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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역사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 Ⅶ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5.08.03|조회수203 목록 댓글 0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 Ⅶ

                                                    

 

61 .진언종의 개조 `고호대사 구카이`

 

신라 신족의 후예로 빈민층 교욱·구휼 헌신

 

 12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 교토의 명찰 ‘도지’의 금당.

 

일본에서 가장 높다는 목조 오중탑(55m)이 위치한 교토의 도지(東寺)는 1200년 역사의 사찰이다.

고호대사(弘法大師)에 의해 일본 진언종(眞言宗) 총본산이 된 이 명찰은 796년 제50대 간무천황(桓武天皇·

781∼806 재위)이 헤이안경(平安京)의 정문(羅城門) 동서 양쪽에다 각기 왕립사찰인 교왕호국사(敎王護國寺)

로서개창했다.

서쪽의 사이지(西寺)는 1233년 화재로 사라져 현재는 공원터로만 남아 있다.

 

 

백제인 어머니에게 극진한 효성을 다한 효자’(‘續日本紀’)로도 이름난 간무천황은 부처님의 가호로 왕도를

지키고자 했다.

도지의 정문인 남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는 중후한 2층 지붕 양식의 금당(국보, 1603년 재건, 천장 높이 12m)

이 웅장하게 자리하며, 법당에는 서민의 병고를 다스린다는 약사여래상(중문)을 중심으로 좌우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협시불로 모셨다.

 

일본 고대 불교를 논할 때면 응당 ‘고호대사’라는 시호를 받은 도지 가람의 고승 구카이(空海·774∼835)를

먼저 꼽게 된다.

도지 연혁에는 “왕으로부터 ‘대사’(大師)라는 시호를 받은 고승들은 많으나 ‘어대사’(御大師)로 불린 것은

고호대사뿐이다”고 설명돼 있다.

 

이를 증명하듯 일본 각지의 명찰에는 고호대사 구카이의 수행(修行) 동상들이 세워져 있다.

도지 경내(남대문 왼쪽 어귀)에는 말할 것도 없고 오사카의 시텐노지(四天王寺),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에이후쿠지(叡福寺), 후지이데라(葛井寺), 스다하치만신사(隅田八幡神社) 등 경내마다 큰 삿갓을 눌러쓰고

석장 지팡이를 짚은 ‘맨발’의 구카이 동상은 일본 서민들에게 숭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경내에 마련된 고호대사 좌상.              도지 경내에 있는 목조 오중탑.

 

 

“ 길에 나서면 어대사님을 만나 동행한다 ” 는 ‘동행2인’(同行二人), 즉 구카이 신앙은 많은 이에게 용기와

분발의 슬로건이었다.

빈곤한 사람들에게 온정을 베풀며 구휼에 힘쓴 구카이는 귀족이 아닌 빈민의 자제도 제한없이 공부할 수 있는

일본 최초의 사립학교인 슈게이슈치인(綜藝種智院)을 도지 한 귀퉁이 귀족(藤原三守)의 저택에 세우고

‘학교 무료 급식’ 제도를 실천한 독자적인 건학사업으로 사회에 공헌했다.

 

도지는 구카이가 62세를 일기로 입적한 날인 835년 3월21일을 기념해 매월 21일마다 금당 앞마당에서 고물상

행상들의 장터인 ‘고호’(弘法)를 연다.

특히 연말인 12월 21일의 마지막 장터 ‘시마이고호’와 연초 1월21일의 ‘하쓰고호’는 전국 각지에서 자그마치

1200명 이상을 헤아리는 노점상이 몰리고 20만명의 인파가 북적대는 서민 장터가 열린다.

 

국보만 치더라도 총 26점을 갖춘 문화재 보고인 도지.

그 경내 서북쪽 전당인 미에도(御影堂)는 구카이가 몸소 기거했던 곳으로, 구카이의 일본 국보 목조상(83.3㎝,

1233년 제작)을 보고자 하는 참배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구카이는 신라 신족(神族) 후예(‘日本高僧傳要文抄’ 13시기)라고 알려져 있다.

“ 어머니의 친정 아도(阿刀)씨는 불교와 유교에 상당히 학문이 높은 귀화(歸化)학자의 가문이었다 ”

(中島尙志 ‘空海’ 1980)고 기록돼 있다.

 

구카이는 사누기 지방(지금의 가가와현)의 고을 원(‘直’)이었던 신라계 아버지 사에키노 다키미(佐伯田公)와

어머니 아도노 다마요리히메(阿刀玉依姬)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호대사가 입적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매달 21일 금당 앞마당에서 장터가 열려

그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구카이의 어릴 적 이름은 마오(眞魚)였으며 그의 수제자였던 신사이(眞濟)는 어린 날의 스승을 가리켜

“ 스님께서는 태어났을 때 총명했다. 남을 잘 보살폈다.

  5, 6세가 지나면서 이웃에서는 신동이라고 불렀다 ” (‘空海僧都傳’ 9세기)고 전했다.

 

구카이의 불교 입문 과정에도 예외 없이 다른 고승들의 탄생설화 배경이랄 수 있는 성인(聖人)의 꿈 현몽이

전해진다.

구카이는 몸소 쓴 ‘유계이십오개조’(遺誡二十五個條)에서

“ 나는 대여섯살 어린 시절에 항상 꿈을 꾸면 여덟잎 연꽃(八葉蓮花) 속에 앉아서 여러 부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 고 말했다.

또 구카이가 12살 때 어머니로부터 들었다고 하는 신비한 고백도 언급돼 있는데

“ 내가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는 꿈에 천축(인도)으로부터 오신 성승(聖僧)이 어머니의 품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보고 난 뒤에 임신해 내가 태어났다 ” 고 말한다.

 

구카이의 외삼촌인 아도노 오다리(阿刀大足)는 당시 왕실에서 간무천황의 제3왕자 이요친왕(伊豫親王· ?∼

807)의 스승인 시강(侍講) 벼슬을 하던 지체 높은 유학자였다.

소년 마오는 14살 때부터 왕도에 가서 외삼촌 밑에 살면서 공부했고, 18세가 되자 벼슬이 5위 이상인 귀족

자제만이 입학할 수 있는 국가 고등교육기관인 대학(大學)의 명경도(明經道, 經書科)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그는 유학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 배움의 과정에 대해 저명한 구카이 연구가인 나카지마 쇼시(中島尙志)씨는 다음처럼 지적했다.

“ 구카이는 국수(國守)의 자제이며 또한 이요친왕(간무천황의 제3왕자, 필자주)의 시강인 외삼촌 아도노

  오다리의 추천도 있어서 특별히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고 본다.

 

 일본 국보급 고문헌 ‘풍신첩’에 기록된 구카이 친필 족자.

구카이는 신라계 고승 최증에게 이 편지를 보냈다.

 

 

  대학에서 그는 ‘모시’(毛詩)와 ‘좌전’(左傳), ‘상서’(尙書), ‘좌씨춘추’(左氏春秋) 등 한서(漢書)를 배웠다.

  구카이는 불교의 길을 택하기 전에 유교를 배웠고 도교를 배웠다.

  그는 문학도 했으며 글씨(書)도 썼고 더구나 세상 공기도 잔뜩 마시고 있었다. ”

 

간무천황의 제2왕자였던 제52대 사가천황(嵯峨·809∼823 재위)은 당나라 유학승으로서 811년부터 친교를

맺어온 고승 구카이를 흠모하여 823년 그에게 교왕호국사(도지)를 직접 관장토록 했다.

 

일본에서 붓글씨에 뛰어난 명필로 꼽히는 이른바 삼필(三筆)로는 헤이안시대(794∼1192)의 사가천황과 구카이,

그리고 다치바나노 하야나리(橘逸勢) 셋을 꼽는다.

이로 미뤄 볼 때 구카이와 12살 손아래 사가천황의 교유 관계는 빼어난 붓글씨 솜씨와도 관련 있는 듯 보인다.

 

구카이가 당나라로 유학의 길을 떠난 것은 804년 5월12일, 당시 나이 만 30세를 헤아리던 때였다.

“ 구카이는 젊은 날 대학을 중퇴한 뒤 산림 속에서 수행하면서 밀교 경전의 수집에 힘썼다. ”

(宮崎忍勝 ‘新弘法大師傳’ 1967)

 

그 시절에 구카이는 삼론종(三論宗)의 뛰어난 고승인 곤조(勤操·758∼827)를 따랐다.

곤조는 신라인 계열의 고승으로서,

“ 그는 하타(秦, 진)씨로서 구카이의 스승이며 도다이지(東大寺) 별당(別當), 왕실의 대승도(大僧都) 등을 역임

  했고, 입적한 뒤에는 승정(僧正)에 추서되었다 ” (三省版 ‘人名辭典’ 1978)고 설명돼 있다.

그는 당나라로 건너가기 전까지 ‘대일경’(大日經)에 능통했던 스승 곤조로부터 진언 밀교에 대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이것이 구카이가 당나라로 유학하게 된 배경이었다.

 

구카이는 이요친왕의 시강인 외삼촌의 천거와 스승 근조 등 도다이지 고승들의 지원에 힘입어 당시 일반인은

꿈도 꾸기 힘들었던 관비 유학길에 올랐다.

구카이는 설레는 마음으로 나니와쓰(難波津, 오사카 나루터)에서 왕실의 사신 파견 제16차 견당선에 몸을

실었다.

앞으로 정해진 유학 기간은 장장 20년.

그가 탄 배에는 당나라 파견 대사인 후지와라노 가도노마로(藤原葛野麻呂·755∼818) 등 외교 사절과 유학생

들이 함께 탔다.

이 배는 자그마치 보름날 이상을 파도에 떠밀리다가 7월6일에서야 비로소 규슈의 쓰키시에서 당나라 쪽을

향해 닻을 올렸다.

견당사 등 구카이 일행이 왕도 장안에 당도한 것은 약 6개월의 긴 여정 끝인 그 해 연말인 12월21일이었다.

 

구카이는 유학승들이 거쳐야 하는 서명사(西明寺)에서 오래도록 머문 뒤 이듬해인 805년 6월에서야 스승인

청룡사 혜과(惠果) 스님을 만나 밀교 대법을 전수받기 시작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구카이는 당나라 귀국 보고서인 ‘어청래목록’(御請來目錄)을 통해

“ 성안을 두루 살피면서 명덕(明德)을 찾다가 청룡사 동탑원의 화상(和尙)인 법명 혜과아도리를 찾아뵙고 스승

  으로 모시게 되었다 ” 고 회상한다.

 

구카이는 그로부터 불과 2년이 채 안된 806년 8월, 독단적으로 귀국했다(岩波版 ‘일본사연표’).

20년이라는 유학기간을 어긴 유학생은 어김없이 처벌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구카이는 왕실 제출용으로 ‘어청래목록’을 써서 당나라에서 가져온 서적과 만다라 그림 등 6종과 가지

(加持) 기도용 법구 9종을 조정에 제출함으로써 화를 면했다.

 

다음 회에는 구카이가 43세였던 817년,

험준한 고야산(高野山, 와카야마현)에 밀교 수행의 도장인 공고부지(金剛峯寺)에 대해 살펴보겠다.

 

 

 

62. 신라계 고승 쿠카이가 창설한 사찰 '공고부지'

 

 일본 불교 진언종의 본찰인 고야산의 공고부지 입구와 본당인 부동당.

공고부지에는 국보 부동당과 ‘동자입상’ 등 150점에 달하는 중요문화재가 있다.

 

 

약 2년간의 짧은 당나라 유학(불교 수업)을 마치고 귀국한 일본 불교 진언종의 개조(開祖)인 고호대사(弘法大師)

구카이(空海·774∼835).

그가 큰 뜻을 품고 43세 때인 817년 개창한 최초의 사찰은 험준한 고야산(高野山, 와카야마현 이도군 고야초)

깊은 산속의 공고부지(金剛峯寺)였다.

신라계 고승 구카이(연재 61회 참조)가 밀교 수행의 도량으로 세운 공고부지는 오늘날까지 일본 진언종의 성지

이자 고승과 수도승들의 요람이다.

 

 

이 가람은 오사카 시내 ‘난카이(南海) 전철’의 ‘고야선’(高野線)으로 약 2시간 남짓 남행하여 깊은 협곡을

누비며 산속 종점에서 내려 다시 등산 케이블카 편으로 오르게 된다.

 

공고부지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다.

또한 본당인 국보 ‘부동당’과 ‘동자입상’, 수묵화인 ‘난파진해람’(벽문짝, 맹장지 그림) 등 30점을 헤아리는

국보와 100점에 이르는 중요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등 일본 고대 불교문화의 요람임을 내세우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이 공고부지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사실은 ‘경장’(經藏, 중요문화재)이라는 서고이다.

경장은 임진왜란(1592∼1597)이 실증되는 역사적인 터전으로 지금까지 411년이나 존재해 오고 있다.

깊은 산속 공고부지 울창한 숲 가운데 위치한 이 서고에는 당시 조선 침략의 선봉 왜장이었던 이시다 미쓰나리

(石田三成·1560∼1600)가 행주산성 전투(1597)에서 참패한 이후 퇴각하면서 약탈한 ‘고려대장경’ 경판들이

숨겨 있다.

 

 공고부지 경내에 세워져 있는 탁발하는 고호대사 구카이 동상.

구카이는 고대 일본의 신라계 고승으로 817년 공고부지를 세웠다. (왼쪽)

임진왜란 때 한반도로부터 약탈한 ‘고려판일체경’ 6285첩을 보관하고 있는

공고부지의 전각 ‘경장’이 자물통으로 굳게 닫혀 있다.

 

 

도쿄대학 건축사학 교수 오타 히로타로(太田博太郞)는 1963년 안내 책자인 ‘국보·중요문화재 안내’에서

“ 공고부지 경내 동쪽 숲속 끝 오원(奧院)의 고호대사 묘(廟, 사당) 동남쪽에 서 있는 ‘경장’은 1599년 이시다

  미쓰나리가 세웠으며,

  이 안에 들어 있는 ‘고려판일체경’(高麗版一切經) 6285첩(帖)도 이시다가 봉납했다.

  경판 모두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고 지적했다.

 

임진왜란 당시 왜의 군사 지배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7∼1598)의 5대 가신으로 큰 신임을 받던

이시다가 그 많은 ‘고려대장경’ 경판을 우리나라 어느 지역에서 강탈해 일본으로 옮겨갔는지는 아직 알려진

게 없다.

하지만 이시다가 험준한 고야산을 골라 전각을 세운 것은 이 귀중한 한국 국보급 경판들을 남몰래 지키기 위한

처사였던 것만은 쉽게 알 수 있다.

필자가 알기로는 이러한 사실이 한국에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9세기 초, 고야산에 공고부지를 개창한 구카이는 당시 제50대 간무천황(桓武天皇·781∼806 재위)의 윤허를

받고 왕도 헤이안경에서 당나라로 떠났다. 그의 나이 만 30세인 804년 5월12일이었다.

그러나 구카이는 왕명에 의한 당나라 유학 기간 20년을 어기고 불과 10분의 1에 해당하는 2년 만에 독단으로

귀국했다.

이는 당시로선 왕명 거역으로 큰 죄에 해당했다.

이 때문에 구카이는 헤이안경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쪽 큰섬인 규슈 지방의 다이자후(大宰府·정부 지방청사)

등에 머물고 있었다.

 

 구카이를 본존으로 모신 본당 부동당의 제단 모습.

 

 

다만 구카이는 당나라 귀국 보고서인 ‘어청래목록’(御請來目錄)을 헤이안경 조정에 제출했다.

이 무렵 구카이를 당나라로 보냈던 간무천황은 승하하고 그의 제1왕자인 헤이제이(平城·806∼809 재위)천황이

통치하고 있었다.

헤이제이천황은 즉시 구카이를 처벌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 관해 교토예술대학장이었던 저명한 문화사가 우메하라 다케시(梅原猛) 교수는

“ 공해 최초의 저작인 ‘어청래목록’은 그의 운명을 걸었던 일종의 변명서였다 ”

  (‘空海の思想について’ 1980)고 비판했다.

그는

“ 구카이 스스로가 ‘어청래목록’에서 밝혔듯이 ‘궐기(闕期)의 죄’는 벗어나기 힘들었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가 재당 2년간 배워온 불법(佛法)이 얼마나 귀중한 것이며, 그러한 불법을 어떻게

  하여 빠르게 수용하였는지 명확하게 입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구카이가 당나라에서 배워 온 것은 승려 불공(佛空)의 불교였다.

  불공은 당의 현종∼숙종∼대종 세 황제에게서 총애를 받으며 불공삼장화상(佛空三藏和尙) 칭호를 받은 고승

  이다.

  ‘어청래목록’이라는 이 당당한 변명서는 그 당시의 권력자(헤이제이 천황)에게 구카이를 다시 바라보게끔

  했던 것임이 틀림없다.

  이 보고서를 제출하고 나서 약 3년간 구카이는 다이자후에 머물고 있었다 ” 고 설명했다.

 

또 우메하라 교수는

“ 일본은 이상한 나라로서 야요이시대(기원전 3∼기원후 3세기)부터 언제나 새로운 지식과 문물은 바다 건너

  쪽에서 왔다 ” 고 덧붙였다.

 

구카이가에 입경하도록 국왕의 윤허가 내려진 때는 809년 7월16일이었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구카이는 입경하자마자 다카오산지(高雄山寺)에 들어갔다.

그는 이곳에서 왕조의 번영을 위해서 수행하겠다며 조정에 상표문을 써서 바쳤다(‘性靈集’).

백제계 간무천황의 제2왕자 사가(嵯峨·809∼823 재위)천황이 통치하고 있을 때였다.

 

구카이가 입경해 다카오산지에 들어가게 도와 준 이는 고승 사이초(最澄·최징·762∼822)였다.

사이초는 고대 일본 오쓰 지방의 신라인 후손으로 일본 천태종의 개조(開祖)다.

교토 동쪽 ‘비와코 호수’를 끼고 있는 히에이산(848m)의 엔랴쿠지(延曆寺)의 창설자였던 사이초는 구카이보다

12살 손위였다.

805년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일종의 후학인 구카이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것으로 알려진다.

 

사이초는 806년 히에이산 엔랴쿠지 터전에서 일본 최초의 천태종을 개창한 뒤 812년 그가 도움을 건넸던

다카오산지의 구카이를 찾는다.

사이초는 구카이에게서 진언종의 교의(敎義)를 터득하기 위해 몸소 두 제자를 거느리고 관정(灌頂·밀교 의식

으로서 수계자의 정수리에 향수를 붓는다)을 받았다.

 

따지고 보면 청소년 시절, 구카이는 유학(儒學)과 한서에는 뛰어났으나 불교에는 희박했다.

그와 처지가 비슷했던 사이초가 소년 시절 열렬한 불교신자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12세 때 승원(僧院)의 엄격한

계율 생활을 했던 것과 비교되는 지점이다.

구카이와 사이초는 교육이나 생활환경에서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나라에 먼저 유학하여 원(圓), 밀(密), 선(禪), 계(戒) 등 사종(四宗)을 배우고 돌아와 고승의 길에

접어든 사이초가 구카이로부터 관정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수도 자세는 개인적으로 존경스러울 뿐만 아니라 구카이의 뛰어난 진언 밀교의 경지를 반증하는 것이다.

 

39세의 구카이가 812년 11월15일, 다카오산지에서 거행한 ‘금강계결연관정’(金剛界結緣灌頂)은

구카이의 밀교를 문자 그대로 부동의 것으로 만든 것으로 평가된다.

이날로부터 일본에서는 비로소 순정(純正) 밀교가 확립된다. 이날 사이초 등 모두 4명이 관정했다.

 

 고야산에 위치한 구카이 사당.

 

 

관정은 고대 인도 국왕의 즉위식에서 비롯됐다.

밀교에서는 불가에서 다시금 태어나는 것을 증거 삼기 위한 신묘한 의식이다.

어려서 유학에 심취했던 구카이는 당시를 다음처럼 술회했다.

“ 나는 어려서부터 외삼촌으로부터 매우 많은 시문(詩文)과 유학 등의 한서를 배웠다.

  성인이 되어서는 당나라에 가서 일본서 배우지 못한 것도 배웠다.

  그러나 나는 불교에 관심이 워낙 컸기 때문에 한학자로서 입신하길 원치 않았다. ” (‘文鏡秘府論’)

 

헤이안경에서 다카오산지에 있는 구카이의 명성은 날로 드높아졌다.

구카이는 43세였던 817년 심산유곡인 고야산으로 들어가 공고부지의 새 터전을 닦는다.

그가 공고부지에 입주해 살게 된 때는 59세인 832년 8월부터였다.

이보다 9년 앞선 823년부터 구카이는 교왕호국사로서 사가 천황으로부터 헤이안경의 ‘도지’(東寺)를 물려

받는다. 공고부지를 세우게 된 즈음이었다.

 

건찰 이유에 대해 9세기 한 문헌은

“ 구카이는 비경의 깊은 산속을 걷다가 개 2마리를 거느리고 사냥꾼 모습을 한 사냥터명신(狩場明神)을 만났다.

  구카이는 그의 안내로 연꽃잎을 연상시키는 봉우리로 둘린 유현한 고원에 살고 있다는 여신 니우쓰히메명신

  (丹生津姬明神)을 찾아갔다.

  이때 여신은 ‘나는 신도(神道)로 큰 복을 누려온 지 오래입니다.

  하지만 정녕 지금 보살이 이 산에 오셨으니 내게는 행복이지요’라고 기뻐했기에 절을 세우게 되었다 ” 고 설명

하고 있다.

 

 

 

63. 간무일왕의 생모, 백제여성 다카노노 니가사의 능묘

 

그 백제의 여인, ‘日 헤이안 문화’를 낳다

 

 

 간무일왕 큰사당 ‘헤이안신궁’(교토) 신전 어귀.

 

 

일본 교토에서 가볼 만한 백제왕족의 터전 하면 백제 여성 야마토노 니가사(和新笠, 후일 高野新笠, 다카노노

니가사로 성씨만을 바꿈, 생년 미상∼789) 왕후의 능묘를 들 수 있다.

장장 1220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두고 일본 왕실에서 직접 제사 모셔온 존귀한 다카노노 니가사 왕후 능묘의

묘비 명칭은

‘고닌천황 황후 다카노노 니가사 오에릉’(光仁天皇皇后 高野新笠大枝陵)이다.

다카노노 니가사는

일본 ‘헤이안 문화’의 창시자인 제50대 간무(桓武·781∼806 재위) 일왕을 낳은 백제 왕족이다.

 

 

이곳의 위치는 초행길에 좀처럼 찾아가기 힘들다.

교토시 서쪽 외곽지대(京都市 西京區 大枝沓掛町)로서 ‘한큐 아라시야마선’ 전철의 가쓰라(桂)역에서 내려

시(市)버스 니시5계통(西5系統)으로 갈아타고 ‘가쓰라사카구치’ 버스정류소에서 하차한다.

여기서 다시 도보로 약 15분 거리의 라쿠사이(洛西) 주택단지 인근의 야산인 이세코산(伊勢講山) 정상에 자리

한다.

굳이 지적하자면 대부분의 일본 ‘교토관광 안내’ 책자 등에는 ‘다카노노 니가사 오에릉’을 밝히고 있지 않다.

 

서기 794년에 지금의 교토땅을 고대 일본의 새로운 왕도 ‘헤이안경’(平安京)으로 개창한 이름 높은 인물이

간무일왕이다.

그의 생모인 백제 여성 다카노노 니가사를 하루아침에 한국과 일본뿐 아니라 온 세계에다 새로이 인식시킨

것은 지금의 일왕 아키히토(明仁·1989 등극∼현재)였다.

2001년 12월23일, 아키히토 일왕은 자신의 68회 생일을 맞아 황거(도쿄의 천황궁, 千代田區千代田1-1)에서

공식 기자회견을 하던 자리에서

‘내 몸 속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다음처럼 진솔하게 공언했다.

 

“ 나 자신으로서는 간무일왕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武寧王·501∼523 재위)의 자손이라는 것이

  ‘속일본기’(續日本紀, 서기 797년 일본 왕실 편찬)에 기록돼 있기 때문에 한국과의 연고를 느끼고 있습니다 ”

(‘朝日新聞’ 2001.12.23).

 

그날 황거에서 거행된 아키히토 일왕의 기자회견 내용은 일본의 일간지 중에서 오로지 ‘아사히신문’에서만

일왕이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백제왕실과 한 핏줄로 이어왔다는 사실을 꾸밈없이 생생하게 보도했다.

일본의 다른 신문, 이를테면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이나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 등 모든 신문은 아키히토

일왕의 한국 핏줄 언명 부분을 일체 묵살해 버렸다.

 

아키히토 일왕의 일왕가와 백제왕실과의 진솔한 혈연 내용 발표에 당황하거나 놀란 일본인도 적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아키히토 일왕의 공언이 있은 지 4개월째였던 2002년 3월,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의 일본어판 다카

야마 히데코(高山秀子) 기자는 백제 여성 다카노노 니가사의 ‘오에릉’ 취재를 하면서 다음처럼 지적했다.

 

  ‘교토어소’의 ‘시신전’(현재 헤이안경의 옛 왕궁 옥좌).(왼쪽)

고닌일왕 왕후 다카노노 니가사 오에릉.

 

 

 일본의 수많은 전문가들은 한국인과의 혈연관계를 공적으로 인정한 일왕의 성명에 대해 ‘아무것도 새삼스

  러울 것은 없다’고 무뚝뚝하게 군다.

  그러면서 조선 문화가 일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라고들 말한다.

  정말 그럴까. 교토에 있는 다카노노 니가사 묘지(오에릉) 주변의 주민들은 니가사가 조선인이었다는 것은

  몰랐다고 입을 맞춘다.

  대숲으로 둘러쳐진 니가사의 묘는 산책이며 하이킹에 잘 어울리는 나지막한 야산이다.

  그곳에는 간무일왕의 어머니라는 것이며 그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그의 경력을 설명하는 것은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조선 여자였다니요? 전혀 몰랐어요’라고 이웃에서 30년 가까이 살았다는 한 주부는 놀란다.

  일본인들에게 이것이야말로 다카노노 니가사라는 여성의 역사를 아는 좋은 기회가 아닐 것인가.

  그것은 일본인 자신의 역사를 아는 것도 되기 때문이다 ”

  (‘ニユ-ズウイ-ク’ Newsweek 〈天皇家と朝鮮〉 2002.3.20일자 일어판)

 

간무일왕의 생모 다카노노 니가사(이하 본성명 화신립) 왕후의 초상화가 전해지는 것은 없다.

일본 왕실 관찬 역사책 ‘속일본기’에서는 그에 관해 여러모로 상세하게 기술하면서 

“ 왕후의 조상은 백제 무령왕(재위 501∼523)의 왕자 순타(純陀) 태자로부터 이어지고 있다.

  왕후는 덕망 넘치며 우아한 모습으로 귀품을 갖춰 젊은 날로부터 평판이 드높았다.

  엔랴쿠 9년(790년)으로 거슬러서 ‘왕태후’의 존호를 추서하였다.

  백제의 먼 조상인 도모왕(都慕王·주몽)은 하백의 딸이 태양의 정(精)을 감응하여 탄생했다.

  왕태후는 그 후손이다.

  그 때문에 시호(諡號)를 천고지일지자희존(天高知日之子姬尊)으로 받들어 모셨다 ” 고 썼다.

왕후 묘소 옆에 세워진 궁내청(宮內廳·천황궁 관청) 현판에는 이 시호만이 밝혀져 있다.

 

화신립 왕후는 서기 660년 백제 멸망 직후 일본 왕실로 건너온 조신 화을계(和乙繼·야마토노 오토쓰구·7∼8C)

라는 백제 왕족의 딸이었다.

어머니는 신라계의 귀족 여인 하지노 마마이(土師眞妹)다(‘신찬성씨록’).

화을계는 왜 왕실에 와서 ‘야마토노 아소미’(和朝臣)라는 고관으로 우대받던 조정의 신하로서 본래 백제 무령왕

후손이었다.

‘야마토’(和) 성씨는 백제 무령왕의 왕성(王姓)이기에 ‘일본’을 상징하는 ‘야마토’(和)는 그 옛날의 백제 왕실과의

연고가 드러난다.

 

 ‘헤이안신궁’의 붉은 ‘도리이’(솟대). (왼쪽)

 주택단지 골목의 ‘오에릉’ 입구 표석.

 

 

교토산대 고대사학 담당 이노우에 미쓰오(井上滿郞) 교수는

 “화씨부인은 제 아비가 왜 왕실의 조신이었기 때문에 시라카베(白壁·709∼781) 왕자와 결혼했다.

  이 시라카베 왕자가 뒷날의 고닌(光仁·770∼781년 재위) 일왕이다.

  고닌일왕이 등극한 것은 그의 나이 이미 환갑이 지난 61세 때의 일.

  일왕 계승을 둘러싸고 일왕가가 왕권 쟁탈로 극히 험악하고 어수선했던 시대에 그는 늙은 왕자의 몸으로서

  왕위에 올랐다 ” (‘桓武天皇’ 2006)고 했다.

 

그의 윗대에서 일왕들이 폐제(廢帝)되거나 또는 거듭 왕으로 복귀하는 중조(重祚) 등,

그야말로 왕실의 살벌한 정치상황에서였다.

더구나 왕위 계승자가 결정되지 않았던 시대의 여러 왕자들 중의 하나였던 노인 시라카베 왕자.

그 당시 입 한번 벙긋 잘못 놀려 폐왕자 되는 자도 있었다.

그러기에 늙은 시라카베 왕자는 애꿎은 화를 피하느라 때로는 고의로 무능한 술주정뱅이 처신을 하며 남

모르게 행방을 숨겼고, 고심참담하게 이리저리 몸을 사려 용케도 재앙을 면하여 끝내 옥좌에 올랐다.

 

시라카베(제49대 고닌일왕)가 왕자 시절에 화신립 왕후와 결혼한 후, 둘 사이에 첫 왕자 야마베(山部·뒷날의

제50대 간무일왕) 왕자가 태어난 것은 서기 737년.

그러기에 아버지 고닌일왕이 등극했을 때 야마베 왕자는 이미 그 나이 34세의 청년이었다.

이 당시 어머니 화신립 왕후는 50세 전후였다고 본다.

화신립 왕후는 뒷날, 아들 간무일왕이 등극한 후 8년째였던 서기 789년에 세상을 떠났다.

 

시라카베 왕자는 770년 10월에 일왕 자리에 등극하자 서넛을 헤아리던 왕자비들 중에서 가장 나이든 화신립

왕후가 아닌 가장 나이 젊은 이노우에(井上·생년미상∼775) 공주를 첫 번째 왕후 자리에 앉혔다.

이 당시 이노우에 공주는 고닌일왕과의 사이에 11살짜리 왕자인 오사베친왕(他戶親王·759∼775)이 있었다.

최초의 왕후가 된 젊은 이노우에 공주는 제45대 쇼무(聖武·724∼749 재위) 일왕의 공주였다.

 

왜 왕실에서의 근친결혼은 다반사였다.

일왕이나 왕자도 여러 비빈을 거느렸던 것은 한국 왕실과 진배없다.

고닌일왕이 등극한 이듬해인 서기 771년 1월에 이노우에 공주의 몸에서 태어난 오사베왕자(당시 12살)가

여러 왕자 형들을 물리치고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왕후 이노우에 공주는 황실 여인천하의 독부였다.

젊은 왕후는 고닌일왕의 손위 친누이 나니와(難波) 공주를 저주하며 남몰래 그녀를 암살하는 끔찍한 살인사건

을 저질렀다.

 

야마베 왕자(간무일왕)의 친고모인 나니와 공주는 34세의 친조카 야마베 왕자를 왕세자로 책봉할 것을 오래

도록 고닌일왕과 조신들에게 강력하게 밀어댔던 것.

이에 반감을 품었던 이노우에 왕후는 자신의 친쇼무일왕계 세력과 손잡고 늙은 남편 고닌일왕을 닦달하며

제 어린 아들을 끝내 왕세자로 책봉시켰다.

그러나 고닌일왕의 옹립자였던 조신 후지와라노 모모카와(藤原百川·732∼779) 참의(參議) 세력은 이노우에

왕후가 나니와 공주를 저주하여 살해한 흑막을 끈질기게 파헤쳐 끝내 그녀의 죄상을 밝혀냈다.

 

실은 이노우에 왕후는 남편 고닌일왕마저 저주하다가 서기 772년 3월에 폐위되었고, 다시 5월에는 왕세자

오사베 왕자도 어미의 대역사건에 연좌되어 폐서인되었다.

이들 죄인 모자는 773년에 멀리 우치군(宇智郡)으로 유배되었다가 775년의 똑같은 날 동시에 죽었다(독살설).

772년 5월 왕세자를 폐서인한 조정에서는 곧 35세의 야마베 왕자를 왕세자로 책봉함으로써 이노우에 왕후

에게 곤혹스럽게 시달려 왔던 화신립 왕후에게 마침내 새빛이 비쳤다.

끝으로 간략하게 부기하자면 간무일왕의 생부 고닌일왕(袋草子·1156∼58)도 백제인 후손이다.

 

 

 

64. 닌토쿠왕과 백제왕족 사케노키미의 터전 응합촌

 

백제인…그 웅대한 식민지 개척의 발자취

 

 

 

지난 2월 7일, 나라현의 ‘아스카촌 교육위원회’가 아스카에서 거대 무덤 ‘마유미간스즈카’를 발견했다.

발굴단은 “ 이 묘지 주인공은 백제 왕족 ‘야마토노아야(東漢)’ 가문의 수장급 인물로 보인다 ” 는 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6세기에 만들어진 이 고분은 아스카촌(明日香村) 서부 구릉 지대에서 발견됐다.

길이 약 40m에 이르는 둥근 무덤이다.

1920년대와 1962년에도 조사됐지만 그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이 무덤은 지금까지 아스카 지역에서 발굴된 가장 큰 무덤이다.

 

지난해 7월부터 묘역 약 200㎡를 조사해 공개한 고분 내부 석실(石室)은 전장이 19m가 넘는다.

폭이 큰 곳은 4.4m, 높이는 4.7m다.

백제계 스이코여왕(推古 592∼628년)보다 훨씬 이전에 백제 왕족이 먼저 이 고장에 건너와서 지배의 터전을

다진 것을 입증한다.

이처럼 오사카로부터 아스카에 이르는 지역에는 고대 백제인들의 발자취가 뚜렷하다.

 

 구다라스 터전인 오사카 중심지.

 

 

오사카와 아스카는 백제의 옛 터전이다.

역사가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淸張 1909∼1992년)는

“ 일본 천황가의 조상은 남조선으로부터 일본에 건너왔다 ” (日本史謎と鍵, 平凡社, 1976년)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일본과 조선은 같은 민족이다. …일본은 조선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다.

  행인지 불행인지 쓰시마(對馬島) 해협이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있어서, 한반도에 전쟁(신라·백제·고구려 삼국

  간의 전쟁, 필자 주)이 일어났을 때 일본은 독립해서 일본의 특성을 가진 나라로 변해 갔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것과 마찬가지다. ” (松本淸張 ‘東京新聞’ 1972년 4월1일)

 

지금부터 이미 1000년 전부터 오사카는 ‘백제국’을 뜻하는 ‘구다라스(百濟洲)’라는 지명이 일본 고대 ‘나니와쓰

(難波津)’ 중심 지도에도 나타났다.

지금도 오사카에는 ‘백제역’(화물역)과 ‘백제통’(百濟通·거리), ‘남백제소학교(南百濟小學校)’,

‘백제왕신사(百濟王神社)’, ‘왕인묘(王仁墓)’, ‘왕인공원(王仁公園)’ 등이 산재한다.

 

 오사카 전철의 중심 역의 하나인 난바역.

 

 

오늘날 오사카 중심지 번화가는 ‘난바(難波)’ 지역이다.

백제에서 온 왕인 박사는 이미 5세기에 이곳 나루터를 일컬어 나니와쓰로 이름지었다.

왕인은 고대의 나니와쓰(오사카) 개척의 위인이었다.

젊은 날 백제 왕실에서 건너온 왕인은 왜 왕실 왕자에게 한자어와 시가를 가르쳤다.

그 왕자는 5세기 초에 등극한 청년 ‘닌토쿠(仁德)’ 왕이다.

왕인은 젊은 닌투쿠 왕자(大雀命·오사사기노미코토)를 왕위에 등극시켰다

(古今集·고킨슈 905년 편찬).

 

닌토쿠 시절부터 비로소 나니와쓰에는 백제문화가 활짝 꽃피기 시작했다.

일본 최대 묘지는 이 고장의 닌토쿠 왕릉(전장 486m)이고,

두 번째로 큰 것은 닌토쿠 왕의 아버지 오진 왕릉이다.

사학자 이시와타리 신이치로(石渡信一郞 1926년∼)는 ‘백제에서 건너온 오진천황’(百濟から渡來した應神天皇

2001년)의 저자이다.

그는 1960년대부터 여러 권위 있는 학자들과 더불어 백제에서 건너온 ‘구다라 왕족’을 인정했다.

 

 남백제촌 터전인 오사카 중심지의 사케노기미의 사당 다카아이신사.

 

 

와세다대학 역사학과 미즈노 유우(水野 裕) 교수가

“ 닌토쿠 천황은 백제인이다 ” (日本國家の 成立 1968년)라고 하는 것을 굳이 부정하려는 학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백제 왕족들의 최초 일본 도래지는 규슈라고 했다.

오사카 중심 지역의 옛 행정구역 명들을 잠깐 살펴보면 과거의 발자취는 쉽게 이해된다.

오사카 행정학자로 이름난 이노우에 마사오(井上正雄)의 ‘오사카부전지’(大阪府全志 전 6권, 1922년)에는

이 고장 구다라스가 백제인 왕들의 지배 터전이었음이 실감 난다.

우선 명칭도 ‘구다라 고리(百濟郡)’였다.

구다라고리에는 그 옛날 남백제촌(南百濟村)과 북백제촌(北百濟村)이 설치돼 있었다.

남백제촌에는 응합촌(鷹合村·다카아이무라), 사자촌(砂子村·스나고무라), 중야촌(中野村·나카노무라)

이라고 하는 대단위 행정구역들이 있었다.

 

다카아이무라의 경우는 닌토쿠왕 43년 9월에, 백제인 아비코가 특이한 매를 잡아서 사냥을 좋아하던 닌토쿠

왕에게 갖다 바쳤다.

이때 닌토쿠왕은 왕실에다 몸소 매를 양육하는 왕실 관장 중요 기관으로서 다카가이베(鷹甘部)를 설치했다.

닌토쿠왕은 그가 조정에서 늘 아끼던 백제인 왕족 신하인 ‘사케노기미(酒君)’에게 매를 건네주며 잘 기르라고

했다. 이때 새로 생겨난 관청이 다카가이베다(일본서기).

 

 

 

남백제촌 지역의 백제인 닌토쿠 왕의 총신 사케노기미 무덤.

 

 

이 다카가이베 자리의 옛날 지명은 남백제군의 다카아이무라다.

현재도 이곳의 지명은 예전과 똑같은 오사카시 히가시스미요시구(大阪市 東住吉區) 다카아이초(鷹合町)다.

그 당시 닌토쿠왕의 고다카쓰노미야(高津宮)는 구다라스의 난바여서 이곳 주군의 다카가이베 관청과 가까웠다.

 

닌토쿠왕은 글이 뛰어나 시가에도 능했던 주군과 늘 사냥을 함께 다니며 즐겼다.

백제인 주군이 죽자 닌토쿠왕은 크게 슬퍼하며 이 고장 다카가이베 터전에서 장례를 지내주고,

그에게 매를 돌보는 신으로서 ‘응견신(鷹見神)’이라는 훌륭한 시호까지 내렸다.

 

오사카에는 고대의 ‘사케노키미즈카(酒君塚)’ 비석도 서 있다.

그런데 고대의 응견신을 제사지내던 다카아이신사 이름을 일제는 근거도 없이 현재처럼 ‘스사노오노미코토

신사’라고 고쳐 부르게 했다.

더구나 이 사당(신사)의 신주 이름은 엉뚱하게도 본래의 응견신이 아닌 일본 개국신의 하나인 ‘스사노오노미

코토’로 바뀌었다.

지금의 사당 현판에 써 있는 것을 보면 사당의 별칭으로 ‘별명 다카아이신사’라고 덧붙여 놓은 게 오히려 군색

해 보인다.

 

 아스카의 거대 무덤 ‘마유미간스즈카’.

 

 

북백제촌에는 금재가촌(今在家村)을 비롯하여 신재가촌(新在家村), 금림촌(今林村) 등의 큰 행정구역들이

속해 있었다.

또한 덴노지촌(天王寺村)은 본래 백제군에 속하는 큰 행정구역이었다.

현재의 오사카시 덴노지구(天王寺區) 지역이다.

그 옛날 백제군의 덴노지촌에 지금껏 자리 잡아 오고 있는 가람이 고대에 백제 건축가들이 건너와 창건했던

시텐노지(四天王寺)다.

해마다 11월에는 백제 불교가 건너왔다는 ‘사천왕사 왔소’라는 큰 축제 행사가 열린다.

구다라스 땅이 백제인의 지배의 터전이며, 바로 그 중심에 우뚝 선 가람이 시텐노지였다.

 

오진, 닌토쿠 왕 부자 시대 때 백제인들의 왜나라 중심지에 시텐노지가 건설된 것은, 6세기 말에 나이 어린

쇼토쿠태자(聖德太子 574∼622)가 백제 불교의 번창을 위해 불교 반대 세력을 제거하던 전쟁(587년) 도중에

창건을 제의해서였다.

그 무렵 쇼토쿠태자는 백제인 여성 스이코 여왕의 생질로서, 여왕의 태자로 책봉됐다.

시텐노지가 서 있는 우에마치 대지(上町台地) 일대는 난바의 중심부 지역이다

(直木孝次郞 ‘日本歷史’ 1970년).

 

오사카 닌토쿠 왕릉

 

 

이 난바 터전에서 부왕인 오진왕(4∼5세기 초)에 이어 405년에 왕위에 오른 사람이 백제인 닌토쿠왕이었다.

그 밖에도 이시카와 구다라노무라(石川百濟村)과 구다라오미(百濟大井) 지역이 구다라스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난날의 ‘구다라 고리’의 각 행정구역 구다라 명칭들이 현재처럼 바뀐 것은 일제의 군국주의 메이지유신

(1868년) 직후부터다.

일제는 역사 과장 조작의 바탕으로써 일본의 건국 시기를 600년 올려 ‘기원 2600년 만세일계의 천황’설을

내세우고 신토주의 황국사상을 외쳤다.

급기야 1910년에는 한반도 침략과 함께 서슴없이 백제와 관계된 지명들을 없앴다.

백제인 신주(神主) 주군의 정체를 숨기고 다카아이신사라는 본래의 사당 이름마저 현재처럼 ‘스사노오노미코토

신사’라고 개칭한 것이 그 한 예이다.

 

4세기 후반 한국 남부와 근접된 규슈 섬을 완전히 정복한 백제인들의 제2 진출지는 다름 아닌 오사카 땅이었다.

백제인들은 기타큐슈로부터 대형 선박들을 띄워서 일본 열도의 본토 세도나이카이로 동진(東進)했던 것.

이와 같은 백제인들이 상륙한 곳이 지금의 오사카 항구 지역인 난바 나루터였다.

이 나루터 일대를 교두보로 해서 오사카는 백제인들의 새로운 식민지 구다라스가 되었다.

 

영국 브리튼의 제1 도시였던 욕(York) 사람들은 대서양의 험한 파도를 건너가서 미국의 항구 도시를 ‘새로운 욕’,

즉 ‘뉴욕(New York)’이라고 명명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백제인 왕족들은 한반도 멀리로부터 현해탄 건너 험난한 파도를 헤쳐 구다라스 땅으로 건너

와서 건설한 새로운 나루터를 ‘나니와쓰’로 명명한 것도 영국인들의 뉴욕 진출보다 이미 천 년 전의 웅대한

식민지 개척의 큰 발자취였다.

더구나 그 나니와쓰 땅 중심지에 가장 큰 행정구역의 정식 명칭을 ‘구다라 고리’로 불러온 사실 또한 우리는

새롭게 평가할 일이다.

 

 

 

65. 백제혼 서린 규슈 후나야마 고분

 

백제 왕권상징 유물 무더기 출토 日 고대문화 한반도 영향력 짐작

 

 

◇ 1873년 1월 발굴된 일본 규슈 후나야마 고분의 안내판과 전경

 

일본 열도 남쪽의 커다란 규슈섬은 고고학적으로 한반도 고대문화의 다채로운 발굴현장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고대 한국인들의 벼농사와 철기문화 등 선진국의 힘이 원시적 미개 상태였던 일본

선주민의 섬나라로 건너가 그들을 지배했던 뚜렷한 흔적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곳이 전장 47m의 ‘전방후원분’인

‘후나야마 고분’(船山古墳, 구마모토현 다마나시 기쿠스이초 에다·熊本縣玉名市菊水町江田 소재)이다.

이 고분의 뒤쪽은 우리나라 왕릉처럼 둥글며, 원분의 지름이 26m인 큰 무덤이다.

 

 

이 고분 속은 집 모양의 조립식 가형 석관이다.

내부는 2.2m 길이에 너비 1.1m이며 천장 높이가 1.45m이다.

특히 주목되는 부장품은 왕권을 상징하는 금동제 관모와 신발(沓),

한자어로 ‘대왕’(大王) 명문(은상감)이 새겨진 철제 큰칼인 ‘대도’(大刀)이다.

여기서는 청동거울과 두 쌍의 금귀고리, 곡옥, 벽옥, 관구슬 등 여러 가지 화려한 장신구, 갑옷 등 무구(武具)와

‘삼환령’ 같은 마구(馬具)에 이르기까지 유물 92건(종류)가 출토됐다.

 

이 유물들은 모두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발굴 직후 도쿄박물관으로 옮겨졌으나 현재까지 일반에 공개

되지 않고 있다.

무덤이 처음 발견된 때는 1873년 1월이었다.

그러나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 군국주의 일본 정부는 발굴 이후 유물 공개를 미루다가

1900년대 이후 발굴 내용을 차츰 알리기 시작했다.

 

 후나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제 관모

 

 

역대 일본 왕 무덤에서는 ‘왕관’이라는 것이 아직 나온 일이 없다.

그러기에 지금까지 일본 학자들은 일본 각지 고대 분묘에서 금동제 관모가 나오면 그 뿌리를 백제, 신라, 가야

등에서 찾았다.

 

이 후나야마 고분의 금동제 관모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사카시립대학 사학과 나오키 고지로(直木孝次郞) 교수는

“ 이 고분에서는 신라와 백제계의 금동관, 금동 신발, 금귀고리 등 풍부한 부장품이 동시에 출토됐다.

  이곳 후나야마의 수장(首長, 왕 등 지배자, 필자 주)은 신라, 백제 어느 쪽인지 확정할 수 없으나 남조선에

  종속했던 사람이 아닌가 한다 ” (‘日本神話と古代國家’ 1993)고 주장했다.

 

그러나 북한의 일본 고대사학자 김석형(金錫亨·1915∼1996) 교수는 무덤 속 피장자를 5세기에 기타큐슈를

거느리던 본국 백제왕의 신하인 백제인 후왕(侯王, 식민지 왕)으로 간주했다.

“ 이 고분의 피장자는 백제인 후왕이다.

  매장될 당시에 관모로부터 귀고리, 반지, 신발, 무기, 토기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물품으로 몸을 장식하고

  조선 물건으로 둘러싸여 백제왕으로부터 전해 받은 은(銀)으로 상감된 글자가 새겨져 있는 칼을 부장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고분의 부장품은 신라와 가야의 것이 아닌 백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

(‘古代朝日關係史’ 1972)고 논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두식 한자어 75글자가 모두 은으로 상감하여 새겨진 손잡이가 없는 85cm 길이의

큰 칼이다.

김석형 교수는 이 칼에 대해서 “ 백제 개로왕이 만들어 왜 땅에다 거느리던 신하인 백제인 후왕에게 하사했다 ”

(앞의 책)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이 칼 앞머리에 등장하는 한자어 글자의 획 등이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 □□대왕(□□大王)의 이름을

백제 제21대 개로대왕(蓋鹵大王)으로 추찰했다.

 

 후나야마 고분의 내부 모습 일본 교토대학 사학과 후쿠야마

 

 

일본 교토대학 사학과 후쿠야마 도시오(福山敏男) 교수는 그 이름(□□大王)을 ‘미즈하대왕’(瑞齒大王)이라고

내세웠다.

그러자 일부 국수적인 일본 학자들은 후쿠야마 교수 주장에 동조하였다.

‘개로’(蓋鹵)라는 글자와 ‘서치’(瑞齒)라는 글자 형태는 서로 엇비슷한 모양이다.

 

75자 중에서 식별할 수 있는 글자들로 전체적인 뜻을 풀어 보면 다음과 같다.

“ 천하를 다스리는 □□대왕 시대에 대왕의 명령을 떠받드는 관청 사람,

  기리(?利)가 (지휘)하여 만든 것이다.

  8월에 커다란 용해 가마(溶解釜)를 사용했다.

  4척(尺)짜리 □칼(□刀)을 80번 담금질하여 60번 휘둘러 3재(三才, 우주의 만물)를 만들었다.

  이 훌륭한 칼을 몸에 차는 자는 오래 살고 자손도 많을 것이며  그가 거느리는 곳(나라)도 잃지 않을 것이리라.

  이 칼을 친히 만든 자의 이름은 이태어(伊太於)이며 글자를 쓴 것은 장안(張安)이다. ”

 

일본 학자는 칼 제작자 이름 글자를 이태어(伊太於)가 아닌 이태가(伊太加)로 보았다.

앞의 나오키 고지로 교수는

“ 이태가(伊太加)는 일본 사람이고 장안(張安)은 조선사람이다 ” 고도 했다.

 

1975년에 교토대학 사학과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가 일본의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 나라현

덴리시 소재)의

“ 백제 칠지도(七支刀)는 백제왕이 후왕인 일본의 왜왕에게 하사한 칼이다.

  이 칼에 새겨진 명문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린 하행문(下行文) 형식의 글투이다 ”

(‘古代史の焦點’)라고 단정한 백제 칠지도의 다음 같은 명문도 자세하게 읽어보기로 한다.

 

 후나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청동거울

 

 

“ (칼의 앞면 글자) 태화 4년(서기 369년) 5월11일 병오날 정양 때에

  무수히 거듭 담금질한 쇠로 칠지도를 만들었노라.

  모든 적군을 물리칠 수 있도록 후왕(侯王)에게 보내주는도다. □□□□작.

  (칼의 뒷면 글자) 선대 이래로 아직 볼 수 없었던 이 칼을 백제왕과 구수세자(필자 주: 뒷날의 근구수왕,

  375∼383 재위)는 성스러운 말씀으로써 왜왕을 위해 만들어 주는 것이노라.

  후세에까지 잘 전해서 보여주도록 하라. ”

 

참고하자면 칠지도에 새겨진 한자어는

(앞면)“泰和四年五月十一日丙午正陽 造百練鐵七支刀 以. 百兵 宜供供候王 □□□□作.

(뒷면) 先世以來未有此刀 百滋王世子奇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로 판독되고 있다.

이와 같이 4세기 백제 왕실에서 만들어 일본땅의 백제인 ‘왜왕’에게 보내준 칠지도의 글투와 5세기 후나야마

고분 출도 큰칼의 글투는 그 문맥상 뜻이 유사성을 잘 보이고 있다.

 

규슈 중북부 지방에 있는 이 후나야마 고분에서 발굴된 금동제 관모는 높이 13.6㎝, 밑변 길이 15.1㎝이며

뒷부분에 뱀처럼 구부러진 줄기에 달린 둥근 반구형(半球形)의 장식 금구(金具)가 큰 특징이다.

더구나 이 금동제 관모는 1982년 2월 우리나라의 ‘입점리 백제 고분’(전북 익산시 웅포면)에서 출토된 금동제

백제 관모와 마찬가지로 반구형의 장식 금구까지 달려 있어 그 제작 형식이 백제 금동관모와 매우 유사해 주목

된다.

 

또 뒷날인 2003년 공주 수촌리 고분(사적 460호)에서 출토된 금동제 관모도 역시 반구형의 장식 금구가 달리는

등 그 제작 형식이 서로 닮았다.

후나야마 고분 출토의 길이 29.7㎝의 금동 신발 역시 입점리 백제 고분 출토 금동 신발과 매우 흡사한 제작

형태를 보이고 있다.

 

 후나야마 고분의 외부 모습

 

 

또 후나야마 고분의 청동거울도 공주 무령왕릉 출토 청동거울의 동물 형상의 부조와 구멍 뚫린 손잡이, 둥근

테두리 장식 부조 등 전체적인 생김새의 제작 양식이 매우 유사하다.

무녕왕릉 발굴 이후 후나야마 고분이야말로 백제 왕가적인 유물들이 잔뜩 쏟아져 나온 가히 백제인 일본땅

규슈 지배자(왜왕)의 무덤이라 주장해도 무리가 아닐 것 같다.

 

도쿄대학 사학과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 교수는 일본 기타큐슈 지방에서 계속 출토되는 허다한 고분

등의 발굴물에 관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기타큐슈의 옹관묘 유적 출토품으로는 청동 제품이 많다.

  이 출토품들은 일본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주로 조선으로부터 들어온 것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

(‘北九州と南鮮’[日本の歷史] 1980)고 했다.

특히 한반도 도래인들의 고대 일본 지배 배경은 일본 기타큐슈 지방을 주축으로 진출하면서 벼농사를 비롯한

청동기며 철기 문화의 일본 전파가 그 바탕이 됐다.

 

 후나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 신발

 

 

2007년 4월 필자 등과 함께 전남 영암에서 강연 (‘국립영산강고고학박물관 건립 추진 학술토론회’)한

일본고고학회 니시타니 다다시(西谷正) 회장(규슈대 명예 교수)은

“ 일본 야요이시대(BC3∼AD3)에 영산강 유역을 시발로 하는 벼농사법을 ‘요시노가리 유적’(吉野ケ里遺跡,

  1989.1 확인) 등 일본 규슈땅으로 가져다 준 한국의 벼농사 문화는 그 이후 쌀농사가 일본에서 정착하게

  했다.

  마한시대의 영산강 유역 청동기시대의 지석묘(고인돌 무덤)와 철기와 와질(瓦質) 토기 등 문화는 일본

  야요이시대 후기에 큰 영향을 끼쳤다.

  더구나 횡혈식 묘지 석실의 구조와 농기구, 토제품도 백제 것들이다 ” 고 했다.

 

저명한 사학가 네즈 마사시는 한반도 도래인들의 규슈 진출 배경을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

“ 고유 일본인(固有日本人, 본래부터 일본에 살아온 선주민)은 석기와 토기를 사용해 채집과 사냥 및 고기잡이

  활동을 했다.

  어느 정도의 재배도 했는데, 그 사회조직은 계급이 없는 공산(共産)사회였다.

  기원전 1세기쯤이 되자 한국과 중국에서 새로운 인종(人種)과 문명이 들어왔다.

  즉 한국인이 벼농사와 철기 청동기 및 노예(奴隸)제도의 사회조직을 가지고 우선 기타큐슈에 들어왔다.

  그 결과 일본에서 벼농사가 퍼지게 됐다.

  종래의 공산사회는 노예와 그 소유자, 대토지 소유자와 경작 농민으로 구분되는 계급사회로 변했다.

  그와 같은 과정은 전쟁이나 타협에 의해 진행됐다.

  그리고 노예 소유자와 대토지 소유자가 농민과 노예를 직접 지배하는 전제국가로 변했다.

  기타큐슈의 고분(무덤)에서는 조선인과 중국인에 가까운 고분인(古墳人)의 뼈가 나오고 있고,

  그 자손이 현대 일본인이 됐다. 따라서 일본인에게는 고분인인 조선인과 중국인의 피가 섞여 있다.

  또 6∼8세기의 아스카(飛鳥), 나라(奈良)시대에도 많은 조선인이며 중국인이 일본에 도래했으므로,

  한층 더 그들에 가까운 것이 됐다 ” (ねずまさし ‘天皇家の歷史’[上] 1989)고

한국인들이 미개했던 고대 일본사회를 직접 지배한 것을 시인했다.

 

 

 

66. 백제 성왕의 후손 의연승정이 세운 오카데라

 

곳곳에 백제인 승덕… 국보·문화재 즐비한 명찰

 

 아스카의 명찰인 오카데라의 본전

 

 

백제인들의 오랜 역사의 터전인 일본 나라의 아스카(飛鳥)라는 아늑한 전원 지대.

이곳의 명찰 오카데라(岡寺)를 둘러싼 풍경은 4월 봄꽃만큼이나 화사했다.

아스카 동쪽 언덕을 등지고 고승 기엔승정(義淵僧正, 출생년 미상∼728, 이하 ‘의연승정’)의 승덕(僧德)이

넘치고 있었다.

 

 

지금의 가람 오카데라 지역은 나라현 다카이치군 아스카촌(奈良縣高市郡明日香村大字岡)에 자리하고 있다.

사찰을 일컫는 일본어인 ‘데라’(寺)는

“ 멀리 백제로부터 배를 타고 오사카 나루터를 거쳐 서기 6세기 말에 아스카에 건너온 백제인 건축가들이

  일본 최초의 칠당가람 법흥사(세칭 아스카절, 서기 596년 준공)를 세울 때 붙였던 한국어 ‘절’(뎔)에서 생겨

  났다 ” 는 게 규슈대 불교사학과 다무라 엔초(田村圓澄) 교수 등 일본 학자들의 공론이다.

 

의연승정의 조상은 백제 제26대 성왕(523∼554 재위)이다.

‘신찬성씨록’(815 일왕실 편찬 족보)에 나오는 이야기다(‘安勅連’ 出自百濟國魯王也).

이 사찰에서 최근 새로 간행한 연혁서인 ‘오카데라’(岡寺, 1972)에도

“ 의연승정의 선조인 이치키공(市往公)은 백제국 성왕의 후손이며 도래인 계통의 가문이다.

  이 고장 도래인들의 계통에는 백제인 아직기(阿直岐)의 후손인 아치 무라지(安勅連, 무라지라는 ‘連’은 조정

  (왕실)의 고관 칭호이자 왕이 내려준 성씨에 붙여쓰는 것임, 필자 주)가 살고 있었다.

  아직기와 아치 무라지는 혈족으로 보인다.

  아치씨(安勅氏)는 아스카 지방의 서부지역 ‘히노쿠마’에 거주했으며 이치키씨(市往氏)는 그 마주보는 쪽인

  아스카 지방의 동부지역 ‘히노쿠마’에 거주했다.

  그와 같은 사실은 이치키씨가 오카 무라지(岡連)라는 사성(賜姓, 국왕이 내려주는 벼슬아치의 성씨)을 받은

  것으로도 추찰된다.

  의연승정은 본래부터 오카(岡)에 살던 도래인 가문의 태생이다.

  그의 생가는 문화적으로 고위층 가문이었기 때문에 ‘승정’(당시 왕실의 최고위 승려직)과 같은 명승이 그 집안

  에서 나왔다 ” (岡寺, 1972).

 

‘오카데라’(岡寺, 1972)는 ‘승정의연전’(僧正義淵傳)과 ‘용문사의연전’(龍門寺義淵傳) 등 이 사찰에 전해오는

옛 문헌을 바탕으로 ‘의연승정은 성왕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밝혀서 엮어낸  간행물이다.

 

의연승정은 일본 역사상 두 번째의 승정이다.

최초의 승정은 아스카 법흥사 준공 직후인 702년 왜 왕실로 건너 온 백제 고승 관륵(觀勒)이었다.

“ 백제승 관륵은 624년(스이코 32년) 최초의 승정으로 임명되었다 ” (‘角川 日本史辭典’, 1976).

그 당시 관륵은 백제로부터 일본 최초로 사용된 달력과 천문 지리서 등 서적을 가지고 왜 왕실로 건너왔다

(扶桑略記).

일본 왕실 편찬 정사(正史)에도 의연승정에 관한 기록은 여러 대목이 있다.

 

제42대 몬무왕(文武, 697∼707 재위, 669년 11월 29일)이

“ 의연법사의 학문과 불도를 포상해 벼 1만다발을 하사했다 ” (‘續日本紀’ 797 왕실 편찬)고 했다.

이어 703년 3월 24일에는 “ 의연법사를 승정으로 임명했다 ”

(續日本紀)는 것과 뒷날인 제45대 쇼무왕(聖武, 724∼749 재위) 당시(728년 10월 20일)에

“ 승정 의연법사가 졸했다.

  치부성(왕실 관방 부서) 관리를 파견해 장례 의식을 감독하고 호위하게 했다.

  또한 조칙을 내려서 비단 100필과 실 200타래, 햇솜 300돈, 삼베 200필을 증여하며 조문했다”

 (續日本紀)는 왕실 최고의 대접 기록이 나온다.

이와 함께 고승의 극락왕생(서거)을 애도했다고 썼다.

 

 의연승정의 건칠상(乾漆像)

 

 

의연승정은 백제계 불교 왕도 국가였던 나라시대(710∼784)의 이름 높은 고승이어서 오카데라 사찰의 고대

전기(龍蓋寺傳記)에는 물론이고, ‘승정의연전’(僧正義淵傳)과 ‘용문사의연전’(龍門寺義淵傳), ‘남도고승전’

(南都高僧傳), 일본 불교 왕조사인 ‘부상략기’(扶桑略記), ‘원형석서’(元亨釋書), '삼국불법전통연기’(三國佛法

傳通緣起-中), ‘도다이지요록’(東大寺要錄), ‘금석물어집’(今昔物語集), ‘칠대사연표’(七大寺年表) 등 수많은

고대 불교 문헌과 역사 자료에 발자취가 전해지고 있다.

 

사찰 승려(寺下 隆)는

“ 오카데라 가람으로 오는 한국인 참배자가 많아졌다 ”

“ 의연승정은 신분이 백제인 왕족 출신의 고승일 뿐 아니라 일본 고대의 천황가와도 연고가 있다 ”

고 설명했다.

 

‘의연승정은 백제 성왕의 후손’이라는 역사의 사실은 곧

“ 백제 제26대 성왕이 백제로부터 일본에 건너가서 백제왕인 동시에 일본 제29대 긴메이 천황을 아울러 겸임

  했다 ” (小林惠子 ‘二つの顔の大王’ 文藝春秋社)는

기록과 연결된다.

또한 의연승정이 성왕의 후손인 백제왕족이기 때문에 일본 왕실의 국가 최고위직 승정에 임명될 수 있었다는

것도 살피게 해준다.

 

오카데라의 오랜 사찰의 전기(龍蓋寺傳記)와 ‘도다이지요록’(권1) 등에는 신비한 의연승정의 탄생 설화가

전해진다. 내용은 이렇다.

“ 옛날 야마토국 다카이치군(高市郡)에 부부가 살고 있었다.

  남편은 진수씨(津守氏), 아내는 아도씨(阿刀氏)였는데 오래도록 자식이 없어 항상 관음보살에게 자식을

  점지하여줄 것을 기원했다.

  어느 날 밤 집 밖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나기에 나가보았다.

  이때 사립 담장 위에 백첩(흰 천)에 싼 영아가 있고 그윽한 향기가 번져 왔다.

  이에 부부는 이 아기야말로 관음보살이 점지하여 주신 것이라며 소중하게 키우게 되었다.

  당시 오카궁(岡宮)에 살던 제38대 덴치천황(天智, 661∼671 재위)은 그 소문을 듣고는 그 아기를 몸소 왕궁

  으로 데려다 자신의 구사카베 왕자(草壁皇子, 662∼689, 본명 日竝知尊)와 함께 나란히 키웠다.

  덴치천황에 의해 자라난 아이가 장차 승려가 되었으며 왕궁인 오카궁마저 의연에게 하사하여

  왕궁을 절로 삼게 된 것이 오카데라인 용개사(龍蓋寺)다.

  의연승정은 학덕을 쌓아 뒷날 왕실의 최고위 승려직인 ‘승정’에까지 올랐다 ” (‘岡寺’, 1972).

 

아기 때부터 의연을 키운 덴치왕은

백제가 망한 663년에 27만명의 일본 군사를 백제 백촌강으로 보낸 백제계 왜왕이다.

덴치왕이 소년 시절부터 왕자와 함께 왕궁에서 의연을 키웠다는 것은 의연이 성왕의 후손이기 때문이라는

것도 추찰된다.

 

 ‘천인전’이라는 천녀의 무릎 꿇은 모습

 

 

용개사’라는 전설도 유명하다.

용이 하늘로 오르지 못하게 연못 위에다 뚜껑을 덮었다는 뜻의 사찰 명칭인 ‘용개사’는 오카데라의 별칭이며,

여기에도 신비한 전설이 따른다.

 

즉 의연승정이 하늘의 용신(龍神)을 간청하여 사찰 연못에 모시느라 못 위에는 큰 바위를 덮어 하늘로 오르지

못하도록 막았다는 것이다.

지금의 오카데라 본전 앞 ‘용개지’라는 못이 그런 전설의 터전이기도 하다.

이것은 그 옛날 일종의 여름철 가뭄에 대비한 의연승정의 부처님에게 단비를 청원하던 청우(請雨)의 수도법

으로 보아 마땅하다.

 

오카데라가 일명 용개사라는 문헌의 자취는

‘정창원문서’(正倉院文書, 751.8.1.)의 ‘조동대사첩’(造東大寺牒)에 보인다.

백제 등 한반도에서 전해진 벼농사와 더불어 성왕의 백제 불교 포교 과정에서 불교적 기우제가 아스카 백제의

불교 터전에 역력하게 이어졌으며, 그 흔적이 오카데라의 ‘용개지’ 못의 자취다.

이 연못 둘레에는 마침 철쭉이 만발해 의연승정의 어진 승덕이 훈향으로 전해오는 느낌이다.

 

  오카데라 본당 광경

 

 

오카데라에는 국보와 중요문화재들이 많아 고대 백제인의 아스카 고찰의 자취 또한 뚜렷했다.

중요문화재인 본당 건물과 역시 중요문화재로서의 본존불 ‘여의륜관음상’(몸높이 454㎝)과 이 본존불의 몸

안에 모셨던 것을 밖으로 꺼냈다고 하는 태내불(胎內佛) ‘금동여의륜관음상’(국보, 몸 높이 312㎝)은 오히려

본존보다 더욱 이름을 알리게 된 일본 국보이다.

“ 이 금동여의륜관음상은 아스카 시대와 하쿠호 시대 이후 중국 대륙과 조선반도에서 도래한

  금동반가사유불상 그 자체이다 (‘岡寺’)는 것이다.

 

특히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의 국보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금동여의륜관음상은 그 제작 형식 등이 서로 매우

유사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또한

“ 이 금동여의륜관음상은 주쿠지(中宮寺, 나라현 이카루가의 호류지 경내, 필자 주)의 여의륜관음상(목조)과

  함께 가장 오래된 불상이다 ” (‘岡寺’, 1972)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 두 불상의 제작 형식과 기법을 백제 제27대 위덕왕(554∼598 재위)이 일본의 백제 왕실로 보내준

것으로 추찰해오고 있다.

 

  태내불(胎內佛) ‘금동여의륜관음상’

 

 

이곳 오카데라 가람에서 또 하나 크게 추앙되는 것은 일본 국보인 ‘의연승정상’이다.

의연승정의 모습을 건칠상(乾漆像)으로 만든 귀중한 이 상의 본체 높이는 909㎝이며 채색된 성스러운 상이다.

진흙으로 골을 만든 다음에 삼베를 감고 그 위에다 진흙 가루를 바른다.

그리고는 다시 숫돌 가루를 섞어 옻칠을 발라서 제작한 소상(塑像)이다.

옻칠 기법이 한반도로부터 일본으로 건너간 사실을 감히 부인하려는 일본 학자는 아직 없다.

 

오카데라에서 주목되는 또 하나의 문화재는 ‘천인전’(세로 391㎝, 가로 382㎝, 두께 79㎝)이다.

천녀가 무릎 꿇은 모습이 부조되어 있는 벽돌처럼 흙으로 넓적하게 구워서 만든 정방형의 전이다.

여러 가닥의 천의(天衣) 줄기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이와 거의 빼닮게 조각된 그림은 경주

불국사 에밀레종(성덕대왕신종)에도 보인다.

종에는 연화좌 위에 무릎 꿇은 천녀가 천인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새겨져 있어 눈길을 모으게 한다.

 

이와 같은 두 천녀상의 공통성에 대해 저명한 사학자 아보시 요시노리(網于善敎) 교수는

“ 아스카시대에 조선으로부터 불교가 전해져 온 것과 그 유포며 정치적 관계, 불교 미술 등 고고학의 영향은

  매우 컸다 ” (‘飛鳥の遺跡’, 1978)며 한국 고대 불교 문화의 큰 힘을 중시했다.

 

의연승정은 일본 불교 ‘법상종’(法相宗)의 조상으로 오늘에까지 추앙되고 있다.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고승은

“ 현방(玄昉)을 비롯하여 행기(行基), 선교(宣敎), 양민(良敏), 행달(行達), 융존(隆尊), 양변(良弁), 도자(道慈)

  등 8명이다 ” (‘三國佛法傳通緣起’).

도쿄대학 사학과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 교수는

이들 중 의연, 도자, 행기, 양변 등은 백제 도래인임(‘王仁の後裔氏族と其の佛敎’ 1945)을 일찍이 지적했다.

백제인 후손

“ 행기와 양변은 나라땅의 대가람 도다이지(東大寺) 창건(752년)의 성인(聖人)이다 ”

(‘東大寺要錄’)는 것도 아울러 기억해 두자.

 

 

 

 

67. 백제왕족 후지와라 가문의 사당 '가스가대사

 

''韓을, 韓을 모셔 오노라'… 백제의 神을 모시다

 

 ‘가스가대사’ 본전 입구.

 

 

일본 나라현 나라시 동쪽 미카사야마(三笠山) 산기슭 언덕받이(奈良市春日野町160)에 자리하는 사당 터전이

 ‘가스가대사’(春日大社)이다.

이곳은 백제 왕족 후지와라(藤原) 가문의 조상 신주(神主)의 위패들을 함께 모시고 제사 지내는 큰 사당이다.

 

 

도쿄대학 건축사학과 오타 히로타로(太田博太郞) 교수는

“ 이 가스가대사 사당은 후지와라노 가마타리(藤原鎌足·614∼649)의 부인(鏡女王·가가미노 히메미코)이

  남편의 제사를 지내려고 710년쯤에 세웠다.

  부인은 나라땅에다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직접 불교 사찰 고후쿠지(興福寺, 奈良市登大路町)도

  세웠다.

  가스가대사 사당은 본래 춘추 두 번의 큰 제사(春日祭, 가스가 마쓰리) 때문에 크게 번창해 왔다”

  (‘국보중요문화재’ 1963)고 한다.

 

예전까지 가스가대사에서는 음력 2월의 상신일(上申日, 첫 원숭이날)과 음력 11월의 상신일,

두 번의 춘추 제사를 거행했기 때문에 ‘원숭이 마쓰리’라고도 통칭했었다.

그러나 1886년부터는 해마다 3월13일에 가스가 마쓰리 제사를 지내게 됐다.

“ 이 제사는 후지와라 가문의 큰 제사여서 성대하게 거행하며, 반드시 일본 왕실의 조정에서 칙사(勅使)로서

  가스가사(春日使)를 제사지내는 사당에 보내 신주에게 폐(幣)를 바쳤다.(奉幣) ” (東京堂版 ‘연중행사사전’ 등)

 

그런데 가스가 마쓰리 제사의 형식과 내용은 지금도 일본 왕실(도쿄 황거의 궁중 삼전)에서 해마다 11월23일

초저녁에 거행하는 왕실 제사인 ‘니나메사이’(新嘗祭, 鎭魂の儀)와 똑같기에 주목된다.

왕실의 니나메사이에는 일왕이 직접 제주로서 왕실의 궁중 삼전(賢所皇靈殿神殿)의 제사 전당에 참석하며,

여기서 백제신 신주(神主)를 모셔오는 축문인 ‘가라카미’(韓神)를 낭창한다.

 

‘미시마(三島) 무명 어깨에 걸치고 나 한신(韓神)은 한(韓)을 모셔 오노라,

 한(韓)을, 한(韓)을 모셔 오노라’는 것이 축문의 첫머리 부분이다.

“ 궁중의 니나메사이 제사 때의 제사 집행관으로는 조정의 좌우 두 대신(大臣)이 차례로 목청을 돋우며 ‘한신

  축문’을 노래 형식으로 길게 낭창했다. ” (臼田甚五郞 ‘神樂歌’ 1992)

 

교토대학 사학과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는

“ 일본 왕실 궁중 제사에서 모시는 한신(韓神)은 ‘백제신’이다 ”

  (‘神樂の命脈’ 1969)고 일찍이 밝혔다.

우에다 교수는 또

“ 미시마(三島) 무명이란 백제신의 신주를 모신 사당 터전에서 짠 신성한 무명이며, 조상신에게 귀중한 폐(幣)

  로서 제사상에 무명천을 바치는 폐백(幣帛)이다 ” 지난 4월13일 필자에게 말했다.

현재 오사카(다카쓰키)에는 고대(5C)에 일본 왕실로 건너온 ‘백제신’을 신주로 모신 사당인 ‘미시마카모신사’가

있다. (연재 제57회 참조)

 

  가스가대사의 왕족들.

 

 

여기서 더욱 주목할 만한 사실을 밝혀둔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일본 왕실 제사인 ‘니나메사이’와 백제왕족 후지와라 가문의 가스가 마쓰리와 더불어

삼위일체를 이루는 일본 왕실의 궁중 제사는 한신제(韓神祭, 가라카미노 마쓰리)라는 점이다.

 

한신제는 백제계의 제50대 간무천황(桓武·781∼806 재위)이 794년 헤이안경(지금의 교토시 터전)을 창설

하면서 왕궁 북쪽에다 세운 백제신의 사당 한신사(韓神社)에서 거행하던 백제신 제사이다. (‘延喜式’ 927)

 

이상의 3가지 제사의 연관성에 관해 고쿠가쿠인대학 니시쓰노이 마사요시(西角井正慶) 교수는 이렇게 밝혔다.

“ 가라카미노 마쓰리는 고대부터 왕실(궁내성)에 모셨던 가라카미(韓神) 사당의 제사이다.

  이 제사는 가스가 마쓰리 뒤인 2월(음력) 축일(소날)과 니나메사이 전인 11월(음력) 축일(소날)에 지냈다. ”

(‘韓神祭’ 1958)

 

일본 고대사에 등장하는 대정객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를 모르고는 일본 역사를 논할 수 없다.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큰 인물이기에 그가 백제인 왕족이라는 사실을 일본 사학자 대부분이 쉬쉬해 온 것

같다.

저명한 사학자 오와 이와오(大和岩雄)는

“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백제인이다 ” (‘古事記天武天皇’ 1980)고 밝혀서 주목받았다.

 

 부적을 사서 행운을 점치는 사람들.

 

 

오와 이와오는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의 아들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는 백제계 귀화인에게 주어진 왕실

고관 벼슬인 ‘후히토’(史) 그룹과 관계가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 백제인 계통의 후히토(史)라는 벼슬아치들을 들자면 다나베노 후히토(田史)를 비롯해 후미노 오비토(書首),

  후네노 후히토(船史) 등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후히토 그룹의 일원으로 성장한 뒤, 당시 정계 최대 권력자가 됐던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후히토라는 벼슬아치의 명칭을 후히토(不比等)라고 그 글자 자체를 바꾸었다.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어려서 백제인 고관 다나베노 후히토 가문에서 양육받았다. ”

(‘新羅蕃國視について’ 1978).

 

또 구리사키 미쓰호(栗崎瑞雄)는

“ 백제인들의 후히토(史) 그룹이란 어린 날의 후히토(不比等)를 길러준 다나베노 후히토 오스미를 중심으로

  하는 그룹으로, 다나베노 후히토 오스미는 백제 귀화인 그룹의 리더였다 ” (‘本人麻呂’ 1981)고 했다.

 

 경내에 이르는 연도에 줄지은 크고 작은 석등들.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淸張)는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조선 귀화인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본래 성명은 나카토미노 가마코(中臣鎌子)였던 것을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로 성씨와

  이름까지 바꿨다.

  그것을 보더라도 나는 그가 귀화인 계통의 관료였다고 본다.

  이름에 ‘타리’(足)가 붙는 것은 조선 도래인 계통에서 많이 볼 수 있다.

  7세기경의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인명들을 보면 거의 다 귀화인 계통의 인물이다. ”

 

나카토미노 가마코가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로 개성명한 것은 백제 멸망 당시 2만7000의 백제 원군을 일본

규슈에서 백제땅으로 보냈던 일본 제38대 덴치천황(661∼671 재위) 8년(668년) 10월의 일이었다.

그때 후지와라노 가마다리는 “조정의 최고 대신으로 임명받았다.”(‘新皇正統記’)

 

그렇다면 가스가대사 사당의 최고 신주(神主)인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구체적으로 백제계의 어떤 인물인가.

815년에 일본왕실에서 편찬한 왕실 족보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보면 일본 왕족들(左京皇別) 중 제18

번째 인물로 후지와라노 가마타리 가문의 가스가노 마히토(春日眞人)가 등장하고 있다.

 

이 가스가노 마히토는 일본 제30대

“ 비다쓰(敏達)천황의 황자(皇子)인 가스가왕(春日王)의 후손이노라 ” 고 한다.

즉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다름 아닌 “백제 왕족 출신의 비다쓰천황”(‘신찬성씨록’)의 후손이다.

그는 백제왕족인 동시에 고대 일본 왕족이다.

그와 같은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은 가스가대사의 제사 양식이 일본 왕실 제사(신상제)며 헤이안경 왕궁의

가라카미(한신) 제사와 동일한 것뿐에서만은 아니다.

 

일본 교토에 있는 백제 제26대 성왕(聖王)의 일본왕실 사당 ‘히라노신사’(神社)에서 거행하는 제사(‘延喜式’)인

‘히라노 마쓰리(平野祭)와도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도 주목된다.

백제 성왕의 일본 왕실 사당 히라노신사에서는 근년에 새롭게 제작한

‘히라노황대신’(平野皇大神)이라는 편액을 정문(도리이)에다 드높이 내걸었다.

‘황대신’이란 일본왕 큰 신령이라는 뜻이다. 즉 성왕은 일본 왕실의 큰 신주라는 것을 밝힌 셈이다.

 

 본전에 이르는 장중한 회랑.

 

 

백제 제26대 성왕은 일본 제29대 긴메이천황(欽明天皇)을 겸임했다 ”

(小林惠子 ‘百濟王, 聖王は欽明天皇だつた’ 1991)는 것과 맞물려 백제 성왕(긴메이천황)의 제2왕자였던

일본의 비다쓰천황(572∼585 재위)을 뒤잇는 백제인 왕족이 다름 아닌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임을 살피게

해준다.

 

성왕(긴메이천황)의 제1왕자는 백제 제27대 위덕왕(威德王·554∼598 재위)이다.

그래서인지 가스가대사의 엄청난 사당 규모의 크기와 더불어 경내로 이르는 연도에 줄지은 크고 작은 석등

들은 자그마치 1200여개에 이른다.

 

여기에 덧붙여 오사카부(히라카타시)의 백제 왕족 삼송가(三松家)의 사당인 ‘백제왕신사’(百濟王神社)와도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의 신주를 모신 가스가대사가 직접 연관되어 있어서 백제인 왕족들이 고대 일본에서

‘백제계 일본 왕실’을 구성하며 활약한 백제인 왕족들의 종횡으로 면밀한 연결고리도 주목할 만하다.

 

그런 구체적인 실례는 삼송가의 사당이 있는 히라카타시의

“ 백제왕신사의 본전 건물은 본래 나라땅 가스가대사의 구전(옛신전) 건물을 옮겨온 것 ”

(井上正雄 ‘大阪府全志’ 1922)이라는 것으로도 살피게 한다.

그러므로 삼송가하고 후지와라 가문도 서로가 똑같은 백제 왕족의 핏줄이라는 것을 여기서도 말해주고 있다.

 

 

 

68. 나라현 아스카절과 부여 왕흥사백제 위덕왕,  倭에 건축가 보내 대가람 세워

 

 일본 최초의 거대한 칠당(七堂) 가람 아스카 절 터전.

 

 

고대 일본과 백제 왕실의 연관성을 살필 때 일본 나라(奈良)현 일대는 고대 백제의 여러 가지 유적과 묘지,

유물 등이 오늘날까지도 쏟아져 나오는 지역이다.

특히 나라현의 다카이치(高市)군 아스카(明日香)촌과 나라현 기타카쓰라기(北葛城)군 고료(廣陵)초 구다라

(百濟) 지역은 백제궁(百濟宮)이라는 명칭의 백제 왕궁 터와 백제 불교 사찰 등이 다수 남아 있다.

 

 

 

지난 2월에는 아스카(飛鳥/明日香)에서 5세기 백제인 아스카 지배자의 대형 묘지인 ‘마유미칸스즈카’ 고분

발굴 결과를 ‘아스카교육위원회’가 공표했다(제64회 참조).

발굴 관계 학자들은 5세기 중반 백제 도래인 씨족으로서 일본 역사에서도 유명한 야마토노아야 가문(東漢氏)의

수장급(首長級) 묘지이나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필자는 지난 4월 ‘마유미칸스즈카’ 고분 일대를 다시 답사했다.

이미 이때는 마유미칸스즈카 고분이 발굴 이전처럼 완전히 흙과 포장비닐로 덮여 있었다.

 

4∼5세기부터 수많은 백제인이 아스카 일대로 건너와서 지역을 개발하고 있었다.

‘일본서기’(720)에는

“ 오진천황 20년 9월에 야마토노아야 가문의 선조인 아지사주(阿知使主)가 그 자식과 도가사주(都加使主) 및

  자신이 거느리던 17현(縣)의 백성을 이끌고 건너왔다 ” 고 썼다.

이는 5세기 중엽에 수만명의 백제인 대집단이 백제인 왕족 수장인 아지사주 휘하에 일본 아스카 땅으로 이주

하였음을 알려주는 놀라운 내용이다.

 

미즈노 유(水野祐) 와세다대학 사학과 교수는

“ 5세기 당시의 오사카며 나라 지방의 지배자는 백제 왕족이었던 오진천황이었다 ”

(‘日本古代國家の形成’ 1978)고 발표한 바 있다.

일본 역사책에서는 오진천황을 3∼4세기(270∼310 재위) 일본 고대왕이라고 쓰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후대인 4∼5세기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현재 일본 사학계의 통설이다.

 

필자가 재차 현지 답사한 마유미칸스즈카 고분에서 남서쪽 약 2㎞ 지점의 나지막한 언덕에는 다름 아닌

아지사주 신주(神主)를 제사모시는 사당인 ‘오미아시신사’(於美阿志神社)가 자리하고 있다.

아지사주의 사당 오미아시신사가 마유미칸스즈카 고분 이웃에 있는 것으로 보아도 모름지기 마유미칸스즈카

고분은 강력한 아스카 지배자였던 백제왕족 아지사주의 무덤이 아닌가 하는 게 필자의 추찰이다.

 

와다 아쓰무(和田萃) 교토교육대학 교수는

“ 오진천황 시대에 백제로부터 야마토노아야 가문(東漢氏, 倭漢氏로도 함께 동등하게 표기함)이 일본으로

  건너온 것은 거의 사실(史實)로 보아 마땅하다.

  오진천황은 자신의 야마토왕권 밑에다 야마토노아야 가문을 두고 직접 거느렸다 ”

(‘飛鳥の神神’ 1996)고 했다.

백제인 지배자 오진천황은 야마토노아야 가문 세력의 큰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아지사주(야마토노아야 가문)의 아스카 지방 백제인 대집단의 힘은 아스카 땅에서 백제인들의

일본 최초 아스카 절(飛鳥寺)이라는 칠당(七堂) 가람을 건설하게 되었다고 본다.

즉 백제계 스이코여왕(推古·592∼628 재위) 당시인 596년에 아스카 왕궁 인근에서 백제에서 건너온 백제인

건축가들에 의해서 처음 세워진 것이 아스카 절이다.

 

  부여 왕흥사 터전 발굴 현장.

 

 

그 당시 백제 제27대 위덕왕(威德王·554∼598 재위)은 일본 아스카 땅의 왜 왕실로 백제인 건축가들을 보내

주어 그들이 아스카 절을 세웠다.

그 무렵 아스카 왕실의 지배자는 백제계인 스이코여왕이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스이코여왕의 왕궁인 ‘도유라궁’(豊浦宮)은 아스카 절에서 직선 거리로 불과 500m 미만

의 지점에 있다는 점이다. 현재도 당시의 도유라궁 왕궁 터는 잘 보존돼 있다.

아스카 절은 588년에 착공, 596년에 완공됐다.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토부립대학 사학과 교수는

“ 백제계 일본 지배자 ‘소아마자’(蘇我馬子·소가노 우마고·626년 사망)에 의해서 아스카 절이 착공되어 8년

  만에 완공됐다 ” (‘古代を考える飛鳥’·1995)고 했다.

가도와키 교수는 필자에게 보내준 저서에서

“ 소아마자의 5대조 할아버지는 백제인 목만치(木滿致·백제 제21대 개로왕의 조신)였다.

 

 아스카 절 1탑 3금당 복원도.

 

 

  목만치는 5세기에 일본으로 도래한 백제 왕실(개로왕, 455∼475 재위)의 고관이었다.

  일본으로 건너온 목만치 일족은 아스카의 소아 터전에 정착하여 소아씨(蘇我氏) 가문을 이루게 되었다 ”

(‘飛鳥’ 1990)고 밝혔다.

 

이에 앞서 미즈노 유 와세다대학 사학과 교수도

“ 소아 가문은 조선인이다”(‘天皇家秘密’ 1977)고 단정했다.

  그 밖의 여러 저명 학자들도 “소아 가문은 백제 도래인이다 ” 고 입을 모았다.

“ 위덕왕이 보낸 백제 건축가들이 세운 창건 당시의 아스카 절은 뒷날인 1196년에 번갯불에 맞아 화재 발생

  으로 소실됐다.

  당시 본존불상(석가여래좌상, 철불)도 대파하였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상은 여러 차례 파손된 부분을

  수리하게 됐다 ” (‘古代寺院の成立’ 1985)고

시미즈 마사지(志水正司) 게이오대학 사학과 교수는 지적했다.

 

12세기 말부터 폐허가 됐던 아스카 절은 그 옛날 절 터전이 1956∼57년 발굴됐다.

발굴 결과 본존불상(석가여래좌상)과 부처님 사리함과 곡옥, 관옥 등 옥류가 발견됐다.

또 금환, 구리쇠 말방울, 수키와 등 기왓장을 찾아냈다.

이 발굴 작업으로 백제인들이 창건한 아스카 절은 ‘1탑(塔) 3금당(金堂) 형식’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즉 한 기(基)의 불탑을 중심으로 불당인 금당 셋이 에워싼 건축양식이었다.

더 구체적으로 절터 형태(사진 ‘아스카 절 1탑 3금당 복원도’ 참조)를 설명하자면 정문인 남문이 있고 그곳

에서 들어서면 중문이 나온다.

중문에서 안쪽에 탑이 섰고, 탑 뒤에는 중금당이 섰으며, 그 뒤쪽은 강당이 있어 일직선을 이룬다.

또 탑의 오른쪽에는 동금당이 있고 왼쪽으로는 서금당이 섰다.

이 1탑 3금당은 네모진 회랑으로 사방이 둘리어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최근 이 아스카 절과 부여 왕흥사의 건축양식이 일본 학자들에게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발굴작업이 시작된 부여의 ‘왕흥사’ 옛 터전(사적 제472호) 목탑터에서

금은동 부처님 사리 용기(금제병, 은제병, 청동함)가 발굴되자 계속하여 일본 학자들이 왕흥사 발굴 현장을

찾아오고 있다.

왕흥사 터는 부여 부소산(사비성)에서 북서쪽으로 백마강 건너 약 1㎞ 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이 사찰은 백제 왕실의 원찰(願刹)로 알려진다. 즉 백제 제27대 위덕왕이 577년,

죽은 왕자를 위해 지금의 왕흥사 터전을 잡고 사찰을 세웠다(‘청동함’의 명문).

 

 오미아시신사 연혁 철판.

 

 

왕흥사 발굴 터를 최근에 답사한

일본 와세다대학 오하시 가즈아키(大橋一章, 佛敎美術史 전공) 교수는 지난 5월22일, 필자에게 직접

“ 왕흥사 터에서 발굴된 각종 출토물이며 기와(연꽃무늬 수막새)의 문양과 탑 구조 등은 일본 나라땅 아스카

  절의 유물과 거의 일치한다.

  일본에 건너와서 596년에 아스카 절을 건축한 백제 건축가들은 이미 그 이전에 백제 땅에서 왕흥사를 건축

  했던 똑같은 기술자들이었다.

  나라 땅의 아스카 절은 왕흥사를 모델로 건설한 일본의 유일한 1탑 3금당 형식 사찰이다 ” 말했다.

또 오하시 교수는

“ 현재 발굴작업이 계속되는 왕흥사 터전은 탑과 금당, 강당이 일직선으로 연결된 오사카의 ‘사천왕사’식 건물

  배치처럼 보이지만, 왕흥사의 회랑 쪽 동서 양쪽에 있는 부속 건물은 뒷날 일본에 건너와서 아스카 절을 지을

  때 2곳의 금당(동금당, 서금당)으로 변했다고 본다 ” 고 했다.

즉 아스카 절은 철저하게 왕흥사를 본떠 백제 건축가들이 세운 사찰이라는 것.

두말할 것 없이 오사카의 사천왕사도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건축가들이 세웠던 가람이다.

그 때문에 사천왕사에서는 지금도 해마다 11월 초에 ‘사천왕사 왔소’ 축제행사를 거행해 오고 있다.

 

부여 왕흥사 터전에서 출토된 곡옥이며 관옥, 금환(순금 둥근고리) 등 사리 공양구들은 역시 아스카 절터에서

출토되었던 사리 공양구 등과 일치한다.

두 사찰에서 각기 발굴된 수막새 등 기와의 연꽃무늬 문양도 동등한 것임을 살피게 해준다.

역시 부여의 왕흥사 유적을 답사했던 스즈키 야스타미(鈴木靖民, 일본고대사 전공) 고쿠가쿠인(國學院)대학

교수도 이런 사실을 인정했다.

“ 아스카 절 창건은 백제왕과 왜왕 사이의 활발했던 교류를 입증하고 있다.

  더구나 아스카 절 창건에 앞장섰던 왜왕실 실권자 소아마자 대신(大臣) 등 만조백관이 아스카 절의 목탑

  찰주에다 사리함을 봉안하던 법요 때 모두 백제 옷을 입고 참석했다는 역사 기사도 있다. ”

 

아스카 절은 1956년부터 그 옛 터전에서 1957년까지 발굴작업 끝에 ‘1탑 3금당 형식’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오하시 가즈아키 교수와 스즈키 야스타미 교수는 아스카 절은 6세기 말 당시의 ‘완벽한 백제 양식’의 가람

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게이오대학 시미즈 마사지 교수는

“ 평양 교외 청암리 고구려 사지(寺址) 등에 중앙에 8각 건물을 가진 3금당 형식이 확인됐다 ”

(‘古代寺院の成立’ 1985)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고대 백제와 고구려에서는 초기에 1탑 3금당 형식의 사찰을 함께 건립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일본에다 백제가 불교를 보내준 것은 일본 역사책에서도 고대 백제의 제26대 성왕(聖明王·523∼554 재위)

이라는 것을 시인하고 있다.

실제로 성왕은 그 스스로가 직접 일본에 건너다니면서 왜왕(긴메이천황·欽明·539∼571 재위) 왕위를 겸임

했던 것(제47회 참조)이며, 성왕이 왜왕으로 왜 왕실에 재임하고 있던 당시부터 성왕의 왕자였던 백제

위덕왕은 열성껏 백제 불교 일본 포교에 참여했던 것이다.

 

 

 

69. 교토 오중탑과 고구려 사찰터 발자취

 

六세기 고구려서 온 사신들 사찰 지어 조상 기려

 

 교토 고구려 오중탑.

 

 

지금의 일본 교토(京都)의 상징 건조물은 ‘기온’거리 언덕의 야사카신사(八坂神社, 본래 명칭은 기온사·祇園社)

옆에 우뚝 솟은 오중탑(五重塔)이다.

백제인 어머니 화신립(和新笠, 사망) 황태후의 몸에서 태어난 제50대 간무왕(桓武, 781∼806 재위)이 796년에

일본 고대의 새로운 왕도로 헤이안경(平安京)을 만들었던 곳이 지금의 교토 지역이다.

교토는 고대 고구려의 중요한 흔적들이 지나간 고대 한국인들의 발자취를 역력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중의 대표적인 게 교토시 동쪽 히가시야마(東山)에 있는 야사카(八坂) 언덕의 六세기 오중탑(목조탑)이다.

본래의 정확한 명칭은 호칸지(法觀寺, 이하 ‘법관사’) 오중탑이다.

이 법관사를 창건한 것은 고구려인들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법관사는 고구려에서 건너 온 고구려인 귀족들이 자리 잡고 만들어 그들의 조상을

받드는 이른바 씨사(氏寺)였다.

절 이름은 야사카데라(八坂寺)라고도 했다.

지금의 야사카신사는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에 일제가 명명한 신사의 이름이다.

그 이전까지는 기온사였다.

 

독자들이 이해하기 좀 복잡하겠으나 고대 일본에서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불교와 신도(神道)를 받들었다.

설명하자면 ‘신령님’과 ‘부처님’을 함께 존중하며 신앙했었다.

이것을 학문적으로는 ‘신불습합’(神佛習合)이라 일컬었다.

우리나라 불교 사찰에서도 산신령을 모신 ‘산신당’(山神堂) 등을 경내에 두는 곳이 있는 것과 유사하다.

고구려인들이 신도와 함께 불교를 신봉했던 이 터전의 발자취는 일본 고대 역사 기사에 상세하다.

고구려인들이 기온사(야사카신사)와 법관사(야사카데라)를 함께 섬기게 된 과정은 이렇다.

 

 고구려절터 시비 앞에서의 필자.

 

 

7세기 중엽에 고구려 28대 보장왕(642∼668 재위)이 보낸 사신들이 일본 왕실로 건너왔다.

‘일본서기’의 역사 기사를 보면,

“ 고구려에서 서기 656년 8월 8일에 대사 달사(大使達沙)와 부사 이리지(伊利之) 등 모두 81명이 건너왔다 ”

고 한다.

이들은 보장왕이 보낸 대사절단이었는데 이 당시의 일본왕은 백제 계열인 여왕인 제37대 사이메이왕(齋明,

655∼661 재위)이었다.

사이메이왕은 이 당시 고구려와 친교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이메이왕의 죽은 남편은 나라 지역에 ‘백제궁’을 짓고 살았던 유명한 백제계의 조메이왕(敍明, 629∼641

재위)이었다.

사이메이왕은 660년, 백제가 망하자 곧 백제 구원군 2만7000명을 편성한 뒤에 서거한 여왕이기도 하다.

더구나 주목되는 것은 야사카신사의 역사 기록인 ‘야사카신사 유서략기’(八坂神社由緖略記)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교토의 가미코마 지역에 있는 고구려사 절터.

 

 

“ 야사카신사는 ‘기온사’(祇園社)라는 명칭으로 널리 알려졌다.

  야사카신사의 창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사이메이천황 2년에 고구려에서 일본 황실로 온 부사

  (副使)인 이리지사주(伊利之使主, 이리시노오미)가 신라국 우두산의 신(神) 스사노오노미코토의 신주(神主)를

  이곳 야사카 터전으로 옮겨 모셔 와서 제사드렸다 ” 고 한다.

 

다른 고대 문서에도 불교 사찰이었던 법관사터에

“ 서기 876년, 신라계의 원여(圓如) 스님이 건너와서 이 터전에다 이번에는 기온정사(祇園精舍)를 세웠다 ”

(‘八坂御鎭座大神之記’)고 한다.

고구려 사신 이리지가 신라신의 신주를 모시고 건너온 데 이어 신라 승려도 이곳에 찾아와 불교 신앙도 함께

받들게 됐던 것이다.

 

고대 일본에는 서기 538년 백제 성왕(523∼554) 재위 시절 불교가 일본 아스카로 처음 건너 갔다.

이후 고구려와 신라에서도 불교가 전파됐다.

사찰과 고대의 신도 사당인 신사가 매우 사이 좋게 한 터전에 자리하는 등 ‘신불습합’이 이뤄졌다.

하늘신과 부처 동일체(同一體)의 종교적인 합병이 이루어진 셈이다.

12년 전 필자가 일본에서 시청한 일본 방송에서도

“ 야사카신사를 가리켜 ‘고구려대사’(高麗大社, 고마다이샤)로도 부른다 ”

(NHK TV 보도, 1996.5.20 PM 6:20)고 했다.

이로 미루어 야사카신사며 법관사는 고구려인들이 창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야사카신사는 이리지의 장남 마테(眞手)의 자손들이 대대로 ‘야사카노 미야쓰코’(八坂造, 사이메이왕이

  고구려에서 온 사신 이리지에게 내려준 사성·賜姓)를 세습해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 (‘八坂神社’, 1972)

고 한다.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815년 편찬)에도

“ 야사카노 미야쓰코는 고구려인 이리지이다 ” 라는 게 밝혀져 있다.

이리지(伊利之)는 일본 옛 문헌에 고구려 사신 이리좌(伊利佐, 이리사)로도 간혹 표기돼 있으나

이리지와 틀림없는 동일 인물이다.

 

그런데 매우 궁금한 것은 당초부터 이 법관사 어귀에 우뚝 서있던 유명한 ‘고구려문’(高麗門, 고마몬/일본 역사

에서는 ‘高句麗’를 한자어 ‘高麗’로 표기하고 있음)이 어디론지 자취를 감춘 일이다.

고구려문이 사라진 시기는 일본 군국주의 치하라는 게 통설이다.

왜냐하면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불교 말살정책’을 펼쳐, 일본 각지의 사찰들을 불지르고

불상을 훼손했기 때문이다(尾藤正英外 ‘日本史’ 1991).

 

필자가 추찰하는 것은 지금의 나라현 남쪽 끝 요시노산(吉野山) 어귀에 있는 ‘고구려문’은 아마도 일제가

교토땅 법관사 앞에 서 있던 문을 나라땅 남쪽 멀리 떨어진 외딴 요시노산 산속으로 옮겨간 것이 아닌가 한다.

일본 학자들도 그 발자취는 아직 밝히지 못하고 있다.

 

 고구려인의 야사카신사 사당.                      현재에도 쓰는 고구려 피리들.

 

 

교토에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또 다른 고구려 유적은 교토시 남쪽의 야마시로초 오코마 들판에 있는 고구려

절터(高麗寺祉)이다.

교토의 일본 국철 JR철도 교토선 가미고마역에서 동쪽으로 불과 300m 남짓한 곳에는 고구려절터 사적을

알리는 커다란 빗돌(1943년 4월 세움)이 있다.

 

사적 설명판에

“ 고구려절은 서기 7세기 초인 아스카 시대에 창건된 일본에서 가장 오랜 가람의 하나이며,

  한반도에서 도래한 고구려 씨족들이 세웠다 ” 는 기록이 있다.

이 사적비가 없으면 이 터전에 그 옛날의 고구려인들의 큰 가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쓸쓸한 고구려절터지만 교토 야마시로초는 이 절터를 크게 복원할 계획이다.

 

교토산대 고대사연구소장인 이노우에 미쓰오(井上滿郞)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 지난 날 이 고장은 교토땅의 오코마향으로 고구려인 씨족들이 번창했던 헤이안경의 이름난 고장이었습니다.

  이 지역 야마시로초의 명칭은 본래 고마손(高麗村)과 가미고마초, 다나쿠라손(棚倉村) 등 이 일대 고구려인

  들의 여러 고장들이 모두 크게 하나로 통폐합된 지명이기도 합니다.

  이 사적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34년이었습니다.

  그 당시 도로 확장 공사 도중 땅 속에서 옛날 기와와 도자기 등 여러 가지 유물이 나왔답니다. ”

 

 요시노산에 있는 고구려문.

 

 

이 고장 교육위원회에서 간행한 책자(‘사적 고구려사적’)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 12.8㎡ 와적(瓦積) 기단이 있고, 중앙에 심초를 갖추고 있다.

  심초는 사리공(舍利孔)을 갖춘 전국 유일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금당 자취와 탑자리에서 서쪽 8m 지점에 남북 13.3m, 동서 17m의 와적 기단을 갖는 금당과 강당 자취가 있다. ”

 

이곳 고구려절터에서 필자의 눈길을 끄는 것은 조그마한 시비(詩碑)이다.

지금부터 36년 전 이 유적에 찾아와서 사방 40㎝ 남짓한 돌에다 김모(이름이 흐림)씨가 지은 일본 와카(和歌)로

쓴 시비였다.

번역하면

“ 나그네여 생각해 보아요. 옛날의 길을 열어낸 고구려의 발자취를 ” (1972.3 吉日)이다.

이 구절은 필자의 가슴을 잔잔하게 흔들어 주었다.

 

일본 역사책에서는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고구려’(高句麗)를 주로 한자어 두 글자인 고려(高麗, こま, 고마)라고

써서 표현해 온다.

즉 고구려(高句麗)의 3글자에서 ‘구(句)’자(字)를 빼고 高麗(고마)로 써왔던 것이다.

 

그밖에도 또한 고구려를 가리켜 한자어의 박(こま, 고마)과 대박(大こま, 큰고구려)이라고도 써왔다.

이를테면 일본에서 유서깊은 신사(사당) 어귀에는 어김없이 문어귀 양쪽에 마귀를 쫓아준다고 하는 수호신

동물 한쌍의 ‘고구려 개’ 조각상이 있다.

이 수호신 고구려 개 이름 역시 ‘고마이누’로 불렸다.

 

일본 고대 건축에 사용했던 훌륭한 ‘고구려자’는 ‘고마샤쿠(高麗尺)로 표기해왔다.

또한 일본에서 아이들의 장난감인 ‘팽이’를 ‘고마’(こま, 한자로는 獨樂)라고 하는데 이것은 고대에 고구려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놀이 기구이기 때문이란다.

 

우리가 꼭 알아둘 것은 한국 역사의 ‘삼국시대’를 뒤이은 우리나라의 ‘고려’(高麗, 918∼1392) 시대의 경우,

한자어는 두 글자가 똑같은 고려(高麗)이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고려는 고구려와 구분하여 소리내서 읽는 음독(音讀)에서 ‘고라이’(高麗, こうらい)로 쓰고

있다는 점이다.

 

 

 

 

70.오사카 미나미구다라 소학교

 

옛 한국인 터전위에 학교 건립, 조상 얼 기려 '남백제'라 지어

 

 고학년 재학생에게 백제 역사를 교육하는 미나미구다라초등학교의 정문.

 

 

오사카(大阪)는 항구 도시이자 일본 제2의 대도시다.

오사카 시내에는 1874년에 개교한 ‘미나미구다라소학교(大阪市立南百濟小學校, 東住吉區湯里1-15-40)가 있다.

우리말로는 ‘남백제초등학교’이다.

 

 

필자는 6월 11일 ‘백제’라는 이름이 사용된 이 학교를 찾아갔다.

니시무라 치에코(西村千惠子) 교장이 기쁘게 맞았다.

“ 우리 학교 이름에 ‘구다라’(백제)가 들어 있는 것은 당연하고도 기쁜 일입니다.

  더구나 지금 일본은 한류 바람이 불고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고대 일본과 백제 역사 문화를 자세하게 알리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학교의 명칭에 ‘남백제’가 정식으로 채용된 것은 개교 20년이 되던 1894년부터였습니다.

  우리 학교는 백제와 연고가 매우 크기 때문에 한일 친선에 이바지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

 

자세한 설명을 마치고 교장은 최근 학교에서 만든 백제와의 직접 연관되는 내용만을 편집한 학교 안내 책자

(‘南百濟小學校と百濟とのつながりについて’ 2008년 6월 1일 제작)를 내주었다.

책자의 목차에 ‘한류(韓流) 붐’을 비롯하여 ‘백제(百濟) 붐’이라는 제목 밑에 소제목들이 달려 있다.

‘한국으로부터의 관광 투어’ ‘자매 도시 제휴 조사’ ‘홈페이지’ 등으로 이어진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 고대 백제 지역에서 일본의 남백제 지역(오사카)으로 많은 백제인이 넘어왔다.

  이들은 철을 전래하고, 청동을 제조하고 가공하는 기술을 선보였다.

  도기 그릇과 베틀, 토목 기술, 한자, 불교, 유교 등도 널리 알렸다.

  660년에 백제가 망했을 때는 백제왕족인 선광(善光) 일족이 이 고장으로 건너왔다.

  선광을 중심으로 백제인들이 거주 지역을 더욱 크게 확대했다.

  백제왕족인 선광을 고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제사로 모시고 있는 사당도 이곳에서 멀지 않은 히라카타

  (枚方)에 큰 터를 잡고 있다.

  그 사당은 이름이 ‘백제왕신사’(百濟王神社)다.

  이 신사 옆의 터는 고대 ‘백제사’라는 사찰 터전이며, 2005년부터 ‘백제사유적 발굴 조사’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미나미구다라초등학교에서 1km 떨어진 곳에 자리한 구다라대교.

 

 

니시무라 치에코 교장이 설명을 이어갔다.

“ 한국에서 많은 관광객이 우리 고장을 방문하며, 학교를 단체로 찾기도 합니다.

  미리 방문 날짜를 알려주면 좀 더 많은 편의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방문을 환영합니다.

  이 고장은 본래 고대 백제인들이 많이 건너와서 살았지요.

  646년에는 넓은 이 지역의 행정구역 이름도 ‘구다라 고우리’(百濟郡, 백제군)가 됐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우리 학교도 ‘남백제초등학교’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입니다. ”

 

백제군인 구다라 고우리의 ‘고우리’라는 말은 한국어의 ‘고을’에서 생겼다는 게 일본 학자들의 통설이다.

이곳 ‘유사토’(湯里)는 고대의 백제인 문화가 번창했던 오사카 지역의 하나였다.

행정 구역 상의 옛 지명은 ‘미나미 구다라무라’(남백제촌)에 해당한다.

‘무라’라는 일본어도 한국어의 ‘마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예전에는 백제강으로 불렸던 히라노강.

 

 

교토부립대학 고대사학과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수도 설명을 보탰다.

“ 오사카 지방에는 백제 도래인들이 매우 많이 살았지요.

  그래서 646년에 이 고장에 백제군이라는 행정 구역이 설치되었고요.

  백제군이 생긴 이후로 오사카 지방 등에 급격하게 많은 백제인이 찾아든 때는 백제가 멸망한 660년부터입

  니다.

  백제군 설치 사실은 일본 왕실 역사책 ‘속일본기’(續日本紀, 1965)에 기록이 있습니다. "

 

필자와 함께 6월 13일 도쿄의 한 호텔에서 ‘백제 문화와 일본 아스카’를 주제로 강연한 교토산대 고대사연구

소장 이노우에 미쓰오(井上滿郞) 교수는

“ 백제인들의 일본 도래는 일본 문화와 산업 등 모든 분야에서 일본을 눈부시게 발전시켰다 ”

“ 백제인과 백제 문화가 백제로부터 일본에 건너오지 않았다면 일본 고대 문화는 적어도 100년 이상 뒤졌을

  것이 틀림없다 ” 고 역설했다.

이날 일본인 청중은 350명이 넘었다.

 

 닌코쿠왕의 사랑을 받았던 백제인 고관 주군의 묘인 주군총의 비석.

 

 

‘자주 창조 협동 책임’이라는 교훈을 가진 남백제초등학교에는 학생 485명이 교직원 37명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학생은 대부분 근처 주택가에서 통학하고 있다.

“ 우리 학교에 다니는 아동 중에 한국 국적의 어린이는 5명입니다.

  의무 교육이어서 수업료는 전혀 없습니다. 다만 공작물의 재료 대금 같은 것은 학생 부담입니다. ”

 

교장이 설명을 덧붙였다. 일본 건물과 우리나라처럼 초등 학생의 숫자가 줄고 있다.

남백제초등학교의 전교생은 1950년에 2400명이었을 정도로 학생들이 많았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학생이 많이 줄었다. 취학 아동들의 숫자가 많이 줄어든 때문이라고 한다.

 

니시무라 치에코 교장이 더 자세한 설명을 한다.

“ 우리 학교에서는 고학년인 5학년과 6학년 학생들에게는 이 고장 ‘남백제’에 관한 역사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1학년 학생부터 이해하기 쉽게 백제 역사와 문화도 가르칠 예정입니다. ”

 

시설도 훌륭하다. 학교 본건물과 큰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맞은 편에 수영장과 운동장, 체육관이 있다.

3층 본관 앞에도 중형 운동장이 있어 아이들이 뛰어노는 공간이 여유 있어 보였다.

학교 후문 안쪽에는 소형 소방차와 구급차도 대기하고 있어 화재 등의 사고에 대비하고 있다.

 

교장과 교무주임(成瀨守一)의 안내로 학교에서 약 300m 거리에 자리한 사케노키미(酒君)의 묘지를 찾았다.

이곳은 고대 백제인으로서 왜왕실의 고관 자리에 있었던 이의 무덤이다.

‘사케노키미총(酒君塚, 이하 주군총)공원’이라는 명칭으로 꾸며진 이곳 중심부에

‘주군총’이라고 하는 한자어가 보였다. 음각된 글자가 보이는 약 1m 높이의 비석이 있었다.

나루세 모라카즈 교무주임이 상세하게 설명한다.

 

 ‘남백제’ 지역을 표시한 고대 지도.

 

 

“ 이 주군총은 닌토쿠 천황(仁德, 5C경)의 총애를 받았던 백제인 고관 주군의 묘지입니다.

  사냥을 좋아했던 닌토쿠 천황은 주군에게 사냥에 쓸 매를 길들이는 왕실 관할의 관청까지 설치해 주었지요.

  닌토쿠 천황은 주군을 매우 총애했기 때문에 주군이 세상을 떠나자 이곳 백제인 터전에다 이런 훌륭한

  묘역을 만들어 장례를 잘 모셔주었다고 합니다. ”

 

닌토쿠왕은 왕인(王仁) 박사 밑에서 ‘천자문’의 한자어며 ‘논어’를 배웠다는 게 일본 역사에 실려 있다.

왜왕실의 초청으로 일본으로 건너온 왕인 박사는 닌토쿠왕의 부친인 오진(應神)왕 당시 백제에서 ‘천자문’ 등을

전래했다.

왕인 박사에게서 글을 배운 닌토쿠왕이 등극하면서 주목할 만한 일이 있었다.

닌토쿠왕이 일본 최초의 시가(和歌, ‘難波津歌’)를 지었다(‘古今集’)는 기록이다.

 

물론 5세기 무렵 오사카 일대의 지배자였던 닌토쿠왕은 백제 왕족이다.

그 내용(‘日本國家の起源’ 1960)은 도쿄대학 사학과의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 교수를 비롯해

와세다대학 사학과 미즈노 유(水野祐·1918∼2000) 교수의

“ 오진 천황과 그의 아들 닌토쿠(仁德)천황은 백제국 왕가로부터 일본 열도로 건너와 정복 왕조를 이루었다 ”

(‘日本古代國家の形成’·1978)는 연구로 유명하다.

 

닌토쿠왕은 오진왕의 네 번째 왕자였다.

저명한 사학자 이시와타리 신이치로(石渡信一郞)의 저서 ‘백제에서 건너온 오진천황’(‘百濟から渡來した應神

天皇’·2001)은 현재 일본 사학계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다.

이시와타리는 이 책에서 오사카부 하비키노(羽曳野)시에 있는 오진왕의 왕릉에 대해

“ 오진릉의 피장자는 5세기 후반에 백제에서 건너온 백제의 곤지(昆支)왕자이다 ”

“ 그는 5세기 말에 백제계 왕조를 수립했다 ” 단정했다.

곤지 왕자는 개로왕의 둘째 왕자이다(‘삼국사기’).

 

필자와 함께 학교에서 약 1km 떨어진 ‘백제대교’(百濟大橋)라는 이름의 다리를 찾은 니시무라 교장이 이곳의

내력을 이야기했다.

“ 지금은 이 백제대교 터전이 주택가 시가지로 개발돼 있으나, 예전에는 이 고장 일대는 큰 벌판이었지요.

  백제강(百濟川)이라는 이름을 가진 강변의 큰 물이 흘렀던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백제강이라는 강 이름은 뒷날 ‘히라노강’(平野川)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

 

물론 이 고장은 ‘구다라노’(百濟野)라고 부르던 ‘백제벌판’이었던 곳이 개척돼 오사카라는 대도시로 발전하게

됐다.

강물도 홍수에 대비해 큰 줄기에서 여러 갈래의 도랑으로 작게 나뉘었다.

바닥은 깊게 파서 사방 공사를 하게 됐다.

이곳 남백제소학교도 현재는 큰 주택가에 둘러싸여 있으나 본래는 ‘백제야’라는 평야 지역이었다.

오사카 중심 지역의 ‘구다라고우리’라는 ‘백제군’은 1889년에 사라지고 말았다.

 

당시인 1889년 4월 1일부터 오사카 지역에는 일제의 새로운 ‘정촌제’(町村制) 행정 제도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오사카의 ‘백제’ 지명 등 고대 백제인의 발자취는 곳곳에 현존하고 있다.

그 옛날 ‘구다라스(百濟洲·백제주)’였다는 오사카 중심지는 참으로 한국인들에게 관심 있는 백제 옛 터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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