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유몽인(柳夢寅, 1559~1623)
그러나 경종이 일찍 죽고 노론계의 지지를 받은 영조가 즉위함에 따라 오랜 세월에 걸쳐 심한 정치적 규제를 받게 되
그러나 1755년 2월 전라도 나주에서 있었던 괘서 사건(반역을 선동하는 익명의 벽보 사건)의 주모자들을 처형한 뒤 특별
그리고 지주전호제의 전면적 개혁보다는 수리의 확충, 농기구의 개선, 상업적 농업의 장려 등을 통해 농업 생산력의
집안이 전통적인 소론이었기 때문에 이긍익이 활동하던 영조 때는 노론의 집권으로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다.
1779년에 정조(正祖)가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문장에 뛰어난 학자들을 외각검서관(檢書官)으로 등용할 때 이덕무·
검서관을 겸한 채 외직에도 나가서 사도시주부(司䆃寺主簿),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
1793년 병들어 세상을 떠나자, 3년 뒤(1796) 그의 재주를 아끼던 정조가 내탕전(內帑錢) 오백 냥을 하사하여, 시문집
북학(北學)을 고창하지는 않았으나 명(明)과 청(淸)나라의 학문을 깊이 이해하고 고염무(顧炎武) 이래의 청조 고증학의
그의 저서로는 이만운(李萬運)의 책을 보완한 역사서 《기년아람(紀年兒覽)》, 사(士)의 윤리와 행실을 밝힌 《사소절
이벽 성조는 키가 8척이요, 한 손으로 무쇠 백근을 들 수 있었으며, 풍채가 당당하고, 마음의 자질과 정신적 재능이 뛰어
집안을 살리는 방법은 과거에 합격하는 길이라 여겨 일찍부터 과거 공부에 매진하였으나 매번 고배를 마시고 1790년
본관은 여주, 호는 혜환이다. 실학파의 중심인물인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조카이다. 그는 가학(家學)을 바탕으로
문학활동에 참여한 성호학파의 대표적 문인이다. 이조참판에 추증된 이심(李沈:1671∼1713)과 이심의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근기(近畿) 남인(南人)을 포함한 다수의 재야문인뿐 아니라, 이언진(1740∼1766)을 비롯한 여항
(閭巷)문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용휴가 조선시대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한국의 8대 문장가 중 한 사람인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1850∼1927)
의 평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택영은 《소호당문집》 권2에서 그의 문학활동을 성만당(盛晩唐)에 비유하고 있을 정도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또한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도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권15
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영조 말년에 명망이 당대의 으뜸이었다. 대개 탁마하여 스스로 새로워지고자 하는 자들이
모두 그에게 배워 문자를 다듬었으니, 몸은 포의(捕衣)로 있었으나 문원(文苑)의 권(權)을 잡은 것이 삼십여 년이었다.
이는 옛날부터 없었던 일이다.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현 장천리에서 태어난 이용휴는 여섯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가가 있는 덕산현 염곡을 거쳐 12세
때는 잠시 서울에 살았다. 얼마 뒤 그는 막내 숙부 이익이 살고 있는 광주(廣州) 첨성리에 정착하였다. 이때부터 이용휴는
동생 병휴(秉休:1710∼1777)와 함께 성호를 모시고 학문 수련에 힘썼다.
1725년 참의(參議)를 지낸 유헌장(柳憲章)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며, 당시 문장 공부에 힘썼다. 28세 때 생원이 된
그는 34세 무렵에는 장형의 도움으로 첨성리를 떠나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가 서울과 안산을 오가며 평생을 살았다.
그가 거처를 서울로 옮긴 이유는 벼슬에 나아가기 위해서였으나 노론(老論)의 집권으로 벼슬길에 나갈 수 없음을 깨닫
는데 만족해야 했다. 그가 평생 벼슬없이 살았던 것도 당쟁 때문이었다.
평생 벼슬하지 않았으나 아들 가환(家煥)이 1781년에 현직(顯職)에 있는 데다 자신의 나이가 70세인 탓으로 첨지중추
부사(僉知中樞府事)의 은전을 입었다. 정조 6년 정월 보름 75세의 나이로 죽었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정자에 기용된 후 박사·수찬·응교·헌납·이조좌랑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했다.[2] 그후
여러 벼슬을 지냈고, 그 뒤에는 1686년 중시문과에 합격하였으다. 이후 여러 번 대제학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그뒤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강원도감사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승정원의 승지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송시열(宋時烈)·
김석주(金錫胄) 등 노론 거물의 지원 아래 노론의 기수로 활동했다. 노론의 중진으로 활약했다.
그뒤 강원감사를 지내다가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남인의 공격을 받고 영해와 남해로 유배되기도 하
였으나, 1694년 갑술옥사로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호조참의로 복귀했다. 그뒤 대사간까지 승진했으나, 기사환국
때 송시열 등과 함께 죽은 형 사명(師命)이 정치적으로 신원되지 못하자, 1698년 이를 문제삼았다가 공주로 유배되었다.
1699년 유배가 풀려 석방되었으나 기용되지 못하다가 1701년에 예조판서로 특임되었으며, 이후 한성부판윤·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그뒤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1706년 우의정이 되었고, 1708년 좌의정,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1717년 병환
중의 숙종은 그를 비밀리에 불러 독대를 하였는데, 그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숙종의 후사(後嗣) 문제에 깊이 관여하여,
독대(獨對)라는 형식으로 숙종과 비밀리에 만나, 세자(뒤의 경종)가 아닌 연령군(延齡君)·연잉군(延礽君 : 뒤의 영조)의
보호를 부탁받고 이들의 후원을 자임했다는 것 정도만 알려졌다.
1720년 숙종의 승하를 알리기 위해 청나라에 갔는데, 그곳에서 독일, 포르투갈의 신부들과 서양인 학자들을 만나 가까
이 지내면서 담론하였고, 그들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를 비롯한 천문학, 역산 등에 관한 책을 가지고 이듬해 귀국하여
이를 국내에 알리고, 널리 소개하였다. 그는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서 김창집·이건명·조태채와 함께 빈청에 모여
심중에 있는 사람을 세자로 세우기로 정하고, 그 이름을 써서 펴보이기로 하니 모두 '양'자를 써서 보였다.
이는 영조가 즉위하기 전의 아호가 양심헌으로 양자를 말하는 것이었다.[1] 그러나 훗날 소론에서 무고하기를 '양'자는
그의 자인 양숙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탄핵하였다.[1] 이후 노론 4대신과 함께 영조의 대리청정을 실현시켰으나, 소론의
무고로 경상남도 남해로 유배되었다가 압송 도중 처형되었다.
그뒤 영조 때 경신처분으로 복관되었으며 경기도 과천의 사충서원에 제향되었다. 충문의 시호가 내려졌다.
유교적 화이사상에 입각하여 서구 문물을 받아들였음에도 수용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나 그 서구 문물의 유용성은 인정
했다. 한편 국내의 현실 문제는 수취체제, 특히 군역의 문제는 근본적인 것이라 보고 병역 조달의 개선 방안으로 정포론
(丁布論)을 제시했다. 종래의 양인(良人) 남성만을 대상으로 군역을 부과하던 방식을 벗어나, 신분에 관계 없이 양반
자제로부터 상민에 이르기까지 15~60세의 성인 남성이면 누구나 군역을 부담하되, 군역 또는 군역을 대신하여 일정액
의 포(布)나 전(錢)을 부담한다는 안이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저서에 시 ·문을 엮은 《소재집(疏齋集)》(20권)과 《강역관계도설(疆域關係圖說)》 《양역변통사의(良役變通私議)》
등이 있다.
이후 형 이잠(李潛)에게서 글을 배워 25세가 되던 해인 1705년(숙종 3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응시하였다가 낙방하
그는 평소 《주역(周易)》의 태극설(太極說)인 태양(太陽)·소양(少陽)·태음(太陰)·소음(少陰)의 사상(四象)을 인체에 적용,
그의 개인적 기록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우나, 집안이 소론에 속하며, 양명학 학풍에 친밀한 분위기였음을 알 수 있고,
그의 학문적 기본입장은 주자학의 폐쇄성을 벗어나 양명학을 적극적으로 긍정함으로써 학문적 기초를 확보하고 있다.
또한, 제자백가의 서적이 있음으로써 사서(四書)의 훌륭함이 드러나는 것처럼, 육구연(陸九淵)·왕수인의 심학이 있음으
그 자신의 심학에서는 양지(良知)·근독(謹獨)·성(誠)의 개념들이 기초를 이루고 있다. 그는 양명학적 역사관에 기초한
또한, 그는 옛 역사(古史)를 지나간 역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로 말미암아 더욱 빛나는 것이요, 내 마음으로 말미암아
대표적 역사저술인 《동사 東史》에서는 전통적 역사관을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매우 창의적 으로 응용하고 있다.
그는 사회적 모순에 대한 위기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옛 습속을 개혁하고 국가의 미 약한 세력을 강하게 바로잡는 개혁
문집으로 《수산집》이 있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는 전국 각지를 지역의 교통 지리 문화 인물 특산물 등을 정리하여 인문지리서인 택리지《(擇里志:
본관 광주(光州). 자 정숙(丁叔). 호 호정(壺亭) ·풍악산인(楓獄山人). 시호 민충(敏忠). 1612년(광해군 4) 생원이 되고
1616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23년(인조 1) 성천(成川)부사가 되고, 이듬해 관향사(管餉使)로 모문룡(毛文龍)
에게 군량을 조달,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전향사(轉餉使)가 되어 임진강(臨津江)의 군량수송을 담당하였다.
1630년 진주사(陳奏使)로 명(明)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할 때 홍이포(紅夷砲) ·천리경(千里鏡) ·자명종(自鳴鐘) 등
서양의 기계와 마테오리치의 《천문서(天文書)》 《직방외기(職方外紀)》 《서양국풍속기(西洋國風俗記)》 《천문도
(天文圖)》 《홍이포제본(紅夷砲題本)》 등의 서적을 가져왔다. 강원도관찰사 ·개성부유수와 중추부지사를 지냈다.
본관 하동(河東). 자 여일(汝逸). 호 농포자(農圃子). 이익(李瀷)의 문인. 일찍이 편모슬하에서 자라 병약하여 과거를
단념하고 집에서 학문을 연구하다가 실학파의 지리학자로서 전국을 답사하였다. 과학적인 백리척(百里尺)을 이용,
《팔도도(八道圖)》를 제작하여 역대 국경(國境) 변천의 역사·지리학적 검토를 기도하였고 군현(郡縣)의 연혁, 산천도리
(山川道里), 관방(關防)의 성곽, 해로(海路), 북간도강계(北間島疆界), 궁실(宮實) 등에 대한 역사적 변천을 기술하였다.
특히 산천의 기사(記事)는 정치적 관점을 벗어난 근대적 안목을 보여주었으며 토지개혁에서부터 병사(兵事)·산업·재정·
의약 등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의 전반을 실용적인 이용면에서 연구하였다. 실학파 가운데 이익을 종조(宗祖)로 하는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가 그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다. 만년에 아들 항령(恒齡)이 왕을 배종한 공으로 첨지중추
부사가 되었다. 저서로는 《인자비감(人子備鑑)》, 《농포문답(農圃問答)》, 《심의설(深衣說)》, 《도령편(韜鈴篇)》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