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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역사

[스크랩] 후지 산富士 山ふじさん

작성자물의나라|작성시간15.03.10|조회수74 목록 댓글 0

 


신칸센, 벚꽃, 밭과 후지산.
일본의 전통과 첨단을 동시에 보여주는 사진이다.

후지 산 富士 山(부사 산) ふじさん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후지 산(일본어: 富士山 (ふじさん))은 일본혼슈 중앙부, 시즈오카 현(후지노미야 시, 스소노 시, 후지 시, 고텐바 시, 슨토 군 오야마 정)과 야마나시 현(후지요시다 시, 미나미쓰루 군 나루사와 촌)의 경계에 있는 휴화산이며, 해발 3,776m로 일본에서 제일 높은 이다. 2013년 6월 22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707년부터 휴지기에 들어갔다. 맑은 날에는 100km 떨어진 도쿄에서도 보일 정도이다. 도카이도 신칸센이 그 근처를 지나간다.

 

수십만년 전부터 반복된 화산 활동으로 인해 형성된 성층 화산이며, 그 아름다운 풍모는 옛날부터 일본의 상징으로서 알려지고 있다. 만약 다시 대분화가 일어날 경우 관측되는 폭발 에너지는 약 7×10^24 에르그로 보고 있다.

 

2013년 6월 22일 제37차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후지산: 신앙의 대상이자 예술의 원천 이름으로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지명의 유래에 관한 여러 설들[편집]

아직까지 그 유래에 대해 뚜렷한 정설은 없다.

 

일본의 "다케토리 이야기"(竹取物語)에서 나오는 카구야히메 설화에서 불로불사의 약을 천제가 일본의 스루가 국(駿河國)에서 가장 하늘에 가까운 산의 꼭대기에 두고 불사르도록(燒) 명해서, 그 이후부터 그 산을 불의 산(ふしの山)이라고 하게 하였다고 한다고 전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정[편집]

일본 정부는 2003년, 후지산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였으나 후지산 일대에 쓰레기 불법투기 문제가 있는데다 화산으로서 세계적으로 특별히 인정받을 만한 독자성이 없다는 이유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지정 심사에서 탈락되었다. 그 후 일본은 후지산이 산악 신앙의 대상으로 많은 순례객을 끌어들이는 점, 각종 그림과 문학에 반복적으로 등장해 문화적 가치가 있다는 점 등을 부각시키는 쪽으로 전략을 바꿔 2012년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하였다. 2013년 6월 22일 유네스코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제37차 세계유산위원회(WHC) 회의에서 후지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결정했다. 후지산은 산악 신앙의 대상이자 많은 예술작품의 소재로 쓰인 일본의 상징으로서 문화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하였고 이에 '후지산-신앙의 대상이자 예술의 원천'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르포]일본 후지산 품에 안은 '야마나시' 관광자원 즐비4개 국립공원과 세계적인 고슈포도 와인 '천하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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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저으면 맞닿을듯한 일본의 상징적인 해발 3,776m 후지산 원경>
   
 
고즈넉한 촌락과 울창한 수목이 드리워진 명경지수의 호수, 그 위에 우뚝 솟아 산마루에 연중 눈이 쌓여 있는 성층화산(成層火山)은 ‘후지산(富士山)’의 미명으로 손짓한다.

 

 

후지(Fuji)산의 고독한 아름다움은 오랜 세월 많은 화가들과 문인들에게 베일속 영감을 안겼으며, 예술가들의 순례지로 입소문이 자자하다.

해발 2,000~3,000m의 높고 푸른 산림으로 둘러 쌓인 일본 최고 후지산의 본향인 '야마나시현'은 열도를 아우르는 최대의 섬과 혼슈 중심부에 자리한다.

현의 면적은 약 4,463km, 인구는 88만 여명에 이르며, 현내는 유명한 후지하코네 이즈국립공원을 비롯한 4개의 국립-국정공원을 보유해 78%가 산림으로 형성됐다.

'야마나시현'의 경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풍요로운 자연의 은총을 받고 무르익은 맛있는 과일로 손꼽힌다.

그 중에서도 포도, 복숭아, 자두는 일본 제일의 생산량을 자랑하며, 고슈 포도로 만든 '와인'은 세계적으로 높은 호평을 얻고 있다.

또한 오래 전부터 가이비단으로 알려져 있는 견직산업이나 수정공예, 와지산업 등의 전통산업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으며, 야마나시의 보석세공 기술은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한다.

 

   
 
야마나시 현에는 많은 관광지들이 즐비하다. 그 중에서 인기있는 것으로는 후지산, 후지 5호, 고후 시, 포도주 양조장, 에린지, 구온지 등이 있다.

 

 

놀이공원인 후지큐 하이랜드에는 에자나이카와 같은 최신 롤러코스터가 있어 남녀노소 탐방객들로부터 인기를 끌고 있다.

생태관광은 또다른 주요 관광 형태를 낳고 있다.

이 지역의 자연 지형은 야마나시를 등산객들의 낙원으로 만들었다.
일본에서 가장 높은 산 후지 산과 두 번째로 높은 기타 산이 모두 야마나시 현내에 위치, 으뜸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미노부 산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불교순례에 참여해 산 정상까지 올라가보면 경이로운 광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야마나시 현에 위치하는 국립공원 가운데 후지하코네이즈 국립공원, 지치부타마카이 국립공원, 미나미알프스 국립공원의 자연환경은 관광객들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목가적인 고원, 계곡, 그리고 형형색색의 꽃밭이 펼쳐져 있는 산자수려한 관광자원의 천국.
그 곳이 바로 야마나시현만의 살아있는 寶玉이다.

그 밖에 화산 활동으로 인해 온천이 많으며, 이사와온천과 야마나미온천은 사계절 한국 관광객들을 '러브 콜(Love call)' 하고 있다.


<일본 가와구치코=권병창 기자>

 

 

우리는 이와같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문맹의 일반인들은 글을 봐도 읽을수도 없었고 읽어도 뜻도 알수가 없었다.

글을 아는 사람이 자칭 학자와 종교인 들이었는데(종교라는 것은 없다),이들이 자기 입맛대로 왜곡하여 소설을 쓰고,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역사와 종교,문화,풍습이 되었고,이것이 잘 이해되지 못한것인줄 모르고, 21C 를 사는 오늘날까지 사실인줄 믿고,알고 살다 죽어 갑니다.우리 삶의 생활이 진실과 거짓이 혼재되어 있습니다.이러한 사실을 모든 사람이 깨닫고 눈을 뜨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옷을 입을때 첫 단추가 잘 못 되면 옷 모양이 잘 못 되듯이,지식이 잘못 입력 되면 모든게 엉망이 되는 것입니다.

 

부사 산富士 山 후지 산 ふじさん

 

富부자 부 + 士선비 사+ 山뫼 산

 

 

사계 김장생 우암 송시열 명재 윤증

 

<충청문화의 힘> (4) 선비의고장, 논산  
 놀뫼의 땅에서 기호유학 꽃 피다
출처:http://www.gg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6730

 

 

선비 [,?,]

학문을 닦는 사람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

 

 

 

선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선비조선 사회에서 학문을 닦는 사람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이다. 특히 유교적 이념을 적극 수용하여 사회에 적절히 구현함으로써 선행을 배푸는 인격체를 가리킨다. [1]

한편, 오늘날에는, 선비는 재물을 탐내지 않고 의리와 원칙을 소중히 여기는 학식 있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거나, 품성이 얌전하기만 하고 현실에 어두운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주로 쓰이고 있다. [2]

위의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오늘날까지도 선비는 유교적인 경향을 보이는 학식있는 사람을 지칭하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을 이르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이는 조선의 선비집단인 사림파가 조선의 중앙정계에 집권하여 정치를 주도하는 과정에서, 현실적이지 못하고 지나치게 이론에 치우친 정책들을 추진하여 조선을 임진왜란, 병자호란, 삼정의 문란 등과 같은 치명적인 일들을 겪게했다는 점에서, 훗날에 선비에 대한 여러가지 부정적인 인식이 대두되면서 그 뜻이 일부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원[편집]

한국말에서 선비는 ‘어질고 학식있는 사람'을 말한다.

 

 

 

선인들은 선비의 인격적 조건으로 생명에 대한 욕심도 초월할 만큼의 무소유의 덕을 요구했다. 공자가 이에 대해 말하기를 “뜻 있는 사(士)와 어진 사람은 살기 위하여 어진 덕을 해치지 않고 목숨을 버려서라도 어진 덕을 이룬다.”고 하였다. 장자도 “사(士)가 위태로움을 당해서는 생명을 바치고, 이익을 얻게 될 때에는 의로움을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맹자는 “일정한 생업이 없어도 변하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은 사(士)만이 할 수 있다.”고 하여 사(士)의 인격적 조건으로 지조를 꼽았다.

이렇게 사(士)가 유교적 인격체로 파악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국어의 ‘선비’가 지닌 성격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사는 역사 속에서 신분적 의미로 많이 쓰였다. 사대부(士大夫), 사군자(士君子), 사서인(士庶人) 등으로 쓰였던 것이 그 예다.[3]

어휘 발생 배경[편집]

'선비'라는 어휘는 기록상으로 《용비어천가》(1447, 80장)에 ‘션□’의 형태로 처음 나타난다. 즉, 이 어휘는 세종 집권시기(1418~1450)에 처음으로 기록상으로 나타났다.

세종은 집권기간동안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여 학문을 적극 장려하고, 의례제도를 유교적으로 개편시켜 조선을 유교사회로 만들어간 인물이다. 이렇게 자신의 여러 유교적 정책들을 더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현실화시키는 과정에서 그는 학문에 밝고, 유교적 이념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인재를 강렬히 원하게 된다.

 

그의 이러한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서, 당시 '학문적으로 뛰어나고 도덕적으로 어진 인물'을 지칭하는 선비를 《용비어천가》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의미로 재정의하여 사회적으로 반포한 것이다.

 

물론, 세종의 《용비어천가》를 통해서만 선비의 의미가 전적으로 재정의된 것은 아니다. 태종 이방원이 선비의 전형적인 표본, 정몽주를 사회적으로 추모하기 시작하면서 선비의 정의가 점점 변화하기 시작했고, 지방에서는 정몽주를 따랐던 선비일파, 온건개혁파가 지방에서 사림파를 형성하여 세력을 넓히기 시작하면서 태종의 정몽주 추모를 적극 뒷받침했던 점만을 본다면, 세종 이전에도 이미 선비에 대한 정의는 점차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세종이 적극적으로 조선을 유교화시키며 유교적인 인재들을 강렬히 열망하고, 이들을 적극 등용하면서 선비의 의미가 유교적으로 크게 개편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서 선비가 《용비어천가》를 통해서 최초로 기록상으로 등장했기때문에, 정치적?사회적인 방면에서 선비는 거의 전적으로 세종이 의도하는 유교적인 의미가 된 것이다.

 

이를 통해 세종은 앞으로의 조선의 인재들에게 자신이 재정의한 선비를 이상향으로 삼도록 하게 하였고, 추구하도록 하였다. [4]

 

당시 세종집권시기의 초기에는 태종의 강력한 왕권강화정책으로 인해, 무를 갖춘 인재보다 문을 갖춘 인재가 상대적으로 더 등한시되는 경향이 남아있었는데, 세종은 이를 해소시키기위해 문을 갖춘 인재들을 더 장려하는 정책들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이를 해소하기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직감했는지, 당시 통용되고있던 어휘들의 일부를 자신이 의도한 대로 적절하게 재정의하여 반포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재통용시켜서 사회적으로도 이를 해소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세종의 이러한 노력의 과정에서, 선비라는 어휘가 위와 같은 정의로 쓰여왔던 것이다.

역사[편집]

2세기 말엽인 고구려 고국천왕을파소는 은둔하여 밭갈이를 하고 살다가 추천을 받아서 재상의 자리에 올랐던 사람이다. 그는 재상의 책임을 맡고서 나올 때 말하기를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어 살고 때를 만나면 나와서 벼슬하는 것이 선비의 떳떳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을파소는 자신의 처지를 선비로 자각하고 선비의 도리를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당시만 해도 선비의 개념은 신분을 뜻하기보다는 인격의 관념이었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에 태학이 세워졌다. 여기서는 유교 이념을 교육하면서 선비를 양성하였다. 박사를 두어 인재를 가르쳤는데, 이 박사제도는 경전에 관한 전문 지식인을 키워냈다. 백제신라에서도 각각 태학과 국학이 세워졌다. 당시 역사의 기록과 편찬은 선비들의 임무였다.

 

고려 시대에는 교육제도가 한층 정비되어 국자감을 비롯해 지방의 12목에까지 박사를 두어 인재를 양성했다. 과거 제도가 정립돼 진사과(進士科)와 명경과(明經科)를 통해 선비들이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확보되기 시작했다.

 

고려 말엽 충렬왕안향 등에 의해 원나라로부터 주자학이 도입되면서 이른바 도학 이념이 정립되었다. 도학 이념을 중심으로 선비들의 자각도 한층 깊어졌다.

 

조선 초에 들어와 유교 이념을 국가 통치 원리로 삼으면서 선비들은 유교 이념의 담당자로서 그 존재 가치가 뚜렷해졌다. 조선 초 선비들은 고려 말에 절개를 잃지 않았던 정몽주를 추종하였고, 조선 왕조에 절개를 굽히지 않은 길재의 학통에서 선비 정신을 강화시켜갔다. 이들은 조선 왕조 건국기에 혁명 세력을 중심으로 고위 관리로서 문벌을 이룬 훈구파와 대비를 이뤘다. 이들은 절의를 존중하는 입장을 지닌 자신들을 ‘사림파’로 구분했다.

 

이때부터 훈구파와 사림파의 분쟁이 시작되는데 이를 ‘사화(士禍)’라고 한다. 사화에서 많은 희생자를 내기도 했지만 마침내 선비들이 정치의 중심 세력으로 등장하는 사림정치 시대를 이루었다.

 

조선 시대에는 사대부에 의한 관료제도가 정착되었고, 그에 따라 선비는 사회의 가장 중요한 지도층이 되었다.[5]

생활[편집]

《소학(小學)》에서 나오는 선비의 생애는 다음과 같다.

어린아이가 가정에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다가 10살이 되면 남자아이는 사랑에서 아버지와 자며 선생을 찾아가 배우고, 20살이 되면 관례를 하고 널리 배우며, 30살에는 아내를 맞아 살림을 하며, 40살에서는 벼슬에 나가고, 70살에는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난다. 이런 생애는 누구나 비슷하지만 특히 선비에게는 학업과 벼슬이 중요하다.
 
선비는 한평생 학업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 선비는 타고난 신분이 아니라 학문과 수련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비는 독서인이요, 학자다. 선비가 배우는 학문의 범위는 인간의 일상생활 속에서 부딪히는 일의 마땅한 도리를 확인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선비는 학문을 통해 지식의 양을 쌓는 것이 아니라 도리를 확인하고 실천하는 인격적 성취에 목표를 둔다.

《대학(大學)》에서도 자신의 내면에 주어진 ‘밝은 덕을 밝히는 일’과 ‘백성과 친애하는 일’의 사회적 과제를 가르친다. 선비는 항상 자신의 인격을 닦아야 하지만 동시에 그 인격성을 사회적으로 실현해야 한다. 그래서 선비는 자신의 덕을 사회 속에서 실현하기 위해 관직에 나가야 한다. 따라서 일찍부터 과거시험을 치고 벼슬할 기회를 갖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비는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못해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다. 소수의 선비만이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선비가 관직에 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을 목적으로 삼아서가 아니라 관직을 통해 자신의 뜻을 펴고 신념을 실현하는 기회를 얻는 것이라고 여겼다.

 

조선 시대 선비들이 맡은 관직도 주로 자신들의 학문과 신념을 펴는 직책이 많았다. 홍문관, 예문관, 성균관, 사헌부, 사간원 등 학문을 전문으로 하는 기관이거나 언로를 맡아 임금에게 간언하는 직책이었다.

 

관직에 오르면 위로는 임금을 섬겨야 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돌보아야 하는 책임이 있다. 선비는 임금에게 무조건 복종과 충성을 하지는 않았다. 선비는 임금과 의리로 관계를 맺기 때문에 언제나 그 직책의 성격과 임금의 역할에 대해 성찰하여야 했다. 임금에게 잘못이 있으면 아뢰어 바로잡으려 하고, 직책이 도리에 합당하지 않으면 물러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선비는 나아가기를 어려워하고 물러서기를 쉽게 생각하는 태도를 가져야 했다. 그것은 부귀의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불의에 대한 비판 정신을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선비로서 평생 과거시험을 보지 않거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는 경우를 흔히 ‘처사(處士)’라고 하였다. 처사가 관직에 나간 선비보다 많은 존경을 받았다. 학문에 조예가 깊어 후생을 많이 가르치고 바른 도리를 제시하는 사람을 ‘선생(先生)’이라고 불렀다. 선생은 벼슬에 나간 사람의 호칭인 ‘공(公)’에 비해 훨씬 높은 존중을 받았다.

 

선비에겐 지향하는 두 가지 방향이 있다. 하나는 한 시대에 나가서 도를 시행하고, 또 하나는 후세에 말씀을 내려주어 가르침을 베푸는 일이다. 즉 자신의 학문을 제자들을 통해 전하기도 하지만 직접 저술을 하여 후세에 가르침을 내려주는 것이다.

 

이렇게 선비의 일생은 도를 밝히고 자신을 연마하여 세상을 바로잡고자 노력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6]

주석[편집]

  1. 이동 황훈영, 《우리 역사를 움직인 33가지 철학》, 푸른숲, 141쪽
  2. 이동 다음 사전, 선비_1 (2)재물을 탐내지 않고 의리와 원칙을 소중히 여기는 학식 있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3)품성이 얌전하기만 하고 현실에 어두운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3. 이동 황훈영, 《우리 역사를 움직인 33가지 철학》, 푸른숲, 142쪽
  4. 이동 황훈영, 《우리 역사를 움직인 33가지 철학》, 푸른숲, 143-144쪽
  5. 이동 황훈영, 《우리 역사를 움직인 33가지 철학》, 푸른숲, 143-144쪽
  6. 이동 황훈영, 《우리 역사를 움직인 33가지 철학》, 푸른숲, 145-146쪽

 

현대 선비님들 모습.

 

산청군, '2015 산청선비대학' 입학식 열린다
연합뉴스 보도자료 | 입력 2015.03.09 11:42

 

출처 : 산청군청 보도자료

 

이와같아,

 

부사 산富士 山 (후지 산 ふじさん)은

 

富부자 부(건강할때 부자) + 士선비 사(잘난 너 상징)+ 山뫼 산(죽음을 상징)

 

부자 [,,]

재산이 많은 사람.건강한 사람.선비는 대단히 잘난 너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부사 산富士 山(후지 산 ふじさん)이란?
 
"대단히 잘난 너에게는 죽음이 있고,죽음을 깨닫고 건강하게 살아갈때 부자 인것이다"라고 메세지를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후지 산 ふじさん 으로는 이런 사실을 알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사 산富士 山으로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좀 해봅시다!

 

선비는 한민족 문화인데 지금의 일본에 있는 산이름에 선비사"士" 문자가 왜 들어가 불리워지고 있을까요?

 

 

 

칠지도七支刀 명문 분석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濟王世子 奇生聖音 故 爲倭王旨 造 傳示後世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백제 왕세자가 기이하고,성스러운 소리를 내며 태어나셨다.그러므로,왜국 왕들에게 뜻을 알리기 위해 만들었다.후세에게 보이고 전하라.<==왜국은 백제의 제후국으로 백제가 통치하였음을 알수있다.일본이라는 정식 국호인 “대일본제국”은 1889년 2월 11일에 발포(發布)된 “일본 제국 헌법”에서 “대일본제국”이라고 칭하고 있는 것에 유래한다.<==
일본은 1889년 2월 11일 전前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나라인것이다.

 

이와같아,

 

선비사"士"는 우리 조상님이 다스리던 땅이었던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말한 왜곡되어지고 잘못알려진 역사로,역사교육이 잘못되니 2300년전부터~8C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인渡來人,귀화인(歸化人)으로 알고 있다.

 

일본에 있는 유적은 모두,우리 조상님이 후손後孫들이 보고 눈을 뜨고 살으라고 남겨 놓은 유적이었던 것입니다.

 

고조선,삼한.==> 규슈에 유적 분포.

가야 ==>오사카에 유적 분포.

백제 ==>아스카,나라에 유적 분포.

신라 ==>교토에 유적 분포.

 

금당 벽화(金堂壁畵)

나라현 호류사(법륭사) 금당 벽화(法隆寺金堂壁畵). 일본의 호류사의 금당 벽에 그려져 있던 벽화. 610년(영양왕 21년)에 일본에 건너간 고구려의 승려 담징이 그린 것으로, 우리 나라의 석굴암, 중국의 윈강 석불과 더불어 동양의 3대 미술품이라고 일컬어졌다. 삼국의 문화가 일본으로 전파됨을 보여 주던 좋은 예였으나 1949년의 화재로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그것을 본떠 그린 그림이 남아 있을 뿐이다.(이 당시는 일본이라는 이름이 있었던것이 아니고 여러 제국이 있었고 "나라 제국"(또는 다른 제국명) 으로 불리웠을것으로 생각합니다.고대古代에 일본은 왜국으로 불러야 할것으로 본다.)

 

천재학습백과 

 

610년 이당시 일본은 문화라는것도 없고,미개하여 기저귀 차고 살고,남녀 혼탕등 짐승처럼 살았을것으로 보이며(지금도 일본에 남아있는 문화를 볼때),이런 짐승들을 깨우치려  일본에 사찰 건립을 했던것으로 생각 한다.

 

 

독도獨島

 

 

독도獨島를 일본이「竹島(다케시마)」로 부르고,교사놈들은 자기 땅이라고 강도 교육을 하고 강도들을 키우고 있고,정치인놈들은 권력 욕심에 영토 야욕으로 국민을 선동하고 이웃 국가와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 

 

 

일본이 독도獨島를「竹島(다케시마)」로 부르나 다케시마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일본말로는 알수가 없다.

 

「죽도竹島」는 우리에게 깨닫고 살으라는 메세지를 주고 있는 타임캡슐 인것입니다.

 

竹 대 죽(생명 상징) + 島섬 도(잘난 너)

 

잘난 너는 죽지 말고 물에서 생명을 깨닫고 잘 살아야한다는 메세지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죽도竹島」라는 이름은 후세가 보고 깨닫고 잘살으라고,우리 조상님이 지어논 이름 이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아,

 

독도獨島는 일본 땅이 아니다.

 

일본은 강도짓을 멈추고 이웃나라와 잘 살아갈수 있도록 국민을 이끌어야 할것이다.

 

 

 

 

 

늙으면 누구도 孤老病死에서 벗어날수 없고 벗어나려면 건강할때 건강 챙기며 사십시요.

 

20세이상 나이 들어가면 건강에 빨간불이 켜지기 시작하여 여기저기 아픈곳이 나타나고 세월가면 갈수록 당신 몸은 병들어 고통뿐이 없다.

 


세숫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 앉아만 계십시요(좌욕).

물에 앉는것을 실행하시면,건강을 지킬수 있습니다.

하루에 오전,오후30분이상 실행하며,매일 습관을 들이는것이 중요합니다.

(오래 앉아 있을수록 좋으며,1분1초라도 더 물에 앉으면 자신에게 좋은 것이나, 힘이들때는 쉬어가면서 하세요)<==이것도 못해 먹겠다고요?

아픈것도 못 아프겠다고 해서 않 아플수 있으면 좋으련만,죽는것도 못죽겠다고 해서 않 죽으면 좋으련만,마음대로 않되지요.

 

죽는것도 않 죽겠다고 하면 않죽으면 좋으련만,마음대로 않되지요.

 

노력과 극복없이 기쁨은 없습니다.

 

모든 병든자(者),장애인분들은 현대의학의 가장 적합한 치료방법과 병행하시기 바랍니다.

 

 

사람마다 각자 처한 상황이 다르니 모두에게 꼭 좋은일이 있다고 말씀 드릴수는 없으나,인연있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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