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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역사

중국사 (3) - 5-1 주 ~ 춘추 전국 시대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7.01.14|조회수578 목록 댓글 0

5-1 주


주(周,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56년)나라는 상나라을 이어 중국에 존재했던 나라이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오래 유지된 나라로, 이 시기에 철기 시대의 사용이 시작되었다.

주나라는 기원전 11세기 중엽에 서쪽의 웨이허 강 분지에서 세력을 확대하여,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中原)을 지배

했다.

주나라의 청동기문화권이 최근의 조사에서는, 중원에서 더욱 남쪽 지방인 장쑤(江蘇), 안후이(安徽), 후베이(湖北) 등의

양쯔강 유역에까지 미친 것이 확실해졌다.

이 광대한 지배권을 유효하게 통치하는 조직이 봉건제도이다.

주 왕조는 농업을 장려하고 농지의 개척을 진척하였으나 농기구는 목제나 석제의 기구였다. [1]

 

견융이 침략하여 기원전 771년 유왕이 살해되고 제후에 의해 옹립된 평왕이 호경(鎬京, 현재의 시안 시 부근)에서 부도

(副都) 낙읍(洛邑, 현재의 뤄양 시)으로 수도를 옮기게 되는데, 이를 기준으로 이전을 서주(기원전 1046년~기원전 771년),

이후를 동주(기원전 770년 ~ 기원전 256년)라고 구분한다.[1]

 

봉건제도

 

주나라는 본격적인 봉건제도를 실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개국 초부터 무왕은 자신의 친족들과 태공망 등 개국공신들을 각지에 파견하고 이들에게 영토를 나눠주며 다스리게

하였고, 주(周) 왕실을 지키게 했다.

이것이 시간이 지나 독립적인 국가를 유지하는 봉건체제가 되었다.

봉건제 하에서 왕은 직할지를 직접 다스리고, 동맹 세력과 일족을 세습 제후로 봉하여 토지를 나누어 주고 그 대가로

군사적 봉사와 공납을 받았다.

주나라나 제후의 나라는 읍(邑:도시국가)이었고, 그 구조는 씨족적 결합으로 성립되어 있었다.

이 씨족적인 결합은 종법(宗法)에 의하여 규제되어 있었다. [1]

부계 혈통의 종족 구성에서는 "대종"(大宗)과 "소종(小宗)"의 엄격한 구분이 있었다.

천자의 적장자만이 천자가 될 수 있었는데 이것이 대종이고, 그 나머지 자식들은 소종이라 하여 신분이 한 등급 낮았다.

이 원리는 제후·대부·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으며, 전국적인 통치 제도에 이용되었다.

춘추 시대의 봉건 국가들은 주나라 왕실의 정통성을 인정하며 그 안에서 자신들의 패권을 다퉜으나, 전국 시대에 접어

들면서 주나라 왕실의 정통성은 유명무실화 되었고, 급기야 주나라 왕실이 폐지되고 전국 칠웅의 국가들이 형식상으

로도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임을 내세우게 된다.

 

역사

 

주나라 봉건제도 도식화.

 

주나라는 혈연관계에 기반을 둔 종법 원리로 통치했다.

주나라는 은나라의 서쪽 (지금의 산시 성)에서 은나라와

상당 기간 공존했다.

주나라는 은나라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우호적으로 지내

다가도 때때로 은과 전쟁을 벌였다.

그러던 중 주나라의 왕실에서 은나라를 정복하자는 주장

이 나왔다.

전통적으로는 BC 1122년에 주나라가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결정적인 전쟁은 BC 1111년경에 벌어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은나라의 전영역에 대한 주의 통치권이 확립되기 전에 반란이 일어나 이를 진압하는 데 3년이나 걸리긴 했지만, 결국 주나라가 중국 전역에 대한 통치권을 확립하게 되었다.

주는 영역 내의 질서를 유지하고 전지역에 대한 군주의 지배권을 보장하기 위한 방편으로 각지에 봉건 제후국을 설치했다.

 

주의 수도는 원래 웨이허 강(渭河)이 황허 강(黃河)과 합류하기 전의 지점인 지금의 시안(西安) 부근에 있었다.

동부지역으로 팽창한 제국과 제후국들을 지원하기 위해 황허 강 중류지역에 있는 뤄양에 동도(東都)를 세웠다.

약 200년 후 20여 명의 제후들이 지방에서 세력을 점차 키워감에 따라 이러한 체제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BC 8세기에 기본적으로 거대한 가족체제였던 주의 정치체제는 크게 약화되기 시작했다.

여러 제후들이 주에 버금가는 힘을 가지게 되면서 유력한 제후들이 번갈아 패자(覇者)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BC 771년 이전의 주를 보통 서주(西周)라고 하며 BC 770년부터는 동주(東周)라고 한다.

동주는 춘추시대(BC 770~476)와 전국시대(BC 475~221)로 나뉜다.

춘추전국시대에는 많은 작은 제후국들간에 쟁탈전이 벌어졌으며, 전국시대에 들어서는 몇몇 강대한 제후국이 작은 제후

국들을 병합하면서 패권을 둘러싸고 격렬한 전쟁을 벌였다.

결국 이들 제후국 가운데 하나였던 진(秦)이 나머지 제후국들을 정복하고 통일제국(BC 221~206)을 세웠다.

 

정치

 

주의 관제에 대해서는 주의 여러 제도에 대해 주공 단이 엮었다고 여겨지는 『주례』에 매우 자세한 기술이 있지만,

이 서적이 집필된 것은 전국시대 이후라고 생각되므로 이것으로 주의 관제를 논하려면 무리가 있다.

금문에 의하면 주에는 경사료(卿事寮)·대사료(大史寮)로 불리는 2개의 조직이 있었다.

경사료의 장관은 태보(太保)·태사(太師)의 2개가 있었으나 나중에는 태사만 남았다.

그 밑으로 사마(군사 담당)·사토(토지 관리 담당)·사공의 관직이 있었고 각 제후 밑에도 같은 관직이 있었다.

대사료의 장관을 태사(太史)라 부르고 역사의 편찬·각종 의례·제사 등을 실시했다.

 

신분 제도에 대해서는 『춘추좌씨전』에 의하면, 왕 아래에 제후가 있고 그 아래에 대부(大夫)로 불리는 일종의 귀족층이

있으며 그 아래에 사(士)로 불리는 층이 있고 그 아래가 서민이다.

다만 대부와 사라는 계급은 금문에는 없다. 또한 거래되는 대상인 일종의 노예 계층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고 주로 주인을

대신해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

이 안에는 직공이라고 생각되는 직책도 있어 청동기의 주조와 관련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토지 제도에 대해서는 정전제를 하고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이 제도가 실제로 행해지고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경제와 사회

 

주나라 시대에 중국은 문명의 측면에서 볼 때 비교적 후진성에서 벗어나 가장 선진적인 지역으로 발전했다.

소가 끄는 쟁기와 철기·석궁(石弓)·기마술을 모두 도입했다.

또 처음으로 대규모 관개와 수리시설도 설치하여 화북 평야의 농업생산량을 크게 증가시켰다.

도량형을 새로 건설하고 교통체계도 크게 개선했다.

상업이 발전하고 도시가 늘어났으며 화폐의 주조가 활발했다.

젓가락도 사용하게 되었다.

은나라 시대에 원시적인 형태로 시작된 문자는 주대에 들어서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또한 철학도 크게 번성하여 유가·도가·법가가 이 시기에 나타났다.

후대의 중국인들은 중국 문명의 기원을 알기 위해 주에 관해 많은 연구를 했다.

 

문화


서주의 청동기 (기원전 1000년 경)

 

상나라의 청동기 문화는 그 예술성면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다.

주나라도 기본적으로는 그 기술을 계승하고 있었지만 예술성에서는 간소화되어

은대에 비하면 꽤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시대의 청동기는 거의 모두가 제사용이며 실용적인 것은 적다.

그릇에는 점의 결과를 거푸집에 부은 것이 있다.

이것이 금문으라 불리는 것으로 이 시대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상대와 비교해서 주대는 이 문장이 매우 긴 것이 특징이다.

 

또 지금까지의 절대적인 조상 숭배가 약해진 것도 상과 주의 차이로서 들 수 있다.

상나라에서는 조상에 대한 숭배와 외경심이 매우 강하고 제사를 게을리하거나 하면 당장이라도 탈이 날 수 있다는 생각

을 가지고 있었다.

주의 사람들도 조상에 대한 제사는 하고 있었지만 재앙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닌 순수하게 경의를 표하는 상징이 되었다.

상대에는 일이 있을 때마다 점을 쳤지만 주대에는 그러한 일이 적어졌다.

이러한 이유로 상이 남긴 금문에 비해, 주가 남긴 금문의 수가 적어 주대 전기보다 오히려 상대의 자료가 많은 상태이다.

 

이러한 청동기에 문자를 거푸집에 붓는 기술은 왕실의 독점 기술인 것으로 보이고 제후에게는 어떤 때에 왕실로부터

하사되는 경우가 있었다.

춘추시대에 들어설 무렵의 혼란으로 기술이 제후에게도 전파되어 제후들 사이에서도 청동기에 문자를 거푸집에 붓는

것이 행해지기 시작했다.

 

건축 분야에서는 주대에 들어서 모즙 기와가 일반적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주석

1.↑ 가 나 다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주의 봉건제도〔槪說〕〉
2.↑ 이와 같은 봉건적 관계는, 이미 상나라에서 왕과 백의 관계로 성립돼 있었다.




5-2 서주


서주(西周, 기원전 11세기~기원전 771년)는 수도를 시안에서 뤄양으로 옮기기 전의 주나라를 말한다.

주나라의 판도는 상나라보다 대폭 확대되어 황하 일대에 세력을 미쳤다.

 

서주는 기원전 771년 내부 반란과 이에 합세한 견융(犬戎)의 침략으로 멸망하였으며,

이 일을 계기로 주나라 왕실은 유명무실해지고, 산하의 제후들이 사실상의 독립국으로 행세하게 된다.

 

역사

 

문왕, 무왕과 개국 - 원래 주나라는 상나라의 서부 제후국으로, 황하가 굽어 올라가는 지역인 오르도스 지방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상나라의 주왕 시절, 주나라의 문왕은 상의 서쪽 제후들에 대한 총 책임권을 가지고 있던 서백의 지위에 있었다.

(그의 이름인 희창(姬昌)을 붙여 '서백 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시 주왕의 폭정으로 상나라의 인심은 흉흉하였고, 서백 창은 주왕의 측근으로 주왕에게 반역하는 다른 제후들을 여러

차례 평정하는 등 공을 세웠다.

부하들은 그를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려 하였고, 백성들도 그를 따랐으나 서백 창은 끝까지 주왕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않다가 고령으로 죽게 된다.

 

그러나 서백 창의 태자인 희발(무왕)은 아우인 희단과 현자인 강태공 등과 더불어 주왕에 반역할 뜻을 세우고 비밀리에

군사를 모았다.

즉위 9년, 드디어 반역의 준비가 끝난 희발은 반란의 기치를 높이 들고 아버지인 희창의 위패를 모시고 황하 서쪽으로

동쪽으로 건널 수 있는 나루터인 맹진까지 원정하였다.

강태공은 총사령관이 되어 제후를 소집하였고, 수많은 제후들이 모여 주왕을 무찌를 준비를 하였다.

 

사기에 의하면, 이때 무왕의 진지에는 두 가지의 길조가 있었다고 한다.

첫째로 맹진을 도하하는 무왕의 배에 상나라를 상징하는 흰 물고기가 날아들어 무왕은 그것을 잡아 제사지냈다.

둘째로 강 상류에서 불길이 일더니 그것이 무왕의 앞에서 빨간 까마귀로 변했다.

빨간색은 주나라의 상징색으로, 이 또한 앞서와 마찬가지로 큰 길조였다.

이러한 길조에도 불구하고, 무왕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며 제후들을 해산시켰다.

점을 통해 길흉을 따지는 상나라의 전통과 달리 무왕은 길조에도 불구하고 반란의 때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 군대를

물린 것이다.

 

2년 후, 무왕은 다시 문왕의 위패와 함께 주왕에 대한 2차 반란을 일으켰다.

무왕의 군대는 은허의 남쪽인 목야에 도착했고, 주왕도 마지막 여력을 짜내어 토벌군을 파견하였다.

이때 주나라의 진영에 있던 점쟁이가 갑골로 점을 쳤는데, 이번에는 저번과 반대로 큰 흉조가 나타났다.

이때 강태공은 이를 무시하고 길흉의 점과 상관없이 전투에서 이기면 된다고 주장해, 무왕의 원정은 계속되었다.

 

목야에서 무왕은 상나라 병사들을 향한 선전포고문을 발표했는데, 달기의 말만 듣고 정사를 멀리하는 주왕을 탓하고,

하늘이 뜻이 자신에게 있음을 밝혔다.

이에 상군의 많은 수가 흔들렸으며, 결국 목야의 싸움은 주나라의 대승으로 끝난다.

 

전투에서 패한 상의 주왕은 자살했으며, 은허에 입성한 주의 무왕은 주왕의 시체에 활을 세 번 쏘고 검으로 벤 후 효수

하여 하얀 깃발 위에 높이 내걸었다.

이어 후궁으로 들어가 달기를 비롯한 주왕의 후비들을 벤 후, 이 역시 상나라를 상징하는 하얀 깃발 위에 걸었다.

장엄한 입성식이 끝난 후, 무왕은 주나라의 개국을 선언하였으며, 강태공, 주공 단 등의 공신들을 포상하여 강태공은

제나라, 주공 단은 노나라에 봉했다.

주왕의 태자인 녹부에게도 온정을 베풀어 작은 땅을 다스리게 하였으며, 삼황오제 및 하나라의 후손들도 작은 영지에

봉하였다.

 

초기 혼란기 - 주나라를 개국했던 무왕은 오래 살지 못하고 일찍 죽는다.

개국공신이자 무왕의 동생인 주공 희단이 무왕의 아들인 성왕을 보좌하여 국정을 이끌어간다.

왕조 초기에 어린 왕이 등장함으로써 상나라의 유신들이 반역할 염려도 있고, 춘추 좌씨전에 나온 것처럼 무왕의 일가

친척으로 영주에 봉해진 자가 40명에 이르는 등 불안한 상황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상나라 주왕의 태자였던 녹부가 자신의 감시역이자 무왕의 형제였던 희선, 희탁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주공 단은 연나라의 시조이자 일가였던 소공 희석과 연합하여 녹부를 토벌하는 토벌군을 파견했다.

개국 공신인 강태공이 이를 이끌었으며, 반란을 일으킨 지 3년이 되어 드디어 녹부의 반란이 진압되었다.

녹부와 희선은 주살되었으며, 기타 녹부에 협력했던 자들은 모두 쫓겨났다.

 

하지만 주공 단은 상나라의 제사는 유지되길 원하여 녹부의 동생인 미자개를 송나라에 봉했으며, 상나라의 유신들을

송나라에 모여 살게 하였다.

 

주공 단이 성왕을 대리하여 통치한 지 7년, 성왕이 성인이 되자 희단은 성왕이 직접 통치하도록 하였다.

 

팽창기 - 초기의 혼란을 지나 안정기에 접어든 주나라는 본격적인 팽창을 시작하게 된다.

성왕의 손자인 4대 소왕의 시대에는 허난 성 지방에 있는 묘족이 공물을 진상하였다.

소왕의 아들인 목왕 때에는 원래 주나라의 기원이었던 서방 지역에 대한 팽창에 집중했다.

목왕은 전설의 서방 군주인 서왕모를 만나고 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서왕모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서북쪽의

이민족인 견융을 공격하여 그들의 흰 꿩, 흰 여우, 흰 사슴 등을 잡아 돌아왔다.

그러나 이런 외정의 소득은 그리 크지 않았으며, 이로 인한 지출 때문에 점점 주나라의 재정은 열약해져갔다.

목왕의 손자인 7대 의왕에 대해 사기는 "왕실 드디어 쇠락하여 시인, 풍자하는 시를 짓다."라고 적고 있다.

의왕의 뒤를 이은 자는 숙부인 효왕이었는데, 효왕의 다음은 다시 의왕의 아들인 이왕이 이어 정치적인 혼란을 보여주고

있다.

 

여왕과 공화기 - 이왕의 아들인 10대 여왕은 이러한 혼란을 극복하고 주나라의 재건에 힘쓰려 했다.

강력한 중앙 통제를 시행하여 재정의 건실화를 추구했으며, 형법을 제정하여 불안한 치안상황을 개선하려 했다.

이에 대해 백성들의 불만이 일게 되자, 여왕은 옛 상나라 출신의 무당을 불러들여 자신을 비방하는 자들을 잡아들이게

했다.

사기는 이런 상황을 보고 "백성들은 감히 말하지 못하며, 도로에서 눈으로 대화한다."고 표현했다.

여왕의 재건정책이 빛을 보기 전에 백성들이 불만이 폭발하여 결국 여왕은 쫓겨나고, 기원전 841년부터 기원전 828년은

'공화기'로 남게 된다.

여왕이 반란군 때문에 도읍을 버리고 도망갔기 때문이다.

여왕이 궁을 도망간 후, 정치는 주공 단과 소공 석의 후손이었던 두 재상이 맡아 다스렸으며, 여왕이 망명지에서 죽은 후,

여왕의 아들이 선왕으로 등극한다.

이 14년간을 '공화'라는 명칭으로 부른 이유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죽서기년에 따르면, 공나라의 화라는 자가 14년

간 왕위를 찬탈했기 때문에 '공화'라고 불렀다 한다.

하지만 여씨춘추 등에 따르면, 여왕의 정치가 가혹했기에, 공화에 대한 백성들의 지지는 높았다고 한다.

이후 이 표현은 왕정에 반대되는 체제를 뜻하는 공화주의라는 표현에 쓰이게 된다.

 

미녀 포사와 천도 - 여왕의 아들인 선왕이 등극한 후 주나라는 서방 민족과의 대결에 들어간다.

선왕 39년, 티베트 계통의 강족과의 전쟁에서 주나라 군대는 크게 패했다.

선왕은 백성의 호구 조사를 실시하여 전쟁의 패배를 극복하고 국가 재건을 노력했으나, 빛을 보지 못하고 재위 46년

만에 죽었다.

 

그런데 선왕의 뒤를 이은 유왕은 포사라는 미녀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유왕에게는 원래 정부인 신씨에게서 낳은 태자가 있었지만, 포사가 온 뒤로는 포사의 아들을 태자로 삼고, 원래 태자를

폐하였다.

포사는 무척 미인이었지만 웃는 일이 없어 유왕은 포사를 웃게 하기 위해 고민했다.

하루는 왕궁에서 실수로 봉화를 올린 일이 있었다. 이민족의 습격을 받은 지 오래 지나지 않은지라 각지의 제후는 서둘러

전쟁 준비를 갖추고 왕궁에 도착했다.

하지만 실수로 봉화가 올려졌다는 것을 깨달은 제후들은 허탈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그때 포사가 이를 보고 크게 웃었고, 유왕은 그 뒤로도 포사를 웃게 하기 위해 봉화를 몇 번 올리게 된다.

이 때문에 주나라에 대한 제후들의 신뢰가 크게 떨어진다. 이것을 유래로 "천금으로 웃음을 산다"라는 속담이 생겼다.

 

한편 유왕이 포사만 감싸고 정치를 소홀히하자, 유왕의 정부인 신씨의 친정은 하나라의 후손인 증, 이민족인 서이,

견융과 더불어 왕궁을 습격했다.

유왕은 다급하여 봉화를 올렸으나 봉화를 보고 달려온 제후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기원전 771년, 유왕은 여산(驪山) 근처에서 반란군에게 죽게 되고, 포사의 아들이자 태자였던 백복도 살해당했다.

 

견융은 그 뒤 호경에 눌러앉아 약탈을 벌였고, 제후들은 이 사건을 알고 새 왕에게 강한 권력을 행사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진, 정 등의 제후국들이 와서 견융을 토벌하고 호경을 되찾았다.

 

신, 증 등의 제후들은 신씨의 아들이자 원래 태자였던 의구를 옹립했하였다.(평왕)

그 뒤 견융의 침략 위협에 시달리다가 제후들과 BC771년, 낙양으로 천도하니 이로써 서주 시대가 끝나고 동주 시대,

즉 춘추 시대가 시작되었다.

 

평가

 

시경의 평가 - 시경은 서주의 마지막 군주인 유왕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백성들, 토지를 가지면 그대 그것을 빼앗고,
백성들 노예를 가지면 그대 그것을 빼앗는다.
죄가 없음에도 그대는 죄 있다 하고,
죄 있을 때 그대는 이를 용서한다.
현명한 남자는 나라를 일으키고
현명한 여자는 나라를 기울게 한다.
아아 그 여자 올빼미가 되고 접동새가 된다.
여자가 말 잘하는 것은 재앙의 사다리
재난은 하늘이 내리는 게 아니다.
여자로부터 생긴다.

 

이는 유왕의 부덕한 정치를 탓하는 동시에, 유왕의 후처였던 포사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이 시에서 포사는 올빼미나 접동새처럼 목소리가 나쁜 새로 비유되었다.

 

참고 자료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1》, 시대정신, 1992




5-3 강태공(강상), 포사


강상

 

강상의 초상. 태공상(太公像)이라고 적혀 있다.


강상(姜尙)은 기원전 1211년(은나라 경정(庚丁) 8년에 출생하여 기원전 1072년(주강왕 6년)에 사망할 때까지 나이(수壽)가 139세에 달했다. 중국 기록은 약간 차이가 난다.

또다른 중국 기록에서 강상은 기원전 1140년 9월 12일(음력 8월 3일(~5) ~ ?)에 태어

났다고 한다.

 

기원전 11세기 중국의 은나라를 멸망시킨 인물로 염제신농의 후손이라고 전해오며,

동해가 고향이다. 동해는 동해상으로도 불린다.

성은 강(姜), 이름은 상(尙), 자는 자아(子牙)이며, 호는 비웅(飛熊)이다.

주왕이 항시 꿈에서라도 바라던 인물이 비로소 나타났다하여 흔히들 태공망이라고도 불렸다

 

강태공의 본관은 천수강씨(天水姜氏)이며 염제신농씨의 후손이다.

강태공은 주나라 문왕을 도와 주나라를 건국한 일등공신이며, 전국칠웅인 제(齊)

나라의 제후가 되었다.

 

강태공의 자손들(강급, 강소백 등)이 대대로 제나라를 이끌어왔으며 이 시기에 중국의 고(高), 노(盧), 여(呂), 허(許),

구(丘,邱), 강(强), 방(方), 정(丁), 장(章), 사(謝), 제(齊), 하(賀), 향(向), 가(柯), 뢰(賴), 초(焦), 기(紀), 최(崔), 좌(左),

역(易)씨 등 수많은 성씨들이 강태공의 자손들로부터 갈라져나갔다.

강태공 사당에는 해마다 강태공의 후손들과 강씨에서 분파된 성씨들이 대거 참례를 온다.

 

현재 강태공의 후손은 한국의 진주강씨와 중국의 천수강씨가 있다.

 

생애 - 강상은 염제신농황제(炎帝神農皇帝)의 51세손이요, 백이(伯夷)의 36세 손이기도 하다.

주나라 문왕, 무왕, 성왕(成王), 강왕(康王) 4대에 걸쳐 태사(太師)를 지냈으며 춘추전국 시기의 제(齊)나라의 창시자요,

딸은 주 무왕의 왕후이다.

 

때는 기원전 1046년 2월 겨울, 은나라 주왕의 흉폭한 정치가 계속되어 천하가 비탄에 젖어있을 시 홀연히 나타나 주

문무왕의 스승이 되어 4만 5천의 군사로 72만의 은나라군을 대파하는 기적적인 전쟁을 일구어낸 동이지사(東夷之士)

이며 기인(奇人)이다.

이 전쟁을 목야전쟁(牧野戰爭)이라 하며 목야전쟁이 주는 의의는 적은 수로 많은 적을 섬멸한 기적의 전쟁이요,

아무리 불리하더라도 정의(正義)는 반드시 필승(必勝)한다는 정법을 확립시킨 정의 필승의 전쟁이며 대륙을 통일한

천하통일전쟁이라 할 것이다.이후 제나라를 일으켜 제1대 초대 국왕으로 제나라는 32대 근 800여 년을 존속하였다.

 

강태공은 주나라 문왕, 무왕의 스승이자 장인이며 천하의 스승국의 위치로 군림하여 제나라의 왕이 되었다.

제나라의 2대 왕좌를 큰아들 강급(姜及)에게 물려주었고 강급은 제 정공(齊丁公)이라고 불렸다.

강태공을 이어 제나라가 가장 흥한 시기는 제 환공 강소백(姜小白)시기로 강소백은 춘추시대 첫번째 패자가 되기도

하여 강태공의 얼을 이었다. 제나라 최전성기에는 사방 5000리를 이룩한 대국으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강태공이 남긴 유명한 명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복수불반분'(한번 엎지러진 물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다)이다.

강태공의 전 부인 마씨는 강태공이 주문왕을 만나기전 생활고에 견디다 못해 강태공 곁을 떠났는데, 이후 강태공이

성공했을때 다시 돌아와서 아내로 맞아주길 요청했다.

이에 강태공은 하인더러 물을 떠오라고 한 후 그 물을 땅에 엎었다.

그리고 돌아온 아내에게 지금 바닥의 그 물을 다시 항아리에 담는다면 아내로 맞이 해주겠다고 했다.

즉, 한번 떠난 마음은 두번다시 되돌리기 어렵다는 유명한 명언을 남긴 것이다.

 

강태공은 기원전 1072년에 신선계에 드셨으며 그때 연세는 139세셨다. 의관을 서주(西周)호경(鎬京)에다 안장하였다.

제나라 사람들은 강태공의 덕을 생각하여 제나라에다 강태공 이관총(衣冠塚)을 세웠다.

강태공은 주역(周易)의 확립자이며 강태공이 저술한 육도삼략(六韜三略)이 현재에도 전해져 오고 있다.

육도삼략은 중국 고대병서의 최고봉인 무경칠서(武經七書) 중의 둘을 차지한다.

후대인 손무의 손자병법도 강태공의 육도삼략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후일 대륙을 정복한 청나라 황실에서조차 강태공을 무성왕(武成王)으로 칭하여 천하통일을 이룬 왕으로 인정하였다.

 

극화 - 중국 소설 《봉신연의》에서는 본명은 강자아이며, 곤륜산의 도사가 되어 신선들의 살겁을 깨기 위한 봉신을

주도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가족 관계 - 아들 : 제 정공(齊丁公) 강급(姜伋), 딸 : 읍강(邑姜), 사위 : 주 무왕

 

포사

 

포사(褒姒, 사기에서는 襃姒)는 기원전 8세기(기원전 770년)경 주나라 유왕의 황후로 활약한 인물로, 절세의 미녀로

언급되며 후에 주나라의 멸망의 원흉이 되었다. 생일과 사망일은 알려져 있지 않다.

포시에 관한 문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진다.

 

하나라 말년에, 두 마리의 용이 왕궁에 나타나 스스로를 "포나라의 두 임금이다"라고 하면서, 타액(침)을 뱉어놓고는

사라졌다.

사람들이 점을 쳐 본 결과 보관해두면 길할 것이다(藏之吉)라는 점괘가 나와 사람들은 그것을 나무 상자에 고이 보관

하였다.

주나라 려왕(厲王) 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그 상자를 열고는 그 안을 관찰하였다. 조심하지 않아 용의 침을 조정 밖으로

흐르게 하였더니, 용의 침이 갑자기 검은 도마뱀으로 변하여 왕부 안을 돌아다녔다.[1]

한 소녀가 이 검은 도마뱀과 우연히 마주쳤다. 그 소녀가 40년 만에 여자 아이를 하나 낳았다.

소녀는 이 아기를 갖다버렸다.

포나라(褒國) 사람이 이 아기를 거두어 집에서 길렀다. 포나라 사람은 이 여인을 주나라 유왕(幽王)에게 바쳤는데,

그녀가 바로 포사였다.

 

주나라 유왕은 포사에 빠졌다. 포사는 유왕의 총희가 되었으며, 아들 백복(伯服)을 낳았다. 하지만 포사는 웃음이 없었다.

주나라 유왕은 포사를 기쁘게 해주고 싶어했다.

 

주나라 유왕은 봉화를 올려 제후들을 려산(驪山)(산시 림동, 陝西臨潼) 앞에 소집하였다. 제후들은 황망히 려산 앞에

달려왔으나, 봉화가 적의 침범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낭패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돌아갔다.

포사는 이 광경을 보고 단순호치(丹脣皓齒)를 드러내며 크게 웃었다.

 

이후, 주 유왕은 태자 의구(宜臼)를 폐하고는 백복(伯服)을 태자로 세웠다.

신후(申后)는 그 아들과 함께 외가 신국(申國)(허난 남양북, 河南南陽北)으로 급히 떠났다.

 

기원전 771년, 신후(申后)의 아버지 신후(申侯)가 려(呂) 등의 나라와 연합하여 견융족(犬戎)과 함께 호경(鎬京)으로 대거

진공해왔다. 주 유왕은 다급히 봉화를 올렸으나, 제후들은 이 봉화가 또 거짓인 줄 알고 아무도 오지 않았다.

견융족의 병사가 주나라 유왕을 살해하였다.

포사는 그들의 포로로 잡혔는데,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자결했다는 설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참고 문헌

사마천 사기 권사 주본기 제사(卷四 周本紀 第四)


주석

1.↑ 단순호치 (丹脣皓齒).




5-4 동주


동주(東周)는 기원전 771년서주의 유왕이 견융의 침공으로 호경이 함락되고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제후들이

평왕을 옹립하였고 평왕이 수도를 호경에서 낙읍으로 옮긴 이후의 주나라를 말한다.

동주 시대에는 주나라 왕실의 힘이 약화되고, 제후들이 주나라 왕실을 명목상으로만 남겨둔 채, 독립적인 활동을 하였다.

이 때가 춘추 전국 시대이다.

 

정나라와의 전쟁

 

정나라는 선왕의 동생인 정 환공으로부터 시작된 제후국으로, 이제 개국한 동주 왕실과는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

환공은 유왕의 재상이었으며, 평왕은 환공의 아들이자 자신에게는 당숙인 정 무공을 재상으로 삼았다.

정나라는 강대국은 아니었지만, 이제 왕실과 혈연관계가 약해진 다른 제후국과 달리 가까운 혈연관계로 왕실에 대한

충성도가 높았으며, 왕실 근처에 자리잡고 있어 왕실을 대신해 태산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정 무공은 50년에 다다른 평왕의 치세를 보좌해 동주의 초기의 기반을 다졌다.

 

평왕의 뒤는 손자인 희임이 이어 환왕이 되었다. 정 무공도 평양을 20여년간 보필한 후 죽고, 그의 아들 장공이 대를

이어 평왕을 보좌하다가 이제 환왕을 보좌하게 되었다.

하지만 혈기 왕성한 환왕은 이미 오랜 기간 동안 동주 왕실의 핵심 세력이 된 정나라 세력을 탐탁치 않게 여겨 다른 친척

제후국인 괵나라 세력을 중용했다.

 

이러한 왕실 내의 세력변화는 정 장공에게 좋지 않았으며, 장공은 노나라에게 사신을 보내 주 왕실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노나라 내에 있는 태산 근처의 땅을 노나라에게 양도하는 대신 정나라 내에 있는 노나라 영토를 병합했다.

이것은 정나라가 주 왕실의 재상 자격으로 태산에 제사지내러 가는 일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으며, 이는 환왕의 분노를

샀다.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환왕은 자신이 중용한 괵나라를 비롯, 진(陳), 채(蔡), 위(衛)의 군사를 소집해 정나라를 토벌

하기로 했다.

정 장공은 제중(祭仲), 고거미(高渠彌)를 파견해 이를 맞아 싸워 대승을 거뒀다. 이때 장공의 부하 중 축첨(祝瞻)이 쏜

화살이 환왕의 팔에 맞았다. 정 장공은 공격을 중지시키며 "윗사람을 공격하는 것도 꺼려지는 일인데 하물며 천자를

능멸할 수는 없는 일이다."며 사신을 보내 환왕의 부상을 위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동주 왕실의 힘은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춘추전국시대에 관한 기록은 각각의 시대에 관한 서술을 참고하라.

 

멸망

 

전국시대가 되면서 주 왕실은 유명무실해졌으며, 초와 위 등의 국가는 왕호를 칭하게 되었고, 진 혜문왕이 왕의 칭호를

사용하면서 주 왕실의 권위는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기원전 249년 진나라의 장양왕(진시황의 아버지)의 군대가 동주를 침공하여 주나라는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5-5 정



정나라(鄭, 기원전 806년 ~ 기원전 375년)는 서주 왕조와 춘추 시대에 걸친 주나라의 제후국 중 하나이다.

작위는 백작이었으며, 공실의 성씨는 희(姬)성으로 동성 제후국에 속했다. 한나라(韓)에 의해 기원전 375년에 멸망했다.

 

정나라는 기원전 806년, 주 여왕의 아들이자 주 선왕의 동생인 정 환공 우(友)가 서주의 기내에 있는 정(鄭, 현재의 섬서성

화현 서북쪽) 땅에 봉해짐으로써 세워졌다.

주 유왕의 정사가 어지러워지자 화를 피해 동쪽으로 옮겨 동괵(東虢)과 회(檜, 鄶)나라에서 열 읍을 받아 새로 나라를 세웠다. 환공은 서주 시대의 마지막 왕인 주 유왕의 숙부였으며 주 평왕의 종조부였으므로, 서주 말기와 춘추 시대 초기에 정나라와 주 왕실은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정 환공은 주 유왕의 사도로 봉직했으며, 그 후임인 정 무공과 정 장공도 주 평왕과 주 환왕의 경사(卿士)로써 봉직했다.

또한 오랜 세월이 지나 왕실과 혈연관계가 멀어진 다른 동성 제후국과 달리 왕실에 대한 충성도가 높았으며, 왕실 근처에

자리잡고 있어 왕실을 대신해 태산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이러한 주 왕실과의 관계로 인해 춘추 시대 초기에 정나라는 국가간 외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나 주 평왕 4년에 정 무공이 같은 동성 제후국인 동괵을 멸망시키고 이름을 신정(지금의 허난 성)으로 바꾸어 수도로

삼고, 주 평왕의 뒤를 이어 주 환왕이 즉위함으로써, 주 왕실과 정나라의 관계는 틀어졌다.

주 환왕은 오랫동안 왕실에 봉사하면서 동주 왕실의 핵심 세력이 된 정나라 공실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그 반대급부로

다른 동성 제후인 괵나라를 중용했다.

 

이러한 왕실의 세력 변화로 인해 주 왕실에서 정나라의 세력이 약화되자 정 장공은 주 왕실의 권위를 무시하고 노나라와

상대방의 봉토 안에 있는 각자의 제사용 봉토를 교환했으며, 이에 분노한 주 환왕은 정나라의 영토 일부를 몰수하고 주변

제후국인 진(陳)나라, 채나라, 위(衛)나라의 군사를 소집해 정나라를 공격했다.

그러나 정 장공의 반격으로 주 왕실과 그 연합군은 패배했으며, 주 환왕이 팔에 화살을 맞아 부상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동주 왕실의 힘은 결정적으로 약화되었으며, 환왕이 정 장공에게 패배한 시기 근처가 바로 춘추 시대가

시작하는 때이다.

 

정 장공이 죽은 후에는 정 소공, 정 여공 및 다른 공자들의 공위 다툼으로 인해 국력이 급속히 약화되었으며, 주변 강국인

진 (晉), 초, 제의 사이에 끼어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기원전 607년 진(晉), 진(陳), 위, 송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정 간공(鄭簡公) 시기에 자산을 등용하여 법 체계를

정비하는 등 일정 이상의 국력을 유지했다.

 

전국시대 초기부터 한나라와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였고, 내란이 일어난 틈을 탄 한나라의 공격을 받아 기원전 375년에

멸망했다.




5-6 춘추 전국 시대


춘추 전국 시대(春秋戰國時代: 기원전 770~221)는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를 아울러 부르는 말로, 기원전 770년 주(周)

왕조의 천도 후부터 기원전 221년 진 시황제(秦始皇帝)의 통일까지를 말한다.

상업이 많이 발달하였으므로 이때부터 철기가 사용되었다.

 

춘추 전국 시대는 선진 시대(先秦時代)라고도 불리는데,[1] 이는 기원전 221년의 진나라에 의한 중국 통일 이전의 시기를

뜻한다.

이 시대는 중국사상의 개화결실의 시기였다.[1] 이 시대의 사상가들을 제자(諸子)라 하며 그 학파들을 백가(百家)라

부른다.[1]

 

원인

 

주나라가 유목 민족에 의해 도읍을 동주로 옮기자 주 왕실이 약화되어 봉건제가 약화됨에 따라 각각의 제후국들은 철제

무기로 무장한 군대를 발전시키고 인재를 등용하여 주왕실에 반기를 들고 춘추 전국 시대의 패자가 되기 위해 치열한

전쟁 및 제자백가사상, 뛰어난 왕과 장군이 나타났던 시대이다.

춘추 전국 시대는 기원전에 속하는 시대이다.

 

의의

 

춘추 전국 시대때는 상공업이 많이 발전하였고,철제로 된 물품을 상용하였고,남북조 시대와는 달리 인재의 등용에 힘을

써서 안으로는 치안과 평화를,밖으로는 영토확장을 위한 전쟁을 하였다. 또한 제자백가등 사상의 발전도 많이 되었다.

 

사상 - 제자백가


유가(儒家)
주요 인물: 공자 맹자 순자
주요 사상: 효제(孝悌) · 인의(仁義) · 예(禮)를 바탕으로 한 정치.


도가(道家)
주요 인물: 노자 장자
주요 사상: 무위자연, 인위의 배격


묵가(墨家)
주요 인물: 묵자
주요 사상: 가족, 국가를 초월하는 사랑인 겸애(兼愛). 존비친소(尊卑親疎)에 입각한 차별애(差別愛)를 주장한 유가를

비판.


법가(法家)
주요 인물: 관자(관중) 상앙(공손앙) 한비자 이사
주요 사상: 법치, 절대군주에 의한 부국강병


농가(農家)
주요 인물: 허행
주요 사상: 특권층의 문화생활을 부정하고, 개농주의를 주장,


주석

1.↑ 가 나 다 동양사상 > 동양의 사상 > 중국의 사상 > 제자백가의 사상 > 제자백가의 사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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