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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역사

백제속국일본사 3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5.01.12|조회수161 목록 댓글 0

3장. 백제 초고대왕 일본 천황 시조 스사노오 百濟 肖古大王 日本 天皇 始祖 速佐之男

 

                   백제 초고대왕 후손 일본천황표                 

 

 

 

 

 

 

 

 

  1. 백제의 건국지 대동강 평양 百濟 建國地 大同江 平壤

백제 온조대왕이 배를 타고 만주를 떠나와 한반도로 들어와서

처음 건국한 곳은 평안남도 대동강의 서쪽가지 보통강 평성시 청룡산성이며 대산한성, 하북 위례성이라 불렀고,

이후에 대동강 동쪽가지 비류강 성천군에 하남위례성을 세웠다. 동서 2성인 것이다.

대동강 하류 평양에 있던 기준의 마한을 병탄하여,

백제가 북으로는 압록강, 동으로는 태백산맥,

남쪽으로는 금강에 이르렀다.

 


고구려 국모였던 소서노召西努가 비류沸流왕자와 온조溫祚왕자를 데리고 바닷가로 와서 소금장사를

하여 마침내 어하라於瑕羅를 세운 곳은 고대 어니하於泥河가 흐르던 만주 대석교시大石橋市 진미산성

鎭迷山城으로 고려된다.

진미산은 발해 진주辰州가 있었고 그 이름의 유래는 진한辰韓이다.

이를 소서노의 장자인 비류대왕이 물려받았다.

소서노의 차자인 온조왕자가 비류대왕으로부터 독립하여 배를 타고 한반도로 건너와서 처음 상륙한

곳은 미추홀彌鄒忽이라 전하는데, 이는 평안남도 서해안의 영유현永柔縣 미두산米豆山이다.

미추의 변음變音이 미두인 것이다.

미추는 용의 우리말이다. 강룡산降龍山, 견룡지見龍池 등이 미추홀에 남아있다.

온조대왕이 오른 한산漢山 부아악負兒岳은 평안남도 평성시 자모산慈母山이다. 자모산성이 남아있다.

성 둘레는 5000m이고, 위례성을 호위하는 5방성 중의 북방성이 된다.

온조봉에서 그 이름이 유래된 은좌봉殷坐峰이 그 서남에 있다.

평성시 동남쪽 백족산百足山도 온(溫=百)조산에서 유래한 것이다.

자모산성 남쪽에는 청룡산성靑龍山城이 있는데 첫번째 한산 수도 하북 위례성이다. 성 둘레는 약 5000m이다.

그곳을 상차리上次里, 또는 오리동이라고도 하는데, 위례성慰禮城의 지명이 아직 남은 것이다.


다음으로 온조대왕이 한수漢水(=平壤 大同江)로 보호된 도읍지 하남 위례성河南慰禮城을 세워 한성漢城

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평안남도 성천군成川郡 홀골산성忽骨山城이다.

성천은 위례성천이 어원으로 추정되며, 현재는 비류강沸流江이라고도 부른다.

동쪽의 소조산小祖山도 온조산에서 유래된 것이 된다.

 

 

 

 

 

그림 17) 백제 세력도

 

 

 

온조대왕이 처음 쌓은 마수성馬首城은 압록강鴨綠江 남쪽의 의주義州 서남쪽의 백마산성白馬山城이다.

[광개토대왕 비문]에서 모수성牟水城이다.

낙랑이 마수성 축성을 반대하니 독산禿山, 구천狗川의 두 성을 쌓아 낙랑의 통로를 막았는데 이는 청천강

淸川江의 북안 독산면獨山面과 개천군价川郡의 두 성이다.

온조대왕이 다시 한강漢江(=渾江) 서북쪽에 성을 세우니, 이는 압록강의 동북방인 중국 환인현의 혼강

渾江에 위치한 오녀산성烏女山城이다.

백제는 환성丸城이라 했고, 지금은 환인桓仁이라 하는데, 청나라 때는 오이고성烏爾古城이라 했었다.

백제계 일본성씨인 화니和邇=丸씨, 우리말로 아이阿爾씨의 고향이다.

신공황후의 성씨가 환씨이니 그 조상들의 원향이다.

온조대왕은 평양 위치에 있던 기씨마한箕氏馬韓을 병탄하였다.

그리하여 마한을 합친 백제의 남계는 황해도와 경기도를 지나 충청남도 금강錦江에 이르러서 공주公州

대두산성大豆山城, 다른 말로 콩산성公山城을 쌓게 된다.

당시 백제의 북계는 패하浿河에 이르렀다고 했는데,

이 패하는 고대에 파사수婆娑水, 파저강婆猪江이라고도 했던 지금의 압록강일 것이다.

초기 백제 동계는 주양走壤이라고 했는데,

대동강 동계인 곡산천谷山川의 달해산達海山 달보산성達寶山城으로 고려된다. 

개루대왕이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쌓았는데, 평양 북쪽 평성시 청룡산성으로 고려된다. 자모산성 남쪽이다.

백제 전성기 근초고대왕의 한산성은 대성산 남쪽 안학궁지로 고려된다.

고구려가 훗날 한성을 쌓았는데 지금의 평양성이다.

 

(주) 백제의 초기 수도가 대동강 지역인 것은 여러 가지 증거가 있다.

1) 일본 나라현奈良縣의 아스카明日香 기토라고분에서 나타난 벽화의 별자리가 평양 하늘을 관측한

것으로 증거된다. 백제인의 하늘은 평양 하늘이었다. 

2) 신라의 수만 개에 달하는 고분과 고구려의 수만 개 고분에 견줄 수 있는 백제 고분은 서울에 거의 없다.

일제강점기에 약 80개 정도 남아 있었다고 전하지만 대부분 고구려식이다.

대신 평안남도와 황해도에 수만 개 고분이 있는데 이 모두가 백제 귀족 고분이며 이를 이제까지 유령국가

낙랑군의 고분으로 잘못 알고 있다.

3) 6세기 공주 무령왕릉 같은 형식의 벽돌塼室 고분의 선구가 만주로부터 대동강에 산재해 있다.

현재 서울 한강에는 벽돌 고분이 없다.

고구려 장수대왕이 백제 개로대왕을 죽인 뒤에 백제는 공주로 천도하였고,

황해도 전실고분도 공주로 직접 이어진 것이다.

4) 일본의 벽화 고분은 백제가 전수한 것이다. 그 벽화 고분의 선구가 역시 평양 지방이다.

서울에는 벽화 고분이 하나도 없다.

벽화 고분은 만주의 요양시를 거쳐 평양시에 전해졌고, 그 뒤에 고구려 집안과 신라로 전해졌다.

5) 또한 고구려고분으로 선전된 황해도 안악3호 고분의 복식과 관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왕의

복식과 관이다. 고구려왕의 복식과 관은 색이 전혀 다르다.

6) 황해도 사리원의 대방태수 장무이張撫夷 묘는 낙랑의 대방태수묘가 아니라 백제의 대방태수묘이다.

471년 송나라에 개로대왕의 사자로 간 백제 대방태수의 이름도 장무張茂였다.

즉 장무의 부형이 장무이인 것이다.

7)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396년 백제를 정벌할 때 뺏은 첫번째 성이 만주의 단동시丹東市 봉황산성

鳳凰山城으로 [만주지리풍속지]에 기록되어 있다. 즉 396년 이전에 백제 땅은 만주에도 퍼져 있었다.

8) 광개토대왕에게 패퇴한 5세기, 백제가 후퇴한 수도 한성은 예성강禮成江에 있었다.

황해도 신계군新溪郡 부여면夫餘面 위라천位羅川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예성강은 본래 위례성강慰禮城江

이었던 것이다.

그곳의 피난 수도였던 태백산성은 백제 말기 수도인 충청남도 부여의 부소산성과 똑같은 형식이다.

9) 대동강 평양에서는 506년 경에 고구려인에 의해서 현재의 평양성이 세워질  당시에 만들어진

[평양성벽 각서刻書]가 발견되었는데, 그 성벽에 평양이라는 말은 전혀 없고,

대신에 오로지 [한성漢城]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漢城 下 後部小兄...

고구려가 당나라에 항복했던 대동강 평양은 본래 고구려 한성이었다.

연개소문의 둘째아들 천남산묘지泉男山墓誌에도 고구려가 당나라에 항복한 곳은 한성漢城으로 나와있다.

즉 지금 평양은 본래 백제 한산성, 고구려의 한성이었다.

[泉男山墓誌] 漢城不守 貊弓入獻 楛矢來王

396년 백제 한산성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빼앗았다.

한편 [평양성벽각서]에서 [한성 하, 漢城 下]는 고구려 한성이 고구려인에 의해 건설 도중에 다시 백제

에게 함락되었던 사실을 의미한다. 506년 무령왕 때이다.

10) [삼국사기]에서 한성(평양)의 백제 개로왕을 참살한 고구려가 안장왕 대에 국경을 넘어 백제로

쳐내려와서 전투한 곳은 황해도 한복판 오곡군五谷郡이었다.

(앞 지도 참조) 북한의 역사책은 이를 백제군의 북침을 유인해서 섬멸한 것이라고 억지로 해석한다.

11) [일본서기] 550년조에서 백제가 평양平壤을 쳐서 6군을 수복했는데, 본래 백제 고지라고 했다.

12) [삼국사기 거칠부전居柒夫傳]에서 나제동맹군의 백제가 앞서나가서 평양성을 쳤다고 했는데 대동강

평양, 즉 하평양이다.

13) [일본서기]에서 550년 백제는 고구려 도살성道薩城을 빼앗고, 고구려는 백제 금현성錦峴城을

빼앗았는데 서로 싸우다가 지친 틈에 신라 진흥왕의 이사부異斯夫가 습격하여 빼앗았다.

[일본서기日本書記]에서는 두 성을 우두방牛頭方과 니미방尼彌方이라고 기록했는데 신라 우두방이 있던

곳은 금천군金川郡으로서 지금 예성강의 동편이다.

5세기 아신대왕의 위례성이 예성강 서편 평산군平山郡 태백산성에 있었다.

14) 번한왕 기준箕準이 요서에서 위만衛滿에게 밀려나서 피난나온 마한이 대동강 평양이다.

[마한세계馬韓世系]에서 기준의 9세 후예인 기정箕貞이 기원전 17년에 백제 온조대왕에게 망했는데,

이때 기씨마한의 세력이었던 선우鮮于씨는 평양 서쪽의 오석산 황룡산성黃龍山城(앞 지도 참조)의

주인이 되았고, 기奇씨는 경기도 행주산성의 주인이 되었고, 한韓씨는 충청북도 청주의 주인이 되었다.

전라도 익산 구석에서 기씨마한이 망했다는 주장은 그 후손들의 분산 배치 결과로서 말이 되지 않는다.

15) 평양의 백제대왕을 낙랑태수라고 한 것은 동진에서 보낸 근초고대왕의 책명에서 나타나고,

그후 [양나라 직공도梁職貢圖]에도 백제 사신을 낙랑 사신이라고 기록해놓았다.

아울러 이 백제가, 이 낙랑이 양자강 동쪽을 동진東晋 말부터 백년간 거느렸다.

16) 백제 초고대왕肖古大王의 이름이 함흥에 남아있다. 이는 뒤에 자세하다.

17) [정의괄지지正義括地志]에서는 도이島夷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백제국 서남의 발해 중에 큰 섬 15개소가 있는데 백제에 속했다. 백제가 발해 동북에 위치해 있었으니

백제의 만주 소유가 기록된 것이다.

[正義括地志]:「百濟國西南渤海中有大島十五所,皆邑落有人居,屬百濟.」

이렇게 많은 대동강 백제 평양의 증거가 무시되는 국사는 결코 진실된 역사가 아니다.

제 조상 무덤을 호로새끼 무덤이라 하면서, 스스로 근본을 부인하고 노예처럼 살기로 작정한 것은 사실

우리 국민들의 뜻이 아니다.

고려 말기 이후로부터 왜곡된 지식을 대대로 후손에게 그릇 가르쳐온 양반 학자들의 만행이다.

 

 

 

2. 초고대왕의 함흥 거점 일본 진출  肖古大王 咸興 據點 日本 進出                

 

백제 개루대왕 때에 백제는 함흥에 진출하였고

함흥에 쇠를 다스리는 수시리성을 두어 초고왕자가 지켰다.

160년 초고왕자는 함흥에서 일본 이즈모에 건너가서 일본 전역을 굴복시키고

일본 천조대신 히미코, 즉 세오녀를 포함한 8명의 신녀를 후비로 삼아서 팔중성에 가두고 8명의 자손을 낳았다.

그후 히미코가 탈출하여 큐슈에 야마대국을 세우고,

그 아들이 가야로 건너가서 가야왕의 사위가 되어 얻은 후손이 알알이이며,

알알이가 큐슈로 돌아와 아들을 낳으니 신무천황이 되었다.

 

   

백제 6대 초고대왕肖古大王(재위166~214)이 일본의 건국신인 스사노오須佐之男이니,

일본이 최초 천황으로 모신 신무천황神武天皇(194~256)의 증조부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당시 동해안의 정세를 보면 108년에 강원도 삼척三陟이 신라 파사왕婆娑王

신라 땅으로 통합되었다.

125년에 신라가 동해안의 말갈로부터 침략을 받으니, 백제 기루대왕己婁大王(재위 77~128년)은 백제의

다섯 장군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였다.

이때 백제가 동해안에 영토가 없었으므로 말갈은 백제를 거치지 않고 신라를 친 것이다.

그러나 말갈과 백제가 전투를 한 곳은 동해안이었다.

이후 155년, 백제 개루대왕(재위 128~166년) 때에 신라의 아찬 길선吉宣이 백제로 망명하였다.

이때 신라는 백제를 쳤으나 백제는 여러 성을 굳게 지켰다.

이때에 신라인 길선이 동해안 함흥, 원산 등의 여러 성을 가지고 귀순하여 백제에 받침으로 백제가

동해안에 진출하고, 신라의 탈환 공격을 방어한 것이다.

백제는 수도가 하북 위례성, 즉 평성시 청룡산성인 때에, 백제 동부 주양走壤에서 문천시 서쪽 마식령

馬息領(고대 마수령馬樹嶺이다.)을 통해 태백산맥을 넘어 동해안에 진출한 것이다 

 

 

 

 

 

그림 18) 초고대왕의 속고성과 일본 진출도

 

 

 

이 무렵에 원산시元山市 북쪽 문천시文川市에 속고봉速高峰, 속고산速高山(722m, = 신증동국여지승람 ;

所依達山, 즉 쇠달산) 같은 백제 초고대왕의 별명인 속고왕速古王의 이름을 딴 지명이 생겨난 것이다.

함흥시 동쪽에는 초고대령草高臺嶺도 생겨났다.

즉 개루대왕 생전에 초고대왕인 속고왕은 원산-함흥 지역에 봉토를 받아서 있었던 것이다.

그후 214년 신라가 사현성沙峴城을 수복했는데,

이는 원산元山 남쪽 고산군高山郡 사현봉수沙峴烽燧가 있던 사현沙峴이다.


문천군에 속고산速高山(722m)이 있다. 문천군 천불산에도 속고봉이 있다.

문천군에 매홀석성妹屹石城이 있었고, 이는 문주文州라고도 했는데 백제 개로대왕을 이은 문주대왕

汶洲大王이 고구려로부터 이 지역을 탈환하여 지키고 있었던 곳으로 고려된다.

개로대왕의 참살 때에 문주대왕은 함흥으로부터 신라로 내려가서 구원병 1만을 얻어올 수 있었다.

함흥 동쪽 퇴조만의 퇴조고성退朝古城(석축 4917척)이 백제 고성으로 고려된다.

서쪽에 초고대령草高臺嶺 동북에 초막산草幕山, 제봉산鵜峰山이 있다. 초고대령은 초고대왕령이었을

것이다.

초막산 북쪽에 가장 높은 우두산牛頭山(814m, 현재 봉화산)이 있었고 그 북쪽에 함관령이 있다.

백제 초기에 공격하던 함흥 낙랑의 우두산성이다.

그 서북쪽에 덕산동 초원고성草原古城이 있는데 토성으로서, 1147척의 호위성이다.


함흥 서쪽 6511척의 한당고성閑堂古城이 토성인데, 동해안까지 확장된 백제 동부의 부도성으로 유력

하다. 그 위치는 함흥시와 백운산석성의 중간인 상조양면의 중평리다.

북쪽에는 자고성慈姑城이 있는데 이는 평양의 자모산성처럼 북쪽 호위성이다.

한당고성은 백제 초기 등장하는 낙랑 지역이었으며 고구려, 백제의 우수주牛首州였다.


백제 개루대왕蓋婁大王 때에 개루대왕의 왕자 초고왕자는 함경남도 원산에서 바다를 건너서 일본

시마네현嶋根縣의 이즈모出雲에 진출하였고, 160년에 일본의 여왕 히미코(~247)를 정복하였다.

이는 히미코 여왕의 여사제女師弟인 와카히稚日女命(113~160년)가 초고대왕에게 죽임을 당한 해가

그녀의 고분에서 160년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는 효고현兵庫縣 서궁시西宮市 증암정甑岩町에 있는 월목암신사越木岩神社에 남아있는 기록이다.

일본에 간 최초의 백제인 초고대왕肖古大王은 일본에서 속고왕速古王, 또는 속고대왕速古大王으로

표기한다. 백제에서는 별칭이 소고왕素古王이었다.

그후 초고대왕의 여러 아들들이 일본에 진출하였고, 그리하여 일본에는 백제 속고대왕速古大王의 후손

으로서 여러 씨족 가문인 금부련錦部連, 삼선숙녜三善宿禰등 직계 후예를 남겼는데

이는 일본의 고대 기록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에 남아있다.

특히 여느 백제왕들과 달리 ‘속고대왕速古大王’이라고 [신찬성씨록]에 표기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의 모든 왕 중에 유일하게 백제 속고왕만 대왕大王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한반도에서보다 일본에서 초고대왕이 더 추앙받는 현실이다.

그외 속고대왕의 후손이 일본 고대 역사에 많이 기록된 것은 속고대왕 때에 일본 진출을 했기 때문인

것이다.

일본의 최초 천황이 된 신무천황神武天皇의 증조부였던 스사노오須佐之男

일본에서 建速須佐男, 速佐男, 素佐能雄, 素盞嗚, 素佐能雄 등으로 표기되어 왔다.

건속建速은 속을 건국했다는 뜻이니,

한반도 동해안 원산 지방인 속국速古國을 처음으로 차지한 분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속고왕이라는 일본 이름도 생겨난 것이다.

일본에도 역시 속고를 건설했는데,

시마네현嶋根縣에 처음 팔중궁을 세웠던 수가須賀가 바로 일본의 속고 땅이다.

여기서 스사노오須佐之男의 뜻은 쇠코 왕이라는 뜻이다.

[삼국사기]<백제기>의 소고(素古)왕이나 초고왕(肖古王)이나 [신찬성씨록]의 속고대왕(速古大王)이나

다 쇠코왕이라는 뜻이다. "코"의 우리말 고어가 "고"이다.  

[일본서기]에서 소산오素盞嗚라고도 표기하는데 스사노, 소산오의 뒤부분 산오, 또는 사노 sano가 바로

코를 의미한다.

이는 아프로아시아 언어Afroasiatic etymology 에서 코를 의미하여 남아 있다.

소말리아를 비롯한 아프리카 대륙 여러 언어에 남아있다.

현생 인류가 6만년전에 아프리카 아담Y에서 출발하였으므로 그 흔적이 일본에 남아있는 것이다.

또한 [고사기]나 [일본서기]에서 스사노오의 출생은 이자나기의 코에서 탄생한다.

사노가 코를 의미하는 것은 더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 앞의 소가 지금 우리말 소이다.

이는 어찌해서 알 수 있는가?

656년에 세워진 야사카 신사(八坂神社)의 기원에 그 의미가 있다.

신사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제명천황 2년에 고구려사자가 일본에 올 때에 부사인 이리노사주가 신라땅

우두산에서 제사지내는 스사노오신을 야사카에 모셔와 제사지냈다고  하였다.

社伝によれば、斉明天皇2年(656年)、高句麗より来日した調進副使・伊利之使主(いりしおみ)が、

新羅の牛頭山に祀られる素戔嗚尊を山城国愛宕郡八坂郷に祀り、「八坂造」の姓を賜ったのに始まる

という。他にも各種の記録がある。

함흥은 신라 진흥왕 이후 신라 영토이고 고구려 사자가 통과한 곳이 된다. 

그런데 백제 온조왕 초기에 우수주가 바로 함흥이다. 또한 소시모리의 전설이 있는 곳이다.

야사카신사는 본래 우두천왕을 제사지냈는데 명치유신 이후에 소사노오로 이름을 바꾸어 제사지낸다.

이후 일본은 우두천왕과 스사노오를 동일시 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구려 사자가 백제 초고왕을 모셔왔을 가능성은 적고 본래의 소시모리,

즉 우두천왕을 모셔왔을 가능성도 높다.

백제 초고왕이 그 땅 우수주를 다스릴 때에 쇠코왕이라고 하였던 것이고,

초고왕의 신사가 신라 우수주 우두산에 남아 있었을 때에 고구려사자가 일본에 오면서 가져온 것이다. 

결론은 소사노오는 쇠코왕의 당시 일본말이고 백제에서는 쇠코왕, 즉 소고왕, 초고왕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현재 함경남도 문천시 속고산速高山이 쇠코산의 의미이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대 쇠달산

所依達山이라고도 했는데 속을 소의所依로 풀어쓴 것이니 역시 쇠를 의미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쇠달산에 신사神祠가 있었다고 전한다. 신라 우두산이라고 고려된다.

스사노오의 딸을 수세리공주須勢理毗賣라고 했는데, 함흥 남쪽 정평군定平郡에 수시리고성隨時里古城

(400m토성)이 남아있다.

수세須勢도 중국어 발음기호표기식인 반절半切로 보면 “쉐(shu-e)”발음인데 “쇠”의 우리말 고어다.

정평의 수시리고성은 금이강金伊江이 감싸고 있는데, 금이金伊도 “쇠+l”의 이두吏讀 기록이고

금이강이 쇳물이다. 이 지역에 광산이 많이 있으니 수시리고성은 쇠를 다스리던 곳이기도 하다.

금이강 서북쪽 사수산泗水山(1747m)도 사수泗水가 곧 쇳물이다.

한편 [일본서기]에서 스사노오(즉 초고대왕)는 신라국新羅國 소시모리曾尸茂梨에서 (아들 구수대왕과)

배를 타고 일본 이즈모出雲로 왔다고 하였다.

한편, 금이강 남쪽에 이웃한 금야강金野江은 고대에 비류수沸流水라고도 이름했다.

백제 초고대왕肖古大王은 백제의 속국速國, 내지 별국別國을 일본 본토 시마네현嶋根縣에 세운 일본신

스사노오建速須佐男, 즉 쇠코대왕이다.

초고대왕이 건너가 세운 일본 지명인 시마네현嶋根縣은 그 이름에서 일본 팔도八島의 뿌리가 되었고

일본의 뿌리인 것이다.


[고사기]에서 왜여왕 히미코卑彌呼(~247)는 일본에 도래한 초고대왕, 스사노오를 아나세阿那勢라고

불렀는데, 일본은 이를 동생이라고 풀이했으나 일본말 “아나”는 한자로 귀가 되므로,

귀세貴勢가 올바른 기록이며, 이는 존귀한 분을 가리키는 중국 고어다.

초고대왕은 이즈모出雲 히가와斐伊川의 수가須賀에 야에가기八重垣 궁을 세웠다.

히가와斐伊川는 함경남도 문천시文川市 서쪽 배지이천配歧伊川에서 유래한 것이다.

문천시에 매성妹城이라는 고성이 있었는데 왕비를 기린 것이라고 고려되고, 히가와의 히도 여신을

의미한다. 문천시에 절문루節文樓가 전해오는데 스시노오의 부인 이름도 쿠시나다櫛名田姬다.

즉 쿠시나다가 문천시 배지천에서 초고대왕, 스사노오를 따라서 도일한 백제 본토 여인으로 고려된다.

한편 비이신사斐伊神社는 효소천황孝昭天皇 5년에 세웠다고 한다.

[일본서기]에서 스사노오는 신라에서 왔고 근국根國으로 돌아갔다.

실상은 백제가 점령한 함흥에서 일본으로 갔고 다시 백제로 돌아가 초고대왕으로 즉위한 것이다. 

야사카 신사에 모셔온 백제왕 스사노오의 혼령이 신라 땅에서 다시 건너왔을 뿐이다.  


(주) [삼국사기/지리4]의 고구려백제 지명중 “우수주牛首州”를 함흥에 비정하여 잃어버린 고구려,

백제 지명을 밝힌다.

우수주牛首州는 다른말로 오근내烏根乃라고도 했다는데 함흥 성천강城川江의 이름에 흑말천이 있다.

우수주 벌력천현伐力川縣은 함흥의 성천강城川江 유역이다.

횡천현橫川縣은 함흥 동쪽 호련천瑚漣川부근으로 고려되고 자현磁縣은 함흥 서북쪽 자고성慈古城에 해당

한다.

우수주 호원군乎原郡은 北原이라고도 했는데, 함흥 북쪽 홍원군洪原郡이다.

나토군奈土郡은 대제大提라고도 했는데 함흥 남쪽 정평군定平郡이다. 서호西湖 광호廣湖, 동호東湖 등

큰 호수가 많다.

적산현赤山縣은 주이천朱伊川이 흐르는 지금의 함주군청咸州郡廳 자리다.

사열이현沙熱伊縣은 사수산泗水山을 지나 흐르는 금진강金津江으로 추정되니 함흥 남쪽 정평군 定平郡

위치다. 광산이 많고 고대로부터 쇠를 다스리던 곳이다. 초고대왕의 딸이 살던 수시리 고성이 있다.

근평군斤平郡은 심천현深川縣만 있었는데, 함흥 북쪽 신흥군新興郡으로 고려된다.

양구군陽口郡은 북청군이다. 양구근 저족현猪足縣은 오사회烏斯廻라고 했는데,

이는 일본말로 풀어서 한자로 옮기면 압하천鴨坡河이 된다.

북청군의 북쪽 물 이름이며 그곳의 성대리星垈里 고성은 고대의 철산지다.

왕기현王岐縣은 진흥왕순수비가 있는 이원군利原郡으로 고려되고, 삼현현三峴縣은 삼봉三峰 남쪽

숙신고도肅愼古都로 추정된다.

성천군狌川郡은 창덕성倉德城이 있던 단천군端川郡으로 고려된다.

대양관군大楊管郡은 마근압馬斤押이라고도 했다. 매곡현買谷縣과 고사마현 古斯麻縣이 있었는데,

고사마현은 무령대왕 이름이고, 청진 북쪽 수성천輸城川의 근원이 되는 부령군富寧郡이 본래 무령군

에서 비롯되므로 고사마현이 된다.

매곡현은 청진시淸津市가 되는데 고말산高抹山이 있다.

급벌산군及伐山郡은 이벌지현 伊伐支縣과 수성천현藪狌川縣이 있었는데, 함경북도 도청이 있는

경성鏡城시 북쪽 수성천輸城川을 의미하므로 지금의 경성鏡城이다.

이벌지현은 경성시가 되고, 수성천현藪狌川縣은 청진시 수성천 남쪽이 되고, 문현현文峴縣은 주을朱乙이

된다.

모성현母城郡은 경성 남쪽 어랑천漁郞川, 어랑군漁郞郡이다.

객련군客連郡은 학성鶴城, 길주吉州 명천明川이다.

천성군淺城郡 비열홀比烈忽은 영흥永興이다. 박평博平이라고도 했으니 그 뜻이 천성과 같고,

영흥을 지나는 용흥강龍興江이 고대 비류수 沸流水였으니 당연히 비열홀 이름이 유래되는 것이다.

살한현薩寒縣은 전탄강箭灘江이 된다.

이제까지 비열홀은 안변군安邊郡이라고 알려졌는데 잘못이다. 안변은 천성군의 남쪽 천정군의 남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신라의 국경군인 안변군이 발해의 공격으로 후퇴한 것으로 고려할 수 있다.

천정군泉井郡은 원산시元山市에 있던 덕원군德源郡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지리지] 지리 2의 해설은 당시 신라 지명만 맞고, 그 내력이 되는 고구려 이름은

거의 틀렸다.

김부식은 통일신라 때에 고구려 유민들이 옮겨온 고구려 지명을 본래 고구려의 지명으로 잘못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주) [고사기]나 [일본서기]에서 스사노오가 이즈모에서 팔지대사八枝大蛇를 잡아 죽인 것은,

초고대왕이 일본 천조대신의 12신녀 중에서 8신녀를 잡아 팔중원八重垣에 가두고 후비로 삼은 것을

의미한다.

 

 

4장. 백제 구수대왕 대국주신과 사반대왕 사대주신

       百濟 仇首大王 大國主神과 沙伴大王 事代主神

 

 

초고대왕의 아들 구수대왕은 초고대왕의 딸인 수시리공주와 결혼해서 일본의 대화大和에 진출하여 일본의 대국주신이 되었고 다시 백제로 돌아왔다.

구수대왕의 아들 사반대왕은 일본의 효소천황이자 사대주신이 되었고 사반대왕의 딸은 신무천황의 비가 되었다.

따라서 신무천황도 초고대왕의 증손자이고, 신무천황비도 초고대왕의 증손녀이다.


[고사기]에서 초고대왕은 처음에 이즈모出雲에 정도하고 그 곳에 수가須賀(=속고速古)에 야에가기

八重垣궁을 짓고 살면서 백제의 여인 쿠시나다히메櫛名田比賣와 결혼하여 일본 팔도왕인

야시마지누미노가미八嶋士奴美神를 낳았다.

이를 [일본서기]에서는 오호아나무지(대기귀신大己貴神) 또는 대국주신大國主神이라 하였는데

바로 초고대왕의 장자 구수대왕仇首大王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쿠시나다히메가 함경남도 문천 출신이고, 백제에서 구수대왕을 낳고 일본으로 데려간 것이다.

구수대왕은 일본에서 귀수왕貴首王이라고 표기하는데, 일본의 대국주신大國主神이다.

대국주신의 일본 발음인 오호아나모지大穴牟遲(=大己貴神)는 아나穴, 己가 그 발음에서 본래 귀

뜻하고 모지牟遲가 우리말 머리를 의미하므로 귀수왕貴首王을 일본말 아나모지大穴牟遲로 풀어쓴 것이다.

스사노오의 후손으로 기록된 장남 야시마지노미신八嶋土奴美은 일본 팔도왕八嶋牟遲을 의미하는

관직명이다.

[위서왜인전]에서 일본 지방왕을 히노모리卑奴母離라고도 했는데 이는 백수白首라는 우리말이다.

우리나라 남자 무당을 의미하는 박수무당의 박수와 어원이 같다.

고구려 [동천왕묘지문]에도 백수百殊라는 왕칭王稱이 등장한다.

백제의 첫번째 팔도왕 야시마지노미八嶋土奴美는 구수왕자였다.

대국주신의 또다른 별명인 야찌호꼬八千矛神와 같은 발음의 이름이다.

구수대왕의 무기가 광창廣槍이었으므로 야찌보코八千矛神라고 했다.

이즈모의 박물관에 남아있는 수많은 비파형 동검 중에서 가장 넓은 것이 그의 무기였다.

비파형동검의 아래 부분에 나무를 끼워서 장창으로 사용한 것이다.

 

초고대왕은 칸오호찌히메神大市比賣와 결혼해서 오호토시노가미大年神, 우카노미타마노가미

迦之御魂神(=海神)을 낳았다. 함흥 지방에는 만년산萬年山이 있다. 만년과 대년이 서로 통한다.


[일본서기]에서 초고대왕은 일본에서 다시 신라 땅 소시모리, 즉 함흥으로 돌아갔다.

구수대왕, 즉 대국주신은 일본에서 고려高麗로 돌아간 것이 일본의 야찌보코오호쿠니누시신사

八千矛山大國主神社의 연기縁記에서 확인된다.

함흥이 당시는 백제 땅이었고, 후에는 고구려 땅, 또 신라 땅이었으므로 기록의 시점에 따라 신라,

고구려로 다르게 적혔지만 같은 곳이다.

구수대왕은 초고대왕이 먼저 함흥으로 돌아간 뒤에도 일본에 남아있다가 함흥 남쪽 정평군定平郡

수시리성에 다시 와서 초고대왕을 만나고,

초고대왕의 딸이자, 구수대왕의 배다른 동생인 수세리히메須勢理毗賣와 결혼하여 정비로 삼고 일본에

다시 건너가서 일본을 다스리는 대국주신大國主神이 되었다.

[고사기]에서 스사노오의 딸이자 대국주신의 부인이 된 수세리히메는 정평군 수시리성의 공주였던 것이다.

초고대왕은 장자인 구수왕자를 [고사기]에서 초고대왕은 아시하라葦原의 시골놈

(是奴, 葦原色許男, 葦原醜男)이라고 불렀다.

구수왕자는 초고대왕의 딸 수세리히메를 정비로 해서, 일본으로 건너가서 아나모지穴牟遲

(穴=貴, 즉 귀수貴首)라는 이름으로 일본을 다스리는 오호쿠니누시大國主神가 되었다.

대국주신의 대국성大國城은 오사카 대국정大國町에 있었다.

구수왕자 대국주신은 일본에서 도또리현의 야카미八上 공주, 니이가타의 누나가와沼河 공주,

후쿠오카의 타기리多紀理 공주 등등과 결혼하였다.

타기리공주는 초고대왕이 히미코 왜여왕의 여사제에게서 낳은 공주였고, 누나가와 공주는 야시마무지신

八嶋牟遲(관직명=白首의 고어로 추정)의 딸이었는데 구수대왕이 이즈모出雲에서 대화大和로 진출할 때

이즈모에 임명한 지방왕이 된다. 누나가와 공주의 신사는 니이가타新瀉현 경성頸城군에 있다.

구수대왕은 또 백제본국의 칸야타데神屋楯 공주를 통해서 백제 사반대왕沙伴大王

즉, 일본의 사대주신事代主神인 효소천황孝昭天皇을 낳았다.

214년에 구수왕자는 본국에 돌아와 백제대왕에 즉위하였고,

이즈모出雲의 야에가기八重宮에는 사대주신事代主神을 보냈다.

사대주신은 일본에서 효소천황孝昭天皇이 되었고, 미시마三嶋의 세야다타라勢夜陀多良와 통하여

이스케요리伊須氣余理毗賣(219~273)를 낳았는데, 이스케요리는 신무천황(194~256)의 황후가 되었다.

이스케요리히메의 비문이 효소천황릉에서 발견되었는데 바로 효소천황의 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이스케요리히메의 부친이라는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가 효소천황이었던 것을 확정할 수 있다.


초고대왕(재위166~214년)이 귀국한 뒤에, 166년부터 구수대왕이 오사카大阪 대국성大國城에서 일본을

다스리다가, 백제대왕으로 즉위한 214년 뒤에는 구수대왕(재위 214~234년)의 아들인 의덕천황

懿德天皇(180~244) 오호야마토히코스키토모大倭日子鉏友命가 대화를 다스리다가 신무천황神武天皇

(194~256)에게 전사하였다.

그 뒤에 초고대왕의 막내아들인 대년신大年神의 아들 안녕천황安寧天皇(222~270)이 신무천황에게

항복하였다.

이후 신무천황은 왜여왕 히미코를 통일 왜국왕으로 내세워 2인자로서 보좌하다가, 247년에 히미코

여왕이 죽으니,

백제 고이대왕古爾大王(재위 239~286)의 허가 없이 스스로 독립된 일본 최초 천황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신무천왕이 257년에 백제 구수대왕계의 반격으로 죽고, 백제에서 돌아온 사반대왕인 효소천황

孝昭天皇(202~268)과 신무천황의 아들인 수정천황綏靖天皇(243~292)이 타협하여 효소천황의 손녀

공주인 13살의 여사제 일여壹與, 즉 개화천황開化天皇(244~283)을 여왕으로 세워서 휴전한다.

사반대왕의 아들이자 개화천황의 부왕인 효원천황孝元天皇(228~273)은 개화천황의 부왕으로서

역시 천황의 반열에 올려졌을 것으로 고려된다.

234년 구수대왕의 사후에 만주에 있던 백제 대방왕 구이대왕仇台大王이 만주 요양시遼陽市 태자하太子河

대방성帶方城에서 백제대왕으로 즉위하였고,

238년 구이대왕이 죽자 사반대왕沙伴大王(=효소천황)이 즉위하였고, 평양에서 낙초(樂初 238년;

삼국유사기록三國遺事記錄)라는 연호를 세웠다.

그뒤 1년만에 구이대왕의 아들 고이대왕이 백제대왕으로 즉위하고 사반대왕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효소천황이 되었다.


(주) 백제가 남긴 백제대왕의 대위는 동명성왕 고주몽을 1세로 한다.

[신찬성씨록]에서 백제 혜대왕을 주몽대왕 30세손이라고 出自百濟國都慕王卅世孫惠王也 했는데

[삼국유사]의 28대와 비교하면 혜왕 위에 사라진 두 왕이 더 있고 그중 하나는 추증된 시조 주몽대왕이

되니 다른 한 분은 구이대왕이 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백제 6대 구수대왕은 10세라고 했는데 出自百濟國都慕王十世孫貴首王也

고대에 칠七과 십十을 구별하기 어렵게 썼으므로 이를 7세라고 교정해서 보면 그의 앞에 주몽대왕

한 분만 있다. 따라서 구수대왕 뒤에 사라진 한 분이 있는데,

[삼국유사]에서 고이대왕의 즉위년을 기왕에 알려진 234년이 아니라 낙초樂初 2년 기미년 239년이라

하였으므로, 사반대왕의 즉위년을 238년으로 보아야 하고, 구수대왕(재위 214~234) 서거 뒤에 234년

에서 238년까지 다스린 백제대왕이 비게 되므로 그 자리가 구이대왕 위치가 된다.

만주 대방 고지의 구이대왕은 공손탁의 딸을 후비로 들였고 국인들의 추대로 왕이 되었다고 하였다.

[수서隋書][북사北史/ 백제전] 東明之後,有仇台者,篤於仁信,始立其國 於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

孫度以女妻之

 

 

 

5장. 초고대왕과 왜여왕 히미코의 증손자 신무천황

肖古大王과 倭女王 卑彌呼의 曾孫子 神武天皇

 

                      [記]神倭伊波禮毗古命 /[紀]神日本磐余彦天皇

 


 

1. 히미코의 손자 니니기의 강림 卑彌呼   孫子 邇邇藝   降臨

 

 

이즈모의 팔중궁에서 탈출한 세오녀는 큐슈로 피난하여

큐슈에 여인왕국 야마타이국을 세우고 히미코 여왕이 된다.

왜여왕 히미코는 신라와 교류하고 가야에 자신과 초고대왕의 아들을 아메노오시호미를 보내 결혼시키고 손자 알알이를 얻어서 큐슈의 왕으로 데려오니,

오늘날 천손이라 추앙되는 알알이의 큐슈 강림신화로 전해진다.

 


초고대왕은 시마네현嶋根縣의 이즈모出雲을 정복하고, 160년에는 대화大和 수진국秀眞國의 왜여왕인

세오녀細烏女 히미코卑彌呼 여왕을 사로잡아 일본 열도를 차지했다.

초고대왕이 히미코의 여동생 와카히稚日女命(113~160년)를 160년에 죽였는데,

바로 그 160년이 초고대왕이 일본 큐슈를 정복한 해다.

초고대왕은 히미코 여왕 등 8신녀들을 정복하여 다섯 왕자와 세 공주를 얻었다.

히미코 여왕 자신의 왕자는 아메노오시호미天之忍穗耳命 왕자로서 니니기邇邇藝(174~220?) 왕자를

낳았고, 그는 최초로 일본 천황이 된 신무천황神武天皇(194~256)을 낳았다.

오시호미의 아들 니니기邇邇藝는 우리말로 알알이다.

천손 니니기를 가야로부터 큐슈로 인도했던 이시호리도히메伊斯許理度賣命(141~174)의 고분에서

밝혀진 연대로 보아서, 니니기의 출생은 174년경이며,

오시호미가 태어난 것은 히미코가 정복당한 1년후인 161년경이 된다.

초고대왕의 일본생 둘째 왕자는 첫째 신녀인 모치코持子 마수희麻須姫가 낳은 아메노호히天之菩卑命

왕자로서 출운신出雲臣 등 시마네현 귀족의 선조가 되었다.

셋째 왕자는 아키코秋子・하야아키쯔速開津姫 신녀가 낳은 아마쯔히꼬네天之津根命로서 후꾸오카의

자성국조茨城國造 등의 선조가 되었다.

넷째 왕자는 미치코道子・오오미야大宮姫가 낳은 이꾸쯔히꼬네活津日子根命이고,

다섯째 왕자는 아야코紋子・토요히메豊姫가 낳은 쿠마노쿠스비熊野久須毘命이었다.

이 때 5왕자의 순서는 신녀의 순서다.

히미코 여왕은 출운 팔중궁의 포로 신세에서 탈출하여 큐슈九州에 새로운 왜국倭國인 여왕국을 세웠다.

이를 야마대국邪馬壹國이라고 한다.

[고사기]에서 초고대왕은 보검인 쯔무가이대도都牟刈大刀를 규수의 왜여왕 히미코에게 보내주었다.  

 

 

          그림 15) 주몽검 / 쿠사나기쯔루기

 

 

 

대구大邱 평리동坪里洞과 비산동飛山洞에서 출토된 청동검과 비교된다.  

 

           그림 16) 대구 평리동 청동검과  대구 비산동 청동검

 

 

 

 

고구려 백제 공동시조인 고주몽을 일본에서 쯔모왕都牟王(=都慕王)이라고 했으므로,

초고대왕은 일본에 고주몽신사를 세워 고주몽을 제사 지내도록 주몽왕검朱蒙王劍을 보내준 것이며,

이는 히미코에게 왜국 왕권을 수여한 것이기도 하다.

이후 주몽왕검은 일본 황실의 삼보三寶 중의 첫째가 되었다.

이 주몽왕검의 형식은 한국형韓國形 세형동검細形銅劍이다.

히미코여왕은 초고대왕과 자신의 아들 오시호미天之忍穗耳命가 일본의 대화大和를 통치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첫째 신녀의 아들 아메노호히天菩比神를 야마대국의 사자로서 백제 본토의 구수대왕에게 보냈다.

그러나 그는 이복형인 구수대왕으로부터 영지를 받고 이즈모出雲에 정착하였다.

히미코여왕은 그후 다시 아메쓰쿠니다마天津國玉命(122~178)의 아들 아메노와카히코天若日子

구수대왕에게 보냈는데, 역시 구수대왕의 사위가 되어서 돌아와 큐슈에 영토를 받았다.

히미코여왕은 다시 세번째로 다케미카쯔찌建御雷神(160~210년)을 아메노토리후메天鳥船命(149~206)

함께 파견하였다.

이 다케미카즈끼는 206년경에, 오사카에 있던 4살박이 사대주신事代主神(202~268)을 힘으로 밀어

냈다고 하는데 과연 사실인지 믿기 어렵다.

사대주신事代主神은 효소천황孝昭天皇인데, 효소천황을 [고사기]에서 미마쯔히코카에시네御眞津日子

詞惠志泥命라고 하였고, 그 이름의 앞머리가 미마쯔히코御眞津日子이니,

[고사기]에서 큐슈의 다케미카쯔찌建御雷神가 굴복시킨 타케미나카타建御名方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즈모出雲에 있던 효소천황孝昭天皇은 후퇴시켰지만 대마도對馬島, 그리고 오사카大阪인 대화

大和의 백제 왕자들이 모두 굴복한 것은 아니다.

특히 대화大和(오오사카)에는 역시 구수대왕의 아들인 의덕천황懿德天皇(180~244)이 강력하게 지키고

있었다.

히미코여왕은 큰 아들 오시호미忍穗耳를 불러 일본의 중심 오사카大阪인 대화大和에 보내려고 하였다.

그런데 오시호미는 가야에 가서 김수로왕의 딸과 결혼하더니 돌아오지 않고,

그 아들 니니기邇邇藝(174~220?)가 대신 강보에 싸여서 큐슈로 돌아왔다.

니니기는 우리말로 알알이다. [일본서기]에서는 경경저瓊瓊杵라고도 쓴다.

즉 원래 발음은 알알이邇邇藝, 뜻은 경경저瓊瓊杵인 것이다.

오시호미의 귀국을 안내한 이시호리도히메伊斯許理度賣命(141~174)의 고분으로 추정하면 강림한 때가

174년이다.

이때 니니기의 형이라고 기록된 아마노호아카리天火明命(165~210)는 오시호미의 출생년도가 161년경

이므로 니니기의 형이 될 수 없다.

아마노호데天火明命(165~210)는 니니기의 형이 아니라 초고대왕의 막내아들인 우가미신宇迦美神

이었고, 백제계 1대 대마도주對馬島主 불합존不合尊였으며,

동시에 단군시대 대마도주 언파불합彦波弗合 이후로 51세 대마도주(궁하문서宮下文書에 의함)였으며,

그의 다른 이름은 야마토오弥眞都男王命 즉 왜남왕倭男王이다.

니니기는 히미코여왕의 손자이고, 히미코여왕의 가야계 동생벌인 대마도주 대산진신大山津神의 딸이

낳은 우가미신인 아마노호데天火明命(165~210)는 니니기와 서로 육촌간이라서 형이라고 기록했다.

불합不合은 대마도對馬島를 의미한다. 대마도는 한 개의 섬 이름이면서 실상은 두 개의 섬이다.

파도? 때문에 섬의 중간에서 아주 조금 합치지 못한 두 개의 섬이지만 실상은 하나라는 뜻이 불합不合

다. 궁하문서宮下文書에서는 불이합不二合으로도 썼다.

35세 단군 사벌 때인 bc723년에, 언파불합彦波弗哈을 보내 웅습熊襲(=큐슈九州)을 평정했다고 하는데,

언파불합이 대마도 출신 장수였던 것이고, 그의 후예들이 대대로 대마도의 불합존不合尊이다.

[궁하문서宮下文書]에 기록된 51대 우가야불이합왕조宇家澗不二合須世 기록도 언파불합이후의

대마도왕조 기록이다.

초고대왕의 막내아들 아마노호아카리天火明命, 구수대왕의 아들 호데火照命, 니니기의 아들 회오리

火遠理命(=火火出見) 등은 모두 우가야-대마도주-불합왕不合尊을 의미하거나 불합왕을 지냈다.

대산진신大山津神과 그 딸, 토요타마히메豊玉姬와 타마요리히메玉依姬, 타마요리히메의 아들 이쯔세

五瀨命도 모두 대마도의 인물이며 대마도에 토요타마히메豊玉姬(신무천황의 첫번째 왕비)의 묘가 남아

있다.

일본의 [상기上記]에서 1대 대마도주불합왕(사실은 51세 불합왕, 즉 아메노호아카리天火明)

구수대왕인 대국주신의 권유로 대마도의 대산진신의 딸 타마요리히메玉依姬를 이즈모出雲으로 초청하여

결혼하였고 이쯔세五瀬命(184~238)를 낳았다.

 

 

 

2. 초고대왕의 증손자 신무천황의 즉위  肖古大王   曾孫子 神武天皇   卽位

 

                     [記]神倭伊波禮毗古命 /[紀]神日本磐余彦天皇

 

 

천손 알알이는 큐슈에 와서 구수대왕의 후비였던 사쿠야히메와 결혼하였고 칠삭동이 신무천황을 낳았다. 사쿠야히메와 구수대왕의 큰 아들인 호데가 신무천황을 대마도로 쫓아냈다.

신무천황은 가야 군대를 얻어서 큐슈에 복귀하고

왜여왕 히미코의 사절로 중국에 다녀온 후에 대화를 정벌하여 일본을 통일하고 구수대왕의 손녀인 이스케요리와 결혼하여 히미코의 사후에 일본 최초의 천황에 오른다.

 


히미코 여왕의 손자 니니기邇邇藝(174~220?)는 대마도의 해신海神, 즉 오카미宇迦美의 딸,

고노하나사쿠야히메木花之佐久夜姬와 처음 결혼하였는데,

사쿠야히메는 이미 구수대왕과 결혼하여 세 아들을 낳았었다.

사쿠야히메의 큰아들은 호데火照命(187~241)인데,

[고사기]에서는 스사노오의 손자인 후하노모지구노수노布波能母遲久奴須奴神다.

[고사기]에서 초고대왕의 장자인 구수대왕, 즉 대국주신大國主神(八島士奴美神者=八千矛神)

대산진견신大山津見神의 딸 고노하나노루木花之流姬를 통해서 후하노모지구노수노布波能母遲久奴須奴神

를 낳은 기록이 있다.

후하布波=후하不合으로 보면 후하의 지방왕이라는 것인데,

不合이라는 지명과 합치되는 것으로서 대마도의 지방왕이다.

후하노모지-구노수노신久奴須奴神은 구수남久須男 즉, 귀수남貴首男의 의미이니 당시 문법 상식으로

구수대왕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또한 [위지왜인전]에서 왜여왕 히미코와 불화했던 구노국남왕 비미궁호소弓呼素에 해당한다.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 倭女王卑彌呼與狗奴國男王卑彌弓呼素不和


니니기邇邇藝(174~220?)는 사쿠야히메木花之佐久夜姬의 여러 아들들을 국진신國津神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고사기]에 “그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라 국진신의 아이다. 此胎必非我子 而為國津神之子”고 말했다.

국진신은 대국주신이라고 했던 백제 구수대왕이다.

사쿠야히메의 네 아들 중에 마지막 넷째인 호오리명火遠理命, 즉 신무천황神武天皇(194~256)만이

그의 유일한 친아들로 추정된다. 그나마 7개월만에 낳아서 칠뜨기라고 했으니 과연 니니기의 아들인지

구수대왕의 아들인지 알 수 없지만 역사에는 니니기의 아들로 기록되었다.

신무천황의 시호諡號에 사용된 이와례伊波禮는 “이파리”라는 순우리말이다. 니니기邇邇藝(=경경지瓊瓊枝,

알알이)와 그 아들 신무천황이 이파리伊波禮, 옥엽玉葉으로서 합치면 천손天孫 부자父子가 합쳐져서

[경지옥엽瓊枝玉葉]이라는 왕손 혈통을 의미하는 고사성어가 된다.


초고대왕의 아들 우가미신, 불합왕-아메노호아카리天火明(165~210) 죽자, 구수대왕은 자신과

사쿠야히메의 아들 호데火照命(187~241)에게 그 뒤를 잇도록 하여, 새로운 대마도주 불합왕 우미사치

海佐知로 임명하였다.

이때, 아메노호아카리天火明와 타마요리히메가 낳은 이트세五瀬命(184~238)는 대마도주로 즉위하지

못하고, 새로운 불합왕 구수대왕의 아들 호데火照命의 신하가 되었다.

그후 214년에 대국주왕이었던 구수대왕이 평양의 백제대왕으로 즉위하니, 호데火照命는 대마도로부터

큐슈九州로 출정나와서 니니기의 아들인 호오리火遠理命(=신무천황)가 이어받아야 할 큐슈 영토를

차지하였다. 니니기는 이미 죽은 것이다.

대신에 호데火照命는 신무천황을 대마도로 보내어 신무천황이 불합왕이 되었고, 타마요리히메의

동생인 토요타마히메豊玉姬와 결혼하여 살았다. 이것이 낚시바늘 시비로 인한 야마사치山幸와

우미사치海幸 간의 영토 바꾸기 신화이다.


이때 왜여왕 히미코는 말로만 왜왕이고 실제는 큐슈의 구노국狗奴國을 차지한 호데火照命에 의하여 연금

된다.

히미코가 있던 곳은 큐슈의 동남부인 야마대국邪馬臺國인데 그 바로 아래에 구노국狗奴國이 있어서

궁호소弓呼素와 불화하였다.

이 궁호소가 후하노모지구노수노布波能母遲久奴須奴神,

즉 호데火照命(187~241)이며 구수대왕과 사쿠야히메의 첫 아들이다.

[위지왜인전] 倭女王卑彌呼與狗奴國男王卑彌弓呼素不和

이부형인 호데火照命에게 큐슈를 뺏기고 쫓겨나 대마도로 물러난 3년 뒤에,

신무천황은 가야(久米 = 金海김해) 군대와 대마도의 힘을 빌어서 불합왕으로서 큐슈로 돌아와 호데火照命

타도하고, 큐슈를 되찾은 후에, 대마도와 큐슈, 그리고 가야(久米)의 힘을 합쳐서, 일본 본토를 정복한다.

[위지왜인전]에서 야마대국 북부에 사치국佐治國이 있어서 남제男弟가 스스로 왕이 되어서 외할머니인

야마대국 히미코 여왕을 보호하였다.

신무천황은 형제중에서 막내동생이고 관직이 본래 히미코여왕을 수호하는 야마사치山幸(左知)였는데,

호데왕에게 밀려나서 대마도에서 우미사치를 하다가 큐슈로 돌아와서 사치국이라고 한 것이다.

[위지왜인전] 有男弟佐治國。自為王以來,少有見者。以婢千人自侍,唯有男子一人給飲食,傳辭出入

[위지왜인전]에는 또 왜여왕 히미코가 238년부터 중국과 교류한 기록이 있다. 왜여왕이 대부 난승미를

대방군에 보냈다.

[위지왜인전] 景初二年六月 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

대부 난승미難升米는 우리말 되 승의 훈訓 “되”를 취하면 “난-되미”의 借字가 되는데 신무천황의

이름인 호호-데미火火出見의 데미를 옮겨적은 것이다.

화화火火는 재난災難을 의미하고 그래서 난이 재로 바뀌고 또 화화火火로 고상하게 바뀐 것이다.

그런데 난은 본래 우리 고대말에서, 또 현재 일본말에서 숫자 7이다. [삼국사기/지리지]에서 난은별

難隱別이 칠중현七重縣이다.

즉, 난승미難升米는 칠데미, 우리말로 “칠뜨기”, 즉 칠삭七朔동이였다. 칠개월만에 태어난 아이 칠뜨기

이다 보니 과연 니니기의 아들인지 구수대왕의 아들인지 니니기로부터 의심받은 것이다.

신무천황이 칠삭동이인 것을 숨기기 위해서 난데미難升米를 호호데미火火出見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신무천황이 중국에 왜여왕의 사자로 다녀온 238년에, 신무천황은 대화大和의 쿠시타마알이하야히

櫛玉饒速日命(=초고대왕의 아들인 대년신의 아들로서 쿠니타마신大國御魂神이자 안녕천황安寧天皇이다.)

와 전쟁을 벌이는데, 신무천황과 함께 대화大和 정벌에 나선 이트세五瀬命(184~238)가 전사한다.

결국 신무천황이 244년에 대화大和의 강력한 저항 세력인 에시키兄師木와 오토시키弟師木 형제와

싸워서 에시키를 전사시키고 승리한다.

전사한 에시키兄師木는 구수대왕, 즉 대국주신의 아들로서 의덕천황懿德天皇(180~244)으로 기록된

오호야마토히코스키토모大倭日子鉏友命이다.

그의 동생 오토시키弟師木는 시키즈히코師木津日子命(198~248)으로 기록되었다.

이 대화 정벌 전쟁에서 244년에 마침내 승리하니, 안녕천황安寧天皇, 쿠시타마알이하야히櫛玉饒速日命

항복하였고, 그 후예는 물부련物部連이 되었다.

같은 초고대왕의 후손으로서 구수대왕계를 배반하고 협력한 것일 수도 있다.

신무천황은 이때 백제 사반대왕沙伴大王이었던 효소천황의 딸인 이스케요리히메伊須氣余理比賣(219~273)

를 황후로 취한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대외적인 왜여왕은 큐슈에 있던 히미코였고, 실제 통치는 증손자인 칠뜨기 신무천황이

대화에서 통치하고 있었다.

그후 247년에 히미코가 죽으니 신무천황이 왜왕으로 즉위하면서 히미코의 능을 거대하게 꾸미고,

무려 백명의 노비를 순장하였다.

[위지왜인전] 卑彌呼以死 大作塚 逕百餘步 徇葬者奴婢百餘人 更立男王


(주) 249년 신라를 공격하여 각간 우로를 죽인 왜왕은 신무천황이다.

(주) 아직 일본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실은 아니지만, -아마도 기원전 700년으로 왜곡한 천조대신의 능으로 전방후원분이 부적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히미코 여왕의 거대한 산능은 시코쿠四國地方의 덕도현德島縣 기연산氣延山에 있다. 전방후원고분이며 후원부 정상에는 특이한 오각형의 제단이 있다.

기연산氣延山은 히미코의 가야 남편이자 본래 천조대신이었던 연오랑延烏郞을 기린 산이름으로서 기연산紀延山이었을 것이다. 기연산에 야쿠라히메八倉比賣 신사가 있고 그 뒤에 히미코의 능이 모셔져있다. 야쿠라는 큰 카라스烏, 대오大烏에서 유래된 것이다. 야쿠라히메 신사에는 247년 당시의 아마테라스(히미코)를 위한 장례식 장의葬儀 행렬에 대한 신사 기록이 남아 있다.

当八倉比賣大神御本記の古文書は、天照大神の葬儀執行の詳細な記録で、道案内の先導伊魔離神、葬儀委員長大地主神、木股神、松熊二神、神衣を縫った広浜神が記され、八百萬神のカグラは、「嘘楽」と表記、葬儀であることを示している。

기연산의 다른 이름은 기연산 이외에 스기오杉尾산, 시야矢野산이라고도 하는데, 모두 세오녀細烏女, 세오리츠히메瀬織津姫穗의 세오細烏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그 앞 바다는 세호瀨戶 내해內海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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