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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역사

일본사 (4) - 19. 일본불교의 성립 ~ 몽골의 일본 침공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7.01.24|조회수101 목록 댓글 0

19. 일본불교의 성립, 신도의 신들과의 결합


나라 · 헤이안 시대(8세기, 9세기)


그때 세계는

919년 : 독일, 작센 왕조 성립

958년 : 고려, 과거제 실시



불교는 6세기 중엽 일본에 도입되어, 쇼토쿠 태자의 아스카 문화를 꽃피웠다.

애초에 불교는 대륙의 선진 문물을 운반하는 통로로서 지배 계급으로부터 크게 환영받았다.

당시 일본의 수준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던 대사원이 건축되고 탁월한 예술품이 만들어졌는데, 일본의 지배 계급은

이를 감탄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것들이 자신의 권위를 높여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불교 철학의 심오함은 거의 이해할 수 없었다.

아스카 시대 일본에서 단 한 사람, 쇼토쿠 태자만 불교 철학을 알았다고 하는 말은 그렇게 과장이 아닐 것이다.


불교가 들어오기 전, 모든 지역이 그러하듯이 일본에도 원시 신앙이 있었다.

일본은 바다, 큰 강, 바람, 천둥 등이나 지역의 토지신과 조상신(씨족의 수호신)을 가미(神)로서 숭배했다.

이처럼 자연 현상, 동식물, 조상신 등의 신령한 힘을 경배하며 의례를 통해 재앙을 물리치는 원시 신앙에 가까운 것이

신도이다.


불교는 이러한 신앙의 입장에서 이해되어 일본이 신앙하는 다양한 신 중의 하나, 마법적 힘을 지닌 신으로 해석되었다.

사원은 불교의 철학과는 무관하게 씨족의 조상신을 제사하기 위한 장소로서 천황과 귀족에게 받아들여졌다.


나라 시대에 이르러서는 쇼무 천황이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동대사의 대불을 만드는 등 불교가 최성기를 맞는다.

그렇다고 신도로부터 불교가 독립한 것은 아니었다.

불교가 신도의 체계 안에서 굳건히 자리를 차지했다는 편이 옳은 해석일 것이다.

이처럼 불교가 신도와 융합된 것을 '신불습합(神佛習合)'이라 한다.

신불습합은 일본의 불교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용어이다.


쇼무 천황은 동대사에 거대한 불상을 조영하여, 자신을 이 비로자나불의 노예라고 지칭하며 부처의 측량할 수 없는 공덕

으로 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또 동대사 대불 개안식에는 멀리 인도에서 승려를 초청할 정도로 대단한 불교적 행사를 열었다.

그런데 이러한 불교적 행위는 일본의 신들에게 도움을 청한 후 신탁에 의해 행해졌다.

애초 불상 건축 계획은 이세신궁에 모신 신도의 최고 신인 태양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에게 아뢰었다.

규슈 우사 지방의 신이자 군신(軍神)인 하치만(八幡) 신에게 도움을 구하여, 규슈의 사원 안에 하치만 신사를 건립하기

까지 했다.

 


하치만 신사. 

동대사 불상 건축을 순조롭게 이루기 위해 하치만 신에게 도움을 구하여 규슈의 절 안에 하치만 신사를 건립했다. 



동대사 대불 개안은 불교가 신도 속에서 융합하여 존재하는 '신불습합'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유명한 신사에서는 신궁사를 짓고, 사원에서는 토지의 수호신을 모시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신사와 사원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하나가 되었다.


신불습합은 더욱 진행되어 10세기, 헤이안 시대 중기에는 일본의 신과 불(佛, 부처)을 직접 관련짓는 본지수적설(本地

垂迹設)이 나오게 되었다.

부처는 근본 실체(本地, 본지)이며, 신도의 신들은 부처의 화신(垂迹, 수적)이라는 설이다.

즉 '인도의 부처와 보살이 일본에 흔적을 남겨서 대신 나타난 것이 일본의 신들'이라 하여, 신도의 체계 안으로 불교를

포섭했다.

이론적으로는 일본의 신들에게 모두 불교의 본지불이 있었다고 전제하지만, 구체적으로는 일본에 존재하는 수많은 신

가운데 유력한 신들, 즉 정치 권력자의 조상신이나 영험하다고 믿는 신에게 구체적으로 본지불이 정해졌다.

천황의 조상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는 최고 부처인 비로사나불이 본지불로 정해졌으며, 이세의 신은 노사나불을 본지

불로 삼았다.


본지수적설은 신도가 강한 일본의 풍토 속에서 불교가 생존할 수 있는 유력한 길이었다. 본

지수적설은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이후 신사에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신궁사, 별당사를 지어 본체인 부처를 모시게

되었다. 신사에 모셔지는 신으로 신불습합된 신이 속속 등장했고, 인도의 신이 일본의 신과 하나가 되어 모셔지기도 했다.


본지수적설은 신불습합과 더불어 일본 불교의 특색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단어이다.

본지수적설은 '진정한 깨달음, 해탈을 향해 나아간다'는 불교의 본질에서 한참 비켜나 있다.

일본에서는 불교를 신도처럼 주술적인 종교의 하나로 바라보면서, 불교를 새로운 신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오늘날에도 일본의 절에 가보면 사원 건축물은 불교 그대로이지만, 사원 경내에는 신도 계통의 일본 신, 불교 계통의

신이 사이좋게 진좌하고 있어 신불의 백화점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20. 주술화된 일본 고대 불교


천태종과 진언종(9세기)


그때 세계는

960년 : 송 건국(북송, ~1127년)

987년 : 중세 프랑스, 카페 왕조 성립


 

진언종의 본산, 동사(東寺)의 전경. 



천태종과 진언종은 새로운 국가 불교로 발전한 헤이안 시대의 대표적인 불교이다.

사이쵸(最澄, 767~822)가 당나라에 가서 천태교학을 배우고 다수의 경전을 가지고 일본에 귀국하여 히에이(比叡) 산

꼭대기에 연력사(延曆寺)를 세워 천태종을 창시했다.

사이쵸는 중국에서 최신의 불교 교학을 갖고 온 학승으로서 조정과 귀족의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히에이 산 연력사는 나쁜 귀신의 무리를 진압하는 수도 헤이안의 영적 수호자로서 국가로부터 특별히 중시되었다.


원래 천태종은 중국에서 법화경을 최고의 진리로 하여 정리된 이론 체계로 대단히 형이상학적이며 철저히 관념 중심의

철학이다.

중국에서의 천태종은 정신을 집중하여 실상을 직관하는 선의 수행을 가르쳤다.

그래서 어떤 구체적인 신을 숭배하여 질병 등의 재앙을 물리친다고 하는 신도적 세계와는 어울릴 수 없는 교리였다.


사이쵸는 형이상학적인 천태교학을 배운 일본 불교계의 큰 인물이었지만, 신도의 신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천태 불교의 신과 신도의 신을 과감하게 습합시켜 신도를 천태종 속으로 융합하였다.

히에이 산은 히에이 신(日吉神)이 사는 산이라 하여 옛부터 산악 신앙의 영산으로 일컬어진 산이었다.

사이쵸는 히에이 신이 살고 있는 영산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는 산속에 신사 히에이 대사(日吉大社)를 짓고

히에이 신을 모셨다.

이러한 신불습합으로 인해 히에이 산 연력사는 나쁜 귀신의 무리를 진압하는, 수도 헤이안의 영적 수호자로서 국가로

부터 특별히 중시되었던 것이다.


사이쵸 이후 일본의 천태종은 더욱 밀교적 의식이 강조되어 조정과 귀족을 위한 가지기도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동시에 융통성을 발휘하여 신도는 물론 모든 불교 종파를 통합하기도 하고, 천태종이 지닌 형이상학을 발전시켜 불교적

이론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리고 히에이 산의 천태종은 정치 · 경제적으로는 물론, 사무라이 시대에 이르러서는 군사적으로도 강대한 세력으로

남기도 했다.

 

 

종교의 영웅으로 전해지는 구카이 대사. 



헤이안 시대의 대표적 종파인 진언종도 교리는 약간 달라도 천태종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진언종은 당나라에서 밀교를 배우고 귀국한 구카이(空海, 773~835)가 세운 종파이다.

구카이는 사이쵸와 함께 견당사 배를 타고 당에 간 동시대 사람이다.

밀교는 대일불(大日佛)을 우주 근본 부처로 삼아, 모든 부처와 보살과 신은 대일불에서 나온 것으로 여긴다.


밀교에서는 주술적인 가지기도가 중요한 요소를 차지한다.

가지기도는 재앙을 물리치고 이익을 줄 수 있는 증익(增益), 적을 넘어뜨리는 조복(調伏) 등을 목적으로 행해진다.

구카이는 당나라 밀교의 대가 혜과(惠果, 746~805)의 후계자로 선정될 만큼 뛰어났으며, 2년 동안의 수련 끝에 다수의

경전과 밀교에 필요한 도상(圖像)과 법구를 가지고 귀국한다.

귀국 후, 고야(高野) 산에 밀교 도량을 여는데, 고야 산은 산악 수행의 영산으로 여겨지던 산이었다.


진언밀교는 우주 만물이 본질적으로 대일불과 다를 바 없는 존재라 여긴다.

즉 모든 인간은 손으로 합장을 하고 입으로 진언(眞言)을 외우며 마음으로 깊은 진리를 보면, 성불할 수 있다고 보는 것

이다.


이러한 철학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인간이 일정한 방법으로 자신을 초월적 존재로 움직인다면, 신과 영이 감응해서 인간

에게 응해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밀교에서는 신과 영과 감응하기 위한 수법, 의례가 발달한다.

가지기도는 이러한 밀교의 세계관에 따라 신과 영에 감응하여 재앙을 물리치고 이익을 불러오며 적을 넘어뜨리는 방법

이다. 구카이는 자주 가지기도를 수행하면서 비를 오게 하거나 반란을 안정시키는 등 효험을 나타내곤 했다.


당시 일본 사람들은 진언밀교의 철학적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신도적 환경에 익숙했기 때문에 진언밀교의 주술적

영험력이나 장엄한 의례 수법은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진언밀교에서는 신도적 의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눈부시게 독특한 법구나 장식이 사용되었다.

이런 장식을 이용하여 재앙과 질병을 물리치거나 적을 넘어뜨리는 영험력은 당시 조정과 귀족의 정신을 빼놓을 정도였다. 구카이에게는 수많은 신화와 전설이 전해지며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종교적인 영웅으로 남아 있다.


헤이안 시대는 진언종이 널리 퍼지고 천태종이 밀교화함에 따라 밀교의 신은 현세 이익을 주는 신으로 신봉되었으며,

불교는 현세적 원망에 치중하는 주술 조직처럼 되었다.

그러면서도 형이상학적 요소는 버려지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 대륙의 교학을 흉내 냈다.

불교 철학은 주술과 절대로 결합할 수 없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사이좋게 공존하며 연구되었다.

불교계는 국가로부터 막대한 토지를 부여받고, 이를 확대코자 노력하는 사업가이기도 했다.




21. 상황의 정치와 무사


원정의 시작(1086년)


그때 세계는

1066년 : 노르망디 공 윌리엄, 영국 정복

1067년 : 송, 왕안석 변법


 

헤이지(平治)의 난



후지와라 씨는 150년간 권세를 누렸지만, 자신의 딸을 후비로 만들어도 황태자가 태어나지 않는 일이 계속되었다.

그 때문에 1068년 후지와라 씨와 외척 관계가 전혀 없는 고산죠(後三條) 천황이 즉위하면서 후지와라 씨의 권세에 제동이

걸렸다. 천황은 섭관정치의 그늘에서 벗어나 천황가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정치 쇄신을 꾀했다.


고산죠 천황의 뒤를 이은 시라카와(白河) 천황도 부왕의 유지를 계승하여 친정을 실시해 천황권 강화에 노력했다.

그러나 차기 천황이 혹시라도 후지와라 씨와 관계를 맺게 되면 이러한 노력도 수포로 돌아갈 것이므로, 황위를 재빨리

아들에게 양위하고 자신은 상황(上皇)이 되었다.

상황의 궁전(院)에 원청을 설치하여 정치를 실시하니 이것을 원정(院政)이라 한다. 원정은 이후 100년간 계속되었다.


원정이 후지와라가의 독점을 누르고 천황가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했다고 하지만, 원정은 중앙집권적 왕권 국가로 돌아간

것이 아니었다.

천황가가 권력 전면에 나왔다는 외피만 갖고 있을 뿐, 실제 내용은 섭관가의 귀족 정치 시대와 다를 것이 없었다.

정부는 장원을 정리하여 국가의 영토를 확대하고자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상황이 앞장서서 장원 확보에 나섰으며 실제로 섭관가를 능가하는 장원을 소유했다.

후지와라 씨가 천황을 상징으로 삼아 섭정과 관백으로 실권을 휘두른 것처럼, 상황도 천황의 후견인으로서 그러한 지배

형태를 취했던 것이다.

심지어 상황이 여러 명일 때도 있었다.

자연히 상황과 천황 사이에 세력 확장을 위한 분쟁이 자주 일어났고 내란으로 발전하기까지 했다.


왕권강화의 기초는 엄격하고 안정적인 양위이다. 살아서 양위를 하는 전통이 고쳐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왕권 강화의 기초도 이룩하지 못했음을 나타낸다.


원정하에서 천황은 형식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았으나, 원의 권력은 천황의 아버지라는 점에 하나의 근거를 두고 있는 것

이므로 천황의 지위를 둘러싸고 원정의 전제적 주권자인 상황과 다른 상황 혹은 천황과의 대립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 얽히고 얽힌 싸움에서 상황과 천황이 사용한 무력이 무사단, 즉 다이라 씨(平氏, 헤이시)와 미나모토 씨(源氏, 겐지)의

무사단이었다. 좀 복잡해보여도 이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자.


시라카와(白河) 상황은 처음에 겐지(源氏)를 이용했지만, 후에는 이가(伊賀) · 이세(伊勢) 지방에 기반을 구축하고 있던

다이라 씨인 다이라노 마사모리(平正盛)를 등용하였다.

다이라 씨(平氏) 세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다이라노 기요모리(다이라노 마사모리의 아들) 때였다.

원정이 시작되면서 천황의 발언력은 약화되고 상황과 천황의 대립이 생겨나면서, 이러한 과정에서 황위를 둘러싸고 도바

(鳥羽) 법황 · 고시라카와(後白河) 천황과 스토쿠(崇德) 상황이 대립하였다.

1156년 도바 법황이 사망하자 천황 측에는 후지와라노 타다미치(藤原忠通)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 ·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 등이 가담하고, 상황 측에는 후지와라노 요리나가(藤原賴長)와 미나모토노 타메요시(源爲義) · 다이라노 타다마사(平忠正) 등이 가세하여 싸웠으나 천황 측의 승리로 끝났다.


황실, 섭관가, 무장 모두 부자 형제를 죽이는 권력투쟁에서 천황 측이 승리하였다는 사실은 천황이나 관백의 승리라기보

다도 무사계급의 황족 귀족계급에 대한 승리의 첫 단계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황

위를 둘러싼 싸움에서 승리한 고시라카와 천황은 상황이 되어 원정을 시작하고,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고시라카와 상황의

총신 후지와라노 미치노리와 결합하여 권력을 휘둘렀다.


이에 은상(恩嘗)에 불만을 품은 전공이 적었던 미나모토노 요시토모는 미치노리와 대립하고 있던 후지와라노 노부요리와

결합하여 기요모리와 미치노리를 타도하려 했다.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는 1159년(平治1년)에 군사를 일으켜 다이라노 기요모리와 가까운 후지와라노 미치노리(藤原通憲)를 살해했지만, 기요모리의 반격을 받아 살해당하였고 난은 평정되었다. 이를 헤이지(平治)의 난이라고 한다.

이 난에서 중앙귀족의 권력투쟁은 무사의 무력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음이 명백해졌다.

이 사건 이후 무가의 동량으로서의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의 지위와 권력은 급속히 증대하였다.


헤이안 시대 이후 중앙집권 체제가 붕괴되면서 중앙 정부는 지방과 농촌 지역에서 법과 질서를 유지할 능력을 상실해갔다. 자연히 지방의 유력자는 자신의 생명과 토지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장할 수밖에 없었다. 무사는 이렇게 발생한 것이다.

이들 무사는 점차 상호 연결되어 주종 관계를 맺으면서 무사단으로 성장해갔다.

이 무사단 가운데 간무 헤이시(桓武平氏)와 세이와 겐지(淸和源氏)가 우두머리, 즉 동량이 되었다.


이들은 섭관 정치 시기나 원정 시기에 유일한 군사 집단이었다.

섭관이나 상황, 천황은 장원은 소유했지만 자신들의 무력은 없었다. 내란이나 권력 투쟁이 일어나면, 이들 무사를 동원하여 해결했다.

처음에 무사들은 황실에 이용당하고 사랑받는 데에 만족했으나, 점차 실력에 걸맞은 지위를 노리게 되었다. 특

히 황위 계승을 둘러싼 권력 투쟁이 일어났을 때, 무사 계급의 힘에 의해 황위가 결정될 정도로 성장해갔다.

상황의 원정시대 무가의 동량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이러한 배경속에서 권력의 핵으로 등장한 것이다.


흔히 일본을 무사 사회였다고 말한다. 무사를 일컫는 사무라이는 우리에게 아주 낯설고 독특한 일본 문화를 대표한다.

그러나 실상 사무라이는 왕권 국가의 실패 결과 발생한 것이다.

 


원정시대의 미술. 토끼, 

개구리, 원숭이 등을 의인화해서 그린 조수인물희화.







22. 일본고대, 열도가 주는 자유로움



고대사(6세기 ~ 11세기)


그때 세계는

1077년 : 카노사의 굴욕

1087년 : 고려, 흥왕사에서 1차대장경(초조대장경) 완성


 

하다카 마츠리. 

일본 각지에는 훈도시만 걸친 벌거벗은 남자들이 벌이는 마츠리가 있다.

태어난 모습 그대로 청정한 상태에서 신과 만나려는 마음을 담는다.

 


지금까지 우리는 일본의 구석기 시대부터 헤이안 시대 원정에 이르기까지 원시와 고대라는 긴 여정을 거쳐 왔다.

일본은 아스카 시대, 다이카 개신을 거치면서 중국 문물을 받아들여 겉으로는 천황제 중앙집권 국가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결국 왕권 강화는 실패로 돌아갔다.

일본은 왕권 강화의 짧은 노력 끝에, 일본적인 환경에 맞지 않는 중앙집권을 내던져 버렸다.

헤이안 시대 이후 일본은 환경이 원하는 대로, 자기식대로 살아나가게 되었다.


이는 우리나라가 왕권 강화를 위해 기울였던 필사적인 노력과는 너무도 대비되는 현상이다.

중국 대륙이 발전시킨 선진 정치 체제, 중앙집권적 왕권 강화를 성공시키지 않고서는 우리나라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설사 어떠한 난관이 있더라도, 환경에 맞지 않는다고 대충 중단해도 되는 그러한 문제가 아니었다.

외침의 위험성이 없어 여유로운 섬나라 일본과는 극명한 차이를 이루는 부분이다.


높고 험한 산지로 각 지방이 분리되어 있어서 중앙집권을 하기에는 불리한 지리적 환경, 과거 제도도 채택되지 않을 만큼

강력한 귀족 세력의 존재, 배를 타고 들어오는 문명이 갖고 있는 한계성.

일본은 이러한 난관을 극복할 절박성이 없었다. 중앙집권 체제는 일본으로서는 적합하지 않았다.

왕권강화의 실패와 사무라이의 등장, 열도가 주는 비교적 여유로운 환경을 배경으로 동아시아와는 다른 특징을 지닌

나라가 되었다.


또 하나 주술적 군주로서 천황의 존속의 문제가 있었다.

역사의 초창기 정치 지도자는 주술적 의례를 잘 행하는 것이 가장 큰 임무였다.

4세기 일본에서 등장하는 야마토 정권의 대왕(후에 천황)은 신에게 제사를 집행하는 제사왕이었고, 주술적이었다.

중앙집권적 왕권 국가의 노력이 이루어질 때에도, 천황은 사제장적 성격이 그대로 계승되었다.

짧은 기간 동안 천황은 세속적 군주로서 권력을 행사했으나, 곧 중단되었다.

헤이안 시대 이후 천황은 줄곧 주술성이 강한 군주로 남았다.


헤이안 시대 천황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목욕재계를 한 다음 신배를 올리는 주술을 반드시 했다.

또 햇곡식을 수확하고 나서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에게 햇곡식으로 빚은 밥과 술을 바치고 국가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

하는 추수감사제를 거대하게 집전했다.

이러한 주술적 행사를 거행하는 신성군주이니만큼, 그 생활도 특이했다.

헤이안 시대에 천황의 생활을 《담해(譚海)》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천황은 재위 기간 동안 침이나 뜸 등을 뜰 수가 없다. 또 옥체에는 쇠붙이를 대서는 안 되기 때문에 머리나 손톱 발톱이

자라면 궁녀가 이로 잘라 끊어 드리게 되어있다. 먹는 것에도 정해진 것이 있어 그 외의 것은 바칠 수가 없다.

 

이 외에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로부터 받아 천황가 대대로 물려 내려온다는 3종의 신기가 있다.

그 보물은 옥, 검, 거울로서 천황가의 신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천황은 반드시 이 검과 함께 자야 했기 때문에 비(妃)와 동침할 때는 침전으로 불러들이든가, 혹은 몸소 다른 궁으로 갈

경우라면 낮의 정사가 보통이었다.

3종의 신기는 일종의 주술 도구로서, 이것을 잃어버리면 이미 천황은 천황일 수 없는 것이다.

이 3종의 신기는 현재에도 귀중하게 보관되고 있다.


이러한 천황은 마치 '전설의 고향'에 나올 법한 장면처럼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냥 그런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천황이 주술적 군주로 남은 데에는 일본이 왕권 강화에 실패한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왕권 강화가 성공하면 주술적 군주만으로는 광대한 영토를 감당할 수 없다.

통치자 역시 사제장적 성격을 순화 · 극복하여 이성화된 강력한 세속적 정치 권력자로 발전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과 중국이 왕권 강화 이후 왕이 강력한 정치 권력자로 성장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일본은 중앙집권 체제가 급속히 무너져 내리면서, 이러한 발전이 중단되었다.

천황은 후지와라와 같은 귀족에 의해 조종되어 이름뿐인 상징으로 존재했다.

원정 시대에 다시 천황가가 후지와라 씨로부터 권력을 되찾았다 해도, 이것은 왕권의 복구가 아니라 일종의 귀족으로

서의 천황이었다.


왕권 강화 실패의 결과, 천황은 세속적인 정치 권력자로 발전하지 못하고 수많은 일본의 신 가운데 최고의 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주술적 제사왕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 열도는 바다 한가운데 동떨어진 남태평양 섬들과 달리 적당한 거리에 자리 잡고 있어서 선진문화의 자극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바다라는 장벽으로 외부로부터의 위협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일본은 한국처럼 필사적으로 대륙 문물

수용에 나설 필요가 없었다.

자신의 환경에 따라 적합한 부분만 취사선택했다.

사상과 종교도 한국처럼 본질과 정수를 이해하지 않고 필요한 것만 선택했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왕권 강화도 이해해야 한다.

왕권 강화를 쉽게 포기한 것도 섬나라라는 일본의 지리적 위치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왕권 강화의 실패는 일본을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이탈하여 독특한 문화를 갖게 되는 기본적인 배경의 하나가

되었다.





23. 무사 헤이시 정권의 성립과 멸망


Ⅱ 중세 사무라이 사회 


중세의 시작(1156년 ~ 1185년)


그때 세계는

1096년 : 십자군 운동(~1270년)

1115년 : 여진, 금 건국(~1234년)

1135년 : 고려, 묘청의 난



바다위에 떠 있는 이쓰쿠시마 신사. 

이쓰쿠시마 신사는 총 21채의 건물이 있으며 각 건물들은 붉은 칠을 한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신사 건물 전체가

도리이와 마찬가지로 바닷물에 잠겨 있다.

물에 잠긴 신사에 붉은 해가 지는 모습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창조물이 조화를 이룬 최고의 장면이다.

 


헤이안 시대 이후 중앙집권 체제가 붕괴되면서 지방과 농촌 지역에서 법과 질서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지방의 유력자들은 자신의 생명과 토지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장할 수밖에 없었다.


사무라이는 이처럼 중앙집권의 와해, 즉 왕권 강화의 실패와 더불어 발생했다.

이들 사무라이는 점차 상호 연결되면서 무사단으로 성장해갔으며, 그 가운데 간무 헤이시(桓武平氏, 다이라 가문)와

세이와 겐지(淸和源氏, 미나모토 가문)는 몇 개의 무사단을 통솔하는 우두머리, 즉 동량(棟梁)이 되었다.

다이라 씨(平氏)와 미나모토 씨(源氏)는 중앙의 천황족에서 탈락하여 지방에 정착한 경우이다.

이들은 천황가의 후손이라는 고귀한 신분으로 인해 사무라이의 신망을 얻었고, 동량이 될 수 있었다.


사무라이는 섭관 시기나 원정 시기에 유일한 군사 집단이었다.

섭관이나 상황, 천황은 장원은 소유했지만 자신들의 무력은 없었다.

그래서 내란이나 권력 투쟁이 일어나면, 중앙 귀족은 이들 사무라이를 동원하여 해결했다.

처음에 사무라이는 큰 세력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차츰 중앙의 권력 투쟁이 사무라이의 무력에 의해서 좌우되었고, 급기야 12세기에는 사무라이의 힘에 의해

황위 계승이 결정될 정도로 성장했다.


즉 12세기 중엽, 교토에서 천황권 계승을 둘러싸고 상황과 천황이 대립하자, 귀족도 두 패로 갈라져 내란으로 발전했다.

천황 측에는 무사단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 등을 끌어들였다.

상황 측에는 귀족 후지와라노 요리나가(藤原賴長)가 가담하고, 무사단 미나모토노 다메요시(源爲義), 다이라노 다다마사

(平忠正) 등이 가세하였다. 이 싸움에서 고시라카와 천황 측이 승리하였다.


이 천황 측과 상황 측의 싸움을 호겐(保元)의 난이라 하며, 이 사건은 고대가 종식되고 중세가 시작된 시점이라 일반적

으로 말해진다.

중앙은 싸울 군사력을 갖고 있지 못했고, 중앙에서 상황과 천황 측은 무사단인 다이라 가문과 미나모토 가문에게 지원을

요청했던 것이다.

중앙의 상황, 천황, 귀족의 싸움이었지만, 무사의 무력에 의해서만 해결할 수 있음이 명백해졌다.

이제 천황귀족의 시대인 고대가 종식되고 새로운 세력 무사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천황 측의 승리로 끝나긴 했지만, 은상(恩賞)을 둘러싸고 겐지 무사단 수장(源氏, 미나모토노 요시토모)과 헤이시 무사단

수장(平氏,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은상에 불만을 품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는 1159년에 군사를 일으켰지만, 최후로 미나모토 가문을 제압하고

다이라 가문의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가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바로 반세기쯤 전까지도 귀족에게서 비천한 촌놈이라고 인간대우를 받지 못했던 무사의 수령이 조정을 탈취한 것 자체가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권력의 형태나 경제적 기반으로 보아도 섭관가나 원의 정권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었다.

동량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사무라이의 힘을 배경으로 권력을 장악했는데도, 후지와라 가문을 흉내 내면서 천황의 외조부가 되어 전제정치를 하는 등 귀족 파벌의 지도자처럼 행동했다.

다이라 가문은 '다이라 씨가 아닌 자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호언하면서, 사치와 나태에 빠졌다.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이미 부패하였던 낡은 조정의 기구를 장악한 후에 스스로도 부패해져 새로운 국가기구를 창조할 수

없었다.


다이라 정권은 무사들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고 귀족정권화되어 감에 따라서, 무사계급의 지지를 점차 잃어갔다.

게다가 권력을 빼앗긴 귀족과 상황, 사원 세력이 반발하게 되었다.

귀족들의 반감을 사는 가운데 1177년 법황의 근신들이 다이라 정권의 타도를 꾀했다가 실패한 사건이 일어나자, 다이라

정권은 고시라카와(後白河) 법황을 유폐시키고 무력에 의한 강압정치를 시작하였다.

이는 겐지(源氏)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1180년, 미나모토노 요리마사(源賴政)는 유폐된 법황의 황자 모치히토왕(以仁王)을 받들어 거병하였으나, 거병은 실패

하고 요리마사는 패사하였다.

그러나 모치히토왕이 내린 헤이시(平氏) 토벌의 지령은 각지에 있던 겐지(源氏)에게 전해졌다.

이즈(伊豆)에 유배되어 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와 시나노(信濃)의 기소(木曾)에 숨어 지내던 미나모토노

요시나카(源義仲) 등 각지의 겐지(源氏)가 연이어 거병하고 사원세력도 다이라 정권을 타도하는 데에 가담하였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그의 장인 호조 토키마사(北條時政)의 원조를 받아 거병하여 헤이시(平氏)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그 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가마쿠라에 머물면서 동국의 지반을 공고히 하였다.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는 재기를 위해 노력했으나 1181년에 병사하였다.


한편 미나모토노 요시나카(源義仲)는 1183년 호쿠리쿠(北陸) 지방으로부터 병력을 동원하여 헤이시(平氏) 일문을 교토

(京都)로부터 쫓아내었다.

그러나 요시나카는 고시라카와 법황과 대립했기 때문에 법황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에게 도카이(東海) · 도산

(東山) 지역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요시나카의 토벌을 명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동생인 노리요리(範賴) · 요시쓰네(義經)를 상경시켜 요시나카를 토벌시켰다.

나아가 이들은 헤이시(平氏) 일문을 공격해 멸망시켰다. 결국 5년 동안의 전쟁 끝에 미나모토 군이 다이라 군을 물리치고,

막판에 같은 일족인 요시나카를 제압하여 최후의 권력을 얻었다.






24. 최초의 무사정권, 가마쿠라 막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정이대장군이 되다(1192년)


그때 세계는

1167년 : 영국, 옥스퍼드 대학 세움

1147~1149년 : 프랑스 · 신성로마제국, 제2차 십자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미나모토는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사무라이 정부를 세웠다. 



다이라 군을 물리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는 섣불리 귀족 흉내를 내다가 사무라이의 지지를 상실한 다이라 가문의 전철을 밟지 않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독특한 사무라이 조직을 통해 전국을 다스릴 장치를 마련했는데, 이것이 가마쿠라 막부(鎌倉 幕府)이다.

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가마쿠라에 기반을 두고 있던 요리토모는 이곳에 막부를 세운 것이다.

가마쿠라는 지금의 도쿄와는 한 시간쯤 걸리는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요리토모는 거병 이후 자신의 휘하에 모인 사무라이와 주종 관계를 맺어 이들을 고케닌(御家人)으로 삼았다.

주종 관계란 우선 주군 입장에서 설명하면, 주군인 요리토모는 사무라이가 갖고 있던 영지의 소유를 승인한다.

그 대가로 종자인 사무라이는 평시에는 교토나 가마쿠라의 경비를 담당하고 전시에는 전투에 참여하는 관계를 말한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 종자가 전투에 참여했다면, 주군은 그 대가로 은상(恩賞)을 주어야 한다.

주종 관계는 700년간 사무라이 사회의 기초를 이루는 관계였다.

가마쿠라 막부는 쇼군과 고케닌이 토지를 매개로 하여 맺어진 주종관계를 근간으로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배관계의

구조를 봉건제도라고 한다.


부하인 고케닌의 통제를 위해 1180년에 사무라이도코로(侍所)를 설치하고 일반정무를 수행하기 위해 구몬조[公文所,

후에 政所(만도코로), 1184]와 고케닌의 소송을 처리하기 위한 기관으로서 몬츄죠(問注所)를 설치하였다.

또한 조정에 기소(議秦)를 두어 막부의 의향이 조정내부에 반영되도록 하였다.


성립초기의 막부는 고케닌을 통제하기 위한 요리토모의 사적 통치기관으로 그 지배의 범위는 고케닌의 소령(所領, 땅)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요리토모는 다이라 씨가 멸망한 1185년에 조정의 승인을 받아 국(國)마다 슈고(守護), 각국의 장원과 국아령(國衙領)에 지토(地頭)를 두었다.

슈고에는 관동 출신의 고케닌 중 유력자가 임명되었고, 세습되는 경우가 많았다.

슈고는 평소에는 관내의 고케닌을 지휘하여 치안유지와 경찰권을 행사하고 전시에는 고케닌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하였다. 지토(地頭)도 고케닌 가운데 임명하여 장원 · 국아령에 설치되었다.

지토는 연공을 징수해 장원영주에게 보내고, 토지를 관리하며, 치안유지에 임하였다.

지토는 일정의 토지를 하사받는 것 외에 관리하는 토지의 수확 일부를 병량미로서 취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그 때문에 장원영주인 귀족 · 사원 · 신사는 지토의 설치에 강하게 반발하여 처음에는 헤이시(平氏)로부터 몰수한 토지와

모반인의 토지에만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지방조직으로는 교토에 교토슈고(京都守護), 규슈(九州)에 친제이부교(鎭西奉行)를 두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는 1190년에 우근위대장(右近衛大將)에 임명되고, 1192년에는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

되어 명실공히 무가정권으로서의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되었다.

 

가마쿠라 막부는 무로마치 막부와 달리 서쪽의 교토에서 멀리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그만큼 가마쿠라 시대에는 교토의 천황과 귀족의 힘이 강했기 때문이다. 가마쿠라는 오늘날의 도쿄의 바로 옆에 있다.

 

막부의 사적 주종 관계가 국가의 공적 지배 조직으로 기능하고, 막부가 지방도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가마쿠라 막부가 국가 전체를 통치하는 기구로는 발전하지 못했다.

즉 경제적으로는 다이라 씨(平氏)로부터 몰수한 장원과 관동지방에 있는 막부직할지와 고케닌의 영지에 한정되었다.

교토에서는 변함없이 원정이 행해지고 있었고, 교토조정에서도 막부에 반대하는 세력이 강했다.

또 막부가 설치한 슈고, 지토에 대한 국사나 장원영주의 반발도 아직 뿌리 깊게 남아 있었다.

가마쿠라 막부는 전국을 조정과 막부가 이원적으로 지배하는 불완전한 권력이었다.

그렇지만 교토 조정에서 독립하여 사무라이의 독자적인 정권이 성립된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25. 호조 씨의 대두, 그리고 무사와 농민



처가로 옮아간 막부의 실권(1219년 ~ 1324년)


그때 세계는

1196년 : 고려, 최충헌, 이의민을 죽이고 최씨 정권 세움

1198년 : 고려, 노비 만적의 난



요리토모가 죽은 후, 막부의 내부에서는 주도권을 둘러싼 싸움으로 유력한 고케닌이 연이어 몰락하고 요리토모의 처가인

호조(北條) 씨가 실권을 장악하였다.

1199년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가 사망하자 장자인 미나모토노 요리이에(源賴家)가 장군의 지위를 계승하지만,

그는 고케닌들을 통솔할 만한 능력이 부족하였다.

요리이에는 장인인 히키 요시카즈(比企能員)와 측근자를 중용하고 요리토모 이래의 고케닌 세력을 억압하려고 했다.

이에 요리이에 장군의 어머니이기도 한 호조 마사코(北條政子)는 그의 부친인 호조 토키마사(北條時政)와 함께 장군

요리이에의 독재를 중지시키고 토키마사(時政)와 그의 아들 요시토키(義時)를 비롯한 유력 고케닌 13인의 합의제에 의해

정치를 행하도록 하였다.

호조 씨는 권력을 독점할 계획으로 1203년에 히키 요시카즈를 멸망시키고 요리이에를 이즈(伊頭)의 슈젠지(修禪寺)로

유폐시켰다. 그리고 장군의 동생인 미나모토노 사네토모(賴實朝)를 3대 장군으로 추대한 후 요리이에를 모살시켰다.


호조 요시토키(北條義時)는 그의 누이인 마사코와 협력하여 호조 씨의 권력 확립에 박차를 가하여 1213년에 사무라이

도코로(侍所)의 장관(別當)이었던 와다 요시모리(利田義盛)를 멸망시키고 그 직을 겸하였다.

또 1219년에는 요리이에의 아들 구교(公曉)를 부추겨서 장군 사네모토를 살해하였다.

여기에서 겐지(源氏)의 정통은 겨우 3대 27년으로 끝나고 막부의 실권은 호조 씨(北條氏)가 싯켄(執權)으로서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와 혈연관계가 있는 구조 요리쓰네(九條賴經)를 교토로부터 맞이하여

명목적인 장군으로 삼았다. 이후 장군의 존폐는 호조 씨의 의사에 따라 결정되었다.

 


가마쿠라 시대의 무사



가마쿠라 시대의 무사들은 평소 장원이나 국아령이 있는 농촌에 거주하면서 지토나 장관직을 맡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 집 주위에 호를 파거나 흙으로 벽을 쌓고, 문 위에는 초소를 설치하고 방패나 화살 등 무기를 준비하여

비상시에 대비했다.

무사 일족은 조상 대대로 전래되어 온 영지를 지키고, 종가의 적자를 총령으로 삼고 그의 통제를 받았다.

영지는 여자에게도 분할 · 상속되었으며 총령은 군사 지휘 · 제사 · 토지 등을 통괄해가면서 일족의 구성원과 막부를

연결했다.


무사의 영지 중에서 저택 주위에 있는 논과 밭은 예속농민들이 경작하도록 했고, 그 밖의 다른 경작지는 농민들에게

소작시켜 수확물을 거두어들이는 한편, 부역으로 여러 가지 노동을 시켰다.

당시 부역은 농민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농민은 끊임없이 새로운 토지의 개간과 농업기술의 개량을 통해 생산력을 향상시켰다.

우마(牛馬)를 경작에 이용하였고 초목으로 퇴비를 만들어 토질을 높혔다.

또 기나이(畿內) 주변과 서일본 각지에서는 보리의 이모작도 행해졌다.

 

농업생산력의 증대는 수공업과 상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수공업자는 처음에 장원 영주의 주문에 따라 주물, 도기 등의

생산에 종사했으나 농업생산의 향상에 의해 농민의 수요가 증대하여 철제농구와 솥, 냄비 등 생활용품도 생산하였다. 농

업 · 수공업의 발달에 따라서 상업도 활발해져 농산물과 수공업 제품의 교환을 위해 장원내 교통의 요지와 사원 · 신사의

문전에 시장이 열리고 점차 정기시의 형태로 발전해 갔다.





26. 막부의 전국통치와 천황



조큐의 난(1221년)


그때 세계는

1206년 : 몽골, 테무진, 나이만 부를 멸하고 '칭기즈 칸'이라 칭함

1215년 : 영국,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제정


 

고토바 상황. 

무사들을 이끌고 조큐의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 후 유배되었다. 



막부 내부의 항쟁이 계속되는 중에 교토(京都)의 조정에서는 권력을 회복하기 위해 막부타도를 계획하고 있었다.

고토바(後鳥羽) 상황은 막부타도의 중심에 있었다.

고토바 상황은 북면(北面)의 무사 외에 새로이 서면(西面)의 무사를 두는 등 무력을 증강하였다.

3대 장군인 미나모토노 사네모토(源實朝)가 살해되어 겐지(源氏)가 단절된 것을 호기로 삼아, 고토바 상황은 1221년 호조

요시토키(北條義時) 토벌을 제국의 무사들에게 명했다.

고토바 상황은 명령이 한 번 내려지면 제국의 무사는 급히 몰려올 것이고, 가마쿠라에서도 이에 호응할 유력자가 반드시

속출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상황의 명령에 무사들이 일사분란하게 복종한다는 생각은 과거 천황제 권위에 대한 환영에 불과했다.

그렇게 천황제의 권위가 무너져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무사들이 천황에 칼을 들이대는 것까지는 주저하였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상황의 명령은 가마쿠라 막부에 동요를 야기시켰다.

막부의 창시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부인이자 요시토키의 누나인 마사코는 무사들의 동요를 잠재우고 무사를 확실히

막부 측으로 돌려놓았다. 일본사에서 손꼽히는 여걸 마사코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연설을 했다.

 

"돌아가신 요리토모께서 조정의 적을 정벌하여 막부를 세운 후, 여러분들이 받은 은혜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 할

것입니다. ······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상황편에 가담한 간신과 무사를 쳐 죽여 3대의 쇼군이 다져온 막부를 지키

세요. 단 상황편에 서고 싶은 사람은 지금 즉시 가마쿠라를 떠나십시오."

 

마사코의 단호하면서도 깊은 신뢰에 호소한, 상황과 싸우면서도 천황을 적으로 돌리지 않고 요리토모가 천황의 적을

정벌했음을 상기시킨 말은 명연설이었다.

부하 무사 고케닌(御家人)의 결속은 견고하였고, 19만 대군을 형성하면서 1개월도 채 안 되는 기간에 상황(上皇)군을

격파하고 교토를 점령하였다. 이때가 1221년 조큐3년이었으므로, 조큐(承久)의 난이라고 한다.


이 난 이후에 고토바를 비롯한 세 상황이 유배되고 천황은 폐위되었다.

막부는 황위 계승에도 개입하는 한편, 새로이 로쿠하라탄다이(六波羅探題)를 두어 조정의 감시와 교토내외의 경비 등을

담당케 하고, 또 서국(西國)의 통괄을 맡겼다.

그리고 상황 편에 섰던 귀족이나 사무라이의 영지 3,000개소를 몰수하여 공을 세운 사무라이를 각지의 지토로 임명했다.

이상의 전후처리를 통해 기내(畿內), 서국(西國)의 장원(莊園), 공령(公領)에도 막부의 힘이 미치게 되고, 이제 조정과

막부라는 이원적 지배구조는 종말을 고하고 막부가 실질적인 일본 열도의 지배자가 되었다.

 

호조 씨 일족은 집권(集權) 자리를 세습하면서 가마쿠라 시대의 정권을 계속 장악했다.

호조 요시토키(北條泰時)는 일족의 유력자에게 집권을 보좌하는 렌쇼(連署)를 맡기고 정치의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중요 정무와 재판에 관여하는 합의기관으로서 호죠슈(評定衆)도 설치하여 정국을 합의제로 운영했다.

1232년 법전인 고세이바이시키모쿠(御成敗式,貞永式目) 51개조를 제정하였다.

이 법전은 무가 사회 최초의 법전으로, 고케닌끼리 혹은 고케닌과 장원 영주 사이의 분쟁을 공평히 재판하는 기준을

설정한 것이다. 고케닌에 의한 고케닌을 위한 정치가 안정되면서 막부의 지배력은 착실히 자리를 잡아갔다.


이 난에서 승리한 호조 가문의 권력은 교토 조정에 대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반란을 일으켰던 상황은 유배시키고 천황은 폐위시켰지만, 다른 천황이 대를 이었고 천황가는 계속

되었다.

호조 가문은 천황 정부에 대한 감시를 본격적으로 하여 황위 계승자 결정권을 장악했지만, 천황가 자체를 멸절시키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호조 가문은 상황을 죽여 천황가의 대를 끊어 버리지 않았을까?

그것은 호조 가문이, 전국의 토지와 인민을 직접 지배하는 왕이 아니라 주종 관계를 통해서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권력의 기반이 취약했으며, 황실 및 귀족과 대사원의 장원 지배를 단번에 뿌리 뽑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오랫동안 내려오는 천황가의 혈통을 끊는다는 것은 발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중요한 토벌이 있을 때마다 상황의 허락을 구했고, 슈고나 지토(地頭)의 설치도 조정의 허가를 받고 행할 정도로

천황의 권위를 빌어 자신의 권위를 얻고 행동을 정당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게다가 천황은 큰 권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일본국의 수호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후손이라는 혈통의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27. 전투자로서 사무라이의 세계



충성과 무용(12세기 ~ 15세기)


그때 세계는

1219년 : 고려, 거란 침입을 강동성에서 격퇴

1219~1224년 : 몽골, 칭기즈 칸의 서정(西征)


 

야부사메. 

말 타고 표적을 맞추는 무사들의 놀이이다. 



주종 관계는 700년간 사무라이 사회의 기초를 이루는 관계였으며, 귀족과 천황이 다스리던 고대에는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이다. 주종관계는 주군이 종자의 토지를 보호해주거나 나누어주며, 대신 종자는 주군에게 군사적 · 경제적 충성을 바치는 관계이다. 주종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영토나 경제력, 명예가 보존될 수 있었다. 주종 관계는 군사적 충성을 매개로 하며, 최종적으로 전투의 승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주종 관계는 막부의 쇼군과 다이묘, 다이묘와 가신들의 관계인 것이며, 하층 사무라이에서부터 쇼군에 이르기까지 사무라이 사회의 기본적인 인적 결합 관계였다.

따라서 사무라이 사회는 충성과 무용이 다른 모든 것보다 우위를 차지한다.


주군과 종자와의 관계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다. 종자 사무라이는 전장에서 용감하게 싸우고 반드시 그 대가를 요구했다. 어느 한쪽이 뭔가를 주거나 충성을 바쳤음에도 그 대가가 없을 때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전투에 싸운 보상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종자는 주인에게 항의하고 이반하는 경우도 많았다.

절박한 경우 주인을 배반하는 변절도 다반사였다.

몽골의 침입 때도 사무라이가 가마쿠라 막부를 위해서 싸웠지만 전쟁의 성격이 외침인 탓에 전리품 없어 보상을 받지 못하자 충성을 바치던 사무라이가 이반하여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에 이르게 했다.

조선 침략에 실패한 히데요시 정권도 역시 보상을 할 수 없게 되자, 용감히 싸웠던 사무라이가 등을 돌리게 되어 몰락했다. 특히 전국시대는 힘에 의해 정확히 주고받지 않을 경우, 주종 관계는 여지없이 깨졌다.


주종 관계는 정확한 계산에 따라 서로 주고받는 관계이므로 계산이 맞지 않으면 배반과 변절이 쉽게 일어났다.

실제로 사무라이 사회의 가치인 충성에는 계산에 의한 실리가 기본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용감함, 무용 역시 경제적 이득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무용의 공적에 따라 전리품이 배분되며, 무용이 큰 용사에게는 은상(恩賞)으로 막대한 소유 영지가 주어졌다.

사무라이 사회에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부와 명예의 영화를 누리는 길은 전투에서의 승리이기 때문에, 승리를 위한

무훈은 그만큼 중요했다.

임진왜란 때에 왜병이 처음에는 조선인의 목을 보내다가, 수가 많아지자 코를 베어 썩지 않도록 소금에 절여 보낸 것도

무훈을 증명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이처럼 충성과 무용이 대개 실리에 의해 계산된 것이었지만, 나름의 사무라이적인 도덕성이 동시에 있었다. 사

무라이는 훌륭한 말(馬), 찬란한 색채의 갑옷과 날카로운 검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도 있었다.

스파르타식의 엄격한 생활을 신조로 하고 있어서 질박함 · 검소함 · 엄격함을 존중했다.


한번 싸움터에 나가면 주인과 부하, 즉 같은 집단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겪으면서 생사 운명을 함께

하므로 주종 결합은 종종 이해관계를 초월한 엄숙한 경지에 이른다.

주군을 포함한 연대, 즉 집단에 대한 충성심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다.

14세기 군기문학 〈태평기〉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부모보다 더한 정분은 기가 맞는 형제애이다. 다년에 걸친 주종간의 연분은 자식에게도 뒤지지 않는 그리움이다.

금수라도 그런 마음은 모두 있다.

 

일본의 사무라이 사회는 '충성심'이라는 사회적인 결합과 유대가 가족적인 관계보다 우위를 차지한다.

많은 군기문학에서는 자식을 죽이면서까지 연대와 집단을 지킨 사람을, 가족의 정에 이끌려서 연대로부터 도망치려 했던

사람보다 훨씬 더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연대적 운명을 같이하는 것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주군과 집단에 대한 충성심은 사회를 유지하고 일족의 번영을 꾀하는 데에 필요하기 때문에 찬미되고 중시되고 교육

되었으며, 일본 사무라이 사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서 발전했다.

 


미야모토 무사시를 그린 그림. 

일본에는 천하무적이 되기 위해 전국을 방랑한 미야모토 무사시와 같은 사무라이의 이야기가 고전으로 전해진다. 






28. 죽음의 미학, 할복과 벚꽃


사무라이 사회(12세기 ~ 15세기)


그때 세계는

1231년 : 고려, 몽골의 제1차 침입

1241년 : 한자동맹 성립


 

단숨에 꽃잎이 지는 모습이 주군에게 미련없이 목숨을 바친다는 상징으로 여겨지는 벚꽃. 



죽음은 최고의 충성을 표현하는 용감함의 극치로 사무라이 사회에서 각광받았다.

원래 사무라이 사회의 많은 부분이 전쟁터였던 만큼 죽음은 아주 낯익은 세계였다.

전투가 시작되면 민가에 불을 지르고, 필요에 따라 집을 부수고 약탈하는 것이 전투의 상례였다.

전쟁터에는 온갖 죽음의 모습이 존재했다.

전투에서 앞장서 달려 나가 싸우다가 전사하는 모습, 이름도 없이 죽어가는 무명 병사의 흔한 죽음······. 만약 장수가 적군에게 잡히게 되거나 무명 병사처럼 싸움에서 밀려 죽음을 당하게 되면 최고의 불명예요, 수치가 되었다.

그래서 장수들은 불명예를 피해 자해를 했다.

적의 화살을 맞고 죽어가던 대장의 모습을 14세기 군기문학 〈태평기〉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화살에 맞아 이제는 더 못 견디겠다고 느꼈는지 칼을 왼손으로 옮겨 쥐고 스스로 목을 잘라, 자른 목을 깊은 구덩이 속에

감추고 그 위에 가로 누워 쓰러졌다.

 

대장이 큰 무훈을 세우지 못하고 적의 화살로 죽게 되자 시시하게 전사했다는 불명예를 막고자,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의

얼굴을 감추려는 집념을 나타낸 것이다.

적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어느 장수는 '붉은 물감을 부어놓은 듯 큰 눈을 번쩍 뜨고 무섭게 노려보면서' 목이 잘리고 죽어

갔음에도 그 부릅뜬 눈이 감기지 않았음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이외에도 수많은 죽음의 모습이 전쟁터에 있었고, 죽음은 사무라이에게 일상적인 삶이었다.


위험과 살육이 난무하는 곳이기에 사무라이 사회는 '죽음을 가벼이 여기고, 그 누구라도 전사해 이름을 후손에 남기기'를

미화하고 권장한다.

집단과 함께 죽는다는 의식도 발전한다.

패전이 명백해졌을 때, 패자인 사무라이가 손에 손을 잡고 바다에 들어가 몰사하는 장면은 군기문학 속에 자주 나온다.

더구나 패전에 임한 사무라이가 '칼을 빼어 갑옷 깃을 자르고, 칼 손잡이 부근까지 배에 찔러 세우고, 자신의 편이 죽은

그 자리에 간신히 오자마자 쓰러져 창자를 다 내놓고 죽었다'는 장면도 묘사된다.


할복은 죽음이 최고의 무용으로서 권장되고 죽음까지도 주군과 함께 한다는 충성이 강조되는 가운데 탄생했다.

배를 갈라서 자살하는 할복은 오랜 고통으로 죽음을 지연시키는 지극히 끔찍한 방법이다.

임금이 있는 곳을 향해 예를 갖춰 부복하고 사약을 받는 문치주의의 조선과는 대조되는 현상이다.

'할복으로 끔찍하게 죽어 원령이 되어서라도 적을 괴롭혀 이기겠다'는 것이다.

사무라이는 최후의 일념까지도 주군에게 바치겠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원한에 차서 죽으면 원령이 되어 이 세상에 불행을 가져올 수 있다는 원령 의식이 강했다.

할복은 원령으로나마 복수를 다짐하는 집념의 죽음이었다.

그리고 초인적인 용기와 기력이 필요한 죽음이었다.

따라서 할복은 최고의 찬사를 받게 되고, 가마쿠라 시대 이후 명예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주군에 대한 단심의 표현으로

관습화되었다.


벚꽃 또한 사무라이의 사랑을 받았다. 한 번의 바람결에도 단숨에 꽃잎이 지는 모습이 주군에게 미련 없이 목숨을

바친다는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무수히 많은 전쟁터의 죽음이 삶의 일부인 사회에서, 더구나 용맹스런 죽음이 경제적 실익을 가져오고 존경받게 되는

사무라이 사회에서, 죽음은 독특한 것이 된다.

사무라이에게 죽음은 예술의 대상이 되고 미학으로까지 발전했다. 많은 군기문학은 이를 다루고 있다.


이 죽음의 미학을 앗빠레(あつぱれ, 장렬하고 용감한 행동)의 처참미, 비장미라 한다. 이 처참미, 비장미가 도대체 어떤

것인지 〈헤이케 모노가타리〉의 주인공 다이라 기요모리(平淸盛)가 죽음을 앞두고 한 행동을 통해서 느껴보자.


다이라 기요모리는 사무라이 시대를 개관할 때, 사무라이의 힘을 바탕으로 권력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무라이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천황의 외척으로서 귀족 행세를 하는 등 실정을 하고 결국 가마쿠라를 세우는 미나모토 가문에게

패배했다.

그래서 다이라 가문은 죄가 많은 것으로 이 작품에서 그려지고 있다.

다이라 기요모리는 미나모토 가문에게 패배가 완연해지고 더군다나 고열로 상상할 수 없는 처참한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기백을 토하면서 미나모토의 목을 베라는 명령을 유언으로 남기고 죽어간다.

다이라 기요모리는 몰락이 분명한데도 그 몰락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자명한 몰락'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도, 그 운명과 어떻게든 싸워 이기려 한다.

그래서 운명을 이기려는 생명력이 너무도 왕성하여 그의 무모함이나 잘못을 압도해 버린다.

그 순간 처절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다이라의 투지에 찬 유언으로 인해, 다이라 가문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두 번씩

이나 버리고 미나모토에게 끝까지 대항하다가 일가 전체가 장렬한 최후를 마치게 된다.


이것이 일본 사무라이가 발견한 앗빠레의 처참미, 비장미인 것이다. 패배와 죽음 앞에 직면한 비참한 순간인데도, 주인

공에게 어떠한 도덕적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너무도 당당히 최후를 맞이한다.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은 사라지고 죽음 그 자체가 주는 비장하고 처참한 아름다움만 남게 되는 것이다.






29. 전환의 시대, 민중불교의 탄생



가마쿠라 시대의 신불교(12세기, 13세기)


그때 세계는

1265년 : 영국, 의회 시작

1270년 : 고려, 삼별초의 난


 

가마쿠라의 대불. 

불교가 민중에게 전파되면서 높이가 13m나 되는 거대한 불상이 만들어졌다. 



가마쿠라 시대를 전후한 시기는 사회의 주도권이 천황 · 귀족 계급에서 사무라이 계급으로 넘어가는 대전환기였다.

다행히 교토의 조정과 귀족은 생존하긴 했지만, 많은 권력을 사무라이 정권에 넘길 수밖에 없었다.

조정과 귀족은 사라져 가는 자신의 권력을 비탄에 젖어 바라보며, 불안 속에서 현실의 영화를 바람처럼 붙들고 있었다.

백성들도 참혹한 전란을 겪는 동안 익숙한 것들이 무너지면서,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정녕 불운한 시대를 맞이했다고 생각했다.

불법에서 말하는 '말법의 시기'라는 의식이 일본 사회 속에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바로 혼란과 혼돈, 불안과 좌절이 팽배한 전환의 시기에 새로운 불교적 복음이 탄생했다.

이들 새로운 불교를 '가마쿠라 신불교'라 한다.

신불교 가운데 가장 먼저 호넨(法然, 1133~1212)이 나왔다.

호넨은 기존의 천태종 연력사에서 수학했다.

당시 천태종에 속한 대부분의 중은 권력자를 위해 가지기도로 나날을 보냈고, 혼란을 틈타 승병으로 무장하여 세력

확장을 꾀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호넨은 오로지 진리를 추구하여 염불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전수염불(專修念佛) 신앙에 도달

했다. 호넨은 42세가 되던 1175년에 천태종과 절연하고 정토종을 창시했다.


호넨은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대로,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은 대로, 사무라이는 사무라이대로, 농민은 농민대로, 심지

어는 악인조차도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염불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설교했다.

지고한 마음으로 염불을 하는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필요 없다고 역설했다.

여기엔 장엄한 사원이나 의식, 수도장, 승직, 그리고 번잡하기만 한 교학 등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호넨의 쉬우면서도 분명한 가르침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호넨의 문하에는 황족, 공가 귀족뿐 아니라 사무라이, 그리고 유녀와 같은 최하층 사람까지 모든 계층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호넨의 가르침이 널리 수용되면서, '염불 이외에 어떠한 기존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그의 철저한 생각이

반발에 부딪혔다.

호넨의 철저한 가르침에 긴장하고 있던 기성 불교 측은 드디어 호넨을 거세게 비난하고 나섰다.

결국 권위의 훼손을 우려한 막부 권력까지 나서서 호넨에게 탄압을 가하게 되었다.

계속되는 탄압 속에서도 염불을 중단하지 않자, 호넨의 나이 75세에 제자 8명과 함께 유배되었다.

호넨은 유배되는 순간에도 "죽을죄라도 염불을 그칠 수는 없다"고 하면서 바닷가 마을의 유녀에게도 염불을 권했다고

한다. 호넨은 죽는 순간까지 염불 부흥에 앞장서다가 80세에 타계했다.

 

호넨에게서 보이는 정신의 불꽃은 그의 제자 신란(新鸞, 1173~1262)에게서 더욱 치열하게 타올랐다.

정토종은 신란을 통해서 한층 심화되었다.

일본 불교사에서 신란을 넘어서는 사람은 없다고까지 한다.

신란도 호넨과 마찬가지로 히에이 산 연력사(천태종)에 9세에 들어가 20년간 수학했다.

신란은 날로 퇴폐해져 가는 천태종에 실망하여 히에이 산을 떠나 호넨의 제자가 되었다.

신란은 스승 호넨에게 절대적 신뢰를 보내며 염불에 전념하지만, 전수염불 탄압으로 노스승을 잃고 승려 신분을 박탈

당한 채 유배되었다. 비록 신분은 빼앗겼으나, 4년의 힘든 유배 생활 동안에도 염불 신앙을 심화해 갔다.


이후 동국(東國)의 농촌에서 자신도 농민이 되어 일하며 가난한 농민들과 함께 20년을 보냈다.

신란은 농민과 함께 밑바닥 인생을 살면서 호넨의 가르침을 뛰어넘는 독자적인 가르침을 펼쳐 나갔다.


그는 동국에 사는 동안 빈궁한 백성이 아미타불의 구원을 간절히 원하면서도 무거운 연공에 쫓기어 잠잘 시간도 없이

일해야 하는 것을 목격했다.

백성은 수만 편에 달하는 염불을 외울 힘도 시간도 없는 것이다.

무지와 빈궁의 밑바닥에 묶여 있어 살기 위해서라면 수렵과 어업처럼 불교에서 말하는 살생도 할 수밖에 없었다.

신란은 이처럼 가난에 찌든 사람들, 살기 위해 살생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야말로 구원받아야 할 대상임을 확신

하게 되었다.


이런 각성은 스승 호넨의 사상으로는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스승의 사상은 모든 인간의 구원을 말하긴 했다. 그렇지만 수만 편의 염불을 외워야 한다고 한다.

신란은 장문의 염불을 외우라고 강조하는 스승 호넨의 사상은 완벽하지 못하다고 느꼈다.

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직접 살며, 인간의 죄성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구원은 절대적으로 부처의 힘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절대 타력'의 신앙에 도달했다.

그래서 염불의 횟수는 중요하지 않다.

아미타불의 염불을 단 한 번만이라도 진실하게 말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신란은 절대 타력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정토진종의 개조(開祖)가 되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기존의 사원 체제를 격렬히 비난했다.

아미타불 하나만의 신앙을 끝까지 밀고 나가, 다른 여러 신이나 영을 부정하고 염불 이외의 행위를 일체 인정하지 않았다. 아미타 신앙에 대단히 엄격하여, 자신의 교의에서 벗어나 밀교나 가지기도 같은 것과 결합하려던 아들과 부자의 연을

끊을 정도였다.


신란의 교의에 따르면 결혼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스스로 결혼도 하고 통상적인 세속 생활도 했다.

가난한 생활 가운데서도 58세의 만년에 책을 저술했다.

신란은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며 죄가 많은 인생이었음을 고백하였고, 90년의 생애를 마쳤다.


정토교의 호넨과 신란에 이어 13세기 중엽, 니치렌(日蓮, 1222~1282)이 나타난다.

니치렌은 법화경을 믿고 법화경의 제목을 외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설교하며 일련종(日蓮宗)을 열었다.

니치렌은 정치도 법화경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 하며, 법화경을 따르지 않는 막부 측을 격렬히 비난했다. 그로 인해 유배를 당하면서도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은 호국 불교적인 요소가 강하다.

특히 신도의 신들을 법화경의 본존으로 삼은 점은 내면의 철저함을 지향한 호넨과 신란에 비해 후퇴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배를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정치보다도 종교를 우위에 둔 것은 국가에 예속하여 봉사하던 이전의 불교

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밖에도 도겐(道元, 1200~1253)은 오로지 좌선을 통해서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선종을 설파하고 조동종(曹洞宗)의

개조가 되었다. 도겐은 막부와 같은 세속의 권위를 일체 부정하고, 절에 틀어박혀 깊이 사색하면서 제자를 양성했다.




30. 몽골의 일본 침공



일본을 구해낸 가미카제(1268년 ~ 1281년)


그때 세계는

1285년 : 고려, 일연, 《삼국유사》 지음

1299년 : 오스만 제국 성립

1299년 : 마르코 폴로, 《동방경문록》 지음


 

몽골의 일본 침공을 그린 그림. 

일본은 역사상 두 번의 외침을 겪었는데, 몽골의 침입과 미국의 점령이었다. 



열도인 일본은 역사상 두 번의 외침을 겪었는데, 바로 몽골의 침입과 1945년 미국의 점령이다.


13세기 초 몽골 고원의 유목민족인 칭기즈 칸이 출현하여 몽골과 그 주변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고 서아시아 · 남러시아를

원정하는 등 급속히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나아가 그 후계자들은 금(金)을 멸망시키고 송을 남방으로 압박하며 아시아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유럽에까지 원정하여

세계사상 유례없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칭기즈 칸의 손자 쿠빌라이는 중국을 지배하기 위해 수도를 대도(大都, 북경)로 옮기고 1271년에 국호를 원(元)으로 칭

하면서 아시아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원은 일본을 정복하려는 의도로 1268년부터 고려를 통해 3차례에 걸쳐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다.

이에 싯켄이었던 호조 토키무네(北條時宗)는 사신을 추방하고 1271년에는 몽골의 침공에 대비하여 국내의 고케닌(御家人, 막부와 주종관계를 맺은 무사)들에게 북규슈의 하카타만(博多灣)을 중심으로 한 해안방위를 명하였다.

당시 일본은 조큐(承久)의 난 이후 50년이 지나 많은 고케닌들은 전쟁의 경험을 갖지 않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쿠빌라이는 고려를 일본 침공의 전진 기지로 삼아 1274년, 고려군 5,600명을 포함한 3만여의 병력과 900여 척의 병선으로

쓰시마 · 이키(壹岐)를 침공하고 북규슈 하카타만(博多灣)에 상륙하였다.

일본 측은 이를 맞아 싸웠지만 이들의 집단전법과 화약을 사용한 새로운 병기 때문에 고전했다.

한때 다자이후(大宰府)의 미즈키(水城) 일대까지 후퇴했다.

그런데 날이 밝은 이튿날 하카타만에 정박해 있던 원군의 병선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밤사이에 몰아친 폭풍우 때문에 많은 병선이 바다에 침몰하고 원정군은 고려로 퇴각하였던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신의 가호에 의한 기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일본 측에서는 다시 원군의 재침에 대비해서 규슈의 고케닌들으로 하여금 하카타만 연안에 해안선을 따라 석축의 방벽을

쌓았고 수군도 보강했다. 그리고 교대로 규슈 북부의 요지를 경비하도록 하는 이국경고번역(異國警固番役)을 정비하고,

막부의 고케닌이 아닌 자들도 동원하여 북규슈의 요지와 나가토(長門) 연안을 방비시켰다.


드디어 1279년에 남송을 멸망시킨 원은 일본원정을 계획하여 1281년 고려의 동로군 4만 명, 중국 본토의 강남군 10만 명

총 14만의 대병력을 4,400여 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북규슈에 2차 침공을 단행하였다.

일본군은 석벽에 의지하며 약 2개월에 걸쳐 공방전을 계속했는데, 원군이 본토상륙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대폭풍을

만나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 퇴각하고 말았다.


막부는 거듭된 몽골의 침입을 때마침 불어온 대형 태풍 덕분에 막아낼 수 있었다.

일본을 구해낸 이 태풍을 '가미카제(神風)'라 불렀으며, 이후 일본은 신의 보호를 받는 신국(神國)이라는 불패 신앙이

탄생하였다.

20세기 세계대전에서 육탄으로 승리하려 했던 가미카제 특공대라는 이름은 바로 몽골의 침입을 물리치게 했던 가미

카제에서 유래한다. 몽골군을 물리치긴 했지만, 사무라이는 막대한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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