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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역사

중국사 (4) - 유가 ~ 농가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7.01.15|조회수92 목록 댓글 0

5-7 유가(유교)



유교(儒敎)는 중국 춘추시대(기원전 770~403) 말기에 공자(孔子)가 체계화한 사상인 유학(儒學)을 종교적 관점에서

이르는 말이다.

시조 공자의 이름을 따서 공교(孔敎)라고도 한다.[1]

지켜야 할 인륜의 명분(名分)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하여 명교(名敎)라고도 한다.[2]

 

유교의 특징 또는 핵심 사상은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유교는 수기치인의 학이라 할 수 있다.

즉, 유교는 자기 자신의 수양에 힘쓰고 천하를 이상적으로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문이며 또한 그것을 향한 실천

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유교는 전국시대(기원전 403~221)에는 제자백가의 하나인 유가(儒家)로 등장했지만, 전한의 무제(재위 기원전 141~87) 때

국가 정통의 학문이 된 후로는 중국의 학문과 사상계를 대표하게 되어 현대의 중국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정치와 국민생활

에 영향을 주었다.[3]

 

유교의 주류는 전국시대에는 맹자로 대표되는 내성파의 학문과 순자로 대표되는 숭례파의 학문, 한나라와 당나라 시대의

훈고학과 경학, 송나라 시대의 주자학, 명나라 시대의 양명학, 청나라 시대의 고증학 등으로 발전 또는 변천되었다.

 

역사

 

개요 - 공자의 사후, 공자의 제자들은 증자(曾子) · 자사(子思)의 계통에 속하는 내성파(內省派)와

자하(子夏) · 자유(子遊)의 계통에 이어지는 숭례파(崇禮派)의 2파로 나누어졌다.[3][4]

그 후 내성파의 전통은 맹자에게로 이어졌고 숭례파의 전통은 순자에게로 이어졌다.[4]

그리고 순자의 사상은 제자백가의 법가가 사상의 한 유파로서 성립될 수 있는 근거를 주어 한비자 등에 의해 법가가

성립되었다.[5]

 

한나라와 당나라 시대에 훈고학과 경학이 성립 · 발달하였다.

한나라 시대에서 《시》와 《서》 외에 《역》·《예》·《춘추》가 경서에 추가돼서 오경이 성립되었다.

 

송나라(960~1279) 시대에 성리학이 성립되었다.

성리학에서는 선진시대(先秦時代: 기원전 221년 이전) 유학의 도통(道通: 유학의 도가 전해져 이어온 계통)이 강조됨

으로써 공자 · 증자 · 자사 · 맹자의 내성파의 계보가 중시되어 공자의 《논어》, 증자의 《대학》, 자사의 《중용》,

맹자의 《맹자》의 4서가 성립되었다.[4]

 

명나라 시대에서는 양명학이 성립되었고, 청나라 시대에서는 고증학이 크게 흥기하였다.

 

성립 - 유교는 시조 공자의 이름을 따서 공교(孔敎)라고도 하는데, 그 내용은 신분의 존비와 인애(仁愛)를 근본으로

하면서 수신(修身) · 제가(齊家) · 치국(治國) · 평천하(平天下)의 길을 가르치는 일종의 정치학 · 윤리학이다.[1]

따라서 유학이라고도 한다.[1]

 

공자는 자기의 교학(敎學)이 정교일치(政敎一致)의 성덕(聖德)을 갖춘 옛 성왕(聖王, 선왕)들의 도(道)에 합치하는 것

으로 생각했다.[1]

또한 이 "선왕의 도"는 주공(周公)을 비롯하여 주 왕조의 창설자들에 의해 밝혀져서 《시(詩)》나 《서(書)》 등의 경전

(經典, 경서)에 수록되어 있다고 생각했다.[1]

 

공자의 사상은 전국 시대에는 맹자(孟子) · 순자(筍子) 등에 의해서 계승되어 진(秦) · 한(漢)에 미쳤는데, 이 시기에 이르

러서 《시》와 《서》 외에 《역(易)》·《예(禮)》·《춘추(春秋)》가 경서에 추가돼서 오경(五經)이 성립되었다.

오경의 성립은 중국인 공통의 규범이나 신앙이 유가 사상을 핵으로 하여 집대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나라의 무제는 전 중국의 지배자로서의 한왕조의 권위를 이데올로기 면에서 정당화하기 위하여 동중서(董仲舒) 등의

협력을 얻어 유교를 한제국 공허(公許)의 학문으로 채용하였다.[1]

이것으로 유교는 강대한 전제 권력에 의해서 전면적으로 지지를 얻게 되고 관료와 그 후보자적 존재에게 있어서는 필수

적인 교양이 되었다.[1]

따라서 이전에 유교가 재야 여러 학문의 하나였던 때에 비해서 유교는 차차 그 사상적 내용의 긴장성을 잃어갔다.[1]

 

발전

 

유교는 춘추전국시대 이후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등 고대 및 중세를 거쳐 변함 없이

중국의 대표적 이데올로기였다.

일시적으로 도교나 불교가 국가 핵심 이념이 될 때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근본은 유교였다.

유교는 고대의 훈고학적 유교를 거쳐 송나라 때 신유학과 도교의 형이상학적 개념을 받아들여 주자와 정자에 의해

성리학으로 발전하였다.

 

성리학은 한국으로 건너와 조선왕조의 국가 이데올로기로서 자리잡는 등 한국에 큰 영향을 주었다.

명나라 때는 사변적인 성리학에 대한 반발로 왕양명에 의해 양명학이 등장하였다.

양명학은 사물의 이치를 파악 이전에 마음의 선천적인 앎의 능력인 양지(良知)를 강조하였다.

조선 후기 북학파, 실학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강화도를 중심으로한 강화학파의 학문이기도 하였다.

청나라에 이르러 객관적인 증거에 의한 실증적이고 귀납적인 연구를 강조하는 고증학이 크게 흥기하였다.

 

유교는 동북 아시아, 즉 한국과 일본 등 중국의 인접 국가를 비롯한 나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 특히 한국의 경우

삼국시대 이후 고려를 거쳐 조선 왕조 때에는 국가 지배 이념이 되었다.

 

변천

 

본래 공자의 유교라는 것은 인류 보편적 질서, 인간 내면의 심미적인 부분을 중점을 두는 내용이었다.

또한 고대 사회의 야만스러운 풍속을 정리 하기를 원했으므로 사회 본편적 질서, 계급 간의 상호 존중, 등을 이론화

하였다.

 

한나라 시대 초기에는 순장도 존재하였고, 왕족 간의 근친혼도 존재하였다.

이것은 유교가 통치 이념이었지만 당시에는 교리화되지 않았으므로 세부적 제반 사항이 존재하지 않았던 이유이다.

한나라 시대는 유교 이론은 자연스러웠고 성리학의 획일성, 계급성을 내포하지는 않았다.

한나라 중기를 거쳐 후대에 이르면 유교가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순장, 근친혼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명나라 시대와 같이 여성의 평생 순결을 강조하거나, 지나친 계급 체제의 합리화는 유교에 존재하지 않았다.

 

성리학은 유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본질적으로 다른 요소가 포함된다.

유교 추종자들은 공자의 이상을 교리화하고 강제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졌던 것으로 이해되며, 성리학으로 발전 시킨다.

또한 명나라 시대에는 권력자에게 충성을 다하고, 지배 체제를 강화화기 위하여 성리학 이론을 이용하게 되었다.

 

명나라는 성리학을 이용하여 사회를 통제하기를 원했다.

이런 현상은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성리학이 고려 후기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나, 후기로 갈수록

지나치게 계급화되고 교리화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또한 여성에게 가혹한 법칙들이 생겨났다. 성리학의 이와같은 문제들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성리학이 유교 이론에서

파생되었다는 근거 때문에 유교도 비난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러나 성리학에 제기된 문제 때문에 유교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이론 또한 문제가 있다.

공자가 유교를 창시하였으나, 그 후 맹자, 순자 등을 거쳐 변형이 되었고, 명나라 때의 성리학은 공자가 창제한 유교와

같다고 하기에는 도그마적인 요소가 너무 많았다.

 

따라서 공자가 창시한 유교, 맹자와 순자가 개량한 유교, 교리화된 성리학은 분리되어 다루어져야 한다.

실제로 그 이론들도 철학적 요소가 다르며, 그것이 적용되는 양상도 시대에 따라 모두 달랐다.

한나라 시대 유교가 국가 이념이었으나, 명나라 시대와 같이 억압적인 규칙이 없었던 것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사상

 

유교(儒敎) · 유가(儒家) 또는 유학(儒學)은 본래 춘추시대 말부터 전국시대에 걸쳐서 배출된 제자백가(諸子百家) 중의 한

학파에 불과했으나 한나라(漢) 왕조의 권력 안정과 함께 그 통치를 정당화하는 이론으로서 중시되어 중국의 정치사상

중에서 정통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국에 왕조 정치 체제가 존속한 2천년 동안 유학은 국가의 질서를 뒷받침하는 교학(敎學, 즉 儒敎)으로서 정통

사상의 지위를 계속 차지하였다.

그 오랜 기간 동안에 유학은 각 시대의 정치 상황이나 다른 사상과의 관계에 대응하여 그 내용을 변화시켜 전개하였다.

"유(儒)"라는 명칭의 기원에 대해서는 유약(柔弱)을 의미한다든가 "수(須=鬚, 턱수염)"와 통하여 노인(老人)을 의미한다

든가의 말이 있어 일정하지 않으나, 대체로 묵가(墨家)나 법가(法家)와 같은 타학파의 사람들이 아래에 서술된 바의 특징

또는 성격을 가진 학파를 가리켜서 붙인 명칭인 것으로 보인다.

 

핵심 사상 - 유교사상의 특징 또는 핵심 사상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學), 즉 자기 자신의 수양에 힘쓰고 천하를

이상적으로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삼는 학문이며 그것을 향한 실천이라고도 할 수 있다.

 

수기 - 수기(修己), 즉 자기(己)를 닦는다(修)는 것은 개개인의 선천적인 도덕성을 신뢰하여 그것을 정직하게 신장(伸長)

하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은 그것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유교에서는 자기의 도덕성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사람을 군자라 하여 존중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소인이라

하여 배척했다.

 

덕(德)의 양성을 위해서 유교는 배우는 일과 아는 일을 중시한다. 그 학습 대상은 궁정(宮廷)같은데 보존되어 있는 옛

예악의 관례나 고사(故事)를 전한 《시경(詩經)》·《서경(書經)》 등의 고전이다.

그것들의 전통을 배움으로써 그 형식에 포함된 옛 성현들의 정신을 획득하려 한다.

따라서 전통을 지켜가면서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가해 나가려고 한다.

 

이러한 점은 천(天)이나 귀신(鬼神: 사후의 영혼)에 대한 태도에도 일관(一貫)되어 나타나 있다.

인간의 선천적인 도덕성을 중시하는 입장에서는 인력(人力)을 초월한 천(天)의 위력이나 귀신(鬼神)의 재앙 등은 무시

해야 할 것이나 유교는 전대로부터 내려온 그것들에 대한 신앙을 완전히 버리지 않는다.

천(天)은 역시 운명을 지배하는 것이요, 귀신은 공경하나 멀리해야 하는 것으로 본다.

 

치인 - 유교의 이상은 "나를 닦는다(수기(修己))"는 일만으로는 안 된다.

《대학(大學)》에 있는 것과 같이 몸을 닦는 일(수신(修身))로부터 시작하여 집을 가지런히 하고(제가(齊家)), 나라를

다스리고(치국(治國)), 천하를 평(平)하게 하는 데(평천하(平天下)) 도달해야 한다.

반드시 치인(治人), 즉 사람을 다스리는 일이 학문의 궁극적 목표가 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학은 어디

까지나 치자(治者)를 위한 학(學)이다.

 

치자(治者)는 위로는 황제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관료를 포함한다. 그러한 치자(治者)의 자격을 갖는 계층에 대하여

어떻게 백성을 다스릴 것인가, 어떻게 하면 백성이 다스려질까를 말하는 학문이 유학이다.

그 경우 중시된 것이 법률에 의하여 백성을 엄하게 통치하는 것보다는 교화에 의하여 저절로 백성을 치자가 의욕(意慾)

하는 방향으로 인도한다고 하는 방식이었다.

맹자의 덕치주의(德治主義) 또는 왕도정치(王道政治)는 이를 대표한다.

그러한 교화의 측면을 구비한 학설을 자칭할 때 대체로 유학(儒學)이라는 말보다는 유교(儒敎)라는 말을 쓴다.

 

교화(敎化)의 학(學)으로서의 유교는 결코 개인의 정신적 구제를 목적으로 삼는 종교와는 다르다.

사람을 다스리는 일(치인(治人))을 구극(究極)의 목표로 삼기 때문에 유교는 현실에 존재하는 국가권력을 처음부터

무시한다거나 그로부터 도피한다거나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치자(治者) 계급의 일원이 되려고 한다.

그렇지만 그 때에도 정치가 유교 계통의 교화의 사상과 일치하여 행하여지는 것을 기대한다.

그런 점에서 너무 무도한 정치에 대하여는 용감하게 비판을 가하는 일도 있으며 왕조의 교체를 혁명(革命) 이론에 의하여

정당화하는 역할도 과감히 한다.

 

능동적 변화 - 이상과 같은 성격을 갖는 유교사상은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있어서는 당연히

타학파의 맹렬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예컨대 혈연관계를 중시하고 예악 등의 의례를 존중하는 학설은 겸애(兼愛) · 상현(尙賢) · 비악(非樂) · 절장(節葬) 등을

주장하는 묵가(墨家)에 의하여 비판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선천적인 도덕성에 신뢰의 기초를 두는 학설은 권력이 군주를 중심으로 일원적(一元的)으로 강화(强化)되

는 상태를 지향하는 법가(法家)에 의하여 배격되었다.

또 치자(治者)의 일원이 되어 이상적 정치 실현에 광분하는 태도는 인위적인 노력의 한계나 허무함을 깨달은 도가로부터

조소를 받았다.

 

그러한 비판이나 조소 속에서 전통(傳統)과 중용(中庸)을 지키려고 노력한 것이 유교였다고 할 수 있다.

유교사상은 또한 타학파의 비판과 공격에 견디기 위하여 타학파의 학설 중 그 장점을 섭취하는 일을 서슴치 않았다.

 

예컨대 전국시대 말기의 순자(荀子)는 법가나 도가의 이론을 교묘하게 유교의 체계 속에 받아들였으며, 한나라(漢) 시대

의 동중서(董仲舒)는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이나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을 대폭적으로 채택하여 시대의 요청에 순응

하는 이론을 만들어냈다.

정정(政情)의 불안정이 계속된 위진남북조시대(魏晋南北朝時代)에서는 유교사상은 불교나 노장사상(老莊思想)의 공격을

받았지만 후에 불교와 도교에 대한 유교의 도통(道統)에 대한 자각이 당나라(唐) 시대 중기에 일어나 송나라(宋) 시대에

이르러서는 불교와 도교의 장점을 취하여 신유학(新儒學)인 성리학(性理學)을 성립시켰다.

청나라(淸) 말기에 중국이 위기에 빠졌을 무렵에, 서양의 입헌군주제(入憲君主制) 등을 공양학(公羊學)의 체계에 포괄해

설명한 캉유웨이(康有爲)의 학설이 출현한 것도 이상과 같은 유교사상의 특질이 나타난 한 양상이다.

 

유교의 경전

 

사서: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오경: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


유학자

 

중국의 유학자

공자
맹자
증자
주자
왕양명

한국의 유학자

조광조
이황
이이
송익필
서경덕
조식
김성일
김장생
김집
이익


유교와 종교

 

유교가 종교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논란이 있다.

 

현대적 의미에서 유교는 원론적으로 유학(儒學)·유학사상(儒學思想)이라 함과 대차 없는 것으로 종교는 아니다.

곧 인(仁)으로써 모든 도덕을 일관하는 최고 이념을 삼아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를 이룩함을

목표로 하는 일종의 윤리학·정치학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교주, 교리, 교단, 내세 관념 등의 가변적이거나 매우 희박하므로 종교가 갖춰야 할 것을 가지지 못한 하나의

통치 사상(이념)에 불과하다고 보는 주장, 본질적으로는 종교라고 할 수 없으나 다른 사상과 종교를 억압하면서 스스로

종교적 성격을 자초한 측면이 크다는 주장, 그리고 근대의 서구적 학문이나 분류 개념을 대입할 때 종교적 색채가 강하게

드러난다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종교가 아니라고 할 때에는 유학(儒學)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도통

 

도통(道統)이란 "유학의 참 정신이 전해 내려온 큰 흐름", 즉 유교에서 그 사상이 전해지는 정통적인 계보를 뜻한다.

《맹자》에서는 도통을 요(堯) · 순(舜) · 우(禹) · 탕(湯) · 문왕(文王) · 공자 순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유(韓愈)는 《원도(原道)》에서 맹자의 도통에 대하여 공자 앞에 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을 더하고, 공자의 도가

맹자로 이어지는 것으로 파악했다.

여기에 주자(朱子)가 공자 뒤에 증자(曾子)와 자사(子思)를 추가하고, 이것이 맹자를 거쳐 자신의 스승인 정호(程顥) ·

정이(程頤)에게 이어진다고 하여 도통을 확립하였다.

그리하여, 주자(朱子) 시대의 유교계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학문 계통을 의식적으로 구성하고 있었으며, 당신의

유학을 도통(道統)의 학(學)이라는 뜻에서 도학(道學)이라 불렀다.[6]

도학은 정주학(程朱學) · 주자학(朱子學) · 이학(理學) · 이기학(理氣學) · 성리학(性理學) · 성명의 학(性命의 學) 등으로

호칭되면서 송나라 시대의 대표적 학자와 사상가를 포괄하고 있었다.[6]

 

주자의 도통
요(堯: 기원전 2356?~2255?[7])
순(舜: 기원전 23~22세기?)
우(禹: fl. 기원전 2070?)
탕(湯: fl. 기원전 1600?)
문왕(文王: 기원전 12~11세기?)
무왕(武王: 기원전 ?~기원전 1043?)
주공(周公: fl. 기원전 1046?)
공자(孔子: 기원전 551~479)
증자(曾子: 기원전 505~435) · 안자(顔子, 안회: 기원전 521?~491?)
자사(子思: 기원전 483?~402?)
맹자(孟子: 기원전 372?~289?)
주자(周子, 주돈이: 1017~1073)
장자(張子, 장재: 1020~1077) · 정자(程子: 정호(程顥: 1032~1085)와 정이(程頤: 1033~1107))
주자(朱子: 1130~1200)


주석


1.↑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세계사 > 인류 문화의 시작 >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제국 > 한제국의 성립과 발전 > 유교의

      성립,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2.↑ "名敎(명교)", 《네이버 한자사전》. 2011년 3월 15일에 확인.
3.↑ 가 나 세계사 > 인류 문화의 시작 > 도시국가와 춘추전국시대 > 전국시대의 제자백가 > 유가, 《글로벌 세계 대백과

      사전》
4.↑ 가 나 다 동양사상 > 동양의 사상 > 중국의 사상 > 제자백가의 사상 > 공문의 2유파,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5.↑ 세계사 > 인류 문화의 시작 > 도시국가와 춘추전국시대 > 전국시대의 제자백가 > 순자의 성악설,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6.↑ 가 나 동양사상 > 동양의 사상 > 중국의 사상 > 송·명의 사상 > 도학,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7.↑ 사마천의 《사기》에 따른 전통적인 견해




5-8 도가



산으로 은둔하는 도연명(陶淵明: 365~427): 송나라, 12세기 초

 

도가(道家) 또는 노장사상(老莊思想)은 중국사상(中國思想)의 여명기인 춘추전국시대 이래 유가(儒家)와 함께 중국

철학의 두 주류를 이루었던 학파이다.

 

도가는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의 하나로, 대표적인 사상가는 노자 · 장자이며, 전국시대 중기에 유가와 함께 유력

하였다.

 

도가는 참된 길, 즉 도(道)는 인위(人爲)를 초월한 곳에 있으며 그것은 직관에 의해 체득되는 것으로 사람은 그 참된

길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가르쳤다.

또 인위(人爲)를 배제하고 무위자연(無爲自然)이 될 것을 권했는데, 배제해야 할 인위(人爲) 중에서 주된 것은 유가의

도(道)인 인(仁)이나 예(禮)라고 말했다.

 

중국사상의 양대흐름인 유가와 도가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현실적이며 긍정적인 유가가 군주의 통치권을 합리화하여

역대 왕조의 통치이념으로써 사회의 기본사상으로 자리잡은 것에 비해, 도가사상은 현실부정적이고 도피적인 성향이

강해 하층민을 중심으로 뿌리를 내려 후에 도교로 발전하였고, 주로 민간신앙과 철학적 사고의 원천이 되었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유가가 지배자의 사상을 대변한다면 도가는 지배층에 대항하는 피지배자의 사상으로 대변되었다.

도가는 한나라(漢) 이후 구체적인 모습을 가진 철학 학파로서의 독립성은 잃어버렸지만, 그 사상은 후세 중국 불교에

수용되었고, 도교(道敎)의 교리의 형성을 도왔으며, 문예(文藝)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역사

 

배경 - 기원전 260년의 초(楚)도가사상(道家思想)은 노자(老子)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노자는 초(楚: 기원전 1030 이전~기원전 223)의 사람이라고

한다.

 

남방 초국의 문화는 북방의 문화와 처음부터 달랐다.

북방의 풍토에서 생긴 《시경(詩經)》과 초(楚)의 풍토에서 생겨난 《초사(楚辭)》를

비교하여 읽어보면 그 다름을 알 수 있다.

 

《초사(楚辭)》에 실린 시들 중 대표적인 작품인 굴원(屈原: 기원전 340~278)의 〈이소(離騷)〉를 읽으면 초조(焦燥)해

하고 있는 굴원에 대하여 굴원의 누이가 고독한 성실함을 지키지 말고 세속 사람들과 동화(同化)되는 것이 좋다고 타이른

말이 있다.

《초사》의 한 작품인 〈어부사(漁父辭)〉에서는 홀로 결백함을 지키려 고민하는 굴원(屈原)에게 어부는 세속의 진애

(塵埃)와 탁한 것을 사람들과 함께 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는 참으로 도가적이다.

 

《논어(論語)》에는 초(楚)의 광인(狂人)을 가장한 접여(接輿)라는 인물이, 정치의 이상에 불타서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공자에게 지금의 정세는 정치에 종사하는 것이 위험하니 그만두는 편이 좋다고 초(楚)나라 격조의 노래로 비판하는 말이

있다.

 

이와 같은 예로 볼 때 초(楚)의 지방에는 옛부터 도가적 사고방식과 연관된 인생관이 유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도가사상도 그러한 사회적, 지리적 배경에서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성립 - 《노자(老子)》에 실린 글은 때때로 압운(押韻)을 갖고 있다. 그것은 철학시로서 전해진 것이 어느 시기에 산문

으로 정리된 것같이 느낌을 주기도 한다. 《노자》의 사상을 노자 개인의 철학으로만 보기 어려운 점도 있다.

거기에는 많은 사람들의 철학이 압축 · 집약되어 있는 것 같다.

 

전설에 따르면 노자는 물소를 타고 주나라를 떠났다[1]

 

남방의 초(楚)에서 발생한 생활 철학과 그것을 전한 철학시(哲學詩)가 언젠가 《노자》에 나타나는 말과 표현으로 종합되어 응축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그 철학은 인생 경험을 많이 쌓아

올린 노옹(老翁: 늙은이)의 말이라 하여 추앙되다가 나중에 아예 노자(老子)라는 개인의 철학처럼 굳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도가에 대해서는 오늘날 아직도 알 수 없는 점이 여러 가지가 있다. 도가사상은 주로 은자의 철학인 것으로 설명되기 때문에 도가사상을 주장한 사람의 성격도 분명하지 않다. 현재 중국 학자들의 평가에 의하면 도가사상은 몰락한 귀족들 사이에서 생겼을 것이라고 한다. 도가의 철학에는 준열한 역사와 풍토 위에서 생활한 서민들의 지혜도 혼입되어 있지만, 몰락 귀족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노자와 장자의 철학을 사랑하여 뛰어난 시를 지은 도연명(陶淵明)도 몰락 귀족이었다.

 

발전 - 도가의 시조로 여겨지는 노자(老子)의 사고방식에는 유물적(唯物的)인 요소도 보였지만 장차 그 사상은 열자

(列子: 기원전 4세기)에서 장자(莊子: 기원전 369?~286)를 거치면서 매우 유심적(唯心的)인 철학으로 변모해 갔다.

그러나 그 사상 내용은 참으로 동양적이며 또한 전인류의 지혜로서도 손색없는 독특하고 훌륭한 철학이다.

 

영향

 

노자의 초상[2]

 

유가 - 도가사상(道家思想)은 유가사상(儒家思想)과 더불어 후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노자는 공자보다 선배로서 공자는 일찍이 노자에게 예를 배운 일이 있다고 알려

지고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일은 후대 유가의 사고방식에 매우 대립되는 것인데도,

《논어(論語)》나 《맹자(孟子)》 중에는 노자의 도가사상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말하는 바가 없다.

 

맹자(기원전 372?~289?) 시대에 유가사상에 대립한 것은 양주(楊朱: 기원전 4~3세기)의 도가사상과 묵가사상의 대표자인 묵자(墨翟: 기원전 470?~391?)의 겸애설

이었다.

오늘날 양주는 도가의 일파라고 생각되고 있지만, 《논어》에도 《맹자》에도

노자에 관한 사항은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당초 유가와 강하게 대립한 학파는 묵가였다.

그 때문에, 현대 중국의 철학자인 펑유란(馮友蘭: 1894~1990)은 노자는 공자보다 훨씬 뒤의 전국시대의 사람일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논어(論語)》 〈헌문편(憲問扁)〉에는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덕으로써 원한을 갚는 것은 어떠합니까"라고

물은 일이 기록되어 있다.

"원(怨)을 갚는 데 덕으로써 한다"는 것은 《노자(老子)》 〈63장〉에 보이는 말이다.

또 "무위(無爲)로써 다스린 분은 순(舜)이었다"라고 하는 사고방식은 《노자》의 "무위"를 생각게 한다.

또 《논어》 〈태백편(泰伯篇)〉의 증자(曾子)의 말에 "도를 지녀(有)도 없는 듯 덕이 실하여도 허(虛)한 것 같이"라는

말이 있다.

유무(有無) · 허실(虛實)은 이것 역시 《노자》에서 자주 보이는 대립 개념이다.

이렇게 보면 《논어》에 노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은 확실하지만 노자적인 사고법이 전연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문학 - 도가사상은 인간에게 분수를 지키고 무욕(無欲)하는 생활을 하라고 가르치고, 또 정치적 혼란에 직면해서는

은둔자로 생활하는 등 일견(一見) 소극적인 태도 속에서 적극적으로 저항할 것을 가르쳐 절대적인 가치를 생각하게

함으로써 현상세계의 어쩔 수 없는 모순이나 마음에 맺힌 것을 풀어버리는 지혜를 가르쳤다.

 

그리하여 이러한 도가사상은 후대에 있어서 문학자에게 많이 애호되었다. 예컨대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시(詩)에

보이듯이 훌륭한 인생의 지혜를 말하는 문학작품을 낳았다.

 

불교 - 무욕과 은둔의 지혜를 가르친 도가사상은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서 중국화되었을 때 불교철학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중국 불교의 선종(禪宗)과 도가의 사상과는 근저에 있어서 통하는 것이 있다.

 

도교 - 또 한편 도가의 철학에 불교의 형태를 받아들여서 민중종교로서의 도교가 성립하였다.

후세의 중국 민중사회에 도교가 준 영향은 크다.

예를 들어, 도가사상은 감필체(減筆體)라고 칭하는 공간의 가치를 귀하게 여긴 수묵화나 무도의 일종인 권법에도 영향을

주었고 지극히 중국적인 동시에 지극히 동양적인 유현(幽玄)한 특성을 낳는 근원이 되었다.

 

주석

1.↑ Renard, (2002), p.16
2.↑ Page 72 of Edward Theodore Chalmers Werner's 《Myths and Legends of China》 on Project Gutenberg





5-9 묵가


묵가(墨家)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의 한 학파로, 묵자(墨子: 기원전 470~391?)를 시조로 하며 전국시대

초기에 활약하였다.

 

묵가는 유가 · 도가와 동시대에 출현하여 발전되었고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 중 주요 네 철학 학파 중의 하나였다.

이 시기에 묵가는 유가의 주요 경쟁상대였다.

 

묵자는 겸애설(兼愛說)를 가르쳤다. 겸애는 사람들이 격의없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롭게 하는 것으로, 하늘의 뜻도

바로 겸애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묵자는 서로를 이롭게 한다("교리 · 交利")는 보편적 시각에서 강본(强本: 勤勉 · 근면)과 절용(節用: 儉約 · 검약) 등

을 주장했다.

기타 유명한 사상으로는 반귀족적 인재등용론인 상현(尙賢)과 비전론(非戰論)인 비공(非攻) 등의 사상이 있다.

또한, 묵자는 체험을 근본으로 하여 사물의 본질을 추론하는 논리적 사고를 중국에서 최초로 창시한 인물로 최근에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

 

현대에서, 묵가는 철학파로서는 사라졌지만 소수의 아시아 비밀 단체들은 스스로를 묵가 사상의 추종자로 생각한다.

 

개요

 

전국시대에 묵가(墨家)는 유가와 병립하는 유력한 학파였다.[1]

예를 들어, 맹자는 묵자(墨子)와 양주(楊朱: 도가 일파의 사상가[1])의 삿된 사상이 유행하고 있는 것에 대해 분격하였

으며, 한비자(韓非子)도 "세상의 현학은 유儒)와 묵(墨)이다"라고 하였다.

한나라 시대 초기에는 학자를 통칭하여 "유묵"이라 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후의 중국의 사상계에서는 유가사상만이 역대 왕조의 공인을 받아서 특별하게 번영하고 묵가사상은 이단사상이라 하여 배격되었다.

묵가사상과 그 원전(原典)인 《묵자(墨子)》에 대한 재평가가 청나라 왕조의 권위가 동요한 19세기 말에 시작된 것도

우연은 아니다.

 

묵자는 처음에 유가에 나아가 배웠다고 하지만 그의 사상은 거의 유가사상에 반대되고 있다.

묵자를 시조로 하는 묵가의 특징적인 주요 사상으로는 겸애설(兼愛說) · 상현론(尙賢論) · 절용론(節用論) · 비악론

(非樂論) · 절장론(節葬論) · 비명론(非命論) · 명귀론(明鬼論) · 상동론(尙同論) · 천지론(天志論) 등이 있다.

 

이러한 특징을 구비한 묵가사상은 개조(開祖)인 묵자가 이끄는 집단이 성벽의 수축이나 방어작전 등에 종사하는 공인

(工人)의 집단이었다는 것과 깊은 관계를 갖는다.

그것은 유가의 사상이 공자를 중심으로 제자들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학문을 토론했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 하는 것이었다.

묵가사상은 묵자의 사후 그 지위를 이은 지도자 밑에 결속한 집단의 내부로부터 서서히 정리되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묵가의 대표적 서적인 《묵자(墨子)》는 이러한 집단 활동의 결정체이다.

 

주요 사상

 

겸애설 - 유가가 부모형제들의 혈연관계를 윤리의 기본에 두는 데 반하여, 묵가는 그러한 차별에 관계하지 말고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겸애설(兼愛說)을 주장하였다. 묵자는 모든 이들이 하늘 앞에 동등하다고 믿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집합적인 사랑의 실현에 참여하여 하늘을 모방하여야 한다고 믿었다.

 

상현론 - 유가가 인재의 등용에 있어 덕의 유무를 기준으로 하여 군자와 소인의 차별을 엄격히 하는 데 반하여 묵가는

농민이건 상공업자건 구애할 것 없이 재능있는 자는 계속해서 등용하라는 상현론(尙賢論)을 주장하였다.

당시 사회의 실정에 비추어볼 때, 상현론은 반귀족적인 인재등용론이었다.

 

절용론·비악론·절장론 - 유가가 관혼상제나 일상의 의식을 중시하는 데 대하여 묵가는 군주의 긴요하지 않은 지출은

줄이라는 절용론(節用論), 궁중 음악 등은 그만두라는 비악론(非樂論), 그리고 장례의식 등은 간소하게 하라는 절장론

(節葬論)을 주장했다.

 

비명론·명귀론 - 유가가 인도(人道), 즉 인간의 도덕적 실천을 중히 여기면서도 또한 인력으로는 어떻게 하기 어려운

천도(天道)나 천명(天命)을 인정하는 데 반하여, 묵가는 일체 명(命)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비명론(非命論)을 주장

했다. 그리고 인간의 행위의 선악은 모두 귀신에게 감시받으며 귀신은 정확하게 그에 대응하여 상벌을 내린다는

명귀론(明鬼論)을 주장했다.

 

상동론·천지론 - 유가가 개개인의 도덕적 자각을 중요시하고 어느 군주를 섬기느냐 하는 판단의 자주성을 인정하는

데 반하여, 묵가는 하위자(下位者)는 상위자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상동론(尙同論)과 인간 중의 최상위인 천자

(天子)도 천(天: 하늘)에 복종해야 한다는 천지론(天志論)을 주장했다.

 

주석

1.↑ 가 나 동양사상 > 동양의 사상 > 중국의 사상 > 제자백가의 사상 > 도가의 사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5-10 법가


법가(法家)는 중국의 역사에서 춘추전국시대(770~221 BC)의 제자백가 가운데에서도 주요 유파 넷 가운데 하나이다.

나머지 셋은 공자의 유가, 노자의 도가 그리고 묵자의 묵가이다.

대표적인 법가 사상가는 상앙(商鞅) · 신불해(申不害) · 한비자(韓非子)이다.

 

천하를 다스리는 원리에 대해, 유가가 인 · 의 · 예와 같은 덕치주의가 근본이라고 주장하였음에 비해 법가는 보다 엄격한

법치주의가 근본이라고 주장하였다.

법가는 천하를 다스리는 원리는 법(法)과 술(術)이라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법(法)은 군주가 정하는 규범을 뜻하며 술(術)은 법을 행하는 수단을 뜻한다. 또한 법가는 술(術)의 핵심은

명(名: 군주의 명령)과 형(形: 신하가 이루어낸 실적)의 일치 · 불일치에 따른 시비의 판단이라고 보았다.

법가는 법(法:군주가 정하는 규범)의 엄중한 이행을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하고 전제적 군주 권력의 확립을 꾀하였다.

 

법가 사상은 춘추시대의 패도(覇道)에 부응해서 일어났는데, 전제 지배체제를 지향하는 군주에게 채용되어 진나라 ·

한나라의 중앙집권적 고대 제국의 형성에 대한 이론적 기초를 줌으로써 크게 중용되고 융성하였다.[1]

그러나 전한 무제 이후에는 유가(儒家)가 국가의 관학으로 정통시되면서부터는 유가가 중국 사상계의 주류가 되고

법가 사상은 독자적인 발전에 있어 방해를 받았다.[1]

 

한비자의 법가 사상

 

한비자의 법가 사상은 실용적인 정치 철학이다.

 

법(法): 군주가 인민을 통제하는데 사용하는 공개적이고 자세한 규칙
세(勢): 인민과 신하를 굴복시키는 힘
술(術): 법(法)을 행하는 수단, 즉, 신하들을 이끌어가는 방식

 

대표적 인물

 

춘추시대

관중(管仲)
자산(子產)

 

전국시대

신도(愼到)
한비자(韓非)
상앙(商鞅)
이사(李斯)
신불해(申不害)
오기(吳起)
이회(李悝)


주석

1.↑ 가 나 동양사상 > 동양의 사상 > 중국의 사상 > 제자백가의 사상 > 제자백가의 사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5-11 농가


농가(農家)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221)의 제자백가 가운데 하나이다.

 

사회사상가로서 저명하였던 대표적인 농가의 인물은 허행(許行)이다.

 

춘추전국시대에 있었던 농가 사상(農家思想)에는 기술과 사회사상에 관한 것 두 방면의 것이 있었다.

전자에 대해서는 농업 생산기술에 대하여 말한 기록이 《주례(周禮)》·《관자(管子)》·《여씨춘추(呂氏春秋)》 속의

몇몇 편에 있다. 아래의 내용은 후자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농가 사상

 

허행은 춘추시대(기원전 770~403)의 등(藤)에 살면서 수십인의 문인(門人)에게 농업생산에 의한 자급자족의 생활을

주장하였다. 허행이 있는 곳으로 곧 송(宋)에서 진상(陳相)을 무리의 우두머리로 하는 수십인이 달려 왔다.

 

허행의 무리들은 농업신(農業神)이기도 하고 상고(上古)의 전설적인 제왕이기도 한 신농(神農)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을 기치로 삼아, 왕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자신의 노동으로 자신의 생활을 유지할 것을 설파하였다.

그리하여 봉건지주의 착취나 상인(商人)의 농민에 대한 이윤추구를 배척하였고 그에 저항하였다.

 

허행의 무리는 농업 생산에 필요한 공구를 생산하는 수공업자 역시 노동에 종사하는 자라 하여 그 존재의 의의를 인정

하였다.

인간은 모두가 자신의 직접적인 노동에 의하여 자신의 생활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의 결과에 의한 잉여(剩餘)는 각자 노동자의 소유에 귀속시킨다. 이렇게 해야만 천하가 고루 공평하게 된다고 하였다.

 

허행의 농가 사상은 공상적(空想的)인 사회사상에 가까운 면이 있다. 그러나, 춘추시대 당시의 점차로 강고해져가고 있던

봉건지주들과 봉건 제후국들의 부국강병책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한 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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