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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신화 설화

축의시대 (2) - 카렌 암스트롱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6.08.17|조회수213 목록 댓글 0


축의시대 - 종교의 탄생과 철학의 시작



인간의 창조성이 가장 뜨겁게 폭발했던 '축의 시대'

문명 진화의 결정적 순간에 관한 인문학적 통찰의 향연

 

축의 시대는 대략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200년까지 세계의 주요 종교와 철학이 탄생한 인류사의 가장

경이로운 시기를 다룬 역사서이다.

이 시대에 중국에서는 공자, 묵자, 노자가 활동했고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 자이나교, 고타마 싯다르타가

등장했으며, 이스라엘에서는 엘리야, 예레미야, 이사야가 나타났고 그리스에서는 소포클레스, 소크라테스, 플라

톤이 차례로 태어났다.

이 책의 저자는 이 시기가 인류의 정신적 발전에서 중심 축을 이룬다고 믿는다.

 

이 책에서 저자는 '축의 시대' 네 민족(인도, 이스라엘, 중국, 그리스)이 서로 교류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비슷한

시기에 놀라운 사유의 혁명을 일으켰는지를 탐구한다.

특히 네 민족의 정신적 변화 과정을 나란히 배치하고 이를 횡단하며 각각의 문명이 '축의 시대'를 통과해 가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전개한다.

이 책은 인류사의 수수께끼로 불리는 이 놀라운 문화적 평행 현상을 축의 시대의 문명 벨트를 횡단하며 재조명한다.

 

 

 

머리말


안타깝게도 우리가 서로 해치고 상처를 내는 능력은 우리가 이룬 특별한 경제적.과학적 진보에 뒤처지지 않고

함께 발전해 왔다.

우리에게는 호전성을 제어하여 안전하고 적절한 테두리 안에 가두어 둘 지혜가 부족한 것 같다.

 

이제 우리는 땅을 성스럽게 여기지 않고 단순하게 자원으로 보기 때문에 환경 재앙의 위험에 처해 있다.

뛰어난 과학 기술적 재능에 뒤처지지 않는 어떤 정신적 혁명이 없으면, 이 행성을 구하지 못할 것같은 느낌이

든다.

 

아우슈비츠, 르완다, 보스니아, 세계무역센터 파괴는 우리가 모든 이간 한 사람 한 사람이 신성불가침한 존재라는

감각을 잃어버릴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계시하는 음울한 예이다.

 

이런 곤경에서 빠져나오려 할 때, 나는 우리가 독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가 축의 시대(Axial Age)라고 부른

시기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축의 시대는 기록된 역사 가운데 지적.심리적.철학적.종교적 변화가 가장 생산적으로 이루어졌던 때로 꼽힌다.

 

예를 들어, 랍비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은 모두 축의 시대에 발전한 전통이 나중에 개화한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보겠지만, 이 세 전통은 모두 축의 시대의 전망을 재발견하고 그것을 자기 시대의 환경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언어로 훌륭하게 번역해냈다.

 

사실 어떤 예언자나 철학자가 강제적인 교리를 고집하기 시작하는 것 자체가 보통 축의 시대가 동력을 잃는다는

신호였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행동하느냐였다.

종교의 핵심은 깊은 수준에서 자신을 바꾸는 행동을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스스로 변화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제자들이 유익한 가르침을 얻어 정신이

고양된다는 느낌을 약간 맛본뒤 새로 힘을 얻어 평소의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돌아가게 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목적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인간을 창조하는것이었다. 모든 현자들이 공감과 자비의 영성을 설교했다.

 

실제로 사람들이 자신의 지평과 공감을 제한하기 시작한다는 것 또한 축의 시대가 끝나간다는 표시였다.

각각의 전통은 각기 그 나름의 방식으로 황금률’- ‘네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 하지 마라’ -을 정리해냈다.

축의 시대 현자들에게 종교란 정통적인 믿음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신성한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었다.

 

축의 시대 정신은 그런 종류이 순응이 사람들을 열등하고 미성숙한 자아에 묶어 둔다고 주장한다.

축의 시대의 선구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건물을 지을수 있는 토대를 닦았다.

그 결과 각 세대는 이들이 처음 제시한 통찰을 자신의 독특한 환경에 맞추려고 노력했는데, 이것은 바로 오는날

우리의 과제이기도 하다.

 


1장 축의 시대 문명 벨트 (기원전 1600-900년경)


아라아인은 그들이 타인과 나누어 갖고 있다고 여기건 이 영혼을 깊이 존중하는 태도를 완전히 잃어비리지 않았

으며, 이것이 그들의 축의 시대의 핵심 원리로 자리 잡게 된다.

 

자기 희생 없이는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어떤 진보도 있을 수 없었다.

이것 또한 축의 시대의 원리 가운데 하나가 된다.

 

전통적인 아리아인은 당황하고 겁을 먹었다. 방향 감각을 완전히 상실했다. 삶이 엉먕으로 뒤집혔다고 느꼈다.

 

어쨌든 이 의문은 통찰력있는 한 사제의 관점이 었는데, 그는 기원전 1200년경 아후라 마즈다가 자신에게 초원

지대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을 위임했다고 주장했다. 사제의 이름은 조로아스터였다.

 

조로아스터는 이 환상을 통해 아후라 마즈다가 단순히 위대한 아후라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최고신임을 확신했다.

조로아스터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마즈다는 이제 자연 세계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신, 다른 신과는

종류가 다른 신이 되었다. 그렇다고 딱히 일신교, 즉 유일무이한 하나의 신에 대한 믿음은 아니었다.

 

조로아스터는 자비롭고 선한 모든 것의 원천이 되는 하나뿐인 신적 존재가 있다면, 습격자들의 잔혹 행위를 부추

기는 악한 신도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곧 아곤(agon 경쟁)이 고대 종교의 공통된 특징이었음을 보게 될 것이다.

 

한 전승에 따르면 조로아스터는 그가 낡은 종교를 거부하는 데 격분한 사제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에 조로아스터가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우리는 전혀 모른다.

어쨌든 기원전 2000년대 말에 아베스타계 아리아인은 남쪽으로 이주하여 이란 동부에 자리를 잡았고, 이곳에서

로아스터교는 국교가 되었다.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정보 출처는 산스크리트로 작성된 제의용 문서인데, 전체적으로 베다’(지식)라고 알려져

있는 것이다.

베다의 언어는 아베스타어와 아주 비슷하고, 문화적 전제들은 <가타>와 아주 밀접하기 때문에 베다는 거의 틀림

없는 아리아인의 경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리아인 이민자들은 고대 도시를 재건하거나 제국을 소생시킬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늘 이동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정착 생활의 안전성을 경멸했으며, 요가, 즉 습격을 시작할 때 전차에

말을 멍에로 연결하는 것을 택했다.

인도의 아리아인은 역동적인 종교를 원했다. 그들의 영웅은 이동하는 전사이자 전차를 탄 투사였다.

그들은 점차 조로아스터가 숭배하던 아수라가 따분하고 수동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리아인은 열심히 살고, 열심히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음악, 도박, 술을 사랑했다.

그러나 이런 이른 단계에도 그들은 영적인 천재성을 보여주었다.

펀자브에 도착한 직후 학식있는 엘리트는 베다경전 가운데 가장 유명한 부분인 [리그베다](운문으로 이루어진

지식)의 가장 초기에 속하는 찬가들을 편찬하기 시작했다.

완성된 <리그베다>는 모두 1,028편의 찬가로 이루어졌고, 열 권으로 나뉘어 있었다.

 

아리아인들에게 소리는 늘 신성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 신성한 텍스트에 귀를 기울일 때면 신이 들어 온다고 느

꼈다.

찬가를 암기할 때면 그들의 마음에는 신성한 존재가 그득히 들어찼다.

베다의 지식은 사실 정보의 습득이 아니라, 성스러운 훌림으로 경험되었다.

 

베다의 신성한 지식은 단지 말의 의미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소리에서도 왔는데, 이 소리 자체가 데바였다.

 

아리아인은 초원 지대에서 습격을 시작한 이후로 자신들의 일상 생활의 경쟁적인 분위기를 반영하는 방향으로

제의의 형식을 바꾸었다.

이런 제의 들은 그들의 전투에 영혼을 부여했으며, 지상의 전투와 신성한 원형을 결합하여 전투를 성스러운

활동으로 만들었다. 희생제는 인도 아리아 사회의 영적 핵심이었다.

 

공동첵 필요 이상의 동물이나 작물을 축적하면, 이런 잉여는 태워야했다. 늘 이동하는 유목민 집단이 잉여 생

산물을 보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포틀래치는 사회의 부를 재분배하는 임시변통의 방법이었던 셈이다.

 

현세의 자아를 남겨두고 천상의 대응물과 하나가 되어야 할 때에도 적극적인 자기 주장에 몰두한 것이다.

고대 제의에서 발생하는 이런 역설은 축의 시대에 많은 개혁가들의 관심사가 된다.

 

희생제는 매우 제의적인 분위기에서 아리아의 영웅 코드에 내재한 영광과 공포를 재연했다.

전사의 삶 전체가 식량과 부를 둘러싸고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위험한 경쟁, 즉 아곤이었으며, 이런 경쟁은 죽음

으로만 끝날 수 있었다.

 

리시는 불평한다. “곤궁과 헐벗음과 피로가 나를 아프게 죄어 온다. 내 마음은 새음 마음처럼 파닥 거린다.

쥐가 직조공의 실을 쏠 듯이 근심이 나를 갉아먹고 있다.

이런 허약한 상태는 혼란스러운 사회적 변화가 일어았던 베다 시대 후기의 특징이다.

기원전 10세기에 이전의 부족 내의 평등한 구조가 무너지고, 크샤트리야 라고 알려진 전사 가문으로 이루어진

귀족 계급이 되었다.

그보다 신분이 낮은 씨족 사람들인 바이샤는 습격을 그만두고 농부가 되었다.

 

죽어서 화장을 하면 전사는 희생제물이 되며, 아그니는 그를 데리고 신들의 나라로 간다.

불은 그의 가장 훌륭하고 깊은 자아(아트만)를 대표하며, 불은 아그니이기 때문에 이 자아는 성스럽고 신성했다.

 

후기 베다 시대로 오면서 아리아인은 브라만, 즉 최고의 실재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브라만은 데바가 아니라, 신들보다 더 높고, 더 깊고, 더 기본적인 힘, 우주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모든 요소들을

한데 묶어 그것들이 파편이 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힘이었다.

브라만은 만물이 강해지고 확장될 수 있게 해주는 근본원리였다. 브라만은 생명자체였다.

브라만은 정의되거나 묘사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포괄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브라만 밖으로 나와 그것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었다.

 

그는 태초에 아무것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존재도 비존재도 없고, 죽음도 불멸도 없고, 오직 무차별적인 혼돈

있었다. 이런 혼란에 어떻게 질서가 잡히고 생명력이 생겼을까?

시인은 이 질문에는 답이 있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 창조물이 어디서 태어나고 어디서 오는지 누가 진정으로 알며 누가 선언할 수 있을까?

신들은 이 세상의 창조보다 늦었다. 따라서 이 세상이 언제 처음 생겨났는지 누가 알까?

이 창조물의 첫 번째 기원인 그, 그가 이 모든 것을 이루었는지 이루지 않았는지

가장 높은 하늘에서 눈으로 이 세상을 관장하는 그는 진정 그 답을 안다. - 아니, 어쩌면 모를 수도 있다.

 

마침내 유명한 푸루샤 찬가에서 한 리시는 아리아인의 오래된 창조 이야기를 명상하며 인도 축의 시대의 기초를

닦는다.

는 첫 인간이 희생물이 되어 인류가 태어났음을 떠올린다.

시인은 치 최초의 인간(푸루샤)이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희생제 터로 걸어가 새로 자란 불밭에 누워 신들

이 자신을 죽이는 것을 허용하는 과정을 묘사한.

이렇게 자기를 내주는 행동 떄문에 우주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푸루샤 자신이 우주였다. 모든 것이 그의 주검에서 나왔다.

 

상 왕조의 귀족은 이런 이야기들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들은 문명이 힘겹게 얻어낸 위태로운 성취라는 것을 알았으며, 살아 있는 자들의 운명이 그들 앞에 살았던 자

들의 영혼과 뗄 수 없이 묶여 있다고 믿었다.

 

상나라는 평등한 사회가 아니었다. 위계와 질서를 몹시 따졌으며, 이것은 이후 중국 문명의 특징이 된다.

 

상나라 사람들은 죽은 자의 혼이 위험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망자를 두꺼운 관에 묻었을 뿐 아니라 몸을

옥으로 꾸며 주었다. 또 혼이 빠져나와 산 사람들을 해치지 못하도록 몸의 구멍을 다 막았다.

훗날 축의 시대 철학자의 한 사람인 묵자는 천자인 상나라 왕들의 호사스러운 장례식을 돌이켜 보았다.

그는 엄청나고 천박한 방종과 가엾은 하인이나 가신을 죽이는 제의에 역겨움을 느꼈던 것이 분명하다.

 

주나라는 자신의 조상과 더불어 상의 죽은 왕들도 섬기고 싶었다. 그러나 상의 왕조를 파괴해놓고 어떻게 상의

영혼들을 섬긴단 말인가?

주공의 말에 따르면 상나라 왕들은 부패하여 압제를 일삼았다.

하늘은 백성의 고통을 가엾게 여겨, 상에게 위임했던 천명을 도로 거둔 뒤 새로운 통치자를 찾았다.

중요한 순간이었다. 주나라는 그때까지 도덕성에 관심이 없던 종교에 윤리적 이상을 도입했다.

 

중국인들은 주 왕조 초기 시절을 결코 잊지 못했다.

그래서 축의 시대에도 천명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의로운 통치자를 찾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기후나 환경의 변화로 광범위한 가뭄과 굶주림이 지역 경제를 파괴하면서 분열에 창으적으로 대처할 유연성이

사라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최초의 성경 텍스트들은 기원전 8세기에 기록되었으며, 성경 경전은 기원전 5세기 또는 세기에 결정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도의 현자들이 희생제의 의미를 생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집요하게 그들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를 사유했다.

이스라엘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는 조직화를 위한 상징이 되며, 축의 시대의 발전은 이 상징을 중심으로 이루어

진다.

 

야훼는 족장들에게 이스라엘을 강한 나라로 만들어 주고,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기근이 들어 야곱/이스라엘과 그의 열두 아들(이스라엘 12지파의 창립자)은 이집트로 이주한다.

처음에 그들은 그곳에서 번창했으나 결국 이집트인의 노예가 되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곳에서 400년 동안

고달픈 포로 생활을 한다.

마침내 기원전 1250년경 그들의 신 야훼는 그들을 동정하여 막강한 힘을 과시하며 모세에게 영도를 맡겨 그들

을 해방한다.

결국 학자들은 이집트 대탈출 이야기는 역사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대체로 합의를 보았다.

성경 저자들은 현대 역사가들을 만족시킬 만큼 과학적으로 정확한 이야기를 쓰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존재의 의미를 탐색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만의 정체성을 창조하도록 돕는 서사적 이야기이자 민족의 전설이었다.

 

이 지역의 다른 사람들처럼 이스라엘 사람들도 자신들이 자신들만의 신과 이어져 있다고 느꼈으며, 자신들을

암 야훼측 야훼의 혈족 또는 민족이라고 불렀다.

이스라엘의 중심 숭배 대상은 언약의 궤라고 부르는 수호물이었다.

언약의 궤는 암 야훼를 한데 묶는 조약의 상징이었으며, 이들은 싸움터에 이 궤를 들고 갔다.

 

유월절 축제는 예리고 공격에서 시작된,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위한 성전을 준비하는 행사였다.

예리고의 성벽은 기적적으로 허물어지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소건 양이건 나귀건 모조리 칼로 쳐 없애버렸다.

야훼는 전쟁의 신이었다. 길갈의 축제는 봄 수확때 거행되었지만 풍작을 기원하는 기도는 없고, 오로지 전쟁만

기념했다. 이스라엘의 신은 야훼 시바오트’, 즉 군대의 신이라 불렀다.

 

그들은 신화에 등장하는 태초의 세계에서 신성한 시간에 얻은 승리를 기념한 것이 아니라, 멀지 않은 과거에 인

간의 시간에 거둔 그들은 그렇게 믿었다. - 승리를 기념했던 것이다.

 

야훼가 유일한 신이 되는 것은 기원전 6세기 말이다. 초기에 야훼는 신들의 모임에 속한 신성한 자들또는

의 아들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태조에 엘은 신성한 자에게 각 민족의 수호신 일을 맡겼고, 야훼는 이슬라엘의 신성한 자

로 임명되었다고 하다.

 

이스라엘과 인도에서도 새로운 적대적 땅에서 하나의 사회를 유지해 나가는 일의 불안정성과 어려움 때문에 믿

음에 폭력과 호전적 이미지가 들어왔다.

그러나 사람이란 높은 수준의 긴장을 무한히 유지하며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제의는 그들에게 심연을 보라고 불가능한 것과 맞서도 살아남는 것이 가능하다고 가르쳤다.

기원전 9세기에 축의 시대 민족 가운데 네 번째인 그리스인들은 암흑시대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경험은 제의의 드라마가 고대 세계 사람들에게 역사적 파국과 절망에 창의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을 가르

쳐주었음을 보여준다.

 


2장 불안과 공포의 시대 (기원전 900-800년경)


그러나 기원전 13세기의 위기는 낡은 신앙을 박살냈다.

그리스인은 자신들의 체계가 붕괴하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그 트라우마가 그들을 바꿔놓았다.

 

축의 시대에 네 지역에서 창조된 종교 전통은 모두 공포와 고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들 모두 고난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고난을 완전히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깨달음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이었다.

축의 시대가 시작되기 오래 전인 이초기 단계에도 그리스인은 이미 그 중요성을 이해했다.

 

이 사실은 새포도주를 맛보는 시기인 봄의 안테스테리온에 열린, 술의 신 디오니소스를 기념하는 축제에서 분명

하게 드러난다.

즐거운 봄 축제를 이런 무지막지한 공포를 기념하는 행사로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인뿐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감추어진 신성이다. 이제 더는 자연의 격렬한 힘이 아니라. 소리의 가냘픈 속삭임 속에서 , 작은 산들바람

의 느껴질 듯 말 듯한 움직임 속에서, 소리를 내는 침묵이라는 역설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초월의 순간이다.

야훼는 자연 세계에 내재한 신성을 드러내는 대신 분리되어 다른 존재가 되었다.

역사가들은 종종 축의 시대의 초월적 돌파를 이야기한다.

 

중국의 종교는 제의()로 우주의 자연 질서를 보전하는 데 몰두해 있었다.

이렇게 하면 인간 사회와 하늘의 도(천도)의 일치가 보장된다는 것이었다. 중국인은 자연 질서를 초월하는 신에

게는 결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엘리야가 경험한 신, 즉 세상과 완전히 분리된 신 이야기를 들었다면 당황했을 것이다.

하늘과 땅은 상호보완적이었다. 신성하고 동등한 동반자 관계였다.

 

중국인들은 정교하게 고안한 의식의 중요성을 이해했다.

이런 복잡한 드라마를 공연하면서 그들은 완전한 인간을 향해 나아간다고 느꼈다.

 

왕들의 수치스러운 실패를 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회의를 품었다.

하늘의 아들이 이렇게 무능하고 근시안적이라면 최고신은 어떻게 생각해야 한단 말인가?

제의를 꼼꼼하게 거행했지만 가뭄이 나라를 태우고, 조상들은 전혀 도와주지 않았다.

 

제의는 여전히 아름답게 거행되고, 여전히 참여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지만, 소수의 현실적인 비평가는 제의

의 마법적인 효능에 대한 믿음을 잃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점증하는 위기에 맞서 중국인은 제의를 약화하는 것이 아니라 강화하는 쪽으로 대응한다.

 

기원전 9세기에 이르면 인도의 제의 전문가들은 인도의 축의 시대를 여는 전례 개혁에 나선다.

그들은 희생제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과정에서 내적 자아를 발견한다.

아리아인들의 생활은 점차 정착되어 갔다. 경제는 약탈보다 농업 생산물에 더 의존하기 시작했다.

문서 증거는 없지만 약탈과 대응 약탈이라는 파괴적 순환을 중단해야 한다는 데 점차 합의가 이루어 졌던 것 같다.

 

동물은 때때로 살려서, 주관하는 사제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다.

이 이른 시기부터 이미 제의 전문가들은 인도 축의 시대의 불가결한 덕이 되는 아힘사(불살생)의 이상으로 다가가

고 있었다.

 

희생제를 바치는 사람은 죽음을 흡수하여 자기 내부에 받아들임으로써 죽음을 정복할 수 있었다.

따라서 죽음은 그의 자아(아트만)가 되었다. 이것은 놀라운 이미지다.

 

그러나 전례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내면 세계의 발견이었다. 제의 전문가들은 희생제를 드리는 사람의 정신적

상태를 강조하여 그의 관심을 내부로 이끌었다.

그들은 희생제의 방향을 원래 가리키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틀어, 아트만, 즉 자아의 창조에 초점을 맞추었다.

 

인도에서 축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현대 세계에서 제의는 종종 노예적인 순응을 장려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브라민들은 그들의 학문을 이용하여 외적인 제의와 신들로부터 해방되어,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자아라는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냈다.

사제 개혁가들은 제의의 내적인 역학을 명상함으로써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아리아인 전사들이 인도의 미지의 밀림 속으로 파고들 듯이 앞장서서 열심히 내적 세계를 탐험하기

시작했다. 그이후로 인도의 영적인 탐구는 외적인 신이 아니라, 영원한 자아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3장 자아의 발견 (기원전800-700년경)


기원전 8세기 말경에 모세오경, 즉 성경의 첫 다섯 책 가운데 일부가 처음으로 글로 기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축의 시대 모든 종교 전통의 핵심이 될 자기 버리기의 씨앗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축의 시대의 영성은 우상 파괴적인 경우가 많다.

종교는 소중하게 간직해 온 관행이나 믿음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었다.

외려 사람들에게 전통에 의문을 제기하고, 자신의 행동을 비판할 것을 요구했다. 축의 시대 종교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느끼는 공감이 기본 조건이 된다.

 

아모스와 호세아는 둘 다 이스라엘 종교에 중요한 새로운 영역을 도입했다.

그들은 올바른 윤리적 행동이 없으면 제의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종교는 공동체의 자부심이나 자존감을 부풀리는 데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주읠르 버리도록 권유하는

데 이용되어야 한다.

특히 호세아는 이슬라엘이 내적인 삶을 피하고, 감정을 분석하고, 자기 성찰에 기초한 더 깊은 전망을 갖추어 나

아갈 것을 촉구했다.

 

그것은 그에 삶에서 의미를 앗아갈 수도 있는 완전한 복종의 행동이었다.

가 그렇게 오랫동안 섬겨온 신의 약속을 꺠뜨리고 비정하게 아이를 죽이는 존재임을 보여주었다.

마지막 순간에야 엘로힘은 천사를 보내 살인을 막고, 아브라함에게 이사악 대신 숫양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했

. 이 이야기는 중요한 종교적 전이를 뜻한다. 인간희생을 동물 봉헌으로 대체하기 때문이다.

 

히스기야는 번창하는 왕국을 물려받았지만, 경솔한 외교 정책으로 인해 이제 그에겐 예루살렘이란느 아주 작은

도시국가만 남았다. 애국적 자긍심과 배외주의적 신학이 나라를 거의 멸망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알 수 있듯이 기원전 8세기 그리스 귀족들에게 대중 연설은 군사적 위용만큼이나 중요

했다.

미케네 시대에 왕은 그저 동등한 사람들 가운데 첫째즉 상대적 우위에 있는 사람에 불과했으며, 귀족들의 조언

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모든 사람이 아무리 초보적인 방식이라 해도 정의 와 윤리의 추상적 원칙을 염두에 두고 실제적인 문제에 관해

이야기해야 했다.

 

<일이아스><오디세이아>는 그리스 성서라고 부르기도 했다.

거기 담긴 이상과 가치가 새로운 그리문화에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겼기 때문이다.

호메로스가 아킬레우스 같은 전사를 모든 남자들이 갈망해야 할 탁월함의 모범으로 제시하는 것을 보면, 그와 축

의 시대의 문턱에 섰던 공통점이 없었다는 느낌이 든다.

 

<일이아스>는 죽음에 관한 시다.

등장인물들은 죽이거나 죽임을 당한다는 강박에 지배당한다.

아킬레우스는 귀족적인 전사 에토스를 완전히 무시하는 말로 대답한다.

죽음에 대해 나를 위로하려 들지 마시오. 나는 죽은 자를 모두 통치하느니 차라리 시골에서 머슴이 되어 품팔이

를 하고 싶소영웅적 이상의 핵심에는 무시무시한 공허가 있었던 것이다.

 

늙은 왕의 완전한 겸손은 아킬레우스에게서 자신의 아버지를 위하여 통고하고 싶은 욕망을 일으켰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사랑하는 친구를 죽인 사람의 아버지에게 자비를 베푸는 과정에서 인간성과 필로테스를

회복한다.

 

축의 시대의 다른 민족들이 낡은 신들에게 불만을 느끼거나 신성의 관념을 바꾸고 있을 때, 그리스인은 과거의

종교 양식에 더욱더 헌신한다.

그들은 신성을 초월적인 것으로 여기는 대신, 전통이 가르쳐주는 대로 자기 신들의 내재성(비초월성)을 다시

확인했다.

신과 만나는 것은 압도적인 충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리스인은 신이 인간과 얼마든지 양립할 수 있다고 느꼈다.

 

신들은 한 개인으로서 독립적이고, 개별적으로 고립된 인물로 볼 수 없었다.

각각은 전체의 불가결한 구성 요소였으며, 다른 가족 구성원과 비굘르 할 때에만 이해를 할 수 있다.

그리스의 만신전은 언어에 비유 되어왔다. 언어에서는 모든 단어의 의미가 사전에 나오는 다른 언어들과의 유사

점이나 차이점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직 한 신만을 섬기고 다른 신들 숭배를 게을리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리스 세계에서 일신 숭배는 금기였으며, 끔찍한 벌을 받을 수도 있는 행위였다.

 

어떤 신도 다른 신 숭배를 금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좋아하는 신을 고르고 고르거나 만신전에 소속된 구

성원 가운데 단 하나라도 무시하는 일이 금지되었다.

신들은 싸우고 논쟁을 벌일 수도 있지만, 각각은 현실의 진정한 측면을 대표했다.

그런 측면이 없으면 우주가 영구적으로 훼손될 터였다.

다양한 신들 전체를 숭배함으로써 모순들을 함께 끌어안는 통일성을 한 눈에 파악하는 것이 가능했다.

 

모든 그리스신에게는 어둠고 위험한 측면이 있었다. 누구도 전적으로 선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누구도 도덕성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역설을 회피하거나 세계의 어떤 부분도 부정하지 않고 함께 삶의 풍요로운 다양성과 복잡성을 표현했다.

그리스인은 새로운 종교형식을 개발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과거의 믿음에 만족했다.

이 믿음은 축의 시대가 끝난 뒤에도 700년 동안 살아남았다.

 

오랜 관습이 왕의 권위를 대체하여, 전쟁, 복수, 조약을 통제하는 일종의 국제법 역할을 했으며, 물자와 용역의

교환을 통제했다. 이것이 역사가들이 춘추시대라고 부르는 시대의 출발이었다.

 

이제 군주제가 쇠퇴하자 유는 대평원 지대에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생활 전체를 정교한 제의 수행과 다름

없게 바꾸어 놓았다.

귀족의 제의화된 생활 양식은 귀족들에게 겉으로는 서로를 존중하며 겸손하게 행동하도록 가르쳤지만, 보통의

경우 예의 특징은 자기 이익이었다.

모든 것이 위신의 문제였다. 귀족은 특권과 명예를 선망했으며, 예를 이용하여 자신의 지위를 높였다.

 

이 출가자들은 울타리 너머로 나아갔으나, 인도의 영적 탐구에서는 중심이 되었다.

따라서 가장이 아니라 출가자가 종교적 변화의 동인이 된다.

인도의 축의 시대의 다음 단계를 규정한 사람은 브라민 사제가 아니라 출가자였다.

 

인도에서 교육은 절대 사실 정보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었다. 제자는 어떤 일을 해서 배웠다.

만트라를 외우거나, 과제, 제의 , 고행 등을 직접 해야 했다.

이것은 텍스트 공부만큼이나 중요했으며, 또 그런 공부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를 변화시켜 그는 세상을 다른 눈으

로 보게 되었다.

 

출가자는 외적으로 표현하는 종교에서 내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종교로 이행한 셈이었다.

출가자는 축의 시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종교의 내면화를 처음 성취한 사람들로 꼽힌다. 버림, 금욕, 신성한 삶

의 규율을 발판으로 삼아 출가자는 자신의 아트만, 즉 내면 깊은 곳에 신비하게 자리 잡고 있는 브라만과 통일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출가자가 용감하게 새로운 영적인 길을 걸어간 선구자라고 찬사를 보냈다.

출가자는 마을에서 자신의 독립을 선포했으며, 자신이 만든 세계에 살았고, 어떤 제의에도 굴복하지 않았으며,

일반적인 사회적 의무는 전혀 이행하지 않았고, 근본적 자유를 끌어 안았다.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생활 방식은 출신 계급에 따라 결정된다고 선포하던 시대에 출가자는 스스로 결정

을 내렸다.

 

가장은 사회적 네트워크, 부양가족, 자식의 규정을 받았지만, 출가자는 자신의 힘으로 혼재 존재하는 개인이었다.

축의 시대의 새로운 영웅은 자신의 무예와 용맹을 자랑하는 영웅적 전사가 아니라, 자기 내면을 탐구해 스스로

절대적인 것을 발견하겠다고 결심하고 아힘사에 헌신하는 수도자였다.

출가자는 야타부타 즉 깨달음을 추구했는데, 이것은 자신의 진정한 자아에 눈을 뜨는 것이기도 했다.


 

4장 앎을 향한 기나긴 여정 (기원전 700-600년경)


베다 종교는 베단타, 베다의 끝이라고도 부르는 (우파니샤드)에서 성년에 이르렀다.

고대 베다 종교는 끊임없는 이주와 새로운 영토의 정복에서 영감을 받았다. 폭력적 갈등의 세계에서 등장한 것

이다. 그러나<우파니샤드>에서 한 무리의 신비주의자들은 내적 공간의 평화로운 정복에 나섰다.

이것은 종교사에서 주요한 진전을 뜻한다.

외적인 제의가 엄격한 자기 성찰로 대체되었음에도, 이것은 혁신이 아니라 고대 전통의 완성으로 여겨졌다.

 

기원전 7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사이에 나온 고전 <우파니샤드> 13권은 <리그베다>와 같은 지위를 부여받았다.

<우파니샤드> 또한 슈루티, 계시된것이라 최고의 경전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우파니샤드>는 해석이 쉽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베다 문헌 가운데 어는 것보다도 힌두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우파니샤드>의 초점은 아트만, 즉 자아였다. 아트만은 브라만과 동일하다.

현자가 자기 존재의 내적 핵심을 발견할 수 있다면, 자동적으로 궁극적 실제로 들어가 필멸의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우파니샤드>라는 말은 가까이 다가앉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신비주의 경향의 아녀자가 발치에 앉은, 영적인 재능이 있는 소수의 제자들에게 나누어주던 신비한 지식

이었다.

그러나 삶은 변하고 있었다. 변화된 환경에 대응할 영성을 찾을 필요를 느끼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뜻이다.

 

<우파니샤드>의 모든 현자들과 마찬가지로 야지나발키아도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는 말하자면 불멸의 불꽃이

있다고 확신했다.

불멸의 불꽃은 전 우주를 유지하고 또 거기에 생명을 주는 불멸의 부라만에 참여하며 또 그 본질도 같았다.

이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발견이었으며, 모든 주요 종교 전통에서 중심을 이루는 통찰이었다.

궁극적 실재는 모든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안에 존재했다. 따라서 자아. 즉 아트만의 깊은 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인간은 인간 의식의 더 깊은 층들을 체계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규율 잡힌 자기 성찰로 정신의 표면 아래 놓인 자아의 방대한 영역에 눈을 떴다. 완전하게

자의식을 갖추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기는 매우 어렵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 삶에, 우리의 개인적 생존에 집착한다. 우리의 개별성이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자는 이것이 착각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이 온 우주를 포함한 브라만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현재의 이 제한된 존재에 매달려서 더 얻을 것이

하나도 없음을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만물이 똑같은 본질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이 특별하고 유일무이하며, 지구상의 다른 모든 존재와 다른다고 상상했다.

들은 자신의 가장 깊은 진실을 살리는 대신 자신을 귀중하고 흥미로운 것으로 만들어 주는 특징들에만 집착했다.

그러나 사실 이렇게 구별을 해주는 특징들은 같은 바다로 흘러드는 강물과 마찬가지로 지속적이지도 않고 의미

도 없었다. 바다에서 합쳐지면 모두 그냥 바다가 될 뿐이다.

따라서 세속적인 자아에 집착하는 것은 미망이며, 이것은 반드시 고통과 혼란을 낳는다.

 

제자가 실제로 명상을 하지 않는다면, 자기 성찰이라는 길고 어려운 여행을 하지 않는다면, 깨달음도 있을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형이상학적 명상이 입문의 작은 부분일 뿐이라는 것이다.

 

브라마카린과 마찬가지로 <우파니샤드>의 제자 또한 자기를 지우는 겸손한 삶을 살아야 했는데, 이것은 탐구의

지적인 내용만큼 이나 중요했다.

언제나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던 인드라도 스승을 위해 나무를 하고, 스승의 불을 보살피고, 집을 청소하고, 금욕을

실천하고, 전쟁을 그만두고, 아힘사를 실천해야 했다.

현자와 신들은 공격적으로 자기 주장을 하던 에고를 버릴 때에만 효과가 있는 영적 기술을 발견하는 중이었다.

 

스파르타의 케노시스는 아힘사가 아니라 군사적 능률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스파르타 시민의

평등은 다른 도시의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정복하는 데 의존하고 있었다.

 

기원전 8세기 말에서 기원전 7새게 초에 활동한 시인 헤시오도스는 어떤 폴리스에서는 자식이 이제 부모 말을

안 듣고, 세대 간에 반목하며, 나이 든 사람이 젊은 사람을 이끌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의 시는 이런 도덕적 진공 상태를 메워보려는 시도였다.

헤시오도스는 호메로스와는 다른 종류의 시인이었으며, 위기를 평가할 만한 완벽한 위치에 있었다.

 

개별적인 법적 결정은 여신 디케에게서 나왔다.

디케는 판결이 왜곡되면 상처를 받았다.

디케는 바실레우스가 뇌물을 받거나 자기 배를 채울려고 위증을 하면 제우스에게 바로 알렸고, 그러면 사회의

보호자인 제우스는 전염병, 기근 , 정치적 재난으로 지를 지은 폴리스를 벌했다.

이것은 순진하기 짝이없는 해법으로서 신의 직접적인 개입이 필요했다.

게다가 신이 그렇게 개입하는 일은 드문 것같았다. 그럼에도 이것은 변화의 조짐이었다.

 

오래된 귀족의 명예 규약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었다.

러나 폴리스가 발전하면서 바실레우스와 농민이 긴밀하게 협조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에 영웅적 이상은 보통 사람

들의 공정하고 균등한 기회 요구와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헤시오도스는 자신의 세대가 엄혹한 선택에 직면했다고 믿었다.

앞으로 그리스 사회의 특징은 정의 가 될까, 아니면 영웅적인 전사의 오만하고 이기적인 무절제가 될까?

 

희생제는 사람과 신을 함께 묶었지만, 동시에 둘 사이의 건널 수 없는 차이도 드러냈다.

이제 고난은 피할 수 없는 삶의 현실이 되었다. 바로 이것이 축의 시대의 주요 주제다.

프로메테우스의 반역은 그 자신의 고통과 인간의 쉼없는 노역이라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다.

 

그러나 이 실험의 결과로 사람들은 제대로 조직만 되어 있으면 지배 계급의 착취를 제어할 수 있고, 자신의 운명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중무장 보병은 이전 어느 때보다 남성 주민 다수에게 의존하는 인민의 군대였다. 뒤집어 말하면 인민, 즉 데모스

가 이제 기본적으로 군대와 다름없다는 뜻이었다.

 

군대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었던 아킬레우스의 히브리스(오만)는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탁월성(아레테)은 다시 정의 되었다. 탁월성은 이제 애국심과 공동의 선에 대한 헌신이었다.

기원전 7세기 말에 활동하던 스파르타의 시인 티르타이오스는 새로운 영웅을 이렇게 묘사했다.

 

한 남자가 앞줄에 굳게 서서 움직이지 않고

수치스러운 도주에 대한 생각을 잊고

정신과 마음을 가다듬어 견디고

말로 옆에 서 있는 전우를 격려한다면

이것이 탁월성이다. 이것이 남자의 가장 훌륭한 재산이다.

젊은 남자가 얻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상이다.

이것은 모든 도시와 모든 인민을 위한 공동의 선이다.

 

중무장 보병 계혁은 그리스를 바꾸어 민주주의의 기초를 놓았다.

밀집 대형에서 귀족 옆에서 싸운 농부는 귀족 계급을 절대 전과 같은 눈으로 보지 않게 되었다.

과거의 복종은 유지될 수 없었다.

오래지 않아 하층 계급들은 자신들의 조직 민회 이 도시 정부에서 중심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무장 보병 개혁은 폴리스의 자기 이미지를 바꾸어 놓았다. 이것은 평화적인 혁명이었다.

농민은 상층 계급을 제거하는 대신 귀족의 에토스를 채택하였고, 이렇게 해서 도시 전체가 결과적으로 신사 전사

계급이 되었다.

 

인도에서는 축의 시대에 등장한 윤리가 고대 제의에서 폭력을 빼버렸다.

그러나 그리스에서는 낡은 제의가 군대의 요구에 따라 바뀌고 있었다.

 

기원전 7세기가 되자 제후국의 삶은 예로써 세밀하게 규제되어, 사회.정치, 군대 생활이 주나라 조정의 정교한

제의적 의식을 닮아 가기 시작했다.

언뜻 보기에는 이런 조직화된 순응은 축의 시대의 정신과 거리가 먼 것 같지만, 이런 의식 가운데 일부는 상당한

영적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인은 아직 이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축의 시대는 그로부터 200년이 더 지난뒤에야 시작 되었다.

그럼에도 노나라 전문가들은 미래를 위한 단단한 기초를 닦았다.

물론 기원전 7세기에 그들이 일차적 목적은 절제와 자제로 우아한 삶을 사는 군자들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예는 전례를 실행에 옮기는 사람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이런 의식에서 관심을 쏟는 자의 신성함도 높여준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주술적인 개념이었지만, 깊은 심리적 통찰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일관되게 최고의 존경심으로 사람을 대하면, 이 사람은 자신이 숭배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느끼게 된다.

자신에게 절대적 가치가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중국에서 예는 관계를 신성하게 만들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신성함을 부여했다.

 

승리는 위험할 수도 있었다. 제후는 정복한 영토를 봉신에게 주어야 했고, 봉신이 이렇게 추가의 자원을 얻게 되

면 훗날 그이 통치에 반역을 일으키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도 있었다.

봉건제는 모두가 자기 자리를 지켜야 유지되었다.

봉신이 너무 힘이 강해지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국가의 평형을 흔들수도 있었다.

 

노나라의 제의 전문가들은 이렇게 설명했다.

예는 우리가 감정을 자유롭게 제어하도록 가르친다. 감정이 멋대로 가는 길을 따르는 것은 오랑캐의 도이다.

예의 도는 완전히 다르다. 전례는 도와 한계를 정한다.

전례가 자기 존재의 진정한 일부가 되면 군자는 절제, 자제, 관용을 배우게 된다.

예는 폭력과 교만을 제어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기 때문이다. 전례는 제방이 홍수를 방지하듯이 무질서를 방지한다.

 

이렇게 해서 아들은 서(, 자기 자신에게 견주다)라는 공감의 덕을 배웠으며, 이것이 중국의 축의 시대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

 

그러는 동안 죽은 자는 이미 인격적 생존을 획득한 조상들에게로 조금씩 다가갔다.

애도기간이 끝나면 아버지의 신격화가 완성되며, 그 뒤부터 아들은 아버지를 모시는 제사를 주관했다.

 

<예기>는 역사적 현실이 아니라 유토피아적 현실 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기원전 7세기에 이런 이상은 주나라를 거칠고 방종에 빠진 사회에서 중용과 절제를 중시하는 사회로

바꾸어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상은 축의 시대를 가동했으며, 독특한 방향을 제시했다.

 

요시아는 두루마리에 적힌 말을 듣자마자 옷을 찢으며 몹시 괴로워했다.

그는 소리쳤다. “이 책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대로 하라고 하셨느데, 우리 선조들이 그 말씀을 따르지 않았으므로

우리가 불길 같은 야훼의 진노를 사게 되었소.

종교가 구전 전승에서 기록된 텍스트로 전환된 충격은 컸다.

이 경우에도 성경의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당혹감, 죄책감, 무능력감이 나타났다.

이런식으로 종교적 진실이 제시되자 완전히 다르게 들렸다.

모든 것이 분명하고, 미리 준비된 느낌이었다. 구전이 제공하는 모호한 지식과는 완전히 달랐.

 

인도 사람들은 영적 가르침을 글로 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텍스트를 정독하는 것만으로는 <우파니샤드>의 완전한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신명기>저자들은 야훼 신앙을 책의 종교로 만들었다.

이후 서구에서 종교적 정통성의 기준은 기록된 경전이 된다.

 

<신명기>저자들은 유대교를 책의 종교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전개에 상당한 반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자 해독 능력은 사람들과 유산의 관계를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늘 좋은 쪽의 변화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 인도에서 구전 전승은 긴 도제 기간, 카리스마를 지닌 스승과 제자의 역동적인 상호교류, 자기를 지우

는 규율 잡힌 생활 방식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혼자서 텍스트를 읽으려면 더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교육이 필요했다.

학생은 이제 구루에 의존하지 않고, 혼자서 텍스트를 정독하며 자기 나름의 결론을 끌어낼 수 있었다.

그의 지식은 천박할 수도 있었다.

페이지에 적힌 말 뒤에 놓인 것을 보거나, 그말이나 개념을 넘어서는 찬란한 침묵을 경험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록된 텍스트는 붓의 술책만으로도 정통성을 뒤집을 수있다고 지혜보다는 정보를 주어 전통을 왜곡할 수 있다.

 

근대 유대인 운동 연구에서 저명한 학자 하임 솔로베이치는 구전에서 기록된 텍스트로 전환될 때 종교적인 삐걱

거림이 나타나, 제자에게 본질적으로 포착하기 힘들고 말로 표혀날 수 없는 문제에 관하여 그릇된 명료함이나

확실성을 줄수있다고 주장한다.

 

야훼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기들끼리는 서로 친절하라고 가르쳤을지 모르지만,어쨌든 그들은 외국인에게는

무자비 했다.

 

지나친 확신과 명료함은 잔인한 불관용에 이를 수있다.

 

유월절 유대교 3대 주요 순례 절기 가운데 하나. 기원전 13세기 이스라엘 사람들의 조상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출애굽기)을 기념하는 축제일이다. 과월절이라고도 한다.

 


5장 고난의 시대(기원전 600-530년경)


기원전 6세기에 이스라엘은 본격적으로 축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번에도 변화의 촉매는 걷잡을 수 없는 충격적인 폭력의 경험이었다.

기원전 597년 유다 왕국의 젊은 왕 여호야긴은 바빌로니아에 항복하여, 백성 8천 명과 함께 자기 땅에서 추방당

했다. 여기에는 왕족, 귀족, 군인, 뛰어난 장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유력자 7천명과 은장이, 대장장이 천 명을 바빌론으로 사로잡아 갔는데 그들은 모두 싸우러 나갈 수 있는 용사들

이었다. 새로운 축의 시대 전망을 창조한 사람들은 처음으로 바빌로니아에 끌려간 사람들이었다.

 

그의 굽힐 줄 모르는 용기 있는 태도는 축의 시대의 핵심 원리 가운데 하나를 표현했다.

 사람들이 실제로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겁이 난다 해도, 모래에 머리를 박고 진실을 마주하기를 거부한다면 영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나 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포로 가운데 일부는 바빌로니아의 평안을 구하기는커녕 그 어린아이들의 머리를 바위로 메어치고 싶어

했다.

추방은 단지 주소만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적인 혼란이다.

난민은 문화와 정체성의 뿌리와 단절되면서 표류한다는 느낌, 방향을 상살했다는 느낌, 하잖은 존재로 시들어

간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다.

 

개혁은 자신의 결점에 대한 객관적이고 분명한 검토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나 에스겔이 그리고 아마도 추방당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도, 고통을 소화하고,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심장이 부서지는 것을 감수했기 떄문에 그들은 인간적인 존재가 되었다.

 

인류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사회적 불확실성의 시기에는 제의가 새로운 중요성을 띤다.

히 추방당한 사람들에게는 다른 집단과 구분되는 경계를 유지하려는 압력이 생겨나며, 순결, 오염, 종족간 결혼

에 대한 관심이 새로이 나타난다. 공동체는 그것을 바탕으로 다수 문화에 저항할 힘을 얻는다.

 

이스라엘이 하나의 민족인 것은 그들이 어떤 특정한 나라에 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세상 어디에 있든 그들과 함께 돌아다니는, 존재하는 하느님 안에서 살아갔기 때문이다.

 

여기에 함축된 이미는 야훼가 이번에 바빌로니아로 이주를 했을 때에도 자신의 백성가운데 여전히 존재하고 있

다는 것이다.

 

P의 율법은 삶 전체를 제의화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이 고대의 성전 율법을 이용하여 추방의 경험에 기초한 새

로운 윤리적 혁명을 개시했다.

 

P가 모든 것이 제자리를 잡은 세계를 환기하는 것은 추방이 남긴 트라우마 때문이다. 무자비한 제국 권력의 과

시는 추방당한 사람들의 민족적 통일성을 훼손했다.

이런 상황에서 추방당한 사제와 예언자들은 원한과 복수에 기초한 믿음을 피하고, 모든 생명의 신성함을 인정하

는 영성을 창조함으로써 위대한 성취를 이루었다.

 

아테네는 솔론을 택하여 기원전 594년에 그를 도시의 집정관으로 임명하고 제도 개혁을 위임했다.

귀족이 그들을 억압하려 하는 바람에 사회에 유해한 불균형이 생겼으며, 이 불균형은 자멸로 나아갈 수 밖에 없

었다.

디스노미아는 천벌이 아니라 인간의 이기심의 결과이며, 따라서 오직 일치된 정치적 노력으로만 평화와 안정을

복원할 수 있었다.

신들은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았으며, 상황을 개선할 신성한 법을 드러내지도 않을 터였다.

이것은 축의 시대다운 돌파였다.

 

그리스 사람들은 새로운 분석적 방법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문제의 여러 구성 요소들을 분리하여, 각각의 요소에 완결성을 부여하고, 거기에서부터 논리적 해법을 찾는 길로

나아간 것이다.

 

그러나 솔론은 참주 정치가 불균형한 정치라는 이류로 거부했다. 단기적으로 보자면 솔른은 실패했다.

사람들은 아직 그의 생각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밀레토스 학파의 존재론이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 우주론은 영적 통찰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밀레토스 학파는 추론 자체를 위해 추론을 했다. 미래의 서구 합리주의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와 완전히 다르고 베다 경전에도 거의 눈길을 돌리지 않는 새로운 철학이 나타났다.

이 철학은 상키아(분별)’라고 부른다.

그러나 원래 이 말은 그냥 사유토론을 의미했을 수도 있다.

상키아는 인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상키아는 밀레토스 학파와 마찬가지로 우주를 낱낱의 구성 요소로 분석

해 들어가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갔으며, 우리의 세상을 만들어낸 진화의 과정을 묘사했다.

그러나 닮은 것은 거기에서 끝난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바깥세게(객관적 세계)를 지향한 반면 상키아는 안으로 파고들었다.

밀레토스 학파는 여전히 세상은 신들로 가득하다라고 주장한 반면 상키아는 무신론 철학이었다.

 

인도에서 진실은 객관적 가치가 아니라 치유적 가치를 기준으로 평가된다.

 

상키아는 인도의 영성에 두 가지 중요한 기여를 했다. 첫째는 모든 삶이 두카라는 인식이었다.

이 말은 흔히 괴로움으로 번역되지만, ‘불만족스럽다. 뒤틀려 있다는 더 넓은 의미가 있다.

아무도 그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신성함이 사라진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6장 공감의 발견(기원전 530-450년경)


정치적으로 실패했기 때문에 공자는 생각할 시간을 얻었으며, 영감이 넘치는 스승이 되었고, 스스로 성공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들이 고위직을 얻을수 있도록 훈련하겠다는 결심을 했기 때문이다.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공자는 무엇보다 한 가지 자질을 살폈다.

열심히 터져나오지 않는 사람은 가르치지 않으며, 흥분이 부글거리지 않는 사람은 깨달음을 주지 않는다

공자는 제자들을 꾸짖고 사정없이 몰아댔지만, 결코 으스대지는 않았다.

 

그는 요 임금이나 순 임금처럼 성스러운 영감을 받은 현자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계시나 전망이 없었다.

그의 유일한 장점은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고 가르치기를 게을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논어>는 수백 편의 짧은 서로 관련 없는 말로 이루어져 있으며, 분명하게 규정된 전망을 만들려 하지 않는다.

그 스타일은 중국의 풍경화와 마찬가지로 암시적이다.

독자들은 말로 표현되지 않은 것을 찾아야 하며, 행간을 보고 완전한 의미를 이해해야 하고, 하나의 생각을 다른

생각과 연결시켜야 한다.

 

낡은 세계는 무너져 가는데, 과거의 가치를 대신할 새로운 가치는 나타나지 않았다.

공자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좋은 해법은 과거에 잘 운용되었던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공자는 군자의 역할을 재규정했다. 진정한 군자는 전사가 아니라 학자여야 했다.

군자는 권력을 얻으려고 싸우는 대신 올바른 행동의 규칙을 공부해야 했다.

 

공자는 중국의 종교를 땅으로 끌어내렸다. 사람들은 내세에 관심을 두는 대신 여기 아래에서 선해져야 한다.

그의 제자들은 신이나 귀신에 관한 신비한 정보를 얻으려고 그와 함께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궁극적 관심은 하늘이 아니라 도였다.

군자의 과제는 그 길을 조심스럽게 걸어가는 것이였으며, 그 자체에 절대적 가치가 있었다. 그렇게 하면 어떤

장소나 사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선의 상태에 이르렀다.

제의는 그들에게 올바른 방향을 안내해줄 지도였다.

 

공자는 축의 시대 사람으로서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일을 완전히 의식하기를 바랐다. 예의 수행은 단지 어떤

동작을 수행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여기에는 심리적인 명민함, 감수성, 각 상황에 대한 지적인 평가가 필요했다.

 

인도에서 요가 수행자들은 절대적인 것을 향한 외로운 탐구를 시작했다. 공자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공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완전한 인간성을 끌어내려면 다른 사람이 필요했다.

자기 계발은 상호적인 과정이었다. 공자는 인도의 출가자들과는 달리 가족 생활이 꺠달음에 장애가 된다고 보는

대신 종교적 탐구의 극장이라고 보았다. 모든 가족 구성원에게 다른 사람을 위해 살도록 가르치기 때문이다.

 

()는 매일 종일토록 우리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발견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그런 고통을 주는 일을 삼갈 것을 요구한다.

자신을 특별한 별도의 범주에 넣지 말고, 자신의 경험을 타인의 경험과 연결시킬 것을 요구한다.

 

공자는 전통의 관습과 전례의 세목에 매달리는 소심한 보수주의자가 아니었다. 그의 전망은 혁명적이었다.

그는 관례적인 예에 새로운 해석을 부여했다.

이것은 귀족의 존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잊는 실천을 습관으로 만들어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고안

것이었다.

공자는 또 새로운 평등주의를 도입했다. 전에는 오직 귀족만이 예를 수행했다. 이제 공자는

누구라도 전례를 실행하면 안회처럼 출신이 미천한 사람이라도 군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공자는 법과 질서 이상의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인간의 존엄함, 고귀함, 신성함을 원했으며, 이것은 서라는

덕을 얻으려고 매일 노력 할 때만 얻을 수 있음을 알았다.

실로 대담한 계획이었다.공자는 사람들에게 강압 대신 고양된 인간성의 힘을 신뢰할 것을 요구했다.

 

인을 추구하는 것은 평생에 걸친 노력이었다. 죽어야만 끝나는 일이었다.

자는 제자들에게 도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추측하라고 권하지 않았다.

그 길을 따라 걷는 것 자체가 초월적이고 역동적인 경험이 었다.

 

아마 추방당한 사람들의 공동체에 두 가지 서로 다른 생각의 흐름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종은 비폭력과 자신을 지우는 태도로 승리를 거둔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고난에는 구원의 힘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추방당한 다른 사람들은 타인의 복종에 기초한 새로운 질서를 기대한다.

앞의 에토스는 축의 시대를 깊이 반영하는 것이며, 뒤의 에토스는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이런 긴장은 이스라엘 내부에 계속 존재하게 된다.

 

야훼는 다른 신들을 절멸시켰으며, 결과적으로 유일한 하느님이 되었다.

그의 활력은 바빌로니아 신들의 생명 없고 무기력한 우상들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야훼는 당당하게 선포한다. “내가 야훼다. 누가 또 있느냐? 나 이외에 다른 신은 없다.”

 

기원전 5세기에 중간 계급은 회의 토론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아테네에서 가장 지성적인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

할 수 있었다. 이 실험은 시민들이 제대로 교육받고 동기 부여를 받기만 하면 , 정부가 야만적인 힘에 의존할 필

요가 없으며, 오래된 제도를 합리적인 방법으로 개혁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살라미스 해전은 그리스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뭔가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이 태어났다.

그리스인은 훈련받은 대로 이성을 활용하여 엄청난 제국을 물리쳤다. 만일 아테네 시민이 오랜 세월에 걸쳐 논리

적으로 생각하고, 이성의 힘으로 감정을 제거하는 훈련을 하지 않았다면, 테미클레토스는 결코 아테네 시민들에

게 자신의 계획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전략은 축의 시대의 여러 가지 가치를 보여주었다. 그리스인은 과거에 등을 돌리고, 실험적인 길에 나서야

했다. 그의 계획은 자기 희생을 요구했다.

 

이 연극들은 축의 시대의 새로운 자의식을 보여준다. 관객은 주인공의 마음이 자기 내부를 향하고, 대안을 명상

하고, 고통스럽게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비극은 아테네 사람드에게 자신을 타자에게 비춰보고,

자신과 전제가 분명히 다른 사람들도 공감의 범위 안에 포함시키라고 가르쳤다.

 

그들은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모든 인간이 고난을 겪는 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카타르시스는 공감과 자비를

경험하는 데서 얻을 수 있었다. 타자와 함께 느끼는 느력이 비극적 경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모든 삶이 사실 두카다. 그러나 고통은 인간을 가르친다.

그래서 인간은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곤경을 넘어설 수 있다.

 

이 작품은 확고한 믿음과 분명한 원칙이 어김없이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등장 인물 모두가 선한 의도를 품었고 누구도 비극이 일어나기를 원치 않지마, 그들이 신실하게 최선의 노력을

기울렸음에도 결과는 파국이고 참담한 상실이다.

 

그들은 안티고네처럼 비극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노력을 할 만큼 한 뒤에는 당당하게, 용기를 내어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소포클레스는 이것이 인간의 위대함이라고 암시한다.

 

인도에서도 영적인 진공 상태가 입을 벌렸다. 새로운 현인들이 새로운 해법을 찾아내고자 열심히, 심지어 필사적

으로 노력했다.

야지나발키아 시대에는 논란이 되었던 카르마(행동)의 교리가 기원전 5세기 말에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 졌다.

사람들은 모두 죽음과 재생의 끊없는 순환에 들어가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덧없는 삶을 계속 되풀이해야 할 운명이라고 느꼇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낡은 베다 제의에 환멸을 느꼈다. 베다 제의는 이런 문제에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

이다. 베다 제의가 제시할 수 있는 최선은 신들의 세계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지만, 새로운 철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은 고난과 죽음의 무자비한 반복에서 일시적으로 해방되는 것일 뿐이었다.

 

기원전 6세기에 이르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은 모크샤를 얻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가장은 카르마의 노예로서 자신이 속한 계급의 의무 때문에 계속 행동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각 행동은 욕망으로부터 일어났는데, 이 욕망이야 말로 문제의 뿌리였다.

가장은 욕망 없이는 자식을 낳을 수 없었다. 성공하고 싶은 마음 없이는 전쟁을 할 수도 , 곡식을 기를수도 사업

을 할 수도 없었다.

 

모든 행동은 새로운 의무를 낳았고, 이 때문에 삼사라(윤회)의 냉혹한 순간에 묶였다.

해방을 찾는 유일한 길은 숲으로 나아가’, 그런 의무가 전혀 없는 은자나 탁발승이 되는 것이었다.

인도 사람들은 출가자를 허약한 낙오자로 보지 않고 용맹한 선구자로 존경했다.

 

사회적 위기 때문에 영적 불안은 악화되었다.

인도 북부 사람들도 그리스인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정치 . 경제적 변화를 겪고 있었다.

베다 체계는 늘 이주하는, 기동성이 아주 높은 사회의 영성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6세기와 5세기가 되면서 사람들은 점점 커지는 영구적 공동체에 정착하여 진지하게 농업에 몰두

했다.

 

기원전 6세기가 끝날 무렵 부족국가들은 더 큰 단위로 흡수되었다.

이 영토를 다스리던 왕들은 아주 점진적으로 자신의 지배를 강요했고, 씨족의 의리에서 나오던 낡은 형식의 충성

심을 친족 관계보다는 영토에 초점을 맞추는 초기 형태의 애국심으로 서서히 바꾸어 나갔다.

그 결과 국방과 행정을 책임진 크샤트리아 전사 계급의 역할이 더 두르러지게 되었다.

 

네 계급의 관계를 지배하던 규칙은 이제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며, 사람들은 함께 사는 새로운 방법을 배

워야 했다. 부족적 정체성이 사라지자 어떤 사람들은 뭔가를 빼앗기고 허공에 내던져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가축을 기르는 것이 가장 큰 일일 때에는 동물 희생도 합당한 일인지 모르지만, 이제는 농업과 교역이 중요한 위

치를 차지하면서 가축은 드물어지고 희생제는 낭비이자 잔인한 행위로 여겨졌다.

공적 생활의 폭력성을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종교적 해법이 필요했다.

 

새로 나타난 가르침에는 여러 가지 공통 요소가 있었다. 삶은 두카다. 자유로워지려면 금욕과 명상으로 행동에

이르는 욕망을 제거하라. 정교한 텍스트나 주석은 없었다. 이 다르마들은 어디까지나 실용적이었다.

 

이런 가르침들은 모두 재생과 다시 죽음이라는 삼사라의 막다른 골목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겠다는 결의를 보여

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엄청난 금욕으로 거기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은 적대와 불화를 피해야 한다고 믿었다.

표는 형이상학적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었다.

 

소포클레스와는 달리 이 현자들은 자신의 고통을 위엄있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탈출구를 찾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마히비라는 누구든 자신의 섭생을 따르는 자는 반드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상태에 이르러 지나(정복자,

승리자)가 될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의 추종자들은 자이나 교토라고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의 다르마는

정복자의 길이 되었다.

 

유일한 종교적 의무는 비폭력이었다.

아힘사가 없으면 다른 모든 윤리적 실천은 소용이 없었으며, 아힘사는 자이나 교도가 모든 피조물과 공감할 때에

만 얻을수 있었다.

숨을 쉬고,존재하고,살아 있고,감각 능력이 있는 모든 피조물은 죽이지 말아야 하고, 폭력으로 대하지 말아야

하고, 학대하지 말아야 하고, 괴롭히지 말아야 하고, 쫒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순수하고 변함없고 영원한 법이며, 앎을 얻은 깨달은 자들이 선언한 법이다.

 

베다 희생제에서 신들은 인간이 동물을 도살하는 것을 보려고 모였다.

그러나 참파에서는 신,인간,짐승이 아힘사 설교를 들으려고 모여 단일한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런 통일과 보편적 공감의 전망이 삶의 모든 행동에 영향을 주어야 했다.

 

자이나 교도는 하루에 두 번씩 스승 앞에서 서서 , 녹색 식물, 이슬, 딱정벌레, 곰팡이, 축축한 땅, 거미줄을

밟는바람에 자기도 모르게 주었을 괴로움을 회개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을 맺었다. “ 저는 모든 생물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모든 피조물이 저를 용서하기를 바랍니다.

제가 모든 피조물과 우정을 나누고 어떤 피조물에게도 적의를 품지 않게 해주소서.

새로운 이상은 단지 폭력을 삼가는 것이 아니라. 가없는 친절과 자비를 키워 나가는 것이었다.

 

 

7장 사유의 혁명 (기원전450-398)


이스라엘의 축의 시대는 첫 단계가 끝이 났지만, 앞으로 마지막 장에서 보게 되듯이, 두 번째 개화기, 랍비의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가 이스라엘의 축의 시대 통찰에 기초를 두고, 황금률과 양보, 공감, 모든 사람에

대한 관심이라는 영성에 기초한 신앙을 강조하는 시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철학은 보통 사람들로부터 너무 멀어져 갔다. 이런 공상적인 우주론은 인간의 요구에 응답하지 않았으며, 기본적

경험과 모순되었다.

자신의 감각 증거를 믿을 수 없다면 어떻게 어떤 결론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확실한 증거를 댈 수도 없는데 왜 파르메니데스나 데모크리토스의 독특한 사사을 믿어야 하는가?

이 논리학자들은 상식을 무자비하게 부수어버렸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방향 감각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소피스트들은 불안이 깊어지는 시대에 체계적인 의심을 가르쳤다.

그들은 널리 여행을 했다. 그들은 다른 문화의 다른 관습 또한 완벽하게 작동한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 결과 절대

적 진리는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만물의 척도는 인간이다.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존재하는 데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존재하지

않는 대로. 프로타고라스는 인식론 논문에서 그렇게 썼다. 개인은 자신의 인간적 판단에 의존해야 한다.

초월적 권위는 없으며, 인류에게 자신의 관점을 강요할 수 있는 최고신은 없다.

일부 아테네인은 여기에서 해방을 얻어, 기본적 가정에 의문을 던지는 습관이 새로운 문을 열러주고 종교에 관

하여 새로운 통찰을 얻게 해준다는 것을 발견한다.

 

에우리피데스의 개인적 경험은 낡은 신학과 모순되었다.

압제자들은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으나, 품위 있게 사는 사람들보다 더 잘살았다.

그의 영웅인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의 아들이었지만, 여신 헤라 때문에 미쳐버렸다.

헤라클라스는 신이 불어넣은 광기에 빠져 부인과 자식들을 죽였다.

이런 신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누가 그런 신에게 기도할 수 있습니까?” 헤라클레스는 희곡의 끝에 가서

아테네의 왕 테세우스에게 그렇게 물었다. “이런 이야기는 그저 시인들이 쓴 한심한 신화일 뿐입니다.”

 

오이디푸스는 평생 바르게 행동하려고 노력했으며, 늘 최선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괴물이 되고 말았으며, 자기 도시를 오염시켰고, 당시에는 의미를 몰랐던 행동

때문에 가망 없이 더럽혀지고 말았다. 오이디푸스는 유죄인 동시에 무죄였으며, 행위자인 동시에 피해자였다.

 

선의 본질을 이해한다면 올바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 혼란에 빠져 있거나, 선에 대한 이해가 이기적이거나 피상

적이면, 행동이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를 수 없다.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의 목적은 우주에 관한 심오하고 난해한 이론을 펼치는 것이 아니었다.

철학은 사는 방법을 배우는 문제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장 근본적인 가정에 반드시 질문을 던져야 했다. 그래야 올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으며,

진짜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볼 수 있고, 그릇된 의견을 넘어서서 언제나 올바르게 행동하게 해주는 완벽한 직관

조금이라도 다가갈 수 있었다.

 

의미에 관하여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영혼(soul)(프시케)’의 배반이었다.

프시케의 발견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이룬 가장 중요한 성취로 꼽을 만하다.

아트만과 달리 프시케는 몸으로부터 분리된 것이었다.

프시케는 개인의 탄생 이건부터 존재하며, 죽음 이후에도 살아 있다.

영혼 덕분에 인간을 추론을 할 수 있고, 선을 찾을 수 있다. 영혼의 계발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파괴적이고 소모적인 슬픔대신 조용하고 수용적인 평화가 있었따. 축의 시대 내내 현자들은 죽음에 몰두했다.

소크라테스는 고통과 고난 가운데에서도 인간이 자신의 환경을 초월하는 평온을 누릴 수있음을 보여주었다.

 

겸애는 공정, 공평한 감각과 모든 인간에 대한 예외 없는 불편 부당한 관심에 기초를 둔다.

만일 사람들이 전 인류를 향한 박애심을 기르지 못하면 가족 사랑이나 애국주의는 집단적 자기 중심주의로 타락

할 것이다.

 

그들이 살아남는 유일한 길은 감정적인 동일시가 아니라, 적이라도 나와 똑같은 요구, 욕망, 공포를 갖고 있을 수

있다는 이성적이고 실용적인 이해에 기초한 가없는 공감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 소용없었다. 아무리 가혹하게 고행을 해도, 아니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그의 몸은 여전히 관심을 가져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그를 죽음과 재생의 엄혹한 순환에 묶어 두고 있는 욕정과 갈망에 계속 시달렸다.

 

그는 줄곧 제자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일치하지 않으면, 아무리 존엄한 사람의 가르침이라 해도 절대 받아들이지

말라고 말했다. 의심없이 또는 간접적으로 어떤 교리를 받아들이면 안 된다.

심지어 고타마 자신의 가르침도 깨달음을 주지 못하면 버려야 한다. 권위있는 인물에 의존하면, 자신의 진정하지

못한 모습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해 니르바나의 자유를 절대로 얻지 못할 것이다.

결국 지나친 고행으로 건강은 망가지고 영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이른 상태여서 절망과 저항이 뒤섞인 순간에

타마는 혼자 치고 나가기로 결심했다.

틀림없이 깨달음을 얻는 다른 길이 있을 것이다. 고타마는 그렇게 소리쳤다.

이런 독립 선언이 진짜로 전진하는 길이었음을 입증이라도 하듯 새로운 해법이 그에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꺼진 것은 그의 인격이 아니라 욕심, 증오, 기만의 불이었다. 붓다는 해로운마음 상태를 눌러 없앰으로써 ,

자기가 없는 상태로부터 오는 평화를 얻었다.

 

그는 근면한 명상과 윤리적인 노력으로 내적인 안식처를 얻었다. 그의 방법을 실행에 옮긴 사람들은 이 안식처

덕분에 고통과 더불어 살아가고, 고통을 소유하고, 고통을 인정하면서도, 괴로움 한가운데서 깊은 마음의 평화를

경험할 수 있었다.

어쩌면 소크라테스도 평생에 걸친 뜨거운 정직성의 규율을 통하여 비슷한 것을 발견하였고, 이 때문에 부당하게

처형을 당하면서도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결국 니르바나는 각 사람의 내적 존재 안에서 발견되며, 완전히 자연스러운 상태다.

니르바나는 삶에 의미를 주는 고요한 중심이다.

 

붓다는 늘 지고의 존재를 부정했다.

감독하는 권위적인 신 또한 깨달음을 방해하는 또 다른 버팀목이나 족쇄가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포기하기는커녕, 자신이 애착을 품은 대상을 적극적으로 누리려 하였으며, 자신을

버리라는 붓다의 메시지를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

 

팔라어 텍스트에 따르면 자비심 때문에 붓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중요한 언급이다.

붓다는 단지 자신의 구원에 이른 사람이 아니라, 계속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애초에 그에게 깨달음을 안겨준 것은 세상 모든 곳을 향한 공감과 자비였다.

 

수도승들은 매일 몇 시간씩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자비에 바탕을 둔, 깨어있는 마음의 요가를 연습했지만,

그 방법을 다른 사람에게도 가르쳐야 했다.

이것은 옛날 베다 제의와는 달리, 특권을 가진 엘리트를 위한 종교가 아니었다. 다수를 위한 것이었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남을 희생하면서까지 옹호하고, 부풀리고, 구슬리고, 드높여야 하는 자아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고 노력했다.

 

사실 다른 사람의 권위에 의지하여 도그마를 받아들이는 것은 해로운 일이다.

그것은 개인적 책임을 포기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앙은 니르바나가 존재한다는 믿음과 그것을 실현하겠다는 결의를 의미했다.

붓다는 늘 자신이 가르치는 모든 것을 시험해보라고 제자들에게 강조했다.

종교적 관념은 정신적 우상, 또 한 가지 집착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수도승들이여 내 가르침 역시 뗏목과 같다. 강을 건널 때만 쓰면 되지, 늘 거기 매달릴 필요는 없다.” 붓다의

과제는 오류가 없는 명제를 제시하거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고통의 강을 건너 피안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목적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따라서 붓다에게는 세계 창조나 하느님의 존재에 관한 이론이 없다.

세상을 창조한 하느님을 아는 것이 뭐가 중요한가? 그것을 안다 해도 비통과 고통과 비참함은 계속될 것이다.

 

일반인은 수도승처럼 철저하게 자기 중심주의를 꺼버릴 수 없다. 수도승과는 달리 늘 그 일에 정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이기심의 경험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도 약한 상태에 있다는 것에 공감할 수는 있다.

이렇게 하면 일반인도 자기 탐닉에서 벗어나 자비라는 핵심적 가치에 이르게 된다.

 

붓다는 소크라테스나 공자와 마찬가지로 카를 야스퍼스가 인격의 모범이라고 부른 사람이 되었다.

인간이라면 될 수 있고 되어야만 하는 목표를 예증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붓다는 인간 본성의 새로운 잠재력을 드러냈을 뿐이다.

이 고통의 세계에서도 스스로를 다스리고, 자신을 비롯한 모든 생물과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사는 것이 가능

하다.

사람들이 자기 중심주의의 뿌리를 잘라버리면, 자신의 능력의 정점에서 살고, 자신의 존재 가운데 평소에는 잠들

어 있던 부분을 움직일 수 있었다.

브라민은 붓다를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자 붓다는 그에게 말했다. “나를 깨어있는 사람으로 기억해 주시오

 


8장 철학의 모험 (기원전 400300년경)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한 이론을 선택하고 다른 이론을 거부한다는 것은 실재를 왜곡

하고 , 삶의 창조적인 흐름을 우리 자신이 만든 통로로 강제로 밀어넣으려 하는 것과 다름 없다.

유일하게 타당한 주장은 우리에게 의심과 스스로 알지 못한다는 명료한 인식을 가져다주는 질문뿐이다.

확실성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당황해서는 안 된다. 이런 혼란이 우리를 도로 이끌기 때문이다.

 

도를 막는 일을 그만두고 나면 재능 있는 장인의 교묘한 솜씨를 닮은 자연스러움을 얻게 될 것이다.

노인은 집중력을 완벽하게 발휘하여 자신의 일에 몰입함으로써 엑스타시스, 즉 자기망각을 이루어 도와 완벽한

조화를 이룬 것이 분명했다.

노인은 자신의 의식적인 자아를 떠나 기가 자신을 장악하게 한 것이다.

저는 그것을 손으로 터득하고 마음으로 느낄 뿐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냥 아는 것입니다.

 

자기는 장인이 자신의 일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라졌던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매달릴 때 우리는 도의 큰 변화로부터 소외된다.

자기는 자기 자신을 잊었기 때문에 자기중심주의 속박에서 해방되었다. 이것이 큰 앎이었다.

큰 앎은 크고 서둘지 않는반면 작은 이해는 비좁고 바쁘다

 

사물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다른 모든 것과 구별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별을 잊는다는 것은 구분되지 않는 통일

성을 깨닫고 분리된 개인이라는 감각을 모두 잊는다는 것이다.

맹자는 낙관주의자 였다.

설마 마음을 잃더라도 언제나 다시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무위(無爲)는 답이 아니다. 유위(有爲, 스스로 노력하는 것)를 요구하며, 이것을 바탕으로 인간들은 하늘과 조화

를 이룰수 있다. 유가에서 교육의 목적은 길을 잃은 자비심을 찾는 것이었다.

 

<마하바라타>, 이 서사시는 크샤트리아 전사 계급의 에토스를 반영한다.

축의 시대의 종교 혁명은 그들에게 곤혹스러운 딜레마를 안겨주었다. 왕이나 전사는 공동체를 방어하기 위하여

싸우거나 죽여야 하는 자신의 소명을 이행하면서 어떻게 동시에 아힘사(불살생)라는 이상을 존중할 수 있는가?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세상을 구하려면 덕은 옆으로 치워야한다고 말했으며, 유디슈티라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어렵게 드로나에게 잔인한 거짓말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진신이 아닌 것이 진실보다 나을 수도 있다. 크리슈나는 주장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면, 거짓도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이 서사시는 축의 시대의 영성이 인도의 보통 사람들을 불안하게 뒤흔든 면을 보여준다.

그들은 림보로 밀려 들어간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세상의 다르마에 묶여 있기 때문에 출가자나 요가 수행자들에

게 가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낡은 베다 신앙은 자신을 지탱해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플라톤은 붓다와 마찬가지로 현자는 깨달음을 얻은 뒤에는 아고라로 돌아가 그곳에서 인류의 개선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폭력에 대한 플라톤의 대응은 수학과 철학 학파를 세우는 것이 었다.

이 학파는 아카데메이아라고 불렀다.

 

가르침은 강의보다는 스크라테스 방식의 토론으로 이루어졌다.

플라톤은 이 초기 단계에는 자신의 관점을 제자들에게 강요하려 하지 않고 독립적인 사고를 권장했다.

동시에 글을 써서 자신의 개인적 사상을 발전시켜 나갔으며, 결국 전 저작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최초의 철학자가

되었다.

 

플라톤은 자신의 통찰을 교조적으로 기록하지 않고, 대화의 형식을 사용했다.

이렇게 하면 다양한 관점을 표현할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이런 대화들의 주인공 이었기 때문에, 대화는 확고

한 결론에 이르지 않았다. 플라톤의 대화는 결정적인 주장이 아니라, 더 많은 생각을 해보라는 권유였다.

 

*교조적: 역사적 환경이나 구체적 현실과 관계없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진리인 듯 믿고 따르는.

또는 그런 것.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우리와 관계도 없고,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에 따라 달라지지도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존재하며, 자신의 존재나 본질하고만 관계가 있다. 이런 존재나 본질은 본래 그들 자신의 것이다.”

 

형상은 시간의 세계에 자신을 표현하지만, 그보다 우월하고, 초자연적이고, 영원하다.

이 형상들은 우리 삶에 형태를 부여하지만, 그것을 초월한다.

이곳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은 변하고 쇠티한다. 이런 형상들은 그것을 인식하는 지성과 독립적으로, 그것을 초월

하여 존재한다. 따라서 그 형상은 일반적인 사고 양식이 아니라, 훈련받은 지성이 찾아내고 발견하는 것이다.

 

붓다가 니르바나의 평화를 만끽하고 싶어했던 것처럼, 그러나 그들에게는 동굴의 어둠으로 돌아가 동지들을 도

와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따라서 너희 각각은 이제 아래로 내려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거처에서 살아야

한다.”

 

결국 플라톤 이후에는 신들 너머에 존재하는 ,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실재에 대한 갈망이 나타났다.

그러나 플라톤의 우주론은 철학적 훈련을 받지 않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인류에게 관심이 없는 신은 그들의 삶에 의미를 줄 수 없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철학적 탐구 초기에 그릇된 종교적 관념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은 소크라테스의 처형에

경악했다.

그러나 말년에 가서는 자신의 관점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사형 선고를 옹호했다.

플라톤의 전망은 힘을 잃었다. 그것은 강제적이고, 편협하고, 징벌적인 것이 되었다.

그는 외부로부터 덕을 강요하려 했으며, 자비로운 욕구를 불신했고, 자신의 철학적 종굘르 전적으로 지성적인 것

을 만들었다.

그리스의 축의 시대는 수학, 변증법, 의학, 과학에는 놀라운 기여를 했을지 몰라도 영성으로 부터는 점점 멀어지

있었다.

 

변화는 두카가 아니었다. 모든 생물에게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빗물질적 세계에서 의미를 찾

지 않고, 변화의 물리적 형상에서 의미를 찾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형상이란 감각이 영역 너머에 있는 영원한 실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각 물질 내부에 내재하는 구조였으며, 그 물질이 성숙해 질 때까지 진화를 통제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갑자기 세상을 창조하기로 결정하고 인간 역사에 직접 개입하는 지고의 신이라는 개념을 아주

우수꽝스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위대한 천재성을 지닌 선구자 였다. 그는 거의 혼자서 서구 과학, 논리학, 철학의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서구를 과학의 길 위에 올려놓았다. 그 길은 첫 번째 축의 시대 이후 거의 2천년 만에

2의 위대한 변화를 부르게 된다.

 


9장 제국의 시대(기원전300-220)


중국인은 그리스인을 매혹시켰던 과학적.형이상학적.논리적 문제들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급하게 여긴 것은 법과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중국의 철학자, 도학자, 신비주의자들은 그런 목적을

위해 통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했다. 이 무렵 새로운 접근 방법이 필요하다는 점은 분명해졌다.

 

계속 팽창하는 커다란 나라의 군주들은 이제 그들이 가진 직책의 마법적 능력(도덕)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들은 현실주의자였으며, 경제의 성공의 열쇠임을 알았다. 승리는 영토가 가장 넓고, 인력이 가장 많고, 자원이

가장 풍부하고, 곡식을 가장 많이 저장해 두 나라의 통치자에게 돌아갈 터였다.

 

군주가 이런 거대한 왕국을 다스리려면 인과 예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법가는 실제로 기능하는 정부를 만들고 싶어 했다. 위나라 진나라 같은 성공한 나라들은 끊임없이 팽창했기 때

문에 정복을 당하여 원한을 품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통치를 강요해야 했으며, 따라서 통치자의 카리스마에 의존

하지 않고 부자든 가난하든, 중국인이든 , 오랑캐든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능률적인 통치방법을 찾았다.

 

법가는 봉건 시대의 개인 대 개인 통치에서 객관적인 법률 체계로 중요한 지적 이행을 이루었다.

이런 법률 체계는 현대 서구의 법 개념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고대 중국에서 법은 개인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통제를 위해 고안되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축의 시대 많은 주요 원리들을 비웃는 상앙의 개혁은 고립되어 있던 후진적인 진나라를 중국에서 가장 강력하고

발전적인 나라로 만들었다.

상앙의 광범위한 개혁의 결과 기원전 3세기 말에 진은 다른 모든 나라를 정복하고, 기원전 221년에 그 통치자는

중국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황제가 된다.

 

과거에 사람들이 너그러웠다 해도 그것은 그들이 인을 실행에 옮겼기 때문이 아니라 인구가 적고 먹을 것이 부족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전국시대의 부패와 갈등도 부정직의 결과가 아니라 자원이 빈약한 결과일 뿐

이다.

 

자기중심적인 강박에서 벗어나면 평범한 사람도 현자처럼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편협하고 이기적인 관점에 갇히는 대신 통치의 더 깊은 원리들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도덕경>에는 임박한 소멸에 대한 공포가 주제처럼 흐르고 있다.

<도덕경>은 약한 군주에게 생존의 전략을 제시한다. 호전적인 태도를 보이는 대신 물러나서 스스로를 작게 만들

어라.

음모와 계략을 짜는 대신 생각을 버리고 마음을 진정시키고 몸의 긴장을 풀고 세상을 보는 관습적인 방법에서

자유로워져라. 무위를 훈련해 문제들이 저절로 풀리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구분을 만들어냈으며, 실제로는 자기 중심적 투사에 불과한 엄숙한 행동원리를 고안했다.

노자는 이점에 관하여 장자와 의견이 같았다. 현자가 이런 정신적 습관을 버리는 훈련을 하면 원래의 본성으로

돌아가 올바른 길로 복귀할 수 있다.

 

텅 빈 상태는 <도덕경>에 스며들어 있는 두려움에서 해방을 가져온다. 소멸을 두려워하는 통치자는 망상을 두려

워하는 것이다. 무를 두려워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실재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무위는 행동을 완전히 삼가라는 뜻이 아니라 증오의 상승을 막는, 비호전적이며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다.

우리가 하는 일의 결과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 행동이 아니라 태도다.

군자는 사람들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려 하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노자는 우리가 축의 시대 중국에서 만나는 마지막 현자이다. 그의 이상은 본질적으로 유토피아적이었다.

이런 수준의 비움에 이른 군자는 권좌에 오르기 어려울 것이다.

 

쾌락은 호색과 자기방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타락시아(고통으로부터 해방)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모든 정신적 혼란을 피했다.

죽음은 의식의 소멸에 불과하며, 에피쿠로스가 지적했듯이 우리가 존재할 때 죽음은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이

존재할 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 죽음을 걱정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었다.

 

죽음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올바른 이해는 무한한 시간을 보태주는 것이 아니라 불멸을 향한 욕망을 없애줌으로

써 유한한 삶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

 

반면 기원전 3세기의 새로운 과학자들은 수학, 물리학, 천문학, 공학의 첨단을 달렸다.

과학은 이제 초기의 종교적 방향성을 잃고 전적으로 세속적인 일이 되었다.

 

서양에서는 과학과 로고스를 향해 모여들었으며, 인도나 중국의 현자들에 비해 영적인 야망이 크지 않았다.

헬레니즘 철학자들은 내부에서 초월적 평화의 영역을 발견하려고 영웅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대신 고요한 생활에

만족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들은 정신의 직관적 능력을 훈련하는 대신 과학적 로고스에 의지했다.

서양은 신비한 깨달음을 얻는 대신 세속적인 계몽에 더 흥분했다.

서양의 과학적 소질은 결국 세계를 바꾸며, 16세기의 과학 혁명은 새로운 축의 시대를 출발시켰다.

이것은 인류에게 큰 혜택을 주지만, 과거와는 다른 종류의 정신에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2의 축의 시대의 영웅들은 붓다. 소크라테스, 공자가 아니라 뉴턴, 포로이트, 아인슈타인 이었다.

 

아소카가 죽은뒤 인도는 암측 시대에 들어섰다. 많은 문건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이 수백

년 동안 나타났다 사라진 왕국과 왕조에 관한 믿을 만한 정보는 거의 없다.

이런 불안정은 서기 320년 굽타 왕조가 등장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인도가 이기간에 중요한 영적

변화를 겪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시기에 인도의 종교는 유신론적으로 변했으며, 사람들은 인격신을 발견했다.

<바가바드기타>는 축의 시대의 마지막 위대한 텍스트로 꼽히는데, 이 책은 종교적 변화의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 이야기에 자주 나왔듯이, 새로운 종교 통찰은 폭력에 대한 혐오에서 영감을 얻는 경우가 많았다.

 

전사는 어떻게 하면 자신이 실행에 옮길 수밖에 없는 폭력적 카르마의 악영향을 피하면서 사회에 대한 신성한 의

무를 이행할 수 있을까?

 

<바가바드기타>는 아마 어떤 인도 경전보다도 큰 영향력을 발휘해왔을 것이다. 접근하기 쉽다는 것이야말로 큰

장점이다. 다른 영성들은 소수의 재능있고 영웅적인 금욕주의자들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 반면, 이것은

만인을 위한 종교였다.

 

크리슈나는 이 위대한 현현 뒤에 물질 세계 전체가 인간들이 깨달음을 얻고자 투재하는 전장이며, 그 무기는 초

연한 태도, 겸손, 비폭력, 정직성, 자제라고 설명했다.

<바가바드기타>는 축의 시대 영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10장 축의 시대의 귀환 (기원전 2세기 - )


축의 시대의 영적 혁명은 혼란, 이주, 정복을 배경으로 이루어 졌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정박지에서 떨어져 나와

떠도는 사회에 살았다.

카를 야스퍼스는 이렇게 말했다. 축의 시대는 큰 두 제국 사이의 공백기, 자유를 향한 휴식, 가장 명료한 의식을

가져다 주는 깊은 숨이라고 부를 수 있다.

 

축의 시대 후에 확립된 제국에서는 새로운 정치적 통일을 긍정하는 정신성을 찾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중국 축의 시대 철학자들은 만물의 통일에 대한 영적 이해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사에게 통일이란 반대자의 폭력

적 파괴를 뜻했다. 세상에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정부, 하나의 역사, 하나의 이데올로기 밖에 없었다.

 

유방은 진의 중앙 집권적 정치 체제를 보존하고 싶었다. 이사의 정책이 오도된 면이 있지만 제국에는 교훈적인

이데올로기 만이 아니라 법가의 현실주의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나라 초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天下>라는 글의 저자는 중국의 정신 세계가 해체되고 있다고 느꼈다.

성군들의 가르침은 명료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천하가 큰 혼란에 빠져 훌륭한 사람과 현자들은 빛을 뿌리지 못하고, 도와 덕은 통일되지 못하며, 온 세상이

오직 한 측면만 보면서 전체를 파악했다고 생각하곤 한다.

 

중국인은 누구도 진리의 문제에서 결정권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을 이해했다.

아무리 당당한 정설이라 해도 완전한 충성을 요구할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의 견해를 존중하는 것이 하나의 무

오류의 전망을 얻는 것보다 중요했다. 중국의 포괄적인 정신은 독특하다.

나중에 중국인은 토착의 영성과 더불어 불교를 흡수하게 된다. 중국인은 보통 각각의 믿음에 각각의 영역이 있음

을 인정한다. 이런 축의 시대의 태도는 지금 우리시대에 간절히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바크티 혁명은 브라민과 출가자의 엄격한 종교를 일반 사람들에게 맞게 고치려 했다.

이런 헌신적 믿음의 인기는 유신론에 대한 새로운 갈망을 드러냈다.

모두가 비인격적 브라만과 융합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신과 더 인간적으로 만나기를 바랐다.

 

<바가바드가타>는 공자가 , 자기 자신에게 견줌이라고 부른 것을 실행하게 된 바크타를 가장 높이 칭찬

했다.


자신과 비교를 통하여

기쁨이든 고통이든

모든 것에서 동일성을 보게 될 때

그들 순수한 규율을 갖춘 인간으로 여길 수 있다.

 

바크티는 신을 섬기는 사람에게 자신의 무력함과 욕망을 인정하라고 권한다.

이렇게 자신의 약한 면을 경험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감정 이입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새로운 영성은 축의 시대와 깊은 조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붓다의 죽음이후 수 백년동안 불교도는 붓다의 상을 공경하는 것을 어울리지 않는 일로 여겻을 것이다.

붓다는 니르바나의 축복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붓다의 아이콘은 점차 매우 중요해졌다. 사람들은 붓다의 얼굴에서 고요와 충족을 보면서 인간의 가능성

을 인식하게 되었다.

붓다는 깨달은 인간의 이미지 였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니르바나가 충만했기 때문에 니르바나와 동일시 되었다.

따라서 중요한 의미에서 그는 니르바나였으며, 인간의 형상으로 초월적 실재를 표현했다.

 

서기 1세기에 여기에서 새로운 불교 영웅 보디사트바(보살)가 탄생했다.

그는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보디사트바는 니르바나의 축복 속으로 사라지는 대신 사람

들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희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해방을 발견하라는 가르침을 주려고 삼사라의 세계로 돌아

왔다. 보디사트바는 자비의 새로운 모델이었으며, 축의 시대의 오래된 이상을 새로운 형식으로 번역한 존재였다.

 

힐렐은 간단하게 대꾸 했다. “당신 자신에게 가증스러운 일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마시오. 그게 토라의 전부이고,

나머지는 그 주석일 뿐이오. 가서 그것을 공부하시오

환대가 미래의 핵심이었다. 유대인은 전쟁 시절의 폭력과 분열에서 고개를 둘려 하나의 몸과 하나의 영혼으로

통일된 공동체를 창조해야 했다. 공동체가 사랑과 상호 존중 안에서 통일될 때 신은 그 공동체와 함께 있지만,

서로 싸울 때는 천사들이 한 목소리와 한 선율로 노래하는 하늘로 돌아가버린다.

 

성경은 닫힌 책이 아니었다. 계시는 먼 시대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 아니었다.

성경은 유대인이 텍스트와 대면하여, 거기에 마음을 열고, 자신의 상황을 거기에 적용하려 할 때마다 새로워졌다.

이 역동적인 비전은 세상에 불을 붙일 수 있었다.

 

기독교는 유대인이 되는 새로운 방법을 찾고자 했던 서기 1세기 운동 가운데 하나로서 시작되었다.

기독교는 서기 30년경 로마인에게 십자가형을 당한 갈릴리의 한 신앙 요법사의 삶과 죽음이 중심이 되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 나사렛 예수가 오랫동안 기다리건 유대인 메시아이며, 그가 곧 영광 속에 다시 돌아와 지상에 신의

왕국을 열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신의 아들이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의미로는 신으로부터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고 신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는 특권을

부여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고대 왕실 신학에서는 이스라엘 왕을 야훼의 아들이자 종이라고 보았다.

2 이사야의 고통받는 종이 예수와 연결되었는데, 그 종 또한 인간들 때문에 수모를 겪고 신에 의해 특별히 높

은 지위로 들어올려졌다.

 

예수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 의도가 없었으며, 뿌리 깊은 유대교도 였다.

복음에 기록된 그의 많은 말은 바리사이파의 가르침과 비슷했다.

기독교를 이방인의 종교로 만든 사람은 최초의 기독교 저술가 바울로 였다.

그는 예수가 메시아’ , ‘기름 부음을 받은자(크리스토스)’이기도 했다고 믿었다.

하느님은 만인에게 관심이 있었다. 바울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인류 전체에게 열려 있는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조했다고 확신했다.

 

바울로는 자신이 제한된 개별적 자아를 초월했다고 주장한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랜 원형적인 종교가 사랑이라

는 덕의 지배를 받는 새로운 축의 시대의 지형 안에 다시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예수는 또 아힘사의 인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는 체포될 때 제자들이 그를 위하여 싸우지 못하게 했다.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

그는 자신을 처형한 자들을 용서하며 죽었다. 그의 가장 놀라운 가르침은 모든 증오를 금지한 것이다.

 

무함마드는 축의 시대의 모든 위대한 현자들과 마찬가지로 오래된 가치들이 무너지는 폭력적인 사회에 살았다.

아라비아는 부족 전쟁이라는 악순환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복수는 어김없이 다른 복수를 불렀다.

이때는 또 경제적이고 물질적인 진보이 시기이기도 했다.

메카사람들은 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을 정도로 부유해졌지만, 부를 향한 대질주 속에서 공동체가 씨족의 약한

구성원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하던 오랜 부족적 전통은 잊어버렸다.

불안이 널리 퍼졌을며, 사막의 유목민 시절에는 아라비아인에게 큰 도움이 되던 오랜 이교도 신앙은 바뀐신앙

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무함마드의 종교는 이슬람(내어놓다)이라고 부르게 된다.

이슬람 교도는 하느님에게 자신의 삶을 존재론적으로 내어놓은 사람들이다.

이것은 바로 축의 시대의 핵심과 이어진다.

몸을 구부려 엎드리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일이라고 생가했기 때문에 이것은 아라비아인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몸을 구부려 엎드리는 것은 그들에게 이슬람이 요구하는 것을 이성적인 수준보다 더 깊은 수준에서 가르

치려고 고안된 것이었다.

즉 날뛰고, 우쭐하고, 젠체하고, 언제나 자신에게 관심을 끄려고 하는 에고를 넘어서라는 것이었다.

 

축의 시대의 모든 종교에서 개인들은 자신의 높은 이상에 맞추어 살지 못했다.

이 모든 종교에서 사람들은 배타성, 잔혹성, 미신, 심지어 잔혹 행위의 피해자가 되었다.

그러나 축의 시대 종교들은 그 핵심에서 자비, 존중, 보편적 관심이라는 이상을 공유한다.

이 시대 현자들은 모두 우리 시대와 다를 바 없는 폭력적 사회에 살았다.

 

어떤 사회에 전쟁과 테러가 만연하면, 이것은 사람들이 하는 모든일에 영향을 끼친다. 증오와 공포는 그들의 꿈,

관계, 욕망, 야망에 스며든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이런 일이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이것을

극복하는 것을 돕기 위해 자아의 더 깊고 , 덜 의식적인 수준에 뿌리를 둔 교육을 만들어 냈다.

 

그들이 서로 다른 경로를 거쳤음에도 깊은 수준에서는 서로 비슷한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인간이

움직이는 방식에서 어떤 중요한 것을 실제로 발견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각각의 신학적 믿음과 관계없이, 사람들이 자신을 재교육하려고 훈련을 받고 노력을 기울이면 인간성의

고양을 경험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들의 프로그램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폭력의 주요 원인인 자기 중심주의를 없애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으며,

황금률의 감정 이입적 영성을 장려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엑스타시스, 습관적이고 자기에게 얽매인 의식으로부터 바깥으로 나가기를 경험했으며,

이때 흔히 하느님, 니르바나, 브라만, 아트만, 토라고 부르는 실재를 파악할 수 있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먼저 발견한 다음, 자비로운 삶을 사는 것이 아니었다.

훈련된 자비의 실천 자체만으로 초월을 맛볼 수 있었다.

 

현자들은 우리가 체계적으로 완전히 다른 심리적 태도를 계발하면, 다른 의식 상태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았다. 축의 시대 현자들이 서로 의논한 것도 아닌데 일관되게 황금률로 돌아갔다는 것은 인간 본성의 구조에 관

해 중요한 점을 이야기 해준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이기심을 버리고 자비의 영성을 계발하는 것을 그들의 의제의 맨 위에 두었다.

그들에게 종교란 곧 황금률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초월해야 하는 대상 탐욕, 자기 중심주의, 증오, 폭력 에 집중했다.

사람들이 그런 것을 초월하여 이르게 되는 곳은 쉽게 규정할 수 있는 장소나 사람이 아니라, 여전히 에고 원리의

함정에 갇힌,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지복의 상태였다.

사람들이 초월하여 이르고자 하는 곳에 집중을 하고 그것에 관해 교조적이 되면, 공연히 캐묻기만 하며 삐걱될

수 있었다.

 

수백 년에 걸친 제도적.정치적.지적 발전은 종교에서 자비의 중요성을 흐릿하게 만든 경향이 있다.

공중의 담론을 지배해 온 종교는 제도적 자기 중심주의를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신앙이 너의 신앙보다 낫다! 사람들은 신앙에 자신을 던져 넣으면 , 시비를 걸고 간섭을 하고 심지어 불친절

해질 수도 있다. 자비는 인기있는 덕이 아니다.

 

고대의 보편적 관행이었던 동물 희생은 우리 안에 내재된 공격성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통제하기 위해 고안된

화려하고 폭력적인 행위다. 살인에 대한 종교적 정당화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전통 전체로부터 떼어놓고 본다면, 예를 들어 헤브라이 성경, 신약, 쿠란의 개별 텍스트들은 비도덕적인 폭력과

잔혹성을 승인하는 데 쉽게 이용될 수 있다.

 

우리의 대응은 어때야 하는가? 축의 시대 현자들은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조언을 했다.

첫째, 자기 비판이 있어야 한다. 축의 시대 믿음은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의 행동에 책임질 것을 요구했다.

째로, 우리는 축의 시대 현자들의 본을 따라 실천적이고 효과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

 

오늘날 극단주의자들은 자비와 다른 사람들의 신성한 권리 존중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무시하고 수백 년에

걸쳐 진화해 온 호전적 요소들을 강조하여 축의 시대 전통들을 왜곡해 왔다.

제도의 완결성을 보존하려면 불편한 경전과 역사적 참사들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학자, 성직자, 일반 신도가 어려

운 텍스트를 공부하고, 탐색하는 질문을 던지고, 과거의 결함들을 분석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 모두 자비로운 전망

을 회복하고 그것을 혁신적이고 영향력 있는 방식으로 표현할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많은 현자들이 기록된 경전이라는 관념에 반대한다. 그것이 통속적이고 피상적인 앎을 낳을 것이라고 걱정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즉각적인 의사소통 시대에 살기 때문에, 종교도 즉각적으로 이해하고 싶어하며, 그것을 즉시 파악하지

못하면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축의 시대 현자들은 진정한 앎은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꾸준히 설명했다.

 

우리는 큰 공포와 고통의 시기에 살고 있다. 축의 시대는 우리에게 인간 삶의 피할 수 없는 사실인 고난과 직면

하라고 가르쳤다.

우리 자신의 고통을 인정할 때에만 타인과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밀려 들어와 우리 의식을 공격하는 슬픔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영적인 탐구를 시작할 수 없다.

 

내가 만일 나의 개별적 자아를 절대적 가치로 만들어버리면, 인간 사회는 유지가 불가능해지므로, 우리는 모두

서로 양보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과제는 이런 통찰을 발전시켜, 여기에 전 지구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

이다.

 

오늘날 우리는 비극적 세계에 살고 있으며, 그리스인이 알고 있었듯이, 여기에는 간단한 답이 있을 수 없다.

비극이라는 장르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서 사물을 볼 것을 요구한다.

종교가 우리의 부서진 세계에 빛을 가져오게 하려면, 맹자가 주장했듯이, 우리는 사라진 마음, 우리의 모든 전통

의 핵심에 놓여 있는 자비의 정신을 찾으러 나서야 한다.



저자 카렌 암스트롱(KAREN ARMSTRONG)


영국의 종교학자. 현재 세계에서 가장 선도적인 종교 문제 비평가로 꼽힌다.

1944년 잉글랜드 우스터셔에서 태어났다. 1962년 열일곱 살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수녀원에 들어갔다가 7

만에 환속했다.

옥스퍼드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뒤 런던대학에서 현대 문학을 강의했다.

종교학자로 삶의 방향을 바꾼 뒤 신의 역사》 《마호메트 평전》 《붓다》 《이슬람같은 논쟁적인 저작을 썼으며, 마음의 진보와 같은 울림이 큰 성찰적 저서로 대중과 소통하는 최고의 작가가 되었다. 인류의 모든 종교와 철학의 기원인 축의 시대를 다룬 역작 축의 시대는 암스트롱의 대중적 영향력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었다. 암스트롱의 저작은 출간되는 책마다 세계 40여 언어로 번역되어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카렌 암스트롱은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의 기원을 탐구한 비교종교학적 연구를 통해, 1천 년 넘게 갈등을 겪어 온 세 종교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2008년에는 종교 간 화해와 평화를 위해 활동해 온 공로를 인정받아 프랭클린 D. 루즈벨트 자유 메달과 테드(TED) 상을 수상했다. 테드 상 수상자로서 세계를 바꾸기 위한 한 가지 소원을 말하는 자리에서 암스트롱은 다른 이를 나와 같이 여기는 마음을 위한 선언을 만들어 황금률이 이념과 종교, 민족의 차이를 넘어 세계인들의 믿음과 삶의 중심이 되도록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이 제안은 200911<자비의 헌장(CHARTER FOR COMPASSION)>으로 구체화되어 발표되었다. 암스트롱은 현재 런던에 살고 있으며, 테드(TED) 재단의 자비의 헌장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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