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편 신라사의 특징과 현재적 의미
제1장 신라사의 시기 구분과 흐름
제2장 신라사의 특징
제3장 신라사의 현재적 의미
제1장 신라사의 시기 구분과 흐름
1. 시기 구분과 그 의미
2. 국가의 형성과 전개
3. 삼국 통합 성공과 평가
4. 융성과 쇠망
1. 시기 구분과 그 의미
시대구분
역사 연구자들의 머릿속에는 떠나지 않고 언제나 맴도는 큰 화두話頭가 하나 있다.
장구한 인간 삶의 총체를 의미하는 역사를 어떻게 하면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해 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다.
무수한 연구자들이 그를 겨냥하여 오래도록 열심히 추구해 온 결과 가장 기초적이며 기본적이라 할 만한 틀이 하나
마련되었다.
흔히 시대구분時代區分이라고 일컬어지는 용어가 그것이다.
이처럼 지금까지 역사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창안한 것 가운데 아직은 더 나은 방법은 없다고 단언해도
좋을 정도로 시대구분은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활용되어 왔다.
역사 연구의 최종 도달점이라고도 운위될 정도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자신의 역사를 몇 단계로 구분지으려는 시도는 동양에서건 서양에서건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중국에서도 일찍이 흘러간 과거를 세 시기로 나누어서 이해해 보려고 하였다.
이른바 요순堯舜시대, 혹은 상고上古시대라 불리는 용어는 그런 데서 나온 표현이다.
그와 같은 인식의 틀은 자신들이 살고 있던 때를 항상 말세末世, 말법末法으로 인식하고서 저 먼 과거를 이상향理想鄕
으로 설정함으로써 다가올 미래사회를 그렇게 만들어 내려는 꿈과 희망에서 비롯한 몸부림이었다.
서양에서도 르네상스시대에 이르러서 본받아야 할 이상세계로서 그리스, 로마시대를 고전고대古典古代라고 불러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였다.
당대와 고전고대 사이에 끼여 있는 바로 직전의 시대를 중세中世라 명명하고 암흑기라 간주함으로써 극복해야 할 대상
으로 삼았던 것이다.
인간의 역사를 그처럼 몇 개의 단계로 구분하려 한 것은 결국 체계적으로 이해해 보려는 노력의 소산이었다.
그 밑바탕에는 당면 현실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앞날에 대한 바람직한 전망을 제시함으로써 마침내 그를 일구어 내겠
다는 목표가 깔려있음은 물론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대구분이란 곧 현실에서 비추어 본 과거에 대한 이해이기도 하며, 동시에 미래를 제대로 이루어 나가
려는 작업이라고 규정할 수 있겠다.
이처럼 인간의 역사를 몇 단계로 끊어 볼 수 있는 유력한 근거는 시간에 내재된 속성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설정된 시간이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동일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역사에서 다루는 시간은 질량質量이 늘 한결 같은 무게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주요한 특징이 있다.
시간이 갖는 무게는 시대마다 으레 다르게 느껴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과거 수천 수백년 전의 시간이란 인간이 그 흐름을 거의 감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느리게 지나갔다.
그것과 피부로 확연히 느낄 정도로 급변하는 오늘날의 시간을 대비하면 비록 양적으로는 동일하더라도 질적으로는 결코
서로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의 질량 변화나 그에 따른 결과가 뚜렷하게 감지되는 시점을 기준으로 해서 전후로 나눔으로써 전체 역사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데서 나온 발상이 곧 시대구분 논의라 하겠다.
인간의 역사를 구분하는 유력한 방법으로서는 일찍이 고대, 중세, 근대(현재)로 나누는 삼분법三分法이 나와서 널리
통용되어 왔다.
이후 그를 둘러싸고서 논란이 전개되면서 마침내 4분법, 5분법까지 제시되기에 이르렀다.
그들 가운데 특정 사회나, 국가 혹은 민족 수준의 범위를 훨씬 뛰어넘어 인류 전체의 역사를 하나의 단위로 삼아 시대를
구분해 보려는 시도까지 나왔다.
한국사 분야에서도 흐름을 체계화하려는 목적을 띤 다양한 시대구분 노력이 있었다.
그 가운데 오래도록 왕조王朝국가의 흥망성쇠를 기준으로 삼은 시대구분이 편의적으로 널리 활용되어 왔음은 다 아는
바와 같다.
왕조의 교체 속에는 상당한 변화도 담겨 있으므로 당연히 시대를 구분하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는 있다.
다만, 외형적으로 드러난 왕조 교체만을 따질 경우 그 밑바탕에 흐르는 본질적 변화를 제대로 추출해내지 못하므로
흔히 한국사의 체계적 이해에는 일정한 한계가 뒤따른다고 여겨지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사를 시대구분을 하는 데서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인가?
시대구분을 위한 기준으로서 오직 하나의 길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모름지기 같은 역사적 사건 사실이라도 어떤 시각에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매우 다르게 비쳐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대구분을 시도하는 데 적용할 수 있는 기준은매우 다양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크게는 자유나 평등의 확대와 축소, 혹은 작게는 정치나 경제제도, 사회관계나 신분제, 생산수단 등도 당연히
대상이 된다.
때로는 역사를 움직여온 주체가 누구였으며, 그들이 어떻게 바뀌어 갔는가도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겠다.
어느 특정한 사항만 유일무이한 절대적 기준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여러 가능한 기준 가운데 어느 쪽이 실제 모습을 가장 적절하고 적확하게 설명해낼 수 있느냐가 선택의 관건이 될 터이다.
가장 유력한 최종적 기준은 줄기찬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신라 천년사의 시기 구분
흔히 신라를 천년의 왕조라고 말한다. 기록 그대로를 받아들인다면 신라가 거의 천년 가까운 기간 동안 존속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므로 편의상 그렇게 불러도 무방하겠다.
다만, 신라 멸망의 시점이 935년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건국은 남아 전하는 기록의 성격으로 말미암아 그 시점을
뚜렷하게 특정하기가 힘든 대상이다.
거기에는 신화적, 설화적 내용까지도 뒤섞인 채 복잡하게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라사의 출발이 신화나 설화의 형식으로 정리되었다고 해서 신라의 뿌리가 반드시 그 뒤의 어느 시점부터
내려진 것이라 단정하기는 어렵다.
신라의 모태는 경주분지에 기반을 둔 사로국斯盧國이란 초기국가였거니와 그 이름으로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시점은
분명하게 잘라 말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까지 알려진 고고자료를 근거로 판단하면 오히려 기록상으로 등장하는 서기전 57년보다 한층 더 거슬러 올라
가리라 추정함이 일반적이다.
원래 기원이란 대상의 성격에 따라 무한정 소급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므로 그 뚜렷한 시점을 추출해내기란 무척 힘들다.
그러므로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가에 따라 신라의 존속 기간도 다소 신축적으로 조정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명확한 근거가 따로 마련되지 않는 이상 편의적으로 신라를 천년왕조라 일러도 큰 잘못은 아니라 하겠다.
신라가 천년에 이르는 긴 기간에 걸쳐 존속하는 동안 아무런 곡절을 겪지 않고 강물처럼 유유히 흘러간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정치 사회적 변동과 굴절을 거치면서 발전·변모해간 것이었다. 그처럼 격동의 과정을 겪었다면 전후 시기의
질적 변화도 당연히 뒤따랐으리라 추정된다.
따라서 전체 천년을 무조건 하나로 묶어서 같은 수준으로 접근해서는 곤란한 일이겠다. 그렇게 해서는 자체 내부의 질적
변모를 제대로 드러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특별히 변동을 중시하는 역사 연구의 본령을 크게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천년에 달하는 신라의 역사도 몇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당위성이제기된다.
앞서 언급한 시대구분과는 다르게 하나의 왕조를 대상으로 그 내부적 흐름을 몇 개의 작은 시기로 쪼개어 이해한다는
측면에서 아래에서는 편의상 그 하위 개념으로서 시기 구분이란 이름을 붙여 사용하기로 하겠다.
신라 당대인도 스스로 자신의 역사를 몇 단계로 나누어 보려고 노력하였다.
이는 어떻든 신라사의 전개 과정에서 쉽게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히 극심한 변화를 겪었음을 방증해 주는 사실
이기도 하다.
그런 실상을 뚜렷이 보여 주는 것으로서 『삼국사기』에서 확인되는 삼대법三代法이나 『삼국유사』에서 기준으로 삼은
삼고법三古法이라는 시기 구분법의 존재를 들 수 있다.
삼대법은 신라의 건국 시조로 등장하는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이 즉위한 서기전 57년부터 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
말년인 654년까지를 상대上代, 29대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이 즉위한 654년부터 36대 혜공왕惠恭王이 사망한 780년까지를 중대中代, 선덕왕宣德王이 즉위한 780년부터 신라가 멸망한 935년까지를 하대下代로 크게 3시기로 구분하는 방법이다.
이는 대체로 신라의 왕통 계보가 혈연상의 직계로 이어지지 않고 어떻든 중간에 바뀌었다는 사실을 명분으로 삼은 것이다. 물론 그 밑바탕에 정치사회적 변동도 수반되었음을 함께 고려한 구분이겠다.
삼고법은 삼대법과 마찬가지로 신라 전체의 역사를 3시기로 구분하면서도 각각의 시점始點과 종점終點에 대해서는 약간씩 차이를 보인다.
혁거세로부터 22대 지증왕智證王이 사망한 514년까지를 상고上古, 23대 법흥왕法興王이 즉위한 514년부터 진덕여왕이
사망한 654년까지를 중고中古, 무열왕이 즉위한 654년부터 신라 왕조가 막을 내리는 935년까지를 하고下古로 설정하여 3분하였다.
삼고법은 대체로 불교의 공인 및 그것에서 비롯한 불교식 왕명의 사용 등을 기준으로 삼아 전후 시기를 나눈 것으로 이해
되고 있다.
이처럼 삼대법과 삼고법 각각에는 그럴 만한 나름의 명분과 기준이 있을 것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양자를 합쳐서 이해하면 특정한 시점이 중복되는 사실이 확인되므로 잠시 이를 주의깊게 살필 필요가 있다.
두 개의 시기 구분이 교차하는 지점은 진덕여왕이 사망하고 무열왕이 즉위하는 654년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해는 신라사를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는 주요한 분수령이 된다고 하겠다.
그를 기준으로 삼을 때 신라 56왕 전체는 전후로 각기28왕씩 나뉜다.
이는 매우 이상스럽게 여겨지는 대목이다.
과거 일제 시기 이후 일본인 연구자들은 그 속에 어떤 작위적 요소가 깃들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 점을 주요 근거로 삼아 신라인들이 자신들의 건국 기년을 올리기 위해 초기 왕들을 조작하여 의도적
으로 늘린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말하자면 이 시기의 왕명王名이나 왕계王系는 모두 의도적으로 조작한 결과라고 주장하면서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초기 기사에 내재한 역사성까지 완전히 부정하려고 하였다.
초기기록의 내용이 문제점을 적지 않게 안고 있음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신라의 초기 왕계나 왕명 전부까지 조작되었다고 판단할 별다른 결정적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일본인 연구자들은 신라 왕조의 출발 시점을 아예 늦추어보려는 선입견을 갖고 출발하였기 때문에 그런 결론을 스스럼
없이 이끌어 내었던 것이다.
신라 천년의 역사가 654년을 기준점으로 28왕씩 크게 전후 두 시기로 나뉘는 것은 단순히 우연의 소치라고 진단함이
올바른 접근 자세일 듯 싶다.
여하튼 진덕여왕과 무열왕대를 가르는 654년이 신라사의 전개 과정에서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 하나의 계선界線임은
명백한 사실이다.
진평왕眞平王이 자신의 딸 선덕善德을 여성임에도 왕위에 즉위시키려는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성골남진聖骨男盡’이란
주장이었다.
이 무렵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성골 출신의 남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뜻이다.
성골의 구체적 의미나 성격이 여하한지는 일단 젖혀 두더라도 그 자체는 왕위를 자연스럽게 승계할 수 있는 자격을
뜻함은 분명하다.
그런데 성골 남성이 없었다는 사실은 왕통상에서 커다란 변동의 조짐을 암시하여 준다.
선덕여왕의 뒤를 이어 다시 진덕여왕이 즉위하게 되는 것도 사정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덕여왕을 끝으로 이제 성골 신분 자체가 완전히 소멸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는 뒤이은 무열왕의 즉위 자체가 왕통의 계보상으로 일대 변동을 동반하였음을 여실히 보여 주는 사실이다.
이처럼 신라사는 일단 왕통 계보를 기준으로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가 있다.
그러나 단순히 거기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 무렵을 전후하여 정치 사회적으로 상당한 변화가
수반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불교로부터 유학으로 지배이데올로기가 바뀐 점도 두 시기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설정되었을 수가 있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을 끝으로 불교식 왕명시기는 끝나고 뒤이어 새로운 왕명의 시기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진덕여왕을 이어 즉위한 무열왕이 중국식의 왕명과 시호諡號 및 묘호廟號를 사용한 데서 드러나듯이 그 직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면모를 보인다.
이처럼 태종 무열왕의 즉위 자체에는 새로운 정치 지향이나 제도 및 운영 방식 등 여러 가지 부면에서 큰 변화가 함축
되어 있으므로 신라 전체의 역사를 양분하는 하나의 계선으로 설정함은 일견 온당한 접근으로 보인다.
특히 무열왕과 문무왕이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마침내 성공을 거둔 통합전쟁은 그를 가름하는 결정적 근거가 될 수 있다.
신라가 삼국통합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냄으로써 사실상 새로운 왕조국가로 전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654년은 이른바 통일신라의 출발점으로 설정될 수가 있다는 측면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상징적 비중은 대단히 크다고
평가된다.
그런 뜻에서도 삼대법과 삼고법이 만나는 654년을 기준으로 신라사를 양분하는 것은 정당한 이해이다.
이처럼 신라 천년의 역사 전반은 내용상으로 볼 때 삼국통일을 기준으로 크게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눔은 매우 자연스럽다.
그래서 양자를 뚜렷하게 구별하려는 의도에서 신라와 통일신라로 다르게 부르거니와 때로는 고古신라와 통일신라,
또는 신라와 대大신라라고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여 대비시키기도 한다.
그 용어의 타당성여부는 일단 젖혀두더라도 통일전쟁이 가져다 준 결과와 영향을 염두에 둔다면 대단히 적절한 이해로
여겨진다.
통일기는 한국사 전체의 흐름으로 볼 때도 커다란 전환기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사실 삼국통일 전후를 기준으로 신라 역사를 크게 두 시기로 구분하려는 의식은 당대 신라인들 뿐만 아니라 이후 고려
및 조선시대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다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 중국 명청明淸의 교체 이후 만주 지역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면서 오래도록 도외시
되어온 발해와 신라를 아울러서 남북국南北國, 혹은 남북조南北朝시대라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후 근자에 이르기까지 그를 적극 받아들여 논의를 전개하면서 통일신라란 용어 사용을 꺼리는 입장도 나왔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통일기를 기점으로 신라사가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는 사실 자체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통일신라의 존속 기간을 따진다면 그리 긴 편에 속하지는 않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삼대법에 따라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신라가 전반적으로 극성기에 도달하여 지배체제가 상대적으로 매우 안정되었던 중대와 지배체제가 대체로 이완되었다
고 하든지 약화 현상이 뚜렷해진다고 할 하대이다.
한편 삼고법에 따르면 통일 이전도 상고와 중고로 나뉜다. 그렇다면 신라 전체의 역사는 일단 크게 4개의 시기로 구분
되는 셈이다.
이 4개의 분기分期 가운데 신라사의 출발인 상고는 무려 570년에 달하는 기간으로서 다른 시기와 비교하면 지나치게 길다. 그런데 국명이나 왕호를 비롯한 국가의 내부 구조와 그 성격을 구체적으로 점검하면 여러 가지로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두 시기로 다시 세분할 수가 있다. 이처럼 상고만은 따로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전기는 혁거세로부터 16대 흘해왕訖解王까지이다.
이때는 신라가 아닌 사로국이란 국명이 사용되었고, 그 최고 지배자는 이사금이라 불리었다.
후기는 17대 나물왕奈勿王이 즉위한 356년부터 22대 지증왕 때까지이다.
이때에는 신라란 국명이 처음으로 출현하였으며 그에 걸맞은 새로운 왕호로서 마립간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신라가 사로국이란 초기국가初基國家로서의 성격을 벗어나 명실상부하게 고대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춘 시기이다.
이처럼 상고는 여러 가지 측면을 비교할 때 성격상 차이가 나는 전후로 다시 나눔이 올바른 접근이겠다.
이상과 같이 천년의 신라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실마리로 크게 상고 전기와 후기, 중고, 중대, 하대의
다섯 시기로 나뉘는 셈이다.
각 시기의 정치 사회적 양태는 매우 달랐으며, 신라국가는 그 각각을 하나의 독립된 단계로 하면서 전개 되어 갔다.
이 다섯 시기는 곧 신라의 내재적 발전 과정을 담보하고 있다고 하겠다.
아래에서는 각 개별 단계를 구체적으로 다루어 신라사의 흐름을 간략히 정리해 보고자 한다.
2. 국가의 형성과 전개
초기국가의 출현
반도 남부 지역에서는 지석묘가 조성되던 서기전 8세기 전후 무렵 계급 분화를 바탕으로 한 정치체가 출현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계급 분화의 단초가 마련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초기국가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생산력의 수준이 매우 낮아 이제 막 계급 분화가 시작되는 수준에 머물렀으며 아직은 기존의 공동체성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가가 성립하기에 이르는 데에는 다시 장구한 기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초기국가 출현의 배경과 시점 및 과정이 전체 지역에 걸쳐 동일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청동기문화에 바탕하여 비교적 이른 시기에 국가가 출현한 곳이 있는가 하면 한층 뒷날에 이르러서 철기문화를
토대로 성립한 국가도 있었다.
문화적 기반이 일률적이지 않았으므로 초기국가의 출현 시기도 지역에 따라 상당한 편차가 있었던 것이다.
대체로 청동기문화를 기반으로 자체의 온축된 힘과 계급 분화를 배경으로 삼아 이른 시기에 성립한 국가를 일차국가라고
한다면, 발달한 선진 철기문화를 기반을 하면서 이미 다른 지역에서 정치체를 경험한 집단의 유입에 의해출현한 국가를
이차국가라 불러서 구별하기도 한다. 어떤 형태의 국가가 성립하느냐는 지역의 형편과 문화적 양상에 따라 달랐다.
청동기 문화에 토대한 일차국가가 대체로 한반도 북부지역 혹은 그 바깥의 요동지역과 만주 일대에서 먼저 출현하였다면,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삼은 이차국가는 주로 그들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을 강하게 받아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그 이남
지역에서 성립하였다.
전자의 성립이 상대적으로 빨랐다면, 후자는 아무래도 뒤늦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일차국가와 이차국가를 모두 합쳐서 편의상 초기국가라고 부른다.
과거 한때 초기국가에 대해 학술적으로 부족국가部族國家란 용어로 통칭한 적이 있었다.
이 용어는 1930년대에 만들어진 이후 오랜 기간 통설의 지위를 누렸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한국사 연구의 수준이 크게 향상되고 또 서구 정치인류학 이론이 본격적으로 소개되면서 성격이
전혀 달라서 서로 대비되는, 그래서 나란히 놓기가 곤란한 부족과 국가를 함께 붙여 사용함은 잘못이라는 비판이 제기
됨으로써 부족국가는 점점 그 지위를 잃어갔다.
그 대안으로서 제기된 것이 성읍국가城邑國家였다.
이는 성읍이라 불리는 토성土城을 중심 거점으로 삼았던 국가에 대해 그 형태를 중시한 데서 나온 용어이다.
그렇지만 성읍의 기능을 특별히 강조한 점을 제외하고는 실제 내용상으로 부족국가와 별로 다른 점이 거의 없다는 점,
토성은 초기국가가 형성될 즈음이 아니라 그보다 한 단계 뒤늦은 시기에 축조되기 시작하였다는 점 등이 밝혀지면서
강한 비판을 받았다.
그리하여 여러 다양한 용어가 다시금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정치인류학에서 제기한 여러 이론 가운데 단순한 구조의 혈연공동체로부터 한층 성숙되고 복잡한 구조의 국가로 나아가기 이전 과도기적 단계로서 필히 거쳤으리라 추정된 이른바 취프덤(chiefdom) 논의를 적극 수용하여 이를 족장사회, 수장사회, 군장사회,추장사회, 군장국가 등으로 번역함으로써 초기국가를 나타내는 용어로 대체하자는 제안이 나왔던 것이다.
한편 『삼국지』나 『삼국사기』 등의 여러 기본 사서 속에서 확인되는 읍락은 초기국가의 기초 단위로 기능함이 일반적
이었다.
그 가운데 정치적 중심지는 국읍國邑이었지만 기초 단위가 모두 읍락이란 의미에서 초기국가를 읍락국가邑落國家라
부르자는 주장도 나왔다.
아직 어느 쪽도 절대적 지지를 확보하고 있지 못한 상태이다.
여기서는 잠정적으로 읍락국가란 용어를 선택하여 논의를 진행시키기로 하겠다.
읍락국가의 출현 과정을 명확히 이해하려면 먼저 다음의 두 가지 조건이 각별히 전제되어야 한다.
첫째는 읍락국가의 형성을 바라보는 시야를 한반도로만 국한 시켜서는 곤란하다는 사실이다.
당시는 오늘날처럼 뚜렷한 국경선을 그어 출입을 통제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문화 양상으로 보아 한반도 바깥까지도 함께 고려해야 함이 적절하다.
그렇게 보면 요동遼東 지역을 비롯한 만주 일대와 대동강 중심의 한반도 북부 지역은 대체로 청동기나 토기, 지석묘 등
에서 비슷한 양상을 띤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 지역들을 하나로 묶어서 이해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둘째는 지리적으로 한반도 북쪽이 아무래도 문화적 선진지역이었으므로 남쪽은 자연히 그 방면으로부터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으리라는 점이다.
문화의 흐름이란 마치 자연 상태에서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이치와 같다.
그럴때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였으리라 짐작된다.
하나는 북쪽의 주민이 집단을 이루어 남쪽으로 이주한 경우이다.
이는 주민과 함께 문화가 이동한 것으로서 가장 직접적인 전파 양상이라 하겠다. 다른 하나는 지역 상호 간의 접촉과
교류를 통해 북으로부터 남쪽으로 선진의 새로운 문물이 유입된 경우이다.
후자의 경우는 자체 내부의 필요성에 따른 주체적인 문화 수용이라 할 수도 있다.
전반적 양상으로 미루어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읍락국가가 형성되던 초기에는 대체로 후자보다 전자가 주류였다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남부 지역에서의 읍락국가 형성 과정을 다룰 때 북부 지역으로부터의 유이민流移民 파동을 언제나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 형성 과정이나 배경은 남북 지역이 동일한 양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주민의 이동과 함께 그들이 보유한 선진문물이 남쪽으로 대거 옮겨가는 흐름이 일단락되기에 이른 것은 대략 북쪽
에서 4세기 전반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소멸하고 난 뒤의 일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것처럼 읍락국가가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아무래도 지리적 요인으로 미루어 요동 지역이었을
터이다.
그 일대를 시발로 해서 만주 및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읍락국가가 잇달아 출현하였다.
그 가운데 읍락국가 여럿이 결속하여 다시 더 큰 정치 조직체로서 연맹체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연맹체를 구성한 읍락국가들이 각기 독립성을 그대로 유지하였음은 물론이다.
사로국의 성립과 상고 전기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는 청동기문화를 배경으로 한 초기국가가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에 출현하였다.
늦어도 서기전 4세기 무렵에 이르러서는 그들 가운데 몇몇 특정 세력을 구심으로 주변세력을 결속함으로써 고조선
古朝鮮이나 부여夫餘와 같은 정치적 연맹체까지 결성된 상태였다.
반면 당시 남부 지역에서는 아직 초기 청동기문화에 기반한 지석묘支石墓가 조성되는 단계에 머물렀다.
특정한 개인의 무덤이 지석묘와 같은 큰 규모 형태로 조영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계급이 상당한 수준으로 분화되고
그를 토대로 한 정치체가 성립하였음을 방증하는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그 자체가 곧 초기국가 출현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 농업생산력의 향상에 따른 성장을 매개로 한층 더 내부적 성숙을 기다려야만 하였다.
다만, 이후 청동기가 본격 부장되는 적석목관묘들이 여기 저기 조성되는 것으로 보아 이후 계급 분화가 점점 더 진전
되어 어렴풋하게나마 초기국가 구성의 기반인 읍락의 초기적 씨앗이 뿌려졌다고 하겠다.
평온하던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전반적 변화가 두드러지게 일기 시작한 것은 서기전 2세기 초 무렵의 일이다.
이때 북쪽에서 일어난 정치 파동의 영향을 받아 밑바탕으로부터 꿈틀거리기 시작하였다.
그 결정적 계기는 가장 선진으로서 대동강 유역을 거점으로 발전을 거듭하던 단군조선이 중국 방면으로부터 이주해 온
위만衛滿에 의해 멸망당하는 사건이었다.
그 마지막 왕인 준왕準王은 황급히 무리를 이끌고 남쪽의 한족韓族사회로 나아갔다.
이 파동으로 한강 이남의 전역에 걸쳐 재편 작업이 본격화되었다.
그 결과 한족사회 일부 지역에서 정치적 결속이 이루어져 읍락국가가 출현하였다.
그러다가 서기전 2세기 말엽 통일제국 한漢이 위만조선을 공략하여 한사군을 설치함으로써 그 파장은 즉각 다시 한족
사회에까지 미쳤다.
이를 북으로부터 가해진 2차 파동이라고 할 수 있다. 위만조선의 멸망으로 적지 않은 수의 유이민이 발생하여 남쪽으로
이동함으로써 한족사회 전반에 걸쳐 정치 사회적 변동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성장일로를 걷던 읍락이나 읍락국가는 방어적 차원에서 내적 결속을 도모함으로써 대부분 읍락국가로 발전하고 규모가
커졌다.
유이민이 토착사회와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읍락이나 읍락국가가 탄생하기도 하였다.
이런 여러 읍락국가가 결속함으로써 서기전 1세기의 어느 시점에는 다시 한층 큰 연맹체가 출현하기도 하였다.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이 그것이다. 이때 진한연맹체에 소속한 여러 읍락국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사로국이었다.
고고학 자료가 보여주는 현황으로 미루어 사로국은 서기전 2세기 말에서 늦어도 서기전 1세기 초 무렵에는 성립하였으
리라 추정되고 있다.
그 밑바탕에는 이전 부터 꾸준하게 진행되던 읍락의 성장이란 기본 조건이 배경으로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경주분지 일대의 여러 읍락이 위만조선의 멸망으로 가해진 강한 압박을 받아 특정 읍락을 중심으로 결속함으로써
사로국이 성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등의 문헌에도 시점은 차이가 나지만 그런 정황이 희미하게나마 반영되어 있다.
6촌장으로 불리는 초보적 정치세력이 존재하던 경주분지 일대에 혁거세가 하늘로부터 내려옴으로써 비로소 국가가
탄생하였다고 묘사한 것은 그 일단을 보여 준다.
사로국이 성립하게 되는 배경에 북쪽에서 이미 선진문물을 경험하고 보유한 유이민 집단들이 남하한 일이 큰 계기로
작용하였음을 시사해 주는 대목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서기전 1세기 무렵 여러 초기국가가 특정 목적으로 결속함으로써 성립한 것이 진한이었다.
읍락국가들의 내적 발전의 결과였다.
사로국이 처음부터 줄곧 진한의 맹주국으로서 기능한 것인지 어떤지는 분명하지 않다.
경주분지에 자리한 사로국은 내륙에서 동해안 방면으로 나아가는 교통로가 모여드는 일종의 결절지結節地이기도 하였
으며, 해안 쪽에서 내륙 방면으로 들어가는 관문지關門地로서도 기능할 수 있는 특수한 지리적 이점을 갖고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사로국이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진한의 맹주 역할을 하였다고 추정해도 좋겠다.
그 일대에서 가장 발달한 초기철기문화가 확인되는 점도 그런 실상을 방증해 주기에 충분한 근거이다.
사로국을 구성한 다수의 읍락 가운데 주도적 역할을 맡은 중심 읍락의 수장은 이사금이라 불리었다.
이사금이 소속한 읍락은 곧 국읍으로서 사로국 전체를 대표하였다.
당시 기록상에서 잇따라 이사금의 지위에 올랐다는 박, 석, 김 3성이란 바로 사로국을 구성한 유력한 읍락들로서 그들이
곧 국읍으로 기능하였음을 뜻하는 사실이다.
이 설화를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선후하면서 바깥에서 사로국 경역 내로 진입하여 읍락을 이루었고 마침내는 국읍으로
발전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국읍을 비롯한 유력한 읍락이 상호 경쟁하는 과정을 통해 사로국은 전반적 발전의 길을 걸어갔다.
이처럼 신라의 모태인 사로국은 서기전 2세기 후반부터 서기전 1세기 초 무렵 성립하였다.
상고 전기는 사실상 이때로부터 신라라는 국호가 출현하는 4세기 이전 단계까지를 말한다. 당시 사로국은 단순히 진한
연맹체를 주도한 맹주로서 기능하였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왕조국가로서의 신라는 아직 출현한 상태가 아니었던 셈이다.
사로국과 신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신라사 초기의 모습은 다르게 그려질 수밖에 없다.
가령 사로국 단계를 신라의 전기前期로 보느냐, 아니면 전사前史의 성격으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그림이 나오는
것이다.
전자라면 사로국을 중심에 놓고서 신라의 형성이나 발전 과정을 살피게 될터이므로 자연히 진한연맹체나 혹은 그에
소속된 다른 여러 동료국가들은 흐름의 주체가 아닌 주변적 존재나 객체로서 처리되기 마련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사서들은 기본적으로 그런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것이 오래도록 신라사 이해의 주류적 입장으로 자리하여 왔다.
그렇지만 후자의 입장을 취하면 그와 같은 그림은 도저히 그려지지가 않는다.
신라는 존재하지 않는 반면 진한이란 이름을 가진 연맹체가 존재하였을 뿐이며, 게다가 사로국은 맹주이기는 하지만
유일한 정치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등한 여러 초기국가가 분립한 상태로 공존하면서 서로 간의 필요성 때문에 연맹체를 구성하기는 하였으나
내적으로는 상호 치열하게 각축을 벌이는 관계였다.
그런 과정에서 진한연맹체를 이탈하여 인근의 변한으로 소속을 바꾸거나 혹은 독자세력을 표방한 경우도 있었다.
신라의 성립이란 곧 진한 내부에서 전개된 통합운동에서 사로국이 최후의 승자가 되어 단일한 왕조국가가 탄생하였음을
뜻하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문헌자료에서는 전자의 입장이 주류였지만 중국측 자료는 물론이고 고고자료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오히려 후자가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최
근의 연구 흐름을 보면 그런 입장이 대세를 이룬다.
후술하듯이 상고 후기가 왕호를 근거로 마립간기로 불리다가 근자에는 내부적 운영을 고려하여 부체제로 불리는 경향
도 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
이처럼 상고 전기는 신라라는 국호가 사용되기 이전으로서 경주분지에는 사로국이란 초기국가가 존재하였다.
당시 왕호는 처음 거서간居西干, 차차웅次次雄이라 하다가 최후에는 이사금尼師今이라 하였다.
이들은 초기국가에 어울리는 의미와 성격을 담은 왕호였다.
특히 이사금이 사로국의 정식 왕호로서 기능하였다.
사로국은 신라의 모태이기는 하였으나 그 자체가 곧 신라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는 신라시대라기보다 차라리 사로국 시대, 혹은 그를 맹주로 한 진한시대라 부르는 편이 온당하다.
부체제 운영과 상고 후기
삼한사회는 한漢 군현의 견제와 감시를 받는 가운데에도 선진문물을 적극 입수함으로써 성장의 길을 착실히 걸어갔다.
삼한 각각은 낙랑군을 선진문물의 주된 입수 창구로 해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낙랑과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자리하여 가장 빈번하게 교류하던 마한(혹은 그에 소속한 읍락국가)의 발전이
아무래도 빨랐으리라 여겨진다.
제반 양상으로 볼 때 진한도 꾸준하게 발전하였음은 물론이다.
진한은 3세기 후반에 이르러 마한과 마찬가지로 중국 본토와 직접 교섭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중국 본토가 큰 혼돈 속으로 빠져든 까닭에 몇 차례의 교섭만으로 그쳤지만 여하튼 그것은 진한사회 내부에서도
어떤 변화의 움직임이 모색되어 가던 중이었음을 반영하는 사실이다.
그를 추진한 중심 주체는 사로국으로서, 그 자체는 진한 제국의 통합운동과도 연관되었을 터이다. 그
러나 진한의 중국과의 교섭 역시 마한처럼 오래 지속되지 못한 채 급작스럽게 중단되고 말았다.
곧이어 고구려가 남하정책을 추진하여 313년과 314년 낙랑군과 대방군을 점령하는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진한 내부의 통합운동을 유발한 직접적 계기로작용하였다.
낙랑과 대방 관할 하의 주민이 다수 이탈해 남쪽으로 이주하면서 정치적 파장을 일으킨 것이었다.
진한에서는 그들을 적극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장차 닥치게 될지도 모를 공세에 대비하여 내부의 통합운동을 전개
하였다.
통합운동은 여러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지만 최후의 승자는 사로국이었다.
사로국은 통합운동을 마무리하자 변모된 상황에 맞추어 신라란 국명을 사용함으로써 지배체제를 새롭게 단장하려 하였다.
사로국과 신라는 본래적 성격과 의미가 엄연히 달랐다.
사로국의 범위가 경주분지 일원에 한정된 반면 신라는 사로국을 정치적 중심 거점으로 해서 확보된 주변의 영역 전체를
아우르는 포괄적 성격의 국호였다.
그런 의미에서 신라는 영역국가를 뜻하는 전혀 새로운 성격의 국호라 할 수 있다.
신라국가가 출현하면서 지배자의 칭호도 이사금에서 마립간麻立干으로 바뀌었다.
연장자를 뜻하는 이사금이 사로국에 어울리는 칭호였다면 마립간은 신라란 왕조국가에 맞추어 창안된 것이었다.
세습성이 확고하지 못한 박·석·김 3성이 세력 다툼을 벌이면서 이사금의 자리에 올랐던 사로국과는 달리 이제 김씨족단
만이 단독으로 마립간의 지위를 세습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최고지배자에게 힘이 그만큼 집중되고 커졌음을 뜻하는 사실이다.
그런 사정의 일단을 반영해 주는 것이 경주 시내에 조성된 거대한 외형을 가진 고총고분인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다.
겉모습은 물론이고 거기에 부장된 유물의 질량質量도 그런 사정의 일단을 잘 반영하여 준다.
상고 후기는 신라국가가 성립하고 마립간이란 새 왕호를 처음 사용한 나물왕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는 당시 커다란 정치 사회적 변동이 수반된 결과였다.
그를 보여 주는 뚜렷한 몇몇 증거가 확인된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신라라는 국호 및 마립간이란 왕호의 사용, 김씨족단의 단독 세습체제 확립, 왕경과 지방이란 개념의
성립, 중국 전진과의 통교에 따른 동아시아 국제무대에의 등장 등을 손꼽을 수 있다.
그런 사정 전반을 물증해 주는 것이 적석목곽분이란 거대한 외형을 자랑하는 대형의 고총 고분이다.
다만, 이들은 변화를 피상적으로 보여 주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 이 시기를 연맹왕국聯盟王國시대란 모호한 용어로 불렀던 것도 그와 맥락을 같이한다.
때로는 왕호를 이용하여 단순히 마립간기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신라의 출현으로 기존의 정치 지형 전반이 달라졌다.
최근 연맹왕국이나 마립간기 대신 부체제란용어를 사용해 정치 운영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담아 내려 시도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사로국에서 신라국가로 전환하면서 자연히 내부 변동도 뒤따랐다.
복속지인 지방에 대응되는 왕도가 성립하였다. 사로국 자체가 곧 왕도로 전환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오직 사로국만 기존 상태를 그대로 이어갔을 리 만무하였다.
그를 구성하던 국읍과 읍락의 재편이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부部였다.
부는 사로국이 진한의 통합운동에 성공하면서 읍락 지배세력 사이에 결집이 이루어짐으로써 재편된 결과였다.
부는 단순히 왕도의 행정구획으로 기능한 것이 아니었다.
그 자체는 정치적으로 반半독자성을 지닌 단위 조직이었다. 부는 최후로 6개로 정리되었다.
6부 각각은 배타적 독립성을 지녔으며 그 내부는 다시 여러 다양한 혈연집단으로 이루어져 서로 경쟁하였다.
그들 간의 결속력은 그리 강고하지 않았다.
마립간의 정치적 위상은 이사금에 견주어 현격히 높아졌음에도 아직은 한계가 있었다.
기존의 공동체적 질서가 온존되어 완전히 해체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립간은 6부 가운데 가장 유력한 탁부喙部의 부장이면서 동시에 신라의 국왕이기도 하였다.
여타의 부도 각각 마립간을 어느 정도 견제할 만한 정치적 기반을 지니고 있었다.
신라국가의 중요한 일들은 부의 대표자들이 모여 구성된 회의체에서 결정되었다.
그 회의체를 주재한 것이 마립간이었지만 아직 절대권자, 초월적 지배자는 아니었다.
반독자성을 지닌 부를 중심으로 신라 정치가 운용되었으므로 이를 부체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부체제는 공동체적 성격을 강하게 지닌 사로국 단계로부터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 나아가는 도중에 거친 과도기적
지배체제였다.
아직 관부官府는 물론이고 관료조직이나 관등제官等制, 신분제 등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다.
부 각각은 나름의 독자적 경제 기반과 지배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부체제는 마립간을 정점으로 한 일원적 지배체제가 아니라 다원적 성격을 띠었다고 하겠다.
물론 각 부는 마립간을 배출하는 탁부에 견줄 바는 아니지만 상호 연합함으로써 그를 견제할 수가 있었다.
마립간도 어디까지나 부장部長이었을 따름이다.
신라국가 전체와 관련된 중요한 일은 각 부의 우두머리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회의체를 통해 결정되었다.
마립간은 회의를 주재하는 현실 정치의 일인자였다.
지방의 유력자도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회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다. 다만, 그들의 참여는 전쟁을 비롯한
군사력 동원과 관련된 문제, 외교상의 문제 등에 국한되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지방세력도 상당한 독자적 기반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4-5세기를 거치면서 삼국 간의 다툼이 점점 고조되어 갔다.
그를 배경으로 해서 신라의 지배체제가 국왕을 정점으로 집권화해 갈 분위기는 점차 무르익고 있었다.
집권적 지배체제의 성립과 중고
4세기에 접어들어 삼국이 정립함으로써 영토의 경계가 서로 맞닿게 되었다.
이후 주도권 장악을 위해 상호 치열하게 경쟁해 갔다.
서로 견제하고 우위에 서기 위해 상대방을 적절히 활용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외교정책, 외교관계, 외교술 등 정치외교
라고 표현해도 무방한 새로운 양상이 생겨났다.
이를 삼국이 정립된 이후의 두드러진 변화 가운데 하나로 손꼽을 수 있다.
정치상에서 외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커져 갔다.
삼국의 발전과 전개의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시각에서 접근이 가능하나 각각 통합을 겨냥하여 정치를 운영하였음을
고려한다면 외교 동향 중심으로 흐름을 살펴보는 것도 유효한 방법의 하나라 하겠다.
삼국의 국가 형성 배경, 과정, 시점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면 고구려가 가장 선진국이었고 백제가 그 다음이며, 신라는
가장 후진국이었다. 따
라서 신라사의 입장에서 한국고대사의 전개를 살피면 후진국이 선진국을 따라잡아 나가는 과정으로 설정할 수 있다.
앞서 간 두 선진국은 대립 상쟁하면서 상대적 약세인 신라를 우군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려고 애썼다. 신라는 두 나라의 그런 입장을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선발주자들을 따라잡아 나갔다.
고구려와 백제의 지배층은 모두 부여계로서 기본 뿌리가 같았다.
그래서 양자는 언제나 서로를 끊임없는 경쟁의 상대로만 여겼으며 이해관계가 부딪치면 결코타협하려 하지 않았다.
정치적 이유로 자국自國을 이탈한 인물이 서로를 피난처로 활용하였음은 그런 실상을 잘 반영해 준다.
두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단 한 차례도 서로 사신을 주고받았던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신라는 그런 정황을 교묘하게 이용함으로써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다.
삼국이 정립하자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속셈에서 백제가 먼저 신라에게 우호적인 손짓을 하였다.
신라는 선진문물의 입수 창구로서 어느 쪽이 더 유리할지를 저울질하다가 마침내 고구려를 선택하였다.
이후 한동안 신라는 고구려와 깊숙이 밀착해 갔다.
신라는 377년과 382년 두 차례에 걸쳐 고구려의 안내를 받아 북중국의 전진前秦에 나아가 통교할 수도 있었다.
신라란 이름으로 동아시아 국제무대에 첫 신고식을 치룬 것이려니와 이는 그만큼 내부적으로 발전하였음을 뜻하는
사실이기도 하다. 신
라가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맺자 백제는 그에 대항할 목적으로 가야는 물론 바다 건너 왜까지 동맹세력으로 끌어들였다.
이로써 고구려-신라, 백제-가야-왜의 두 그룹이 대치하는 전선이 형성되었다.
신라는 391년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즉위하자 10년 뒤 즉위하게 되는 실성實聖을 볼모로 보내어 기존 우호관계를 재확인
하였다.
고구려는 396년 대규모의 병력으로 한강을 건너 백제 왕성을 공략하였다.
당시 백제의 아신왕阿莘王은 위기를 맞아 항복하고서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부담함으로써 화의를 성사시켰다.
일단 한숨을 돌리게 된 백제는 보복을 목적으로 399년 가야와 왜를 사주하여 먼저 신라를 공격케 해서 그 왕도를 함락
시켰다.
멸망 직전까지 이른 신라는 황급히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광개토왕은 그에 부응하여 400년 5만의 대병력을 보내어 신라 왕도를 탈환하고 도망치는 왜와 가야의 연합병력을 쫓아
임나가라의 일부 경역까지 진격하였다.
고구려는 이 군사 작전 후 신라를 보호해 준다는 구실 아래 왕도는 물론이고 군사적 요충지에다가 병력을 배치시켰다.
이로써 고구려는 사실상 신라를 일종의 복속국처럼 여겨 정치적으로 깊숙이 간여하였다.
402년 나물왕이 사망하자 볼모 경험을 통해 자연히 친고구려적 성향을 지닌 실성을 즉위시켰다.
실성왕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고구려의 간섭이 지나치다고 판단해서 반발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오히려 그를 내몰고 정치적 경쟁관계에 있던 눌지訥祗를 즉위시켰다.
신라는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벗어나면서 한동안 그 우산 아래에서 안정적 성장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지나친 간섭은 발전에 큰 질곡桎梏이 됨을 알아차렸다.
눌지왕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오히려 백제로의 접근을 꾀하였고 마침내 433년에는 동맹관계를 맺었다.
신라는 고구려와의 갈등과 대립이 점점 커져 갔음에도 겉으로는 기존 관계를 그대로 유지해가는 척하였다.
그러다가 464년 신라는 군사고문관 형식으로 그 왕도에 주둔하던 고구려 병력 백여 명을 일시에 몰살시켰다.
이로써 고구려와의 관계는 완전히 끝장나고 말았다.
고구려는 신라의 배후에서 백제가 조종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호시탐탐 기회가 닿기를 기다렸다.
그런 동향을 눈치 채지 못한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은 자만에 빠져 느슨하게 대비하다가 오히려 고구려의 공격으로 왕도가
함락되고 사망함으로써 한강 유역을 잃는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였다.
한편 신라는 백제 쪽으로 눈을 돌려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고구려의 공격에 적극 대비하면서 방비체제를 강화해 갔다.
군사적 요충지에다 지방민을 동원해서 축성을하고 왕도 내의 명활산성明活山城으로 일시 거처를 옮겼다.
축성을 위해 지방민을 동원하고 군사적 조직화를 도모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지방관을파견할 기반이 갖추어졌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지배세력 내부에서 갈등이 빚어져 사탁부 출신의 갈문왕葛文王이던 지증이 국왕인 소지왕을 내모는
정변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추대의 형식을 취해 즉위한 지증왕은 지배 기반 확립을 위해 직전과는 확연히 다른 면모의 개혁적 시책을 추진
하였다.
이를테면 순장殉葬 금지, 새로운 상복법喪服法의 제정, 우경牛耕의 실시, 지방행정단위의 전면적 재편과 지방주둔군
사령관 군주軍主의 파견 등의 조치를 손꼽을 수 있다.
그리고 기왕에 사용되던 여러 국호 가운데 신라를 정식 국호로 확정지었다.
갈문왕이란 지위 및 64세란 연령으로 보아 정상적 상태라면 즉위하기 곤란하였을 지증왕은 제반 개혁적 조치를 적극
추진함으로써 신라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토대를 마련해 나갔다.
그 기본 지향은 곧 부체제의 해체에 두었다.
지증왕의 뒤를 이은 법흥왕은 병부兵部를 설치하였으며, 그 장관으로서 병부령을 두었다.
이는 신라 최초로 두어진 관부였다. 이어서 율령律令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였으며 상대등上大等을 설치하는 등
지배체제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그 과정에서 왕경인 대상의 17등급 경위京位와 지방민 대상의 외위外位를 두는 등 특유의 신분제인 골품제의 골간도
마련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법흥왕은 스스로 기존 매금왕寐錦王 대신 대왕大王이라 칭하였다.
이로써 국왕의 위상은 초월자적 수준으로 부상하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국왕도 다른 여러 부장과 마찬가지로 부명을 관칭冠稱하는 등 대등한 가운데 제일인자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제는
그들과 전혀 다른 위상을 갖게 된 것이다.
그를 드러내 보이기 위해 연호 사용을 표방하기까지 하였다.
법흥왕은 갖은 곡절을 겪으면서 불교를 공인하게 되었거니와 이후 그것이 한껏 격상된 국왕의 위상을 적절히 포장해
주는 지배이데올로기로 기능하였다.
진흥왕이 스스로 내세운 전륜성왕轉輪聖王, 진평왕대에 정리된 석가족 신앙, 화랑의 외피를 미륵신앙으로 입힌 사례
등등은 그런 실상을 뚜렷이 보여 준다.
이후 지배체제를 실질적으로 뒷받침해 주고 또 유지해 가기 위해 여러 관부와 함께 관직을 설치하였다.
율령적 관료제가 발달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된 것이었다.
그와 같은 과정을 거쳐 부체제는 약화, 해체되면서 국왕을 정점으로 한 새로운 지배체제가 성립되었다.
이를 흔히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라고도 부른다.
기왕의 6부와 그 이름은 그대로 존속하였으나 이제 왕도의 행정구획으로만 기능하였을 따름이다.
이로써 신라는 선진의 고구려나 백제와 어깨를 견줄 만큼의 수준으로 올라섰다.
중고는 신라적 체제와 질서가 갖추어진 새로운 시기의 출발이었다.
3. 삼국 통합 성공과 평가
통일 지향의 전쟁 시작
신라는 5세기 후반 이후 백제로부터 크게 도움을 받기는 하였지만 거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뒤따름을 차츰 느껴 가고
있었다.
그래서 6세기 중엽 마침내는 신라가 발전하는 최선의 방책은 백제의 영향권을 벗어나 결별하는 길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것 같다.
540년 7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진흥왕眞興王은 551년 성년으로 친정親政하면서 개국開國이란 새 연호를 사용하였다.
‘나라를 연다.’라는 연호의 뜻 속에 함축되어 있듯이 진흥왕은 새로운 변신을 꾀하면서 독자노선을 걷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셈이었다.
이제 그를 직접 실행으로 옮길 계기와 시점만 남겨 둔 상태였다.
그럴 때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백제는 오래전 잃어버린 본거지 한강 유역의 탈환을 학수고대해 왔다.
특히 한강을 잃은 당사자인 개로왕蓋鹵王의 아들 무령왕武寧王이 즉위하고서부터 그런 뜻은 구체적으로 표방되었으며,
이는 손자 성왕聖王에게도 거의 그대로 이어졌다.
성왕은 왕도를 웅진(공주)으로부터 사비(부여)로 옮기는 등 한강 유역 탈환을 실행하기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을 철저히
하였다.
백제는 한강 유역 진출이 순조롭게 성공하기 위해서는 아직 단독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신라는 물론 가야 세력까지 적극 끌어들여 연합군을 편성함으로써 만전을 기하려 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왕위 승
계 문제를 놓고 외척 세력 간에 극심한 내분을 겪은 직후로서 그 여진이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불안정한 상태였다.
게다가 북방에서는 유목민인 돌궐이 흥기하면서 고구려에 위협적 세력으로 부상해 가던 중이었다.
백제는 그를 절호의 기회로 여겨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551년 백제 주축의 연합군은 드디어 한강 유역 탈환에 나서 성공하였다.
당시 신라는 주로 한강의 상류 지역을 확보한 반면 백제는 자신의 원주지였던 한성(서울)을 비롯한 하류 일대를 장악하였다.
그런데 신라는 이미 한강 방면으로 출정할 때부터 하류까지 진출할 희망과 의도를 갖고 있었다.
신라는 한강 유역 장악에 성공하였을 때 망명해 온 승려 혜량惠亮으로부터 고구려 내부의 동향에 관련된 최신 정보를
입수하고서 적당한 시점에 고구려와의 밀약설을 유포시켰다.
이때 신라가 고구려와 실제로 밀약한 것인지 어떤지를 둘러싼 논란이 있지만,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런 이야기가
널리 퍼져 나갔음은 분명하다.
그런 첩보를 입수한 백제는 액면 그대로가 사실이라면 감당하기 어렵다고 진단하여 553년 한강 유역에 주둔시킨 병력을
작전상 자진 철수시켰다.
한강 유역으로 부터의 철군이 힘겨루기를 한 결과가 아니었으므로 두 나라의 기존 동맹관계는 아직 유효한 셈이었다.
백제 성왕은 신라에 보복할 생각을 가졌지만 왕녀를 진흥왕의 소비로 보내는 등 잠시 내심을 숨기고서 전면전 준비에
들어갔다.
백제 내부에서는 신라와의 전쟁 추진을 놓고서 찬반 양론으로 나뉘어 크게 논란을 벌였다.
이때 강경한 주전론자였던 성왕의 장남 여창餘昌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554년 대규모의 전쟁을 일으켰다.
초기의 전세는 백제에게 매우 유리하게 돌아갔다.
잠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자 크게 고무된 성왕은 여창을 격려하기 위해 직접 소수의 병력만을 이끌고 전장으로 나아갔다. 그러던 도중에 한강 유역에 주둔한 총사령관으로 전세가 불리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돕기 위해 행군하던 김유신의 조부
무력武力이 이끌던 부대를 만나 사로잡히고 말았다.
성왕은 신라 지휘부로 끌려가 곡절끝에 참형을 당함으로써 최후를 맞았다.
성왕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기세가 한풀꺾인 백제 병력은 급속히 수세에 몰렸다.
드디어는 총사령관 여창만 몸을 피하였을뿐 거의 3만에 달하는 전체 병력이 몰살당하는 완패를 당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널리 알려진 관산성管山城전투의 시말이다.
이 싸움의 승패는 이후 신라와 백제의 명운을 뚜렷이 가를 정도로 의미가 컸다.
신라가 승승장구하여 통일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는 길을 걸어갔다면 백제는 거꾸로 극심한 정치적 내분을 겪어 원상을
회복하는 데 너무도 오랜 시간과 노력을 투여해야 하였다.
신라와 백제의 체제 경쟁에서 전자의 승리가 예고된 사실상의 분기점이나 다름없었다.
그 뒤 잠깐 동안의 휴전 상태를 지나 중국 방면에서 등장한 통일왕조 수가 7 세기 초반부터 고구려와의 전쟁을 준비하자
다시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삼국 간의 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된 것이다.
그 가운데 통일전쟁의 계기나 출발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642년은 대단히 주목할 만한 해이다.
이 해에는 직전 해에 즉위한 의자왕이 다수의 왕족과 귀족을 몰아내는 궁정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이유가 뚜렷하게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그로 말미암아 백제의 내정은 심히 불안정해진 상태였다.
의자왕은
그런 정황을 호전시키기 위해 신라를 대상으로 전면전 수준의 공세를 펼쳤다.
그 결과 백제는 낙동강 이서 지역, 즉 과거 가야의 영역 대부분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신라는 크게 타격을 입고서 안팎으로 커다란 위기 상황을 맞았다.
왕경의 바로 코앞에 백제의 병력이 진을 친 셈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왕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한강 유역도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다급해진 신라는 즉시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는 사절을 파견하였다.
당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사이에 백제는 한층 더 가열찬 공세를 펼쳤다.
이에 김춘추가 고구려로 가서 외교 교섭을 하였다.
하지만, 그는 고초만 겪었을 뿐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고구려에서도 바로 앞서 실력자인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즉위시킨 일대 정변을 일으킨 탓에
내정이 심히 불안정하였으므로 신라의 요구가 먹혀들 리 없었다.
이제 신라로서는 도움을 요청할 대상이 당나라밖에 없었다.
그래서 643년 다시 당에다 원병을 요구하는 사신을 파견하였다. 6
40년 고창高昌을 멸한 뒤 고구려 원정을 차근차근 준비하던 당 태종으로서는 신라의 요청을 들어줄 리 만무하였다.
태종은 고구려 공략 실패로 몰락한 수隋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 나가던 중이었다.
그런 당이 신라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여 백제 공략으로 선회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태종은 신라가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세 가지 계책을 제안하였다.
그 속에는 신라는 여자가 왕으로서 정치를 잘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웃나라의 공격을 받는 것이라 단정하고서는 만일
당의 왕족으로 왕을 교체한다면 원병을 보내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신라 조야에서는 선덕여왕의 재위 문제가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그 연장선상에서 647년 당시 상대등 비담이 왕위계승을 목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김춘추와 그의 영원한 동지 김유신은 비담의 난을 진압하면서 마침내 실세로 부상하기에 이르렀다.
두 사람이 집정하면서 삼국통일 전쟁으로 비화할 분위기가 한층 더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645년 시작된 당의 고구려 원정은 몇 차례 추진되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집권자 김춘추는 648년 당 태종을 만나 내밀히 군사동맹을 체결하였다.
654년 왕위에 오른 김춘추는 불안정한 내정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당으로 하여금 고구려 공격을 잠시 유보하고
백제를 먼저 공격하도록 요구하는 외교를 적극 펼쳤다.
당도 때마침 고종의 비인 측천무후則天武后가 권력 장악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정정이 심히 불안정해지자 신라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면서 고집하던 고구려 선공론先攻論을 백제 공격론으로 수정하였다.
삼국통일 전쟁이 본격화하기까지의 과정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았다.
삼국 간의 관계와 각국의 내부 동향, 신라가 적극적으로 펼친 외교전, 당의 내정과 동아시아 재편 전략 등이 서로 뒤얽혀
양상이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어떻든 신라가 줄기차게 노력한 결과로서 660년 나당 연합군이 결성되어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후 고구려를 대상으로
삼은 공격이 여러 차례 단속적으로 이어지다가 668년에는 마침내 연개소문 사망 이후 격심한 내부 정쟁을 겪고 있던
고구려를 쉽게 멸망시켰다.
백제가 멸망한 뒤 3년에 걸쳐 진행된 백제의 부흥운동 과정에서 바다 건너 왜까지도 참전하였다.
이로 보면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된 통일전쟁은 단순히 삼국 간에만 치른 싸움이 아니라 사실상 동아시아 국제전의
성격을 띤 셈이었다.
그처럼 확대되기까지는 물론 당시의 국제정세가 작용하기도 하였지만 신라가 추진한 외교활동이 큰 몫을 차지하였다는
사실도 부정하기 어렵겠다.
일단 고구려와 백제가 소멸되자 당과 신라 두 나라에게는 공동의 적으로 삼을 대상이 사라진 셈이었다.
그러나 전후 처리에 대한 입장이 서로 달랐던 데에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신라는 김춘추가 648년 태종을 만나 밀약한 그대로 백제 땅은 신라가, 고구려 땅은 당이 차지하기로 한 약속을 굳게
믿고서 추진하였다.
반면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에 대한 근본 재편을 노리던 당은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는 물론 심지어 동맹국인 신라조차
기미주羈縻州로 삼아 영토화하려는 속셈을 갖고 있었다.
전쟁 초반기부터 당의 입장을 간파한 신라도 종내는 당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리라는 사실을 직시하고서 그에 대한
대비책을 꾸준하게 마련해 두고 있었다.
과연 670년 전후부터 백제 옛 영토의 영유 문제를 놓고 갈등이 노골적으로 표출되면서 드디어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
어졌다.
이후 주로 한강 유역과 그 북쪽 일대를 중심으로 전투가 산발적으로 전개되다가 676년 당이 평양의 안동도호부를 요동
지역으로 철수시킴으로써 전쟁은 끝났다.
이후 한동안 소강상태를 맞았으나 신라는 애초의 소원대로 백제 영역전부를 확보하였으므로 당과의 화해 외교를 꾸준히
펼치면서 관계 회복을 추구하였다.
통일에 대한 평가
신라는 676년 당과의 전쟁을 끝냄으로써 통합전쟁을 완전히 마무리한 셈이었다.
그래서 이후를 이전과 구별하여 각별히 통일신라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는 사서史書에 등장하는 정식 국명은 아니다.
근대 역사학이 출범한 이후 현대적 시각과 입장에서 만들어낸 특수한 성격의 조어造語일 따름이다.
현재 널리 통용되고 있기는하나 그 개념조차 엄밀히 규정된 상태는 아니다.
그러므로 통일신라란 용어는 일단 제한적 범위에서 조심스럽게 사용함이 올바른 접근 자세이다.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을 놓고서 최근까지 다양한 평가가 내려졌다.
돌이켜보면 오래도록 신라에 의한 삼국통합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로서 굳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이르러 그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남북한에서 동시에 나왔다.
698년 고구려의 계승자를 표방한 발해가 건국되었으므로 신라의 삼국통합을 그대로 통일로서 인정하기는 곤란하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그래서 통일신라란 용어의 사용조차 꺼리면서 이때를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로 불러야 마땅하다고 하였다.
발해가 고구려의 영토와 주민을 거의 그대로 승계하고 또 스스로도 그 계승자란 인식을 갖고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발해가 건국되기 이전 30년 동안은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하고 오직 신라만이 단일의 통일왕조로서 존재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물론 당시 고구려의 영토나 주민 모두가 그대로 신라에 편입되지 못한 점을 고려하면 그 자체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통일이었음은 의심할 바 없다.
그렇지만 반드시 주민과 영토 전부가 남김없이 편입되어야만 비로소 통일하였다고 규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과거 존재하던 여러 정치적 적대세력이 일정한 과정을 거쳐 사라지고 하나로 정리되었다면 그 수준은 젖혀 두더라도
통일로 단정해도 무방한 일이다.
그러므로 일단 발해가 출현하기까지 한시적이기는 하나 신라가 단일의 통일왕조로 존재하였다는 사실 자체는 틀림없다.
한편 뒷날인 926년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하면서 그 영토와 주민이 떨어져 나가 우리 역사의 주류로 편입되지 못한
점도 아울러 고려하면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을 굳이 그렇게 의도적으로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특히 그러한 평가가 내려지게 된 이면에는 삼국통일 과정에서 당이란 외세가 개입되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던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삼국통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당이란 외세가 개입된 문제를 크게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반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당시 민족주의자들은 조선왕조(대한제국)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당면의 현실을 과거의 역사 속에 비추어 보면
서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과 그 주도세력에 대해 기존과는 전혀 다른 평가를 내렸다.
그 결과 전통시대에는 줄곧 삼국통일의 원훈으로 치켜세워졌던 김춘추와 김유신에 대한 이해도 완전히 바뀌었다.
이제는 그들을 영웅이 아니라 민족의 배반자로서 낙인찍기까지 하였다.
민족주의자들은 그들이 당이란 외세를 끌어들여 서슴없이 동족국가를 치는 등 민족에 대한 배족背族 행위를 저질렀다고
힐난하였다.
그런 결과로서 사대주의적 사고나 풍조가 뿌리내렸으며 결국 현실의 조선왕조 멸망의 원인遠因도 그런 분위기의 연장
선상에 있는 것으로 풀이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일제시기를 통해 상당히 널리 유포·통용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그것이 북한 역사학계의 주류적 이해로 정착하였고, 남한 역사학계의 일각에서도 비슷하게 받아들여 왔다.
남북국시대론이 나오게 된 배경은 이런 해석과 일정하게 맥락이 닿아 있다.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심각한 현실 문제를 장차 해소해 나가려는 방안의 하나로서 지나간 역사를 더듬어보고 그를 반추
反芻하여 근본 요인을 찾아내려는 자세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결론을 내리려면 먼저 사실 여하에 대한 충분한 검토 작업이 선행되어야 마땅한 일이다.
사실성을 결여한 역사 해석이란 어디까지나 선언이며 주장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를 올바른 역사적 접근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과연 삼국의 주민이 서로를 동족으로 인식하고 있었던가, 삼국 주민들을 실제로 같은 민족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가 하는
등등의 문제가 먼저 밝혀져야한다.
삼국이 4세기 이후 줄곧 접촉하면서 정치적·문화적으로 교섭·교류하면서 비슷한 과정을 밟아 발전하였음은 분명하다. 따
라서 정치제도나 운용, 그리고 문자를 비롯한 문화 전반, 불교와 유학에 대한 이해 등에서 많은 부분이 닮았음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를 삼국 주민이 동족이었다거나 삼국이 동족국가였다는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
그것이 삼국 자체가 지닌 본질적 성격을 나타내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유사하게 보이는 측면과 요소는 삼국 각각이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내부의 필요성 때문에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율령,
불교, 한자문화 등을 공통분모로 가지게 된 데서 기인한 것일 따름이다.
그 방향을 추구하면서 상호 접촉을 통해 주고받은 영향관계로 말미암아 매우 비슷한 면모를 갖추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처럼 결과론적인 유사 현상만으로 동족, 동족국가를 운위하는 것은 지나친 추론일 따름이다.
한편 삼국 각각은 평화적이건 전쟁을 통한 것이건 간에 잦은 접촉을 통해 서로 외모나 언어 등의 측면에서 어딘가 비슷
하다고 인지하기도 하였을 터이다.
아마도 이따금씩 만나는 중국인이나 왜인과는 어딘가 다르다고 느꼈을 것 같다.
그렇다고 이를 민족의식을 공유한 증거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유사하다는 동류의식同類意識 정도로 인식하였을 따름이다.
삼국의 주민들 사이에 민족의식을 공유하였다고 볼 만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또 당시는 민족이 이미 만들
어져 있던 상태가 아니라 형성되어 가던 도중이었다.
서로는 죽이거나 죽임을 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적대세력으로서, 당이나 왜와 마찬가지로 외세라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 통일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에 민족의식을 기준으로 삼아 삼국통일을 평가하는 것은 너무도 부적절한
접근이다.
신라는 삼국을 통합한 이후 그에 어울리는 여러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가운데 통일 정책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9주州 5소경小京과 9서당誓幢과 같은 제도이다.
전자는 고구려와 백제의 옛 영역을 포함한 영토 전반에 대한 재편이며, 후자는 주민에 대한 재편이다.
가능하면 적대국 유민이라도 신라민이 된 이상 차별하지 않고 포용하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문무왕이 죽음에 직면하여 남긴 유조遺詔에도 세제稅制를 균등하게 실시하라는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신라국가는 삼국 간의 영역 및 주민을 차별하지 않는 융합을 통일정책의 기본 방향으로 설정하였음이 분명하다.
그것이 신라의 영속성을 보장하는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목표를 순조롭게 달성해 내기 위해서 주통州統·군통群統을 설치하고 삼국 공통의 기반이었던 불교를 적극 활용
하였다. 그
와 함께 특히 새로운 지배이데올로기로서 일통삼한一統三韓을 크게 내걸었던 사실은 각별히 주목할 만하다.
일통삼한이란 신라의 삼국 통일을 곧 삼한 통합으로 간주하려는 논리를 말한다.
삼국의 모태는 삼한으로서 그를 구성한 주민이 모두 하나의 한韓이었는데 신라의 통합으로써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그것을 뒷받침해 주기 위해 삼국과 삼한을 곧바로 등치시키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신라는 진한의 후예로 설정한 반면, 고구려와 백제의 전신에 대해서는 마한과 변한 중 어느 쪽으로 비정할지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삼국이 곧 삼한이라는 인식은 실제의 역사적 사실과는 크게 어긋났음에도 통일정책의 필요성에 따른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조작해낸 것이었다.
이를 사실로 만들어서 삼국의 원래 주민들에게 주입시키고자 하였다.
일통삼한 자체는 역사적 사실과 전혀 관계가 없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훗날 단일의 민족 혹은 민족문화가 탄생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삼국이 본디하나의 뿌리에서 연유하였다는 인식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문헌 기록상에서 여러 갈래의 종족 명칭이 확인된다.
크게 조선, 한, 예濊, 맥貊, 예맥濊貊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들을 기반으로 삼은 정치체가 각지에서 만들어져 부침을 거듭하여 왔다.
그들의 향방이 어떻게 될지 예정된 바 없이 역사는 진전되어 갔던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신라가 삼국을 통합함으로써 비로소 하나의 민족, 민족국가, 민족문화가 생성될 수 있는 굳건한 토대가 놓
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물론 그 자체로써 하나의 민족이 곧장 탄생한 것은 아니다. 이후 일정한 영역 범위 내에서 다양한 세력 집단이 오래도록
이합집산과 혼동상을 거치면서 그런 흐름이 점점 굳게 다져지고 뿌리내려져 갔다.
구성원 모두가 동일한 데서 연유하였다는 인식을 차츰 공유해 간 것이다.
사실상 오늘날 사용하는 것처럼 성원 모두의 평등을 기본적 전제로 삼는 민족의 개념과 의식의 실체가 나오게 된 것은
근대사회에 이르러서의 일이지만 신라가 삼국을 통합함으로써 외형이 이미 마련되었다고 하여도 좋다.
그런 의미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이 갖는 의미는 결코 작다고만 할 수 없다.
이로써 그 전과는 다른 새로운 지평이 열렸던 것이다.
4. 융성과 쇠망
새로운 지배체제의 성립과 중대
신라는 지리적 위치로 말미암아 삼국 가운데 후발주자로서 가장 약세였다.
삼국이 정립한 이후 치열하게 전개된 경쟁에서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생존을 도모하면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 선진
문물을 적극 입수하려 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제정세의 흐름에도 관심을 깊이 기울여 나갔다.
그 결과 필요에 따라 고구려 혹은 백제, 나아가 인근의 가야와 왜까지 적절하게 활용하는 지혜를 보였다.
마침내 중국 방면에서 오랜남북의 분열 상태를 극복하고 수隋나 당唐과 같은 강력한 통일 왕조가 들어서자 그에 적극
밀착하여 외교적 성공을 거두었다.
신라가 불리한 여건을 극복하고 삼국 통합전쟁에서 최후의 승자가 된 결정적 요인의 하나는 바로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읽고서 추진한 외교의 성공에 있었다.
신라가 삼국통합에서 승리하게 된 또 다른 요인으로는 지방민에 대한 적절한 시책과 새로운 시대를 감당할 만한 인재의
양성을 손꼽을 수 있다.
신라는 촌주제나 외위제의 실시, 군사郡司나 촌사村司의 운영과 같이 지방민을 조직화하고 관리하였다.
전투에서 승리하면 크게 포상하고 반발하면 엄하게 형벌을 가해 다스리는 정책을 적절히 구사하면서 전장으로 끌어들
였다.
한편 화랑도와 같은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인재를 체계적으로 양성하고 관리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그 위에 김유신과 김춘추와 같은 새로운 시대를 선도해 간 지도자들의 탁월한 안목과 뛰어난 능력이 큰몫을 다하였다.
신라는 삼국을 통합한 뒤 영토와 주민을 하나로 굳혀서 안정을 유지해 가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구사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의 지배세력에게 본국에서의 관작을 고려하여 일정한 기준을 세워 적절하게 관등을 지급함으로써 신라
주민으로 포섭하였다.
한편 전국을 9주州로 편제하면서 원래 삼국의 영토에 골고루 3주씩 안배하였다.
그 지역들에다가 왕경을 모방하여 소경小京을 둠으로써 지방문화의 발전에 구심의 역할을 하도록 유도하였다.
통일기의 핵심적 군단인 9서당은 복속민들을 적절하게 배분하여 편성하였다.
가능하면 복속된 주민에게 차별적으로 비쳐질 만한 요소는 최소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최대한 균등한 정책을 취하는 듯이 보이도록 유도하였던 것이다.
특히 문무왕이 임종에 직면하여 남긴 유조에서 드러나듯이 조세 수취와 같은 민감한 사안에 대해 복속민을 신라민과
다름없이 대우하여 형평성을 유지하는 데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통일 이후 고구려나 백제의 유민에게서 상당 기간 두드러진 반발이 나오지 않았던 것으로 보면 그러한 시책은 일단
목적을 달성하였다고 평가된다.
삼국을 통합한 뒤 인구와 영토가 크게 늘어났다.
신라 중앙정부는 그를 조직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통치조직을 전반적으로 재정비하였다.
당의 율령제를 적극 수용하려 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당의 관제를 모방하여 소위 6전典 관부 조직을 완비하고 관부마다 기본적으로 5등관제를 실시하였다.
물론 관등을 비롯한 관부나 관명에서는 기존 신라의 그것을 그대로 고집하였음도 확인된다.
실제 운용상에서는 선진이었던 고구려나 백제의 그것도 적극 참조하였으리라 여겨진다.
이런 지배체제의 정비 과정을 거치면서 국왕권은 한층 강화되어 갔다.
관제 정비와 운용의 기본 방향은 사실상 국왕 중심의 권력 집중화를 겨냥한 것이었다.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해 가기 위해 기왕과는 다르게 왕자王子를 비롯한 근친 왕족을 요직에 배치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를 거치면서 통일 이후의 중대에는 국왕을 정점으로 한 지배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기간을 한 마디로 전제專制왕권의 시대라 일컫기도 한다.
전제왕권의 의미를 둘러싸고서 논란이 있지만 당시 잘 짜인 제도 운영을 통해 국왕권이 안정적으로 행사되었다는 의미
에서 나온 표현이라 여겨진다.
국왕권을 이념적으로 밑받침해 준 것이 유학에서 추구한 이상인 왕도정치였다.
그 이전까지는 불교를 지배이데올로기로 삼았다면 이제는 유학으로 그것을 대체해 나간 경향성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말하자면 통일 이후 중대는 유학을 지배이데올로기로 삼은 새로운 시대로 바뀌었던 것이다.
중고기 불교와 정치가 합일된 정교일치의 시기였다면 중대는 그를 벗어나 유학이 정치를 뒷받침해 준 반면 불교는
정치성을 탈각하여 종교로서만 기능한 시기였다.
불교 신앙이 다양하게 수용되고 교학불교가 크게 발전하였음도 그런 실상을 반영하여 준다.
불교 신앙이 깊이 뿌리내려 가면서 그와 연관된 문화도 크게 발전하였다.
이로써 통일기에 이르러 신라 문화는 절정으로 치달아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특히 성덕왕聖德王과 경덕왕景德王 때를 그 대표적 시기로서 손꼽을 수 있다.
이때 신라 문화를 상징하는 불국사와 함께 다보탑, 석가탑이 세워지고 석굴암이 조영되었다. 특히 공예상의 백미라 할
성덕대왕신종(봉덕사종)과 같은 대표적인 작품이 제작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절정기에 이르자마자 내부적으로 모순이 급속히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중대에는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근친 왕족을 중심으로 정치를 운영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정치적 핵심에서 배제된 귀족들의 불만은 누적되어 갔다.
그들이 정치적 핵심에 접근하는 지름길은 대체로 외척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왕비의 자리를 둘러싼 암투가 크게 벌어졌다.
특이하게도 중대에는 국왕이 왕비와 이혼하는 사례가 여러 차례 일어났음은 그런 사정을 잘 반영하여 준다.
경덕왕은 자신을 승계할 왕자가 없다는 이유로 왕비와 이혼을 감행하면서까지 자식을 얻고자 하는 강렬한 욕심을 내보
였다.
그 결과 뒤늦게 얻은 나이 어린 혜공왕을 무리하게 즉위시키면서 드디어 파국을 맞았다.
767년(혜공왕 3)에는 96각간角干이 가담하였다고 표현될 정도로 대규모의 난이 발발하였다.
거의 전국에 걸친 지배층이 자의건 타의건 사건에 연루되었다.
신라가 절정기로 나아가면서도 밑바탕에 모순이 누적된 결과였다.
이후에도 난이 이어지면서 정정은 심히 불안정해져 말기적 상황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침내 780년 혜공왕이 피살됨으로써 중대는 막을 내리고 새로운 시대로 돌입하였다.
지배체제의 동요와 하대
하대는 중대 내내 정치 핵심에서 배제된 바 있는 여러 가문 집단이 참여하여 연합하는 형식으로 운영되었다.
상급귀족들은 『신당서新唐書』에서 노동奴僮이 삼천명이라 표현될 정도로 엄청난 경제적·무력적 기반을 독자적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하대는 그런 상태의 유력한 귀족들의 합의 아래 운영되었다는 의미에서 한마디로 귀족연립정권의 시기라 부르고 있다.
이는 국왕권이 상대적으로 그리 강하지 못하였음을 뜻하는 사실이다.
어린 나이의 애장왕哀莊王은 809년 김언승金彦昇을 비롯한 몇몇 삼촌들이 모의하여 일으킨 반란의 와중에 피살되었다.
이를 신호탄으로 하대의 정정은 심히 불안정한 상태로 들어갔다.
그런 가운데 즉위한 헌덕왕憲德王대에는 한발이 일어나 기근이 계속되는 등 사회가 심히 혼란스러웠다.
전국 각지에서 농민이 거주지를 이탈하여 유랑하거나 당과 같은 외국으로 나아가는 등 파탄의 조짐을 보였다.
때마침 822년(헌덕왕 14)에는 인사에 불만을 품은 웅천주도독 김헌창이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독립국을 표방하여 국호를 사용한 점, 독자적 연호를 사용한 점에서 지닌 의미나 의의가 유달랐다.
신라왕조 자체를 부정한 데서도 그러하거니와 특히 연호 사용은 당에 대한 직접적 반감의 표출로 보이기 때문이다.
지방민을 반란에 적극 활용하였다는 점도 특징적인 현상이다.
김헌창이 지방장관을 역임한 지역은 과거 백제의 영역이었다.
그곳이 난의 중심이었다는 것은 복속지역의 불만이 크게 고조된 상태였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특정 세력에 의한 중앙 중심의 정치에 대해 크게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지방세력이 중앙정부에 자칫 문제가 발생하면 당장이라도 반기를 들어 이탈해 나갈 것임을 예고해 준
사건이었다. 지방세력에게 쌓인 불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얼마 뒤인 828년(흥덕왕 3) 당에서 군사적으로 성공한 장보고가 귀국, 흥덕왕을 배알하여 1만 명의 병력 모집권을 허락
받았다.
그를 군사적 기반으로 청해에 군진을 설치하고 바로 최고 책임자인 대사大使로 임명되었다.
이는 지방민이 오를 수 없는 자리로서 신라 사회가 정상적이었다면 도저히 있기 힘든 일이었다.
중앙정치는 파탄으로 치닫는 반면 지방세력이 크게 성장해 가던 양상을 반영한다.
836년 흥덕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왕위를 둘러싸고 귀족간의 정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지배체제가 밑바탕에서부터 무너져 내리는 현상으로서 천년왕조 신라의 멸망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예고해 주고 있었다.
치열하게 전개되던 왕위 쟁탈전은 문성왕文聖王이 즉위하면서 일단 정리된 듯 하였다.
분립된 상태에서 기회를 노리던 유력한 귀족들 사이에 일정한 타협이 이루어진 듯하다.
그런 분위기를 배경으로 해서 861년 즉위한 경문왕景文王은 내부체제 정비를 도모하였다.
국학國學 교육에 관심을 쏟는 한편 오래도록 배제되어 왔던 황룡사에 행차하고 거기에 있던 구층목탑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왕궁의 중수에도 상당한 힘을 쏟았다.
이는 실추된 국왕의 권위를 회복해 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미 깨어진 그릇이 완벽하게 복원될 수 없는 것처럼 근본에서부터 무너져 내리는 신라왕조의 옛 영광을 되돌리
기에는 너무 늦었다.
지방민의 이탈이 가시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889년(진성여왕 3) 지방을 대상으로 한 세금 수취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농민봉기의 횃불이 타올랐다.
사벌주에서 일어난 원종과 애노의 반란사건을 시발로 양길, 견훤, 궁예가 잇달아 거병하자 중앙정부는 속수무책의
상태에 빠졌다.
이윽고 분산적이었던 여러 정치세력이 결집함으로써 삼국 재흥을 내건 후백제, 후고구려가 건국되었다.
후삼국이 정립되자 신라왕조는 멸망의 시점만 남겨 둔 상태였다.
한동안의 쟁패를 거쳐 경순왕이 935년 유력 우세한 고려의 왕건에 투항함으로써 천년왕조 신라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쇠망의 요인
흔히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 하였듯이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는 언젠가 소멸하게 되어 있음은 자연적 이치였다.
마찬가지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국가도 언젠가 소멸함은 역사가 증명해주는 필연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때 당나라가 자신들에 못지않다고 간주하고서 군자국君子國이라 높여 불러줄 정도의 문화적 번성을
누린 천년왕조 신라도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하필이면 통일을 이룬 뒤 250년 쯤 지난 10세기 초라는 특정 시점에 무너지게 된 데에는 나름의 어떤 요인이
깊숙이 작용하였을 터이다.
신라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듯이 오랜 기간에 걸친 모순이 누적된 결과 멸망하기에 이른 것으로 여겨진다.
그처럼 켜켜이 쌓여간 모순의 실체를 한 마디로 잘라서 말하기는 곤란한 노릇이다.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이 무너지기에 이른 데에는 대개 그러하듯이 단일한 요인이 아니라 여러 가지 개별 요소가 복합
적으로 작용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라사의 전개 과정을 통해 잠시 그럴 만한 몇몇 두드러진 요인을 추출해낼 수가 있다.
먼저 신라가 한 번도 왕도를 옮긴 경험이 없었다는 사실은 멸망과 관련하여 특별히 주목해 보아야 할 대목이다.
천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신라 사회가 안고 있는 근본적 문제점을 해소할 기회를 제대로 갖지 못하였음을 뜻하는 사실이다.
왕도란 한 나라의 정치는 물론이고 경제와 문화 등이 모여드는 중심지이다.
그래서 도시의 급속한 성장과 발달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이 파생될 소지가 큰 곳이기도 하다. 그
런 문제점들을 일거에 해소, 혹은 약화시키기 위한 방편으로서 천도라는 수단이 종종 활용되기도 하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천도는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위협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내부적 필요성에 의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신라처럼 대단히 장기간 존속한 왕조가 단 한 차례의 천도 경험이 없다는 사실은 세계사적으로 매우 희소한 사례로
여겨진다.
5세기 말 고구려의 공격에 대비하여 왕궁을 왕도 내에서 옮긴 적은 있었어도 천도하지는 않았다.
689년에는 통일 정책의 최종적 마무리 작업으로서 인근 달구벌達句伐로의 천도를 기도하였다.
이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자체는 경주분지만으로는 무엇인가 한계나 모순을 노정하고 있는 데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더 이상 천도를 도모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내부적 모순이 중층적으로 누적되었음에도 그를 근본적으로 해소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음을 뜻한다.
신라 사회는 한층 더 보수화하는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경향을 뚜렷하게 보이는 대상으로서 특이한 신분제의 운영을 손꼽을 수가 있다.
신라는 국왕을 정점으로 한 집권적 지배체제가 갖추어져 가던 6세기 초부터 골품제라는 독특한 신분제를 마련하였다.
골품제의 운영상에서 드러나는 가장 주된 특징은 왕경인만을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지방민은 그 구조로부터 배제된 이른바 골품외적 존재였다. 신라 사회를 한마디로 왕경지배자공동체라 부르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관료조직상 개인의 정치적 위상을 나타내는 관등제를 경위제와 외위제로 2원화시켜 운용한 것은 그런 실상을 뚜렷이
보여 준다.
경위 소지자만 중앙관직의 부여 대상으로 설정한 골품제 아래에서의 지방민이란 정치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소외되고
차별받는 존재였다.
6세기 중엽 이후 삼국 간 전선이 크게 확대되는 과정에서 지방민의 동원이 절실히 필요해졌고 그에 따라 그들의 적극적
참전을 이끌어내기 위해 7세기에 들어서는 군공 포상의 용도로서 외위 대신 경위를 지급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로써 지방민은 부분적이나마 경위를 소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통일전쟁이 거의 마무리되던 673년에 백제 출신의 유력자들을 회유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그들에게도 경위가
일괄 지급되었다.
이를 계기로 이듬해인 674년에는 한정적으로만 운용되던 지방민 대상의 경위 지급을 전체 외위소지자에게 확대 실시
하였다.
이로써 외위는 완전히 소멸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지방민이 외위 대신 경위를 소지하더라도 모든 중앙관직이 그들에게 완전히 개방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지방민은 여전히 왕경인과의 차별이란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고구려나 백제의 유민과 마찬가지로 지방민도 아무런 차별을 받지 않는 존재였던 듯하지만 골품제가 그대로 운용되는한 그것이 근본적으로 해소되기는 어려웠다.
왕경 천도가 실패한 배경에는 골품제를 유지해가려는 기득권층의 반발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 결과 신라 지배층은 보수성을 더욱 강하게 유지하고 그를 지켜내기 위해 결속하였다.
통일 이후 신라 문화가 절정기로 치달아가면서 경제력이 왕경에 집중되는 정도는 점점 더 높아져 갔다.
509년(지증왕 10) 동시東市가 두어진 이래 하나밖에 없던 시장이 통일 직후인 695년(효소왕 4)에 이르러서 서시西市와
함께 남시南市까지 설치된 것은 지방의 물산이 왕경으로 모여든 상황을 잘 반영해 준다.
그 결과 왕실을 비롯한 귀족들은 점점 호화사치의 극치를 달렸다. 『당서』에서 8세기 신라 최전성기 사정의 일면을
전하듯이 유력 귀족들은 노동을 3천명이나 보유하였다.
그들이 4절유택四節遊宅과 35금입택金入宅이란 호화로운 별장과 대저택을 보유하였다는 기록도 그런 실상을 증명하기에
충분한 실례들이다.
당시의 전반적 사정으로 미루어 액면대로 실시되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지만 834년(흥덕왕 9) 신분에 따라 내려진 색복
色服, 거기車騎, 기용器用, 옥사屋舍 등 생활과 직결된 여러 가지 금제禁制는 그 정도가 위험 수위를 넘어선 데서 나온
부득이한 조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왕경 거주 지배귀족들이 누렸던 호화사치에 소요되는 경비는 당연히 지방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는 지방민 대상의 착취구조가 한층 심화되고 있었음을 뜻하는 사실이다.
중앙 정치력이 해이해져 가는 데 반비례하여 지방민 대상의 착취 정도는 더욱 깊어지고 구조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지방민에 대한 차별화의 밑바탕에는 과거 고구려, 백제라는 피복속민의 차별도 강하게 존재하였음을 의미한다.
중앙정부가 균열의 틈을 보이면 그들의 이탈은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다.
9세기 전반의 김헌창이나 장보고의 난은 그를 암시하는 사건이었다.
삼국통일이 성공한 이후에도 엄연히 존재한 지방, 지방민에 대한 차별적 인식과 시책은 통일전쟁의 주도세력이 추구해
오던 왕도정치의 이상을 제대로 꽃피우지못하게 함으로써 신라를 멸망의 길로 이끈 결정적 요소로 기능하였다.
통일 이후 천도가 추진되면서 일시적이나마 신라 사회에 내재한 본질적 모순이 근본적으로 해소될 기회를 맞았지만
그것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신라 패망의 결정적 요인으로 돌아왔다.
신라 말기 지방세력의 분립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뒷받침해 준 것은 유교가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그동안 정교 분리의 입장에서 정치적으로 배제된 불교 속에서 새로운 이상을 추구하려 한 선종이었다.
지방의 반발과 선종의 결합으로 신라 사회는 바탕으로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주보돈)
참 고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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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식, 1984, 『한국고대사의 신연구』, 일조각.
이영호, 2014, 『신라 중대의 정치와 권력구조』, 지식산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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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돈 외, 1992, 『한국사회발전사론』, 일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