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亂世)의 처방
인심 어지러운 난세를 맞이하여 테러라는 극렬한 무력(武力)의 방법이 성행하고 복수와 증오만이 넘실거리는
이 지구촌의 독기(毒氣)는 인간의 포악한 마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약물도 극독약을 처방하는 치사량의 극약 투약법을 생각나게 합니다.
왜냐하면 치세(治世)의 약과 난세(亂世)의 약이 다르다고 경전에 쓰여있으니까요.
난세를 치료하는 진정한 법왕(法王)은 없을까요? 법왕은 말 그대로 법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유자재한 지혜의
진리를 터득한 자입니다. 스스로 패권주의적 세계의 왕을 자처하는 군사 강국으로 일컫는 왕이 아니라,
정법(正法)을 잘 알아서 사람과 동식물에 이르기까지 우주적인 평화를 줄 수 있는 법을 간직해야만 진정한 법왕
이라 칭할 수 있습니다.
약(藥)에 있어서 맹신 암기주의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데 약뿐만 아니라 판단력 없는 교조주의적 맹신은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돌발퀴즈 공포로 얼어붙거나 열 받는 분노로 치를 떠는 양극단적 민심으로 몸살을
앓는 난세의 약과 치세(治世)의 약에 대한 타당한 설명은?
1. 평화 시절의 약은 순한 인삼과 숙지황으로 서서히 더웁게 보양(補陽)하거나, 서서히 보음(補陰)을 시도한다.
2. 난세일수록 그 약은 강해야 하니, 음양(陰陽)의 체질을 잘 보아 너무 공포로 얼어서 몸이 차가운 사람은 인삼,
부자 등을 적절하게 가감하여 몸의 양기(陽氣)를 돋구어 주고 마음도 활발하게 희망과 용기를 준다.
반면에 극렬한 경쟁심이나 투쟁심으로 몸이 달아 있는 양적(陽的)인 체질에게는 숙지황, 황련(黃連), 대황 등의
순서대로 몸과 마음을 차갑게 하는 투약을 시도 한다.
정답: 1, 2번 모두 경전에 인삼(人蔘)과 숙지황(熟地黃)은 평화스러운 치세(治世)의 약이요, 부자(附子)와 대황
(大黃)은 난세의 약이라는 오묘한 말이 있습니다.
독자 제위께서는 부자, 대황은 독약에 가까운 극약이고 인삼과 숙지황은 순한 약임을 짐작하실 수 있겠습니다.
인삼과 숙지황 정도로 잘 다스려지는 질병만 있다면 의사 노릇은 훨씬 더 쉬워질 텐데, 청산가리 종류에서
추출된 성분으로 암(癌)을 치료한다던가 하는 소식이 들린 지 오래입니다.
남성의 약인 기(氣)를 보(補)하는 사군자탕(四君子湯)의 인삼은 더운약이기는 하지만 부자(附子)라는 극약처럼
뜨거운 맹독을 가지지는 않습니다.
여성 약인 사물탕(四物湯)의 혈(血)을 보(補)하는 숙지황(熟地黃)은 대체적으로 몸에 수기(水氣)가 없는 사람,
즉 진액이 없는 사람 위주로 쓰이며 맹독성이 없습니다. 물론 음적(陰的)인 약인 만큼 숙지황 같이 순한 약조차
도 뚱뚱한 음인(陰人)에게는 피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러나 설사약으로 쓰는 대황(大黃)이라는 약은 차가운 맹독성을 가지고 있어 어쩌다 몸이 찬 사람에게 잘못
썼다가는 항문까지 빠지는 탈항증(脫肛症)을 유발시킬 정도로 낭패보는 독약입니다.
무서운 독약 치료 방법들은 알고 보면 모두가 인간의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세가지 삼독(三毒)에서 유래
합니다.
그래서 석가세존은 팔만 사천 번뇌의 근본을 모두 탐진치(貪瞋痴) 삼독에서 찾아내었고, 그 마음의 끊임없는
회전을 윤회(輪廻)라 일컬었습니다.
그 중에서 총칼과 대포와 테러로 변화되는 분노의 독은 욕심의 독보다 피해가 심각합니다.
석가 세존은 욕심은 끊기는 어렵되 과보가 그리 크지 않고, 분노나 질투 시기심으로 인한 악업의 결과는 돌아
서면 후회하여 끊기가 쉬운 듯 보이나 그 과보가 크다고 설파하셨습니다.
피상적인 진단을 하여 건물의 내구성을 발전시키거나 비행기 탑승자의 엄한 검색 등으로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한의학에서 미친 병, 광기(狂氣)의 병은 열독(熱毒)으로 보아 대황이라는 설사지제를 써 가지고 그 위로 오르는
분노의 독을 배설시켜 버립니다.
저 전쟁광증으로 몸과 맘이 열로 달아 있는 자들에게 대황탕(大黃湯)을 먹여 시원하게 설사를 시켜야하겠습니다.
점점 더 미쳐가고 있는 전쟁광촌 지구를 구원할 차가운 대황탕(大黃湯) 같은 냉정한 이성을 되찾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선각자의 외로움
도인에게 무슨 한이 있겠는가? 그러나 중생세계에서 이 좋은 법을 섭수하지 못할 때 아프다.
오직 주고 싶은 것밖에 없는데 받아주질 아니할 때 그렇게 서운하고 외로울 수 없다. 꼭 필요한 법인데도 오히려
경멸과 조소와 외면을 던지는 세상이 아닌가?
이 인간세계는 종교를 의논하는 데에도 미묘한 자아의식(ego)이 작용한다.
'기독교와 불교', '불교와 기독교'의 두 제목 중 어떤 것이 옳은가? 내가 불교인이거나 기독교인이라는 상을
지니고 있다면 분명히 선후를 비교한 끝에 만족과 불만이 존재할 것이다.
보라, 세상의 엄청난 묵인사항이 '나는 무엇이다'라는 명제이다. '내가 무엇이다', '너는 무엇이다'라는 구분의
아상(我想)은 필연적으로 전쟁을 유발시킨다.
작게는 학벌, 지방색, 크게는 국가주의로 자기를 쌓아놓고 서로 충돌하고는 서로 곤혹에 빠진다.
불교인 입에서 "저 친구 ○○도야", "○○도야" 서슴없이 나오는 분리의식의 독산 구업은 없는가? "도인은 주로
○○도에서 나온대" 이런식 말이다.
이보다 더 큰 문제인 흑백인종 국가간의 분리된 사상을 떨구어주어야 할 불제자가 이렇다면, 이 지구촌의 망상은
누가 책임지고 없애줄 것인가? 설사 이 따위 것들이 다 없어진다해도 아마 절대자를 빙자한 종교적 자아의식은
남게 될 것이 분명하다.
'우리 부처님', '우리 예수님' 말하자면 우리들과 너희들은 좀 다르다는 뜻이다. "기껏해야 천당의 쾌락을 최고로
아는 인천교(인천교)인 너희 교리로써 어찌 우리 최상승의 대승도리를 알겠는가?" "너희는 기껏해야 인간의
깨달음을 논하지만 우리는 창조주 신의 자손이다. 어찌 감히 동등한 위치에 서려 하는가?" 이런 논쟁으로 들끓는
지구촌의 편견된 종교의식…. 나를 확대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신의 이름 혹은 절대자 교주 이름을 빙자하여
우월해지고 성스러워지고 싶은 자아(ego) '나는 불교인 너는 기독교인'의 분리가 없는 마음이 곧 세존의 제법
무아(諸法無我)의 진리이거늘. '나는 예수님의 자손' '너는 더러운 죄인'의 구분을 두지 않는 것이 곧 창세기
금단의 과일 '선악과'의 교훈이거늘-. 언제부터 이 지구촌은 선과 악, 미와 추, 우월과 열등을 나누어 놓고 교활한
악업의 삿된 소견이 난무했는가?
혜암선사께서 하루는 성경을 읽으시더니 탄복을 하셨다. "나로 인하지 않고는 하늘나라 들어 갈 수 없다는 '나'
와, 세존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나'는 결코 둘이 아니로구나" 대성인이신 예수님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는
예수라는 명사에 끄달려 그 이름으로 인하여 하늘나라 들어가는 것으로 착각하는 세상을 한탄하셨다.
즉시 아름다운 한폭의 그림과 같은 글을 쓰셨는데 제목이 [불교와 기독교의 동일점]이다.
자신의 저서에 이 글이 실려있는데 자신의 저작인데도 실로 이 글이 실리기까지는 참으로 유감스러운 난관이
많았다. 어째서일까? 주위의 엄청난 반대로 1년 6개월 간을 보류하고 있을 즈음 노선사의 진리에 대한 솔직한
견해의 확신감에 찬 추진으로 결국은 실리게 되었으니, 이는 오로지 참다운 진리의 천명에 그 취지가 있다.
진리에는 세상의 아전인수격인 교만이 용납되지 않는다. 도인의 안목이 너무도 천진하고 순수하므로 세간의
불협화음을 무릅쓰고 천하에 이 사실을 공표하고 싶어 하셨다.
노선사의 이 간절한 부탁을 받고 이 신문사 저 신문사 쫓아다녔던 시자 스님의 말씀을 듣고 필자는 콧등이 시큰
했다. 어째서 세상은 이 글을 용납하지 못했을까? 모 신문사 양반 말씀이 "이런 글 실리면 양쪽에서 욕먹습니다"
라고 하더란다. 양쪽이란 어느어느 곳을 말하겠는가? 참으로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선각자의 외로움이 뼈에 사무
친다. 이 양쪽으로 인식되어버린 종교의 분리는 이제 세속인들에게 상식화되어 버렸다.
흑백논리의 전쟁터인 이 종교계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일본에 기독교가 처음 전파되었을 때의 일화를 보자.
어떤 사람이 신약성경을 한 선사(禪師)에게 가져갔다.
그리고 그는 몇 귀절을 읽었는데 "들에 피어 있는 백합을 보라, 그들은 내일을 위하여 생각하거나 수고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들은 지금 여기에서 그토록 아름답다.
솔로몬의 영화라 할지라도 그토록 아름답지 못하였느니라." 그가 그 선사에게 이 귀절을 읽자 "그만! 누가 뭐라고
하여도 그 게송을 읊은 사람은 선각자이다"하고 단호하게 말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위대한 통찰은 양변을 떠난
깨달을 자만이 서로 미소지을 수 있는 세계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세상에서는 외로운 견해가 아닌가? "세상이 비웃지 않는 법은 법이라고 할 수 없다" 옛 선사의 말씀이
증명하는 이 세대여, 부끄럽지 아니한가? 지난해 오월 노선사의 입적 소식을 듣자마자 필자는 모 신문사로
찾아가서 또 한번 간절히 부탁해 보았다.
큰스님의 유고를 일간지에 실어 드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효도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역시 거절당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부딪쳤을 때의 절망감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오늘의 이 페이지를 스승님
의 영전에 바치오니 이제는 한을 좀 푸시옵소서….
민족주의적인 선민의식을 바탕으로한 이스라엘인의 배타적인 종교성을 전세계적으로 확대하는 데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이 뒤따랐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는데 인자는 머리둘 곳도 없다'
비통한 말 한마디를 던졌던 예수님---- 선각자의 외로움은 예나 이제나 이와같다.
무심코 선각자의 간절하신 법문에 못질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스승은 외로이 서 계셨다. 그리고는 가셨다.
이제는 그 법만이 남아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체를 다버리고 나를 따르면 천국이 너의 것이다"하였다. 여기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예수 자신을 따르라는 말이 아니라 각자의 '나'를 따르라는 말로 알아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 중에는 이것을 물으면 예수를 따르라는 말씀이라 하니, 이것은 기독교인으로서 예수님의
본 뜻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세존의 "천상천하에 나만이 홀로 높다"는 말씀도 각자의 '나'를 가리킨 것이니, 여기에 다른 것이 무엇이 있겠
는가? 사상법(事相法)으로 말하더라고 밖으로 쓴 즉 나타나고, 안으로 거두운 즉 감추는지라, 밖으로 공경하는
것을 들어서 안으로는 참된 성품을 밝히고, 나의 성품과 밖의 형상이 서로 응함을 알아야 한다.
불교에서 불상(佛像)을 숭상하는 것은 이러한 이치인 것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인이 이와 같은 도리를 알지
못하고, 무조건 우상은 배척해야 된다는 말을 한다면, 그것은 상식밖의 생각이다.
만일 그렇다면 기독교인이 십자가 앞에서 기도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십자가는 눈에 보이는 우상이 아니
겠는가?
그러므로,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성경의 근본 뜻을 알고 믿으면 부처님도 예수처럼 믿을 것이요, 불교를 믿는
사람이 부처님 말씀의 근본 뜻을 알고 믿으면, 예수님도 부처님처럼 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
가는 한 가정에서도 부모는 불교도요 자녀는 기독교도라 해서 그 의견이 서로 같지 않음을 흔히 본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바로 알고 바로 믿으면 기독교를 믿는 자녀들도 불교를 믿는 부모에게 효도를
달리 할 수 없을 것이요, 또 불교를 믿는 부모들도 기독교를 믿는 자녀들에게 사랑을 달리 할 수 없을 것이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믿는 진리(기독교와 불교)가 겉으로는 다르지마는, 그것은 마치 물을 파도를 여의지 아니
하고, 파도는 물을 여의지 아니한 것과 같은 것이다.
또 이와 같이 모든 종교의 진리가 하나임을 알아야 하며, 그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한 채, 남의 옳지 못한 말만
믿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비유를 보면 그런 생각은 잘못된 것임을 알 것이다.
가령 달 밝은 밤에 접시,사발,동이,항아리 등 무수한 그릇에 물을 떠놓고 보면, 그 그릇마다 달은 다 비추어 있다.
다시 말하면 불교니 기독교니 천주교니 하는 것 등은 곧 접시달·사발달·항아리달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즉 그 그릇은 각기 다르나 그 달은 같은 달인 것이다.
보라, 청천에 떠 있는 달은 우주에 오직 한 몸만 비추어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알면, 종교라 원래 하나임을
깨끗한 정신으로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사회에서 철학이 어떠니, 심리학이 어떠니, 인생관이 어떠니 하고
떠들며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 남의 흉내만 내는 것이다. 참으로 위에 것을 달관하여 인생이란 것을 철저
하게 타파해야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타파해야 하는가? 다시 말하면 우리는 다 자기가 과거에 어디에
있다가 이 세상에 왔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천만 번 계교(計較)하고 사량(思量)하여 이르더라도, 그것은 다 뜨거운 불 위의 한 점〔一點〕
눈〔雪〕이라,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글이야 한 자도 모르더라도, 내가 전생에 어디 있다가 이 세상에 왔는지, 그 온 곳을 알아야 한다. 그 온 곳을
진실로 밝게 알면, 따라서 내생에 어디로 갈 것인지를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니, 이렇게 되었을 때에 비로소 참된
인생관이 성립되는 것이고 완전한 인격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金仙耶蘇本目面 人前各自强惺惺 一坑未免但埋却 不知身在眼子靑 부처와 예수의 본래 면목이 각자 사람앞에
스스로 똑똑히 밝았으니 다만 한 구덩이에서 면하지 못하고 묻히면 몸 가운데 푸른 눈알이 있음을 알지 못하리.
윤회하는 광증(狂症)
부처님께서 제시하신 팔정도(八正道)에서 이름을 따온 듯 한 팔정산(八正散)은 아이러니칼하게도 정기를 보충
시키는 약은 아니다.
동양 의학에서 치료하는 네 가지 법의 주요 골자는
한토하화(汗吐下和) 법인데, 즉 땀내는 법, 구토시키는 법, 설사나 이뇨시키는 법, 화해시키는 법이다.
각각의 쓰임새가 다르지만, 서로 그 질병의 상황과 이 네 가지 법이 어긋나면 건강을 그르친다.
팔정산은 그 중 하제(下劑)인데 주로 이뇨기능을 도와준다.
하기야 바른 기운을 얻기 위해서 꼭 보약을 사용한다고 되는 것만은 아닌 것이,
때로는 사(瀉)하는 것이 보(補)되는 경우도 있다.
삿된 기운이 실(實)한 것은 사법(瀉法)을 쓰는 법인데, 법으로 보더라도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경우 그것과 같다.
삿된 열을 제거함으로써 하초(下焦)의 방광이나 대장 자궁 등의 화농성 질환을 다스리는 팔정산은 마치 삼독
번뇌의 열을 식혀주는 불법(佛法)과 같다.
아무리 급해도 대소변을 먼저 처리하지 않는 이는 없는데, 급하다고 해서 마음의 찌꺼기인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삼독을 씻어내지 않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대소변의 중독은 그 화가 일생의 육신에만 미치거니와, 집착의 뜨거운 화는 세세생생 미친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말이다.
이 세상에 겉으로는 바른 견해라 주장하지만 속으로는 삿된 안목을 지닌 지도자가 너무 많다.
바른 견해[正見]는 곧 팔정도의 주춧돌이니 먼저 바른 견해를 터득하기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바른 견해를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바른 견해 아닌 삿된 견해를 쳐부셔야 한다.
우리가 사랑이니 자유니 평화니 행복이니 하는 지고한 명제를 추구할 때, 그 지상 최고의 경지를 욕심만 내지
말고, 그것 아닌 조건들을 먼저 제거하면 될 것이다.
역사 이래 건강을 정의내린 의학자는 없다. 어떻게 건강의 상태를 정의할 수 있을 것인가?
병이 없는 상태를 건강이라고 하는데, 병이라는 조건을 제거하고 나면 그냥 드러나는 것이 건강이다.
옛날에 "단지 범인의 정을 쉬어버린 것이지 따로이 성인의 견해가 있지 않다"고 했다.
범인의 정을 쉬어버린 견해가 곧 바른 견해가 드러나는 곳인데 어떤 것이 범인의 정인가?
첫째 성인의 경계와 범인의 경계를 둘로 보고, 열심히 거룩한 경계를 구하는 것이 범인의 정이다.
일차적인 식욕*재욕과 이차적인 색욕 즉 성욕과, 삼차적인 명예욕*지식욕 등으로 꽁꽁 뭉쳐진 중생 세계의
실상을 보면 그 중 제일로 교활하게 무장된 탐욕이 곧 무형에 대한 욕망인데(無有愛), 곧 명예욕 같은 것이다.
거룩해 지고 싶은 것, 권력을 휘어 잡고 싶은 것, 우월해 지고 싶은 것 등
인간의 ego의식인 아상(我相)을 확대해 나가는 모양은 참으로 가관이다.
마치 도인이나 성인이 비교에 의한 우월한 존재로 착각하면서 숭배하고 흉내내어 구하고 다닌다.
비교없는 마음은 무엇인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없으므로, 마음을 미래에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노력함이나 구함이 쉬어버려 심리적으로 시간과 공간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바로 현실을 직시하며 법의 실상을 볼 뿐이다.
바른 견해란 바로 이러한 분리 의식이 없는 마음의 공덕을 일컫는다.
비교*경쟁*시기*질투의 열이 쌓이고 쌓여 팔정산의 신세를 진다해도, 그것이 영원한 치료일 수는 없다.
바른 견해를 깨닫는 지혜의 광명이야말로, 필요없는 마찰의 열기를 영원히 진정시켜 줄 뿐이다.
둘째로 바른 견해를 다시 똑 바로 말한다면, 보는 놈은 볼 수 없는 이 견해가 곧 바른 견해이니,
비유하면 눈이 눈을 어찌 보겠으며, 혓바닥이 혓바닥 맛을 어찌 보겠는가?
보는 놈은 보여지는 사물이 아니면서 곧 모든 것을 비추는데, 비유컨대 눈이 오색을 분별해 보되 눈 자체가
오색이 아님과 같으며, 혓바닥이 맛을 보되 혓바닥 자체가 곧 맛이 아님과 같다.
이 견해야말로 제불조사가 비밀히 인가하여 전한 견해이니 이는 석가부처님도 모르고 가섭존자 역시 전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어떤 것이 정견이요?" 적실한 뜻 여쭈었더니, 스승 혜암 눈 푸른 답 "훈풍절로 남쪽에서(薰風自南來!) !"
"상(相) 없으며 공(空)도 없고 공이 아님 또한 없도다. (無相無空無非空)"
임종게를 남기신 채 입적하신 혜암 대선사께서는 평소 "훈풍이 저절로 남쪽에서 불어오는 때 나는 간다"고
말씀하셨다. 이 도리를 해석하여 마침 따뜻한 오월에 입적하셨으니 이 때가 마침 훈풍 부는 때라고 오월로
쫓아가 사량분별의 혀끝을 대는 사례를 보았다.
이는 천부당 만부당한 해석이니, 참으로 깊은 선지(禪旨)는 미묘하여 알기가 어렵다.
따뜻한 바람이 남쪽에서 절로 불어오는 이치는 곧 바른 소견을 드러낸 것이어서,
이는 따뜻하니, 바람이니, 남쪽이니의 문구 해석으로 쫓아가면 바른 견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님이향한 그곳이나
바른소견 나온그곳
둘이런가? 하나런가?
훈풍절로 남쪽에서!
윤회하는 광증(狂症)
글이써지지 않는 오래된 볼펜심을 라이터로 달궈 잉크가 나오는 걸 알아냈습니다.
내친 김에 좀더 잘 나오게 하려는 욕심으로 가열을 더했더니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잉크가 폭발해 키보드를
얼룩지게 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우둔한 필자가 중용(中庸)을 잃은 과보임에 분명합니다.
최근 서로 나만이 대통령깜이라는 선두 다툼 경쟁에 민심이 신명나게(?)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우승은 꿈도 못 꾸고 공도 못 차보는 월드컵보다 너나 없이 동참하는 선거의 기대감에 신(神)나며,
신명(神明)난다고들 합니다.
내가 최고라는 독선적 승부심은 병(病)이고 중용 감각의 이성(理性)은 건강입니다.
그러나 공인(公人)들 조차 병들어 편들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게 무슨 현상일까요?
도박판에서는승패(勝敗)가 갈려진 순간보다 패를 조이는 순간의 짜릿함이 대단합니다.
알고 보면 그 승부 불분명의 순간을 즐기려는 듯합니다.
이번의 선거도 언젠가는 패자의 눈물과 함께 승자의 환호가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승패 반복의 역사입니다. 같은 현상의 반복을 윤회(輪廻)라고 부릅니다.
인간 질병의 역사 역시 같은 형태를 반복하는 윤회의 역사입니다.
승부앞에 신명(神明)내는 인간의 심리를 통찰함도 질병의 원인을 파악하는 지름길입니다.
신(神)자가 들어간 신명나는 마음이 때로 약(藥) 되기도 합니다.
황제내경에서 심장의 기능을 설명하기를 '군주지관(君主之官)이니 신명(神明)이 출(出)한다'고 합니다.
즉 건강한 심장은 신명나는 마음에서 출발한다는 암시입니다.
음양불측위지신야(陰陽不測謂之神也)라는 구절은 신(神)이라는 개념을 확장시키는 한의학적 용어입니다.
즉 승패의 음양을 예측할 수 없는 마음이 곧 신명(神明)나는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무당들의 신명나는 굿거리가 가끔 질병을 낫게 하는 현상도 우연은 아닙니다.
신명의 마음이 결여된 세상에 신명은 분명 약(藥)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타인에 의존하여 소속되고 편드는 식의 대리 승부 전쟁에서 나오는 신명이라면
다분히 병적인 구속성이 있습니다.
이길지 질지 모르는 게임 중에서 가장 스릴 있는 선거(選擧) 열풍은 사람들을 광적(狂的) 신명으로 몰고 갑니다.
승부 중에서 가장 피부에 와 닿는 게임은 뽑을 '선(選)'자의 선거(選擧) 바람입니다.
바람 '풍(風)'을 상징하는 주역의 '손(巽)'괘(卦)에서 유래된 '선(選)'은
인간의 지배하고 싶은 권력의지를 극명하게 나타냅니다.
여전히 잔존하는 지방색의 소속 심리를 지닌 한국인은 돌아가면서 출신 지방의 권력 앙금을 가라앉히는 나라
인가 봅니다.
항상 패자로 살아 온 사람이 승자와의 동일시 현상을 맛보기 위해서 어딘가에 소속하는 지지자들은 우매하기
마련입니다.
힘이 있다는 것은 자기편이 지지를 받을 때 아닙니까?
그러나 지지자들은 누구입니까? 그렇게 되고 싶은 사람들 아닙니까?
신도와 추종자의 노예는 누구입니까? 바로 그들의 한 표를 구걸하는 사람 아닙니까?
환호의 뒤에 피눈물이 있는 선거 문화는 승부에 놀아나는 전쟁판에 유사합니다.
대타를 출전시켜 놓고 그 승부를 즐기는 게임이 선거의 실상입니다.
대중의 표를 구걸하는 선두 주자들의 마음은 조급합니다. 반대측의 표밭에는 적개심을 가집니다.
종교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위대하고 신성한 그 무엇과의 동일시에서 기인한 종교전쟁은 이 지구촌에 항상 전운(戰雲)을 감돌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의외로 패권 다툼의 전쟁에서는 생기가 도는 듯 합니다.
관전하기를 좋아하거나 몸소 소속되어 승부 겨루기를 좋아합니다.
무기만 들지 않았지 인격 살인도 서슴지 않습니다.
승자가된다 해도 대중과 스스로에 붕 떠서 속으면 안됩니다. 역시 승부 이전의 중용을 알아야 합니다.
대중들은 언젠가 다시 승부가 불투명한 선거전의 신명감을 애타게 그리워하기 시작할 테니까요.
로마의 아름다운 전통 이야기가 여기 있습니다.
월계관을 쓰고 입성하는 승자의 옆에는 항상 삐에로가 있어 이러한 말을 외우게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속지 마십시오, 사람들에게! 이건 다 꿈입니다. 안 그러면 당신은 미치게 됩니다.'
이 전통이 사라지자 로마는 '펑!' 하면서 사라졌습니다.
(김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