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루의 함정, 그리고 카멜레온 숙신(肅愼)
『고려사』에 보면 건녕 3년 왕융(王隆)이 군(郡)을 들어 궁예(弓裔)에게 귀부하자 궁예는 크게 기뻐하여 왕융을
금성태수로 삼았습니다. 그러자 왕융이 말하기를 “대왕께서 만약 조선ㆍ숙신ㆍ변한의 땅을 통치하는 왕이 되시
려면 무엇보다도 송악에 먼저 성을 쌓으시고 저의 맏이(고려 태조 왕건)를 그 주인으로 삼으시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자 궁예가 이를 따라 왕건을 그 성주로 삼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왕융은 고려 태조의 부친으로 후일 추존하여 고려의 세조(世祖)가 되는 분입니다].
[原文] 乾寧三年 丙辰 以郡歸于裔裔大喜以爲金城太守 世祖說之曰 大王若欲王朝鮮肅愼卞韓之地 莫如先城松嶽
以吾長子爲其主 裔從之使太祖築勃禦塹城仍爲城主 時太祖年二十(『高麗史』太祖紀).
그런데 이상하죠? 왕융이 궁예에게 “대왕께서 만약 조선ㆍ숙신ㆍ변한의 땅을 통치하는 왕이 되시려면”이라는
구절이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변한은 대체로 한반도의 중남부를 말하는 듯하고 조선은 고조선을 말하는 것
으로 북경을 비롯한 북중국과 요동 땅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때는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왕조가 성립되기 무려 4백여 년 전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숙신이라는 곳은 어디를 말할까요?
제가 보기엔 일단 과거 고조선 지역을 제외한 만주 전체 지역으로 봐야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아니죠. 왕융이 궁예에게 한 말은 조선ㆍ숙신ㆍ변한을 하나의 범주로 두고 있다는 것이
지요.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이러한 생각이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의 서두에 나올 뿐만 아니라 다른
사서(史書)에서도 많이 확인이 된다는 것이죠.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지역적인 범주를 일반적으로 현재의 한국(韓國 : Korea)을 의미하는 ‘삼한(三韓)’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청나라 때 편찬된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의 머리글에는 금사세기(金史世紀)를 인용하면서 숙신
(肅愼)에 대하여 “한나라 때는 삼한(三韓)이라고 하고, 위진시대(魏晋代)에는 읍루(挹樓)라고 하였으며 …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權兌遠,「濊ㆍ貊文化圈과 肅愼문제」,『論文集』43, 충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4).
어떤가요? 지금까지 배우고 가르쳐온 관점으로 이해가 잘 되십니까? 그러면 다시 좀 더 깊이 들어갑시다.
고구려 때 요동의 북쪽에 막힐부(鄚頡府 [마오제부(?)])가 있었는데 이곳은 현재 랴오닝성(遼寧省) 창유현
(昌圖縣)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막힐부에 대한 기록들이 매우 일관성 있게 나타나고 있어서 주목이 됩니다.
『신당서(新唐書)』에 이 막힐부는 부여의 옛 땅(扶餘之故地)이라고 합니다(『新唐書』「渤海傳」).
그런데 『요사(遼史)』에 따르면 이 막힐부라는 행정구역은 고구려가 설치하였고 발해가 이를 계승한 곳이라고
합니다만,
이상한 것은 요나라 때는 한주(韓州)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이죠(韓州…高(句).麗置 鄚頡府 都督鄚ㆍ高二州
渤海因之 : 遼史「地理志」).
이상하죠? 요하(遼河)의 북쪽을 두고 한주(韓州)라고 하다니오? 우리는 대부분 한(韓)이니 삼한(三韓)이니 하면
으레 한반도 남쪽을 이야기하는데 요하의 북쪽을 두고서 한주(韓州) 라고 했다니 말입니다.
더구나 송(宋)나라 때의 기록을 보면 이 한주가 삼한의 땅(三韓之地)라고 합니다(曾公亮,『武經總要』卷16,
「北蕃地理」).
사실 쥬신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하등의 이상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쥬신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새끼 중국인’의 관점에서 보면 한없이 이상해지는 것일 뿐이죠.
즉 이 기록 때문에 일부에서는 숙신은 읍루(挹樓)와는 달리 한(漢)나라 때 예맥문화권(쥬신문화권)에 흡수 동화한
종족으로 볼 수가 있다고도 합니다만, 그것은 잘못입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보시면 지극히 당연한 말을 한 것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는 것뿐입니다.
고려시대에는 거란ㆍ금ㆍ고려를 아예 삼한(三韓)이라고 불렀다는 것이죠[허흥식編,『韓國全石全文』中世上,
(亞細亞文化社 : 1984) 崔思全 墓誌].
그리고 명ㆍ청 시대 사람들은 요동 지역을 아예 삼한(三韓)으로 불렀다는 것이 고증에 철저한 대학자의 저서에
나오고 있습니다[顧炎武撰,『日知綠』卷31, 地理 三韓條(四庫提要, 子, 雜家類]
그뿐이 아니죠. 『요사(遼史)』에서는 아예 이 한주(韓州)가 바로 그 의문의 고리국(藁離國)이라는 것이죠
( 遼史「地理志」).
고리국이 어디입니까? 바로 부여와 고구려의 시원(始原)이 된 나라가 아닙니까?
그것이 요하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결국 예맥족(숙신ㆍ동호 포함)의 이동 경로는 허베이(河北) - 요동(遼東) - 요하 북쪽(遼北) - 부여지역
- 고구려ㆍ몽골이라는 저의 주장이 이제는 충분히 이해가 되실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1) 숙신, 안개속의 그 이름
숙신이라는 명칭은 고대ㆍ중세 할 것 없이 중국의 사서(史書)에 자주 나타납니다.
앞서 본대로 숙신은 B. C. 5세기 경 『상서(尙書)』에 나타나고[武王旣伐東夷 肅愼來賀(「書序」)], 『죽서기년
(竹書紀年)』에도 “순임금 25년 식신(숙신)이 와서 활과 화살을 바쳤다(帝舜二十五年息愼來朝貢弓矢)”라는 말이
있죠.
숙신은 그 후 물길(勿吉), 말갈(靺鞨), 읍루(挹婁) 등과 같은 의미도 쓰이는 경우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
종족을 바탕으로 하여 다른 종족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숙신에서 물길이, 물길에서 말갈이, 말갈에서 여진족이 나타나기도 하고 일부는 숙신 - 물길 - 말갈 -
여진 등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나타나기도 합니다.
따라서 숙신이란 같은 종족에 대하여 한족(漢族)의 사가(史家)들이 시대에 따라 읍루·물길·말갈·여진 등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이라는 점을 알 수가 있죠.
숙신의 명칭이 달라진다고 해서 머리 아프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동아시아에 있어서 하나의 민족에 대한
명칭이 달라지는 것은 이들 종족의 문제가 아니라 이들 종족에 대한 한족(漢族) 사가(史家)들의 기록 태도의
문제이기 때문이죠. 애당초 한족(漢族)들은 이들에 대해 편한 대로 부르거나 동물 이름을 섞어서 비칭화(卑稱化 :
욕)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역명과 그 지역에 사는 민족명을 혼동하여 부르기도 한 것입니다.
이제 이 숙신이라는 민족이 어떤 지역에 있었는지를 살펴봅시다.
사마천의『사기(史記)』의 자료로 알려져 있는『국어(國語)』에 “공자가 진나라(현재의 허난성[河南省] 카이펑
[開封] 부근) 머물러 있을 때 싸리나무 화살이 꽂힌 매 한 마리가 떨어져 죽자, 공자가 ‘이 화살은 숙신의 것’이
라고 했다.”는 말이 있죠. 이 사건의 사실 여부보다도
① 상당히 오래 전에 숙신의 존재가 알려져 있다는 점,
② 죽은 새가 발견된 위치가 카이펑 부근이라는 점이 중요하죠. 이것을 지도로 살펴봅시다.
현재의 개념으로 보면 이 매가 화살을 맞은 상태에서 비행 거리가 길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면 멀리 잡아도 숙신은
현재의 산시(山西)지방이나 허베이(河北)를 넘지는 않았을 것이겠죠? 이 기록은 『사기(史記)』(권47 「공자세가」)
를 포함하여 전한(前漢) 때 유향(劉向)이 지은『설원(說苑)』(권18 「辨物篇」), 『전한서(前漢書)』(권27
「五行志」) 등에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기』에 “동방의 이족(夷族)과 함께 북방에는 식신(息愼)”을 들고 있는데[『사기』권1 「五帝本紀」舜],
후한(後漢)의 정현(鄭玄)은 이에 대하여 “식신(息愼)은 또는 숙신(肅愼)이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동북방에 거주하는
오랑캐이다.”라고 주석을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직신(稷愼)은 숙신(肅愼)이다(『일주서』「왕회해」).”라는 말도 보이고 한 무제(漢武帝) 때의 조서에
숙신(肅愼)이라는 말이 보이는데 실제로 씌어진 조서에서는 肅□(□은 愼의 古語)로 되어있습니다.
그 후 이 숙신이라는 말은 236년경부터 554년까지 다시 등장합니다.
이 부분의 연구자들은 숙신을 굳이 나눠 어떤 시대에 사용된 숙신이라는 명칭은 읍루이고 어떤 것은 물길이고
하는 식으로 분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제가 보기에 이것은 잘못입니다.
이 숙신이라는 명칭은 특정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한족(漢族)들이 편리한 대로 부른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시 정리 좀 하고 넘어가죠. 우리는 지난 장에서 ‘조선 = 숙신’임을 보았으므로 다음과 같은 관계가 성립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동북방 오랑캐 = 조선(朝鮮) = 숙신(肅愼) = 식신(息愼) = 직신(稷愼)
그 동안 숙신을 포함하여 만주 지역의 민족들에 대한 연구는 일본, 북한이나 러시아를 중심으로 많이 이루어졌
습니다. 다만 북한 학자들은 중국인들이 아무렇게나 부른 말[汎稱]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여 특정 종족으로
인식하고 분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잘못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당(唐)나라가 멸망하고 난 뒤에도 오랫동안 일본인들은 중국인들을 당인(唐人)으로 불렀고 베트남인
들은 중국을 오(吳)라고 부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경우에도 민족적으로 일반적으로 부르는 말을 정하기란 쉽지 않지요. 지금은 한족(漢族)으로 부르지만
일본의 경우 에도(江戶)시대가 끝날 때까지도 중국인들을 당인(唐人)으로 불렀습니다
[시바 료타로, 『몽골의 초원』(고려원 : 1992) 117쪽].
재미있는 것은 몽골어에서는 지금도 중국을 거란(契丹)이라고 부릅니다. 이상하죠?
이 몽골이나 거란은 둘 다 과거 동호(東胡)로 몽골쥬신에 해당되는 완전히 같은 민족인데도 서로 다르게 부르고
있죠.
거란은 8세기경에 일어나 10세기경에 요(遼)나라를 건국한 민족인데 이들은 몽골과 별 차이가 없는데도 불구
하고 몽골이 이들을 중국인들과 동일시하여 경멸하는 말투로 불렀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요나라가 지나치게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추진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초기에는 같은 민족으로 살다가 요나라가 한화(漢化)하면서 스스로를 한족(漢族 : 중국인)들과 동일시하였기
때문에 몽골인들이 이를 거부한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고구려가 반도부여(백제)를 경멸하여‘잔당(殘黨)’이라고 하면서 그들을 철저히 응징하려했던 것도 반도
부여(백제)가 지나치게 친중국정책(親中國政策)을 추진, 한족(漢族)과 연합하여 고구려에 끝없이 대항했기 때문
입니다. 후일 이 같은 전통은 열도부여(일본)에 그대로 전승되어 열도부여의 지명(地名)들도 마치 중국의 지명
처럼 부릅니다. 모방이 지나쳐 보기에 민망스러울 정도입니다.
(2) 숙신, 카멜레온의 빛깔
숙신이라는 명칭은 554년까지 계속 사용되고 있었고 물길(勿吉)이라는 명칭은 572년까지 사용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563년부터 말갈(靺鞨)이라는 명칭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말갈이라는 명칭이 사라지기도 전인 5대10국
시대에도 여진(女眞)이라는 새로운 명칭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북한 사회과학원 『발해국과 말갈족』(중심 : 2001)].
다시 말해서 숙신-읍루-물길-말갈-여진 등의 명칭이 하나씩 나타났다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쓰이기도
하고 점차 사용되다가 없어지기도 하는 명칭들이라는 것이죠. 마치 한국에서 중국인·한족(漢族)·되놈·짱골라·짱께·
솰라솰라(殺了殺了) 등이 동시에 사용되다가 없어지기도 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숙신이 물길이라는 명칭을 거치지 않고 바로 말갈이라는 명칭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나타
납니다. 왜 그럴까요?
제가 보기엔 여기에는 두 가지의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한족(漢族)의 사가(史家) 입장에서 보면
정확한 정보원(情報源)이 부족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이들 종족들이 유목민들이기 때문에 정확한 이동경로를 파악하기 어려우며 독립적으로 생활을 영위
하면서 이합집산(離合集散)이 심할 수 있기 때문이죠.
유목민들이라도 발전 수준이 모두 다 조금씩은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각자의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
가기 때문에 여러 가지의 차이들이 불가피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겠죠.
특히 소규모의 독립적인 비정착민(非定着民)들은 국가를 구성하기도 어려운 환경에서 주변의 종족들과 극심한
경쟁관계에 있기 때문에 동일한 민족이라도 상당한 적대적인 관계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부여와 고구려는
물론이고 몽골인들이 요나라에 대해 가졌던 적개심이 대표적인 경우지요.
숙신은 시대에 따라서 읍루(挹婁[이루우]), 물길(勿吉[우지, 또는 와지]), 말갈(靺鞨[모허]) 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진서(晋書)』에 보면, “숙신씨는 일명 읍루라고 하기도 한다.(肅愼氏一名挹婁也)”라고 하고(『晋書』
「肅愼傳」)
『후한서(後漢書)』에도 “위략에서 말하기를 읍루는 일명 숙신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後漢書』「孔融傳」의 주석).
읍루·물길·말갈 등의 발음들이 고대에서는 정확히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 알기는 어렵지만 숙신이나 조선 등의
말과는 분명히 다르게 들립니다.
즉 숙신과 조선은 비슷한 소리로 파악이 되는데 읍루·말갈·물길은 상당히 다르게 느껴지거든요.
이것이 왜 그런 지 분명히 알아낸다는 것은 현재로서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지적할 점은 한자(漢字)의 표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숙신·식신·조선 이라는 말과는 달리 읍루·물길·말갈 등은 발음도 차이가 나지만 상당히 비하적인 요소
가 많다는 얘기입니다. 욕에 가깝지요.
읍루는 두레박과 유사한 의미를 보이고 ‘물길’은 ‘기분 나쁜 놈’이라는 의미, ‘말갈’은 버선과 가죽신 또는 ‘두건을
쓴 놈’ 이라는 의미로 하나의 민족 이름으로 사용하기 힘든 욕설(비칭) 들이죠. 그저 되놈·짱꼴라 수준의 말로 이해
하시면 가장 적절할 겁니다.
(3) 숙신, 읍루와 결별하다
아가, 아가 언제나 우리에게 풍요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 아가는 물의 신(神) - 나나이족 -
『삼국지』에는 “한나라 이래로 읍루는 부여에 속해 있었고 부여는 조세와 부역 부담을 가중하게 하여 황초연간
(220~226)에 반란을 일으켰다.(『三國志』「魏書」東夷傳)”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읍루는 부여의 정치권 내에 속하고 있죠.
숙신의 위치는 대체로 보면 백두산 북쪽에 있고 동쪽은 바다에 면해 있다는 것으로 봐서 그 위치가 현재의
블라디보스토크이나 우수리스크ㆍ하바로프스크 등지로 추정됩니다.
[『진서(晋書)』에는 “숙신씨는 일명 읍루로 불함산 북쪽에 있다. 만약 부여에서 그 곳까지 가려면 60일 정도가
걸린다. 동쪽은 큰 바다에 면하여 있고 서쪽은 구만한국에 접해있고 북쪽은 약수에 이른다.
그 영역은 수 천리이다
(肅愼一名挹婁在不咸山北 去夫餘可六十日行東濱大海 西接寇漫汗國 北極弱水 其土界廣袤數千里)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숙신은 과거 숙신으로 기록된 백성들의 극히 일부에 불과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전의 기록들에 의한 부분은 “한족(漢族)이 황하 중류 유역의 좁은 지역을 근거로 할 당시에 이에
인접하여 있는 종족이 숙신”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죠[북한 사회과학원, 『발해국과 말갈족』(중심 : 2001) 98쪽].
또한 숙신을 대신하는 물길이라는 이름은 요하 지역(요동ㆍ요서ㆍ요북)에서 나타난 말이기 때문에 읍루가 대신
하고 있는 숙신(블라디보스토크 - 하바로프스크 - 아무르강 하류)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죠.
따라서 숙신을 대신하는 읍루라는 것은 숙신인(쥬신인) 가운데서 현재의 블라디보스토크나 우수리스크 등지로
이동한 사람들을 말하게 되지요. 그렇다면 현재의 지리 개념으로 보면 황하 → 요서 → 요동 → 북만주 → 연해주
등으로 숙신의 일부가 이동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이들 지역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다른 민족이라기보다는 개발 정도의 차이에 따라서 안정된
국가 권력을 형성하지 못한 숙신계의 극소수의 비정착민들이 끊임없이 정치경제적 탄압으로부터 탈출해간 경로
라고 봐야합니다.
여기서 쥬신의 역사에서 가장 골치 아픈 문제의 하나인 숙신과 읍루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봅시다.
읍루는 그 민족적 계열이 가장 혼란하여 동북아시아 전체사를 혼란에 빠뜨린 민족입니다.
이 부분을 해명해야만 쥬신의 비밀이 풀립니다.
이 읍루 부분이야말로 한족사가(漢族史家)들이 가장 큰 실수를 했으며 그로 인해서 쥬신의 역사가 안개 속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의 사가들도 이 읍루의 함정에 걸려들어서 천년 이상을 헤매고 있는 것이죠.
먼저 선사시대 동아시아의 인종분포를 살펴봅시다. [그림 ④]은 현재의 고교 역사부도에 있는 지도입니다.
[그림 ④]에서 보면 읍루와 아이누의 지역이 일치한다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① 읍루와 아이누의 발음이 거의 일치하고,
② 읍루와 아이누가 살고 있는 지리적인 영역이 일치하며,
③ 현대에 이르기까지 아이누의 생활(일본 지역은 제외)과 각종 사서들에 묘사된 읍루의 문화와 습속,
그리고 그 생활상이 일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첫째, 읍루(挹婁)는 현대 음은 이루[yìlóu]인데 이 말은 아이누 말인 ‘이르’, 또는 아이누라는 말과 거의 일치합
니다. 아이누의 말로 ‘이르[ir]’라는 말은 가족(家族), 또는 그 보다 큰 범위의 친족을 가리킬 때도 사용한다고
합니다. ‘아이누’란 그들의 말로 사람이란 뜻이고 이들을 부르는 일본말인 ‘에조, 에미시’도 아이누말로 사람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일본인들은 아이누를 ‘하이(蝦夷)’, ‘이(夷 : 중국말로 동쪽 오랑캐)’, ‘적(狄 : 중국말로 북쪽 오랑캐)’으로 적고
‘에조’, ‘에미시’라고 읽습니다. 열도부여인(일본인)들이 지나치게 중국인 행세를 하면서 주변민족을 부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죠].
둘째, 지리적 영역으로 앞서 본 대로 읍루는 “동쪽은 큰 바다에 면하여 있고 서쪽은 구만한국에 접해있고
북쪽은 약수에 이른다. 그 영역은 수 천리이다.” 라는 표현과 [그림 ④]의 영역이 거의 일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후한서』에서는 “읍루의 거주영역의 북쪽 끝은 어디까지인지 알 수가 없다
(不知其北所極 :『後漢書』東夷傳).”고 합니다.
셋째,『후한서』에 “읍루는 항상 혈거생활(穴居生活)을 하는데 그것이 깊을수록 귀하며 큰집의 경우에는 무려
9층(아홉 개 계단)에 이르기도 한다(常爲穴居 以深爲貴 大家至接九梯 :『後漢書』東夷傳).”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 즉 연해주에서 아무르 강 하류 일대에 이르는 주민들은 정착생활을 하면서 야산이나 삼림에서 수렵을
했습니다. 이들 정착민의 주거(住居)는 원칙적으로 반지하식이며 흙을 씌운 혈거(穴居)입니다.
이것은 근대에 이르기까지도 거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베링해에 가까운 지역에서는 대부분 순록을 기르는 유목민
인 것과는 약간은 대조가 됩니다.
생물학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 아이누족은 예맥이나 숙신과는 거리가 멉니다. 길랴크나 아이누의 언어는
고아시아 제어(諸語)에 속합니다. 그래서 알타이어계통과는 다르지요.
언어적으로 보면 아이누 말은 문장 성분이 서로 뒤섞여 한 낱말처럼 보이는 집합어(polysynthetic language)에
속한다고 합니다(즉 동사는 각종 의미를 갖는 일종의 접사와 낱말들이 융합되어 구성이 복잡해져 매우 어렵게
됩니다).
유럽의 바스크 언어도 이와 유사한데, 스페인 속담에 “하나님이 악마를 징벌하기 위해 내리는 가장 큰 벌은 그
악마에게 7년 동안 바스크 말을 공부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집합어는 말이 어렵다고 합니다.
아이누족은 눈이 쌍꺼풀이고 귀는 큰 편이며 광대뼈는 크지 않습니다. 아이누는 머리 길이도 세계의 인종들
가운데서 아주 큰 편(198.36㎜)이지만 머리의 폭은 아주 작은 반면, 한국ㆍ몽골ㆍ만주 인종은 짧은 머리형에
속합니다. 알타이 계통이 아니지요. 뿐만 아니라 아이누에게서는 몽골 반점이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시베리아에는 다양한 민족들이 살고 있지만, 그들의 수는 매우 적습니다.
오늘날에도 시베리아 소수민족의 비율은 채 10%가 되지 않으며 시베리아 지역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가진
민족은 부랴트족(몽골의 칭기즈칸족의 기원)ㆍ사하(야쿠트)족 등인데도 1990년대를 기준으로 봐도 40여만 정도
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퉁구스인들은 십만이 안 된다고 합니다(물론 스스로를 퉁구스라고 부르는 민족은 없지요).
이 종족들을 살펴보면 에벤·에벤크·네기달·나나이·울차·우데헤(러시아)·오로촌(중국)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길랴크로 알려진 니브히·에스키모·코략·유카기르 등의 소위 고아시아족이 있으며 과거 사서에서 읍루라고
부르던 종족은 아무르강 하류에서 연해주에 이르는 곳에 살던 길랴크나 아이누 같은 고아시아족들에 대해 읍루,
즉 아이누라고 불렀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시베리아의 종족들의 인구는 하나의 종족이나 민족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정도로 적습니다.
대개의 경우 1만 명도 안 되고 있습니다(민족으로 분류하기도 어렵죠). [그림 ④]에서 일본은 북몽골이 아닌 것
으로 나타나 있는데, 이것은 반도부여(백제)의 영향이 미치기 이전의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들을 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숙신과 아이누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숙신을 읍루, 즉 아이누라고 불렀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쥬신의 비밀을 찾아가는 하나의 중요한 열쇠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글을 먼저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래의 글은 바로 1920년대의 연해주
일대에 살고 있는 길랴크 족의 모습을 묘사한 글입니다(이 글에서는 길랴크라고 하고 있는데 큰 범주에서 보면
아이누, 즉 과거의 읍루라고 보시면 됩니다).
“러시아와 만주의 국경일대에 사는 소수민족인 퉁구스 고리드족과 길랴크족에게는 곰한테 죽은 사람의 시체는
그 곰을 잡을 때까지 그대로 둔다는 관습이 있었는데 … 곰을 유인하겠다는 의도가 있었다. … 북만주 일대의
삼림이나 황무지에는 길랴크나 고리드, 한민족(韓民族) 등 나라 없는 약소민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만주족은
그들을 박해하고 착취했다. … 길랴크족은 늘 당하기만 했다(김왕석, 『수렵야화』 「중국인과 길랴크족」).”
대체로 이들의 거주지는 아이누 - 길랴크의 거주영역과 일치합니다.
그런데 만주족(만주 쥬신)과는 다르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계속 보시죠.
“그 일대는 나무들이 울창한 원시림이었으며 그런 곳에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오직 길랴크족뿐이었다.
만주 땅에서는 어디를 가도 나타나는 마적들도 그곳엔 들어가지 않았다. … 만주인들은 그들을 짐승 같은 야만인
이라고 말했다(김왕석, 『수렵야화』 「중국인과 길랴크족」).”
이 부분의 묘사는 『삼국지』와 거의 일치하고 있습니다. 『삼국지』에서는 “그들은 사람의 수는 적었지만 험한
산속에 살고 있었고, 이웃 나라 사람들은 그들의 활과 화살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끝까지 그들을 굴복시키기는
어려웠다(『三國志』魏書「東夷傳」).”는 기록이 있죠.
이 기록은 『후한서(後漢書)』『진서(晋書)』에도 그대로 있죠.
“길랴크족은 사냥만으로 생활을 했다. 몽고족처럼 그들도 농업이나 상업을 경멸했으며 아무리 생활이 궁해도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몽고족은 그래도 목축을 했으나 길랴크족은 그것도 하지 않고 오직 사냥만을 했다. …
그들은 많은 짐승들을 잡았으나 수입은 좋지 않았다.
만주인 상인들에게 착취를 당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값비싼 짐승 털과 녹용·웅담 등 약재를 헐값으로 만주인
상인들에게 팔아 상인들만 배부르게 만들어주었다.
길랴크족은 돈이라는 걸 잘 몰랐고 저축이니 이자니 하는 것도 잘 몰랐다. … 그들은 짐승을 많이 잡아도 훈제로
만들어 저장을 할 줄 몰랐다. 많이 잡히면 이웃마을 사람들이나 나그네들까지 불러 잔치를 벌여 다 먹어치웠다.
그래서 그들은 사냥이 잘 되지 않으면 굶주렸다.
만주인들은 그럴 때는 그들에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거기엔 터무니없는 이자가 붙어있었다. 한 달에 2할, 심지
어는 3할까지 이자가 붙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만주인들이 돈을 꾸어줄 때는 땅이나 집, 또는 처자식을 담보로
잡았으며 돈을 갚지 않으면 강제로 담보물을 빼앗아갔다(김왕석, 『수렵야화』「중국인과 길랴크족」).”
이 부분에서 아이누 - 만주족(만주쥬신) - 한족(漢族)의 비즈니스적 네트워크의 연계관계(supply chain in
business)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만주족(과거의 숙신 : 만주 쥬신) 중의 일부는 이들과 깊은 거래관계가 있어
왔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족(漢族)들이 쥬신의 일부를 두고 읍루(아이누)라고 부른 이유도
충분히 짐작이 됩니다.
위에서 인용된 『수렵야화』는 신문에 연재 되었던 글인데 저자는 한국인 사냥꾼 박상훈(朴尙勳, 함경도 출신,
1879 ∼ 1945년 소식불명)이라는 사람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쓴 글이라고 합니다.
이 글로 보면 당시의 읍루의 생활이 어떤 상태였는지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그리고 이들과 만주인과의 관계를 알 수가 있지요. 이들의 수렵생활은 그 특성상 긴 세월 동안 상당한 원형을
유지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자는 이들이 만주나 한족들과는 달리 이기심이나 교활성 위선 등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수렵야화』에서는 만주족과 읍루(아이누, 또는 길랴크)와는 완전히 다르게 보고 있지요? 다시 말하면 우리가
만주족의 조상이라고 보는 숙신과 읍루(아이누)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한 번 더 말씀드리지만 이 점을 분명히 아셔야 쥬신의 뿌리가 해명이 됩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 사서의 기록들로 돌아가 좀 더 심층적으로 살펴봅시다. 제가 보기에 한족(漢族)의 사가들은
숙신(肅愼)의 일부가 동부 지역으로 지속적으로 이동해가면서 아이누족(길랴크족)과 (『수렵야화』에서 보듯이)
상업적 거래를 위해 어울리는 것을 보고 아예 읍루(아이누)라고 불렀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또 숙신의 일부가 아이누 지역까지 흘러 들어간 것을 마치 이들이 읍루로 합쳐진 양 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숙신이 연해주 쪽으로 흘러들어가니 아이누는 다시 동북으로 올라갔겠고 후일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만주 쥬신이
대거 중국 땅으로 들어가자 다시 이들은 남하하였을 것입니다.
이 같은 요동이나 만주ㆍ연해주 일대의 사정을 한족 사가들이 제대로 알 리가 없지요.
따라서 숙신이 아이누가 아니듯이 아이누는 예맥이 아니고 또한 쥬신도 아닌 것이지요. 숙신 대신에 사용한
읍루가 아닌 아주 엄격한 의미에서 말하는 읍루는 예맥계열이 아니죠. 앞으로 읍루는 아이누로 보고 분석을
해야 합니다.
유전학적으로 보면 아이누에 특유하게 나타나는 유전자인 DE-YAP(Y 염색체 변이의 하나)는 한국이나 몽골
등 범쥬신에게는 1~2%도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 (Han Jun Jin & Wook Kim, “Genetic Relationship
Between Korean and Mongolian Population Based on the Y Chromosome DNA” 『Korean J Biol Sci 7 』
139 ~144, 2003)
다만 DE-YAP은 일본의 경우에는 꽤 많이 나타나는데(『Human genetics』2003, Vol 114, 27~35쪽),
이것은 아이누가 일본열도에 이미 많이 살고 있었고, 쥬신족이 일본 열도에서 아이누를 정벌하는 과정에서 많은
피가 섞인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 동안 읍루족의 기원은
① 퉁구스족의 일파설(위치가 현재의 길랴크족의 분포와 가까우므로 길랴크[니브히(Niebuhr)]족의 선조로 보는
견해)
② 여진족의 선조설(각종 중국측 사서에는 숙신의 별칭이자 후예로 여진족의 선조로 보는 견해) 등이 있지만
이제 읍루가 여진족의 선조라는 설은 확실히 틀렸다는 것을 아시겠죠?
읍루족이 아이누족이라고 볼 때 숙신의 이동으로 인하여 다시 사할린 북쪽 아무르강 하류 입구쪽으로 다시 밀려
올라갔을 가능성이 크므로 ①은 타당성이 있습니다.
이 점을 좀 봅시다. 킬랴크는 연해주에서 북극해에 이르는 동시베리아 지역에 광대하게 분포하는 아이누의 영역
가운데서 아무르강 하류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죠.
일부에서는 한국어가 길랴크족의 언어와 매우 유사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한국인과 길랴크족이 직접적으로 연관
된 민족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것은 잘못입니다(무엇보다도 지금까지 본 대로 유전자적인 분석에서 범쥬신
에게 있어서 아이누의 특성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죠).
1955년 러시아의 끄레이노비치는 길랴크족(Gilyak)이 아무르강과 사할린보다 남부 지방에 거주했으며, 한국인
및 만주인들과 긴밀했다고 보고 한국어 및 만주어와 길랴크어의 유사성을 찾아내었는데 그것은 두 언어에 보이는
유사한 낱말은 차용에 의한 것이지, 결코 동일 계통에 속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김방한,『한국어의 계통』(민음사 : 1983) / 장길운,『국어사정설』(형설출판사 : 1993) / 이기문,『국어사개설』
(탑출판사 : 1972)].
오늘날 많은 학자들이 아이누말의 계통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이 언어와 우리 말과는 직접적인 연계를 밝히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이 분야의 전문가에 따르면, 아이누 계의 언어를 일본어·한국어·알타이어, 심지어 인도 유럽어와
의 비교를 해보았지만 어느 쪽도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이 언어를 현재까지는 다른 언어와는 상관이 없는
‘고립어(isolated language)’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한국어가 길랴크말과 비슷한 어휘들이 많다는 것은 숙신과 길랴크(또는 아이누족) 사이에 상당한
교류가 있었거나 정치적인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길랴크족의 주요 거주지는 아무르강 하류
유역이고 아이누의 주요 영역은 아무르강 하류에서부터 두만강 하구에 이르는 태평양 연안 지역입니다.
그래서 아이누나 길랴크는 각각 숙신(만주쥬신)과 한반도(반도쥬신)에 경제적으로나 언어적으로 많은 교류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그래서 읍루, 즉 아이누는 비슷한 시기에 동쪽으로 이동해가는 숙신인들과 교류를 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만
그것이 숙신의 후예들인 만주족(만주쥬신)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숙신 - 여진 - 만주는 쥬신으로서의 일관된 계보를 가지고 있는데 왜 갑자기 아이누와
하나의 종족이 된다는 말입니까?
물론 숙신의 일부 즉 한반도 및 연해주 동북부의 사람들과 교류가 있을 수가 있겠지만 그것은 숙신의 큰 흐름의
일부에 불과한 것이지요.
숙신을 읍루와 혼동한 것은 그 동안 사가(史家)들이 한 실수 중 가장 큰 실수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읍루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삼국지』의 “읍루는 과거 숙신의 나라이다(古之肅愼氏之國也).”라는
기록으로 말미암아 사가들이 숙신 - 읍루의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본대로 숙신은 예맥의 주요 흐름과 일치하는 민족이므로 읍루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사가들이 읍루의 함정에 빠진 것은 읍루, 즉 아이누가 아무르강 상류에서부터 연해주까지 이동해왔기 때문에
생긴 문제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아이누들의 남진(南進)은 정확한 원인을 알기는 어렵지만, 아무르강 유역의
문화를 뽈체 문화라고 하고 아이누의 문화를 올가 문화라고 하는데 이 두 문화는 토기ㆍ철기ㆍ석기 등에 나타
나는 유사성(토기의 형식, 문양구성, 제작기법 등)으로 보아 같은 문화로 보고 있습니다
[강인욱, 『極東考古學要綱』(2002) 53쪽].
아이누는 문화적으로는 많이 뒤떨어져 있지만 수렵을 하는 민족이므로 그 특성상 대단한 전투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후한서(後漢書)』에 “아이누(읍루) 사람들은 배를 타고 노략질하는 것을 즐겼는데,
북옥저는 이들의 노략질을 두려워하여 매년 여름이 되면 번번이 바위굴에 숨었다가 겨울에 되어 뱃길이 통하지
않으면 이에 내려와 읍락에 거처하였다
(挹婁人憙乘船寇抄, 北沃沮畏之, 每夏輒臧於巖穴, 至冬船道不通, 乃下居邑落 :『後漢書』「東沃沮」).”라는 기록
이 있습니다.
아이누는 전문 수렵인이라 대부분 백발백중의 명사수였던 모양입니다. 『삼국지』에서는 읍루인들은 사람의
눈을 쏘아 맞힐 정도로 활쏘기에 능하여(善射) “일단 활을 쏘면 모두 맞았다. 화살에 독을 발라서 사람이 맞으면
모두 죽는다.(射人皆入. 矢施毒, 人中皆死 : 『三國志』「魏書」東夷傳)”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여는 여러 번 이들을 정벌하기 위해 나섰지만 산세도 험하고(所在山險) 사람들이 그들의 화살을 두려워
해서 끝내 정복할 수 없었다(卒不能服也)고 합니다(『三國志』「魏書」東夷傳).
그러면 여기서 읍루, 즉 아이누와 교류를 가진 숙신의 일부 집단의 성격에 대해 알아봅시다. 범쥬신은 한족의
압박으로 인하여 허베이 - 요동 - 만주 - 연해주 등지로 지속적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연해주로
이동해 간 쥬신의 일부는 아이누와의 교류를 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여기에는 보다 경제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요동과 만주의 범쥬신 가운데 일부는 고래로부터 문피(호랑이 가죽)가
가장 주요한 특산물의 하나였습니다(‘숙신이 조선에서 나온 아홉 가지 이유’ 참고).
이 같은 고급 특산물의 가장 중요한 공급자가 바로 아이누로 볼 수가 있습니다.
실제에 있어서 읍루의 문화수준은 매우 열악했다고 합니다. 『삼국지』에서는“동쪽 오랑캐들은 대부분 예기
(禮器)를 사용하는데 동쪽 오랑캐들 가운데 (유독) 읍루는 음식예절이 없고 풍속이 엉망이었다.(東夷飮食類 皆用
俎豆 唯挹婁不法 俗最無綱紀)”(『三國志』「魏書」東夷傳)라고 하여
문화적으로 가장 미개할 뿐만 아니라 장례법 또한 매우 미개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요.
읍루는 자연환경이 열악한 까닭으로 다른 종족들과 문화적으로 격차가 심하여 제대로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숙신과 읍루가 제대로 융합하지 못하는 것은 마치 언어와 문화가 다른 쥬신과 한족(漢族)이 제대로 어울릴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읍루(挹婁)는 쥬신이 아니며 연해주에서 아무르강 하류에 이르는 지역에 살던 아이누ㆍ
길랴크(니브히) 같은 고아시아족을 이르는 명칭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부 쥬신(숙신)이 이 지역과 연계하여 비즈니스 활동(Business Activities)을 함으로써 한족 사가들이
이들을 읍루라고 혼동했거나 아니면 숙신인지를 알면서도 비하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4) 기분 나쁜 놈
숙신을 의미하는 말 가운데 물길(勿吉)이라는 이름을 한번 봅시다.
중국인들이 한자어로 표현한 것을 보면 한마디로‘기분 나쁜 놈’이라는 뜻이군요. 정말 듣기에 기분 나쁘군요.
물길은 발해 때 숙신의 한 갈래가 막힐부(鄚頡部)를 중심으로 먼저 물길을 칭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 다시 막힐부가 나오네요. 막힐부는 현재 랴오닝성(遼寧省) 창유현(昌圖縣)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막힐부는 고구려가 설치하였고 발해가 이를 계승한 곳이고, 요나라 때는 한주(韓州)로 이름이 바뀐 곳이죠.
이 한주(韓州)란 ‘한국인(韓國人)들이 사는 곳’이라는 의미이죠? 이것만 보아도 물길을 쥬신에서 빼어낸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사서들의 기록을 보면 숙신의 이름이 매우 다양하게 바뀌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물길·말갈로 주로 나타나
지만(읍루도 나타나지만 이제는 제외시켜야겠지요),
숙신이 어느 날 동시에 물길로 불린 것도 아니고 그들의 일부에 대하여 물길로 부르거나 끝까지 물길로 부르지
않은 숙신도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숙신은 카멜레온처럼 변화가 무쌍합니다.
숙신이라는 민족 이름의 변화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나타납니다.
① 숙신 - 숙신 - 숙신 (일부의 숙신족은 그대로 숙신으로 부름)
② 숙신 - 읍루 - 읍루 (일부의 숙신은 읍루로)
③ 숙신 - 읍루 - 물길 (일부의 숙신은 읍루 - 물길)
④ 숙신 - 숙신 - 말갈
⑤ 숙신 - 읍루 - 물길 - 말갈(일부의 숙신은 읍루 - 물길 - 말갈)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 한 가지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숙신이라는 종족이
물길·말갈 등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읍루는 이제 제외합시다).
위의 경우 가운데 일반적으로는 ⑤의 경우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 경우뿐만 아니라 다른 경우가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④의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면 흑수말갈(黑水靺鞨)이 있습니다. 즉 흑수말갈은 물길로
불린 적이 없다는 말이죠[북한 사회과학원, 『발해국과 말갈족』(중심 : 2001) 108쪽]. 참고로 흑수(黑水)란 현재
의 흑룡강(또는 송화강)을 말합니다.
숙신이라는 종족의 명칭이 이렇게 다양하게 된 또 다른 원인으로 추정되는 것은 하나의 원집단(原集團)에서
그 집단의 세력이 약화되었을 때 그 통치권 하에 있던 다른 부족 가운데 강력한 세력이 나타나서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한 경우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말갈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의견들이 있습니다. 그 많은 견해들을 다 소개할 순 없는 일이고 주요한
것만 소개해 봅시다. 예를 들면 흑룡강(黑龍江)을 현지인들이 만구[Mangu] 라고 했는데 이 말을 따서 했다는
견해도 있고 물길, 또는 말갈은 만주어로 밀림, 또는 삼림의 뜻인 ‘웨지’[窩集 (Weji)], 또는 ‘와지’에서 나왔다는
견해도 있죠.
제가 보기에는 이 ‘와지’라는 말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즉 ‘산골 사람’, 또는 ‘숲의 사람’이라는 의미로 ‘와지’라는
말을 사용해왔는데 그것을 중국인들이 한자로 받아 적을 때 같은 발음으로 ‘기분 나쁜 놈(勿吉)’이라는 욕설로
쓴 것이죠. 정말 기분 나쁘군요. 그런데 이 ‘와지’라는 말은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합니다.
‘와지’라는 말은 삼림이라는 의미 외에도 동쪽, 즉 ‘해 뜨는 곳(日本)’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죠. 생각해보세요.
숲이 우거진 곳에 사는 사람들은 숲에서 해가 뜨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동쪽인 한자말의 동(東 : 木 + 日)도 사실은 나무(木) 위로 떠오르는 태양[日]을 묘사한 말이죠. 평생을 알타이
연구에 몸을 바치신 박시인 선생(前 서울대 교수)은 이 말을 옥저(沃沮)나 왜(倭)의 어원(語源)이라고 분석합니다.
앞으로 다른 장(일본편)에서도 보시겠지만 이 왜라는 말이 시작된 것은 요동ㆍ만주 지역입니다.
놀랐죠? 여러분은 그 동안 왜(倭)라는 말은 일본 열도에서 시작된 말로만 아셨죠? 이 부분은 일본편에서 다시
분석합니다.
어떻습니까? 그렇다면 이 물길·말갈이 결국은 옥저나 동예 나아가 일본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다시 말하면 숙신이 부여ㆍ고구려 지역은 물론이고 옥저ㆍ동예ㆍ한반도ㆍ일본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된
민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따라서 숙신이나 물길은 동아시아의 쥬신족들에 대한 일종의 범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중국학자들이나 대부분 한국의 사학자들은 물길은 확실히 오랑캐 종족으로 보고 있으며 물길을 이은
말갈(靺鞨[모허])도 일반적으로 돼지·개가죽 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조선의 대표적인 석학으로 추앙받는 정약용 선생조차도 “내 생각이긴 하지만 말갈이라는 말은 그들이 돼지와
개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었기 때문에 그들을 말갈로 부른 것일 것이다.”라고 합니다(정약용,『아방강역고』권2 ).
이외에도 말갈이라는 말은 붉은 색의 무릎 가리개를 의미한다는 설도 있긴 합니다.
즉 말갈을 부르는 다른 말로 매갑(韎韐[모거])이라는 말이 있다는 것이지요. 매갑이란 선비(鮮卑)의 세르비와
유사하게 붉은색의 무릎 가리개를 의미합니다. 매갑은 말갈이라는 말과 발음이 매우 유사하죠.
말갈은 그 이전의 앙갈(鞅羯)의 후예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앙(鞅)이란 고삐를 말하고 갈(羯)이란 거세한 양을
의미하는 말로 양을 거세하여 고삐로 이리저리 끌고 다닐 수 있게 한 것이라는 의미죠.
이 갈족은 중국의 산서성을 중심으로 석륵(石勒)이라는 영걸이 나타나 후조(後趙)를 세워 중원을 지배한 적이
있는 민족입니다. 『동문선』에 실린 최치원의 견해에 따르면 “발해의 원류는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에 (고구려의
변방에) 혹처럼 붙어있던 부락인 앙갈의 족속이다(渤海源流 句麗末滅之時 本爲疣贅部落鞅羯之屬)”라고 합니다.
최치원은 이들이 세력을 확장하여 발해를 건국한 것으로 보고 있지요.
그러나저러나 분명한 것은 말갈이라는 말이 비록 음을 빌려서 사용한 말이라고 할지라도 예맥(濊貊)이라는 말과
같이 욕설(비칭)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숙신은 만리장성 이북의 지역에서 동북아시아에 걸쳐서 거주했던 민족들을 부르는 일반적인 명칭이었
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숙신은 카멜레온의 몸 색깔처럼 물길(勿吉)·말갈(靺鞨)·읍루(挹婁) 등으로 불리었
으며, 후일에는 여진·만주족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름들이 거의 욕설로 바뀌어졌습니다. 스스로 글이 없다 보니 한족(漢族)의 사가(史家)들에
의해 재단된 것이죠. 그러나 이 숙신이야말로 쥬신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주체였습니다.
다음 장에서는 이 숙신이 현실적으로는 어떤 국가에서 어떻게 변모되어가는지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쥬신의 실제 뿌리, 물길과 말갈
유리(羑里)에 가서 불탄다
노태맹
이제 유리에서 푸른 강의 은유는 끝났네.
물고기 산중에 매달려있고
아침이면 가장 높은 곳으로부터
마른 북 울리며 늙은 소 물 마른 강가로 내려오네.
불길한 괘처럼 태양 속에 별이 뜨고
우리 딱딱한 혀는 얼마나 오래 유리의 은유를 견디는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적인 유리 나무들 제 마른 팔 부러뜨리고
붉은 새 안간 힘으로 둥근 유리의 시간 빠져 나가네.
그러나 여기 유리에는 외부는 없네.
마른 북 울리며 늙은 소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물 마른 강가 저녁 얼굴 가리고
부러진 나무속에 갇혀 우리 불타네, 우우
유리에 가서 우리 불타네.
- 노태맹 시집. 『유리에 가서 불탄다』(세계사 : 1995) -
‘유리(羑里)’란 삼천백여 년 전 은(殷)의 폭군 주왕(紂王)이 문왕(文王)을 가둔 감옥입니다. 문왕은 주(周)를
건국한 무왕(武王)의 아버지로 유리에서 복희(伏羲)씨가 그린 ‘팔괘(八卦)’를 처음으로 연역(演易)‘하였는데
이것이 주역(周易)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무왕은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웠습니다. 무왕과 그의 후예들은 쥬신의 손발을 묶어 빠져나올 길이 없는
유리에 가두었습니다. 그로부터 수천 년 동안 쥬신은 유리(羑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1) 숲의 사람
우리는 때로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조금만이라도 그 관념의 틀을 벗어나 보면 금방 알게 되는
것들도 그 관념 속에서 헤매다가 그 관념 속에 함몰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경우도 많지만 우리 역사에서 대표적인 경우는 물길(勿吉), 또는 말갈(靺鞨)이라는 민족에 대한 것입니다.
말갈과 관련하여 몇 가지 먼저 알아둘 사항이 있습니다. 말갈은 고구려나 발해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에서의 “고구려·발해는 소수민족 지방정권”이라고 하여 한국사와는 무관한 중국사의 일부로 보고 있습니다.
즉 발해는 ‘말갈족을 주체로 한 민족 정권인 동시에 당나라 중앙 정권의 책봉을 받아 당 왕조에 예속된 지방 정권’,
혹은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 정권’이라는 것입니다. 중국 정부의 공식입장을 대변하는 중국의 국정교과서에는
“발해는 당현종(唐玄宗)이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임명한 속말부(粟末部)의 수령(首領) 대조영(大祚榮)이 세운
속말말갈(粟末靺鞨)의 지방 정권’(『중국역사, 초급중학교과서』).”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중국학자들의 연구로 “고구려인은 여진족과 동일하다”라는 주장[왕건군(王健群),「고구려
족속탐원(高句麗族屬探源)」『學習與探索』53 : 1987-6]도 있습니다.
즉 고구려는 부여(夫餘)에서 왔고 부여는 숙신(肅愼) 계통의 퉁구스족, 즉 후대의 여진족이므로 고구려인도
여진족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발해도 ‘고구려족(高句麗族)의 별종(別種)도 아니고 고구려의 후예도
아닌 중국 동북지방에 예로부터 생활해 온 숙신족(肅愼族)의 후예인 속말말갈족(粟末靺鞨族)’이라는 연구
(김향, 「발해국의 일부 민족문제에 대하여」)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위에 나타난 내용만으로 보면 왕건군이나 김향의 주장은 크게 틀린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런 당연한 이야기를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는 한국사학계의 고질적인 ‘새끼 중국인’ 근성입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숙신, 물길이나 말갈은 우리와는 다른 미개한 오랑캐로 고구려나 부여의 지배를 받은
민족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동북공정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고구려도 숙신, 즉 후대의 여진족의
국가라고 하니 꼼짝없이 당하게 된 것입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숙신(물길ㆍ말갈)은 중국의 산서지방에서 흑룡강 연해주 등지에 걸쳐서 거주한 민족의 범칭
(일반적으로 두루 부르는 이름)으로 불리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본 대로 말갈이나 물길이란 만주어로 밀림, 또는 삼림의 뜻인 ‘웨지’[窩集 (Weji)], 또는 ‘와지’
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즉 ‘산골 사람’, 또는 ‘숲의 사람’이라는 의미로 특정한 권역을 가리키고 있지는 않지요.
그리고 이 말이 ‘해 뜨는 곳(日本)’을 의미하여 쥬신의 일반적인 명칭을 따른 것을 알 수 있지요.
일부에서는 물길이 부여나 고구려 계열과는 전혀 다른 종족이라는 근거로 『위서(魏書)』[북위(北魏)의 역사서
- 『삼국지』의 위나라가 아님] 「물길전」의 “물길의 말이 다른 동이의 그것과는 다르다.”라는 기록을 들고 있습
니다. 이것은 『위서』「물길전」의 기록이 아이누(좀 더 엄밀하게는 아이누의 선조, 또는 길랴크 같은 고아시
아족), 또는 아이누와 교류하는 일부 숙신인들을 지칭하면서 아이누의 언어와 숙신 즉 물길의 언어를 혼동하여
생긴 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읍루 지역(아이누나 고아시아족의 영역)에 살고 있던 숙신을 아예
읍루처럼 불렀던 것 같습니다(‘읍루의 함정, 그리고 카멜레온 숙신’ 참고).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고요? 바로 물길의 위치 때문이지요. 『위서』에 따르면 물길의 대체적인 위치는 북류
송화강변이었습니다(『魏書』卷100「勿吉傳」). 이 지역은 현재의 하얼빈 동쪽 송화강이 북류하는 지역으로
하바로프스크에서 콤소몰스크(Komsomolsk)에 이르는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앞 장에서 물길은 발해 때 숙신의 한 갈래가 막힐부(鄚頡部)를 중심으로 먼저 물길을 칭하였다는 말씀을
드린 바 있죠[북한사회과학원『발해국과 말갈족』(중심 : 2001) 107쪽]. 구체적으로 보면, 5세기 경 물길이라는
이름을 가진 종족이 사서에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현재까지 정확히 언제 이 물길이라는 명칭이 나타났는지 알 수
는 없습니다. 다만 연흥 5년(475년) 물길의 을력지(乙力支)가 북위(北魏)에 사신으로 간 것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 이전의 시기로 볼 수는 있겠지요. 그리고 물길이 조공을 보낸 마지막 기록은 북제의 무평 3년(572년)입니다.
물론 이것은 기록상의 이야기이고 실제로 물길이 이 기간에만 존속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고 다만 이 마지막
조공 후에도 일정하게 그 이름은 있었겠지요,
문제는 물길을 가장 먼저 칭한 막힐부의 위치가 현재 랴오닝성(遼寧省) 창튜현(昌圖縣)으로 추정된다는 것이죠.
이 막힐부는 고구려가 설치하였고 발해가 이를 계승한 곳이었죠. 이 곳은 과거 고조선의 영역이자 동호의 영역인
지역입니다.
그러면 『위서』「물길전」의 기록은 분명히 이상합니다. [그림 ①]에서 보면 랴오닝성 창튜현의 위치는 요하
(遼河) 북쪽입니다. 만주 서쪽 경계 가까이에서도 물길이 존재하고 동쪽 끝부분에서도 또 물길이 나온다는 말이
지요? 그렇다면 만주 지역 전체에 해당되겠군요. 손오공처럼 동쪽 끝과 서쪽 끝을 구름을 타고 날아다닐 일은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결국 물길의 영역은 요하에서 하바로프스크가 위치한 연해주 일대에 분포한 것이 되어
결국 숙신의 영역과 다를 바가 없지요. 차라리 범쥬신의 영역이라는 편이 나을 듯 한데요.
이것을 [그림 ①]로 확인해 보세요.
그래서 『위서』「물길전」의 기록은 잘못된 것이고 이 책 역시 그 동안 고질적인 문제인 숙신(물길)과 아이누
를 혼동하여 보고 있죠. 그 동안 이런 유의 기록을 한국이나 중국의 사학자들이 앵무새처럼 다시 반복하여 왔
습니다. 그러니 숙신이나 물길의 실체가 보일 리 있나요? 다시 말씀드리면, 숙신의 일부가 읍루(아이누)와
접촉한 것을 두고 『위서』「물길전」은 숙신(물길)을 마치 읍루(아이누를 포함한 고아시아족)처럼 묘사한 것
이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중국의 사서(史書)에서는 쥬신의 종족에 대해서 아무렇게나 기록하다보니 하나의 민족이 여기저기서
서로 다르게 나타나게 됩니다. 여기에다 ‘새끼중국인[小中華人]’을 자처하는 한국의 사가(史家)들이 이것을
지속적으로 비판 없이 받아들여 사용하다보니 쥬신의 역사가 자꾸 안개 속으로 밀려들어가게 된 것이죠.
일단 물길에 대한 사료들을 간단히 보고 넘어갑시다.
물길인들은 문화적으로는 뒤떨어져 있었으나 군사적으로는 매우 강대하여 부여를 멸망시킨 것으로 되어있습
니다(『魏書』卷100「勿吉傳」). 대부분의 사서에서 국가를 제대로 구성하지 못하고 만주일대를 살아가는 쥬신
들은 강한 전투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이들 부족들을 지배하기란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수많은 경제적 수탈과 정치적 압제 속에서 강한 전투력을 유지하고 그 한계상황에서는
과감히 도전하고 그들의 정치적 지배를 물리친 경우가 많습니다.
전체 물길인들 가운데 국가구성에 동참하지 않은 물길인들은 전쟁이 벌어지면 부족들을 중심으로 전쟁에 임했
으며 전쟁이 끝나면 다시 원래로 돌아가 유목생활을 하였습니다. 각 부족들은 우두머리가 있었지만 전체를 통솔
하는 큰 우두머리는 없었습니다(邑落各自有長 不相總一 :『魏書』卷100「勿吉傳」). 그것은 자연환경과 유목과
수렵이라는 경제적 배경에 원인이 있겠지요.
물길은 정착생활을 하기 힘든 상황이기 때문에 중국과는 달리 국가의 영역에 포함되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은 것이죠. 그렇다고 하여 이들이 숙신(물길)이 아닌 것은 아니죠. 우리가 모든 것을 단지 한족
(漢族)의 농경민의 시각에서만 보니 이상한 것이죠. 위의 설명[邑落各自有長 不相總一]에서 보듯이 한족(漢族)과
같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 안에 속해있지 않다고 해서 다른 민족으로 파악해서는 안 되죠
[참고로 한족(漢族)의 통치제도는 정착민을 바탕으로 한 철저한 수탈과 착취의 경제구조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
니다. 대부분의 한족(漢族) 왕조들은 지나친 수탈과 사치로 패망합니다].
그러다보니 쥬신을 부르는 이름도 일관성이 없고 대충 부르게 된 것입니다. 한족(漢族)의 입장에서는 국가체제
를 구성한 부족은 따로 분리하려 들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비칭(卑稱 : 욕)으로 동북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일반
적으로 숙신 또는 물길(말갈)등으로 통칭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것은 만주 지역의 문화적ㆍ지리적 특성과도 무관하지는 않겠죠. 인구가 극히 희박하고 부족의 단계에
머물러 수많은 씨족 또는 원시적 형태의 부족국가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족(漢族) 사가(史家)로서는 판단
하기에 어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관심도 없었겠죠.
예를 들면 북위의 역사서인 『위서』(「물길전」)에 의하면 물길의 주변에는 대막루국(大莫婁國 : 부여국이라
고도 함), 복종국(覆鍾國), 막다회국(莫多回國), 고루국(庫婁國), 소화국(素和國), 구불복국(具佛伏國), 필려이국
(匹黎尒國), 발대하국(拔大何國), 욱우릉국(郁羽陵國), 고복진국(庫伏眞國), 로루국(魯婁國), 우진국(羽眞國)
등의 12개국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고대국가 체제가 아니라 부족, 또는 원시적 부족국가 정도의 단계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런 부족국가
들을 모두 서로 다른 민족으로 분류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쉽게 말하면 쥬신은 주로 부족연맹·부족연합국가 등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중앙집권적 구조의 중국
인의 사고로는 이해될 리가 없죠. 이런 특성은 부여ㆍ고구려ㆍ백제ㆍ신라ㆍ몽골ㆍ금ㆍ후금(청)ㆍ일본 등에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전통은 일부 지역에서는 이미 농경생활이 정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사라지지
않았던 쥬신의 주요 특성입니다[제가 『삼국지 바로읽기』(34장 삼국지와 고구려)에서 쥬신의 특성을 볼복스
(Volvox)에 비유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지요].
(2) 지배층만 고구려인이라니?
숙신은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물길과 말갈로 불립니다. 그 동안 우리가 배우고 가르친 대로 동북방의 대표적
오랑캐지요. 지금까지 배운 대로 한다면, 이들은 발해의 피지배계층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인이고 피지배층인 민중은 말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물길과
말갈 역시 안개 속에 있는 민족입니다. 마치 쥬신의 역사가 안개 속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그 동안 요동과 만주 지역의 민족에 대한 연구는 북한(北韓)에서 많이 이뤄졌습니다.
북한의 연구는 발해가 고구려 유민과 대부분 고구려의 전주민(前住民)에 의해 건국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즉 북한 학자들은 발해주민을 일률적으로 말갈로 부르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대부분이 고구려(高句麗)의 유민
(遺民)으로 보아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북한 사회과학원 『발해국과 말갈족』(중심 : 2001) 120쪽].
따라서 고구려인들이 발해를 건국했거나 일부의 고구려인이 건국하고 다수의 말갈을 지배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죠. 그리고 통일신라 때 최치원은 발해가 갈족의 한 갈래인 앙갈(鞅鞨)에 의해 건국된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둘 다 잘못되었습니다.
말갈과 고구려 주민을 분리하는 것은 보다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문제이지 민족적 특성으로 보기는 어렵지요.
예를 들어 봅시다. 한국의 수많은 씨족 가운데 한 성씨인 전주(全州) 이씨(李氏)가 조선왕조를 건설했다고 해서
그들이 전체 대다수 한국인들과 다른 집단이라고 볼 수 있나요?
발해는 고구려의 유민들을 바탕으로 하여 만주 일대에 광범위하게 존재했던 포괄적인 말갈인(만주쥬신)에
의해 건국된 나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최치원은 중국에 조기유학한데다 중국에 너무 오래 살아서 그런지 발해와 말갈에 대해서는 비하하는 정도가
한족(漢族)의 사가와 유사하고(그래서 여러 망발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북한의 연구는 지나치게 편협해[『력사과학』(1962) 1호 「발해사 연구를 위하여」, 『발해사연구론문집』
(1992) 「발해의 주민구성」] 그에 반하는 사료들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죠.
예를 들면 『유취국사(類聚國史)』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발해국은 고구려의 옛 땅이다. … 주현과 관역이 없고 곳곳에 마을이 있는데 모두 말갈인의 부락이다.
백성들은 말갈인이 많고 원주민(土人)들은 적다.
모두 원주민으로 촌장을 삼는다. 큰 마을은 도독, 그 보다 작은 규모는 자사ㆍ수령으로 부른다. 날씨가 극히 추워
수전 농사가 안 된다.
(渤海國者 高麗之故地 … 無州縣舘驛 處處有村里 皆靺鞨 其百姓靺鞨多 土人少 皆以土人爲村長 大村曰都督
次曰刺史 其下百姓 皆曰 首領 土地極寒 不宜水田 : 『類聚國史』卷193)”
위의 글은 8세기 당나라에 유학했던 영충(永忠) 스님이 보고한 것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라고 하는데 “백성들은
말갈인이 많고 원주민(土人)들은 적다.”고 하고 있죠? 오히려 말갈인과 토인(土人 : 원주민)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같은 시대 사람이 같은 시대의 사정을 그린 것이고 비행기를 타고 다닌 것도 아닌데다 여러 지역을
직접 통과하면서 적은 기록이니 비교적 정확한 기록으로 봐야 합니다.
그런데 북한의 학자들은 영충이 발해의 변두리를 보고 온데서 이 같은 말을 했다고 봅니다(북한 사회과학원,
앞의 책. 143쪽). 하지만 영충스님 글의 전체적인 서술 내용으로 보면 특정한 지역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기는
어렵고 발해의 전반적인 상황으로 봐야할 것입니다.
즉 “백성들은 말갈인들이 많다”라고 하는 것은 일반론적인 서술로 볼 수가 있기 때문이죠. 오히려 전체 주민이
말갈이고 일부가 그 지역 사정을 잘 아는 그 지역 토착민(정착민)으로 보고 있는 것이죠.
영충 스님의 글로 보면 고구려인이라는 말은 어디로 가고 말갈과 토인만이 있어서 고구려인이라고 별도로
분리한다는 것은 무의미해 보입니다. 오히려 말갈이 고구려인과 동일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북한 학자들의 연구방식도 결국은 ‘소중화의식’, 즉 ‘새끼중국인’의 사고방식에 깊이
물들어져 있음을 알 수 있죠.
하기야 한국 지식인들의 ‘새끼중국인’ 근성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런 식이니 과거 세종대왕께서 친히 민중을
위해 한글을 창제하시는데도 사리사욕(계급적 이익)을 위해 반대할 수가 있는 것이죠.
세종대왕께서는 집현전 학사들의 간섭을 피해 왕자·공주들과 비밀리에 한글을 만들어 기습적으로 반포하셨다고
합니다(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세계 문화유산이자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디지털 시대에 가장 적합한 아름
다운 문자를 사용하고 있지요). 이런 자들을 어떻게 말리겠습니까?
한마디로 수천 년을 유리(羑里)에 빠져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직도 미망(迷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아무리 갈 길이 멀어도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갑시다. 이제 자가당착적인 ‘소중화의식(小中華意識)’, 즉 ‘새끼
중국인’ 근성은 그만 버리자는 겁니다. 몽골ㆍ만주족과 우리의 뿌리가 같은데도 남북한 학자들 모두 이들을
오랑캐 취급을 하고 민족사의 범주에서 제외시키려는 일들을 이제는 그만두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진실이
어둠 속에 갇히고 1900년대 후반기부터 시작된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 요동 만주 지역 쥬신역사 말살정책)
도 자초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해결책은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중국의 논리를 도와주고 있을 뿐입니다.
숙신ㆍ물길ㆍ여진 등이 실제로는 고구려ㆍ발해와 같은 뿌리임에도 불구하고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의
논문(1933)이 발표된 이후 “발해(渤海)의 지배층은 고구려의 유민”이라는 해괴한 논리로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시라토리 구라키치가 만주사(滿洲史)의 대부(代父)격이라 해도 비판할 것은 비판
하고 봐야하는데 남북한의 사학자들이 아직도 이 사고 범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시라토리 구라키치가 식민사학[植民史學 : 만선사관(滿鮮史觀)]의 대부(代父)라고 핏대를 높인
사람들도 남북한의 사학자들입니다.
발해의 지배층만이 고구려 유민이라니 그것은 말이 안 되지요. 말갈이라는 명칭 자체가 중국인들이 중국의
동북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부른 소리인데 ‘말갈인 = 고구려인 = 발해인’인 상태에서 누가 지배층이 되고 누가
피지배층이 된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누가 누구를 지배한다는 소린지 알 수가 없군요.
영충스님의 기록을 보세요. 그가 다녀간 곳은 과거 고구려 지역이죠? 그리고 그 지역이 이제는 발해가 되었고
그 대부분 백성이 이전에는 고구려백성이었던 말갈이고 나머지는 소수의 토착민이라는 것이죠.
고구려나 발해는 위ㆍ오ㆍ촉과 같은 정치적인 국가명칭이고 말갈은 중국인들이 만주 일대에 거주하는 종족을
부른 이름이 아닙니까? 실제로 발해의 피지배층으로 알려지고 있는 말갈계 족장들도 수동적으로 지배를 받은
존재들이 아니지요. 이들은 국제무역은 물론이고 외교에 있어서는 독자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李成市, 「 발해사 연구에서의 국가와 민족」『만들어진 고대』(삼인 : 2001) -
참고로 말씀드리지만 이 책 자체는 비밀이 많은 일본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학자 특유의 현학적 횡설수설이
많지만 발해 관계부분만은 비교적 객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갈인들은 7개의 부로 나눠져 있었다고 합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일부 말갈들은 당나라로
들어가고 일부는 세력이 미약하여 흩어지고 나머지는 발해로 들어갔는데 오직 흑수지역의 말갈, 즉 흑수말갈만이
강력하였다고 합니다(『신당서(新唐書)』권 219 「말갈전」).
이같은 분석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사가들이 말갈인들과 고구려 유민이라는 것에 아직도 집착한다면
다시 분석을 해봅시다.
만약 발해를 구성한 주민들을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인으로 본다면 이 들 사이의 종족적 문화적 차이는 있을까를
냉정히 물어봅시다.
발해에 있어서는 말갈인들을 위한 2원체제가 구성되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말갈인들과 고구려 유민들
사이의 차이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죠. 제가 보기엔 그 차이라는 게 도시민과 지방민 정도의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발해의 백성이 된 말갈인과 편입되지 못한 말갈인은 정착 - 비정착 단계의 차이 정도가 아니었
을까 합니다[참고로 말씀드린다면,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산골에는 화전민(火田民)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학교에서 화전민은 산(山)을 망치는 매우 나쁜 사람들로 배워서 그런지 이들이 제게는 매우 이질적
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들은 실제의 한국 정부의 통제 밖의 존재로 보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는 저
자신에 대해 놀라기도 했습니다. 같은 한국인끼리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즉 발해의 지방통치제도는 5경 15부 62주가 있었을 뿐 이민족(異民族)을 다스리는 별도의 부서나 제도가 없었
다는 것은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과의 문화적 차이가 거의 없다는 말이죠. 북한의 학자들은 이에 대하여 “말갈인이
없었기 때문에 이원적 통치구조가 없었다[북한 사회과학원 『발해국과 말갈족』(중심 : 2001) 153쪽].”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여러 사서에 발해 민족의 대부분이 말갈이라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사실은 발해에는 (대부분) 말갈인만 있었기 때문에 이원적 통치구조가 필요 없었다는 것이 더 맞는 말입
니다.
이상의 기록들을 종합해 본다면 한규철 교수의 지적과 같이 “말갈이란 어느 특정의 종족명이 아닌 넓은 지역
이민족을 통칭하여 부르는 범칭(한규철,『발해의 대외관계사』)” 으로서 일종의 욕설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코쟁이·짱꼴라 등으로 외국인들을 묘사하듯이 한 말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 범칭으로 부르는 말갈은
과연 어떤 공간적 범위를 차지하고 있을까요?
기본적으로 말갈의 영역은 지나치게 광대하여 지금껏 말씀드린 범쥬신 영역을 대부분 포괄하고 있습니다.
6세기말 수ㆍ당 시대 이후 많은 학자들은 발해의 영역의 주민들을 말갈로 통칭하였고 그래서 시라토리 쿠라키치도
“말갈이란 이름은 넓은 동북 지방의 여진 민족을 총칭하는” 것이라고 합니다(白鳥庫吉, 「塞外民族」『東洋思潮』
12, 1935 ; 『白鳥庫吉全集』卷4 ).
다시 말해서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만주에서 한반도 북부에 이르는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부르는 말이 바로 물길, 또는 말갈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 말이 옥저는 물론이고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쉽게 말하면 물길, 또는 말갈은 쥬신족을 불렀던 명칭이라는 말입니다. 즉 과거에 숙신이라고 하다가 나중
(수나라ㆍ당나라)에는 요동ㆍ만주에 사는 주민들을 모두 물길, 또는 말갈족으로 불렀다는 것이죠.
이 점은 쥬신족의 실체에 대한 것이므로 좀 더 구체적으로 봅시다.
말갈에는 크게 7부가 있는데 이들에 대한 견해가 다소 복잡하고 논쟁도 심하지만 결국 이들이 예맥계(濊貊系)냐,
숙신계(肅愼系)냐 하는데 국한되어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논쟁은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아무런 쓸모가 없습
니다.
왜냐하면 숙신계와 예맥계의 차이가 궁극적으로 없지 않습니까? 예맥계든, 숙신계든간에 이들은 모두 말갈의
7부에 속한 민족입니다. 그러면 말갈로 부르면 되지, 왜 무슨 근거로 이들을 나눕니까? 중국인들은 이들을 포괄
하여 그저 ‘말갈’로 부른 것이지요. 중국인이 입장에서는 “그놈들이 그놈”이라고 생각하여 ‘재수 없는 놈’이라고
하여 물길(勿吉)로 한 것 아닙니까?
더구나 중요한 것은 예맥이라는 말은 말갈이 등장할 즈음에는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많은 예맥이 한순간에 증발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말갈계니, 읍루계니 하는 말들이 얼마나 단기적
이고 일관성이 없는 용어인가 말이죠. 다 따지고 보면 숙신(숙신=예맥=동호)이라는 민족 그 자체는 그대로 있고
그것을 부르는 방식이 이리저리 바뀌고 있을 뿐인데 말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고조선과 고구려는 예맥계이고 발해의 주민은 말갈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면 예맥과 숙신이
분명히 다르다는 말이죠? 그런데 지금까지 본 대로 도대체 무엇이 다른지 그 근거를 알 수가 없네요.
러시아 학자 엘 에르 꼰체비찌는
① 고대 조선족과 숙신(물길ㆍ말갈의 선민족)의 인구분포가 사료와 지리상으로 일치하고
② 이들의 종족 형성 과정이 유사하며 토템이 공통적으로 새[鳥]라는 점, 종족 발상지가 백두산(白頭山)이라는 점,
③ 그리고 이들을 묘사하는 말이 비슷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사실상 동일 종족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안호상 선생은 예맥ㆍ숙신ㆍ동호를 하나의 범주로 봅니다. 중국인 학자 슈이 이푸는 『삼국지』와
『후한서』를 분석한 후 중국 대륙의 동부에 거주했던 모든 민족은 동일한 기원을 갖고 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유엠뿌진, 『고조선』(소나무 : 1997)]. 앞서 본대로 숙신ㆍ조선ㆍ변한도 하나의 범주로 보는 것은 고려시대
까지는 일반적인 관행들 가운데 하나로 볼 수도 있죠.
(3) 물길과 말갈, 고향과 형제의 이름
이상한 기록이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나 백제가 고구려와 접경지에서 말갈의 침입을 받았다는 말들이
자주 나옵니다. 그런데 고구려가 침입하지 않고 왜 말갈이 침입하냐는 거죠?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볼까요?
『삼국사기』「백제본기」의 무녕왕조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502년 백제의 무녕왕은 고구려의 남쪽 경계를 공략하였고 다음해(무녕왕 3년) 5천명의 군대로 마수책(馬首柵)을
불태우고 고목성(高木城)으로 침입해오는 말갈군대를 쳐서 물리쳤다고 합니다(三年秋九月, 靺鞨燒馬首柵, 進攻
高木城. 王遣兵五千, 擊退之. 冬無氷).
506년 다시 말갈이 침입하여 고목성을 파괴하고 6백여 명의 주민을 죽입니다(六年秋七月 靺鞨來侵, 破高木城,
殺虜六百餘人). 507년에는 말갈군대의 침입에 대비하여 고목성 남쪽에 목책을 세우는 동시에 장령성을 축조합
니다(七年夏五月 立二柵於高木城南, 又築長嶺城, 以備靺鞨).
그러자 그해 겨울 고구려의 장수가 말갈과 함께 한성을 공격하기위해 횡악에 주둔하자 왕이 군대를 보내 이들을
격퇴하였다고 합니다(冬十月 高句麗將高老與靺鞨謀, 欲攻漢城, 進屯於橫岳下, 王出師, 戰退之).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말갈의 영역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죠? 그 동안 배운 역사에서는 말갈은 현재의
흑룡강변이나 하바로프스크에 있어야지 함경도나 평안도 남부에는 왜 나타나느냐 말이죠.
그래서 정약용 선생은 이를 두고 말갈이 아닌데 말갈로 잘못 사용했다고 하였습니다.
즉 동예(東濊)를 말갈로 착각하여 기록했다는 말이죠. 현대의 사학자들도 이런 견해를 수용하거나 아니면 말갈이
고구려의 속민 또는 식민지(부용국)이니 백제나 신라의 정벌에 말갈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고구려가 백제ㆍ신라와의 한창 전쟁 중이던 거의 1백여 년간 말갈에 대한 기록이
『삼국사기』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죠. 말갈병의 전투력이 대단하므로 이 때가 오히려 더 많은 말갈병이 필요할
터인데 나오지를 않고 있으니 더욱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마치 말갈병들이 몽땅 증발한 듯이 말입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이 분야의 전문가로 알려진 한규철 교수는 말갈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변경 피지배 주민들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초기에는 단순히 피지배계층(통치의 대상)으로만 보던 말갈을
후기에 갈수록 하나의 동일한 국가구성원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한규철 교수의 글을 직접 보시죠.
“고구려지배층들은 평소에는 변경의 피지배 주민들을 ‘촌사람’의 뜻을 갖는 ‘말갈’로 생각하다가, 삼국 항쟁의
위기 아래에서는 ‘고구려국인(高句麗國人)’에 그들을 포함하여 편제하였다는 것이다. … 고구려는 지방에 대한
통치력을 많이 상실하게 되어 지방 세력가의 발생을 초래하게 되었으며, 이들은 대외적으로는 당과의 관계에
있어 반독립적인 활동을 전개하여 ‘말갈’이라는 이름을 남기었고, 대내적으로는 도시의 지배층으로부터 다시금
‘말갈’의 변방 사람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삼국사기』 편찬자는 598년부터 고구려 피지배 주민의
비칭이자 범칭인 ‘말갈’을 『수서』, 『구당서』등에서 다시 차용하여 썼다고 생각한다.
[한규철, 『발해의 대외관계사』(신서원 : 1994) 제1장]”
즉 말갈이라는 것이 고구려의 주류 민족과 다른 민족이 아니라 고구려의 지방민들을 두루 일컬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래 전에는 역사 서술이 왕조 중심적이고 도시 중심적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또 도시 사람과 시골(지방) 사람 및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차별하였기 때문에 고구려의 지방민을 그저 ‘말갈’로
불렀다는 얘깁니다. 몇 가지를 제외하면 상당히 타당한 지적이죠?
이같은 현상은 비단 고구려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죠. 『남사(南史)』에 따르면, “신라는 그 풍속에 성을‘건모라’
라 하고, 읍은 안쪽에 있는 것을 ‘탁평’이라 하고, 밖에 있는 것을 ‘읍륵’이라 하는데, 역시 중국의 말로 군현이라는
것이다. 나라에는 6탁평과 52읍륵이 있다.
(其俗呼城曰健牟羅, 其邑在內曰啄評, 在外曰邑勒, 亦中國之言郡縣也. 國有六啄評·五十二邑勒. :『南史』「列傳」)”
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이란 신라어로는 잔머라[健牟羅(jianmuluo)]이고 그 성안을 쥬핀(啄評[zhuoping])으로 불렀으며 성
밖의 사람들을 일러서 이루(邑勒[yile])라고 하는데 이 말은 바로 읍루(挹婁)와 거의 같은 발음이 나타나고 있지요.
아직까지 정확한 의미를 고증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중앙민과는 달리 지방민을 비하한 표현으로 ‘읍루
(아이누)같은 촌놈’ 정도로 생각됩니다.
이런 경우는 흔히 나타납니다. 즉 신라가 경주의 다른 이름으로 쓰이는 것이나 발해의 경우에도 국인(國人 : 나라
사람들)이란 지배층을 의미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결국 우리는 흔히 발해인의 구성인 대부분이 말갈인이었다고
하는데 발해인들이 그 스스로를 말갈로 불렀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는 얘기죠.
다시 봅시다. 한국의 사학계가 흔히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인이고, 피지배층은 말갈인”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위의 논리대로 하면 결국은 ‘발해 = 고구려’라는 의미가 되지 않습니까? 발해의 지배층은 또 발해의 수도에
살겠지요? 그 수도에 사는 사람이 고구려인이죠? 그 나머지는 고구려 시대에나 발해시대에는 역시 말갈인이죠?
그래서 저는 발해라고 하지 말고 대고구려(대고려), 또는 후고구려(후고려)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죠.
사실 과거로 갈수록 관존민비(官尊民卑)뿐만 아니라 왕경(王京 : 수도), 즉 중앙과 지방의 격차는 매우 심각했을
것입니다. 결국 도시(都市), 즉 왕경을 중심으로 국가가 운영되겠죠? 가령 고구려(또는 발해)에서 평양(상경)을
중심으로 할 터이고 그러면 평양(상경) 이외의 지역은 ‘고구려’, 또는 다른 종류의 범칭(凡稱)이 필요하니 이것을
중국인들은 다소 욕설에 가까운 “버선발과 가죽신 입은 놈[말갈(靺鞨)]”이나 “기분 나쁜 놈[물길(勿吉)]”으로
불렀다는 말입니다. 이 말이 가지는 뉘앙스는 한규철 교수의 지적대로 ‘(재수 더러운) 촌놈’에 가장 가까웠을 것
입니다. 단 이러한 말들은 고구려(또는 발해)의 입장이 아니라 중국의 입장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한규철 교수가 간과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물길이라는 말 자체가 ‘촌놈’을 의미하는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물길이니 말갈이라는 말은 아무렇게나 나온 말은 아니고 범쥬신 지역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던 말,
즉 ‘와지’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것이죠.
이 ‘와지’라는 말은 숲이나 삼림, 또는 ‘해 뜨는 곳[日出地]’이라는 쥬신에게는 다소 성스러운 삶의 터전, 또는 그
민족을 가리키는 말인데 한족(漢族 : 중국인)이 이것을 ‘재수 더러운 놈[勿吉]’이라는 욕설로 만든 것입니다. 기가
찰 일입니다. 여기에 부화뇌동하는 ‘새끼중국인’들이 더욱 가증스럽죠. 결국 물길(勿吉)이라는 말은 우리가 사용
하는 ‘짱꼴라’, 또는 ‘코쟁이’ 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의 심한 욕설입니다.
중국의 입장에서 봅시다. 중국인들에게는 설령 고구려라는 거대 국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정책과 의사결정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은 왕경(수도)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근대적 국가와는 달리 수도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민, 즉 지방민이란 통치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 불과했던 것이니까요. 따라서 실제로 중국인들과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사람들은 왕경인들이라고 봐야합니다.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은 어떤 말로 대충 부르게
됩니다. 그래서 한족(漢族)들은 고구려의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들을 고구려인으로 판단하고 그들을 고구려
인으로 부르지만 나머지 사람들을 대충 ‘말갈’로 비하하여 불렀다는 얘기죠.
그렇다면 이상하게 보였던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말갈’이라는 표현이 잘못되지 않았을 수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즉 말갈이 침입했다는 말은 고구려의 지방군이 공격했다는 말이 된다는 말이죠. 결국 고구려군이 침입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후에는 말갈병이 침입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군이 침입한 것이니 기록에 남을 리가
없는 것이죠. 한규철 교수의 지적처럼 중앙과 지방민의 인식변화라기보다는 아마도 통일전쟁이 가속화되고
치열해짐으로써 중앙과 지방 사이의 군사적 협력과 연계가 강화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생각됩니다.
그 결과 중앙과 지방민의 인식도 바뀐 것이겠죠. 즉 순서가 틀렸단 말입니다.
그리고 정약용 선생의 경우도 말갈을 너무 천한 오랑캐라는 편견을 가지고 이 문제를 분석했기 때문에 말갈이
백제를 침입했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였던 것뿐입니다. 그렇군요. 천하의 석학(碩學)이라도 수천 년 동안 지나친
관념의 유리(羑里) 속에 갇히게 되면 어쩔 수가 없나 봅니다.
이것은 단순히 국호(國號)에만 나타나는 것만은 아닙니다. 과거에 노비(奴婢)도 그렇지요. 노비는 성(姓)이
없었고 이름도 단지 구별을 위한 것입니다. 요즘의 예를 들면 드라마 작가가 시나리오를 쓸 때 ‘행인 1’, ‘행인 2’,
‘포졸 1’, ‘포졸 2’ 등으로 엑스트라들은 그저 구별을 위한 말만 필요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큰눈이·분이· 끝딸이·
분통이·섭섭이·점순이·돌이 등등이 그 예입니다. 근대 시대에 들어오기 전까지 일반인들은 성(姓)이 없이 살았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현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봉건 왕조체제와 유사한 북한을 보세요. 북한의 수도인 평양(平壤)은 아무나 거주할 수
없는 곳이 아닙니까? 그 뿐인가요? 남한도 서울(Seoul) 지역의 사람들은 은연중에 지방인들을 깔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울에서는 인구 4백만이 넘는 국제항구 부산(釜山)도 시골이라고 합니다(부산 사람들 들으면 사흘
정도는 밥을 먹지 못할 일이죠).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죠. 프랑스도 파리사람을 부르는 별칭이
있고 일본도 마찬가지지요.
(4) 발해는 후고구려
저는 앞에서 ‘발해 = 고구려’이니 발해라고 하지 말고 대고구려(대고려), 또는 후고구려(후고려)라고 해야 한다고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이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다시 봅시다.
숙신은 한나라 때에 이르면 ‘읍루’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데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사람의 모습은 부여와
비슷한데 언어는 고구려나 부여와는 다르다.”고 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삼국시대 말기의 기록에는 읍루가 또다시
숙신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三國志』「魏書」상도향공기). 이것은 앞에서 본대로 숙신이 읍루
(아이누·길랴크 같은 고아시아족)라는 말이 아니라 읍루와 교류를 하는 극소수의 숙신(또는 옛 읍루지역에 사는
숙신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북위시대에 숙신은 물길(또는 말갈)이라는 이름으로 중국과 교섭하고 있습니다(『魏書』「孝文帝紀」). 『신당서
(新唐書)』에는 발해가 강성해지자 말갈은 다시 발해에 종속된다고 합니다(『新唐書』「黑水靺鞨傳」). 이 때는
흑수말갈만이 따로 떨어져 존재합니다. 그러다가 다시 이들도 발해에 속하게 됩니다(『金史』本紀 1).
그런데 대부분의 중국 사서에는 발해는 말갈의 국가라고 하고 있죠.
제가 같거나 비슷한 말을 여러 번 반복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은 많은 사서들이 같은 민족을 이리저리 부르고
있기 때문이죠. 간단히 보면 물길ㆍ말갈ㆍ숙신은 같은 민족의 다른 표현이며 이들이 고구려와 발해의 국민이었
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발해 = 고구려’를 좀 복잡하게 표현한 것뿐이죠. 사실 뻔한 얘기인데 사학자들이 무슨
이유인지 너무 복잡하게 꼬아놓아서 일반인들의 접근을 못하게 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표현이 복잡하든 말든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것은
① 정치적 계승의식과 통치 영역의 면,
② 인적 구성의 면,
③ 문화적인 일체감 등에서 보더라도 분명히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발해는 후고구려로 보는 편이 적당할
것입니다.
중국의 사서(史書)에도 도처에 “발해는 국토가 고구려와 일치하며 산물(産物)들도 고구려와 일치(『오대사
(五代史) 』74 「고려전」)”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발해의 국왕이 스스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풍습을 그대로 간직했다”고 하고 (『속일본기(續日本記)』
10 聖武天皇 新龜四年), “발해는 부여의 별종”이라고도 하고 있습니다(『武經總要』 前16 下).
『구당서(舊唐書)』나 『신당서(新唐書)』에서도 “발해의 풍속은 고구려와 거란과 같다”고 하고 있습니다
(『신당서(新唐書)』219 「발해전」, 『구당서(舊唐書)』199 「발해말갈전」).『속일본기(續日本記)』에서는
발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 스스로를 고려국왕(高麗國王)이라고 칭하면서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유지한다(復高麗之舊居 有夫餘遺俗 : 續日本紀 권10)”라고 하여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분명히 합니다.
일본에서도 그를 고려국왕으로 칭하는 것으로 보아 ‘발해 = 고구려’라고 보는데 하등의 이론이 있기 어렵습니다.
뿐만 아니라 발해의 시조 대조영은 고구려의 구장(新羅古記云 高麗舊將 祚榮姓大氏 : 『三國遺事』)이라는
기록이 있죠.
그리고 발해왕이 천손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니[『속일본기(續日本記)』권23]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발해는 그
스스로 고려라고 칭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측에서나 일본 측에서도 ‘발해 = 고구려’라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발해가 정치 경제는 물론이고 그 문화나 사회전반에 걸친 이데올로기까지도 고구려를 완벽히 계승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과 대등하게 발해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국왕의 묘호를 제정하였다는
점에서 쥬신의 역사에 큰 중요성을 가졌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발해를 발해로 부르기보다는 후고구려(후고려, 또는
대고려)라고 부르는 편이 더욱 타당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발해는 아예 ‘발해 말갈’로도 지칭이 되는 나라입니다[『구오대사(舊五代史)』,『오대회요(五代會要)』,
『구당서(舊唐書)』,『삼국사기(三國史記)』]. 또 “발해는 본래 말갈(靺鞨)이라고 불렀는데 고려(高麗 : 고구려)의
별종(『五代史』74 「高麗傳」)”, “발해 말갈은 본래 고려종(高麗種)(『五代會要』30 「渤海」)”, “고려의 별종인
대조영(大祚榮)(『자치통감(資治通鑑)』210)”이라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기존 한국 사학계의 여러 저명한 선생님들처럼 고구려인과 말갈인이 제대로
구별이 됩니까?
제 머리로는 도저히 이들을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통(正統) 사학도(史學徒)가 못 되는지도 모르
겠습니다. 여러 사료를 종합해보아도 그 민족이 그 민족입니다. 즉 예맥 - 조선 - 숙신 - 물길 - 말갈 - 고구려 -
발해 - 거란 등의 민족들이 모두 하나의 범주로 포괄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당시의 발해에 대하여 북적(北狄)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는 중국인들이 사방의 오랑캐를 부를 때 동이(東夷)
와 북적(北狄)은 완전히 다른 듯이 말하곤 했지요.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서는 발해를 북적(北狄), 또는 적국인(狄國人)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자기들도 동쪽 오랑캐인 주제에 참으로 딱하기도 합니다만.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들이 임의로 쓴 말은 아닐 것이니 북적과 고구려ㆍ부여ㆍ
읍루 등을 지칭하는 동이(東夷)와의 차이를 찾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쉽게 말해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동이
(東夷)를 북적(北狄)으로 같이 부르고 있으니 그것이 구별이 되겠는가 말입니다.
참고로 한 마디만 더 합시다. 중국에서는 발해를 자기의 지방정권으로 중국사의 일부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니지요. 당시의 사정으로 보면 발해 - 통일신라사이에는 하나의 민족으로 보는 정신적 흐름이 분명히
발견됩니다. 통일신라(統一新羅)는 발해를 북조(北朝), 또는 북국(北國)이라고 명백히 지칭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권 10 「신라본기」; 권37 지리지).
아마 이 당시까지만 해도 상당한 공통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통일신라가 발해에 대하여 북조(北朝)
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우리가 한반도 북쪽을 북한(北韓)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즉 통일신라는
발해와 현재는 대립하고 있지만 결국은 통일이 되어야할 동족(同族) 전체의 일부라는 의식이 있다는 말이죠.
이상의 분석을 토대로 보면 숙신과 그의 다른 이름인 물길과 말갈은 만주 지역에 광범위하게 거주했던 사람들의
총칭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전에 있었던 예맥이라는 말이 없어진 자리에 숙신ㆍ물길ㆍ말갈 등의
명칭들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은 예맥은 소멸하고 물길이나 말갈이 성장한 것이 아니라 그 민족이 그
민족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예맥과 숙신ㆍ동호는 무관한 것이 아니라 이들은 요동ㆍ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끝없이 뭉치고 흩어진
하나의 역사 공동체이자 문화공동체라는 말이지요.
지금까지 우리는 쥬신의 뿌리를 찾아서 긴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예맥 - 동호 - 숙신 등에 이르는
민족에 대한 분석을 마쳤습니다. 쉽게 말하면 쥬신의 뿌리에 대한 총론(總論)을 마친 셈이지요. 동아시아 고대사
의 영역 가운데 가장 어렵고 지루한 부분이 마무리된 것이지요. 필자의 입장에서는 내용 자체가 워낙 복잡하기
때문에 아무리 재미있게 쓰려고 해도 안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다음 장부터는 쥬신의 보다 재미있고 역동적이면서 구체적인 모습들을 찾아갑니다.
즉 쥬신의 신화(神話)와 고구려ㆍ백제ㆍ신라ㆍ몽골ㆍ금ㆍ일본 등 구체적인 나라들이 쥬신의 역사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하는 점들을 살펴봅니다. 여기서는 고구려는 물론, 백제와 일본의 건국과정, 몽골과 금의 건국과
역사를 쥬신의 관점에서 살펴볼 것입니다.
(김운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