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신(肅愼)은 주나라 이전 조선의 별칭이었다.
어떤 학자는 숙신은 지금의 산동반도(山東半島)에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김육불(金毓黻)의 《동북통사(東北通史)》 권 2에서 언급하기를, "《좌전(左傳)·소공구년전
(昭公九年傳)》을 상고해 보면 숙신(肅愼)·연(燕)·박(亳)은 우리의 북토이다(肅愼、燕、亳、吾北土也。)"
라는 말이 있는데 만약 고대의 숙신족(肅愼族)이 지금의 영고탑(寧古塔) 일대에 있었다고 한다면, 연(燕)·
박(亳)의 지역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거늘, 어떻게 이들과 싸잡아서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가장 오래된 숙신족(肅愼族)이기 때문에, 산동반도(山東半島)에서 일어났다고 생각되고,
다시 등주(登州)의 해척(海脊: 해저산맥)을 거쳐서 동북으로 이동해 간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산동반도에 잔류해 있는 자들은 바로 숙신(肅愼)을 씨(氏)로 하면서, 또 별도로 "숙사(夙沙)"로 썼다.
동북지역으로 이동해 간 시기에 관해서는 아마도 유사이전(有史以前)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부사년(傅斯年)의 《동북사강(東北史綱)》 권 1에서 언급하기를, "주나라 초기에, 숙신의 서계(西界)는
틀림없이 요하(遼河)와 산해관(山海關) 사이에 달했을 것이요, 어쩌면 그 보다 관내(關內) 쪽으로 미쳤
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해류방(奚柳芳)은 《숙신동천고(肅愼東遷考)》에서 인정하기를, "성·강(成康: 주나라 성왕과 강왕) 이전의
숙신은 마땅히 지금의 요녕성 서부 및 그곳에서 멀지 않는 지방에 있을 것이며,
대체적으로 지금의 연산(燕山) 이동, 의무려산(醫巫閭山) 이서에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들의 공동점은 모두 숙신는 최초에는 중원(中原)과 멀지 않는 지역에서 살다가, 그 뒤에 비로소 동쪽
으로 옮겨 가서 동북지구(東北地區)에 도달하였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러한 결론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춘추좌전(春秋左傳)》의 "숙신(肅愼)·연(燕)·박(亳)은
우리의 북토이다(肅愼、燕、亳、吾北土也。)"라는 단편적인 기록을 강조하면서, 숙신과 관련이 있는 그밖
의 기록을 소홀히 하였다.
고숙신(古肅愼)과 연관이 있는 각종 기록을 종합해 보면, 숙신은 해외(海外)에 있고, 대황(大荒) 가운데에
있으며, 중원과 거리가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간파할 수 있거니와,
따라서 숙신재산동설(肅愼在山東說)·하북설(河北說)·요서설(遼西說)은 모두 이러한 조건에 부합되지
않는다.
하물며, "숙신(肅愼)·연(燕)·박(亳)은 우리의 북토이다(肅愼、燕、亳、吾北土也。)"라는 이러한 기록은
상당히 모호해서, 결코 숙신(肅愼)과 연(燕)·박(亳) 및 주(朱)나라와의 거리를 기록한 것이라고 할 수 없
으며, 이른 바 북쪽이라는 것은 고대에는 왕왕 서북(西北)·동북(東北)을 포함한 것이다.
따라서 만약 숙신이 주(周)나라의 동북쪽으로 수천 리 떨어져 있다고 인정되는데, 이러한 기록도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이러한 기록을 근거로 할 수 없는데도 바로 숙신은 분명히 주나라의 정북쪽에 있으며,
아주 가까운 곳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이상의 제설을 취하는 자들은, 모두 중원에 가까운 숙신만이 사서에 자주 나올 수 있으며, 사서에서 비교
적 먼 곳에 있는 숙신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비교적 가까운 여러 종족은 도리어 역사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여러 사서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연(燕)의 북쪽에는 산융(山戎)·동이(東夷)·북발(北發)·예(穢)
등이 여전히 존재하며, 모두 사서에서 자주 보이지만, 결코 가까운 각 종족 모두가 사서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여러 사서에서 숙신을 중시하는 이유는 그것이 주(周)나라에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나라
가 "그 나라가 왔는데, 멀리서 왔다. ……선왕께서 그 아름 다운 은덕이 먼 곳까지 미치게 된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바로 사적에 기록하고 기물에 새기어 금독(金牘)에 이를 비장하고, 제후들에게 하사한 것이다.
〈동이(東夷)와그 역사적 지위〉
먼저 당가홍은 동이의 토착적 거주지를 산동과 소북(蘇北), 회북(淮北)지구로 파악하고 주로 《상서
(尙書)》에 기재된 조이(鳥夷), 우이(?夷), 내이(萊夷), 회이(淮夷), 서이(徐夷) 등의 이인(夷人)을 중심
으로 동이의 개념 형성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 결과 동이라는 단어는 일반명사 혹은 집합명사로서 사용되었으며 단일한 민족에 대한 고유명사가
아닌 것으로 간주한다.
다음으로 동이의 범주에 대해서는 태호, 소호, 후직(后稷), 신농(神農), 축융(祝融) 등을 동이의 주요
종족으로 보고 이들 중 새를 숭배하는 소호 종족과 관련된 국가로 은(殷), 서국(徐國), 회이, 부여,
고구려, 숙신[여진(女眞), 만족(滿族)] 등을 꼽는다.
다시 동이의 변천에 대해서는 산동 등 대륙 내지에 있던 동이의 일부는 후일 북방으로 옮겨가는데
은의 기자가 망명하여 고조선을 세우고 주공(周公)의 정벌을 받은 포고(蒲姑)가 쫓겨 간 후 부여가
되어 고구려, 백제 등으로 변천하고 실위(室韋) 역시 이주하여 예(濊), 옥저(沃沮), 말갈 등을 파생
시켰다고 논술한다.
마지막으로 당가홍은 발해-황해-동해-남해 주위로 이어지는 충적평원지구(沖積平原地區)의 이인과
황토고원지구(黃土高原地區)의 하인(夏人)이 2,000년간 대립하다가 춘추, 전국 시대에 동이문화는
결국 화하문화(華夏文化)에 통합되었으나 북쪽으로는 북미에, 남쪽으로는 남미와남양(南洋) 제도
(諸島)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논평
부사년의 〈이하동서설〉은 중국의 고대 문명을 남북 간의 이항구조로 파악하던 전통적인 관념을
뒤집고 동서 간의 대립으로 인식을 전환시켰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으며, 이(夷) 곧 동이의 실체를
드러내고 정치적, 문화적 지위를 부각시켰다는 점에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부사년이 중국의 하-주 중심의 정통 역사관을 비판하고 종래 주변 세력으로 간주되던 이(夷)의
존재와 역할을 새롭게 제기한 것은 최근 황하문명 중심론이 폐기되고 다원주의적 중국문명론이 정립
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선구적 의미를 지닌다 할 것이다.
다만 부사년은 은(殷)과 이(夷)의 관계에 대해서는 하(夏), 주(周)와 대립된 동방의 국가라는 차원에서
친연성을 인정하면서도 종족적, 지역적, 기원적으로 구별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뚜렷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 않아 애매한 느낌을 준다.
은(殷)을 고조선과 같은 계통으로 보는 반면 이(夷)의 활동 범주를 대륙 내지인 산동(山東) 등에 국한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고대 한국은 동이계로 간주하지 않는 셈인데 다소 의외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부사년의 〈이하동서설〉은 주변문화의 정체성에 대해 재고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부여하였고
특히 고대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규명하는 데에 상당한 지식과 유용한 관점을 제공하였다.
부사년은 은(殷)의 기원을 고찰함에 있어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기록한 다량의 문헌들을 근거 자료로
인용함으로써 은(殷)과 고대 한국과의 공통요소를 강조하였는데 발해만 일대를 은(殷)의 본향으로
파악하여 은(殷)이 망한 후 기자(箕子)가 고조선으로 향한 것을 “선왕이 살던 곳을 좇은 것 從先王居”
이라고 판단한 것은 기자가 고조선으로 망명하여 임금이 되고 개화시켰다는 중국사학계의 정설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견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부사년은 또한 동북의 박(?)이 은(殷)의 최초 도읍지였고 후일 남하 혹은 서진함에 따라 박(?)은 물론
박(薄), 박(博), 포고(蒲姑), 박고(薄姑) 등의 지명이 생겼는데, 이것들은 모두 박(?)의 음변(音變)일 뿐
동일한 지명이라고 논증한다.
이러한 견해는 부사년보다 7년 먼저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1927년)
에서 주장한 내용과 일치한다.
육당은 동이 종족의 태양 숭배를 표현한 ‘밝’이라는 발음과 관련된 지명이 그들의 활동 무대의 변천에
따라 중국에서 상술한 지명으로 표기되었다고 논증한 바 있었다.
아울러 부사년은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허부(子虛賦)》의 “[제(齊) 나라는]비스듬히 숙신(肅愼)과
이웃을 이루고 있다 斜與肅愼爲隣”라는 구절에 대해 숙신을 후대의 읍루(?婁), 말갈(靺鞨) 등과는 무관
한 고조선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이러한 관점은 숙신을 주신(珠申), 조선(朝鮮) 등과 동일한 발음으로
간주하여 고조선을 지칭하는 것으로 주장한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의 견해와 일치한다.
부사년의 〈이하동서설〉은 종래 우리 학계에서 실증성이 결여된 것으로 거리를 두어 온 선학들의
견해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는 좌증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 학계에서의 선학들의 고대사 관련 노작들에 대한 보다 전향적이고도 정밀한 검토 자세가 요청
된다.
당가홍의 〈동이와 그 역사적 지위〉는 기본적으로 부사년의 〈이하동서설〉에서 표명된 동이관을
계승하였다.
이를테면 충적평원지구의 이인과 황토고원지구의 하인이라는 대립적 개념은 부사년의 동평원구의
이인과 서고지계의 하인이라는 개념을 표현만 바꾼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은(殷)과 동이를 동일시하는 점에서 부사년과 차이가 있으며 은 및 동이의 변천을 고대 한국의
성립과 연계시키고 특히 부여를 중심으로 논술하고 있는 점은 큰 변모이다.
아울러 은의 기원을 동북에 두지 않는 점도 부사년과는 구별된다.
고힐강 선생의 기자봉국(箕子封國)
《낭구촌수필(浪口村隨筆)》
중국의 석학 고힐강(顧頡剛) 선생의 《낭구촌수필(浪口村隨筆)》에 의하면 《기자봉국(箕子封國)》
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기(史記)·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 이르기를, "주무왕(周武王)이 이윽고 기자(箕子)를 조선
(朝鮮)에 봉하였으나 신하로 취급하지는 않았다"라고 하였는데 태사공(太史公)의 이 말은 대개 복생
(伏生)의 《상서대전(尙書大傳)》에 근거한 것이었다.
《상서대전(尙書大傳)》에 이르기를, "주무왕(周武王)이 은상(殷商)과 싸워 승리하자 갇혀 있는 기자
(箕子)를 풀어 주었다.
기자(箕子)는 주(周) 당국에 의해 자신이 풀려 난 것을 참을 수 없어, 달아나서 조선(朝鮮)으로 가버렸다.
주무왕은 이런 소식을 전해 듣고 조선(朝鮮)으로써 기자(箕子)를 봉했던 것이다.
(《史記·宋世家》云: "武王內封箕子于朝鮮而不臣也。" 史公此語, 蓋本之《尙書大傳》。
《大傳》云: "武王勝殷, 釋箕子之囚。箕子不忍爲周之釋, 走之朝鮮。武王聞之, 因以朝鮮封之。")
《상서대전(尙書大傳)》은 다시 어느 책에 근거한 것인가 관해서는 혹은 한초(漢初)의 전설(傳說)에서
나온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은 옛날 전적(典籍)을 통해 증명할 수도 없거니와, 그 이유는 조선(朝鮮)은 당시의
중국 땅(中土)으로부터 지리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주무왕(周武王)에 의해 분봉될 수 없었다는
것으로도 단언할 수 있다.
추측건대, 이러한 전설이 생기게 된 소이는, 진·한(秦漢) 사이에 조선(朝鮮)의 왕이 기씨(箕氏)였다는
데서(《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동이예한전(東夷濊韓傳)》을 보라), 기인하여 이러한 억측(臆測)이
생겼을 뿐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기준(箕準)이 조선에서 왕노릇을 했다는 것과 주무왕이 기자를 봉했다는 것은 전혀 별개이다.
성씨가 우연히 같다고 해서, 결국 이전의 어떤 사건을 근거로 해서 나중의 다른 한 사건도 처음부터
틀림이 없는 것이라 단정해 버리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至《大傳》, 更本之何書, 抑或出於漢初傳說, 今不可知。然其事於故籍無徵: 且朝鮮離當時中土絶遠,
非周武之所得而封, 則可斷也。推想所以有此傳說之故, 當由秦、漢間之朝鮮王爲箕子(見《三國·魏志·
東夷濊韓傳》), 因作此臆測耳。然箕準王朝鮮爲一事, 武王封箕子又爲一事, 不當以姓氏之偶合, 而遂
憑前一事, 以斷說後一事固無疑。)"라고 하였다.
삼가 말씀드리자면, 기자의 봉지에 관하여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나오는 글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희공 15년전(僖公十五年傳)》에 진목공(秦穆公)의 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듣기로는 진국(晉國)은 당숙(唐叔)의 봉지라 하고, 기자(箕子)도 '당숙(唐宿)의 후대가 틀림없이
강성해 질 것이다'라고 하였거늘 어찌 진국(晉國)을 도와 주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위대한 기자가 참으로 조선에 봉해졌다는 것은 당숙(唐叔)이 당(唐)에 봉해졌다는 것과는 아무
런 연관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들 나라는 너무 멀리 떨어져서 서로 보고 들은 것이 없거늘 어떻게
이러한 예측의 말을 했다는 말인가.
즉 이러한 예측의 말이 또한 어떻게 멀리 진(晉)나라와 진(秦)나라에 전파되어 익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수 있단 말인가.
이는 기(箕)와 당(唐)이 대부분 경계가 연하여 있고, 땅이 접해 있었을 가능성을 말해 주고 있다 할
것이다.
(竊謂箕子封地, 可藉《左傳》之文而知之。僖十五年記秦穆公之言曰: "吾聞唐叔之封也, 箕子曰: '其人
必大!' 晉其庸可冀乎?" 大箕子誠封于朝鮮, 則與唐叔封唐了無關涉, 旣遼遠不相聞問, 如何作此豫測之言?
卽有此豫測之言, 亦何緣遠播晉秦, 習于人口? 是則箕之與唐, 固大有連境, 接壤之可能。 )
여사면(呂思勉)의 《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와 숙신(肅愼)
전술한 바와 같이 선진(先秦)의 사적에서 조선에 관한 기록을 찾지 못하자 중국의 이른 시기의 고적에
일찍부터 등장하는 숙신(肅愼)이 혹시 조선(朝鮮)일 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한 학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필자는 여사면의 《중국민족사》를 읽던 중, 여사면 선생은 "고대의 숙신(肅愼)은 틀림없이 후대의
읍루(揖婁)·말갈(靺鞨) 그 사람인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고 자문하고 그 증거로 두 가지를
제시하여 설명하는 것을 보고 매우 흥미롭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고대의 숙신(肅愼)은 틀림없이 후대의 읍루(揖婁)·말갈(靺鞨) 그 사람인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여기에 그 증거로 둘이 있다.
읍루(揖婁)·말갈(靺碣) 이외에 후대에 호시석노(楛矢石砮)를 사용한 민족은 더 이상 없었다는 것이 그
첫번째 증거이다.
한나라 때에는 오직 읍루(揖婁)만 있었으나 《진서(晉書)》에 이르기를, "숙신(肅愼)은 다른 이름으로
읍루(揖婁)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진(晉)나라 때 읍루인들은 여전히 숙신(肅愼)이란 이름으로 달리
통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서(晉書)》에서 당연히 "읍루(揖婁)는 고숙신국(古肅愼國)이다"라고 해야 하고,
<《위서(魏書)·물길전(勿吉傳)》에서는 "구숙신국(舊肅愼國)이다"라고 하였는데 '舊'자는 대개 진(晉)
나라 때를 가리켜서 말하는 것이요, 만약 삼대(三代: 하상주) 이전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항상 '古'자를
사용하였다> 4) "숙신(肅愼)은 다른 이름으로 읍루(揖婁)이다"라고 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는 것이 그
두번째 증거이다.
(여사면, 《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 동방출판사, 171쪽 참조)
4) < > 안의 내용은 저자의 자주(自注)로 원래는 작은 글씨로 협주한 것이다.
"舊"자와 "古"자의 차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전자는 과거·낡은·이전 등(現과 상대적인 뜻)의 뜻이
있으며, 그 반대는 新이요, 후자는 고대(今과 상대적인 뜻)의 뜻이 있다.
《위서(魏書)·물길전(勿吉傳)》의 《위서(魏書)》는 진수가 쓴 《삼국지(三國志)》의 《위서(魏書)》
가 아니라 선비족 탁발씨가 세운 북위(北魏)의 사서 즉 《북위서(北魏書)》를 가리킨다.
각설하고,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논문을 입수했다.
그 내용을 다 공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거나 이 문제에 대해 그 어느 글보다 깊이 있는 내용이라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 글을 장덕옥(張德玉) 선생이 쓴 《만주발원지역사연구(滿洲發源地歷史硏究)》라는 제목의 글에서
《숙신족의 땅은 요동이 아니었다(肅愼族地非遼東)》라는 장에서 가려 뽑아 우리 말로 옮겨 본 것이다.
<관리자>
《숙신족의 땅은 요동이 아니었다(肅愼族地非遼東)》
장덕옥 씀. 봉오선생 옮김
동북지구는 역사상 기본적으로 4대민족계가 활동한 장소였으니, 하나는 한족계(漢族系)요, 다른 하나는
동호계(東胡系)요, 다른 하나는 숙신계(肅愼系)요, 다른 하나는 예맥계(穢貊系)이다.
각 대족계의 활동중심지에 대한 논쟁의 수는 숙신족계가 비교적 많다.
논쟁의 수가 많다고 하더라도 백산·흑수의 광대지구라는 말도 아직 없다.
요사이에 어던 사람은 요동은 주나라 때에도 숙신족계(肅愼族系)의 활동지구라고 언급하였고, 심지어
산동(山東)·하북(河北) 두 성의 일부지구도 숙신족의 활동지구였으며,
요동의 여러 산맥이 장백산(長白山)으로부터 이어졌고, 숙신은 산에 의지해서 채(寨)를 만들어,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여 사냥을 하면서 살아왔다는 주장까지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요동은 벌써 오래 전부터 개발이 되어, 상·주(商周) 때에 숙신은 이 지역에서 거주하면서
농사를 짓고 사냥을 하였으며, 열매를 따거나 물고기를 잡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숙신은 채렵(采獵)을 생업으로 하였고 농경에 종사하지 않았다는 것은 역사문헌에 일찍부터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요동(遼東)"이 만약 요동도사(遼東都司)의 관할지역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 관할지역의 남쪽은 여순구(旅順口)로부터 시작해서, 북쪽으로는 개원(開原)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압록강(鴨綠江)을 면하고, 서쪽으로는 산해관(山海關)에 이른다.
그것은 "남쪽으로 청·서(靑徐)2)를 바라보고, 북쪽으로 송막(松漠)3)을 끌어 당기며, 동쪽으로 해서여진
(海西女眞)을 둘러 싸는 것인데, 이는 중원지구가 북쪽으로 누르깐(奴爾干) 관할로 이어지는 중간 부분
으로, 이를테면 하나의 거대한 팔과 같이, 명나라 서울(북경)의 동쪽에 가로 뉘여 정치·군사상의 천연
장벽을 이루고 있다 할 것이다.
주(周)나라 이전의 요동지구에서 살아왔던 인류는 결국 어떤 종족이며, 어떤 종족계의 활동구역이었다
는 말인가?
이는 요동의 종족 및 동북의 4개 고대 주체 민족계의 분포문제를 언급하고 있거니와, 다시 요동 인구의
종족(種族)·연원(淵源)·연변(演變: 변천)·진화(進化) 문제를 말해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명확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2) 청주(靑州)와 서주(徐州)를 말한다.
옛날 청주(靑州)는 대략 지금의 산동(山東) 북부에 상당하고, 동진(東晉) 때 청주(靑州)를 우주(우州)에
교치하였는데 지금의 강서 회양 동남쪽에 있었다.
옛날 서주(徐州)는 지금의 안휘 동부 및 강소 북부에 상당하고 서주(徐州)를 종리(鍾離)에 교치하였는데
지금의 호북 한천현(漢川縣) 동쪽에 있었다.
3) 송막(松漠)이라고 하면 송나라 때 홍호(洪皓)가 쓴 《송막기문(松漠紀聞)》이란 책 이름이 떠 오를
것이다.
송막(松漠)은 지명으로 지금의 열하 위장현(熱河圍場縣) 및 경봉현(經綳縣) 커시커턴기(克什克滕旗)
경내인데 소나무가 가장 많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천리송림(千里松林) 혹은 함평송림(咸平松林)이라도고도 한다.
(중국문화대학인행,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5책), 80쪽 참조)
숙진족(肅愼族)의 지역을 말하기 이전에 먼저 "동북(東北)"이나 "요동(遼東)"의 함의를 명확하게 이해
해야 할 것이다.
동북(東北)과 요동(遼東)을 가장 먼저 기록하고 있는 고문헌으로는 《상서(尙書)》·《주례(周禮)》와
《관자(管子)》 등이 있다.
《상서(尙書)·우공(禹貢)》 편에서는 동북을 유주(幽州)라 하고, 산은 의무려(醫巫閭)라 말하고 있다.
《주례(周禮)·직방씨(職方氏)》에서도 동북을 유주(幽州)라 하고, 그 진산(鎭山: 옛날 도읍이나 도시의
뒤쪽에 있는 큰 산)을 의무려(醫巫閭)라고 하였다.
그리고 《관자(管子)》 권 23 《경중갑(輕重甲)》4) 편에서는 연(燕)나라에는 요동(遼東)의 자염(煮鹽:
바닷물을 끓여서 만든 소금)이라는 말이 있다.
이로써 적어도 춘추전국(春秋戰國: 일반적으로 先秦이라고 한다) 이전에 동북(東北) 혹은 요동(遼東)은
이미 구주(九州) 가운데 변역(邊域)의 하나로서 사책(史冊: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4) 《관자(管子)·경중갑(輕重甲)》에는 중국의 사책 가운데서 8천 리 발(發)·조선(朝鮮)이란 말이 맨
처음 기록되어 있다.
관자는 제(齊)나라의 관중(管仲)(?~B.C 645)의 저서라고 알려졌지만 관중의 시대에 국한하여 쓰여진
것이 아니라 그 후대의 관련 기록도 있다고 한다.
어떻든 관자에 조선(朝鮮)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기원전 7세기 경에는 중국에 조선이
알려졌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기(史記)》로부터 명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서에는 모두 요동(遼東)의 위치와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명대 이전의 정사 중에서 요동(遼東)은 단순히 요하(遼河) 이동의 한 모퉁이에 있는 지역
만을 가리키는 것이 결코 아니라 일반적으로 전료(全遼) 혹은 동북 전체의 경내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았다.
김육불(金毓黼) 선생이 일찍이 석의(釋義)하여 언급하기를, "동북(東北)이란 말은 곧 중국 동북부를
약칭한 것임이 그 의미상으로 지극히 명백하다"라고 하였고,
《사기(史記)·소진전(蘇秦傳)》에 "연나라의 동쪽에 조선(朝鮮)·요동(遼東)이 있다(燕東有朝鮮遼東。)"
라고 하였다.
《요동지(遼東志)·지리리(地理志)》에서 요동을 해석하기를, "요동은 진(秦)나라 때 붙여진 이름으로,
《운서(韻書)》에 의하면, '요(遼)는 멀다는 뜻이 있는데, 그곳이 구주(九州)의 동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또 거기에는 요서(遼西)를 겸하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진서(晉書)·재기상(載記上)》에 "곽경(郭慶)이 모용평(慕容平)을 '요해까지(至遼海)' 막다른 골목
으로 몰아넣었다."라고 하였다.
《승요록(乘軺錄)》에 요해(遼海)를 해석하여 이르기를, "요해(遼海)는 곧 요동(遼東)이다"이라고
하였다.
요즘 사람 영운평(瀛雲平) 선생이 요해(遼海)를 해석하여 말하기를, "이것이 가리키는 것은 지금의
눈강(嫩江) 하류의 서안인 월량포(月亮泡)를 중심으로 한 커다란 소택지(沼澤地)를 말하는 것인데,
이 소택지는 북으로 치치하얼 동북쪽까지, 남으로 신개하(新開河) 유역까지, 서쪽으로 오란호특(烏蘭
浩特) 서북의 색룬(索倫)까지, 동쪽으로 하얼빈 이서까지 대략 면적 10만 평방 킬로미터에 달하며,
절강성(浙江省)의 면적과 맞먹는다고 하였다. 이 지역 내에는 호수가 사방에 총총이 분포되어 있고,
하류가 종횡으로 교차하면서 작은 호수와 소택, 하류와 소택 간에 경계가 매우 불분명해져 비가 많은
우기에는 하류·소택이 망망대해를 갈대가 무성하게 자란다.
그래서 수·당(隋唐) 시대에 이 지역에 대해서 요해(遼海)라는 명칭이 생기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본문에서 말하는 "요동(遼東)"에는 두 가지의 함의가 있으니 그 하나는 명대 요동도사(遼東都司)(요동
도지휘사사)의 관할 지구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지역이 《우공(禹貢)》에서 말하는 구주(九州)의
동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명대의 문헌에서는 "요진(遼鎭)" 혹은 "전료(全遼)"
라고도 하였다.
그 둘은 요하(遼河)를 경계로 한 요하(遼河)의 동쪽으로, 요양(遼陽)·심양(瀋陽) 등지와 같은 것을 요동
(遼東) 혹은 하동(河東)이라고 하고, 요하(遼河) 서쪽의 광녕(廣寧)·금주(錦州) 등지 같은 것을 요서
(遼西) 혹은 하서(河西)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몇몇 학자들이나 전문가들이 숙신족의 활동지구를 논급할 때 요동도사(遼東都司)의 요동 및
오늘날의 요동까지도 포함하여 가리키기 때문이다.
숙신족계(肅愼族系)는 중국 동북 지구에서 아주 오래된 민족의 하나이다.
"동북 동쪽의 장백산(長白山)·노장광재령(老張廣才嶺) 일대의 어렵민족으로, 선진(先秦: 춘추전국) 때
숙신(肅愼)으로 일컬어졌다."라고 하였다.
멀리 전설 중의 순(舜)임금 때 벌써 중원과 경제·문화의 왕래가 있었다.
숙신의 위치와 관련하여 어떤 사람은 《산해경(山海經)》에 근거하여 불함산(不咸山)(지금의 長白山/
白頭山) 일대로 인정하고 있고, 어떤 사람은 지금의 흑룡강성 농안현(黑龍江城農安縣) 일대로 인정하며,
어떤 사람은 지금의 길림시(吉林市) 지구로 인정하며,
어떤 사람은 흑룡강(黑龍江) 중·하류의 광대한 지역으로 인정하며, 어떤 사람은 요동(遼東)(요동도사의
요동)으로 인정하며, 심지어 지금의 신빈(新賓)·무순(撫順) 지구로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각가의 견해가 각이한 것은 주로 근거로 한 자료와 이해의 각이한 것으로 말미암아 조성된 것이다.
우리는 겨우 숙신의 방위(方位)와 관련된 몇 개 분야, 곧 이정(里程)과 사지(四至) 등만 가지고 분석·
검토하였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숙신이 처한 구체적인 지리위치를 고증하고자 한다.
(1) 이정(里程)
《좌전(左傳)》에서 숙신에 대해서 말하기를 주초(周初)의 북토(北土) 내에 있다고 하였고, 《산해경
(山海經)》에서는 숙신은 "대황지중(大荒之中)"에 있다고 하였는데, 대황(大荒)이라는 지리 개념이
매우 요활(遼闊)하여, 숙신의 구체적인 지리의 방위를 지적하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정황하에서 이정(里程)이야 말로 분명히 드러나는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이는 숙신의 지리와
위치를 확정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로 된다고 할 것이다.
두예(杜預)는 《좌전(左傳)·소공구년전(昭公九年傳)》을 인용하여, 주석하기를, "숙신(肅愼)·북이(北夷)
는 현도군(玄菟郡) 북쪽 3천여 리에 있다"고 하였고,
곽박(郭璞)은 《산해경(山海經)·대황북경(大荒北經)》에서 주석하기를, "현재의 숙신국(肅愼國)은 요동
(遼東)으로부터 3천여 리 떨어져 있다"라고 하였다.
두예·곽박은 모두 진(晉)나라 사람으로, 진(晉)나라 때 현도군(玄菟郡)의 치소는 지금의 무순시 노동
공원(勞動公園)에 있었으며, 요동군(遼東郡)의 치소는 지금의 요양시(遼陽市)에 있었다.
따라서 숙신은 현도군(玄菟郡) 혹은 요동(遼東)으로부터 1,50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던만큼, 흑룡강
(黑龍江) 하류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기(史記)·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에서 말갈국(靺鞨國)을 두고 《사기정의(史記正義)》는
《괄지지(括地志)》를 인용하여 "말갈국(靺鞨國)은 고숙신(古肅愼)으로, 읍루(揖婁)라고도 하는데,
서울(장안)으로부터 동북쪽으로 8천 4백 리 떨어져 있으며, 남으로 부여(夫餘)와 1천 5백 리 떨어져
있으며, 동쪽과 북쪽으로 각각 대해(大海)에 닿아 있다.
(靺鞨國, 古肅愼也, 亦曰揖婁, 在京東北八千四百里, 南去夫餘千五百里, 東及北各抵大海也。)"라고
하였다.
또 《사기(史記)·하본기(夏本紀)》에서 조이피복(鳥夷皮服)을 두고 《사기정의(史記正義)》는
《괄지지(括地志)》를 인용하여, "말갈국(靺鞨國)은 고숙신(古肅愼)으로, 서울(장안)로부터 동북쪽
으로 1만여 리쯤 떨어져 있으며, 이하의 동쪽 및 북쪽이 각각 대해(大海)에 닿아 있다.
그 나라 남쪽에 백산(白山)이 있는데 조수(鳥獸)와 초목(草木)이 모두 흰 색깔을 하고 있다.
(靺鞨國, 古肅愼也, 在京東北萬里, 已下東及北各抵大海。其國南有白山, 鳥獸草木皆白。)"라고 하였다.
《괄지지(括地志)》는 당나라 때의 작품으로, 말갈(靺鞨)은 흑수말갈(黑水靺鞨)을 가리키고, 흑수말갈
(黑水靺鞨)은 숙신의 고지(故地)에 있었다.
신·구《당서(唐書)·실위전(室韋傳)》에는 당나라 때 흑수(黑水)는 지금의 흑룡강(黑龍江)과 송화강(松
花江)이 합류하는 아래 쪽에 있는 것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당나라의 서울은 장안(長安)으로, 장안(長安)에서 요동(遼東)(지금의 요양시)까지는 2,300킬로미터였
으며,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에 기록하기를,
지금의 요양(遼陽)에서 발해의 왕성(王城: 수도)까지는 750킬로미터라고 하였으니 도합 3,050리가
되거니와, 그리고 발해의 왕성으로부터 다시 동북으로 또 1.150리를 가서야, 비로소 숙신 지역에
이르게 된다.
게다가 사서에서는 명확하게 흑수말갈(黑水靺鞨)은 숙신지역에 있다고 하였고, 흑수말갈은 흑수(黑水)
로 인해서 얻어진 이름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숙신을 흑수의 이외로 옮겨 갈 수도 없다.
그외에도 지금의 흑룡강성(黑龍江城) 호눈평원(呼嫩平原)5)은 옛날 부여인(夫餘人)들이 활동하였던
지구이다.
부여(夫餘)의 북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는데 지금의 흑룡강(黑龍江) 중류로서, 동북쪽으로 지금의
흑룡강(黑龍江)·송화강(松花江)의 합류처와 그 동북에서 숙신과 서로 접하여 있다.
《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에서 부여(夫餘)는 읍루(揖婁)(숙신)에서 75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고 하였는데,6) 부여(夫餘)의 활동중심지로부터 숙신(肅愼)의 서남부까지의 리수를 가리키는 것
으로 생각된다.
또 《진서(晉書)》에서는 부여는 숙신으로부터 60일 가는 거리에 있다고 하였는데 만약 매일 35킬로
미터씩으로 계산한다면 2,100리가 되어 숙신 동북쪽 가장 변방지구까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5) 호눈평원(呼嫩平原)은 송눈평원(松嫩平原)이라고 하는 듯하다.
송화강(松花江)과 눈강(嫩江)이 충적하여 이루어진 평야로 흑룡강성 서부와 길림성 서북부에 위치하고
있다.
6) 《후한서(後漢書)·부여전(夫餘傳)》에는 "부여국은 현도의 북쪽 천리쯤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와,
동쪽은 읍루와, 서쪽은 선비와 접해 있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국토의 면적은 사방 2천 리이며,
원래 예의 땅이다.(夫餘國, 在玄菟北千里。南與高句麗, 東與揖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地方二千里,
本濊地也。)"라고 하였다.
《삼국지(三國志)·부여전(夫餘傳)》에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는데, 현도에서 천 리쯤 떨어져 있다.
남쪽은 고구려와, 동쪽은 읍루와, 서쪽은 선비와 접해 있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국토의 면적은 사방 2천 리쯤 되며, 호수는 8만이다.(夫餘在長城之北, 去玄菟千里, 南與高句麗, 東與
揖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 方可二千里, 戶八萬。)"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현도로부터 기산하지
않고 읍루로부터 기산하여 75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맨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근거로 할 만한 것이 있다.
《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관구검전(毌丘儉傳)》에 말하기를, "정시 6년(245)에 다시 고구려를
쳤는데, 고구려 왕 궁(宮)7)이 마침내 매구(買溝)로 달아나매, 관구검이 현도군 태수 왕기(王頎)를
보내어 추격케 하였는데 옥저(沃沮) 1천여 리를 지나 숙신(肅愼)의 남계에 도달하였다.(六年, 復征之,
宮遂奔買溝。儉遣玄菟太守王頎追之, 過沃沮千有餘里, 至肅愼氏南界。)"라고 하였다.
《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동이전(東夷傳)》에 이르기를, "북옥저(北沃沮)는 일명 치구로(置溝婁)로,
남옥저(南沃沮)로부터 8백여 리 떨어져 있다"라고 하였는데, 고증한 바에 의하면, 매구(買溝)는 곧
치구루(置溝婁)로서, 지금의 혼춘(琿春) 부근 - 숙신남, 지금의 흥개호(興凱湖) 일대이다.
《진서(晉書)》에 기록된 숙신(肅愼) 토계(土界)의 면적은 수천리에 달해 이곳으로부터 북쪽으로
수천리요, 숙신의 활동지구는 지금의 흑룡강 하류에 있는데, 중류의 일부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사리
에도 맞는다.
7) 고구려 왕으로 이름이 궁(宮)인 사람은 태조대왕(太祖大王)이다.
위 정시 6년에 관구검이 고구려를 칠 당시의 고구려의 왕은 동천왕(東川王)이요,
이름은 우위거(憂位居)이었는데 이 분을 궁(宮)이라 하는 듯하다.
(2) 사지(四至)8)
8) 원래는 옛날 토지나 주택 주변의 경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지팔도(四至八道)의 준 말이다.
옛날에 토지의 경계를 표시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사면팔방으로 이른 곳과 통하는 도로를 표시하였다.
이정(里程)은 숙신이 처한 곳의 방위를 판단할 수 있으나, 사지(四至)는 다시 그 토계(土界)의 면적상
그 분포의 대체제적인 범위를 판단할 수 있다.
《후한서(後漢書)》·《진서(晉書)》·《당회요(唐會要)》 등 서에 기록된 숙신(肅愼)·읍루(揖婁)·
흑수말갈(黑水靺鞨)은 모두 옛 숙신 및 그 지역을 가리키고, 따라서 그 사지(四至)는 곧 숙신의 사지이다.
《후한서(後漢書)·동이전(東夷傳)》에 이르기를, "읍루(揖婁)는 옛 숙신국(肅愼國)이다. 부여(夫餘)에서
동북으로 1천여 리쯤 떨어져 있는데, 동으로는 대해(大海) 가까이에 있고, 남으로는 북옥저(北沃沮)와
접하고 있으며, 북쪽은 그 끝을 알 수 없다.
(揖婁, 古肅愼之國也, 在夫餘東北千餘里, 東濱大海, 南與北沃沮接, 未知其北所極。)"라고 하였다.
부여(夫餘)의 활동중심지는 지금의 호눈평원(呼嫩平原)으로, 그 동북계는 지금의 흑룡강·송화강 합류
처까지이다. 동쪽으로 가까이 있는 대해(大海)는 곧 일본해(日本海)/동해(東海)이다.
그 남쪽은 북옥저(北沃沮)와 접하고 있는데, 북옥저(北沃沮)는 지금의 도문강(圖門江)(두만강) 이북에
있으며, 읍루(揖婁)는 북옥저(北沃沮)와 남북으로 분계하는 지역으로서, 아마도 지금의 흥개호(興凱湖)
일대에 있을 것이다.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는데, 대해(大海) 가까이에 있으며, 북쪽으로
읍루(揖婁)·부여(夫餘)와 접계한다. 개마대산(蓋馬大山)은 지금의 장백산(長白山)/백두산(白頭山) 및
낭림산맥(狼林山脈)이다.
대해(大海)는 곧 일본해(日本海)이다. 그 북쪽의 부여는 바로 동부여(東夫餘)를 가리키며, 그 지역은
장백산(長白山)/백두산(白頭山)의 서(西)·북(北)에 있다.
《신당서(新唐書)·발해전(渤海傳)》에 "숙신의 고지를 상경(上京)으로 삼았는데 용천부(龍泉府)라고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옛 숙신의 서남쪽은 발해의 상경(上京)지구를 포함하고,
그보다 남쪽은 동부여(東夫餘)인데, 동부여는 주몽(朱蒙)이 세운 고구려의 북변이다.
《진서(晉書)·동이전(東夷傳)》에 "숙신씨(肅愼氏)는 일명 읍루(揖婁)로, 불함산(不咸山)의 북쪽에
있는데, 부여(夫餘)로부터 대략 60일 가는 거리에 있고, 동쪽으로 대해(大海) 가까이에 있고, 서쪽으로
구만한국(寇漫汗國)에 접하고, 북쪽 끝으로 약수(弱水)이다."라고 하였다.
불함산(不咸山)은 지금의 장백산(長白山)/백두산(白頭山)으로, 숙신 남계에서 장백산(長白山)에 이른다.
동쪽으로 면한 대해(大海)는 곧 일본해 및 오호츠크해이다.
"북쪽 끝으로 약수"라고 하였는데 약수(弱水)는 곧 흑룡강(黑龍江)이다.
《괄지지(括地志)》에 의하면, "숙신은 동쪽 및 북쪽이 바다로 막혀 있다"라고 하였으니 북쪽의 바다는
곧 오호츠크해요, 약수(弱水)는 곧 숙신 경내의 강물인 것이지 숙신의 북계의 가장 끄트머리가 아니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쪽으로 구만한국(寇漫汗國)에 접한다"고 하였는데 구만한(寇漫汗)은 곧 나중의 두막루(豆莫婁)로서,
진(晉)나라 때는 지금의 흑룡강·송화강 합류처의 북쪽에 있었다.
수·당 때 흑수말갈은 숙신의 지역에 있었으니, 《당회요(唐會要)》에 기록하기를, "지금의 흑수말갈의
경계는 남으로 발해 현덕부(渤海顯德府)와(마땅히 덕리부이다), 북으로 소해(小海)까지, 동으로 대해
(大海)까지, 서로 실위(室韋)까지, 남북 대략 2천 리, 동서 대략 1천 리이다.
(今黑水靺鞨界, 南與渤海國顯德府, 北至小海, 東至大海, 西至室韋, 南北約二千里, 東西約一千里。)"라고
하였다.
신·구 《당서(唐書)·실위전(室韋傳)》에 기록하기를, 흑수말갈은 지금의 흑룡강과 송화강이 합류한
뒤의 흑룡강(黑龍江)에 있는데, 이 강의 남쪽은 남흑수말갈(南黑水靺鞨)이요, 이 강의 북쪽은 북흑수
말갈(北黑水靺鞨)이다.
덕리부(德理府)는 곧 철리부(鐵利府)로, 원래는 흑수말갈에 속했다가 그 뒤에 발해에 편입되었으며,
지금의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부근이다.
북쪽의 소해(小海)는 곧 오호츠크해요, 동쪽의 대해(大海)는 곧 지금의 일본해(日本海)/동해(東海)이다.
서쪽으로 실위(室韋)에 이르는데, 곧 진(晉)나라 때의 구만한(寇漫汗)이요, 북조 때의 두막루(豆莫婁)요,
당나라 때의 달말루(達末婁)이다.
(3) 자연조건
숙신은 중원과 연계된 것이 비록 오래 되었다고 하지만 선진(先秦: 춘추전국)의 사적에서 그 정황에
대한 기록은 때때로 지극히 간략하다.
《산해경(山海經)·해외서경(海外西經)》에 "숙신국(肅愼國)은 백민(白民)의 북쪽에 있는데 일종의
웅상(雄常)이라 부르는 나무가 있다.
여기서 사는 사람들은 평시에 옷을 입지 않으나 중국에 만약 현명한 천자가 제위를 이으면, 이 나무가
문득 자라 나무 거죽을 벗겨내서 사람들이 그것을 취해 옷을 만들어 입는다.
(肅愼之國在白民北。有樹名曰雄常, 先入伐帝, 于此取之。)"라고 하였고,9)
또 "대황지중(大荒之中)에 산 이름이 불함산(不咸山)이라는 것이 있는데 숙신씨국(肅愼氏國)에 있다"
라고 하였다. 문장으로 보면 불함산(不咸山)과 숙신(肅愼)은 모두 "대황지중(大荒之中)"에 있다고
하였지만, 숙신의 활동중심지가 바로 불함산(不咸山) 일대에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숙신국(肅愼國)의 남쪽은 백민(白民)인데, 백민(白民)은 곧 맥민(貊民)이다.
《후한서(後漢書)·동이전(東夷傳)》에 기록하기를, "숙신씨(肅愼氏)는 일명 읍루(揖婁)로, 불함산
(不咸山)의 북쪽에 있고……동쪽으로 대해(大海) 가까이 있고 북쪽으로 약수(弱水)에서 끝난다"라고
하였다. 이에 의하면 백민(白民)은 곧 맥민(貊民)이다.
9) 이 부분의 원문은 간략하나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先入伐帝, 于此取之"에 대하여 곽박(郭璞)이
이르기를, "그들의 습속은 옷을 입지 않는다. 중국에 성제(聖帝)가 대신 들어서면 이 나무가 자라
거죽을 벗겨 옷을 해 입는다"라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동이전(東夷傳)》에 기록하기를, 숙신의 지역은 "토지가 산이 험한 곳이 많다(土地
多山險。)"라고 하였고, 《진서(晉書)·동이전(東夷傳)》에 기록하기를, "숙신씨(肅愼氏)는 일명 읍루
(揖婁)로, 불함산(不咸山) 북쪽에 있는데 동쪽으로 대해(大海) 가까이 있고 북쪽으로 약수(弱水)에서
끝난다.
그 토계(土界)의 광모(廣袤: 면적)은 수천리로, 깊은 산과 궁벽한 계곡에 있다.
그 길이 험준하여 다니기 어렵고 차마가 통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 나라 동북쪽에 산이 있는데 거기서 나는 돌은 날카롭기가 쇠도 끊을 정도며, 장차 이를 취하려면
먼저 신에게 기도를 올린다"라고 하였다.
이에 의하면, 숙신은 불함산(不咸山)의 북쪽에 있고, 동쪽으로 대해(大海), 곧 오호츠크해 및 일본해를
면하고 있다. 약수(弱水)는 흑수말갈(黑水靺鞨)의 고칭으로, 부여(夫餘)와는 "북쪽에 약수가 있다(北
有弱水)"라고 할 때의 약수(弱水)와 똑같은 강이다.
석산(石山)은 이 나라의 동북쪽에 있는데 《길림통지(吉林通志)》에 이르기를, 지금의 외흥안령(外興
安嶺)을 옛날에는 석산(石山)이라고 하였다.
지금의 흑룡강 하류는 "심산궁곡(深山窮谷)이라고 하였고 그 길이 험준하여 다니기 어렵고 차마가
통하지 않는다고 하는 지역이라고 하였다.
(《흑룡강지고(黑龍江志稿)》) 원황진(元黃縉)의 《찰라이공신도비(札喇爾公神道碑)》에 기록하기를,
"동쪽으로 원수부(元帥府)를 공격하였는데 길이 험준하여 다니기가 어려웠으며, 암석이 우뚝우뚝 솟아
한 여름에는 물이 왕성하여 바로 배가 나닐 수 있으나 겨울이 되면 개를 가지고 썰매를 얼음 위에서
끈다. 그 지역에는 벼와 수수가 나지 않으며 물고기로써 먹은 것을 대신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숙신이 거주하는 자연환경으로 말하면, 오호츠크해 및 일본해의 서쪽과 장백산의 북쪽
이요, 석산(石山)이 서남쪽에 있어, 바로 약수(弱水) (흑룡강) 유역의 광대한 지역으로 생각된다.
(4) 물산(物産)
숙신의 물산도 지역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 명산(名山: 특산물)과 그 족계가 역대 사서에 함께 기록되어 있다.
주(周)나라 및 그 이전에 숙신이 바쳤던 것은 석노호시(石砮楛矢) 및 송골매(隼)이다.
송골매(隼)는 곧 해동청(海東靑)이다.
노필(盧弼)의 《삼국지집해(三國志集解)》에 대하여 염백시(閻百詩: 閻若璩를 가리킨다)가 말하기를,
"또 새가 있는데 해동청(海東靑)이라고도 하며, 곧 송골매이다"라고 하였다.
《원사(元史)·지리지(地理志)》에 의하면, "해동청의 산지는 지금의 흑룡강 하류의 누르깐(奴爾干)
지방이다"라고 하였다.
호시석노(楛矢石砮)는 숙신의 특산품이다. 석노호(石砮楛)도 지금의 흑룡강 하류에서 나온다.
(중류 일부 지역도 포함한다)
《요동지(遼東志)》에 기록하기를, "흑룡강 입구에 돌이 있는데 이름하여 목화석(木化石)이라 하고,
날카로워서 화살촉을 만드는 데 쓰며, 토인들은 이를 귀하게 여긴다"라고 하였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기록하기를, "호시석노(楛矢石砮)는 흑룡강 동쪽에서 나는데 이름하여
목화석(木化石)이라 하고, 날카롭기가 쇠를 끊을 정도라서 화살촉을 만드는 데 쓰이며,
토인들이 장차 이를 취하려 할 때는 먼저 신에게 기도한다"라고 하였다.
《영고탑기략(寧古塔紀略)》에 기록하기를, "혼동강(渾同江)에서 석노가 나는데 송지(松脂: 송진)가
물에 들어가서 천여년 동안 변화한 것이라고 전해 오고 있는데, 나무 결과 같은 무늬가 있다.
그 색깔은 감벽색으로, 쇠보다 단단하여 토인들은 이로써 칼날을 갈며, 이름하여 앙위혁(昻威赫)
이라고 하는데 옛날 숙신씨가 바치던 호시석노(楛矢石砮)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석노(石砮)가 흑룡강 하류에서 나는데 만주말로 앙위혁(昻威赫)이라 하며, 그 의미는 곧 나무가 변하여
돌로 되었다는 뜻이라고 한다. 《진서(晉書)》에 이르기를, "숙신의 동북쪽 석산(石山)에서 난다"고
하였다.
《수서(隋書)·말갈전(靺鞨傳)》에 기록하기를, "불날(不涅) 이동으로부터 화살은 모두 석노(石砮)이다"
라고 하였는데 불날(不涅)은 지금의 흑룡강 의란현(依蘭縣)에 있는 바,
이는 석노가 흑룡강 하류 일대에서 나온다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숙신에서는 또 일종의 "웅상(雄常)"이라고 부르는 나무가 나는데 그 산지는 지금의 샤할린섬, 곧 쿠릴
섬이다.
웅상(雄常)은 《진서(晉書)》에서는 "雒常"이라 하였고, 《회남자(淮南子)·지형훈(地形訓)》에서는
"雒裳"이라고 썼다.
곽박이 주석하기를 "이 나무의 거죽을 벋겨 내서 옷을 해 입을 수 있다"라고 하였고, "부상(扶桑)에서
급피치(芨皮紙)가 난다"고 하였다. 부상(扶桑)은 곧 닥나무로, 지금도 쿠릴섬에서는 여전히 이 작물이
난다고 한다.
《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동이전(東夷傳)》에 기록하기를, "적옥(赤玉)·호초(好貂)가 나는데 지금
말하는 읍루(揖婁)의 초(貂: 담비)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물산의 특징 및 그 분포로써 옛 숙신족의 활동은 흑룡강 하류 양안의 광대한 지구에 있었다는 것도
간파할 수 있다 할 것이다.
(5) 습속
숙신족의 거주습속은 오랜동안 흑룡강 하류 지구에도 남아 있다. 성을 쌓아 혈거한다든가 집의 모양이
무덤처럼 생겨, 위쪽으로 구멍을 내어 사다리를 타고 출입한다고 하는데 이러한 형상과 구조의 혈거
가옥은 원·명(元明) 때 흑룡강 하류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지금의 흑룡강 하류에서는 여전히 여러 형상의 각이한 수혈거주(竪穴居住) 유적이 발견되고 있으며,
쿠릴섬에도 똑같은 유지가 발견되고 있다.
수혈 중에서는 일찍이 석기(石器)와 도기(陶器)들이 출토되었고 이러한 유지는 고고(考古) 전문가들에
의해 숙신의 조상 및 그 친속부락(親屬部落)의 거주지였다는 것이 인정되었다. 이러한 수혈(竪穴)의
유지가 현재 숙신의 활동구역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숙신 혹은 그 후예의 주거지로 인정되는 것
이다.
숙신족(肅愼族)의 지역과 그 활동지구의 문제는 만족(滿族)의 발원지와 똑같은 것이 아니다.
만족의 발원지는 청왕실(淸王室)의 발상지를 가리킨다.
청왕실의 발상지에 관한 견해는 먼저 세 선녀(仙女)가 주과(朱果)를 먹고 만족의 시조를 낳았다는
고사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사는 또 허다한 견해가 있다. 전반적인 내용을 말하면, 선녀인 세 자매가
있었는데 맏이의 이름은 은고륜(銀古倫)이고, 다음의 이름은 정고륜(正古倫)이고, 셋째의 이름은
불고륜(佛古倫)이었다. 어느날 함께 장백산 천지에 함께 목욕을 하고 있었다. 불고륜(佛古倫)이 신조
(神鳥)가 떨어뜨린 주과(朱果)를 잘못 먹고 잉태하였으며, 그리하여 포고리옹순(布庫里雍順)을 낳았다.
포고리옹순(布庫里雍順)은 태어나자마자 산으로 가서 아막혜(俄莫惠)라는 들판에 있는 아다리성(俄多
里城)에 왕으로 추대되어 국호를 만주(滿洲)라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만주(滿洲)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요즘 사람 대일(戴逸)이 주편한 《간명청사(簡明淸史)》에서 만족의 직계조선(直系祖先)(포고리옹순)
은 당초에 흑룡강 이북에 살았다고 하였다.
요녕대학 역사연구실 부교수 이림(李林) 동지는 《건주여진의 원류(建州女眞的源流)》라는 일문에서
강동 64둔(屯)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지금의 애훈 동쪽 일대라고 하였다.
이 두 분 선생의 관점은 1설이다.
다른 일설은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에서, "만주의 시조는 장백산 동쪽 아막혜(俄莫惠)
라는 들에 있는 악다리성(鄂多里城)에서 살았다.
이 성은 흥경(興京) 동쪽 1천 5백 리와 영고탑성(寧古塔城) 서남쪽 3백 30리 늑복선하(勒福善河) 서안
이다"라고 하였다.
이상의 두 설은 서로 1,000여 킬로미터나 차이가 난다.
그렇다면 만주인들은 결국 어느 지역에서 발원했다는 말인가?
원명청(元明淸) 사료의 연구한 결과, 건주(建州)의 삼위(三衛)는 원대의 호리개만호부(胡里改萬戶部)
(치소는 지금의 이란현치)와 알타련만호부(斡朶憐萬戶部)(치소는 지금의 이란성 강서마대둔)에서
발전·변화하여 온 것이다.
원말(1367)에 호리개부(胡里改部)는 목단강(牧丹江) 동안을 따라 남하하다가 옛 발해국 솔빈부(率貧部)
건주(建州) 지역에서 멈추웠는데 그들은 나중에 건주위(建州衛)로 바뀌었다.
명홍무 5년(1372)에 알타련만호부(斡朵憐萬戶部)도 목단강 서안을 따라 남하하였는데, 《흠정만류고
(欽定滿洲源流考)》에서 알타련부(斡朵憐部)가 먼저 돈화시(敦化市) 일대에 멈추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합리적이다.
청나라 조조(肇祖)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孟特木)10)가 바로 이곳에서 출생하였다.
"아막혜라는 들(俄莫惠之野)"은 바로 지금의 돈화시(敦化市)에 소재한 소분지의 평야를 가리킨다.
이곳은 《금사(金史)》에서 "와모해(窩謀海)"라고 하였고,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서는 이를
"아막혜(俄莫惠)"라고 하였고, "아마하(俄摩賀)"·"악모화소로(鄂謀和蘇魯)" 등으로 썼다.
원대에는 알타련만호부(斡朵憐萬胡部)에 속했고, 지금의 돈화시 북쪽의 액목향(額穆鄕)은 바로 아막혜
(俄莫惠)의 자취가 남아 있는 이름(遺名)이다.
10)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의 7세손이 청나라의 창업군주 누르하치이다.
맹가첩목아는 도독 맹특목(孟特穆)인데 누르하치가 청나라를 세운 뒤 조조(肇祖)로 추존되었고, 그의
손자 복만(福萬)은 흥조(興祖)로 추존되었고, 복만(福萬)의 아들 각창(覺昌), 즉 누르하치의 조부는
경조(景祖)로 추존되었고, 누르하치의 애비 탑극세(塔克世)는 현조(顯祖)로 추된되었다.
(맹삼, 《청사강의(淸史講義)》, 중화서국, 11쪽 참조)
악다리성(鄂多里城)은 곧 지금의 돈화시(敦化市) 구역내의 "오동성(敖東城)"으로, 원래 발해가 처음
으로 도읍지로 한 곳이다. 당현종 이륭기(李隆基) 천보 14년(735)에 발해국이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를 수도로 정한 뒤로 이 성은 "구국(舊國: 고도)"으로 되었다.
이로써 셋째 선녀가 만주시조를 낳았다는 신화고사(神話故事)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선녀의 이름은 불고륜(佛古倫)인데, "불(佛)"·"영불(映佛)"은 만주말로 옛날
(舊)이란 뜻이요, 고륜(古倫)이란 나라(國)라는 뜻이니, 불·고륜(佛古倫)은 곧 "구국(舊國)"이며,
이는 바로 구국(舊國)이 만족의 조선(祖先)을 낳아 길러내었다는 말이다.
명나라 초기에 만족의 조선(祖先)이 비로소 돈화시(敦化市) 일대에 이르렀기 때문에 숙신씨(肅愼氏)는
주대 이전에 결코 요동지구에서 활동한 것이 아니며, 더욱이 신빈(新賓)의 땅으로 발을 들여 놓은 일이
없었던 것이다.
원말 호리개부(胡里改部)가 강을 따라 남하하여 건주(建州) 지역에 이르러 건주위(建州衛)로 바뀌었
으며, 명나라 초기에 알타련부(斡朵憐部)도 강을 따라 남하하여 돈화시 일대에 멈추었던 것이다.
명정통(明正統: 명종) 초기에 만족(滿族)(여진)은 비로소 신빈(新賓)에 진입하였다.
어떤 사람은 아마 발해국(渤海國) 때 일부 발해인들이 나중에 여진인으로 바뀌었을 지 모른다고 인정
하였다. 발해의 시기에 당나라와 발해는 신빈(新賓) 등지를 "구탈(甌脫)"11) 지역으로 간주하여 비록
주(州)(木底州)를 설치하였지만 아직 관리하지 않았었다.
발해인들도 아직 이 지역에 대량으로 옮겨가 살지 않았다.
《발해국장편(渤海國長編)》9)에서 "《신당서(新唐書)·고구려전(高句麗傳)》에 설인귀(薛仁貴)가
남소(南蘇)·목저(木底)·창암(蒼岩) 세 성을 함락시켰다"라고 하였다.
또 《신당서(新唐書)·지리지(地理志)》에 고구려(高句麗) 항호(降胡) 14주(州) 중에 목저주(木底州)가
있는데, 대개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이 주를 설치하였다가 나중에 발해(渤海)에 침거당한
곳으로 생각된다.
발해의 62주를 조사해 본 바, 그 중에도 목저(木底)라는 명칭이 없으니 대개 처음에 옛 이름을 그대로
답습해 쓰다가 나중에 바로 이를 바뀐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의 동료하(東遼河)는 달리 혁이소하(赫爾蘇河)로 일컬어지고, 옛날에 남소수(南蘇水)로 불려졌
으니, 고구려의 남소성(南蘇城)이 바로 이곳에 두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길림통지(吉林通志)》에서 남소(南蘇)는 지금의 길림성(吉林省) 이통(伊通)이 바로 이곳이라고
하였다. 목저성(木底城)은 여기서 가까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혹시 지금의 신빈현 경내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아직 고증을 기다린다.
이 설에 따른다면 목저성(木底城)은 신빈(新賓) 경내에 있지도 않았고, 발해인들은 더더욱 신빈(新賓)
에 진입한 적이 없게 된다.
신빈 경내에 목저성(木底城)은 역시 한인(漢人)·고구려인(高句麗人)이 많았으나, 발해인은 적었고,
더욱이 만주인(滿洲人)(여진)은 없었다.
11) 구탈(甌脫)이란 흉노말로 변계의 둔수하는 곳이란 말이다.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기(史記)·
흉노열전(匈奴列傳)》에 나오는 흉노의 선우 두만(豆曼)과 그의 아들 묵특(冒頓)이 동호(東胡)가 자신
의 세력을 과신하여 밑도 끝도 없는 무리한 요구를 참을 수 없어 마침내 동호를 정벌하게 된다는 다음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묵특(冒頓)이 선우가 되었을 때 동호(東胡)는 강성했다. 묵특이 제 아비를 죽이고 자립했다는 말을
듣자, 동호는 사자를 보내어 두만이 살아 있을 때 소유하고 있던 천리마를 갖고 싶다고 묵특에게
말하게 했다.
묵특이 그 일에 대해 군신에게 묻자, 군신들이 입을 모아 말하기를, '천리마는 흉노의 보마입니다.
주어서는 아니 되옵니다.'라고 했다. 그런 묵특은 '서로 나라를 이우하고 있으면서 어찌 말할 필을
아끼겠는가?'라고 말하고 마침내 천리마를 내주었다.
그후 얼마 안되어 동호는 묵특이 자기들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다시 사자를 보내어 선우의
연지 한 사람을 얻고 싶다고 말해 왔다. 묵특은 다시 측근들에게 물었다.
측근들은 모두 노하여 말하기를, '동호는 무도하여 마침내 연지를 요구해 오게 되었습니다.
공격해서 해치워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묵특은 '서로 나라를 이웃하고 있으면서 어찌 아녀자
한 사람을 아끼겠는가?'라며 마침내 사랑하는 연지 한 사람을 뽑아 동호에게 주었다.
동호는 점차 교만해져 서쪽으로 침략해 왔다.
동호와 흉노 사이에는 그 중간에 불모의 버려진 땅이 있었는데 천 리에 걸쳐 살고 있는 백성들도 없었고
양국은 각기 그 변경에 거주하였으며 이 지역을 구탈(甌脫)이라고 하였다.
(東胡王愈益驕, 西侵。與匈奴間, 中有棄地, 莫居, 千餘里, 各居其邊, 爲甌脫。)
동호는 사자를 보내어 묵특에게 말했다. '흉노가 우리와 경계하고 있는 불모의 버려진 땅은 흉노에게는
진출할 수 없는 땅이니 우리 쪽에서 보유하고 싶소.'라고 말했다. 묵특은 이에 대해 여러 신하들에게
더니 그 중의 어떤 신하가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어차피 버려진 땅입니다. 주어도 좋고 주지 않아도 좋습니다.'라고 말하자 묵특은 크게 노하여
'토지는 나라의 근본이다. 어찌 토지를 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주어도 좋다고 말한 자들을 모두
목베어 죽이고, 곧 말에 올라타 고 온 나라 안에 명령했다. '이 출전에 늦는 자는 베어 주일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동쪽에 있는 동호를 습격하였다."
이 구탈(甌脫)은 우리 고대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연나라나 그 뒤를 이은 진나라· 한나라와 고조선 사이에 있었던 공지(空地)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조선시대 압록강 북쪽의 봉황성 일대도 일종의 구탈지역으로서 명나라와 조선,
그리고 그뒤의 청나와 조선 사이에 그 어느 쪽도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 설정된 바 있다.
우리의 사신이 이 지역을 통과할 때는 조선에서 그 경호경비를 맞고, 명나라나 청나라 사신이 들어올
때 역시 그들이 경호경계를 맞아 상대지역으로 인계하였다.
9) 김육불이 저술한 《발해국지》 관련자료집이라 할 수 있다. 김육불(金毓黻)(1887~1962)은 사학자·
목록학자이다. 자는 육불(毓불)이요, 호는 정암(靜庵)이다.
요녕 요양인이다. 1916년 북경대학(北京大學)을 졸업하고 심양대학(瀋陽大學)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1931년에 요녕성 정부위원 겸 교육청청장으로 임영되었고, 그 이듬해 겨울에 위만주(僞滿洲)(만주국
을 가리킨다) 봉천성도서관 부관장을 맡았다.
그는 일본 침략자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정사를 따지지 않고 동북지방사료의 수집정리와 연구에 몰두,
선후하여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 21권, 《문연각사고전서원본제요(文淵閣四庫全書原本提要)》
32책, 《봉천성지(奉天省志)》 100책을 편집·출판하였다.
그뒤에 일본으로부터 도피해 남경으로 되돌아 온 회오(會晤) 채원배(蔡元培)를 만나 그의 소개로 중앙
대학(中央大學)에서 교편을 잡았다.
출판한 것으로 《동북문헌습령(東北文獻拾零)》·《요해서징(遼海書徵)》 등 서가 있고 항일전쟁이
승리한 뒤에 동북대학교(東北大學校) 사학과 교수를 역임하면서 동북도서관東北圖書館) 소장 청실
내각대고(內閣大庫)의 명청당안(明淸당案)을 정리하여 《명청내각대사료(明淸內閣史料)》를 집성
하였다. 해방 후에 《태평천국사료(太平天國史料)》를 출판하였고 대영박물관 도서관 및 캠브리대학
도서관 소장 태평천국(太平天國) 진귀자료를 수집한 것이 있는데 중요한 가치가 있다.
논문과 저작이 여러 종류이다. 대표작으로 《중국사학사(中國史學史)》 등이 있다.
고대에 동북의 4개 주요 민족계로서, 숙신계(肅愼系)의 활동중심지구는 흑룡강 하류·장백산 이북의
광대지구에 있었고, 예맥족계(穢貊族系)는 주로 장백산(長白山) 이서와 길림성 동부·요동 산악지구에
있었으며, 동호계(東胡系)는 흑룡강 중·하류와 길림 서부·몽고·요서의 광대한 지구에 있었으며,
한족(漢族)은 주로 요남(遼南)·요서(遼西)·요동(遼東)과 길림 및 흑룡강 중부지구에 있었다.
이는 바로 고대 동북의 4개 주요 민족활동지구의 분포상황이다.
위에서 서술한 바를 종합하면, 필자는 주대 이전에 숙신계 민족은 요동(遼東)으로 진입한 바 없으며,
더욱이 신빈(新賓)으로 들어온 적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만족(滿族)(여진)이 신빈(新賓)으로 진입하거나 요동(遼東)으로 진입한 것도 기껏해야 원말명초(元末
明初)일 수밖에 없으며, 그보다 더 빠를 수는 없다.
그리고 발해인이 신빈(新賓)으로 들어간 것은 잠시 아직껏 사책에서 찾아 보지 못했다. <끝>
(九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