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수 교수의 이슬람 (9.11테러 10년과 달라진 이슬람 세계)
프롤로그
그들은 국제법의 보호조차 받지 못한 채 끝없는 고통속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견대다 못한 일부 과격 세력들은 무모한 폭력적 저항과 처절한 복수를 시도했다.
알 카에다의 9.11테러도 그 같은 현상이다.
무고한 시민들을 상대로 한 그들의 반인륜적 테러 행위는 이미 이슬람 법정에서도 범죄로 단죄되었다.
건강한 무슬림 주류 사회의 공감이나 대중적지지 기반도 상실했다. 그것은 명백한 반이슬람적 범죄 행위이다.
이제는 찬찬히 심호흡을 하면서 이성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실체에 근거하여 이슬람 문제와 이슬람 세계를 들여다
보아야 한다.
이슬람 세계는 15억 57개국, 지구촌 4분의 1에 육박하는 세계 최대 단일 문화권이다.
인류문명의 발상지이자 세게 3대 유일신의 종교가 태어나 인류의 영성 세계를 밝혀준 본향이다.
나아가 지금 이슬람 세계는 에너지 자원과 자본을 갖고 우리의 주요한 협력 파트너이자 미래에도 상호 의존적인 윈윈
전략을 공유해야 하는 입장에 있다.
언제까지 서구가 만들어 놓은 오류와 고정관념, 광신의 도그마에 갇혀 그들을 버리고 가야 하는가?
그 동안 이술람권 현장에서 무슬림들과 일상으로 부닥치면서 1차적 체험을 통해 보고 공부한 진정한 모습과 귀국해서
목도한 미국이나 서구가 자신들의 국익 극대화를 위해 만들어 놓은 정보와 이미지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는 것
을 깨달았다.
이제는 찬미-반미라는 이데올로기 논쟁의 차원을 뛰어넘어 정말 우리가 세상의 중심이 되어, 우리가 인식의 주체가 되
어 관면적이고 명분적인 국익이 아닌 냉철한 실체와 실용적인 측면을 고려하면서 세계 문화를 있는 그대로 들여다볼
수는 없을까?
이러한 인식의 전환이나 성찰없는 21세기 우리의 글로벌 전략이라는 것은 어쩌면 한 축이 무너진 허구는 아닐까?
이슬람 세계를 들여다보는 관점은 문화상대주의에 입각해 총체적으로 접근하겠지만, 인류의 보편적 가치라는 기본
적인 틀을 존중할 것이다.
아울러 국제법, 유네스코헌장, 국제사법제판소 최종 판결, 헬싱키 세계인권선언, 유엔 안보리 결의안, 상호 합의된
평화 협정등 ‘인류가 이것만은 지키자고 약속한 규범’으로 문제를 이해하고자 한다.
이 책은 아직 미완이며 다른 시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다문화-다종교 공존의 시대에 이슬람을 종교적 선악 구도가
아닌 우리와 이웃해서 협력하고 공존해야 할 문화적 파트너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를 고대한다.
문화는 선악이나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같고 다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1장 아랍 민주화 시위와 미국과 중동의 변화
아랍은 1920년대만 해도 하나의 문화 공동체였다.
아랍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이슬람교를 주된 종교로 믿으며, 스스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아랍’이라고 주창하는 사람
들의 집합개념이다.
아랍은 종족적 공동체라기보다는 문화적 개념에 가깝다.
이런 공동체 개념의 아랍은 제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서구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리 찢기고 저리 쪼개지면
서 22개의 개별 국가로 다시 태어났다.
아무리 아랍 민주화가 급물살을 탄다고 해도 성공 여부에 있어 가장 중요한 변수는 의심의 여지없이 미국의 태도와
중동 정책의 변화 여부다.
‘이스라엘 안보 보장’과 ‘석유 이익의 안정적 확보,’ ‘효율적인 이란 견제’라는 세 가지 중동 정책의 기본 축을 바꾸지
않는 한 중동의 민주화는 결실을 맺기 어렵다.
2장 9.11테러 10년
많은 무슬림들은 미국을 지구상에서 가장 정치적으로 침략적이고, 경제적으로 지배적이고, 문화적으로 타락하여
퇴폐한 문화를 가진 국가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다.
가공할 신무기를 앞세워 약소국을 제멋대로 유린하고, 자신들의 과소비와 풍요를 위해 귀중한 제3세계의 자원을 헐
값으로 약탈하는 지구상에서 가장 반문명적인 제국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슬림들의 미국에 대한 이러한 반감은 사실상 그 역사적 뿌리가 그리 길지 않다.
중동 지역 대부분은 18세기 제국주의 시대 유럽 강대국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그들의 가혹안 통치를 맛보았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를 당했음에도 그 이후 이 지역에 진출한 미국에 대한 반감이 영국과 프랑스보다 큰 것은
바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얽힌 문제에 미국이 개입하면서 부터이다.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주도하여 1947년 11월 29일 유엔총회에서 분할된 유대 국가 창설을 통과시키고, 1948년 5월
14일 아랍 영토에 이스라엘을 건국시킨 원죄에서 출발한다.
지금까지 미국은 팔레스타인 평화 협상에서 한 번도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국가로서 버림받은 약자의 편을 들어준
적이 없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도 용인될 수 없는 노골적인 이스라엘 편애에 많은 무슬림이 인내를 상실했다.
국제법을 위반하고 아랍을 겨냥한 200기 이상의 핵탄두를 갖고 있음에도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은커녕 NPT에도 가
입하고 있지 않은 이스라엘을 미국은 무조건 감싸고 예외로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이슬람권에서는 그 누구도 산업용 핵 프로그램조차 갖지 못하게 하는 미국의 극단적 이중잣대(double
standard)가 이슬람 세계의 좌절과 분노를 확산시키고 있는 것이다.
터키총리 레젭 에르도안의 최근 성명 자료를 보면 이는 더욱 명확해 진다.
유엔이 설립된 이후 이슬라엘의 국제법 위반에 대한 89차례의 유엔 안보리 제재 결의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결행된 것이 없었다.
상대방인 아랍 국가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손쉽게 제재를 가하면서도 .......... 만약 유엔 안보리 결의안이 제대로 지켜
지기만 했어도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은 오래전에 해결되었을 것이다. <TIME지 2011년 10월 10일 64쪽>
석유가 개발되기 시작한 1990년대 초부터 오일 쇼크가 발발하는 1970년대 초까지 석유 시장의 국제 유가는 배럴당 2
달러 수준이었다. 석유 1배럴이 약159리터 이므로 1리터에 15원 정도였다.
그것도 70년간이나 지금 휘발유의 최종소비자 가격이 1리터에 2천원 정도임을 고려한다면, 당시 유통구조의 왜곡과
서구 석유 회사들의 자원 착취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생산 원가나 개발비가 턱없이 낮은 중동 석유를 거의 헐값으로 가져다가 오늘날 서구는 선진공업국으로 발돋음했다.
이슬람 역사를 살펴보면 무슬림들이 서구의 식민 통치에 순응할 수 없는 이유를 찾을수 있다.
적어도 중세 천 년을 압도적인 우위로 유럽을 지배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무슬림들은 야만 상태에 있던 그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면서 문명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 문화 교사 역할을 했는데,
이제 치욕적인 지배를 받으며 오히려 무지와 미개의 대상으로 취급받고 있다.
이처럼 자신들의 뒤바뀐 입장을 일부 무슬림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9.11테러 이후 이제 미국은 아프간을 공격해 그 앙갚음을 하고, 이라크를 희생양으로 삼아 점령해 주둔하고 있다.
테러의 진정한 배경인 역사성은 덮이고 ‘오늘 이 시점 인류 질서를 어지럽히는 반문명적 범죄 집단의 응징으로 테러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미국은 현실 중심적인 수평적 사고가 강하고, 배경과 심층적 원인이 되는 역사성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혹은 무지
하다.
그런데 무슬림들은 억눌린 근대 100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과거 고통의 역사를 잊지 못한다는 것이 그들이 처한 또 다른 고통인지도 모른다.
지금 미국인들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테러, 그것만을 생각하며 복수를 다짐한다.
응징의 대상이 자신들이 받았던 것과 똑같은 고통을 느낄 민간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용서 못할 테러 주범을 제거하고 지구촌에 민간인을 향한 테러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며, 약간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위험한 생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인론은 또 그렇게 선동적으로 대중을 몰고간다. 테러는 또다른 테러를 낳고. 그 희생자들이 무고한 시민이라는 지성인
들의 목소리는 위력을 잃고 만다. ‘왜’라는 성찰 없는 복수의 테러가 가져올 과정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한다.
8년에 걸친 이란-이라크 전쟁이 알려진 바와 같이 미국산 재래식 무기의 재고 처분 잔치였다면,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첨단 무기 시장의 개척이었다.
아프카니스탄은 카스피해 원유를 인도양으로 연결하는 핵심 루트일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이란, 파키스탄과 인도를
사이에 둔 전략적 요충지로서 미국의 세계 전략에 꼭 필요한 나라였다.
1989년 소련군을 몰아낸 직후부터 시작된 오랜 내전 끝에 1997년 아프카니스탄의 정권을 잡은 세력은 탈레반이다.
이슬람 신학교 마드리사 출신들로 ‘이슬람을 배우는 학생들’이란 의미의 탈레반은 주로 파슈툰족으로 구성되어 있으
며, 급격한 이슬람 정통주의를 고수하여 패쇄적인 국정운영으로 이슬람권에서 조차 비판받는 광신적 정권으로 자리
를 잡았다.
탈레반은 본질적으로 자생적 풀뿌리 민중 조직이다.
따라서 탈레반을 궤멸시킨다는 것은 다른 말로 아프카니스탄 국민 대다수를 없애겠다는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이 미국이 아프카니스탄 전쟁에서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이유였다.
따라서 주민과 탈레반을 분리하는 전략이 성공할 수 없다면 애초부터 그 전쟁의 승리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1989년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침공을 퇴치하기 위해 전폭적으로 협력하고 지원했던 한때의 동반자 알 카에다를 주적
으로 맞아야 하는 상황도 미국으로서는 커다란 부담이었다.
미국 행정부-사우디 왕정-알카에다 라는 삼각 협력 커넥션은 알 카에다를 최전선에 내세워 10년간 끈질긴 저항 끝에
소련군을 몰아내는 쾌거를 달성했다.
시리아는 느긋하게 지켜보면서 시위의 향방에 따라 취할 방향이 정해지겠지만, 이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지막 골칫거리이다.
이란은 우선 세계 제2의 원유 보유국이자 1, 2위를 다투는 천연가스 매장국이며, 풍부한 우라늄광과 지하자원을 가
지고 있다. 또한 중동 최대의 농산부국이며, 양대 유전 지대인 걸프해와 카스피해를 모두 끼고 있는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페르시아 대제국의 후예로 찬란한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인구 8천만에 육박하는 수준 높은 인적 자원에 이르
기까지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강소국이다. 이란에 대한 압박과 제재가 가중된다면 그 틈새를 중국이나 러시아가 차지
할 것이고, 중동 최대 시장이며 제3의 중동 붐이 일어날 가장 잠재성이 큰 나라를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장의 선심성 경제 지원보다는 존중받기를 원한다. 하나의 인간이자 무슬림으로서 그들의 삶의 방식과 종교
적 가치를 존중해 주기를 갈망한다.
일단은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잘못된 가치를 버리고 다른 방식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인식을 통해
변화하도록 기다려야 한다.
3장 잊힌 이슬람 역사와 문명의 복원
유럽 인들이 ‘빛은 오리엔트에서’라는 말을 사용하고, 현재 터키 반도를 일컫는 그리스 어 아나톨리아, 라틴 어 오리
엔트, 이탈리아 어 레반트라는 용어들이 모두 ‘해가 뜨는 곳’이라는 동방을 지칭한다.
그럼에도 유럽 문명의 큰 스승이었던 오리엔트의 문화적 실체와 영향을 받아들이는 데는 매우 인색했다.
이제 세계의 역사는 19세기 말 유럽 중심의 인종주의적 편견에서 굳어진 역사 인식과 사관에서 벗어나 서양 문명과
이집트, 서양 문명과 오리엔트 문명과의 관계를 복원하는 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동양을 정복한 서양 인물 알렉산드로스의 침략과 잔혹한 약탈에 열광하고 문명의 위대한 전도사로 그를 추켜세웠지
만, 알렉산드로스의 등장으로 반짝하고 그의 죽음으로 사라진 마케도니아에 비해 문명의 깊이나 역사가 훨씬 심대
하고 광범위했던 페르시아 제국의 실체는 상대적으로 소외된 것이다.
서양이 공격하면 정복이나 위대한 승리지만 , 동양이 공격하면 찬탈이고 파괴가 되어야하는 우리 세계사 교과서의
서술적인 문제도 역사 왜곡에 큰 몫을 하고 있다.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가 죽고 난 후 그의 지배 영역들은 바로 쪼개지면서 악화되었다.
곧 중동일대는 로마를 이어받은 동로마 제국의 비잔틴과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의 격돌장으로 바뀌었다.
두 제국이 벌인 300년간에 걸친 소모 전쟁으로 중동 일대는 경제적 파탄과 세기말적 혼란상이 더욱 가속화 되었다.
이런 시대적 절망감에서 7세기초 이슬람이란 새로운 종교 사상이 등장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전혀 우연이 아니다.
무함마드는 서아시아의 정통적이고 오랜 사상적 기반을 가진 유일신 사상을 다시 한 번 설파하면서, 혼란한 당시
사회를 정신적으로 통합하는데 성공했다.
토착종교와 기존 구조에 대한 포용 정책과 더불어 역동적인 유목 군사시스템을 통해 정복사업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슬람 군대는 합리적인 조세제도와 토착 주민들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인정함으로써 전쟁다운 전쟁을 치르지 않고
도 주변지역을 쉽게 복속할 수 있었다.
이슬람 제국의 시대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출발하여 북아프리카 모로코와 스페인 남부,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인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이슬람 종교와 문화유산을 남겼고, 1천년의 대제국 시대를 거치면서 인류 문명의 성
숙에 크게 공헌했다.
중세 유럽이 암흑의 시기에 잠들고 있을 때 그리스-로마의 지적 유산을 번역하고 재해석하여 유럽에 전해 주었으며,
이를 토대로 유럽의 르네상스가 일어나는 결정적인 모티브를 제공하였다.
1천 년의 이슬람 제국 시대 모두가 아랍 인 중심은 아니었다.
1258년 몽골에 의해 압바스 제국이 멸망한 이후, 이슬람 세계의 주도권은 튀르크인 중심의 오스만 제국으로 이동했다.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세계의 정교 일치적 통치권인 칼리파권을 행사했고, 1924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이후 오
스만 왕정이 무너지고 터키 공화국으로 독립하면서 이슬람 세계의 명목상 통합마저 깨졌다.
오스만 제국의 멸망과 와해는 그 치하에 있던 여러 소수 민족들이 독립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었다.
하지만 곧바로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 열강들이 중동 일대를 식민 통치함으로써 오늘날 중동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과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기원전 8000년경, 예리고와 차탈휘육으로 대표되는 인류 최초의 도시가 형성된 곳은 바로 중동과 나일강 유역을
포함하는 오리엔트 지역이었다.
기원전 3000년경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유역의 범람에 대비한 대규모 치수사업을 통해 도시 국가를 형성하고
최초의 문명 생활을 시작한 민족은 수메르 인이었다.
수메르 인들은 쐐기문자를 만들어 점토판에 그들의 삶을 기록하여 보존하였으며, 보리빵에 맥주를 즐겨 마시기도
했다.
수메르 인들에 의해 시작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야말로 이후 전개되는 중동 5천 년 역사의 굳건한 모태가 되었다.
중동의 가져다준 가장 훌륭한 문화유산은 의심의 여지없이 유일신 사상의 확립일 것이다.
유대교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그리고 후일 이슬람교가 모두 중동의 토양에 굳건한 뿌리를 내리면서
세계적인 일신교로 발전하였다.
바빌로니아 왕국은 기원전 18세기경 함부라비 왕 때 전성기를 이루어 유명한 성문법전을 남겨놓았다.
기원전 16세기 후반에는 철기 문화를 일으킨 히타이트가 등장하여 바빌로니아을 멸하고 세력을 떨쳤다.
예루살렘을 수도로한 헤브라이 왕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정착한 유목민인 헤브라이인들에 의해 성립되었다.
헤브라이인들은 기원전 1500년경 팔레스타인의 가나안에 정착했다가 심각한 기근으로 이집트로 이주하였다.
파라오의 압제를 피해 모세의 인도로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온 후, 기원전 11세기 말에 헤브라이 왕국을 세웠다.
다비드와 솔로몬 왕때 전성기를 누린 헤브라이 왕국은 곧 이스라엘과 유대 두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이스라엘은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 제국에게 멸망당했고, 유대왕국은 기원전 6세기 신바빌로니아 왕국에게 정복되
었다.
유대교를 성립시켰던 헤브라이인들의 유일신 사상은 후일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성립과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서양 문화의 바탕이 되었다. 헤브라이 인들의 민족사는 구약성경에 잘 나타나 있다.
아시리아 제국의 멸망으로 오리엔트는 다시 메디아,리디아,이집트,신바빌로니아의 네 나라로 분열되었다.
그중 칼데아라고도 불리는 신바빌로니아 왕국(기원전 612-538)이 가장 번영하였는데
그 중심지인 바빌론은 세계의 수도로 불릴만큼 크게 번창하였다.
이 왕국은 네브카드네자르왕 때 전성기를 맞았는데,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시리아를 확보한 후 기원전 586년에는 유
대 왕국의 예루살렘을 정복하였다.
이때 많은 유대인들이 전쟁포로로 바빌론으로 끌려간 것을 바빌론 유수라 한다.
이 사건은 유대 문화에 오리엔트의 다양한 문화적 유산이 이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예측할 수 없는 홍수로 인한 경작의 불확실성, 개방적인 지리적 입지로 인한 피할 수 없는 이민족의 위협은 메소포
타미아 인들의 생활과 인식 세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는 정기적인 나일강의 범람으로 풍요를 보장해 주던 예측 가능한 경체 체제와는 판이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이집트 인들은 내세를 평온한 현세의 연장으로 보고 영혼 불멸과 부활의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영혼 불멸과 부활 사상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신앙에 전해져 후일 기독교의 부활 신앙으로 승화되었다.
반면 현세적이고 숙명론적이었던 메소포타인들은 악마 신앙과 점성술에 몰입하였다.
악마에 대한 믿음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 선신 아후라 마즈다에 대항해 싸우는 악신 아흐리만이라는 사상으
로 전승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원론적인 사고는 기독교 신학의 발달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집트를 정복하고 분열된 중동을 재통일한 세력은 기원전 6세기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이었다.
페르시아 제국은 오리엔트를 넘어 지중해로 진출하면서 소아시아의 그리스 식민지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다.
이는 필연적으로 그리스와의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흔히 페르시아 전쟁으로 알려진 이 격돌에서 페르시아가 패퇴하였고, 그 결과 기원전 338년경 그리스 도시국가를 통
일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왕에 의해 페르시아 제국은 기원전 331년 종말을 맞았다.
알렉산드로스가 아시아 서쪽을 지배하면서 그리스-로마 문화가 소개되었고, 이슬람이 등장하는 7세기 초까지 거의
1천 년간 동서 문화의 교류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헬레니즘이라 불리는 새로운 문화 현상은 그리스 문화의 일방적 전파라기 보다는 오리엔트의 오랜 문화적 토양에
그리스적인 요소가 첨가되어 독특하게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다.
7세기 초 비잔틴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의 오랜 전쟁으로 마비된 육해상 실크로드를 대신한 우회루트가 아라비아 사
막을 가로지르는 대상로였다.
메카와 메디나는 바로 그 중심 도시였다. 이 시기에 이슬람교를 완성한 무함마드가 등장하였다.
오랜 명상 끝에 그의 나이 40세 되던 610년 드디어 하느님(알라)으로부터 첫 계시를 받아 우상숭배타파, 평등과 평화
를 강조하는 범세계적인 이슬람 종교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무함마드의 이슬람이 처음부터 주변의 호응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유일신 사상은 당시 우상 숭배자들인 메카 상류층의 종교적 권위와 상업적 질서를 위협하였기 때문에 메카에서
극심한 배척을 당했다.
그래서 622년 무함마드와 그 추종자들은 메디나로 이주하여 새로운 이슬람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것을 헤지라라 하여 이슬람력의 원년으로 삼고 있다.
메디나에서 굳건한 이슬람 공동체를 형성한 무함마드는 세 차례에 걸친 전투 끝에 630년 메카를 무혈 재정복함으로
써 획기적인 교세 확장에 성공하였다.
이슬람 공동체는 632년 무함마드가 타계함으로써 후계자 선출 문제에 부닥쳤다.
그러나 슈라라 불리는 부족 합의제 방식으로 후계자인 칼리파를 뽑아 이슬람식 민주주의의 전형을 마련하였다.
칼리파는 정치와 조교를 동시에 관장하는 이슬람 공동체의 최고 통치자였다.
아부 바르크, 우마르, 오스만, 알리에 이르는 네 명의 칼리파가 통치하는 시기를 이슬람의 가르침에 충실한 정통 칼
리파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부터 적극적인 대외 정복이 이루어졌다.
비잔틴 치하의 시리아를 정복하고, 사산조 페르시아가 멸망하였다.
불과 10년 정도의 짧은 기간에 이집트에서 페르시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것은 거의 기적이었다.
이슬람의 급속한 세력 팽창을 두고 서구 학자들은 흔히 한손에는 칼, 한손에 꾸란‘ 이란 표현을 사용하지만, 당시 비
잔틴 및 페르시아의 수탈과 착취에 시달리던 시대적 상황이 이슬람의 진출을 오히려 환영하였고, 이슬람 정복 과정
에서 강제 개종은 실제로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급격한 정복사업으로 영토가 강대해지면서 부족 간의 이견과 이해관계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특히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 리가 칼리파가 되자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가 알리에 도전하였다.
이러한 갈등의 와중에 알 리가 암살당하자 이슬람 제국은 다시 무아위야에 의해 우마이야 왕조로 통일되었다.
그러자 알리의 추종 세력들이 이탈하여 시아파라는 이슬람의 새로운 이념아래 결집하였다.
우마이야 왕조(661-750)는 세습적인 군주제를 채택하였다.
먼저 수도를 메디나에서 비잔틴 제국의 동부 수도였던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로 옮겼다.
그리고 정복전쟁을 본격화 하여 파미르 고원을 경계로 중국 당나라와 접경하고, 서쪽으로는 비잔틴 제국을 공격하여
두 차례나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기도 했다.
한편 711년에는 북아프리카를 거쳐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스페인의 이베리아 반도에 도착했다.
이로써 스페인은 15세기 말까지 800년간 이슬람 국가로 유럽에 이슬람 문화를 전파하는 창구 역할을 하였다.
정복지가 증대되고 개종자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신분 계층이 더욱 심화되었다.
마왈리라 불리는 개종자들은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아랍인에 비해 열등한 대우를 받았다. 마왈리들의 불만은 곧 바
그다드에 근거지를 둔 시아파 세력들과 결탁하여 우마이야 왕조를 위협했다.
여기에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남부 아랍인들까지 가세하였여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하고, 아불 압바스에 의해 압바스
왕조가 새로운 이슬람의 옷을 걸치고 등장하였다.
정복사업을 단시일 내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아라비아 일대의 상업과 목축업이 침체되어 늘어나는 이슬람
공동체의 생존에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주지와 비옥한 경작지의 획득, 공납지의 확대, 안정된 교역로의 확보 등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또한 비잔틴과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의 끊임없는 교전으로 경제가 피폐해졌고 양국의 강압적인 통제 정책과 과중한
조세 수탈은 민심의 이반을 가져왔다.
이에 반하여 이슬람교는 새 정복지에서 살육과 직접통치 보다는 공납과 간접통치를 선호하였는데, 이 정책은 정복
주민의 환영을 받았고 이로써 무혈의 정복사업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사산왕조페르시아 [ Sassanian Persia, Sassanid Empire, Sassanian Dynasty, ─王朝─ ]
페르시아란 이름은 이란 남서부의 ‘파르스’라는 땅 이름에서 유래했다.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중세 페르시아 왕조의 하나로, A.D. 226년에 아르다시르 1세(Ardashir I, 226-241 재위)가 파
르티아(Parthia) 왕국을 점령한 뒤 건설하였다. 사산왕조는 A.D. 651년에 아랍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였다.
사산왕조 페르시아를 세운 아르다시르 1세는 오늘날 이란 남서부 파르스(Fars) 지방에 있던 이스타크르(Istakh, 고
대의 페르세폴리스)의 조로아스터교 제사장인 사산(Sāsān)의 손자이자, 이 파르스 지방의 실권자였던 파파크(Pap
ag 혹은 Papak)의 아들이다.
왕조의 명칭은 아르다시르 1세의 조부(祖父)의 이름인 사산(Sāsān)에서 유래한다.
이 왕조는 고대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를 계승하고, 그 중세적 재흥(再興)을 나타낸다는 의미에서 사산왕
조 페르시아로 불렸다.
조로아스터교의 이념을 기반으로 하는 신정국가(神政國家)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이슬람 제국의 정복으로 멸망하
기 이전까지 고도로 발달된 페르시아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제국의 영토는 오늘날의 이란을 중심으로 하여, 이라크, 아르메니아, 코카서스,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북부,
터키 동부에 이르렀으며, 호스로 2세(Khosrau II, 590-628 재위)의 치세기에는 팔레스타인, 이집트 지역도 제국의
세력권 안에 있었다.
또 다른 이슬람 문화의 전파이유는 특유의 융화력이라 할 수 있다.
아랍 인은 정복을 통하여 역사상 최초로 오늘날의 인도와 중국의 경제지역, 그리스, 이탈리아 및 프랑스의 변경 지역
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통합하였다.
이 방대한 지역을 한동안은 군사적, 정치적 권력을 통해, 그 후 훨씬 오랜 기간 동안은 아랍 어와 이슬람 종교를 통하
여 한 덩어리로 묶어 놓았다.
이와 같이 이슬람 세계는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전파되어 공간적으로 주변 문화를 수렴하고 역사적으로는
고대 문화를 재생시켜 이슬람 문화라는 종합 문화를 창출하였다.
이처럼 이슬람 사회에서 다양성이 수용된 이유는 중세 기독교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상재적인 관용성 때문이며,
이 관용성이야말로 이슬람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이다.
무슬림들은 이교도의 종교를 인정하고 그들의 종교생활을 보장하였다.
전쟁에서 패하면 남자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여자들은 노예로 팔려 가던 시절에 이러한 조치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
었다.
이와 같이 무슬림들은 비무슬림들에게 종교적.경제적.지적 활동의 자유를 부여하여 그들이 이슬람 문명 창조에 눈
부신 공헌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압바스 왕조(750-1258)의 등장 배경은 단순한 군사적 음모나 쿠데타가 아니라 강력한 하부 조직과 선전에 의한 아
래로부터의 혁명이었다.
왕조의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기고, 압바스 지배층은 인종과 민족을 초월한 범이슬람 제국을 지향했다.
이리하여 후대 역사가들은 압바스 왕조를 진정한 ‘이슬람 제국’이라 부른다.
이 왕조에서는 여러 민족과 문화가 골고루 융합된, 보다 폭넓은 이슬람 문화가 발전하여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아랍인의 개념도 인종적 의미에서 아랍어를 사용하고 이슬람을 믿으며, 스스로 아랍인으로 자칭하는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문화적개념으로 바뀌었다.
이런 문화적 아랍화의 물결은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를 비롯한 북아프리카 전역으로 번져 오늘날의 아랍권이 형성
되는 계기가 되었다.
압바스 왕조는 5대 칼리파 하룬 알-라시드(786-809)와 그의 아들 마문(813-832)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때 바그다드는 당나라의 장안과 함께 세계 교역과 문화의 중심지로 번성하였고, 활발한 육.해상 실크로드의 개척
으로 동서 문물이 물밀 듯이 유입되었다. 특히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제지술이 종이 혁명을 불러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이 번역, 재해석되고, 학문이 꽃을 피워 이슬람의 르네상스를 맞이하였다.
제지술의 도입은 754년 압바스 군대의 이븐 살리히 장군과 당나라의 고선지 장군이 벌리 탈라스 전투의 결과이다.
이 전투에서 중국군이 이슬람군에 패했고, 포로로 잡힌 중국 제지 기술자에 의해 종이가 이슬람 세계 전역으로 확산
되었다. 더욱이 이 시기에 저술된 많은 아랍 사료에서 신라에 대한 귀중한 기록을 발견할 수 있어, 우리나라와 아랍
세계와의 긴밀한 교류와 역사적 접촉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제국 영토가 방대해지면서 압바스 왕조는 중앙 정부의 내분과 지방 총독들의 할거, 이민족의 잦은 침입 등으
로 9세기 중엽부터 급격히 쇠약해 졌다.
우마이야 왕조가 망한뒤 그 일파가 스페인에 후우마이야조를 세우고 통치자가 되어 969년 스스로 칼리파로 자칭하
며 바그다드에 맞섰다. 이집트에서는 시아파에 의한 새로운 이슬람 국가가 독립하여 파티마조를 열었다.
압바스 시기에 세 대륙에 걸쳐 형성된 이슬람 제국은 아랍의 전통 문화를 기반으로 오리엔트,그리스, 로마, 이란 및
인도 문화를 흡수하여 독창적인 이슬람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슬람 문화의 특징은 이처럼 광대한 정복지의 문화를 파괴하지 않고 받아들여 국제적이고 종합적인 문화를 이루었
다는 점이다.
일찍이 서구인들은 무슬림에 의한 정복 사업을 소위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슬람의 호
전성과 종교의 강압적 전파를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서구 사람들이 가진 이교도에 대한 적개심과 확산되는 이슬람 세력에 대한 위기감에서 만들어낸 용어에
지나지 않는다.
이슬람을 전파하는 것은 무슬림의 종교적인 의무이다.
하지만 ‘무력에 의한 이슬람 전파’에 대한 어떠한 흔적도 꾸란에서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꾸란에서는 분명한 단어로 상반되는 원칙을 주장한다. 즉 “종교에는 어떠한 강요도 있을 수 없다‘라는 것이다.
이슬람 정부는 세금 감면을 노리는 대량 개종을 막기 위해 오히려 개종 금지 백서를 발효했다.
국가 수입의 증대를 위해 피정복민의 개종보다 공납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보면, 무력에 의한 이슬람 전파는 근거가 희박하다.
십자군 전쟁이후 유럽 전역을 휩쓰는 이슬람 열풍을 막고 기독교 세계를 지키기 위해 당대 최고의 기독교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만들어 놓은 적의감이 가득찬 정치적 수사에 불과한 용어다.
역사를 살펴봐도, 이스람 세력이 진출했던 지역은 그들이 물러난 후에도 원래의 토착 종교로 돌아가거나 다른 종교로
개종하지 않았음은 물론, 오늘날까지도 이슬람 문화권으로 남아 있다.
만일 무력에 의한 종교전파가 있었다면 이슬람 세력이 후퇴한 후에 그 지역 주민들은 즉시 이스람교를 벌렸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슬람이 더 번성하여 그후 많은 이슬람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만이 이 지역들에서 배출된 학자들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이슬람 신학이나 철학, 사상등의 이슬람 학문은 발전하지 못
했을 것이다.
중세 이슬람사회에서 자신의 고유한 문화정체성을 유지하도록 허용된 이교도를 ‘딤미’ 혹은 ‘아흘 알-딤마(계약의
백성)’라 불렀다.
딤미는 무슬림 국가에 의해 허용되고 보호받는 비무슬림 시민들을 일컫는 법률적 용어였다.
실제로 그들은 기독교인, 유대인, 동부 지역의 조로아스터교인들을 의미했다.
딤미의 지위는 무슬림 통치자와 비무슬림 공동체간의 계약에 의해 결정되었다.
계약의 기본 골격은 딤미가 이슬람의 우위와 이슬람 국가의 지배를 인정하고, 나아가 일정한 사회적 계약이나 지즈야
라고 불리는 인두세 납부를 통해 딤미의 종속적 지위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물론 무슬림들에게 인두세 납부는 면제되었다.
인두세에 대한 대가로 딤미는 생명과 재산의 안전, 외적의 침입시 보호, 신앙의 자유, 자신들의 문제에서 광범위한 내
적 자치등을 보장받았다.
대신 무슬림들은 40분의 1에 해당되는 종교세인 자카트를 의무적으로 납부해야 했다.
오는날 스페인 땅은 711년부터 1492년까지 거의 800년 가까이 이슬람 세계에 속하면서 중세 최고 수준의 학문, 과학,
예술, 문화 등의 결실을 유럽에 전해주는 지적 창구 역할을 했다.
10세기경 이슬람 제국의 수도였던 코르도바는 50만명 규모의 국제도시 였으며, 1600개의 모스크가 있었고, 8만개의
상점에서 1만3천명 정도의 직공이 일하는 대도시로 발전했다.
중세 ‘아랍의 르네상스’는 유럽보다 500년이나 앞섰다.
이슬람 세계의 학문적 성취는 스페인 톨레도에 설치된 번역소에서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에 전해짐으로써 유럽의
르네상스가 일어나는 지적 원동력이 되었다.
이처럼 이슬람 역사 초기부터 이슬람 세력이 서구와 직접 접촉하는 전성이 형성되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서아시아, 아프리카, 남유럽의 세 대륙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래서 14세기 아랍 역사학자 이븐 할둔은 “지중해는 유럽인들이 배 한척 띄울수 없는 이슬람의 바다가 되었다.”라고
호언할 정도였다.
후일 스페인 다중 회랑과 말굽 모양의 대리석 기둥들로 이루어진 코르도바의 모스크들은 절제를 강조하는 고딕 정신
과 자유로운 예배공간을 존중한 이슬람 정신이 어우러진 상징적인 문화 합작품이었다.
안달루시아의 기념비적인 건축물인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도 문화의 섞임과 조화가 만들어낸 걸작품이다.
그러나 16세기부터 과거의 화려한 문화가 철저히 부정되고 말살당하면서 안달루시아는 편협과 독선의 무대로 바뀌
었다.
1491년 페르난도 5세는 기독교 성직자들의 강한 요구에 따라 안달루시아의 중심국가인 그라나다 침공에 나섰고, 7개
월간의 포위에 들어갔다.
당시 그라나다의 마지막 무슬림 왕인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빈 알리는 무슬림들의 종교와 문화 및 언어를 그대로 유
지해 준다는 보장을 받고 항복을 선택했다. 페르난도 5세는 기꺼이 그 제의를 수락하였고, 그라나다를 무혈 인수하
였다.
그러나 페르난도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보아브딜은 모든 재산과 특권을 뺏긴 채 추종자들을 이끌고 안달루시아를 떠났으며, 1499년부터 안달루시아 문화 말
살과 그라나다의 무슬림들에 대한 가혹한 인종 청소가 뒤따랐다.
모스크를 비롯한 이슬람적인 것은 모두 사용 중단되거나 철폐되었고, 어떤 형태의 불만도 용납되지 않았다.
줄잡아 300만 명의 무슬림과 30만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강제로 추방되었다.
안달루시아 문화가 그토록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민족들이 상호 교류를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민족, 사상,
언어등을 접하고, 상호 배타적 적대관계 보다는 이질적인 종교와 이데올로기를 뛰어 넘는 상보적인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안달루시아는 이슬람 세계와 막 태동한 유럽 세계를 잇는 문화의 교량으로써 유럽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한 축을 담당했다.
그 후 기독교 안달루시아가 카톨릭이외의 모든 종교를 배척하자 문화 다양성의 용광로는 더 이상 가동되지 않았으니
이는 17세기 이후 스페인이 문화가 정체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분열되었던 이슬람 세계는 11세기 투그릴 베이가 이끄는 셀주크 터키조에 의해 재통일되었다.
그들은 1055년 바드다드에 입성하여 압바스 왕조의 칼리파로부터 술탄의 칭호를 받았다.
셀주크 터키는 3대 술탄 말리크 샤(1072-7092)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들은 시리아, 팔레스타인, 소아시아를 포함하여 동쪽은 천산산맥, 서쪽은 지중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형성하였다.
특히 뛰어난 수상 니잠 알-물크의 뛰어난 개혁 정책들은 셀주크조의 기반을 다지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071년 셀주크가 비잔틴군을 격퇴하고 아나톨리아와 소아시아 지역에 진출함으로써 이 지역이 이슬람화되는 기틀
을 마련하였다.셀주크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비잔틴 제국에 대한 압박은 십자군 전쟁을 유발하는 빌미가 되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 세력과의 격돌이라기 보다는 기독교 내부의 이권다툼과 물자약탈이 주가 되었다.
셀주크조는 1157년 술탄 산자르의 사후 여러 공국으로 분할되었다가 몽골의 침략으로 종말을 고했다.
나아가 칭키즈 칸의 손자이자 몽골 제국의 대칸인 몽케의 동생 훌라구가 사마르칸트 총독으로 부임한 후, 1258년 2
월 대규모 군대로 바그다드를 함락시켰다.
이로써 500년 역사의 압바스 제국이 멸망하였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아랍이 주도하던 이슬람 시대의 실질적이고 공식적인 종말을 의미한다.
이제 이슬람 세계는 오스만 제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튀르크 시대를 맞았다.
셀주크 조 [ Seljuq 朝 ]
중앙아시아의 투르크 계 민족인 오구즈(구즈) 일족 또는 그 일족이 건설한 제국으로, 흔히 셀주크 투르크라고 불린다.
투르크 족의 서아시아 진출의 선구가 되었고, 다음의 오스만 제국을 건설하였다.
10세기 말에 족장 셀주크의 인도로 시르다리아 강 하류로 건너가 이슬람교를 믿었다.
그의 손자 토그릴 베그 시대에 세력을 떨쳤고, 1038년에는 이란의 호라산 지방까지를 지배하여 새 국가를 건설하였다.
1055년 바그다드로 진출하였고, ‘술탄’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또한 소아시아·시리아를 정복하였고, 11세기 말 제3대 말리크샤의 시대에는 동쪽 파미르 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으며, 이란 이슬람 문화의 꽃을 피웠다.
말리크샤가 죽은 뒤 왕족 사이의 격렬한 내분으로 분열을 일으켜, 케르만 셀주크, 아나톨 셀주크, 시리아 셀주크 등
셀주크 왕조를 칭하는 지방 정권이 독립하였다. 호라산의 대(大) 셀주크 왕조는 1157년에 멸망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첫 건설자인 오스만 베이는 원래 셀주크 터키 시대의 한 부족장이었다.
1299년부터 오스만 베이는 정복사업을 펼쳐 주로 비잔틴 영토를 잠식하였고, 그의 아들 오르한 시대에 이미 발칸반
도에 진출하여 비잔틴의 존재를 위협하였다.
1361년 아드리아 노플 정복으로 시작된 발칸 공략은 1389년 코소보 전투의 승리로 마무리 되었다.
오스만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것은 1453년 이었다. 술탄 메흐메트 2세에 의해 점령된 콘스탄티 노플은 이
스탄블로 이름이 바뀌었다.
비잔틴 제국의 정신적 심장이었던 성 소피아 사원은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어 기독교 정교의 비잔틴이 이슬람교의
오스만에 귀속되었음을 분명히 하였다.
오스만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은 오스만의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한 획을 긋는 큰 사건이었다.
이제 중세가 종식되고 근대가 시작되는 기점이 되었다.
유럽은 오스만 제국이라는 동방문화권과 직접 접촉함으로써 동방의 새로운 기운과 문명을 급속도로 받아들였다.
이로 인해 곧바로 르네상스가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인들이 스스로 ‘지리상의 발견’이라 불렀던 대항해시대가
도래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정복부터 16세기 말까지의 시기가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였다.
제국의 영토는 북으로 헝가리에서 남러시아, 남으로는 북아프리카 알제리에서 걸프해에 이르기까지 과거 이슬람 세
력권의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확장과 번영에는 여러 가지 특징적인 제도가 뒷받침되었다.
예니체리 – 귀족세력의 견제를 통한 술탄의 중앙 집권화와 효과적인 전투력 배양을 위해 예니체리 군대가 결성되었다.
예니체리는 술탄의 근위보병 부대로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였다.
술탄은 예니체리 병력을 충원하기 위해 데브쉬르메라는 제도를 도입하였다. 데브쉬르메는 주로 발칸 반도의 기독교
소년들을 징집하여 엄격한 훈련과 튀르크화 교육을 통해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고 예니체리에 배속시키는 제도였다.
밀레트 제도 – 이슬람 초기 시절의 딤미라는 이슬람 사회의 소수 민족 정책은 오스만 터키 제국 시대에 오면 밀레트라
는 톡특한 체제로 되살아난다.
오스만 제국내의 소수 집단들은 밀레트 내에서 자신들의 신앙과 종교 의례는 물론, 고유한 관습과 언어 사용, 문화적
전통등을 향유할 수 있었다.
또한 튀르크인들과의 마찰과 갈등으로 인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들의 공동체 내규에 따라 분쟁을 조정하고 해결
했다.
유대인,아르메니아인, 그리스 정교도등 각 밀레트에서는 최고 종교 지도자가 해당 밀레트의 종교 행정과 문화 활동
을 관장했고, 오스만 터키제국의 술탄에게만 책임을 졌다.
소수 민족 공종체와의 조화와 공존은 오스만 터키 제국 600년 역사를 관통하는 기본통치 이념이었다.
오스만 제국 치하에 있던 아랍 세계에서는 18세기 중엽 이슬람교의 요람인 아라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자주를 표방한
민족운동이 태동했다.
이러한 흐름을 대표하는 것이 와하비(wahhabi)운동으로, 원래는 이슬람교의 변질과 개혁주의에 반대하여 꾸란의
순수한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종교적 열정에서 출발하였다.
와하비 운동은 아랍 인의 각성을 촉구하여 후일 아랍 여러 나라의 독립에 정신적 바탕을 제공하였다.
독일편에 가담했던 오스만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제국이 와해되는 운명을 맞았다.
거의 모든 제국 영토를 뺏기고 터키 본토까지 점령당하자, 무스타파 케말 이라는 뛰어난 장군이 독립전쟁을 수행했다.
그 결과 1923년 로잔 조약에서 최종적인 영토조정이 이루어졌고,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한 무스타파 케말은 칼리파제
와 왕정을 폐하고 터키 공화국을 창설하였다.
이로써 1299년 이래 600년 이상 이슬람 세계의 종주국으로 존속해왔던 오스만 제국은 종말을 고했다.
아랍의 이슬람 문화권을 지배하던 오스만 제국의 멸망은 아랍 민족들에게 새로운 자주 의식과 독립의 기운을 고취시
켰다. 그러나 이미 중동의 이권에 혈안이 되어 있던 서구 열강들의 개입과 분열 책동으로 아랍은 사분오열되는 비극
을 맞았다.
아랍어, 이슬람교, 아랍인이라는 공통분모로 단일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던 아랍은 20개국이 넘는 개별국가로 분할됐
으며, 상충되는 이해관계로 협력과 분쟁을 거듭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서구 열강은 아랍인들에게는 후세인-맥마흔 서한을 통해 아랍국가의 독립을, 유대인들에게는
발포어 선언을 통해 유대 민족 국가의 창설을 , 영국과 프랑스간에는 사이크스-피코 비밀조약을 통해 영국의 팔레
스타인 통치를 암암리에 결정함으로써 오늘날 중동 지역에서 끊이지 않는 분쟁의 근원적 불씨를 제공하였다.
이리하여 오랬동안 이 지역에서 평화롭게 공존해 왔던 아랍과 유대인들은 서구의 지원을 얻어 유럽의 유대인들이
1948년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슬라엘을 건국함으로써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적대관계로 변모하였다.
팔레스타인 지역
팔레스타인(Palestine)은 지중해의 동해안 일대를 가리키는 지역명. 요르단강 서쪽부터 지중해에 이르는 길이 240㎞,
폭 45~85㎞의 단검날 모양의 땅이다.
20세기 들어 지금까지 유대와 아랍의 민족운동 진영이 서로 영유권을 주장하는 분쟁지역으로 남아 있다.
이스라엘인들은 기원전 15세기경부터 예수가 탄생한 1세기 후반까지 이땅을 지배했으며, 팔레스타인 아랍인은 6세
기경부터 지금까지 이 땅에서 살아왔다. 현재 이 지역의 80%는 이스라엘 영토이다.
유대교 전통에 따르면, '에레츠 이스라엘'('이스라엘의 땅'이라는 뜻)이라고 불리는 팔레스타인은 하느님이 약속한
땅이자 가장 거룩한 곳으로 유대민족 독립의 중심지였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와 사도들이 생활하고 복음을 전파한 현장으로 중시되며, 이와 관련된 몇몇 성스러운 장소들이
발견되었다.
이슬람교도들은 예언자 무함마드와 관련된 일정한 곳들을 거룩한 장소로 여긴다.
■ 팔레스타인 지역 역사
기원전 15세기경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주, 이스라엘 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기원전 1세기 로마제국의 속국이 되었고 서기 135년경 유대인들은 대부분 해외로 이주한 이후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이 땅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반유대인 운동이 전개되고 그에 대응하여 유대인들이 '조국의 건설'을 목표로 민족주
의 운동(시오니즘)을 확산시켜 나가면서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만제국의 약화와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미끼로 아랍
민족과 유대인들 모두에게 독립국가를 창설시켜준다는 이율배반적 약속을 하였다.
영국 외상 벨푸어는 당시 유대인의 전쟁 협력을 얻기 위해 '벨푸어 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건국을 약속
했으며, 같은 이유로 아랍인들에게도 '맥마흔 선을'을 통해 팔레스타인 내 아랍인 거주 지역의 독립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전쟁 후 팔레스타인 지역을 자신의 위임통치 지역으로 편입하고 그 지역으로 이주해오는 유대인들에
게 유리한 정책을 취하였고 아랍인들은 이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반유대인 운동을 확산시켰다.
2차 세계대전 후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에 이관하고 유엔은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UN Special Committee
on Palestine; UNSCOP)를 설치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을 아랍인 구역과 유대인 구역으로 분할시키는 안을 채택하였
다. 유대인들은 이를 기꺼이 수락한 반면 아랍 측은 거부하였고 그 결과 유대인들은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
를 수립하였다.
이스라엘 건국 직후 이집트를 비롯한 7개 아랍국가들이 무력적 항쟁을 벌이면서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였으며,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80%를 차지하는 전과를 올렸고, 팔레스타인인 90만 명이 유랑민으로 전
락하였다.
이로서 팔레스타인 분쟁이 시작되었고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1964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결성되었다. 팔레스타인은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고 이스라엘과 충돌할 때마다 유혈 분쟁으로 치달
았다.
1994년엔 파레스타인 자치정부(PA)가 수립되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평화 협상도 몇차례 성사되었으며,
1993년엔 「영토와 평화의 교환」을 원칙으로 한 '오슬로평화협정'을 체결, 팔레스타인자치국 건설에 합의했다.
그러나 2000년 9월 이스라엘 강경파인 아리엘 샤론 총리의 동예루살렘내 이슬람성지 방문 사건이 돌출, 유혈 충돌이
다시 고조되었고 이후 휴전협상과 재충돌, 암살과 자살테러 등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서구와 이슬람 세계는 이슬람이 완성된 이후 지난 1400년 동안 협력과 갈등을 거듭하는 애증의 관계였다.
이슬람이 발생한 7세기부터 18세기 초까지는 이슬람 세계가 유럽에 대해 군사, 정치,문명등 모든 면에서 압도적 우위
를 점하는 시기였다.
스페인 안달루시아가 800년간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프랑스 남부, 이탈리아 남쪽, 그리스와 발칸반도 대부분
도 수백년간 이슬람 지역이었다.
그러나 근대이후 18세기부터 서구에 의한 이슬람 세계 식민지화가 가속화되면서 ‘지배와 피지배’라는 숙명적 관계는
역전되었다.
오랜 기간 이슬람 세계의 지배와 끊임없는 위협에 시달려온 서구로서는 모처럼 뒤바뀐 힘의 강약 구도를 깨뜨릴 의사
가 전혀없었다.
이란의 전 대통령이자 철학자인 모함마드 하타미 의 ‘문명간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설파하고 있다.
무슬림들은 예로부터 유럽인들에게 역사와 철학, 시민 사회가 어떤 것 인지를 소개했습니다.
그리스의 과학이나 철학, 지혜가 유럽사회에 전해진 것은 유럽인들이 무슬림들과 친숙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럽 인들은 우리 무슬림들로부터 관용의 정신을 배웠습니다.
지금 유럽인들이 무슬림들에게 관용과 도덕적 가치를 설명하는 것은 사실은 우리를 비꼬는 것입니다.
유럽의 위대한 문명은 이슬람 문명에 강하게 뿌리를 둔것이며, 이슬람 세계는 위대한 문명 세계였습니다.
이란과 서구의 불편한 관계
현재 서구와 이슬람 세계 사이에서 가장 불편한 관계의 축은 이란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에 의해 ‘악의 축’, ‘테러 지원국’으로 분류되면서 반미 노선을 걷고 있는 이란에게는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바로 1954년 모사데크 정권 붕괴사건이다.
1951년 모사데크가 이란 수상이 되어 석유산업의 국유화 조치를 단행하였다.
나아가 1952년 영국과의 국교를 단절하면서 서방과의 불편한 관계를 감수하더라도 독자적인 노선을 주창하면서 석
유 이익을 이란에게 되돌리려는 정책을 시도하였다.
결국 미 정보당국이 개입하여 모사데크 정권을 무너뜨리고 친미적인 팔레비 왕정이 정권을 잡게되었다.
이 사건은 미국이 공공연하게 중동 사태에 개입하는 뚜렷한 기점이 되었으며, 동시에 중동-이슬람 세계의 미국에 대
한 불신이 더욱 가시화되는 정치적 계기가 되었다.
쿠에이트는 원래 오스만 시대부터 이라크의 바스라 주에 속한 이라크영토였다.
그러나 1932년 이라크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때 영국은 석유 이권 때문에 쿠웨이트 지역을 계속 통치했으며, 쿠웨
이트는 1961년 이라크에 귀속되지 않고 독립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 때문에 이라크는 계속 영유권을 주장해 오던 터였다.
4장 이슬람은 무엇을 믿고 무엇을 지키는가
일반적으로 종교는 민족이나 창시자의 이름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유대인들이 믿는 유대교, 예수에서 예수교, 부처에서 불교, 조로아스터에서 조로아스터교(배화교) 등이다.
이슬람교에서는 무함마드(영어로는 마호메트)를 믿지 않는다. 따라서 마호메트교는 잘못된 표현이다.
또 회교(回敎),회회교(回回敎)라는 표현도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중국에서 위구르 족을 지칭하는 회홀, 회골등이 믿는 종교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 용어는 ‘위구르 인들의 종교’라는 뜻이기 때문에 이슬람교와는 맞지 않으며, 교과서에도 삭제되어 현재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이슬람은 종교와 문화를 포괄한 개념이며, 종교를 구분해서 사용할 때는 이슬람교, 여타의 경우에는 이슬람으로 폭
넓게 사용한다.
우선 이슬람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슬람(islam)의 언어학적 어원은 ‘평화’이고, 신학적인 의미는 ‘복종’이다 따라서
이슬람 사상의 핵심은 알라(유일신)에게 절대 복종하여 내면의 평화를 얻는 것이다.
각 종교 사상의 핵심에서 기독교가 사랑, 불료가 자비, 유교가 인이라고 한다면, 이슬람 사상의 중심은 평화와 평등
이다. 평화야말로 이슬람의 핵심이요, 삶의 구체적이고 궁극적인 목표이다.
이스라엘 인들의 인사말인 ‘샬롬(shalom)’도 평화라는 뜻이다.
아랍 어와 이스라엘의 히브리 어는 같은 셈 족 계통 언어로 매우 닮아 있어서 ‘이슬람’은 히브리 어의 ‘샬롬’과 같은
어근으로 ‘평화’를 뜻한다.
그러나 평화라는 의미를 가진 이슬람교는 우리에게 가장 평화와 거리가 먼 폭력적이고 호전적인 모습으로 비춰진다.
테러라는 현상만으로 이슬람 전체를 들여다보게 하는 채널의 편중 때문이다.
우리의 편견과 서구 시각에 의한 교육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이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중재자나 대속자 없이 신과 신자의 직접 대화나 교통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누구도 하느님에게 대적하라 수 없고 대신할 수도 없다. 하느님은 자식을 두지 않았으며 자식을 낳지도 않았다.
꾸란 전체의 3분의 1만큼 중요한 한 구절에서 이 사상이 집약되었다.
말하라. 그분은 오직 한 분
시작도 없고 영원하시도다
그분은 낳지도 낳아지지도 않았으니
그분과 필적할 자 아무도 없느니라 꾸란 112장
구원의 방식도 아주 간결하여 현세에서의 선악의 경중에 따라 최후의 날 신의 심판을 받아 천국의 구원과 지옥의
응징으로 나뉜다는 내세관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 모든 것은 신이 정한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예속된다는 정명(定名) 사상을 갖고 있다.
이슬람은 구체적 실천을 위해 다섯 가지 기본적인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첫째 ‘알라의 유일성과 무함마드가 그 분의 예언자임을 믿는다’ 라는 신앙고백,
둘째 하루 다섯 번의 예배,
셋째 이슬람력 9월인 라마단 한 달간 해 있는 동안의 단식,
넷째 자신의 순수입 2.5퍼센트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세금을 내는 자카드,
다섯째 평생에 한 번 권장되는 메카 성지 순례 등이다. 이를 이슬람의 다섯 기중, 오주라고 한다.
믿음의 기본은 육신으로 분류된다. 유일신 알라, 즉 하느님을 받들고, 천사들, 성서들, 예언자들, 내세와 최후의 심판
에 대한 믿음, 정명에 대한 믿음이 그것이다.
이슬람에서 네 권의 경전인 무함마드의 꾸란, 모세의 율법, 다윗의 시편, 예수의 복음서를 모두 인정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최종적인 복음은 꾸란으로 완성되고 집대성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그 이전 복음서의 내용까지 그대
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이슬람교는 새로운 종교가 아니고 하느님이 태초 이래 인류에게 보내신 모든 예언자들에게 계시한 말씀과 지침을
포괄하는 종교다. 그래서 아담부터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에 이르는 모든 예언자들은 동시에 무슬림의 예언자들
이며, 이들 예언자 중 무함마드가 마지막 예언자인 것이다.
꾸란 2장 136절
우리는 하느님을 믿으며, 우리와 아브라함과 이스마엘, 이삭, 야곱과 그의 자손들에게 내려진 계시를 믿나이다.
그리고 모세와 예수에게 내려진 계시와 주께서 당신의 모든 예언자들에게 내리신 계시를 믿나이다.
우리는 그들 사이에 서로 차별을 두지 않으며, 하느님께 경배하나이다.
定命에 대한 믿음
우주의 법칙과 인간의 삶이란 본질적으로 하느님이 정해놓은 명에 따라 움직인다는 믿음이다.
이는 창조주인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순응하는 자세를 강조한다. 다만 운명 예지론이나 숙명적 삶의 태도와 다른 점
은 인간의 판단 의지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점이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스스로가 판단하여 행동할 수 있는 이성과 자율 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인
간의 실수나 소홀로 일어난 사건까지 모두 하느님의 책임이나 운명으로 돌려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취한다.
보다 적극적인 인간의 태도와 책임을 요구하고 있는 점이 다른 종교와의 차이라 할 수 있다.
창세기 이후 알라께서는 인간에게 삶의 올바른 지침을 위해 민족과 시대를 달리하여 수많은 예언자들을 끊임없이
내려 주셨다.
이슬람에서도 아담 이후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등을 모두 알라가 보내신 예언자로 믿고 따른다.
그러나 하느님의 복음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인간의 손에 의해 덧붙여지거나 삭제되면서 잘못 이해되고 변질되어
갔다고 본다.
그때마다 알라는 새로운 예언자를 통해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으려고 했고, 무함마드에 이르러 꾸란 계시를 통해
전 인류와 모든 시대에 걸친 완벽한 복음을 완성했다고 본다.
결국 이전의 모든 계시를 요약하여 종교의 통일성에 결론을 내린 것이 이슬람이고, 이 계시를 간직한 것이 꾸란
경전이며, 인류의 마지막 예언자가 무함마드다.
중세 교황청의 공식적인 생각은 사막의 신인 무함마드를 추종하는 무리들과 함께 호흡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이는
이교도에 대한 무자비한 대량 살육의 길을 열어 주기도 했다.
기독교 서구 사회에서는 예수를 신의 아들이 아닌 인간 예언자로 추앙하는 이슬람을 용서할 수가 없었고,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더욱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다른 종교와 도저히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쪽은 서구의 기독교였지 이슬람 사회가 아니었다.
무함마드는 570년경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서 쿠레이쉬라는 명문 귀족의 가난한 유복자로 태어나, 마흔 살이 되던
해인 610년경 알라의 계시를 받았다.
고아로 자라 할아버지와 삼촌들에 의해 양육되었던 무함마드는 대상 교역이 낙타몰이꾼으로 인생을 시작했고 25세대
메카의 상인이었던 카디자의 미망인과 결혼하였다.
결혼후 그동안 품어왔던 사회적 악습과 모순에 대해 고뇌와 명상을 시작하였고, 40세 되던 610년 메카에서 가브리엘
천사의 인도로 알라의 첫 계시를 받았다.
알라가 글자와 학문을 몰랐던 무함마드를 선택하여 22년에 걸친 내린 계시는 꾸란이라는 무슬림들의 완벽한 경전으
로 계승되었다.
무함마드의 어떤 덕목과 리더십이 1400년 이란 오랜 시간 동안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붙잡아두고 일상에서 그를 본
보기로 끌어 안고 살아가게 하는 것일까?
첫째, 그른 아무런 유산을 남기지 않았다. 무슬림 상속의 근간이 된 유산 대부분을 국가와 가난한 이웃에게 환원하고
최대 3분의 1이하만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는 관습을 남겼다
둘째, 그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셋째, 무엇보다도 무함마드는 순수한 인간이었다. 그는 어떠한 기적도 행하지 않았으며, 결단코 신이 되기를 거부했다.
넷째, 무함마드는 적에 대한 관용과 가난하고 버림받은 자에 대한 한없는 낮춤의 자세를 가졌다.
다섯째, 그는 종교적 열정과 온화함의 조화를 행동으로 보인 지도자 였다.
여섯째, 여성들에 대한 지위와 인식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준 이슬람 페미니스트 였다.
여성을 완전한 인격체로 존중할 것을 명했으며, 여성들에 대한 상속을 법제화 했다.
632년 무함마드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10만 명의 추종자들을 인솔하여 메카 순례를 떠났다.
이미 그는 죽음을 예견하였고, 마지막 순례가 될 것이라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그는 그곳에서 유명한 고별 순례 연설을 하였다. 무슬림들이 일상에서 깊이 간직하고 예언자에 대한 한없는 존경을
표하는 이 연설문에서 무함마드는 이슬람에 대한 자신의 이성상을 밝히고 무슬림들에 대한 절절한 당부를 담고 있다.
또한 생며에 때한 존엄성과 생활 경제의 원칙을 천명하고 있는데, “남에게 채무를 진 자는 빚을 갚아야 하고, 이자는
받지도 지불하지도 말라. 또한 생명과 깨끗한 재산은 주님을 만나는 날까지 신성하다”.라고 선언했다.
이 고별 순례 연설 직후 신의 마지막 계시가 무함마드에게 내려졌다.
꾸란 5장 3절
오늘 내가 너희를 위해 너희 종교를 완성했으며 나의 은총이 너희에게 충만하도록 하였고 이슬람을 너희의 종교로
만족하게 하였느니라.
철저한 인간으로 남은 그의 생애야말로 이슬람이 어떤 신비화나 신격화를 거부하고 무함마드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지도자로 남아 있게 된 배경이 아닐까
꾸란은 무함마드가 서기 610년에서 632년까지 23년간 예언자로서 알라로부터 받은 계시 내용을 담은 이슬람 최고의
경전이다.
꾸란은 아랍어로 기록되었으며, 당시 아라비아 반도의 히자즈 지역 유목민이 사용하던 아랍어를 기준으로 하였다.
결국 이슬람은 아랍인 예언자 무함마드에 의해 아라비아 반도 메카와 메디나에서 아랍어로 계시되었다는 특징을 갖
고 있다. 이것이 이슬람교가 아랍과 혼돈되는 배경이다.
꾸란은 하느님의 말씀만을 의미하며, 무함마드가 언급한 것은 꾸란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무함마드의 말씀은 하디스라고 하여 이슬람을 이해하는 중요한 경전이지만, 꾸란과는 명백히 구분된다.
꾸란은 ‘읽다, 암송하다’의 뜻을 가진 아랍어 동사 까리아에서 파생된 단어다.
모든 무슬림은 매일 다섯 번의 예배 때마다 꾸란 구절을 암송하면서 알라의 가르침을 되새기고 기억한다.
알라의 오묘한 진리와 가르침이 손상되거나 그 의미가 왜곡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정통 이슬람 학자들은 꾸란이 다른
언어로 번역되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다.
무슬림들에게 꾸란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삶의 지침서이고 영혼의 양식이다.
무슬림들은 꾸란이 신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고, 이전의 계시를 총망라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라고 믿는다.
따라서 인간은 이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슬람의 단식은 사움이라고 불리지만, 단식하는 달 이름을 그대로 따서 라마단이라고도 한다.
그 의미는 참으로 깊고도 공동체적이다.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 가는 구성원들이 부자인건, 가난하건, 권력자이건,
평범한 시민이건 모두가 똑같은 조건에서 하느님이 명하신 고통을 직접 체험하는 기회를 갖는 것이다.
함께 굶고 함께 나누는 과정을 겪으며 말로써가 아닌 1차적인 실천과 경험을 통해 억울한자, 가난한 자, 빼앗긴자의
고통과 소외와 배고품을 직접 느낀다. 진정한 공종체의 영적 나눔의 행사라고 할 수 있다.
하즈라 불리는 성지 순례는 무슬림들의 마지막 의무이며, 평생에 한 번 이슬람력 12월 첫 주에 메카를 방문하는 것을
의미한다.
메카는 이슬람이 완성된 곳일 뿐아니라 하느님의 집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순례는 다른 절대 의무와는 달리 재정 조건이나 건강이 허락되지 않을 때는 다른 선행으로 대체할 수 있는
상대적인 의무라 할 수 있다.
이슬람의 전승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아내 하갈과 어린아들 이스마일을 사막에 내버려두고 떠났다.
하갈은 아브라함에게 몇 번이나 자신들을 버리는 이유를 물었다.
아브라함은 신의 뜻이라고 대답했다. 그 말에 하갈은 겸허하게 신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분이 자신들을 보호해 주실
거라고 믿으며 광야로 나아갔다.
배고픔과 목마름에 지친 그들은 고통속에서 물을 찾았는데, 하갈은 이스마일에게 먹일 물을 찾아 이 언적, 저 언덕을
올랐다. 두 언덕 사이를 일곱차례나 왕복한 끝에 드디어 물이 솟아나는 찾았으니 이 샘은 잠잠이라고 불린다.
이 곳에 사람들이 터를 잡고 형성된 도시가 바로 오늘날의 메카다.
두 언덕이 바로 메카에 있는 시파와 마르완이며, 성지 순례를 할 때 순례객들은 이 고사를 떠올리며 시파와 마르완
언덕 사이를 일곱 차례 왕복한다.
이슬람교에는 성직자 제도가 없다.
이슬람 정신인 평등을 실천하는 가장 확실하고 구체적인 사회적 약속이다.
이 점은 이슬람교가 기독교, 유대교, 불교 등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중요한 차이점중 하나이다.
이슬람은 인간과 하느님사이에 어떠한 영적 중간자나 매개자를 인정 하지 않는다.
신과 인간의 직접대화나 교통을 강조한다. 전지전능한 하느님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은 신자로서는 대단한
영광이고 종교에 대한 무한한 긍지와 우월감을 심어준다.
동시에 신에게만 책임을 지기 때문에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종교 의례나 불필요한 형식이 과감하게 생략된다.
통상적으로 성직자들이 주관하는 예배 인도, 모스크 관리, 꾸란 편찬, 종교적 유권해석, 영적 지침 같은 공동체의
종교적 활동은 누가 맡아서 하는가? 그 역할을 하는 사람이 이맘이다.
즉 예배 인도자인 셈이다.
모든 성인 무슬림들은 예배를 인도하는 이맘이 될 수 있다.
직업이나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이맘이 될 자격이 부여된다.
예배하러 모여든 사람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거나 이슬람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 그 예배를 인도하면 이맘이 되는 것
이다. 이맘의 자격을 취득하기 위한 성직 과정도, 성직자로 입문하는 특별한 예식도 필요치 않다.
그런데 배우지 못한 모든 신자들이 꾸란을 알고 종교적 의미를 파악해서 혼자 자유롭게 신을 만나고 신의 뜻을 생활
에 그대로 실천하는 것은 사실상 무리다.
그 학문적 길잡이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울라마이다.
이들은 종교 법학자 및 신학자이자 이슬람학을 전공한 이슬람 학자들이며, 이슬람 초기부터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
과 유산을 모아 정리하고 해석하여 이슬람 법인 ‘샤리아’를 체계화 했다.
이슬람 세계에는 로마 교황청 같은 이슬람 전체 세계의 문제를 일사분란하게 다루는 기관이 없다.
따라서 조정과 명령 체계가 부족한 편이며, 대부분 국가 단위로 설치된 종교성에서 이슬람 문제를 다룬다.
지구상에서 기독교에 가장 가까운 종교를 하나 들라고 하면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이슬람교일 것이다.
같은 하느님의 뿌리에서 아브라함을 공통 조상으로 하고있는 종교이다.
구약에 나오는 아담에서부터 노아, 아브라함, 모세에 이르는 선지자들을 받아들이는 모습도 두 종교가 비슷하다.
발생 순서대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유일신 사상을 기초로 완성하였지만, 서로 이단시 하고 구원에 이르는 길
을 달리한 까닭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신학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견해 차이가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창세기 아담의 창조에서 모세에 이르는 기간 동안의 가르침까지 세 종교는 기본적으로 같은
맥락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유대교가 신의 아들이자 메시아 복음 전달자로서 예수를 부정하는 반면, 이슬람교에서는 예수를 최상의 인격체로
받아들이고 추앙한다.
한 줌의 신성도 지니지 않은 순수한 인간 예언자 혹은 선지자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슬람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로서, 또한 신격으로 받아들이지 못함으로써 기독교와는 본질적인 길을
달리하게 되었다.
이슬람교에서 무함마드는 예수 이후 나타난 마지막 예언자다.
마지막 예언자는 앞선 복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복음을 완성하고 보완함으로써 최종적인 형태를 갖추게
하고, 최후의 심판일까지 인간 세상을 관장하는 것이라고 이슬람은 보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와 무함마드는 신학적으로 동격이며, 차이가 있다면 시대적인 임무와 복음의 포괄성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이슬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중상모략하고 그의 신학적 미션을 왜곡, 폄하하고 있다는 일반의 오해와는 달리
이슬람의 경전 꾸란에서는 예수에 대한 특별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꾸란에서는 15개 장에 걸쳐, 그리고 꾸란 전체 6226절 중에서 93절에서 예수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는 이슬람의 마지막 예언자인 무함마드에 대한 기록보다 훨씬 많은 것이다.
그렇지만 이슬람교는 기독교의 세 뿌리인 원죄관과 예수의 십자가 대속 개념, 부활의 기적을 모두 부정한다.
이슬람은 인간이 한 줌 티 없는 깨끗한 상태로 태어난다는 원선설의 입장을 갖고 있다.
꾸란에 따르면,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의 계율을 어기고 사탄의 유혹에 빠져 금단의 열매을 따 먹음으로써 큰 죄를
저질렀지만, 아담과 이브가 계획적인 음모에 의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다.
이들은 사탄의 유혹에 빠져 이성의 망각 상태에서 실수로 죄를 저질렀고, 곧 자신의 죄를 깨닫고 진실로 뉘우치고
회개하는 과정을 거쳤다.
또한 하느님께 진정한 용서를 빌었고, 하느님은 이들의 죄를 엄히 물으시고 그에 상응하는 죄값을 치르게 하셨다.
이로써 아담과 이브의 죄는 당대로써 소멸되었다고 이슬람은 해석한다.
따라서 인간의 원죄를 대신 책임질 대속자나 십자가 처형이라는 역사적 사전이 필요치 않다.
나아가 부활이란 기적도 요구되지 않는다.
여기서 이슬람교의 구원관은 훨씬 단순하고 합리적이다.
다른 피조물과 달리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거 ‘이성’이라고 하는 자율 판단 의지를 은총으로 부여하셨다고 본다.
실생활에서도 이슬람 법은 무신론자 이교도와 결혼을 엄격히 금지하면서도 무슬림 남성과 기독교 혹은 유대 인 여성
의 결혼은 같은 성전의 백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허용한다.
그 외에도 서구에서 생활하는 무슬림들은 음식 문화에 있어서 이슬람식으로 도살한 고기 등을 얻기 불가능할 경우
기꺼이 기독교인 상점을 이용하여 하느님의 노여움을 피해 간다.
이는 하느님을 믿지않는 다른 종교 집단보다는 구원의 길은 다르지만 같은 하느님을 믿는 성전의 백성들인 기독교인
이나 유대인들에게 훨씬 친근한 동질성을 느끼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슬람교와 기독교, 한 뿌리에서 출발한 두 종교의 이질성을 확대 과장하여 서로의 적의감을 증폭시키는 것보다는
같은 점과 서로 소통할수 있는 맥락을 찾아 다름을 이해하고 동질성을 넓혀 나가는 것이 앞으로 문화 다양성의 시대
를 지혜롭게 살아가는 지구촌 시민의 기본 덕목일 것이다.
이슬람교의 기본교리와 관행에서 대부분의 이슬람 공동체는 단합과 통합을 이루고 있으나, 사상이나 종교 의례, 율
법적 해석에서 차이를 보이며 여러 분파가 생겨났다. 대포적인 차이가 바로 순니파와 시아파이다.
무함마드는 632년에 타계하면서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아랍 무슬림들은 아랍 부족들의 오랜 대의 정치 전통에 따라 민주적인 만장일체 제로도 후계자를 선출
했다. 이로써 종교적 최고 카리스마와 세속 군주의 절대 통치권을 가진 칼리파라는 후계자가 선출되었다.
아부 바크르, 우마르, 오스만이 차례로 칼리파가 되었다.
그러나 무함마드의 유일한 부계 혈통인 그의 사촌동생이자 사위 알리는 후계자가 되지 못했다.
알리의 추종자들은 이에 대한 정치적 소의와 피해 의식이 강했다.
656년, 알 리가 드디어 네 번째 칼리파가 되었으나 661년에 그만 살해되고 만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유일한 직계 혈통이 겨우 네 번쨰 칼리파가 된 것도 수긍하기 어려운 데다 그의 죽음까지 더해지
자 극단적 분노와 적개심이 표출되었다. 바로 알리의 추종자들이 시아파가 되었다. ‘시아’란 ‘떨어져 나간 무리’라는
뜻이다.
자연히 남아 있는 무리들은 순니가 되었다.
시아파는 무함마드 이후의 세 칼리파인 아부 바르크, 우마르, 오스만을 칼리파로 보지 않고 찬탈자도 보았으며, 무함
마드 이후의 정통 승계권을 알리로 보았다.
그들은 알리의 후손들을 믿고 따르며 마지막 12번째 이맘은 죽지 않고 사라졌으며 언젠가는 구세주가 되어 재림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시아파는 이란을 중심으로 전체 이슬람세계의 약 10퍼센트를 차지한다.
순니와 시아의 종교적 관행 중 또 다른 차이점은 타끼야(신앙을 숨기는) 관행이었다.
시아파는 정치적.종교적.이념적 믿음을 숨길 수 있도록 하였다.
즉 생존과 자기 방어를 위한 선의의 거짓말을 일정 부분 허용하는 점이다.
이슬람 역사 1400년 동안 타끼야 관행은 시아에 대한 탄압의 대응수단으로 종종 사용되었다.
이슬람은 다른 종교와 달리 삶과 종교가 상당부분 구분되지 않고 혼재되어 있다.
즉 이슬람 사회는 서구 사회와 달리 종교가 삶속에 완전히 녹아있고, 삶이 곧 종교다.
그래서 세속과 종교를 무자르듯이 구분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물론 많은 이슬람국가들이 현재 이슬랍 법인 샤리아 보다는 스위스 민법과 서구법 체계를 받아들여 시행하는 추세
가 강하다.
그러면서도 민법의 많은 부분들, 즉 상속,결혼,이혼,가족 문제,부채 관계, 토지 문제등에서는 전통적인 이슬람 문화
와 율법 전통을 따르면서 형법에서는 서구식 법률을 시행하는 이중적인 법 체계가 공존한다.
샤리아는 ‘성스러운 계명과 지침의 길’이라는 뜻이다. 또라는 의미는 ‘샘에 이르는 길’이다, 사막의 뜨거움과 방황 속
에서 샘으로 향하는 길은 바로 생명의 길, 알라의 길이다.
따라서 샤리아란 인간이 신에게 완전히 복종하는, 즉 ‘이슬람’하는 외적인 신앙의 표출인 셈이다.
꾸란 구절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시대나 환경의 변화에 상관없이 지켜나가야 할 절대적인 규범과 시대나 환견의 변화
에 따라 이성으로 판단해서 새롭게 정의해 갈 수 있는 일반 규범으로 나누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절대 규범에 해당되는 종교 의례와 인간 사회의 기본적인 자치와 질서를 유지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독단적인
해설을 막기 위해 비교적 상세한 규정을 명시하고 있지만, 일반적 규범에 대해서는 원칙만 밝히고 상세한 규정을 명
시하고 있지만, 일반적 규범에 대해서는 원칙만 밝히고 세세한 설명이 결여되어 있다.
즉 인간의 합리적인 판단으로 공동체의 선을 위해 얼마든지 재해석이 가능하도록 문호를 열어놓은 셈이다 이것이
이슬람 법의 특징이다.
이슬람 법의 원천은 무엇인가? 모두가 공감하는 네 개의 신학적 원천이 가장 중요하다.
신의 말씀 그 자체인 꾸란, 오류를 범하지 않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순나*, 해당 적용 법규를 꾸란과 하디스
에서 유추하여 적용하는 끼야스(유추), 이슬람 율법학자 울라마들의 전원 합의인 이즈마(합의)가 그것이다.
*무함마드의 언행을 ‘순나’라 하고, 순나중에서 신빙성 있는 것을 선별해 책으로 편찬한 것을 하디스라 한다.
하디스에는 여러 판본이 있으나, 이맘 부하리의 하디스와 무슬림 사히흐 하디스가 가자 정통적인 책으로 이슬람 세
계에 널리 통용된다.
배우지 못한 모든 신자들이 꾸란을 알고 종교적 의미를 파악해서 혼자 자유롭게 신을 만나고 신의 뜻을 생활에 그대
로 실천하는 것은 사실상 무리다. 그 학문적 길잡이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울라마이다.
세 번쨰 법원인 끼야스는 유추이다.
현대적인 인간관계에서 빚어지는 사건 사고의 정황들이 모두 구체적으로 꾸란과 순나에서 찾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울라마들은 한 사건에 적용할 수 있는 가장 유사한 사례들을 꾸란이나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에서 찾아서
유추하여 법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방식이다.
물론 끼야스에는 인간의 이성적 잣대가 개입할 여지가 있기 때문에 학자들간의 완전한 합의와 엄격한 적용 방식이
요구된다.
네 번째 이즈마는 인간 사회의 범죄나 다툼에서 꾸란이나 순나에서 유추하여 결정할 수 있는 근거나 합리적 조항을
찾지 못할 때, 당대 울라마들의 심사숙고와 전원 합의를 거쳐 이슬람 법으로 규정하는 방식이다.
이는 비슷한 사례를 찾아 유추하는 끼야스보다 인간의 이성적 판단이 더 강하게 작용될 수 있다.
때문에 매우 신중한 절차를 따르며, 그 결정에 대해서도 정통파 사이에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학자들이 개별적 해석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이즈티하드라 하고, 유권해석의 권한을 지닌 학자들을 무즈티하드라고
부른다.
이슬람 법 해석에서 이즈티하드가 갖는 위험성을 간파한 많은 정통 울라마들은 이즈티하드의 문은 닫혔다고 주장하
면서 더 이상의 무즈티하드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이슬람을 경전 중심의 이론과 교리로만 해석하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영적 본질에 다가가려는 종교적 신비주의를
수피즘이라 한다. 수피즘은 어떤 특정한 인물이 창안하거나 주장했다기 보다는 시대적 상황에서 자연스러운 영적
운동으로 생겨난 종교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수피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두 가지 주된 배경을 설명해야 한다.
첫째는 세계 제국으로 확대된 압바스 시대의 물질적 번성과 풍요가 주는 이슬람의 세속화와 4대 학파를 중심으로
발전된 이슬람 법리 논쟁의 와중에서 진정한 영적인 가치를 찾고자하는 움직임이다.
둘째는 이슬람이 비아랍어권으로 확산되어 감에 따라 하느님의 꾸란 말씀인 아랍어에 대한 이해가 어려워진 상황
이다. 당시 민중들의 절대다수가 문맹인 상황에서, 모국어가 아닌 아랍어 꾸란을 배워 하느님의 뜻을 깨우치고 그
에게 다가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기서 수피라 불리는 사람들은 기존의 화려한 치장과 물질적 풍요에 빠져 지루한 교리 논쟁을 일삼는 경직된 이슬
람 율법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진정한 영적 가치를 찾으려는 참다운 고뇌를 시작했다.
사실상 아라비아 반도를 제외하고 이슬람이 전 세계로 확산된 데는 정통 이슬람 교리보다 수피즘의 영향이 절대적
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이러한 수피즘은 종파라기보다는 하나의 의례이며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상 최초의 여성 수피는 8세기 라비아 알 아다위야 였다. 그녀는 명상과 밤샘기도, 겸허한 마음 가짐을 통해서
신을 찬미했으며, 다음 같은 명상시를 남겼다.
주여! 제가 만일 지옥이 두려워 당신을 숭배한다면 , 저를 지옥 불에 태우시고,
천국에 가고자 당신을 찾는 다면 천국에서 저를 내치옵소서!
당신만을 사랑하고, 조건 없이 당신만을 섬긴다면
당신의 영원한 아름다움으로부터 저를 붙잡아 주옵소서.
5장 이슬람 문화의 향기
모스크 내부로 들어가면 카펫이 횡렬로 나란히 줄을 맞춰 깔려 있다. 일렬로 평등한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배려다.
알라 앞에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신분이나 출신 성분에 상관없이 모든 신자는 한 줄로 예배를 본다.
앞줄이 채워지지 않는 한, 두 번째 줄에 서서는 안 된다. 왕자와 거지가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예배를 보는 성스러운
공간이다.
무엇보다 모스크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기능은 정치적 담론의 형성 공간으로서의 역할이다.
예배 전후 무슬림들은 매일 벌어지고 있는 팔레스타인 이슈를 필두로 국내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치적 입장
으로 토론을 벌인다.
당시 아랍세계는 바그다드에 중심을 둔 압바스 왕조 전성기였다.
세대륙에 걸친 영토의 정복과 다양한 문물의 유입으로 아랍 세계는 활력이 넘쳤다. 셈 족의 유목 문화에 페르시아,
이집트, 인도 문화가 유입되고,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가 아랍 어로 재해석되어 흡수되었다.
바그다드라는 문화 용광로 속에 녹아 든 세계 문화의 요소를 그대로 반영한 작품이 바로 아라비안나이트 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인류 4대 문명 중 세 권력의 문명을 포괄하고 있다.
아주 많은 수자를 ‘1천1’로 표현하는 비잔틴과 오스만 터키의 영향아래 ‘천 밤의 이야기’가 ‘1천1밤의 이야기’로 바뀐
시기도 이때이다.
아라베스크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종교적 배경에서 피어난 대안 예술이자 새로운 문화였다.
사람과 동물 대신 꽃과 나무, 식물과 자연 현상을 아랍어 서체와 결합하여 기하학적 배치를 통해 예술성을 표현하였
다. 아라베스크는 반복과 대칭을 그 특징으로 하면서 이슬람어 서체 내용을 주로 꾸란 구절로 장식하였다.
모든 예술은 결국 하느님의 뜻에 따른다는 의미를 담았고, 시작도 끝도 없는 반복과 대칭 구도 자체가 바로 오묘한
신의 예술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아라베스크 문양이 당초문(唐草紋)으로 알려졌다.
꽃과 식물을 기본 모티브로 사용한 디자인이 당나라를 통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처마와 와당장식, 불교 사찰의 단청, 청나라 백자에 그려진 문양, 전통 가옥의 문살 등에서 흔히 보이는 당초문은
아라베스크를 그 원형으로 한다. 그래서 박물관에 가면 당초문의 영문 번역이 대부분 아라베스크로 되어있다.
중국에서 용은 황제의 의미를 내포하지만, 페르시아에서는 악마이며, 인도에서는 죽음을 의미한다.
간혹 페르시아 케펫에 등장하는 날짐승들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으로 선과 악의 싸움을 의미한다.
기하학적 문양의 예로 중국에서 만(卍)자 무늬는 평화를 상징한다. 독일 나치 때문에 이 무늬가 공포의 대상이 되었
던 유럽과는 상반되는 이미지이다. 간혹 이슬람으로 상징으로 묘사되는 초승달은 진리의 시작이자 신앙심을 의미
하며, 끝이 없이 연결되는 매듭 모양의 기하학적 무늬는 지혜와 불멸을 의미한다.
카펫은 단순한 공예품이나 예술품이 아니다.
바로 인간이 만들어 내는 다양한 삶의 궤적 그 자체다. 사람은 카펫을 만들었지만, 카펫은 또 사람을 키우고 길러 내
는 산실이다. 이렇게 인생의 사이클을 대변한다.
커피의 대명사 모카는 아라비아 남부 예멘에 있는 지방이다.
커피의 원산지는 에티오피아의 카파 지방으로 알려졌지만, 동부 아프리카의 뾰족한 곶을 따라 홍해를 건너면 나오는
모카 지방이야말로 커피의 본향인 셈이다.
처음 중세 카톨릭 교회에서 시커먼 커피를 보고 이교도가 개발하여 그들이 마시던 음료하고 하여 악마의 음료로 간
주하였다. 즉 커피의 음용은 불경스러운 일이었다.
교황의 이러한 유권해석을 어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불이익을 당했다.
결국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직접 커피를 마셔 본후 하나의 기호 식품으로 인정하였다. 커피에 세례를 준 셈이다.
커피의 생산과 유통을 장악하고 있던 오스만 터키 당국의 독점으로 값은 여전히 상승하였다.
유럽은 새로운 시장을 찾았다. 그곳은 그들이 식민통치를 하고 있던 인도네시아와 남미등 아랍과 기후가 비슷한
지대였다. 인도네이사에서 대규모의 커피 플랜테이션이 시작 되었고, 남미에서도
값싼 노예 노동력을 동원하여 어마어마한 커피 농장이 생겨났다.
그들은 유럽식 커피를 무조건 네스카페라고 부른다.
이 상표가 제일 먼저 진출하여 아랍 인의 입맛을 바뀠기 때문이다.
불행히고 네스카페는 근대화와 엘리트 계층의 상징이 된 반면, 터키 커피는 이슬람과 보수 계층의 상징으로 굳어져
간다. 하나의 희망은 아직도 전통과 역사를 이야기 할 때 터키 커피는 빠질 수 없는 아랍의 정서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6장 무슬림들은 어떻게 살아가나
물론 종교적 해석으로는 이슬람의 가장 중요한 경전인 꾸란에서 돼지 고기 금기를 명시해 놓았으니 신자로서는 당연
히 따를 수밖에 없다.
이슬람의 음식 문화는 허용된 것(할랄)과 금지(하람)되어야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예언자 무함마드도 그의 하디스에서 ‘할랄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고, 하람은 금지하신 것이나 꾸란에 아무런
언급이 없는 사항은 모두 너희에게 허락되어 있느니라’라고 대답했다.
꾸란에 비친 음식 금기의 정의를 보자
믿는 자들이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부여한 양식 중 좋은 것을 취하고 그분께 감사하고 구분만을 숭배하라.
죽은 고기와 피와 돼지고기를 먹지마라.
그러나 고의가 아니고 어쩔수 없이 먹을 경우는 죄악이 아니다. 하느님은 진실로 관용과 자비로 충만하신 분이니라.
꾸란 2장 172-173절
이슬람이 처음 발생했던 아라비아의 생태적 환경과 삶의 방식을 고려하면서 돼지고기 금기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돼지고기가 오아시스 생태환경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의식주 동반자로서의 효율성이 낮은 것이다.
주요한 음식으로서의 고기, 인간에게 젖을 나누어 주지 못하는 한계, 수송과 이동의 불편함 등으로 걸림돌이 될 뿐
이다. 아라비아 사막 생활에서 낙타와 비교해 주는 비효율성과 혐오는 다음의 낙타편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유목사회에서 가축 사육의 선호도를 결정하는 요소로 수송과 이동기능, 의식주 동반자 기능, 전쟁 수행 보조 기능 등
이 고려되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낙타는 이동과 수송, 의식주의 해결, 전쟁 수행이라는 측면에서 오아시스 생태권에서 가장 중요한 생존
의 요소이다.
낙타는 400킬로그램 이상의 짐을 적재하고 물이나 식량의 보급없이 400킬로미터를 이동하는 놀라운 수송력을 지니
고 있다. 무려 17일 동안이나 아무것도 먹지 않고 견딜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낙타는 수송과 전쟁에서도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동물이다 목축과 제한된 오아시스 경작이 주가 되는 경제 순환
에서 교역은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는 주된 통로이다.
그러나 부족이나 국가 간에 평화가 유지될 때는 교역이 제대로 기능하지만, 평화 구도가 깨어지면 금세 약탈과 침략
으로 돌변한다. 어떤 경우라도 낙타는 필수불가결한 수단이다. 낙타 없는 교역이나 전쟁을 상상할 수 없다.
낙타는 생존과 동의어이다.
이슬람의 공동 축제는 크게 두 개다.
한달 간의 단식 뒤에 고통을 딛고 즐기는 이들 피트르와 평생의 의무인 성지 순례를 마치고 자신을 가다듬고 공동체
결속을 다지는 이들 아드하가 그것이다.
모든 이슬림들은 이슬람력으로 아홉 번째 달인 라마단 한 달 동안 단식을 한다.
단식의 목적은 앞에서 말한 대로 가진 자와 가난한 자 모두에게 똑같은 조건에서 이웃의 배고픈자와 빼앗긴 자의
아픔과 고통을 몸소 체험하자는 종교적 의미를 갖는다.
구호나 형이상학적인 가르침이 아닌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소득 재분배와 사회 공동체의 강화를 가져
오자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닷새간의 축제는 성스러운 종교적 의무와 완성리 뿐만 아니라 건강한 사회통합의
과정이다. 적의가 줄어들고, 서먹서먹했던 관계로부터 복원되는 볼라운 힘을 축제가 발휘하는 셈이다.
두 번째 큰 축제는 이들 아드하는 이슬람력 12월 첫 주에 행하는 성지 순례를 마감하면서 벌이는 이슬람권 전체의
축제이다. 이 순례를 하즈라고 한다. 하즈는 하느님의 집이 있는 성지 메카를 순례하는 무슬림들의 5대 의무 중 하
나이다.
할랄은 도살 방식에서 생명 존중이라는 회개 과정을 거친다.
첫째, 동물을 도살할 때 한 생명을 앗아가는 일이기 때문에 신의 이름 으로 잡는다.
“비쓰밀라”를 세 번 외치면서 인간을 위한 탐욕의 대상으로 한 생명을 의미 없이 죽이지 않도록 한다.
둘째는 고통을 가장 적게 하는 방식으로 도살한다.
셋째, 피는 부패하기 쉬울 뿐만아니라 생명의 상징이기 때문에 먹지 않는다.
넷째, 고기와 가죽, 털을 깔끔하게 해체하고 정리하여 완전한 순환을 이룬다.
다섯째, 판매를 목적으로 하지 않은 축제 때 잡은 고기는 삼등분하여 함께 나누는 미적을 강조한다.
또한 아주 어린 생명이나 사고로 죽은 동물들을 팔거나 취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할랄 식품이라는 것은 청정과 영성을 준 신뢰의 식품이라는 강점을 갖고 있다.
현재 유럽이나 심지어 우리 나라에 조차 할랄 고기를 사는 사람에는 무슬림보다도 일반들이 더욱 많다는 통계는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그러나 사실 할랄은 식음료 분야뿐만 아니라 금융, 보험, 서비스, 관광, 제약, 화장품, 바이오 산산업사료, 의복, 패션
등에도 적용되는 무슬림들의 일상을 지배하는 총체적 삶의 개념이다. 쉽게 말하면 할랄은 올바른 삶의 방식을 규정
한다.
이슬람의 할랄은 단순히 깨끗한 육류와 영성적 음식을 취하겠다는 개념을 훨씬 뛰어넘는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품격 있는 윤리 의식이 강하게 작용한다.
친환경, 동물 복지라는 새로운 인류의 라이프 스타일과도 상통하는 개념이다.
아랍 곳곳에 살짝 숨어서 살아 있는 바자르는 가장 본질적인 인간 내면을 만나는 곳이다.
바자르를 찾는 사람들에게 그 순간만큰은 문화의 차이와 색깔의 다름이 의미를 상실한다.
최대한 값싸게 사고 싶은 충동, 깎고 설득하고, 애원하면서 자신의 역량과 성격, 잠재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중동-아랍 문화를 단시간 내에 가장 압축적으로 느껴보고 싶을 때 아랍이나 터키, 이란, 파키스탄등지의 전통 바자르
로 달려간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작명에는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가 알라의 이름인 99가지 덕목을 따는 것이다. 알라는 친절하고, 아름답고 신실하고 정직하고 지혜롭고 전지전
능하고 위대하고 등 99가지 덕목을 이름으로 따오는 방식이다.
그 덕목들은 알라에게 속한 것이므로 이름 앞에 ‘종’이란 의미로 압둘(abdul-)을 붙인다.
즉 알라의 종인 압둘라(abdullah), 압둘 라흐만(자비), 압둘 라힘(자애), 압둘 알림(지혜), 압둘 카림(위대함), 압둘
자밀(아름다움)등이다.
둘째는 성서에 나오는 예언자들의 이름을 따는 방식이다. 놀아운 것은 마리아, 예수, 솔로몬 ,요셉, 요한, 아담 같은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이름들이 그대로 무슬림들의 이름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다른 문화권에서도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지명이나 고향, 행복, 사랑, 자연물(바다,장미,바위등)을 이름으로
사용하는 경우다. 유목 생활을 하는 아랍인들은 성이란 개념이 없었기 떄문에 자신의 이름 과 아버지 이름 사이에
빈(bin)이나 빈트(bint)를 붙여 부자, 부녀간을 표시하는 가계를 나타냈다.
현재는 많은 다른 이슬람 국가에서 성을 만들어 쓰고 있다.
이슬람에서 결혼은 사회 결속과 가족 연대를 강화하는 기능, 성적 욕구의 충족이라는 본능을 제도화 하는 의미를 갖
는다. 꾸란과 하디스는 인간의 덕목을 유지하기 위해, 종족을 번창하게 하기 위해, 인간 사이의 사랑과 동정심을 확
립하기 위해 결혼 생활을 장려하며 찬양하고 있다.
따라서 결혼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신성한 계약이며 종교적 의무이다.
이슬람권의 혼례가 다른 문화권의 혼례와 확연히 구별되는 것은 신분과 직업에 상응하는 중매혼, 일부다처의 허용,
결혼 지참금 제도, 사촌 결혼, 남성 위주의 결혼 생활 등이 있기 때문이다.
결혼 조건이 충족된 상태에서 쌍방의 합의가 이루어지면 신랑, 신부는 보호자와 각각 두 사람의 증인이 참석한 가운
데 까디(판관)에 의해 결혼의 합법성이 공표된다. 전통 관습법은 서면 양식 없이 판관에 의해 쌍방의 합의가 공동체
에 공표됨으로써 효력을 발생했다.
지금은 여성 보호 차원에서 모든 조건을 세부적으로 명시한 혼인 계약서가 작성되어 공개된다.
신랑이 신부를 데려오는 대가로 신부 측에 일정한 재화를 지불하는 마흐르 제도는 이슬람 이전 아랍 사회에서도 잔
존하던 유습이다.
애초에 마흐르는 부족이나 가문 간의 연대 표시를 위한 기능이 강했다.
그러나 이슬람 이후 이 제도는 종교적인 강제 규범으로 승화되어 순수하게 이혼이나 재해 시에 여성을 위한 최소한
의 복지금의 의미로 정착되었다.
따라서 마흐르는 남편과 함께 사는 동안에는 친정에서 관리하고, 필요할 때 여성에게 전달된다.
친정에서 이 돈을 임으로 처분할 수 없도록 이슬람 법으로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
마흐르는 결혼 성립을 위한 절대 필요충분조건이며, 쌍방이 합의하는 경우 액수가 조정되거나 3분의 2를 결혼시에
지불하고, 나머지 3분의 1은 이혼 때 지불하기도 한다.
이슬람에서 죽음은 종말이나 생명의 손상이 아닌 영혼과 육체의 일체감이 소멸함을 의미한다.
생명이 육체에 대한 영혼의 집중이라면, 죽음은 생명열의 소화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종말이 아나라 새로운 시작이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므로 기쁨이라고 본다.
즉 내세는 이승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차원적인 삶의 양태가 보장되는 곳이다.
이처럼 이슬람교에서의 죽음은 이승과 저승을 연결한 매듭이고, 새롭고 영원한 삶에 이르는 교량이다.
따라서 죽은 자를 화장하는 경우 영혼의 안식처가 소멸된다고 보며 매장하여 무덤이라는 영혼의 거주 공간을 만들어
주도록 가르친다.
또한 죽은자의 무덤을 방문하여 고인을 추모할 때 두 영혼의 교감으로 영적인 지도를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나아가 영혼이 분리된 이후에도 육체와 영혼간의 사랑은 끝나지 않고 상당기간 지속된다고 보기 때문에 사체에 대한
손상이나 무덤 위를 밟고 다니는 행위는 금기지된다.
이런 이유에서 이슬람 사회에서의 장례는 빠른매장(보통24시간이내), 간단하고 엄숙한 상례, 내세에 대한 강한 믿음
등의 특징으로 규정된다.
7장 이슬람 여성
이슬람권 여성의 경우, 여성의 지위와 권리가 7세기 당시 환경을 반영했다거나 그 후 여성들의 압력이나 조직적인
대응에 의해 획득되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명령받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서구 여성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이슬람권 여성의 지위와 권리인 것이다.
이슬람은 꾸란의 가르침에 따라 남성과 여성의 역할 분담을 강조하고, 신체적이고 정서적인 차이를 인정한다.
남성에게는 외적으로부터 가족을 지키고 경제적인 삶을 책임지는 의무를 부과하는 한편, 여성에게는 가족을 부양
하고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을 미덕으로 권장한다.
그러다 보니 이슬람 문화는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정치 참여를 상대적으로 힘들게 만드는 경향이 강했다.
여성에 대한 꾸란의 가르침을 살펴보자
첫째, 꾸란은 남녀 모두 알라의 피조물이며, 동등한 가치와 존엄을 가진 존재로 규정한다.
물론 남녀 동등 개념은 외적,물질적 가치의 동등이나 동격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꾸란은 흔히 구약에서 가르치는 여성의 창조기원설을 배격하고 있다.
즉 최초의 여성이 하느님에 의해 남성보다 열등한 가치로 창조되었다던가 남성의 갈빗대 하나로 창조되었다는 사실
을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 서로를 완성하기 위해서 ‘한줌 영혼’으로부터 남녀가 동격체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친다.
또한 토라나 구약에서는 이브를 사탄을 도와 아담으로 하여금 하느님께 불복종케 한 에덴동산의 유혹자로 다루지만
꾸란에서는 두 남녀가 똑같은 죄를 범하고 함께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는 벌을 받았으며 그들이 진실로 회개했을
때 차별 없이 용서를 받았가도 기록한다.
둘째, 꾸란에서는 종교적 의무 수행과 보상은 물론, 허용과 금기에서도 조금의 차등없는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부과
한다.
셋째, 남녀가 동등하게 교육받을 기회에 대해서도 꾸란은 물론,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에서 많은 예를 찾을수
있다.
넷째, 꾸란에는 법적 측면에서 여성을 보호하는 장치가 언급되어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여성의 상당한 법적 소유와 지위에 관한 명시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권이 주어지는 만큼 여성의 법적인 보호와 동등한 지위에는 책임의 완수라는 의무가 동시에 부과된다.
즉 여성의 과오에 대하여 꾸란은 남성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징벌을 명시했으며, 여성이 패해를 입었을 경우
남성과 똑같은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즉 꾸란 사회는 남녀 동등을 장려하는 차원을 넘어 그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다섯째, 꾸란은 양성 사회를 지향한다.
남녀 사이에 외적, 정서적. 지적 차이가 없다면 그들의 역할과 기능에 있어서도 당연히 차이가 없어야 된다는 서구
사회의 인식과는 달리, 꾸란은 남녀 모두에게 특별하고 고유한 책임이 분배되어 있다고 믿는 전통적인 양성 사회를
지지한다.
종교적 가치는 약자와 보호받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들에게 영적인 위안이 되기보다는 두렵고 피하고 싶은 도그마가
되어 인간을 괴롭히고 위협하기도 한다.
8장 이슬람 경제와 비즈니스 관행
거꾸로 생각하면 인샬라는 신의 뜻을 걸었기 때문에 노력에 따라서 반드시 성사될 수 있다는 강한 긍정의 메시지이
기도 하다.
무슬림들은 일상생활의 모든 과정이나 비즈니스까지 우주를 주관하는 알라의 의지에 의해 움직인다고 믿는 정명사
상이 무척 강한 편이다.
척박한 오아시스에서 제한된 생태계를 무대로 미래가 예측되지 않는 삶의 조건이 만들어낸 지혜이고 철학이다.
예측 가능한 순환 경제 패턴을 가진 농경정주 사회와는 달리 전쟁과 교역이 주된 삶의 방편인 아랍 유목 사회의 전
통적 삶은 온통 불확실성이다.
모든 성패를 알라에 거는 심성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러다 보니 두터운 신뢰가 축척되지 않은 외부인이나 이방인에 대한 불신이 무엇보다 강하다.
그들과 거래를 할 때는 신뢰가 필요하다. 시간을 두고 관찰하면서 신뢰를 쌓아간느 과정이 인샬라 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비즈니스의 귀재다. 시간 승부에 특히 강하다.
신의 뜻에 맡기고 기다리고 협상하면서 그들의 태도나 신뢰를 시험해 보는 것이다.
물론 가격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가려는 속셈은 기본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시간의 노예가 되는 것을 싫어한다.
정해진 시간 내에 반드시 해치워야 하는 시간 강박개념이 아니라 자신들이 시간을 창조해 간다고 생각한다.
외부자나 이방인의 위치에서 얼마나 빨리 내부자의 위치를 확보하는가가 관건이다. 일단 내부자가 된다면 신뢰가
형성되는 것이고, 비밀 보장은 물론, 이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된다.
지속가능한 비즈니스 파트너쉽이 형성되는 것이다. 아랍 인들이 한번 관계를 맺은 사람과 오래 거래하고, 새로운
공사를 맡기도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인샬라는 기다림의 미학이다.
이슬람은 비즈니스 종교다. 정당한 거래를 조장하고 공정한 이익을 매우 강조하는 종교다.
1)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임하라. ‘아랍에서 서두르는 것은 상대를 모독하는 것이다. ’내일 해도 되는 일은 철저히
내일로 미루자‘ 인내가 최고의 미덕이다.
2)신뢰를 줄 수 있는 확실한 카드를 준비하라
3)아랍에서는 과거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4)동시다발적인 협상 방식을 존중하라
5)그들에게 흥정은 생활이고 익숙한 오락이다.
6)아랍 인들은 생사의 선택을 자주 내려야 하는 오아시스의 험난한 생활습관 때문인지 ‘모른다’와 ‘잘못했다’라는 표
현을 잘 쓰지 않는다. 목숨걸고 길을 찾아 떠나는 카라반들에게 ‘모른다’는 것은 죽음이고 절망일 수 있다. ‘잘못했다’
는 것은 용서를 구한다기 보다는 패배에 대한 시인이고 비굴함의 표현일 수 있다.
그래서 아랍인들은 부정적인 표현보다는 습관적으로 ‘예’라는 말을 즐겨 쓴다
7)친한 사이라도 문서와 거래 관계는 분명히 하라. 특히 아랍에서는 인간적인 신뢰가 깨지면 거래가 언제든지 뒤집
어질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
8)문화적인 혐오나 종교적인 금기에 조심한다.
9)자존심과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유목 문화의 전통이 사고방식과 삶에서 아직도 펄펄 살아 움직인다.
10)한없이 소탈해보이다가도 일순간 예의와 격식을 엄격하게 따진다.
11)아주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국내 정치나 최고 통치자 이야기는 삼가는 것이 좋다.
12)아랍에서 서비스는 남성의 몫이다.
13)아랍 남성들의 속도감에 주의하라. 지상에서는 한없이 느리던 아랍인들이 말만타면 최고 속도로 빠르게 달린다.
자동차 경주하듯이 과속하는 습관 때문에 인구 비례로 스포츠카가 가장 많이 팔리는 지역이 아랍이며 대형사도고
많이 발생한다. 그들은 ‘낙타모드’와 ‘휴식모드’를 구분한다.
이슬람 은행은 이자 없이 운영된다. 이슬람 경제에서 고리대금은 철저하게 금기이다.
꾸란에서도 돈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것을 강하게 비난한다.
사악한 행위로 보기 때문이다. 대신 이윤은 철저히 보장된다. 자신의 노동이나 노력, 투자와 지식을 통해 얻는 이익
은 신성한 것으로 폭넓게 인정한다. 이기는 금지되지만 이윤은 인정하는 것이 이슬람 경제의 골격이다.
자본과 노동사이의 갈등과 투쟁의 과정에서 이슬람은 노동의 편에 서고, 고리대금 금지를 통해 자본과 노동의 균형
을 회복하며 노동이 자본에 예속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이것은 노동의 고귀함을 중요시하는 이슬람의 기본 가르침과 맥락을 같이 한다.
9장 이슬람을 빛낸 문화-예술인
메블라나 잘랄레딘 루미(1207-1273)는 이슬람 수피주의의 큰 흐름인 메블라나 종단의 창시자로 중세 이슬람 세계의
지적 혁명과 영성운동에 한 획을 그은 인류의 영적 스승이자 대사상가 이다.
그들은 ‘적게 먹고 적게 마시며 아무렇게나 옷을 걸치고’ 기존의 권위와 형식에 맞섰다.
그들은 수피하 불렀으며, 명상과 기도를 통한 다양한 방식으로 이슬람의 가르침에 다가가려 했다.
십자군과 몽고군에 의한 약탈과 살육으로 고통받는 민중들을 위한 영적인 돌파구를 마련해 준 것이 루미였다.
아랍 어로 쓰인 꾸란은 비아랍권인 터키와 이란을 거쳐 가면서 민중들이 접근하기에 너무나 어려웠다.
더욱이 오해와 왜곡을 막기위해 꾸란을 다른 외국어로 번역하는 것이 금지되면서 중앙아시아 튀르크족과 이란 인
사이에서 꾸란은 가진자와 엘리트 지배 계층만을 위한 신앙적 도구로 전략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잘랄레딘 루미는 꾸란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도 누구나 일정한 영적인 수련을 통해 신의 영역에 들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았다. 세마 춤은 경전 중심의 이슬람에 대한 반발이자 민중들을 위한 명상과 엑스터시를 통한 영성 수련법의
일환으로 바로 잘랄레딘 루마에 의해 창안된 신비주의 춤이다.
그의 사상은 민중들에게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비아랍문화권인 중앙아시아 전역에 정신적으로 커다란 영향
을 끼쳤다. 무엇보다 토착종교와 관습들을 존중한 그의 사상은 관용과 상생이라는 두 축으로 이슬람을 재해석 하였다.
심지어 비무슬림인 이교도나 무신론자들에게 까지 구원의 손길을 펼쳐 인류 공동체가 용서와 화해를 통해 함께사는
진정한 지혜를 제시하였다.
이슬람이란 종교가 전파 과정에서 아랍이라는 민족적 옷을 벗고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토착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포용력을 갖추고 이슬람을 퍼트린 수피주의가 중심에 있었다.
나스레틴 호자(1208-1284)는 13세기 걸출한 터키 인 민중 철학자이며, 그의 일화가 <나스레틴 호자 이야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나스레틴의 애칭이 된 호자는 터키 어로 ‘선생’이란 뜻이다.
이븐 바투타(1304-1368)는 이슬람 세계가 배출한 14세기 최고의 여행가이자 학자였다.
우리 사회가 안고있는 서구 중심적인 지적 편중의 대표적인 예가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이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어 중세 세계 여행기의 대명사로 자리 잡는 동안, 일반 대중들
에게 이븐 바투타는 겨우 그 이름만 전해 오는 수준이었다.
방대한 자료와 여행기의 깊이, 방문한 지역 정보의 신뢰도 등에 비춰 <동방견문록>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이븐 바투
타의 여행기는 특히 아랍어 원전의 난해함 때문에 서구학자들에게는 큰 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초간 이후 600녀 년이 지난 지금까지 프랑스어판만이 완역되었다는 것이 단적으로 이를 증명해 준다.
오마르 카얌(1048-1131)은 이슬람 세계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시인이자 대학자이다.
고대 성인들이 그러했듯이 아마르 카얌도 시만 쓰는 시인은 아니었다. 그는 훌륭한 업적을 남긴 뛰어난 수학자, 천문
학자, 철학자였으며, 기계와 지리학, 음악에 관한 글도 남겼다.
그는 정확한 태양력을 만들기 위해 라이에 새로운 천문대를 세우고 연구에 몰두한 결과, 술탄의 칭호를 딴 잘랄리력
을 완성시켰다. 이 역법은 20세기까지 이란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는데, 카얌시대보다 500년 후에 정리된 서양의
그레고리력보다 정확해 3770년에 하루의 오차가 발생할 정도였다.
오마르 카얌의 시는 인간의 무한한 자유와 사랑을 노래하는데 근엄한 종교적 벽을 뛰어넘은 깊은 상징성을 담고 있다.
얼마나 더 많은 모스크, 더 많은 예배와 단식이 있어야 하나?
차라리 술 마시고 거리에서 구걸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카얌, 와인을 마셔라
그러면 곧 흙으로 빚어진 너의 몸뚱아리가 술 컵을
술병을 언젠가 술 단지를 만들 때
장미가 활짝 핀 소식을 듣게 될 그때,
그때가 바로 때이거늘, 내 사랑, 와인을 부어라
궁전이고 정원이고 천국이고 지옥이고
이건 다 지어낸 거짓말이니,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나
나깁 마흐푸즈(1911-2006)는 아랍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이집트의 현대문학 작가다.
그는 이슬람 종교에 대한 신성모독을 담은 살만 루시디의 행동과 작품의 내용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문학 작품에
대한 표현의 자유는 누구의 간섭 없이 보호되어야 한다는 준엄한 작가 정신을 지켰다.
그느 ‘한 작가에게 죽음을 명하는 것이 이슬람과 무슬림들에게 신성모독보다 훨씬 큰 해악을 끼친다.“라는 유명한
입장을 세상에 알렸다.
10장 한국과 이슬람
아랍상인들의 고려 진출을 적고 있는 [고려사]를 보자. 현종 15년(1024)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대식국(아라비아)에서 열라자 등 100명이 와서 왕을 만나 토산품을 바치니, 왕이 그들을 극진하게 대접하게 하였다.
또 그들이 돌아갈 때 금, 은, 옷감등을 선물로 주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음력 정월 초하룻날 경복궁 경회루에서 문무백관이 도열해 있는 가운데 꾸란을 낭송했다
고 한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한반도에 정착해 살고 있던 이슬람 지도자들은 궁중 하례 의식에도 초청을 받아
정례적으로 참석하였다. 이를 ‘회회조회“라 불렀다.
그들은 궁중조회에 참석하여 꾸란 낭송이나 이슬람식 기도를 통해 국가의 안녕이나 임금의 만수무강을 축원했으니
이를 ‘회회송축’이라 했다.
이슬람 역법의 원리를 가져다 중국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맞게 고쳐 썼으므로 그들에게는 맞고 우리에겐 맞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정인지가 이슬람 역법의 원리와 이슬람 과학을 배워 우리 역법의 일몰 시간, 동지 같은 것을 모두
대입해서 만들 것이 <칠정산외편>이다. <칠정산외편>은 오는날 우리가 쓰는 음력의 기초가 되었다.
11장 끝나지 않은 전쟁
지하드는 이슬람의 성전이다. 그러나 지하드의 원래 의미는 단순한 성스러운 전쟁을 수행한다는 외적 개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하드 개념을 혼동하면서 오히려 왜곡된 의미가 본질을 덮는 현상이 팽배할 정도다.
그러다 보니 오는날 서구 사회에서 가장 관심을 끌고 오해 받고 있는 이슬람의 개념 중 하나가 지하드일 것이다.
아랍어의 지하드의 언어적 의미는 ‘분투하다. 노력하다. 힘쓰다’이다.
지하드는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서 개개인의 성실한 분투를 의미하며, 사회에서 선을 행하고 부정과 불법, 압제, 악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이다. 이러한 노력과 분투는 사회,경제.정치 분야에서 올바른 방향으로 정진함을 의미한다.
지하드라는 단어는 꾸란에서도 33번이나 언급된다. 대부분이 폭력보다는 믿음, 참회, 선행, 의무, 윤리와 같은 이슬
람의 기본 개념들과 함께 사용된다. 이처럼 지하드는 하느님의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자신과의 내적 투쟁이 본질이다.
여기서 이슬람이 다른 세상을 보는 관점도 살펴보자. 이슬람은 세상을 두 개로 나눈다.
‘dar al-islam’, 즉 ‘이슬람의 세계’와 dar al-harb’, 즉 전쟁의 세계다. 이슬람의 세계는 평화와 질서가 지켜지는 정의
의 사회이고, 전재의 세계는 혼란과 인간의 기본 양식이 침해되는 세상이다.
따라서 모든 무슬림은 이슬람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신의 뜻에 따라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슬람을 믿지 않는 세상을 모두 공격이나 파괴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꾸란의 기본 정신은 자신과 다른 생각, 다른 모습을 가진 이교도라 할지라고 그들이 종교와 문화적 전통을 보호하고
존중하라고 수없이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지하드란 모든 수단이 기능을 멈추었을 때, 자신과 종교를 지키기 위해 폭력에 호소하는 것이다.
폭력은 마지막 수단이고 모든 가능성의 문이 닫혔을 때 사용하는 도구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슬람 세계의 일부 급진 세력들은 이미 서구와의 대화채널이 닫혔다고 선언하고 최후의 수단인 무력
투쟁만을 일삼으며 지하드라고 강변하는 것이다.
모든 대지하드의 문이 닫혔을 때, 소지하드인 전쟁이나 폭력이 동원될 때 지켜야할 규범들이 꾸란과 이슬람 율법에
잘 나타나 있다.
너희를 상대하여 싸우는 자에 대하여 하느님의 이름으로 싸워라. 그러나 침략하지 마라
하느님은 침략자를 사랑하지 않으신다. 꾸란 2장 190절
`전쟁 지하드는 첫째 올바른 하느님의 길을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
둘째 적이 먼저 무기를 들고 무슬림을 공격할 때, 셋째 적이 싸움을 중지하면 무슬림도 곧 무기를 놓아야 한다. 등의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원칙아래 이슬람 율법은 더욱 세부적으로 지하드 전쟁의 원칙을 천명하고 있다.
첫째, 지하드는 개인이나 단체가 아닌 오직 국가만이 선포할 수 있다.
둘째, 지하드 수행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해서는 안된다.
셋째, 지하드 수행과정에서 어떤 명분으로도 무슬림을 살해해서는 안 된다.
넷째, 무슬림의 권익과 자유로운 종교새활이 보장되는 나라에 대해 지하드를 선포하고 싸울 수 있다.
따라서 오사마 빈 라덴의 지하드와 9.11테러는 이슬람 율법학자들의 합의인 이즈마를 통해 샤리아, 즉 이슬람 법대
로 한다면 반이슬람적 행위이고 명백한 유죄인 셈이다.
알 카에다가 건전한 이슬람 주류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결정적 이유다.
아랍인과 유대 민족은 같은 성서의 백성이자 같은 셈계 종족으로서, 같은 계통의 셈어계 언어를 사용하며 오랜 역사
적 유대 관계 속에 살아왔다. 함께 유일신을 믿고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한느 척박한 땅에서 제한된 생태계를 공유
하며 유목과 목축을 주업으로 살아온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민족이다.
구약과 꾸란에서 두 민족은 아브라함을 공통조상으로 받들고 있다.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어 몸종인 하갈과 혼인하여 이스마일을 낳고 다시 본부인인 사라에게도 태기가 있어 자식을
낳으니 그가 이삭이다.
이삭은 유대민족의 조상으로 후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낳고, 이스마일은 아랍 족의 조상으로 그 가문에서 무함마드가
탄생하여 이슬람으로 이어졌다.
이런 역사적 친근 관계를 가진 두 민족이 싸우게 되는 역사는 전혀 다른 무대에서 이루어졌다.
그 무대는 바로 유대 민족을 박해했던 기독교 유럽이었다.
기원전 1000년경에 유대 민족은 이스라엘 왕국을 이루며 살고 있다가 기원전 7세기에 아시리아에 빼앗겼다.
그러다 또다시 국가를 세우지만, 기원후 1세기에 유대왕국은 로마에 멸망당했다.
이후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하면서 건국할 때 까지 2000년간 유대 민족은 국가없는 유량생황(diaspora)을
해 왔다. 처절한 유량의 무대는 유럽이었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이 아닌 유럽에서 박해와 고문과 민족적인 차별을 당하면서 살아왔다.
313년에 기독교가 공인된 이래, 적어도 16세기 까지 유럽에서 유대인은 악마와 동일시 되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유대민족은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먹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저주받은 민족이었다.
종교개혁 시기에 유대 인의 위상은 크게 향상되어 악마의 지위에서 탈피했다.
그러나 유럽 인의 반유대 감정은 너무아 뿌리 깊어서 16세기 종교개혁의 신봉자 였던 마르틴 루터 조차도 그의 저서
<악마론>의 서문에서 ‘악마를 제외하고 가장 흉측하고 광포한 우리의 적은 유대인 이다“라고 서슴지 않고 단언할
정도였다.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전 세계 유대인들이 모여 제1회 세계유대인대회를 창설하고 비밀 강령을 채택했다.
팔레스타인 유대 국가를 창설하는 데 온 유대인들이 협력한다는 내용이었다.
1915년 12월 후세인-맥마흔 서한으로 알려진 비밀협상으로 제1차 대전중에 영국은 독일에 대항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 식민치아의 아랍인들을 끌어들였다. 영국과 함께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우는 대가로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지역에 독립을 보장해 주었다.
1917년 영국 외상 발포어는 영국의 은행 제벌 로스차일드와 비밀리에 회동, 소위 발포어 선언이라는 비밀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서 유대인의 전쟁 참여를 대가로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국가 창설을 약속했다.
1916년 5월 16일 영국 대표 사이크스와 프랑스 대표 피코 사이에 비밀리에 체결된 사이크스-피코협정의 골자는
전후 중동 지역의 분할에 관한 것이었다. 이 비밀 협정에 따르면, 프랑스는 시리아의 해안 지대와 그 북부, 영국은
팔레스타인과 바그다드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1947년 11월 29일 팔레스타인 지역을 분리하여 아랍과 유대 두 개의 독립국가로 분할하자는 안이 유엔에서 통과되
었다. 당초 아랍인이 중심이 되는 팔레스타인 연방안이 우세했으나 미국의 집요한 제3세계 회유 작전으로 결국 연방
안 대신 분할안이 퉁과되었다.
이 분할안은 전체면적의 56페센트를 유대인에게 곡장지대의 80%, 아랍인 공장의 40%가 유대인에게 배정되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분노와 좌절은 극에 달하였다.
1948년 5월 14일 유대인들은 아랍인을 몰아낸 곳에 이슬라엘 국가를 건국했다.
세계는 2천년 유량 생활을 마무리하고 역정을 딛고 일어선 유대인들의 승리에 동정과 축하의 눈길을 보냈다.
바로 그날 자신의 고향에서 쫒겨난 수백만면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응어리진 분노로 조국 탈환을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동안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땅이 아닌 유럽에서 온갖 민족적 차별과 종교적 박해를 감수하면서 굳건하게 터전을
다졌다. 유대인 박해와 나치 학살로 이어지는 유대인 말살 정책은 유럽인의 죄과였다.
왜 유럽인들이 희생시켰던 유대인들에 대한 책임을 아무런 역사적 인과 관계가 없는 아랍인들에게 전가시켜야 하나?
팔레스타인 지역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쿠르드족은 아라크 북부 유전 지대와 터키 동남부 티그리스 강 상류를 포괄하는 쿠르디스탄에 살고 있는 세계 최대
의 나라 없는 유량 민족이다.
인족적으로는 이란계 백인이고, 언어적으로는 페르시아어에 가장 근접한 인도-유럽어족에 속한다.
보스니아 사태는 러시아 정교권의 세르비아와 카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
이슬람에 속한 보스니아가 충돌한 20세기 인류 역사에 가장 치욕적인 기록을 남긴 야만과 가치 혼돈의 전쟁이었다.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동유럽 점령과 이슬람화 물결 이후 잠재되어 왔던 오랜 역사적 응어리가 한꺼번에 표출되면서
민족의 이름으로, 또 종교의 이름으로 서로를 죽고 죽인 참극이었다.
구소련이 붕괴되면서 새롭게 재편되는 과정에서 분출한 거대한 동유럽 문화권의 지각 변동이기도 했다.
21세기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문명 국가 유럽은 바로 이웃에서 자행되는 가공할 인종청소를 방치함으로써 ‘문명 범
죄의 공범자’라는 의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캅카스 지역에 사는 인구 130만명의 소수 민족 체첸이 강대국 러시아에 대항해 조금도 굽힘없이 독립운동을 펼치며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체첸 민족이 거주하고 있는 캅카스 지역은 그야말로 인종,언어.종교의 전시장이라고 불릴만하다.
우리나라 강원도 보다도 작은 15500제곱 킬로미터에 불과한 이 지역에는 50여개의 민족이 40여개의 언어를 구하하
며 이슬람. 그리스도교,유대교 및 토속종교를 믿으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지정학적으로도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위치해 있고, 유라시아와 중동을 잇는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어서 역사적
으로 외세의 침략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1980년 후반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캅카스 남부 지역의 아제르바이젠, 아르메니아, 그루지아가 각각 러시아로부터
독립했다. 이런 기회를 기다려 체첸 자치 공화국도 1991년 11월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모스크바 정부는 이 지역에 매장된 약6천만톤 규모의 엄청난 석유 이권, 흑해로 이어지는 송유관이 통과하는
카스피 해 유전의 경제적 이점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파병했다.
이것이 기나긴 레시아-체첸 분쟁의 시작이었다.
카슈미르는 히말라야의 눈 녹은 물이 흘러 비옥한 토지를 일구는 세상에서 가장 청정한 지역이자 장수촌이고, 실크
로드가 지나가는 문명의 교차로이다.
카슈미르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고원에서 자라는 염소 털로짠 모직 캐시미어로, 한때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또한 천연자원이 풍부하고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어 세계적인 관광지로 각광을 받아왔다.
영국의 오랜 식민 통치가 끝나고 1947년 인도 대륙이 무슬림지역인 파키스탄과 힌두 지역인 인도로 각각 분리독립
했다. 이때 무슬림들이 대다수인 지역은 파키스탄, 힌두교도가 대다수인 지역은 인도에 귀속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당시 카슈미르 지역은 전체 인구의 60%이상이 무슬림이었음에도 힌두 마하라자(토후,왕) 하리 싱이 주민들
의 의사에 상관없이 카슈미르를 인도에 귀속하는 문서에 서명하였다.
무슬림들은 즉각 파키스탄으로의 귀속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파키스탄이 동족보호를 내세우며 군대를 파견
했다. 이로써 인도와 파키스탄간에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하였다. 카슈미르 비극의 시작이었다.
카슈미르 지방은 정치.군사.전략적 측면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에게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첫째, 카슈미르 지역이 전략적인 방어선 구축을 위해 꼭 필요한 지역이다.
둘째, 인도의 세속적인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과격한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 아프카니스탄과의 완충지대에
있는 카슈미르 지역에 대한 통제가 매우 중요하다.
셋째, 카슈미르의 자연환경에 대한 중요성 및 힐말라야에서 흘러나오는 거대한 수자원 확보가 중요하다.
위구르는 중국이 아니다. 1949년 이후 중국 공산당이 강제 점령하여 중국 땅에 편입시킨뒤 지금껏 지배하고 있다.
중국은 위구르 지역을 새롭게 빼앗은 땅이라 해서 신장(新장)이라 부른다.
그러나 위구르 사람들은 자신의 땅을 투르키스탄으로 부른다. ‘튀르크인들의 땅’이란 뜻이다.
위구르 인은 적어도 5천 년간 그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유목과 목축, 정주 생활을 번갈아 하며 살았다.
실크로드라는 문명의 이동로를 따라 인류가 창안했던 가장 첨단의 기술과 정보, 새로운 문화를 호흡하며 인류 역사
에 기여했다. 그들의 조상은 흉노와 돌궐 제국을 세웠다.
특히 돌궐은 중국의 조공을 받는 중앙아시아 최대의 제국으로 고구려는 물론 멀리 비잔틴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과도 교통할 정도로 강성한 국가였다.
중앙아시아 중심 지역에서 출발하여 840년 키르기스에게 멸망할 때 까지 위구르 제국은 중앙아시아의 실질적인 실
력자로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 있었다.
문화적으로 위구르 인들은 실크로드 상인인 소그드 인들로부터 마니교를 받아들였으며, 그들의 수준 높은 문화는
후일 몽골 젝국의 형성에 두터운 원동력이 되었다.
무엇보다 많은 위구르 인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임으로써 중앙아시아 이슬람 파고의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위구르 인들을 지칭하는 회홀, 회골에서 회교라는 말이 연유된 것도 이 때문이다.
실크로드 동서양을 이어 준 기원전 고속도로 비단길(Silk Road)이라고 일컫는 실크로드는 고대 중국과 서역 각국
간에 비단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무역을 하면서 정치ㆍ경제ㆍ문화를 이어 준 교통로의 총칭이다.
총길이 6,400㎞에 달하는 실크로드라는 이름은 독일인 지리학자 리히트호펜(Richthofen, 1833~ 1905)이 처음 사용
했다. 중국 중원(中原) 지방에서 시작하여 허시후이랑(河西回廊)을 가로질러 타클라마칸 사막(Taklamakan Desert)
의 남북 가장자리를 따라 파미르(Pamir) 고원, 중앙아시아 초원, 이란 고원을 지나 지중해 동안과 북안에 이르는 길
이다.
그러나 위구르 인들 대부분은 새로운 세상을 찾아 서쪽으로 이동하여 후일 셀주크 터키와 오스만 터키 제국을 건설
하였다. 중앙아시아 서쪽 옛 땅에 뿌리를 내린 위구르 사람들이 지금의 동쿠르키스탄(신장)에 살고 있는 위구르 인
들이다.
1990년 구소련이 붕괴되자 1991년을 기점으로 서투르키스탄의 튀르크족들은 각각 우즈베키수탄, 카자흐스탄, 키르
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으로 독립을 쟁취했지만, 중국 치하의 위구르 인들만은 55개 소수민족의 하나
로 아직도 고통 속에 살고 있다.
중앙아시아 [ Central Asia, 中央─ ]
아시아 대륙 중앙부의 광대한 지역.범위는 일정하지 않으나 작게는 파미르고원을 중심으로 동(東)투르키스탄으로
불리는 중국의 신장웨이우얼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와 서(西)투르키스탄으로 불리는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
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의 4개 공화국 및 카자흐스탄 남부를 합친 지역을 가리키며, 넓게는 내 ·외몽골(몽골
과 중국의 네이멍구자치구), 중국 칭하이성[靑海省], 티베트고원(高原), 아프가니스탄까지를 포함한다.
이는 강물이 외양으로 흘러나가지 않는 내륙 아시아와도 거의 일치한다.
중국은 왜 위구르를 포기하지 못하는가?
첫째, 중국 행정구역 가운데 가장 큰 성인 신장 지역은 중국 전체 면적의 6분의 1이나 되고 석유, 천연가스 등 에너지
자원과 풍부한 광물이 매장된 중국의 가장 중요한 자원의 보고다.
둘째, 위구르 지역은 주요한 전략적 핵 실험장으로 중국의 국력과 미래 자산의 운명이 걸려있는 곳이다.
셋째, 위구르 자치구는 러시아를 비롯하여 카자흐스탄, 파키스탄, 우즈베키스탄등 8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변경
무역도 활발하다. 무엇보다 중국이 실크로드를 따라 서방세계로 나가는 중요한 출구인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로서 21
세기 거대 중국을 이루기 위한 든든한 거점이다.
넷째, 위구르의 소요와 독립은 중국 내 약5천만명에 달하는 회족 공동체의 이탈과 탈중국화를 촉진시킬 수있다.
이 모든 시나리오는 가까운 장래에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의 강국으로 부상하고자 하는 중국의 거대 지배 담론
자체를 무산시킬수 있다.
1521년 마젤란의 필리핀 탐험이후 스페인은 1898년 미국에게 2천만 달러에 필리핀을 넘길 때까지 200년 이상 이
나라를 지배했다.
그동안 필리핀은 무슬림들이 살고있는 남부 도서 지방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주민들이 카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아시아의 가장 견고한 카톨릭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필리핀 남부에 사는 700만이 넘는 무슬림들은 16세기 스페인에 의해 식민지가 되기 이전의 이슬람 술탄 왕
국의 재건을 꿈꾸며 살았다.
모로(moro)라 불리는 필리핀 남부의 무슬림들은 민다나오와 술루 군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면서 필리핀 정부로부터
차별과 오랜 박해를 경험해 왔다.
말레이시아와 필리핀 사이의 국경을 이루는 술루 제도는 인구의 97퍼센트가 무슬림이다.
그들은 필리핀 주민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역사와 문화적 전통을 가진 집단이다.
모로 무슬림들의 습속은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 등과 더 유사하고, 문화적으로는 중국 문화와 아랍 문화가 교차
한다.
12장 오늘날 이슬람 세계
서구에서 주장하고 서구 언론에서 일반화해 버린 이슬람 원리주의는 꾸란과 하디스 같은 이슬람 경전의 구절과 가
르침을 충실히 따르면서 타락한 서구 사회는 물론, 변질된 무슬림 사회를 뒤엎거나 변화시키려는 급진적 사상운동을
일컫는다.
동시에 현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시대착오적인 돌출행동과 과격한 무장 투쟁 등으로 지구촌 평화에 가장 큰 걸
림돌이라는 고정관념을 양산시킨다. 이는 극히 일부의 극단적 행위를 일반화시키는 고도의 전략적 시나리오이다.
역설적이게도 종교적 원리주의가 문제가 된 것은 19세기 기독교 세계였다.
기독교의 근본 교리인 성서의 무오류성과 그리스도 재림등을 부정하는 성서 비판학이 대두하자 기독교 근본 교리를
지키기 위한 과도한 반응으로 기독교 원리주의가 기승을 부리게 된 것이다.
이슬람 원리주의란 말은 영국학자 와트가 그의 저서 <이슬람 원리주의 와 근대화>라는 책에서 이슬람의 전통적인
세계관을 교조적으로 해석하고 실천하려는 움직임에 갖다 붙인 이후, 서구에서 일반적으로 과격한 이슬람 운동 전부
를 지칭하는 용어로 통용되고 있다.
이슬람 세계의 개혁운동은 크게 두 흐름으로 파악된다.
서구에게 지배 당하고 왜곡된 무슬림 사회의 현상 타파를 위해 무슬림들의 이상향인 무함마드 예언자 이후 정통 칼
리파 시대로 돌아가기 위한 영적인 다짐으로 꾸란과 순나에 충실한 삶의 회복을 그 중심에 두고 있다.
하지만 실행 방식에 있어서는 천차만별이다.
큰 흐름의 하나는 이슬람의 전통과 가르침을 두텁게 강화하면서도 서구와의 공존과 협력을 도모하는 사회적.지적
운동의 방향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서구의 바이러스를 오늘날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단정하고 과감하게 서구를 버리고 이슬람의 원론적
가르침에 충실하자는 완고한 영적 운동이다.
이슬람 개혁운동의 흐름은 18세기 사우디아라비아의 이념적 근간이 된 와하비즘으로 이어졌다.
와하비즘 [ Wahhabism ]
18세기 중엽 아라비아반도에서 출현한 이슬람 복고주의 운동이자 사회·정치 운동으로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의 건
국이념의 기초이자, 근대 이슬람 부흥운동의 효시이다.
현재 주류적 이슬람 운동의 중심 담론은 이슬람의 가치와 가르침을 단단한 뿌리에 두면서도 서구의 앞선 기술, 과학,
심지어는 제도까지도 과감하게 수용하여 서로가 화합하고 공존하는 길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유럽의 무슬림 인구는 2007년 통계로 약5천 300만 명에 달한다. 유럽연합 가입국 중심인 서유럽의 무슬림만 따져도
약 2천만 명에 달한다. 이제 이슬람은 유럽의 두 번째 종교가 되었다.
프랑스 인들은 완벽한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아프리카 흑인을 헌법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무슬림 여학생이 히잡
을 두르고 등교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1990년대 초반에 유럽 이민자의 3분의 2가 무슬림들이었다.
유럽의 각국 정부는 이민자 중 특히 무슬림 이민자들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이들이 걱정하는 것은 인구와 문화의 양면에 나타난다.
독일에 거주하는 터키인이건 프랑스에 거주하는 알제리 인이건 간에 이슬람 공동체는 현지 문화에 동화되지 않았
으며 앞으로도 그럴 조짐을 보이지 않아 유럽인들을 불안에 빠뜨리고 있다.
“이슬람 공동체가 유럽의 국경선을 장식하면서 유럽 공동체 내에서 열세번째 나라로 부상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전
유럽에 팽배해 있다.”라고 1991년 도므나슈는 지적했다.
미국 이슬람의 역사는 생각보다도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진출과 그의 항해를 도운 스페인 무슬림 무어 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콜롬버스 항해 당시까지만 해도 무스림 과학자와 선원들의 협조는 거의 절재적이었다.
미국에서의 생활과 사회적 행위 패턴은 직장에서 하루 다섯 차례 예배를 자유롭게 보거나 금요일에 모스크로 가서
주일 합동 예배에 참석하는 것조차 어렵게 만든다.
미국 사회 주류의 논점은 이슬람과 테러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며 왜곡된 일부 급진주의자들이 반미 행동이 문제
라는 쪽으로 모아지지만, 9.11을 일으킨 집단의 종교라는 심정적 적대감은 미국 사회 전역에 넓게 퍼져 있는 상황이
다. 이러한 분위기속에서 소수 민족으로서 유리한 삶의 적응 전략을 선택해야 하는 무슬림들은 이슬람의 서구화 및
서구적 가치와의 접목을 더욱 서두르고 있다.
미국적 가치에 대한 애국적 입장과 이슬람 세계에 대한 종교적 연대감 사이에서, 무슬림으로서 신앙과 종교적 가르
침을 지속해야 하는 고통과 모순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오는날 미국 무슬림들의 현주소이다.
아랍-이슬람 세계는 이슬람 이전부터 다양한 이념들이 함께 하는 경험을 오랜 역사를 통해 축적해 간 공존의 현장이
었다. 그래서 일찍이 중동 인류학자 칼톤 쿤은 중동-아랍 사회를 ‘모자이크’사회라고 표현하면서 민족 집단간의 뚜렷
한 노동 및 직업의 분화, 다양한 복장과 언어, 종교에 대한 관용 등으로 갈등 과 반목보다는 이질적인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 불편한 동거에 익숙한 사이라고 정의했다.’
더 나아가 전통적인 무슬림 사회학자들은 ‘용광로’이론을 주장한다.
다양한 문화적 요소가 이슬람이라는 용광로 속에서 용해되어 피아의 구분 없는 종합적인 문화 토양으로서의 중동-
아랍을 규정하고 있다.
중동 근대사를 면밀히 검토해 보더라도 갈릴리 호수와 요르단 강이라는 제한된 생태계를 공유하면서 토착 유대인과
아랍 인들이 1900년 가까이 분쟁과 큰 갈등없이 공존해 온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20세기말 이슬람권에서 논의되었던 문명 간 대화 노력은 서구 주도의 대화 노력과는 약간 차이가 난다.
그것은 문화다원주의적 입장에서 이슬람 문화가 서구 문화와 동등하고, 그 다양성이 문화상대주의적 입장에서 그대
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당위에서 출발하였다.
진정한 의미에서 문명 간 대화가 이루어지고 그것이 상호 이해와 각각의 사회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선행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같은 상황, 같은 주제끼리 대화와 이해관계가 전제되어야 한다.
명제의 동일성이 모호한 상태에서의 대화는 표피적이고 대화를 위한 대화에 머물고 말 뿐만 아니라 어떤 일방의 주장
을 펼치는 장이 될수도 있다.
둘째, 대화에는 목표의식과 철학적 방식, 방법론적 합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① 기존 문제에 대한 절충과 상호 이해가 가능하고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대화여야 한다.
② 대화의 목표는 가치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각각의 입장을 설명하고 이를 다른 견해와 비교해 보는 기회의
장이 되어야 한다.
③ 명료한 대화의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④ 문화간,종교간 소통과 함께 정치,경제,외교적 협력 대화가 동시다발적으로 병행되어야 한다.
셋째, 문화 다원주의, 다문화 사회, 문화상대주의에 입각하여 공존하는 모든 문화는 본질적으로 동등하고 상호 존중
받는 상태에서 문명 간 대화에 참여하고, 나아가 논의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넷째, 대화의 방향이 과거의 관계에 얽매이는 것이아니라 새로운 주제로 글로벌 이슈를 중심으로 조건없이 참여하
고 논의하는 장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자기와 다른 색깔과 신분을 가진 사람들과 한울타리에서 살아가는 데 종교만큼 효율적이고 실질적인
통합의 매개체를 찾기 힘들다.
그러나 동시에 자기와 다른 신념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데 종교만큼 다름과 차이를 극대화 시키면
서 공동체를 산산조각 내는 역기능적 요소도 드물 것이다.
더욱이 그 종교가 일신교인 경우에는 폐쇄성과 자기 종교 절대주의의 성향이 훨씬 강하다.
자기 종교의 절대적 신념 체계 내에서만 사랑과 베풂이 넘치고 다른 종교를 향해서는 분노와 적의의 칼날을 들이대
는 일신교가 만민 평등과 중생 구제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길은 없을까?
나는 아직 인류를 위해 만들어지거나 계시가 내려진 신앙 체계에서 폭력을 조장하거나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도록
내버려 두는 종교적 가르침을 알지 못한다.
이러한 지극히 상식적인 종교적 명제가 왜 이슬람종교의 근본적인 차이를 들여다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갈등의 원인과 배경은 주로 침략자나 강자들의 논리에 의해 조작되거나 왜곡되기 일쑤여서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가 아닌 제3자의 입장에서는 그 진실을 들여다 보기가 매우 어렵다.
종교 간의 본질적인 문제는 종교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종교를 악용하고, 자신의 독점적 지위와 가치만을 돋보이
게 하려는 가장 비종교적인 방식을 추구하는 일부 집단 때문이다.
종교간 소통을 이야기 하면서 이슬람의 이해에 남다른 열정을 보인 카톨릭 성직자 출신 작가 카렌 암스트롱이 던진
메시지는 더욱 큰 파장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서로의 종교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하고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그 종교를 받아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어도
다른 사람의 고귀한 신앙에 불신과 편견, 무지를 심지 않기 위해서다.
무엇보다 자신의 이익과 정치적 목표, 집단의 폐쇄적 특권만을 위해 종교를 내세우며 종교를 이용하는 왜곡된 인식
구도에서 벗어나 종교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고, 사랑이라는 본인의 사명을 찾아가는 영적 각성이 필요하다.
그것이 나의 종교적 소중함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종교적 가치를 존경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존중하
고 경청할 줄 아는 기본적인 공동체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다.
에필로그
미국은 지나치게 현실에 바탕을 둔 수평적 사고에 젖어있는 것 같다.
오늘 이 시작 미국이 갖고 있는 힘의 논리와 스스로 자부하는 발전된 제도, 물질적 풍요만을 중심에 두고 미국적 가
치를 당연한 글로벌 스탠다드로 받아들여 복종하고 따라오기를 원한다. 철저한 현실 중심적인 힘의 논리다.
반면 이슬람 인들은 과거 지향적이다.
중세의 화려한 영광을 쉽게 잊지 못하고, 역사를 통해 겪어야 했던 처절한 투쟁의 과정과 아픔, 부당한 간섭, 모욕당
한 종교적, 민족적 자긍심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힘의 논리를 받아들여 양보하고 더러는 포기하면서 실리를 선택하는 미래 지향적인 영악함이 부족하다.
미국은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에 대한 배려’에서 너무나 상이한 두 가지 기준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미국이라는 나라 안에서는 그들끼리의 다름에 대해 관용과 친절이 펄펄 넘쳐 나는데, 미국 바깥의 다름에 대해서는
이중 잣대를 들이대거나 때로는 야만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기도 하다.
오로지 미국의 변영과 복지, 안전과 평화를 위해 나머지를 과감하게 희생시켜도 좋다는 섬뜩한 익숙함에 전율을 느
꼈다.
그들은 책을 많이 읽으면서도 여전히 무식하고 바깥 세상에 무관심하다.
지금 자신들의 풍요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전쟁으로 죽어가는지, 폭격으로 삶의 기반이 초토화되어
가고 있는지, 그들의 식탁을 위해 다른 나라의 경제가 피폐해지는지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다.
그 결과 9.11 테러 이후 10년 동안 미국을 겨낭한 세계의 테러는 더욱 늘어났고, 미국은 안보 면에서 더욱 불안해 졌다.
미국안에서는 물론이고, 미국 바깥에서도 미국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욱 위험해 졌다.
이희수(李熙秀, 1953년7월17일, 경상남도 밀양 - )는 대한민국의 이슬람 학자이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졸업 후 터키의 국립 이스탄불대학교에서 역사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10년간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 튀니지, 터키, 이란 등에서 이슬람 문화를 연구하면서, 리비아 카다피 대통령의
쿠데타, 이란 이슬람 혁명 등을 목격했다.
[1] 현재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와 한국 이슬람학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터키사》, 《중동의 역사》, 《지중해문화기행》, 《세계문화기행》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