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 수군의 공격 루트 《한서 보주에서 漢書補註》
한나라의 수군장수 양복은 7천명의 수군병력으로 산동반도의 제남을 출발하여 발해바다로 나간 다음 북
쪽연안을 따라 요서의 열구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순체군의 육군 5만병력을 싣고 목적지인 조선을 공격하게 되어있었다.
그런데 순체군의 도착이 지연되자 양복이 단독으로 먼저 조선으로 출격하게 된것이다.
물론 연달아 후속부대가 따라오는걸로 약속이 되어있었지만 조선의 패수서군에 막혀 주공격군의 도착이
또한번 차질을 비졌다.
만약 공격목적지를 한반도로 하였다면 당시의 단독항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우거가 지키고 있던 조선의 위치는 등주의 거너편에 있던 사문도였다.
그 경로를 설명한 기록이 《한서》<보주>(1)에 있는것이다.그 내용에 조선의 위치가 사문도로 등장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혹자는 한무제군이 한반도의 평양을 공격하였다고 우기지만 그들의 공격선은 발해를 벗어난 근거가 없다.
내용을 검토하기로 한다.
*선겸왈, 호(胡)의 주에 이르기를, 양복이 제(齊)를 따라나와 발해에 떳다고 하였는데,
이 발해는 청주(靑州)의 북쪽에서 유주(幽州)와 평주(平州)의 남쪽에 걸쳐있는 바다를 말한다.
그 바다를 통상적으로 발해라고 한다.
이 발해는 발해군(渤海郡)과는 뜻이 다른 말이다. (호(胡)의 주란 호위(胡渭)의 주을 말함. 필자 주)
심흠한이 말 하기를, 제남에서 배를타고 떠나, 북쪽에 있는 평주 갈석에서 출발하여 남쪽의 발해 입구에
있는 등주 사문도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평주 갈석과 등주 사문도간의 거리는 오백여리이다.
《독서방여기요》에 이르기를, 그 바다에는 유주와 평주등에서 건너간 한량(난민?) 들이 있다고 하였다.
이 발해바다는 동과 서의 넓이가 천 여리이다.
설개선이 말 하기를 하구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은 옛날에는 평주 석성현에 있었는데,
이 곳은 갈석이 동쪽으로 바라다 보이던 곳이었다. (열구列口)
그 후 역하(逆河)는 대풍이 불어 점점 바다로 빠져 버렸다.
정대창이 말 하기를 역하는 세상에서 말하는 발해(渤海)다.라고 하였다. 이상...
다음은 《한서 감기(漢書 鑑記)》 의 기록이다.
왕 우거는 성을 지키다 구멍을 통하여 내려다 보니 누선군의 숫자가 적은 것을 알고 즉시 성밖으로 나가
공격하니 누선군은 패하여 산산이 흩어졌다.
그들은 산중에서 10여일을 헤매이다 다시 뫃였다.좌장군은 패수서군을 공격하였으나 뚫치 못하였다.
王 右渠城守窺知樓船軍昭卽出城擊樓船軍敗散遁山中十余日稍求退散卒復聚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未能波,
漢書鑑記
송나라때 만든 우적도를 저본으로 한나라 수군의 위만조선 공격 루트를 표시한 지도다. 근거:<한서 보주〉
소개드리는 우적도는 송나라때 제작된 지도다. 이 지도를 잘 보시면 동서가 넓고 남북이 좁은것을 보실수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발해의 북방한계선은 난하 하구였다.
평주의 갈석산이 난하하구 근방에 있고 이곳을 평주라고 하였다.
난하를 당시는 유수(濡水)라고 쓰고 있었다. 지도의 거리 측정은 사각 한칸을 백리로 기준하였으므로
사각을 세어보면 대략의 거리가 나온다.
아래에 소개드리는 <연산도>에는 황하가 입해하는 하구에 조선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나라수군의 이동경로(화실표)
본서는 徐善繼(서선계)·徐善述(서선술) 著≪人子須知資孝地理學(인자수지자효지리학)≫(16冊 72卷)을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의 체재는 지리의 形象(형상)과 理氣(이기)로 분리하여 조화있게 설명되었으며,
내용은 龍(용), 穴(혈), 砂(사), 水(수), 明堂(명당)으로 細分(세분)하여 圖表(도표) 및 그림 800여 개를
곁들였다
황하가 바다로 입해하는 하구에 낙랑조선이 있었다.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사이에 있는 묘됴열도다.
그 서쪽으로 요동만(遼東灣)이 형성되기 전의 요동과 요서의 경계는 압록강이었다.
이때 압록강은 서요하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면서 세갈래로 갈라져 남쪽으로 흐르는데 갈석산을 중심으로
좌측을 요서로,우측을 요동으로 구분하던 요수다.
그리고 요동의 우측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물은 소요수로서 개주의 서쪽으로 흐르던 물이었다.
이곳에 만번한이 있었다. 당시 갈석을 중심으로 우측으로 양평이 있었고, 이곳이 장성의 동단이다.
당시 발해의 모양은 동서로 넓고 남북으로 좁다. 이곳에 진번조선이 있었으나 연나라의 진개에게 빼앗겨
요동과 요서군이 되었다.
후일 세개의 요수는 모두 지진과 해일로 무너져 바다로 변하였고 이 바다가 요동만이 된것이다.
따라서 낙랑군 수성현.열구현.증지현.대방현등도 모두 요동만으로 윤몰되었다.
한나라의 수군들이 위만조선을 치기위하여 산동의 제남에서 출발 발해로 북상하여 평주갈석을 돌아 사문
도로 향하였다는 갈석이 바로 이곳 바다에 있었다.
당시 요동만지역에 있었던 패수는 내륙이 모두 요동만으로 변하여 수계는 모두 사라졌다.
장성의 표시는 갈석까지 그려져야 한다.아래 지도는 그 장성을 표시하고 있다.
이 지도는 고조선사를 연구하는 후학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지도다.
특히 원 안으로 표시되는 그림들은 지금은 볼수없는 윤몰된 땅이기 때문이다.
1번 위치의 좌측으로 대능하와 대요수가 합류하고 남하하여 다시 소요수와 합류하여 바다로 입해하는
열수(패수)의 경로도다.
강의 우측에는 '요양성에서 산해관까지 1천리라는 주기와 동쪽으로 500리에 압록에 이른다고 하였다.
그리고 좌측으로 광령廣寧(靑) 요서,그리고 장성에 산해관을 표시하고 있다.
이 지도의 바다 모양이 좌우가 길고 상하가 짧게 그려진것은 아래 지도에서 설명이 되겠지만 요동만이
생성되기 전이기 때문이다.
주( )[補注] 先謙曰, 胡注 僕 從 齊 浮 渤海, 蓋自靑 以北. 幽平以南皆賓於海, 其海通謂之渤海, 非之渤海
郡而言也. 沈欽韓云, 于欽齊乘, 北自平州碣石, 南至登州沙門島, 是渤海之口, 闊五百餘里. 紀要, 海在幽平
閒者, 皆爲之溟渤, 東西浩翰千有餘里. 薛季宣云, 河入海處, 舊在平州石城縣, 東望碣石. 其後, 大風逆河,
其漸于海, 程大昌云, 逆河, 世之所謂渤海者也. 하략
위만조선(낙랑군) 요서설은 <사기>조선열전과 배치된다.
한나라 섭하(涉何)가 돌아간 평주 유림관이 산해관지역이라면 패수의 서쪽이 됨으로 패수의 동쪽에 있어야
하는 위만조선이 될 수 없다.
따라서 한무제가 조선을 침공하여 설치한 한사군이나 낙랑군은 요서지역이나 기타지역인 내륙이 될 수 없다.
사기 조선열전 제55
당시 패수는 산해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던 대요하였다.
이를 《사기》<조선열전에서는 열수(洌水)라 하였고,이 열수는 다시 선수(용선수=난하)와 습수(濕餘水=백하)
가 낙선정(樂亭)에서 합수되어 동쪽으로 흐르던 물을 열수(洌水)라 하였다.
따라서 낙랑조선(樂浪朝鮮)이란 이름도 여기서 얻었다는것이다.
이 열수(패수)는 양복이 왕험성을 침공하기 위하여 산동성 제남을 출발하여 발해 연안을 따라서 북으로 올라와
삼수가 합류하는 열구에서 갈석산을 돌아 다시 남쪽으로 조선을 치기 위하여 움직인 항로였다.
아래 지도에서 산해관 서남쪽에 낙정(樂亭)이 있고 세물이 합류되는 넓은 열구(列口)와 갈석산를 확인할 수
있다.이러한 물길이 현재는 발해로 윤몰되어 가시적인 확인이 불가능하다.
대명구변만국노정전도(大明九邊萬國人跡路程全圖)
위 지도에서 산해관의 우측에 보이는 내륙은 지진과 해일로 인하여 바다로 변하여 요동만이 되었다.
이 지도는 요동만이 만들어지기 전의 한나라와 조선의 국경이었던 패수의 경로를 확인할 수 있는 지도다.
바다가 윤몰 된 이후 패수는 사라졌다.
[대청광여도] 상좌측에 보이는 그림은 9하의 토사 분출장면이다.
이렇게 년 16억톤씩 쏟아진 토사가 소요수의 출구를 높이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로 인하여 패수의 경로가
북류하여 서남으로 바뀌는 결과를 가져왔다.따라서 패수의 경로는 시대에 따라 다르다.

2015/9/27일 만권당 발행 윤내현교수의 <고조선연구 上>에서
*이 지도에서 위만조선과 낙랑군은 평주의 유림관 지역에 있다.따라서 평주 유림관은 패수의 동쪽이 되어야
한다. 렇다면 《사기》<조선열전>의 패수경로와는 상반되는것이다.평소 윤교수의 주장대로 난하를 패수로
비정한다 하더라도 평주 유림관은 패수의 동북쪽이 된다.
그렇다면 섭하가 조선의 비왕 장을 살해하고 도망쳐 건너간 요동고새 평주 유림관(산해관지역)은 어디서
찾어야 하는가.
이 지도대로 위만조선과 낙랑군의 위치를 요서군 지역으로 설정한다면 한나라의 요서군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사기 조선열전 평주유림관부분
한(漢)과 조선의 경계인 [패수(浿水)]의 위치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사기 조선열전>
한(漢)초(初)에 이미 수비가 어려워 진(秦)의 요동외요(遼東外徼)를 포기하고 패수(浿水) 서쪽으로 퇴각하여
진번조선(眞番朝鮮)과의 국경으로 삼았음을 보여준다.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 王之 都王險 <동同
열전> (朝鮮)...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潘汗爲界 朝鮮遂弱...燕人衛滿亡命爲胡服 東渡浿水 詣準降
說準求居西界 故收中國亡命爲朝鮮藩屛 準信寵之 拜以博士 賜以圭 封之百里 令守西邊...<위략魏略>
[새(塞)]는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설치 시기나 위치 그리고 목적이 완벽하게 [변경을 맞닿은] 동북
방민족 보다 정확히는 동방제국을 겨냥한 것(그 성벽을 새(塞)*출입구를 문(門 )또는 관(關)이라 했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동방민족들에게 내내 시달림을 받던 춘추(春秋*전국시대戰國時代)를 거쳐 진(秦)에 이르러
더욱 활발해졌는데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사기 조선열전][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同 열전]
[滿爲外臣 保塞外蠻夷-동서同書][涉何...卽渡馳入塞-동서同書] 등 일련의 사건들이 모두 [새(塞)]를
중심으로 벌어졌다는 사실이 진번조선(단군조선)의 위치규명에 매우 중요하다.
특히 유림관(楡林關)은 산해관(山海關) 서쪽 40里 지점으로 [조선상(朝鮮相) 로인(路人)은 (유림관
에서 멀지 않은) 어양인(漁陽人)이다-사기 색은][일명 유관(楡關)으로...대저 번융(蕃戎)을 제(制)
하여 요해(要害)에 웅거한 것이 실로 유주(幽州)와 평주(平州)사이의 천험(天險)이다-독사방여기요
(讀史方輿紀要)] 란 기록으로 보아도 자명한데 번융(蕃戎)은 [번조선]을 말한다.
秦滅六國 始皇帝使蒙恬將十萬之衆 北擊胡 悉收河南之地 因河爲[塞]<사기>
유림관(楡林關)은 일명 유관(楡關)으로...지금의 산해관(山海關)인데...대저 번융(蕃戎)을 제制하여
요해(要害)에 웅거한 것이 실로 유주(幽州)와 평주(平州)사이의 천험(天險)이다.
역주(易州) 서북이 금파관(金坡關)이요.창평(昌平) 서방이 거용관(居庸關)이요.
순주(順州)의 북쪽이 고북관(古北關)이요. 경주(景州)의 동북이 송정관(松亭關)이요.
평주(平州)의 동쪽이 곧 유관(楡關)이다. 웅주(雄州)에서 동으로 유관(楡關)에 이르기까지 장애가
없는 1000여리의 옥야(沃野)가 열려 있으며 북은 대천(大川)*중강(重剛)*복령(複嶺)이 가로막혀
오직 거용(居庸)과 유관(楡關)만이 통해 있고,
송정(松亭)*금파(金坡)*고북(古北)은 길이 막혀 사람은 갈 수 있으되 말은 나아갈 수 없다.
유관(楡關) 아래 유수(渝水)가 있어 관(關)의 동북을 순류(循流)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길은 있으나 지극히 협소하여 겨우 한 가닥만이 통할 뿐 좌우(左右)는 곧 가파른 산줄기와 높은
준령(峻嶺)이다.
거용관(居庸關)은 길이 좁고 험하여 북평(北平)의 입과 목구멍이 된다.1000人이 지키면 10,000부
(夫)도 발걸음을 들여놓지 못한다. <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권10 직예(直隸)
1) 패수(浿水)는 단군조선과 한(漢)의 국경선이었고 동쪽(東渡浿水)에 진반(眞番)*조선(朝鮮) 영역
(진고공지상하장(秦故空地上下鄣)이 존재)이 있다.
2) 만(滿)이 동쪽으로 패수(浿水)를 건너 진고공지(秦故空地)의 상하장(上下鄣)에 거주하며 단군
조선(준왕)과 교섭하고 있다.
3) 진고공지(秦故空地)는 원래부터 단군조선인이 주인이며 진개(秦開)때 일시 연(燕)에게 빼앗겼다.
4) 단군조선은 만(滿)에게 백리 땅을 봉해줬는바 그가 거주한 진고공지(秦故空地)는 약 100리 정도의
지역이다.
5) 만(滿)이 거주한 100리 지역은 패수(浿水) 동쪽 지역이므로 왕험성(王險城)과 패수(浿水)와는 100
리 이상이 되어야하고 그 사이에는 반드시 어떤 자연적인 계선(界線)이 있어야 한다.
6) 단군조선의 강역을 살피려면 우선 그 하한(下限)이 서한(西漢) 초(初)를 넘지 않은 시기에 저술되
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산해경(山海經)]의 기록을 유의해야 한다.
분명히 [바다의 북쪽]에서 [동해(東海)의 안]과 [북해(北海)의 귀퉁이]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한반도는 <동해(東海)의 밖>으로 묘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무렵 지나(支那)에서 본 동해(東海)는 지금의 황해(黃海)였기 때문이다.
밖이 아닌 안이라 함은 서부 변경이 대륙에 위치하며 그곳에서 북동편으로는 발해(渤海)가 틀림없는
바다 북쪽인 북해(北海) 안에 걸쳐있다는 표현이다.
따라서 서변(西邊)의 경계였던 [패수(浿水)]의 위치가 어디인지 능히 짐작된다.
조선은 열양의 동쪽에 있으며 바다의 북쪽*산의 남쪽에 위치하고 열양은 연에 속한다.
朝鮮在列陽東海北山南列陽屬燕 <산해경 해내북경>
동해의 안 북해의 귀퉁이에 명칭을 조선이라고 부르는 나라가 있다. 東海之內北海隅有國名曰朝鮮
<해내경>
그런데 이런 기준에 맞추어 [기존 대동강패수설(大同江浿水說)]에 근거하면서 [패수(浿水)]를 분석
하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1) 패수(浿水)가 현(現) 대동강(大同江)이라면 강줄기가 [서(西)-동(東)]으로 흘러가므로 위 1)-2)의
해석 상 한(漢)은『반도 남쪽』에서 단군조선과 국경을 맞대어야 한다. 하지만 기록으로 보아서는
패수(浿水)를 사이에 두고 진반(眞番)*조선(朝鮮)과『동-서』로 대치해야만 하는 모순이 생긴다.
2) 만(滿)이 패수(浿水)를 건너 정착한 진고공지(秦故空地)는 이 무렵 단군조선이 진(秦)의 북쪽 지역
에서 반도에 이르기까지였으므로 2)-3)의 해석으로 볼진대 단군조선의 경내(境內)를 제 집안처럼
거쳐 그 지역만 달랑 공취(기록상 100리 정도이다)할 수가 없으니 결국 바다를 건너야 한다.
또한 진개(秦開)도 그렇다. 그러나 도해(渡海)한 기록이 없고 문맥상 육로(陸路)로 공격하여 탈취한
정황(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이 뚜렷하다.
3) 만(滿)이 거주한 100리 땅은 패수(浿水)를 건너 만나는 동쪽 지역인데 기록상 그가 패수(浿水)를
동쪽으로 건너 동쪽 땅을 얻었다는 상황과 대동강(大同江)의 흐름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4) 아울러 위 글 4)의 해석 상 [패수(浿水)-만(滿) 정착지 100리-왕험성(王險城)]은 <왕험성(王險城)-
평양(平壤)>의 위치와도 부합하지 않는다. 왕험성(王險城)은 대동강(大同江) 동쪽 100여리 밖에
있어야 하는데 오늘날 평양(平壤)과도 모순된다.
그러므로 [대동강패수설(大同江浿水說)]은 처음부터 모순이었으며 기록 분석으로 보아서도 단군
조선과 한(漢)과의 국경선인 패수(浿水)는 반드시 상기(上記)에 열거한 역사적*지리적 사실을
충족시켜야만 한다.[대륙패수설(大陸浿水說)]이 힘을 얻는 순간이다.
수경주 패수조의 기록은 과연 낙랑군 재평양설의 결정적인 근거로 작용될 수 있을까?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우리 고대사에 있어 한사군 위치 논쟁만큼 뜨거운 주제는 드물 것이다.
특히 인터넷을 둘러보다 보면 한사군 위치 논쟁들이 많은데, 그 중 통설을 따르는 이들이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에 위치했다는 주장의 결정적인 근거 중 하나로 《수경주》1 <패수조>의 기록을 내세우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그 해당기록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그 기록만 있으면 한사군이 한반도에 위치하지 않았
다는 주장들이 싹 다 반박된다고 믿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최근들어 그런 논쟁들을 볼 때마다 답답한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낙랑군 재평양설의 입장에서 내세
우는 《수경주》 <패수조> 관련 근거들은 주로 객관적인 확실한 사실이 아닌 추론에 입각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 글을 통해 《수경주》 <패수조>의 기록이 낙랑군 재평양설을 입증시켜줄 결정적인 근거가
될 수 없음을 확실히 밝혀두고자 한다. 우선 해당기록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 해당기록이란 바로 <패수조>에 기록된 다음의 구절을 말한다.
其地今高句麗國治余訪蕃使言城在浿水之陽其水西流逕故樂浪朝鮮縣卽樂浪郡治漢武帝置.
이 구절은 《수경주》의 저자 역도원이 패수가 동쪽으로 흐른다는 《수경》의 기록에 주석을 달아
이를 반박한 구절의 일부이다.
이 구절은 해석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지는데, 낙랑군이 평양에 위치했다고 보는 이들은 위의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그 지역은 지금 고구려의 국도이다. 내 일찍이 번국의 사신을 만나 보았는데, 말하기를 "그 성은 패수 북쪽
에 있고 그 강물은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군 조선현 즉 낙랑군치를 지나는데 한무제가 설치하였다"고 한다.
이 해석만 놓고 보면 그 내용은 대충 이렇다.
역도원이 고구려 사신에게 패수가 어느 방향으로 흐르는지 물어봤더니 고구려 사신의 답변에 의하면
고구려 수도 평양성은 패수의 북쪽에 있고,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군 조선현 땅을 지난다는 것이다.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한다면, 고구려 사람이 직접 옛 낙랑군 지역이 지금의 평양에 해당되는 고구려 평양
성임을 밝힌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낙랑군을 축출했던 나라인 고구려의 사신이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에 위치했다는 역사 인식을
가진 것이 되는 것이다.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에 위치했다고 보는 이들은 이러한 해석을 통해 고구려인들에게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에 위치했다는 역사 인식이 있었으므로 이 기록이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에 위치했다는 결정적인
근거 중 하나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은 해석도 가능하다.
그 지역은 지금의 고구려 치소였다. 그래서 나는 고구려 사신을 방문하여 물어보았더니 그는 말하기를
"고구려의 도성이 패수의 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그 강은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군 조선현을 지난다. 조선현은 낙랑군의 치소로서 서한의 무제가 설치한
것이다.
이 해석의 경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역도원이 고구려 사신에게 고구려 수도 평양성에 대해 물어봤더니 고
구려 사신의 답변에 의하면 평양성이 패수의 북쪽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 역도원이 패수가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군 조선현을 지난다고 부연 설명을 덧붙인 것이
된다. 그렇게 보면 고구려 사신은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 지역에 위치했다는 역사 인식을 가지지 않은 것이
된다.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에 위치하지 않았다고 보는 이들은 주로 이 해석을 따른다.
그럼 이 해석을 따르는 입장에서는 낙랑군 내에 흐르고 있는 패수와 고구려 평양성 남쪽의 패수가
이름이 같은 것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할까?
주류 학자들도 인정하듯 패수는 시대에 따라 그 위치가 변동되었고, 같은 시기에 패수라는 지명이
다른 곳에 각각 존재하기도 했다.
고조선의 국경인 패수, 낙랑군 내에 흐르고 있는 패수, 백제 영토의 북쪽에 흐르고 있는 패수,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의 남쪽에 흐르고 있는 패강이 그것이다.
역도원이 살던 남북조시대에 이르면 패수는 고구려 수도 평양성의 남쪽을 흐르는 지금의 대동강이
되는데, 그 일례로 《삼국사기》 등을 보면 지금의 대동강을 패강으로 기록하고 있다. 2
결국 이 해석에 따르면 역도원에게 평양성의 위치에 대해 알려준 고구려 사신은 그저 패강의 북쪽에 평양
성이 있다고 말했을 뿐인데, 역도원이 멋대로 고구려 수도 평양성 남쪽에 흐르고 있는 패수를 옛 낙랑군
조선현에 흐르던 패수라고 기록한 것이 된다. 이 해석 또한 문법 상으로 맞는 해석이다.
그런데 후자의 해석에 대해 노태돈 교수는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런데 이에 대해 밑줄 친 기사 중 ㉠은 고구려 사신의 말이고, ㉡이하는 역도원 자신의 견해를 기술한
것이라는 반론이 제기되어 왔다.
사실 위의 기사 자체의 서술 형태만을 살펴볼 때에 그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수경주』에서, 역도원이 『수경』에서 기술한 강들에 대한 간략한 기사를 놓고, 각 강의 흐름과
통과하는 지역 및 그에 관계된 역사적 사실과 사적(史蹟)에 대한 비교적 풍부한 주(注)를 붙였다.
『수경주』의 편찬 동기는, 진(秦) · 한대 이래의 지리에 관한 지식이 5호16국 시대를 거친 후 혼란해진
상태에서, 이를 재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역도원은 강의 흐름에 대한 자연지리적인 지식뿐 아니라, 그에 관계된 역사지리에 대해서도 진 · 한대
이래의 수많은 각종 사서의 기록을 구사해 고증을 시도하였다.
패수조(浿水條)에서도 그는 기자(箕子) 및 위만조선과 그리고 한군(漢軍)의 침공 루트에 대한 서술을
하였다. 그러한 면들을 고려할 때, 역도원이 『수경』의 패수에 대한 기사에 의문을 품었을 때, 자연 강의
흐름을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와도 연관해서 생각하였을 것임은 능히 추측되는 바이다.
그의 조상이 낙랑군과 어떤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럴 때 그가 모처럼 만난 고구려 사신에게 그 수도와 패수의 관계만을 질문하였을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이런 개연성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위의 인용문 (B)에서 ㉠에 이어 ㉡에서 "其水西流······而西北流 "라 하
였다.
이때 "서류"와 "서북류"는 고구려 도성 지역에서 서쪽으로 흘러, 낙랑군 조선현 자리를 지나 서북으로
흐른다는 뜻이다.
즉 고구려 도성과 옛 낙랑군 조선현 자리가 패수의 흐름의 방향을 기술하는 각각의 기점이 되었다.
역도원이 참조한 이전 시기의 문헌에서 패수의 흐름과 위의 두 지점과의 위치 관계를 기술한 것이 없는
데도, 이렇듯 명기(明記)하였던 것은 고구려 사신과의 문답을 통한 지식에 의해서라고 보아야겠다.
(B)의 ㉢에서 "考之古今" 즉 "패수의 흐름을 고금의 사실을 통해 살펴볼 때"
『수경』의 기술이 착오라고 하였다. 이때 "今"이란 바로 고구려 사신을 통한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위의 (B)의 ㉡은 그 문장 서술 형태만으로는 역도원의 견해를 기술한 것으로도 볼 수 있으나,
(B)의 기사 전체를 놓고 볼 때 ㉡의 그의 견해는 고구려 사신을 통해 얻은 지식에 입각한 것이라고 보는
게 순리다.
곧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를 비정함에 있어서, (B)의 ㉡을 통해 확인되는 5세기 말~6세기 초의 고구려
사신의 말은 중요한 증언이라 할 수 있다.
노태돈, 《단군과 고조선사》
위의 글은 노태돈 교수가 본인의 논문 및 저서에서 주장한 것으로, 노태돈 교수의 논지를 쉽게 풀어서 설명
하자면 대충 이렇다. 우선 노태돈 교수는 후자의 해석이 문법상으로 가능하다는 것은 인정하였으나 후자의
해석보다는 전자의 해석이 맞다고 주장하고, 역도원이 패수의 흐름을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와도 연관해서
생각하였을 것이고 그의 조상이 낙랑군과 관계가 있었으므로 고구려 사신에게 평양성과 패수의 관계만
질문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본인의 추론을 그 근거로 내세웠다.
현재 인터넷 상에서 일어나는 《수경주》 <패수조>에 관한 논쟁들에서는 전자의 해석이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후자의 해석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없는 경우가 많이 보였다.
분명 앞서 밝혔다시피 전자의 해석이든 후자의 해석이든 노태돈 교수도 인정했듯이 문법 상으로는 둘 다
가능한 해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자의 해석만을 내세우며 이를 근거로 고구려의 평양성이 옛 낙랑군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낙랑군 재평양설에서 내세우는 《수경주》 <패수조>의 해석에 대한 논리들 중에는 그나마 앞서 소개한
노태돈 교수의 논지와 같은 좀 더 발전된 논리들이 있기는 하나, 그 또한 자세히 보면 결국은 물증적 근거가
아닌 개인적인 추론에 입각한 것들이었다. 이러한 추론들은 아무리 그것이 개연성이 있고 그럴싸할지라도,
그것을 확실하게 뒷받침해줄 논리적 근거가 없다거나 얼마든지 다른 추론들이 끼어들 여지가 존재한다면
절대적 진리가 될 수 없다. 추론은 어디까지나 추론일 뿐이다.
과연 노태돈 교수의 추론대로 역도원이 고구려 사신에게 평양성과 패수의 관계 뿐 아니라 패수의 흐르는
방향과 옛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까지 물어봤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물론 불가능하지는 않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확실한 물증적 근거가 없는 한 다른 추론이 끼어들
여지가 충분히 있다.
나는 위의 노태돈 교수의 저서를 읽으면서 특히 이 부분에서 가장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그러한 면들을 고려할 때, 역도원이 『수경』의 패수에 대한 기사에 의문을 품었을 때, 자연 강의 흐름을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와도 연관해서 생각하였을 것임은 능히 추측되는 바이다.
그의 조상이 낙랑군과 어떤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역도원의 조상이 낙랑군과 관계가 있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는 역도원의 6세조가 낙랑군의 관리였던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노태돈 교수의 논지는 역도원의 6세조가 낙랑군의 관리였으므로 역도원이 자신의 6세조가 근무
했던 옛 낙랑군 지역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을 것이고, 따라서 고구려 사신에게 평양성과 패수의 관계
뿐 아니라 패수의 흐르는 방향과 옛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까지 물어봤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 또한 결국은 개인적인 추론인데, 나는 특히 이 부분이 노태돈 교수의 추론 중 가장 무리가 있는 추론이
아닌가 싶다.
6세조가 관리로 근무했던 지역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지역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에 따라 고구려 사신
에게 평양성과 패수의 관계 뿐 아니라 패수의 흐르는 방향과 옛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까지 물어봤다?
6세조면 제법 먼 조상이다. 그런 6세조의 고향도 아니고 근무했던 지역이라는 이유로 옛 낙랑군 지역에
깊은 관심을 가졌을 거라고 본다면 조금의 비약이 있다.
과연 이것이 이병도 박사가 매국노 이완용과 같은 가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같은 매국노로 보는 것과
다를 게 무엇일까?
물론 이런 추론도 사료적 사실을 침해하지만 않는다면 가능은 하다.
막말로 해서 역도원이 그의 6세조가 근무했던 옛 낙랑군 지역에 깊은 관심을 가지지 못할 이유도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앞서 설명했듯이 확실한 물증적 근거가 없으면 어디까지나 추론은 추론일 뿐, 역사적
사실로써 확증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라면 정반대의 추론도 얼마든지 끼어들 여지가 있기 때문
이다.
그런데 앞에서 이미 말하였듯이 역도원이 살았던 시기에 고구려의 도읍은 지금의 평양이었다.
따라서 고구려 사신이 말한 패수는 지금의 대동감임을 알 수 있다.
위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역도원은 전혀 고증을 거치지 않은 채 기자 일족의 망명지 위치와 위만조선의
위치를 지금의 평양 지역으로,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를 한반도의 서북부지역으로 단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반도의 지형으로 보아 패수가 동쪽으로 흘렀다면 그것은 동해로 흘렀을 것이기 때문에 한반도
의 서해안에 있는 지금의 평양으로 가는 도중에 위만이나 양복, 순체가 패수를 건넜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경』에서 패수가 동쪽에서 바다로 들어간다고 한 것은 『한서』 「지리지」'패수현'의 기록에
패수는 서쪽으로 증지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되어 있는 것과도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도원은 당시에 중국을 방문한 고구려 사신을 찾아가 패수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고구려 도성
이 패수 북쪽에 있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앞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고구려에서는 지금의 대동강을 패강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고구려 사신은 지금의 대동강을 패수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확인되었듯이 패수는 역도원이 살았던 시기(서기 469~527년)의 고구려의 패수이며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을 이루었던 패수는 아니었던 것이다.
윤내현, 《고조선 연구》
위의 글은 윤내현 교수가 본인의 저서에서 주장한 것으로, 윤내현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역도원은 전혀
고증을 거치지 않은 채 기자 일족의 망명지 위치와 위만조선의 위치를 지금의 평양 지역으로,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를 한반도의 서북부지역으로 단정한 상태에서 고구려 사신을 찾아가 패수가 어디 있는지
물어봤고, 고구려 사신은 평양성이 패수의 북쪽에 있다고 대답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본다면 역도원은 고구려 평양성 지역을 옛 낙랑군 지역으로 인식하고 있던 중에 평양성이 패수
북쪽에 있다는 고구려 사신의 답변을 듣고서는 그 답변 뒤에 자신이 인식하는 패수의 흐르는 방향 및
옛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를 기록한 것이 된다.
이 또한 사료적 사실을 침해하지 않은 이상 충분히 가능하다.
이렇듯 하나의 구절에 다양한 해석과 그 해석들을 뒷받침할 추론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서 살펴본 전자와 후자의 해석들 중 어느 것을 따라야 할까? 사실 여기에 정답은 없다.
앞서 설명했다시피 전자와 후자 모두 문법 상으로 가능한 해석이고, 두 해석들을 뒷받침해주는 추론들의
경우도 확실한 물증적 근거가 없으면 확실한 사실로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여러 해석이 가능하고 애매한 근거만 가지고는 낙랑군의 위치 비정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문제는 다른 사료들과의 교차검증이 필요한 것이다.
한사군이 존재하던 시기를 기록한 《후한서》·《삼국지》·《삼국사기》 등의 사료들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사군 위치 관련 논쟁들을 볼 때마다 《수경주》 <패수조>의 기록에 집착하는 이들이
많아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지곤 했다.
특히 某 역사블로거는 낙랑군 재요령설을 논파한답시고 고작 해당 기록의 전자의 해석 한 줄 던져놓고는
'환빠들의 독해력이란 과연 병ㅋ신ㅋ'이라며 비아냥대는 등 사료 분석의 기본마저도 지키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까지 하였다.
사료 분석은 결코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끝나서는 안 된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말이 있듯이
사료 분석에는 사료 한 줄에 집착하는 것이 아닌 모든 사료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넓은 시야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수경주》 <패수조>의 기록만 가지고 낙랑군의 위치를 운운하는 것은
잘못된 사료 분석의 자세임을 확실히 밝혀둔다.
참고자료
윤내현, 《고조선 연구》
노태돈, 《단군과 고조선사》
김상태, 《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
(위궁)
[실증]서한군국도와 동한군국지도의 낙랑조선과 안동도호부
진나라때 고조선땅에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군등 5군이 신설되었고,
한나라때 대방.낙랑군등이 증설되었다.
낙랑조선의 위치는 산동반도 등주의 북쪽에 있었다.
이곳에 한나라가 낙랑군을 세웠다.따라서 한사군과 낙랑군의 강역은 한반도와는 관계가 없다.
<서한군국도> 국립중앙도서관소장
<동한군국지도東漢郡國之圖)>서한군국도에서 낙랑조선지역이 이 지도에서는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가 요동반도까지 연결되어있다.안동도호부는 한반도와는 관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