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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인문

茶山의 사유와 근대성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6.04.10|조회수119 목록 댓글 0



茶山의 사유와 근대성





다음 물음이 종종 제기되었다. “다산의 사유는 근대적인가?” 이 물음이 계속 되풀이된다는 것은 다산 사유의 과도기적

성격을 드러낸다.

다산의 사유가 전형적인 전통 사유도 분명한 근대 사유도 아니라고 생각될 때 이 물음은 제기된다.

때문에 어쩌면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이 물음이 줄곧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는 물음보다는 되물어짐에, 즉 물음 자체를 끝나지 않게 만드는 되물어짐의 구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되물어짐의 구조는 곧 ‘다산 사유의 근대성’ 여부에 대한 판결이 그 안에서 끊임없이 연기되고 때로는 유보되기까지

하는 불투명성이다. 그 불투명성은 우리에게 또 다른 물음, 즉 그에 대한 대답 안에서만 비로소 다산 사유의 근대성이

일정한 해를 얻게 되는 물음으로 우리를 이끈다.


본래의 물음에 대해 메타적 층위에 놓이는 이 물음은 곧 이것이다. “근대적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수립된 지평 위에서만 본래의 물음을 던질 수 있다.

그럼에도 이 메타적 물음은 종종 생략되었다. 이러한 생략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이 메타적 물음이 이미 해결된

물음, 즉 그에 대한 해들이 대부분의 논의에서 이미 전제되고 있는 물음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해들로 흔히 과학기술 문명, 주관화된 문화, 자본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및 대중 사회 등이 열거되곤 했다.

그러나 이런 해들을 가능하게 한 선험적 조건으로 거슬러 올라갈 때, 우리는 지난 몇 백년간의 담론사가 그를 둘러싸고

소용돌이쳤던 존재 즉 주체에 맞닥뜨리게 된다.

이것은 주체 개념에 대한 존재론적 수준의 이해를 통해서만 ‘근대적인 것’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근대의 진정한 가능 조건은 주체가 아니라 주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다.

즉, 주체가 근대 문명을 가능하게 했지만 주체 자체는 일정한 조건들 위에서 형성되었다.

이 조건들은 주체도 주체의 성과물도 아닌 보다 비가시적인 차원의 논리적 구조들이다.

주체는 이 논리적 구조들과 근대적 성과물들 사이의 매듭에 존재한다.

우리가 여기에서 우선 추적할 것은 이 논리적 구조들이다.


한국사에 있어 서구화 이전에 독자적 근대화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다산 사유의 근대성을

논한다면, 그것은 그에게서 근대화의 잠재적 조건 즉 근대적 주체 개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죽음과 혼돈 속에서 시원을 찾는다. 인간은 무 앞에서 시간적 시원을 찾고 혼돈 앞에서 공간적 시원을 찾는다.

근대화/서구화의 끝에서 우리는 허무를 느끼고 이제 다시 그 과정의 시발점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허무의 옆에서 혼돈을 느끼고 그 혼돈의 시발점을 찾아가게 된다.


우리가 다산을 읽는 것은 무/혼돈에 직면해 시원으로 돌아가 보려는 행위이다.

바로 오랫동안 역사의 추동력이었던 근대적 주체의 탄생 지점으로.

그러나 다산에게서의 근대적 주체 개념은 아직 보다 많은 명료화를 요청하는 개념이다.

이제 이러한 명료화는 바로 근대적 주체의 형성을 가능하게 한 논리적 구조를 검토하는데 있을 것이다.


“다산의 사유는 근대적인가?”라는 물음이 ‘근대적인’ 것에 대한 해명을 전제한다는 것은 근대성이 다산 사유의 해명을

가능하게 하는 인식론적 조건으로서 先在함을 함축한다.

그렇다면, 이 선재하는 조건이 서구적 근대성이라고 할 때, 우리의 물음은 서구적 근대성을 잣대로 해서 다산 사유의

근대성을 판단함을 뜻하는가? 즉, 서구적 근대성은 역사적으로 우발적인 것인가 필연적인 것인가?


매우 난해한 이 물음에 대해 우리는 우주 전체의 진화와 세계사 전체의 흐름을 外揷해 보는 한에서 필연적이라고 말

해야 할 것이다.

우주의 진화가 동질성에서 다질성/이질성으로, 물질에서 생명, 의식으로 진행되었다는 것, 세계사가 끝없이 새로운

물질적 조건을 찾아가는 도정이었으며 그 조건 위에서 갖가지 의미와 가치가 펼쳐졌다는 것에 동의하는 한에서

그렇다. 이렇게 보는 한에서 그리고 오직 그 때에만, 우리는 다산 사유를 서구 사유의 잣대에 맞춰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우주와 역사의 진화가 일정한 경향을 내보인다고 해서 그 구체적 양태들이 일정한 것은 아니다.

멀리 볼 때의 도시와 가까이 들여다볼 때의 도시가 다르듯이, 세계사에서의 근대성과 서구의 근대성을 단적으로 일치

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세계사는 거대 권력의 탄생과 신화로 대변되는 상고 시대, 철기의 도입으로 인한 물적 토대의 변화와 정치적-사상적

격변으로 대변되는 고대, 그리고 수많은 사상들 중 하나가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채택됨으로써 다양한 형태의 제국

들이 들어선 중세로 진행되었으며, 근대성이란 이 중세적 삶의 양태로부터 탈주를 시도한 다양한 경향들을 총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근대성을 우발적인 것으로 볼 수도 없으며(이 경우 어떤 일반화도 곤란할 것이다), 서구적 근대성만

을 유일한 근대성으로 볼 수도 없을 것이다(이 경우 근대성의 규정은 너무 좁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지난 3, 4백년간 흘러온 세계사의 전반적인 방향성을 집어냄으로써만 근대성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전반적인 방향성을 균형 있게 잡아낸다는 것은 지난 몇 백년 간의 세계사 및 담론사에서 잔가지들을 조심스럽게

헤치고 나아가 굵은 가지들만을 잡아내는 노력을 요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근대와 현대를 조심스럽게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현대는 근대의 경향이 극으로 치닫는 초근대의 흐름과 그에 저항하는 다양한 형태의 탈근대의 흐름이 얽히는 시대

이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에서 읽어내야 할 ‘모더니티’는 탈근대의 흐름까지는 포괄하지 않는다.

근대에로의 진입 여부를 묻는 맥락에서 탈근대까지 요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문제삼는 근대성은 중세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해 조금씩 형성된 초기의 근대성이다.

우리는 이렇게 보다 순수한 형태의 근대성을 형성하는 전반적인 경향성으로부터 몇 가지의 논리적 구조들(哲學素들)

을 추출해낼 수 있다.

그것은 곧 본질/초월에서 현상/내재로, 연속/하나에서 불연속/여럿으로, 이성/합리성에서 욕망/의지로의 이행이라는

철학소들이다.



1. 合理와 경험


철학사에서 근대성의 새벽은 인식의 새로운 길에 대한 성찰, 즉 방법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열렸다.

이런 과정은 담론사에서 반복되었으나 근대 초에 우리는 인식론사에 있어 두드러지게 높은 문턱을 발견한다.

근대 인식론은 근대에 새롭게 이루어진 과학적 성과에 대한 메타적 반성으로부터 발아한 것이 아니다.

근대에 새롭게 형성된 ‘인식론적 장’ 안에서 근대 과학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 인식론적 장을 드러내는 것은 인식론에서의 근대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근대 자체의 인식론적 근거를 드러내는

일이다. 인식론적 반성이 근대를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 인식론적 반성은 중세의 사유가 함축하고 있던 형이상학적 전제들을 회의하면서 이루어졌고, 때문에 형이상학과의

불가분한 관계를 통해서 가능했다.


물론 근대적 사유의 핵심이 수학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이 생각의 설득력 여부는 ‘수학적 존재들’의 존재론에 상관적이다. 수학적 존재들을 감각적 존재들과 구분되는, 그보다

더 심층적인 실재들로 보는 한에서 근대 사유의 핵심은 수학에 있다는 생각이 성립한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수학적 존재들이 형상들과 감각적 존재들 사이에 있다고 했던 플라톤에게서, 또는 극미의 존재들

을 오로지 수학적 구조들(예컨대 텐서 방정식)을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는 현대 물리학에서 성립할 것이다.

근대의 수학은 측정치들을 ‘경제적으로’(마하) 서술해 주는 개념적 도구일 뿐이다.

근대 과학의 플라톤주의적 해석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갈릴레오가 사용한 수학은 플라톤적 수학이기보다는 아르키메

데스적 수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1)


근대 과학에서 수학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수학은 서술을 위한 도구였지 설명을

위한 존재(aitia)는 아니었다. 근대적 사유는 수학적이지만, 그 테제가 존재론적 수준에서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근대적 사유는 전근대 사유를 가능하게 했던 어떤 형이상학적 원리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을 통해서 가능했다.

그렇다면 전근대 사유를 떠받치고 있던 형이상학의 근본 원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전근대 인식론의 밑뿌리에서 인식 주체의 동일성, 인식 객체의 동일성, 그리고 주체와 객체, 사유와 존재의

일치를 발견한다.

데카르트의 철학 역시 이런 토대 위에서 움직였다.

그에게 사유하는 주체는 ‘res cogitans’이다. 그것은 ‘res extensa’와 똑같이 ‘사물/실체’일 뿐이다.

세계에 대한 탐구는 감성이 파악하는 감각적 성질들을 걷어버리고 두 실체의 일치가 이루어졌을 때 성립한다.

근대적 사유는 현상 저편과 감각 저편의 두 심층을 일치시키는 이 끈, ‘자연의 빛’을 끊어버렸을 때 성립했다.

이런 과정은 칸트에게서 극적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근대적 사유의 전형을 칸트에게서 찾을 것인가? 칸트는 전근대 사유에서의 ‘외관’을 ‘현상’으로 대체함으로써

근대적 사유의 토대를 마련했지만, 그 현상을 주체에 의해 일정하게 구성되는 인식 질료로 파악함으로써 근대 사유의

핵심을 비켜 갔다.

칸트는 객체의 동일성을 논파했지만, 객체의 가변성을 주체의 동일성으로 흡수함으로써 동일성 사유의 그늘 속에 머물

렀다. 근대적 사유의 ‘전반적인’ 흐름은 객체의 가변성과 주체의 가변성 사이에서 성립하는 우발성(contingence)을 그

핵으로 한다.2)


우발성을 기초로 한다는 것은 가변적 객체와 가변적 주체의 만남을 통해 형성되는 것, 그 이전에 어떤 것도 전제로

하지 않은 채 이 만남에 의해 생겨난 결과를 순수하게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이 꽁트가 생각한 ‘실증성’이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은 곧 경험을 통해서 가능하다. 경험을 지배하는 밑바탕은 가시성, 보다 넓게는 감성이다.

이 감성을 통해 드러나는 소여들을 넓혀가고 그리고 그것을 가장 합리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근대적 학문의 ‘전반적인’

흐름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경험론에 의해 논박 당하고, 라이프니츠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감각주의에 의해

논박 당하고, 독일 관념론이 실증주의에 의해 논박 당한 것은 근대적 사유의 전반적인 흐름에 있어 필연적인 것이었다.

근대 사유는 우발성을 토대로 하는 경험의 사유이다.

그리고 경험의 한계는 끝없이 넓어지지만 결코 끝나지는 않으며, 때문에 인식에서의 유한성은 숙명적으로 받아들여

진다. 그리고 현대 학문이 바로 이 ‘주어진 것’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하는 것 역시 조금도 우연이 아니다.

(예컨대 바슐라르의 ‘새로운 합리주의’는 이 ‘주어진 것’에 대한 집요한 공격에 기반하고 있다)


우리는 주희에게서 전근대적 인식형이상학의 전형을 발견한다. 객체의 동일성은 理에 의해 보장된다.

천지가 생기기 전부터도 리는 있었다[未有天地之先 畢竟是先有此理].3)

그리고 천지는 리에 입각해서 존재할 수 있었다[先有箇天理了 却有氣]. 이 점에서 리는 선험적이며 초월적이다.

천지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선험적이고, 천지와 분리될 수 있다는 점에서 초월적이다.4)

그러한 현실적인 리는 늘 氣에 구현되어 존재한다. 인식은 기와의 부딪침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부딪침을 통해 이루어진 경험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기는 리가 전제된 차원에서 존재하며, 따라서 기와의 부딪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경험도 리의 선험성을 전제해서

이루어진다.5)


경험적인 것은 우발적 차원에서 개별적인 사실을 낳는 것이 아니다. 즉, 경험적인 현실이 모두 기로 구성된다 해도

기는 오로지 리의 마이너스적 차원에서만 존재한다.

형상은 질료에 구현되어야 실존할 수 있지만 질료가 온전한 형상의 현존을 가로막듯이, 리는 기가 있어야 그 터잡을

[掛塔] 곳이 있지만 기는 리의 순수성을 가로막는다.

따라서 진정한 인식은 기에 부딪쳐 생겨나는 경험을 넘어서는 데에서 성립한다.

객체의 동일성에 도달하는 것은 곧 리를 인식하는 것이다.


객체의 동일성과 더불어 주체의 동일성이 요청된다.

주희에게 인식의 주체는 마음[心]이고, 마음이 우리 몸을 주관한다.

경험 세계의 모든 것은 기의 작용이지만, 마음은 극미의 기로 되어 있는 투명한[虛明] 존재이다.

그것은 사람에게 있어 알맹이다. 그러나 이 알맹이 속에 더 근본적인 알맹이가 들어 있다.

마음이 경험적 자아라면 性은 선험적 자아이다.6) 그것은 참된 인식과 인의예지라는 도덕적 실체를 갖춘 本然의 성

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은 본연지성으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기질지성을 갖추고 있다.

본연지성은 개별적 실체들이 갖추고 있는 절대적 선이지만, 기질지성은 개별적 존재들에 묻어 있는 현실적인 기질

들이다. 따라서 기질지성은 늘 본연지성에 대해 마이너스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 안의 도덕적 알맹이를 찾아

가는 것은 마이너스 통장을 메워나가는 것과도 같다.

마치 거울의 떼를 벗기어내야 순수 투명한 본연의 거울이 보이듯이.


이제 이 주체의 동일성과 객체의 동일성 사이에 보다 핵심적인 동일성의 끈이 놓인다.

이러한 끈은 ‘性卽理’의 테제에서 가장 선명하고 극적으로 표현된다. 성즉리의 테제를 통해 우주와 인간(과 다른 모든

개체들) 사이에 동일성(일정한 상응)이 성립한다.7)

그러나 리는 기에 가려 있고 본연지성은 기질지성에 가려 있다. 따라서 성즉리를 깨닫는 것은 곧 기를 정화해내는 것

과도 같다. 즉, 수준 낮은 경험은 수준 높은 경험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일 뿐이며, 궁극적으로 미망과 욕망의 장인

경험의 수준을 벗어나야 성즉리의 깨달음에 도달한다. 그래서 사물에 나아가 그 하나 하나의 리를 窮究하는 것은 곧

우리 안의 본연지성을 발견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存心’과 ‘窮理’는 거울 이미지를 형성한다.8) 리라는 객체의 동일성, 성이라는 주체의 동일성, 그리고 성즉리라는 주객

사이의 동일성을 통해 주자학이 성립했다.


다산은 의심할 바 없이 18, 9세기에 발생한 탈주자학적 흐름에 속한다. 그런 점에서 그의 사유는 분명 근대의 문턱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일 이 시대의 새로운 사유들이 주자학과의 대립을 통해서 형성되었다면, 이 사유들의 근저에서 우리는 주자학의

논리 구조와 대립되는 구조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산에게서 이 구조들을 발견한다는 것은 그에게서 근대성의 전반적 경향인 경험의 인식론을 발견한다는 것을 뜻한다.


다산의 시대는 고증학의 시대이며 사변에서 검증으로 전환한 시대이다.

그러나 고증이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원전의 본래 모습을 복구하려는 것을 말하며, ‘본래’라는 말이 함축하듯이

새로운 경험을 확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산의 저작에서 우리는 종종 ‘其在古經 絶無此語’, ‘非洙泗之舊’ 같은 말들을 발견한다.

이것은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경험주의는 아니다. 또 다산을 포함해서 18, 9세기의 새로운 학문 경향을 ‘실학’이라고 할

때, 이것이 반드시 근대적인 것은 아니다.

서구에서 실용주의는 근대성의 최종 단계로서 등장했지만, 동북아의 학문은 원래 실용적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산 사유의 근대성을 보다 근본적인 곳에서 찾아야 한다.


전통 사회의 사유를 특징짓는 핵심적인 말은 ‘本然’이다. 본연의 선험적 존재를 부정하는 지점이 근대성의 문턱이다.

본연의 존재를 상정하고 그 본연의 존재가 인식과 도덕을 정초한 것은 동서의 사유에 공통된다.

우리는 생물학사에서도 아프리오리한 ‘표’를 전제했던 고전 시대의 박물학과 우발성에 기초한 실증 과학으로서의

생물학이 성립한 19세기가 대립함을 볼 수 있으며, 이러한 변화는 대다수의 담론들에서 공통으로 추출된다.


본연을 상정한다는 것은 모든 사물들을 그 본연을 기준으로 존재론적으로 또 가치론적으로 배열함을 뜻한다(가치-

존재론). 따라서 본연지성이 절대적 기준이라면 다양한 형태의 기질지성은 그 기준으로부터 각각 다른 거리에 떨어져

있는 현실적 존재이다. 때문에 근대성의 한 문턱은 바로 본연에 대한 거부, 그리고 현실적 존재에 대한 경험적 인식에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산이 본연의 개념을 강력하게 거부하는 까닭을 알 수 있다.


다산은 “본연의 성은 본래 같지 않다[本然之性 原各不同]”고 말한다.9)

본연의 리와 현실적 기의 대립이라는 주자의 선험적 구도에, 다산은 본래적 기를 제시한다.

그러나 다산에서의 ‘본래’는 더 이상 선험적-절대적 기준으로서의 리가 아니라 현실적 기이다.

현실 자체가 본래가 된다. 현실과 본래의 일치는 근대성의 문턱을 넘어섰을 때 일정하게 나타나는 哲學素이다.


선험적 구도를 취할 경우 리는 만물에 보편적으로 부여되며, 기의 차이에 따라 사물들의 차이가 형성된다.

기가 개별화의 원리로서 작용한다. 그러나 경험적 구도를 취할 경우 기가 만물에 보편적인 것이 되고 리는 부정된다.

그 리에 대비해 개별화의 원리로서 작동하는 것은 이제 현실적 도의이다.10)

도의를 통해 인성과 물성이 구분된다. 기에 대한 인식은 주체가 그에 부딪침으로써 이루어진다.

따라서 인식은 경험적이며 유한하다. 객체의 동일성은 무너진다.


이에 상관적으로 주체의 동일성도 무너진다. 性이 순수 기준으로서 존재할 때, 도덕적 행위는 마이너스의 행위,

되돌아가는 행위이다. 그러나 인간의 현실적 존재, 즉 心을 본래로서 인식할 때 인간의 도덕적 행위는 무엇인가로

나아가는 행위, 만들어 가는 행위로 변환된다.


性은 행위 이전에 존재하는 선험적 원리가 아니라 행위 후에 성립하는 理想이요 결정체이다[仁義禮智之名 成於行事

之後. 故愛人而後 謂之仁 愛人之先 仁之名未立也, 善我而後 謂之義 善我之先 義之名未立也, 賓主拜揖而後 禮之名立

焉, 事物辨明而後 智之名立焉. 豈有仁義禮智四顆 磊磊落落 如桃仁杏仁 伏於人心之中者乎].


마음은 경험을 향해 열려 있는 경향성으로 파악되며, 노력의 개념을 통해 특징지어진다.

다산의 사유를 ‘합리적’이라고 특징짓는 것은 막연한 의미가 아닌 한 정확하지 못하다.

合理的이란, 바로 이 말 자체가 성리학적인 표현이거니와, 바로 객체와 주체의 동일성 및 그 사이의 동일성을 전제하는

태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주희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중세적 합리주의든, 데카르트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근세 합리주의든, 합리

주의는 경험의 안개를 걷어내면서 세계와 인간의 투명한 알맹이를 발견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이며 나아가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대전제 아래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다산에게서 이런 태도가 막연한 신념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산의 정확한 의미에서의 ‘인식론적 정향’은

경험적이며 따라서 탈중세적임이 분명하다. 다산에게서 우리는 경험하는 주체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러한 성격은 그가 동북아 사유의 핵심 개념들을 감성적 언표들에까지 끌고 내려오려고 할 때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합리주의는 기호 작용적 의미론11)으로 기운다.

경험적 언어들은 산만하고 불투명하다. 합리주의는 이런 산만함과 불투명함을 조금씩 제거해 나아가 보다 추상적이고

심층적 존재를 찾아간다. 그에 따라 언어 또한 추상화된다.


다산은 이렇게 추상화된 언어들을 경험의 구체적 장으로 다시 환원시킨다.12) 이것은 仁을 人과 人으로, 의를 善과

我로, 禮를 示와 曲과 豆로, 智를 知와 白으로 환원시켜서 이해할 때 뚜렷이 드러난다.

이렇게 함으로써 다산은 儒者들의 언어를 구체적 사물들과 구체적 행위들에 맞닿는 지시 작용적 의미론으로 되돌리

려고 한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모든 경험주의, 실증주의의 시초에 나타나는 공통된 경향이다.


그러나 다산은 리/성을 거부하는 그곳에서 상제를 긍정함으로써 중세 저편으로 뒷걸음질친다.

서학의 영향으로, 다산은 인격신의 개념으로 기울어지며 고대적 신앙으로 회귀한다.13)

上帝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근거는 우리 마음 속의 道心에 있다. 그리고 이 도심에 의해서 인간은 초목금수와 구분된다.

결국 초월적 존재의 긍정, 초월적 존재와의 끈으로서 인간 고유의 마음의 긍정, 그리고 초월에 이어지는 마음의 고유

함으로부터 연역되는 인간 존재의 특수성이라는 논리 구조, 우리가 서구 중세나 초기의 근대에서 찾아낼 수 있는 논리

구조는 다산에게서 고스란히 발견된다.

다산은 근대성의 문턱을 넘어 새로운 시대를 흘낏 보았지만, 끝내 그 문턱을 온전하게 넘어서지는 못했다.



2. 연속과 불연속


중세와 근대 전체에 걸쳐 우리는 연속과 불연속 사이의 끝없는 긴장과 투쟁을 본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 사이의 연속성을 수립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결코 과거와 같은 식으로는 불가

능할 것이다.

근대성을 ‘전반적으로’ 볼 때 연속성은 불연속성에 의해 계속 무너져 내리곤 했다.

르네상스적 연속성은 데카르트에 의해 논박 당했고, 라이프니츠의 연속성은 칸트에 의해 논박 당했고, 베르그송의

연속성은 바슐라르에 의해 논박 당했다.(이것은 연속성의 사유가 대개 형이상학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주자와 다산의 관계에서도 확인한다.

연속/불연속 문제는 근대성의 확립에 있어 건너뛸 수 없는 또 하나의 철학소이다.


연속성은 상대적이다. 거리의 가로수는 떨어져 있지만 일정하게 떨어져 있다는 점에서는 연속적이다.

본격적인 불연속은 이 일정함 자체가 무너질 때 탄생한다.

신과 피조물 사이의 결코 넘볼 수 없는 거리에도 불구하고 最盛期의 중세를 지배한 세계의 연속성과 위계는 아리스

토텔레스에 뿌리 두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적 사물들은 種의 누층적 위계에 따라 질서 지워져 있다”(『신학대전』)는 아퀴나스의 자연 이해

에서 전형적인 위계적 사유를 발견한다.


무한소 미분에 입각한 라이프니츠의 절대적 연속주의, 지질학적 발견들에 토대를 둔 “자연에는 비약이 없다”(라이엘)

고 했던 근대 과학자들의 신념 속에서 우리는 중세에서 근대로 이어지는 연속주의의 전형을 본다.

이런 연속주의에서 우리는 경험을 초월하는 총체적 앎에의 신념, 세계의 완벽한 합리적 질서, 그리고 무엇보다 위계

적인 가치-존재론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은가.

오랜 세월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다듬어져 온 연속주의들에서 우리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合理的 믿음을 본다.


그러므로 주희에게서 기본적으로 매우 유사한 사유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해서 놀랄 필요가 있을까.

주희에게서 객체의 동일성과 주체의 동일성은 어떻게 이어지는가? 즉, 하늘과 사람은 어떻게 이어지는가?

주자는 ‘天命之謂性’을 ‘性卽理’로 해석함으로써 단번에 객체와 주체 사이에 끊어질 수 없는 끈을 수립한다.

리는 논리적으로 초월적이다[未有天地之先 畢竟也只是理]. 그러나 그 리가 개개의 개체에 부여됨으로써 현실적인

내재성을 띠게 된다.

초월과 내재, 하늘과 사람은 이어진다. 그 이어짐의 양태는 리와 기의 관계를 통해 형성된다.

리와 기는 누층적 위계를 형성한다. 마치 모래와 금이 다양한 그러나 일정한 비율로 섞이듯이 리와 기는 일정하게

분배되는 비율에 따라 결합한다.

물론 움직이는 것은 기이다. 리는 절대적 기준으로 존재하고 기가 달리 배합됨으로써 누층적 위계가 형성된다.

마치 거울은 그대로이되 그에 끼인 때는 얇을 수도 있고 두꺼울 수도 있듯이.

‘理一分殊’(程伊川)의 생각(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나무’)은 주희 사유의 뼈대를 온전히 드러낸다.14)


존재론과 인성론의 연속성은 다시 도덕으로 확장되어 이어진다. 리는 物理이자 道理이며, 自然이자 當然이다.

「계사전」의 ‘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에 이미 존재론, 인성론, 도덕의 연속성이 잘 표현되어 있거

니와, 주희는 이에 관련해 ‘誠者眞實無妄之謂 天理之本然也’(『中庸章句』)라 한다.


도덕적 행위는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본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寂然不動’의 경지에 다가서는 것이다. 인간에게 도덕은 明德으로서 처음부터 주어져 있다.

다만 인욕이 그것을 가릴 뿐이다(明德者 人之所得乎天, 而虛靈不昧 以具衆理 而應萬事者也. 但爲氣稟所拘 人慾所蔽

則有時而昏, 然其本體之明 則有未嘗息者, 『大學章句』)

결국 주희에게서 존재론, 인성론, 도덕은 단적으로 연결되며, 그 연결을 흐리는 기, 정, 인욕을 어떻게 다스리느냐가

학문의 관건이 된다.


나아가 개인과 사회 사이에도 연속성이 놓인다. 주희에게서 개인으로부터 시작해 인류, 우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위들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과 갈등은 부차적인 것이다.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개인은 축소된 사회이고 사회는 확장된 개인이다.

개인의 인식과 수양은 그대로 이어져 집안과 나라로 나아가고 결국에는 천하에로 나아간다.

위로는 왕으로부터 아래로는 평민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연속성이 놓인다. 그리고 그 연속성에 또한 일정한 방향성이

부여된다. 주희의 학문은 物格에서 시작해 意誠, 心正을 거쳐 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 이르는 연속적, 일방향적 사유

이다.


다산의 사유에서 중세적 연속성은 무너지고 새로운 계열화가 탄생한다.

다산에게서 리의 초월성은 거부되며 기의 내재성만이 인정된다.

리라는 초월성과의 단절이 발생한 것이다. 다산은 초기에(『중용강의』) 리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 기는 독립적인 존재이고 리는 의존적인 존재이다[蓋氣是自有之物 理是衣附之品].


그는 퇴계의 ‘理發’을 비판하거니와, 중요한 것은 그의 사유가 退栗의 구도 내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다산의 독자적인 사유에서 이제 리는 자취를 감추며, 경험 세계는 기질로서 설명된다.

다만 인간은 도의를 지님으로써 여타 초목금수와 불연속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15)


선험적 구도를 취할 경우 리는 만물에 보편적으로 부여되며 기의 차이에 따라 사물들의 차이가 형성되지만, 경험적

구도를 취할 경우 기가 만물에 보편적인 것이 되고 인간만이 도의를 지니게 된다.

리의 연속성이 도의의 불연속성으로 바뀐 것이다.


다산에게서 불연속은 무엇보다도 초목금수와 인간 사이에 그어진다.

주희에게서 문제가 되는 분절은 리와 기 사이에 있다. 경험과 선험 사이에 선이 그어진다. 그러나 경험과 선험이

합쳐져 이루는 세계의 누층적 위계는 연속적이다.

다산에게서 性의 의미는 급변한다. 다산에게 성이란 본연의 무엇이 아니라 현실의 무엇이다.

현실 속에서 확인되는 대로의 각 존재의 본성일 뿐이다. 본연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 현실적인 성이 본연일 뿐이다.16)

따라서 모든 것은 기질에 입각해 논의된다.

선험적 구도를 취할 경우 리는 만물에 보편적으로 부여되며 기의 차이에 따라 사물들의 차이가 형성되지만, 경험적

구도를 취할 경우 기가 만물에 보편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인간과 초목금수도 일차적으로는 연속적이다.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기질의 차원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만이 道義를 가짐으로써, 인간은 초목금수와 결정적인 불연속을 형성하게 된다.

‘人心者 氣質之所發也, 道心者 道義之所發也’(『孟子要義』)라는 구절은 이 점을 정확하게 드러낸다.


주희의 사유가 리의 보편성과 근원성에 기반하고 理一分殊와 기질의 누층적 위계에 입각한 연속의 사유라면, 다산의

사유에서는 기의 보편성과 현실적 성의 차이에 입각한 불연속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산의 사유를 불연속의 사유로만 특징지을 필요는 없다.

논의의 층위와 영역에 따라 달리 나타날 뿐, 연속과 불연속은 늘 같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 논의를 보다 구체화하기 위해 다산 사유에서 心의 위상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날카로운 이분법적 사유에서, 예컨대 데카르트적 사유에서, 心은 순수한 영혼이거나 순수한 물질이다.

즉, 순수 영혼이거나 한 臟器로서의 심장이다. 다산에게서 心은 물질적 계기와 도덕적 계기에 동시에 상관적이다.

달리 말해, 유형의 마음과 무형의 마음이 동시에 인정된다.


유형의 마음은 심장이고 무형의 마음은 虛靈不昧者이다.17) 허령불매자란 물론 도의를 가진 마음이다.

마음은 물질성과 도덕성의 매듭에 위치하고 있다. 이 점에서 다산의 사유에는 심신 일원론적인 측면과 이원론적인

측면이 공존하고 있으며[神形妙合], 전자가 자연에 대한 실학적 탐구를 가능하게 했다면 후자가 그의 도덕철학을

가능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다산이 리와 성의 연속성을 해체시켰다 해도, 하늘과 사람의 연속성은 또 다른 방식으로 고스란히 남는다.

하늘과 사람을 연속으로 보고, 사람과 초목금수를 확연하게 구분하는 것은 데카르트나 기독교 사상에서도 선명하게 나

타난다.

데카르트에 있어 인간의 몸과 마음은 확연하게 구분되며, 몸은 기계론적 설명의 대상인데 반해 마음(영혼)은 신과

연결된다. 그 끈은 본유 관념에 있다. 인간은 무한한 신의 관념을 가지고 있으나,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서 무한한

신의 관념이 유래할 수는 없다. 그래서 결국 그런 관념은 바깥의 무한한 존재가 인간에게 부여한 것이라고밖에는 생각

할 수 없는 것이다. 본유 관념은 유한한 인간과 무한한 신을 이어주는 빛이다.


다산 역시 세계를 기로 설명하고자 했음에도 인간이 하늘과 맺는 관계와 땅과 맺는 관계는 비대칭적이다.

다산에게 몸과 마음은 한 실체의 두 측면이며 데카르트적 이원론과 다르다.

그러나 다산에게서도 허령불매자로서 마음은 하늘로 이어진다. 물론 다산이 하늘을 요청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도덕

적 맥락이다.

그의 하늘은 단순 소박한 고대의 하늘, 즉 上帝일 뿐이다. 결국 다산은 성리학의 주지주의적인 리를 거부한 대신 감성

적인 형태의 하늘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귀신론으로 이어지며, ‘君子 處暗室之中 戰戰慄慄 不敢爲惡 知其有上帝臨女也’(『中庸自箴』)라는 구절

은 그가 근대적 세계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나를 드러낸다.

다산은 근대성의 몇몇 단초를 마련했지만, 본격적인 근대로 진입했던 것은 아니다.



3. 이성과 욕망


중세 사회는 안정성과 위계를 특징으로 한다. 서구의 경우 세계는 가치-존재론적으로 이해되어 왔다.

모든 사물은 더 많은 존재나 더 적은 존재를 내포한다. 존재론과 가치론은 변별되지 않는다.

따라서 존재의 함유량에 따라 무수한 사물들이 위계적 서열을 형성한다.

중요한 것은 생명계에 있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 이 사유가 사회 관계에 그대로 투영된다는 점이다.

역으로 말해 신분 사회에 대한 표상이 자연 세계에까지 투사되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18)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에서 한 예를 취해 보자. 모

든 모나드는 나름대로의 조직화의 원리를 지니고 있고 따라서 완성태들이다. 그러나 모든 모나드들이 동등한 것은

아니다. 완성태들 중에서 기억 작용을 하는 것은 ‘영혼’으로서 변별된다.

따라서 순수 영혼과 순수 물질이 양분되는 데카르트적 이분법이 아니라 정도에 따라 누층적 위계를 형성하는 사유가

성립한다. 다시 영혼과 정신이 변별되며, 물론 정신으로서의 모나드는 인간뿐이다.

이 정신의 수준에서 인간은 신과 소통하며, 때문에 가장 아래의 물질들부터 신에 이르기까지 피라미드적 구조가 건설

된다.19) 그리고 이런 피라미드적 사유에 신분적 차등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편입된다.


연속적 사유와 위계적 사유는 대부분 나란히 간다. 따라서 자연과 역사의 연속성이라는 테제가 붕괴하면서 본격적인

근대적 사회 이론이 등장한 것은 당연하다.

주희의 사유에서도 우리는 전형적인 위계적 사유를 발견한다. 현실적인 모든 것은 리와 기의 복합체이다.

리는 절대적 순수성으로서 존재하며 거기에 기가 얼마나 덜 묻어 있나에 따라 각 존재의 존재론적-가치론적 위상이

결정된다.

덜 묻어 있는 기는 그만큼 더 투명하며 그래서 뚫려 있고, 더 묻어 있는 기는 그 만큼 불투명하며 그래서 막혀 있다.20)


위계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이성이다. 가치-존재론은 완전성을 근거로 한다.

완전성이란 한 존재의 빈위들의 양, 존재의 양이다.

때문에 완전성은 모래에 섞인 금의 양과도 같다. 이 완전성을 토대로 한 존재의 가치-존재론적 위상이 가늠된다.

그 최상위에 가장 완전한 존재가 놓인다. 서구의 神과 주희의 최상위의 理가 그것이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이 최상위의 존재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에 의해 평가된다.

그래서 현실은 자연스럽게 마이너스가 된다. 결국 이성을 가리는 요소가 많을수록 저급한 존재가 되며, 모든 것은

이성으로부터 떨어진 거리에 의해 측정되는 것이다.


근대 초기에도 여전히 우리는 합리주의를 발견할 수 있고(물론 중세적 합리주의와 몇 가지 점에서 다르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합리주의(바슐라르 등)가 건재하지만, 근대성의 특징은 역시 이성 중심주의로부터의 탈피에 있다.

그것은 욕망하는 주체, 意志하는 주체의 발견이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위계적 세계관의 붕괴를 함축한다.

욕망이나 의지에서는 등급보다는 방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性이란 우리의 마음이 무엇인가에로 기울어지는 경향이다[性者 吾心之所好也].” 여기에서의 성은 주희의 리가

아니라 현실적 본성이다. 모든 존재는 각자의 현실적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본성이란 다름 아닌 경향성,

즉 ‘嗜好’이다.


기호는 어떤 부동의 실체이기보다는 무엇인가에로, 즉 타자에게로 기울어지는/끌리는 경향성이다.21)

따라서 인간의 성(= 심)은 늘 열려 있는 존재이다.

타자에로 열려 있는 것이다. 마음은 리처럼 자체 충족적이고 순수한 절대성이 아니다. 그것은 운동성이다.


욕망의 일차적인 성격은 타자에로의 기울어짐이다. 욕망은 주체가 가진 일차적인 속성으로서 자기 바깥으로 나와

타자에로 향하는 운동성이다. 그렇다면 ‘性者 吾心之所好也’라는 구절은 바로 인간의 성을 욕망으로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운동성은 다산에게서 일정한 방향성을 가진다.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일반적인 욕망론에서 욕망이 가지는 중요한 한 특성은 일정한 방향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굳이 평균적으로 말하면,

대부분의 욕망은 음식, 권력, 성 등으로 향한다. ‘飮食男女’라고 했거니와 여기에 ‘權勢’를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다산은 마음이 자생적으로(서구어로는 ‘spontanément’에 해당) 움직여 가는 방향성은 바로 仁義라고

말한다. 이 점에서 마음의 경향성이 결코 ‘人慾’을 뜻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 점에서 다산은 한편으로 욕망론을 제기한 근대적 철학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욕망의 자연적 방향성을 인의에로

향하는 것으로 본 점에서 비근대적 철학자이다.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 같은 현대 철학자들이 제시한 핵심적인 실천철학이 ‘건강한 욕망’에 있다면, 다산의 사유는

오늘날의 시점에서는 탈근대적 맥락에서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의 건강한 욕망에서 인의는 누락되어 있으며, 이 점에서 우리는 다산에게서 자생적이고(앞에서

말한 ‘자생적’과는 다른 의미) 탈근대적인 사유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여기에서 ‘자생적으로’라는 말은 ‘잠재적으로’를 의미하지 ‘저절로’를 의미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인의로 향하는 잠재적 방향성이 있다 해도, 그 방향성이 실현되려면 일정한 勞力이 요구된다.

우리는 멘느 드 비랑 이래의 반성철학이 노력의 테마를 집요하게 발전시켜 왔다는 점을 알고 있다.

노력이란 두드러지게 근대적인 주제이다. 우리는 다산에게서 이 주제를 발견한다.

다산에게 인간의 마음은 갈등의 장이다. 인간은 악한 행위를 하면서도 갈등한다. 늘 도의와 기질이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다[人恒有二志相反而並發者].


주자의 성 삼품설은 선인과 악인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처럼 논하지만, 다산에게 인간의 마음은 갈등의 장이며

따라서 인간을 서로 다른 존재로 만드는 것은 결국 노력인 것이다.


갈등하는 존재, 노력하는 존재는 또한 선택하는 존재이다. 다산에게서 초목금수와 인간 사이에 존재론적 분절선이

그어지는 이유는 인간에게 자유와 선택이 있기 때문이다[人之於善惡 皆能自作].

만일 인간에게 本然이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기질과 도의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 그리고 도의를 향하는 마음,

그리고 자유와 선택, 그리고 책임이 있다는 점이다. 인간과 금수가 현실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이 바로 본연인 것이다.


다산의 인간관은 여러모로 근대적이다. 그러나 전적으로 그럴까? 다산에게서 사람이 인의예지를 지키고, 개가 도둑을

쫓고, 소가 멍에를 지는 것은 ‘천명’에 의한 것이다.

근대성이란 주체가 자신의 근거를 바깥의 형이상학적 객체성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았을 때 성립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천명을 말할 뿐 아니라 그 천명에 인격적 요소까지 부여하는 다산이 근대성의 문턱을 넘어

섰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다산 사유와 주희로 대변되는 중세적 사유의 차이는, 일정한 테두리 내에는 커다란 것이었으나, 결국 오늘날의 관점

에서 볼 때 미묘한 것이었다고 해야 하리라.


지금까지 우리는 마치 곡예를 하듯이 다산 사유의 중세성과 근대성 사이를 오갔다. 그것은 바로 다산의 사유가 근대

성의 문턱 바로 거기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다산의 사유가 오늘날의 관점에서 근대성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고 할 때, 그 ‘오늘날’은 어떤 함축을 지니

는가? 우리는 그 ‘오늘날’의 의미가 최근 몇십 년 사이에 현저하게 변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하지 않을까.

다산의 사유가 우리가 서구에서 확인하는 전형적인 근대 사유가 아니라는 점은 우리가 서구/근대를 맹목적으로 추구

했을 때는 아쉬운 것으로 표상 되었다.

그러나 근대성/서구성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 볼 수 있게 된 오늘날, 다산의 사유는 맹아적인 형태였지만 우리

에게 또 다른 근대로서 다가온다. 만일 이 또 다른 근대가 역사적 연속성을 띠고서 계속 발전되어 왔다면?

이런 역사적 가정이 부질없는 것이라면, 이제 그러한 발전의 책임은 지금의 우리 자신에게 있을 것이다.

 

 




1) 伊東俊太郞, 『ガリレオ』(講談社, 1985)의 기본 테제. 이는 무엇보다도 플라톤의 수학이 물리계를 초월하는 정적

관조의 대상인데 비해, 아르키메데스의 수학은 물리적 운동을 모델로 만들어진 동적 분석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2) 하나의 예로서 임상의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고전 시대를 주도했던 의학의 토대는 질병 분류학이었으며,

이 분류학은 식물학적 계통학과 거울 이미지를 형성했다. 나아가 이런 분류/계통학이 의학이나 식물학만이 아니라

경제학이나 언어학에서도 나란히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개별 과학의 근저에서 작동하는 존재론의 역할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근대 학문은 이 존재론이 와해되고 개별 과학들이 자신들의 ‘데이터’를 가지고서 탐구하기 시작했을 때

성립했다. 그리고 그 데이터들의 양상은 우발성이다.



3) 이하 주희에 관련해 특별한 언급이 없는 모든 인용은 『주자어류』에서 한 것이다.



4) “且如萬一山河大地都陷了 畢竟理却只在這裡”(理氣上卷一)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생명계의 우발적 변화와는 상관

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고전 시대의 ‘표’를 연상하게 된다.



5) 현실적으로 기와 리의 선후를 따질 수는 없다[理與氣 本無先後之可言]. 그러나 “위로 추론해 가면[推上去時]” 리가

앞선다고 한다. 여기에서 위로 추론해 간다는 것은 논리적 선후로 봄을 뜻한다. 즉, 리는 체이고 기는 용이다.

체는 용에 앞서며, 따라서 리는 논리적으로기에 앞선다.



6) 다음 구절들이 시사적이다. “性便是心之所有之理 心便是理之所會之地”, “性如心之田地.”(性理二/性情心意等名

    義卷五)



7) 그러나 이것이 동어 반복은 아니다. “性卽理也. 在心喚做性 在事喚做理”(앞의 곳)라고 했으니, 만물의 보편적 지평

에서 말하면 리이고 각 개별 존재의 특수성(때로는 인간의 특수성)에서 말하면 성이다. 그러나 성은 개별자에 내재된

리일 뿐 다른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유비해서, 리가 ‘eidos’라면 성은 ‘psychê’이다.



 

8) “一心具萬理 能存心而後 可以窮理”, “心包萬理 萬理具于一心 不能存得心 不能窮得理, 不能窮得理 不能盡得心”

(學三/論知行卷九). 존심과 궁리를 거울상을 형성하지만, 굳이 발단을 따지자면 존심에 있다.

마음이 우선 움직여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론에서는 리가 선행하지만, 학문론에서는 심이 선행한다.



9) 이하 특별한 언급이 없는 인용은 모두 『맹자요의』에서의 인용이다.



10) “人則樂善耻惡 修身向道 其本然也. 犬則守夜吠盜 食穢蹤禽 其本然也. 牛則服軛任重 食芻齝觸 其本然也. 各受天命

不能移易. 牛不能强爲人之所爲 人不能强爲犬之所爲, 非以其形體不同 不能相通也 乃其所賦之理 原自不同.”(卷二)

여기에서 리는 본연=천명의 뜻이다. 각 존재에게 이 본연=천명이 현실적으로 차별화되어 주어져 있으며,

그래서 이 본연=천명의 정도가 가치-존재론적 분절을 가져온다.



11) 기호 작용적 의미론과 지시 작용적 의미론의 구분에 대해서는 들뢰즈, 『의미의 논리』(한길사, 1999), 계열 3을

     볼 것.



12) 예컨대 理에 대한 상세한 분석으로 『맹자요의』(告子上, 富歲子弟多賴麰麥易牙章)를 보라.



13) “鬼神不可以理氣言也, 臣謂 天地鬼神昭布森列 而其至尊地帶者 上帝是已.”(『中庸講義』, 卷一)



14) “伊川說得好. 曰 理一分殊, 合天地萬物而言 只是一箇理, 及在人 則又各有一箇理”(理氣上卷一)



15) “性有三品. 草木之性 有生而無覺, 禽獸之性 旣生而又覺, 吾人之性 旣生旣覺又靈又善. 上中下三級 截然不同.”

(『中庸講義』, 卷一) 여기에서 靈과 善은 물론 도의와 통한다. 여기에서 靈明은 인의예지라는 도덕적 실체가 아니라

인의예지로 화할 수 있는 잠재성이요, 이 잠재성을 현실화하는 것은 도덕적 실천[行事]을 통해서만 가능하다(仁義禮

智之名 本起於吾人行事 並非在心之玄理. 人之受天 只此靈明, 可仁可義可禮可智 則有之矣. 卷一).



16) “或性好山水 或性好書畵 皆以嗜好爲性, 性之字義 本如是也. 故孟子論性 必以嗜好言之. 其言曰 口之於味 同所嗜,

耳之於聲 同所好, 目之於色 同所悅, 皆所以明性之於善 同所好也.”(『孟子要義』, 卷一)



17) “有形之心是吾內臟也, 無形之心是吾本體卽所爲虛靈不昧者也.”(『大學講義』, 卷二)



18) ‘理一分殊’에서의 分은 이런 함축을 지닌다. 이 分은 자연계에서의 分이기도 하지만(“譬如一草木合在山上 此是

本分”), 또한 사회에서의 分이기도 하다(“天分卽天理也 父安其父之分 子安其子之分 君安其君之分 臣安其臣之分

則安得私”). 이런 分은 구체적인 수준에서까지 규정되곤 했다. “嘗謂呂與叔說得數句好云. 自斬至緦衣服異等 九族之

情無所憾, 自王公至皂隸儀章異制, 上下之分莫敢爭”(論語四學而下卷二十二).



19) Leibniz, Monadologie, §18-§30.



20) “以其理而言之 則萬物一原 固無人物貴賤之殊. 以其氣而言之 則得其正且通者爲人 得其偏且塞者爲物. 是以或貴或

賤 而不能齊也.”(『大學或問』) 이러한 차이는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성립한다. “然其通也 不能無淸濁之異,

其正也 或不能無美惡之殊. 故其所賦之質 淸者智而濁者愚 美者賢而惡者不肖. 又有不能同者.”(같은 책)



21) “性者人心之嗜好也. 如蔬菜之嗜糞, 如芙蕖之嗜水.”(『大學講義』, 卷二)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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