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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역사

삼국의 강역 11 - 섭라,임나,삼한,대마,가야,왜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5.10.26|조회수276 목록 댓글 0

섭라(涉羅)와 임나(任那)





장산군도의 특징은 수백리의 바다가 수심이 지극히 낮아 3~1미터 깊이밖에 안됩니다.

이곳이 간조시에는 전부 바닥이 들어나는것입니다.

이곳을 소해(小海)로 부르고 걸어서도 건널수 있다는 표현으로 섭라(涉羅)라고 부른듯 합니다.



섭라(涉羅)는 섬나라라는 말인데 평소에는 바다로 보이다가 간조로 물이 빠지게 되면 걸어서 건널수

있다는...이곳은 서해의 섬들입니다.



이렇게 걸어서도 들어갈수 있다는 섬을 말합니다. 물이 깊은 섬을 도(島),도(嶋)서(嶼)라 하고 이곳을 배를

타고 건너는것을 도(渡)라고 한다면 수백리의 바다가 수심이 낮고 간조때는 바닥이 들어나 걸어서도 건널수

있는 섬을 섬나라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주같은 깊은 바다는 섬라가 될수가 없는 것이지요.

섭'涉'자는 물을 걸어서 간다는 뜻을 가진자입니다


<졸본>과 <말갈>, <락랑>, <비류> 및 <섭라>의 위치 관계와 <涉羅>


추모경 권3 본기제1 임오년(BC39) 7월 기사 중에 아래와 같은 기사가 있어서 대략 번역해 보았습니다.

아래에 나오는 얘기는 소서노가 추모를 <졸본>의 궁으로 데리고 가서 <추모>에게 하소연 하는 대목입

니다. 이 하소연하는 구절 중에 <졸본>과 <말갈>, < 락랑>, <비류> 및 <섭라>의 위치 관련한 얘기가

나옵니다.

여기에 나오는 <섭라> 즉 <涉羅>가 혹 서토인들의 사서에 나오는 <사로> 또는 <사라> 및 <시라> 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지, 즉 일명 <서신라>를 달리 기록한 것 아니었나? 하는 것입니다. 궁금합니다.

동학들께서 가르침을 주시길 청합니다...

<焉公主再拜且拜曰"妾,以小邦之主世襲此邑,輓近以來,北辱於<末曷>東屈於<楽浪>,北有<松讓>南有<涉羅>,

無年不兵無日不戰,國弊民疫無以支存,况今新丧<于台國>無所主.妾以孤寡不知所圖,伏乞夫皇矜此可憐,使妾執

紼主此邦民.”>


공주가 재배하고 또 절하며 말하길 "첩은 소방의 임금으로 이 읍을 세습하였는데, 근자이래로 북으로는

<말갈>에게 욕을 당하고 동으로는 <락랑>에게 굽실거려야 하였고, 북쪽에는 <송양>이 있으며 남쪽에는

<섭라>가 있어 전란이 없는 해와 싸움 없는 날이 없었더니, 나라는 피폐해지고 백성들은 병을 알아서

지탱하여 살아갈 수 없었는데, 하물며 새로이 상을 당하였더니 <우태>의 나라는 주인이 없게 되었습니다.

첩은 아는 것이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르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부황께서는 이를 가련하게 여기시어 첩으로

하여금 삼베나 붙잡게 하시고 이 나라 백성의 임금을 해주세요."라 하였더니,


*여기서의 키포인트는 소서노가 비류와 온조를 대리고 졸본을 떠나서 정착한 대방고지입니다.

그녀는 이 대방고지에서 처음에 십제를 세우고 다시 십제가 발전하여 백제를 세우게 되는데 동쪽에 이웃한

낙랑과 북쪽에 위치한 말갈의 횡포를 호소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북쪽으로는 송양(松讓)이 있고 남쪽으로는 섭라가 있다고 함으로서 졸본이 대련의 북쪽에 있음

을 추정할수 있습니다.

여기서 송양은 비류국 왕이므로 대방고지의 북쪽이라 하면 요동반도의 북쪽이 됩니다.

따라서 비류국은 동가강의 주변일수가 없지요. 동가강은 바다와는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백제는 백가가 바다를 건너 세운 나라이므로 이곳이 소해의 광록도가 되어야 한다고 필자는 주장하여 왔

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진군국도라는 지도를 근거로 제시하였습니다.

즉 <위지>에서 말하는 고구려의 남쪽은 소해에 접한다는 바다 말입니다.(주1)


따라서 만약 요동반도의 남쪽 바다를 고구려의 남쪽바다로 인정할수 없다면 한반도 고구려땅의 남쪽에는

바다가 존재할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삼국사기등에 등장하는 왕이 남해를 순방하였다는 기록등은 모두가 요동반도의 남쪽에 있는

장산군도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 기록은 바로 <삼국사기><백제본기>에 나오는 건국초기기록에 송양과 섭라를 추가하였다고 보면 이해

하기가 쉽습니다. 남쪽의 마한이 섭라로 바뀌었을뿐입니다.(주2)


(주 1)世祖時,釗曾孫璉始遣便者安東奉表貢方物,並請國諱,世祖嘉其誠款,詔下帝系外名諱於其國,

遣員外散騎侍郎李敖拜璉為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郎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敖至其所居平壤城,訪其方事,云:遼東南一千餘里,東至柵城,南至小海,北至舊夫余,民戶參倍於

前魏時。

(주 2)<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때의 초기백제 위치

十三年 春二月 王都老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疆境 少有寧日 況今妖祥屢見 國母棄11)養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秋七月 就漢山下 立柵 移慰禮城民戶 八月 遣使馬韓 告遷都 遂定疆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

大海 東極走壤 九月 立城闕


13년(서기전 6) 봄 2월에 서울[王都]에서 늙은 할멈[老]이 남자로 변하였고, 다섯 마리의 범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나이가 61세였다. 여름 5월에 왕이 신하에게 말하였다.


"우리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이즈음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가 돌아가시니 형세가 스스로 편안할 수 없도다.

장차 꼭 도읍을 옮겨야 하겠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漢水)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길이 편안할 수 있는 계책을 도모하여야 하겠다."


가을 7월에 한산(漢山)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들을 옮겼다.

8월에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긴 것을 알리고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는데 북쪽으로는 패하

(浿河)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웅천(熊川)을 경계로 하였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9월에 궁성과 대궐을 세웠다.


그런데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섭라'를 '임나'라고 하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이 임나를 왜가 관가를 두어 관리하다가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고, 이를 다시 백제가 빼앗어가자

고구려는 북위에게 조공하던 옥이나 금등을 조달할수 없었고, 이후 왜는 임나를 백제의 영지로 불가피하게

승인하는 순서를 밟게되지요, 종래에는 다시 백제가 신라에게 빼앗기게 되니 이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왜와

가야. 백제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는 전쟁을 이르키기에 이른것입니다.


이들은 무엇때문에 임라를 서로 소유하기 위해서 쟁탈전을 벌렸던 것일까요.

여기에서 임라의 위치가 통설대로 한반도의 남쪽이라면 고구려의 영지가 될수 없었고, 졸본이나 낙랑과

가까울수가 없었겠지요.

뿐만 아니라 반대로 임라의 위치가 한반도의 북쪽이라면 왜가 점령하여 관리하는 관가를 둘수가 없었을것

입니다. 더구나 현재의 대마도는 졸본과 낙랑과는 거리가 먼 얘기가 됩니다.(김성겸)
 

 

<삼국사기>는 섭라를 탐라로,〈일본서기>는 임나(任那)로 불렀습니다.



조선말기에 저술된 안자산의 고기등에 소개된 섭라의 금광은 고구려의 소유였는데 백제가 빼앗었다고

하는 기록입니다.

섭라와 신라는 금이 많이 생산되어 의복과 금화를 만들어 통용시켰다는 내용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안자산의 국문학연구 섭라(涉羅)에서>

 


 


백제가 섭라를 빼앗아가자 고구려와 가야에서 일어나는 소동입니다.

고구려는 광산을 빼앗겨 위나라에 조공하던 옥과 금을 받칠수 없었고 가야는 자기들의 영토를 빼앗기자

분노한것입니다.

한편 위나라황제는 두나라를 종전대로 환원시켜 조공품을 계속 받치도록 고구려를 다구치고...

<한권으로 읽는 백제 왕조실록 증보판>



장산군도내의 삼한 분포도입니다. 그중에 가야에 속했던 섭라(임나)등은 각각 독립된 강역을 가지고 있었

습니다.그렇기 때문에 백제의 크기는 동,서 450리 남북 900리라 하였고, 임라를 다른 이름으로 대마도라

하고 상도와 하도에 10여국이 있으며 동서가 400리라는 기록도 보입니다.

안라와 가라등을 통틀어 임나로 불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였다. 북은 바다로 막히고 치소가 있었는데 국미성이라 한다.

동서에 각각 마을이 있다.

어떤자는 조공하고 어떤자는 반한다. 뒤에 대마의 두 섬은 마침내 임나가 통제하는 바가 되었다.

때문에 임나는 이 때부터 대마도를 다 뜻하는 말이 되었다.

옛부터 구주와 대마도는 곧 삼한이 나누었던 땅으로 본래 왜인들이 살던 땅이 아니었다.

임나는 또 갈려서 삼가라가 되었다. 소위 가라는 가장 중심이 되는 읍의 이름이다.

이 때부터 삼한은 서로 다투고 싸워왔고 세월이 오래 되도록 적대감을 풀지 못하였다.

좌호가라는 신라에 속하고, 계지가라는 백제에 속함은 바로 그것을 말한다.

영락 10년 3가라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인들은 모두 임나에

통제되었으니, 열나라가 나누어 통치하면서 연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 속하여 열제의 명하는 것이 아니면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는 못했다.

< 한단고기><고구려국 본기>



 

가야는 섭라를 탈환하기 위해서 고구려.위.양.신라.왜등에 국제사회의 도움을 요청하였고, 백제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왜의 도움을 요청하고 섭라는 과거로 부터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섭라(임나)는 실로 일촉즉발의 화약고였습니다.<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증보판>249쪽


*섭라는 왜가 백제로 통하는 길목이요 선진문물을 공급받는 통로이므로 백제의 편을 들었다. 

그리고 양나라와 같이 백제의 편을 들자 수백년동안을 왜와 통하던 가야는 신라쪽으로 기우러지고 결국

신라와 합병하게 된다. 이것은 모두 백제 무령왕때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523년 무령왕이 사망하자 급보를 왜로 보내어 임나를 지켜줄 군사를 보내주도록 요청합니다.


*물부대신 녹록화를 추록화로 수정 요구됨


<삼국사기>에는 동성왕대에 섭라를 장악하였다고 하였으니 섭라가 임나와 동일한 이름이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임나에 속한 4개현의 이름이 섭라와 같을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본서기>계체천황조 에 임나국의 4개현의 이름이 상다리,하다리,하타,모루등으로 나와 있으나

이곳은 통설상 순천,여수,광양으로 밝혀져 있어 고구려의 영지가 될수 없을 뿐 아니라 분쟁의 원인이 되었던

가(珂)라는 옥이 생산된 사실도 없고. 금.은등이 생산된 사실이 없으므로 실재의 지명과는 거리가 멉니다.


*<삼국사기><백제본기>동성왕 20년조에는 섭라를 탐라로 또는 탐모라로 기록하였습니다. 

다른사전에서 섭라와 탐라는 같은 지명이란 설명이 따르지만 <삼국사기>에서의 섭라를 탐라로 기록한것은

교간시 왜곡의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백제의 무령왕이 서거하자 왜의 천황에게 급히 연락을 보내어 지원군을 요청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특이한 표현이 있습니다. <가을까지는 바다밖 미리거>를 잘 지키겠다는 말과 또 바다밖 다른나라

들은 활과 말이 매우 부족한데,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것을 천황에게 받아 강한 적을 막았다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백제는 바다안에 있었다는 해석이 됩니다.



<일본서기>의 숭신천황조에서 나라의 산물들을 소개한 내용들입니다.

<위지> 동이전의 변진한조에는 철이 많이 난다고 하였고, 일본<고사기>와<일본서기>에서는 신라를

금,은의 나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라와 금관가야가 철과 금,은의 생산지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특산물중 특히 금,은,철의 생산은 위치를 구분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단 일본 <고사기나> <일본서기>가 말하는 "금.은 채색 다재기국"(金銀採色 多在其國)이란 기록과

<위지><동이전>의 변.진한조에서 말하는 칠이 많이 난다는 기록은 혹시 가(珂)가 나전(螺鈿)즉 자개를

말하는지는 다른 기록들을 확인하여 결론을 얻어야 할것입니다.

이곳은 전복류를 많이 생산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 섭라의 중국대륙설은 인접해 있던 고구려의 졸본.낙랑.삼한.왜등의 위치와 너무 거리감이 있어 제외시켰

습니다. 안휘성 주변에 고구려와 삼한이 있을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가(珂)에 대한 설명에서 나전칠기를 앞세우면서 대륙신라를 내세우는 학설은 연계되어 있는 주변

국들을 고려할때 타당성이 희박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주석 100) 의 역주에서 임나의 위치를 낙동강 중류지역인 고령일대로 비정한것은 타당성이 없습니다.

고구려가 이곳을 점유한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령의 북쪽지역에 졸본과 낙랑 말갈등이 있을수가 없다는것이 부정하는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애시당초 분쟁이 일어난 원인을 삼국사기는 섭라에서 산출되는 가(珂)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珂'는 옥이름입니다.

그런데 가야국 강역에서 옥이 산출되는곳이 있는지를 신증 동국여지승람을 통하여 조사하여 보았으나

찾을수 없었습니다.

순천 여수 광양등에서도 옥이 생산되는곳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서기나 고사기에서 신라를

황금.은.철의 나라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역시 경상도를 통틀어 토산물을 조사하여도 금이 생산되는곳을

확인할수가 없었습니다.

조사결과 확인된 광산물로서 창원의 불모산에서 철. 김해도호부 관내에서 철이 생산될뿐 옥이 생산되는

곳은 상주의 갑장산에서 옥석.옥등석.철, 풍기에서 수정석,부산에서 청옥. 양산에서 쇠. 언양에서 쇠.

울산에서 마뇌석. 경주에서 수정과 화반석 등입니다.

그렇다면 임나로 지명이 밝혀진 순천이나 여수등은 본래의 지명과는 다른 옮겨진 장소이기가 쉽습니다.

황금의 나라 신라 또한 마찬가집니다.


추모경 동명14년정유년 9월 기사에 아래와 같은 <섭라/=사라?>관련 기사가 또 나와서 올려드립니다.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九月,<涉羅>女主<奕居知>遣使入貢.<涉羅>,在於<桓那>之東南,依山傍海,世襲女主,山多野少,民以魚獵為

生,冢居岩伏,好歌舞鬼神,囯之俊秀者為女主之嬖臣,生女為巫,其最少者継之.其俗淳實不䓁能為其主而盡忠.

上,賜<奕居知>綾緞,命親自入朝.


9월, < 섭라>여왕 <혁거지>가 사신을 보내 입공하였다.

<섭라>는 <환나>의 동남에 있으며, 산을 의지하고 바다{또는 호수나 강 같은 큰 물} 곁에 있는데, 여왕을

세습하였고, 산이 많고 들이 적어서 백성들은 어렵을 생업으로 삼고 산등성이{또는 무덤이나 땅굴}나

바위굴에 숨어살며, 노래하길 좋아하고 귀신에게 춤을 올리며, 나라의 준수한 이들이 여왕의 폐신이 되어서,

딸을 낳으면 무녀를 삼으며 그 중 가장 나이가 적은 이가 뒤를 이었다.

그곳의 습속은 도타워서 열매{또는 곡물}가 잘 여물지 않으면 능히 그 임금을 위해 ①죽음으로 충성하였다

{또는, ②성심을 다하여 충성하였다}.

상이 <혁거지>에게 능라를 하사하고는 친히 스스로 입조하라고 명하였다.


* 환나(桓那)는 어디를 말하는것일까요. 고구려에서 조공을 받았으니 고구려의 치도일것인데 <요사>

<지리지>는 환주를 옛 고구려의 중도성으로 고구려가 처음으로 궁궐을 세운곳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지명을 환도(桓都)라고 불렀는데 고국원왕때 진(晉)나라의 모용황의 침입을 받아 궁궐이

모두 불타버리고. 소속현들도 모두 폐지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이곳은 주변에 있던 송양의 비류국이 있던 정주와 함께 옮겨져 녹주에 예속된것입니다.

패수는 초기에는 개주의 남쪽으로 흘러 소요수에 합류되어 남쪽 바다로 입해하였으므로 비류수와 합류하게

되고, 따라서 환도는 개주의 서남쪽(지금은 바다)에 있었다고 추정이 됩니다.

이곳은 현재의 북황성도 주변입니다.

환나라는 기록이 다시 나타나지 않는 이상 환도를 환나로 보는것이 타당할것입니다.

그렇다면 환나의 동남쪽에 있었다는 돌거지라는 여왕이 다스리던 섭라는 장산군도의 대마도나 마한이

있었다는 장자도가 타당한 위치입니다.

[환주(桓州) 고구려 중도성(中都城)으로 옛 현은 환도(桓都)·신향(神鄕)·패수(浿水) 등 셋인데 모두 폐지

되었다. 고구려 왕은 여기에 궁궐을 처음 세웠는데 나라 사람들이 신국(新國)이라고 불렀다.

5대손 소(釗 ; 고국원왕)는 진(晉)나라 강제(康帝) 건원(建元) 초년에 모용황(慕容皝)에게 패하고 궁실이

불타버렸다. 호구수는 700이며 녹주에 예속되었는데, 녹주에서 서남쪽으로 200리 떨어져 있다.]

<요사 지리지> 녹주부


* <추모경 >내용중에는 환나(桓那), 패자(沛者), 둔(屯), 한(汗), 등의 용어가 나오는데 둔은 만주말로

해도(海島)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추모경>동명왕 7년조에 환나한(桓那汗)남쪽이란 말이 나오고 온조를 환나 패자(桓那沛者)로

삼았다는 기록도 나옵니다.

패자(沛者)란 고구려초기의 대관(大官) 또는 대로(對盧)에 해당되는 관직입니다.

패(沛)자는 '늪'이라는 뜻입니다.

온조가 출생하여 어렸을때 졸본에서 자라서 태자로서 처음 관직을 제수받은 기록이 환나의 패자입니다.

둔'屯'은 해도(海島), 패(沛)는 늪, 한(汗)또한 만번한에서 나온 표현으로서 물이 질펀한 상태를 말합니다.

졸본이 내륙에 있었다면 이러한 용어들이 필요가 없는것이지요.

졸본과 비류수는 바다에서 가까운 늪지대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곳이 윤몰되어 바다로 변한것이고 위치는 요동반도의 남단 답씨현(沓氏縣), 그러니까 대련의 서쪽

바다입니다.

그러므로 섭라(涉羅)의 위치는 소서노가 건국한 장산군도의 대방고지 남쪽에 있는 삼한땅 대마도 주변이

됩니다. 이곳이 고구려의 초기 도읍지(졸본) 한나의 동남쪽이 되는것이지요.

<三月 茵切太子爲溫祚太子爲桓那沛者>
< 두절태자를 온조태자로 하고, 환나패자로 임명하였다


추모경에 의하면 낙랑은 남옥저의 땅이라고 하며, 아슬라·장령이라는 명칭과 같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낙랑에 철기병(鐵騎兵)이 등장하기도 하며, 대방이 등장하는 것은 기림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낙랑과 대방,아슬라가 남옥저땅 주위에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낙랑과 대방이 동해안에 있을수 없드시 아슬라 또한 동해안에 있을수 없다는 말이며 신라로 떠나는 배들은

요동반도의 남쪽이 되어야 할것입니다.        

파소공주는 동옥저를 거쳐 신라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남옥저는 동옥저의 남쪽입니다.

그러니까 눌지의 동생 보해가 탈출하기 위해서 배를 탔던 아슬라와 같은 장소로 추정이 가능합니다.                           
「환단고기」6-2 에 의하면,


<북부여의 왕족 협보(陜父)가 남하하여 웅본(熊本:구마모토)에 웅습성(熊襲城)을 만들고, 다파라국(多婆

羅國)을 세워 일향(日向)의 안라국(安羅國)과 연합하여, 야마다이(邪馬臺)국이 되었다. >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모두 지금의 일본이 아닌 요동반도의 남쪽에 있는 서한만에서 일어났기가 쉽습니다.

서한만에는 야마대로 불리는 대화도(大和嶋)가 있습니다. 

임나와 이왜의 무리는 모두 신하로써 따르지 않는자가 없었다. 해동의 번성함은 이때가 그 극성기이다.

이보다 앞서 협보는 남한으로 도망쳐 마한의 산중에 살았다.

그를 따라온 자도 수백가였는데 몇해 지나지 않아 큰 흉년에 시달려 유리하고 방황했다.

협보는 장혁을 알고 무리를 유혹하여 양곡을 도둑질하여 배에 싣고 패수를 따라 내려와 해포로부터 몰래

항해하여 곧바로 구야한국에 이르니 곧 가라해의 북안이다.

여기서 수개월 동안 살다가 아소산으로 옮겨가서 기거했다. 이를 다파라국의 시조라한다.

뒤에 임나를 병합하여 연정을 세워 이를 통치케하다. 3국은 바다에 있고 7국은 뭍에 있었다.

처음 변진구야국의 사람들이 한때 모여 산적이 있었는데, 이를 구야한국이라 한다.

다파라를 다라한국이라고도 한다.

홀본으로부터 와서 고구려와 일찌감치 친교를 갖고 있었으스로 늘 열제의 통치를 받았다


삼국유사에 보면
駕洛國記 朕降于玆,天命也.配朕而作后.亦天之命.卿等無慮.遂命留天干押輕舟,持駿馬. 到望山島立待.申命神

鬼干,就乘岾.(望山島.京南島嶼也.乘岾,輦下國也.)


가야 김수로왕이 배필인 허황옥을 맞기 위해 신하를 보내는 장소가 망산도입니다.

그동안 허황옥의 도착지를 복원하기 위해 많은 이가 심혈을 기울여 김해일대를 조사했으나 실패했습니다.

비전문가인 본인은 우연히 강화의 남단에 작은 섬인 현지명 황산도가 망산도가 아닐까 의문을 가져봤습니다.

허황옥은 도착후 마니산을 향해 절을 올립니다.

忽自海之西南隅.掛緋帆,張茜旗,而指乎北.留天等先擧火於島上    


허황옥이 탄 배가 바다의 서남쪽에서 나타나는 묘사입니다.
현재 지명 황산도에서 서남쪽이면 허황옥이 출발지로 추정하고 있는 인도나 중국 사천성 등에서 출발했

다고 봤을때 무리가 없습니다. 출발지가 어디든 황산도의 서남쪽은 방향이 맞습니다.

朕欲定置京都.仍駕幸假宮之南新畓坪.(是古來閑田.新耕作故云也.畓乃俗文也)


수로왕은 경도를 정해 두고자 하였다. 거듭 가?는 임시궁의 남쪽인 신답평을 희망했다.

(신답평은 예부터 가로막아 놓은 밭이었는데 새로이 경작함이라, 답은 속문이다.)
신답평이 어디일까요? 속문인 답이 경작을 부연하는 잇는(俗) 글자일 경우 신평 또는 신경新耕을 암시할

수도 있겠습니다.



섭라에서 생산되는 가(珂)가 자개 자료인 라전(螺鈿)이라면,




대련에 있는 조개박물관이 마치 고성처럼 솟아 있습니다. 대련은 발해쪽의 금주만과 장산군도의 거의

전역에서 많은 종류의 조개를 다량 생산합니다.

이곳은 모두가 고구려.백제와 신라.가야의 영역이었지요.

섭라는 임나로서 본래 가야 땅이었지만 한때 왜가 들어와 관가를 두었었고, 고구려가 점령하여 가(珂)라는

옥종류의 조공품을 조달하던 곳입니다.

후에 백제에게,또 신라에게로 넘어가는 쟁탈전이 일어났고 그 원인은 교통요지의 확보와 옥종류의 보석인

가(珂)를 확보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광개토대왕의 비문에 기록된 임나는 한반도의 남쪽이 아니라 서한만 안에 있던 장산군도였습니다.

더 상세한 임나 기록은 두개의 다른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임나는 한반도의 가야가 아닙니다. 이로써 중기 삼한의 위치는 다시 검토되어야 합니다.

이 건물은 2009년도부터는 미국의 쉐라톤호텔이 경영권을 받아 운영한다는 소식입니다.




마한과 임나,가라.등에서는 모두가 소라와 전복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신라쪽에서는 전복이 안보이는구뇨.대마도에 그려진 두개의 섬을 잘 보세요.

왜 대마도로 이름을 지었을까를 생각하게 합니다. 오른쪽 섬은 완전한 말입니다.


세계 나전칠기의 본산인 한국나전칠기 공예는 중국의 조칠 기법의 척홍칠기로, 일본에서는 칠회기볍의

시회칠기로, 한국에서는 자개를 상감하는 나전칠기로 각기 그 특색을 보아가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나전칠기의 나(螺)자는 바다조개의“소라”(진주)라는 뜻이며 전(鈿)자는 보배롭게 “꾸며”다는 뜻이고

칠(漆)자는 “옺칠하다”라는 뜻이며 기(器)자는 소중함을 담는 “기물”이라는 뜻을 말합니다.

나전칠기는 섬세함과 신비스러움으로 오랜 세월 동안 우리 고유의 공예품으로 사랑 받아왔으며 칠흑 같은

칠 바탕에 진주 빛과 같이 영롱한 빛을 발하는 자개의 섬세한 무늬효과를 가진 나전제품은 천연나무와

깊은 바다에서 자생하는 전복, 소라 와 목재, 장석 및 기타 각종 재료를 이용하여 만드는 반복적이고 정밀한

세공작업과 복잡한 칠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나전칠기는 잘 건조되고 고운목재(고사목)를 이용하여 물건의 모양을 제작한 뒤(일명 백골이라고도 함)

여기에 헝겊과 여러 가지 재료를 첨가한 뒤 옻칠 혹은 카슈칠을 한뒤에 전복, 소라, 진주, 조개들의 자개를

갈고 세공하여 수놓은 제품을 통틀어서 나전칠기라 합니다.

하나의 완전한 제품이 완성되기가지 3~6개월의 기간이 소요됩니다.
나전칠기에 사용되고 있는 옻칠은 칠중에서 가장 강한 것이며, 그 수명 또한 영구불변의 것입니다.

한국의 나전칠기의 기원을 살펴보면 옛 낙랑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고증과 유물에 의하면 7~10세기의

통일신라시대에 나전칠기가 성행하기 시작하였으며, 11세기인 고려문종때 조정에서 나전칠기 제품들을

제작할 수 있게 공방제도를 두어 운영하였고 이곳에서 제작되는 나전칠기들은 외국의 사신들이나 왕에게

선물로 보내졌다고 합니다.

나전칠기 제품이 일반적으로 보편화된 시기는 임진왜란 때 삼도수군통재사로 부임하신 이순신 장군께서

통영에 13공방을 두면서 일반서민들도 나전칠기 제품을 가까이서 접할 수 있으면서 통영이 나전칠기 제품

의 생산지가 된 동기는 남해안의 맑은 물에서 생산되는 전복껍질로 그 색깔이 오색영롱하여 검은 칠 바탕

에 아주 잘 어우러져 고급가구를 많이 생산하게 되었다.

오늘날 일본, 독일, 미국, 영국, 화란 등지의 박물관에 소중히 소장되고 있는 것들은 그 당시의 선물로

보내졌던 것으로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나전칠기 공산품이라 할 것입니다.

현재 한국에서는 나전칠기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인간문화재 7명과 무형문화재인 지방 인간문화재

5명이 있으며 이들의 기법을 계승하기위해 많은 이수자들이 연마하며 전국에 20만여 나전칠기 기예인들이

연구와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

외세의 영향으로 많은 변화를 거친 한국의 문화와 예술 중에서 커다란 변화없이 그대로 계승되어온 나전

칠기는 이제 한국민 모두에게 민족공예로 추앙되고 있습니다.

이 자랑스러운 나전칠기는 광채는 온화 하면서도 유유하고 은은히 빛내는 조용한 색상입니다.
신비함과 섬세함은 어느 예술품과 보석보다도 으뜸이며 전세계인의 전통공예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출전- 문화칠기사 제공)


지증왕 14년(513년) 8월의 기사입니다.
金官入貢 磁器七事 貝器八事 于仙院 后命仙臣亥牟 往金官 習其事


금관국이 磁器(사기그릇), 貝器(패기?)를 신라에 바쳤다.


選自【古籍十八種】/通典/邊防典凡十六卷/卷一百八十五 邊防一/東夷上/百濟
自晉以後,吞并諸國,據有馬韓故地.其國東西四百里,南北九百里,南接新羅,北拒高麗千餘里,西限大海,

處小海之南.國西南海中有三島,出黃漆樹,似小榎樹而大.六月取汁,漆器物若黃金,其光奪目.


통전/변방전/동이 상/백제


<일본서기>나 <고사기>에서 말하고 있는 신라의 금 생산에 대하여는 장산군도의 소흠도에서의 광물생산

통계를 확인할수는 없었으나 주변에서 가까운 단동에서의 광물생산 통계를 조사한 결과는 놀라운것이었

습니다. 그렇다면 정확한 추정이라고는 볼수 없으나 바다까지 연결되어있는 대륙붕의 종점에서 유사한

광물질이 생산될 가능성도 있다고 볼수 있는것입니다. 다음은 단동의 광물자원 현황입니다.

<단동지구의 광산자원은 매우 풍부하다. 금속, 비금속 광산이 52종 , 그중 매장량이 많고 채굴까치있는

것이 34종에 달한다. 대리석, 붕, 금, 연, 아연 등은 전 성(省) 나아가 전국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예를 들면 붕광의 매장량은 전국 고체붕광 총매장량의 94%를 차지하며 년생산량은 전국의 첫 자리

를 차지하고 있고 예로부터 <붕해>로 소문이 높았다.

에비르기광산으로 석탄, 니탄 및 우라나움, 트리움 등이 있다. 석탄은 주로 봉성시 새마 -고가 일대에 분포

되여있는데 무연탄을 위주로 매장량이 약 2,000만톤에 달한다.
금속광산은 금, 은, 동 , 연 , 아연 , 월프람, 몰리부덴 , 철과 망간 등이 있다.

그중 금광과 연, 아연광은 성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미 발견한 금광은 대중형이 세곳이고 소형이

한곳이다. 연, 아연은 중요한 유색금속자원이다. 청성자 연, 아연광외에도 소형광산이 많다.

동광은 관전현 만보 와 사평가 에 분포되여있다. 철광은 주로 봉성시에 있다. 망간광은 동항시 황토감 등지

에서 발견되였다. 그리고 희소금속니오비움과 탄탈은 주로 봉성시 새마일대 알카리성 암석속에 존재한다.     


지증왕 14년(513년) 8월의 기사입니다.


金官入貢 磁器七事 貝器八事 于仙院 后命仙臣亥牟 往金官 習其事


금관국이 磁器(사기그릇), 貝器(패기?)를 신라에 바쳤다

칠하면 황금색이 난다는 황칠수가 백제의 서남쪽 섬에서 생산된다는 기록이 있고 보면 이곳에서 라전칠기의

완성품이 생산되었을 가능성이 충분이 있습니다.     

選自【古籍十八種】/通典/邊防典凡十六卷/卷一百八十五 邊防一/東夷上/百濟

自晉以後,吞并諸國,據有馬韓故地.其國東西四百里,南北九百里,南接新羅,北拒高麗千餘里,西限大海,

處小海之南.國西南海中有三島,出黃漆樹,似小榎樹而大.六月取汁,漆器物若黃金,其光奪目.

통전/변방전/동이 상/백제

진(晉)나라 이후 마한고지의 여러나라를 병합하였는데, 그 나라는 동서가 400리,남북이 900리다.

남쪽으로 신라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와 천여리 떨어져 있다.

서쪽은 대해이고, 소해의 남쪽에 있다. 나라 서남쪽으로 섬이 세개 있는데, 황칠수가 난다.

소하수 큰거와 유사하고 6월에 집을 짜며,칠기에 바르면 그 색갈이 황금색을 띤다.


<신라사략> 금천대제 법흥진왕조 7년(서기 520년) 3월조에 <三月 帝與玉珍宮 入桃山

造玉人十二 于別洞>옥을 만드는 옥장인 12명이 별관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가야가 신라에 흡수
된 이후인지는 알수 없으나 신라에서 옥이 생산되고 있었다는 증거가 들어난 셈입니다.


낙랑이라는 명칭은 기림기에 마지막으로 등장한다. 기림기에 우두주에서 낙랑과 대방에게 공물을 바쳤는데,

백제와 고구려가 낙랑과 대방을 갖기 위해 전쟁을 한다고 하였다(근초고왕과 고국원왕의 직접적인 전쟁

원인이다).

추모경에 의하면 남옥저의 땅이라고 하며, 아슬라·장령이라는 명칭과 같이 등장한다.

낙랑에 철기병(鐵騎兵)이 등장하기도 하며, 대방이 등장하는 것은 기림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참고>   <추모경> 與樂浪王柴吉定界 柴吉欲得奄東盖斯之地曰 "我本南沃沮也 願得沃沮故地" 上許之


낙랑왕(樂浪王) 시길(柴吉)과 국경을 정하였다.

시길(柴吉)은 엄동(奄東)의 개사(盖斯)의 땅을 얻고 싶어서 말하기를 "저는 본래 남옥저(南沃沮)였기에

옥저고지(沃沮故地)를 얻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여, 상이 이를 허락하였다.


대마도는 가야국의 국미성이었다 


▶ 임나(任那)는 경남 김해가 아니고, 대마도이다.


고구려 본기(환단고기): 任那(임나)는 본래 對馬島(대마도)에 있고 서북 쪽 경계이고 북쪽은 바다가 막혀

있다. 통치상 말하기를 나라에서 제일 끝에 있기 때문에 國尾城(국미성)이라 하였다.

[곧 가야(伽倻)국의 국미성이라 사료된다] 동서쪽에 부락이 각각 있었는데 혹 朝貢(조공)도 하고 혹은

반란도 일으켰다. 후에 對馬島(대마도)의 2島(섬)을 任那(임나)라고 했는데 두 섬을 [고구려]가 통제하고

부터 임나 전체를 對馬島(대마도)라 칭했다.

옛 부터 구주(仇州)와 對馬島(대마도)는 고조선 삼한(진한, 마한, 변한)이 나누어 통치한 지역이며 본래는

倭人(왜인)이 거주한 지역이 아니다.

任那(임나)를 또 나누어 三加羅(삼가라)가 되었다. 소위 加羅(가라)는 [가야국의] 수로왕(首露王)이 다스린

邑(읍)을 칭한다. 이 가라를 3국이 서로 차지하려고 투쟁하였기에 오랜 세월에도 서로 원한을 풀지 못했다.

[대마도의] 佐護加羅(좌호가라)는 신라에 속하고, 仁位加羅(인위가라)는 고구려에 속하고, 鷄知加羅(계지

가라)는 백제에 속해 있었으나 永樂(영락) 10년(400년) 三加羅(삼가라)는 모두 고구려에 귀속되었다.

이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모든 倭(왜)를 다 통합하고 任那(임나)도 10국이 나누어 통치하기로 약정하고

聯政(연정)이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직할이기에 烈帝(열제)의 소명을 얻지 않고 자국들이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이게 어떻게 현재 동해의 대마도가 될 수 있겠습니까. 대마도는 1940년도에 러일전쟁을 하기 위해서 일본

군부가 운하를 뚫어 물길을 낸것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대마도가 어떻게 나라의 최 남단이 될수 있습니까?

 

 

 

낙랑.대방군과 삼한.왜도


 

서진군국도(西晉郡國圖) 요동반도의 남쪽바다에서 발해해협에 걸쳐있는 낙랑.대방군.진(晉)나라당시

낙랑군과 대방군의 강역은 요동반도 남쪽해안의 장산열도에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서진군국도 1(국립중앙도서관소장본)

이상과 같이 바다로 확인된 고조선과 낙랑,대방등에 대해서 영국의 탐험가 그레이엄 핸콕은 해저탐사

가능성을 그의 저서에 담고있다 

 

장산군도에 펼쳐진 삼한과 왜 그리고 낙랑과 대방 동예등의 위치도  이중 대마도는 임라가라 추정 

 

후한 이후 낙랑.대방.동예(한)위치도

 대마도의 실제 형태 남→북

대마도의 실제 형태 북→남 

삼한위치도

삼한과 왜 위치도

 

 

 

 

(九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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