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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역사

위만조선 4 - 금마저,위만조선 평가,창해군,장산열도의 고대국가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5.11.04|조회수366 목록 댓글 0

준왕이 도착한 금마저(金馬渚)는 장산군도의 대왕가도(마한도)




사진설명: 요동반도의 남쪽에 펼쳐진 금주와 대련지방을 신금(新金)으로 표시한 위성지도다.

그런데 이곳이 백제시대의 금주 금마군 이었다고 하는 기록이 《만주원류고》를 인용한 《흠정사고전서》

에서 밝혀졌다.

그리고  《만주원류고》는 그 출전을 송나라때 기록인 《통고(通考)》에서 참고하였다고 하고 있다.

지금은 유명한 관광지로 변한 대련과 장산군도 사이에 금석탄(金石灘)이란 해변 관광지가 있고 이곳의

주변을 신금(新金) 이라고 부르고 있다.

지도에서 신금의 좌측으로 보이는 풍산산성은 과거의 외패산성으로  후한의 광무제가 서기 44년 낙랑군의

동부도위 산하에 있던 영동7현을 수복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와 빼앗은 성이라는 기록도 《금사》열전의

주석을 통해서 밝혀졌다. 그러나 주석에는 벽류하에 있다고 하였다.

현재의 풍산산성은 벽류하의 원류에서 분수되어 서남쪽으로 흐르는 지류가 있다.

<요동반도에 마한의 이름이 있었는데 그 증거가 하나 나왔다.
《금사》에서 요동반도 서남부의 반란을 토평하는데 반란군이 도망간 곳이 동남부로서 지금 장해현의

<마한도>였다. 그 옆에 왕가도로서 추적이 되었으니 현재 마한도의 이름은 석성도라고 한다.

소,복주蘇、復州 소주와 복주(현재 같은 지명),


蒲?古胡什吉水 (벽류하, 고대 비류하. 온조 형 비류태자가 있던 곳. 벽류하에 있는 [위패산성]은 후한

광무제의 군대가 쳐들어온 곳이고, 비류는 쫓겨나서 온조가 먼저 있던 평양 서북 미추성으로 옮겨갔다.


마한도馬韓島; 현재 이름은 석성도石城島
왕가도王家島; 현재 이름도 왕가도
그래서 최치원은 고구려가 마한이라고 한 것이다.
대동강의 마한은 기자의 금마마한이었고 삼국사기백제전에서는 진마라고 하였다.>  

* 금마군에 대해서 산해경광주’(山海經廣注) 18권 해내경에는 조선을 말하며 준이 위만에 쫓겨나 간곳이

근거없는 한반도가 아니라 명확히 한나라 즉 대륙동해안의 금마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漢地金馬郡)

이내용에 대해서는 《산해경 광주》가 사고전서안에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확인하였으나 원문을  아직

까지 찾지 못했다.

 

근래에 출간된 윤명수님의 《금사》에는 열전 제18 이 빠져있다. 따라서 열전에 대한 주석도 빠져있다.

뿐만아니라 인터넷으로 지원되는 중국싸이트에서는 《金史》열전의 원문은 확인할수 있으나 열전의

주석은 모조리 탈락되어 있다.

 

청주한씨 족보: 준왕의 성씨와 한씨


청주한씨 족보의 마한의 왕통에 따르면 준왕(후조선의 哀王=마한의 武康王)은 BC194년에 마한으로 이도

하고 그해에 돌아가셨는데 후대가 평양으로 들어가 도읍을 세우고 마한왕 8세를 이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평양으로 들어가 도읍을 세웠다는 대목은 준왕이 위만의 평양으로 부터 탈출하여 바다로 도망한

후에 마한에 도착하여 한왕을 선언하고 서거하자 후대가 한반도의 새로운 평양에 들어가 도읍을 세웠다고

한것이다.

당시 새로운 평양성을 구축한 기록은 《한단고기》의 <북부여기>에서 볼 수 있다.

그후 마한왕으로서 8대를 지내는 동안 다른곳으로 도읍을 옮긴 사실이 없다.

그렇다면 그들이 바다로 도망하여 처음 도착한곳이 마한의 금마저였지 익산의 금마가 아니다.

마한의 금마저란 요동반도의 남쪽바다에 펼쳐진 장산군도중의 대왕가도를 말한다.

따라서 한서(韓西)란 대왕가도의 서쪽에 있던 위만조선 즉 사문도(장도)를 말한것이다.


청주한씨 족보의 마한의 왕통에 따르면 준왕(후조선의 哀王=마한의 武康王)은 한씨라 칭한 바가 없고

후대에 세 성씨가 갈리며 그때야 한씨가 등장하는 듯합니다.


마한 왕통(馬韓九世王位諱號世系)

1世 <武康王> 一云<哀王>, 諱<準>, 丁未(BC 194년) 移都<馬韓>, 其年 薨. <哀王>己入於都<平壤>.

                四十一世則 <馬韓>王爲八世
2世 <康王> 諱<卓>. <惠帝> 二年 戊申(BC 193년)立 在位四年
3世 <安王> 諱<龕>. <惠帝> 六年 壬子(BC 189년)立 在位三十二年
4世 <惠王> 諱<寔>. <文帝> <後元> 七年 甲申(BC 157년)立 在位十三年
5世 <明王> 諱<武>. <景帝> 十三年 丁酉(BC 144년)立 在位三十一年
6世 <孝王> 諱<亨>. <武帝> 二十八年 戊辰(BC 113년)立 在位四十年
7世 <襄王> 諱<燮>. <宣帝> <本始> 元年 戊申(BC 73년)立 在位十五年
8世 <元王> 諱<勳>. <宣帝> <神爵> 四年 癸亥(BC 58년) 立, 在位 二十六年 . 甲子(BC 57년) <新羅王>

     <朴赫居世>立國<慶州>. 遂 <辰韓>二十二年 甲申(BC 37년)<高句麗><東明王><高朱蒙>立國<成川>

       倂二府. <元><稽>之末 有後孫三人: 一曰<平>稱<鮮于>氏入<黃龍國>; 一曰<諒>稱<韓>氏; 一曰

     <平>稱<奇>氏.

9世 <稽王> 諱<貞>, <成帝> 建始 元年 己丑(BC 32년) 立.
鴻嘉 四年 甲辰(BC 17년) 爲<百濟><溫祚>所奪, 在位十六年 人只保<圓山><錦峴城>. <新><莽>元年

己巳 以二城 降于<百濟>. <馬韓>不祀自<康王>戊申至<稽王>, 己巳(AD 9년)爲二百二年

<馬韓>凡九世, 歷二百二年 自<箕子><朝鮮>四十一世. <馬韓>九世前後 共五十世. <箕子>元年 至韓亡之

世合1131年. <馬韓>之末 <元王><勳>有子三人: 一曰<友平>入<黃龍國>爲<北原>(或云<太原><鮮于>

氏;一曰<友諒>仕于<新羅><脫解王>朝爲<上黨><韓>氏以<淸州>爲本;一曰<友誠>降<百濟>仕于<溫祚王>

朝爲<德陽><奇>氏以<幸州>爲本.
按魏誌曰<箕子><子>姓其後有曰<友平><友諒><友成>.<友平>因襲<鮮于>氏, 歸<北原>.

<友諒>襲<馬韓>仍爲<上黨><韓>氏. <友成>歸<德陽>爲<奇>氏. 見石灘公所刊萬曆丁巳譜.


위의 기록에서 송나라의 《통고》에, 고려는 백제의 금주 금마군을 남경으로 불렀다고 하고, 주를 달았는데,

<그땅 백제의 동남 변경의 전부를 신라가 점유하였다가 후에 발해와 거란으로 귀속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백제의 동남 변경이 익산이 될수없다는 결론이고 백제의 영토는 대련의 서북쪽으로도 있었다는

얘기가 되겠다.


<금사><열전18>에 대한 내용이 무엇인지 어려움을 무릅쓰고 다음과 같이 번역을 시도해보았습니다.

번역이 부실하면 지적 부탁드립니다.

/新校本金史/列傳/卷八十 列傳第十八/斜卯阿里
- 1799 -
蘇、復州叛,?至十萬.旁近女直皆保於太尉胡沙家,築壘?固.敵圍之數重,守者糧芻俱盡,牛馬相食其?尾,

人易子而食.夜,?二人出,告急於阿里.阿里赴之,內外合擊之,破其?於闢?密罕水上,?殺幾盡,水?之不

流.蒲?古胡什吉水、馬韓島凡十餘戰,破數十萬?.契丹、奚人聚舟千?,將入于海.阿里以二十七舟邀之,

中流矢,臥舟中,中夜始蘇.敵船已入王家島,?夜取海路追及之,敵走險以拒,阿里以騎兵邀擊,再中流矢,

力戰不退,竟破之,盡獲其舟.於是,蘇、復州、婆速路皆平.

소주, 복주에서 반란이 일어나 그 수가 10여만명에 이르렀다. 근방에 있던 여직의 보어태위 호사가는 돌로

공고한 축을 쌓아 지켰는데 란민들이 겹겹이 둘러쌓고 지키자 성내의 지키는 자들은 식량이 떨어져 소와

말의 꼬리를 잘라먹고 사람들은 서로 자식을 바꿔 인육을 먹었다. 밤에 두사람이 탈출하여 아리에 급히

고하자 아리가 달려와 성의 안팍에서 공격하여 포위를 풀었다.

벽금밀한수상에서 접전하여 많은 인명을 죽이자 물이 막혀 흐르지 않았다. 또 벽류하와 마한도에서 십여

전을 치뤄 수십만을 격파하였다. 거란과 해인들이 천척의 배를 ?아 장수가 인솔하여 바다로 들어와 아리는

27척의 배를 요격하고 가운대로 쏜살같이 빠져 배위에 누어있다가 밤이 되자 다시 일어나 적선이 있는 왕

가도로 들어갔다. 밤을 택하여 해로로 추격하자 적들은 험한곳으로 달려가 막았다.

이에 아리는 기병을 풀어 요격하고 다시 쏜살같이 적진을 통과하여 싸움에 물러섬이 없었다.

이로서 결국 적들을 격파하고 적선들을 모두 노획하였다. 이후 소주, 복주, 파속로가 모두 평정을 되찾았다.

(번역에 애로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완벽하지가 못합니다.

"벽금밀한수"란 물이 어디를 말하는지는 알수 없습니다.)

소주와 복주의 위치는 위의 지도상에서 좌측에있는 와방점시(瓦房店市)주변입니다.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魏略曰: 其子及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 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
참고// 국편에 있는 번역문//
[準王]은 그의 近臣과 宮人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를 경유하여 韓의 지역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韓王

이라 칭하였다.
魏略: 準의 아들과 친척으로서 [조선]나라에 남아있던 사람들도 그대로 韓氏라는 姓을 사칭하였다.

準은 海外[의 나라]에서 王이 되었으나 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 뒤 準의 후손은 絕滅되었으나, 지금 韓人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
원문을 새롭게 번역을 해보면,...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 (準은) 그의 左右宮人을 거느리고 走入海하여,

韓地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韓王이라 불렀다.

다음,, 위략을 인용한 주석 부분

魏略曰 : 魏略에 이르길其子及親留在國者 : 그의 자손과 친척은 나라에 머물러 있으면서
因冒姓韓氏 : 韓氏로 姓을 冒한 까닭에 (韓氏를 冒姓한 까닭에)準王海中 : 準王은 海中에 있으면서,
不與朝鮮相往來 : 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실증]위만조선의 공과 남북사학계의 평가


위만조선의 치적에 대한 남북 사학계의 평가

고조선 말기에 건국 되어 약 86년여를 한나라와 대치상태에 있던 위만조선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국력을 강화하여 한나라와 대치하였던 공과에 대하여 남북한의 사학계에서는 어떠한 평가를 하고 있는지

알아보기로 합니다. 왜냐하면 조선의 건국 이래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 두계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94쪽
    
제 6절    여   언

다시 거듭하는 바이지만, 조그마한 위만조선이 저 세계제국을 건설하려는 한제국의 대공세를 맞이하여 약 

 1년간이나 항쟁하였을 뿐더러 누차 해군의 예봉을 좌절시킨 이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당시 조선인의 정치조직, 경제 및 군사조직의 진보발달, 민족의식의 왕성은 물론이요, 또한 한의 우세한 

철제무기에 대항할 정도의 철기문명의 혜택을 이미 충분히 받았던 것도 알 수 있다 하겠다.

한은 위씨조선 땅에 본주민의 국가를 말살시키고 자국의 군현제를 실시하여 사상에 저명한 동방4군(낙랑.

진번. 임둔. 현도) 을 형성 하였다. 동방의 경제적 이익을 오로지 하려는 한제국의 조선 침략은 , 전일 연의

조선 침략에서 일보를 내킨, 즉 그것의 일 연장이라고 볼 수 있거니와, 이 때 중국민족의 동침세력이 발해.

황해연안을 통하여 동안에 깊이 침투해 온 것을 주의 하여야 할 것이다.

비록 지역상으로는 반도북반에 불과하다 하겠지만, 일국을 들어 오랫동안 이민족의 통치하에 놓이게 한

것은 이것이 우리 역사상에 첫 경험이요, 또 획기적인 중대 사실이었다.

그러나 한 군현의 설치로 말미암아 군현 내와 그 주변사이에 많은 자극제와 영향력을 끼쳐주어 그들의

문화의 향상, 민족의식 내지 투쟁정신을 왕성케 하였던 것은 또한 주의할 사항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리하여 부족의 통일운동, 고대국가의 건설 등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인용끝)


* 천 관 우 <한국사 시민강좌> 144쪽

"연인"(燕人)이라 일컬어 온 위만은,당시의 연령(燕領)인 요하 하류에 있던 조선(북진번)인이었다는 설을

따른다.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4권 100~101쪽

국가의 기원문제와 관련하여 위만조선이 성립된 이후의 관직명과 관위체계 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위만조선 사회의 상층 지배집단으로는 왕. 태자. 비왕. 상. 대신. 경. 장군 등의 명칭이 나타나고 있다.

위만은 앞서의 준왕보다 한 차원 높은 단계의 왕격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준왕은 중국사회의 “조선 후”로 인식되던 상황에서 왕을 자칭한 것임에 비해,

위만의 경우 이미 왕으로서 손색없는 수준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위만은 주변지역 사방 수 천리를 장악하여 진번. 임둔. 옥저지역이 모두 위만조선의 통치영역에 포섭

되어 있었다. (30)

따라서 위만조선 당시의 왕은 명실상부한 왕의 지위를 유지하였으며, 특히 “태자”라는 칭호가 사용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독점적이고 안정적으로 왕위를 계승하는 왕실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왕권이 단순한 제후 왕보다 훨씬 강화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하략 (30)<<삼국지>> 권 30, 위서 30, 오환선비 동이전 30, 동옥저.


궁금한 위만조선의 군대 제도에 대하여 북한 사학계의 의견을 들어 봅니다.

<고조선의 력사 개관> 116쪽에서 인용합니다.

한국의 사학계 에서는 아쉽게도 책임 있는 학자들의 연구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조선국가는 상당히 째인 군대제도와 강력한 상비무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만조선의 군대는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국왕이 관활하는 지역에서 징집한 중앙군은 평시에는 주로 수도방위의 의무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전시에는 왕을 따라 전선에 출동하여 외적방어의 주력으로 활동하였다.
후왕들이 거느린 지방군의 기본사명은 변방의 국경방위였다.
국왕은 전군에 대한 지휘통솔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지방군에 대한 지휘통제는 실제상 후왕들에게 맡겨져

있었다.

만조선에서는 발전된 무기로 장비된 많은 상비무력이 있었다.
고조선_한나라 전쟁 당시에 직접 전투에 참가한 고조선군의 수는 대략 10만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그

러므로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군대 수 까지 고려한다면 실제 무력은 그 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조선병제사>) 1권,

만조선의 군대는 활과 창, 검 (단검, 장검) 과 도끼, 과, 쇠뇌, 방패와 갑옷 등 여러 가지 무기무장으로

장비 되여 있었다. 만조선 시기의 무기와 군사장비들에서 기본은 철제품이었다. ..........하략.


고조선__한나라 전쟁 시기에 고조선의 태자가 1만 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담판 장에 나섰을 때 이 부대가

가지고 간 말 이 5천 필이나 되었다. (<사기> 권 115 조선열전) 고 한다.

그러므로 전국의 말들을 다 합산하면 그 수 는 대단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만조선 시기에 목축업이 발전하여 집짐승 특히 말과 소의 마리 수가 빨리 늘어 났는데 이것은

농업생산을 더욱 발전시키고 군사력을 증강하는 중요한 담보의 하나로 되었다.

<고조선의 력사 개관 >117쪽에서


고조선인민들의 창조적 로동에 의하여 철기가 더 널리 보급되고 농업과 수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국내

상업과 대외 무역도 훨씬 활기를 띄게 되었다.

만조선은 성립이후 정치, 경제, 군사 등 여러 분야에서 많은 발전을 이룩하였으며 국력을 한층 강화 하였다.

만조선은 바로 이 강력한 국력에 의거하여 주변의 소국과 정치세력들에 대한 통제와 통합 사업을 다그쳐

령토를 부단히 넓혀나갔으며 대외적으로 한나라 침략세력에 당당히 맞서 나라의 자주권과 존엄을 고수

하였다.


중국사서인 <사기> 는 “만이 군대의 위력과 재물에 의거 하여 주변의 소읍들을 침공하여 항복시키니 진반,

림둔이 모두 와서 복속하였으며 령토는 사방 수 천리에 달하였다.”고 하였으며

만의 손자 우거가 <꼬여 들인 한나라 망명자들이 상당히 많았을 뿐 아니라 또 진반과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중국의) 천자에게 글을 올리고 방문 하려는 것 마저 가로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사기> 권 115 조선열전)고 전하였다.

이것은 다 만조선의 국력의 강화와 대내외적 발전모습의 일단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만조선의 안정과 발전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점차 난국에 부닥치게 되었다.
만왕조의 발전과 더불어 그의 계급적 지반을 이루고 있던 중앙과 지방의 귀족세력들이 더 큰 세력으로

자라나 권력과 재부를 위한 쟁탈전을 벌리었으며 때로는 왕권에 도전하기도 하였다.

만조선 말기에 28만 명을 거느리고 있던 후국의 왕 예군 남려가 서쪽 한 나라에 투항한 사실과 중앙의 대신

이었던 조선상 력계경이 2,000호의 사람을 대리고 동남쪽의 진국으로 탈출한 사실 등이 그 일단을 보여준다.

만조선은 지배계층내부의 이러한 분열과 대립으로 말미암아 그 말기에 이르러 대내외적으로 심각한 위기를

겪게 되었다. (인용끝)


이상으로서 위만조선의 성립으로부터 멸망 때까지의 경위를 밝혀 봤습니다.

우리들이 인정을 하던 하지 않던 믿을 수밖에 없는 기록이 이렇다면 위만조선에 대한 잘하고 잘못한 것에

대한 사실은 인정을 해야 될 터인데도 이를 논하는 학자들의 의견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적어도 공식적인 사서에 최초로 기록된 우리들의 조상에 대한 기록인데도 불구하고 이처럼 강 건너 불 보듯

하는 태도는 옳다고 볼 수 없습니다.

위만조선의 성립당시의 경위가 비록 정당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었다 하더라도 당시 상황을 엄밀히

분석해 봤을 때 불가피한 상항이었다면 현실을 인정해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직까지도 위만에 대한 평가를 가지고 반신반의 하는 태도로 임 한다면 그 뒤로 따라서 전개되는 많은

사실들 자체 까지도 확신을 가질 수 없도록 하는 영양을 미치게 됩니다.




[실증]창해군(滄海郡)을 산속에서 찾아야 하는가?



고대사를 공부하는 연구자 들에게 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난제중에 하나는 창해군(滄海郡)이라는 지명

이다.

창해군이 등장하는 1차 사료에 예맥조선이 거론 됨에 따라서 동예로 비정되던 강릉이 등장 하였고 또

이들이 팽오의 감언이설에 속아 이동하여 간 곳을 압록강의 지류인 동가강(혼강)유역이라고 주장하여

왔다. 

이렇게 하여 높은 산들이 즐비한 협곡에 창해군이라는 한나라의 영지가 생겼다고 하는것이다.

따라서 이곳에는 소요수가 있어야하고, 비류수와 염난수가 있어야 하고, 환도성,졸본,홀승(두)골 성 등도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학설에 맞도록 지명 들을 맟추어 놓았다.

그러나 만약 창해군이 생기게 되는 동기를 알았었다면 이렇게 무모한 억지 주장은 없었을것이다.

창해군설치는 위만조선을 치기위한 한무제의 계략이었다. 


사마천의 《사기》<조선열전>에는 예군 남려의 귀부 사건이 수록되지 않았지만 <흉노열전>에는 연나라

가 예맥조선과 동호를 치고 연5군을 설치하였다고 기록하고있다.

따라서 예군 남려 28만 호구라는 것은 연나라의 침략으로 밀려난 예맥조선과 진번조선의 유민들이었다.

그들의 일부는 북쪽으로 밀려나 부여에 의탁하고 일부는 비교적 안전지대였던 묘도열도의 타기도로 들어가

낙랑조선의 휘하로 합류한것이다. 

후에 진번군이 된 예읍(타기도)은 준왕의 낙랑조선의 관활하에 있었고 당시 이들은 준왕과는 별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위만이 준왕을 밀어내고 정권이 바뀌자 예군 남려는 반발하기 시작한것이다.

이를 노리고 있던 한무제는 위만조선을 공격하기 위하여 창해군작전을 시도한것이다.

이를 《후한서》는 <예전>에 수록하여 마치 예맥족들이 한나라에 항복한것처럼 왜곡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한나라는 기원전 126년에 어사대부 장구가 면직되자, 공손홍이 그 자리에 올랐다. 공손홍은 무제에게 창해군

과 삭방(朔方)에 군을 설치하자는 주장에 대해 중국을 피폐하게 만들면서 이족을 경영하는 일은 무용지물이

라고 하면서 중지해줄 것을 여러 번 간언했다.

이에 무제가 주보언을 시켜 삭방에 군을 설치하여 얻을 수 있는 10가지 이로움에 대해 공손홍에게 말하게 했다.

공손홍은 한 가지도 조리있게 대답하지 못했다. 공손홍은 무제에게 “산동의 비루한 사람이라 그런 이점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원컨대 서남이와 창해군의 일은 그만두고 삭방의 일에 전념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결국 창해군은 이때 폐지되었다. 표면상으로 흉노 공격에 전념하기 위해서 창해군을 폐지 하였으나,

진짜 이유는 위만조선의 공격을 견디지못하여 화친을 도모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위치가 섬이었기 때문이다. 이로서 한무제의 1차 침공계획은 실패한것이다.


예맥조선에 대한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 견해를 보면, 제의 환공(桓公)편에… 북으로 고죽(孤竹)과 산융

(山戎)과 예맥(濊貊)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管子》小匡篇)


이는 예맥이 燕의 동북인 산융의 동쪽에 있었다는 내용으로 예맥의 중심지가 어디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呂氏春秋》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예맥이 북해지동(‘北海之東)’으로 언급되어 있어 그 위치가 요령

지역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같이 예맥에 관한 초기 기록은 예맥이 종족명칭으로서 고조선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비파형동검문화가

분포한 지역의 주민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 예맥 관련 명칭이 구체적으로 중국사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한대(漢代)이후의 문헌

이다.


① 북쪽으로는 오환.부여(烏丸․夫餘)와 인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예맥조선 진번(穢貉․朝鮮․眞番)에서 이(利)를

     취했다(《史記》권 129, 列傳69, 貨殖).
② 여러 좌방(左方)의 왕장(王將)들은 동쪽에 위치해 있는데 상곡(上谷)을 거쳐 곧바로 가면 동으로 예맥조선

     (穢貊․朝鮮)과 맞닿는다(《史記》권 110, 列傳50, 匈奴).
③ 팽오(彭吳)가 예맥조선을 물리치고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자 연(燕)과 제(齊)의 사이가 모두 들고 일어

     났다(《漢書》권 24 下, 志4 下, 食貨).


이들 사료에서는 예맥이 부여조선(夫餘․朝鮮)과 함께 언급되어 있는데 특히 예맥조선( ‘濊貊朝鮮’)이라는

연칭으로 나타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즉 이전까지의 조선이라는 명칭은 지역적 성격이 강한 표현이었는데, 새로이 등장하는 예맥조선이라는 표현은

종족명칭이 부가되었다는 점에서 ‘예맥족이 사는 조선’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89)

즉 예맥은 기본적으로 고조선을 구성하는 중심 종족으로서 중국의 동북방면에 위치한 조선지역에 존재하였

다는 사실이 한대에는 보다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기원전 108년 한무제의 2차공격후 처음에는 예읍(濊邑)이었던 창해군이 나중에 한사군의 하나인

진번군이 되었다는 기록과 창해는 원래 발해를 부르던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창해군의 위치는 현재까지 전해오는 통설처럼 요동의 산골짝인 동가강에 비유할 근거가 없어진것

이다.  더욱 기록대로라면 창해는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있어야 된다고 하는것이다.

그렇지만 기존의 통설은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다. 뿐만이 아니다. 이러한 이유를 들어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

들을 모조리 얼챙이 소설가로 폄하 시키고 아예 초장에 입도 뻥긋 못하도록 집단 행패를 가하는 행위다.

무엇이 잘못 된것일까. 꼬였던 문제들을 풀어보기로 한다.

 


위 지도를 잘 관찰하시면 노란 흙탕물이 탁하게 움직이는것이 보이실 거다.

이중에서 붉은색의 圓 위치는 비교적 물이 맑아져 푸른바다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부분이다.

이곳을 창해군이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물의 색갈은 홍수만 없다면  일시적이 아니고 거의 같은 변화로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영정하 입해구 남쪽으로 약간의 푸른 부분이 보이는 곳은 창주(滄州)로 부르던, 수나라가 발해군을 두었던

곳이다. 이곳을 창해군으로 착각하고 계시는 학자님들도 계신다.

그럼 우선 발해를 창해로 불렀던 사례 몇가지를 소개드린다.


사실 창해란 <오월춘추>에 창수사자(蒼水使者)로 등장하는 단군 부루태자로 부터 시작되는 장소다.

평양성의 대홍수를 겪으면서 얻었던 치수의 지혜를 회계산의 도산회맹에 참가하여 이때 금간옥첩에

기록된 오행치수 방법을 우사공에게 한수 지도하신 것이다.


그 곳은 바로 황하이(黃海)와 보하이(渤海)의 분계선이다.

황하이와 보하이가 만나는 곳은 색깔이 두 가지로 갈라지는데, 한 쪽은 짙은 푸른색, 다른 한 쪽은 옅은

노란색을 띠며‘태극(太極)’모양의 기이한 광경을 연출한다.

분계선은 마치‘용의 꼬리’모양과 흡사하며, 푸른 바다를 맑음과 탁함이 확실이 구분된 두 세계로 나누고

있다. 용의 꼬리 동쪽 부분은 끝없이 넓고 아득한 바다로 물고기가 뛰어 놀고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천연

어장이다. 그리고, 용의 꼬리 서쪽 부분은 잔잔한 파도에 조개와 수초가 공존하는 좋은 수산양식장이다.

가장 특이한 점은 한 쪽에서 파도가 거울처럼 잔잔할 때, 다른 한 쪽에서는 검처럼 격류가 일어나서 멀리서

봤을 때 용의 꼬리가 물을 가로지르며 노는 것 같다가도 갈매기가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는 그야말로 바다 위의 기이한 풍경이라고 할 만하다


* 《사기》권 55 <유후세가>에는 한나라의 장량이 창해군(滄海君)을 방문하여 진시황을 테러하기 위한

역사(力士)를 협조받고, 무개가 120근이나 나가는 철퇴를 만들어 동순 중이던 진시황을 박랑사에서 공격

하였으나 실패한 얘기가 있다. 바로 이 창해군이란 장도에 계시던 단군을 말한것으로 보인다.


이 창해군에 대해 《사기 색은》에 주석하기를, 서한 무제때 예군 남려(濊君南閭)가 투항해 옴으로써 만든

창해군은 그 명칭이 아마도 여기에서 기인하였을 것이므로 그 지역이 서로 가까울 것이라고 하였다.

즉 창해군(蒼海君)이 살았던 곳은 후에 창해군(滄海郡)이 설치되었던 곳과 동일하거나 가까운 곳이라는

것이다.

장량이 창해군을 만난 후 역사와 함께 진 시황제를 저격했던 박랑사는 지금의 하남성 중모 근처로 본다. 

장량은 韓나라 사람으로 자기 나라를 멸망시킨 진시황에게 원수를 갚기 위해서 장도에 있던 조선으로

건너가 임금을 뵙고 힘이 좋은 力士를 구했던 것이다.


사료의 곳곳에는 발해해협 장도에 있던 조선을 암시하고 있는 대목이 많은데, 구테여 바다를 피하여 엉뚱

한곳으로 해석을 돌리는 어리석음은 이제 깨달을 때도 되었다.

새로 밝혀진 하유기의 <해경신탐(海經新探)>에서는 <산해경>에서 말하는 사해(四海)는 산동반도를 중심

으로 동,서,남,북해를 표현한것이고, 곤륜산은 태산을, 흑수는 청주지역을 흐르는 낙수 또는 치수라고

밝히고 있다.

이 흑수의 위치에 대한 해석을 졸저《신시본토기》에서는 2002년에 벌써 이곳으로 밝혀 두었다.(주 1)

이 흑수와 곤륜산의 위치를 중국대륙의 서쪽으로 비정하고 연구를 계속하시는 학자님들께서는 긍정적인

재고가 있어야 될것이다. 사실 이같은 연구서는  너무 늦은 감이 있다.


(주 1)<<신시본토기>>338쪽, "상서"우공편의 삼위산은 장도의 삼신산이며, 흑수는 삼위산에 이르러

방향을 바꾸어 남쪽 황해로 들어간다. 돈황의 흑수나 삼위산은 옮겨진것이다.

흑수는 치수(淄水)를 말한것이며 내주만에서 동으로 흘러 묘도의 삼위산에 도착하면 방향을 바꿔 남으로

흐른다.(유엠 뿌찐 저 고조선에서) 


史記卷五十五 留侯世家 第二十五

留侯張良者,其先韓人也。大父開地,相韓昭侯﹑宣惠王﹑襄哀王。父平,相厘王﹑悼惠王。

悼惠王二十三年,平卒。卒二十歲,秦滅韓。良年少,未宦事韓。韓破,良家僮三百人,弟死不葬,悉以家

財求客刺秦王,為韓報仇,以大父﹑父五世相韓故。

중략...  良嘗學禮淮陽。東見倉海君。得力士,為鐵椎重百二十斤。秦皇帝東遊,良與客狙擊秦皇帝

博浪沙中,誤中副車。秦皇帝大怒,大索天下,求賊甚急,為張良故也。良乃更名姓,亡匿下邳。

注正義今陳(鎭)州也。***<통고通考>에 고려의 서경을 鎭州라고 부름.(필자 주)
注集解如淳曰:「秦郡縣無倉海。或曰東夷君長。」索隱姚察以武帝時東夷穢君降,為倉海郡,或因以名,

蓋得其近也。正義漢書武帝紀云「*[元朔]*元年,東夷穢君南閭等降,為倉海郡,今貊穢國」,得之。

太史公修史時已降為郡,自書之。


括地誌云:「穢貊在高麗南,新羅北,東至大海西(***이 대목은 장산군도의 동예. 필자 주)


*두번째 주에는 <진나라의 군현에는 창해군이 없으므로 혹 동이의 군장을 말하는것이 아닌가>라고 하였고,

색은에서 요찰이 말하기를 무제때 동이 예군이 투항하여 그곳에 창해군을 설치하였는데, 창해군은 혹 그곳

이거나 아니면 가까운곳일거라고 하였다.

그러나 <괄지지>가 말하는 예맥은 장산군도로 옮겨간 동예를 말한다.

본 예맥은 창해군으로 말하는 묘도열도의 타기도에 있었다.


* 다음은  조조가 발해만 연안의 난하 유역에 있는 갈석산에 올라 발해를 바라보며 지은 관 창해(觀滄海)

라는 시다. 이 시 가운데 그 첫 구절은 "동쪽으로 갈석에 올라 창해를 바라본다"로 시작된다. 

* <수서>권64 <來護兒傳>에는 고구려와의 전쟁에 대해서 언급한 대목이 있는데, 요동의 전쟁에 (來)護兒

는 루선을 인솔하고 창해로 나아가서 패수로부터 들어가 평양 60리에 이르러 고(구)려와 서로 부딪혔다.

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창해는 발해라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渤澥


卽渤海,《司馬相如賦》浮渤澥,《初學記》東海之別有渤澥,故東海共稱渤海,又曰滄海。

 

渤解란 즉 渤海며, <<사마상여부>>부발해에서, 그리고 <<초학기>>에 동해에 따로 발해가 있다. 

옛날에는 동해를 발해로 같이 불렀었다. 또한 창해(滄海)라고도 한다.


청색선으로 표시된 《박물지》의 내용은 창해지중에는 봉래.방장.영주.등 삼신산이 있다고 하는 기록이다.

삼신산에는 금.은으로 만든 궁궐이 있다는것과 그곳에는 선인들이 뫃여 산다는 기록이다.

뿐만 아니라 부상(扶桑)이니 오악(五嶽)이니 명해(溟海) 한해(澣海)니 하는 이름으로 불리는 내력을 기록

하고 있다.

이곳이 발해해협이고 사문도로 불리던 지금의 장도라는 사실은 틀림이 없다.

따라서 장도는 삼신산의 중심지이고 불사국이며 공자나 진시황.한무제등이 건너고 싶어하던 이상향이었다.

이곳이 선인왕검께서 주제하시던 고조선이고 고 평양성인 낙랑땅이었다.



*여순은 戰國時這裏屬燕國的“遼東郡". 따라서 연제지간(燕齊之間)은 발해해협


*창해군滄海郡* <한서 식화지 漢書 食貨志>彭吳 穿 濊貊朝鮮 置 滄海郡 則 燕齊之間 靡然發動   

팽오 천 예맥조선 치 창해군  칙 연제지간 미연발동


* 彭吳賈滅朝鮮 置滄海之郡 則燕.齊之間 靡然發動 - 사기 권30



춘추전국시대의 7웅도에는 연나라의 강역이 요동반도까지 진출해 있다.

당시 산동반도에는 제나라가 있었으니 발해해협에 있던 묘도군도는 연제지간(燕齊之間)이 된다.

남려예군이 다스리던 난민 예맥조선은 당시 발해협의 타기도에 있었다.

당시 압록강과 동가강은 연나라의 강역이 아니다.따라서 동가강의 창해군설은 왜곡된 기록이다.


* 彭吳賈滅朝鮮 置滄海之郡 則燕.齊之間 靡然發動 - 사기 권30 *


《사기》권 30에는 팽오가 조선을 매수하여 멸하고 그곳에 창해의 군을 설치하자 연.제지간이 바람에

풀이 눕드시 소란해졌다.[주1] 

연제지간이란 창해군의 위치를 설명한곳이고, 또 예맥이 있던 위치의 형태가 여러개의 섬들이 흩어져

있는곳이다.민심이 소란해진 이유는 아마도 과도한 세금때문이었을것이다.


[주 1] 이 조선이란 《한서》에서 예맥조선으로 나오는 조그만 섬이다. 대륙에서 진개에게 밀려 바다로

들어온 이 섬에 전쟁의 난민들이 28만여명이 있었다고 했다. 어떻게 하여 팽오에게 매수를 당했는지는

다음장에서 계속된다.


*요동반도 남단에 있는 여순의 장군산은 노철산의 일부인데 전국시에 연나라의 요동군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창해군은 연제지간에 설치되었다고 하는것은 이 장소가 발해해협이라는 근거가 정확한것이다.

조금더 상세한 설명은 별도로 보충하였다.

<戰國時這裏屬燕國的“遼東郡”.>漢朝時,在今天的鐵山街道於家村東邊的山坡上修建了“牧羊城”

又稱“木羊城”)



그런데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는 이 창해군이 뒤에 진번군이 되었다는 얘기다.

강단사학계에서는 진번군의 위치를 황해도로 비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전연히 맞지 않는 얘기다.

어떻게 진번군이 동가강(혼강)에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친절하게도 <지명대사전>은 조선에서 주장하던 창해군이 요령성의 압록.동가 양강과 흥경부근

이라는 설을 <지금은 그곳이라는 설도 있고> 혹은 조선남부에 있다는 설도 있다고 하였다.

중요한것은 뒤에 진번군이 되었다고 하는 대목이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滄海郡>


《漢書》彭吳穿穢貊、朝鮮置滄海郡,史記作蒼海郡,後爲眞番郡,今遼寧省鴨綠、佟佳兩江及興京附近之地,

或謂滄海郡當在今朝鮮南部


 

이병도박사의 주장은  <창해군(蒼海郡) : 한나라 무제(武帝) 때 지금의 통구 부근에 설치한 군현으로 원삭

(元朔) 원년에 설치되었다가 원삭 3년에 폐지되었다. 예ㆍ맥은 본디 지금의 통구 부근에 근거를 두고

있다가 세력이 약해지면서 후대에 지금의 함경도와 강원도 지방으로 옮겨 왔는데, 후대의 중국 사서(史書)

에서는 이 두 예ㆍ맥을 혼동하여 예ㆍ맥이 본디 강원도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잘못 동예전(東濊傳)

속에 포함시키기도 하였다.>


*창해군이 탄생하게된 연유 


험독의 왕험성에 국도를 정한 위만은 그동안 연나라와의 전쟁에서 탕진한 조선의 국력을 회복시키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오랜 기간 동안 쌓았던  예맥조선과  진번조선의 모든  영화들을 발해의 서북쪽에

묻어버린체 위만의 조선만이 마지막 남은 조선의 촛불 이었으니까.

우리나라의 어떤 학자들은 위만이 점한 조선은 전 조선국토의 1/75 밖에 안된다고 과소평가 하였지만

그것은 자기변명에  불과하였다.

조선 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던 땅은 위만이 물려받았던 낙랑조선 말고 또 무엇이 남았던 것인가?

위만에게 낙랑조선을  맡기고 떠나간 준왕과 그를 따라서 동쪽바다로 이동한 모든 난민 세력들은 조선이란

이름은 사실상 장도의 왕험성에 남겨놓고 떠난 것이다.

왕험성 에서 가장 가까운 묘도의 중심지였던 타기도에는 예맥조선의 난민지도부인 예읍이 있었고 이들의

지도자는 남려(南閭)라는 자가 군주였다. 그러나 이들은 위만조선의 우거와는 비교적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니까  난민세력들로 구성된 권력구조가 난맥상을 보였고 위만세력의 지도노선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자 위만의 손자 우거는 험독의 동쪽에 흩어져 있던 예읍(진번)을 위시한 진국과 삼한 등 의

한나라와의 교류나 조공무역 등의 통로를 차단 시켰다.

당시 해상세력들의 단일 통로였던 노철산 수도가 막히자 한나라는 위만조선의 우거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회유한 끝에 이들에게 한나라의 별도 외신이란 신분을 부여하고 동북변방의 이족들의 약탈행위를 막도록

한것이다.

그리고 변방 이족들의 교통을 막지 않는다는 조건을 부쳐 한나라의 신형 철제 무기를 공급하여 준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로 부터 막대한 무기공급을 받은 이들은 한나라의 천자를 배알한 일이 없었다.

그러자 당시 요동태수 공손홍은 점점  확장되는 위만조선의 세력을 달래기에 급급하였다.

우거는 힘을 길러 우선 조선내부의 비협조 세력을 타도하여 일사분란한 지도체제를 구축하고, 잃어버렸던

실지를 일부 회복하여 수천리에 달한다는 영지를 확보하였던것이다.


그러자 한나라는 더이상 위만조선의 확장을 좌시할수 없었다.

이렇게 위만조선의 세력이 커지는 동안에도 한은 수년동안에 걸쳐 졸본부여(동부여로기록됨) 를 침략하였

다가 격퇴당한 사실이 있다고 신채호 선생은 그의 조선상고사 上 권에서 말하고 있다.

이 졸본부여의 위치가 남옥저성이 있던 비류수의 건너편에 있었을것 이라고 필자는 가정해 본다.

이곳이 묘도열도의 북단에 있는 북황성도로 짐작한다는 얘기다,
한나라 그들은 수차례에 걸친 무력침공이 용이하지 않자 새로운 계략을 꾸민 것이다.

예읍의  매수작전이다. 이때, 위만조선의 우거와 바로 이웃인 예읍의 남려(南閭)가 사이가 좋지 않다는것을

잘알고 있던 한나라의 상인 팽오 라는 자가 등장한다. 기록을 보자.


<한서> <식화지(漢書 食貨志)>
팽오 천 예맥조선 치 창해군  칙 연제지간 미연발동
彭吳 穿 濊貊朝鮮 置 滄海郡 則 燕齊之間 靡然發動


해설:<팽오가 예맥조선을 뚫고 들어가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창해군을  설치하니 그곳 백성들의 인심이 

술렁거렸다.> 요동반도와 산동반도 사이를 연제지간으로 해석함.필자주

<한서> <무제기(漢書 武帝記)>


元朔元年(128 BC) 條 『東夷濊君南閭 等口 二十八萬降, 置 滄海郡』
원삭원연(128 BC) 조에 동이예군남여 등구 이십팔만인항, 치 창해군


해설: 기원전 128년조에는 동이 예군 남려등 28만명이 투항하여 그곳에 창해군을 설치하였다.


<후한서>동이전예조 에도 내용은 동일.

* 동이 예군 남려는 28만명을 대동하고 항복하였다, 그곳에는 창해군을 설치하였다.

두계학파의 주장대로 한나라와 조선의 국경인 패수가 청천강이나 대동강 이었다면 강 하나만 건너면 평양

을 칠수 있었을텐데 무엇때문에 압록강의 지류에 창해군을 설치해야 했을까.

창해군은 험독의 위만조선을 정벌하기위한  한나라 무제의 계략의 일환 이었다.

그러기에 험독과 창해군은 인근지역이 되어야 했던 것인데 억지주장을 적용하다보니 창해군의 위치가 

바다에서 내륙으로 바뀐것이다.

만약 지금의 평양 자리를 위만의 험독이었다고 가정하였다 하더라도 함경도와 강원도에 있다고 생각한

예읍이 평양 침략에는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뒤에 설정한 창해군이 함경도 동남쪽에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창해군을 설치하고  2년여를 있었다는 얘기는 무엇이며 길을 내는데 돈이 너무 많이들어 포기하고 창해군

을 폐지 하였다는 얘기는 무엇인가 평양으로 통하는 편리한 길을 두고 함경도 동해안이 뭐가 대단 하다고

태산준령을 넘고 대수를 건너 그 험한길을 개척해야 했겠는가.  

창해군은 연제지간(燕齊之間)에 있었다는 해석이 그렇게 어려웠던가, 그러나 그걸 알았다 하더라도 모른체

피해야 했을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위만조선의 평양설이 무너지니까. 지금 얘기하고 있는 지명들의 위치가

맞고 틀리는것은 앞으로 연속되는 사건들을 대입해 보면 자연히 판단할수 있다,


이렇게 중요한 창해군사건을 서울대학교에서 발행한 《한국사 특강》 이라는 책에서는 다루지 않고 있다,


창해군을 창설하는 공작의 매개자로 등장한 자는 팽오(彭吳)란 명색이 문피를 수입하던 무역상 이었다,

이 자는 타기도에서 생산되는 상어가죽과 물범가죽등을 수입하여 한나라에 공급하던 자였다,

그는 예군 남려와도 잘 알고 지내던 사이었는데 예군이 우거와 사이가 나쁜걸 알고 전 주민의 이주를 제의

한 것이다 이주비를 지급하고 이주에 필요한 제반 사항을 책임지기로 약속을 한것이다,

그런데 당시 한나라 조정에서는 남서부의 소통을 위하여 재정을 많이 소모하였으므로 예산이 동이 난

상태라 이주비의 거출을 제나라와 연나라에 맡겼던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전쟁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인데 심한 부담금을 요구하니 민심이 흉흉하여 변란직전이었고

수납을 거부 하였다는 미연발동에 대한 추론이다.

 

조정에서는 같은 조건으로 남만을 매수하고 또 서역을 개척하느라 금고는 바닥이 난 상태에 있었기에

약속을 이행할수가 없었다고 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팽오는 우선 착수금 얼마로 28만의 주민을 대리고

요동내륙으로 나오도록 이동을 진행시킨것이다. 

그러나 예군 남려는 상륙하여 이주자금 확보가 수포로 돌아가자 결국 자결을 택했고 이에 화가 난 태자

울상시는 군사를 동원하여 요동태수로 부임한 팽오를 살해한 것이다,

그후 주민 일부는 본 고장으로 귀향하고 일부는 태자와 함께 부여로 망명하여 합세 하였다고 한다,


예맥조선은 상무정신이 강하여 삼조선중에 최전방에 위치하여 영토를 확장하던 전위부대였다.그들의

일부는 선비족으로 또는 부여로 합류하고 (國有故城名濊城,蓋本濊貊之地,而夫餘王其中)

《삼국지 부여전》 다시 고구려족이 되어 강력한 고구려를 건설한것이다.

뿐만 아니라 부여의 패망으로 인한 유민과 고구려의 패망으로 인한 일부 유민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백제.

신라.가야의 유민들과 합류하여 일본을 건국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본거지는 본래 고죽국(요서)이었다고 당나라때 배구전은 전하고 있다.



《삼국유사》   (원본 1)

《삼국유사》<단군조선조>배구전에 이르기를 고려(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이다.

지금은 바다가 되었다.(요동만의 윤몰을 말함. 필자 주)


이사료는 발해국 사료에서 살아 남았던《창해군 별설의 진상별고》라는 기록인데,

최동박사의 《조선상고민족사》 376쪽에서 옮겨 적었다.

 


장산열도에 있었던 고대국가들


진번조선이 연나라에게 쫓겨난 후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하하게된다.

그 후  진시황의 명에 따라 제(齊나)나라 병사들이 산동반도에 살던 무 라인들을 내륙지방으로 분산, 강제

이주 시키자,  물을 떠나 살 수 없던 그 들은 급히 배를 타고 황해를 도해(渡海)하여 지금의 대동강 하류,

즉 용강군 지역에 자리 잡고, 용 성국을(龍城國) 세웠다고 하였다. 중략...


묘도의 천후궁


용성국(龍城國)과 다파라국(多婆羅國)의 이설


석탈해의 선 주지를 놓고 격론을 벌리고 있는 현장을 보다가 틀 속에 묶여있는 사고의 전환을 위해서 몇

적어 본다.

용성국의 석탈해 칸 에 대한  또 하나의 주장을 김 산호님의 <<대쥬신제국사>>1권에서 인용한다.

비록 이해하기가 쉽도록 극화하여 저술한 관계로 좀 가벼워 보이지만 참고할 사항들이 많다. 227~229쪽

성국과 석 탈 해 칸에서 참고하였음.

[전국 시대 때(서기전 211~210) 산동 반도의 등주인근에 있던 내국(箂國)은 관중의 책략에 빠져 망하면서

조상대대로 살아오던 땅을 중 화족 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 후 중원의 패자 진시황이 한족(漢族)에

대한 동이족의 지배권을 영원히 저지할 목적으로 한족과 동이족의 영토를 구분 짓는 만리장성을 쌓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서도  불안하여 장성 안에 남아 있던 동이세력들을 철저히 사방으로 분산시켰으니 특히 산동 반도에

남아있던 래국(萊國)은 피해가 막심하였습니다. 당시 내국의 옛 땅은 제나라가 점령하고 있었지만, 산동

반도의 동북부에는 전통적으로 황해의 제해권을 독점하고 해상 무역을 장악한 동이족 상인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서 무라(마을)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들 무 라의 상인들은 일찍부터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서, 항해술, 조선술이 발달하였고, 각지로부터

배워 익힌 공 업 술, 특히 야 철술이 높은 수준으로 발달하여 각종 선진무기들과 철기 생활용품을 제조 수

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보아 경제적으로 아주 부유한 상인집단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중국에 빼앗기고, 또 진시황의 명에 따라 제(齊나)나라 병사들이 무 라인들을 내륙지방으로

분산, 강제 이주 시키자,  물을 떠나 살 수 없던 그 들은 급히 배를 타고 황해를 도해(渡海)하여 지금의

대동강하류, 즉 용강군 지역에 자리 잡고, 용 성국을 세웠다고 하였습니다. 중략...

그들에게는 두 가지의 중요한 관직이 있었으니, 그 하나는 외지인들이 좋아하는 철기제품을 제조하는

철술의 명인이고, 또 하나는 해상무역을 위하여 먼 뱃길을 떠 날 때 풍랑으로부터 생명의 안전을 빌어

주는 용왕이라 불리던 무당이 그것이었습니다. 중략.....


서기 24년 용 성국의 마지막 칸, 함 달 파 칸 (含達婆칸)이 죽자 8품 성골의 회의는 왕의 아들인 약관 17

세의 젊은 청년을 용 성국 큰 무 라의 주인으로 뽑으니, 그 가 바로 석 탈 해 칸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석 탈 해 칸이 왕위에 오른 지 채 한 달도 되기 전에 전란에 휘말리게 되었으니,

그것은 서쪽의 새 강국, 외 백제의 출현으로 불안 을 느낀 낙랑이 남 펴 라를 공격하여 허약하게 명맥을

유지하던 말 쥬 신(낙랑조선)의 숨통을 끊어버린 후 용 성 국 마 져 정복하기 위하여 쳐들어 왔던 것입니다.

이때 상인집단인 용성국은 소수의 병력만 보유 하였으므로, 고도의 무장을 갗 추고 침입해 오는 낙랑군을

당해낼 수 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석 탈 해칸 은 출항 대기 중이던 20여척의 선박에 백성을 싣고 용 성국을 탈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황해를 남하하여 남해안을 돌아 새로이 정착할 땅을 찾아 구야지역까지 오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종합적인 의견:  


이들의 선대(先代)들은 산 동 반도의 등주주변에 있던 내주에 뿌리를 두고 살았던 사람들로보입니다.

<양직공도>에 보면 래이(萊 夷 )는 원래 마한의 뿌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마한이 원래 천진남쪽 황하의 입해구인 바다에 있다가 발해로 윤몰된 내산을 근거로 하여 활동 하였는데

지대가 바다로 가라앉자 등주 근역으로 옮긴 것으로 지도에서 확인이 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묘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무역 집단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다를 이용하여 무역을 주업으로 하고 주로 철기를 다루던 당시로는 상위계급에 있던 집단

이었습니다.  

석탈해의 아버지가 함 달 파 왕 이었다고 하였습니다. 묘도의 파사부와 강력한 유대를 가졌던 사람들로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묘도를 떠나 반도의 대동강입구에 용 성국을 세웠다가 다시 쫓겨나 장산군도의 삼 한 땅이 있던

진한으로 들어 온 것입니다.


다 파 라국(多婆羅國)을 뜻글로 풀면 제사장이 많은 나라로 볼 수 있습니다.

다파라국에 대해서는 별도로 설명이 있겠습니다.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부여왕실의 왕녀였던 사소(娑 蘇)가 있던 묘도의 천 후궁, 이곳을 떠나, 다 파 나국을

웠던 함 달 파 왕, 이곳에서 파사석탑을 싣고 떠나온 허 황후, 석탈해의  뒤를 이은 파사왕과 허 씨 가문

의 왕후들, 모두가 연대도 비슷하고 파사(婆娑)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용성국의  위치가 동북쪽이라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기록입니다.

결국 왜의 위치도 삼한의 위치도 장산군도의 내역에 있었다는 주장입니다.

진한으로 왕래하던 많은 기록들이 주로 배를 타고 갔다고 하였습니다. 경주는 항구도 아닙니다.

왜가 침범할 때마다 거의 심장부까지 침입 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토함산 넘어 대 종천을 따라 대왕암까지

의 거리와 지리의 험함은 침입에 용이한 곳이 아닙니다.  

신라는 왜의 침입시마다 기습을 당했던 것으로 볼 때 왜적들이 동해안에 배를 메어두고 경주까지 쳐들어

오도록 방관만 하고 있었겠습니까. 사서의 기록들만 검토 하다보면 실행의 가능성 여부를 놓치기가 쉽습

니다.

고려도경 (권 39 해도 6) 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를 떠나서 명주(明 州)경계까지 오는 데 무릇

바닷길로 42일이 걸렸다”. 송나라는 문물이 발달하였던  나라였고, 석 탈해 시대보다 천년이나 지난 뒤의

기록이었습니다.

알을 넣어서 물에 띠웠던 괘 짝이 붉은 괘이던 아니던 먼저 도착한 것이 금관국인데  해류의 흐름으로 봐서

동쪽에서 흘러와 금관국에 도착하기는 불가능하고, 서쪽에서 와야 하는데 바다에 떠서 몇 달이나 걸렸을

까요? 모두가 실현이 불가능한 대목을 가지고 왈 가 왈 부 하는 것은 시간낭비일 뿐입니다.


다 파 라 국(多 婆 羅 國)에 대하여


아시아동부여지도  1875년판 일본국제작 일본육군참모국


일본은 이 지도를 제작할 당시 고려가 요동반도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더구나 동고려(東高麗)와 서고려(西高麗)가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은 청국에서 만들었던<청나라 해안지도>

에서도 밝혀졌습니다.

대고산(大孤山) 즉 남옥저를 왜 북부마한(北部馬韓)이라고 하였는지는 남쪽으로 마한도(馬韓島)가 있었고,

또 장자도(獐子島)가 있었기 때문입니다.[지도자료 제공:향고도]




<삼국유사><기이> 1 제4대 탈해왕 편에는 석탈해의 선 주지를 용 성국이라고 하고,

<삼국사기><신라본기>

 탈 해 이사금 조에는 ‘다 파 나국’이라고 하였다. 그 위치를「(다 파 나국은) 왜국 동북 1천 리에 있다」

고 하였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이 말하는 위치는 같은데 이름만 서로 틀리는 것이다.

이 문제의 해결을 놓고 설왕설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록을 왜 그렇게 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만 탈해의 어머니가 되는 함 달 파 왕의 비가 적녀국출신이라는 사실과 그 적녀국의 위치를 구주로 가정

했을 때 적 녀 국, 구주, 왜는 용 성국 또는 다 파 나국에서 서남쪽에 위치한다는 해석이다.

따라서「왜국 동북 1천 리」라고 한 기록 안에 있는 적 녀 국을 왜국과 동일시 한다는 얘기가 되겠다.

이 문제로만 봐서는 나라이름이 다른 이유를 해결할 방법은 없고, 서로 왕래할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는

것과 또한 교류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밖에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다 파 나국에 대한 또 다른 주장이 있어 타당성 여부를 검토하고자 한다.  

협보(陜父) 삼도(三島)에 다 파 라 국 (多婆羅國)입국

전략...고구려의 입국과정에서 주몽의 4명의 보필자중의 한사람이었던 협보는 자기에게 주어진 공로에

불만을 품고 자기를 따르는 종자들과 함께 망명길에 나서게 된다.

작은 배로서 연안만을 따라 움직이다가 조금 넓은 바다로 나가게 되었고, 큰 바다에서 익사직전에 탈해의

용 성국 대형선박에 구출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 들은 무역선이었던 이들의 안내로 동쪽바다에 있던 신천지를 만나게 되는데 그곳이 삼도(왜)로 알려진

구주였다고 하고 있다.

협보가 이곳에 도착 하였을 때는 이미 변, 진한에서 건너와 살고 있던 이주민들이 많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곳의 구주를 현해탄건너 북 구주로 인식하게 되면 문제를 풀 수 없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이곳에서 용 성국이 있던 한반도의 대동강 입 강구 주변까지의 거리가 천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다시

메이게된다.

이곳을 <삼국지>지 왜전은 “왜인 재 대방동남 대 해중, 의산도, 위 국 읍 구 백 여국 ”이라고 하였다.  

또 <,한서>><지리지>는 “낙랑해중 유 왜인 분 위 백 여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왜의 위치를 기록하는데 왜 대방을 기점으로 하였는지를 알아야 한다. 만약 왜가 이와 같이 근접한 거리에

섞여있지 않았다면 사서마다 따라 나오는 “남쪽으로 왜와 접한다는 기록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왜는 대장산군도의 제일 동남쪽에 위치한 해양도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5세기 이전의 실재상황을 기록한 사서들에 근거한 것이다.

황 당 무개 하다거나 착각, 망 상등에 의해 제멋대로 씨 나 리오를 쓰 는 게 아니다.  

서기전 19년 협보는 동이족이었던 하이도인(蝦 夷 島人) 그리고 변, 진(弁, 辰), 구야국 사람들을 흡수하여

다 파 라 국을 세우고, 스스로 그 시조가 되었다고 하였다.


모두 10개국으로 편성되었는데, 그중 3개국은 본토에서 떨어져있는 섬나라들이고, 나머지 7개국은 본토에

있는 조 선계 나라들이라고 하였다.

다 파 라 국(多婆羅國)이라는 국명을 선택 하게 된 동기는 협보의 생명을 구출해준 용 성국이 신통력을

행사하는 나라라는 믿음 이었고, 또 그쪽사람들의 일부가 건국에 참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순전히 필자 개인적인 추정이다.

이와같은 추정을 하게된 사서의 근거를 알고 싶었지만 인용한 《대주신제국사》권에는 일반인들과 주로

어린 학생층을 상대로한 저서였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 이외에는 인용문이 없었다.


그러나 필자는 그러한 인용문이 필요없이 이곳을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해할 수 가 있었다.
여기까지는 대마도에 대한 얘기는 없었다. 


다음은 양직공도를 통해서 밝혀진 신라가 한때 왜국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내용이다.

위에서 인용한 용성국을 다음글에 연결시킨다면 어떠한 결과가 나타날까.

 

'양직공도'서 신라ㆍ고구려 제기 발견돼


새로 드러난 양직공도 신라 제기

청대 문집서 찾아내..윤용구 박사 공개

"신라는 倭의 속국" 논란 예고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한국 고대사 연구의 제1급 사료 중 하나로 간주되는 양직공도(梁職貢圖)

에서 영영 사라졌다고 간주된 신라와 고구려에 대한 간략한 설명인 제기(題記)가 최근 발견됐다.

특히 이번에 발견된 신라에 대한 제기에는 신라가 왜(倭)의 속국이라는 구절이 있어 이른바 임나일본부

설과 맞물려 논란이 일 전망이다.

한국고대사 전공인 인천도시개발공사 윤용구 박사는 지난 20일 서강대 다산관에서 열린 신라사학회(회창

김창겸) 제107회 학술발표회를 통해 중국에서 최근 발견 보고된 양직공도 제기를 분석, 소개했다.

윤 박사에 따르면 중국학자 조찬붕(趙燦鵬)이 발굴해 올초에 소개한 양직공도 신자료는 청나라 중기 때

인물로, 그림에 조예가 깊은 장경(張庚. 1685~1760)이라는 사람이 모사(베낀)한 제번공직도(諸番貢職圖)다.


양직공도 신라.고구려.백제사신도(왼쪽부터)


하지만 아쉽게도 장경이 베낀 제번공직도(양직공도)에서 각국 사신도는 없어지고, 각국별 제기만 청말

사람인 갈사동(1867~1935)이 편집한 '애일음노서화소록'(愛日吟廬書畵續錄. 1914)이라는 문집(권5)에

'청 장경 제번직공도권'(淸張庚諸番職貢圖卷)이라는 이름으로 재수록됐다고 윤 박사는 설명했다.

이 문집에 같이 수록된 장경 자신의 발문(跋文)에 따르면 애초에 장경은 산서성 노성현지현(潞城縣知縣)

으로 근무하던 1739년, 이탁이라는 사람에게서 양직공도를 빌려와 5일만에 18명의 백묘(白描. 흑백)

사신도와 함께 해당 국가별 제기를 모두 베꼈다.

윤 박사는 이번에 공개된 양직공도 제기를 난징박물관 구장본(舊藏本)인 양직공도 판본과 비교한 결과,

 "신라와 고구려를 포함한 7개 국가의 제기는 완전히 새롭게 출현한 자료이며, 아울러 백제와 왜국을

비롯해 기존에 알려진 9개 국가의 제기도 내용에서 차이가 작지 않다"고 말했다.

특히 장경이 베낀 양직공도를 통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신라의 제기를 보면 신라의 국호는 사라국

(斯羅國)으로 표기되며 더구나 신라가 "한(韓)에 속하기도 하고 더러 왜에 속하기도 했다.

그 나라 국왕은 스스로 사신을 보내 조빙할 수는 없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총 91글자로 된 이 제기는 "양 무제 보통(普通) 2년(521)에 신라왕 모태(募泰)가 처음으로 백제 사신

편에 붙어 사신을 보내 표(表)를 올리고 방물(方物. 특산품)을 받쳤다.

그 나라에서는 성(城)을 건년(健年)이라 부르며 그 습속은 고려(高麗. 고구려)와 비슷하다.

문자가 없어 나무를 새겨 표시로 삼는다. 말은 백제를 거쳐야만 통할 수 있다"고 했다.

이 기록 중 모태(募泰)는 모진(募秦)을 잘못 적은 것으로 법흥왕을 지칭하며,

성을 지칭하는 신라어 건년(健年) 또한 여타 기록을 참조할 때 건모라(健牟羅)의 오류로 보인다.

윤 박사는 이 내용 중에서도 신라가 왜국에 속하기도 했다는 언급이 새롭게 드러난 대목이며,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따라 역사학계에서 논란이 벌어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직공도 백제사신도와 그 제기


토론자인 국립중앙박물관 이용현 박사는 "신라 제기의 발견은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만하다"면서 "신라가

왜에 속하기도 했다는 언급도 이 시대 동아시아 사정을 고려할 때 언젠가는 나올 수 있는 기록이 나왔을

뿐이며, 그렇다고 해서 신라가 왜의 속국이 되는 것도 아니다"고 말했다.

신라와 마찬가지로 이번에 새롭게 드러난 고구려 제기(총 133자)에는 후한 광무제 초기에 고구려가 사신

을 파견해 조공하면서 처음으로 왕을 칭하기 시작했다는 등의 내용이 보이지만 기존에 알려진 고구려

관련 기록을 크게 보충하는 대목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반면 이번에 드러난 백제 제기에는 기존 난징박물관 구장본 양직공도에서 보이는 백제의 요서경략설,

이른바 백제가 요서 지역을 침략해 영유했다는 기술이 없는 점이 특징으로 꼽힌다.

신라사학회 김창겸 회장은 "이번에 새롭게 드러난 신라와 고구려, 백제 제기를 기존에 알려진 관련 기록

들과 자세히 비교 검토하면 새로운 사실을 많이 밝힐 수 있을 것으로 본다"면서 "특히 신라 관련 기록은

쟁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대목이 있어 주목을 요한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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