해 이성계의 즉위를 미리 알아 맞혔다는 전설은 그 가운데

하나다.(‘대동기문’) 인왕산 선바위에 얽힌 전설은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무학은 애초 조선왕조가 5백년 뒤 망할 줄 알았기 때문에 나라의 수명을 늘리려고 선바위에

와서 천일기도를 하였다는 것이다. 만일 선바위가 한양도성 안에 포함되면 그것이 가능하다는 신령의 계시를 받았으나, 정도전의 주장에 밀려 무학의 주장은 관철되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그러자 무학은 장차 불교가 유교에 억눌려 지내게 되고, 나라의 수명도 500년에 불과하게 되었다며 통탄했다.

선바위에 관한 전설 역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무학의 예언 능력이 조선후기 민중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은 유교사회가 된다는 예언은 실제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해 꾸민 이야기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국운이 500년에 그친다는 예언은 많은 민중의 희망이기도 했다.

그들은 한 편으로 조선왕조와 수도 한양의 번영을 바라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조선사회의 각종 모순이 해소된 새 나라를 꿈꾸었다. 이런 소망은 왕조의 종말에 관한 예언 설화를 낳았고, 그 중심에 무학이 자리잡게 되었다.

무학의 신이한 예언 능력을 소재로 한 설화는 전국 여러 곳에 있다. 부평의 원통골이나 부산의 강선대(降仙臺)의 지명 설화는 해당 지역의 지리적 특성을 설명하면서 무학의 예지능력을 강조한 경우다.

그밖에 서산의 나무 설화는 특정한 나무를 대상으로 해 세상의 운명을 예언한 것이다.

 

무학은 예언과는 거의 무관한 고승

 

역사적 기록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무학은 예언가가 아니었다.

경남 합천 삼가 출신인 그는 젊은 시절 원나라의 수도에서 인도승려 지공(志空)을 만나 불법을 배웠고, 뒤에 고승 나옹(懶翁)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태조의 두터운 신임으로 왕사(王師)가 되어 한양천도를 도왔다.

그러나 세상사에 깊이 관여한 흔적은 없다.

무학은 주로 회암사에 조용히 머물다가 태종 5년(1405) 금강산 금강암에서 세수 78세, 법랍 62세로 입적하였다. 비록 풍수에 능통하긴 했지만, 사사건건 세상일에 관심을 두었다고 볼 근거는 조금도 발견되지 않는다.

 

 

무학을 둔갑시킨 술사들

 

하지만 후대에 이르러 무학은 풍수지리와 예언의 대가로 부풀려졌다.

16세기 후반, 무학이 타계한 지 약 180년쯤 지났을 때, 불현듯 그가 저술했다는 ‘도참기’

(圖讖記)가 한양에 등장했다.

그 때는 고질적인 당쟁이 시작된 데다 일본과의 관계가 경색되기 시작해 안팎으로 무척 어수선하였다. 이런 판국에 누군가 무학의 명성을 빌려 국가의 장래를 논하였다고 하겠다.

무명의 술사가 실은 ‘도참기’의 저자였을 것이다.

 

‘도참기’는 임진왜란을 전후해 상당히 널리 퍼졌다.

그런데 처음에는 누구도 그 내용을 명확히 해석하지 못했다. 그만큼 난삽했다.

예컨대, 임진년에 대해 “악용운근(岳聳雲根) 담공월영(潭空月影) 유무하처거(有無何處去)

무유하처래(無有何處來)”란 구절이 적혀 있었다.

이 구절은 한바탕 왜란을 겪은 뒤에야 명료해졌다. 결론적으로 말해, 신립(申砬) 장군이 충주에서 패전해 그 군사들이 월낙탄(月落灘)에서 몰사한다는 내용으로 풀이되었다.

왜 그런가. 첫 구절의 ‘악’(岳)은 곧 ‘유악강신’(維岳降申)이므로 신(申)이다.‘용’(聳)은 ‘입’(立)과 같은 뜻이라 입(立)이다. 그리고 ‘운근’(雲根)은 돌(石)이다. 따라서 ‘악용운근’(岳聳雲根) ‘신립’의 이름이다.

다음 구절인 ‘담공월영’(潭空月影)은 ‘달이 여울에 떨어지다.’(月落灘)는 뜻이다.

달리 말해,‘물에 빠져 죽는다.’는 말이다.

마지막 두 구절은 ‘도성의 백성들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 피란 간다.’,

‘왜구가 입성(入城)한다.’는 말로 해석된다(실록, 선조 25년 4월30일 기미)

 

물론 이런 해석은 사후 약방문이었다. 억지스러운 면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무학의 예언가적 능력에 새삼 주목했다. 실제로는 어느 술사가 무학의 이름을 빌려 저술한 ‘도참기’였을 텐데 그 위력에 힘입어 예언가 무학의 명성은 더욱 빛났다.

 

역사에는 이런 아이러니가 있다. 서양 중세의 도서관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저자로

내세운 위서(僞書)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하지 않은가.

 

한 때 장안의 화제가 됐던 ‘도참기’는 남아 있지 않다. 워낙 알쏭달쏭한 내용이라 해석이 어려워 임란과 함께 수명을 다한 것 같다. 그 대신 오늘날에는 ‘정감록’의 일부로 돼 있는 ‘무학비결’이 전한다. 눈을 부릅뜨고 ‘무학비결’에서 ‘도참기’의 흔적을 살폈으나 허망한 노릇이었다.

‘무학비결’은 조선왕조의 멸망에 초점을 맞춰 말세의 징후를 논의한 예언서다. 주요한 내용은 ‘정감록’에 실린 다른 예언서들과 대체로 일치한다.

 

조선왕조의 국운을 약 400년으로 봐 “앞의 360년” 즉 18세기 말까지는 국정이 비교적 순탄할 것으로 예상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그 뒤 56년은 물과 불이 서로 살아주기 때문에 백성들이 난리를 깨닫지 못하고 재상은 쓸모없는 글만 숭상하니 가히 풍요롭고 태평하나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은 위에서 도둑질하고 아전과 군교(軍校)는 아래에서 약탈을 일삼으니 백성들이 불안하여 들에 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18∼19세기의 실제 상황과 대체로 일치한다.

그 사실로 미루어 보면 ‘무학비결’이 저술된 시기는 그 때가 아니었을까 한다.

 

조선의 운명이 다할 무렵에 대해선 “신인(神人)이 두류산(頭流山)에서 도읍을 옮기는 계책을 세우고 200년이나 국운을 연장시킬 것”이라고 했다. 두류산 즉, 지리산에서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지만 그것은 매우 서서히 진행된다고 보았다.“때에 무(武)는 강하고 문(文)은 약하여

가히 임금이 임금이 아니요 신하 또한 신하가 아니라 슬프도다.” 조선의 마지막은 무인정권이 장식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진 내용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무학비결’이 저술된 시기를 좀더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다. 새로 오군영이 설치되어 수도 방어가 강화되던 18세기 말 이후, 외세의 침입이 노골화되기 직전인 1860년대까지 저술되었다고 추측된다.

누누이 말했듯 18∼19세기엔 술사와 그들에게 협력한 승려들이 다양한 예언서를 생산 유포했다. 그들은 새로운 예언서들에 근거해 때로 반란을 획책했다.‘무학비결’은 바로 그런 예언서의 일종이었다. 고승 무학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지만, 풍수와 예언으로 이미 명성이 높아진 무학의 이름을 빌려 술사들은 민중을 포섭하려 했다. 그러잖아도 민중들은 설화 속의 무학같은 신승(神僧)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무학비결’의 창작은 사회적 여망에 부응하는 행위였다.

 

 

북창 정렴과 ‘정감록’

 

‘북창비결’은 조선 명종 때 도사(道士)로 유명한 북창(北窓) 정렴(鄭 1506-1549)이 썼다고 하는 비결인데, 난해한 부분이 많다. 이 예언서는 19세기 말 또는 20세기 초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으며 그 때부터 줄곧 ‘정감록’의 일부가 되어 있다.

‘북창비결’의 저자로 알려진 정렴은 매월당 김시습, 토정 이지함과 더불어 조선의 3대 기인(奇人)으로 손꼽힌다. 꽤 흥미로운 인물인 셈이라 한 번쯤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북창비결’을 비롯해 그가 저술한 책의 내용을 간단히 검토해 보는 것도 한낱 쓸데없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북창 정렴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도사(道士)

▲ 16세기 조선의 선비 정렴이 지은 ‘북창비결’엔 ‘쥐의 아비 시체가 온 나라에 누워 있고, 뱀의 형 집 연기가 천리 밖에서 나리라.’란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뱀의 해 전 년에 일어났던 임진왜란과 쥐의 해에 일어났던 병자호란을 예언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북창비결은 19세기 말 처음 모습을 드러낸 후 줄곧 ‘정감록’의 일부로 알려져왔다. 사진은 부산진에서 벌어진 임진왜란의 첫번째 전투장면을 그린 ‘부산진순절도’.
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정렴은 다재다능한 선비였다.

그는 천문(天文), 지리(地理), 의약(醫藥), 복서(卜筮)는 물론, 불교와 도교에 모두 정통하였고, 음악과

그림에도 능통했다고 한다.

문집인 ‘북창집(北窓集)’ 외에도 ‘북창비결(北窓秘訣)’,‘용호비결(龍虎秘訣)’,‘동원진주낭(東垣珍珠囊)’,‘유씨맥결(劉氏脈訣)’ 등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전호에서도 인용한 ‘궁을가(弓乙歌)’ 역시 정렴의 글이라 한다.

 

계곡(溪谷) 장유(張維)의 글을 보면, 정렴은 유·불·선 3교에 두루 통달하였으나 사상적 중심은 유교에

있었다고 한다.

도사라기보다는 유학자였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말은 조선시대가 유교를 국시(國是)로

삼았기 때문에 나온 말에 불과한 것 같다.

 

장유가 정렴을 위해 지은 글을 자세히 살펴보면,

정렴은 “한 번 산에 들어가 며칠 동안 마음을 가다

듬고 수양한 다음 내려올 때면 산 아래 100리 간에

일어난 일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본 것처럼 훤히 알아 맞혔다.”고 했다.

굉장히 높은 수준의 점쟁이였다는 말이다.

 

정렴에겐 남다른 풍모가 있어 성수익(成壽益)과

같은 조선후기의 학자는 정렴을 신인(神人)이라

평했다.

성수익은 일찍이 정렴이 중국에 가서 유구(琉球·

오키나와)의 사신을 만난 이야기를 예로 든다.

당시 유구 사신은 정렴을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 뜰 아래로 내려가 절을

올렸다고 한다.

유구 사신이 소지한 책자에는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시(某時) 중국에 들어가면 진인(眞人)을 만날 수 있다.’고 돼 있었다. 유구 사신은 정렴을 바로 그 진인(眞人)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유구 사신은 여러 시간 동안 정렴에게서 주역(周易)을 배웠다.

그와 대담하는 동안 놀랍게도 정렴은 일본말을 유창하게 했다고 한다(‘삼현주옥 三賢珠玉’).

정렴이 과연 언제 어디서 일본어를 배웠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사람들은 정렴이 대단한 인물이라 믿었고, 특히 지관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언젠가 한 번은 정렴의 사촌이 아버지 묏자리를 부탁하러 왔다고 한다.

사양하던 끝에 정렴은 묏자리 하나를 점지해 주었는데, 땅을 파자 온통 물구덩이였다.

모두들 당황했으나 정렴은 시종일관 그 자리만을 고집했다.

결국 구덩이에 큼지막한 돌멩이 몇 개를 채워넣고 장례를 마치게 됐다.

이것은 이른바 수중명당(水中明堂)이었다.

훗날 무덤 안에 채워넣은 돌멩이 숫자만큼 무덤 주인공의 자손들이 문과에 급제했다는 것이다.

 

정렴이 수중명당을 정했다든가 일본어에 능통했다, 또는 100리 안팎에서 일어난 일을 모두

알아 맞혔다는 이야기는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가서 유구의 사신을 만난 것, 주역과 풍수지리에 밝았던

점 그리고 도가적 수련을 즐겼던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정렴은 점술에 능했기 때문에 그에 관해 많은 전설이 남아 있다.

그 중 특이한 이야기 하나가 있어 간단히 소개할까 한다.

 

본래 그는 슬하에 몇 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하는데 아이들을 좀체 귀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내의 불평이 무척 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정렴의 어린 자녀들이 한꺼번에 죽어버렸다. 가족과 친지들은 깜짝 놀라서 죽은 아이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큼지막한 구렁이였다.

소년 시절 정렴은 길을 가다 우연히 구렁이 하나를 죽인 적이 있었다 한다.

그 구렁이가 정렴에게 복수하려고 둔갑술을 빌려 그의 자녀로 태어났다.

그는 이런 사실을 미리 눈치챘기 때문에 아이들을 전혀 귀여워하지 않았다 한다.

▲ ‘북창비결’을 지은 정렴의 위패는 충북 청원군 문의의 노봉서원에 모셔져 있다. 사진은 문의현의 옛모습을 재현해놓은 문의문화재단지 모습.
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구렁이가 변해 아이들이 될 이치는 없다. 방금 말한 이야기는 정렴이 세상살이에 만족하지

못해 후세에 혈육을 남기려 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풀이해야 맞을 것 같다.

뒤에 다시 말하듯 정렴은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과 불화하였다.

정렴은 여러 면에서 재능이 빼어났지만 불우했고, 그래서인지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때이른 죽음에 대해서도 이를 미화하는 설화가 있어 주목된다.

요컨대 정렴은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떼어줬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선조 때 정승을 지낸 윤두수(尹斗壽)가 정렴의 친한 친구였다고 한다.

그런데 윤두수는 어디선가 자신이 단명하다고 들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다 아는 친구 정렴에게 매달렸다. 정렴은 친구의 간청을 외면할 수 없어 마침내 신선들이 모여 있는 곳을 알려주며 찾아가서 수명을 빌라고 했다.

덕분에 윤두수는 수명을 연장하게 됐다. 그러나 신선들은 천기를 누설한 죄로 정렴의 수명을 줄이기로 했고, 정렴은 친구를 위해 사십대 초반에 세상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만일 정렴이 오래 살았더라면 윤두수에 못지않은 큰 인물이 되었을 것이라는 기대가 후대에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이런 전설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정렴의 능력은 특히 방외(方外)에서 빛났던 모양으로, 이능화(李能和)는 ‘조선도교사’에서

정렴을 김시습·권극중·이지함·곽재우에 비견되는 조선 최고의 도사로 손꼽았다.

 

 

정렴은 정치에 희생된 불우한 인물

 

위에서 간단히 암시했듯이 도사 정렴은 말년이 무척 불우했다. 그가 39세 되던 해, 명종 즉위년(1545)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아버지 정순붕(鄭順朋)은 윤원형, 이기 등 세력자들과 함께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많은 선비들을 억울하게 죽이고 귀양보냈다. 정순붕은 이른바 소윤의 핵심세력으로서 명종 초년

세도가로 행세했다. 하지만 정렴은 이런 아버지에 대해 불만이 컸다. 그는 사화로 인해 명망

있는 선비들이 억울하게 당하는 것을 슬프게 생각했다. 아울러 권력을 잡기 위해 그런 일을

일으키는 아버지의 말로가 평탄하지 못할 줄을 미리 내다보았다.

그랬기 때문에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정렴은 곧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살다시피 했다.

그는 아버지를 만류해 사화를 막아내지 못하였다는 자괴감과 세상에 대한 불만을 술과 시로

달래며 소일했다.

 

그런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확인된다.“정렴은 성품이 명민하고 착한 일을 좋아하여

마음속으로 자기 아비가 하는 짓을 그르게 여겨 일찍이 간(諫)하여 말렸으나 아버지 정순붕이 따르지 않았다.

동생인 정현이 부자간에 이간질하여 온 집안에 변고가 일어나려 하였다.

정렴은 아버지의 이해를 받지 못한 채 양주(楊州)의 시골집에 가 있거나 산사(山寺)에 머물러 지낸 것이 실로 여러 해였다(명종 즉위년 8월28일 무오).

또 다른 기록에 보면, 아버지 정순붕은 둘째아들 정현과 공모하여 큰아들 정렴을 죽이려고까지 했다.‘집안에 변고’란 이런 비극적인 사건을 일컫는 말이다.

요컨대 정렴은 현실정치에 관해 아버지와 다른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하마터면 죽음을 당할

지경이었다.

아버지와 아우로부터 버림받은 정렴은 산중에 파묻혀 지내다가 슬픔을 안고 죽어버렸던 것이다. 그것은 비극이었고,‘이 점을 지금까지 선비들은 슬퍼하고 있다.’고 할 지경이었다(실록,

명종20년 10월29일 임진).

자세히 알고 보니 정렴은 너무도 불우한 재사였다.

집안의 저버림을 당한 그는 불교와 도교에 침잠했고, 천문, 풍수지리, 수학, 음악 및 미술로

마음을 달래려 했던 것이다.

그의 초인적 능력에 대한 호평은 대부분 사후에 내려진 것이었을 뿐, 그의 인생은 처참했다.

 

 

‘북창비결’은 덕과 지혜를 최우선으로!

 

‘북창비결’은 말세의 한 가지 조짐을 음주의 폐습과 음란한 풍토에서 찾았다.

이런 예언에서 인터넷 성매매와 호스트 바가 횡행하는 오늘날의 세태를 떠올릴 수 있지만

그런 해석은 지나치게 현재적인 입장을 반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북창비결’에선 말세가 되면 남쪽에서부터 나라가 망한다고도 했다. 좀더 정확히 말해 “물과

물이 있는 서남쪽의 독이 궁궐에까지 미칠 것”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의 서남쪽이라면 제주도와 전라남도에 해당한다.

이 구절은 조선 말기의 동학농민운동 또는 이재수의 난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하는데 반드시

이런 사건을 미리 염두에 둔 예언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많은 경우 딱 들어맞는 예언은 도리어 그런 사건이 일어난 뒤 소급해서 조작된 예언서라는

증거가 될 뿐이다.

어쨌거나 말세가 되면 ‘쥐의 아비 시체가 온 나라에 누워 있고, 뱀의 형 집 연기가 천리 밖에서 나리라.’고 했다. 쥐의 아비와 뱀의 형이 누군지 모르겠다.

혹시 쥐의 해와 뱀의 해보다 한 해 앞선 시점 또는 해당 되는 해의 첫머리에 전쟁이 일어난다는 경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참고로, 임진왜란은 뱀해보다 한 해 전인 용해에 일어났고,

병자호란은 쥐해에 있었다.‘북창비결’의 독자들은 이 두 전쟁이 정확히 예언됐다며 이 예언서가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런 환란이 닥치면 ‘여덟 줄의 백성이 다섯 달 동안 시체로 쌓일 것이다.

그 때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을 것이요, 제비와 기러기가 가고 오는 시절이로다.’

요점은 말세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비명횡사한다는 것이다.

방금 인용한 구절을 나름대로 짐작해보면 이렇게도 풀이된다.‘소나무와 잣나무’는 임진왜란 때 명군(明軍)을 이끌고 와서 싸운 이여송(松)과 이여백(栢) 형제를 가리킨다. 그런가 하면,‘제비와 기러기가 가고 오는’ 것은 병자호란 이후 포로와 사신들의 연행(燕行)길이 잦아졌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연행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제비가 간다.’는 것이다.

당시 전쟁포로와 사신 행차가 기러기 떼마냥 연이어 서울과 연경을 오갔기 때문에, 이를 암시하는 구절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북창 정렴이 과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날 것을 정확히 예언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북창비결’에서 발견되는 흥미로운 점은 난세를 극복할 사람이 누군가 하는 점이다.‘재물에

인색한 사람은 먼저 집에서 죽고, 아무 재주도 없는 선비는 저절로 길에서 죽는다.’ 남에게 베풀기 좋아하는 사람, 참된 지혜를 갖춘 사람만 난세에도 살아남는다는 것이 ‘북창비결’의 대답이다. 지혜와 덕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애써 십승지(十勝地) 같은 데를 찾아 피난해도 결국 아무 ‘쓸데가 없다.’고 단언했다. 그런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하늘에서 떨어져 죽는 기러기 신세를 후회하리라.’고 했다. 정리하면,‘북창비결’은 덕과 지혜를 처세의 으뜸으로 친다는 사실이다.

표현은 다르지만 비슷한 취지의 주장이 ‘정감록’에 실린 다른 예언서에서도 전혀 없지는 않다. 어쨌든 말세에 피난할 장소를 거론하면서도 정말 중요한 것은 인간의 덕성을 온전히 갖추는

일이라고 말한 점은 인상적이다.

 

 

곡식이 풍부한 평야지대로 가라!

 

그러면서도 ‘북창비결’은 말세의 피난지에 상당한 비중을 할당하고 있다.‘정감록’에 실린 다른 예언서들과 마찬가지로 피난지를 강조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만일 차이가 있다면 ‘북창비결’이 선호하는 피난지역이 다르다는 점이다.‘충청도와 강원도는 살 수가 없고, 경기도 동쪽에서는

어육(魚肉)이 난다.’ 다른 예언서에서도 강원도, 특히 오대산 이북을 위험지역으로 선포한 점은 쉽게 확인된다. 하지만 강원도에 이웃한 경기도 동부 및 충청도까지 위험지역으로 본 것은

‘북창비결’의 특징이다.

‘바라건대 내 자손들은 산에 올라가지 말고 물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흰 것에 의지하는 자는

살겠고, 풍년 든 곳에 가까이 있으면 살리라.’ 이른바 십승지란 태백산, 소백산, 덕유산, 지리산 등 백두대간의 명산대천을 말하며 다른 예언서에서는 피난지로서 중시된다.

그러나 ‘북창비결’엔 그와 전혀 다른 의견이 제시돼 있다.

‘흰 것에 의지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풍년’을 위기 극복의 상징으로 보았던 점으로 미루어 물산이 풍부한 평야지대를 선호했다는 증거로 해석된다.‘돈과 곡식이 쌓인 시골에서 마을 사람들을 구조할 것이네.’라고도 했다. 이런 점으로 보아 ‘흰 것’은 백미, 즉 흰쌀이나 당시의 화폐였던 무명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북창비결’이 말세의 조짐을 흉년에서 읽었던 사실을 머릿속에 떠올리게 된다. 흰쌀과 흰 베가 많이 나는 곡창지대라면 우리나라의 지리적인 조건상 서쪽일 것이다.

그래서였는지 ‘북창비결’은 말세에 ‘기강은 서쪽에서 지탱한다.’고 하였다.

서쪽의 곡창지대라면 전라북도의 김제 만경평야를 비롯해 충청남도의 내포평야, 경기도의

김포평야, 황해도의 연백평야 등이 생각난다. 그런데 황해도는 처음부터 고려대상에서 제외된다. 조선시대는 서북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고,‘정감록’은 어느 예언서에서나 이를 기정사실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밖에 ‘북창비결’은 경기도와 충청도 역시 피난지로 삼지 말라고 심각하게 경고했다. 그런 점을 고려할 때 나라가 지탱해야 될 서쪽은 김제 만경 평야로 대표되는

호남평야였을 것으로 풀이된다.

마땅한 피난지와 관련해 ‘명승지(名勝地)라는 곳이 먼저 혹독한 화를 당한다.’고 말한 대목도

유념할 만하다.

정감록의 다른 예언서와는 전적으로 달리 ‘북창비결’은 십승지 자체를 부정한 것 같은 느낌이 들 지경이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생각할 이유는 없다.

‘양쪽으로 끊어진 산맥, 물이 깊은 곳 섬에 숨어라.’고 말한 구절이 있다.

명산대천 또는 섬에서 말세의 피난처를 구한 흔적이 다소나마 감지된다.

그런 충고는 산에 올라가지 말고 물에 들어가지 말라던 ‘북창비결’의 또 다른 구절과 모순된다. 하지만 내용상의 이 같은 모순은 예언서의 역사를 감안할 때 도리어 당연할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예언서란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베껴 쓰는 과정에서 조금씩 개작(改作)돼온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예언서의 논지가 중층적이거나 상호 배치된 경우가 없을 도리가 없다.

 

 

 

한국 최고의 예언가 도선과 정감록

 

‘정감록’엔 ‘도선비결’(道詵 訣)이 포함돼 있다.

한국 풍수지리설의 원조로 평가받는 신라말의 선승(禪僧) 도선의 저작이란 이야기인데,

도선(827∼898)의 스승이라는 중국 당나라의 고승 일행(一行)이 한국의 미래를 예언하는

 형식이다.

 

 

“임진년에 섬 오랑캐가 나라를 좀 먹으면 송백(松栢)에 의지하라. 병자년에 북쪽 오랑캐가 나라 안에 들끓으면 산도 불리하고 물도 불리하다. 궁궁(弓弓)이 이롭도다.” ‘정감록’ 곳곳에 나오는 주장이 ‘도선비결’에도 그대로 나온다. 정씨가 세 이웃의 도움을 받아 세 아들과 함께 계룡산(鷄龍山)에 도읍한다는 내용도 ‘도선비결’에서 발견된다. 요컨대 고승 도선이 이미 9세기에 조선왕조의 멸망과 정씨의 계룡산 도읍을 예언했다는 것이다.

▲ 영암 월출산
힘찬 바위 봉우리를 자랑하는 전남 영암의 월출산. 도선 국사는 이 산의 영험한 정기를 받아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그는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한국의 중요 산천을 답사하며 명당이 될 만한 곳을 일일이 찾아냈으며, 고려 태조 왕건은 후손들에게 남긴 ‘훈요십조’에서 도선이 말한 곳 외에는 단 한 곳도 새로 절을 세워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따르면 도선은 고려왕조의 등장을 정확히 예언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정감록에 실린 ‘도선비결’에는 고려에 관한 예언이 한 줄도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조선왕조와 정씨왕조의 계승만 언급되어 있다. 과연 ‘도선비결’을 도선이 직접 저술한 것으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도선은 누구기에 사후 1000 년이 지난 다음에도 정감록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예언서의

저자로 논의되는지가 문득 궁금해진다.

예언가 도선의 정체를 알아 보고, 그가 보급한 풍수지리설이 국운의 예언에 관여하게 된

역사적 과정을 조사해 보자.

 

 

신라 말 풍수지리설은 예언의 중심으로 떠올라

 

도선은 출생부터 남달랐다고 한다. 조선 세종 때 채집된 민간의 전설에 따르면, 도선은 하늘이 점지한 아이였다. 이야기는 영암에 사는 최씨의 밭에 열린 오이에서 시작된다.

문제의 오이는 길이가 한 자를 넘어 보는 사람마다 신기하게 여겼다는데 하루는 최씨의 딸이 그 오이를 몰래 따먹었다. 그러자 저절로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게 되었다.

최씨는 아비 없는 자식을 낳았다며 딸을 꾸짖고 아이를 대숲에 버려 두었다.

여러 날 뒤 딸이 대숲에 가서 살펴 보니 비둘기가 날개로 아이를 감싸주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고 딸은 아이를 데려다 길렀다.

아이는 장성하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는데 이름을 도선(道詵)이라 하였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 전라도 나주목 영암군).

 

아이를 비둘기가 날개로 감싸주었다는 대목은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설화를 연상하게 한다.

물론 주몽과 다른 점도 있다. 이를 테면 주몽이 하늘의 손자라면 도선은 땅의 손자다.

오이는 땅의 기운이 열매 맺힌 것이라 땅의 아들로 봐야 하며, 그것도 매우 큰 오이라 하였으므로, 보통 아들은 아닌 것이다.

이를 테면 땅 임금의 손자나 다름없는 도선은 태어날 때부터 세상에서 제일가는 지관(地官)이 되게끔 예정되어 있었다고 봐야 한다. 물론 이 설화라는 것은 후대에 지어낸 이야기가 분명하다. 그러나 그만큼 도선이 지관으로서 명성이 유별났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 도선국사 영정

역사상 도선이 예언가로 처음 등장하는 것은 그가

쉰 살쯤 되던 서기 876년께였다.

당시 신라는 내란기였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도선은 하늘의 명을 받아 송악군으로 갔는데 마침

왕건의 아버지 융건이 집을 짓고 있었다.

도선은 집을 다시 고쳐 지으라며 왕건의 출생을 예언했다. 그리고는 한 권의 책을 건네주면서 훗날 왕건이 장성하면 이 책을 꼭 전하라고 부탁하였다. 때가 되어 왕건은 그 책을 펼쳐보았고 자신이 천명을

받아 왕이 될 줄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내용은 고려 전기에 최유청이 쓴 도선의 비문에 자세히 나와 있다(先覺國師 證聖慧燈 塔碑).

 

정리하면, 도선은 왕건의 출생과 고려 건국을 정확히 예언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도선의 예언은 한국 고대의 예언과는 색다른 방식에 근거했다.

고대의 예언은 해, 달, 별 등 천체의 움직임이나

동물, 식물의 변화를 통해 앞일을 내다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도선은 그런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한 가지 새로운 요소를 부각시켰다. 바로 풍수지리설이었다.

왕건의 아버지에게 집을 고쳐 지으라 했을 때 그가 한 말이 흥미롭다.

“이곳은 지맥이 임방(壬方)인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수모(水母)의 나무를 줄기로 삼다가 말머리 명당에서 그칩니다. 그러므로 그대 또한 물의 운명이군요. 마땅히 물의 대수(大數)에 따라서

집을 지어야 합니다.36구라야 천지의 대수에 부응하겠고, 그러면 내년에 반드시 성자(聖子)를 낳게 됩니다. 부디 아이의 이름을 왕건이라 하십시오.” 도선의 이 말은 ‘고려사’ 세계(世系)에

실려 있다.

단 몇 줄밖에 안 되는 간단한 내용이지만 거기서 우리는 도선의 사상적 근원을 뚜렷이 알 수

있다. 그는 풍수지리설에 음양오행설을 단단히 결합시켰던 것이다.

집터의 성격을 물(水)로 읽었고, 주인의 운명도 그와 똑같은 것으로 본 것이 그 증거다.

더욱이 주인이 살 건물까지도 물이 되어야 한다면서 36칸 집으로 고쳐짓기를 요구했다.

오행설에서는 물을 1 또는 6으로 본다.

그 가운데 1은 작은 물,6은 큰물이다. 따라서 큰물의 조합은 6에 6을 곱한 36이 되므로 ‘36구’설을 폈던 것이다. 도선은 그 명당 기운을 살리려면 집도 터의 성격에 맞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 ‘성자’ 즉, 미래의 임금을 아들로 얻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도선은 왕건 집안이 살던 송악과는 무관한 사람이었다.

그는 선종(禪宗)의 일파인 지리산 동리산의 혜철(慧澈) 스님의 제자로 전남 광양의 옥룡사(玉龍寺)에 오랫동안 주석했다. 줄곧 거기 머물다가 후백제가 건국된 지 7년 만인 898년에 입적하였다. 궁예의 태봉이 건국되기 3년 전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세력 판도를 기준으로 보면 도선은 견훤의 세력권 내에 있었다. 그는 평생 견훤과 어떠한 마찰도 없었다. 그런 도선이 정말 왕건의 가문과 밀접한 관계였는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도선은 왕건가문보다 견훤과 밀접한 관계

 

도선의 행적에 관한 ‘고려사’의 기록은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렵다는 말이다.

또 다른 예로 ‘고려사’는 도선이 중국에 유학해 일행에게 풍수지리를 배웠다고 했지만 그것은 명백한 오류다.

도선은 중국에 유학한 적이 없었다.

참고로, 도선의 스승 혜철과 제자 경보(慶甫,868∼948) 두 사람은 유학했다.

 

왕건 가문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것은 다름 아닌 경보였다.

그는 후백제가 망하기 직전에 고려태조와 접촉하였다.

그럼 그 때까지는?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도선이든 그 제자인 경보든 후백제를 위해 봉사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당대 최고의 지관이었던 그들을 후백제의 왕 견훤이 가만히 내버려뒀을 리가 없다. 만일 경보가 오래 전부터 왕건을 추종했다면 후백제 영토 안에서 살아남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어쨌거나 분명한 사실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던 무렵부터 도선의 제자들이 고려왕조에 봉사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와 더불어 도선과 고려 왕실의 관계는 차츰 윤색되기

시작했다. 도선 일파가 지관으로서 워낙 이름이 높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밖에도 통일신라 말기 또는 후삼국 시기에는 이름난 지관들이 상당수 있었다.

역사책에 이름이 기록된 신라의 감간(監干) 팔원(八元)은 좋은 예다.

팔원은 왕건의 조상 강충을 찾아가 “군(郡)을 산의 남쪽으로 옮기고 산에 소나무를 심어서 바위가 드러나지 않게 하면, 삼한을 통합할 이가 그대의 집안에서 나올 것이다.”라고 예언했다(고려사, 세계). 이것은 풍수지리설에 근거해 새 왕조의 출현을 예측한 최초의 사례였다.

본래 민둥산이었던 부소산에 소나무를 심어 땅의 기운을 북돋웠다든가 그래서 지명이 송악이 되었다든가 하는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이 이야기의 중요성은 도선에 앞서 유명한 지관들이

있었고 그들 역시 풍수지리설을 통해 복잡한 사회현실에 개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도선의 제자들, 고려의 예언계를 평정하다

 

도선이 죽은 지 150년가량 되던 11세기 중반, 그가 남겼다는 비기(記)가 느닷없이 등장했다.

‘도선송악명당기’(道詵松嶽明堂記)라는 비결이었다.

비결 가운데 “서강(예성강) 가에 군자가 말을 몰고 있는 모양을 한 명당이 있다.

태조가 통일한 병신년(936)으로부터 120년이 되는 해에 이곳에 건물(이궁)을 창건하라.

그러면 왕업이 연장될 것이다.”(西江邊 有君子御馬明堂之地.自太祖統一丙申之歲 至百二十年 就此創構.國業延長)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근거해 조정에서는 부랴부랴 임시 궁궐을 짓는다(‘고려사절요’, 권 4).

어느덧 도선은 고려왕실의 지속적 번영을 위해 동원되는 인물이 되었다.

이것은 물론 도선의 후예를 자처하는 고려의 술관(術官)들이 나서서 하는 일이었다.

그 무렵의 가장 대표적인 술관은 김위제였다.

그만하더라도 도선과의 학맥을 무척 강조하는 편이었다.

 

‘고려사’에는 “신라말에 도선이란 스님이 있었는데, 당 나라에 들어가서 일행(一行)에게 지리의 법을 배웠다. 돌아와서는 비기를 지었다. 그것이 김위제에게 전해져 김위제는 그 술법을 배웠다.”고 기록돼 있을 정도다. 김위제는 도선이 지었다는 ‘도선기’(道詵記)라는 예언서를 인용해 가며 당시의 남경(南京) 즉,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자고 주장하였다.

“고려에는 세 개의 서울이 있게 되리라.

송악은 중경, 목멱양은 남경, 평양은 서경이 되리라.11,12,1,2월은 중경에 머무르고 3,4,5,6월은 남경에 머무르며,7,8,9,10월은 서경에 머물러라. 그러면 36국이 고려의 천자에게 조공을 바칠 것이다.” 도선의 예언서에 나오는 구절이었다.“개국 후 160여년에는 木覓壤(한양)에 도읍할

것이다.”라고도 했다. 그러나 김위제는 한양으로 천도까지 할 필요는 없고 삼경을 돌아가며

머물면 나라의 운수가 장구할 거라고 주장했다.(‘고려사’ 권 122)

 

한강 북쪽에 도읍 정하면 나라 부흥

 

그밖에도 김위제는 도선이 남긴 또 다른 예언서라면서 ‘도선답산가’(道詵沓山歌)를 인용하였다. 그에 따르면, 한강의 북쪽에 도읍을 정하면 “나라가 길이 영원하며 천하의 온 나라가 와서 조공을 바치게 되고 왕족이 창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일 한강을 건너 남쪽에 서울을 두게 되면 나라가 분열되어 나라가 한강을 경계로

이분된다고 말했다.(‘고려사’ 권 122)

 

또한 김위제는 도선이 지었다는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를 인용하면서 삼각산 아래 왕궁을 지으면 신하들 사이에 다툼이 없어지고, 왕실재정이 저절로 풍부해지며, 사방의 인재들이 조정에 가득 차게 된다고 했다. 한 마디로 국정의 운영이 순조롭게 되며 온 나라들이 조공을

바치러 온다고 극찬했다.

요약하면, 한양 즉, 오늘날의 서울은 최고의 명당이라는 것이고, 오늘날 서울의 강북 지역이야말로 나라의 중심이어야 된다고 했다.

만일 강남 또는 한강 이남이 수도로 지정될 경우 나라가 망하고 만다는 식의 이야기다.

이를 현실에 적용한다면, 최근 진행 중인 신행정 수도 같은 것은 전혀 불필요하며, 부동산 개발로 문제가 돼 있는 강남이고 판교고 개발해선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염두에 두면서 서두에서 소개한 이른바 ‘도선비결’의 내용과 잠시 비교해 보자.

다시 말하면 ‘도선비결’은 정씨가 계룡산에 도읍한다는 내용이었다.‘도선답산가’,‘도선기’ 등과는 아무런 유사성도 찾을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예언서다.

 

좀더 꼼꼼히 살펴 보면 고려시대에 등장한 도선의 예언서들도 내용상 상호 모순 관계에 있다.‘도선송악명당기’는 고려의 수도는 어디까지나 개경이라는 입장을 밝힌 것인데 ‘도선기’는 3경설을 편다. 이에 비해 ‘도선답산가’와 ‘삼각산명당기’는 한양천도를 적극적으로 주장한다.

완전히 다른 내용을 담고 있는 예언서들이다. 이 모두를 고승 도선이 지었다고 볼 수 있을까?

 

그것은 도선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지은 것으로 봐야 옳을 것이다.

김위제를 비롯한 고려의 술관들은 도선이 남긴 풍수지리와 음양오행설의 전통 위에서 국가가 당면한 모든 문제들을 풀려고 하였다. 그러다 보니 국가적으로 중대한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들은 도선의 권위를 빌렸다. 도선의 예언이라고 내세우면 모든 것이 합리화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능력은 과대평가되었다. 도선은 기껏해야 고려왕조의 출현에 관심을 가졌을 텐데,

그의 제자인 후대의 술관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빙자해 국가의 모든 현안에 개입하였다.

 

고려 후기까지 줄곧 그런 전통이 이어졌다. 예컨대 원나라 생활에 익숙한 충열왕이 중국을

본떠 높은 건물을 지으려 하자 술관들은 그에 반대했다. 반대의 이유는 물론 도선의 예언이었다. 술관들은 ‘도선밀기’(道詵密記)를 들먹였다.“산이 드물면 높은 집을 지어라.

산이 많거든 낮은 집을 지어라. 산이 많으면 양이다. 산이 드물면 음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산이 많아 만일 높은 집을 짓는다면 반드시 손해를 가져온다.”

만일 이말 대로라면 63빌딩 같은 것은 당장이라도 허물어야 할 판이다.

 

도선의 제자들은 고려 태조 때부터 높은 건물을 금지해온 것이 고려의 국법이며 이는 바로

자기네 스승의 가르침이었다고 말했다. 만일 “도선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태조의 명령을 좇지 않는 것이 되고, 그 결과는 엄청난 재앙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했다(고려사, 권 28) 과연 도선이 고층건물을 반대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술관들의 이런 견해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국가의 비용이 절약되는데다가

백성들의 노역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도선의 제자들은 대대로 고려의 술관으로 위세를 떨쳤기 때문에 도선의 명성은 세월이 갈수록 더욱 높아졌다. 따라서 이른바 도선의 예언서는 어느 것이나 일단 위작(僞作)이라고 봐야 한다. 사실 고려시대에는 예언서를 포함한 음양서(陰陽書) 일반이 조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주역은 전문가인 술관과 스님들이었고, 문장에 능한 문사들이 보조적인 역할을 떠맡았다. 그러나 고려시대만 해도 이런 책들을 생산, 소비하는 계층은 수도 개경의 특수층에 국한되었다.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도선의 명성

 

조선 건국 직후에도 도선의 예언서는 결정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태종은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그 때도 도선이 이용되었다. 당시 천도 문제를

실질적으로 담당한 이는 술관 이양달(李陽達)과 정승 하륜(河崙) 등이었다.

하륜은 ‘도선비기’를 존중해 “한수가 명당으로 들어온다는 말”(漢水入明堂之語)에 주목했다.

한편 이양달은 ‘도선비기’에 “서쪽에 공암 있고 붉은 색깔로 글씨 쓴 돌 벽이 있다.”는 구절에

암시를 받아 인왕산에서 붉은 글씨를 찾았고, 결국 경복궁터를 정하게 되었다.(‘필원잡기’, 권 2)

고려의 건국을 예언했다는 도선이 이제는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일어선 조선왕조의 안정과 발전을 보장해 주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러다가 조선왕조의 기틀이 어느 정도 잡히자 도선의 예언서는 폐기처분되었다.

세조는 ‘도선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을 금지시켰던 것이다(실록, 세조 3년5월26일 무자). 이미 한 두 차례 강조했듯이 고대로부터 국가는 예언을 독점하고 통제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예언이 ‘불순분자’들의 수중에 들어가면 사회적 혼란이 초래된다는 판단에서였다.

더욱이 성리학을 국시(國是)로 삼은 조선왕조의 경우, 예언은 점차 악덕으로 간주되었다. 그

결과 15세기 후반 이래 국가의 공식 기록에서 도선에 관한 언급은 사라졌다.

 

그러나 일반 민중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에게 도선은 영원한 스승으로 남았다.‘정감록’에

‘도선비결’이 실리고, 도선의 출생에 대한 신비한 설화가 만들어지게 된 것은 그 증거다.

사람들의 눈에 비친 도선은 “신(神)이 통한 밝고 지혜로운 스님이었다.”(성종 16년1월8일

신묘). 도선은 새 세상이 동터 옴을 알릴 만한 참된 예언가였던 것인데, 이런 기대는 그가 이

땅에 풍수지리설을 최초로 집대성하였던 데서 비롯되었다.

고려시대 도선의 제자들은 풍수지리설을 국가운명을 예언하는 도구로 정착시켰으며,

이것은 한국의 고유한 전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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