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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역사

중국사 (2) - 2-1 황하 문명~달기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7.01.13|조회수313 목록 댓글 0

2-1 황하 문명


황하 문명(黃河文明)은 중국의 황하 중하류 지역에 성립한 옛 문명의 총칭이다.

문명의 성립이란 일반적으로 국가·청동기·문자의 성립 등이 요소가 되는데,

이런 의미에서 황하 문명의 성립기(成立期)는, 오리엔트나 인도보다 늦은 BC 2000년경이라 말하고 있다.

예전에는 세계4대 문명으로 분류되었지만, 현재는 장강 문명, 훙산 문화 등 다양한 문명이 중국 각 지역에서 발견되

었기 때문에 4대 문명에 황하 문명만을 채택하지는 않으며, '황하 및 장강 문명'이라 한다.

 

신석기 시대의 양사오 문화와 룽산 문화를 거쳐, 은나라, 주나라의 청동기 문명으로 발전해 갔다.

 

배경

 

선사 시대의 중국인의 생활구역은, 황하 유역 지대의 산기슭에 있는 물이 솟아나는 지대에 많으며, 수해를 피하기

위하여 단구(段丘) 위에 거주했다.

나일 강이나 인더스 강 유역에서는, 하천의 정기적인 범람으로 인한 비옥한 흙의 퇴적을 이용한 관개 농업이 성립했

으나, 이 점은 중국 농업의 성립 조건과는 다르다.

황토는 잿빛이 나는 황색의 석영(石英)이나 장석(長石) 등의 미립(微粒)의 퇴적으로서, 빗물 속의 석회질을 모아 땅이

비옥하고 부드러워서 농경 생활을 하기에는 아주 적합했다.

이 황토 지대에서 농업 생산력의 발전을 기초로 문명은 성립된 것이다. 장강 유역에 고문명이 성립하지 않은 이유는,

고온다습(高溫多濕)하기 때문에 초목이 무성하여, 철기시대 이전에는 개간이 곤란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최근 장강 중·하 유역의 문화 유적의 발굴 조사가 진척중이어서 그 결과가 주목된다. [1]

 

신석기 시대

 

페이리강 문화(裴李崗文化, 기원 전 7000년? ~ 기원 전 5000년?)의 대표 유적은 허난성 화 현의 페이리강 유역에 있다.

이들은 원형·방형의 움집에 살았으며, 조 등의 밭농사 농업을 하고 있었다.

홍갈색의 도기나 마제석기 등을 특색으로 한다.

 

라오관타이 문화(老官台文化, 기원 전 6000년?~기원 전 5000년?)의 대표 유적은 샨시성 화 현 (웨이난 시) 의 라오관타이

(老官台)이다. 이들은 원형의 움집 주거에 살며, 조 등의 밭농사 농업을 하고 있었다. 암적색의 협사도기를 특징으로 한다.

 

베이신 문화(北辛文化, 기원 전 6000년? ~ 기원 전 5000년?)의 대표 유적은 산둥성 텅저우 시의 베이신이다.

황갈색의 도기를 특징으로 한다.

 

츠산 문화(磁山文化, 기원 전 6000년? ~ 기원 전 5000년?)의 대표 유적은 허베이성 우안 시의 츠산이다.

이들은 원형, 타원형의 움집 주거에 살며, 조 등의 밭농사 농업을 하고 있었다. 홍갈색의 협사도기를 특징으로 한다.

 

양사오 문화(仰韶文化, 기원 전 4800년? ~ 기원 전 2500년?)는 1921년 허난성 몐츠 현 양사오촌에서 발견된 붉은 바탕에

채색 한 토기(칠무늬토기)를 특색으로 하는 문화이다.

 

전기(기원 전 4800년 무렵)는 홍도가 주류로 대표 유적은 산시 성 (섬서성) 시안 시 반파, 양샤오 반파 유형 문화라고

불린다. 모계 제도로 농촌의 계층화가 보인다.

기원전 4000년경에 녹로의 사용을 볼 수 있는 양사오 묘저구유형 문화가 나타났다.

 

후기(기원 전 3500년 이후)에는 반파 후기 유형, 시왕촌 유형, 대사공 유형, 진왕색 유형의 4종의 문화로 크게 분류되어

빈부의 차이가 보이는 사회 분업, 계층화가 진행되었다.

 

허우강 문화(後岡文化, 기원 전 5000년? ~ 기원 전 4000년?)의 대표 유적은 허난성 안양 시 허우강이다.

베이신 문화를 계승 발전했다.

 

다원커우 문화(大漢口文化, 기원 전 4300년? ~ 기원 전 2400년?)는 1959년 산둥성 닝양 현 보투오 촌에서 유적이 처음

발견되었다. 후에 산둥성 타이안 시 타원커우에서도 유적이 발견되고, 이쪽이 대표 유적이 되었다.

전기는 홍도가 주류를 이루었지만, 후기에는 흑도, 회도가 주류로 나타났다.

후기의 란곡흑도의 고병배 무뉘도기는 정교하고 아름다워 산둥 룽산 문화에 계승된다.

 

룽산 문화(龍山文化, 기원 전 2500년? ~ 기원 전 2000년?)는 중국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에 의해서 1930년 산둥성

장추 시 룽산진에서 발견된 흑도(흑색 토기)나 회도를 특색으로 하는 문화이다.

흑도는 얇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흑색의 토기로, 제작에는 소성 온도는 약 1000도 이상되는 녹로가 사용되었다.

 

후기에는 청동기의 주조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중원 룽산 문화(섬서 룽산 문화, 진난 요서 룽산 문화, 허난 룽산 문화)와 산둥 룽산 문화로 나뉜다.

 

중원의 룽산 문화는 양사오 후기 문화를 계승해 회도가 주류를 이루며, 뼈가 갈라진 특징을 가진다.

산둥의 룽산 문화를 계승하여 흑도가 주류를 이룬다.

 

얼리터우 문화(二里頭文化, 기원전 2000년? ~ 기원전 1600년?)는 1959년 허난성 옌스 시 얼리터우에서 발견되었다.

유적은 약 2km 사방에서 뻗어있고, 중심부에는 두 개의 궁전 자취가 있다.

이 유적의 사람들은 진난 요서 룽산 문화, 허난 룽산 문화를 계승하였으며, 청동 주조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주석

1.↑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황허문명〉




2-2 양사오 문화, 룽산 문화


양사오 문화

 

올빼미 머리를 한 양사오 문화의 묘저강기 도기

 

양사오 문화(중국어: 仰韶文化, 병음: Yǎngsháo wénhuà)는 황하 중류의 채도를 동반한 신석기의 농경문화이다. 채도가 특색으로 채도문화(彩陶文化)라고도 한다.

 

개요 - 유적의 대부분은 강기슭의 대지(臺地)에 있고, 거주지와 공동묘지가

있다.

정주생활을 했고 조·수수 등을 재배하고 가축 사육과 사냥, 고기잡이도 병행

했다.

간석기·뗀석기·돌식칼 등으로 수확하고, 흙을 구워서 만들거나 돌을 갈아 만든 팔찌도 애용했다.

 

토기로는 붉은간토기와 바탕흙에 모래알이 함유된 회도(灰陶)가 있었는데, 특히 일부 붉은간토기에 기하학무늬와 사람

얼굴 등을 그린 채도는 제사라든지 묘장공헌(墓葬供獻)에 쓰였다.

성인(成人)은 공공묘지 안의 구덩이에 매장되었으며, 어린 아이는 옹관장(甕棺葬)으로 집 근처나 마루 밑에 묻혔다.

유적은 허난 성(河南省) 서부, 산시 성(山西省) 남부, 산시 성(陝西省) 중부 등지에 분포되어 있으며, 대표적 유적으로는

산시 성 시안 시(西安市) 반포(半坡) 유적을 표준으로 하는 반포 유적과 허난 성 산현(陝縣)의 먀오디거우(廟底溝) 유적을

표준으로 하는 먀오디거우 유적이 있다. 시간적으로는 반포 유적쪽이 더 오래되었다.

 

양사오 문화는 황하 상류에 전파되어 간쑤양사오(甘肅仰韶)문화의 탄생과 산둥(山東)의 농경문화에 영향을 끼쳤다.

중원에서는 이 문화에 뒤이어 룽산 문화(龍山文化)가 성립했다.

최근의 새로운 조사를 통해 허난 성 신정 현(新鄭縣)의 배리강(裵李崗)과 허베이 성 무안 현(武安縣)의 자상(磁上) 등에서

양사오 문화보다 앞서 있었던 초기 농경문화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룽산 문화

 

란각도로 만든 고병배, 산둥성 주청 시 청즈유적에서 1976년 출토된 룽산문화 도기

 

룽산 문화(중국어 간체: 龙山文化, 정체: 龍山文化, 병음: Lóngshān wénhuà

Longshan culture[*], 기원 전 3000년경-기원 전 2000년경)는 중국 북부(화북)의 황하

중류에서 하류에 걸쳐 퍼져 있는 신석기 시대 후기의 문화를 말한다.

흑도가 발달하여 흑도 문화라고도 한다.

 

룽산 문화는 중원 룽산문화(허난 룽산문화와 샨시 룽산문화) 및 산둥 룽산문화로

나뉘어 있다.

산둥 룽산문화는 황하 하류를 중심으로 존재한 다원커우 문화에 이어 나타나며,

허난 룽산문화는 황하 중류에 존재한 양사오 문화에 이어 등장하고 있다.

룽산 문화는 황하 유역의 다른 문화가 발전했던 지역에까지 널리 퍼졌을 뿐만 아니라, 장강 유역 등, 이후 한족의 문화가 발달한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개요 - ‘룽산’이라는 이름은 1928년 산둥 성 룽산에서 처음으로 유적이 발굴된 데에서 비롯되었다.

룽산 문화는 중원 룽산문화(허난 룽산문화와 샨시 룽산문화) 및 산둥 룽산문화로 나뉘어 있다.

산둥 룽산문화는 황하 하류를 중심으로 존재한 다원커우 문화에 이어 나타나며, 허난 룽산문화는 황하 중류에 존재한

양사오 문화에 이어 등장하고 있다.

룽산 문화는 황하 유역의 다른 문화가 발전했던 지역에까지 널리 퍼졌을 뿐만 아니라, 장강 유역 등, 이후 한족의 문화가

발달한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란각도 고병배, 산둥 룽산문화의 출토품

 

룽산 문화는 산둥성 동부의 장추 시 룽산진에 있는 청즈아이(城子崖)에서 1928년에

유적이 출토되어 1930년 이후 본격적으로 발굴되었다.

룽산 문화의 특징은 고온으로 구운 회도, 흑도를 중심으로 한 높은 도기 기술에 있

으며, 그릇이 얇고 균일하여 녹로가 사용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특히 란각도(卵殻陶)로 불리는 것은 그릇을 알의 껍질처럼 얇게(0.5 - 1 mm) 만든

흑도의 도기로, 한층 더 연마해 검은 윤기를 내고 세밀한 문양을 조각한 것이다.

이것은 황하 유역뿐만 아니라 장강 유역이나 중국의 남부 해안 부근에서도 발견되고

있어 룽산 문화의 확산을 알려주고 있다.

한편으로 장강 중류 지역의 취자링 문화도 회도, 흑도를 특징으로 하는 문화로 허난성 부근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어 룽산 문화가 장강 부근의 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

성도 있다.

 

삼족 조리기 鬹, 산둥 룽산문화의 출토품

 

도기 생산 효율의 상승은 출토하는 도기의 수나 종류가 전대 문화에 비해 대폭 증대

되었던 것에서도 볼 수 있어 솥이나 격(鬲, 삼족 솥), 규(鬹, 세발달린 가마솥), 높은

자루 잔(高柄杯) 등, 조리기나 식기로서 사용된 다양한 흑도, 회도의 도기가 출토

되었다.

 

도기뿐 아니라 돌칼(石包丁) 등 석기나 골기 등의 무기나 도구, 비취 등의 구슬도 출토되었다. 룽산 문화 후기에는 청동기도 출현하였고, 은대, 주대(또눈 은나라 이전의

하나라)의 청동기 시대로 가는 과도기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룽산 문화의 사회에서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도시의 출현이다.

초기의 주거 형태는 수혈식 주거였지만, 곧 기둥이나 벽을 세운 가옥이 출현했다.

또 흙을 다져 만든 성벽이나 굴이 출토되고 있어, 특히 샨시성 샹펀 현 타오스 향

(陶寺郷)의 남쪽에서 발견된 샨시 룽산문화의 유적, 타오시 유적(陶寺遺跡, 기원

전 2500년 - 기원 전 1900년)은 룽산 문화의 도시 유적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다.

농업이나 수공업의 발달도 특징이다. 샨시성의 웨이허 주변에서는 농업과 목축업이 양사오 문화의 시기에 비해 크게 발전

하였다. 쌀의 재배도 시작되었고, 누에를 기르는 양잠업의 존재와 소규모의 견직물 생산도 확인되고 있다.

 

산둥 딩공의 도기 파편에서 발견된 11 문자, 산둥 룽산문화

 

동물의 견갑골을 사용한 점술이나 무술(巫術)의 흔적도 엿볼 수 있어 종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농업 등의 발달로 인한 잉여 생산이 생기고, 사유재산이 출현하여 사회의 계층화가 진행되었고, 부권제 사회나 계급 사회가 탄생했다.

 

중국의 신석기 시대의 인구는 룽산 문화에서 절정을 이루었지만, 룽산 문화의 말기에는 인구가 격감했다.

동시에 분묘의 부장품에서 고품질의 란각도, 흑도 등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시대 구분 - 룽산 문화의 전기는 기원전 3000년에서 기원전 2600년경으로, 기원 전 2600년경에서 기원 전 2000년경이

후기에 속한다.

또 룽산 문화는 황하 유역의 지형에 맞추어, 중원의 허난 룽산 문화, 웨이허 연안의 샨시 룽산 문화, 황하 최하류의

산둥 룽산 문화 등 지역 마다 여러 가지로 분화되고 있어, 특히 후기가 되면 분화가 명확해 진다.

웨이허 연안은 그 뒤로 실크로드로 불리는 서역 교역로의 기점으로서 중국 역사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3-1 하

하(夏 , 기원전 2070년경 ~ 기원전1600년경)나라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상나라 이전 수백 년간 존재했다고 기록된 나라
이다. 그 연대는 하상주단대공정에 의해 기원전 2070년경에서 기원전 1600년까지로 추정되었다.

 

사기, 죽서기년 등 중국의 사서에는 초대의 우로부터 후세의 걸까지 14세 17대, 471년간 계속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사

 

우의 창업 - 하왕조의 시조가 되는 우는 오제의 손자 중 한 명이다. 요의 시대에 우는 치수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순에게 추천 받는 형태로 황하의 치수 사업을 맡았고 공적을 이루어 크게 인정받았다.

 

순은 덕망이 높았던 우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순이 사망한 후 3년 상을 치른 우는 순의 아들인 상균을 제위에

앉히려고 했지만 제후들이 상균을 순의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가 제위에 즉위하였다.

양성을 도성으로 정했다. 우의 성은 사(姒)였지만 왕조 창시 후에 하후(夏后)로 바꾸었다.

 

우는 즉위 후 잠시 동안 무기 생산을 그만두고 궁전의 대증축을 한동안 재고하였으며 관문과 시장에 걸려있는 여러 세금

을 면제했다. 또한 지방에 도시를 만들었고 번잡한 제도를 폐지해 행정을 간략화했다.

이 결과 중국 안에서는 물론 밖에서도 조공을 청하러 오게 되었다. 또한 우는 여러 하천을 정비했고 주변의 토지를 경작

해 초목을 육성하였으며 중앙과 동서남북의 차이를 기(旗)로써 사람들에게 나타냈고 옛 방식도 답습해 전국을 나누고

9주를 두었다. 우는 검약 정책을 취했고 스스로 솔선수범하였다.

 

죽서기년에 의하면 45년 동안 재위에 있었다고 한다.

 

즉위 후 고도(皋陶)가 정치를 보좌하도록 했지만 고도의 사망으로 익(伯益)이 조정을 보좌하였다.

 

최초의 세습 - 왕조우가 사망한 후 익이 후계자가 되었지만 익이 집정에 익숙하지 않아서 제후들은 우의 아들인 계를

제위에 앉혔다.

이것이 중국 역사상 최초의 왕위의 세습으로 여겨진다. 제위에 오른 계는 유호씨가 복종하지 않자 이를 토벌하였다.

 

계가 사망한 후 아들 태강이 제위를 계승했지만 사기에 의하면 '나라를 잃었다'라고 기록되는 등 국세의 쇠퇴를 볼 수 있다. 태강이 사망한 후 남동생 중강이 뒤를 이었다. 중강 때에 제후인 희씨와 화씨가 음락에 빠져 있었으므로 윤(胤)에게 명해

희씨와 화씨를 토벌하였다.

 

사기에 중강 이후의 왕들의 사건에 대해서는 특별히 전하고 있지 않다.

 

하나라의 쇠퇴와 멸망 - 하의 14대 왕인 공갑은 성격이 음란하고 귀신을 흉내내는 것을 좋아해 인심은 하왕조부터

멀어져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걸은 인덕이 부족해 무력으로 제후와 민중을 억압해 인심의 배반을 불렀다. 또 상나라의 탕을 불러내 투옥시켰다.

탕은 덕으로써 나라를 다스려서, 제후들이 그의 밑에 모였으며 마침내는 걸을 넘어뜨렸다. 걸은 명조로 도망쳤지만

객사했다. 이 걸에 관한 전설은 상나라의 주와 지나치게 비슷해서 후세에 만들어진 전설이라는 주장도 있다.

 

상나라의 탕왕은 제위에 즉위하면서 하나라의 혈통을 받은 사람들을 하정(夏亭)에 봉했다.

주나라 때에는 기나라의 제후로 봉해졌다.

 

하나라의 실재성

 

예전에는 하나라의 실재성을 확실히 보여주는 고고학상의 발견이 없고 전설상의 왕조로 여겨져 왔지만 사기 등을 비롯한

중국의 사서에서 이유없이 기재한 것이 아니고, 또 최근의 고고학의 실적도 하왕조가 실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현대의 중국 역사·고고학 학계에서는 실재했다고 보고 있다.

 

최근에 탄소 14연대 측정법에 의해 허난 성 옌스 시 얼리터우 촌의 얼리터우 유적이나 허난 성 신미 시의 신자이 유적

등에 흔적이 있는 얼리터우 문화가 하나라가 있었다고 생각되는 연대와 거의 일치하는 등, 문헌 사료가 말하는 하나라는

얼리터우 문화에 비정 된다.

그러나 문헌 사료에 적혀있는 하나라에는 전국시대 이후의 사상이 적지 않게 섞여 있어 하나라가 실재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점이 많다.

 

하왕조가 실제하였다는 구체적 증거들이 발견되지 않았다. 하을 창업하였다는 우임금의 묘지가 얼리터우 문화가 존재하였던 하남성이 아닌 중국 동남부 항저우 인근 저장성 사오싱에 위치하여 있는데,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사기에 따르면 황제는 기원전 2500년경에 살았는데, 황제에서 소호 · 전욱 · 제곡 · 제요 · 제순, 5대를 거쳐 하왕조로 이어진다. 5대는 많이 잡아도 200년이 채 되지 않으므로 300년 정도의 역사가 비어 있다. 맹자의 경우 제순을 헌원의 자손이 아닌

것으로 정의 하기도 하여, 오제를 거쳐 하나라로 넘어왔다는 관념도 명확하지 않고, 실존성도 모호하다.

 

중국 고고학회는 얼터리우 문화 1기부터 3기까지는 확대기에, 4기는 쇠퇴기로 정의하여, 1기부터 2기까지가 하 왕조, 3기

이후에는 은나라로 접어든다고 추정했다.

중국 학자들은 하나라가 얼터리우 문화와 연관되었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가운데 어떤 것이 하나라 유적인지 현재까지도

판별하지 못하고 있다. 얼티라우 문화의 년대를 나누어 하나라라고 추정하기 이전에 하왕조가 허난성에 있었는가를 먼저

검증해야 하는데, 그런 과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나라 시대에는 갑골 문자도 존재하지 않았다. 문자가 없으므로 성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사마천은 하왕조 창시자 우임금을 사(姒)씨로 기록하고 있다. 구전으로 전해진 성명을 사마천이 찾아내 적어 놓았다고 믿기에는 무리가 있다.

 

역대 군주

 

우(禹) : 하나라의 개국 군주로, 요순임금의 하나인 순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고, 부자상속제를 확립하였다.
계(啓)


태강(太康) : 고분죽서기본에 의하면, 짐심으로 도읍을 정했다고 한다.

우왕의 손자이지만, 우왕과는 달리 사치에만 힘을 써 백성의 신망을 잃었다. 태강이 부하들과 사냥을 나간 사이, 하나라의 제후였던 유궁(有窮)의 후예라는 자가 반역하여 도성을 점령하였다. 태강은 몸을 피하여 주변의 제후들에게 원조를 요청

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하고 쫓기는 인생을 살다가 죽는다.


중강(中康) : 태강의 동생으로, 후예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다. 그러나 후예와의 권력다툼 끝에 왕위에서 쫓겨난다.


상(相) : 태강의 아들로 태강이 죽은 후, 제구(帝邱)에서 하나라의 유신들에게 왕으로 옹립된다.

그러나 후예의 토벌로 성이 포위되었을 때 자살한다.


(후예(后羿)) : 원래는 하나라의 제후로 궁술의 명인이었다. 태강이 민심을 잃자, 그가 사냥을 나간 틈을 타 도성을 점령

하고 태강의 동생 중강을 옹립하였다. 그러나 중강은 후예의 부하인 희화를 쫓아내고, 백봉(伯封)이라는 제후를 이용해

후예를 견제하려 했다. 이렇게 중강이 자신의 손을 벗어나 자립할 움직임을 보이자 후예는 중강을 쫓아내고 직접 왕위에

올랐으며, 백봉 등 중강을 지지했던 제후들을 탄압하였다.

왕위에 오른 뒤에는 백봉의 어머니이자 천하의 미인인 현처(玄妻)를 왕비로 삼았다.

현처는 아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야심가인 한착을 끌여들였다. 현처는 한착과 정을 통해 계획을 세웠고, 자신의 세상이

라고 넋을 놓고 있던 후예를 죽이고 한착을 왕으로 세웠다.


(한착(寒浞)) : 원래는 후예의 부하이나, 후예가 왕이 된 후 정사를 돌보지 않고 문란한 생활에 빠져있는 것을 보고 현처와

공모하여 후예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20여 년을 다스렸으나, 상의 아들인 소강에게 살해당한다.


소강(小康) : 상이 죽었을 때 임신한 상태였던 상의 왕비는 자신의 친정인 유잉(有仍)으로 피신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이가 바로 소강이다. 소강은 아직도 남아 있던 하나라의 유신들에게 보살핌을 받았으며, 성인이 되고나서 군사를 일으켜

한착을 죽이고 하나라의 왕실을 복구한다.


저(杼)
괴(槐)
망(芒)
설(泄)
불강(不降)
경(扃)
근(厪)
공갑(孔甲)
고(皐)
발(發)
걸(桀) : 하나라의 마지막 군주로, 포악하고 사치스러웠다.

충신이었던 이윤의 간언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나라를 다스리다가 상나라의 시조인 탕왕에게 토벌되어 죽는다.





3-2 우

우(禹, 기원전 2070년경)는 중국 고대의 전설적인 군주로 하나라의 창시자이다.
아버지는 곤이며 곤의 아버지는 오제의 하나인 전욱이다.
따라서 우는 전욱의 손자이다.
또 전욱은 황제의 손자이므로 우는 황제의 고손자가 된다. 도산씨의 딸에게 장가가 계라는 아들을 두었다.
우는 인덕을 가져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또 탁월한 정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자랑하지 않았다. 아마도 전설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이러한 성인으로서 그려지는
것으로 보인다.

 

우의 치수사업

 

요의 시대에 우는 치수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순에게 천거되는 형태로 황하의 치수를 맡았다.

『열자』의 양주 제7에 따르면 이 때 일에 너무 몰두해서 아이도 기르지 않고, 가정도 돌보지 않았으며, 신체는 반신

불수가 되었고 손발의 살갗이 텄다고 한다.

 

禹라는 문자는 본래 도마뱀이나 악어, 용의 모습을 그린 상형문자로, 우의 기원은 황하에 살던 물의 신이라고 보기도

한다.

 

하 왕조 창시

 

우는 즉위 후에 한동안 무기의 생산을 중단하고 궁전의 재증축을 재고하였으며 관문이나 시장에 걸려있는 여러 세금을

면제하였다. 그리고 지방에 도시를 만들고 번잡한 제도를 폐지해 행정을 간략화했다.

그 결과 중국 안에서는 물론 밖에서까지도 조공을 요구해 오게 되었다. 또한 우는 많은 하천을 정비하였고 주변의 토지를

경작해 초목을 키웠으며 중앙과 동서남북의 차이를 기(旗)로써 사람들에게 나타냈고 옛 방식도 답습해 전국을 나누고

구주를 두었다. 우는 검약 정책을 취해 스스로 솔선해 행동했다.

 

하(夏)가 망한 후 하(夏)씨가 생기고 다시 기간공(杞簡公)의 아우 타(佗)가 노(魯)로 망명하여 후작(侯爵)을 받았으므로

다시 하후(夏侯)씨가 생기게 되었다.[1]

 

성(姓)은 사(姒)이고 씨(氏)는 유하(有夏)이다. 이름은 문명(文命), 대우(大禹), 하우(夏禹), 융우(戎禹)이다.[출처 필요]

일반적으로 하왕조는 사씨이다. 고대에 있어 성의 개념은 미약하였으며, 다른 성들은 후대에 추존되어 붙은 것이다.

 

우의 무덤

 

죽서기년에 의하면 45년간 재위했다고 하며, 저장 성 사오싱 시의 회계산에 우의 릉이 있고 전해지고,

실제로 저장성에 우의 무덤이 위치해 있다.

 

고대의 기록이 변형이 많다고 해도 저장성과 허난성은 지역적으로 거리가 많이 멀다.

현재까지도 흔히 중원이라고 부르는 허난성에 하왕조의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지 않다.

단지 몇몇 고대 얼리터우 유적의 연대을 나누어서 하왕조라고 추정만 하고 있는데 근거는 전혀 없다.

따라서 하왕조가 중원에 있지 않았다는 점을 우의 무덤이 어느정도 반증하고 있다.

 

사마천이 주족으로 점철되는 자신들의 남방계 조상들을 황제로 추존하기 위해 하왕조와 우에 대해서 과장된 서술을 한

부분이 있다.

 

주석

1.↑ 씨성과 보첩(譜牒)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33)




4-1 상

상(商, 기원전 1600년경 ~ 기원전 1046년)나라는 역사적으로 실재했다고 여겨지는 최초의 중국 왕조이다.

 

개요주(周)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는 은(殷)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므로 은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스스로의 나라 이름을 칭할 때는 은나라를 세운 부족 이름인 상(商)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상'이라는 이름으로 통일해 부르고 있다.

상나라의 시조에 대한 의견은 분분한데, 기록에 의하면 전설상의 인물인 황제(黃帝)의 후손 탕왕(湯王)이 세웠다고 전

해진다.

탕왕은 하나라의 마지막 왕이자 폭군인 걸왕을 무찌르고 상나라를 개국하였다. 상나라는 여러 차례 수도를 옮겼는데,

반경왕이 마지막으로 옮긴 수도가 은(殷)이었기 때문에 '은나라'라는 명칭이 붙여진 것이다.

 

마지막 왕은 무희 달기와 함께 국민을 잔혹하게 다룬 31대 주왕(紂王)이며, 주나라 시조인 서주 무왕(武王)에 의해 멸망

하였다.

 

19세기 말까지 전설상의 왕조로만 다루었으나 20세기 초에 은허가 발굴되고 고고학적 증거들이 나타나 실재하는 왕조

였음이 인정되었다.

 

역사

 

창업 이전 - 전설상 상 왕조의 시조는 설로 되어 있다. 설은 유융씨의 딸이자 제곡 차비인 간적이 제비의 알을 먹었기

때문에 낳은 아이로 되어 있다. 설은 순 때에 우의 치수를 도운 공적이 인정되어 순에 의해 상에 봉해져 자씨 성(子姓)을

받았다.

 

그 후 설의 자손은 대대로 하나라를 섬겼다. 또 설로부터 탕까지의 14대 사이에 8차례 수도를 옮겼다고 한다.

 

1.설(시조)
2.소명 - 계의 아들
3.상토 - 소명의 아들
4.창약 - 상토의 아들
5.조어 - 창약의 아이
6.명 - 조어의 아들
7.왕해(고조) - 명의 아들
8.왕긍 - 왕해의 동생
9.상갑미 - 왕해의 아들
10.보정 - 상갑미의 아들
11.보을 - 보정의 아들
12.보병 - 보을의 아들
13.주임 - 보병의 아들
14.주계 - 주임의 아들
15.탕 - 주계의 아들


역대 치세 - 설로부터 13대째의 탕은 박(현재의 허난 성 상추 시)를 수도로 삼고 있었다.

탕은 현인 이윤의 도움을 빌려 하왕 걸을 쓰러뜨리고 제후들에게 추천되어 왕이 되었다.

 

상나라 4대 왕인 태갑은 폭군이었기 때문에 이윤에게 추방되었다. 후에 태갑이 반성했고 이윤은 이를 허락했다.

이후 태갑은 선정을 베풀어 태종(太宗)으로 칭해졌다.

 

옹기 때에 왕조는 잠시 쇠약해졌다. 옹기의 다음 왕인 태무는 현인 이척을 임용해 선정을 베푸려 노력했고 상 왕조는

부흥했다. 태무의 공적을 칭송해 태무는 중종(中宗)으로 칭해졌다.

중종의 사후에 왕조는 다시 쇠약해졌다. 조을은 현인 무현을 임용해 선정을 하려고 노력했고 상 왕조는 부흥했다.

 

조을의 사후에 다시 왕조는 쇠약해졌다. 반경은 은허로 천도했고 탕 때의 선정을 부활시켰다.

 

반경의 사후에 다시 왕조는 쇠약해졌다. 무정은 현인 부설을 임용해 상 왕조의 중흥을 완수했다. 무정의 공적을 칭송해

무정은 고종(高宗)으로 칭해졌다.

 

고종 이후의 왕은 대체로 어리석은 폭군이었다. 상 왕조의 마지막 왕인 제신(주왕)은 즉위 후 달기라는 미녀에게 빠지고

폭정을 실시했다. 이 때문에 주의 무왕에게 주살되었다. 그리고 상 왕조는 어이없게 멸망했다.

 

멸망 후

 

주왕의 아들인 무경은 주의 무왕에 의해 상나라의 옛 땅에 봉해졌다. 무왕의 사후에 무경은 무왕의 형제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해 주살당했다. 그 후, 무경의 백부의 미자계(주왕의 형)가 송에 봉해져 상 왕조의 제사를 계속했다.

 

상인(商人)라는 말은 상나라 사람들이 나라가 멸망한 후에 생업을 위해 각지를 떠돌아 다니며 물건을 팔았던 것에서

유래한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구체적으로 몇 년인지를 추정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중국의 하상주단대공정은 이 사건을 기원전 1046년의 일로 보고 있다.

 

예전의 설로는 죽서기년에 무왕에서 유왕(서주의 마지막 왕)까지 257년이는 기술이 있어 유왕이 죽은 것이 기원전 771년의 일이므로 상나라가 멸망한 것은 기원전 1027년이 된다. 또 한서에는 주는 867년 동안 계속되었다는 기술이 있어 이것으로

부터 기원전 1123년의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그 이외에도 여러가지 설이 있어, 상나라 멸망을 가장 오래 전으로 보는 것은 기원전 1127년, 가장 나중으로 보는 것은

기원전 1018년이다.

 

갑골문자


갑골문 귀갑(甲骨文 龟甲)

 

1899년에 갑골문(甲骨文)이 발견됨으로써 그 실존이 알려졌는데, '갑골'이란 거북의

뱃가죽뼈와 소의 어깨뼈를 말한다.

갑골문이란, 갑골의 안쪽 면에 불에 달군 나무를 눌러 급속히 팽창시키면 표면에

국부적인 균열이 생기는데, 그 균열의 상태를 보아 점을 치고 거기에 점친 날짜와

점쟁이의 이름, 점친 내용과 결과 등을 새겨 넣은 글을 말한다.

갑골문의 주요 내용은 주로 조상신이나 자연신에 대한 제사의 여부, 전쟁의 가부,

농사의 풍흉, 바람과 비의 유무, 수렵이나 재해의 유무 등 왕의 통치와 관련된 다양한

사안들이었다.

 

정치

 

상나라 사람들은 상제(上帝, 여기서 상제는 하느님을 의미)라는 존재가 우주의

지배자이며 그 의지에 따라 모든 미래가 결정된다고 생각하였다.

점을 쳐서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신정 정치가 이루어졌다.

갑골문은 상제의 의향을 묻기 위한 행위의 기록을 의미하는 것으로 상제에 대한 제사와 조상 숭배가 합쳐져서 상나라는

정치와 종교가 일치된 제정일치 국가의 성격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또한, 상나라 시기에 정교한 청동기가 발달되었는데 이러한 청동기는 바로 신정적 권위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신정적 권위는 쇠퇴하고 세속적 권위를 강화해 간 왕권이 성장하였다.

 

행정

 

상나라는 읍제(邑制)국가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읍이란 씨족 집단을 중심으로 성벽을 갖춘 국가를 의미한다.

읍은 대읍과 족읍, 소읍으로 나뉘는데, 대읍은 상나라 왕이, 족읍은 상나라 왕과 연합관계에 있던 씨족의 우두머리,

소읍은 씨족의 우두머리와 연합관계에 있던 동족집단의 우두머리가 각각 통치하였다.

이 처럼 누층적으로 구성된 읍들 사이와 정치적 연합관계를 봉건(封建)관계라고 부른다.

 

역대 군주

 

제125세- 光武皇帝 광무제는 은왕조의 성탕황제의 후손이다. 그는 덕이 있고 다른 사람을 항상 존중하고 사랑하였다.

그는 고리를 수도로 정하고 서진은 안식국에 동 으로는 동래에 이르렀다. 그의이름은 현이고 연호는 명치라하였다.

 

참고문헌 및 링크

사마천, 《사기》「은본기」, 중국 한나라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1》, 시대정신, 1992
《사기》「은본기」(원문)
상왕조의 군주




4-2 탕, 제신, 달기


 

탕(湯, 기원전 1600년경)은 은나라의 창시자이다. 이름은 리(履)이다. 천을(天乙),

대을(大乙), 태을(太乙), 성탕(成湯), 성당(成唐)이라고도 한다.

하나라의 마지막 왕 걸을 추방해 하 왕조를 멸망시켰다.

 

하나라의 마지막 왕 걸은 포학한 정치를 해 인심은 하로부터 멀어져 있었다.

하의 신하인 탕은 명신 이윤의 보좌를 받아 걸을 공격해 멸망시켰다.

서경에는 걸을 멸할 때에 제후를 향해 연설했다고 여겨지는 『탕서』가 있다.

 

탕은 하의 우, 주의 문왕, 무왕과 함께 성군으로서 후세에 숭상되고 있다.

 

제신

 

제신(帝辛)은 주(紂), 주신(紂辛), 주왕(紂王)이라 불리며, 은나라의 제 31대 왕으로

마지막 군주이다.

 

서백후 희창을 강제로 납치하여 감금하였다. 희창이 죽은 후, 희창의 아들 희발 주무왕이 아버지를 보복하기 위해서 강태공 등의 부하들과 함께 주왕에 반역하였다.

반란군은 맹진에서 주왕과 대치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은허 남쪽의 목야에서 벌어진

2번째 전투때는 주왕을 패배시켰다.

 

은의 도읍으로 들어가지만, 주왕을 체포할 수 없었다. 주왕은 패배한 이후 누대에

올라가 자살하였고, 상나라는 멸망한다.

실제 역사에서 그는 실정보다는 무리한 동방 원정(아마도 고조선)에 힘을 쏟다가 주나라 무왕의 반란으로 나라를 잃었다.

그 최후는 역사서마다 다르게 서술되어 있으며,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주나라 성립 이후에, 제신(帝辛)은 희대의 폭군으로 묘사되었다. 비공식 설화에 전해지는 그는 달기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성격이 난폭해서 간언을 하는 사람을 그 자리에서 살해하였으며, 궁궐이 초라하다고 해서 화려하게 만들고, 술로

만든 호수를 만드는 등 (酒池肉林) 국가예산을 많이 낭비했으며, 사람을 숯불에 태워 죽이는 형벌 (炮烙之刑)을 새로 제정

하여 원성을 샀다고 전해진다.

 

달기

 

달기(妲己, ?~?)는 은나라(상나라) 주왕의 애첩이다. 주왕은 달기를 총애하여 달기가 하자는 대로 따랐다고 하는데, 주왕은 포악하고 음탕하여 주지육림(酒池肉林)에서 달기와 함께 노닐며 쾌락에 젖어 살았고 간언하는 신하들을 잔인한 형벌로

다스렸다고 전한다.[1]

 

십팔사략이나 봉신연의 등의 작품에서는 뛰어난 미색의 소유자로 묘사되며 주왕이 달기의 환심을 사려고 쾌락에 빠져

국사를 그르치는 것으로 그려진다.[2][3] 달기의 최후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주(周)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할 때 잡혀 처형되었다고도 하며[1], 주공(周公) 단(旦)이 달기를 취하여 그의 시녀가 되었다고도 전한다.[4]

 

참고

1.↑ 가 나 사마천, 사기 은본기
2.↑ 십팔사략
3.↑ 봉신연의
4.↑ 세설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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