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 고자장구상(告子章句上)
▣ 고자장구상(告子章句上)
『凡二十章이라』
『 모두 20장(章)이다.』
『○ 맹자 ; 고자상 ; 제1장+1』
『○ 맹자 ; 고자상 ; 제2장+2』
『○ 맹자 ; 고자상 ; 제3장+3』
『○ 맹자 ; 고자상 ; 제4장+4』
『○ 맹자 ; 고자상 ; 제5장+5』
『○ 맹자 ; 고자상 ; 제6장+6』
『○ 맹자 ; 고자상 ; 제7장+7』
『○ 맹자 ; 고자상 ; 제8장+8』
『○ 맹자 ; 고자상 ; 제9장+9』
『○ 맹자 ; 고자상 ; 제10장+10』
『○ 맹자 ; 고자상 ; 제11장+11』
『○ 맹자 ; 고자상 ; 제12장+12』
『○ 맹자 ; 고자상 ; 제13장+13』
『○ 맹자 ; 고자상 ; 제14장+14』
『○ 맹자 ; 고자상 ; 제15장+15』
『○ 맹자 ; 고자상 ; 제16장+16』
『○ 맹자 ; 고자상 ; 제17장+17』
『○ 맹자 ; 고자상 ; 제18장+18』
『○ 맹자 ; 고자상 ; 제19장+19』
『○ 맹자 ; 고자상 ; 제20장+20』
*맹자 ; 고자상 ; 제1장
▣ 제1장(第一章)
『告子曰 性은 猶杞柳也요 義는 猶?짒也니 以人性爲仁義는 猶以杞柳爲?짒이니라』
『 고자(告子)가 말하였다. “성(性)은 기류(杞柳)와 같고, 의(義)는 나무로 만든 그릇과 같으니, 사람의 본성(本性)을 가지고 인의(仁義)를 행함은 기류(杞柳)를 가지고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다.”』
『性者은 人生所µ;之天理也라 杞柳는 ¸9柳요 ?짒은 屈木所爲니 若퀧휉之屬이라 告子言人性은 本無仁義하여 必待矯츍而後成이라하니 如荀子性惡之說也니라』
『 성(性)이란 사람이 태어날 때에 받은 바의 천리(天理)이다. 기류(杞柳)는 거류(¸9柳)이다. 배권(?짒)은 나무를 구부려 만든 것이니, 치(퀧)와 이(휉)같은 등속이다. 고자(告子)는 “인성(人性)은 본래 인의(仁義)가 없어서, 반드시 교유(矯츍)하기를 기다린 뒤에야 이루어진다.”고 말하였으니, 순자(荀子)의 성악설(性惡說)과 같은 것이다.』
『孟子曰 子能順杞柳之性而以爲?짒乎아 將캓賊杞柳而後에 以爲?짒也니 如將캓賊杞柳而以爲?짒이면 則亦將캓賊人以爲仁義與아 率天下之人而禍仁義者는 必子之言夫인저』
『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그대는 기류(杞柳)의 성질을 순(順)히 하여 배권(?짒)을 만드는가? 장차 기류(杞柳)를 해친 뒤에야 배권(?짒)을 만들 것이니, 만일 장차 기류(杞柳)를 해쳐서 배권(?짒)을 만든다면, 또한 장차 사람을 해쳐서 인의(仁義)를 한단 말인가? 천하 사람을 몰아서 인의(仁義)를 해치게 할 것은 반드시 그대의 이 말일 것이다.”』
『言 如此면 則天下之人이 皆以仁義爲害性而不肯爲하리니 是因子之言而爲仁義之禍也니라』
『 이와 같다면 천하 사람들이 모두 인의(仁義)가 본성(本性)을 해친다고 여겨서 즐겨 하지 않을 것이니, 이는 그대의 말로 인하여 인의(仁義)의 화(禍)가 된다고 말씀한 것이다.』
*맹자 ; 고자상 ; 제2장
▣ 제2장(第二章)
『告子曰 性은 猶湍水也라 決諸東方則東流하고 決諸西方則西流하나니 人性之無分於善不善也는 猶水之無分於東西也니라』
『 고자(告子)가 말하였다. “성(性)은 여울물과 같다. 그리하여 이것을 동방(東方)으로 터놓으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방(西方)으로 터놓으면 서쪽으로 흐르니, 인성(人性)이 선(善)과 불선(不善)에 구분이 없음은 마치 물이 동(東)•서(西)에 분별이 없는 것과 같다.”』
『湍은 波流?回之貌也라 告子因前說而小變之하니 近於揚子善惡混之說하니라』
『 단(湍)은 물결이 맴도는 모양이다. 고자(告子)가 앞의 말로 인하여 약간 변했으니, 양자(揚子)『[양웅(揚雄)]』의 선(善)•악(惡)이 혼잡 되어 있다는 말에 가까운 것이다.』
『孟子曰 水信無分於東西어니와 無分於上下乎아 人性之善也 猶水之就下也니 人無有不善하며 水無有不下니라』
『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물은 진실로 동(東)•서(西)에 분별이 없거니와, 상(上)•하(下)에도 분별이 없단 말인가? 인성(人性)의 선(善)함은 물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과 같으니, 사람은 불선(不善)한 사람이 없으며, 물은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것이 없다.”』
『言 水誠不分東西矣어니와 然이나 豈不分上下乎아 性卽天理니 未有不善者也니라』
『 ‘물은 진실로 동(東)•서(西)에 분별이 없거니와, 그러나 어찌 상(上)•하(下)에 분별이 없겠는가.’라고 말씀한 것이다. 성(性)은 바로 천리(天理)이니, 불선(不善)함이 있지 않다.』
『今夫水를 搏而躍之면 可使過챓이며 激而行之면 可使在山이어니와 是豈水之性哉리오 其勢則然也니 人之可使爲不善이 其性이 亦猶是也니라』
『 지금 물을 쳐서 튀어 오르게 하면 이마를 지나게 할 수 있으며, 격(激)하여 흘러가게 하면 산에 있게 할 수 있거니와, 이것이 어찌 물의 본성(本性)이겠는가? 그 세(勢)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사람이 불선(不善)을 하게 함은 그 성(性)이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搏은 擊也라 躍은 跳也라 챓은 額也라 水之過額在山은 皆不就下也라 然이나 其本性은 未嘗不就下요 但爲搏擊所使而逆其性耳니라』
『○ 此章은 言 性本善이라 故로 順之而無不善이요 本無惡이라 故로 反之而後에 爲惡이니 非本無定體而可以無所不爲也니라』
『 박(搏)은 침이다. 약(躍)은 뜀『[튐]』이다. 상(챓)은 이마이다. 물이 이마를 지나고 산에 있음은 모두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 본성(本性)은 일찍이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것이 아닌데, 다만 치고 격함에 사역을 당하여 그 본성(本性)을 거슬렸을 뿐이다.』
『 ○ 이 장(章)은 성(性)이 본래 선(善)하기 때문에 순(順)히 하면 불선(不善)함이 없고, 본래 악(惡)함이 없기 때문에 반대로 한 뒤에야 악(惡)함이 되니, 본래 정해진 체(體)가 없어서 하지 못하는 바가 없는 것이 아님을 말씀한 것이다.』
*맹자 ; 고자상 ; 제3장
▣ 제3장(第三章)
『告子曰 生之謂性이니라』
『 고자(告子)가 말하였다. “생(生)의 본능을 성(性)이라 한다.”』
『生은 指人物之所以知覺運動者而言이라 告子論性前後四章이 語雖不同이나 然이나 其大指는 不外乎此하니 與近世佛氏所謂『作用是性주:작용시성』者로 略相似하니라』
『 생(生)은 인물(人物)이 지각(知覺)하고 운동(運動)하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고자(告子)가 성(性)을 논한 앞뒤 네 장(章)이 말은 비록 똑같지 않으나, 그 대지(大指)는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근세(近世)에 불가(佛家)의 이른바 ‘작용(作用)하는 것이 성(性)이다.’한 것과 대략 서로 비슷하다.』
『孟子曰 生之謂性也는 猶白之謂白與아 曰 然하다 白羽之白也가 猶白雪之白이며 白雪之白이 猶白玉之白與아 曰 然하다』
『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생(生)의 본능을 성(性)이라 함은 백색(白色)을 백색(白色)이라고 이르는 것과 같은 것인가?” “그러하다.” “그렇다면 백우(白羽)의 백색(白色)이 백설(白雪)의 백색(白色)과 같으며, 백설(白雪)의 백색(白色)이 백옥(白玉)의 백색(白色)과 같은 것인가?” “그러하다.”』
『白之謂白은 猶言凡物之白者를 同謂之白이요 更無差別也라 白羽以下는 孟子再問而告子曰然이라하니 則是謂凡辭生者는 同是一性矣니라』
『 백지위백(白之謂白)은 모든 물건의 백색(白色)을 똑같이 백색(白色)이라 이르고, 다시 차별이 없다는 말과 같다. 백우(白羽)이하는 맹자(孟子)께서 다시 물으심에, 고자(告子)가 ‘그렇다.’고 말하였으니, 그렇다면 이는 모든 생(生)을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이 한 성(性)이라고 말한 것이다.』
『然則犬之性이 猶牛之性이며 牛之性이 猶人之性與아』
『 “그렇다면 개의 성(性)이 소의 성(性)과 같으며, 소의 성(性)이 사람의 성(性)과 같단 말인가?”』
『孟子又言 若果如此면 則犬牛與人이 皆有知覺하고 皆能運動하니 其性이 皆無以異矣라하시니 於是에 告子自知其說之非하고 而不能對也하니라』
『○ 愚按 性者는 人之所得於天之理也요 生者는 人之所得於天之氣也니 性은 形而上者也요 氣는 形而下者也라 人物之生이 莫不有是性이요 亦莫不有是氣언마는 然이나 以氣言之하면 則知覺運動은 人與物이 若不異也로되 以理言之하면 則仁義禮智之µ;이 豈物之所得而全哉아 此는 人之性이 所以無不善而爲萬物之靈也니라 告子不知性之爲理하고 而以所謂氣者로 當之라 是以로 杞柳湍水之喩와 食色無善無不善之說이 縱橫繆戾하고 紛췣舛錯이로되 而此章之誤가 乃其本根이니 所以然者는 蓋徒知知覺運動之蠢然者人與物同이요 而不知仁義禮智之粹然者人與物異也라 孟子以是折之하시니 其義精矣로다』
『 맹자(孟子)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만일 과연 이와 같다면 개와 소와 사람이 모두 지각(知覺)이 있으며, 모두 운동(運動)할 수 있으니, 그 성(性)이 다름이 없을 것이다.” 하시니, 이에 고자(告子)가 스스로 그 말이 틀렸음을 알고서 대답하지 못한 것이다.』
『 ○ 내가 살펴보건대, 성(性)이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바의 이(理)요, 생(生)이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바의 기(氣)이니, 성(性)은 형이상(形而上)이요, 기(氣)는 형이하(形而下)이다. 인물(人物)이 태어날 때에 이 성(性)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없으며, 또한 이 기(氣)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없다. 그러나 기(氣)로써 말한다면, 지각(知覺)•운동(運動)은 사람과 동물이 다르지 않은 듯하되, 이(理)로써 말한다면,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본성(本性)을 받음이 어찌 동물이 얻어 온전히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이는 사람의 성(性)이 불선(不善)함이 없어서 만물의 영장(靈長)이 되는 이유이다. 고자(告子)는 성(性)이 이(理)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이른바 기(氣)라는 것을 가지고 성(性)에 해당시켰다. 이 때문에 기류(杞柳)•단수(湍水)의 비유와 식색(食色)이니, 선(善)도 없고, 불선(不善)도 없다는 등의 말이 종횡(縱橫)으로 틀리고 어지럽게 잘못되었는데, 이 장(章)의 오류(誤謬)가 바로 그 뿌리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다만 지각(知覺)•운동(運動)의 움직이는 것은 사람과 동물이 같은 줄만 알고,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순수한 것은 사람과 동물이 다름을 몰랐기 때문이다. 맹자(孟子)께서 이것으로써 꺾으셨으니, 그 의(義)가 정밀하다.』
*맹자 ; 고자상 ; 제4장
▣ 제4장(第四章)
『告子曰 食色이 性也니 仁은 內也라 非外也요 義는 外也라 非內也니라』
『 고자(告子)가 말하였다. “식색(食色)이 성(性)이니, 인(仁)은 내면(內面)에 있고, 외면(外面)에 있는 것이 아니며, 의(義)는 외면(外面)에 있고, 내면(內面)에 있는 것이 아니다.”』
『告子以人之知覺運動者爲性이라 故로 言 人之甘食悅色者卽其性이라 故로 仁愛之心은 生於內하고 而事物之宜는 由乎外하니 學者但當用力於仁이요 而不必求合於義也니라』
『 고자(告子)는 사람의 지각(知覺)과 운동(運動)을 성(性)이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사람이 음식을 좋아하고 색(色)을 좋아하는 것이 바로 그 성(性)이다. 그러므로 인애(仁愛)의 마음은 내면(內面)에서 생기고, 사물의 마땅함은 밖에서 말미암는 것이니, 배우는 자들은 다만 마땅히 인(仁)에 힘을 쓸 것이요, 굳이 의(義)에 합하기를 구할 것이 없다.” 고 한 것이다.』
『孟子曰 何以謂仁內義外也오 曰 彼長而我長之요 非有長於我也니 猶彼白而我白之라 從其白於外也라 故로 謂之外也라하노라』
『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어찌하여 인(仁)은 내면(內面)에 있고 의(義)는 외면(外面)에 있다 이르는가?” 고자(告子)가 말하였다. “저들이 어른이라고 하므로 내가 그를 어른으로 여기는 것이요, 나에게 그를 어른으로 섬기려는 존경심이 있는 것은 아니니, 저들이 백색(白色)이라고 하므로 내가 그것을 백색(白色)이라고 하여 그 백색(白色)을 외면(外面)에 따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것을 외면(外面)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我長之는 以彼爲長也요 我白之는 我以彼爲白也라』
『 아장지(我長之)는 내가 저를 어른이라고 여겨 존경하는 것이요, 아백지(我白之)는 내가 저것을 백색(白色)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曰『(異於)』白馬之白也는 無以異於白人之白也어니와 不識케라 長馬之長也無以異於長人之長與아 且謂長者義乎아 長之者義乎아』
『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말『〔馬〕』의 백색(白色)을 백색(白色)이라고 함은 사람의 백색(白色)을 백색(白色)이라고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거니와, 알지 못하겠으나, 말의 나이 많은 것을 가엾게 여김이 사람의 나이 많은 것을 어른으로 존경함과 차이가 없단 말인가? 또 장자(長者)를 의(義)라고 여기는가? 그를 장자(長者)로 높임을 의(義)라고 여기는가?”』
『張氏曰 上異於二字는 宜衍이라하고 李氏曰 或有闕文焉이라하니라 愚按 白馬, 白人은 所謂彼白而我白之也요 長馬, 長人은 所謂彼長而我長之也라 白馬, 白人은 不異하나 而長馬, 長人은 不同하니 是乃所謂義也라 義不在彼之長이요 而在我長之之心하니 則義之非外가 明矣니라』
『 장씨(張氏)가 말하기를 “위의 ‘이어(異於)’ 두 글자는 마땅히 연문(衍文)이어야 할 것이다.” 하였고, 이씨(李氏)가 말하기를 “혹 궐문(闕文)이 있는 듯하다.” 하였다.』
『 내가 상고하건대, 말을 백색(白色)이라 하고 사람을 백색(白色)이라 함은 이른바 저들이 백색(白色)이라고 함에 내 그것을 백색(白色)이라고 한다는 것이요, 나이 많은 말을 가엾게 여기고 나이 많은 사람을 어른으로 여김은 이른바 저가 어른이라고 하므로 내 그를 어른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말을 희다 하고 사람을 희다 함은 다르지 않되, 나이 많은 말을 가엾게 여기고, 나이 많은 사람을 공경함은 같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이른바 의(義)라는 것이다. 의(義)는 저의 나이 많음에 있지 않고, 내가 그를 어른으로 존경하는 마음에 있는 것이니, 그렇다면 의(義)가 외면(外面)에 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曰 吾弟則愛之하고 秦人之弟則不愛也하나니 是는 以我爲悅者也라 故로 謂之內요 長楚人之長하며 亦長吾之長하나니 是는 以長爲悅者也라 故로 謂之外也라하노라』
『 고자(告子)가 말하였다. “내 아우이면 사랑하고, 진(秦)나라 사람의 아우이면 사랑하지 않으니, 이는 나를 위주로 하여 기쁨을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면(內面)에 있다고 이른 것이요, 초(楚)나라 사람의 나이 많은 이를 어른으로 여기며, 또한 내 어른을 어른으로 여기니, 이것은 어른을 위주로 하여 기쁨을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면(外面)에 있다고 이른 것이다.”』
『言 愛主於我라 故로 仁在內요 敬主於長이라 故로 義在外라』
『 사랑은 나를 위주로 하므로 인(仁)은 내면에 있고, 경(敬)은 어른을 위주로 하므로 의(義)는 외면(外面)에 있다고 말한 것이다.』
『曰 耆秦人之灸가 無以異於耆吾灸하니 夫物이 則亦有然者也니 然則耆灸亦有外與아』
『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진(秦)나라 사람의 불고기를 좋아함이 나의 불고기를 좋아함과 다를 것이 없으니, 물건은 또한 그러한 것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고기를 좋아함도 또한 외면(外面)에 있단 말인가?”』
『言 長之, 耆之가 皆出於心也라 林氏曰 告子以食色爲性이라 故로 因其所明者而通之하시니라』
『○ 自篇首로 至此四章에 告子之辯이 屢屈而屢變其說하여 以求勝하고 卒不聞其能自反而有所疑也하니 此正其所謂『不得於言 勿求於心주:부득어언』者니 所以卒於鹵莽『(로무)』而不得其正也니라』
『 장지(長之)와 기지(耆之)가 모두 마음에서 나옴을 말씀한 것이다.』
『 임씨(林氏)가 말하였다. “고자(告子)가 식색(食色)을 성(性)이라 하였기 때문에 그가 잘 알고 있는 것을 인하여 통하게 하신 것이다.”』
『 ○ 편(篇)의 머리로부터 여기까지의 네 장(章)에 고자(告子)의 변론이 여러 번 굽혀졌는데, 여러 번 그 말을 바꾸어 이기기를 구하였고, 끝내 스스로 돌이켜 의심한 바가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으니, 이것이 바로 이른바 ‘말에 이해되지 못하거든 마음에 알기를 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는 이 때문에 노무(鹵莽)『[거칠고 소략함]』함에 마쳐서 그 올바름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맹자 ; 고자상 ; 제5장
▣ 제5장(第五章)
『孟季子問公都子曰 何以謂義內也요』
『 맹계자(孟季子)가 공도자(公都子)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의(義)가 내면(內面)에 있다 이르는가?”』
『孟季子는 疑孟仲子之弟也니 蓋聞孟子之言而未達이라 故로 私論之하니라』
『 맹계자(孟季子)는 맹중자(孟仲子)의 아우인 듯하다. 그가 맹자(孟子)의 말씀을 듣고 통달하지 못하였으므로 사사로이 논한 것이다.』
『曰 行吾敬故로 謂之內也니라』
『 <공도자(公都子)가 말하였다.> “내 경(敬)을 행하기 때문에 내면(內面)에 있다 이르는 것이다.”』
『所敬之人이 雖在外나 然이나 知其當敬而行吾心之敬以敬之면 則不在外也니라』
『 공경하는 바의 사람은 비록 외면(外面)에 있으나, 마땅히 공경해야 함을 알아서 내 마음의 공경을 행하여 공경하니, 그렇다면 외면(外面)에 있는 것이 아니다.』
『鄕人이 長於伯兄一歲면 則誰敬고 曰 敬兄이니라 酌則誰先고 曰 先酌鄕人이니라 所敬은 在此하고 所長은 在彼하니 果在外라 非由內也로다』
『 “향인(鄕人)이 백형(伯兄)보다 나이가 한 살이 더 많으면 누구를 공경하는가?” “형(兄)을 공경한다.” “술을 따를 때에는 누구에게 먼저 하는가?” “먼저 향인(鄕人)에게 술을 따른다.” “그렇다면 공경하는 것은 여기『[백형(伯兄)]』에 있고, 어른으로 높이는 것은 저기『[향인(鄕人)]』에 있으니, 의(義)는 과연 외면(外面)에 있는 것이요, 내면(內面)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구나.”』
『伯은 長也라 酌은 酌酒也라 此皆季子問에 公都子答이요 而季子又言 如此면 則敬長之心이 果不由中出也라하니라』
『 백(伯)은 장(長)이다. 작(酌)은 술을 따르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계자(季子)가 물음에 공도자(公都子)가 답한 것인데, 계자(季子)가 또 말하기를 “이와 같다면 공경하고 어른으로 높이는 마음은 과연 중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公都子不能答하여 以告孟子한대 孟子曰 敬叔父乎아 敬弟乎아하면 彼將曰 敬叔父라하리라 曰弟爲尸則誰敬고하면 彼將曰敬弟라하리라 子曰惡在其敬叔父也오하면 彼將曰在位故也라하리니 子亦曰在位故也라하라 庸敬은 在兄하고 斯須之敬은 在鄕人하니라』
『 공도자(公都子)가 답변하지 못하여 맹자(孟子)께 아뢰자,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숙부(叔父)를 공경하는가? 아우를 공경하는가?’ 하고 물으면, 저가 장차 대답하기를 ‘숙부(叔父)를 공경한다.’ 할 것이다. ‘아우가 시동(尸童)이 되면 누구를 공경하는가?’ 하고 물으면, 저가 장차 대답하기를 ‘아우를 공경한다.’ 할 것이다. 자네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숙부(叔父)를 공경한다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물으면, 저가 장차 ‘<아우가 시동(尸童)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니, 자네 역시 ‘<향인(鄕人)이 빈객(賓客)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라, 평상시의 공경은 형(兄)에게 있고, 잠시의 공경은 향인(鄕人)에게 있는 것이다.”』
『尸는 祭祀所主以象神이니 雖弟子爲之나 然이나 敬之를 當如祖考也라 在位는 弟在尸位요 鄕人在賓客之位也라 庸은 常也요 斯須는 暫時也라 言 因時制宜가 皆由中出也니라』
『 시(尸)는 제사지낼 때에 신주(神主)로 삼아 신(神)을 상징하는 것이니, 비록 아우와 아들이 시동(尸童)이 되더라도 그를 공경하기를 마땅히 조고(祖考)와 같이 해야 한다. 재위(在位)는 아우가 시동(尸童)의 자리에 있고, 향인(鄕人)이 빈객(賓客)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 용(庸)은 상(常)『[평상시]』이요, 사수(斯須)는 잠시이다. 때에 따라 마땅하게 함이 모두 중심으로부터 나옴을 말씀한 것이다.』
『季子聞之하고 曰 敬叔父則敬하고 敬弟則敬하니 果在外라 非由內也로다 公都子曰 冬日則飮湯하고 夏日則飮水하나니 然則飮食도 亦在外也로다.』
『 계자(季子)가 이 말을 듣고 말하였다. “숙부(叔父)를 공경하게 되면 숙부(叔父)를 공경하고, 아우를 공경하게 되면 아우를 공경하니, 의(義)는 과연 외면(外面)에 있는 것이요, 내면(內面)에서 말미암는 것이 아니로구나.” 공도자(公都子)가 말하였다. “겨울철에는 끓는 물을 마시고, 여름철에는 찬물을 마시나니, 그렇다면 마시고 먹는 것도 또한 외면(外面)에 있는 것일세.”』
『此亦上章耆灸之義니라』
『○ 范氏曰 二章問答이 大指略同하니 皆反覆譬喩하여 以曉當世하여 使明仁義之在內하시니 則知人之性善하여 而皆可以爲堯舜矣리라』
『 이 역시 위 장(章)의 불고기를 좋아한다는 뜻이다.』
『 ○ 범씨(范氏)가 말하였다. “두 장(章)의 문답은 대지(大指)가 대략 같으니, 모두 반복하여 비유해서 당세(當世)를 깨우쳐 인의(仁義)가 내면(內面)에 있음을 알게 한 것이니, 그렇다면 사람의 성(性)이 선(善)하여 모두 요순(堯舜)이 될 수 있음을 알 것이다.”』
*맹자 ; 고자상 ; 제6장
▣ 제6장(第六章)
『公都子曰 告子曰 性은 無善無不善也라하고』
『 공도자(公都子)가 물었다. “고자(告子)가 말하기를 ‘성(性)은 선(善)함도 없고 불선(不善)함도 없다.’ 하고,』
『此亦生之謂性, 食色性也之意니 近世蘇氏胡氏之說이 蓋如此하니라』
『 이 또한 생(生)을 성(性)이라 하고, 식색(食色)을 성(性)이라 한 뜻이다. 근세(近世)에 소씨(蘇氏)『[소식(蘇軾)]』와 호씨(胡氏)『[호안국(胡安國), 호굉(胡宏)]』의 말이 이와 같다.』
『或曰 性은 可以爲善이며 可以爲不善이니 是故로 文武興하면 則民好善하고 幽쪵興하면 則民好暴라하고』
『 혹자는 말하기를 ‘성(性)은 선(善)을 할 수도 있으며, 불선(不善)을 할 수도 있으니, 이러므로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이 일어나면 백성들이 선(善)을 좋아하고, 유왕(幽王)과 여왕(쪵王)이 일어나면 백성들이 포악함을 좋아한다.’하며』
『此는 卽湍水之說也라』
『 이것은 바로 여울물과 같다는 말이다.』
『或曰 有性善하며 有性不善하니 是故로 以堯爲君而有象하며 以줥첳爲父而有舜하며 以紂爲兄之子요 且以爲君이로되 而有微子啓, 王子比干이라하나니』
『 혹자는 말하기를 ‘성(性)이 선(善)한 이도 있고, 성(性)이 불선(不善)한 이도 있다. 그러므로 요(堯)를 군주로 삼았는데도 상(象)이 있었으며, 고수(줥첳)를 아버지로 삼았는데도 순(舜)이 있었으며, 주왕(紂王)을 형(兄)의 아들로 삼고 또 군주로 삼았는데도 미자(微子) 계(啓)와 왕자(王子) 비간(比干)이 있었다.’하니,』
『韓子性有三品之說이 蓋如此하니라 按此文하면 則微子, 比干이 皆紂之叔父로되 而書稱微子爲商王元子라하니 疑此或有誤字라』
『 한자(韓子)『[한유(韓愈)]』의 “성(性)은 <상(上)•중(中)•하(下)의> 삼품(三品)이 있다.”는 말이 이와 같다. 이 글을 상고해 보면 미자(微子)와 비간(比干)이 모두 주(紂)의 숙부(叔父)인데, 《서경(書經)》의 〈미자지명(微子之命)〉에는 ‘미자(微子)는 상왕(商王)의 원자(元子)이다.’라고 칭했으니, 의심컨대 여기에 혹 오자(誤字)가 있는 듯하다.』
『今曰 性善이라하시니 然則彼皆非與잇가』
『 지금 <선생님께서> 성(性)이 선(善)하다고 말씀하시니, 그렇다면 저들은 모두 틀린 것입니까?”』
『孟子曰 乃若其情則可以爲善矣니 乃所謂善也니라』
『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그 정(情)으로 말하면 선(善)하다고 할 수 있으니, 이것이 내가 말하는 선(善)하다는 것이다.”』
『乃若은 發語辭라 情者는 性之動也라 人之情은 本但可以爲善이요 而不可以爲惡이니 則性之本善을 可知矣니라』
『 내약(乃若)은 발어사(發語辭)이다. 정(情)은 성(性)이 동(動)한 것이다. 사람의 정(情)은 본래 다만 선(善)만 할 수 있고, 악(惡)은 할 수 없으니, 그렇다면 성(性)이 본래 선(善)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若夫爲不善은 非才之罪也니라』
『 불선(不善)을 하는 것으로 말하면 타고난 재질(才質)의 죄가 아니다.』
『才는 猶材質이니 人之能也라 人有是性이면 則有是才하니 性旣善이면 則才亦善이라 人之爲不善은 乃物欲陷溺而然이니 非其才之罪也니라』
『 재(才)는 재질(材質)과 같으니, 사람의 능(能)함이다. 사람이 이 성(性)을 가지고 있으면 이 재질(材質)을 가지고 있으니, 성(性)이 이미 선(善)하면 재질(材質) 또한 선(善)하다. 사람들이 불선(不善)을 함은 바로 물욕(物欲)에 빠져서 그러한 것이니, 재질(材質)의 죄가 아니다.』
『惻隱之心을 人皆有之하며 羞惡之心을 人皆有之하며 恭敬之心을 人皆有之하며 是非之心을 人皆有之하니 惻隱之心은 仁也요 羞惡之心은 義也요 恭敬之心은 禮也요 是非之心은 智也니 仁義禮智非由外찱我也라 我固有之也언마는 弗思耳矣라 故로 曰 求則得之하고 舍則失之라하니 或相倍퓳而無算者는 不能盡其才者也니라』
『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으며, 수오지심(羞惡之心)을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으며, 공경지심(恭敬之心)을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으며, 시비지심(是非之心)을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으니,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仁)이요,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의(義)요, 공경지심(恭敬之心)은 예(禮)요,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지(智)이니, 인(仁)•의(義)•예(禮)•지(智)가 밖으로부터 나를 녹여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요, 나에게 고유(固有)한 것이지만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구하면 얻고, 버리면 잃는다.’ 하는 것이니, 혹은 <선악(善惡)의> 거리가 서로 배(倍)가 되고, 다섯 배(倍)가 되어 계산 할 수 없는 것은 그 재질(材質)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恭者는 敬之發於外者也요 敬者는 恭之主於中者也라 찱은 以火銷金之名이니 自外以至內也라 算은 數也라 言 四者之心은 人所固有로되 但人自不思而求之耳니 所以善惡相去之遠은 由不思不求而不能擴充以盡其才也니라 前篇에 言是四者爲仁義禮智之端이어늘 而此不言端者는 彼欲其擴而充之요 此直因用以著其本體라 故로 言有不同耳니라』
『 공(恭)은 경(敬)이 외모에 드러난 것이요, 경(敬)은 공(恭)이 중심에 주장하는 것이다. 삭(찱)은 불로써 쇠를 녹이는 것의 명칭이니, 밖으로부터 안에 이르는 것이다. 산(算)은 셈이다. 네 가지의 마음은 사람에게 고유(固有)한 것인데, 다만 사람들이 제 스스로 생각하여 구하지 않을 뿐이다. 선악(善惡)의 거리가 먼 것은, 생각하지 않고 구하지 않아서 능히 확충하여 그 재질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편(前篇)『[공손추상(公孫丑上)]』에서는 ‘이 네 가지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단서가 된다.’고 말하였는데, 여기서는 단서를 말하지 않은 것은, 저기서는 그것을 확충하고자 하였고, 여기에서는 단지 용(用)을 인하여 본체(本體)를 드러냈을 뿐이다. 그러므로 말에 같지 않음이 있을 뿐이다.』
『詩曰 天生蒸民하시니 有物有則이로다 民之秉夷『(츺)』라 好是懿德이라하여늘 孔子曰 爲此詩者 其知道乎인저 故로 有物이면 必有則이니 民之秉夷也라 故로 好是懿德이라하시니라』
『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하늘이 여러 백성『[사람]』을 내시니, 사물이 있으면 법이 있도다. 사람들이 마음에 떳떳한 본성(本性)을 가지고 있는지라, 이 아름다운 덕(德)을 좋아한다.’ 하였는데,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시(詩)를 지은 자는 그 도(道)를 알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이 있으면 반드시 법이 있으니, 사람들이 떳떳한 본성(本性)을 가지고 있는지라, 그러므로 이 아름다운 덕(德)을 좋아한다.’ 하셨다.”』
『詩는 大雅蒸民之篇이라 蒸은 詩作烝하니 衆也라 物은 事也요 則은 法也라 夷는 詩作츺하니 常也라 懿는 美也라 有物必有法은 如有耳目則有聰明之德하고 有父子則有慈孝之心이니 是民所秉執之常性也라 故로 人之情이 無不好此懿德者니라 以此觀之면 則人性之善을 可見이니 而公都子所問之三說은 皆不辨而自明矣니라』
『○ 程子曰 性卽理也니 理則堯舜至於塗人이 一也요 才µ;於氣하니 氣有淸濁하여 µ;其淸者爲賢이요 µ;其濁者爲愚하니 學而知之면 則氣無淸濁히 皆可至於善而復性之本이니 湯武身之 是也라 孔子所言下愚不移者는 則自暴自棄之人也니라 又曰 論性不論氣면 不備요 論氣不論性이면 不明이며 二之則不是니라 張子曰 形而後에 有氣質之性이니 善反之면 則天地之性이 存焉이라 故로 氣質之性을 君子有弗性者焉이니라 愚按 程子此說才字는 與孟子本文으로 小異하니 蓋孟子는 專指其發於性者言之라 故로 以爲才無不善이라하시고 程子는 兼指其µ;於氣者言之하시니 則人之才는 固有昏明强弱之不同矣니 張子所謂氣質之性이 是也라 二說이 雖殊나 各有所當이라 然이나 以事理考之면 程子爲密하니 蓋氣質所µ;이 雖有不善이나 而不害性之本善이요 性雖本善이나 而不可以無省察矯츍之功이니 學者所當深玩也니라』
『 시(詩)는 〈대아(大雅) 증민편(蒸民篇)〉이다. 증(蒸)은 《시경(詩經)》에 증(烝)으로 되어 있으니, 많음이다. 물(物)은 일이요, 칙(則)은 법이다. 이(夷)는 《시경(詩經)》에 이(츺)로 되어 있으니, 떳떳함이다. 의(懿)는 아름다움이다. 사물이 있으면 반드시 법이 있음은, 예를들면, 이목(耳目)이 있으면 총명(聰明)한 덕(德)이 있고, 부자(父子)가 있으면 자효(慈孝)의 마음이 있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사람들이 잡고 있는 바의 떳떳한 성(性)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정(情)이 이 아름다운 덕(德)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없는 것이다. 이것으로써 관찰한다면 사람의 성(性)이 선(善)함을 볼 수있으니, 공도자(公都子)가 물은 세 가지 말은 다 변론하지 않아도 자명(自明)해지는 것이다.』
『 ○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성(性)은 바로 이(理)이니, 이(理)는 요순(堯舜)으로부터 도인(塗人)에 이르기까지 똑같은 것이요, 재질(才質)은 기(氣)에서 받은 것이니, 기(氣)에는 청탁(淸濁)이 있어 청(淸)한 기(氣)를 받은 자는 현인(賢人)이 되고, 탁(濁)한 기(氣)를 받은 자는 우인(愚人)이 된다. 그러나 배워서 알면 기(氣)의 청탁(淸濁)에 관계없이 다 선(善)에 이르러 성(性)의 근본을 회복할 수 있으니 ‘탕(湯)•무(武)가 몸으로 실천하여 성(性)을 회복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신 ‘하우불이(下愚不移)’는 자포(自暴)•자기(自棄)하는 사람이다.”』
『 또 말씀하였다. “성(性)만 논하고 기(氣)를 논하지 않는다면 구비되지 못하고, 기(氣)만 논하고 성(性)을 논하지 않는다면 밝지 못하며, 이것을 두 가지로 나눈다면 옳지 못하다.”』
『 장자(張子)가 말씀하였다. “형(形)이 있은 뒤에 기질지성(氣質之性)이 있는 것이니, 이를 잘 회복하면 천지(天地)의 본성이 그대로 보존된다. 그러므로 기질지성(氣質之性)을 군자(君子)는 성(性)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 내가 살펴보건대, 정자(程子)가 여기에서 말씀하신 재자(才字)는 맹자(孟子)의 본문(本文)과 조금 다르니, 맹자(孟子)께서는 오로지 성(性)에서 발(發)한 것을 가리켜 말씀하셨기 때문에 ‘재질(才質)이 불선(不善)함이 없다.’고 하셨고, 정자(程子)는 기(氣)에서 받은 것을 겸하여 가리켜 말씀하였으니, 그렇다면 사람의 재질(才質)은 진실로 혼명(昏明)과 강약(强弱)의 같지 않음이 있는 것이니, 장자(張子)가 말씀한 ‘기질지성(氣質之性)’이란 것이 이것이다. 맹자(孟子)와 정자(程子)의 두 말씀이 비록 다르나, 각기 해당되는 바가 있다. 그러나 사리(事理)로써 상고해 보면 정자(程子)의 말씀이 더욱 치밀하니, 기질(氣質)이 받은 것은 비록 불선(不善)함이 있으나 성(性)의 본연(本然)의 선(善)함에는 무방(無妨)하고, 성(性)은 본래 비록 선하나 성찰(省察)하고 교유(矯츍)하는 공부가 없어서는 안되니, 배우는 자들이 마땅히 깊이 음미해야 할 것이다.』
*맹자 ; 고자상 ; 제7장
▣ 제7장(第七章)
『孟子曰 富歲엔 子弟多賴하고 凶歲엔 子弟多暴하나니 非天之降才爾殊也라 其所以陷溺其心者然也니라』
『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풍년에는 자제(子弟)들이 의뢰함이 많고, 흉년에는 자제(子弟)들이 포악함이 많으니, 하늘이 재주를 내림이 이와 같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빠뜨리는 것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富歲는 豐年也라 賴는 藉也라 豐年엔 衣食饒足이라 故로 『有所賴藉주:유소뢰자』而爲善이요 凶年엔 衣食不足이라 故로 有以陷溺其心而爲暴니라』
『 부세(富歲)는 풍년(豐年)이다. 뇌(賴)는 의뢰함이다. 풍년에는 의식(衣食)이 풍족하기 때문에 돌아보고 의뢰하는 바가 있어서 선행(善行)을 하고, 흉년에는 의식(衣食)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빠뜨림이 있어서 포악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今夫Ú/麥을 播種而췞之하되 其地同하며 樹之時又同하면 쮔然而生하여 至於『日至之時주:일지지시』하여 皆熟矣나니 雖有不同이나 則地有肥즇하며 雨露之養과 人事之不齊也니라』
『 지금 모맥(Ú/麥)을 파종하고 씨앗을 덮되, 그 땅이 똑같으며 심는 시기가 똑같으면, 발연(쮔然)히 싹이 나와서 일지(日至)의 때에 이르러 모두 익으니, 비록 똑같지 않음이 있으나, 이것은 땅에 비옥하고 척박함이 있으며, 우로(雨露)의 배양과 사람이 가꾸는 일이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
『Ú/는 大麥也라 췞는 覆種也라 日至之時는 謂當成熟之期也라 즇는 瘠薄也라』
『 모(Ú/)는 대맥(大麥)이다. 우(췞)는 씨앗을 덮는 것이다. 일지지시(日至之時)는 성숙(成熟)하는 시기를 당함을 이른다. 요(즇)는 척박함이다.』
『故로 凡同類者 擧相似也니 何獨至於人而疑之리오 聖人도 與我同類者시니라』
『 그러므로 무릇 동류(同類)인 것은 대부분 서로 같으니, 어찌 홀로 인간에 이르러서만 의심을 하겠는가. 성인(聖人)도 나와 동류(同類)인 자이시다.』
『聖人亦人耳니 其性之善이 無不同也시니라』
『 성인(聖人) 또한 사람이니, 그 성(性)의 선(善)함이 같지 않음이 없으시다.』
『故로 龍子曰 不知足而爲즞라도 我知其不爲튢也라하니 즞之相似는 天下之足이 同也일새니라』
『 그러므로 용자(龍子)가 말하기를 ‘발을 알지 못하고 신을 만들더라도 내가 그 삼태기를 만들지 않을 줄을 안다.’ 하였으니, 신이 서로 비슷함은 천하의 발이 같기 때문이다.』
『튢은 草器也라 不知人足之大小而爲之즞하면 雖未必適中이나 然이나 必似足形이요 不至成튢也니라』
『 궤(튢)는 풀로 만들 그릇이다. 남의 발이 크고 작음을 알지 못하고 신을 만들면, 비록 반드시 적중하지는 못하나, 반드시 발의 형상과 같을 것이요, 삼태기를 만드는 데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다.』
『口之於味에 有同耆也하니 易牙는 先得我口之所耆者也라 如使口之於味也에 其性이 與人殊가 若犬馬之與我不同類也면 則天下何耆를 皆從易牙之於味也리오 至於味하여는 天正期於易牙하나니 是는 天下之口相似也일새니라』
『 입이 맛에 있어서 즐김을 똑같이 함이 있으니, 역아(易牙)는 먼저 우리 입이 즐기는 것을 안 자이다. 가령 입이 맛에 있어서 그 성(性)이 남과 다름이 마치 개와 말이 우리와 동류(同類)가 아닌 것처럼 다르다면, 천하(天下)가 어찌 맛을 즐기기를 모두 역아(易牙)가 조리한 맛을 따르듯이 하겠는가. 맛에 이르러서는 천하가 역아(易牙)가 되기를 기약하나니, 이것은 천하의 입이 서로 같기 때문이다.』
『易牙는 古之知味者라 言 易牙所調之味는 則天下皆以爲美也라』
『 역아(易牙)는 옛날에 맛을 잘 안 자이다. 역아(易牙)가 조리한 맛은 천하가 다 아름답게 여김을 말씀한 것이다.』
『惟耳도 亦然하니 至於聲하여는 天下期於師曠하나니 是는 天下之耳相似也일새니라』
『 귀도 또한 그러하니, 소리에 이르러서는 천하가 사광(師曠)이 되기를 기약하나니, 이것은 천하의 귀가 서로 같기 때문이다.』
『師曠은 能審音者也라 言 師曠所和之音은 則天下皆以爲美也라』
『 사광(師曠)은 음(音)을 잘 살핀 자이다. 사광(師曠)이 조화(調和)한 음악은 천하가 다 아름답게 여김을 말씀한 것이다.』
『惟目도 亦然하니 至於子都하여는 天下莫不知其즁也하나니 不知子都之즁者는 無目者也니라』
『 눈도 또한 그러하니, 자도(子都)에 이르러서는 천하가 그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는 이가 없으니, 자도(子都)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는 자는 눈이 없는 자이다.』
『子都는 古之美人也라 즁는 好也라』
『 자도(子都)는 옛날의 미인(美人)이다. 교(즁)는 아름다움이다.』
『故로 曰 口之於味也에 有同耆焉하며 耳之於聲也에 有同聽焉하며 目之於色也에 有同美焉하니 至於心하여는 獨無所同然乎아 心之所同然者는 何也오 謂理也義也라 聖人은 先得我心之所同然耳시니 故로 理義之悅我心이 猶芻턣之悅我口니라』
『 그러므로 말하기를 ‘입이 맛에 있어서 똑같이 즐김이 있으며, 귀가 소리에 있어서 똑같이 들음이 있으며, 눈이 색(色)에 있어서 똑같이 아름답게 여김이 있다.’고 하는 것이니, 마음에 이르러서만 홀로 똑같이 옳게 여기는 바가 없겠는가. 마음에 똑같이 옳게 여긴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이(理)와 의(義)를 말한다. 성인(聖人)은 우리 마음에 똑같이 옳게 여기는 바를 먼저 아셨다. 그러므로 이(理)•의(義)가 우리 마음에 기쁨은 추환(芻턣)이 우리 입에 좋음과 같은 것이다.”』
『然은 猶可也라 草食曰芻니 牛羊是也요 穀食曰턣이니 犬豕是也라 程子曰 在物爲理요 處物爲義니 體用之謂也니라 孟子言 人心이 無不悅理義者하니 但聖人則先知先覺乎此耳요 非有以異於人也니라 程子又曰 理義之悅我心이 猶芻턣之悅我口라하시니 此語는 親切有味하니 須實體察得義理之悅心이 眞猶芻턣之悅口라야 始得이니라』
『 연(然)은 가(可)와 같다. 초식동물을 추(芻)라 하니, 소와 양이 이것이요, 곡식을 먹는 동물을 환(턣)이라 하니, 개와 돼지가 이것이다.』
『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사물에 있는 것을 이(理)라 하고, 사물을 대처하는 것을 의(義)라 하니, 체(體)와 용(用)을 말한다.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마음은 이의(理義)를 좋아하지 않는 자가 없다. 다만 성인(聖人)은 이것을 먼저 알고 먼저 깨달았을 뿐이요, 일반인보다 특이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신 것이다.”』
『 정자(程子)가 또 말씀하였다. “이의(理義)가 우리 마음에 기쁨은 추환(芻턣)이 우리 입에 좋음과 같다는 이 말씀은 친절하여 맛이 있으니, 모름지기 실제로 의리(義理)가 마음에 기쁜 것이 참으로 추환(芻턣)이 우리 입에 좋은 것과 같음을 체찰(體察)하여야 비로소 얻게 될 것이다.”』
*맹자 ; 고자상 ; 제8장
▣ 제8장(第八章)
『孟子曰 牛山之木이 嘗美矣러니 以其郊於大國也라 斧斤이 伐之어니 可以爲美乎아 是其日夜之所息과 雨露之所潤에 非無萌蘗之生焉이언마는 牛羊이 又從而牧之라 是以로 若彼濯濯也하니 人見其濯濯也하고 以爲未嘗有材焉이라하나니 此豈山之性也哉리오』
『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우산(牛山)의 나무가 일찍이 아름다웠었는데, 대국(大國)의 교외(郊外)이기 때문에 도끼와 자귀로 매일 나무를 베어가니, 아름답게 될 수 있겠는가. 그 일야(日夜)『[밤]』에 자라나는 바와 우로(雨露)가 적셔주는 바에 싹이 나오는 것이 없지 않건마는, 소와 양이 또 따라서 방목되므로, 이 때문에 저와 같이 탁탁(濯濯)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 탁탁(濯濯)한 것만을 보고는 일찍이 훌륭한 재목이 있은 적이 없다고 여기니, 이것이 어찌 산(山)의 성(性)이겠는가.”』
『牛山은 齊之東南山也라 邑外를 謂之郊라 言 牛山之木이 前此固嘗美矣러니 今爲大國之郊하여 伐之者衆이라 故로 失其美耳라 息은 生長也라 日夜之所息은 謂氣化流行하여 未嘗間斷이라 故로 日夜之間에 凡物이 皆有所生長也니라 萌은 芽也요 蘗은 芽之旁出者也라 濯濯은 光潔之貌라 材는 材木也라 言 山木雖伐이나 猶有萌蘖이어늘 而牛羊이 又從而害之라 是以로 至於光潔而無草木也니라』
『 우산(牛山)은 제(齊)나라의 동남쪽에 있는 산이다. 읍(邑) 밖을 교(郊)라 이른다. 우산(牛山)의 나무가 전에는 일찍이 아름다웠었는데, 지금 대국(大國)의 교외가 되어 나무를 베어 가는 자가 많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을 잃었음을 말씀한 것이다. 식(息)은 생장(生長)함이다. ‘일야(日夜)에 생장(生長)하는 바’라는 것은 기화(氣化)가 유행(流行)하여 일찍이 간단(間斷)하지 않으므로 일야(日夜)의 사이에 모든 물건이 다 생장(生長)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맹(萌)은 싹이요, 얼(蘖)은 싹이 곁으로 나온 것이다. 탁탁(濯濯)은 빛나고 깨끗한 모양이다. 재(材)는 재목(材木)이다. 산의 나무가 비록 베어져도 오히려 싹이 나오는데, 소와 양이 또 따라서 해치므로 이 때문에 산이 빛나고 깨끗하여 초목(草木)이 없는 데에 이름을 말씀한 것이다.』
『雖存乎人者인들 豈無仁義之心哉리오마는 其所以放其良心者 亦猶斧斤之於木也에 旦旦而伐之어니 可以爲美乎아 其日夜之所息과 平旦之氣에 其好惡與人相近也者幾希어늘 則其旦晝之所爲 有梏亡之矣나니 梏之反覆이면 則其夜氣不足以存이요 夜氣不足以存이며 則其違禽獸 不遠矣니 人見其禽獸也하고 而以爲未嘗有才焉者라하나니 是豈人之情也哉리오』
『 비록 사람에게 보존된 것인들 어찌 인의(仁義)의 마음이 없으리오마는 그 양심(良心)을 잃어버림이 또한 도끼와 자귀가 나무에 대해서 아침마다 베어 가는 것과 같으니, 이렇게 하고서도 아름답게 될 수 있겠는가. 일야(日夜)에 자라나는 바와 평단(平旦)의 맑은 기운에 그 좋아하고 미워함이 남들과 서로 가까운 것이 얼마 되지 않는데, 낮에 하는 소행이 이것을 곡망(梏亡)하니, 곡망(梏亡)하기를 반복하면 야기(夜氣)가 족히 보존될 수 없고, 야기(夜氣)가 보존될 수 없으면 금수(禽獸)와 거리가 멀지 않게 된다. 사람들은 그 금수(禽獸) 같은 행실만 보고는 일찍이 훌륭한 재질(材質)이 있지 않았다고 여기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실정(實情)이겠는가.』
『良心者는 本然之善心이니 卽所謂仁義之心也라 平旦之氣는 謂未與物接之時淸明之氣也라 好惡與人相近은 言得人心之所同然也라 幾希는 不多也라 梏은 械也라 反覆은 展轉也라 言 人之良心이 雖已放失이나 然이나 其日夜之間에 猶必有所生長이라 故로 平旦未與物接하여 其氣淸明之際에 良心이 猶必有發見者라 但其發見至微하고 而旦晝所爲之不善이 又已隨而梏亡之하니 如山木旣伐에 猶有萌蘗이어늘 而牛羊이 又牧之也라 晝之所爲가 旣有以害其夜之所息하고 夜之所息이 又不能勝其晝之所爲라 是以로 展轉相害하여 至於夜氣之生이 日以´/薄하여 而不足以存其仁義之良心이면 則平旦之氣亦不能淸하여 而所好惡遂與人遠矣니라』
『 양심(良心)은 본연(本然)의 선(善)한 마음이니, 바로 이른바 ‘인의지심(仁義之心)’이란 것이다. 평단지기(平旦之氣)는 사물과 접하지 않았을 때의 청명(淸明)한 기운을 이른다. 호오(好惡)가 남들과 서로 가깝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똑같이 옳게 여기는 바를 얻음을 말한다. 기희(幾希)는 많지 않음이다. 곡(梏)은 틀이다. 반복(反覆)은 전전(展轉)함이다. 사람의 양심(良心)이 비록 이미 방실(放失)되었으나, 일야(日夜)의 사이에 그래도 반드시 생장(生長)하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평단(平旦)에 사물과 접하지 않아서 그 기운이 청명(淸明)할 때에는 양심(良心)이 반드시 발견(發見)『[현]』되는 것이 있다. 다만 그 발견(發見)됨이 지극히 미약한데 낮에 하는 바의 불선(不善)이 또 이미 따라서 곡망(梏亡)시키니, 이것은 마치 산의 나무를 이미 베어가도 오히려 싹이 돋아나나, 소와 양이 또 따라서 방목됨과 같은 것이다. 낮에 하는 행위가 이미 밤에 자라는 바를 해치고, 밤에 자라는 바가 또 낮에 하는 바의 나쁜 행위를 이기지 못한다. 이 때문에 전전(展轉)하여 서로 해쳐서 야기(夜氣)가 생겨나는 것이 날로 점점 박(薄)해져서 인의(仁義)의 양심(良心)을 보존할 수 없는 데에 이르면, 평단(平旦)의 기운도 또한 맑지 못하여, 좋아하고 싫어하는 바가 끝내 남들과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故로 苟得其養이면 無物不長이요 苟失其養이면 無物不消니라』
『 그러므로 만일 그 기름을 잘 얻으면 물건마다 자라지 못함이 없고, 만일 그 기름을 잃으면 물건마다 사라지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山木, 人心이 其理一也라』
『 산의 나무와 사람의 마음이 그 이치가 같은 것이다.』
『孔子曰 操則存하고 舍則亡하여 出入無時하며 莫知其鄕은 惟心之謂與인저하시니라』
『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잃어서, 나가고 들어옴이 정한 때가 없으며, 그 방향을 알 수 없는 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을 두고 말한 것이다.’ 하셨다.”』
『孔子言 心은 操之則在此하고 舍之則失去하여 其出入이 無定時하고 亦無定處如此라하시니 孟子引之하여 以明心之神明不測이 得失之易而保守之難이라 不可頃刻失其養하시니 學者當無時而不用其力하여 使神淸氣定하여 常如平旦之時면 則此心常存하여 無適而非仁義矣리라 程子曰 心豈有出入이리오 亦以操舍而言耳니 操之之道는 敬以直內而已니라』
『○ 愚聞之師하니 曰 人理義之心이 未嘗無하니 惟持守之면 卽在爾라 若於旦晝之間에 不至梏亡이면 則夜氣愈淸이요 夜氣淸이면 則平旦未與物接之時에 湛然虛明氣象을 自可見矣니라 孟子發此夜氣之說하시니 於學者에 極有力하니 宜熟玩而深省之也니라』
『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은 잡으면 여기에 있고, 놓으면 잃어버려서 그 출입이 정해진 때가 없으며, 또한 정처(定處)가 없음이 이와 같다.” 하셨는데, 맹자(孟子)께서 이것을 인용하여, 마음이 신명(神明)하고 측량할 수 없어 득실(得失)『[잃음]』이 쉽고 보존하여 지킴이 어려워서, 잠시라도 그 기름을 잃어서는 안됨을 밝히신 것이다. 배우는 자가 마땅히 때마다 그 힘을 쓰지 않음이 없어서, 정신이 맑고 기운이 안정되게 하여, 항상 평단(平旦)의 때와 같이 한다면, 이 마음이 항상 보존되어 가는 곳마다 인의(仁義) 아님이 없을 것이다.』
『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마음이 어찌 출입이 있으리오, 이 또한 잡아두고 놓음으로써 말씀했을 뿐이니, 마음을 잡는 방법은 경(敬)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는 것일 뿐이다.”』
『 ○ 내가 스승에게 들으니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사람은 의리(義理)의 마음이 일찍이 없지 않으니, 오직 이것을 잡아 잘 지키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만알 낮 사이에 곡망(梏亡)시키는 데에 이르지 않는다면 야기(夜氣)가 더욱 맑아질 것이요, 야기(夜氣)가 맑아지면 평단(平旦)에 사물과 접하지 않았을 때에 담연(湛然)히 허명(虛明)한 기상(氣象)을 스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맹자(孟子)께서 이 야기(夜氣)의 말씀을 발(發)하셨는데 배우는 자들에게 지극히 힘이 있으니, 마땅히 익숙히 보고 깊이 살펴야 할 것이다.”』
*맹자 ; 고자상 ; 제9장
▣ 제9장(第九章)
『孟子曰 無或乎王之不智也로다』
『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왕(王)의 지혜롭지 못함이 이상할 것이 없구나!”』
『或은 與惑同하니 疑怪也라 王은 疑指齊王이라』
『 혹(或)은 감(感)과 같으니, 의심스럽고 괴이함이다. 왕(王)은 제왕(齊王)을 가리킨 듯하다.』
『雖有天下易生之物也나 一日暴之요 十日寒之면 未有能生者也니 吾見이 亦罕矣요 吾退而寒之者至矣니 吾如有萌焉에 何哉리오』
『 비록 천하(天下)에 쉽게 생장(生長)하는 물건이 있더라도 하루 동안 햇볕을 쪼이고 열흘동안 춥게 하면 능히 생장(生長)할 것이 있지 않으니, 내가 임금을 뵈옴이 또한 드물고, 내가 물러 나오면 임금의 마음을 차갑게 하는 자가 이르나니, 싹이 있은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暴은 溫之也라 我見王之時少하니 猶一日暴之也요 我退則諂諛雜進之日多하니 是十日寒之也라 雖有萌蘗之生이나 我亦安能如之何哉리오』
『 포(暴)는 따뜻하게 함이다. 내가 왕(王)을 뵙는 때가 적으니, 이것은 하루 동안 햇볕을 쪼이는 것과 같은 것이요, 내가 물러 나오면 아첨하는 자들이 잡되게 나아가 뵙는 날이 많으니, 이것은 열흘동안 차갑게 하는 것이다. 비록 싹이 나옴이 있은들 내 또한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今夫奕之爲數가 小數也나 不專心致志면 則不得也라 奕秋는 通國之善奕者也니 使奕秋로 誨二人奕이어든 其一人은 專心致志하여 惟奕秋之爲聽하고 一人은 雖聽之나 一心에 以爲有鴻鵠將至어든 思援弓퇨而射之하면 雖與之俱學이라도 弗若之矣나니 爲是其智弗若與아 曰非然也니라』
『 지금 바둑의 수(數)가 작은 수(數)이나, 마음을 오로지 하고 뜻을 다하지 않으면 터득하지 못한다. 혁추(奕秋)는 온 나라 안에서 바둑을 잘 두는 자이다. 혁추(奕秋)로 하여금 두 사람에게 바둑을 가르치게 하거늘, 그 중에 한 사람은 전심치지(專心致志)하여 오직 혁추(奕秋)의 말을 듣고, 한 사람은 비록 듣기는 하나 마음 한 편에 기러기와 큰 새가 장차 이르거든 활과 주살을 당겨서 쏠 것을 생각한다면, 비록 그와 더불어 똑같이 배운다 하더라도 그만 못할 것이니, 이것은 그 지혜가 그만 못해서인가? 그렇지 않다.”』
『奕은 圍棋也라 數는 技也라 致는 極也라 奕秋는 善奕者名秋也라 퇨은 以繩繫矢而射也라』
『○ 程子爲講官하여 言於上曰 人主一日之間에 接賢士大夫之時多하고 親宦官宮妾之時少하면 則可以涵養氣質而薰陶德性이라하여시늘 時不能用하니 識者恨之하니라 范氏曰 人君之心은 惟在所養이니 君子養之以善則智하고 小人養之以惡則愚라 然이나 賢人은 易疎하고 小人은 易親이라 是以로 寡不能勝衆하고 正不能勝邪하니 自古로 國家治日常少而亂日常多는 蓋以此也니라』
『 혁(奕)은 바둑알을 에워싸는 것이다. 수(數)는 기예(技藝)이다. 치(致)는 지극함이다. 혁추(奕秋)는 바둑을 잘 두는 자로 이름이 추(秋)이다. 작(퇨)은 노끈을 화살에 달아서 쏘는 것이다.』
『 ○ 정자(程子)가 강관(講官)이 되어 임금에게 말씀하기를 “인주(人主)가 하루 사이에 어진 사대부(士大夫)들을 접견하는 때가 많고, 환관(宦官)과 궁첩(宮妾)을 친근히 하는 때가 적으면, 기질(氣質)을 함양하여 덕성(德性)을 훈도(薰陶)할 수 있다.” 하셨는데, 당시에 이 말을 쓰지 못하니, 유식(有識)한 자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 범씨(范氏)가 말하였다. “임금의 마음은 오직 기르는 바에 달려 있으니, 군자(君子)가 선(善)으로써 기르면 지혜로워지고, 소인(小人)이 악(惡)으로써 기르면 어리석어진다. 그러나 현인(賢人)은 소원(疏遠)하기 쉽고, 소인(小人)은 친근(親近)하기가 쉽다. 이 때문에 적은 사람이 많은 사람을 이기지 못하고, 정직(正直)한 자가 사악(邪惡)한 자를 이길 수 없는 것이니, 예로부터 국가에 다스려지는 날이 항상 적고, 혼란한 날이 항상 많음은 이 때문이다.”』
*맹자 ; 고자상 ; 제10장
▣ 제10장(第十章)
『孟子曰魚도 我所欲也며 熊掌도 亦我所欲也언마는 二者를 不可得兼인댄 舍魚而取熊掌者也로리라 生亦我所欲也며 義亦我所欲也언마는 二者를 不可得兼인댄 舍生而取義者也로리라』
『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어물(魚物)도 내가 원하는 바요, 웅장(熊掌)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진댄 어물(魚物)을 버리고 웅장(熊掌)을 취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의(義)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진댄 삶을 버리고 의(義)를 취하겠다.”』
『魚與熊掌이 皆美味로되 而熊掌尤美也라』
『 어물(魚物)과 웅장(熊掌)은 다 맛이 좋되 웅장(熊掌)이 더욱 좋은 것이다.』
『生亦我所欲이언마는 所欲이 有甚於生者라 故로 不爲苟得也하며 死亦我所惡언마는 所惡가 有甚於死者라 故로 患有所不µ?『(避)』也니라』
『 삶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원하는 바가 삶보다 심한 것이 있다. 그러므로 삶을 구차히 얻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며, 죽음도 내가 싫어하는 바이지만, 싫어하는 바가 죽음보다 심한 것이 있다. 그러므로 환난(患難)을 피하지 않는 바가 있는 것이다.』
『釋所以舍生取義之意라 得은 得生也라 欲生惡死者는 雖衆人利害之常情이나 而欲惡有甚於生死者는 乃秉츺義理之良心이라 是以로 欲生而不爲苟得하고 惡死而有所不避也니라』
『 삶을 버리고 의(義)를 취하는 이유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득(得)은 살 수 있는 것이다. 삶을 원하고 죽음을 싫어함은 비록 중인(衆人)들의 이해(利害)에 떳떳한 정(情)이나, 원하고 싫어함이 생사(生死)보다 심함이 있는 것은 바로 병이(秉츺)의 의리(義理)의 양심(良心)이다. 이 때문에 살기를 원하면서도 구차히 얻으려 하지 않으며, 죽기를 싫어하면서도 피하지 않는 바가 있는 것이다.』
『如使人之所欲이 莫甚於生이면 則凡可鎰生者를 何不用也며 使人之所惡가 莫甚於死者면 則凡可以µ?患者를 何不爲也리오』
『 가령 사람들이 원하는 바가 삶보다 심한 것이 없다면 모든 삶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어찌 쓰지 않겠으며, 가령 사람들이 싫어하는 바가 죽음보다 심한 것이 없다면 모든 환난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어찌 쓰지 않겠는가.』
『設使人無秉츺之良心이요 而但有利害之私情이면 則凡可以偸生免死者를 皆將不顧禮義而爲之矣리라』
『 가령 사람들이 병이(秉츺)의 양심(良心)이 없고, 다만 이해(利害)의 사정(私情)만 있다면, 모든 삶을 훔치고 죽음을 면할 수 있는 짓을 모두 장차 예의(禮義)를 돌아보지 않고 할 것이다.』
『由是라 則生而有不用也하며 由是라 則可以µ?患而有不爲也니라』
『 이 때문에 살 수 있는데도 <그 방법을> 쓰지 않음이 있으며, 이 때문에 화(禍)를 피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음이 있는 것이다.』
『由其必有秉츺之良心이라 是以로 其能舍生取義如此니라』
『 반드시 병이(秉츺)의 양심(良心)이 있기 때문에 능히 삶을 버리고 의(義)를 취하기를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다.』
『是故로 所欲이 有甚於生者하며 所惡가 有甚於死者하니 非獨賢者有是心也라 人皆有之언마는 賢者는 能勿喪耳니라』
『 이러므로 원하는 바가 삶보다 심한 것이 있으며, 싫어하는 바가 죽음보다 심한 것이 있으니, 다만 현자(賢者)만이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건마는, 현자(賢者)는 능히 이것을 잃지 않을 뿐이다.』
『羞惡之心을 人皆有之로되 但衆人은 ?於利欲而忘之하고 惟賢者는 能存之而不喪耳니라』
『 수오지심(羞惡之心)을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되, 다만 중인(衆人)들은 이욕(利欲)에 빠져서 이것을 잊고, 오직 현자(賢者)만이 능히 보존해서 잃지 않을 뿐이다.』
『一簞食와 一豆羹을 得之則生하고 弗得則死라도 ?爾而與之면 行道之人도 弗受하며 蹴爾而與之면 乞人도 不屑也니라』
『 한 그릇의 밥과 한 그릇의 국을 얻으면 살고 얻지 못하면 죽더라도, 혀를 차고 꾸짖으며 주면 길 가는 사람도 받지 않으며, 발로 밟고 주면 걸인(乞人)도 좋게 여기지 않는다.』
『豆는 本器也라 ?는 쪉?之貌라 行道之人은 路中凡人也라 蹴은 踐踏也라 乞人은 ¸!乞之人也라 不屑은 不以爲潔也라 言 雖欲食之急이라도 而猶惡無禮하여 有寧死而不食者하니 是其羞惡之本心이니 欲惡有甚於生死者를 人皆有之也니라』
『 두(豆)는 나무로 만든 그릇이다. 호(?)는 혀를 차고 꾸짖는 모양이다. 행도지인(行道之人)은 길 가운데의 일반인이다. 축(蹴)은 밟음이다. 걸인(乞人)은 빌어먹는 사람이다. 불설(不屑)은 깨끗하게 여기지 않음이다. 비록 그것을 먹고자 함이 급하더라도 오히려 무례(無禮)함을 싫어해서, 차라리 죽을지언정 먹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이것은 수오(羞惡)의 본심(本心)이니, 원함과 싫어함이 삶과 죽음보다 더 심한 것이 있음을 사람마다 모두 가지고 있다.』
『萬鍾則不辨禮義而受之하나니 萬鍾이 於我何加焉이리오 爲宮室之美와 妻妾之奉과 所識窮乏者得我與인저』
『 만종(萬鍾)의 녹(祿)은 예의(禮義)를 분별하지 않고 받나니, 만종(萬鍾)의 녹(祿)이 나에게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궁실(宮室)의 아름다움과 처첩(妻妾)의 받듦과 내가 알고 있는 궁핍한 자가 나를 고맙게 여김을 위해서일 것이다.』
『萬鍾於我何加는 言於我身無所增益也라 所識窮乏者得我는 謂所知識之窮乏者 感我之惠也라 上言人皆有羞惡之心하고 此言衆人所以喪之由此三者하니 蓋理義之心이 雖曰固有나 而物欲之蔽亦人所易昏也니라』
『 만종(萬鍾)이 나에게 무슨 보탬이 있겠느냐는 것은 내 몸에 증익(增益)되는 바가 없음을 말한다. 알고 있는 바의 궁핍한 자가 나를 고맙게 여긴다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바의 궁핍한 자들이 나의 은혜에 감사함을 이른다. 위에서는 사람이 모두 수오지심(羞惡之心)을 가지고 있음을 말씀하였고, 여기서는 중인(衆人)들이 이것을 잃는 이유가 이 세 가지에서 연유됨을 말씀하였으니, 이의(理義)의 마음이 비록 고유(固有)하다고 하나, 물욕(物慾)의 가림 또한 사람이 쉽게 어두워지는 것이다.』
『鄕爲身엔 死而不受라가 今爲宮室之美하여 爲之하며 鄕爲身엔 死而不受라가 今爲妻妾之奉하여 爲之하며 鄕爲身엔 死而不受라가 今爲所識窮乏者得我而爲之하나니 是亦不可以已乎아 此之謂失其本心이니라』
『 지난번 자신을 위해서는 죽어도 받지 않다가, 이제 궁실(宮室)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그 짓을 하며, 지난번 자신을 위해서는 죽어도 받지 않다가, 이제 처첩(妻妾)의 받듦을 위하여 그 짓을 하며, 지난번 자신을 위해서는 죽어도 받지 않다가, 이제 알고 있는 바의 궁핍한 자가 나를 고맙게 여김을 위하여 그 짓을 하니, 이 또한 그만둘 수 없는가. 이것을 일러 ‘그 본심(本心)을 잃었다.’고 하는 것이다.”』
『言 三者는 身外之物이니 其得失이 比生死爲甚輕이어늘 鄕爲身엔 死猶不肯受?蹴之食이라가 今乃爲此三者而受無禮義之萬鍾하니 是豈不可以止乎아 本心은 謂羞惡之心이라』
『○ 此章은 言 羞惡之心은 人所固有언마는 或能決死生於危迫之際로되 而不免計豐約於宴安之時라 是以로 君子不可頃刻而不省察於斯焉이니라』
『 ‘세 가지는 몸 밖의 물건이니, 그 득실(得失)이 생사(生死)에 비하면 매우 가볍다. 그런데 지난번 자신을 위해서는 죽어도 오히려 혀를 차고 꾸짖으며 발로 밟고 주는 음식을 받지 않다가, 이제 마침내 이 세 가지를 위해서는 예의(禮義)가 없는 만종(萬鍾)의 녹(祿)을 받으니, 이 어찌 그만둘 수 없는 것이겠는가.’라고 말씀한 것이다. 본심(本心)은 수오지심(羞惡之心)을 이른다.』
『 ○ 이 장(章)은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사람에게 고유(固有)한 것이지만, 혹은 위박(危迫)한 즈음에 사생(死生)을 결단하면서도 연안(宴安)의 때에 풍약(豐約)을 따짐을 면치 못한다. 이 때문에 군자는 경각(頃刻)이라도 이에 대해서 성찰(省察)하지 않으면 안됨을 말씀한 것이다.』
*맹자 ; 고자상 ; 제11장
▣ 제11장(第十一章)
『孟子曰 仁은 人心也요 義는 人路也니라』
『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인(仁)은 사람의 마음이요, 의(義)는 사람의 길이다.”』
『仁者는 心之德이니 程子所謂心如穀種이요 仁則其生之性이 是也라 然이나 但謂之仁이면 則人不知其切於己라 故로 反而名之曰人心이라하시니 『則可以見其주:즉가이견기』爲此身酬酢萬變之主而不可須臾失矣니라 義者는 行事之宜니 謂之人路라하시니 則可以見其爲出入往來必由之道而不可須臾舍矣니라』
『 인(仁)은 마음의 덕(德)이니, 정자(程子)의 이른바, ‘마음은 곡식의 씨와 같고, 인(仁)은 그 나오는 성(性)이다.’라는 것이 이것이다. 그러나 다만 인(仁)이라고만 말하면, 사람들이 자신에게 간절한 줄을 모른다. 그러므로 돌이켜서 이름하기를 인심(人心)이라 하였으니, 만(萬) 가지 변화에 수작(酬酢)하는 이 몸의 주장이 되어서 잠시라도 잃어서는 안됨을 볼 수 있다. 의(義)는 행사(行事)의 마땅함인데, 이것을 인로(人路)라고 일렀으니, 그렇다면 출입(出入)하고 왕래(往來)할 때에 반드시 행해야 할 길이 되어서 잠시라도 버려서는 안됨을 볼 수 있다.』
『舍其路而不由하며 放其心而不知求하나니 哀哉라』
『 그 길을 버리고 따르지 않으며, 그 마음을 잃어버리고 찾을 줄을 모르니, 애처롭다.』
『哀哉二字를 最宜詳味하니 令人쾩然有深省處니라』
『 애재(哀哉) 두 글자를 가장 마땅히 자세하게 음미해야 하니, 사람으로 하여금 척연(쾩然)히 깊이 살핌이 있게 하는 부분이다.』
『人有鷄犬放이면 則知求之하되 有放心而不知求하나니』
『 사람이 닭과 개가 도망가면 찾을 줄을 알되, 마음을 잃고서는 찾을 줄을 알지 못하니』
『程子曰 心은 至重하고 鷄犬은 至輕이어늘 鷄犬放則知求之하되 心放則不知求하나니 豈愛其至輕而忘其至重哉아 弗思而已矣니라 愚謂 上兼言仁義하고 而此下專論求放心者는 能求放心이면 則不違於仁하여 而義在其中矣니라』
『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마음은 지극히 중(重)하고, 닭과 개는 지극히 경(輕)하거늘, 닭과 개가 도망하면 찾을 줄을 알되, 마음을 잃고서는 찾을 줄을 알지 못하니, 어찌 그 지극히 경(輕)한 것을 사랑하고, 지극히 중(重)한 것을 잊는가? 이것은 생각하지 않아서일 뿐이다.”』
『 내가 생각건대, 위에서는 인의(仁義)를 겸하여 말씀하였고, 이 아래에서는 오로지 방심(放心)을 찾는 것만을 논하였으니, 이것은 방심(放心)을 찾으면 인(仁)을 떠나지 않아서 의(義)가 그 가운데에 있기 때문이다.』
『學問之道는 無他라 求其放心而已矣니라』
『 학문(學問)하는 방법은 다른 것이 없다. 그 방심(放心)을 찾는 것일 뿐이다.”』
『學問之事固非一端이나 然이나 其道則在於求其放心而已라 蓋能如是면 則志氣淸明하고 義理昭著하여 而可以上達이요 不然이면 則昏昧放逸하여 雖曰從事於學이나 而終不能有所發明矣라 故로 程子曰 聖賢千言萬語가 只是欲人將已放之心約之하여 使反復入身來니 自能尋向上去하여 下學而上達也라하시니라 此乃孟子開示切要之言이어늘 程子又發明之하여 曲盡其指하시니 學者宜服膺而物失也니라』
『 학문(學問)의 일은 진실로 한 가지가 아니나, 그 도(道)인즉 방심(放心)을 찾음에 있을 뿐이다. 능히 이와 같이 하면 지기(志氣)가 청명해지고 의리(義理)가 밝게 드러나 위로 통달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혼매(昏昧)하고 방일(放逸)하여 비로 학문(學問)에 종사한다 하더라도 끝내 발명(發明)하는 바가 있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정자(程子)가 말씀하기를 “성현(聖賢)의 천 마디 말씀과 만 마디 말씀이 다만 사람들로 하여금 이미 잃어버린 마음을 가져다가 묶어서 되찾아 몸에 들어오게 하고자 한 것이니, 이렇게 하면 자연히 위를 향해 찾아가서 아래로 <인간(人間)의 일을> 배워서 위로 <천리(天理)> 통달하게 될 것이다.” 하셨다. 이것은 바로 맹자(孟子)께서 열어 보이시기를 간절히 하고 요긴히 하신 말씀인데, 정자(程子)가 다시 발명(發明)하여 그 뜻을 곡진히 다하였으니, 배우는 자들이 마땅히 가슴속에 새겨두고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맹자 ; 고자상 ; 제12장
▣ 제12장(第十二章)
『孟子曰 今有無名之指屈而不信『(伸)』이 非疾痛害事也언마는 如有能信之者면 則不遠秦楚之路하나니 爲指之不若人也니라』
『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지금에 무명지(無名指)가 굽혀져 펴지지 않는 것이 아프거나 일에 해가 되지 않건마는, 만일 이것을 펴주는 자가 있으면 진초(秦楚)의 길을 멀다 여기지 않고 찾아가니, 이것은 손가락이 남들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無名指는 手之第四指也라』
『 무명지(無名指)는 손의 네 번째 손가락이다.』
『指不若人이면 則知惡『(오)』之하되 心不若人이면 則不知惡하나니 此之謂不知類也니라』
『 손가락이 남들과 같지 않으면 이것을 싫어할 줄 알되, 마음이 남들과 같지 않으면 이것을 싫어할 줄 모르나니, 이것을 일러 유(類)를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不知類는 言其不知輕重之等也라』
『 부지류(不知類)는 그 경중(輕重)의 등급을 알지 못함을 말한다.』
*맹자 ; 고자상 ; 제13장
▣ 제13장(第十三章)
『孟子曰 拱把之桐梓를 人苟欲生之인댄 皆知所以養之者로되 至於身하여는 而不知所以養之者하나니 豈愛身이 不若桐梓哉리오 弗思甚也일새니라』
『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공(拱)•파(把)의 오동(梧桐)나무와 재(梓)나무를 사람들이 만일 생장시키고자 한다면 모두 이것을 기르는 방법을 알되, 몸에 이르러서는 몸을 기르는 방법을 알지 못하니, 어찌 몸을 사랑함이 오동(梧桐)나무와 재(梓)나무만 못해서이겠는가. 생각하지 않음이 심한 것이다.”』
『拱은 兩手所圍也요 把는 一手所?也라 桐梓는 『二木名주:이목명』이라』
『 공(拱)은 두 손으로 에워싸는 것이요, 파(把)는 한 손으로 잡는 것이다. 동(桐)과 재(梓)는 두 나무의 이름이다.』
*맹자 ; 고자상 ; 제14장
▣ 제14장(第十四章)
『孟子曰 人之於身也에 兼所愛니 兼所愛면 則兼所養也라 無尺寸之膚不愛焉이면 則無尺寸之膚不養也니 所以考其善不善者는 豈有他哉리오 於己에 取之而已矣니라』
『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사람이 자기 몸에 대해서 사랑하는 바를 겸하니, 사랑하는 바를 겸하면 기르는 바를 겸한다. 한 자와 한 치의 살을 사랑하지 않음이 없다면, 한 자와 한 치의 살을 기르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잘 기르고 잘못 기름을 상고하는 것이 어찌 다른 것이 있겠는가. 자기에게서 취할 뿐이다.”』
『人於一身에 固當兼養이라 然이라 欲考其所養之善否者는 惟在反之於身하여 以審其輕重而已矣니라』
『 사람이 자기 한 몸에 대해서 진실로 마땅히 겸하여 길러야 한다. 그러나 그 기르는 바의 잘잘못을 상고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이것을 자기 몸에 돌이켜서 그 경중(輕重)을 살핌에 달려있을 뿐이다.』
『體有貴賤하며 有小大하니 無以小害大하며 無以賤害貴니 養其小者爲小人이요 養其大者爲大人이니라』
『 몸에는 귀천(貴賤)이 있으며 소대(小大)가 있으니, 작은 것을 가지고 큰 것을 해치지 말며, 천한 것을 가지고 귀한 것을 해치지 말아야 하니, 작은 것을 기르는 자는 소인(小人)이 되고, 큰 것을 기르는 자는 대인(大人)이 되는 것이다.』
『賤而小者는 口腹也요 貴而大者는 心志也라』
『 천하고 작은 것은 구복(口腹)이요, 귀하고 큰 것은 심지(心志)이다.』
『今有場師舍其梧¡)하고 養其휒棘하면 則爲賤場師焉이니라』
『 지금 장사(場師)『[원예사]』가 오동(梧桐)나무와 가(¡))나무를 버리고 가시나무를 기른다면 값어치 없는 장사(場師)가 되는 것이다.』
『場師는 治場圃者라 梧는 桐也요 ¡)는 梓也니 皆美材也라 휒棘은 小棗니 非美材也라』
『 장사(場師)는 장포(場圃)를 다스리는 자이다. 오(梧)는 오동(梧桐)나무요, 가(¡))는 재(梓)나무이니, 다 아름다운 재목이다. 이극(貳棘)은 작은 대추나무이니, 아름다운 재목이 아니다.』
『養其一指하고 而失其肩背而不知也면 則爲狼疾人也니라』
『 그 한 손가락만을 기르고, 그 어깨와 등을 잃으면서도 모른다면, 이는 낭질(狼疾)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狼은 善顧나 『疾則不能주:질즉불능』이라 故로 以爲失肩背之喩하니라』
『 승냥이는 돌아보기를 잘하는데, 빨리 달아나면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깨와 등을 잃는 것의 비유로 삼은 것이다.』
『飮食之人을 則人賤之矣나니 爲其養小以失大也니라』
『 음식을 밝히는 사람을 사람들이 천히 여기나니, 작은 것을 기르고 큰 것을 잃기 때문이다.』
『飮食之人은 專養口腹者也라』
『 음식지인(飮食之人)은 오로지 구복(口腹)만을 기르는 자이다.』
『飮食之人이 無有失也면 則口腹이 豈適爲尺寸之膚哉리오』
『 음식을 밝히는 사람이 잃음『[잘못함]』이 있지 않다면 구복(口腹)이 어찌 다만 한 자나 한 치의 살이 될 뿐이겠는가.”』
『此는 言 若使專養口腹而能不失其大體면 則口腹之養은 軀命所關이니 不但爲尺寸之膚而已라 但養小之人은 無不失其大者라 故로 口腹이 雖所當養이나 而終不可以小害大, 賤害貴也니라』
『 이것은 가령 오로지 구복(口腹)만을 기르면서도 그 대체(大體)를 잃지 않을 수 있다면, 구복(口腹)의 기름은 사람의 몸과 생명이 관계되는 바이니, 다만 한 자나 한 치의 살이 될 뿐만이 아니다. 다만 작은 것을 기르는 사람은 그 큰 것을 잃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구복(口腹)을 비록 마땅히 길러야 하나, 끝내 작은 것으로써 큰 것을 해치고 천한 것으로써 귀한 것을 해쳐서는 안됨을 말씀한 것이다.』
*맹자 ; 고자상 ; 제15장
▣ 제15장(第十五章)
『公都子問曰 鈞是人也로되 或爲大人하며 或爲小人은 何也잇고 孟子曰 從其大體爲大人이요 從其小體爲小人이니라』
『 공도자(公都子)가 물었다. “똑같이 사람인데, 혹은 대인(大人)이 되며, 혹은 소인(小人)이 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그 대체(大體)를 따르는 사람은 대인(大人)이 되고, 그 소체(小體)를 따르는 사람은 소인(小人)이 되는 것이다.”』
『鈞은 同也라 從은 隨也라 大體는 心也요 小體는 耳目之類也라』
『 균(鈞)은 같음이요, 종(從)은 따름이다. 대체(大體)는 마음이요, 소체(小體)는 이목(耳目)의 유(類)이다.』
『曰 鈞是人也로되 或從其大體하며 或從其小體는 何也잇고 曰 耳目之官은 不思而蔽於物하나니 物交物이면 則引之而已矣요 心之官則思라 思則得之하고 不思則不得也니 此天之所與我者라 先立乎其大者면 則其小者不能奪也니 此爲大人而已矣니라』
『 “똑같이 사람인데, 혹은 그 대체(大體)를 따르며 혹은 그 소체(小體)를 따름은 어째서입니까?”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귀와 눈의 기능은 생각하지 못하여 물건에 가리워지니, 물건『[외물(外物)]』이 물건『[이목(耳目)]』과 사귀면 거기에 끌려갈 뿐이요, 마음의 기능은 생각할 수 있으니,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못하면 얻지 못한다. 이것은 하늘이 우리 인간에게 부여해 주신 것이니, 먼저 그 큰 것에 선다면 그 작은 것이 능히 빼앗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대인(大人)이 되는 이유일 뿐이다.”』
『官之爲言은 司也라 耳司聽하고 目司視하여 各有所職而不能思라 是以로 蔽於外物하나니 旣不能思而蔽於外物이면 則亦一物而已라 又以外物로 交於此物이면 其引之而去不難矣라 心則能思而以思爲職하니 凡事物之來에 心得其職이면 則得其理而物不能蔽요 失其職이면 則不得其理而物來蔽之라 此三者는 皆天之所以與我者로되 而心爲大하니 若能有以立之면 則事無不思하여 而耳目之欲이 不能奪之矣니 此所以爲大人也라 然이나 此天之此를 舊本에 多作比하고 而趙註에 亦以比方釋之어늘 今本엔 旣多作此하고 而註亦作此乃하니 未詳孰是라 但作比字면 於義爲短이라 故로 『且從今本云주:차종금본운』이라』
『○ 范浚心箴曰 茫茫堪輿여 俯仰無垠이라 人於其間에 ¨3然有身하니 是身之微는 太倉±"米로되 參爲三才는 曰惟心爾라 往古來今에 孰無此心이리오마는 心爲形役하여 乃獸乃禽이라惟口耳目과 手足動靜이 投間抵隙하여 爲厥心病이니라 一心之微를 衆欲攻之하니 其與存者가 嗚呼幾希로다 君子存誠하여 克念克敬하나니 天君泰然하여 百體從令하나니라』
『 관(官)이란 말은 맡는다는 뜻이니, 귀는 듣는 것을 맡고 눈은 보는 것을 맡아서, 각기 맡은 것이 있으나, 능히 생각하지는 못한다. 이 때문에 외물(外物)에 가리워지니, 이미 생각하지 못하여 외물(外物)에 가리워지면 또한 한 물건일 뿐이다. 또 외물(外物)로써 이 물건『[이목(耳目)]』과 사귀게 되면 거기에 끌려가는 것이 어렵지 않다. 마음은 능히 생각할 수 있어서 생각함으로써 직분을 삼으니, 모든 사물이 올 때에 마음이 그 직분『[맡은 기능]』을 잘 해내면 그 도리를 얻어서 물건이 가리우지 못하고, 그 직분을 잃으면 그 도리를 얻지 못하여 물건이 옴에 가리워진다. <이(耳)•목(目)•심(心)> 이 세 가지는 다 하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것인데, 그 중에도 마음이 가장 크니, 만일 능히 이 마음을 세울 수 있으면 일을 생각하지 않음이 없어서, 귀와 눈의 욕심이 능히 빼앗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대인(大人)이 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차천(此天)이란 차자(此字)는 옛 책에는 대부분 비(比)로 되어 있고, 조씨(趙氏)의 주(註)에도 또한 비방(比方)『[비교함]』으로 해석하였다. 그런데 금본(今本)에는 이미 대부분 차(此)로 되어있고, 주(註)에도 또한 차내(此乃)로 되어 있으니, 누가 옳은지 상세하지 않다. 다만 비(比)로 쓰는 것이 뜻에 부족하기 때문에 우선 금본(今本)을 따르는 것이다.』
『 ○ 범준(范浚)의 심잠(心箴)에 말하였다. “아득하고 아득한 천지(天地)는 굽어보고 우러러봄에 한이 없다. 사람이 그 사이에 작게 몸을 두고 있으니, 이 몸의 작은 것이 비유하면 태창(太倉)의 한 낱알에 불과한데, 참여하여 삼재(三才)가 됨은 마음 때문이다. 지나간 옛날과 오는 지금에 누가 이 마음이 없겠는가마는, 마음이 형체(形體)에 사역되어 마침내 금수(禽獸)가 되는 것이다. 입과 귀와 눈과 수족(手足)과 동정(動靜)이 사이에 끼고 틈을 파고들어 그 마음의 병이 된다. 한 마음의 작은 것을 여러 욕심들이 공격하니, 그 보존된 것이, 아! 얼마 되지 않는구나. 군자(君子)는 성(誠)을 보존하여 능히 생각하고 능히 경(敬)하나니, 천군(天君)『[마음]』이 태연(泰然)하여 백체(百體)『[온갖 몸]』가 명령을 따르는 것이다.”』
*맹자 ; 고자상 ; 제16장
▣ 제16장(第十六章)
『孟子曰 有天爵者하며 有人爵者하니 仁義忠信樂善不倦은 此天爵也요 公卿大夫는 此人爵也니라』
『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천작(天爵)이 있으며, 인작(人爵)이 있으니, 인의(仁義)와 충신(忠信)을 행하고 선(善)을 즐거워하며 게을리 하지 않음이 이 천작(天爵)이요, 공경(公卿)과 대부(大夫)는 이 인작(人爵)이다.”』
『天爵者는 德義可尊이니 自然之貴也라』
『 천작(天爵)은 덕의(德義)로서 높일 만한 것이니, 자연의 존귀함이다.』
『古之人은 修其天爵而人爵從之러니라』
『 옛 사람은 그 천작(天爵)을 닦음에 인작(人爵)이 뒤따랐다.』
『修其天爵은 以爲吾分之所當然者耳요 人爵從之는 蓋不待求之而自至也라』
『 천작(天爵)을 닦는다는 것은 내 분수의 당연한 바를 할 뿐이요, 인작(人爵)이 뒤따랐다는 것은 구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저절로 오는 것이다.』
『今之人은 修其天爵하여 以要人爵하고 旣得人爵하여는 而棄其天爵하나니 則惑之甚者也라 終亦必亡而已矣니라』
『 지금 사람들은 천작(天爵)을 닦아서 인작(人爵)을 요구하고, 이미 인작(人爵)을 얻고서는 천작(天爵)을 버리니, 이것은 의혹 됨이 심한 자이다. 끝내는 반드시 인작(人爵)마저 잃을 뿐이다.”』
『要는 求也라 修天爵以要人爵하니 其心이 固已惑矣요 得人爵而棄天爵이면 則其惑又甚焉이니 終必쯂其所得之人爵而亡之也리라』
『 요(要)는 구함이다. 천작(天爵)을 닦아서 인작(人爵)을 요구하니, 그 마음이 진실로 이미 혹(惑)한 것이요, 인작(人爵)을 얻고서 천작(天爵)을 버린다면 그 혹(惑)함이 더욱 심한 것이니, 끝내는 반드시 그 얻은 바의 인작(人爵)까지 아울러 잃고 말 것이다.』
*맹자 ; 고자상 ; 제17장
▣ 제17장(第十七章)
『孟子曰 欲貴者는 人之同心也니 人人이 有貴於己者언마는 弗思耳니라』
『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귀하고자 함은 사람의 똑같은 마음이니, 사람마다 자기에게 귀함이 있건마는, 생각하지 않아서 모를 뿐이다.”』
『貴於己者는 謂天爵也라』
『 자기에게 귀하다는 것은 천작(天爵)을 말한다.』
『人之所貴者는 非良貴也니 趙孟之所貴를 趙孟이 能賤之니라』
『 남이 귀하게 해준 것은 양귀(良貴)가 아니니, 조맹(趙孟)이 구하게 해준 것을 조맹(趙孟)이 능히 천하게 할 수 있다.』
『人之所貴는 謂人以爵位加己而後貴也라 良者는 本然之善也라 趙孟은 晉卿也라 能以爵祿與人而使之貴면 則亦能奪之而使之賤矣라 若良貴則人安得而賤之哉리오』
『 남이 귀하게 해준다는 것은 남이 작위(爵位)를 내 몸에 가(加)해 준 뒤에 귀하게 됨을 말한다. 양(良)은 본연(本然)의 선(善)이다. 조맹(趙孟)은 진(晉)나라의 경(卿)이다. 능히 작록(爵祿)을 남에게 주어서 그로 하여금 귀해지게 할 수 있다면, 또한 능히 빼앗아서 천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양귀(良貴)로 말하면 남이 어떻게 그것을 천하게 할 수 있겠는가.』
『詩云 旣醉以酒요 旣飽以德이라하니 言飽乎仁義也라 所以不願人之膏粱之味也며 令聞廣譽施於身이라 所以不願人之文繡也니라』
『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이미 술로 취하고 이미 덕(德)으로 충족했다.’ 하였으니, 인의(仁義)에 충족함을 말한 것이다. 이 때문에 남의 고량지미(膏粱之味)를 원하지 않는 것이며, 좋은 명성과 넓은 명예가 몸에 베풀어져 있다. 이 때문에 남의 문수(文繡)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詩는 大雅旣醉之篇이라 飽는 充足也라 願은 欲也라 膏는 肥肉이요 粱은 美穀이라 令은 善也요 聞은 亦譽也라 文繡는 衣之美者也라 仁義充足而聞譽彰著는 皆所謂良貴也라』
『○ 尹氏曰 言 在我者重이면 則外物輕이니라』
『 시(詩)는 〈대아(大雅) 기취편(旣醉篇)〉이다. 포(飽)는 충족함이다 원(願)은 하고자 함이다. 고(膏)는 살진 고기요, 양(粱)은 아름다운 곡식이다. 영(令)은 좋음이요, 문(聞) 또한 명예이다. 문수(文繡)는 옷의 아름다운 것이다. 인의(仁義)가 충족되고 명예가 드러남은 모두 이른바 양귀(良貴)라는 것이다.』
『 ○ 윤씨(尹氏)가 말하였다. “나에게 있는 것이 중(重)하면 외물(外物)이 가벼워짐을 말씀한 것이다.”』
*맹자 ; 고자상 ; 제18장
▣ 제18장(第十八章)
『孟子曰 仁之勝不仁也는 猶水勝火하니 今之爲仁者는 猶以一杯水로 救一車薪之火也라 不熄이면 則謂之水不勝火라하나니 此又與於不仁之甚者也니라』
『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인(仁)이 불인(不仁)을 이김은 물이 불을 이김과 같으니, 지금에 인(仁)을 해하는 자들은 한 잔의 물로 한 수레에 가득 실은 섶의 불을 끄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불이 꺼지지 않으면 물이 불을 이기지 못한다고 말하니, 이는 또 불인(不仁)을 돕기를 심히 하는 것이다.”』
『與는 猶助也라 仁之能勝不仁은 必然之理也로되 但爲之不力이면 則無以勝不仁이어늘 而人遂以爲眞不能勝이라하니 是는 我之所爲가 有以深助於不仁者也니라』
『 여(與)는 조(助)와 같다. 인(仁)이 불인(不仁)을 이김은 필연(必然)의 이치인데, 다만 하기를 힘쓰지 않으면 불인(不仁)을 이길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침내 참으로 이길 수 없다고 말하니, 이것은 나의 하는 바가 깊이 불인(不仁)을 도와줌이 있는 것이다.』
『亦終必亡而已矣니라』
『 또한 끝내 반드시 잃을 뿐이다.』
『言 此人之心이 亦且自怠於爲仁이니 終必幷與其所爲而亡之니라』
『○ 趙氏曰 言 爲仁不至而不反諸己也니라』
『 이 사람의 마음 또한 장차 스스로 인(仁)을 행함에 게을러져서, 끝내는 반드시 그 하는 바마저 아울러 잃게 됨을 말씀한 것이다.』
『 ○ 조씨(趙氏)가 말하였다. “인(仁)을 하기를 지극히 하지 않고서 자기 몸에 돌이키지 않음을 말씀한 것이다.”』
*맹자 ; 고자상 ; 제19장
▣ 제19장(第十九章)
『孟子曰 五穀者는 種之美者也나 苟爲不熟이면 不如荑稗니 夫仁도 亦在乎熟之而已矣니라』
『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오곡(五穀)은 종자의 아름다운 것이지만, 만일 익지 못하면 피만도 못하니, 인(仁) 또한 그것을 익숙히 함에 달려 있을 뿐이다.”』
『荑稗는 草之似穀者니 其實亦可食이라 然이나 不能如五穀之美也라 但五穀不熟이면 則反不如荑稗之熟이니 猶爲仁而不熟이면 則反不如爲他道之有成이라 是以로 爲仁은 必貴乎熟이니 而不可徒恃其種之美요 又不可以仁之難熟而甘爲他道之有成也니라』
『○ 尹氏曰 日新而不已則熟이니라』
『 제패(荑稗)는 풀 중에 곡식과 같은 것이니, 그 열매가 또한 먹을 만하다. 그러나 오곡(五穀)처럼 아름답지는 못하다. 다만 오곡(五穀)이 성숙하지 못하면 도리어 제패(荑稗)가 성숙함만 못하니, 인(仁)을 하되 익숙히 하지 못하면 도리어 다른 일을 하여 성공이 있는 것만 못함과 같다. 이 때문에 인(仁)을 행함은 반드시 익숙히 함을 귀하게 여기니, 다만 그 종자『[종류]』의 아름다움만을 믿어서는 안되고, 또 인(仁)이 익숙하기 어렵다 하여 다른 일을 해서 성공이 있는 것을 달게 여겨서도 안 된다.』
『 ○ 윤씨(尹氏)가 말하였다. “날로 새롭게 하고 그치지 않으면 익숙해진다.”』
*맹자 ; 고자상 ; 제20장
▣ 제20장(第二十章)
『孟子曰 혬之敎人射에 必志於즠하나니 學者도 亦必志於즠니라』
『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예(혬)가 사람에게 활쏘기를 가르칠 적에 반드시 구(즠)에 뜻을 두게 하니, 활쏘기를 배우는 자 역시 반드시 구(즠)에 뜻을 둔다.”』
『혬는 善射者也라 志는 猶期也라 즠는 弓滿也니 滿而後發이 射之法也라 學은 謂學射라』
『 예(혬)는 활쏘기를 잘한 자이다. 지(志)는 기(期)『[기약함]』와 같다. 구(즠)는 활을 가득히 당기는 것이니, 활을 가득히 당긴 뒤에 발사하는 것이 활 쏘는 법이다. 학(學)은 활쏘기를 배움을 이른다.』
『大匠이 誨人에 必以規矩하나니 學者도 亦必以規矩니라』
『 큰 목수가 사람을 가르칠 적에 반드시 규구(規矩)로써 하니, 목수 일을 배우는 자 역시 반드시 규구(規矩)로써 한다.』
『大匠은 工師也라 規矩는 匠之法也라』
『○ 此章은 言事必有法然後에 可成이니 師舍是則無以敎요 弟子舍是則無以學이라 曲藝도 且然이온 況聖人之道乎아』
『 대장(大匠)은 공사(工師)『[도목수(都木手)]』이다. 규구(規矩)는 목수『[장인(匠人)]』의 법이다.』
『 ○ 이 장(章)은 일은 반드시 법이 있은 뒤에야 이루어질 수 있으니, 스승이 이것을 버리면 가르칠 수 없고, 제자(弟子)가 이것을 버리면 배울 수가 없음을 말씀한 것이다. 하찮은 기예(技藝)도 그러한데 하물며 성인(聖人)의 도(道)에 있어서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