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철학 인문

실학 개관 (2)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6.05.11|조회수181 목록 댓글 0


21. 유몽인(柳夢寅, 1559~1623)


본관은 고흥(), 자는 응문(), 호는 어우당()·간재()·간암(묵호자() 등이며, 시호는 의정
()이다.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1589년 증광문과에 장원하였다. 문장이 뛰어난 그는 1593년 세자시강원문학
()이 되어 왕세자에게 글을 가르쳤다. 성리학의 대가 성혼()의 문인이기도 한 그는 스승의 교훈을
거역, 파문당하여 성혼이 죽은 뒤에 그를 모욕하는 글을 써서 비난을 받았다

황해도관찰사·좌승지·도승지를 거쳐, 1612년(광해군 4) 예조참판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벼슬을
내놓고 전전하다가 역모로 몰려 아들 약(瀹)과 함께 사형되었는데, 정조 때 신원되어 이조판서가 추증, 홍양의 운곡사
(), 고산()의 삼현영당()에 제향되었다. 설화문학의 대가였던 그는 《어우야담》·《어우집》 등의
문집을 남겼으며, 전서·예서·해서·초서 등 글씨에도 뛰어났다.



22. 유본학(柳本學)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백교(伯敎), 호는 문암(問菴). 유득공의 맏아들로 아우 본예(本藝)와 더불어 당시 예원(藝苑)
에서 이름이 높았다. 18세기 후반에 태어나 정조·순조 때 활약한 것으로 추정된다. 저서로 1812(순조 12)~13년의 시
작품 157편을 모아 엮은 1책의 〈문암집〉이 있고, 〈문암문고〉가 고본(藁本)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문암문고〉
에는 〈오원전〉·〈김풍헌전〉·〈김광택전〉·〈이정해전〉·〈김시적전〉·〈박열부전〉 등 6편의 전이 실려 있다.
 
이중에서 〈오원전〉은 고양이를 의인화한 가전(假傳)이다. 도적을 잘 살핀다는 것 때문에 등용되어 임금의 총애를 받던
오원이 점차 교만·포악해지면서 급기야 버림받고 도적으로 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전(史傳)의 형식을 갖춘 논찬
부분에서 작가는 사람에게는 시종(始終)이 있기 어려운 법이라고 전제한 뒤, 하찮은 과실이 큰 공을 덮지 못한 점을 진지
하게 지적했다.
 
나머지 전은 기인(奇人)이나 일사(逸士)의 행적을 기록한 탁전(托傳)이다. 〈김풍헌전〉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의원
김풍헌이 불치의 병을 고치고 신선이 되어 종적을 감춘 이야기를 적고 있으며, 〈김광택전〉은 신검술을 익혀 나라에
기여하려 했으나 인정받지 못하고 묻혀 지내야 했던 김체건·김광택 부자의 불우한 삶을 그리고 있다. 기이한 재주나
신통한 능력을 지녔으면서도 사회적 통념과 신분적 제약 때문에 좌절해야 했던 중인 이하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사회적
모순을 비판하고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하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23. 유수원(柳壽垣, 1694~1755)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남로(南老), 호는 농암(聾庵)·농객(聾客). 할아버지는 대사간을 지낸 유상재(柳尙載), 아버지는
통덕랑에 오른 유봉정(柳鳳庭), 어머니는 김징(金徵)의 딸이다. 아들로 유동휘(柳東暉)가 있다.
 
1694년(숙종 20) 충주에서 태어난 유수원(柳壽垣)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한성(현 서울)의 친척 집에서 자랐다.
1714년(숙종 40) 진사시에 급제하고, 1718년(숙종 44)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1722년(경종 2)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1723년(경종 3) 조정의 쇄신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예안현감으로 좌천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파직되었다.
그나마 유수원의 가문이 소론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같은 해 7월 다시 낭천현감으로 부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종이 일찍 죽고 노론계의 지지를 받은 영조가 즉위함에 따라 오랜 세월에 걸쳐 심한 정치적 규제를 받게 되
었다. 이른바 임인안옥(壬寅按獄: 1722년 노론의 네 대신을 처형한 사건)의 주모자로 종숙부(아버지의 사촌 동생)
유봉휘(柳鳳輝)가 노론에 의하여 처벌되었기 때문이다. 1728년(영조 4) 사헌부지평을 거친 이후 10여 년간을 줄곧
작은 고을의 수령으로 옮겨 다니게 되었다.

그러던 중 1737년(영조 13) 단양군수 재직 시 저술한 『우서(迂書)』를 보고 이광좌(李光佐), 이종성(李宗城), 조현명
(趙顯命) 등이 유수원의 탁월한 식견과 재질을 인정하여 추천하였다. 마침 영조의 탕평책이 실시되어 비변사문랑으로
중앙 정계에 복귀할 수 있었다.

뒤이어 사간원정언, 사헌부장령, 사복시정 등을 지냈으며 1741년(영조 17)에는 우의정 조현명의 추천으로 경연에 참가해
영조와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 뒤 영조의 특명으로 『속오례의(續五禮儀)』 편찬에 종사하다가 1744년(영조 20)
은퇴하여 10여 년간 초야에서 지냈다.

그러나 1755년 2월 전라도 나주에서 있었던 괘서 사건(반역을 선동하는 익명의 벽보 사건)의 주모자들을 처형한 뒤 특별
히 베푼 과거시험에서 응시생 심정연영조와 노론을 비판하는 내용의 답안지를 제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대적으로 소론에 대한 숙청 작업이 진행되면서 1755년 5월 유수원도 모반죄로 체포되어 결국 처형
되고 말았다. 또한 당시 유수원의 출신지라는 이유로 충주목충주현으로 강등되었다.
 
유수원(柳壽垣)은 당쟁의 여파로 불우한 일생을 보냈으나, 학문과 경륜이 뛰어났고, 유형원(柳馨遠), 이익(李瀷), 정약용
(丁若鏞)등과 함께 실학자의 한 사람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특히 그의 저서 『우서』는 그 속에서 제시되었던 여러
개혁안 가운데서도 상공업 정책과 화폐 정책 등의 분야에서 뛰어난 면모를 보여 시대를 앞선 경제 서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유수원『우서』에서 사·농·공·상의 신분제를 개편하고 전문화된 분업의 수행만이 조선이 이룩할 수 있는 부국안민의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산업의 피폐를 과도한 농본사상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농업과 함께
상업도 균등하게 진흥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지주전호제의 전면적 개혁보다는 수리의 확충, 농기구의 개선, 상업적 농업의 장려 등을 통해 농업 생산력의
증대와 농민 수입의 증대를 가져오게 하고, 호적 제도와 농촌 편제를 개혁하여 수취 제도를 공정히 해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 유수원이 이처럼 다른 실학자와 달리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정책을 제안할 수 있는 것은 오랜 기간 지방의 수령
을 역임하면서 도시와 농촌의 비교 관찰을 통하여 현실적 모순과 폐해를 어느 누구보다 심각하게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서로 1737년(영조 13)에 저술한 『우서』가 있다. 『우서』유수원이 모반죄로 사형을 당한 이후 저자 미상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본’, 등으로 세상에 유통되다가 1960년대에 이르러
유수원의 저작으로 밝혀졌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본’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본’ 모두 1737년 이전의
초간본과 1744년~1750년의 보정본(補訂本) 두 종류가 있다.



24. 유희(柳僖, 1773~1837)

본관은 진주. 초명은 경(儆). 자는 계중(戒仲), 호는 서파(西陂)·방편자(方便子)·남악(南嶽).
아버지는 목천현감 한규(漢奎)이며, 어머니는 이창식(李昌植)의 딸로 〈태교신기 胎敎新記〉를 저술한 전주이씨 사주당
(師朱堂)이다. 본디 몸이 허약했는데 천연두를 앓고 난 뒤에는 더욱 건강이 나빠졌고, 11세에 아버지를 여읜 후에는
어머니로부터 천문(天文)에서 조류(鳥類)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학문을 익혔다. 18세에 향시(鄕試)에 합격했으나,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1809년(순조 9)에는 충청북도 단양으로 이사가 농사를 짓다가 10년 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1821년 어머니가 죽은 후 과거에 응시하여 1825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829년 황감제(黃柑製)
에 직부회시(直赴會試)했으나 벼슬을 하지 않았다. 흉년을 예측하여 한발대책을 세우고, 홍경래의 난을 예측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구호대책을 세우기도 했다.
 
일생을 통하여 연구한 천문·지리·의약·복서·종수(種樹)·농정(農政)·풍수·충어(蟲魚)·조류 등에 관한 것들을 〈문통 文通〉
이라는 총서(叢書)에 수록했으나 현재 전하지 않고, 〈시물명고 詩物名攷〉·〈물명류고 物名類考〉·〈언문지 諺文志〉
만이 지금까지 간행·소개되었다. 그는 당시 실학자이며 정음학자인 정동유(鄭東愈)를 직접 사사하여 문자음운학에 대한
식견을 가지게 되었다. 역대의 학자들이 대부분 한자음을 연구하는 일로 일관했고, 우리말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없자
1824년에 1권 1책으로 된 〈언문지〉를 저술했다.

그는 〈언문지〉 전반에 걸쳐 한자음을 제대로 표기할 수 있는 한글이 되도록 교정(校定)하기에 힘썼으며, 한편 표음
문자로서의 한글의 우수성을 인정하여 한자음뿐만 아니라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를 다 적을 수 있도록 한글을
교정했다. 초성례·중성례·종성례·전자례의 4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의 내용을 보면, 훈민정음 15초성이라 하여 'ㄱ·ㄴ·
ㄷ·ㄹ·ㅁ·ㅂ·ㅅ·ㅇ·ㅋ·ㅌ·ㅍ·ㅈ·ㅊ·ㅎ·'을 들었으며, 아래아()의 음가를 'ㅏ, ㅡ'의 간음(間音)이라고 했고, 또한 전자례
(全字例)에서 인간이 발음할 수 있는 성음(成音)의 총수, 즉 한글로 기록할 수 있는 언문자의 총수를 1만 250개라 했다
(→ 국어음운론).
 
1820년대에 저술한 것으로 추정되는 〈물명류고〉는 당시의 국어어휘 7,000여 물명을 수집하여 유정류(有情類:동물)·
무정류(無情類:식물)·부동류(不動類:돌·쇠 등)·부정류(不靜類:물·불)로 분류한 물보류(物譜類)로 주석에서 1,660여
개의 우리 어휘를 사용했다.



25. 위백규(魏伯珪, 1727~1798)


본관은 장흥. 자는 자화(子華), 호는 존재(存齋)·계항거사(桂巷居士). 진사 문덕(文德)의 아들이다. 손이 귀한 집안의 첫째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 작은할아버지 세린(世璘)에게 사랑을 받으며 일찍 문자에 눈을 떴다. 20세 무렵에는 문중의 자제
를 모아 가르쳤고 1750년(영조 26) 장흥부사 이진의의 천거를 받았다. 1751년(영조 27) 봄에 윤봉구를 사문(師門)으로
정하고 스승이 있는 충청도 덕산까지 천리 길을 오가며 성리학에 힘썼다. 15년 동안 덕산에 실제 머문 기간은 얼마 되지
않으며 대부분 천관산의 장천재(長川齋)에서 경전탐구와 과거공부에 매달렸다. 이 기간에 〈의례문답 疑禮問答〉·〈대학
차의 大學箚義〉·〈고금 古琴〉 등이 완성되고, 〈정현신보 政鉉新譜〉·〈환영지 寰瀛誌〉 등의 초고가 준비되었다.


1757년에는 스승에게 〈시폐십조 時弊十條〉를 지어 올렸다. 이때 선대의 유훈(遺訓)을 정리·발굴하는 데도 힘썼다.
1765년 생원복시에 합격하고 과거에 대한 뜻을 단념했다. 1767년 독경병행(讀耕竝行)의 문중결사인 사강회(社講會)를
결성하여 문중결속을 꾀했으며 이로부터 자영농업적인 처사의 생활로 들어갔다. 가중사시회(家中四時會)라는 가족모임
도 결성하여 성리학적 규범에 입각한 가정상을 세우고자 했다. 1781년(정조 5) 모친상을 당하자 독경병행에서 물러나
독서인으로 돌아와 다산정사(茶山精舍)를 짓고 후진을 가르치면서 저작활동을 했다. 〈사성록 思成錄〉(1781) 전·후편과
1786년 전후에 〈만언봉사 萬言奉事〉를 완성했다. 또한 〈환영지〉(1787)·〈거병서 去病書〉(1789), 〈정현신보〉
(1791)·〈사서차의 四書箚義〉(1791)·〈격물설 格物說〉(1791) 등을 완성했다. 1794년(정조 18) 그의 나이 68세 때
서영보의 천거를 받아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1796년(정조 20) 2월 그의 저술을 본 정조의 요청에 의해 백성의 실상과 그 해결책을 논한 〈만언봉사〉를 올렸다.
정조는 그에게 옥과현감을 임명했는데 승지 윤숙과 헌납 한홍유가 〈만언봉사〉는 사투리를 마구 써서 임금의 귀를
더럽힌 무엄한 것이라고 성토했고, 성균관 유생들 또한 자기들을 비판했다면서 이에 항의했다. 옥과현감에 부임해서는
향약을 설치·시행하고 청렴하게 일했으나 그해말 고과(考課)에 걸렸다. 그로 인해 계속 사직 상소를 올렸지만 정조는
들어주지 않았다. 1797년(정조 21) 2월 중풍이 들어 눕게 되어 6월의 고과에서 최하등을 받게 되자 정조는 이러한 고과에
불만을 나타내고 "하고(下考)는 우선 지워버리고 경직(京職)에 자리나는 것을 보아 올리도록 하라"고 명했다.
정조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병이 악화되어 1798년(정조 22) 세상을 떠났다.
 
18세기 향촌사회에서 일생을 보낸 전형적인 향촌사족의 한 사람으로서 사회현실의 모순을 비판하고 향촌사회의 자율
성을 모색했다. 그의 문학관은 철저히 재도론(載道論)적 입장에 있었으며 현실비판적 문학을 높게 평가했다. '보리'
연작시와 〈연년행 年年行〉 연작, 구황식물연작 등의 한시, 〈농가구장 農家九章〉의 시조 9수, 그리고 가사 〈자회가
自懷歌〉는 모두 농촌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시들이다. 문집으로 〈존재집〉이 있으며 그의 글을 총망라해서 모아놓은
〈존재전서 存齋全書〉가 있다.



26. 이규경(李圭景, 1788~1856)


이덕무(李德懋)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정밀한 고정(考訂)과 변증(辨證)으로 조선 후기 실학의 영역을 넓혔다.
백과전서파로도 불린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백규(伯揆), 호는 오주(五洲)·소운거사(嘯雲居士).

할아버지 덕무는 북학파의 한 사람으로 박학강기(博學强記)하여 고금의 제자백가와 기문이서(奇文異書)에 통달했을
뿐만 아니라 문장에서도 새로운 조류를 일으켜 문명(文名)을 일세에 떨친 실학자였다. 아버지 광규(光葵)는 할아버지의
유고를 편집했으며 검서관(檢書官)으로 규장각에 봉직했다. 그는 이러한 집안의 분위기, 특히 할아버지의 학문과 사상
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진대(晉代)의 박물학자 장무선(張茂先)과 송대(宋代)의 학자 이석(李石)의 저서에
관심을 가져 박물학을 좋아했다. 청년시절에 천문·역법(曆法)·역사·제도·종교·의생활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자료를 수집,
그 근원을 고증·정리하여 체계를 세우는 데 주력했다. 1832년(순조 32) 병으로 요양중에 예전에 써둔 원고를 정리하기로
결심하여 1834년 가을에 〈오주서종 五洲書種〉의 '금석'(金石)과 '옥석'(玉石) 부분을 완성했고, 1839년(헌종 5) 가을
에는 '군사기술' 부분을 완성했다. 그후 우리나라 및 중국, 그밖의 고금사물(古今事物)을 대소와 아속(雅俗)의 구별 없이
의의가 있거나 고증의 필요가 있는 것을 모두 정리한 〈오주연문장전산고 五洲衍文長箋散稿〉를 저술했다. 이외에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이는 그가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신분적으로 서손(庶孫)이었으며 평생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초야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27. 이긍익(李肯翊, 1736~1806)


본관은 전주(), 자는 장경(), 호는 완산()·연려실()이며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다. 원교() 이광사
()의 아들로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정치적으로는 소론 집안이다.
아버지 이광사는 양명학자인 정제두()에게서 학문을 배우기 위해 강화도로 이사를 갔고, 정제두의 손녀를 며느
리로 삼았다. 정제두에게서 이광사로 이어지는 양명학을 일명 강화학파라 부르며, 그 맥은 이광사()―이충익
()―이면백()―이시원()―이상학()―이건창()으로 이어진다.

집안이 전통적인 소론이었기 때문에 이긍익이 활동하던 영조 때는 노론의 집권으로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다.
이로 인해 정계에 발을 들이지 않은 이긍익은 일찍부터 역경과 빈곤을 헤치고 초야에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의 저술로 남아있는 《연려실기술()》에서 노론, 소론, 남인, 북인 등 어느 한 쪽으로 쏠리지 않고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연려실'이란 한(漢)나라 유향(劉向)이 옛 글을 교정할 때 신선이 비단으로 만든 지팡이에 불을 붙여 비추어주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유명한 서화가였던 그의 아버지가 그의 서실(書室) 벽에 손수 휘호해준 것을 그대로 호로 삼
았다. 그의 가문은 전통적으로 소론(少論)에 속했다. 그의 5대조인 경직(景稷)과 그 동생인 경석(景奭)은 김장생(金長生)
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나고 호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낸 인물이었다. 특히 경석은 산림의 학자들을 대거 천거하여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이 이때 처음으로 요직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후 그가 천거한 송시열과 정적(政敵)이
되어 노소분당(老少分黨)이 이루어졌다. 이때부터 이긍익의 가문은 소론에 당적을 두고 노론과 정치적 각축을 벌였으며
증조부인 대성(大成)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소론의 대표자가 되었다. 조부인 진검(眞儉)은 노소당쟁의 절정이었던 신임
사화에서 주모자가 되어 노론의 축출에 앞장섰으나, 영조의 즉위로 국면이 반전되어 처형되었다. 이때 처형된 소론의
잔여세력이 일으킨 1728년(영조 4)의 이인좌(李麟佐)의 난과 1755년 나주괘서사건으로 아버지 광사는 유배당했다가
죽었다. 이처럼 소론으로 일관한 가문에서 어린시절부터 불우한 일생을 보내야 했던 그는 벼슬을 단념하고 오직 야사
(野史) 정리에만 몰두하여 〈연려실기술〉의 저술을 평생의 사업으로 삼았다.
 
당시 주자학적 이념이 지배하던 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소론의 선비들은 양명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아버지 광사는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이사하여 양명학의 거두인 정제두(鄭齊斗)에게서 배웠는데, 이긍익은 이러한
집안 분위기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약 30년간에 걸쳐 저술된 〈연려실기술〉은 조선의 역사를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
로 엮은 역사서로서 원집(原集) 33권, 별집(別集) 19권, 속집(續集) 7권으로 된 대저술이다. 이로써 강화학파(江華學派)가
역사학을 연구하는 실마리를 마련했다. 이 책의 의례(義例)에서 역사서술의 기본태도로 조직적인 체계, 편리한 열람, 충
분한 자료수집, 조급한 서술의 금지, 정확하고 풍부한 사실수록의 5가지 기준을 들고 있는데, 이는 곧 객관적인 자기인식
을 기반으로 한 사학을 주장한 것으로서 실학적 역사서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나타나는 역사
인식은 객관성·공정성·체계성·인과성·현실성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이는 뒤에 정약용(丁若鏞) 등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
을 주었다.



28.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조(正祖)가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검서관(檢書官)을 등용할 때 박제가·유득공·서이수 등과
함께 뽑혀 여러 서적의 편찬 교감에 참여했다. 청(淸)의 고증학을 수용하여 조선에서 북학을 일으키는 데 공헌하였다.
 
본관 전주(). 자 무관(). 호 형암() ·아정() ·청장관(). 정종() 별자() 무림군()의
후손. 통덕랑() 성호()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얼() 출신으로 빈한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어려서부터 박람강기()하고 시문에 능하여 젊어서부터 이름을
떨쳤다.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와 함께 약관의 나이에 《건연집()》이라는 사가시집(
)을 내어 일찍 문명을 날렸고, 이것이 청나라에까지 전해져서 이른바 사가시인()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북학파 실학자인 박지원(홍대용()·박제가()·유득공(서이수() 등과 사귀고 그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중국의 고염무(), 주이존() 등 고증학자의 영향도 받았다. 1778(정조 2)년에는 청나라에 
서장관() 자격으로 사은사(使)의 일원으로 여행하고, 연경에서 기균·이조원·이정원·육비·반정균 등 석학들과
교류하고 중국의 산천, 도리(), 궁실, 누대(), 초목, 조수() 등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가지고 돌아와 중국에
관한 안목을 넓히는데 기여하였다. 한편, 고증학 관련 서적을 가져와 북학론을 발전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1779년에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하여 문장에 뛰어난 학자들을 외각검서관()으로 등용할 때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를 수위()로 뽑아 임용하였다(이를 4 검서관이라 함). 이들은 실학 발달에 큰 기여를 하였다.
나아가 규장각에서 《국조보감()》《대전통편()》 《무예도보통지()》《규장각지()》《규장전운()》《홍문관지()》《송사전()》 등 여러 서적의 편찬 교감에 참여하였다. 
시문에도 능하여 규장각 경시()대회에서 여러 번 장원하여 정조의 신임을 크게 받아 내각검서관으로 승진하였다
(1781). 한양 지도인 <성시전도()>를 보고 읊은 백운시()가 정조로부터 ‘아()’라는 평가를 받아 호를
아정()이라 새로이 칭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검서관을 겸한 채 외직에도 나가서 사도시주부(簿), 사근도찰방(), 광흥창주부(簿),
적성 현감() 등을 거쳤으며, 1791년에는 사옹원주부(簿)가 되었다.

1793년 병들어 세상을 떠나자, 3년 뒤(1796) 그의 재주를 아끼던 정조가 내탕전() 오백 냥을 하사하여, 시문집
아정유고(稿)》(8권 4책)를 규장각에서 편찬하여 간행하게 하였다. 나아가 아들 광규()도 검서관으로 채용
하였다(1795). 문자학()인 소학(), 박물학()인 명물()에 정통하고, 전장() ·풍토() ·금석
() ·서화()에 두루 통달하여, 박학()적 학풍으로 유명하였다.

북학()을 고창하지는 않았으나 명()과 청()나라의 학문을 깊이 이해하고 고염무() 이래의 청조 고증학의
성과를 수용하여 실질적으로는 북학을 함으로써 후배들의 청조 고증학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이만운()의 책을 보완한 역사서 《기년아람()》, 사()의 윤리와 행실을 밝힌 《사소절
()》, 고금의 시화()를 수록한 《청비록()》, 명나라 유민()의 인물지인 《뇌뢰낙락서()》 그리고 《관독일기()》《이목구심서()》《영처시고(영稿)》《영처문고(영稿)》《예기고
()》《편찬잡고()》《입연기()》《앙엽기(앙)》《협주기()》《한죽당수필()》《천애지기서()》《열상방언()》이 있고, 이들은 《아정유고》의 문집과 함께 아들 광규()에
의해 망라되어 《청장관전서()》 71권 33책으로 편찬되었다.



29. 이만운(李萬運, 1736~?)


본관(本貫)은 광주(廣州). 자는 원춘(元春), 호는 묵헌(黙軒). 이당(李唐)의 차자 이집(李集)을 일대(一代)로 하고 좌통
례공 이극견의 차자 승사랑 이지(李摯)칠곡 입향조로 하는 광주이씨이다. 귀암(歸巖) 원정(元禎)의 후손으로 아버지
는 동지(同知) 이동영(李東英)이고, 어머니는 의성김씨, 부인은 평산신씨이다.


1736년(영조 12)에 태어나 생원시를 거쳐 1777년(정조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주부(主簿)·좌랑(佐郞)·도사(都事)
등을 역임했다. 경종 연간의 신임옥사 때 4대조 이담명(李聃命)이 앞서 숙종 연간의 경신환국 때 희생된 자신의 아버지
귀암(歸巖) 이원정(李元禎)의 원수를 갚으려 하였다는 죄목으로 형벌 받은 일로 인하여 벼슬길이 막혔다. 1795년(정조
19)에 특별한 교지로 불러 인견하고는 하교하기를 “이제야 스승 삼을 선비를 얻었다.” 라고 하였다. 드디어 지평(持平)·
안의현감·정언 등에 이르렀으나 요직에는 나아가지 못하였고. 벼슬은 통정대부 첨추에 그쳤다. 문장과 덕망이 뛰어나고
높아 유장(儒匠)이 되었으며, 천문·지리·역산(曆算)·명물(名物) 등에 밝았다.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에 살았다.
 
『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를 9년간에 걸쳐 편찬하였으며, 저서로 『묵헌문집(黙軒文集)』 등 유집(遺集)
수십 권이 있다.



30. 이벽(李檗, 1754~1786)


남인 학자들과 교유하여 주자학에 대항하는 새로운 사상을 모색했으며, 그 일환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여 신자가 되었고
포교에 힘써 우리나라 천주교의 수용에 크게 기여했다. 본관은 경주. 자는 덕조(德操), 호는 광암(曠庵). 세례명은 요한
세자.
 
아버지는 부만(溥萬)이다. 정약용(丁若鏞)의 누이와 결혼했다. 젊은시절에는 경학(經學)을 공부했는데, 이때부터 당시
사회와 주자학적 이념의 모순을 깨닫고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다 청나라에서 들어온 서학서(西學書)를 탐독하게 되었다.
이 책들에 대한 연구로 천주교의 교리뿐만 아니라 서구의 과학·문명에 대해 깊은 지식을 쌓아 천주교를 수용하는 기반을
다졌다. 그는 남인의 일원으로서 권일신(權日身)·권철신(權哲身)·이가환(李家煥)·이승훈(李承薰)·정약용 등과 교유했으며,
특히 정약용과는 절친한 사이로 큰 영향을 주었다. 1779년(정조 3) 정약전(丁若銓) 등 기호지방의 남인학자들이 광주의
천진암(天眞庵)과 주어사(走魚寺)에서 새로운 사상과 실학적인 학문을 모색하는 강학회(講學會)를 열었는데, 이때 그는
천주교에 대한 지식을 전했다. 1784년 중국에 가게 된 이승훈에게 영세를 받아올 것을 부탁했고, 그가 세례를 받고 돌아
오자 다시 그에게서 세례를 받아 정식으로 천주교도가 되었다.

이때부터 친분이 있는 학자와 중인 계층의 인물들을 방문하여 천주교를 전도했다. 권철신·정약용·정약전·이윤하(李潤夏)
등 남인학자들과 김범우(金範禹) 등 중인이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뒤 우리나라 최초의 교단조직인 '가성직자계급'(假
聖職者階級)을 형성하고 그 지도자가 되어 포교·강학 등 천주교 의식을 거행했다. 1785년 봄에는 수십 명의 양반과 중인
이 모인 가운데 설교하는 모임을 가지기도 했다. 이러한 천주교 모임은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으로 커다란
타격을 입었으며, 성균관 유생들의 척사운동(斥邪運動)으로 해산되었다. 그뒤 천주교 신앙에 대한 아버지의 격렬한 반대
로 유교적 윤리관과 새로운 사상 사이에서 고민하다 페스트에 걸려 죽었다.
 
이벽의 서학사상은 그의 저서인 〈성교요지 聖敎要旨〉에 잘 나타나 있다. 이는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제1부는 〈구약성서〉·〈신약성서〉를 중심으로 한 한시(漢詩)로 그리스도교 성서의 이해와 구세관(救世觀)을 표현한 부분이고,
제2부는 바울로의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중심으로 정도관(正道觀)을 서술한 것이다. 제1부에서는 천주교의 기본
사상인 창조와 원죄, 예수의 일생과 부활, 구세(救世) 등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남인 학자들의 사회에
대한 위기의식과 민중의 정신적·물질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이 표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제2부에서는 천주교 교리에
대한 이해와 윤리의식을 나타내고 있으며, 유교적인 동양의 윤리와 서학의 윤리가 종합된 다양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저자의 성서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우리나라의 천주교 수용이 성서를 기반으로 하여 당시 사회의 지배적 이념
에 대항할 수 있는 학문으로 전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기독교사상과 유교사상이 결합된 윤리와 규범을 제시
했으며, 이는 후일 우리나라 천주교의 수용에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정약종(丁若鍾)이 지은 고전소설 〈이벽선생몽회록〉에는 이벽의 강학회에서의 공덕과 죽음이 신성시되어 있어 그의 천주교 포교에 대한 기여가 당시의 신자들에게 큰 영향
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성교요지〉가 유일한 저작으로 전해진다.
 
이벽 성조는 1754년 경기도 포천군에서, 경주 이씨 이부만 공을 아버지로 청주 한씨를 어머니로, 6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셨고, 한 때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검단산 아래 윗두미에서 살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원로 대학자 성호
이익 선생께서 어린 이벽을 보고, '이 아이는 앞으로 반드시 아주 큰 그릇이 되리라'고 예언하였다.
성조께서는 다섯 살 때에 이미 철이 났고, 일곱 살 때는 경서를 읽었으며, 열아홉살 때, 권상복의 문집을 편찬하면서
'天學考'를 지어 실었고, '상천도(上天道)'라는 글을 지어, 부근에 있는 奉先寺 춘파대에 기증하였다. 스물 다섯 살 때,
성호 이익 선생의 학풍을 이으려는 선비들 중 정약전, 이승훈, 권 상문 등과 함께 학문을 연구하고 토론하였는데, 이때
이미 이벽 성조께서는 천학도리를 아주 깊이 깨닫고, 믿고 있었다. 특히, 천학에 관한 서적들은 현고조부 이경상 공이
소현세자를 모시고 중국에 8년간 있다가 귀국할 때, 아담샬 신부에게서 천주교 도리를 듣고, 중국인 천주교신자 5명을
환관으로 데리고 왔었는데, 그 때 가지고 왔던 천주교 책이 집안에 전하여 오던 것이었다.
이벽 성조는 키가 8척이요, 한 손으로 무쇠 백근을 들 수 있었으며, 풍채가 당당하고, 마음의 자질과 정신적 재능이 뛰어
났었고, 특히 언변은 기세 좋게 흐르는 강물에 비할 수 있었다고 한다 1779년 기해년 음력 섣달, 심산 궁곡의 한 절간
에서, 학자 권철신 성현이 정약전, 김원성, 권상학, 이승훈, 정약종, 이총억, 정약용, 권일신 등과 함께 강학회를 개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벽성조께서는 일백여리 눈길을 걸어 권철신 성현이 자주 우거하던 주어사에 밤늦게 도착하였으나, 강학회는 뜻밖에도 앵자산 너머에 있던, 폐허가 다 되어 스님들이 사용하지 않는 천진암 암자에서 열리고 있다 하므로,
그 길로 엄동설한인데도 눈에 덮힌 앵자산을 넘어 천진암에 이르러 촛불을 밝히시고 학자들과 경서를 담론하셨다.
여러 날 계속된 강학회에서, 학자들은 이벽 성조의 논증으로 천주교 도리를 대강 깨닫고 믿으며, 아는 바를 즉시 실천하
였다. 이때 이벽 성조께서는 성교요지를 하필하시고, 천주공경가를 지으셨으며, 정약종은 십계명가를 지었다.
더욱이 칠일마다 주일 하루는 천주공경에 바쳐야 함도 알았으나, 그 당시 우리 나라에는 요일이 없었고 또 요일을 아직
몰랐으므로, 음력으로 매월 이레, 열 나흘, 스무 하루, 스무 여드레를 주일로 삼아, 온종일 대재와 소재, 파공과 기구,
독경과 잠심으로 지냈다. 이 강학회를 통하여 이벽 성조께서는 천학을 천주교로, 천주학을 천주교로, 즉 학문적 지식을
종교적 신앙으로 발전시키셨다
1783년 가을, 이벽 성조께서는 몇 해 동안 수차에 걸친 시도와 노력 끝에 마침내 이승훈 성현을 북경 천주교회로 파견
하시며 "자네가 북경에 가게 된 것은 천주께서 우리 나라를 불쌍히 여기사 구원코자 하심일세. 북경에 가거든 즉시
천주당을 찾아가서 서양인들과 상의하며 모든 것을 물어 보고, 그 교리를 깊이 배우고, 그 종교의 모든 예배행위를 자세
히 알아보고, 필요한 서적들을 가져오게. 삶과 죽음의 큰 문제와 영원의 큰 문제가 자네 손에 달려 있으니,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게."하고 당부하였다. 이승훈은 이를 대스승의 말씀으로 마음에 새겨, 영세와 성서, 성물 구입 등 부여된
사명을 완수하고 귀국하여, 한국천주교회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1784년 이승훈 성현이 북경에서 영세하고 귀국하자 이벽 성조께서는 조선천주교회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권철신과
권일신 형제들을 입교시키고, 김범우, 최창현, 최인길, 김종교, 등도 바로 입교시켰다. 요한세자 이벽 성조와 이승훈
베드로와 권일신 프란치스꼬 사베리오, 이 3명의 학자들은 자기들이 개척한 새 종교를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전파하며,
동포들의 눈에 신앙의 광명을 비추어 주려고 노력하였다. 그 때까지는 복음 전파가 공공연하게 별 지장이 없이 행하여
졌다. 이벽 성조께서는 여러 양반들에게도 전교하여 입교시키셨는데, 이에 강력히 반대하는 지성인들과의 토론과 논쟁
이 불가피하였다.
고명한 학자로 평판이 높았던 이가환은 천주교에 대한 말을 듣고 "이것은 매우 큰일이다. 저 외국 교리가 이치에 어긋
나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대로 앉아 있을 수는 없다. 내가 가서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하겠다."고 하였다.
드디어 토론 날짜가 정해져 두 학자의 친구들과 호사가의 한 떼가 이 굉장한 토론을 참관하려고 이벽 성조의 집에 모
였다. 사흘동안 계속된 토론회는 마침내, 이가환의 완전한 패배로 끝났다. "이 도리는 훌륭하고 참되다. 그러나 이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불행을 갖다 줄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같이 말하며, 이가환은 돌아갔고 그때부터 천주교에
관하여 다시는 입을 열지도, 전혀 상관하지도 않았다. 두 번째 토론회는 문의현감 이기양과 하였는데 역시 광암
이벽성조의 대승으로 막을 내렸고, 서울 장안의 선비들은 술렁거리며 이벽성조께로 쏠리기 시작하였다.
1785년, 을사년 이른 봄, 드디어 최초의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1년간에 걸쳐 약 500명의 입교 영세자를 낸, 이벽
성조의 수제자들이었던 학자들은, 명례방 김범우 선생 집에서 집회를 열고 있었다. 교회예절 거행을 위하여 청색도포로
정장하신 이벽 성조께서 안 사랑 상좌에 벽을 등지고 좌정하시고, 학자들은 이벽성조 둘레에 무릎을 꿇고, 손에 책을
들고 엄숙한 자세로, 강론과 교리해설을 듣고, 함께 기도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1년 전에 북경 천주교회에 파견되었던
이승훈, 대학자이던 사우 거사 권일신, 그 아들 권상문, 정약용과 그 형들인 약종과 약전, 그 외에 최창현, 최인길, 김종교,
지황, 김범우, 이총억 등 한국천주교회창립의 기둥과 같은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이 때 추조금리들이 갑자기 들어와,
수색을 하고, 성물과 성서를 몰수해 가는 동시에, 집주인이며 중인 계급인 김범우 선생을 체포하여 가고, 다른 이들은
양반집안의 신분을 가진 학자들이므로, 그대로 집에 돌아가라고 하였다. 권일신 성현이 몇몇 양반학자들과 함께 추조
판서를 찾아가, 김범우와 함께 벌받기를 청하였으나, 추조판서는 이 양반학자들을 잘 달래다시피하여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김범우만은 계속하여 모진 매를 때리면서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양반들을 벌하는 방법이 있었으니, 그것은
당시 사회에서 같은 양반들의 문중세력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양반집 문중마다 종친회의를 열게 하고 천학을 규탄하는 통문이 서울에 돌려지기 시작하였는데, 서울 4대문
안과, 문밖, 그리고, 강상 지역과 강하 지역의 여러 대감집들과 양반집들에게 이 통문을 돌리는 책임자들이 따로 정해
졌을 정도였다. 그 중 경주 이씨 문중회의가 가장 혹심한 반발과 무서운 질투로 충만하였다.
그리하여 이벽 성조의 아버지 이부만 공은, 문중회의에 번번이 불려가서, 수치스러운 모욕과 문책을 당하였다.
아들 이벽 성조의 천학운동을 막든가, 막을 수 없으면, 아예 족보를 빼어버릴 터이니, 어디에 가서나, 경주 이씨로 행세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족보에서 삭제되면, 양반에서 상놈이 되는 것이고, 하루아침에 탈관삭직에 패가망신하는 것이
었다. 이벽 성조의 아버지 이부만공은, 가뜩이나 성격이 괄괄하고 쉽게 격분하는 무관기질이었으며, 체면과 위신을
크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사실 당시 한국의 양반들은 거의가 다 그러했다. 이부만공은 아들 이벽 성조를 불러 놓고,
달래고, 야단치고, 위협하고, 갖가지 수단을 다 써 가면서, 천학운동을 하지 말 것과, 집안 어른들을 찾아다니면서,
잘못을 빌도록 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문중에서는, 평창 이씨 집안에서의 이승훈 성현의 사과와, 라주 정씨
집안에서의 정약용 등의 사과 소식을 들은지라, 사과조차 하지 않는 이벽 성조의 태도에 대하여 한층 더 격분하였다.
그래서, 서울 시내 양반들의 통문이 사방으로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규탄 모임과 반대회합이 빈번하여 경주 이씨 문중회
의는 더 더욱 격렬하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부만 공은 펄펄 뛰며 발을 굴렸다. 온갖 수단 방법으로도 도무지 꿈쩍도
하지 않는 아들의 굳은 마음과 의지를 보고, 마침내 대들보에 노끈을 걸어, 목을 매달아 자살을 기도하였다.
이부만 공이 목을 매달게 되자, 어머니와 형제들과 친척들과 벗들이 모두 이벽 성조에게 달려들어, 아버지의 목매달은
모습을 가리키며 야단을 쳤다. 특히 그 어머니는 아들 이벽 성조에게, "천학이 아무리 좋은 도라지만, 아버지를 목매
달아 죽게 하는 그런 도를 누가 닦는단 말이냐? 아버지가 목매달아 죽는데도, 그래도 천학운동을 하러 다니겠다는
말이냐?" 하며 애원과 탄식과 절규로 부르짖었다. 이벽 성조께서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부모
에게 효도하는 것을 사회윤리의 제일로 삼는 때였다. 이벽 성조께서는, 우선 아버지의 죽음을 막기 위하여, "그럼 나가지
않겠습니다."하고 말하였는데, 즉, 집안과 문중이 조용히 가라앉을 때까지, 좀 고요히 있겠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었다. 이것이 이른 바 두 가지 뜻을 가진 말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목을 매달고 있는 이부만 공은 자살기도를 중단하고,
아들이 천학을 하러 다니지 않겠다고 하였음을 문중에 알렸다.
그러나 문중에서는 이를 신용하지 않고 이부만 공에게 이벽성조 자신이 직접 문중회의에 나와서 자명소를 할 것을 요구
하였는데, 이벽 성조께서는 아버지에게 "문중회의에 나가서 천주학을 배척하거나 그만두겠다는 말대신, 오히려 종친들
에게 천주교를 이해시키고, 경주이씨 문중이 모두가 먼저 천주를 공경해야 함을 알리고 오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아버지 이부만공은 아들이 천학운동을 그만두기로 했다고 문중에 이미 성급하게 통고한 후였기 때문에 입장이 난처하
였다. 이부만공은 아들의 외출을 금지하고, 문중 어른에게 사람을 보내어, 아들이 병으로 갑자기 앓아 누어서, 문중회의
에 나가 자명소를 할 수 없으니, 이해해 달라고, 예나 지금이나 으레 할 수 있는 핑계를 대는 동시에, 아들이 앞으로
천주학을 안하기로 하였으니, 믿어달라고 전하였다.
그러나 문중회의에서는 직접 글로 써서, 천주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도록 하라고 요구하였다.
아버지가 아들 이벽 성조에게, 붓으로 천주학을 하러 나가다니지도 않을 것이고, 또 천주학을 하지도 않겠다고 써서,
종친회에 보내라고 하자, 이벽 성조께서「령득경신기」라는 글을 지어내니, 이것은, 천주 공경의 필요성과 방법과 순서
를 간략하게 알리는 내용이었다. 아버지 이부만공은 이 글을 보고 크게 분노하며, 이는 내 자식이 아니라고까지 극언을
하였다. 할 수 없이 이부만 공은 아들이 글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병이 위중하며, 이벽이 이미 천주학을 하지 않기로 하였
으니 믿어줄 것을 거듭 부탁하였다.
그러자, 종친회에서는, 더욱 의심하며 격분하였다. 그렇게 건강하고, 그렇게 활달한 광암 이벽 성조께서 무슨 병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글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앓는다는 것은 믿을 수 없으므로, 문중회의에서 대표를 보내니, 그 대표에게
확약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당황한 이부만공은 이벽 성조를 후원 별당에 머물게 하고 출입문에 못을 치고, 집밖에는
새끼줄로 금줄을 매고, 종들을 시켜 지키게 하고는, 아들 이벽이 천주학을 하다가 천벌을 받아, 열병(속칭 염병)에 걸려
서 다 죽어가니, 가족들도 전염될까 두려워 출입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때에, 천주교 신자들이 이벽 성조를 뵈오러
찾아와도, 면회가 불가능하였으니, 아버지 이부만 공은 종들과 졸병들을 시켜서, 문전에 발도 들여놓을 수 없다고 강경
하게 거절하며 야단을 쳤다.
이벽 성조께서 모든 것이 다되어, 때가 이르렀음을 아시고, 목욕하고 깨끗한 의복을 갈아입은 다음, 의관을 바르게 한
후, 방안에서, 좌정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의관을 바꾸지 아니하며, 잠을 자지 않고, 기도와 묵상에만 전념하셨다.
당시 한국 예의상, 부모가 격노한 경우, 자녀들이 며칠씩 식사를 않하거나 못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천주밀험기 3권이 이때 저술되었다는 설이 있고, 혹은 2,3개월간이나 문중회의와 겨루면서, 집안에 감금당하여 있는
동안에 집필되었다는 설도 있다. 하여간, 마지막에 가서 스스로 식음을 전폐하고, 고요히 기도에 열중하면서, 천주를
생각하고 명상하다가, 단식 15일이 지나자, 완전 탈진하여, 그 자리에서 운명하시니, 1785년 음력 6월 14일 밤 12시였
다고 정학술의 이벽전은 전하고 있다.
그러나 유림과 문중에는, 당시에 한양의 선비들이 천주교로 몰리고 있었으므로 이벽성조를 그대로 두었다가는 장차
나라와 사회가 뒤집히게 되고, 경주이씨 문중이 멸문지화를 입는다하여 이벽성조를 독살하였다는 설이 내려오고 있으며,
1979년 6월 21일 이장 때 시신을 발굴하였는데 시신이 검푸르게 마르고, 치아가 검고 흑갈색으로 변색되어 있음을 보고,
당시 이장위원회의 유해관리 책임자였던 가톨릭의과대학 해부학 주임교수 권흥식박사도 검시하면서 독살의 가능성을
강조하였었다. 어떻든 이벽성조께서 신앙을 위하여 순교한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벽성조께서 운명하셨을
때, 양반대가의 집안이므로 사돈간이던 정약용 선생이 장례식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은 輓詞를 지었다. "神仙 나라 鶴이
人間世에 내려오사, 神聖한 風采를 보이셨네(仙鶴下人間 軒然見風神), 희고 흰 날개와 깃털, 눈같이도 하얗더니, 닭과
오리 떼들 샘내며 골부리고 미워했었네(羽 皎如雪 鷄鶩生嫌嗔), 울음소리 九重天을 振動시키고, 부르짖던 소리는 風塵
世에 出衆하셨었지(鳴聲動九 亮出風塵), 어느덧 가을되어 문득 날아가시니, 애닲아 탄식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乘秋忽
飛去 空勞人)." 일찍이 조선교구 제5대교구장이었던 다블뤼 안주교는 그의 朝鮮殉敎史備忘記 머리말 첫 페이지에서,
"진정한 의미의 조선천주교회 역사는 이벽의 저 위대한 강학에서 시작하였다"고 기록하면서, 한국천주교회 창립자 이벽
성조의 역할과 위치를 강조하였으며, 정약용도,"이벽이 수령이 되어 천주교회를 전파하였다"고 기록하였고(李檗首先
西敎), 김대건 신부도 조선천주교회 창립에 있어 李檗博士의 역할을 먼저 다루었다.
- http://chonjinam.org



31. 이수광(李睟光, 1563~1628)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峯).
 
아버지는 병조판서 희검(希儉), 어머니는 문화유씨(文化柳氏)이다. 1585년(선조 18) 별시문과에 급제, 승문원부정자가
되었으며, 전적을 거쳐 호조와 병조의 좌랑 겸 지제교(知製敎)를 지냈고, 1590년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의 종사관으로 종군했고, 북도선유어사(北道宣諭
御史)가 되어 함경도 지방에서 이반한 민심을 돌이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뒤 동부승지·병조참지를 역임했다.
1597년에 성균관대사성이 되었으며 진위사(陳慰使)로 2번째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그곳에서 안남(安南:지금의 베트남)
의 사신과 교유했다. 1601년에 홍문관부제학으로 〈고경주역 古經周易〉을 교정했고, 이듬해 〈주역언해 周易言解〉를
교정했으며, 1603년에 〈사기〉를 교정했다. 1605년에 안변부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사직하고 돌아와 1607년 홍주목사
로 부임했다. 1609년(광해군 1) 중앙으로 와서 도승지·예조참판·대사헌·대사간 등을 지냈다. 1611년 왕세자의 관복(冠服)
을 청하는 사절의 일원으로 3번째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유구(琉球)와 섬라(暹羅:지금의 타이)의 사신을 만나
그들의 풍속을 기록했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사직했다가, 1616년 순천부사가 되었고 임기를 마친 후에는 관직을 사양하고 수원에서
살았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도승지로 관직에 복귀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공주로 호종했다. 1625년 대사헌으로서 왕의 구언(求言)에 응하여 12조목에 걸친 〈조진무실차자 條陳懋實箚子〉를
올려 당시 가장 뛰어난 소장(疏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여 강화로 갔으며,
이듬해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죽었다.

이수광은 민본주의 정치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임진왜란의 참화가 군대를 미리 양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민생이 도탄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보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정치사상은 만언(萬言)
에 이르는 장문의 시무책인 〈조진무실차자〉에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은 ① 권학지실(勸學之實), ② 정심지실(正心之實),
③ 경천지실(敬天之實), ④ 휼민지실(恤民之實), ⑤ 납간쟁지실(納諫諍之實), ⑥ 진기강지실(振紀綱之實), ⑦ 임대신지실
(任大臣之實), ⑧ 양현재지실(養賢才之實), ⑨ 소붕당지실(消朋黨之實), ⑩ 칙융비지실(飭戎備之實), ⑪ 후풍속지실(厚
風俗之實), ⑫ 명법제지실(明法制之實) 등 12조로 되어 있다. 여기서 그는 허(虛)가 아닌 실(實)을 강조함으로써 임진왜란
후 흔들리던 국정과 사회 전반에 걸친 시정의 폐해를 개혁할 것을 주장했다. 여기서 보이는 그의 치세관(治世觀)은 덕치
주의(德治主義)의 구현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지만 민(民)에 대해 진취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종래의 주자학
적 유교 이념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이수광의 학문은 일종의 백과전서인 〈지봉유설 芝峯類說〉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에는 일본·안남·유구·섬라 등 동양
각국에 대한 소개뿐만 아니라 유럽에 대한 기술도 실려 있다. 즉 서양에 대한 새로운 지식, 이를테면 영국의 위치·기상·
생활양식, 군함의 구조와 무기 등을 소개하고 있다. 또 마테오 리치가 지은 〈천주실의〉를 소개하고 천주교 교리와
교황에 대한 설명도 곁들여 천주교의 전래에 실마리를 제공했다. 이 책은 천문에 대한 것에서 인물·초목·금수에 이르기
까지 방대한 내용을 분류·수록하고 있다. 이 책의 체제와 내용, 그것이 담고 있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사상은 그후
실학자들의 저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의 학문은 양명학에서도 많은 시사를 받아 저서 곳곳에 양명학을 소개하고 치양지(致良知)와 지행합일(知行合一)
에 대해 언급했다. 당시의 학계와 정계를 진가(眞假)의 대립으로 파악하는 논리는 그의 학문이 양명학과 연관되어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의 학문경향의 특징은 유교적 정통성을 발판으로 하면서도 주자학의 기본문제에 뛰어들기보다는 구체
적인 무실(懋實)을 강조하는 실학적 정신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지봉집〉·〈지봉유설〉이 있다.
수원 청수서원(淸水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32. 이송(李淞)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무백(茂伯)·고청(孤靑), 호는 노초(老樵)·서림(西林). 아버지는 세자시강원보덕 민곤(敏坤)이다.
아버지와 함께 낙론(洛論) 입장의 박필주(朴弼周)에게 수학했고,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하여 문명을 떨쳤다.
 
그러나 1756년(영조 32) 아버지가 탕평론자인 조영국(趙榮國)을 탄핵하다가 유배되어 금성(金城)의 역사(驛舍)에서 소사
(燒死)하자 관직에 뜻을 버렸다. 이후 서산(西山)에 은거하면서 성리학과 실사구시적 실학의 연구에 몰두했다. 성리학에
서는 이이(李珥)의 이기묘합설(理氣妙合說)을 존중했고, 실학자인 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이덕무
(李德懋) 등과 학문적으로 교유했다.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저술·연구에만 평생을 바쳤다. 담백한 필치로 자연경관과 전원생활의 정취를
묘사한 시들과 김창흡(金昌翕) 등 인물을 소재로 한 시·시론(詩論), 중국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론 등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저서로는 〈노초집〉이 있으며, 박지원과 함께 〈담헌묘지 湛軒墓誌〉를 지었다.



33. 이승훈(李承薰, 1756~1801)


한국 최초의 영세자이며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 중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평창(平昌). 교명은 베드로. 자는 자술(子述),
호는 만천(蔓川).
 
아버지는 참판(參判) 동욱(東郁)으로 남인(南人)이다. 외조부 이용휴(李用休)와 외삼촌 이가환(李家煥)의 영향을 받았고,
기호남인(畿湖南人)의 젊은 재사인 권일신(權日身)·정약종(丁若鍾)·정약전(丁若銓)·이기경(李基慶) 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권철신(權哲身)을 중심으로 한 성호좌파(星湖左派)의 학맥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서양의 신학문에 대한 수용
열정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1775년 정약용(丁若鏞)의 누이와 결혼했다. 1780년(정조 4) 진사시에 합격, 성균관에 들어
갔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1783년 동지사의 서장관인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갈 때, 천주교에 몸담고 있던 친척 이벽(李檗)의 부탁을 받고 서학
(西學) 서적을 구하기 위해 베이징[北京] 북천주당(北天主堂)에 찾아갔다. 거기에서 천주교 서적을 접하고 교리를 연구
한 후 입교할 것을 결심, 이듬해 예수회의 루이 그라몽(染棟材)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한국 최초의 천주교 영세신자가
되었다. 1784년 3월 수십 종의 교리서적과 십자고상(十字苦像)·성화·묵주 등을 갖고 귀국하여 이벽·최인길(崔仁吉)과
함께 권일신, 정약용 형제 등을 대상으로 전도활동을 하면서 영세를 집전했다. 다음해 명례동(明禮洞)의 중인(中人)
김범우(金範禹) 집에 한국 최초의 천주교회를 창설했다. 이들은 정기적인 신앙모임을 갖고 교리서를 언문으로 번역해
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일어나자, 이승훈은 가족들의 권유로 서학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척사문(斥邪文)을 짓고 배교했다.
 
1787년 비밀리에 복교하여 자치적인 교회활동을 개시하여 권일신을 주교로 하고 스스로는 신부가 되어 성사(聖事)를
집행했다. 1789년 10월 윤유일(尹有一)을 베이징으로 파견하여 자치적 교회의 존재를 알리게 하고 조상 제사에 대한
교리 해석과 성직자 파견을 부탁하게 했다. 그러나 베이징 교구장 알렉상드르 구베아(湯士選) 신부로부터 조상 제사의
불가 통보와 자치교회의 부정 회답을 받고 다시 배교를 했다. 1791년 평택현감으로 재직중 윤지충(尹持忠)·권상연
(權尙然)의 제사 거부로 비롯된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자 이기경을 비롯한 유생들의 상소로 관직을 빼앗기고
투옥, 옥중에서 배교를 하여 석방되었다.
 
1794년 중국에서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입국하여 전도활동을 하자 교회와 다시 접촉했으나, 다음해 윤유일·최인길·
지황(池璜) 등이 체포·처형되자 이에 연루되어 다시 투옥, 예산(禮山)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생활중 〈유혹문 牖惑文〉
을 지어 유포하고 1796년 유배가 풀린 후 〈주자백록동연의 朱子白鹿洞衍義〉를 짓는 등 교회활동을 단절한 입장을
밝혔다.
 
1793년 이후 기호남인들은 정치적으로는 채제공(蔡濟恭)을 중심으로 한 채당(蔡黨)과 그에 반대하는 홍당(洪黨)으로,
천주교에 대한 입장에서는 신서파(信西派)와 공서파(攻西派)로 나누어졌다. 채당 신서파에 속한 그는 반대파에 속한
홍낙안(洪樂安)·이기경 등에게 계속 공격을 받았다. 1801년 순조 즉위 후 정순왕후(貞純王后)와 심환지(沈煥之) 등
벽파세력 및 최헌중(崔獻重) 등 남인의 일부 세력은 남인 시파가 천주교와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계기로 사학
탄압(邪學彈壓)을 내세우면서 신유사옥를 일으켰다.
 
이에 이가환·정약용·권철신·정약종·정약전 등과 함께 연루되어 같은 해 2월 26일 정약종·최창현(崔昌賢)·최필공(崔必恭)·
홍교만(洪敎萬)·홍낙민(洪樂敏)과 함께 '구서전법'(購書傳法)·'밀통양인'(密通洋人)·'잠모가환'(潛謀家煥)의 죄목으로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했다. 1856년 아들 신규(身逵)의 탄원으로 대역죄는 신원되었다. 이후 신규와 손자 재의(在誼)는
1866년에, 증손 연구(蓮龜)·균구(筠龜)는 1871년에 순교하여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냈다. 문집으로 〈만천유고〉가 있다.



34. 이영준(李榮俊)


조선 인조 때의 역관이다. 서양의 과학기술 도입과 그 연구 분위기 조성에 이바지하였다.
 
1631년(인조 9) 진주사(使) 정두원()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예수회 선교사인 육약한(: Rodrigues, J.)
에게 서양식 천문추산법()을 배웠다.

그 후 서양의 과학서적·세계지도·지리서·천문서·천리경()·자명종() 등을 가지고 귀국하여, 서학(西) 연구
분위기 조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35. 이옥(李鈺, 1760~1815)


1760년 영조 36년에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며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의 후손이다. 호는 경금자(), 매화외사
() 이외에도 여러 개를 썼으며 자는 기상()이다. 이옥 가문은 5대조 이경유()와 그의 형 이경록(
祿)이 무과에 급제하면서 문관()에서 무관()으로 전신한 집안이다. 이경유가 본처와의 사이에 아들을 두지 못해
서자 이기축()이 대를 이었으며 기축 역시 무과에 급제하고 기축의 아들로 이옥의 증조부가 되는 만림()도
무과에 합격하였다. 이옥의 가문은 왕족의 피가 흐르고 있기는 하지만 무반으로 전신한 데다가 기축이 서자라는 사실과,
집안의 당색 또한 북인의 일파인 소북 계열이었기 때문에 노론의 세가 막강했던 조선 후기에 소북 촐신이라는 배경은
조선 사회에서 주변부로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이옥의 아버지 이상오()는 1754년 집안 인물 가운데에는 처음으로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첫번째 부인 남양 홍씨
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낳았고 사별한 후 재혼하여 다시 두아들을 두었는데 이옥은 이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가는 경기동 남양 매화동으로 바닷가에는 집안의 어장이 있었고 밭으로 일구는 땅도 있었으며 집안에는 수백권의
장서가 있어 이옥은 5~6세에 이미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집안을 살리는 방법은 과거에 합격하는 길이라 여겨 일찍부터 과거 공부에 매진하였으나 매번 고배를 마시고 1790년
드디어 과거의 1차 관문인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성균관 동재로 들어가 대과 공부를 시작하지만 때마침 불어닥친 정조
문체반정(문체를 바르게 돌린다)으로 인해 타락한 문체를 쓰는 '문제의 인물'로 거론되었다. 반성문의 글을 하루에 50
수씩 지어 문체를 뜯어 고친 연후에야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벌을 받는 이후에도 정조로 부터 문체가 이상하다하여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는 벌인 '정거()'를 당하였다가 군역에 강제로 복무케 하는 '충군()'의 벌을 두 차례
나 받았다. 정조는 명말청초에 유행하던 패관소품의 문체를 모방하여 과거시험을 치르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여 문체
반정을 단행하였으며 연암 박지원도 정조로부터 문체를 타락시킨 주범으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핵심 노론 집안인 연암
박지원에게는 반성문을 지어올리면 벼슬을 주겠다는 관대한 보상책으로 제시되었을 뿐이었다. 이후 이옥은 잘못된
글을 짓는다는 공식 낙인이 찍혀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고향 남양으로 낙향하여 지내다가 1815년 56세로 사망하였다.
 
박지원의 제자 세대로, 박지원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지는 않았으나 정조의 문체반정에 따르지 않았다. 실록(實錄)에는
이때 그가 소설문체를 써서 선비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었으므로 정조가 문체를 개혁한 뒤 과거를 보게 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과거에서도 문체를 고치지 못하자 그는 영남 삼가현(三嘉縣)에 이적(移籍)되었으며, 뒤에도 같은 문제로
다시 삼가현에 머물러야 했다. 그 뒤로는 본가(本家)가 있는 경기도 남양에서 저작활동에 힘썼다. 그는 유기론(唯氣論)
의 사고체계를 갖고 가치의 원천을 이(理)가 아닌 기에서 찾았다. 그래서 성현의 도리나 고문(古文)의 규범을 벗어나
현실을 직접 경험하고 인식해야 진실에 이른다고 했다. 일상생활에서 겪은 바를 그대로 나타내면 고전적인 명문(名文)
과 겨룰 만한 새로운 문학이 이룩될 수 있다고 했다.
 
이옥의 전(傳)은 23편으로 박지원의 작품보다 많고 등장인물과 사건이 훨씬 다양하다. 그 가운데 〈심생전 沈生傳〉
사대부 잡안의 청년이 중인 계급의 처녀를 사랑하다가 둘 다 비참하게 된 사연을 다루어 신분질서에 대한 비판이 들어
있다. 〈유광억전 柳光億傳〉에서는 과거 답안지를 지어 파는 사람이 자기는 급제하지 못하는 처지를 다루면서 세상에
못 팔 물건이 없게 된 상황을 그렸다. 그밖의 작품들에서도 사기꾼, 협객, 기인, 가객, 여염집 아낙네 등을 주인공으로
삼아 세태와 인정의 다양한 모습을 그렸다. 박지원이 한정된 소재에 고도의 표현 능력을 발휘했다면, 이옥은 흔히 있는
이야기를 받아들여 수법보다는 내용이 앞서는 작품을 내놓았다. 구전설화와의 관계를 밀접하게 하면서 단편소설의
성향을 즐겨 받아들였다. 이옥의 시는 어떤 명분을 내세워도 합리화될 수 없을 정도로 관습에서 어긋났다. 남녀관계에
대한 민요를 한시(漢詩)로 옮긴 〈이언집〉에서는 〈삼난 三難〉이라는 제목의 긴 서문(序文)을 앞세워 자기는 조선
사람이므로 중국풍의 국풍, 악부(樂府), 사곡(詞曲)이 아닌 이언을 짓는다고 했다. 하층민의 남녀관계를 여성적인 감각
으로 노래하는 것이 조금도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했고, 우리말의 어휘와 어법을 대담하게 살려서 한문으로 새기면
말이 되지 않는 문구(文句)를 쓰는 등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 한문으로 창작된 유일한 희곡 〈동상기 東廂記〉도 이옥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백화(白話)가 섞인 한문이라 읽기 어렵고 연극으로 공연할 수 없었다. 지은이의 다양한 취향을
알려주므로 흥미롭다.



36. 이용휴(李用休, 1708~1782)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성호학파의 대표적 문인이다. 창강 김택영과 다산 정약용은 각각 《소호당문집》권2와《여유당
전서(與猶堂全書)》권15에서 그의 문학활동을 높이 평가하였다. 주요 작품에 《혜환잡저》,《혜환시집》등이 있다.
 

본관은 여주, 호는 혜환이다. 실학파의 중심인물인 성호() 이익()의 조카이다. 그는 가학()을 바탕으로

문학활동에 참여한 성호학파의 대표적 문인이다. 이조참판에 추증된 이심(:1671∼1713)과 이심의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근기() 남인()을 포함한 다수의 재야문인뿐 아니라, 이언진(1740∼1766)을 비롯한 여항

()문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용휴가 조선시대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한국의 8대 문장가 중 한 사람인 창강() 김택영(:1850∼1927)

의 평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택영은 《소호당문집》 권2에서 그의 문학활동을 성만당()에 비유하고 있을 정도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또한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1762∼1836)도 《여유당전서()》 권15

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영조 말년에 명망이 당대의 으뜸이었다. 대개 탁마하여 스스로 새로워지고자 하는 자들이

모두 그에게 배워 문자를 다듬었으니, 몸은 포의()로 있었으나 문원()의 권()을 잡은 것이 삼십여 년이었다.

이는 옛날부터 없었던 일이다.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현 장천리에서 태어난 이용휴는 여섯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가가 있는 덕산현 염곡을 거쳐 12세

때는 잠시 서울에 살았다. 얼마 뒤 그는 막내 숙부 이익이 살고 있는 광주() 첨성리에 정착하였다. 이때부터 이용휴는

동생 병휴(:1710∼1777)와 함께 성호를 모시고 학문 수련에 힘썼다.

1725년 참의()를 지낸 유헌장()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며, 당시 문장 공부에 힘썼다. 28세 때 생원이 된

그는 34세 무렵에는 장형의 도움으로 첨성리를 떠나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가 서울과 안산을 오가며 평생을 살았다.

그가 거처를 서울로 옮긴 이유는 벼슬에 나아가기 위해서였으나 노론()의 집권으로 벼슬길에 나갈 수 없음을 깨닫

는데 만족해야 했다. 그가 평생 벼슬없이 살았던 것도 당쟁 때문이었다.

평생 벼슬하지 않았으나 아들 가환()이 1781년에 현직()에 있는 데다 자신의 나이가 70세인 탓으로 첨지중추

부사()의 은전을 입었다. 정조 6년 정월 보름 75세의 나이로 죽었다.




37. 이의봉(李義鳳, 1733~1801)


 조선 후기의 문신. 정조 때 신천 군수가 되었다. 사서 《고금석림》(40권)을 완성했다. 좌승지, 대사간, 공조참판 등을
지냈다. 저서《산천지》등이 있다.
 
본관 전주(). 자 백상(). 호 나은(). 초명 상봉(). 세자익위사익위()를 지내고 1773년
(영조 49)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부수찬 ·교리를 거쳐 1788년(정조 12) 신천() 군수가 되었다. 이듬해 사서()
고금석림()》(40권)을 완성하였는데, 참고 서적이 1400여 종에 달하였다. 1791년 검토관()으로 경연관
()을 겸하고 이듬해 좌승지가 되었다. 1799년 대사간에 승진하고 이어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저서에 《산천지(
)》 《나은만책()》 등이 있다.



38. 이이명(李頤命, 1658~1722)


조선의 문신·학자이다. 세종의 서자 밀성군의 후손으로 광원군 이구수의 5대손이자 영의정을 지낸 이경여의 손자였다.
숙종·경종대에 노론을 주도하며 주자도통주의(朱子道通主義)에 기반한 정치이념을 적극 실현하고자 하였으며, 서양
학술사상을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숙종과 후계문제를 놓고 독대를 하였다 하며, 1722년 소론에 의해 왕이 되려 하
였다 하는 탄핵을 받고 유배, 사사되었다. 자는 지인(智仁) 또는 양숙(養叔), 호는 소재(疏齋), 시호는 문충이다.
본관은 전주이다.
 
아버지는 사헌부대사헌을 지낸 이민적으로, 지평 이민채의 양자로 들어갔다. 아버지 이민적은 홍문관에 숙직을 설 때
그를 대동하였는데 어린 그를 상번 방에서 하번 방까지 뛰게 하여 배가 꺼졌는가를 물은 뒤, 책을 계속 읽게 하여 한시도
쉬는 틈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정자에 기용된 후 박사·수찬·응교·헌납·이조좌랑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했다.[2] 그후

여러 벼슬을 지냈고, 그 뒤에는 1686년 중시문과에 합격하였으다. 이후 여러 번 대제학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그뒤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강원도감사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승정원의 승지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송시열(宋時烈)·

김석주(金錫胄) 등 노론 거물의 지원 아래 노론의 기수로 활동했다. 노론의 중진으로 활약했다.

 

그뒤 강원감사를 지내다가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남인의 공격을 받고 영해와 남해로 유배되기도 하

였으나, 1694년 갑술옥사로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호조참의로 복귀했다. 그뒤 대사간까지 승진했으나, 기사환국

때 송시열 등과 함께 죽은 형 사명(師命)이 정치적으로 신원되지 못하자, 1698년 이를 문제삼았다가 공주로 유배되었다.

1699년 유배가 풀려 석방되었으나 기용되지 못하다가 1701년에 예조판서로 특임되었으며, 이후 한성부판윤·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그뒤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1706년 우의정이 되었고, 1708년 좌의정,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1717년 병환

중의 숙종은 그를 비밀리에 불러 독대를 하였는데, 그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숙종의 후사(後嗣) 문제에 깊이 관여하여,

독대(獨對)라는 형식으로 숙종과 비밀리에 만나, 세자(뒤의 경종)가 아닌 연령군(延齡君)·연잉군(延礽君 : 뒤의 영조)의

보호를 부탁받고 이들의 후원을 자임했다는 것 정도만 알려졌다.

 

1720년 숙종의 승하를 알리기 위해 청나라에 갔는데, 그곳에서 독일, 포르투갈의 신부들과 서양인 학자들을 만나 가까

이 지내면서 담론하였고, 그들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를 비롯한 천문학, 역산 등에 관한 책을 가지고 이듬해 귀국하여

이를 국내에 알리고, 널리 소개하였다. 그는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서 김창집·이건명·조태채와 함께 빈청에 모여

심중에 있는 사람을 세자로 세우기로 정하고, 그 이름을 써서 펴보이기로 하니 모두 '양'자를 써서 보였다.

이는 영조가 즉위하기 전의 아호가 양심헌으로 양자를 말하는 것이었다.[1] 그러나 훗날 소론에서 무고하기를 '양'자는

그의 자인 양숙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탄핵하였다.[1] 이후 노론 4대신과 함께 영조의 대리청정을 실현시켰으나, 소론

무고로 경상남도 남해로 유배되었다가 압송 도중 처형되었다.

 

그뒤 영조 때 경신처분으로 복관되었으며 경기도 과천의 사충서원에 제향되었다. 충문의 시호가 내려졌다.

 

유교적 화이사상에 입각하여 서구 문물을 받아들였음에도 수용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나 그 서구 문물의 유용성은 인정

했다. 한편 국내의 현실 문제는 수취체제, 특히 군역의 문제는 근본적인 것이라 보고 병역 조달의 개선 방안으로 정포론

(丁布論)을 제시했다. 종래의 양인(良人) 남성만을 대상으로 군역을 부과하던 방식을 벗어나, 신분에 관계 없이 양반

자제로부터 상민에 이르기까지 15~60세의 성인 남성이면 누구나 군역을 부담하되, 군역 또는 군역을 대신하여 일정액

의 포(布)나 전(錢)을 부담한다는 안이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저서에 시 ·문을 엮은 《소재집()》(20권)과 《강역관계도설()》 《양역변통사의()》

등이 있다.




39. 이익(李瀷, 1681~1763)


조선 후기 실학자로 본관은 여주(), 자는 자신(), 호는 성호()이다. 아버지는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이하진
()이며, 어머니는 권씨이다. 아버지가 1680년(숙종 6) 경신환국() 때 평안도 운산에 유배되었다가 이듬
해 그를 낳았고, 1682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로 인해 일찍 홀로되어 어머니와 함께 선산이 있는 경기도 광주
첨성리(, 현재 경기도 안산시 성포동)에서 살았으며,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10세까지도 글을 배울 수 없을 정도
였다고 한다.

이후 형 이잠()에게서 글을 배워 25세가 되던 해인 1705년(숙종 31) 증광문과()에 응시하였다가 낙방하
였다. 이듬해 형 잠()이 장희빈()을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당쟁의 제물로 장살()되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첨성리로 낙향하여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727년 그의 학문이 높다는 명성을 듣고 조정에서 선공감() 가감역()을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1763년(영조 39) 83세 때 조정에서 노인을 우대하는 예에 따라 첨지중추부사의 자급()을 내렸으나 그해 세상을
떠났다.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그의 학문은 아버지가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 가지고 온 수많은 서적들이 밑바탕이 되었으며, 처음 성리학
()에서 출발하였으나 차차 경직화된 학풍에서 벗어나 사회실정에 맞는 실용적인 학문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리하여 율곡 이이()와 반계 유형원()의 학문에 심취하였고, 특히 유형원의 학풍을 계승하여 천문 · 지리 ·
율산() · 의학()에 이르기까지 능통하였다. 이러한 관심분야는 한문으로 번역된 서학서(西)들을 접하면서
더욱 영역이 확대되고 깊이가 심화되었다. 

그는 투철한 주체의식과 비판정신을 바탕으로 그의 주요 저서인 《성호사설()》과 《곽우록()》을 통해
당시의 사회제도실증적으로 분석 · 비판하여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였다. 중농사상()에 입각하여 전제개혁
()의 방향을 개인의 토지점유를 제한하여 전주()의 몰락을 방지하려는 한전론()에서 찾았으며,
사회신분제도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노비를 점차적으로 해방시켜 양천합일()을 주장하였고, 정치적으로 당쟁이
발생하는 것은 이해()가 서로 상반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고 분석하여 양반도 산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사농합일(
) 이론을 주장하였다.


인재등용에 대해서는 과거제도에만 의존하지 말고 훌륭한 인재를 천거해서 채용하는 공거제()를 함께 실시할
것과 병역문제는 향병제()를 두고 나라를 지키기 위한 무기의 개발과 군마() 양성, 성지수축 등을 추진해야
한다는 등 여려 방면에 걸친 일대 혁신을 주장하였다.   

그의 학문은 후손으로 종자()인 이병휴()와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 · 이가환 등으로 이어졌고,
문인으로는 안정복() · 윤동규() · 신후담() · 권철신() · 정약용() 등으로 계승 ·발전되
었다.

그의 저서로는 《성호사설》과 《곽우록》 이외에 《성호선생문집()》《이선생예설()》《사서
삼경》《근사록()》 등이 있고, 편저에 《사칠신편()》《상위전후록()》《자복편()》
《관물편()》 《백언해()》 등이 있다.



40. 이제마(李濟馬, 1837~1900)


본관은 전주(), 호는 동무(), 자는 무평()이며, 1837년(헌종 3)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하였다. 
1888년(고종 25) 군관직에 등용되었다가 이듬해 사퇴하고, 1892년 진해현감()에 임명되어 지역민을 대상으로
자신이 고안한 사상의학()을 시험하기도 하였다. 다음해 현감직을 사직하고 서울에 돌아온 뒤 사상의학을 정리
하여 1894년 《동의수세보감》 2권을 저술하였다. 이후 고향 함흥으로 돌아가 의업에 종사하다가 1896년 함흥에서
발생한 최문환()의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고원군수()로 추천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는 평소 《주역()》의 태극설()인 태양()·소양()·태음()·소음()의 사상()을 인체에 적용,
기질과 성격에 따라 인간을 4가지 형으로 분류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의학에 적용하기 위해 연구를 계속하였다.
1900년 예전에 펴낸 《동의수세보감》의 내용을 수정 보충하는 증보판을 준비하다가 세상을 떠났고, 이를 그의 문인들이
정리하여 1901년 출간하였다. 책의 내용은 성명론(사단론()·확충론()·장부론()·의원론(
)·광제론()·사상인변증론() 등 7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종래 질병 치료에서는 음양오행설에 따라 음증인 환자에게는 온열재를, 양증인 환자에게는 냉재의 약재를 써서 병을
다스렸으나 사람의 체질과 성질에 따라 같은 질병이라도 그 처방이 달라야 한다는 이론으로 한의학의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깊다. 저서로는 《동의수세보원()》과 《격치고()》가 전하며,
1995년 《동무유고(稿)》 필사본이 발굴되었다.



41. 이종휘(李種徽, 1731~1797)


조선 후기의 양명학자·역사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덕숙(德叔), 호는 수산(修山). 병조참판을 지낸 정철(廷喆)
아들이다.

그의 개인적 기록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우나, 집안이 소론에 속하며, 양명학 학풍에 친밀한 분위기였음을 알 수 있고,
그 자신 공주판관의 벼슬을 지냈던 일이 있다.

그의 학문적 기본입장은 주자학의 폐쇄성을 벗어나 양명학을 적극적으로 긍정함으로써 학문적 기초를 확보하고 있다.
그는 우주가 생겨난 이래 가장 탁월한 명사(名士)로 장량(張良)·제갈량(諸葛亮)·왕수인(王守仁)의 세 사람을 들고,
왕수인은 재주〔才〕에서 제갈량과, 공적〔功〕에서 장량과 비슷할 뿐 아니라 지조〔節〕에서는 가장 뛰어났다고 극찬
하였다. 또한, 육왕학(陸王學)이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심학(心學)을 이어왔음을 지적하고, 정주학(程朱學)이 실천에서는
육왕학에 못미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는 왕수인의 문제점으로 《대학》을 잘못 읽었다고 지적함으로써,
《대학》 해석에서는 주희(朱熹)가 옳고 심학에서는 왕수인이 정당한 것으로 양면적 긍정을 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이
시대 유학의 가장 큰 사업은 주자학과 양명학 사이의 입문(入門)과 통로〔路脈〕를 변별(辨別)하는 것이라 강조함으로써,
주자학과 양명학을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인식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제자백가의 서적이 있음으로써 사서(四書)의 훌륭함이 드러나는 것처럼, 육구연(陸九淵)·왕수인의 심학이 있음으
로써 정주학이 드러나는 것이라 하여, 정통주의적 정주학에서 입장이 다른 모든 사상에 대하여 이단으로 배척하는 폐쇄
적 태도의 잘못됨을 비판하였다.

그 자신의 심학에서는 양지(良知)·근독(謹獨)·성(誠)의 개념들이 기초를 이루고 있다. 그는 양명학적 역사관에 기초한
역사연구를 통하여 독자적인 사학체계(史學體系)를 제시함으로써 중대한 업적을 남겨주고 있다. 그는 사학(史)과 경학
(經)이 표리관계를 이루며, 서로 날실〔經〕과 씨실〔緯〕로 짜여져 하나의 경사(經史)를 이루는 것으로 파악한다.
동료 홍양호(洪良浩)이종휘의 학문체계를 가리켜, 경술(經術)을 체(體)로 삼고 문장과 사학(史學)을 용(用)으로 갖
추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것은 한쪽에만 치우쳐서 학문의 전체성과 균형성을 잃어버린 편협함의 오류를 탈피한 것
이다.

또한, 그는 옛 역사(古史)를 지나간 역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로 말미암아 더욱 빛나는 것이요, 내 마음으로 말미암아
더욱 값지게 전달되는 것(由我而益傳)임을 역설하여, 역사인식에서 주체적 정당성을 중시 하였다.

대표적 역사저술인 《동사 東史》에서는 전통적 역사관을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매우 창의적 으로 응용하고 있다.
단군­기자­삼한­후조선으로 이어가는 민족의 기원을 확인하고, 부여·발해를 중시하여 만주땅을 고토(故土)로 인식하며,
특히 고구려를 역사계승의 중심축으로 삼고 있다 는 사실에서 도학적 역사관의 중화주의적 의리사관(義理史觀)과 구별
되는 민족사관의 단초를 볼 수 있다. 동시에 역사와 지리를 결합하여 해석하고 고증해감으로써 실학파 역사연구의 일환
으로 중요한 업적이 되고 있다.

신채호(申采浩)는 그의 역사인식에 대하여 “단군 이래 조선의 고유한 독립적 문화를 노래하였으며, 김부식(金富軾) 이후
사가(史家)의 노예사상을 갈파하였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사회적 모순에 대한 위기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옛 습속을 개혁하고 국가의 미 약한 세력을 강하게 바로잡는 개혁
론적 관심과, 과거제도·변경방어 등 제도의 개혁을 추구하는 실학적 사회의식을 보여주었다.

문집으로 《수산집》이 있다.



42. 이중환(李重煥, 1690~1756)


조선후기 문신으로 본관은 여주, 자는 휘조(), 호 청담()·청화산인()이다. 아버지는 참판을 지낸 이진휴
()이며, 어머니는 오상주()의 딸이다. 성호 이익의 재종손()이며 그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일찍부터
실사구시의 학풍을 이어 받았다. 1713년(숙종 3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가주서(),  승문원
부정자, 부사정()를 거쳐 1718년(숙종 44) 김천 도찰방()이 되었다.
 
                                택리지

1719년에는 승정원 주서를 거쳐 그 이듬해 사관, 전적을 지내고 1723년(경종 3)에는 병조정랑, 부사과에 임명되었다. 
1722년(경종 2) 노론 대신들이 세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경종을 제거하고 왕위를 찬탈하려고 모의했다는 목호룡()
의 고변으로 임인옥()이 발생하였다. 이는 당시 소론이 노론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목호룡은 공신으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영조가 즉위하고 소론의 모함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소론들이 탄핵을 받게되었다. 이중환은 말을
빌려 준 것이 문제가 되어 영조가 즉위한 후 목호룡과 함께 구금되었다. 이 일로 인해 1726년 절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으나 사헌부의 탄핵으로 다시 유배되었다. 그가 유배되었던 지역이 어디인지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는 전국 각지를 지역의 교통 지리 문화 인물 특산물 등을 정리하여 인문지리서인 택리지《(:
)》를 저술하였다. 이 책을 통하여 그의 인문지리사상과 이용후생의 실학정신을 살펴볼 수 있다.




43. 정두원(鄭斗源, 1581~?)


본관 광주(). 자 정숙(). 호 호정() ·풍악산인(). 시호 민충(). 1612년(광해군 4) 생원이 되고

1616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23년(인조 1) 성천()부사가 되고, 이듬해 관향사(使)로 모문룡()

에게 군량을 조달,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전향사(使)가 되어 임진강()의 군량수송을 담당하였다.

 

1630년 진주사(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할 때 홍이포() ·천리경() ·자명종() 등

서양의 기계와 마테오리치의 《천문서()》 《직방외기()》 《서양국풍속기(西)》 《천문도

()》 《홍이포제본()》 등의 서적을 가져왔다. 강원도관찰사 ·개성부유수와 중추부지사를 지냈다. 




44. 정상기(鄭尙驥, 1678~1752)


조선 후기 실학파의 지리학자로서 전국을 답사하였다. 과학적인 백리척을 이용하여 《팔도도(八道圖)》를 제작하였다.
토지개혁에서부터 병사(兵事)·산업·재정·의약 등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의 전반을 실용적인 이용 면에서 연구하였다.
 

본관 하동(). 자 여일(). 호 농포자(). 이익()의 문인. 일찍이 편모슬하에서 자라 병약하여 과거를

단념하고 집에서 학문을 연구하다가 실학파지리학자로서 전국을 답사하였다. 과학적인 백리척()을 이용,

《팔도도()》를 제작하여 역대 국경() 변천의 역사·지리학적 검토를 기도하였고 군현()의 연혁, 산천도리

(), 관방()의 성곽, 해로(), 북간도강계(), 궁실() 등에 대한 역사적 변천을 기술하였다.

 

특히 산천의 기사()는 정치적 관점을 벗어난 근대적 안목을 보여주었으며 토지개혁에서부터 병사(산업·재정·

의약 등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의 전반을 실용적인 이용면에서 연구하였다. 실학파 가운데 이익을 종조()로 하는

경세치용학파()가 그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다. 만년에 아들 항령()이 왕을 배종한 공으로 첨지중추

부사가 되었다. 저서로는 《인자비감()》, 《농포문답()》, 《심의설()》, 《도령편()》

등이 있다.




45. 정선(鄭敾, 1676~1759)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원백(元伯), 호는 난곡(蘭谷)·겸재(謙齋). 호조참판에 추증된 시익(時翊)의 맏아들로 한성 북부
순화방(順化坊)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3대에 걸쳐 현관(顯官)을 배출하지 못해 몹시 가난했으나 성품이 온화하고
부모에게 효도했으며 남과 사귐에 결코 화난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등 점잖은 군자적 풍모를 지녔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기 때문에 어려운 생계를 돕기 위해 이웃에 살던 대신 김창집(金昌集)에게 청하여 그의 권고와 추천으로 도화서
에 들어가 관직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 세자를 보위하는 위수(衛率)를 비롯하여 한성부주부·하양현감·청하현감·
훈련도감낭청·양천현령 등을 역임했다. 만년에는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동지중추부사에까지 올랐다.


그는 높은 화명을 통해 당대의 명류들과 교유했으며, 이병연(李秉淵)·조영석(趙榮祏)·유척기(兪拓基) 등의 노론계 인사
들과는 백악산(白岳山:북악산) 밑에 이웃해 살면서 평생지기로 절친하게 지냈다. 말년까지 왕성한 창작활동을 벌였기
때문에 조선시대 화가 중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현재 전하는 작품들은 친자연적(親自然的) 초속의식(超俗意識)과 풍류의식에 기초한 남종화풍(南宗畵風)의 정형산수와
산수인물 및 진경산수화가 대종을 이루는데, 특히 우리나라 산천을 소재로 그린 진경산수화에서는 현실감 넘치는 독창
적인 화풍을 완성하고 성행시킴으로써 한국적 회화 발전에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 전국의 명승지를 탐승하면서 우리의
국토미와 그 특색을 파악하기 위해 무덤을 이룰 만큼 많은 붓이 닳도록 사생을 하며 동국진경(東國眞景)을 대성시킨 그는
자기집 주변의 서울 사철경관과 명승·명소를 비롯하여 금강산과 지방 수령으로 재임했던 지역 주변의 풍경들을 즐겨
그렸다.


인왕산과 백악산 등의 바위덩이를 표현하기 위해 넓적한 붓으로 짙은 먹을 여러 번 칠하는 적묵법(積墨法)을 개발하고,
금강산의 개골암 등을 나타내기 위해 예리한 각필(角筆)의 수직준(垂直皴)을 창안했다. 그리고 전통적인 절파화풍(浙派
畵風)의 수묵법과 새로운 남종화법을 음양의 원리에 융합시킨 독특한 필묵법과 함께 대상의 특색 포착을 통한 인상주의
적 감각에 의해 형성된 강렬한 바위주름법과 편필(便筆)의 소나무 묘법, 부감법의 대각선 구도 등으로 생동감 넘치는
화법을 창출함으로써 중국 산수화풍의 영향 아래서 전개되어온 한국회화사에 일대 변화를 주었으며, 조선 후기 화단에
새로운 장을 열어 놓았다. 그의 이러한 진경산수화풍은 실경사생의 모범이 되어 당대화가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
면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 화가는 강희언(姜熙彦)·김윤겸(金允謙)·정황(鄭榥)·장시흥(張始興)·정충엽(鄭忠燁)·
김응환(金應煥)·김석신(金錫臣) 등으로 정선파라 불린다(→ 정선파).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금강전도 金剛全圖〉·〈인왕제색도 仁王霽色圖〉(호암미술관)를 비롯하여 〈청풍계도 淸風溪圖〉·〈인곡유거도 仁谷幽居圖〉·〈경교명승첩 京橋名勝帖〉·〈해악전신첩 海岳傳神帖〉(간송미술관)·〈정양사도 正陽寺圖〉
(국립중앙박물관)·〈만폭동도 萬瀑洞圖〉(서울대학교 박물관)·〈육상묘도〉·〈연강임술첩 漣江壬戌帖〉(개인 소장) 등이
있다.






(sambolove)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