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지리 역사

조선의 강역 3 - 압록강,삼분하,조선국도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5.11.02|조회수465 목록 댓글 0

1461년 편찬 《대명일통지大明一統地》의 압록鴨綠 : 요녕성 강평현康平縣일대 요하 



그림 1. 《대명일통지大明一統地》의 「외이外夷」 조선국朝鮮國편  압록강鴨綠江기록


1461년(명明, 천순天順 5년)에 명나라 이현李賢등이 황명으로 편찬한 《대명일통지大明一統地》는

「외이外夷」 조선국朝鮮國편에 압록강鴨綠江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地 /  권卷 八十九  /  외이外夷  / 조선국朝鮮國

【압록강鴨綠江】

국성國城-한양-에서 서북西北방향으로 1,450리里(=835km) 떨어져 있으며 일명 마자수馬訾水라 하며

수원水原은 갈말鞨靺-말갈靺鞨-의 장백長白의 산山과 물水의 색色이 마치 압두鴨頭-오리머리-와 닮았다

하여 이름지어졌다. 서남西南으로 흘러내려가서 염난수鹽難水와 더불어 합류하며 해활海闊 300보步 무렵

에서 남입南入해 들어간다. 조선朝鮮으로는 특히 하늘이 내린 참塹-해자垓子-이다.

[원문] “在國城西北一千四百五十里一名馬訾水原出鞨靺之長白山水色如鴨頭故名西南流與鹽難水合南入於

海闊三百步, 朝鮮特爲天塹.”

압鴨 : 오리, 여러 종의 오리가 있어 머리빛깔이 종에 따라 다르며 여기서는 청동오리를 말한다.  

청동오리는 오리과科-오리속屬-청동오리종種에 해당하며 머리빛깔은 광택이 나는 녹색이다.

위의 인용구는 산야가 초록으로 푸르른 것처럼 물빛 또한 그러할 정도로 투명하며 탁하거나 흐리지 않다는

뜻이다.  


해활海闊 : 바다로 들어가는 하구로도 볼 수도 있고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海’를 평원지대로 보면 지명으로

삼분하三分河 두물머리로 유입되는 것으로 볼 수 도 있다.


위에 《대명일통지大明一統地》기록의 명대明代 1,450리里는 현대의 도량형으로 환산해 놓았듯이,
명明 1里 =576m이므로  ‘국성國城 한양 ~ 압록강鴨綠江’ 까지 여정旅程의 거리는 835km입니다.


그런데, 구글위성지도로 현재의 서울 경복궁에서부터 함경북도 의주의 현 압록강鴨綠江강변까지 실측

직선거리는 단지 360km정도에 불과합니다.
물론, 실제 여정은 지도상의 최단거리가 될 수 없으므로 실제여정의 경우 이를 감안해야 합니다.

연행기중 하나인 조선후기 순조3년(1803년) 연경燕京으로 동지사행을 다녀온 기록인 《계산기정薊山紀程》

을 살펴보면, 한양(京)에서 압록강까지의 도리道里를 1,055리里라 하므로
조선후기 1里 = 449.28m이므로  ‘국성國城 한양 ~ 압록강鴨綠江’ 까지 여정旅程의 거리는 474km입니다.

결론적으로, 똑같은 압록강鴨綠江이어야 하건만《대명일통지大明一統地》의 압록강은 《계산기정薊山紀程》

의 압록강보다 북방으로 361km를 더 북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림 2. 요녕성의 지형지세도



《계산기정薊山紀程》에서 나오는 ‘압록강鴨綠江 ~ 심양瀋陽’ 사이의 여정을 살펴보면 565里이니  

즉 환산하면 254km(조선후기 1里 = 449.28m)입니다.

최종적으로, 《계산기정薊山紀程》에서 나오는 ‘압록강鴨綠江’이 현재의 ‘압록강鴨綠江’이라보더라도

《대명일통지大明一統地》의 ‘압록강鴨綠江’은 현재의 심양瀋陽에서도 107km를 더 북상하여야 합니다.
심양瀋陽에서부터는 완전히 산악지대를 벗어나 북쪽방향으로는 드넓은 평원만이 뻗어 있으므로 위도상의

최단거리와 실제 여정거리가 같습니다.
따라서, 남은 여정거리 107km를 직선으로 그대로 북으로 뻗으면 그곳은 바로 이전에 언급하였던  

동요하와 서요하가 합류하는 강평현康平縣일대의 삼분하三分河 두물머리가 됩니다.



그림 3.  강평현康平縣 삼분하三分河


참조지도 :   http://www.coo2.net/bbs/data/new_con_4/SamBun_Ha__and__Samcha_Ha_I.jpg

현 심양시이북으로 개원시,철령시에서 북쪽방향에 위치한 강평현康平縣의 삼분하三分河일대 의 남동류하

는 요하수계가 바로 《대명일통지大明一統地》가 편찬된 1461년무렵 그러니까, 조선전기 세조 7년무렵의

압록강鴨綠江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호수徐浩修의 연행기燕行紀 기록의 서요하와 동요하를 합수하는 삼분하三分河,

즉 요하가  바로  압록강鴨綠江이라는 이전의 글을 둿받침하는 또 하나의 자료입니다.



[ 참조자료 :  삼분하三分河 관련글  ]
1. 삼차하三叉河와 삼분하三分河 : 만주-몽골의 준령을 나누며 횡단하는 삼분하(三岔河)
"  http://coo2.net/bbs/zboard.php?id=con_4&no=22942 "
2. 18C 숙종초 '조선지도'의 삼분하: 조선전기 만주강역 재조정되야 하나? (完)
"  http://coo2.net/bbs/zboard.php?id=con_4&no=22943





산해관 동쪽에는 내륙이 있었다<삼재도회의 산동도>



중국 삼재도회중의 산동도다.

현재의 발해가 생성되기 전의 지도에는 패수의 다른 이름인 열수가 (대요수)산해관 동쪽을 흘러 천진쪽

에서 흘러나온 물들과 합류하여 내주와 등주를 통하여 바다로 합류한다.

이 물이 조선과 국경을 가르던 패수였다.


삼재도회는  명나라  만력  35년(1607)  王圻(왕기)가  찬하고  그의 아들  思義(사의)가  교정한  책이다.

당시 윤몰된 내륙은 필자가 점선으로 표시하였다.

 

 


정개양잡저(鄭開陽雜著)의 단군 건국설과 조선국도



《정개양잡저》는 주해도편(籌海圖編)을 저작한 명나라의 저명 지리학자 정약증의 저서다.

사고전서(史庫全書)의 사부(史部) 지리류(地理類)에 등재되어있으므로 권위를 인정받은 사서로 볼수 있다.

그가 그린 주해도편은 《가탐도리기》에 등장하는 도서들의 위치를 발해내역으로 한정시킴으로서 종래의

왜곡된 통설들을 부정하고 신라와 고려의 요동설을 인정한 셈이다.


다음에 소개하는 《정개양잡저》의 5권에는 조선의 역사와 지리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보통상식과는 판이한 위치에 지명들을 그려놓고 있는것이다.


그리고 단군의 건국설을 <조선고>에 소개하고 있다.

국내에서 권위있다고 하는 사학자들이 단군은 꾸며진 신화라고 하는 주장이 옳다면 과연 국조로서의 단군이

어떻게 중국의 사서에 기록될 수 있을까.

뿐만아니라 압록수의 동남쪽 1000여리로 옮겨졌다는 한반도의 평양은 후당시 고려의 왕건시대에 옮겨졌

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설은 《고려도경》《송사》《원사》《대명일통지》《독서방요기요》등이 공통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에 한사군을 비정하고 대동강 평양을 고조선의 평양성이라고 주장하는 한국사학계의 주장은

억지라는 결론이다.


鄭開陽雜著·卷五~卷六


Author: (明)鄭若曾  四庫全書; 史部; 地理類;
Chinese   China-America Digital Academic Library (CADAL)  浙江大学图书馆 universallibrary

ge: Digitizing sponsor:Book contributor: Collection:

오스랄리아 국립도서관 소장  《정개양 잡저》권 5 조선국도



이 지도는 1787년 파리에서 발행되었다.

중국과 조선.일본등을 표시한 지도지만 조선의 국경을 확대하여 편집하였다.

조선의 국경을 붉은선으로 표시하였으니 조선의 국경이 만주까지 진출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는데

이론이 없을것이다.




북쪽으로 타타르라고 부르던 몽골과 국경을 마주한 고려시대의 지도다.

현재 한중의 국경인 업록강을 점선으로 표시하여 보았다.

그러나 책성으로 표시된 국경은 후대 고려의 영토를 표시한 경계선이다.

1740년당시 동해는 조선해로 표시되어있다.

당시의 함경도는 현재의 길림성까지 진출해있었지만 후대에 이곳의 지명들은 모두가 압록강 이남으로

남하하여 옮겨진 장소에 있다. 따라서 이러한 결과로 역사의 왜곡이 심각한 지경에 이른것이다.


조선고 권5-3


위의 원문에 대해서 특이한 대목만을 설명하려고 한다."조선국은 일본과 가깝다는 대목이다.

여기에서 일본이란 나라이름을 말하는게 아니라 해가 뜨는 일출처를 말하는 발해를 말하는것이다.

그곳은 아침해가 빛나는 동쪽에 있다고 옛날부터 전해온다고 하였다.

요나라 무진년(기원전 2333)에 태백산에 살던 단군을 조선인들이 받들어 임금으로 모시니 이곳이 조선이다.

주나라때 기자가 봉해진곳이다.

전국시 연나라에 속했고,진이 연을 멸하자 요동외요에 속했다.

한나라 초에 그곳(요동외요)이 멀어 요동의 옛 요새을 수리하여 패수를 경계로 국경을 삼았다.

노관이 나라를 배반하자 연인 위만이 천여명의 사람들을 모아 동쪽으로 달아나 새를 벗어나 조선을 격파

하고 그곳에 의지하여 살았다.

[사서는 말하기를 기자를 봉한 후 41대에 이르러 준왕대까지 928년만에 위만에게 나라를 잃었다고 하였다〕


한무제가 조선을 정벌하고 진번,임둔,낙랑,현도등 4군을 설치하였고,소제때 낙랑,현도등 2군으로 통합하

였다.

한말(220)에 공손탁이 이곳을 점거하여 공손연에 이르자 위(魏)가 멸하였고,진(晉) 영가 말(312)에 고구려

에 함락되었다.고

구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그왕 고련이 평양성에 살았는데 일명 장안성이라고도 불렀다.

즉 한나라때 낙랑군땅이다.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평양을 뽑아버리고 그곳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자

그나라(평양)는 압록수동남방 천여리 되는곳으로 옮겨갔다.


오대 당시(후당)왕건이 고씨의 궐지(빈곳)와 옛 신라및 백제땅으로 넓히고 하나로 통일하여 도읍을

옮기니 송악이다.

평양을 서경으로 삼고 그후 자손이 세를 이어 송.요.금.에 4백여년동안 조공하였다.

고려말 역성혁명이 일어나 원나라의 원중에 서경내에 동령로총관부를 설치하였다. 

자비령을 경계로 삼았다.명나라 홍무2년(1369) 이성계의 반란으로 고려는 망하고 조선이 건국된다.

..이하 생략



등주의 동쪽 장도의 삼신산에서 본 발해의 일출장면. 이곳은 바다가 낮아(수심4미터) 양어를 생업으로

하고 있다. 일명 바다목장이라고 부른다.(곳은 평양성이 지진으로 윤몰된 곳으로 추정되는 해역이다.)


왜 이곳을 조선이라고 불렀는지 실감되는 장면이다.발헤에서의 일출장면은 썬그라스를 끼지않으면 직접

보기가 어렵다. 너무나 눈이 부시기 때문이다.발해는 바로 이렇게 밝은 해를 대변하는 우리들의 언어기도

하다.중국어로 '보하이'라고 하는데 이게 과연 밝은해라는 말일까? 한자의 뜻은 안개자욱할'발'로 되어

있다.따라서 발해에서 생성되는 기류는 한반도로 이동하기 때문에 기상예보시 마다 산동반도의 등주가

등장하는것도 이러한 이유때문이고 신비에 쌓인 삼신산도 이 안개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은 중국의 해(海)라고 하면 황해(黃海) 또는 서해(西海)를 생각할 수도 있지만 호위(胡渭)가 말한

것처럼 중국은 고대로부터 바다라고 하면 보편적으로 발해(渤海)를 생각하였으며, 그곳에서 해가 떠

오르기 때문에 양곡(陽谷)이라고 하였고 또 그러한 곳을 '우이(隅夷)' 혹은 동표일출지지(東表日出之地)

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평양부 군명조에는 "居東表日出之地, 故曰朝鮮"이라고 기록하여

조선이라는 말이 해뜨는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그런 나라 이름이 생겼다고 하였다.

그러기에 한반도의 평양은 해가뜨는 특별한 조건을 갖지못한 관계로 옛날의 조선이라고 볼수는 없다는

말이다.


 


지도는 영국판 해도로서 장도(연태시 장도현)전경이다.4.6등 숫자로 표시된 구역이 수심을 표시한 해역

이다. 이곳을 노란색으로 표시하면 지도처럼 수몰된 지역이 나타난다.

평양성이 있던 장도는(사문도)당나라의 침공이 있은 후 해일로 윤몰되자 당나라는 안동도호부를 요양고성

으로 옮겨갔다.

약 3만명의 활동이 왕성한 백성들은 모두 중국본토의 회하지역으로 옮기고 활동이 불편한 노약자들만

남겨두었던 평양은 676년 신라가 점령하였고,이후 패허로 남어있었는데 오호16국시 당나라가 망하자 

후당시 왕건에 의해서 재건이 되었다.

인구가 희소하여 요동지역에서 백성들을 이주시켜 남아있던 높은터에다 평양을 복원한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곳에서 고려를 건국하였다.

평양(平壤)이란 지명속에도 무괴유토(無塊柔土)라는 뜻이 있어 부드러운 흙이 쌓여 삼각주를 이루는 뜻이

있으므로 바다가운데의 평평한 섬을 뜻한다.


고금화이도:


《大 淸 一 統 志》 平 壤 府 漢 曰 樂 浪 郡 後 爲 高句麗 王 所 都 唐 置 安 東 府 後 沒 於 渤海 五 代 時 高 麗 復

取 之 爲 西京.


《대청일통지》평양부는 한나라때 낙랑군이라 불렀고, 후에 고구려 왕도였다.

당나라가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으나 후에 발해로 윤몰되었다.


*이후 안동도호부는 요양고성으로 옮겨갔고,5대시에 고려에 의해서 복원되어 서경으로 삼았다.

평양은 후당 이후 고려에 의해서 서서히 동쪽으로 옮겨갔다.

이 대목에 혹자는 발해를 바다로 이해하지 않고 나라로 해석하는 예가 있으나, 당나라 뒤를 이어 이 땅을

차지한 나라는 발해가 아니라 신라였다.

평양은 전체가 바다로 가라앉은것이 아니라 평지만 윤몰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두개의 평양이 등장하는데 그 하나는 안동도호부를 따라 요양으로 이동한 요양평양이요

다른 하나는 고려에 의해서 옮겨진 대동강 평양이다.

이때의 대동강 평양은 한나라때의 평양인 구 평양이 아니라는 단서가 《원사》지리지.《고려도경》

《대명일통지》등에 기록되어있다.


《독사방여기요》권 38

总章初,李攻高丽,拔平壤,置安东都护府,由此高氏灭。仪凤初,新罗据其地。


668년 이적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평양을 뽑아버리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고구려가 망한후 676년에 신라가 그 땅을 차지하였다.


대명구변인적노정전도(大明九邊人跡路程全圖)       제공:향고도 


청 강희2년(1663)청에서 제작돤것을 다시 일본에서 번각하여 쓰쿠바대와 고베대학 도서관에 소장

옛날 고구려의 평양성이고 후에 고려의 서경,그리고 원나라때 동령로가 바다에 그려진 지도다.

한사코 한반도의 평양을 한나라의 낙랑군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과연 어떻게 해석할것인가.

너무나도 신출귀몰하는 해석을 들고 나와 사료를 부정하는 그들의 해석이 궁금하다.


서진군국도의 낙랑군 위치다.이곳은 바로 등주의 북쪽에 위치한 묘도열도다.

요동반도에는 안동도호부와 요동군,현도군이 병기되어있고, 대방은 요동반도의 남쪽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고 5-4


고려우왕 25년 국상 이성계는 왕씨를 대신하여 나라 이름을 바꾸기를 주청하였는데 그 나라 이름을 조선

이라하였다.

세시마다 조공이 끊어지질 않았다.조선은 8도로 나누고 화풍을 누렸다.중앙을 경기,동을 강원,이라 하였

는데 강원은 본래 예맥지다.

서를 황해라 하였는데 본래 고조선 마한의 구지이다.남을 전라도라 하였는데 본래 변한지다.

동남을 경상도라 하였는데 진한지다.서남을 충청도라 하였는데 모두 고마한의 강역이다.동북을 함경도라

하였는데 본래 고구려땅이다.서북을 평안도라 하였는데 본래 조선의 옛땅이다.

이땅들을 통.군.부.주.현으로 나누었는데, 충청,경상,전라3도는 땅이 넓어 중주현은 거물과 부자.시서인등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평안 함경 2도의 경계는 말갈과 접하고,풍속에 궁,마,병,졸,이 정강하였다.

동,서,남은 바다로 둘려있고,북쪽으로는 여직과 이웃하고, 서북쪽으로는 압록강에 이른다.

동서의 거리가 2천리요, 남북의 거리가 4천리이다.

정북으로 장백산이 있고,장백산에서 시작된 산맥은 남으로 전라도계를 지나 서남향으로 일본대마도다.

동남쪽으로 치우쳐 부산이 있고,...



《통고》(고려) [신라의 동주 낙랑부를 동경이라 부르고,백제의 금주금마군을, 남경이라 불렀으며,

남평양의 진주를 서경이라 불렀다.('護字는 號字의 오기 필자 주)


按:此乃百濟東南邊境,其全部始屬新羅,後歸渤海及契丹,非高麗所能有也.

 

살피건데 백제의 동남 변경은 처음에는 신라에 속하였는데 후에는 발해와 거란에 귀속되었다.

당시는 고려가 소유하고 있던곳이 아니다.

 

*따라서 백제의 동남변경은 한반도가 될 수 없다.그것은 신라 이후에 발해와 거란이 점령하였다는 사실

때문이다.그렇기에 이곳은 요동반도의 남쪽해변인 대련지역이었다.그곳이 금주금마군이었다.

장백산의 남쪽을 지나서 전라계를 향하여 서남쪽으로 일본 대마도에 이른다고 하였다.

만약 한반도의 전라도를 당시 백제로 비정한다면 어떻게 백제의 서남쪽에 일본의 대마도가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이곳을 요동반도의 남쪽이라고 비정한다면 대마도를 장산군도에서 찾을 수 있다.



위 지도는 장산군도 내역에 있는 삼한의 위치도다.

황당한 얘기 같지만 차차로 근접하여 풀기 어려운 사서들과 어울려 수수께끼를 풀어갈것이다.


또다른 대마도의 이름에 대한 참고기록이다.


< 현 대마도라도 불리는 섬은 남북 72km, 동서 15km, 넓이 714㎢의 조그만 섬이다.
이 섬의 이름에 관한 이야기도 많은데 그 중에 특기할 만한 것은 일본인이라고 말해지는 사문의당(沙門

義堂)이 만들었다고 하는 일용공부략집(日用工夫略集)이라는 책에서는 대마도(對馬島)가 마한(馬韓)에

대(對)한 뜻이라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


*그러니까 마한과 마주 보고있어 대마라 한다는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분명히 현재의 대마도가 될수

없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대마가 마한의 동쪽에 대마도가 있다는말과 같다면 위의 지도와 일치한다.


지도:서북피아양계도  규장각소장


다음글은 역사21카페에서 빌려온 소벌가리님의 글이다.

《금사》에 나타난 지명들을 함경도로 옮겨놓고 앞뒤가 맞지않는 주장을 펴고있는 국내학자들의 잘못된

교육을 나무라는 글이기에 공감하는바가 커서 소개한다.


金史 다시 읽기: 그들은 왜 윤관 9성을 함흥 일대로 보았을까?

1. 금사 사료와 그간의 해석

[金史]
1103년, 왕갸우야수(完顔烏雅束=康宗)는 임금자리(두버길러/추장)를 이어받았다.

본디 고려와 좋은 관계였다.
1104년, 고려가 다시 쳐들어 오자 石適歡이 다시 이를 물리쳤다.

고려가 다시 화친을 청하며 전에 붙잡힌 단련된 열네사람 모두 돌려보내니 石適歡이 定邊[1] 백성을 위무

하며 돌아왔다. 蘇濱水[2] 백성들이 명령을 듣지 않으므로 (강종은) 斡帶(워다이) 등을 活羅海川으로 보내

여러 관료를 불러 이를 알리게 하였다.

이때 含國部의 蘇濱水에 사는 斡豁(워허) 勃菫(버긴=部長)는 불러도 오지 않았다.

斡准部와 職德部도 왔다가 다시 도망쳤다. 塢塔(우타)가 이 두 부족을 馬紀嶺에서 붙잡아 데려왔고 마침내

워허를 쳐서 이겼다.
1106년, 고려가 黑歡方石을 보내 절도사 자리에 오른 것을 축하하러 보내니 盃魯(비루)를 보내 마중케

하였다. 고려는 고려에서 죽은 금나라 사람들(시신)을 돌려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이에 阿聒(아구)와 勝昆(싱곤)을 고려로 보냈으나 고려는 약속을 어기고 두 사신을 죽인 뒤 曷懶甸

(하란디엔 Xalan Dien) [3]에 아홉 城(성)을 쌓았다.

[1] 定邊: 평안도 정주로 보곤한다.  
[2] 蘇濱水(Sufin Ula): 용비어천가의 수핑강으로 두만강 북쪽에서 북으로 흐르다 동으로,

     남으로 흘러 블라디보스톡만으로 유입되는 강이다.
[3]曷懶甸(Xalan Dien): 하란(哈蘭)이라고도 한 함흥에 비정되곤 하였다.

2. 반론


금나라에서 曷懶路(Xalan Won)은 매우 중요한 교통로이다. 금사지리지 上京會寧府 조에 따르면 회령부를

기준으로, 동으로 600리에 胡里改(Xuligai)가, 서로 550리에 肇州, 북으로 蒲與路(Puyu Won) 700리, 동남

으로 恤品路 1600리, 曷懶路 1800리에 이른다고 하였다.
恤品路(Supin Won)는 지리지설명에 요나라 때 率賓府, (발해의) 率賓 옛땅이라 하였다.

용비어천가의 수핑강, 요즘의 수분하가 지나는 곳이다.
合懶路(Xalan Won)의 지리지설명에 동남으로 고려 국경까지는 500리라고 하였다.

한자표기만 다를 뿐 曷懶路의 설명임이 분명하다.
會寧府를 함경북도 회령會寧으로 본다면 曷懶(Xalan)은 분명 함흥(하란)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함흥 동남쪽으로 바다일 뿐 고려 땅이 있을 턱이 없다. 게다가 금나라 上京會寧府는 함경도 회령이

아니고 흑룡강성 할빈시 아청구 남백성이다.

이를 기준으로 할 때 수핀로 방향에서 200리(약 100km) 떨어진 曷懶路(하란로)는 결코 함흥일 수 없다.

3. 윤관 장군과 공험진

1107년 대원수 윤관장군은 부원수 오연총, 척준경, 왕자지 등과 함께 17만 대군을 거느리고 여진족을

토벌한 뒤, 북방에 9성을 쌓고, 여진족이 재침략하자 이를 진압하고 1108년(예종 3년) 개선하였다.

포로 346명, 말 96필, 소 300여마리. 宜州城,通泰城,平戎城,咸州城,英州城,雄州城,吉州城,

福州城,公嶮鎭城 등 아홉 城을 쌓은 분은 바로 윤관장군이었다.

<용비어천가>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험진嫌眞 우디거兀狄哈는 구쥬古州의 골야括兒牙 ① 키무나乞木那 ② 다비나答比那 ③ 컬더거可兒答哥를

말한다. 구쥬는 수핑강 곁에 있다. 회령부에서 북쪽으로 이틀거리에 아치랑귀阿赤郞貴, 다시 하루 가면

샹갸하, 다시 나흘거리에 구쥬, 서쪽에 샨츈령先春嶺까지 나흘거리이다.

키무나, 다비나, 컬더거는 친형제이다. 남돌南突 우디거兀狄哈는 수핑강速平江 남돌南突 아라카 바얀阿剌

哈伯顔을 말한다. 남돌은 姓씨이고 남돌 우디거部에 속한다. 콜칸闊兒看 우디거兀狄哈는 바로 안츈眼春의

골야括兒牙 투칭개禿成改를 이른다.

샨츈령先春嶺은 어디일까? 세종실록 지리지를 보면 수핑강愁濱江은 두만강 북쪽에 있다.

그 근원은 백두산 아래에서 나오는데, 북쪽으로 흘러서 소하강蘇下江(=松花江?)이 되어 공험진公險鎭·

샨츈령先春嶺을 지나 거양성巨陽城에 이르고, 동쪽으로 1백 20리를 흘러서 수핑강이 되며 아민阿敏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아민은 블라디보스톡만 북서 해안이다.


윤관장군은 공험진에 고려척경비를 세웠다. 역사기록을 보면 공험진은 蘇下江소하강(수이펀허綏芬河)가

에 있었으며 高麗之境고려지경이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옛 지도를 살피면 선춘령(샨츈령)은 연변조선족자치주 북쪽 경계에 자리한다.

윤관의 9성이 함흥 일대에 있다고 한 사학자들은 무엇을 근거로 그런 결론을 내린 걸까?

교과서에까지 오른 그 ‘정설’은 젊은 역사애호가들에게마저 여러 곳에서 뭇매를 맞고 있다.
아치랑귀는 연길시 국자가(局字街)이다. 공험진 부근인 험진우디거는 공험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정개양잡저》권 5-4에서는 동서의 거리가 2천리요, 남북의 거리가 4천리라고 하였다.

정북으로 장백산이 있고,장백산에서 시작된 산맥은 남으로 전라도계를 지나 서남향으로 일본대마도라고

하고,동남쪽으로 치우쳐 부산이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만약 장백산을 백두산으로 가정한다면 백두산은 한반도의 최북단으로 3천리 이내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장백산은 4천리 지점에 있다는것이다.그

렇다면 조선의 북쪽 경계선은 현 한반도에서 북쪽으로 1000여리가 북상되는것이 정상이다.

그리고 전라도계를 지나 서남향으로 일본대마도가 있다고 하는 대목이 통설과는 정반대라는 사실은 위

에서 설명한《송사 통고》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금사에서 신라6촌의 성(姓)이 중국성으로 개성(改姓)하는 과정이 보이는것은 왠일일까.그곳은 오랫동안 

 신라가 그 땅을 점유했던 결과라고 추정된다.《만주원류고》는 신라구주를 만주지역에 비정하고 계림

(鷄林)의 지명은 길림(吉林)에서 근거한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필자 주)


完顔,漢姓曰王。 烏古論曰商。 紇石烈曰高。〔三〕 徒單曰杜。 女奚烈曰郞。 兀顔曰朱。 

蒲察曰李。 顔盞曰張。 溫迪罕曰溫。 石抹曰蕭。 奧屯曰曹。 孛朮魯曰魯。 移剌曰劉。 

斡勒曰石。 納剌曰康。 夾谷曰仝。 裴滿曰麻。 尼忙古曰魚。〔四〕 斡准曰趙。 阿典曰雷。 

阿里侃曰何。 溫敦曰空。 吾魯曰惠。 抹顔曰孟。 都烈曰强。 散答曰駱。 呵不哈曰田。 

烏林荅曰蔡。 僕散曰林。 朮虎曰董。 古里甲曰汪。

 

 


《호종동순일록(扈從東巡日錄)》


자료는 필자가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를 번역하면서 참고로 입수했던 자료이다.  

이 자료에는 송나라 때의 홍호(洪皓)의 《송막기문(松漠紀聞)》과 청나라 때의 《호종종순일록(扈從東巡

日錄)》·《계동록(啓東錄)》·《황화기정(皇華紀程)》·《변강반적(邊疆叛迹)》 등이 합철되어 수록되어

있는데 《송막기문》은 홍호가 금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오랫동안 그곳에 억류되어 있으면서 금나라 태조

아골타의 주위에서 직접 보고 느낀 것을 나중에 송나라에 돌아와서 기록한 책으로 남송과 금나라의 외교

관계 및 금나라의 관제 · 지리 · 언어 · 풍속 등을 연구하는 데 매우 종요한 자료로서 필자가 역주한

《만주원류고》에 여러 차례 인용되었으며 나머지 서적들은  청나라 역사를 연구하는 데 꼭 필요한 자료

이다.


《호종동순일록(扈從東巡日錄)》이란 무엇인가?

 

이 책은 고사기(高士奇)라는 사람이 강희제가 동순할 때호종하여 동북지방, 즉 만주 길림 일대에 와서 본

것을 글로 쓴 것이다.   청나라 황제들은 그들의 조상들의 능묘가 있는 성경으로 몇 년에 한번씩 참배를

하고 그 과정에서 사냥도 하고 한다.   동원된 인원만도 수천명에 이른다. 


고사기(高士奇)는 자는 담인(澹人)이요, 호는 강촌(江村)인데 청초 절강 전당인이다. 

《청사고(淸史稿)》에 전기가 있는데 그 평생 사적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는 어렸을 때 학문을 좋아하고 총민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일찍이 글을 팔아서 생활을 했으나

나중에 대학사 명주(明珠)의 천거로 내정 공봉(內廷供奉)이 되어 첨부사 녹사를 제수 받았다가 내각중서

(內閣中書)로 자리를 옮겼으며 6품의 봉록을 받았다. 

강희 19년, 액외 한림원 시강이 되었고, 얼마 후에 시독으로 보임되었으며, 일강기거주관(日講起居注官)

으로 충원되었다.  강희 21년, 성조(聖朝)가 동순할 때 그는 문학지사(文學之士)로 호종하여 그가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을 글로 쓴 것이 《호종동순일록》이다.


이 책은 상 · 하 두 권으로 나누어졌는데 상권은 북경(北京)을 출발하여 성경(盛京)에 이르기까지 도중의

견문을 기술한 것이요, 하권은 성경(聖京)에서 길림(吉林) 및 북경(北京)으로 돌아오기까지의 도중의

견문을 기술한 것인데, 기술 중에는 잡다하게 시사(詩詞)의 작품이 있은 바, 이는 청나라 때 동북 생활을

반영한 필기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중에서 길림 일대의 산수· 임목에 대한 기술이 또 다른 특색을 띠고 있다.


(마청복, 《동북문학사(東北文學史)》, 춘풍문예출판사, 489~491쪽 참조) 


이 책은 시간을 날실(經)로 하고, 지망(地望)을 씨줄(緯)로 하고, 역사를 내포(內函)으로 하여, 북경(北京)

에서 길림(吉林)까지 거쳐간 산천 · 군현 · 올새(兀塞) · 요해지지에 관한 사물의 근본을 탐구(探本求源)

하여 그 연혁의 변천을 기록한다거나 혹은 어떤 곳은 자세하게 어떤 곳은 간략하게 낱낱이 해설을 하였다.  

순행한 날자는 모두 80일, 거리가 종횡으로 2천 리에 달한다고 한다.


(고사기 찬 · 진견미 점교, 《호종동순일록(扈從東巡日錄)》, 길림문사출판사, 장백총서 초집 69~70쪽

점교전언 참조)


필자가 대충 읽어 본 바에 의하면 산해관 부근에 있는 갈석산 일대에서 경험한 신기루 이야기며,

요하(遼河)를 일명 구려하(句麗河)라고 한다든가, 요동이 한 때 고구려의 차지가 되었다든가,  걸걸중상의

아들 대조영(大祚榮)이 도읍을 했던 홀한성(忽汗城)이 바로 옛 평양성(平壤城)이었다는 기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 준다 할 것이다. 

특히 흥미를 끈 부분은 강희제가 장백산(백두산) 부근에 이르러 황태자 및 제왕 · 대신들을 거느리고 강안

에서 백두산을 멀리 바라 보고 삼궤구고례(三궤九跪禮)를 올렸다는 기록이다.


위에서도 언급이 되었지만 길림 일대의 산수 · 임목에 대한 것으로 오계(烏稽)에 관한 것이다. 

우계란 만주말로 워즈요 중국어로는 대림(大林)이라는 뜻이다. 

일찍이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옥저(沃沮)란 숲을 뜻하는 만주말에서 비롯되었다던 그 워즈다.  

다른 말로는 와집(窩集) 이라고도 하는데 가을과 겨울에는 얼어 붙은 진창 따위로 통행이 어려운 산림지역

으로 길림성 · 흑룡강성의 산림 지대에 있다. 

그에 관한 내용은 필자가 역주한 《만주원류고》의 해당 부분의 주석을 참고하기 바란다.


(졸저, 《만주원류고》, 186쪽 참조)


 

....(상략)

동서 하권 정미일(丁未日)에 들어 있는 내용이다.  전날인 병오일(丙午日)에는 왕보하(王保河)에서 주필

했다. 

이 날은 산해관으로 장차 들어 가려고 환희령(歡喜嶺)을 통과했는데 산해관 동쪽 3리에 있으며, 일명

서황령(恓惶嶺)이라는 곳으로 관을 나가는 사람들은 이 곳에 올라 당황하여 허둥지둥하므로 서황령이라

하고,  일단 관에 들어와서 이곳에 오른 자는 기쁨에 넘치기 때문에 환희령이라고 한다.


이날 산해관 서쪽 8리쯤에 있는 징해루(澄海樓)에 구경하였다.  이십리포에서 주필하면서 《징해루관

해가(澄海樓觀海歌)》를 지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황제는 관해시(觀海詩)를 쓰고 작자는 징해루(澄海樓)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을 노래했다고나 할까.  그 노래를 짓기까지의 서문은 아래와 같다.


한무제가 동순한 것은 《한서 · 제사지》에 나온다.  괄호한 부분은 원래 있던 내용인데 누락이 되어 원문의

뜻을 복원해 내려면 이 부분을 살려서 번역해야 문장의 전후 관계가 확연해 진다.


昔漢武帝東巡海上, 方士言蓬萊諸神若將可得, 遂欲自浮海求蓬萊, 群臣敢莫能止。  夫武帝以英明之主, 

惑于方士, 爲後人所譏笑。 比者, 左道朱方旦持其邪說, 蠱世惑民, 皇上毅然誅之, 以正人心, 天下稱快。 

孟子曰: 經正則庶民興,. 足徵人主好惡, 關于治蘭不淺, 是日 捧讀御製觀海詩, 實寓此意也. 駐蹕二十里鋪,

作澄海樓觀海歌:  


"옛날 한무제가 해상을 동순할 때, (태산을 봉한 뒤에 바람과 비를 만나지 않자) 방사(方士: 도사)들이

어수선하게 말하기를 봉래(蓬萊)의 여러 신선들을 만날 것 같습니다라고 하자 (이윽고 황상은 흐믓해

하면서 신선들을 만나 보았으면 하고 또 다시 동쪽 해상으로 가서 멀리 바라 보았다.  봉거(奉車) 자후

(子侯)가 갑짜기 병이 나서 하루 사이에 죽어버렸다.

마침내 몸소 바다로 건너가서 봉래에서 신선들을 만나려고 하매, 군신들이 감히 이를 막을 수 없었다. 

대저 무제는 영명한 군주이신데 방사들에게 현혹되다니 후인들에게 조소를 당할 만하다. 

최근에 사교의 무리인 주방단(朱方旦)이 그 요사한 설을 믿고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것을 황상께서

목을 베어 인심을 바로 잡아, 세상 사람들로부터 후련하다는 말을 들었다. 

《맹자(孟子) · 진심(盡心)》 장구에 이르기를, "법도가 잡히면 백성들에게서 착한 기풍이 일어난다

(經正庶民興)"고 하였는 바, 이는 임금의 호오(好惡)가 치란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할 것이다.  

이날, 황상께서 지으신 《관해시(觀海詩)》를 받잡아 읽어 보니 실로 이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겠다. 

황제께서 이십리포(二十里鋪)에서 잠시 머물러 숙박하였다. 

《징해루관해가(澄海樓觀海歌)》를 썼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략).......


登州海市更奇幻, 須臾臺榭生虛空。 停鑾古岸列蘭錡,  華旟翠羽飜長虹。三山靈境疑咫尺, 蜃樓縹緲將無同。

百川朝宗會九野, 緬維大禹眞神功。 宸遊扈從廣聞見, 蕩滌心地開塵蒙。


.....(후략)...... 


등주(登州)의 신기루(蜃氣樓) 더욱 기묘하게 변하더니 갑짜기 허공중에 누각과 정자 같은 것이 생겼다네

황제수레 옛언덕에 멈추고 병기 틀에 놓아 좍 벌려놓고, 화려한 군기(軍旗) 빛고운 물총새 나래 치듯 펄럭

이누나

삼신산(三神山)의 신령스런 풍경 지척인듯, 신기루 아스라이 모든 게 다 다르이

온갖 하천 구야(九野)로 모여드니, 우임금 뛰어난 공적 참으로 생각나누나  

황제 유람할 제 호종하여 견문 넓히니, 이내 마음 후련하고 속세의 어리석음 확 트이는듯 하다 


맺는 말


고사기의 직책 중에 일강기거주(日講起居注)라는 것도 있었다.  

기거주는 황제의 지근 거리에서 일상 언행을 기록하는 사관이었다.  또 일강이란 매일 매일 황제에게 강을

담당했다는 말이니 황제의 그에 대한 신임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청나라가 처음 일어날 때 만주족은 겨우 40만 명으로써 1억 4천만의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산해관을

넘어 중원으로 들어가 주인이 된 자들이다. 

 강희제는 건륭제의 조부로서 오삼계의 반란을 진압한지 얼마 안 된 뒤에 80일 동안 수도 북경을 비우고

자신들의 발상지가 있는 성경까지 순행하면서 중간 중간에 사냥도 하면서 조상의 능묘를 참배하고 다시

되돌아 가는 과정에서 보고 들은 것을 사관이 적은 기록이다. 

얼마나 자신 감이 넘친 통치자였기에 이런 결단을 할 수 있는 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다.  


이 책 맨 마지막 부분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황제는 그같은 고된 강행군에 불구하고 매일 주요한 사안을 직접 챙각종 보고서를 읽어 결재를 하고, 밤늦

도록 손에서 책을 떼는 일이 없었으며, 지나는 고을 마다 반드시 백성들을 만나 살기가 힘들지 않은지,

가믐으로 농사 짓는데 어려움은 없는지, 관할 원님들은 제대로 일을 잘 하는지 못하는지를 물었다고 하니

봉건 군주 시대의 통치자로서의 귀감이 아니라 할 수 없다.   


필자가 《만주원류고》를 번역할 때는 자료로서는 가지고 있었으나 그 내용에 대해 자세하게 알지 못했

는데 이번에 대충 살펴 보는 계기가 되었다.(봉오선생) 


호종동순일록(扈從東巡日錄)중에서

 

漢武帝東巡海上方士言蓬萊諸神若將可得遂欲自浮海求蓬萊羣臣諫莫能止夫武帝以英明之主惑於方士為後人

所譏笑比者左道朱方旦持其邪說蠱世惑民皇上毅然誅之以正人心天下稱快孟子曰經正則庶民興足徵人主好惡

關於治亂不淺是日捧讀御製觀海詩實寓此意也駐蹕二十里鋪作澄海樓觀海歌六龍巡狩滄海東千騎萬騎花五騣

長城既盡插泱漭層樓更上攀穹隆憑闌四望豁遠目惚怳靈變難周窮胚渾太極杳無際初看水面摩青銅轟雷忽動勢

震撼耳畔颯颯鳴驚風碧沙騰湧銀濤拆白石嶄鑿洪波充迴瀾相磓壁矗立飛沫互起山巃嵸薈蔚盪沃雲霧集轉旋上

下乾坤通蓬萊貝闕在何所髣髴想像瀇滉中珊瑚為梁瑇瑁礎水晶鏤出馮大?弓宮介鯨歕浪駕龍女蒼蛟揚髟?者

【 髟?者:鬐】 舞海童吐吞螺節光閃閃漰湱鼉鼓聲逢逢大瀛澄泓散霞綺扶桑照灼初陽紅

 

登州海市更奇幻須臾臺榭生虛空停鑾古岸列蘭錡華旟翠羽翻長虹三山靈境疑咫尺蜃樓縹緲將無同百川朝宗會

野緬維大禹真神功宸遊扈從廣聞見蕩滌心地開塵蒙平生壯志重登覽北歷窮漠東溟濛愧無廣川賦浩汗                                                                                


 


《동사회강(東史會綱)·서례(序例)》 중 《동방지명지변(東方地名之辨)》


정겸(丁謙)의 지리고증은 고구려의 역사를 오늘날 전하는 정사보다 더 올려 잡으려는 노력은 우리가 미쳐

생각하지 못한 부분으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신당서(新唐書)·고려전(高麗傳)》에 "고려(高麗)의 《비기(秘記)》에 '9백년이 못되어 여든 살 먹은

대장이 나와 이 나라가 망한다(不及九百年, 當有八十大將滅之)'라고 하였는데, 고씨(高氏)가 한(漢)나라

때부터 나라가 있은지 지금 9백년이 되었고, 이적(李勣)의 나이가 또 여든입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로써 보건대 고구려가 존속한 햇수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697년보다 훨씬 오래된 9백년 쯤 될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다.


다만 그가 고구려가 신·구 두 나라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7세기경에 주석이 완성된 《후한서

(後漢書)·군국지(郡國志)》라든가 조선시대 말기에 청나라 사람 설배용(薛培榕)가 쓴 《동번기요(東藩紀

要)》등의 지명비정을 통해서 입증하려 한 것은 문제가 심각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설씨의 지명비정은 거개가 조선시대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등에 근거한 것인데,

이는 조선 숙종 때의 역사학자 임상덕(林象德)이 그의 명저 《동사회강(東史會綱)·서례(序例)》 중 《동방

지명지변(東方地名之辨)》에서 이미 적절이 지적한 바와 같이,


 "삼국시대의 지명은 이제 와서 상고할 수 없는 것이 매우 많은 바, 고구려 지방 더욱 심하다.

대개 동명(東明)이 처음에 일어났던 지역은 지금은 이제 모두 상국(上國: 중국)에 다 들어가 버렸다.

그 동북은 건주위(建州衛) 지경이요, 서북은 개주위(蓋州衛) 지경으로, 우리나라의 도적(圖籍)으로 상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동인(東人: 우리나라 사람)들의 상스럽고 속되며 황당한 말은, 예를 들어 동명(東明)의 인마(麟馬)

등에 관한 일은 잘못되고 괴이쩍은 것을 그대로 답습하였거니와,


바로 옛일을 기록하면서 실은 지금의 평안도(平安道) 일대의 산천(山川)과 성곽(城廓)의 이름은 모두 동명

(東明)에 부회(附會)하여 우리 역사에서 보이는 명칭은 과장하여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채워졌거늘,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이에 대해 고증을 해서 바로잡지 않고 동명(東明)이 낙랑(樂浪: 평양)에서

일어났다고 하였거니와, 결국에는 성천(成川)을 송양국(松讓國)이라 하고, 용강(龍崗)을 황룡국(黃龍國)

이라 하고, 우발수(優渤水)가 지금의 영변(寧邊)의 향산(香山)에 있다고 하였으며,

행인국(荇人國)도 영변(寧邊)에 있다고 하였으니 이러한 것들이 매우 많은 바, 모두 잘못된 것같다.


김문열(金文烈)(김부식의 시호가 文烈임, 필자주)의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地理志)》에 졸본(卒本)·

송양국(松讓國)·우발수(優渤水)·황룡국(黃龍國)·행인국(荇人國) 등 나라들은 모두 미상(未詳)이라고 하였

는데 이는 아마도 적절한 견해일 것이다.


(三國時地名, 今不可考者甚多, 而高句麗地方尤甚。蓋東明初起之地, 今皆入上國, 其東北爲建州衛界, 西北

爲蓋州爲界, 非我國圖積所能考據。而東人俚俗荒誕之言, 如東明麟馬等事, 承訛襲怪, 便作古, 實今平安一

道之內山川、城郭之名, 皆附會於東明。國史所見之名號, 以實其誇誕, 而《輿地勝覽》不加證辨直, 以東明

爲起於樂浪, 而遂成川爲松讓國, 龍崗爲黃龍國, 優渤水爲在今寧邊香山, 荇人國亦附於寧邊古跡之末, 此等

處甚多, 皆似誤也。金文烈《三國史·地理志》卒本川、松讓國、優渤水、黃龍、荇人等國, 皆云未詳, 此恐

爲的論, 今錄其大者於下。)"라고 하였으니

(임상덕, 《동국회강(東史會綱)》영인본, 아세아문화사, 15쪽 참조),  


옛날 지명의 고증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것이다. 

따라서 그 내막도 잘 모르면서 함부로 지명비정을 해서는 안되며, 모르는 것은 그냥 존의(存疑: 미해결로

남겨두는 것)로 남겨두는 것이 훨씬 더 낫다. 우리 역사에서는 이런 류가 많나니 중국 난하 일대에 있어야

할 은나라 말기에 나라가 망한 뒤 주나라의 곡식을 먹을 수 없다고 하여 고사리를 캐먹다 굶어죽었다는

고죽국(孤竹國)의 수양산(首陽山)이 황해도 해주(海州)로 옮겨왔고, 중국에 있어야 할 기자(箕子)의 무덤이

평양으로 옮겨와 그 무덤과 사당까지 만들어져 사대주의자들의 숭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봉오선생)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