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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역사

풍류(6)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2.08.17|조회수166 목록 댓글 0

2. 천국과 신시

 

1). 환국과 천국

 

 <환단고기; 삼성기 상편>은 "우리 환(桓)의 건국은 가장 오랜 옛날이었다(吾桓建國 最古)"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지금까지 발굴된 고대유적 중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이라고 말해지는 수메르

문명을 <한단고기>가 환국의 제후국 중의 하나인 '수밀이국(須密爾國)'으로 기록하고 있는 점

으로 보아, 이 기록은 신빙성이 아주 높다. 어떤 사람들은 수밀이국과 수메르를 연관시키는 것이

아전인수격인 해석이라고 반박하는데, 이 문제는 중요한 문제이니 본론을 잠시 미루고라도

확정을 짓고 넘어가도록 하자.

 

 <삼성밀기(三聖密記)>에서 [파나류산(波奈留山)밑에 환인씨의 나라가 있나니 천해(天海) 동쪽의

땅을 역시 파나류국이라 한다. 그 땅의 넓이는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이다. 통털어 말하면 환국

이요, 갈라서 말하면 곧 비리국 . 양운국 . 구막한국 . 구다천국 . 일군국 . 우루국(또는 필나국) .

객현환국 . 구모액국 . 매구여국(또는 직구다국) . 사납아국 . 선비이국(또는 시위국 . 통고사국

라 함) . 수밀이국이니 합쳐서 12국이라. 천해는 지금은 북해라 한다.

 

三聖密記云 波奈留山之下 有桓因氏之國 天海印之地 亦稱波奈留國也. 其地廣南北五萬里 東西二

餘里 總言桓國 分言則 卑離國 養雲國 寇莫汗國 勾茶川國 一群國 虞婁國(一云 畢那國) 客賢汗

勾牟額國 賣勾餘國(一云 稷臼多國). 斯納阿國. 鮮卑爾國(一云 豕韋國. 一云 通古斯國). 須密

爾國 合十二國是也 天海今曰北海 .

 

 박용숙 선생은 <태백일사 . 환국본기 제2>에 나오는 열두 나라(다른 이름이거나 다른 나라로

대치된 이름으로 보이는 나라 이름까지 합하면 열여섯나라) 중에서 여섯 나라를 밝혀내고 있다.

 

 [비리국]은 오늘의 터어키의 중서부에 있는 프리기아(Phrygia) 로서 피리(笛)의 본고장이라고

한다. 
 

 [우루국]은 수메르 유적지 중의 하나인 우르(Ur)이고, [선비국]은 우리쪽 역사책에 자주 등장하는

선비족의 나라이다.

 

 [통고사국]은 퉁구스족으로 그 종족이 아직도 카스피해 연안에 살고 있으며, [필나국]은 오늘날

그리스의 동쪽에 있는 고대도시 펠라(Pella)라고 한다. 
 

이 나라들의 분포된 지역이 바로 천해(天海) 또는 북해(北海)의 동쪽인데, 북해는 흑수(黑水),

북명(北冥), 곤지(坤池)등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흑해(黑海)라고 하며, 흑해 주변에서 위

유적들이 포함되는 지역의 크기가 동서 2만리 . 남북 5만리 정도가 된다는 것이다.

 김상일 선생도 수메르와 우리겨레의 관련성을 여러 가지 근거를 제시하며 역설하고 있다. 그

중요한 것만 소개해 보자.

 

① 수메르인의 언어가 교착어이고, 고산족이다. 그들이 고산족인 증거는 수메르의 신들이 항상

    높은 산위에 내리고, 평야에 내려와서는 지구랏이라는 인조산을 쌓아 신들을 예배하면서

    [하느님의 산] 또는 [하늘의 언덕]이라고 불렀다.
② 최남선 선생은 세계의 지붕인 파미르 고원에서 몽고계 인종이 퍼져나갔다고 하는데, 이정기

    씨는 그 중에서 한갈래가 수메르 인종이라고 주장한다.
③ 몽고계 안에 있는 산악들의 이름에는 [박(白)]이 들어가는 것이 많다. 최남선 선생은 이를

    [불함문화]라고 불렀는데, 이 불함문화와 수메르 문화가 유사점이 많다.
④ 수메르인이 B. C. 3500년경에 티그리스 .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내려왔을 때, 이미 그들의

    고유한 문자인 설형문자를 가지고 왔다. 이 설형문자가 복희가 창제했다는 설형문자와 너무나

    유사하다. 그런데 복희는 물론, 중국 한자의 기원이 된 은대의 갑골문자를 만든 은나라 종족이

    동이족임은 임혜상 같은 중국학자들이 고고학적으로 입증하고 있는 사실이다.
⑤ 중국 한자음보다 우리 한글음이 더 오래되고 고유한 것임은 수메르어와 중국어, 수메르어와

    한국어를 비교해보면 쉽게 밝혀진다. 수메르어는 기원 전후하여 사라져 버렸지만, 셈어 .

    아랍어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아직까지 우리 한국어에서 그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보호되고 있다.
⑥ 그 실례로는 구지(仇知; Gush, Cush; 구리, 금), 숨(Sum; 수메르, 속말리; 聖水), 우르(아루,

    아리; 신, 어른, 알), 안(An; '한', 天神), 딩그르(dingir; 신, 단군), 키(ki; 地神, 氣, 여기. 저기.

    거기) 등이다.
⑦ 문정창(文定昌)은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가 동방계열의 이족(夷族)의 최초 군장(君長)이었고,

    혈연적 . 문화적으로 우리 한겨레의 직계라고 한다(가락국왕 김수로가 소호의 후예라고 한다.

    소호씨의 본고장은 남만주의 봉천. 요동반도 지방이었는데 일찍이 산동반도 회대(淮代)지방에

    진출하여 중국사의 발전에 기여했다. 산동성 곡부에 도읍하고 있던 이 문명의 유적으로 보이는

    대문구문명(大汶口文明)이 산동반도에서 발견되었다. 그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5,785년 전으로

    보이는데, 태음력 . 농업 . 수산 . 목축 . 음악 등의 찬란한 문명을 이루고 있었다. 수메르 문명

    은 이 문명권이 서쪽으로 이동해 간 것이라고 한다.

 

이제 여기에 아래의 몇가지 내용을 보충해 보면, 수메르와 환국의 관련성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① 수메르인들이 메소포타미아에 문자체계와 집대성된 법률과 함께 이주해 왔다는 사실.
② 그들 자체의 문헌 속에서 자신들을 [검은머리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있고, 구환(九桓)의 종족

    들이 스스로를 구이(九夷) 또는 구려(九黎)로 불렀는데, 여기서의 [黎]가 바로 [검은머리]라는

    사실.
③ <산해경>의 [과보추일( 父追日)]이라는 전설에, 북해를 다스리는 신인 후토(后土)의 자손 과보

    가 해를 쫓아 서쪽으로 갔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 [과보( 父)]의 글자가 둘다 동이족과 관련된다.

    과보( 父)의 부(父)는 도끼를 나타내는 글자로서, 염제신농씨 족의 종족문양이었고, 소호금천씨

    가 염제신농의 근거지였던 산동지방에 도읍한 사실은 둘의 밀접한 관계를 암시한다. <산해경 .

    대황북경>에는 "과보와 치우는 함께 염제의 후예가 된다( 父與蚩尤同爲炎帝之裔)"라는 기록도

    있다 . [과( )]는 이(夷)의 다른 글자형인 대궁(大弓)을 세로로 붙여쓴 모습과 흡사할 뿐만

    아니라, 그 뜻에서도 [크다]는 뜻으로 같다. 특기할 사실은 한복바지를 [과(袴)]라 하는데, 이

    옷이 클라인 원통을 재단하여 만든 옷으로서, 옛부터 천황과 지황의 혼인예물로 쓰였던 옷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과보족은 분명히 동이족의 한 갈래요, 해를 따라 서쪽으로 갔으니 민족이동을

    상징한다.
④ 수메르어와 우리말 중에서 유사한 말이 길-기르(GIR; 道路), 밭-바드(BAD; 田), 님-니므(NIM;

    윗사람), 아빠-압바(AB-BA; 아버지), 엄마-움마(UM-MA; 엄마), 아비-아비(ABI; 나의 아버지),

    나-나(NA; 我), 너-네(NE; 汝), 그-게(GE; 그사람)등으로 거의 같다는 사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 수메르 문명의 모체인 환국이 모든 고대신화와 전설에 등장하는 천국이다.

[환(桓)]은 분명히 [하늘]의 뜻이며, 이 환국에서 모든 나라와 종교가 퍼져나갔으니 환국이 천국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문제는 이 환국이 오늘날의 우리들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점이지, 환국이

천국이라는 사실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환국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파미르 고원]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파미르]는

[해마리]와 고대음이 쉽게 통할수 있는 말이기도 하거니와, 지구상에서 전세계의 산맥들이 모여

드는 한 지점을 지도에서 찾아보면 파미르 고원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산맥을 따라 동쪽에 황하문명, 남쪽에 인더스문명, 서쪽에 메소포타미아문명이 자라났

으니 세계문명의 발상지로서의 조건이 충분할 뿐 아니라, 피라밋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는 네줄기

산맥이 동서남북의 네 방향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

동쪽으로 텐산(天山)산맥, 서쪽으로 힌두쿠시산맥, 남쪽으로 히말라야산맥이 있고, 북쪽으로는

우랄산맥이 있다. 이곳을 환국의 자리로 볼 경우에는 또 하나의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그것은

오늘날의 과학으로 간신히 항공촬영을 해서 만든 지도에서나 나타나는 지형을 고대에 이미 알았을

뿐 아니라, 그곳을 나타내는 삼위태백(세(三)곳이 가파른(危) 해마리(太白) 산)을 내려다 보았다는

말의 의미이다. 
 

 즉 삼위태백이 삼신산이요, 삼신산이 파미르고원이라면 그곳을 내려다 보기 위해서는 공중에 떠

있어야 한다는 뜻이 되므로, 지구문명의 외계유입설이나 고대에 지금보다 더 고도로 발전한 문명

있었다는 주장들이 옳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외계문명과의 교류가 실제로 일어날 경우에 진위여부를 가려야 할 사항으로서,

여기서 논의할 대상은 아닌 것 같다. 여기서 밝힐 사실은 고대에 환국이 분명히 있었으며, 그곳이

인류문명의 뿌리인 풍류의 발원지라는 사실이다. 그러면 지금부터는 이 환국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로 기록되고 있는 환웅의 배달국을 살펴보자.

 

2) 신시(神市)와 삼계(三界)

 

  ① 환국과 신시


 <삼국유사>에 "환인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에 신시(神市)를 열어 인사(人事)를 주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삼성기>에서는 "환웅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배달(倍達)이라 했다고 하였다.

기록을 합치면, 환웅이 열었다는 신시가 배달국이라는 뜻이된다. 
여러 기록은 환인과 환웅이 시대적으로는 선후관계에 있고, 지리적으로는 서로 다른 곳에 있었

음을 말해주고 있다. <삼국유사>도 환웅이 환인의 아들이라하여 선후관계를 밝히고 있고,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환국을) 떠났다고 하여 두 나라가 서로 다른 곳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먼저 환국과 배달국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고대의 문명형성과정을 반영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환국이 가장 먼저 형성되었는데, 이는 정치적 국가조직이 아니라 태양신을

모시던 종교조직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때에는 이유가 무엇이었던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정치조직이 성립될만한 여건이 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환국인들이 미개

수준에서 벗어난 최초의 종족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이전에 번성하던 문명이 멸망했기

문일 수도 있으며, 환국인이 지구밖의 외계에서 이주한 최초의 지적생물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 문제는 시간이나 전문가가 해결하기를 기다리기로 하자. 
 

 아무튼 다스릴 대상이 없고 싸울 상대도 없었으므로, 인구가 늘어나면 이웃의 좋은 땅을 골라

잡아 집단이주를 하면 되었을 것이다. <삼성기>의 한국에 대한 기록은 그때 이주하여 퍼져나간

사람들의 분포를 후대에 찾아보니 동서 2만리, 남북 5만리의 영역에 걸쳐 나라를 이루고 살고

있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그때 퍼져나간 사람들의 분포지가 주로 서남아시아에서 나타나는

것은 환국의 자리로 여겨지는 파미르 고원에서 동쪽은 험준한 산맥과 사막으로 막혀 있지만,

서쪽은 비교적 트여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이런 종교조직으로서의 환국은 처음에는 속세의 일에 간섭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간섭할 대상

없었거니와, 간섭할 이유도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환국의 말기에 이르러 환국에서 퍼져

나간 백성들이 온 땅을 뒤덮은 뒤에도, 환국의 중심세력은 세속과 단절된 곳에 성역을 만들어

폐쇄적으로 생활하면서, 비밀신전에서 수도생활과 연금술(기술개발)에 전념했을 것이다. 
 

 환웅에 이르러 환국의 기술수준이 도깨비{서자(庶子) . 지귀(地鬼); 기술자} 삼천명을 파견할

있을 정도로 발달하자 동쪽과 서쪽의 백성들을 통합할 능력이 된데다가, 기상이변 등의

이유로 조공을 받아야 할 필요성도 생겨 삼경(三京)을 두게 되었고, 이것이 삼한의 시초가

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환웅과 같은 시기에 "반고가 십간 . 십이지 신장을 이끌고 공공(共工), 유소

(有巢), 유묘(有苗), 유수(有燧)와 함께 삼위산(三危山)의 라림동굴(拉林洞窟)에 이르러 군주가

되니 이를 제견(諸 田犬)이라 하고 그를 반고가한(盤固可汗)이라 했다" 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반고'는 이미 밝힌대로 피라밋의 다른 이름이다. '제견'은 '제융(帝戎)'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제융(帝戎)은 서방 융족(戎族)의 신이다. 중국 고대지도에 견융(田犬 戎)으로 표현된 이들은 견이

(田犬 夷)라는 이름이 보여주듯이 동이족의 한 갈래이다. 
이 제융이 내려간 곳이 라림(拉林)동굴인데, '拉林'을 우리 발음으로 읽으면 '납림'이 되고, 이는

<성서>에 나오는 '네피림'을 연상시킨다. 또 견(田犬)은 피라밋의 모양(田)과 개(犬)를 합한 모습

인데, 신기하게도 영어의 신(GOD)은 개(DOG)를 뒤집어 놓은 단어이다. 
 

 이런 추리가 말이 된다면, 환웅은 동방 몽고족의 시조가 되고 반고는 서방 황인종의 시조가 되는

셈이다. 이렇게 볼 때 단군신화에서 단군의 출생과정에 대한 기록은, 배달국의 말기에 있었던

동방과 서방의 동이족들 끼리의 세력다툼에서 동방족이 승리하여 환국의 정통맥을 계승한 조선국

을 세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렇게 보는 근거는 곰족(동방족)과 범족(서방족) 중에서 곰족이 정통을 계승한 것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결국 최초의 정치조직은 환웅과 반고의 두 집단으로 나타나며, 그 중에서 동이족의

정통으로 기록된 것은 환웅의 신시인 것이다. 이 두 집단의 충돌을 이해하려면 서방으로 진출한

동이족들이, 서방역사에서 어떤 신들에 해당하는지를 먼저 밝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세상

에서는 이 반고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세계사의 핵심을 꿰뚫을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반고가 바로 <성경 . 창세기>에 등장하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잠시 후에

살펴보고, 먼저 환웅의 신시부터 간단히 살펴보자.

 

  ② 환웅의 신시


 환국이 정치의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에 종교만으로 세상을 다스리던 신전국가(神殿國家)였다면,

신시는 환국에서 창안된 지식과 기술을 이용하여 세상을 지배한 최초의 정치조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삼국유사>는 환웅이 환국을 떠나 속세에 내려온 사실을 '신시(神市)'라고 말한다. '신시'는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아래(太白山頂 神檀樹下)" 인 동시에, "환웅이 강세한 역사적 사실 전체"

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市'는 지금은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그 본래

뜻은 "경계 있는 곳으로 나아가다" 라는 뜻이다. 이 경계란 바로 환웅이 강세하던 시기에 환국의

백성들이 거주하던 씨족 부락들인 것이다. 
 

 아무튼 환웅이 세운 배달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 크게 나누면 백두산

설과 서남아시아 설 이다. 백두산 설은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데 안창범 선생의 경우,

신선도(풍류도)의 발생유래를 백두산 산삼에서 찾고 있다. 서남아시아 설은 박용숙 선생이 대표

적인 학자로서, 여러 가지 역사문헌과 지명(地名)을 토대로 한국의 고대사와 소아시아와의 관계

를 밝히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둘 중에서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두

곳 모두가 우리 역사의 발원지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이 두

가지 학설들이 모두 간과하고 있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며, 그것은 바로 신시개천의 연대이다. 
 

 백두산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대문구문명을 비롯한 발해만 유역의 문화를 환국이나 신시로

보고, 서남아시아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수메르문명의 뒤를 잇는 지중해 연안지역의 유적이

우리 고대사의 흔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입장은 모두환웅의 신시개천 연대가 두

가지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안창범 선생의 지적대로 삼성기와 단군세기의 기록을 따르면, 초대 환웅과 단군왕검

사이에는 역년 1,565년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 박용숙 선생은 이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환웅의

신시개천과 단군의 조선건국을 같은 시기의 일로 보고 있다. 여기에서 고대사의 연결고리

하나가 끊어져 나간 것이다. 
 

 문정창 선생은 앞에 소개한 것과 같이, 동이족이 세운 소호금천씨의 후예가 서쪽으로 이동해

가서 수메르 문명을 세웠다고 주장했는데, 여기서도 이 두 문명과 환웅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제 글쓴이가 생각하는 두 문명의 관계를 제시해 본다면, 신시개천의

자리는 발해만 연안이요, 반고개천의 장소는 서남아시아라는 것이다.

 신시개천의 연대는 B.C. 3,898(2,333+1,565)년으로 대문구문명의 B.C. 3,800년경과 맞아떨어

지고, 이 시기는 B.C. 3,000년 이전의 수메르문명의 개창시기와 맞물린다. 수메르 문명의 가장

오래된 도시 '에리두'는 기원전 3,000년에서 5,000년에 이르는 유적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

'기슈'에서 발견된 점토판은 기원전 3,500년의 것이라고 하는데, 글자의 형태는 갑골문자와

같은 종류의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참고할 사실은 환인이 다스리던 환국의 영토가 서남아시아에도 여럿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에리두의 유적은 환국의 것으로, 기슈의 유적은 반고의 것으로 볼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수메르 문명은 소호금천씨의 후예들의 것일 수도 있지만, 반고의 후예들이 세웠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반고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③ 반고와 여호와


 앞에서 반고가 <성경>의 하느님이라고 말한 것은 하느님의 천지창조 과정을 근거로 말하는

것이다. <성경>의 천지창조 과정은 박용숙 선생이 밝힌 동이족의 천지창조 과정과 꼭 같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천지창조에 뒤이어 여호와의 인간창조가 나오는 사실만 보더라도 <성경>의

하느님은 틀림없이 반고이다. 
 

 여기서는 <창세기>의 천지창조 과정에 나타나는 동이족의 천지창조 원리를 대입하는 방법으로,

두 천지창조 과정이 같은 것임을 밝히기로 하겠다. 이 둘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가리키는 비유와

상징임이 밝혀진다면, 반고가 하느님이라는 사실은 저절로 밝혀지는 셈이다. 
 

 <성경>의 하느님은 먼저 천지를 창조한다. 그런데 이 "하느님이 창조한 천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논의가 되어있지 않다.   옛날부터 이 '천지'가 '우주'와 동일시되고 있을 뿐이고, 그것이

특별한 역사적 . 종교적 실체일 것이라는 가능성은 거의 고려된 적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천지는 동이족에게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즉 동이족에게서 하늘은 신들이 사는

성스러운 공간인 신전이고, 땅은 일반인이 사는 세속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동이족은 이 하늘과

땅을 인체(人體)를 닮도록 구조화 하였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하느님의 천지창조 행위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의미가 부여될 수도 있다. 그리고 <창세기>의 이어지는 부분은 그 사실을

확인해 준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黑暗)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神)은 수면위를 운행하시니라.

 

 여기서 유의할 사실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에 이미 땅이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창조한

천지는 시간과 공간도 아니고, 지구와 대기권도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런 것을 제외하고 천지라고

불리웠던 것은 동이족이 세운 나라밖에 없다.  그리고 그 사실을 증명해주는 말이 '수면(水面)'이다.

왜냐하면 이 수면이 바로 하도(河圖)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샤아머니즘 정치란 인간사회를 우주적 질서와 동일하게 만들려는 실천행위라고 할 수

있으며, 이때의 실천적 원리가 하도와 낙서이다. 따라서 정치의 시작은 먼저 우주의 뿌리(頭)에

해당하는 가람(伽藍)을 창설하는 일이다. 물론 이때의 가람은 하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모든 창세신화나 건국의 전설은 대체로 하도와 관계

가 있기 때문이다. (박용숙 한국의 시원사상)

 

 하도는 그 이름 자체가 '물그림'이다. 이 하도는 우주의 운행법도가 담겨있다. 이것을 "하느님의

신이 수면을 운행했다"고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이어지는 내용과 <창세기>의 내용은 놀랍도록

일치한다. 여기에 반고의 이름이 하도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창세기의 출발점이

어디인지는 자명해지는 것이다.

 

 하도의 출발은 삼극의 원리, 즉 변증법적 인식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먼저 뜻을

지닌 자(者), 즉 창조자가 나타난다. 이때의 창조자는 대체로 신화적인 왕손으로서, 그는 변증법적

원리를 터득한 자다. 그러므로 하도에는 맨 먼저 백지(白紙) 위에 단 한 점인 건(乾)이 생겨난다.

그러나 이때의 乾은 <일석삼극>의 원리에 따라 내용적으로는 삼극을 이루고 있다. 즉 창조자는

즉자(卽自) . 대자(對自) . 즉대자(卽對自)의 존재론적 구조를 요해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세기>의 빛은 곧 '乾(건)'이다. 乾은 괘상이 하늘인 동시에 빛이다. 그리고 괘의 형상이 세

개의 효(爻)로 되어 있어서 삼극합일의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이는 가운데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나눌수 있다는 뜻이 된다. 실제로 <창세기>에서는 빛과 어둠을 나누고 있다.

 그리고 이 '乾'이 바로 피라밋이다. 반고가 내려갔다는 삼위산이 아사달의 다른 이름이며,

그것이 태양신의 신전인 피라밋인 것이다. 이 피라밋은 삼층으로 되어있고, 윗층은 빛의 신인

햇님을 모시고, 아래층은 어둠의 신인 달님(땅님)을 모신다. 이제 천지창조는 두 번째 단계로

들어간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가운데 궁창(穹蒼)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이 부분은 신학자들과 과학자들을 무척 애먹이는 구절이다. 물을 쪼개어 그 사이에 하늘을

두었다는 뜻이니, 신학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그 의미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구절은 동이족의 입장에서는 아주 당연한 일을 말한 것이다. 여기서의 물은 하도가 상징하는

땅을 말한 것이다. 즉 여기에 등장하는 '물'은 'Water'가 아니라, 동이족들이 사해(四海)로 표현

했던 "사람들이 사는 세상"인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사람'도 창조과정의 이 단계까지는 동이족

을 가리킨다. 그 당시에는 오직 동이족만이 사람이라고 불리웠기 때문이다. 
 

 즉 하늘과 땅의 경계를 처음으로 정한 것이니, 신성한 곳을 골라 속세와 경계를 짓고 경계의

윗쪽을 하늘이라고 부르게 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동이족 '사람'들에게 하늘과 땅을 다스릴

직책을 부여한 것이 된다. 이런 풍습은 박용숙 선생의 다음 인용문에서 그 의미가 확정되는

셈이다.

 

 '우리는 이미 인체(人體)가 삼분화 됨을 말한바 있다. 즉 머리(頭) . 몸(體) . 팔다리(四肢)가

그것인데, 이때의 머리가 天(양성) . 몸이 地(음성) . 팔다리가 人(중성)이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원칙을 적용하자면 공간도 결국 천 . 지 . 인으로 삼분화 될 수밖에 없다.

세계의 모든 신화는 공통적으로, 산은 성스러운 곳으로서 신계(神界)이며, 넓은 평야는 사람이

사는 곳으로서 속계(俗界)가 되고, 바다나 강물은 신계와 속계를 갈라놓는 경계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궁창으로 둔 것은 두가지로 해석되고, 둘 다 뜻이 통한다. 그 하나는 신전과 속세의 경계가

되는 곳에 활모양의 물길, 즉 해자(垓字)를 팠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피라밋의 내부에 커다란

방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방은 신들과 사람들이 만날 공간으로 예비된 것이다. 그리고 창조는

계속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가라

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기에 좋았더라.'

 

 이 부분 또한 신학자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구절이다. 아무리 과학지식에 대항하여 창조론을 내세

우려 하여도, 태양빛이 없는 땅에서 식물이 자라고 꽃피고 열매까지 맺는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이족의 천지창조는 이 부분이 반드시 들어가게 된다. 동이족은 최초로 농경을 실시하고,

그 농경을 정치에 적용한 국가제도를 만들었으니, 그것이 바로 풍류의 씨뿌리기인 봉건제도이다.

 

 그러므로 고기(古記)에는 항상 나라를 건설하는 일을 밭을 갈고 우물을 판다고 하였다. 밭은 곧

윷놀이 판이며, 우물은 중심이다. 이를테면 밭은 사악(四嶽)이며 우물은 주산(主山) 즉,  뫼를

말한다. 따라서 밭갈고 우물을 판다 함은 곧 샤아먼가람(天界)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예를 들자면 <삼국유사 . 가락국기>에 처음 나라가 일어나는 풍경을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 먹었다"라고 쓰고 있다. 물론 이런 기록은 자주 보인다. 그러나 이 말이 하나의 비유라는

사실로 가령 <제왕운기>에 조선에 대해서 "耕田鑿井禮義家(경전착정예의가)"라고 쓴 문장이

나온다. 즉 밭갈고 우물파는 예의의 나라라는 뜻인데, 이때의 밭갈고 우물판다가 비유로 해석

되지 않고서는 그 장의 진정한 의미는 결코 알수 없게된다. 즉 예의의 나라라는 것은 곧 가람

(伽藍)의 나라라는 뜻이되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신전을 건설하게 되면, 그 신전에 복역할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거주할 수 있도록 농경지를 확보하게 된다. 따라서 물 중에서 뭍이 드러

나게 한 것은, 농경지를 확보하기 위해 주변의 주민들을 강제이주 시킨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땅에 밭을 만들고, 그 밭을 경작할 종족들을 지정해 주고 그 종족들에게 농작물로 이름을 지어

준다. 이것이 <창세기>의 풀과 나무이다. 그리고 그 풀과 나무가 나라와 종족을 나타냄은 다음

인용문을 통해 알수 있다.

 

 우주목은 천계(天界)의 중심봉(中心棒)이다. 그 중심봉이 있으므로 해서 천계는 회전운동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때의 회전운동은 물론 인재(龍)를 간지법(干支法)에 따라 지상에 파견

내지는 이동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천계의 중심봉은 샤아먼신(三皇)의 지팡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창세신화에 창조주가 지팡이로 바다를 휘젓는다는 것도 그런 뜻으로 쓰이는 비유이다. ......

그런데 이때의 중심봉이 한그루의 나무로 비유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곧 나무가

삼극(三極)의 원리, 이른바 삼분법으로 비유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즉, 뿌리가 天, 줄기가 人

(중성), 가지 . 잎사귀가 地로 비유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그루의 나무가 천계의 중심에

자라나서 온 대지(大地)를 뒤덮는다는 것은, 곧 샤아머니즘의 신정(神政) 정치가 천체(天體)의

법칙대로 인간사회에 적용되는 을 뜻하는 것이다. 창조의 그 다음날은 다시 하늘로 되돌아

와서 해와 달과 별들을 짓는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하여 징조와

사시(四時)와 일자와 연한(年限)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창궁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창궁에 두어 땅에 비취게

하시며 주야를 주관하게 하시며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

 

 여기에 등장하는 해와 달과 별이 지구의 밖에 있는 태양(sun)과 달(moon)과 별(star)이 아님은

구절 자체가 증명한다. 즉 궁창에 있는 광명(光明)이 주야와 일자와 사시와 연한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두 큰 광명을 만들어 밤과 낮을 주관하게 한다. 따라서 이 두 광명도

천체(天體)는 아니다. 이 광명의 정체는 신관(神官)들이다. 즉 역법(曆法)을 관장하는 신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역법은 단순한 천체의 운행 법칙이 아니라, 신전(하늘)에 속한 모든 신들의 출입

진퇴 까지도 규율하는 간지법인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이 <창세기>가 신전의 창설을 기록한

것이라는 직접적인 증거가 된다. 
 

 <창세기>가 신전의 창설에 대한 기록이라는 사실은 이어지는 천지창조의 기록이 계속하여 보여

주고 있다. 다섯째 날에는 물고기와 새와 짐승을 만들었는데, 이날 창조된 피조물들은 동물이

아니라 백성들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니라.'

 

 그렇다면 (성년식을 치르는) 당(堂)집의 기둥은 곧 대지가 되고, 당집의 지붕이 하늘을 뜻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 깃들게 되는 신(神)이 곧 중성이 될 것이다. 이와같은 풍경을 좀더 구체적

으로 기술하자면, 우리는 필연코 동물도상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동물도상(動物

圖象)에 있어서 네 발로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동물은 원칙적으로 대지를, 그리고 날개를 가지고

날아 다니는 조류(鳥類)를 하늘로, 그리고 두가지 기능을 다 갖춘 어류(魚類)를 중성으로 추정

한다. 즉 조류가 원(圓)을, 獸(수)가 방(方)을, 어류가 각(角)을 각각 표상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와같은 법칙은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구분을 다시

세분화 시킴으로써 매우 복잡미묘한 도상(圖象)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산해경> 삽도(揷圖)는

모두 144종의 동물도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곧 샤아머니즘의 도상언어(圖象言語)가 된다는

것은 물론이다.

 

 박용숙 선생의 설명을 참고할 때,  여기서 창조된 것이 나라와 백성들이란 말의 의미를 이제는

알수 있을 것이다. 즉 하느님은 모든 정복된 지역의 주민들에게 짐승의 이름을 딴 종족의 표지를

부여한 것이다. 그들에게 직접 이름을 지어준 것은 뒤에 등장하는 사람이다. 아무튼 이렇게하여

반고는 파미르 고원 서쪽의 지배권을 완벽하게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작업이 끝나고 난 다음에 여호와 하느님의 일이 시작된다. 여호와 하느님은 바로 태호복희의

아내인 여와이다. 그러면 반고는 태호복희인가? 그렇다. 고대에는 신통을 이어 독립하면 그

아버지나 어머니의 칭호를 그대로 쓰는 풍속이 있었다. 이런 현상은 신의 칭호가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라는 사실을 알면 쉽게 이해된다. 아버지의 아들이 자라서 아들을 낳으면

아버지로 불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반고와 여호와는 그 부모의 칭호를 그대로 물려

받아 복희(하느님)와 여와(땅님)가 된 것이다. 
 

 아무튼 반고의 작업이 끝나고 여호와의 작업이 시작되는 이유는, 하늘의 지배권은 반고에게

있었지만 땅의 지배권은 그 아내인 여호와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지배권은 풍류의

다른 이름인 '태교(胎敎)'를 통해 행사된다. 그래서 여호와 하느님의 첫 번째 작업이 '아이낳기'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生氣)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된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있더라. ......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의 각종 나무

의 실과(實果)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논의가 길어졌으니 이 부분은 단도직입적으로 풀이하자. 우선 여기서 비를 내리지 않았다는

것은 하느님의 씨를 뿌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직계혈손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 다음에

흙으로 사람을 빚었다는 것은 지계에서 사람을 선발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에게 신전의 예절을 가르친 것이 사람의 모양을 빚은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에게는

하느님의 영혼에 해당하는 초월적 정신이 없다. 여호와 하느님은 그에게 호흡법을 가르쳐 영생

뜻을 알게 한다. 이것이 코를 통해 숨을 불어넣었다는 말의 본뜻이다. 
그런 다음 태자궁(太子宮)인 동궁(東宮)을 건설하여 그곳에서 공부하게 한다. 이것이 에덴동산

정체이다. 생명나무와 선악(지혜)나무는 그를 가르치기 위한 두 곳의 부속신전이다. 아담은

그곳에서 영생의 능력을 얻은 다음에 지혜를 배우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동이의 지식을 배워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동이의 지식이란 바로 '각술(角術)'이다.  이는 음양비례인 황금률을 뜻하므로 성(性)도 여기에

포함된다. 통일교에서 성(性)이 인간타락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확실히 근거가 있는 말인

것이다. 그러나 선악과는 씹의 뜻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의미는

앞 부분에 여러번 반복된 말 속에서 찾아진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지으신 것들을 보시니

모두가 보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이다. 
 

 이 말은 오직 초월의 상태, 불교식으로 말하면 견성(見性)의 상태에서 자연을 볼 때 나오는 말

이다. 여기에는 시비선악의 분별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천지창조 과정에 반영된 황금율의 비례

가 왜곡되지 않고 그대로 느껴진다. 그러니 존재하는 모든 것이 존재 그 자체로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상태는 지식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 즉시 깨어진다. 기억이라는 것이

생성되는 순간, 영생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을 얻은 신들은 시비선악을 가리는 존재

가 아니라 끝없는 사랑의 화신으로 묘사된다. 기독교에서 그 대표적인 예를 찾으라면 예수 그리

스도가 된다. 
 

 이것 말고도 이 인용문에는 한가지 비밀이 더 있으니, 그것은 태자와 관련된다. 남자를 선발한

다음에는 여자를 선발한다. 아담의 태자궁이 다스리기로 되어있는 나라에서 여자를 선발한

것을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 말이 믿기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와 꼭같은 표현이 삼국유사에도 나온다. 박혁거세의 아내인 '알영(閼英)부인'이 계룡의 왼쪽

겨드랑이 밑에서 나온 것이 그것이다. 아무튼 이 여자, 이브(Eve)는 히브리 민족을 통해 서양의

여자들에게 엄청난 시련을 안겨주는 사건을 저지른다.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인

것이다.

 

 '여호와 하느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대 하나님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맑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

더라.'

 

 아담의 나라에도 여러 토템종족이 있었고, 그들은 반고의 위세에 굴복하여 천국의 백성으로

복종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 뱀을 토템으로 삼은 종족의 추장이 이브를 유혹하여, 호흡공부 보다는

지식공부가 더 실속이 있다고 꼬드긴다. 그 지식이 동이인에게만 허용된 '인도(人道)' 이다. 즉

음양묘합의 진리인 것이다. 그것이 음양묘합의 진리였기 때문에, 거기에는 통일교의 해석처럼

씹이 포함된다. 그러나 하느님이 사람들이 씹하는 것까지 시시콜콜하게 따질 리가 없으며, 씹 좀

한다고 해서 세상이 뒤집어질 리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금지한 것은 앞에서 말한바와 같은 지식의 습득임이 확실하다. 그러나 여기에

씹이 개입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즉 통일교의 해석은 그 절반이었던 것이다. 그 나머지 절반은

동이의 씨뿌리기와 관계된다. 아담과 이브가 했던 씹은 한가지 절차를 생략한 씹이었던 것이다.

그 씹은 하느님과의 씹이다.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 장의 주제로서 상세히 다루어진다. 아무튼

동이족의 통치제도는 천자는 반드시 하느님의 아들이어야 한다는 제한이 있는데, 이브는 하느님

과 씹하기 전에 뱀족의 추장과 씹하고, 다시 그 남편과 씹하므로써 하느님의 씨가 아닌 다른 씨

를 받게 되었던 이다. "독사의 자식들" 이란 질책은 여기서 비롯된다.
 

그런 다음 아담과 이브가 맨 먼저 한 일은 치마를 만들어 입은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이 동이족의

씨뿌리기와 깊이 관련된다.  왜냐하면 동이족의 문화 중에서 가장 비중이 큰 것은 '옷'이기 때문

이다. 그래서 한자문화권에서는 '의(衣) . 식(食) . 주(住)'라고 하여, 먹는 것 보다 입는 것을 앞

세우는 것이다. 그러면 옷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그것은 이 옷이 보통 옷이 아니라 조복(朝服),

즉 조선옷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옷이 뭐 그리 중요한 옷이냐고 비웃을 독자도 있겠지만, 이 조선

옷이야말로 고대에 천자만이 입을 수 있는 옷이었던 것이다.

 

 <진서(晋書) . 사이전(四夷傳) . 동이숙신씨조(東夷肅愼氏條)>에 "그곳에 낙상이라는 나무가

있다. 중국에서 만일 성제(聖帝)가 서서 임금이 되는 일이 있으면 그 나무 껍질을 벗겨 옷을 해

입는다(有樹明 常 若中國有聖帝代位 則其木生皮可衣)"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의 '숙신'이

바로 조선이요, '낙상( 常)'은 <한단고기>에 나오는 '웅상(雄常)'으로서 성황목이다. 
 

 즉 중국의 천자라야 성황목에 걸어놓은 천(베)을 걷어 만든 옷을 입을 수 있었다는 말이 된다.

우리네 마을 입구에 있는 성황목은 그렇게 위대한 나무인 것이니, 성황목에 걸어놓은 물색(베폭)

걷어다가 한복바지를 지어 입으면 중국의 천자가 될 수 있었던 진짜 성황목(聖皇木)이었던

것이다. 
 

 이브는 여신전에 들어가 바로 이 옷을 만드는 법을 훔쳐 배운 것이다. 이는 결국 몰래 나라를

세웠다는 말과 같다. 하느님의 지시에 따라 하느님의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일개 추장의 말을

듣고, 하느님이 허락하지 않은 나라를 세운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 이유는 하느님의 씨를 받지

못했기 때문 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는 동이족의 입장에서는 용서할 수 없는 반역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담과 이브에게 하느님의 영토로부터 영구히 추방하는 징벌을 가한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 민족은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지 못하고, 다음의 인용문에서 보는바와 같이 서남아시아의

변두리를 떠돌아 다녔던 것이다.

 

 설형문자의 문서에 '히브리'(Hebrew)와 동일시 될 수 있는 '하비루'(Habiru)란 종족 이름이 B.C.

1,700 - B.C. 1,300년 사이에 끊임없이 나타난다. 이들 수메르 자료에 의하면, 히브리인들은

떠돌아 다니는 유목민이나 무법의 산적들로서 바빌론, 앗시리아, 힛티, 허리안 들에게 용병으로

팔려다니곤 했다. (김용옥, ' 여자란 무엇인가')

 

 한편 반고와 여호와가 건설한 하늘나라는 '바알'신앙으로 정착되게 된다. 이 '바알'은 말할 것도

없이 단군이다. 즉 하느님(日)과 땅님(月)을 합친 '밝'이 아담과 이브가 떠난 이후에 하느님의

씨를 받아 정식으로 나라를 세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가 동쪽으로 길을 잡은 환웅의 아들과

마찬가지로 '밝' 을 이름으로 삼은 것은, 고대에 동쪽과 서쪽의 하느님이 같은 분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히브리 민족의 계보를 좀 더 더듬어 보자.

 

 '바알'의 왕국에 편입되지 못하고 변두리로 떠돌던 히브리 민족은 그 유명한 바빌론의 유수를

거치는 동안 수메르 문화의 영향을 받아 문자와 언어를 익혔다고 한다. 그 히브리인들 중에서 후에

걸출한 종교가인 모세가 나타나 여호와를 유일신으로 모시는 신앙을 확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 후예 중에서 처음으로 동이족의 신전에 들어가 정식으로 졸업장을 받고 천자가 되기 위해

환속한 사람이 바로 예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만을 인정하는 동족들로부터 배척받아 나라를 세우지 못한 것이다. 그 사이의

사정은 뒤에 다른 부분과 관련되는 곳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창세기>의 비중을 고려하여 자세히

설명하다보니 본래의 주제에서 너무 멀리까지 벗어 났으니 말이다.

 

④ 탁록의 대전


 지금까지 설명된 환국과 배달국 및 서방의 '바알국'의 후예들이 동양 상고사에 등장하는 치우

(환국) . 염제(환웅) . 황제(반고)들이며, 그들은 환국의 주도권을 놓고 동이 역사의 한 분수령을

이루는 초유의 세계대전을 벌이게 된다. 
 

 상고사는 이 전쟁을 탁록대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 싸움의 무대가 '탁록'이기 때문이다. 이

'탁록'에 대해 임승국 선생은 "하북성 탁록현에 있다"고 말하는데, 글쓴이의 생각에는 이 장소가

'타클라마칸(Takla Makan) 사막'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치우가 환국의 정통맥임은 <삼성기>에 "탁록( 鹿)의 북쪽에 대효가 있었고, 동쪽에

창힐이 있었으며, 서쪽에 황제헌원이 있었다 ...... 처음 황제헌원은 치우보다 일어남이 조금 늦

더니, 싸움마다 이로움이 없자 대효에 의존코자 했으나 이룰수 없었고, 또 창힐에게 의존코자

했으나 그것도 뜻대로 안되었으니, 두 나라가 모두 치우의 무리였기 때문이다." 라는 구절을

근거로 추정한 것이다. 이 구절을 그림으로 나타내어 보자.

 

 

 

 이 그림은 피라밋의 사신도에다가 여기에 등장하는 네사람을 배치해 본 것이다. 치우가 환국의

정통맥임은, 치우가 있는 곳인 탁록을 중심으로 다른 세력들의 자리가 설명되고 있는 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중앙은 본래 태양신의 자리이다. 남방이 비어 있는데, 이는 남방이 태양의 활동영역

으로서, 태양신의 직할영지임을 의미한다. 결국 치우가 태양신 환인의 정통 후계자가 된다.

 창힐은 문신(文臣), 헌원은 무신(武臣)이 된다. 이 전통은 동양의 조정에서 문관이 동쪽에, 무관이

서쪽에 서는 형식으로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남아 있었다. 결국 치우가 있던 탁록이 세계의

중심인 환국의 중심신전이 있었던 곳이 된다. 그렇다면 탁록의 주변에 동이족의 성지가 모여

있어야 한다. 실제로 타클라마칸 사막 부근의 지명은 동이족의 성지를 나타내는 이름으로 뒤덮여

있다. 다음 지도는 지금의 이름을 중심으로 그 부근의 지명을 살펴본 것이다.

 

 

 

 탁록을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볼 경우, 북쪽은 트루판 분지요 동쪽은 돈황으로서, 모두 우리

고대사와 관계가 깊다. 이 주변은 트루판 분지 . 곤륜산맥 . 천산산맥 . 티벳고원 . 쿠차(구지) .

돈황 등 고대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름의 지명으로 둘러싸여 있다. 
 

 먼저 트루판 분지는 '트루'가 '셋'을 뜻하므로, 우리말로 바꾸면 지금도 쓰이는 '삼세판'이란

말과 연결된다. 이 삼세판은 '삼(sam)'이 아이낳는 우물(샘)이라는 사실을 이미 설명했고, '판'은

'한'으로 변하기 쉬우니 곧 '삼한' 중에서도 '삼신할머니' 란 말로 이해된다. 여기서는 대효가

북쪽에 있다고 했으니, 대효가 탁록의 북쪽 트루판에 있었던 곤(坤)의 자리인 우물신전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민족사학자들은 이 트루판을 고구려의 첫 도읍인 졸본(卒本)으로 보기도 한다.
 

 동쪽에는 '돈황(敦煌)'이 있는데, 이는 '단황(旦皇 또는 檀皇)' 과 쉽게 연결될 수 있는 말이다.

동쪽은 곧 동궁(東宮)의 자리로서 태자궁이니,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천자가 되기위한

수업을 받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으로 문자를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창힐이 관장하고

있었다고 한 것이다. 
 

 남쪽은 '티벳고원'이니, 이는 '태백산'과 너무나 쉽게 연결된다. 태백산은 환웅천왕이 처음

강세한 곳이며, 남쪽은 태양신의 직할지이니 태백산이 티벳고원일 가능성은 심각하게 연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산도 이 주변에 있으니, 으뜸가는 하얀 산

이란 뜻의 장백산(長白山) 또한 이곳일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지금도 티벳고원은 라마교의

통치강역이다.  '라마'는 '라'가 고대에 태양신(하느님)을 지칭하던 순우리말이고 '마'는 '靈(영)'

이니, 곧 태양신의 다른 이름이된다. 더구나 라마교는 제정일치사회를 아직도 유지하고 있고,

그 우두머리는'달라이 라마'라 부른다. 여기서 '달'이 [땅]과 [산]과 [들(野)] 모두의 고대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라마'가 바로 환웅이거나 단군일 가능성이 아주 높아진다. 
 

 쿠차는 여러 학자들이 가야국의 시조인 수로왕이 내려왔다는 구지봉(龜知峰)이라고 말하고 있다.

더욱이 중가리아 분지의 좌우로는 지도에 표시하지 못했지만, 알타이 산맥과 한가이 산맥이 뻗어

내리고 있다. 그리고 또 타클라마칸 사막은 비단길의 최대 고비로서, 북쪽은 천산산맥, 남쪽은

곤륜산맥이 둘러싸고 있다. 여기서 서쪽으로 파미르 고원만 넘으면 바로 서남아시아로 넘어가서,

'박달'로 옮겨도 문제삼을 수 없는 '바그다드'가 나온다.

 

 

 

 이 바그다드 부근에서 수메르 문명의 유적지가 발견되었음은 위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다. 
결국 탁록의 대전은 환국(배달국)의 종주권을 두고, 동변한인 동아시아의 모든 종족과 서변한

서아시아의 모든 종족들이 참가한 세계대전이었으며,지금도 아시아는 그때 부르던 '아사달'

이라는 이름 그대로 '아사(Asia)의 땅'으로 불리고 있다. 
 

 이 탁록의 대전에 참여한 신농이 [과보추일( 父追日)]의 고사에 나오는 '과보'가 아닌가 한다.

과보는 서쪽으로 태양을 따라가서 태양을 잡기는 하였으나, 그 열기를 이기지 못하여 북쪽으로

옮겨가던 도중에 지쳐서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이는 염제를 자칭하던 과보가 태양신(환인)의

정통을 이었음을 자부하던 황제를 정벌하였으나 그 휘하세력을 모두 평정하지 못하고 죽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과보가 죽은 자리에는 큰 산이 생겨났다고 하는데, 이는 그 후예들이 수메르

또는 바빌론이라는 나라를 건설했다는 뜻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문제는

따로있다. 
 

 염제를 자처하던 과보는 왜 황제를 정벌하였을까? 역사는 이긴자를 정의로운 자로 기술하는

관례를 볼 때, 반고의 후예인 치우가 동두철액의 갑옷투구를 개발하여 환국의 중심신전을 무력

으로 정복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환국의 정통맥인 황제는 치우에게 죽임을 당하고, 치우가

결국 스스로 황제의 위를 찬탈한 것이다. 후대의 역사는 치우가 황제의 위에 올랐으므로, <환단

고기>에서 보듯이 치우천황이란 이름을 썼고, 쫒겨난 황제의 후예가 신임 황제에게 저항한

사실을 치우의 반란으로 기술한 것이다. 
 

 이때 황제(환인의 정통맥)의 후예들로부터 지원요청을 받은 염제의 후예들이 반란을 진압하기

하여 대대적으로 출정 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위를 찬탈한 치우의 대군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두 세력이 연합하는 선에서 타협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동이역사의 주무대는

서남아시아로 옮겨간다. 
 

 이 시기에 대한 기록이 <태백일사>에는 [번한세가]에 기록되어 있다. <태백일사>의 마한과

진한에 대한 사적에는 전쟁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는데, 이는 고대 동아시아의 동이족 본고장은

평화로왔음을 반영한다. 즉 서남아시아로 이주하지 않고 남은 환웅의 후예들은 동아시아의 영토

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남아시아로 이주한 환웅의 후예들(과보의 무리)은 반고의 후예(치우의 무리)들과

국경을 맞대고 싸움을 그치지 않았으니, 그 역사가 번한세가에 반영된 것이다. 치우천왕의 탁록

대전, 요순의 전쟁과 구년홍수 및 우임금의 치수, 하와 은의 전쟁 등이 모두 번한세가에 나온다.

이 번한세가의 대권은 최종적으로 [해모수(解慕漱)]에게 넘어가고, 그때부터 지금 학계에서

우리 역사로 인정하는 부여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서 번한을 서남아시아라고 말했는데, 이 번한의 위치에 대해 참고할 사항이 진한의 위치

이다. 여러 역사기록들이 진한의 서쪽에 번한(변한)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번한의

동쪽에 있었을 진한을 멸망시킨 사람이 진시황이었다는 기록이 또한 <태백일사 . 마한세가>

에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는 진(秦)의 수도가 함양(咸陽; 지금의 陝西省 西安부근)임을 생각할 때, 번한의 위치가 티벳

고원보다 동 쪽이 될 수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다(위 지도의 서안 참조).  따라서 변한(번한)이

있었던 곳은 서남아시아, 즉 지금의 중동지역이 된다고   말 한 것이다.

 지금 우리 겨레의 고대사 중에서 다른 민족들과 관계되는 부분은, 대부분 번한세가의 기록들

이다. 따라서 번한세가는 고대세계에서 한겨레의 위상을 연구할 때 가장 귀중한 자료가 된다.

특히 우리 역사기록이 많은 수난을 당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더 커지는 것이다. 
 

 우리 겨레의 뿌리가 분명치 않은 이유도 이런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환웅의 본고장인 진한과

마한의 사적은 대부분 진시황에 의해 소각되었고, 후대에 조선의 유민들이 편찬한 국사(國史)들

(고구려의 국사 . 백제의 서기, 유집등)도 모두 실전되자, 일연이 참고할 수 있었던 자료는 선비

(鮮卑)의 후예인 위(魏)의 역사에서 따오게 되었고, 그 역사가 바로 변한의 유민들이 가지고 온

변한의 역사였기 때문에 우리민족의 역사가 불분명해진 것이다. 
 

 이제 환웅이 개천한 신시의 위치는 발해만이라고 말할 수 있고, 환웅이 바로 염제신농이라는

연결도 가능해졌다. 그리고 그 중의 주도적 세력이 서남아시아로 건너가서 우리의 직계조상으로

알려진 단군조선을 건설한 사실도 밝혀진 셈이다.

 

 

  ⑤ 단군신화의 실상


 탁록의 대전 후에 소아시아에 거주하고 있던 반고의 후예들은 과보족이 가져간 염제족(신시)의

발전한 문명에 자극받아, 그 제도를 배우려고 애썼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런 사정을 기록한 것이

단군의 탄생신화와 요순의 홍수설화일 것이다. 먼저 요순의 홍수설화부터 살펴보자. 
 

 요임금의 치세는 역사상 최고의 태평성대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과보족이 가져간 정치문화가

그만큼 뛰어났던 것을 상징한다. 요임금은 자신의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순임금에게

양위하였으며, 유교에서는 이것을 이상적인 정권계승으로 사모하고 있다. 
 

 그러나 <태백일사>는 "단군왕검은 제요도당과 나란히 군림했다. 요임금의 덕이 날로 쇠퇴하자

서로 땅을 다투는 일을 쉬지 않았다. 천왕은 마침내 우순에게 명하여 땅을 나누어 다스리도록

병력을 파견하여 주둔시키더니 함께 요임금의 당나라를 치도록 약속하니, 요임금이 마침내 힘이

딸려 순임금에게 의지하여 생명을 보전하고 나라를 양보하였다"라고 기록하여, 사정이 간단하지

않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 <태백일사>의 기록에 나오는 단군왕검의 계보는 상당히 복잡하다. 웅녀군의 후손으로서

단허에 책봉받아 왕검이 된 여(黎)라고 하는 사람의 나라에 비왕으로 책봉되었던 신인왕검이,

섭정한지 24년만에 웅씨왕이 전쟁중에 죽자 그 왕위를 대신하여, 구한을 통일하고 단군왕검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즉 '여(黎)왕검'의 비왕이 '신인왕검' 이었고, 그가 '여(黎)왕검'

의 왕위를 물려받아 단군왕검이 된 것이다. 이 과정은 순임금이 덕망으로 요임금의 섭정이 되었

다가 30년만에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기록과 신기하도록 비슷하다. 따라서 이 단군왕검은 순

임금일 가능성이 아주 큰 것이다. 순임금은 제위에 오른 후 구년홍수를 만났는데, 치수사업을

곤에게 맡겼으나 곤이 치수에 실패하자 곤을 죽이고, 그 아들 우에게 홍수를 다스리게하여 우가

성공하자 그에게 천하를 넘겨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순임금은 우임금의 부친인 곤을 목베인 일

로하여 한족(韓族)의 미움을 사서, 창오의 들판에서 순시 도중 살해되고, 그의 두 아내는 소상강

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단기고사>에 전한다. 결국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왕위를 넘겨준 과정

이 분명치 않은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순임금이 죽였다는 우임금의 부친 곤(鯤)이 북해의 물고기라는 김용옥 선생의

주장과, 그 곤을 곤모신이라고 해석했던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곤모신은 밤

하늘을 지배하는 지황으로서 웅씨녀와 같은 의미가 된다. 
 

 즉 염제신농의 후예가 바로 곤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정하고 싶지않은 역사의 진실을

만나게 된다. 요임금이 바로 곤이었고, 곤을 죽인 순임금은 요임금에게 양위를 받은 것이 아니라

요임금을 죽이거나 밀어내고 왕이 된 것이다. 그리고 순임금에게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우임금이

바로 요임금의 아들인 단주였고, 그 또한 순임금을 죽이고 왕이 된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요임금이 염제신농이요, 순임금이 황제헌원이라는 하신의 주장이 옳다는 결론이

된다. 이 경우 염제와 황제는 요임금과 순임금의 조상들이지만, 고대에는 조상의 이름을 세습

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하니 이점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비극적인 권력쟁탈 과정을 보다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 단군신화이다. 단군신화의 웅녀는

요임금이요, 환웅은 황제이다. 여기서 태호복희의 호가 황웅씨 또는 유웅씨라고 말한 것이 바로

순임금을 가리킨다. 순임금이 태호복희의 혈통으로 이해되었다는 뜻이다. 순임금이 황웅씨라

고도 불리웠다면 이는 단군신화의 환웅과 쉽게 결부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순임금의 두 황후가 실은 일웅일호(一熊一虎)임을 알 수 있고, 우임금인 단주가 황제족의

부족까지도 모두 복속시켜 조선을 세웠다는 사실도 알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단군이 순임금의 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다. 순임금에 의해 요임금의 영토가 정복

당했던 사실을 "요임금의 두 딸을 순임금이 왕비로 삼았다"고 기록했다는 뜻을 말한 것이다.
요임금의 두 딸이란 동쪽과 서쪽의 두 우물을 동시에 가리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곰과

호랑이가 상징으로 등장한 것이다. 곰은 검은머리 검은 눈의 온순한 짐승이요, 호랑이는 노랑

머리 파랑 눈의 거칠고 사나운 짐승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웅이 몸을 바꾸어 웅녀와 동침했

다는 것은, 순임금에게 요임금의 왕권이 일시 이양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반고족에 의해

한때 환웅족이 정복당했던 것이다. 동시에 단군은 이 두 세력이 연합한 시기에 신혼(神婚)에

의해 태어난 태자라고 할 것이다. 
 

 또 <태백일사>의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이 과정에는 동이의 최고조직인 환국도 관여했다고

보여지며, 그 환국까지도 이때 우임금에 의해 정복되어 조선으로 개창되면서 삼한(三韓)이 형성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유라시아 대륙 전체가 단군왕검인 우임금에 의해 완전히 통일

되면서, 조선이라는 전무후무한 세계국가가 생겨난 것이다. 
 

 동이의 고대사는 여기서 보듯이,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무대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대를 발해만 부근의 좁은 땅에다 억지로 끼워맞추려 하다보니, 고대사의 실상이 왜곡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발해만 연안에 있었던 신농씨의 나라는 지배계급들이 모두 빠져나간 후에 급속히 쇠퇴하여,

오랫동안 침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고대의 동이문화는 비인부전의 원칙을 철저히

지켰고, 이인(異人)들은 엄격한 신분제도를 통해 혼혈을 방지하였으므로, 지배계급이 빠져나간

후에는 문화가 침체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대문구문명보다 2,000년이나 뒤에 일어난 용산문화가 대문구문명보다 뒤떨어지고, 동이족이

철수한 이슬람 문화가 오랫동안 침체를 면치 못하는 이유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임금(단군왕검)이 조선국을 개창한 이후의 역사는 주왕실이 멸망하는 춘추전국 시대까지가

동이족의 역사가 되고, 그 이후로는 동이의 정통이 부여를 거쳐 고구려로 넘어온 사실은 <환단

고기>가 전하는 바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고구려의 중심세력은 서남아시아의 천재지변을

피해 비단길을 따라 이주해온 변한인들과, 진시황에 의해 멸망한 후 돈황에 자리잡은 진한과

마한인들의 연합세력이다. 즉 규모가 축소되면서 종족통합을 이루어 생긴 나라가 고구려인

셈이다. 

 

 <산해경>에 수록된 이신(異神)들의 역사는 주로 이 시기의 동이들을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신들의 세계가 있는 곳이 주로 대황(大荒)으로 나타난다. '荒'은 동이들이 떠난 본고장이 황폐

졌다는 뜻과, 동이들의 영역이 크다는 뜻과, 지금 동이들이 살고있는 곳이 초원의 황야라는

세가지 사실을 모두 나타내는 글자인 것이다('荒'은 거칠 황, 클 황, 황무지 황 등으로 새겨진다).

 

⑥ 천지조판


  이제 고대사회를 어설프게나마 하나로 묶어 놓았다. 이렇게 엮어놓고 보면, 지금까지 역사가들

중국(황하유역)과 한국(발해만과 만주벌판)의 고대역사로 생각했던 것들이 실제로는

동아시아와 서아시아의 고대사임을 알수 있다. 박용숙 선생이 우라노스로 시작되는 그리이스

신통기가 단군역사의 후속역사라고 밝힌 것은 역사의 진실이었던 것이다. 
 

 역사적 사실들은 이정도 해두고, 본론으로 되돌아가서 삼계의 개창시기를 살펴보자. 삼계는

동이의 신분제도인 동시에 배달국의 신전조직이고, 삼한관경의 원리적 근거이다. 이 삼계의 모형

이 단군신화에 나타나 있다. 환웅이 신시를 열던 때, 즉 환웅과 반고가 환국을 떠나 최초의 나라를

세우기 이전에는, 환국에서 퍼져나간 백성들은 원시 공산사회를 이루고 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원시시대부터 내려온 채집생활과 복희씨가 만들었다는 그물을 이용한 수렵생활을 병행

하면서, 앞에서 소개된 태양숭배의 제의를 통해 문화를 전수했을 것이다. 
 

 여기에 환웅과 반고가 각기 동쪽과 서쪽으로 길을 나누어, 환국에서 발명한 도구를 이용한 농경

법을 가지고 내려왔을 것이다. 산기슭을 벗어나지 못했던 사람들이 들판을 개척할 수 있는 힘을

얻게된 것이다. 이때부터 지황의 시대, 다른말로 하면 가이아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실제로 단군신화에는 이때의 사건과, 그로부터 1,500년 뒤에 일어난 인황의 천지통합 사적이

혼합되어 있음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 삼백육십여사를 주관하였다"

시기로부터 "때에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한 굴에 살면서 ...... 아들을 낳으니 이가 곧 단군

왕검이다" 까지에는 무려 1,500년 이상의 공백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시대적 공백을 나타내는 것이 단 두 개의 글자, 즉 "一虎(범 한 마리)" 라는

것이다. 즉 호랑이를 곤모신의 상징으로 볼 때에는 신시개천의 시대가 되고, 노랑머리 여인으로

보게되면 조선건국 시기가 되는 것이다. 호랑이를 곤모신(지모신)으로 본다는 것은, 환웅이 강세

할 당시에 영토권을 장악하고 있던 토착종족의 추장을 호랑이로 본다는 뜻이다. 이 경우에는

범이 서왕모의 상징으로 이해되며, 지신을 상징하는 곰과 의미가 같아진다. 따라서 발해만 연안

환웅이 강세할 때, 환국의 정통임을 증명하는 천부인으로 두 종족을 복속시키고, 그 중에 곰족

을 왕비족으로 선택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천손강림이 동쪽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서쪽에도 있었다. 반고가한의 나라가

그것이니, 여기서는 이미 살펴본대로 사람이 되지 못하고 쫒겨난 사람들의 역사도 전해지고 있다.

아무튼 고대에 똑 같은 일이 동쪽과 서쪽 모두에 있었을 가능성도 높으니, 환국의 세력이 둘로

나뉘었다고 보기로 하자.

 이 두 세력이 환국의 통치권을 둘러싸고 충돌하여, 결국 한자리에 모인 사건이 있었다고 가정한

것이 이 책의 탁록대전에 대한 해설이다. 그 때 노랑머리 파랑 눈의 범(반고의 후예)이 힘으로는

검은머리 검은 눈의 곰(환웅의 후예)을 압도하였지만, 문화적으로는 곰족이 우세하여 결국 지배

권이 곰족에게 귀속되었다고 풀면, 단군왕검(우임금)의 조선건국 시기가 되는 것이다. 
 

 이 차이가 <환단고기>에서 강조되지 않은 이유는 첫째 반고가 <성경>의 하느님이 아니라 단군

신화에 등장하는 [一虎(호랑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진한이 멸망한 뒤에 동아시아의 역사기록이 진시황의 분서갱유때 모두

없어져, 변한에서 가져온 단군신화가 환단의 시조신화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 전해진 기록이었을

가능성이다. 결국 이책에서는 두 번째 가능성을 채택한 셈이다. 
 

 따라서 환웅의 시대 보다 수천년 앞선 환인시대에 삼계가 형성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왜냐하면

환웅이 환국을 떠날 때 천부인 세 개를 받고 풍백 . 운사 . 우사의 삼왕을 거느렸을 뿐 아니라,

무리 삼천을 이끌고 왔다는 기록에서 [3]이라는 숫자가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다만, 환인의

시대에 대한 역사기록이 없기 때문에 환웅의 시대를 삼계의 시작으로 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때에 삼계라고 부를수 있는 삼한의 체계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

수도 있다. 천지인 삼황이 하나의 제도속에 완전히 통합된 체계를 삼계라고 말한다면, 환웅의

시대까지는 삼계라고 부르기에는 불완전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황에 해당하는 태자가 있기는 하지만, 그는 제왕수업을 마친 즉시 신시를 떠나

새로운 지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를 삼계형성의 전단계로 보고, 이를 천지조판시대라고

부르기로 한다. 여기서의 천지조판(天地肇判)이란 천계와 지계를 처음으로 나누었다는 뜻이다. 
 

 아무튼 환웅이 강세하여 천계와 지계가 처음으로 갈리던 시대는 지황이 영토권을 장악한 시대

이다. 지황은 원칙적으로는 여신이지만 여자가 지황이 되고 안되고는 여기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대지의 여신을 대리하는 지황이 영토를 매개로 세계를 지배했기 때문에 지황의 시대로 부르는

것이 옳다는 뜻이다. 이 지황이 <산해경>에 자주 등장하는 서왕모(西王母)의 실체이고, 우리

민속에서 산신(山神)으로 상징되는 호신(虎神)이다. 
 

 이 지황의 치세에 만들어진 것이 바로 고분이다. 즉 환웅과 반고가 만든 신전이 고분인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신전의 양식은 서로 다르다. 환웅의 신전은 발해만을 둘러싼 산들을 의지해서 만들

는데, 돈황의 석굴과 같은 양식으로 산에다 굴을 뚫고 만들었다. 반고는 평원을 개척하였기

때문에 예배장소가 마땅치 않았고, 그 때문에 지그랏과 피라밋을 세웠던 것이다. 
 

 이 고분의 형식은 명당(明堂)이라는 글자가 의미하는 것처럼 태양(日)신전과 태음(月)신전을

하나로 합친 형식이다. 이때만 해도 인류의 주된 관심사는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이었을 것이고,

그 때문에 천황과 지황 사이에서 태어나는 인황(별님)들을 서로 짝지워 새 땅으로 보내어, 새로운

명당을 만들도록 하였을 것이다. 그 때문에 산중(山中; 중심신전)은 일월신(부모신)이 직접 다스

리고, 속세(俗世)는 별님들에게 개척하게 하였다. 그리고 별님들의 개척로를 일월신이 지정해

주었으니, 그 개척로는 하늘에 있는 큰 별들의 배치를 본떴던 것 같다. 사방신(四方神)과 이십

팔숙(二十八宿)은 이런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천문이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늘의 별자리를 보고 방향을 잡으면 자동적으로 다른 신전에 도착할 수 있도록 지국(支國)을

건설했다는 뜻이다. 고분이 하나같이 천문관측을 중요기능으로 삼도록 지어진 이유가 이렇게

볼 때 해명된다. 지황의 신전인 고분의 형태와 기능에 대한 암시도 단군신화에서 찾아진다.

환웅의 때에 곰과 호랑이가 "동혈이거(同穴而居)" 하였다는 기록은, 이 글자들의 본래 모습을

찾아보면 고분의 기능과 밀접히 관련된다는 뜻이다.

 

 

 이 그림은 순서대로 [同穴而居]의 옛 글자모습이다. 그림에서 [동(同)]과 [혈(穴)]은 모든 것을

통합하는 굴, 또는 움집의 모습이다. [이(而)]는 수염의 모습이라고 하는데, 고인돌과 같은

제단의 모습으로 보아도 되는 형상이다. [거(居)]는 [살다]또는 [무덤]의 뜻이니, 그림에서 의자

위에 앉은 모습으로 그려진 사람은 무덤에 사는 사람인 신상이나 신관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 구절은 [범(虎)]이라고도 불리고 [ (熊)]이라고도 불리는 동굴신전이라는 뜻도 된다.

그리고 [동(同)]이나 [혈(穴)]에 신상이 표현되지 않은 것은 여신족들이 우물(구덩이) 그 자체를

신전으로 삼아 신성시하였음을 암시한다. 
 

 여기서 [동]이나 [혈]이 모두 땅이 깊이 꺼진 구덩이와 같은 곳에서 지신인 후토(后土)를 모시던

곳이었다는 사실은 또다른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는 지형이 바로 세계에서

가장 깊은 땅인 해발 -170 미터의 트루판 분지이기 때문이다. 
 

 그 옆에는 앞에서 살펴본 대로 즁가리아분지, 띠화, 우루무치, 옥문관, 돈황, 알타이산맥, 한가이

산맥, 곤륜산맥, 타글라마칸사막 등이 둘러싸고 있다. 이런 점을 근거로 환국이 티벳(Tibet)고원을

천황의 영토로, 트루판 분지를 지황의 영토로 삼았다고 추정했던것이다. 
 

 그 내용을 다시한번 살펴보면 트루판은 [트루]가 셋(트리플)의 뜻이있고, [판]은 [한]으로 이해

되어 삼한이 된다. [즁가리아]는 우리말 [둥그리]와 비슷하다. 띠화(우루무치)는 지황(地皇;디황)

의 변형으로 보이며, 이는 우루무치가 울뭍 → 운물 → 우물로 바뀔 수 있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높다. 옥문관은 글자 그대로 여자의 성기를 뜻하니, 노자가 말한 곡신(谷神)의 뜻이다. 돈황(敦煌)

은 단황(檀皇)과 싑게 연결된다. 알타이는 알터, 한가이는 한가리 - 한겨레와 비슷하고, 타글라

마칸은 탁록으로 추정했던 곳이다. 
 

 단군신화의 "願化爲人(사람되기를 원하다)" 은 이 신전에서 여신들이 남신에게 음양교합 하기를

요구했다는 뜻이 된다. 바로 이 음양교합의 장소, 우리말로 "씹자리"가 바로 고분의 기능인 것이다.

고인돌의 형상이 침대처럼 생긴것도 우연이 아닌 것이다. 
 

 결국 환웅의 강세는 지황의 영토권을 부정할 수 있는 권위와 실력을 겸비한 천황이 이 지황의

세상에 내려와, 지황의 우물을 정복하고 천지동덕의 세상을 열었던 역사적 사실을 상징하고 있다. 
 

 즉 산속에 폐쇄된 성역만을 고수하던 천황족이 속세로 내려선 것이다. 어쩌면 이는 지황들의 힘

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던 중대한 변고가 인간세계에 일어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기원전 4,000년경은 <성경> 창세기의 때에 해당하는 시기로서, 세계각지의 전설에 홍수설화가

등장하는 바로 그때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 고분이 단군신화에서는 '신단수'로 나타난다. 신단수는 환웅이 내려왔다는 곳이므로, 환웅이

처음으로 열었다는 신시의 딴 이름이 신단수라고 볼수 있다. 그리고 신단수라는 이름이 "신단이

곧 나무이다" 라는 뜻으로도 이해될 수 있으므로, 신단의 뜻을 어느정도 밝혀낸 지금, 나무의

상징적 의미가 관심을 끌게 된다. 
 

 여기서 나무의 형태가 세모와 네모와 동그라미의 결합이며, 절반은 뿌리로 땅속에 묻혀 드러

나지 않고 나머지 절반은 산과 같은 모양으로 땅위에 솟아있어, 진리의 상징으로 적합하다는

점이 참고가 된다. 그리고 피라밋이나 지그랏이 모두 이와같이 지상부에 천신의 거처를 마련

하고, 지하부에 지신의 거처인 우물을 두었음을 볼 때, 신단수가 고분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단군신화에서 웅녀가 사람이 되기 전에 거쳐야 했던 절차는, 왕이 될 인재를 낳기 위해

서는 여신들도 엄격한 수행을 거쳐 자격요건을 갖추어야 함을 상징한다. 이 자격이 부덕(婦德)

이다. 이 부덕에는 문자 . 의약 . 농사 . 요리 . 재봉 . 가무 등 새 문명을 건설할 수 있는 모든

지식은 말할 것도 없고, 남편을 치마폭에 휘어감을 수 있는 방중술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즉,

부덕은 황후의 자격을 말하는 것으로, 속세에 나가면 황제를 섭정하는 태후가 되기위해 공부

하는 것이다.

 이런 여인상은 유교문화에서 삼종지도(三從之道)에 찌들은 여인상이 아니라, "세상을 다스

리는 것은 남자지만, 그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여자이다"라는 말의 유래가 되는 신모상(神母象)

것이다. 그리고 이 속담은 뒤에 설명되는 바와 같이 고대 제왕들의 숨겨진 비극을 표현한

속담이기도 하다. 
 

 그리고 환웅이 이런 교육을 시켰고, 웅녀가 그 수행을 원했다는 것은 환웅의 문화가 그만큼

우수했다는 반증이라고 보아도 좋다. 
 

 결국 환웅의 시대는 고분의 시대였으며, 그 고분은 천황과 지황의 처소였다. 그 곳은 신혼

(神婚) 또는 성혼(聖婚)을 통해 인황인 별님을 생산하던 '알터' 또는 '아이집터' 였으며, 그 별님

이 새로운 고분을 세워 독립하여 천자(天子)가 된다. 이것이 태양신의 혈통계승이며, 풍류의

핵심요소이다. 
 

 이 지황의 시대에는 삼계가 중층구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즉 환국은 환인의 주관하에 천황

태양신과 지황인 고모신(태음신; 月神)을 제사지내는 성역으로 남아있었고, 하계에 동쪽과

서쪽의 두 고분이 생겨서 백성들을 다스리게 된 것이다. 하계에서는 환인의 혈통임을 자랑하는

남신(男神)이 지상에 강림한 태양신임을 자처하며 스스로 천황이 되고, 천황과 잠자리를 같이

하여 태양빛을 세상에 흘려줄 여신들이 부덕(婦德)을 닦으며 우물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계의 천황은 상계의 인황인 환인과의 관계에서는 천황의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즉 상하를

종합한 위계를 따진다면 환인(상계인황)이 천황이 되고, 환웅(하계천황)이 인황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내용이 있으니, 이 지황의 고분에서 지옥이라는 관념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지옥의 관념이 생긴 것은 이때보다 훨씬 후대의 일일지도 모르지만, 고분에서

공부하고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속세에 전해질 때 지옥이라는 끔찍한 세상이라고 묘사되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이해하려면 지황이 지귀, 도깨비라고 불리웠던 기술자 집단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충분하다. 지귀, 즉 도깨비의 주업무는 야금(대장장이)과 폭약제조, 의료행위 등이다.

작업장은 밤낮으로 쇠를 녹이는 용광로의 불꽃이 타오르고, 온 몸에 고슴도치처럼 침을 꽂고

누워있는 환자들과, 수술을 받느라고 배를 가르고 뼈를 드러낸 사람들로 붐볐을 것이다.

대사람들이 그들의 작업환경을 보고서 지옥이라는 표현보다 더 좋은 말을 만들어 내었다면

오히려 비정상이다. 더구나 도깨비들은 고급기술자로서 작업을 지도하고 감독하는 신분이었고,

직접 노동에 종사한 사람들은 주로 죄수들로 충당되었다고 한다. 이런 풍경은 염라대왕의 부하들

에게 벌을 받고 있는 죄인들의 이미지와 꼭 맞아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지황의 신전이

끔찍했던 만큼 천국(환국)은 이상적으로 묘사되었을 것이고, 그런 생각들이 후대에 "태초의 황금

시대" 라는 관념을 낳았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살펴본 신시의 기본제도와 그 제도들이 상징하는 여러 의미는 신시의 뒤를 잇는 고조선

에도 그대로 계승된다. 그러니 신시에 대해서는 그만 살펴보고, 지금의 문명과 직접 연결되는

고조선을 통해 풍류의 완성된 모습을 찾아보자.

 

(향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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