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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인문

삐딱하게 보기.잃어버린 대의 옹호.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 - 슬라보예 지젝

작성자솔롱고|작성시간16.07.02|조회수188 목록 댓글 0



삐딱하게 보기(대중문화를 통한 라캉의 이해)




여기에 브레히트B.Brecht의 〈서푼짜리 오페라Threepenny Opera〉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패러독스와의

명백한 유사성이 존재한다. "너무 끈질기게 행운을 쫓지 말아라.

당신이 행운을 지나쳐버려 행운이 당신 뒤에 남겨질지도 모르니까." 20.

 

 

목표는 최종 목적지인 반면 목적은 우리가 하려 하는 것, 즉 진행방법 그 자체이다.

충동의 실제 의도purpose는 그 목표(완전한 만족)가 아니라 목적이라는 사실이 라캉의 요점이다.

충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단순히 충동 그 자체를 재생산하는 것, 충동의 순환궤도로 되돌아가는 것, 목표를 향한

그리고 목표로부터 나오는 그 궤도를 지속시키는 것이다.

 

쾌락enjoyment의 진정한 원천은 이러한 폐쇄회로의 반복운동이다. 바로 거기에 시지푸스의 패러독스가 존재한다.

목표에 도달하자마자 시지푸스는 그의 행위의 실제 목적이 진행방법 그 자체, 즉 상승과 하강의 교체에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는 것이다. 22.

 

 

즉 충동 및 충동이 둘러싸고 순환하는 대사으로 이루어진 실재계의 배제야말로 본질적으로 철학을 구성한다. ...

모르긴 해도 이제야 대상 소문자a란 "철학적 반성이 스스로를 위치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즉 그 무효성

nullity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결여하는 것"이라고 라캉이 말했을 때 의미했던 바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3.

 

 

 

환상에 있어서의 목표와 목적

 

다시 말해 라캉의 이론에서 환상이 욕망의 대상-원인인 a에 대한 주체의 '불가능한' 관게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때 제논이 배제한 것이 바로 환상의 차원이다.

환상은 일반적으로 주체의 욕망을 실현시키는 시나리오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일차적인 정의는 우리가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조건 위에서는 아주 적절한 것이다.


환상이 상연하는 것은 우리의 욕망이 충족되는, 즉 충분히 만족되는 장면이 아니라, 반대로 그러한 것으로서의 욕

망을 드러내고 무대화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의 근본적인 초점은 욕망이 미리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이며

따라서 주체의 욕망을 조정하고 그 대상을 특화시키며 그 속에서 주체가 취하는 위치를 지정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환상의 역할인 것이다.


주체가 욕망하는 주체로 구성되는 것은 오직 환상을 통해서다.

환상을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욕망할 것인가를 배우는 것이다.

이 핵심적인 논점을 입증하기 위해서 유명한 공상과학 단편인 로버트 쉬클리Robert Scheckley의 〈세계들의

상점Story of Worlds〉을 살펴보자.

 

이 단편의 주인공인 웨인 씨는 수수께끼에 싸여 있는 노인 톰킨스를 찾아간다.

그는 폐허가 되어 썩어가는 쓰레기만이 가득한 외딴 곳 오두막집에서 혼자 살고 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톰킨스는 특수한 종류의 약을 써서 사람들을 그들의 모든 욕망이 충족되는 평행자원으로

위치이동시킬 수 있다고 한다.

또한 그는 그렇게 해주는 대가로 그 사람이 가장 귀중히 여기는 물건을 건네줄 것을 요구했다.

톰킨스를 만난 웨인은 그와 대화를 나눈다.

톰킨스는 자신의 거래자들이 대부분 자신의 위치이동 경험으로부터 아주 만족한 상태로 되돌아오며, 되돌아온

이후에도 자신이 속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웨인은 망설인다.

그러자 톰킨스는 그에게 결심하기 전에 시간을 갖고 이 문제를 잘 생각해보라고 충고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웨인에게는 내내 그 생각 뿐이다. 그러나 집에서는 아내와 아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고 이내 그는 가족생활의 즐거움이라든가 사소한 문제거리들에 사로잡히게 된다.

거의 매일 그는 스스로 다시 톰킨스 노인을 방문할 것이며 욕망 충족의 경험을 하고야 말리라고 다짐한다.

그러나 언제나 뭔가 해야 할 일이 있고 그의 주의를 흩어 놓으며 그로 하여금 방문을 연기하도록 하는 가정사가

끊이지 않는다.

우선 그는 부부동반으로 연말 파티에 가야 한다. 그러고나면 아들놈이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여름 휴가 때에는 아들과 배를 타러 가기로 약속해 놓았다. 가을에는 가을대로 새로운 약속이 생길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일 년 내내 웨인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시간은 오지 않는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끊임없이 그가 조만간 분명히 톰킨스를 방문하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간다 … 갑자기 그가 톰킨스의 오두막에서 깨어날 때까지.

톰킨스는 그에게 친절하게 묻는다. "그래, 지금 기분이 어떤가? 만족스러운가?" 어리둥절해진 웨인은 당황해서

"아, 예 … 그럼요"라고 중얼거리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세속적인 물건들(녹슨 칼, 오래된 캔, 그 밖에 몇 가지

작은 물건들)을 톰킨스에게 건내준다. 그러고는 저녁 감자 배급에 늦지 않으려고 무너져가는 폐허를 서둘러

떠난다. 어둠이 깔리기 전에 그가 지하 은신처에 도착하자 한 떼의 쥐들이 쥐구멍에서 나와 핵전쟁으로 황폐해

진 땅을 뒤덮는다.

 

이 이야기는 물론 핵전쟁-혹은 그와 유사한 사건-이 우리의 문명을 붕괴시킨 이후의 일상생활을 그리고 있는

일종의 공상과학 소설에 속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의 흥미를 끄는 측면은 이 이야기를 읽는 독자가 반드시 빠지게 되는 함정이다.

이야기의 전반적인 효과는 바로 이 함정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 함정 속에 욕망의 역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물(物) 자체'인 것을 물 자체의 지연으로 혼동하며 사실상 욕망의 실현인 것을 욕망의 추구로, 욕망

고유의 우유부단함으로 착각하고 잇는 것이다.

욕망의 실현은 그것이 '충족되는' 것, '충분히 만족되는' 것에 있지 않으며 오히려 욕망의 재생산, 욕망의 순환운

동과 함께 일어나는데도 말이다.

웨인은 환각 속에서 자신의 욕망충족을 무한정 지연시킬 수 있는 상태로, 즉 욕망을 구성하는 결핍을 재생산하는

상태로 자신을 위치이동시킴으로써 욕망을 실현했던 것이다.

 

불안anxiety에 대한 라캉의 개념의 특성도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불안은 욕망의 대상-원인이 결여되어 있을 때에는 발생하지 않는다.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대상의 결핍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대상에 너무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결핍 자체를

상실할 위험이다. 욕망의 소멸이 불안을 초래하는 것이다.  26.

 

 

환상 공간의 '13층'

 

셰익스피어가 "무에서 배태된 유"의 역설들(같은 문제가 바로 〈리어왕〉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다)에 관해서

그토록 관심을 가졌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전(前)자본주의적인 사회관계들이 급속도로 와해되고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활발하게 등장하던 시대에,

다시 말해 '무', 즉 '어떤 순수한 유사존재' (예를 들자면 그 자체가 단지 '약속'일 뿐인 '무가치한' 종이돈을 '실제'

돈으로 보는 것)의 지시가 거대한 생산과정 기제-그것은 세계의 표면을 바꾸어버렸다-를 촉발하는 방식을 매일

지며볼 수 있었던 시대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절름발이에게 다리를 주며 괴물을 미남으로 만드는 등 모든 것을 역전시켜 놓는 돈의 역설적인 힘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민감한 반응을 여실히 드러내는 작품 〈아테네의 타이먼Timons of Athens〉에 나오는 그 모

든 기억할 만한 구절들은 맑스가 거듭해서 인용했던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라캉이 맑스의 잉여가치 개념을 모델로 하여 잉여 쾌락 plus-de-jouir이라는 개념을 만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잉여 쾌락 역시 사물들(쾌락의 대상들 pleasure objects)을 반대로 역전시키는 힘, 즉 흔히 가장 즐겁고 '정상적인'

성적 경험으로 간주되는 것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고 일반적으로 메스꺼운 행위(사랑하는 사람을 고문한다든지

고통스러운 치욕을 견디는 등의 행위)라고 간주되는 것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인 경험으로 바꿔 놓는

역설적인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와 같은 역전은 사물들이 본래의 모습 그대로 존재했던 상태, 그리고 우리가 그것들을 똑바로 지각했던

상태, 요컨대 아직 우리의 응시gaze가 왜상적 오점에 의해서 왜곡되지 않았던 '자연' 상태에 대한 향수어린 열망

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두 개의 '실재'를 분리하는 경계, 즉 "삐딱하게 볼" 때에만 명확하게 지각될 수 있는 "쾌락의 실체"로부터

객관적인 시각으로 볼 때 뚜렷하게 나타나는 사물을 분리하는 경계는 일종의 "병적인 균열"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정신병에 빠져들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것이 응시에 미치는 상징적 질서의 효과이다.

언어의 출현이 현실 속에 구멍을 만들며 이 구멍이 우리의 응시의 축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언어는 '현실'을 언어 자체 속으로, 그리고 비스듬히 보는 왜상적 응시로써만 채워질 수 있는 사물the Thing의

공백 속으로 반향시키기redouble 때문이다. 33.

 

 

일상적인 현실로 돌아와 깨어난 그가 안도감에 젖은 채 "그건 단지 꿈이었어!"라고 자신에게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결정적인 사실, 즉 깨어 있는 상태란 "그으 꿈의 의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간과

한다.

라캉이 참조한 것 가운데 하나인 장자와 나비의 비유를 여기에 다시 적용하자면 우리는 한 순간 살인자이기를

꿈꾸는 조용하고 친절하며 점잖은 부르주아 교수를 알고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반대로 일상생활 속에서는 그저 점잖은 부르주아 교수이기를 꿈꾸는 살인자다.

 

'실제' 사건들을 허구(꿈꾸기)로 전치시키는 이러한 종류의 역행적 치환displacement은 '타협'이나 이데올로기

순응적 행위로 나타난다.

오로지 우리가 '괴로운 현실'과 '꿈꾸기의 세계' 간의 소박한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고수하는 한에서만 말이다.

우리가 우리 욕망의 실재와 만나는 것은 바로 그리고 오직 꿈 속에서일 뿐이라는 사실을 참작하자마자 전체적

인 강조점이 근본적으로 바뀐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적 현실, 우리가 인정많고 점잖은 사람들로서의 통상적인 역할을 취하는 사뢰적인 세계의

현실이 어떤 특정한 '억압'에 의존하는, 다시 말해 우리의 욕망의 실재를 간과하는 것에 의존하는 환영illusion인

것으로 판명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회적 현실은 실재의 침입으로 인해 언제든지 찢길 수 있는 취약한 상징적 그물망에 지나지 않는다.

언제든 가장 흔한 일상적 대화나 가장 평범한 사건이 돌연 위험한 것이 될 수 있으며 다시는 원래대로 회복할 수

없는 손상이 야기될 수도 있는 것이다. 40.

 

 

그러므로 '광기'의 징후와는 거리가 먼, 실재계를 현실에서 분리하는 경계는 바로 최소한의 '정상상태'의 조건

이다.

'광기'(정신병)는 이 경계선이 무너져내릴 때, 실재계가 현실 속으로 넘쳐흐를 때(자폐적 와해에서처럼), 혹은

실재계가 그 자체로 현실 속에 포함될 때(예컨대 그 "타자의 타자", 즉 편집증 환자의 가해자의 형태를 취할 때)

시작되기 때문이다. 46.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서문  

대의가 말하면 로마는 끝난다Causa Locuta, Roma Finita

 

원인이 제거될 때 결과들이 판친다. 원인이 부재할 때 결과들이 번성한다.(결과들은 오직 원인이 부재할 때만

등장한다). 거꾸로, 원인이 개입할 때 그 결과들은 사라지는 게 아닐까? 7.

 

 

독견doxa(우연적이고 경험적인 견해나 지혜)과 진리Truth, 혹은 실증적이고 경험적인 지식과 절대적 믿음 사이

의 전통적인 구분선상에서 오늘날의 상식은 '생각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에 구분선을 그어야 한다

고 말하는 것 같다.

상식 차원에서 가장 멀리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는 것은 보수주의적 자유주의뿐이다.

확실히, 자본주의의 대안들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도 자본주의 메커니즘이 자시의 토대 자체를 무너

뜨릴 위험은 남아 있다.

이런 위험은 경제적 동력(강력한 국가기구가 시장경쟁 자체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정치적

동력과도 관련된다.


다니엘 벨에서부터 프랜시스 후쿠야마까지 보수적 민주주의자들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는 자기 자신의 이데

올로기적 조건들(오래전 벨이 '자본주의의 문화적 조건들'이라고 불렀던 것)을 무너뜨리는 경향이 있음을 깨달

았다.

자본주의는 자기 책임과 시스템의 '공정함'을 철저히 인식하는 개인들과 그런 개인들을 통해 이뤄지는 사회적

안정을 조건으로 해서만 번창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강력한 교육 제도와 문화적 기제를 통한 이데올로기적 뒷받침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런 지평에서 제출되는 유일한 해법은 하이에크식의 급진적 자유주의도 아니고 낡은 복지국가 모델에 덜 집착

하는 잔인한 보수주의도 아니다.

그것은 경제적 자유주의에다가 시스템의 과잉에 맞서는 최소한의 '권위주의적' 공동체 정신(사회적 안정과 '가치들'에 대한 강조)이 결합된, 블레어T.Blair 같은 제3의 길 사민주의자들이 개척한 해법이다.

 

이것이 상식의 한계선이다. 그 너머에 있는 것은 신념의 도약, 즉 회의적인 지혜의 지평에서는 미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잃어버린 대의Lost Cause에 대한 믿음이다.

이 책은 바로 이 신념의 도약에서부터 발언한다.

하지만 왜? 물론, 문제는 위기와 분열의 시대 속에서 지배적인 상식의 지평에 제약된 경험주의적이고 회의주의

적인 지혜로는 결코 해법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감히 신념의 도약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이다.

 

이런 전환은 "내가 진리를 말하다"에서 "진리 자체가 (내 안에서/나를 통해서, 분석자의 담론에 대한 라탕의

'수학소'matheme에서 진리의 입장에서 말하는 자처럼) 말한다"로의 전환, 다시 말해서, 에크하르트처럼 "이것이

진리이며, 진리 자체가 그렇게 말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지점으로의 전환이다.

물론, 실증적 지식 차원에서 진리를 획득하는 것(진리를 획득했다고 확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지 우리는 끊임없이 진리에 가깝게 다가갈 뿐이다.

왜냐하면 언어란 궁극적으로 자기-지시적이기 때문에 궤변론sohism의 실천들과 진리 자체의 구분선을 긋는 것

은 불가능하다(이것이 플라톤의 문제이다).

여기서 라캉은 파스칼의 입장에서, 진리 쪽에 내기를 건다.

하지만 어떻게? '객관적' 진리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발화하는 위치에 관한 진리를 견지함으로써.

 

이와 같은 진리 개념을 견지하고 실천하는 이론은 두 가지밖에 없다.

맑스주의와 정신분석이 그것이다. 이 두 이론은 모두 투쟁하는 이론이다.

단지 투쟁에 관한 이론일 ㅃ누만 아니라, 스스로를 투쟁 속에 두는 이론이다.

이 두 이론의 역사는 중립적인 지식 축적의 역사가 아니다. 그 역사는 불화와 이단과 파문으로 얼룩져 있다.

그 때문에 두 이론에서 이론과 실천은 해소 불가능한 변증법적 관계 속에 있다.


이론은 단지 실천의 개념적 토대가 아니라, 왜 실천이 궁극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벗는지를 설명한다.

프로이트가 정확히 지적했던 것처럼, 정신분석은 더 이상 정신분석이 필요 없는 사회에서만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론은 실패한 실천의 이론인 것이다. "이 때문에 사태가 어그러진 것이다……."


우리는 흔히 프로이트의 다섯 가지 주요한 임상 보고서가 지극히 부분적인 성공과 궁극적인 실패에 관한 보고서

라는 사실을 잊곤 한다.

마찬가지로, 혁명의 사건에 관한 가장 위대한 맑스주의적 보고서는 모두 위대한 실패들(독일 농민 전쟁, 프랑스

혁명에서의 자코뱅, 파리 코뮨, 10월 혁명, 중국의 문화혁명……)에 관한 역사이다.

그런 위대한 실패에 관한 고찰은 우리를 충실성의 문제와 대면시킨다.

과거에 대한 향수 어린 집착과 '새로운 환경'에 너무 매끄럽게 적응하는 양쪽의 덫을 피해 가면서 어떠헥 이런

실패들 속에 잇는 해방의 잠재성을 부활시킬 것인가?

 

맑스주의와 정신분석의 시댄는 끝난 것처럼 보인다.

토드 뒤프레슨이 지적한 것처럼 인간 사유의 역사에서 프로이트만큼-맑스와 몇몇을 제외하고-오류로 가득찬

이론적 원리를 제시한 사상가는 없다.

그리고, 오날날 이 두 이론은 자유주의자의 의식 속에서 20세기의 핵심 '공범자'로 떠오르고 있다.

짐작 가능하듯이 공산주의 범죄될을 목록화한 악명 높은 『공산주의 블랙리스트』가 출판된 데 이어 2005년에

정신분석학의 이론적 오류와 임상적 사기행각을 열거한 『정신분석 블랙리스트』가 출판되었다.

적어도, 이런 부정적 형태 속에서나마 맑스주의와 정신분석 사이의 심오한 연대가 만천하에 알려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포스트모던한 승리감을 교란하는 징후들이 있다.

알랭 핑켈크로Alain Finkielkraut는 최근 들어 알랭 바디우의 사유가 점점 큰 반향을 얻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바디우의 사유를 근본서으이 회귀와 반-전체주의의 붕괴 징후로, 일체의 '반-전체주의자들', 인권 옹호자들,

프랑스의 신 철학부터 '두번째 근대성'의 주창자들까지 '낡은 좌파적 패러다임'에 맞서 싸운 투사들의 오랜

노작이 결국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울정도로 냉철한 인정으로 특징짓는다.


완벽한 불신 속에서 폐기처분되어 마땅한 것들이 복수의 귀환을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비탄을 이해할 수 있다.

도대체 어떻게 수십 년 동안 학술 논문과 대중 매체를 통해 전체주의적인 '주인-사상가들'의 위험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열심히설명했는데도 그와 같은 종류의 철학이 다시 폭력적인 형태로 귀환할 수 있단 말인가?

아직도 사람들은 그런 위험한 유토피아 사상의 시대가 끝났음을 이해하지 못했단 말인가?

아니면, 전체주의적 유혹에 굴복하는 그런 성향은 근절할 수 없는 맹목성이나 인류학적 천성이란 말인가?


나의 주장은 이런 관점을 뒤집는 것이다.

바디우가 특유의 플라톤적 논법으로 지적한 것처럼, 진실한 이데아들은 영원하며 파괴 불가능하다.

그것들은 자신의 죽음을 선포하는 시간 속에 언제나 되돌아온다.

바디우에게는 이와 같은 이데아들을 다시 한번 명확히 진술하고 그럼으로써 반-전체주의적 사유가 원래 모습

대로 쓸모없는 궤변적 활동으로, 혹은 저급한 기회주의적 생존본능과 두려움의 이론화로, 통상적인 의미에서

반동적일 뿐만 아니라 니체적인 의미에서도 반동적인 reactive 사유방식으로 보이게끔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12

 

 

1장 무조음의 세계에서 행복과 고문

 

주체성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경험은 '나의 풍요로운 내적 삶'에 대한 체험이다.

이것이 공적 삶에서의 소명이나 상징적 결정요소(아버지, 교수, 철학자)와 대조된 '진실로 나'인 바이다.

이에 대한 정신분석의 기본 교훈은 '우리의 풍요로운 내적 삶'은 근본적으로 기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외관을 지킬 수 있게, 나의 진정한 사회-상징적 정체성을 손에 잡힐 듯 지각할 수 있게 해주는 (나의

상상적 나르시시즘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은폐 막, 내지 거짓거리이다.

그래서 이데올로기 비판의 실천 방법 중 하나는 이와 같은 '내적 삶'과 '진정한' 감정의 위선을 벗겨버리는 전략

을 창안하는 것이다. 25.

 

 

칸트가 『학부 간의 논쟁』Der streit der Fakultaten(1798)에서 프랑스 혁명에 도취된 자기 입장을 제시할 때 그

는 이미 이것을 알고 있었다.

혁명의 진정한 의의는 파리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태-상당부분 끔찍한 살육적 열정이 분출된 상태-에 있는 게

아니라, 파리에서 일너난 사건들이 그에 공감하는 유럽의 관찰자들에게 불러 일으킨 열광적인 반응에 있다.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인민들이 일으킨 최근의 혁명은 실패할 수도 있고 성공할 수도 있다.

그것은 불행과 잔혹을 더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것은 모든 관객(혁명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의 가슴

에 욕망에 따른 동조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도취라고 말할 수 있는 그 감정의 표현은 위험한 것이기에 오직 인류 속에 있는 도덕적 소인素因에 의해서만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실재적 사건evnet, 실재the real의 영역은 파리에서 일어난 현실적인 폭력 사태가 아니라 이런 현실이 관찰자들

에게 현상하는 방식과 그들의 가슴속에 일어난 희망 속에 있다.

파리에서의 현실은 시간 속에 일어난 경험적 역사에 속하는 반면, 열광적 반응을 일으킨 숭고한 이미지는 영원

성에 속한다.


이것은 서구의 소련 예찬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일국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소비에트의 경험은 분명 비극과 실패의 연속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구경꾼들(거기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모든 윤리가 그런 물신주의적 부인의 제스처에 의존해야만 하는가?

가장 보편적인 윤리조차 어떤 종류의 수난에 이끌리지 않고 그로부터 선을 그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소비를 위해 도살당하는 짐승은 어떤가?

산업화된 농장에서 반쯤은 눈이 먼 채 잘 걷지도 못하고 도살될 때까지 살만 찌우는 돼지를 보고 나서도 폭찹을

계속 먹을 수 있겠는가?

알지만 무시하곤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고문은 어떤가?

지구상에서 자행되는 (눈을 뽑아 버리거나 고환을 뭉개버리는 따위의) 잔혹한 고문장면을 찍은 스너프 필름을

하루 종일 반복해서 봐야 한다고 상상해 보자.

그럴 때도 우리는 평상시와 똑같이 지낼 수 있을까? 그렇다. 우리가 목격한 것을 어쨌든 잊어버릴 수만 있다면

(우리가 본 것의 상징적 효력을 중지시킬 수 있다면) 말이다. 30.

 

 

타인의 감수성을 존중하고 타인의 내밀함을 공격하지 않으려는 극단적인 조심성은 쉽게 타인의 고통에 대한

잔인한 무관심으로 전환될 수 있다.

이런 정신이 부조리의 수준으로까지 고양된 경우를 러시아 최전방의 독일 육군본부 원수 폰 클루케에게서 찾

을 수 있다.

1943년 1월 육군 본부가 있는 스몰렌스크의 독일군 장교들은 히틀러가 방문할 때 그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

우고 있었다.

계획은 히틀러가 회식을 하는 동안 수십 명의 장교들이 동시에 권총을 쏘아 히틀러를 죽이는 것이었다.

집단적으로 저격하면 히틀러의 경호원들이 한두 발의 탄환은 맏더라도 성공확률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폰 클루케는 그 계획에 반대했다. 그는 분명 반-나치주의자이고 히틀러가 죽기를 원했지만 독일 장교

지침에 따르면 "점심 식사 중인 사람을 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정중함은 교양civility에 가까워진다. 34.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



왜 그리스도적 유산은 싸울 가치가 있는가? 

"종교의 본질은 우상과 같은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걸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벗겨내는 데 있다." 

 

그러므로 언제나 욕망 자체의 대상과 이러한 대상을 탐나게 하는 중개특징이나 요소 사이에는 간격이 존재한다.

우울증에서 나타나는 것은 우리들이 욕망의 대상으로 하여금 욕망의 원인을 빼앗게 하는 것이다. 우

울증 환자에게 대상은 거기에 있지만 놓쳐버리고 있는 것은 대상을 탐하게 만든 특별한 중개특징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적어도 언제나 모든 참된 사랑에는 우울증의 흔적이 존재한다.

사랑안에서 대상은 그것의 원인을 박탈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상과 원인 사이의 바로 그 간격이 붕괴된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이 점이 사랑욕망을 구별하는

것이다.


우리가 막 살펴보았듯이 욕망에 있어서 원인은 대상과 구별된다.

반면에 사랑에 있어서 그 둘은 불가해하게 동시에 일어난다. 내가 그것을 사랑할 가치가 있다고 발견한 바로

그 점을 그것 안에서 발견하였기 때문에 마술적으로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그 자체를 위해 사랑한다.

그리고-마르크스로 다시 돌아가서-욕망의 대상(제어되지 않고 팽창되어 있는 생산력)은 그것(잉여가치)를

촉진시키는 원인을 박탈할 때도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것을 마르크스의 실수가 또한 전제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39. 

 

 

4. 비극에서부터 익살스러운 희극 

 

이러한 과정의 상호 주관적인 결과들은 그런데도 결정적이다. 자본주의는 타대상의 잉여에 초점이 모아져

있기 때문에 그것은 더 이상 주인의 담론 영역이 아니다.

이것은 라깡이 이어받아 자신의 용어로 어떻게 자본주의가 모든 안정된 연결들과 전통들을 해체시켰는지,

자본주의의 공격에서 어떻게 '모든 고체가 기체로 변하는지'에 대한-『공산당 선언』에 출처를 두고 잇는-

오래된 마르크스의 주제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고체'는 주로 물질적 생산물들에 관심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체들에게 명확한 동일시를 제공

해 주는 상징계의 안정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마르크스 자신은 명확히 하였다.

그르므로 다른 한편으로 수세대 동안 지속되리라고 운명지워진 안정된 생산물 대신에 자본주의는 폐물과정의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역동성을 끌어들이고 있다.

완전히 사용되기 이전에도 때때로 폐물된 새로운, 그리고 더욱 새로운 생산물들에 의해서 우리들은 공격받고

있다. 만약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뒤지지 않으려면 개인용 컴퓨터들PCs은 매년 바꾸어져야 한다.

장시간 레코드들(역자 주: LP판)은 CD들에 의해서 대체되었지만 지금은 DVD들에 의해서 대체되고 있다.

이러한 계속적인 형식의 여파는 물론 영구적인 쓰레기 더미의 생산이다. 

 

근대와 포스트모던 자본주의 산업의 주된 생산물은 정확히 낭비적이다.

우리들은 포스트모던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미학적으로 그럴 듯해 보이는 우리의 모든 소비 가공품

들은 결국 지구를 방대한 쓰레기 장소로 변형시킬 지점에 이르기까지 소비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으로 끝이 날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은 비극의 느낌을 잃어버리거나, 여러분들은 진보를 비웃을 것으로 인식할 것이다. *Jacques-Alain

Miller, 'The Desire of Lacan' 

 

새로운, 보다 새로운 대상들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자본주의 욕동의 표면은 그러므로 증가하는 쓸모 없는

쓰레기 더미, 즉 모하비사막에 잇는 비행기 '휴식처'같이 거대한 수의 중고차, 컴퓨터 등등이다….

그것들의 쓸모 없고 활동력 없는 현존으로 우리의 주목을 끌 수밖에 없는, 이러한 계속 늘어나고 잇는 활동력

없고 기능하지 못하는 '물건' 더미들 속에서 사람들은 말하자면 자본주의자의 욕동이 휴식하고 있음을 인식할

수 있다.


그것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Andrei Tarkovsky 영화들의 관심 주제이다.

가장 생생하게 나타나 있는 것은 탈산업적인 불모의 땅을-버려진 공장들보다 더 커진 야생초목, 썩은 물로 채워

진 콘크리트 터널과 기차길, 그리고 길 잃은 고양이들과 개들이 뛰노는 야생 식물벌판을- 갖고 있는 그의 대표

작품인 <잠입자stalker>이다.


여기에서 다시 자연과 산업문명이 겹쳐 있지만, 일반적인 부패를 통해서 썩어 있는 문명은 다시 (이상화된

조화의 자연이 아니라) 부식되어 있는 자연에 의해서 재생되는 과정에 있다.

궁극적으로 타르코프스키적인 풍경은 습기 많은 자연, 인간의 가공품들의 부스러기로(낡은 콘크리트 벽돌들,

또는 녹슨 금속판들) 가득 찬 숲 속 근처에 있는 강 또는 연못이다.


역사의 궁극적인 아이러니는 생산하여 소비하는 욕동의 이러한 표면에 가장 극도의 민감성을 보여주었던 사람

이 바로 동구 공산주의 출신 감독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이러한 아이러니는 뮬러Heiner Muller가 동구 공산주의의 '대합실의 심리상태'라고 불렀던 것에

따라 정해지는 더욱 깊은 필연성을 보여주고 있다. 

 

기차가 18시 15분에 도착해서 18시 20분에 출발할 것이라는 짧은 광고방송이 있었다.

그러나 기차는 18시 15분에 도착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기차는 20시 10분에 도착할 것이라는 등등의 다음

짧은 광고방송이 있었다.

여러분들은 기차가 20시 15분경에 도착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대합실에서 계속 앉아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었다.

근본적으로 메시아 기대감의 상태였다. 메시아가 절박하게 도착한다는 항구적인 광고방송들이 있지만, 여러분

들은 그는 오지 않을 것임을 완전하게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그가 다시 한 번 방송되었다는 것을 듣는 것은 좋은 일이다.  

*Heiner Muller and Jan Hoet, 'Insight into the Process of Production: A Conversation' 

 

그러나 이러한 메시아적 태도의 요점은 희망이 유지되었던 것이 아니라 메시아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주위를 둘러보고, 그리고 활발하지 못하 유형의 주위 환경을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이 점은 영원히 광란적인 활동으로 바쁜 사람들은 그들 주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적절하게조차

주목하고 있지 못한 서구와는 대조적이다. 

 

문화에 가속도가 없었기 때문에 동독DDR 시민들은 대합실이 세워져 있는 땅과 더 많이 접촉하는 것을 즐거워

했다.

이러한 연착에 붙들려서 그들은 그들 세상의 특이성들, 지형학적이고 역사적인 세부 묘사들을 깊이 있게 경험

하였다. 동양에서 연착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경험을 축적하도록 허용하는 동안 서양에서 앞으로 전진하는

여행의 명령은 그러한 모든 잠재력을 파괴하였다.

만약 여행이 세상을 진부하게 하는 일종의 죽음이라고 하면, 기다림은 본질에 이자를 붙게 할 것이다. 

*Scribner, 'Working Memory', p. 150. 

 

다른 한편으로-자크 알랭 밀레가 지적한 인용구의 마지막 문장처럼-인간 상호간의 관계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

난다.

밀레는 이러한 구절을 주인-능기Master-Signifier에서부터 타대상 에 이르기까지의 변천의 관점에서 명확히

말하고 있다.

주인의 담론에서 주체의 동일성identity은 S1, 즉 주인-능기(그의 상징적 직함-명령)인 주체의 윤리적인 위엄을

규정짓는 충성에 의해서 보장된다.

주인-능기와의 동일시identification는 비극적 양태의 실존으로 인도한다.

주체는 자신의 충성을-말하자면 주체는 자신의 삶에 의미와 일관성을 제공해 주는 소명을-끝까지 주인-능기

에게 유지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궁극적으로 주인-능기에 저항하는 나머지 때문에 실패한다.

대조적으로 주인-능기에 어떤 안정된 지지를 결여하여 파악할 수 없이 변화하는 주체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 주체의 일관성은 순수한 나머지/쓰레기/잉여, 즉 어떤 '위엄이 없는', 본래적으로 익살스러운 약간의

실재계와의 관계에 의해서 유지된다.

물론 남아 있는 것과의 그러한 동일시는 조롱하는 듯 익살스러운 양태의 실존, 즉 모든 견고한 상징적 동일시

들의 항구적인 풍자적 전복과정을 받아들이고 있다. 71. 

 

 

진리의 괴이함에 대한 존 살리스John Sallis의 에세이 처음 단락은 이러한 어려운 주제와 직접 씨름하고 있다: 

만약 진리가 무섭고 괴이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진리가 괴이한 모든 것, 불구가 된 모든 것의 상황, 형식인 괴이함 그 자체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 자체가 본질적으로 불구가 되어 있고, 그 자체 안에 괴이한 특성을 갖고 있었다면 어

떻게 되었을까?

본질적으로 진리와 다른 어떤 것, 본성 안에 본성과 차이가 있는 진정한 괴이함이 진리의 본질 안에 존재하였

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John Sallis, 'Degormatives:Essentially Other than Truth' 

 

성급하게 유사 시체적인 결론으로 넘어가기 전에 이러한 진술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잠시 숙고해

보자. 살

리스의 요점은 우리의 살을 지탱시키는 상상력을 자유롭게 펼치게 하는 어떤 힘에 의해서 부과된 고정되고

강요된 질서가 '진리'라는 유사 니체적인-모든 '진리체제'는 우리의 생명'-에너지의 자유로운 흐름을 변형시키며

질식시킨다는 사실에 진리의 '괴이함'은 존재한다는- '해체주의'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 연구가로서 살리스에게 있어 '일종의 오류, 그것 없이는 어떠한 종류의 생명체도 살 수 없다는' 유명

한 진리개념을 갖고 있는 니체는 단순히 진리와 환상 사이의 반플라톤적인 도치관계를 성취하거나, 삶을 고양

시켜 줄 가능성이 있는 소설들을 찬양하면서 진리와 타자(허구, 오류, 거짓) 사이의 형이상학적 저항 안에 머물러

있다. 


살리스는 대응설로서의 진리로부터 드러냄오르서의 진리까지의 하이데거 흐름을 끝까지 따르고 있다.

대응설('내 앞에 스크린이 있다'라는 진술은 오직 내 앞에 실제로 스크린이 있을 때에만 진리인 것처럼, '모든

것이 실재 있는 그대로'라는 진술의 대응설이나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은 진정한 영웅이다'라는 진술은 그

사람이 영웅이라는 개념에 적합하게 실제로 행동했다면 진리인 것처럼,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 자신들의 본질

이라는 대응설)로서의 진리보다 우선하여, 물 그 자체는 우리에게 그것이 무엇인지 드러내져야 한다.


그러므로 하이데거에게 있어 '진리'는 모든 것들이 우리들에게 어떤 특정한 의미의 지평 속에 나타나는 (역사적

으로 결정된) '개간지', 즉 어떤 획기적인 '세계'의 한 부분으로서 존재한다.


진리는 '주체적이지'도 '객체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모든 것들이 그것들의 본질 속에서 나오도록 함으로써 세계 속으로의 우리의 활발한 참여와 우리의

세계에 대한 역동적인 개방을 동시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더 나아가 획기적으로 결정된 존재, 드러남의 양식으로서의 진리는 어떤 초월적인 궁극적 토대(신적 의지, 진화

적인 우주법칙…)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그것의 존재 내부에서 획기적으로 일어나고, 발생하며, '이제 막 생긴' 어떤 것, 즉 '사건'이다.


이제 문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 어떻게 진리의 이러한 개념이 바로 그 중심 속에 '본질적인 반대 본질' 또는 

'특유의 비본질'로서의 비진리(은폐, 오류, 불가사의)를 포함시킬 것인가?

진리의 부정적인/결여적인 해석(거짓, 환상, 허구…)으로서, 그리고 그 자체로 이미 진리에 의존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이러한 비진리를 형이상학적인 방식들의 하나로 전락시키지 안고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하이데거가 진리 사건 그 자체에 내재된 것으로서 비진리를 말을 할 때 그는 두 개의 다른 수준을 생각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인간이 내적 일들에 몰두해 있을 때, 그가 깊이 생각하고 있는 의미의 지평을 잊어버리고, 이러한

잊어버림 그 자체까지도 잊어버리는 방식이다.(여기에 예를 들자면 소피스트들의 출현으로 이뤄진 그리스 사상

의 '퇴행'이다. 바로 우리 존재의 근원과의 대면은 진리와 고유한 관계를 갖지 않으면서 다른 형태의 논쟁을 하는

하찮은 놀이로 변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의미가 획기적인 사건인 한에서 의미 자체의 이러한 지평은 숲 속에서의 개간지가 짙게 빽빽

이 들어서 있는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듯이 그 출현의 헤아릴 수 없는 신비를 배격으로 하여 나타나는 방식이다. 

 

이 두개의 수준이 서로 어떻게 상호 의존적인지에 대한 어려운 문제를 제쳐두고, 두 번째의 더 근본적인 수준에

초점을 맞춰보자.

진리의 핵심에 비진리를 헤아릴 수 없는 배경으로서 인식하는 것이 충분하지 않는가?

모든 획기적인 진리사건은 그 배경을 토대로 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이것을 합법적이라고 인정

하는 한) 라깡과의 대비조차도 이 결론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 같다.


라강에게서도 또한 적절하게 거짓말하기 위해 우리의 말speech은 진리의 보증으로서 큰 대타자를 앞서서 가리

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한 동물의 가장과는 대조적으로 인간이 가장하기 위해 가장할 수 있는 이유,

즉('당신이 실제로 렘버그로 가고 있으면서 왜 렘버그로 갈 예정이라고 나에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프로이트가 인용한 유명한 일화에 나오는 유태인처럼 인간은 진리 자체를 가장해서 거짓말할 수 있는 이유

이다.


그러므로 라깡에게 이러한 의미로 진리 차원을 끌어내지 않은 것-'비진리'는 모든 상징적 우주의 능가할 수 없는

배경으로서 상징 이전의 실재계 자체의 단순히 헤아릴 수 없는 두꺼움이 될 것이다….

하이데거와 라깡에 대한 특유한 지시에서 살리스의 에세이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결론을

내린 사람은 바로 윌리암 리차드슨William Richardson이었다.

'하이데거가 진리의 본질보다도 "더 오래된" 망각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을 때, 라깡이 실재계를 의미한 것을

듣는다. 117-121. 

 

 

9. 구조와 그 사건 

 

이것은 구조와 그 사건 사이의 관계는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으로 사건은 하나의 구조, 구조의

동시적 상징계의 불가능한 실재, 즉 바로 그 자세를 소급해서 '불법으로' 만들고 결코 충분히 인정받아-상징화

되어-고백될 수 없는 억압적인 유령상태로 분류하는 법적 질서를 일으키는 폭력적인 자세이다.


간단히 말해, 동시적 구조질서는 단지 신화적 유령 담론의 모습으로만 구분될 수 있는 그 사건 토대에 대한

일종의 방어-형성이다.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은 또한 이와 정반대를 주장할 수 있다.

그것은 이러한 사건 자체(원초적인 폭력적 설립 자세의 신비주의 담론)의 상태는 궁극저긍로 환상적이지 않

는가?

그것은 구조적인 동시적 질서가 균형을 갖추는 것을 방해하는 구조적 적대감의 실재(교착상태, 불가능성)을

은닉함으로써, 즉 보이지 않게 하믕로써 설명할 수 없는 것(질서의 기원)을 설명해야 하는 환상-구조물이 아닌가? 


간단히 말해, 원초적인 범죄 사건은 동시적 적대감/교착상태를 통시적 담론 계승으로 번역/고쳐 표현해야 하는

소급력 있는 '투사', 즉 이차적인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그 순환고리는 완벽하다. 즉 구조는 그 기초가 되는 사건의 폭력을 완전히 차단함으로써만이 긴으을

할 수 있지만, 이러한 사건의 바로 그 담론은 궁극적으로 구조적/동시적 질서의 쇠약한 적대감/불일치를 해소

하도록 되어 있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사람들은 '영원한' 적대감이 불가능한 실재와 인정받지 못하지만 필수의 유령 대체물로서

역할을 하는 원초적으로 역압된 환상적 담론 사이를 구별해야 한다.  

 

실재로서 행위의 개념과 관련해서 이것은 진정한 행위는 시간과 영원성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으로 행위는 칸트와 셸링이 기술하고 있듯이 '영원성이 시간 속으로 끼어든 지점, 잠시의 인과관계 연속의

고리가 끊어지는' 지점, '어떤 것이 무로부터 출현하거나 끼어드는' 지점, 이전 연결고리의 성과/결과로서 설명

되어질 수 없는 것이 나타나는 지점이다.(칸트의 용어로 표현하면, 행위는 실체적인 차원이 현상성 안으로 직접

개입한 것을 가리킨다. 반면에 셸링의 용어로 표현하면, 행위는 정체성의 심연/무시간 원리-'나는 특별한 이유

없이 그것을 행했기 때문에 그것을 행했다'-가 순간저긍로 충족 이성의 원리를 중지하는 순간을 가리킨다.)


다른 한편으로 행위는 동시적으로 영원성 안/밖으로부터 시간의 출현 순간이다.

셸링이 설명하듯이 행위는 영원한 과거 속으로 순수한 동시발생의 교착상태를 억압하는 원초적인 결정/분리

〔결심〕이다. 행위는 균형을 깨뜨림으로써, 즉 모든 다른 양상에 반해 미분화된 전체의 일부 양상에 '일장적

으로'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교착상태를 돌파한다.'

간단히 말해 적절한 행위는 영원성을 극복하고, 일시성/역사성의 차원을 열어주는 무시간적인/'영원한' 자세의

역설이다. 139.       

 

 

비밀리에 필요하지만 더러운 일을 행하는 것, 즉 현행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인간의 권리 등등의) 명백한 지배

이데올로기를 어기는 것이다. 쓰

여져 있지 않은 함축적인 금지들의 수준으로 그러한 일을 금지한다 하더라도 단순히 허용된 것을 행하는 것,

즉 현행 질서가 분명히 허용한 일을 행하는 것은 이러한 일보다 훨씬 더한 전복이다.

간단히 말해서 은행을 터는 것은 은행을 설립하는 것보다 훨씬 죄가 가볍다는 브레히트Brecht의 잘 알려진 재담

을 풀어서 생각해 보면 법을 위반하는 것은 법을 철저히 복종하는 것과 비교해서 죄가 훨신 가볍다.

또는 키에르케고르는 독특한 방식으로 '우리는 "아니오"라고 말한 아들을 칭찬하지 않지만, "주님, 제가 기꺼이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복음서로부터 배우려고 기꺼이 노력해야 된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216. 

 

스티븐 킹의 <리타 헤이워스>와 <쇼생크 탈출>은 감옥생활의 패러독스에 대해 적절히 설득력 있게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감옥생활에 대한 진부한 표현은 그곳에서의 적응이 나를 너무 압도해서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하거나 심지어

자유나 감옥 밖의 삶을 상상할 수도 없게 하므로 석방은 전체 정신의 붕괴를 가져온다거나 적어도 잃어버린

감옥생활의 안전함을 그리워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할 때, 실제로 감옥생활에 통합되거나 감옥생활에 의해 파멸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옥 생활의 실제적인 변증법은 다소 세련되어 있다.

정확히 말해서 내가 감옥에 있다는 사실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고 일종의 내적 거리를 유지하고, 실재의 삶은

감옥 밖에 있을 것이라는 환상에 집착하고, 그리고 항상 감옥 밖의 생활과 나의 석방이나 탈출 이후에 나를 기다

리고 있을 좋은 일들에 대한 백일몽에 빠져 있을 때, 사실상 감옥은 나를 파괴하고 완전히 제어한다.


그렇게 됨으로써 나는 악순환의 환상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결국 내가 석방되었을 때 환상과 현실간의 기괴한 불일치는 나를 좌절시킨다.

그러므로 유일한 진정한 해결책은 감옥생활의 규칙을 모두 받아들이고, 그러한 규칙들이 지배하는 세계 안

에서 그 규칙들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감옥 밖의 다른 세계에 있는 삶에 대한 내적 거리와 백일몽은 사실상 감옥에 나를 더 가두는

것이 된다.

반면에 감옥의 규칙에 얽매여서 진짜로 감옥에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수용하면 진정한 희망에 대한 여지가

생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효과적으로 자신을 현생 사회적 현실의 굴레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를 그

현실에 배속시킨 위반 환상의 보충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218.




(슬라보예 지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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