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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역사

일본의 날조된 역사를 본다 (1)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5.04.17|조회수158 목록 댓글 0

 

일본의 날조된 역사를 본다-1000년 조작된 천황

 

 

필자는 우리와 일본이 진정한 선린(善隣)관계를 바라지만 일본의 한국과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한 안하무인적인 오만한

태도로 나오는 데에는 곤혹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일본 총리와 겐바 고이치로(玄葉光一郞)외상,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郞)의 망언과 망발이

최근 계속됐다. 이어 하시모토 도루(橋本 徹)오사카 시장이 ‘종군 위안소 설치 관리에 일본이 관여했다’는 일본정부의

공식입장까지 부인하는 데까지 이른데 대해 필자는 일본의 잘못된 역사날조의 진실을 말하려 한다.

일본의 파렴치하고 뻔뻔스러운 망언작태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그들을 알기 위해서는 역사왜곡부터 살펴보는

것이 일본과 일본인을 아는데 도움이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정권의 인기가 바닥이라고 하나 일본은 이럴 때마다 인기 만회를 위해 극우적 발언과

행동을 해 왔다.

 

 

그러나 세상 일은 “심는 대로 거둔다”는 만고의 진리가 변치 않는다는 것을 일본은 알았으면 한다.

일본은 일왕 히로히도(裕仁)가 전쟁을 일으킨 전범이 아니라고 우기지만 일왕은 전쟁에 적극적이었고 진두에 서서 선전

포고권 행사 등 태평양전쟁을 독려한 장본인이다.

일왕이 태평양전쟁의 전범임은 세계가 다 아는 사실이다. 맥아더장군의 배려로 전범에서 벗어났으나 이에 고마움이나

감사는 커녕 미국에 대해서도 맥아더 장군에 대해 피해의식만 고조시키는 족속임은 세계가 모두 알고 비웃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이 조차 아랑곳 하지 않고 잘못을 반성하기보다 약자를 괴롭혀온 것이 일본 극우정치인가 걸어온 작태다.

그들은 패전을 하고서도 패전을 인정하지 않고 종전(終戰)이라 하며, 일본에 민주화를 가져다 준 맥아더장군의 동상

하나 찾아 볼 수 없는 나라다.

그들이 얼마나 옹졸하고 옹색함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아마 지구상에 아직도 19세기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일본밖에 없을 것이다.

일본의 극우를 표방하는 사람들의 행태는 가히 가관인 것이다.

 

 

 

이 대통령이 일왕 사죄 거론, 잘못 아니다

 

 

반성과 은혜를 모르는 일본은 자신들의 하는 짓이 얼마나 죄악을 짓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일왕의 전범행적은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많은 행적 중 하나의 예를 보자. 태평양 전쟁이 한참인 1944년 7월20일 히로히도(裕仁) 일왕은 태평양전쟁을 주도적

으로 수행하는 당시 총리 도조히데키(東條英機)에게 칙서(勅書)를 보내 그의 공로를 치하하는 등 매우 적극적이었다.

이 같은 내용들은 미국으로부터 반환받아 일본 국회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마이크로필름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이러한 일왕을 일본 극동 군사재판을 받지 않게 한 점령군 사령관은 맥아더 장군이었다.

그의 배려로 일왕을 전범에서 제외 시켰으나 그 고마움도 모fms다. 이런 일본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은 “일왕이 통석의

염(念)이니 이런 단어 하나 찾아서 올 거면 올 필요 없다”, “방한을 하려면 독립군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현 일본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정권이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는 참으로 가소롭기까지 하다.

 러시아의 쿠릴열도나 중국의 다오위다오(일본 이름=센카쿠)에 상륙한 중국인에게는 눈치를 보면서 독도 침탈을 획책

하는 일본의 망발은 용납되지 않는다.

 

 

이 대통령의 말한 것 무엇이 잘못됐는가. 무엇 때문에 일본의 눈치를 봐야 하는가. 우리는 일본국민이 아니다.

간악한 일본의 피해를 입은 피해자로서 할 말을 한 것뿐이다. 우리가 일본국민이 아닌 이상 일본의 논조에 따를 필요가

없음은 당연한 것이다. 일본은 아직도 일왕을 정점으로 한 자민족의 우월감을 갖고 주변국을 바라보는 타성이 있는데,

이는 아직도 침략근성을 버리지 못한 잘못 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일본의 반성을 모르며 오만불손한 태도는 일본의 격에도 맞지 않는다. 이 대통령이 8·15를 앞두고 식민통치하의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생명과 재산을 빼앗으며 780만의 조선인을 강제노동에 동원해 고통과 아픔을 준데 대해 일왕에게

사과하라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 사과하고 보상할 것들은 안하면서 망언과 보복 카드나 꺼내는 일본을 볼 때 아직도

일본은 잘못을 은폐하며 우리를 멸시하려는 오만함에 가득 차 있는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된다. 분노를 금 할 수 없다.

일본은 세계를 직시하고 일본을 위해서도 정도(正道)를 가야 한다. 일본이 근대국가 성립과정에서 정치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아마테라스 오미가미(天照大御神)라는 황실조상신을 태양신으로 보편화 시켜 인종과 민족, 영토, 문화, 지역

등을 소통시키고 통합하는 상징으로 조작한 일왕을 일본인은 천황(天皇)이라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웃나라의 왕으로

밖에 보지 않는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일본은 침략전쟁의 잘못을 뉘우치지는 못 할망정, 우리 대통령이 한 말에 대해 무례하고 오만하면서 자기중심적이고

편향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본인에게 일왕은 신 같은 존재일지 모르나 우리에게는 이웃나라의 군주일 뿐이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하기에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지금은 일본제국시대가 아니다.

일본 근대사상의 원류이자 제국으로 가는 길을 연 역사학의 기타 사다키치(喜田 貞吉), 인류학의 도리이 류조(鳥居 龍藏),

고고학의 하마다 고사쿠(濱田 耕作), 민속학의 야나기타 구니오(柳田 國男) 등에 의해 천황이 만들어졌다.

이들 일본신화 재구성의 공모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천황은 신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인간일 뿐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제국주의를 거치면서 옹립된 일왕이다.

이런 탓에 아직도 제국주의 망령에서 못 벗어나 우리를 침략하며 독도를 편입시켰다는 식의 구태의연한 망언을 남발

하고 있다.

이 같은 일본을 보고 있자면 1970년 12월 바르샤바 유태인 희생자 위령 비 앞에 겸허히 무릎을 꿇고 폴란드 국민에게

사죄한 독일의 빌리 브란트총리 같은 위대한 정치인이 일본에는 없음을 본다.

 

 

위대한 정치가가 없는 일본은 서슴없이 침탈행위를 다시 시도하고 있다. 독도 문제는 일본의 잘못이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오늘의 한·일사태는 일본이 형성한 것이지 우리가 한 것이 아니다.

한 국가의 대통령이 이런 말도 못하는 대통령이라면 주권국가의 대통령이 아니다. 필자는 한·일의 친선에 앞장서야 할

마음을 갖고 있으나 일본의 도를 넘는 망동에는 찬성을 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나라 단군 이래 한국이 일본왕조의 발상지이고 실크로드라는 것을 모르는 일본의 정치인들에게 역사날조며

진실을 왜곡시키는 그 진상이 어느 정도이며 얼마나 이웃나라들을 괴롭히고 있는가를 단편적이나마 진실에 근거한

역사적배경과 그 진상을 말해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고자 한다.

 

 

일본은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역사의 엄청난 날조와 우리나라 역사를 제멋대로 축소 왜곡해서 오늘의 일본을 구축했다.

이를 아는 우리는 지금 일본 정치인들의 행태를 정상으로 보지 않는다.

근대에 와서 한·일 간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어긋나게 하는 것은 언제나 일본인 것을 알았으면 한다.

이는 한·일양국에 불행한 일이요 일본의 장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일본의 고립만 조장할 뿐이다.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며 침략의 죄과를 제대로 알고 말하라.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보면 자기들의 죄과가 얼마나

큰 것임을 알 것이다.

우리의 역사도 그리고 독도도 모두 날조하고 조작하며 자민족이 우수하다는 망상에서 못 벗어나는 우월주의에 도취된

모습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다. 일본은 깨어나야 하는데 지금의 일본은 정상적인 상식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닌 듯하다.

광명한 천지에 공명정대한 정도(正道)로 나아가기를 우리는 기대하지만 지금의 일본정치인의 행태는 정상이 아니다.

 

 

 

일본은 역사날조, 제대로 보고 말하라

 

 

일본은 자기들의 역사도 날조해 일왕을 천황이라 하며 일본 천황들의 이름을 나열하나 1대 진무덴노(神武天皇 BC 660~

585)에서~14대 츄우아이(仲哀 天皇)까지는 가공(架空)의 천황이며 일본 역사는 1000년을 날조하고 있다.

2대 스이제이 천황(綏定天皇), 3대 안네이 천황(安寧天皇), 4대 이토쿠 천황(懿德天皇), 5대 코우쇼우 천황(孝昭天皇),

 6대 코우안 천황(孝安天皇), 7대 코우레이 천황(孝靈天皇), 8대 코우겐천황(孝元天皇), 9대 카아카 천황(開化天皇),

10대 스진천황(崇神天皇), 11대 스이닌천황(垂仁 天皇), 12대 케이코우천황(景行天皇) , 13대 세이무 천황(成務天皇)

등은 조작된 것으로 일본 학자들도 인정 하고 있다.

미수노(水野祐)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교수는 양심적으로 일본의 역사는 978년 조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면서 총독부에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일본 교토대학(京都大學)의 이마니시 류(今西 龍)로 하여

금 1만년의 우리 역사를 반 토막 이하로 축소하고 실제 실존 인물인 단군을 곰의 자식이라고 전설화하며 황폐화 시켰다.

이런 날조의 전문가인 일본은 독도 역시 러·일전쟁을 앞두고 노골적으로 도둑질을 하듯 독도가 무주물 이기 때문에

1904년 시마네현(島根縣)에 편입시켰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보다 앞서 고종황제는 일본인들이 울릉도를 불법 침입해 산림벌채와 불법어로를 자행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에 대한제국은 울릉도와 독도를 지방행정구역상 독립된 군으로 승격시키고 “울릉도와 죽도 및 석도(독도)를 관할한다”

고 1900년 10월25일 고종황제칙령 41호를 발포하고 관보에 게재했다.

이래도 독도가 무주물인가.

일본이 억지 주장을 하는 것은 날강도 같은 만행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일본이다.

이제는 이런 만행을 그만둬야 일본의 국격(國格)도 바로 평가 받을 수 있다. 오늘의 망언대국 일본은 이렇듯 말이 아니다.

독도는 엄연히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으로나 우리 고유의 영토다.

 

 

역사를 날조한 일본은 그들의 역사를 2600년이라 하나 일본이 국가 형태를 갖춘 것은 390년 일본에서 태어난 오진(應神=

진구 황후의 아들)이 왜(倭)를 세운 것을 기점으로 삼아야 한다.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346~375在位)의 아들로 실존인물인 왜왕(倭王) 1대가 오늘의 국가 형태의 요소를 갖추었던

것이다.

이 오진(應神)이 시조라 할 수 있다.

일본은 BC1세기에 조선무녀(朝鮮巫女) 히미고(卑弥呼)가 9부족(9部族)을 통일해 일본 최초의 나라를 세워 왕이 돼

여왕2대가 통치한 이도국(伊都國.=邪馬臺國)이 구주(九州)에 있었다고 하나 이도국(伊都國.=邪馬臺國)은 지금의 아프

리카 원주민 부족국가 수준 정도다.

일본이라는 국호를 쓰기 시작한 것은 37대 천황이라는 37대 사이메이(齊明)여왕이 백제로부터 원군지원 요청을 받았

으나 죽고, 백제가 멸망한 후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夫餘)풍장(豊璋)이 사이메이(齊明)여왕의 뒤를 이어 천지(天智)

일왕이 되고, 671年에 당(唐)의 승인을 얻어 이때부터 일본(日本)이라는 국호(國號)를 갖게 된 것이다.

일본의 왕은 백제계임도 이렇듯 모두 밝혀진 사실이다. 현 아키히토(明仁)일왕도 스스로 자기는 백제계라고 밝히고

있지 않은가.

 

 

당시 중국인들은 일본이 국호를 일본으로 하려한다는 것을 듣고 “난쟁이 같은 것들이 나라이름을 일본이라고 한다”고

했다. 명치유신 이전에는 고기도 못 먹던 일본이 근세에 와서 국력이 강해지자 그 오만은 더 볼 수 없는 지경이다.

분명한 것은 일본이라는 명칭은 구다라(百濟)를 한역(韓譯)한 것인데 구는 크다(太)라는 태양의 나라라는 뜻이다.

백제는 일본에 있어 큰 태양 같은 나라로 여겨졌다.

최태영(崔泰永)선생은 106세에 타계하기까지 “일본왕조의 발상지가 한국이라는 것을 일본에 가서 한국사 연구 자료를

찾아다니다 얻은 수확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일본은 칙서에 만세일계(萬世一系)라 하나 일본은 한국에서 건너간 유민이 세운 나라임은 세계가 다 아는 사실이다.

역사왜곡이나 단일민족 운운은 어불성설이다.

일본의 지도층은 물론 전 국민의 85%이상 한국계(韓國系)임을 알아야 한다.

일본으로 유민이 된 한을 품고 언제나 우리에게 해악만 하는 일본은 잘못된 한을 지금은 풀어야 한다.

 

 

 

일본의 지도급 인사는 거의 한국계다

 

 

일본인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양, 으스대지만 그 선조는 한국이다.

일본수상 사토 에이샤크(佐藤英作), 기시 노부스케(片信介)는 모계로 한국계다. 오브치, 아베(阿部), 하네다(羽田),

후크다(福田다케오)부자(父子)들도 모두 한국계(韓國系) 후손이다.

도죠 히데키(東條英機)는 경주박씨이고, 태평양전쟁당시 도구외상(東鄕外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도고헤이

하치로(東鄕平八郞), 러·일전쟁의 영웅 노기 마레수께(乃木希典)대장 등은 모두 박씨다.

헤이그 평화회의 일본대표 스즈키 게리로쿠(都게馨)도 한국계이며, 이등박문(伊藤博文)은 윤씨다.

또한 일본의 60~70연대 연말가요 홍백전에 나오는 일본가수들을 보면 80%이상이 한국계였다.

미소라 히바리를 비롯해서 미야코 하루미, 모리신이치, 이스기 히로시, 후시아키라, 사이죠히데키, 네크 미네, 후랑크

나가이, 와다 아끼고 등(지면상 생략하지만)이 그들이다.

일본은 이 조차도 부인하려 한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와 일본은 한 민족이기도 하다. 일본으로 유민이 된 한을 대립각으로 나오는 일본을 보고 있자면 측은한 마음까지

든다. 지금은 유민된 한(恨)을 한(恨)으로 풀 때가 아니다.

우리와 힘을 합쳐 세계로 비상(飛翔)할 때다. 고대역사의 한을 언제까지 갖고 가려는가. 쓸모없는 한을 풀어야 일본도

산다.

 

 

 

 

 

단군(왕)은 47명 실존인물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라 하면서도 단군역사에 대해 무지하다.

더욱이 일본 강점기의 교묘한 역사 왜곡은 우리의 역사인식마저 바꿔놓았다.

단군은 실제로 BC2333년 전 지금의 중국 요동 땅에 조선을 개국하고 2096년간 47대에 걸쳐 통치해온 임금들을 지칭

하는 한문 식 명칭이다.

즉, 고조선을 개국한 것이다. 고조선은 그 이전에 1565년간 지속된 환국(桓國)시대 말기 곰이며 호랑이 등을 귀히 여기는

여러 부족들을 하나로 통일해 요동에 최초의 단합된 민족국가를 이루었기에 우리역사의 기원으로 중요시 되는 것이다.

단군이라는 명칭은 왕이라는 용어로 변화했다.

또 왕검은 임금이라는 이두(吏讀)이다. 오늘날 단군을 두고 벌어지는 논란의 비극은 오랫동안 한국인들에게 단군이

누구인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이는 일제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조작된 일본 황통사(皇統史)의 식민사관이 조선인들에게 그대로 교육된데 그 원인이

크다.

단군 조상들의 뿌리가 잘려나감에 따라 우리는 국가와 역사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렸다. 역사가 그 핵심을 잃었다.

 

 

그러나 단군사(檀君史)를 심도 있게 연구해 온 최태영(崔泰永) 박사의 연구결과를 보면 단군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한(韓),중(中),일(日)의 역사기록들이 전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중국과 일본이 한국사 왜곡 말살에도 불구하고 부인할 수 없는 근거로 존재한다고 평생을 단군을 연구해

온 최태영 박사는 말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천자문 다음에 배우는 동몽선습(童蒙先習)이 있다.

사대(事大) 때문에 비록 중국사를 앞세워 기자와 위만을 말하고 있다 해도 중국의 요(堯)임금과 같은 시기에 요동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세워졌고 단군(왕)들이 다스렸음을 우리 선조들은 잊지 않고 가르쳤다.

여기서 고조선이란 오직 한(韓)민족 단군들이 대를 이어가며 통치한 조선(朝鮮)을 의미한다.

중국인들은 역사를 자기 뜻대로 구미에 맞게 재구성해 버렸지만 역사책과 달리 지리책만큼은 변조할 새가 없었다.

중국의 세계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에 고조선 이야기가 나온다. “고 조선인들이 한문을 쓰게 된 뒤 나라이름을

 ‘아사달’에서 조선(朝鮮)이라 하고 배달임금을 단군이라고 했다”하고 ‘조선의 음이 조선’(潮仙)’과 같다는 설명이 나온다.

여기의 ‘조선(潮仙)’이란 단순히 그 음을 차용한 것이다.

 

 

고조선의 임금인 단군들은 우리 조상인 실제 인물들이다.

이 단군들은 중국대륙 요동 땅을 통치했던 자랑스러운 우리의 선조들인 것이다.

단군조선 말기에 이르러 힘이 미약해 지면서 지금의 중국대륙에서 밀려 삼한(三韓)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한반도 북부의 강력한 왕국 부여(夫餘)는 이 일대 한민족 국가 가운데 가장 늦게까지 단군의 제위를 이어갔다.

이 같이 우리민족이 중국대륙과 만주 한반도에 먼저 살았던 선주(先住) 주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근대에 조선에 이르러 천하가 중국을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신봉한 사대세력(事大勢力)에 눌려 위국(爲國)이나 호국

(護國)을 내세운 행사를 금함으로서 단군의 존재도 국가규모의 힘과 의미를 잃었다.

그럼에도 단군사당(檀君祠堂)과 성황당(城隍堂)이라는 당집으로 전락해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고 말았다.

동네단위의 민간신앙으로 맥이 이어진 것이다. 일제 때는 미신이라는 이유로 타파대상이 되기까지 했다.

단군에 대한 오해는 이 같은 일제의 역사왜곡 만행에서 비롯됐다.

단군이 실재했다는 것은 조상대대로 불러온 세년가(世年歌)라는 노래로도 전승했음이 세종실록에 나온다.

 

 

일제는 조선을 침탈하면서 초라한 일본역사보다 한국이 유구하고 우월한 찬란한 역사를 가진 것을 깎아내리는데 혈안이

됐다.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그 옛날 고조선이라는 중국대륙과 만주일대와 한반도에 이르는 강대한 국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서든지 지워 잊어버리도록 해야만 통치가 수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은 역대 환웅천황(桓雄天皇)이 수천 년 다스린 환국(桓國은) 물론 고조선도 단군도 모두 실재가 아닌 신화로 바꾸어

버렸다.

환국을 기재한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불태우거나 변조하고 일본이 일찍 한국을 지배하기도 했다는 거짓말을 사실처럼

날조했다.

우리 고대사 왜곡의 앞잡이 이마니시 류(今西龍)의 부류가 “한국사는 신라 때부터 시작이다”이라는 당치도 않은 설을

 ‘실증주의 사학’이라고 호도함으로서 그 이전의 한국고대사를 못 믿을 것으로 돌려 버렸다.

이 같이 한국사를 질시해 온 일본이 조작한 역사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미친 짓이요 우리 영혼을 죽게 만드는

것이다. 일본은 한국인들에게 용기를 잃게 하고 가치관을 변질시킴으로 열등의식과 패배의식을 고취하는데 열을 올렸다.

그리고 큰 덕을 봤다.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들은 이를 솔직히 시인한다.

가시마 노보루(鹿島昇)같은 일본사가(史家)들은 “일본의 황통사(皇統史)는 거짓역사이지만 일본은 놀랄 만큼 짧은 기간

내에 과학과 선진 물질문명을 받아 들여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했다.

아울러 한때 세계지배를 꿈꿀 정도로 자부심과 용기를 갖고 발전했다.

이는 한국과 중국 등 피해국에 대해서는 미안한 일이지만 오로지 이 같은 역사 위조의 공적이다”라고 실토하고 있다.

일본인 중에는 고조선사와 일본의 진정한 고대사인 상가야 왕조사가 연결돼 있다는 것을 아고 기요히코(吾鄕淸彦)같은

학자들이 상세히 연구·발표하고 있다.

이들은 일본 군부와 신직(神職)이 개입된 역사나 일본서기(日本書紀)와 고사기(古事紀)는 진정한 역사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로 인해 일본제국주의 황통사(皇統史) 사가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실정이다.

고대 일본은 한국의 식민지였다. 미나마(任那)는 가야의 식민지였다.

철을 얻기 위해 가야는 일본에 분국(分國)을 두었던 것이다.

 

 

일본이라는 나라이름도 생기기 전인 4세기~6세기 미니마(任那) 일본부(日本府)를 한반도에 설치해서 가야를 지배 했다

느니 신라·고구려·백제를 정복했다는 일본의 주장은 거론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일본의 우리나라 역사 위조사는 1988년 일본 후지산(富士山) 아래 지하 서고(書庫)에서 비서(秘書)인 미야시다 분쇼

(宮下文書=신황기(神皇紀)를 통해서 확인 할 수 있다.

1200년 전의 이 문서에는 백제인이 와서 일본을 가르치다가 일본 왕이 됐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일본 궁내성(宮內省) 소장의 상기(上記)에는 일본에 건너온 한 단군자손의 73대손이 일본의 진무(神武)일왕이

됐다는 기록이 있다.

구사카 히로시(日下 寬), 쓰보이 구에조(坪井九馬三)가 일본어로 번역해 1902년 도쿄대학(東京大學)과 1916년 경성조선

연구회(京城朝鮮硏究會)에서 원문과 함께 출판한 ‘교정(校訂) 삼국유사’는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기록 중 환국(桓國)을

정확히 기록해 놓은 삼국유사 정본(正本)의 증거자료다.

 

 

이같이 일본은 꼼수로 고조선의 역사를 엄청나게 왜곡하고 고조선은 존재하지 않은 양, 조작하고 단군도 신화라고

꾸미며 마치 일본이 옛날 한국을 지배했다는 사실과는 180도 다른 거짓역사를 강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일본이 물러 간지 70년이 다돼 가는데도 우리는 단군과 고조선역사가 실종된 채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있다.

참으로 어리석고 부끄러운 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학자와 일본인 뿐만 아니라 세계인의 웃음거리다. 우리의 위대함은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위대한 여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를 잃으면 모두 잃는다는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

 

 

 

 

한민족은 아시아 패권국이었다

 

 

최태영(崔泰永) 선생은 환국과 단군의 조선역사를 돌아가실 때까지 깊이 연구했다.

그는 ‘인간 단군을 찾아서’라는 저서를 통해 “단군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나라 역사가 아주 장엄하게 엮어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이를 우리 후손들에게 꼭 전하고 싶다”고 했다.

일본의 역사날조 세 번째인 이번 기고에서는 최 선생의 연구 성과를 저서를 중심으로 언급해 보고자 한다.

주요 내용은 지난 90년대 국내에서 학노(學奴, 학문의 노예)들에 의해 미처 발표하지 못한 연구결과들이다.

이는 금년 4월 2일 94세로 타계한 섹스피어 영문학의 태두인 김주현(金周賢) 박사와의 약속이기도 하다.

김 박사는 최태영 선생과 같이 대학 강의를 같이하면서 친분이 가장 가까운 분이었다.

따라서 그는 최 선생의 의중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선생이시다.

 

 

김 선생과 필자는 생전에 자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때마다 김 선생은 “이 선생이 최태영 선생의 역사연구결과를 세상에 널리 알려 그의 생전에 역사를 바로 세우려고 한

숭고한 뜻을 받들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잘못된 우리 역사를 제대로 되돌리기 위해 고령의 나이에도 사비를 들여 중국과 일본을 자주 답사하며 헌신한 최

선생의 뜻을 여기서 멈출 수 없다 하면서 최 선생의 큰 뜻을 이어 가기를 당부했다.

필자는 그것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고대사에 관심을 둔지 10년도 안 되는 천학비재인 필자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최 선생이 타계한지 7년, 김 선생이 타계한지 4개월이 지난 오늘 두 선생님의 명복을 빌며 이글을 쓴다.

그러나 글의 내용은 필자의 연구보다 최 선생이 연구한 내용이 주축이다.

우리 역사가 바로 되기를 바라는 충심에서 선생의 당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펜을 들었다.

 

 

 

환국시대 은폐하기 위해 단군신화 만들어내다

 

 

일본은 총독부에 ‘조선사편수회’를 두어 이마니시 류(今西 龍)로 하여금 우리나라 역사가 신라부터 시작한다고 왜곡했다.

해방 후 단군조선은 부활했으나 단군조선에서 단군은 신화화 됐다. 필자도 초등학교부터 대학 때까지 왜곡된 역사를

배웠다.

우리 역사가 5천년도 안 되는 역사로 배운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일제의 철저한 조작이다.

우리 역사는 단군조선 이전에 이미 환국신시시대(桓國神市時代)가 1565년간이나 지속됐다.

이 환국시대 환웅(桓雄)이 데리고 온 무리가 3000명의 군대였다.

우사(雨師)·운사(雲師)·풍백(風伯) 등 행정적 직임을 맡은 사람은 따로 있었다.

환웅(桓雄)이 거느렸던 이 3000명은 소규모의 군대가 아니다. 당시의 3천명은 대단한 무리다.

신화적 허구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이 부분을 자꾸 은닉시키고 회피하려 했고, ‘조선사편수회’는 단군조(檀君朝)를 논하며 의도적으로 이 부분을

뺐다. 그것은 일본 역사의 열등감에서 나온 일이었다.

이어 그들은 단군 신화를 만들어 냈다. 단군신화는 단군시대가 아닌 신시시대(神市時代) 환국(桓國)에 있던 이야기다.

단군보다 1500여 년 전 환웅(桓雄)이란 임금들이 환국(桓國)에 있었다는 것인데, 역사가 없어졌기에 그런 신화로 상징된

것이다. 일본은 환국이 아예 없는 것으로 역사날조를 했던 것이다.

 

 

어느 나라나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는 신화가 있고 그 신화에 역사적 사실이 반영되는 것이 상식적이지만, 우리나라의

역사는 고조선 개국부터는 분명한 사실이지 결코 신화가 아니다.

실제로 최근 고고학 발굴을 통한 요동의 고조선 지역에서 BC2400년경의 청동기 유물이 발굴되고 있다.

당시 광역국가가 성립할 수 있었다는 충분한 근거다.

황하문명보다 1500~2000년 앞선 요하문명이 있었다는 석학들의 연구결과 발표도 이를 뒷받침하고도 남는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증명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아주 일찍 깨어 난 민족이다.

석기시대부터 들어와 요동과 한반도에 제일먼저 정착했던 주인이다.

다만 약 10만 년 전 빙하 등의 영향을 받은 민족 대 이동으로 요동과 한반도 일대에 인간이 거주했다.

그때 어떤 인종들이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한국 뿌리를 찾아서’를 저술한 존 카터 코벨 박사의 한국 상고사와 관련된 학설이 있다.

코벨 박사는 이 책에서 백인종인 코카서스 인종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들 종족들이 역사적인 설정 아래 혼합해 한데 뭉치기 전 환국신시시대(桓國神市時代)에는 곰, 호랑이, 태양, 조상

등을 섬기는 여러 부족으로 분열해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환웅(桓雄)대에 와서 단군(배달임금)이 나와 환국을 무력 통일하고 서기전 2333년 아사달(지금의 하얼빈)에서

조선이라는 광역국가를 개국했다. 중국의 요임금과 같은 시기였다.

우리민족은 유라시아를 제패했던 기마민족으로서 실제 존재한 고조선을 통해 동아세아 최초이자 최강의 국가를 건국

했던 것이다.

 

 

 

단군은 환웅(桓雄)의 자손으로 단군조선 개조(開祖)

 

 

단군은 환웅(桓雄)의 자손으로서 우리민족의 개조(開祖)가 되는 조상이다. 이것이 단군이야기다.

조선사편수회가 조작한 단군신화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불교의 옷을 벗기면 거기에 인간이 나온다.

그를 배달임금이라 한 것은 산위에서 박달나무 있는 지역으로 내려온 때문이다. 박달나무는 시베리아, 한반도 북부 등의

찬데서 자라는 나무이다.

배달은 박달의 이두(吏讀)로, 박천을 배천으로 읽는 것과 같다.

위에서 본바와 같이 단군이 개국한 조선을 조선, 단군조선, 고조선이라고 부른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치이념도

BC3898년에 반포한다. 나중에 끼어든 기자나 위만조선과 혼동되지 않도록 단군조선, 단군의 손이 살았던 나라로서

고조선이라고 한다.

고조선이란 말이 생긴 것은 신라 이후이다. 고조선이란 이름은 중국의 지리지(地理誌)인 산해경(山海經)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러한 조선의 역사를 일본은 물론 중국도 철저히 위조하고 날조했다.

이에 일본의 역사 왜곡과 함께 중국의 역사왜곡도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중국은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 백제, 고구려 사람들을 끌고 갔을 뿐만 아니라 많은 서적들도 빼앗아 가서 우리역사를

제멋대로 조작한다.

그리고 중화사상(中華思想)을 내세워 자기네가 모든 패권(覇權)을 가져야 하는 것처럼 철저히 주변국의 역사를 개조했다. 그러나 산해경(山海經)만은 역사서가 아니라 지리지(地理誌)인데서 기적적으로 개조를 면했다.

산해경(山海經)에는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고조선이야기가 나온다. 산해경(山海經)에서 조선을 묘사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열양동해 북산 남쪽에 나라이름을 조선이라 한다. 낙랑군(요동에 있는 낙랑군) 왕검성이 조선 땅이다.

군자의 나라로 서로 사양하고 다투지 않고 훈훈하여 박하지 않다. 음식은 기장을 먹고 짐승도 키워서 먹는다.

의관을 하고 띠를 띠고 검을 찬다. 공자는 자기의 도가 중국에서 잘 행하지 않으니 떼를 타고 구이(九夷)의 나라(조선)로

갈까 보다고 했다는 내용도 산해경에 적혀 있다. 당시 조선주변에는 조선이 책봉한 제후국(諸侯國)이 많은데, 한데모여

복종할 때는 제후국이고 저마다 패권을 다툴 때는 열국(列國)이라고 부른다.

 

 

단군은 여러 분국(分國) 분봉 왕(分封 王) 수십 명을 모아 회의를 열었고 속현(屬縣) 여러 군데를 순회 방문했다.

그만큼 고조선은 세력이 있는 민족이었다.

고조선 말기에 조선족의 강한 나라로 부여(夫餘)가 한반도 북부에서 5대 단군을 유지해 나갔다.

예맥(濊貊)도 그 근처였다.

한나라도 부여는 정복 못했으며 부여는 고구려로 이어 졌다. 이 같이 단군은 조선의 왕으로 12부족의 수장으로 군림했

으며, 그 중심은 요동이었다.

고대에 우리는 중국과 항상 전쟁과 전투의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고조선은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다.

그 사례로 훙산(紅山, 홍산) 문화를 들 수 있다. 1980년대 중반에 중국은 우리 몰래 비밀로 발해만 인근에서 대규모의

유적과 유물을 발굴했다. 그 유적과 유물은 바로 고조선의 것이다.

이 훙산문화가 중국의 황하문명보다 1500~2000년 빠르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가.

이 사실이 드러나자 중국은 중원 중심 론에 타격을 받을 것을 염려한 나머지 중국은 훙산문화를 포함해 자신의 국경 내에

존재하는 문물은 모두 자국의 역사라는 논리로 동북공정(東北工程)을 했다.

중국의 역사개조다. 우리는 이 도둑맞는 역사를 되찾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학자라는 사람 중에는 연구하지 않고 일제의 왜곡된 한국사와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그대로 신봉하는

학노(學奴)가 있다.

러시아의 학자로 ‘고조선’을 쓴 U.M 푸틴은 이런 상황을 개탄하며 “동북아 고대사에서 단군 조선을 제외하면 아시아

역사는 이해 할 수가 없다.

그 만큼 단군 조선은 아시아 고대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런데 한국은 어째서 그처럼 중요한 고대사를 부인하는지 이해 할 수가 없다.

일본이나 중국은 없는 역사도 만들어 내는데 당신들 한국인은 어째서 있는 역사도 없다고 그러는지... 도대체 알 수 없는

나라다”고 말하고 있다.

참으로 부끄럽고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중국과 일본은 우리역사를 끊임없이 날조하고 왜곡해 역사가 도둑

맞는 판국에 우리네 사람들은 이를 바로 잡을 생각은 뒷전으로 한 채 방관만 하고 있다.

이래도 되는 것인지 묻고 싶어진다.

“역사를 무시하는 세대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는 로버트 하인라인의 말을 상기하게 된다.

 

 

 

 

일본은 한족(韓族,한국)이 세운나라

 

 

중국과 일본이 우리 역사를 축소하고 왜곡하며 날조까지 하고 있지만 변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을 은폐할 수 없다.

우리 한족(韓族)은 선진민족으로 활약했던 고조선의 중심인 요동을 무대로 대륙을 지배했다.

요동의 넓은 땅에 나라를 이루고 살았던 역사적 사실을 숨길 수 없는 것이다. 중국 한족이 이곳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100여년에 불과하다.

우리 선조들은 이곳에 강대한 나라를 세우고 살아 왔다. 당시 강대했다는 사실은 역사적 사실로 드러난다.

중국의 여러 강국인 한(漢)나라, 수(隨)나라, 당(唐)나라가 공격한 곳이 바로 요동이었다.

중국이 만리장성을 쌓은 주목적이 우리 한(韓)족을 막기 위한데 있었음은 모두 아는 사실이다.

중국의 요임금 다음 순임금이 우리 한족이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강대한 고조선의 강역은 지금의 북경 동쪽에서

한반도 까지 전체를 빽빽이 차지 한 것이 아니라 그물코처럼 곳곳의 산수가 좋은 몇 군데를 차지하고 살았다.

때문에 광역에 걸친 지역에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강화도 마니산도 단군의 손이 원래 거주하던 곳이다.

고조선 강역은 고조선-부여-예맥-고구려로 이어진다.

원래 우리가 살다가 한사군에게 뺏겼던 땅, 요동의 고토는 500년 후 광개토대왕 때 다시 회복됐다.

 

러시아의 학자 U.M 푸틴은 많은 중국 사서에 의한 사료 분석과 최근의 북한 등의 연구 그리고 과거 동아시아지역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을 근거로 고조선(古朝鮮)의 영역을 추정했다.

그에 의하면 과거 고조선이었던 지역은 고인돌로 대표되는 거석문화(巨石文化)의 특징을 갖고 있었다.

이 지역의 청동기(靑銅器)는 중국의 영향이 아닌 독자적인 것으로 현재의 요동지역과 청천강 이북지역에 이러한 유물

들이 나타난다.

따라서 과거 고조선의 영역은 남만주와 한국 북부(청천강 이북)를 중심지역으로 하고 있었다고 푸틴은 주장한다.

 U.M 푸틴은 1982년도에 발간한 책 <고조선>에서 남북한, 중국, 소련 역사학자들의 연구업적을 총 망라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는 “한대(漢代) 이전에 현토와 낙랑 지역에 이르렀던 조선의 영역은 한 번도 중국의 제후국(諸侯國)이 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연(燕)나라나 주(周)나라에 예속된 적이 없다”는 연구 결과를 밝혔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은 허구다

 

또한 기자조선(箕子朝鮮) 설은 주왕(周王)이 자신의 지배하에 있지 않은 영토를 마치 통치한 것처럼 꾸민 전형적인

예라고 언급돼 있다. 푸틴은 “중국의 역사가들은 연나라가 중국의 동북쪽 변방에 있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연나라의

역할을 과장해서 표현해 왔다”곧 했다.

당시 국력으로 보아 연나라가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쌓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랴오똥(遼東)이란 말은 지금의 요동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천하(중국)의 동쪽 변경을 뜻한다고 했다.

이것이 중국의 점령 이후 지명이 된 것이다.

우리민족은 원래 본바닥이던 요동에서 살았고 이후 한반도로 밀려 온 것도 사실이다.

단군의 손 한족들은 중국의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칠 때 세력이 미약해 져서 만리장성 안에서부터 밀려나기 시작해서

요동에서 쫓겨나 한반도 삼한(三韓)으로 전락한다.

우리조상들은 만리장성안의 지역을 차지하고 살다가 요동-만주- 한반도로 이주해 왔고 더러는 일본까지 갔다.

이때부터 일본으로 간 역사가 시작됐다.

 

예국(濊國), 맥국(貊國)도 모두 만리장성 앞의 부여 근처에 있다가 남하해 지금의 강원도로 쫓겨 내려왔다.

삼한은 한반도에서 삼국(三國)으로 발전한다.

한반도 남단 깊숙이까지 밀려온 한족(韓族) 가운데 제일 먼저 건국을 선언한 것은 신라였다.

신라는 중국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간섭이나 시달림을 덜 받아 삼국 중 가장 먼저 건국을 이룰 수 있었다.

구려는 고구려의 먼저 이름이다. 고구려는 중국을 맞상대 해 싸우고 요동에 늦게 까지 국가를 유지하고 있던 부여를

정벌해 합치느라 건국이 늦어진다.

백제는 언제나 고구려의 뒤를 따라 붙었다.

후에 백제가 강해지면서 요서지방에 고구려 영토를 포위하는 성을 11개쌓았다.

이를 두고 고구려와 일대 충돌이 일어나자 아래로 내려와 신라와 연합했다.

신라는 백제와 연합하고 고구려를 상대로 한 싸움에서 땅을 되찾았다. 하지만 신라는 백제한테 주지 않았다.

이에 백제는 분개해 다시 고구려와 연합했다. 이 때 신라 백성들이 왜국으로 가는 바람에 백성을 잃은 금관가야(金官伽倻)

등을 쳐서 합병한 신라는 다시 강해졌다.

 

이후 신라는 당나라를 등에 업고 중국식으로 변신하면서 임금 복색부터 바뀐다.

고구려가 신라에 패망 할 때 정복되지 않고 남은 11개성이 발해가 되어 고구려의 후신임을 자처했다.

신라 이후 왕씨(王氏)가 계승해서 고려(高麗)라고 했다.

그때부터 우리 요동의 국토는 잃었다.

고려에서 역사서를 쓸 때 이런 사실을 다 참고해서 썼을 텐데 고려를 이은 조선이 건국하면서 고려실록을 모두 없애

버렸기 때문에 고려사가 이어지지 못했다.

고려실록이 그대로 있었다면 고대사 자료가 없어서 김부식이 당나라에 까지 가서 당의 구미에 맞는 역사를 자료로 해

고대사가 신라의 편협한 삼국사기를 쓰는 일을 없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너무 우리나라 역사가 변조되고 날조·왜곡됐다는 데 분통이 터진다.

고구려 705년간 중국은 35번 정권이 바뀌고 300년간 통치한 나라도 전무한 상태다. 요·금·청은 중국역사나 당은 289년

통치한 나라다. 때문에 중국은 통일적 다민족국가(56민족)를 지향한다. 우리의 찬란한 역사와 비교가 안 된다.

여기서 우리고대사와 실제 인물인 단군을 살펴보고자 한다.

 

고서(古書)에서 보는 고조선 역사와 단군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단군에 대해 의도적으로 축소한다.

그는 중국에 요공(要功)해서 살려고 했다. 그는 단군과 부여, 고구려로 이어지는 역사 찾는 파벌을 제거해야만 신라

출신인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었기에 고토를 찾으려는 묘청(妙淸)도 그런 김부식에게 토벌됐다.

여기서 주의 할 점은 우리 역사가 두 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는 고구려 계통의 역사는 비밀에 묻혔고, 신라

계통은 천지에 널려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진짜 역사는 모두 박제되어 산속으로 들어갔다.

고구려에 관한 역사서를 찾아 볼 수 없다. 고구려가 망하고 발해가 망한 뒤 그곳에 있던 고구려 사서를 중국이 싹쓸이

해서 모든 역사서를 당으로 가져갔기 때문이다.

고구려 역사를 전하는 사서(史書)는 찾아보기 힘들다. 고구려 역사를 전하는 사서(史書)로는 북애(北崖)의 규원사화

(揆園史話)가 있다.

 

이 규원사화(揆園史話,1795)는 발해에 가 있던 고구려 사서까지 중국이 다 거두어 간 뒤 남은 것 중 예(濊)·맥국(貊國)이

가평과 춘천으로 쫓겨 오면서 보관해 전한 사서를 토대로 쓴 것이다. 우리가 고대사를 어떤 시기부터 신용 할 수 있는

가는 규원사화라 할 수 있다.

규원사화는 옛 책에 있는 그대로 인용·소개하지 않고 요점만 뽑아 우리의 근원을 제대로 찾고 있기 때문이다.

북애(北崖)는 규원사화의 서문에서 “요동평야를 바라보니 나무와 구름이 손짓하고 부르면 대답할 만큼 머뭇거리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조상의 살던 옛 강토가 남의 손에 들어 간지 천년이요 이제 그 해독이 날로 심하다. 공자에게 미쳐서 그렇게 됐다.

공자가 조선에 태어났다면 중국을 오랑캐라 하지 않았겠는가. 왜 중국책에만 빠져 스스로 업신여기고 조상의 자랑을

찾지 않는지 한자의 공과가 반반이다”고 하고 있다. 학계는 규원사화를 신뢰하고 있다.

이 규원사화 이외에도 환단고기(桓檀古記)를 구성하는 5개의 역사서 환국(桓國)을 기록한 <단군세기(檀君世紀)> 세종·

성종·예종실록에서 <삼성기(三聖紀)>, <삼성(비)밀기(三聖(秘)密記)>, <조대기(朝代記)>, <고조선비사(古朝鮮秘史)>

들은 일본인들이 태워서 없애버린 문헌이자 <환단고기(桓檀古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단군에 관한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는 단군세기(檀君世紀)가 있다.

단군세기는 단군조선 47대 단군의 세세한 업적을 전한다. 환단고기(桓檀古記)에 편입된 이 기록은 신라 때의 역사서이다.

우리가 신화나 전설로 허망하게만 취급해온 단군대의 이야기가 일본의 고대사서 4종을 맞추어 보면 중복되면서 확실

하게 드러난다.

단군조선과 일본의 상고사가 그렇게 접점을 이루는 것 중의 하나는 섬승노(陝野奴), 즉 배폐명(裵幣命)과 장수언(長髓彦)

의 내란 부분이다. 배폐명의 이야기는 환단고기에 나와 있는 기록이고 장수언의 내란은 상기(上記)에 나와 있다.

이러한 고서에서 단군에 관한 것을 엿 볼 수 있다.

예컨대, 3대 단군 가륵(嘉勒)때인 BC 2173년 “반란을 일으킨 예읍의 추장 소시모리를 참하였는데 그 후손에 섬승노

(陝野奴)라는 자가 있어 해상으로 도망해 세 섬에 의거하고 왕이라 칭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또 “35대 단군 사벌조(沙伐朝)에는 BC 723년 장수 언파불합(彦波弗哈)을 보내 규슈(九州)의 구마소(熊襲)를 평정했다.

36대 단군 매륵(買勒)조에는 BC 667년 섬승후 배폐명이 병선을 몰고 가서 왜인의 반란을 진압하고 왜의 세 섬의 왕을

칭하였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일본은 한족(韓族)이 가서 세운나라다

 

이에 상당하는 일본 상고사상기<上記>는 “조선인이 선단 70척에 1000명을 싣고 왜(규슈)로 처 들어와 장수언(長髓彦)

으로 하여금 내란을 일으키게 하고 임금으로 내세웠다가 수십 년 후 평정 됐다”고 했다.

우리가 왜와 싸운 게 아니고 규슈에서 장수언 이라는 유력한 세력가를 일으켜 왜왕으로 삼고 수십 년간 다른 대치세력과

전쟁을 벌인 것이다. 이때의 왜는 규슈에서 활동하는 집단이었으며 지금의 일본 본토로 진출한 것은 이로부터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이다.

후일 일본에서 진무일왕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 왜의 지도자가 장수언의 대치세력이었는데, 진무일왕의 아버지 대에

일어난 이 전쟁에 진무 집안 3대가 나서서 싸우다 진무의 두형이 죽고 진무 대에 가서 가까스로 수습됐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왜가 우리의 제후국(諸侯國)에 준하는 부족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진무에게는 후일 스진(崇神)왜왕 대에 있었던 업적까지 덧붙여져 신격화 되는데, 일본사의 믿을 수 없는 부분이 이런

것이다. 배폐명 혹은 섬승노 라고 불린 존재의 왜 정벌은 매우 복잡한 역사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가서 왜를 정벌하고 임금을 내세웠던 것은 사실이다.

선단규모가 70척, 500척인 것으로 미루어 국가적 정벌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왜를 치러간 기록은 부여 때도 나온다.

일본 상고사 연구자들도 이 사실을 주목 한다. 진무의 가계(家系)는 상기<上記>에 의하면 일본에 온 단군의 손의 73대가

되므로 종래는 왜 땅의 통치권을 두고 우리나라 종족끼리 전쟁을 벌인 것이다.

일본 학자들은 이를 두고 ‘대리전’이라고 한다. 단군세기<檀君世紀>에서 배폐명(裵幣命)의 사실을 접하면서 진척되지

못하던 연구가 일본의 고대사서(古代史書) 상기<上記>와 미야시다 문서<宮下文書> 신황기<神皇記>등을 통해 분명해

졌다.

단군조선은 더 이상 부정 할 수 없는 것이며, 일본은 완전히 한족(韓族)이 가서 건설한 나라라는 것이다.

 

 

 

 

 

세계를 제패한 고조선 후예들

 

 

고대사 연구자 적은 것 한탄했던 최영희(崔永禧) 선생

 

 

우리가 너무 고대사연구를 소홀히 해 고조선 상고사를 연구하는 학자가 일본, 중국에 비하면 너무 적다는 것을 염려하던

지금은 고인이 된 최영희(崔永禧) 선생이 생각난다. 선생이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임할 당시 동경에 와 필자에게

전화를 해 주었다. 필자는 마침 일본에서 요양 중에 있었다.

필자가 당시 일본에서 학위를 취득하고 지도교수인 마쓰오카 사브로(松岡三郞) 선생께 인사차 방문하니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해 주었다. 그의 말은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은 자중 3년 이내 3사람 중 한사람은

죽었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32호 박사이니 10여명이 학위를 받고 후환으로 3년 이내에 죽었다는 것이 아닌가.

필자 역시 학위 취득 후 건강이 좋지 않아 일본 동경의 중심가 유락조(有樂町)에 있는 내과병원에 가서 진찰을 한 결과

몸 안이 성한 곳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의사는 필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며 말하기를 “살아 있는 송장”이라는 충격적인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소변을 보면 두부가 되고 물을 마시면 설사를 하는 상황이라 당연한 말을 한 것 같았다.

의사는 필자에게 담배와 술을 하느냐고 묻기에 안한다고 하니“당신은 담배를 피우지 않아서 그나마 생명이 유지되고

있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귀국해도 강의조차 힘들 것 같아 1년을 더 일본서 요양하고 있을 때 최영희 선생이 온 것이다.

선생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지만 국사편찬회에는 독도자료가 하나도 없다고 했다.

마침 선생은 일본 헌정회관(憲政會館)에서 일본 역사학자와 학술회의가 있어 겸사겸사 일본에 독도자료 수집을 하러

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일한국대사관과 재일한국공보관(관장)에게 자료를 부탁했으나 한 점도 얻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필자에게 도움을 구하려고 전화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필자가 “자료를 수집해 드리지요” 하고 박사자료를 수집한 경험을 살려 많은 자료를 수집해 국사편찬회로

보내게 됐다.

 

미처 수집하지 못한 자료는 필자가 민단기획조정실에 있을 때 친분이 있어 선거 때 필자의 도움으로 11명이 더 당선된

일로 가까워진 일본 국회의원의 도움을 받았다. 필자는 그래서 독도 자료를 대형 나무상자 2개에 담아 재일거류민단과

주일대사관의 도움을 얻어 파우치로 국사편찬위원회에 보낼 수 있었다.

이 자료를 모으며 일본헌정회관의 학술회의에도 최영희 선생과 같이 참석했다. 최 선생은 ‘판소리’에 관해 발표하고

필자는 토론에 참석해 한·일양국의 학문교류를 법이 아닌 역사관계에 근거해 선생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때 선생은 “지금 한국에는 고대사 연구하는 사람이 30여명(32명) 정도인데 일본은 2만명이 넘고 관심을 가진 사람도

32만명이 넘는다”고 하며 “우리의 고대사연구가 일본과는 상대가 안될 만큼 지지부진하다”고 한탄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왜 우리는 조상의 뿌리를 찾는 역사연구에 이러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간다.

위대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지만 너무 역사연구를 소홀히 하는 것에 선생이 한탄을 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부터라도 연구를 게을리 하지 말았으면 한다. 일본은 우리가 가서 세운 나라임에도 자신들이 자생적으로 건설했다고

날조와 기만(欺瞞)하는데도 우리는 침묵만 지키고 있다.

 

 

일본 궁궐의 신주(神主)는 모두 한국인이다

 

일본은 우리 한족(韓族, 한민족)이 가서 건설한 나라라는 것을 증거하면서 한족(韓族)의 한국사 연구를 위해 일본의

고대사서(古代史書)를 많이 찾으며 연구한 최태영(崔泰永)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일본이 계획을 세워 철저하게 꾸며낸 것으로 역사서라기보다는 권력사(權力史)다” 그 증거로

일본서기는 속편을 계속 발간하기 때문에 이를 추적하다가 한국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단서(端緖) 여러 개를 선생이

찾아냈다. 그 중에 하나가 우리가 종묘에 제례(祭禮)가 있고 제례법(祭禮法)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에도 그런

것이 있을 것이라 보고 이를 추적하는 중에 일본의 ‘국사대계’를 찾아냈다. 일본 제국주의는 우리 고대사의 역사 말살을

기도해 총독부가 불사른 것만도 22만여권이 넘고 그 외에 또 수만 수천권의 고서를 불사르거나 일본으로 가져가서 역사

왜곡을 했는데, 제례법(祭禮法)에 관한 것만은 미처 왜곡을 못했던 서책 ‘엔기시기’(延喜式)을 찾아 낸 것이다.

 

이 제례법은 일본의 ‘국사대계’ 제13편에 있는 ‘엔기시기’ 기록이다. 이세신궁(伊勢神宮) 아마데라스 오가미(天照大神)

36좌(座)의 일본이 모시는 조상신 가운데 가장 윗자리에 모시는 원신(園神)과 한신(韓神)의 신위(神位)는 가장 앞자리에

위치한다.

이는 신라, 가야, 백제에서 간 우리조상들이 일본을 건설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일본궁궐제례(宮闕祭禮)를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일본 궁궐에서도 제사를 드릴 때 나타난 제례에는 신위(神位) 36위를

모시는데 ‘엔기시기’에 나타난 그대로 ‘원신’(園神=신라, 가야 조상) 1좌(座)와 ‘한신’(韓神=백제조상) 2좌(座)를 모시고

그 나머지 신위는 아래에 모신다.

여기서 낭독하는 제문(祭文)도 한국어다. 필자가 일본에서 제사 지내는 것을 TV화면에서 보면 일본말이 아닌 우리말

이었다. 정확한 발음은 잘 표현이 안 되지만 필자의 귀에는 “오노리 오노리라”(오늘이 오늘이라)하며 제문을 읽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마 그들은 이 말이 어느 나라 말인지 무슨 뜻인지 아는지 모르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일본역사의 상반은 한국역사인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에 제사를 모시는 제문도 한국어인 것이다.

 

일본 가고시마현(鹿島縣) 미야마(美山)에 있는 단군사당(檀君祠堂)인 교구산구(玉山宮)에서 제일(祭日)에 하는 것도

거의 같다. 이것 하나만 보더라도 일본의 국가신이 한국에서 간 유민(流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 가야, 백제

에서 간 조상들이 일본 궁궐의 왕이 됐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일본 학자인 와다나베 미쓰토시(渡邊光每)는 “고대 천황가 도래의 그 뿌리가 백제왕가에서 나왔다”고 실토하고 있다.

일본 왕조발생이 이처럼 일본열도에서 자생한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건너가 세운 것이 일본이다.

일본은 신라와 10여 차례 교역했고 발해와는 14번 했다. 당시 발해사신이 일본 후쿠라 항에 닿으면 제일 먼저 그곳 사당

에서 제물을 놓고 도착을 고한 뒤 조정인 미카도로 달려가는 것도 ‘엔기시기’에서 알 수 있다.

이는 발해와 일본이 연합해 신라를 쳐서 잃어버린 조국 고구려와 백제를 회복 하려는 의도였다.

 

이 계획은 성과를 못내게 되지만 발해(渤海)와 신라 간의 정치적 협상을 하는데도 도착을 고(告)할 만큼 같은 조상의

신을 신성시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발해나 일본의 조상이 하나임을 말해주는 증거인 것이다.

일본은 지금도 역사와 유물을 날조하며 왜곡시키고 일제 당시에는 우리역사를 황폐화 시켰으나 제사를 드리는

‘엔기시기’까지는 손을 못 댄 것이었다.

다행히 우리의 위대한 역사가 일본과 중국에 의해서 얼마나 왜곡·날조 됐는가를 알 수 있게 그 증거를 제시해 주는 좋은

자료가 돼 주는 것이다. ‘엔기시기’ 말고도 지금 일본 궁내성에는 한국에 없는 귀중한 조선 고대사에 관한 도서와 자료

들이 많이 있다.

이것들은 다 한국에서 빼앗아간 우리의 서책들이다.

이 서책들은 우리 역사가 얼마나 찬란했던가를 말해 줄 서책이지만 일본은 이 서책들을 공개하지 않는다. 일본 왕릉을

발굴 않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서책들을 돌려받아야 한다. 이 서책과 유물이며 자료들은 모두 우리

것을 약탈해 간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역사의 열등감에서 우리의 역사를 폄하하고 왜곡·날조하지만 일본은 우리가

세운 나라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이다.

 

우리역사 날조는 어떻게 했나

 

일본이 역사 왜곡을 하기 전 역사서를 보면 분명히 고조선이 환국(桓國)에서부터 언급되고 있다. 예컨대, 일본인만으로

구성된 ‘도쿄대학’과 ‘경성 조선연구회’에서 발행한 ‘교정 삼국유사’를 보자.

여기에는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 고조선의 기록 중 “옛날에 환국이 있었다”의 환국(桓國)두 글자가 1902년과

1916년에 일본 학자들도 온전하게 진본대로 표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삼국유사의 변조자인 이마니시 류(今西龍)도 조선연구회가 일본인으로 구성 된데서 낌새를 못 챘던 것 같다.

일본 제국주의시대는 환국(桓國)으로 표기된 삼국유사(三國遺事) 본(本)을 소장하고 있는 것이 너무도 위험했기 때문에

이 삼국유사 임신본(壬申本)을 소장하고 있던 황의돈 선생도 생전에 삼국유사 임신본(壬申本)이 있음을 발표하지

않았다.

이 책은 지금도 서울대 판본으로 규장각(奎章閣) 깊숙이 소장돼 있다.

일본은 환국을 중요시 해 환국(桓國)을 환인(桓因)으로 변조된 사실을 밝혔던 최남선(崔南善) 선생도 이 책은 언급을

하지 않았다. 간악한 일본의 후환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일본이 역사 왜곡을 철저히 했나를 말해주는 대목

이다. 최남선 선생은 환국이 있었다고 했다.

 

우리나라 역사를 ‘조선사편수회’가 왜곡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역사를 매장하는 학살행위다.

우리나라 역사가 1만년이 되는 것은 외국에서도 알 수 있다. 필자가 다니는 주님의 교회(박원호 목사)에 이병식(李炳識)

장로(長老)가 있다. 이 장로가 세계여행을 한 이야기를 필자와 나눴다.

그가 아프리카를 돌아 마지막으로 터키에 도착하니 오랫동안 한국음식을 못 먹은 터라 한국음식이 생각났으나 한국

식당이 안보여 할 수 없이 터키식당에 들어가서 음식을 먹게 됐다.

그런데 음식을 보니 우리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한국음식과 똑같아서 놀랐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터키사람들은 우리 한국 사람을 보면 형제라고 하며 친근감을 보이는데 왜인가.

터키가 우리를 형제라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역사에 근거해서다.

그들은 먼 옛날 우리조상들이 조선족, 거란족, 여진족, 말갈족, 훈족, 선비족, 돌궐족(突闕族) 등 12부족이 추수한 후

같이 음식을 먹으며 노래와 춤을 추며 즐겼던 역사적 사실에서 형제라고 하는 것이다.

 

터키사람들에게 당신 나라의 역사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으면 1만년이라고 한다.

12부족을 지배한 우리 역사도 1만년이 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오래전 집단 가출한 한 무리 중에 돌궐(突闕)은 튀르크, 즉 터키가 됐다.

오스만 제국을 건설한 돌궐족 터키는 1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데 우리는 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곡과 조작으로 엄청난

역사를 도둑맞은 절반이하 그대로인 상태에 있다. 우리는 유라시아를 지배했던 기마민족으로서 실제 존재한 고조선을

통해 동아시아 최초이자 최강의 국가를 건설했다. 그럼에도 그 역사가 우리들의 잘못으로 침탈을 당하고 있다.

이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 로마를 멸망시키는데 일익을 한 흉노(匈奴)라 부르던 훈족(훈 가리)은 지금의 헝가리가

되었다.

‘훈가’는 몽골어로 ‘나라’는 뜻이다. 이들은 우리와 같은 제천행사(祭天行事)를 했다. 부여 영고(迎鼓)는 추수가 끝난

12월에 했다. 예(濊)에서는 매년 10월에 무천(舞天)을, 고구려는 역시 10월에 동맹(東盟)을 각각 지냈다. 하늘에 감사

하는 제천행사였다.

 

또 백제는 교천(郊天), 삼한(三韓)은 불구내(佛矩內) 등으로 천신(天神)께 감사제를 드렸다. 이때 같이 이 행사를 치르던

우리네 형제가 세계로 뻗어 나갔다. 이들은 우리와 떡과 술을 나누며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즐기던 형제같은 사이였다.

상고시대 조선(朝鮮)에서 갈라져 조선(朝鮮), 선비(鮮卑), 흉노(匈奴), 몽골, 돌궐(突闕), 거란(契丹)등이 됐다.

이들이 극동에서 유럽까지 세계를 다스렸다.

원래 유목민족에게는 경계선이 없다. 초원을 향해 좋은 곳에 깃발을 꼽는 곳이 그들의 영토이다.

세계역사에서 보듯 몽골은 세계를 정복했고 여진(女眞)은 금(金)을 세우고 중국의 청(淸)나라가 됐다.

조선은 대한민국(大韓民國)이 됐다.

우리가 바로 천하를 호령하던 중국도 두려워하던 오랑캐가 아닌 위대한 배달민족인 것이다.

 

 

 

 

우리 강토는 3만~5만리 

 

 

일제는 우리를 단일민족이라고 왜곡해서 가르쳤으나 우리는 단일민족이 아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중화주의(中華主義)와 식민사관(植民史觀)에 익숙해져서 우리들 자신을 잊어버렸다.

단군을 신화화(神話化)하고 붉은 악마의 상징인 고조선의 전신(戰神) 치우천왕(蚩尤天王)은 도깨비로 둔갑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치우천왕은 도깨비가 아닌 실제 존재했던 우리의 조상이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치우천왕을 자기들 조상으로까지 모셨다. 또 가야국(伽倻國)은 만주에서 김수로왕(金首露王)이

건국했다.

건국지가 김해(金海)가 아니다.

가야는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 5만의 군사로 침략했을 때 남하했다.

아울러 발해(渤海)가 망한 것은 백두산 화산 폭발로 인해 6년간 재난으로 먹을 것이 없어진데 따른 영향이었다.

당시 발해 유민이 남하하자 거란족(遼)이 그 땅을 차지했던 것이었다. 발해 군사 한사람이 거란군의 군사 셋을 상대 할

만큼 강한 발해군대였지만 백두산의 화산폭발은 흉년을 가져왔고 발해는 끝내 멸망하기에 이른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중국은 자신들이 불리한 것은 역사에 절대로 올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소정방(蘇定方)은 백제를 멸망시키는데 앞장선 당의 장수였으나 백제가 멸망한 후 당 세력을 몰아내는 김유신

장군에게 패했다.

소정방은 당시 패전후 신라가 다리를 놓으며 그 밑에 같이 처박아 넣었기 때문에 중국역사에 나오지 않는다.

안시성의 영웅 양만춘(楊萬春) 장군도 중국역사에는 나오지 않는다. 왜인가.

자기들이 수치스러운 것은 모두 숨기기 위해서다. 양심 있는 중국학자 중엔 이런 내용을 똑바로 지적하는 용기 있는

사람이 있다. 위안텅페이(袁騰飛=징화학교(京華學校)의 역사담당 교사는 “중국의 진짜 역사는 5%도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위안텅페이는 이 같은 언급을 한 이유로 지금도 감옥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

우리는 천년 왕조가 있지만 중국의 경우 300년 왕조는 송(宋) 이외에는 없다. 따라서 중국이 감히 우리 역사를 날조

한다는 것은 난센스(nonsense)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해동삼국(海東三國)이라 했고 당태종(唐太宗)은 죽으면서 유언으로 “고구려를 치지 말라”고 까지

했다.

 

고구려 시조 주몽(추모)은 고구려를 천제지자(天帝之者)라고 했다. ‘영락’(永樂)이라는 독자 연호를 썼다.

28대 705년간 (BC37~AD668) 존속한 대 고구려다. 중국은 이 기간 동안 35개의 나라가 바뀌었다.

그런데도 고구려가 감히 지방정권이라니. 참으로 무엄하기 짝이 없다는 표현을 써야겠다.

이런 것을 두고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고 하는 것이다. 송(宋)나라는 고려를 천자(天子)의 나라라고 했다.

유라시아를 제패했던 우리는 기마민족으로서 실재하고 존재한 고조선을 통해 동아시아 최초이자 최강의 국가를 건설

했던 것이다.

고대에 우리는 중국과 항상 전투관계에 있었지만 고조선은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던 것이다.

이를 뒷받침 해 주는 사례로 훙산문화(紅山文化)를 들 수 있다.

1980년대 중반에 중국이 우리 몰래 비밀로 발해만 인근에서 발굴한 대규모 유적과 유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유적과 유물들은 바로 고조선의 것이다.

 

이 훙산문화(紅山文化)가 중국의 황하문명보다 1500~2000년이 빠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같은 사실이 드러나자 중국은 중원(中原) 중심론에 타격을 받을 것을 우려한 나머지 한술 더 떠서 훙산문화(紅山文化)

를 포함해서 지금 자신의 국경 내에 존재하는 문물은 모두 자국의 역사라는 논리로 동북공정을 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역사를 훔치는 행위는 야만적인 해적행위다. 1905년 청·일간의 간도조약 후 중국과 일본은 우리역사의

말살을 기도 하고 있다. 중국은 특히 동북공정으로 우리 고구려와 발해 역사까지 송두리째 빼앗아 가려고 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 역사가 중국, 일본에 의해 엄청나게 도둑맞았고 지금도 도둑맞고 있는데, 지금 우리나라의 역사학자들 중

에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가 왜곡·날조한 그대로 우리 고대사의 전반부를 절반 이하로 잘라버렸다.

단군조상과 우리민족이 요동의 강역에 살았음을 부정하고 남이 만들어준 역사를, 그것도 일본의 황통사(皇統史) 식민

사관 그대로 고집하는 자가 아직도 주도하고 있다는데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이는 우리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단군조상과 우리민족이 발상지인 요동의 강역에 살았음을 부정하는 것은 용납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중국도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망발을 하고 있다.

우리역사를 송두리 채 뭉개는 만행인데도 우리 정부와 학계는 눈치만 보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다.

나아가 지난날 사대주의자들이 중국에 요공(要功)하느라고 없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을 갖다 넣어 역사를 왜곡하더니

이제는 일본이 왜곡한 역사를 호도하는 학노(學奴)들이 우리 역사를 좌지우지 하고 있다. 더 이상 묵과 할 수 없는

일이다. 정부는 역사를 바로 세우는데 앞장서서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 그리고 영토를 되찾아야 한다.

 

고구려 발해를 지방정권이라 하는 중국의 가소로운 동북공정은 세계를 기만하는 작태이기도 하다. 차마 눈을 뜨고는

볼 수 없는 참담한 흉계다. 정상적인 이성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우리는 이런 중국의 역사왜곡과 날조로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것과 같은 주장을 절대 받아들일 수 가 없으며 용납도

되지 않는다.

독자 연호인 영락(永樂)을 쓰고 수양제(隋煬帝)의 113만 대군을 물리친 나라가 지방정권인가. 아니면 당나라 당태종

(唐太宗)이 이끄는 30만의 정예군대를 물리친 고구려가 어디 지방정권이란 말인가. 빈대도 낮 짝이 있지, 수치를 모르는

중국이 힘으로 역사를 밀고 가려는 만용은 더 이상 정상적인 이성으로는 볼 수가 없다.

이 같은 만용의 우는 범하지 않는 것이 중국을 위해서도 이로운 것이다. 705년이나 존속한 고구려를 어디 감히 날조를

하려는가. 이 기간 동안 중국은 35개의 나라가 명멸 했는데, 적반하장도 분수가 있다. 어디다 조작하려 한다는 말인가.

참으로 개구무언의 지경이다. 외국학자들도 중국의 왜곡을 우려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학자들은 왜 이렇게 조용

한가.

 

우리역사를 도둑맞고 있는데, 침묵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우리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 강력한 항의와 이에

걸 맞는 연구 노력을 더 경주해야 한다.

하지만 양적으로나 국가 정책적으로나 동북공정에 대응할 기관의 예산이나 연구원의 인선 등 그 대비가 중국에 못

미치고 있다. 필자는 우리 고대사 역사를 연구한지 10년 정도 밖에 안 돼 아직은 초급 수준이라고 본다. 하지만 관심을

갖고 보면 중국의 동북공정은 유치하기 짝이 없다.

중국의 나라수명을 순서 가리지 않고 살펴보면 왜 유치한지 이유를 안다. 진(秦) 15년, 수(隨) 37년, 당(唐) 289년.

송(宋) 319년, 한(漢) 230년, 요(遼) 218년, 명(明) 280년, 청(淸) 295년, 금(金) 119년, 원(元) 97년, 초(楚) 43년,

위(魏) 46년, 오(吳) 53년 등이다. 이런 나라가 1만년이나 되는 역사를 갖고 있는 나라를 지방정권이라고 하니 적반

하장도 분수가 있는 법이다. 중국과 일본이 아무리 우리 역사를 왜곡·날조해도 진실은 밝혀지게 마련이다.

 

우리의 환국(桓國)은 1565년 간 지속됐다.

 

단군조선은 2096년간 47대에 걸쳐 통치했다. 부여(夫餘)는 496년(BC2~AD494년)까지 실제 존재했던 국가다.

고구려(高句麗) 705년, 신라(新羅) 929년, 백제(百濟) 681년, 고려(高麗) 475년, 조선(朝鮮) 528년, 발해(渤海) 228년,

대가야(大伽倻) 490년 등의 긴 역사가 있다. 일본 오가야마(岡山)에도 가야(伽倻)가 있다.

이처럼 우리 역사의 위대함은 중국과 비교가 안 되는 만큼 우리가 오랜 역사와 국가를 지속하며 통치를 해온 사실은

숨길 수 없다. 중국이 우리 역사를 손댄다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영토는 너무 광활해 그 땅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넓고 컸으며 위대했다.

그러기에 고구려는 국시(國是)를 다물(多勿)이라고 했다.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을 말 한다.

환국시대(桓國時代), 단군시대에서 우리 조선(祖先)들이 일구었고, 아세아 유아아라시아의 광활 한 땅을 다시 찾자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부터 이 땅을 찾기 전에 먼저 조선시대까지 우리 영역인 간도부터 찾아 나가야 한다.

 

지난 2009년 11월 17일 KBS뉴스는 카마르탄트 벽화가 고구려 벽화라고 보도했다.

우리 선조의 고대국가들은 유라시아 중앙아세아에 실제로 지배한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 먹 거리도 그 역사를 가늠하게 한다. 미국 학자는 우리나라 된장을 보고 1만년의 민족사(民族史)를 가진 민족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같이 세계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서 인류의 문명은 중원(中原)에서 시작되고

있다. 이 같은 사실들이 분명함에도 중국, 일본은 물론 우리나라 학자라는 자들 까지 중국과 일본의 논리에 부화뇌동

하고 있으니 통탄을 금치 못하겠다. 바로 시정돼야 하고 정부도 이런 노예근성의 학노들을 추려내야 한다.

이를 통해 잃어버린 우리역사의 올바른 역사정립을 위해 새로운 영단을 내리고 도둑맞은 우리역사를 바로 잡고 가야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이 저지른 역사왜곡을 그대로 두는 것은 우리 조상에 대한 모독이요 학살이다.

 

 

우리강토는 3천리가 아니라 3만~5만리였다

 

우리역사는 삼성기(三聖記)에 실려 있는 사실 그대로다. 상고시대(上古時代) 우리나라의 강역(疆域)은 바이칼(Baikal)

호수를 중심으로 시베리아 대륙과 만주, 중국, 한반도, 일본 열도에 이르는 엄청난 경계를 갖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3천리 강산이 아니라 동서가 3만리요 남북이 5만리가 되는 상상 할 수 없는 광활한 강역의 국가였다는

것이다.

이는 아세아와 유럽을 아우르는 것으로 이 광역한 땅에 사는 인구는 1억8000만인 때도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렇듯 강성한 나라의 후예인 고구려, 발해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것은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인류의 문명은 중원(中原)에서, 정확히 말해서 요하(遼河)에서 시작하고 있다. 황하문명보다 1500~2000년 앞선다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지 않은가. 옛날 이곳은 중국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고조선, 고구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의 역사를 심층적으로 연구한 러시아의 학자 푸틴도 “고조선은 고대에 어느 나라에도 지배를 받은 적이 없는 나라

였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지배를 받던 중국, 일본이 열등감에서 우리역사를 거꾸로 꾸미고 있다.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이렇게 중국과 일본이 노골적으로 천인공노 할 역사를 왜곡 조작하는 데도 우리나라 강단파 학자들은 왜곡된

역사만을 고집하고 중국,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

이래서는 안 된다. 나라가 바로가기 위해서는 우리역사의 정체성을 되찾고 가야 한다.

도둑맞은 우리 역사를 그대로 간다면 조상에게 대죄를 짓는 일이다. 자랑스러운 조상의 자손으로서 역사를 제자리로

찾아 넣어야 한다. 로마의 철학자이나 정치가로 알려진 키케로(Cicero)는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일어났던 일들을

모르는 것은 영원히 어린이로 남는 것이다”고 했다. 귀가 있는 사학자라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찬란하고 위대한 역사를 찾고 더욱 빛내도록 해야 한다.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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